벤야멘타 하인학교 - 10점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문학동네

하인, 누군가를 위해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 보다 정확한 사전적 의미로는 "남의 집에 매여 일을 하는 사람".

한자로는 더욱 웃긴다. 그야말로 하인이라도 알 수 있을 법한 쉬운 한자들, 下人. 아랫사람.


학교가 있다. 그런 하인이 되라며, 누구보다 하인다운 하인을 키워낸다는 하인양성학교가 있다.

의외로 그런 학교에도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또 한명이 입학하겠다고 학교 문안에 들어선다.


시대는 19세기 후반. 앙시앙레짐의 귀족들이 무너지고 신흥 부르주아들이 기계 문명과 함께 떠오르는 시기,

예술과 소비의 주체가 특정의 '고귀한 핏줄'만이 아닌 '대중'으로 확장되었다 믿어지기 시작한 시기.


아마도 그는 몰락귀족의 핏줄로부터 도망치고자 했다. 동시에 오만해진 대중과 배나온 부르주아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고 발버둥치기를 거부하고자 했다. 귀족의 오랜 피는 이미 잔뜩 안정되고 녹슬었음을 알아챘고, 또한

부르주아와 대중의 치기어린 범속함을 알아채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 '고귀해지기 위한 경쟁'의 링 위에

올라서기를 거부해 버렸다.


쳇바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남들이 모두 올라서길 열망하며 위를 바라볼 때, 그는 차라리

충직한 하인이 되어 주인님의 반짝이는 구두와 지팡이를 맡아 놓기 위한 예의바르고 순종적인 태도와 더불어,

의심하지 않는 마음, 한결같은 복종과 주인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한 마음을 갈고 닦으려 한다. 시니컬하고

독립적이며 재기발랄한 그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 '하강'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그의 사유가 자동기술식으로 기록된 궤적을 가만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Vertigo에 빠지고 만다. 어디가 위인지 어디가 아래인지, (당위적으로) 뭐가

옳고 발전적인 방향인지 무엇을 피해야 하는 건지. 그렇게 스스로를 혼란 속에 던져놓고 스물스물 삐져나오려

버둥대어 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다.


그리고 실은, 그들의 하인학교는 지금의 세상과 뭐가 크게 다른지 곰곰 따져보는 것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단순하게만 뒤집어보아도 하인이 되기를 자처한 그가 빠져드는 모순과 욕망의 좌절들은 외려 세상에

적응해가며 겪는 그것들과 과히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  vertigo (영어).  물리적 감각이 두뇌에 상충하는 신호를 보내 발생하는 공간 방향 감각 상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수분간, 온갖 세상의 소음들이 삐집고 나오는 그 틈바구니에서 꽃처럼 만발하던 수화들,

처음엔 아무 대사 없이도 이렇게 흡인력있게 당겨낼 수 있다는 데에 마냥 놀랬고, 다음엔 말로 뱉는 대사들 대신

수화만으로도 참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사실 수화, '손으로 하는 말'이라 이해하는 건 조금 어폐가 있는지도 모른다. 수화를 할 때 둘은 서로의 손모양만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표정, 입모양에 몸짓까지 모두 섬세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거다. 그들의 눈빛,

입모양, 살짝 스쳐가는 빛과 그늘, 그런 뉘앙스들을 모두 잡아낼 기세로, 수화는 단지 손짓을 이용한 대화가

아니라 거의 완전소통을 지향하는 무엇과도 같다. 더듬이 두개를 완전히 포갠 채 서로의 의식 전체를 온전히

공유하는 개미의 그것과 같은 무엇 말이다.


쉽게쉽게 뱉어지고 그 누구의 귀에도 가닿지 못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상대를

등진 채로도 던질 수 있는 말이란 건 얼마나 허랑한지. "그럼 여태 너희는 만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그의 아버지가 어이없어 하며 물었고, 그래서 그녀와 그는 말한다. "그동안 우리는 말이 아니라 손으로 했어요."

손으로, 온몸으로,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 내내 한 번도 서로에게 전하지 못했던 말, '사랑해'. 자그맣고 귀여운 반전이 지나고 난 후에도

그들은 말할 뿐이다. "워 시환 니". 난 니가 좋아. 그 말로도 충분한 거다. 굳이 뭉게구름같은 수사와 여름철

소낙비같은 고백 말고, 이미 그들은 손으로, 눈으로, 입모양으로, 온몸으로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p.s1. 이런 달콤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만나면, 잠시나마 심술궂은 시니컬함이 잠잠해지고 만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끔씩은 갱장갱장히 이런 영화가 땡기는 이유.


p.s2. 영화에 대해 아쉬운 점은 딱 하나, '聽說'이란 (아마도) 대만 타이틀을 그대로 써버린 무성의한 제목, '청설'.

차라리 영어제목을 쓰는 게 어땠을까. hear me.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도, 내 말만 들으라는 것도 아니에요.

내 모든 것을, 내 모든 뉘앙스를 가능한 남김없이 들어주길. 그런 느낌의 영어 타이틀이다.






#1. 어어, 평소와 다르다는 건 뭔가가 위험하다는 거다. 어어, 한달이나 전에 봤던 연극을 이제야 포스팅하는 건

뭔가 평소와 다르다는 거다. 어어, 여긴 내가 평소 지내던 방이 아니다. 침대가 아니다. 어어, 위험하다위험하다.

그의 어정쩡하고 위태로운 말투를 그저 보아 넘길 수 있던 건, 일종의 계단 효과. 그대는 나보다 한계단 밑에,

나는 그대보다 한계단 위에 서있다는 충만한 자의식.


#2. 아무런 기대없이 느꼈던 변곡선, 급 행복에서 급 슬픔으로 치닫는 배우들의 변곡선은 그래도 봐줄만 했다.

꼼꼼하게 따지고 개연성이 있네 없네, 따위 공자연한 말씀이야 멀리 떨어진 관객의 입장에선 맘껏 씨부릴 수

있다지만, 정작 자신이 무대 위에 올라 표출하게 되면 도무지 뭐하나 '인과관계', '설득력' 따위 찾아볼래야

찾을 수가 없는 거다. 더구나 무대 위에서 자신은 자기 자신에 벌거벗겨진 셈인 거다.


#3. 교훈...이라고 하자면, 연극 보러 가서 무대 사진 찍으면 어디선가 누군가 나타나 정중하고도 단호한

제재를 가할 거라는 사실, 그리고 '레이먼'과 '레인맨'의 미묘한 차이와 유사성 만큼이나 애매모호한 것들로

우리는 더러 환상적인 공감대를 느끼고 혹은 죽일 듯한 악의를 느끼게 된다는 것.

영화는 극중 영화감독지망생 영재, 그의 말대로 다소 "산만하고 수다스럽고 정신없이" 진행되는지도 모른다.

영화 제작을 위한 자금 걱정을 하다가 뜬금없이 '아~ 스크린쿼터', '아~ FTA' 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나,

네그리의 '제국'을 읽으며 사회의식을 가진 문화활동을 하라던 고참이 눈앞의 부조리에 침묵하는 모습,

노동해방 조끼를 입은 노조원을 개잡듯 두드려잡는 꼰대의 광적인 소란까지. 아, 정신병력이 있는 친척이

있냐는 의사 질문에 대한 대답에 빵 터졌다. "사촌 형 중에 조선일보 기자가 있어요." 정신없이 사방팔방을

손가락질하고 시니컬하게 뒤틀어놓는다. 온갖 사회문제에, 꼰대들의 고루함과, 기존 영화판에까지.


그런 감성과 지적질들이 맞고 틀렸는지는 나중에 따지기로 한다. 워낙 정신없이 사방으로 벌려진 이야기에다가

그의 이야기는 대개 맥락도 없고 지긋한 깊이도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수다스런 이야기는 외마디다.

외마디의 집합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그가 문득 실어증에 걸리면서 비로소 핵심으로 가닿는다. 입닥치는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여태 제대로 '말을 들었던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영화를 만들려면 우선 그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떻게 살아왔고 남들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지를 되짚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는 그와

함께 했던 그녀와의 관계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결국 은하, 그녀를 해방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은하 3호, 4호로 바뀌어 나가고 동시에 자신도 영재 4호,

5호로 바뀌어 나가며 함께 해나가기에는 이미 그녀는 지쳐있었다. 이젠 자신이 없어, 이젠 마음이 없어.

그렇게 그는 홀로 영재 5호, 6호로 변전해 나간다. 그건 그가 여태 남의 말을 듣거나 감정을 헤아리기보다는

혼자 쉼없이 떠들어댄 대가이자, 그 '양질전환'의 임계점에 이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했을지 모른다.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까. "잘 할 수 있을 거야, 잘 하니까." 해방된 은하, 그리고 새로 함께 하는 은성 역시

똑같이 말해준다. 그가 애초 번다하고 수다스럽게, 마치 정리되지 않은 채 머릿속을 부유하는 온갖 말풍선들을

잘라붙인 듯한 화면과 메시지를 모자이크하듯 던져준 건 일종의 힌트 아닐까. 이제 그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줄곧 머릿속에 쌓이기만 한 채 일방적이고 단편적인 '외마디 수다'로 소모되었던 그런 에너지를 조금 더 잘

가다듬어서, 그런 산만하고 정신없는 실타래로부터 하나하나 잘 정련된 '이야기', '대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그마하고 조심스런 희망.


새로 함께 하는 은성이 듣지 못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채플린의 영화처럼, 혹은 '톰과 제리'같은 만화처럼,

말이 없어도 그 의미와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영화를 감독은 만들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러고 나면 그의 정치적

지향과 감수성, 비판의식같은 것들도 좀더 효과적이고 설득력있게 다가올 수 있을 거 같다. 이 영화에서

다뤄진 것만큼 유쾌하고 발랄한 방식은 고스란히 살리면 좋겠고. 그게 영화속 감독지망생에게 바라는 바이자,

(아마도) 윤성호 감독 본인이 바라는 바인지도 모르겠다.



목련이 허벅지게 피어올랐고, 벚꽃이니 매실꽃은 팝콘처럼 터져올랐다.

나른한 봄빛이 일렁이는 도심 속 조그마한 공원, 미디엄레어로 익힌 스테이크 정도의 온기가 담긴 벤치에 앉아

유약한 연두빛이 돋아나는 세상을 본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이듯 노래하는 그녀의 이야기.


그녀의 목소리는 그렇다. 간질거리는 봄볕과 꿈결같은 공기의 흔들림. 아무래도 좋아, 라는 식으로 사람을

멍하게 만들어버린다. 적당한 비음이 섞인 채, 여리여리해서 금새라도 끊길 듯 하다가는 훌쩍 높은 파도를

뛰어넘는다. 노래방이 보우하사 천편일률한 바이브레이션과 과잉한 목소리들 사이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단연

튀고야 만다. 흔들림없이 길게 뽑아내어지는 목소리, 그렇지만 잔잔함 속에서 사람 맘속에 숨겨진 버튼 하나를

쿡 누를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호소력.


그녀의 이번 앨범 역시 말하자면, "참 뜬금없는 이야기들, 참 특이한 노래가사들이다." 대체 정신세계가 어디를

부유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그녀는 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느 때처럼 All songs written by 이상은,

Produced by 이상은이니, 앨범을 두고 그녀를 말하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그녀의 앨범, 그녀의 조각, 그녀의

별부스러기니까. 그녀의 가사는 예컨대, 이런 식이다.


"저기를 봐 시간의 불꽃놀이 텅빈 저 미래는 무중력의 무한한 하늘..."(Stardust)
"지구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느끼고 있네...아, 반짝이는 파랑 플랑크톤 저 하늘의 별들과 이어져 빛나..."(섬)
"나는 왜 멈추어 있어야만 하나...플라즈마 구름 태양풍의 파도 그 흐름 속 나는 작은 입자 인디언핑크색 나노 텐트의 LA 실크로드 위 스카이 카들의 순례..."(Cosmic nomad)


그녀는 미국과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사는 아티스트답게 노마드의 감성을 늘 유지한다. 유랑하는 음유시인,

그녀는 삶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적나라하게 긍정하지도 않는다. 밝지도 않지만 어둡지도 않다. 춥지도 덥지도,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다. 어딘가의 야성적인 초원이나 차들빼곡한 주차장에 주차된 차 본넷 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읊조릴법한 가사들. 시간의 비밀, 우주의 비밀, 세상의 비밀, 그리고 삶의 비밀에 대한 수많은

은유와 경구들이 등장하는 그녀의 노래는 뭔가 주문과도 같다. 혹은 기도문이랄지도 모르겠다.


'속삭임'이란, 상대에 대한 압박이나 강요없이,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다.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

그녀의 이야기엔 늘 사람을 빨려들게 하는 마력이 있다. 목소리와 음악 자체도, 그에 얹힌 가사말도. 어디론가

빨려들어가서 전혀 새로운 시공간 속에 그녀와 함께 누워있다가 오는 느낌. 음악이 어느순간 멈출 때마다

난 몽롱한 눈빛으로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잠시 망연해 해야 했다.


봄날과도 같은 앨범. 그녀의 14번째, 우리는 별부스럭지에서 생겨났다.






영화는 두 가지의 미친 세상을 보여준다. 디카프리오의 미친 세상, 셔터아일랜드의 미친 세상. 그들의 이야기는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되 겹치지 않고, 어느 한구석 서로에게 타협할 여지는 없다. 미쳤다고 서로를

가리키는 손가락 사이에 타협은 없다. (사실은 영화는 뚜렷이 어느 한쪽에 기운 '진실'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진실'이 양측에 갖는 효용과 의미를 생각하고 싶은 거다.)


누군가에게 '미쳤다'는 딱지를 붙이는 순간, 그의 논리적인 항변은 광인의 두서없는 헛소리로, 저항은 폭력성으로,

그의 생존의지는 방어기제의 발현으로, 그리고 인간이면 누구나 품고 있는 내밀한 트라우마는 광증이 시작된

'딱 들어맞는' 계기로 이해된다.


미치지 않은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기란 그래서 참 쉬운 일이다. 우리와 당신이 밟고 있는 지반 자체가

다르다, 당신은 당신만의 안개낀 세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니 말이 통하지 않는다니까. 그건 맹렬한

폭풍우의 으르렁거림이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인간'에게 아무런 의미도 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런 우왁스런 윽박지름, 무시무시한 경멸, 싸잡아 내리누르는 일관한 무시까지. 그건 종종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만들 거다. 정신병은 '발병'이 아니라 '발견'되는 거라 어떤 사람이건 그 차가운 이론틀과 개념어로 짜인

거미줄에 걸려 비비적거리고야 말 테니 말이다. 막말로, 히키코모리 법정스님와 김수환 추기경은 두분 다 성격

이상에 변태성욕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대체 욕정을 어떻게 해소한 거지? 변태 아냐?"


결국 숫자 싸움이다. 자신이 받아들이는 지금의 세계가 미친 환상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그 세계내에 포섭되어

자신과 같은 환상을 보는 사람 숫자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누구 하나 자신이 지금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만지는 세계가 진짜임을, '레알'임을 증명할 수 없으니까 무리지어 '권위'를 보증할 밖에. 그렇게, 우악스럽게

다수결로 정하는 수 밖에 없단 건 흡사 문명 간의 충돌, 세계관의 충돌을 연상케 한다. 타협할 여지가 없이 각자

꽉 채워져 완결된 이야기로 굳어있으니, 부딪혀 힘센 놈만 살아남고 약한 놈은 부서져 버리는 거다.


여럿의 손가락질에 순순히 자신의 세계를 '배신'하고 미쳤음을 인정했던 그는, 끝내 자신의 세계를 지키려

나섰다. 그 안에서는 자신이 착한 영웅으로 죽을 수 있으니까. 자신이 미쳤다며 손가락질하던 세계로 끌려나와

또라이 악한으로 죽긴 싫었으니까, 그는 번번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거다. 그에게는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정합성있는 현실감을 제공하는 '미친 세계'가 '진짜 세계'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에겐 그것이

유효한 진실, 하나뿐인 세상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이 세계에 그어진 '정상성'과 '비정상성'은 그토록 우악스러운 다수결 논리에 따른 '카드로 만든

집'인지 모른다. 누군가의 트라우마는, 모두의 머릿속과 심장속에 새겨진 트라우마는, 그래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균열짓고 또 동시에 이어주는 저주이자 축복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다른

세계를 보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몇명 죽어나가고 인식되기 전까지는 주위에서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 뿐일지도. 


p.s. 요새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점 하나, 배우의 내적 세계와 환상을 뚜렷한 비쥬얼로 표현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이는 거 같다. 이전에는 저토록 생생하게 드러내고 보여주기보다 배우의 연기나 독백..? 여하간 좀 다른

방식으로 아리송하게 보여줬던 거 같은데. 나만 느끼는 건가..?




작년에 말그대로 (햇빛만 받으면) '샤방샤방한' 뱀파이어가 나와서는 '우쥬 매리 미'로 끝내던 '뉴문'이 개봉하던

때, 비슷한 제목으로 몇 개 안 되는 스크린수로 개봉했다가 금방 내린 영화가 있었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끝내 못 보고 놓쳤던 영화, '더문'.


공룡시대에서 세계종말까지의 시간축, 한국에서 남극 혹은 외계까지의 공간축, 그 위에서 '나'란 존재는 유일무이,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고 그야말로 유니크하다는 믿음은 쉽사리 건들 수 없는 신앙같은 부분이다. '나'란 사람은

내가 부모의 정자와 난자라부터 이어받은 유전적 형질에 더해 지금껏 쌓아온 독특한 경험과 교육, 교훈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며, 그렇기에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엄연히 제각기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거다. 요는, '개성'이다.


조금만 거창하게 나가자면, 그러한 '개성'이 존재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자신의 개별적인 삶의

근본적인 이유이자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란 민주주의적 공리를 아무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내가 왜 숱한 사람이 앞서 걸어간 인류의 자취를 따라 굳이 수고로운 삶을 살며 하나의 자국을

남겨야 하는지, 나와 당신이 함께 지지고 볶고 싸우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 바로

그 '개성'이기 때문이다. 난 앞선 누구와도 다르고, 함께 사는 누구와도 달라. 조금 깊어진 생각으로라면,

그 '다름'이 '우열'의 판단과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런 관용을 발휘해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기반이 될 거다.


그렇지만, 너무도 흔히 쓰이는 단축키 두 개를 상상해 본다. ctrl+c, ctrl+v. 파일 복사, 그리고 붙여넣기의 마법.

생성된 시간만 다를 뿐, 내용은 어느 것 하나 변하거나 달라진 구석이 없다. 나중에, 그런 명령어를 지시받는

컴퓨터가 인간과 자유로이 대화할 지경이 된다면, 그(녀) 컴퓨터는 인간이 가진 그 '알량한 개성'이란 걸

어떻게 생각할까.


파일이 가진 내용, 히스토리, 혹은 약간의 특질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금세라도 ctrl+c, ctrl+v의 마법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 영화에서 그런 컴퓨터 '거티'는 두 명의 존재에게 같은 이름을 부르고 같은 친근함을

표하며 같은 '동일자'로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던 거다. '개성'이라고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자아의

원천이라 여겼던 그 뿌리가 이토록 쉽게 복사되고 다른 그릇에 부어질 수 있는 거라면, 대체 인간은 어디에서

그 삶의 이유를, 의미를, 목적을 찾아야 할 것인가 묻게 되는 영화다.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상상, 얼굴도 같고 성격도 같고 심지어 갖고 있는 기억조차 같다면.

그런 상대라면 우리는 아마도 그 상대를 죽여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솔직히 그런 식의 상상은

이미 했었다.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 알라인지 부처님인지 태을인지간에, 그 신이라는 작자의 상상력이 워낙

빈약하고 노력이 미천해서, 초딩 5년의 국한이와 중딩 2년의 태호, 고딩 3년의 상은이와 대딩 1년의 석훈이가

어쩌면 같은 붕어빵틀에서 찍혀나온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서로 모르고 있을 뿐 어딘가에 그(녀)와 똑같은

그(녀)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역시 그런 상상의 위험한 칼날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했을 뿐이었다. 만약 어딘가에 나와 똑같은

외모, 똑같은 성격, 똑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역시나 나는 칼을 쥐고 그를 향하거나 나를 향할 거라

생각한다. 내가 믿어왔던 세상, 내가 진짜라고 믿어왔던 발밑의 기반이 허물어지는 충격일 거다. 그럼 두려움,

혹은 황당함을 빌미로 생각조차 하기 싫어진단 건, 내가 지금 모종의 경계-빨간약과 파란약 중 하나를 골라

잡아야 하거나, 프로그램 속 세상의 외피가 벗겨질 즈음의 지점-에 서있다는 경고 신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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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전시회에 다녀왔다. 미술을 모르지만 그래도 가끔은, 작품을 보며 그의 위트와 의도를 느끼고 웃어줄 수 있었다. 회뜨듯이 얼굴을 조각내어 평면에 늘어놓은 그림들은 그의 한 시기..그리고 그의 계속되는 실험의 한 연속선에 불과했다. 그가 곁을 허용했던 7명의 여자들..피카소는 그녀들을 모델로 세워두고는, 그 어슴프레한 윤곽을 몇개의 선으로 버혀내며 마치 선율처럼, 강하고 때로는 약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정말 와닿았던 작품이 하나 있었다. '여자의 얼굴'이란 작품. 그림 앞에서 족히 십분은 서있었던 것 같다. 그가 큐비즘에 빠져있던 시기, 칼날처럼 솟은 어깨'뽕'을 대담하게 그려내고는, 그위에 어두운 색채로 생략된 목에 이어붙은 직육면체의 턱쪼가리..혹은 얼굴의 아랫도리. 그리고 그 첨단쯔음에 위태하게 균형잡고 선 초승달같은 얼굴. 정면을 향한 외눈과 긴장되고 신경질적인 얼굴면 옆에는 또다른 얼굴이 그림자를 먹고 숨어있었다. 칼날같은 초승달이 품고 있던 측면부의 완만함. 피카소라면 분명히 '둔덕'이라고 표현했을 것같은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굴곡을 그리며,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와 보이는 그 초승달의 얼굴정면은 가득찬 FULL MOON과 같은 이면을 갖는다. 정면의 외눈이 날카롭고 섬세하다못해 찌를듯한 예기가 서려있다면, 그림자를 머금은 측면의 눈은..놀란 듯이 커진 눈. 예기치못하게 허를 찔린 듯한, 원치않던 사랑에 빠진 듯한..표정. 그렇게..그 정면을 향해 무표정한 '여자'는, 측면에서는 가늘고도 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측면을 파고 들수록 깊어지는 어둠..불빛조차 가닿기 힘든 내면으로 다가설수록 그녀의 미소는 깊어지고 황홀해진다.

피카소의 인물들이 으레 그렇듯, 그 '여자'가 가진 최외곽의 가면..하늘을 향해 예각을 세운 날카로운 코잔등에서 급격하고 단호한 감정선을 느껴보고, 찔리면 당장 죽을것 같은 코끝에서 사정없이 놀아나는 남정네의 가슴서늘함을 되새겨보기도 하고, 그럼에도 약간만 고개를 틀어도 나타나는 방심한 듯한 눈매의 매력과 깊이를 품은 미소에 반하기도 하고. 피카소는, 잘라낸 손톱같이 신경질적이고 속알머리없어 보이는 초승달의 이면에 그렇게 둥실하고 아늑한 둔덕이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었을 거라고 고개를 끄덕여 본다. 그는, 7명의 여자를 사랑했던 그는, 한사람한사람, 처음이자 마지막인듯이 사랑했을 거라고, 질리지도 않고 그녀들의 얼굴을 탐닉하고, 표정과 뉘앙스를 짜내었을 거 같다. 그는, 그녀의 미소가 시작되는 입술의 한쪽 언저리에서 다른쪽 언저리까지 가닿고 탐험하고 싶어서..불빛도 닿기 힘든 그 구석 한켠의 미소를 완전하게 찾아내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으리라.

이미 한차례, 쪽당할 각오하고 '노란벨트'라는 작품을 폰카로 기어이 찍어버린 터였다. 피카소의 에로틱함..혹은 그가 추구하던 관능미가 유쾌하게 변주된 작품인거 같아서. 마치 프로이트의 심리병리학적 해석들처럼. 그런데 도무지 '여자의 얼굴'이란 작품은 인터넷에서 구할 수가 없다. 온갖 매체들이 써놓고 긁어놓은 작품사진이나 설명을 보아도..무엇이 원전인지 모르겠지만 거개가 다 똑같은 작품에 대한 똑같은 이야기뿐이다. 내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던 이 작품은..아마도 대중이나 전문가의 '인증'이란 걸 받지 못한 모양이다. 아쉽기 짝이 없어서..내가 한번 기억을 떠올려 그려볼까 생각중이다. '여자의 얼굴'이란 거.

덕수궁 돌담길의 그늘에 숨어 걸으며, 피카소는 붓으로 독심술의 결과물들을 그려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그는 여자의, 사람의 얼굴이나 마음이 책처럼 편평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을 거다. '독심술'이란 말의 어폐..를 그는 이해하고 있지 않았을까.


(2006. 6. 24)

사람들은 서로의 곁을 얼마만큼 내주고,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는 걸까. '사랑'이란 말이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순간이란, 얼마나 짧고도 덧없는 것일까.


영화에서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는 이 조형물..연인들은, 아늑한 공간을 확보한 저 높이만큼 계단을

올라가서 편안하고도 행복한 포즈를 취한다. 시간이 다소 흐르면, 남자는 당연한 듯 여자에게 반말을 하고,

여자와 남자는 어딘가의 찻집에서 말다툼도 한다. 위로 오를수록 가팔라지고 위태로와지는 계단.
 
오를수록 폭이 좁아지며 제 한몸 운신하기도 벅찬 계단은, 게다가 받침대마저 없다. 그 계단은 어디로도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여자는 흔들리는 계단 어딘가쯤에서 리셋을 원했고, 성형을 해서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해보지만..결국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나락.


'관계'에 '시간'이 더해지면 예외없는 나락이다. 껍데기를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몇가지 취향과 특징을

좇아 사람을 공들여 찾는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다. 결국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나와 당신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김기덕의 답, 혹은 내가 읽은 김기덕의 답은..항상 그렇듯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변하는 것이다.

시간의 표백력은 그토록 강력한 것이고, 저 계단을 함께 설레며 올랐던 '관계'들은 어느순간 다 깨어져나간다.

행복했던 기억은 사진으로만 남을 뿐, 그 사진마저 바꿔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이래도 세상을 살아볼테냐, 이래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보겠단 거냐, 라고 그는 몰아세우는 거다. 사람이란

이토록 불완전하고 아름답지 못한 존재다라고.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초인(ubermensch)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사정없이 몰아부친 김기덕의 공격을 모두

긍정해 낼 수 있다면, 한자 남짓한 '재겨딛을' 공간조차 보이지 않는 그 코너에서 웃을 수 있다면. 하지만 영화는

수미상관, 다시 변주된다. A에서 A'로.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삶을 이어나가려면

적당한 타협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고. 내가 생각해낸 타협점은 이거다. "Art Of Love." 우리가 함께 딛고 오르기

시작한 이 계단이 우리를 아무데로도 데려다주지 못하는 건 변함이 없다 하더라도, 그 계단 한칸, 한칸을 지그시

즈려밟으며 가능한 오래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파국의 지연..이랄 수도. 통속적이게도, 오래 관계를 유지하려면

역시나 서로의 노력이 절실하단 거다.



더하기. 혈연(이른바 귀속지위 등)으로 묶인 관계를 제한다면,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엮어내는 관계란 얼마나

귀한 걸까..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랑한다는 거. 영화 도중, 살짝 쌩뚱맞아보이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많이 사랑하시나봐요"란 대사에서, 그래서 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어쩌면 연애지상주의자인가..라고 생각을 해보기도.ㅋ


더하기2. 김기덕..내가 이 감독에 환장하는 이유는, 그의 감성과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는 '계급, 계층, 젠더'같은

틀에 얽혀있지 않으며, '긍지높은 인간'이길 포기하되 관계와 소통의 가능성을 물고 늘어지도록 끝까지

몰아세운다. 어줍잖은 위로도, 환타지도 없는 그의 '보여주는(showing)' 영화 그자체는 항상 내게 모종의

좌절감을 맛보여주고, 나는 그 좌절감을 아껴 핥으며 바닥을 단단하게 감촉하는 것이다.
 
다소 드라마가 강화되고 대사의 비중이 늘어났으며, 하드보일드한 장면들이 많이 거세된 '시간' 역시, 그의

실험정신과 좌절스런 주제의식은 그대로여서..언제나 그렇듯 실망하지 않았다. 13th.



(2006.8.27)
#. 자동차의 앞모습을 보고 저녀석 웃고 있구나, 인상쓰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밍숭밍숭한

헤드라이트를 가진 프라이드는 왠지 멍청해 보였고, 캐피탈 정도는 왠지 지적이란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갖고

있었고. 마티즈 정도는 내게..상당히 세련되면서도 은근 얍쌉하다는 느낌을 주었고. 뉴그랜저 정도는 적당히

무게 있는 표정과 적당히 올라간 눈꼬리를 갖고 있고.


유지태의 코란도는 그런 거였다. 이영애와 잠시 분위기가 틀어져 분위기가 싸해지면 디젤엔진 특유의 덜덜거리는
 
소음이 그 공간을 더욱 야박하게 했고, 새로 뽑은 이영애의 마티즈와 엇갈려 한눈에 잡힐 때에는 더욱더 그

무지근한 덩치와 투박함이 두드러져 보이는. 봄날은간다, 이영화에서 자동차는 그 인물들의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하나의 적나라한 힌트였다.


이영애가 끌린 다른 남자, 그의 뉴그랜저는 그녀가 그에게 첨으로 관심보였던 선그라스만큼이나 짙은 검은색의

반들반들한 보디를 갖고 있었고, 유지태의 각진 코란도는 제대로 광이라곤 났던 적이 없는 거 같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내겐 '사랑은 역시 변하는구나', 정도로 들렸다. 관계가 힘들어지거나, 유지태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시계나, 하다못해 달력이라도 나왔다. 조막만한 공간이었고, 그만큼

시계가 세상에 널려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와 그가 충일감을 느끼던 그런 시간들에는 한번도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가 첨으로 화를 내던 시간 아침 10시반, 그후 혼자 남자가 꾸역꾸역 밥먹는 시간 11시, 남자의 할머니를 찾은

시간 밤 10시..그런 식으로, 계속 화면의 한구석에서 집요하게 시간이 흐르고, 안쓰러운 감정의 흐름과 관계의

변천을 의식시킨다. 결국 그런 아연스러운 시간의 흐름...그 극단의 형태는 마지막...남자와 여자가 서로 등을

돌리기까지..화면의 모서리로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몇번씩 서로 눈길이 엇갈리며 하염없이 부질없는 희망을

갖게 만드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다.
 

그간의 관계를 집약해서 보여주듯 때론 같이, 때론 홀로..상대를 되돌아보고, 무언가를 기다리듯 애절하게 잠시

멈춰서 마주보지만..시간이 멈춰진다면 잠시나마 기대앉아 울어보기라도 하겠지만...


시간은 흐르고 봄날은 가고.


마티즈의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그녀였지만, 악수를 핑계로 먼저 등을 보여주는데 성공했지만, 역시 사랑을

세련되게 혹은 잘 정돈된 모습으로 한단 건 불가능하다. 가슴이 터질듯한 안타까움..대체 세상은 왜 이따위인

거냐고 고래고래 내지를법한.


#. 그래도 남자에겐 기댈 곳이 없다. 이미 훌쩍 커버린 그에게는 고작 친구녀석과의 짧막한 대화나, 할머니가 주는

사탕 정도가 남아있을 뿐...떠나간 사람을 내처 못잊는 할머니에게, 자신에게 화를 내고, 고함치고,

울어버리지만...허물어질듯, 무너져내릴듯 하면서도 자그마한 할머니의 어깨는 너무도 야위고 약하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서 둘은 세상 한가운데서 오직 서로의 품에서만 기댈 곳을 찾았던 거였고.

그런데 더이상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거둬내고 씻어주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영혼에 스며있는 것. 둘이 되어 그 외로움이 더욱 커질 때, 빈틈이 늘어나고 균열이 깊어질 때 봄날이

가버렸다. 최악보다 차악,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남자는 다시금 시간의 흐름이 숨겨진 곳에서 바람을 느끼며 헤어진 후 처음으로 웃음을 띄우지만...글쎄,

그 뒤에는 아마도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정도...를 붙여서 생각해야 하지않을까.


봄날은 가버렸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봄날이 오겠지만, 시간을 비끄러매고 태양을 묶어둘 재간이 없는 이상..

다시 봄날은 가고. 언젠가 분홍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분홍빛 양산을 드리운채로 햇살 가득한 봄날의

끝물쯤에서 세상을 등질지 모른다.


(2005.4.25)
우선 '리뷰'라는 단어를 좀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리뷰. 사전적 의미로는 도서, 영화, 연극 등에 대한 논평이지만

블로고스피어에선 다소 다른 의미로 많이 바뀌어 가고 있는 듯 하다. 티스토리의 공지 역시 '영화, 리뷰, 책...'

거기서 얘기한 '리뷰'란 아마 각종 제품에 대한 '리뷰'라고 이해하면 될 거 같다.

(무슨 제품에 대한 것이 되었건) 리뷰나 영화, 책에 대한 포스팅이 딱히 사진이 강조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렇지만 글만 줄줄 들어가는 것도 참 재미없는 노릇, 간단히 사진 한장에 포스팅 내용이 얼마간 노출되는

것이 역시 최선인 것 같다.


남는 문제는, 그런 '리뷰'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괜찮지 않을까 시도해봤다.

"최신 포스팅", "분야별 리뷰", 그리고 "직접 선정한 추천 리뷰" 정도.

아무래도 최신 포스팅이 맨 위로 오르는 게 '첫화면'으로서 꼭 필요하고 당연하기도 한 순서 같다. 따끈한 최신

포스팅이다 보니 포털 헤드라인 스타일로 그림도 크게 넣고 노출되는 글도 조금은 많이.

영화 리뷰의 경우 난 으레 영화 포스터를 하나씩은 넣곤 한다. 딱히 다른 이미지를 넣을 게 없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소감이니만큼 글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어서다. 그런 욕심으로, 조금은 더 많이 노출시킨 글자들.

도서 리뷰는 약간 더 글자 중심이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아예 이미지 노출을 치워버렸다. 포스팅 제목에 책

제목이 들어가면 됐지 굳이 책 사진을 올릴 필요까지야.

여태 써온 리뷰들을 보면 대개 영화와 도서 분야, 상대적으로 언론과 공연/전시 쪽은 포스팅도 뜸하고 글도

많지 않아서 두 개씩만 노출시켜 보기로 했다. 언론 분야나 공연/전시 모두 이미지가 필요하니 적당하게.

그리고 마지막 부분, '영화, 도서, 언론, 공연/전시' 분야에서 그래도 스스로 맘에 드는 리뷰 포스팅들을 몇개

골라서 간략한 형태로 노출시켜 봤다. 다른 박스들에서 최신글들이 꾸준히 업데이트되고 특히나 맨 앞머리에서

리뷰 분야 최신글이 노출되겠지만, 이 부분은 본인이 스스로 지정한 글들을 변경하지 않는 한 계속 같은

포스팅들을 노출시키게 될 거다. 그건 이 '리뷰' 블로그의 뼈대거나 주된 색깔, 시각을 드러내는 대표선수랄

수도 있겠다.




'욕심쟁이 ver.' 첫화면에는 그야말로 꽉꽉 포스팅들이 차 있다는 느낌이었다. 수십개 포스팅이 잔뜩 노출되어

있긴 한데 막상 손이 가는 건 하나도 없는 얼기설기한 결혼식장 부페 풍경같달까.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지금의 '첫화면 꾸미기' 기능이 좀더 영리하게 각 카테고리별 포스팅들을 배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배려가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욕심쟁이 ver.' 첫화면과 보완요청사항들.에서 이미 그런 아쉬운

배려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했다.), 기능을 쓰는 사람의 욕심도 엄연히 한 몫했다. 조금더 욕심을 덜고 새롭게

세팅해본 '미니멀리즘 버전' 첫화면. 그건 어쩌면 애초 테스터 해보겠다고 손번쩍 들었던 포스팅의 의도와도

더욱 맞아떨어지는 거였다.([첫화면 베타테스팅]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미니멀리즘 버전' 첫화면이 지향한 목표는,

1) 각 카테고리별 노출이 효과적일 수 있도록.
2) 가능한 간결하고 정갈한 느낌이 나도록.
3) 꼭 필요한 만큼만 노출하되 그림만 벙벙 뜨지 않도록.


소위 'Minimalism'인 거다. 그리고 그런 의도를 '첫화면 꾸미기' 기능이 잘 받춰줄 수 있을지 확인해 봤다.

와중에 [사진] 아버지의 센스. "여보! 사랑해!" 가 다음 베스트에 오른 덕분에 좀더 테스팅에 도움이 된 거 같다.
어쨌든, 큰 카테고리부터 수정, '여행', '리뷰', '일상', 그리고 '선選'의 네 가지로 한정키로 했다.

여행 카테고리를 어떻게 세팅할지가 가장 문제였다. 그리고 디자인을 어떻게 잡을지도.


알고 보니 타이틀에 이런 식으로 색깔과 박스를 치는 기능이 있던 거다. 이것저것 시험을 해보다가 취향대로

시뻘건 색 범벅을 해 볼까, 하는 유혹이 잠시 들었지만 혼자만의 미니멀리즘을 고수하기로 했다.(이는 절대

미감이 떨어져서라거나, 귀찮아서 따위 하잘것없고 세속적인 이유는 아니다..;; )
그래서 그냥, 깔끔하게 아무 장식없이 글자만 박아넣었다. 그러고 보니 제일 낫지 싶다. 때로는 군더더기 기능

괜히 써먹는다고 했다가 오히려 지저분해지기만 하고 적용하느니만 못한 경우도 있는 게다. 다만 폰트가 좀더

여러 가지 있었다면 좀더 다양한 느낌을 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여행' 담에 온 '리뷰' 공간. 넷북에 눈이 먼, 타는 목마름이 오롯이 드러나는 노출이다. 공간 사이를 구획하는

겹줄을 적용하고 나니까 확연히 구분은 되는데, 위아래 공간을 너무 띄우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일상'과 '선選'에 할애된 아랫공간. 마침 '일상'에 올린 포스팅 하나가 베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다음에서 이렇게 편집된 사진으로 오른 '포토 베스트'. 사실은 나도 첫화면에 노출할 때는 저 부분을 강조하고

싶었었는데, 도무지 선택의 여지가 없던 거다.

그래서 이렇게 부모님 얼굴에 고양이 그림을 씌운 숭악한 모습이 첫화면에 계속 뜨고 말았다는 게 안타까웠다.

베스트에 뜨고 나서 다시 저렇게 편집된 사진으로 첫화면 노출되는 사진을 바꾸려 이렇게 저렇게 시도해봤지만

좀처럼 '첫화면 꾸미기' 기능에는 노출될 사진에 대한 선택권이 제공되지 않는 듯 하다.

그러니 요런 문제가 생긴다. 꼬맹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이 알아서 코 윗부분을 잘라먹고 노출되어 버렸다.

노출 사진을 뭐로 할 건지, 100% 노출할 건지 일부를 잘라서 노출할 건지를 정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그리고 베스트로 노출된 글을 한번 방문자의 입장으로 보다가 떠올린 아이디어 하나, 포스팅 맨 마지막에 붙는

이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개를 조금 다른 버전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첫화면에 카테고리별로 노출시켜둔 그 해당 박스를 포스팅 아래로 붙이는 거다. 예컨대 이번 같은 경우엔 아예

이렇게 '일상' 카테고리의 박스 부분을 노출시키게 되면 좀더 눈에도 띄고, 다른 글에 대한 관심도도 높아지지

않을까. 뭐, 이렇게 싹 바꾸자는 게 아니라 이런 식의 노출 옵션도 제공해줌 좋겠다는 이야기.

그래서 '미니멀리즘 버전' 첫화면은 이런 모습이다. 나름 굉장히 깔끔하고 보기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기만족적인 '미니멀리즘'을 구현하는데 티스토리의 '첫화면 꾸미기' 기능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미니멀리즘이고 나발이고...최신글만 무조건 노출되는 심심하고 둔감한 첫화면을 계속

고수하고 있었을 거니깐.) 근데 이 그림 좀 키워서 볼 수 있게 해주면 안 될까.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다가, 혹시 또 나중에 이 전체 그림을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쨌건 나도, 티스토리 블로거들에게는 좀더 편하고 멋진 환경에서 포스팅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여타 공간의 블로거들에게는 티스토리로의 유입 동기나 자신 공간에 대한 압박 동기로 작용할 수

있도록, '첫화면 꾸미기' 기능 보완을 통해 언제나 선방뜨는 티스토리가 되었음 좋겠다.

이상, '욕심쟁이 버전'에서 '미니멀리즘 버전'으로 바꿔보면서, 또 베스트 노출로 좀더 방문객 입장에서의

검토를 하다보니까 다시금 몇가지 아쉬운 점이 두드러졌다는 이야기다. 위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아      래 -

1) 박스 위아래 줄을 적용할 때 공간을 얼마만큼 띄울 건지 선택이 가능하다면 좋겠다.

2) 글자체를 좀더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

3) 노출될 사진에 대한 최초 포스팅시의 선택권은 물론, 발행 후에도 수정이 쉬웠으면 좋겠다.

4) 카테고리 글 소개란에 첫화면 노출면을 활용하여 여러 옵션을 주면 좋겠다.

5) '첫화면 꾸미기' 시작할 때 현재의 모습을 한눈에 보게 해주는 그림이 좀더 커졌으면 좋겠다
.(혹은 그림 사이즈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 이전 보완 희망사항 요약.

1) 각 포스팅이 노출될 때 대표사진을 뭘로 할지 선택권이 부여되었으면 좋겠다.
2) 원본 사진을 전부 노출시켜주던가, 아님 어느 부분이 노출될지를 정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3) 글만 노출하는 박스의 포맷도 좀 더 다양해졌으면 좋겠다.
4) 각 박스에 들어가는 노출 포스팅들이 각각 카테고리를 지정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
5) 지금의 박스는 전부 가로형으로 되어 있는데 박스 세로형도 있었으면 좋겠다.
6) 첫화면에 노출된 포스팅 중에서 가장 최근에 오른 포스팅에는 특정한 표시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7) 첫화면에 팝업창을 띄울 수 있게 하는 기능을 추가할 수 있으면 좋겠다.


(to be continued...)




자신 이외의 사람을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과도 거의 아무런 유대없이 혼자 살며, 친구, 직장동료라거나 애인도 만들지 않고 '사람은 혼자 죽는다'는

신조를 갖고 다만 자신이 세운 목표만을 위해 하루하루 조용히 살고 있다. 이따금 강연을 하러 가면, 가방을 

앞에 꺼내두곤 그 가방에 불필요한 책상 위 소품들, 챙기고 책임질 자신이 없는 친구/가족/배우자, 그 

하나하나를 모두 담아서는 자크를 닫고 내다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어서 더욱 어울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생면부지의 다른 회사 직원들에게 해고통지를 하는 역할.

그 일은 상대에 대한 집중과 배려, 세심한 말솜씨와 '밀/당'의 스킬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시

상대를 볼 필요가 없는 일회적인 일이기도 하다.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 자살하던 말던, 그는 단지 소심한

그 회사 사장 대신 통지를 전하는 역할이었을 뿐이니 알아야 할 일도 아니고 관심도 없다는 투다.


그는 미국 전지역을 비행기로 커버하며 온갖 마일리지와 특급회원권을 향유한다. 비즈니스석과 특급호텔의

안락하고 편안한 서비스. 그 공간에서 역시, 그는 신경써야 할 소소한 장식품이니 청소니 빨래니, 책임져야

할 강아지나 가족 따위 없는 거다. 요컨대 그의 생활은 철저하게 본인 자신에 맞춰져 있고, 책임질 수 없는 본인

능력 이외의 부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부분은 그의 생활 '밖'에 있다. 


굉장히 솔직하기도, 또 굉장히 어린애스럽기도 한 태도다. 어린애같은 태도가 아니라면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라고 이토록 명쾌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까. 그런 태도는 또 굉장히 매력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감당할 자신도 없고 벅찰 거라는 걸 알면서 꾸역꾸역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기대를 하지만, 애초

그런 거짓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겠다는 거니까. 자신은 아직 '지상에 내려와' '청소하고 빨래하고 기념일을

챙기며' 사람들과 우격다짐하면서도 행복한 척 연기나 하는 삶은 싫다는 거니까. "쿨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영화의 최대 장점은, 그렇게 뻗대는 그를 '교화'시켜 지상으로 내려보내려 안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물론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만치) 동생의 결혼 앞에 가족애를 실감키도 하고, 24시간 늘 청결하게 유지되는

화려한 특급호텔과는 판이하게 남루한 전셋집에 익숙해보려는 노력도 하지만,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거다. 아직은 up in the air, 조금은 더 자신의 방식으로 '책임지는 관계'를 최소화한 채

살겠다는 거다.


자신 이외의 사람을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지상'으로 내려가는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는 라이언

(그리고 조지 클루니)의 순수하고 도덕주의적인 태도엔 사실 반대다. 덕분에 그 연세에도 소년같은 순수함과

섹시함을 과시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그가 해고를 통보했던 사람들이 한바탕 울분을 토하고 격한

언사를 내뱉은 후에는 꼭 가족들과 함께임을 생각했듯, 어쨌든 그건 자신이 준비가 되고 안되고를 떠난 문제다.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책임질 준비가 된 사람을 '어른'이라 한다면, 어른이 될 준비가 되어서 어른이 된

사람이 어딨나. 그냥 피할 도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거지, 라이언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비행기 안, 천만 마일리지를 달성한 그 자리에서조차 기장은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우린 돌아갈 곳이

필요하고 그 곳엔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할 거미줄같은 관계망이 버티고 있는 거다. I'm from here. 라는 그의

있어보이는 듯, 그렇지만 엉성한 대답이 살짝 망연하게 들렸다. 아마 그도 알고 있었을 거다. 가방에 넣고 자크를

잠가버릴 필요도, 잠가버릴 수도 없는 게 다른 사람들 속에 어느샌가 품어진, 내 속에 어느샌가 품어진 서로의

조각들이란 것. 언제까지 호텔 직원과 비행기 승무원들이 일방적으로 챙겨주는 세상에 머물 수만은 없다는 것도.


그는 조금씩 지상으로 착륙하는 중이다. 책임을 지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도,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모두 쉽지 않단 건 이미 경험했으니 조금은 더 연착륙의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러닝타임이 무려 162분이던가, 두시간 사십여분짜리 영화란 걸 알고 대번에 툴툴거리고 말았다.

대체 요즘 영화들은 왜 이렇게 길게만 만드는 거야, 좀처럼 덜어낼 줄도 모르는 욕심쟁이들 같으니라구.

아무리 제임스 카메론이 감독의 전작들, 에이리언이니 타이타닉(195분)이니 전작들이 모두 러닝타임이 대체로 

길었다고는 해도, 또 그의 검증된 '능력'을 신뢰한다 해도 부담스러운 길이의 영화임에는 틀림없었다.


엊그제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바로 리뷰를 쓰고 싶었다. 워낙 요새 개봉한 영화 가운데서 압도적이고 독보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는데다가, 대체로 영화에 대한 상찬 일색이었던 판이어서 나도 뭔가 말을 보태 그 '아바타

신드롬(?)'이라 할 만한 것에 묻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달까. 그런데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무엇을 딱히 짚어서 이야기할 만한 건더기를 결국 못 찾고 말았다. (사실은 이 영화에 대해

새로운 영화적 가능성을 발견하니 어쩌니 말은 많지만, 결국은 '현질'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다. 카메론 감독이 공들여 묘사해낸 외계 행성의 비쥬얼은 디테일한 부분까지 황홀할

정도로 환상적이었고 전투신 등은 박진감 넘쳤으며, 스토리 역시 길고 긴 러닝타임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탄탄했지만, 무엇보다 무척이나 재미있는 영화였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비쥬얼과 스토리 모두

빠짐없이 구비한 데다가 명감독의 능력까지 더해 아주 재미있는 영화가 된 셈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하나 되짚어 보면, 비쥬얼이나 이야기 모두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비쥬얼만 따져보자면 공중에 떠있는 '할렐루야 산'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의 성 라퓨타'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몇 점을 그대로 영화화해 놓은 듯한 느낌이었고, 공중 전투신은 스타워즈에서 보았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다. 외계 행성에 있던 '생명수'의 이미지라거나 그들의 '자연친화'적인 삶의 이미지 역시

어디에선가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났던 그런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친생태 유토피아'의 모습인 거다. 딱 잘라

말하자면 적잖이 진부한 비쥬얼이란 거다. 딱히 새롭게 상상력을 자극한다거나 전혀 참신하고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스토리 역시 마찬가지다. '아바타'라는 존재를 통해 지구인과 외계인의 존재를 매개한다는, 그리고 결국 어떤

육체에 실려있을 때가 자신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은 일견 참신해 보인다. 그렇지만 매트릭스 이후, (사실은

'13층'이란 영화 이후) 모든 SF가 다루고 있는 건 일종의 탈근대적인 자아 정체성 찾기의 문제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나로서 규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마주한 시공간이 현실/진실일까" 따위의 철학적

문제, 동양적으로는 일종의 '호접몽'을 제기하는 건 이미 답도 없고 진부하기만 한 관념적 유희가 되어버렸을

정도다. 거기서 더 나아가려는 영화적 시도들이 있고, 실제 그런 영화들이 개봉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이제와

또다시 '이 몸이 정말 나인가 저 몸이 정말 나인가' 같은 류의 화두를 꺼내다니 조금 아쉽다. 물론, 영리하게도

감독은 이런 난해하고 오래묵은 문제를 파고들지도, 치열하게 대면하지도 않는다. 단지 영화를 맛깔나게 하는

하나의 씨즈닝처럼 살짝 얹어놓을 뿐.


결국 영화는 종을 넘어선 사랑이야기다. 생태에 대한 이야기, 인류의 탐욕에 대한 이야기, 인간적 신뢰와

휴머니즘의 이야기, 혹은 지구적 차원에 빗대어 선진국 대 제3세계 간의 갈등이야기 등은 하나의 양념이나

데코레이션처럼 영화를 풍성하게 하는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카메론

감독이 정말 '나비'족의 생태철학과 생명존중문화를 중요한 주제로 여겼다고 생각한다면 몇 가지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적장의 가슴에 화살을 두 발씩이나 박아넣던 여자가, 처음 등장할 때엔 어쩔 수 없이 생명을 해치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죄책감을 고스란히 간직했던 그 여자라는 걸 기억하는지. 생명을 최대한 불필요한 괴로움없이

사그라뜨리려던 건 '나비'족의 어른이 되기 위한 요건이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증오'와 '분노'를 배운 셈이다.

또, 마지막 장면에 '나비'족이 포로들을 지구로 돌려보내던 장면에서 지구인들의 무기로 무장한 장면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제 그들은 지구인의 대량살상무기로 무장한 채, 지구인들의 또다른 침공을 대비하거나 혹은

자신들끼리 전쟁을 벌이게 될 거다. 그들이 지구인들에 비해 '야만'이었던 혹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인류'였던,

이제 그들도 오염되기 시작하는 건 아닐까.


뭐, 심각하게 따지고 보자면 그런 거고, 역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로 보아야 할 거 같다. 그다지

새롭거나 실험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지만, 이미 오락성이 검증된 몇 가지 이야기와 소재들을 잘 버무려서

만들어낸 전형적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랄까. 어쨌건 그 스펙터클함은 영화관에서 봐야 제 맛인.



날것의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쉼없이 쏟아져나오는 육두문자와 걸레 물고

내뱉는 온갖 말들조차 세련되었다거나 세련되어서 어색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김기덕의 영화들에서 나왔던

막말들보다도 더욱 강하고, 진짜같았다. 리얼했다. 여기서 '리얼했다'는 말은 흔히 조폭 코미디나 깡패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관용어구'같은 욕들과 억양이 아니라, 정말 진짜로 '마음을 담아' 욕을 하고 있어 보였단 의미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경찰을 폭행하고, 거침없이 욕을 달고 살며, 아버지를 밟아 짓이기고, 길가는 여자에 침을

뱉으며, 여자에 주먹질도 서슴치 않는 사채 해결사.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다. 대화와 소재와 주제, 스토리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막장인데 대체 '세련되다'는 느낌은 어디서 왔을까. 세련된 거라 함은 보통 디테일까지

은근하지만 꼼꼼하게 안배되어 있으며, 어거지스럽거나 촌스러운 부분을 최대한 배격한 것을 이르는 것 같다.


아마 그런 부분 아니었을까. 남대문시장에 여자와 아이와 함께 놀러나갔던 남자, 그전까지 항상 쉼없이 담배를

뻐끔대던 남자의 입에 물린 담배가 불이 붙지 않은 채 빙빙 돌고 있던 어느 스쳐간 장면. 또, 아이와 여자가

금세 친해지고 살짝 겉도는 느낌을 받은 남자가 어색하게 주머니에 쑤셔넣은 손을 아이가 슬그머니 끌어당겨

잡아주는 장면. 여자가 남자의 이복 누이의 집에서 서둘러 일어나려는 남자에게 "갈테면 혼자 가"라는 식으로

당돌하게 말하면서도 문 앞을 가로막은 채 주저앉아 양파니 파를 다듬는 장면. 그리고..남자가 손목을 그은

아버지를 들쳐업고 뛰면서 내뱉는 헉헉 끊어지는 단어들, 중간중간 미처 뱉어지지 못한 채 삼켜진 단어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면. 남자가 입안가득 피를 머금고 꾸륵꾸륵대며 던지는 몇마디 짐승소리 같은 그것들.

너무나 함축적인데, 그러면서도 또 너무나 생생하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 역시 굉장히 좋았다. 양익준의 눈빛은
 
특히나.


세련되다는 느낌은 무엇보다 선정적이고 표피적으로 동원해낸 막장스러움이 아니라 그냥 진정한 막장을

보여준 데서 나온 것 같다. 왜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듯이, 극단으로 밀고 간 막장은 오히려 극단의 세련됨과

통하는지도 모른다. 어정쩡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우물쭈물하는 게 아니라, 거침없이, 끝까지 보여주면서

꾸미지 않는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욱 이야기에 흡인력이 생기고 '진심'이 담겨 버린 게다. 이 영화, 어정쩡한
 
자세로 보면 왠지 한 대 호되게 두들겨 맞을 만큼의 서늘함과 기백을 품고 있다. 실제로 양익준은 이 영화를

자신의 지난 시절을 해소해내기 위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거나 굉장히 날것이면서도 굉장히 세련된 이 영화는, 결국은 사람을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어버렸다. 아니,

그보다는 '굉장히 우울함'이라는 연못에 빠졌다가 흠뻑 젖어서 기어나온 느낌이랄까. 써늘하고, 소름이 돋고,

너무 먹먹해서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가 끝났다는 것만으로 왠지 따뜻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심마저

들게 만드는 영화다. 이 영화의 단점이랄까, 나무랄데없이 행복해보이는 풍경과 최악의 상황을 맞바로 붙여

놓는 거침없는 모양새와 비쥬얼과 사운드를 필요에 따라 드문드문 생략한 채 어느 하나에 집중시켜 버리는

영리한 머리씀씀이. 그런 것들이 일종의 뒤집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망가지고, 이렇게

형편없어져도 괜찮구나. 그래도 어엿하게 살아갈 수 있구나, 하고. 그건 분명 단점이라면 단점이고, 또 분명

장점이라면 장점인 게다.


내가 너무 쉽게 예상해 버렸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뻤던 장면 하나.

(한참 골몰하던 남자,) "야 한연희, 두년희, 세년희, 네년희 이 썅년아, 이 미친년아." "아씨 이 미친놈 진짜."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골목에서 남자가 여자에 침을 뱉고 주먹을 날렸을 때만 해도, 남자가

그녀 앞에서 이렇게 나름의 농담을 던지려고 애쓸 줄은, 그래서 귀여운 모습을 보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문장을 보는 것으론 느낄 수 없는 맛, 그리고 둘 사이의 내밀한 교류를 모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맛. 저런

대사들이 난무하는 사이에서도 그들의 눈빛만 좇을 수 있다면, 비위가 약해도 한번쯤 꼭 시도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꽤나 컸던 영화, 기대 이상이었다. 김기덕의 은퇴 후, 이런 감독이 나타난 건

축복이다.






#1.

어제 '내사랑 내곁에'를 보았다. 적잖이 눈물을 흘렸다. 사실은 이런저런 핑계김에 울고 싶었는데, 눈물이 흐르기만 했다.

발랄하던 하지원은 울부짖고, 김명민의 '메소드 연기' 역시 훌륭했다. 일부 평론가의 악평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대신 감독의 의지에 휘둘렸다. 눈물이 울음으로 발전토록 냅두질 않았다. 화면이 휙휙 넘어가고, 현실만큼 어색한 유머가

맥을 끊었다. 
 

뭔가 아쉬운 게 많은 영화였다. 죽음에 익숙한 장례업체 여직원, 착한 척 하다가 무너지는 루게릭병 환자라는 등장인물,

감정이입하기엔 쉽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원과 김명민의 연기는 좋았다. 스토리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너는 내운명'을 울며 보고 나서 느낀 후련함이 없었다. 눈물이라고 다 같지는 않다.


#2.

포르투 와인 두 잔 째다. 안 보려고 애썼는데, 결국 1Q84 1권을 방금까지 다 봐버렸다. 얼마전 누군가와의 대화 끝에,

하루키를 탐닉한 전력이 있되 그를 극복, 혹은 경과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었다. 하루키가 창조해낸

존재들이 갖는 공통점은, 자신의 영역 밖으로는 세계가 펼쳐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 지독히 이기적인 점이란 거다.


보통의 '이기적'이란 단어와는 뜻이 달라서, 내 한몸 제대로 추스리지도 못하니 그것부터 해보겠다는 겸손함도 담겨있고,

나부터 바로 서서 누군가를 품어보겠다는 건설적인 의지도 담겨 있겠지만. 아직 1권밖에 못 봤는지라 인물들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시니컬하며 세상에 대한 환멸에 젖어있다. 그러고 보니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이 와인을 불렀댔다.


#3.

10월말까지는 꽤나 바쁠 예정이라 했는데, 원래 시험 전날에 더욱 만화나 책들이 땡기기 마련. 장그르니에의 '섬'을

다시 읽고 있고, '내 심장을 쏴라'나 '오늘의 거짓말' 등등의 소설들을 하룻밤새 다 읽어 버렸으며, 최장집교수의

'민중에서 시민으로'를 찬찬히 읽고 있는 중이다. 리뷰어로 받던 책들도 다 끊겼으니 이제 살림살이 좀 나아질 것 같다.


바쁜 거 다 끝날 때까지 보고 싶던 책들을 끊는 거보다, 그냥 가능한 재빨리 전부 해치워버리는 게 낫겠다.


#4.

나만의 블로깅 원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중이다. 인기 블로그나 파워 블로그 따위 허명들과 덧없는 거품을 지우고,

공짜에 현혹되어 자처한 온갖 리뷰들을 걸러내고,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블로그'라는 게 어떤 공간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원칙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중이다. '리뷰'를 쓴다는 행위가 어느새 '그 무엇'의

사주를 받은 마케팅에 (결과적으로) 포섭되고 만 건 아닌지 싶어서다.


"이리저리 흐트러진 나의 육체를 끌어모아 글자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꽉 닫는다"(이선영, "글자속에 나를 구겨넣는다 中)

내게 블로그란 그런 공간이다. 일기를 쓰고 낙서를 끄적대듯, 그런 내밀하면서도 솔직한 공간의 의미가 우선인데 어느새

'미디어'라는 측면, 가능성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여러 편향이 생겼다. 단순하게는 글투의 문제에서부터, 이야기꺼리,

심지어는 '수익'에 대한 고려까지. 리뷰 신청을 끊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5.

와인 세 잔째다. 어쩌면 내가 아직 '하루끼적으로' 이기적인 티를 못 벗은 건지도 모른다. 요새 정말 보고 싶은 영화는

'똥파리', 그 영화의 감독이 영화를 찍고 나서 이건 나를 위해 만든 영화다, 라고 했다지. 대체 어떤 영화일까. 그는

어떻게 '나'와 '그들', 혹은 '우리'를 불러내고 있을까. 당당하게 '나를 위해 만들었다'는 그가 부러운 건지, 아님

그 말 뒤에 숨어있는 원초적인 암담함과 답답함이 처연한 건지는 모르겠다.




요새는 위드블로그에 종종 앨범이 리뷰대상으로 오르고 있지만, 위블에서 올린 음반 리뷰의 첫대상이었던 '화나'

힙합앨범이 운좋게 당첨된 이후([FANATIC] 생기다만 귀로 듣는 화나의 힙합.)로는, 전혀 당첨의 기회가 없었던지라
 
아쉬워 하던 참이었다. 아마 그때의 리뷰가 맘에 안 들었나보다, 역시 내 귀는 생기다 말아서 누군가의 음악을

평한다는 게 가당치도 않은 소리로 들렸나보다..여러 가지 자책감과 자괴감이 물밀듯 몰려오던 중.


"클래식/크로스오버 뮤직의 센세이션! 본드와 바네사 메이보다 업그레이드된 21세기형 클래식 밴드"라고?

본드는 제임스 본드를 말함인가 했지만, 여튼 바네사 메이는 안다. 그녀의 바이올린 연주를 나름 좋아라 하며

찾아들었던 이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21세기형 클래식 밴드'란 단어가 와닿는다. 오호...냉큼 신청.

"레드 제플린의 'Kashmir',엔니오 모리꼬네의 'Chi Mai'라니요..이 두곡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해서 연주했는지 꼭 듣고 싶습니다. 비록 제가 바네사 메이밖에 모르고 본드가 누군지, 에스칼라가 누군지 듣도 보도 못했지만 바네사 메이보다 업그레이드되었단 게 대체 어떤 느낌일지 맛보고 싶네요."

라고 알랑방귀 아닌 알랑방귀를 뀌었더니, 뿡, 소식이 왔다. 역시 방구가 잦으면 또...흠, 여튼.

앨범 포장지에도 붙어있다.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최종전까지 진출했던 그녀들인 게다. 하긴 데뷔 앨범에서

'Palladio', 'Kashmir' 두 곡이 동시에 싱글 차트에서 대박을 냈다니 실력은 인정받고도 남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들어보니 2번 트랙 Palladio와 3번 Kashmir, 그리고 7번 Chi Mai와 9번 Serabande가 가장 귀에

꽂힌다. 주로 가사없는 클래식 음악이나 뉴에이지 음악류는 틀어놓고 쭉 BGM으로 쓰는 터라 따로 트랙번호나

곡 이름을 확인하는 일이라곤 좀처럼 없는데, 이렇게 네 곡은 앨범을 들춰 제목을 다시 확인하고 말았다.

특히 Palladio는 그녀들이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들고 나간 곡이라던데, 아마 그 쇼에 나가서 처음 이 곡을

선보이던 순간, 심사위원들은 이런 느낌을 받았지 않을까. 포장지를 쭉 잡아찢어 그녀들의 음악을 좀더

맛보고 싶다, 대체 이 세련되면서도 파워풀한 곡 흐름은 뭐지, 두 대의 바이올린, 한 대의 비올라, 한 대의

첼로로 이렇듯 풍부한 감정을 탄주할 수 있다니. 아마 그랬기에 최종전까지 올라갔었으리라. 다른 재해석된

곡들도 물론 멋졌지만, 이 앨범 전체에서 가장 빛나는 곡이 바로 Palladio인 것 같다.


나름 클래식한 우아함, 장중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스피디함과 보다 드라마틱한 궤적을 화려하게 그려내는데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지만, 이 씨디를 아예 차에다 갖다놓고 시간날 때마다 듣게 되는 걸

보면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품고 있는 거다. 아마도 다음 앨범이 나온다면, 한번쯤 살지 말지를 고민하게 될

법하다. (물론 그 전에 리뷰대상으로 나온다면 꼭 뽑아주세요~하고 저요저요 하겠지만.)


아, 그러고 보니 기억 속의 흐릿한 바네사 메이보단 파워가 약하면서도 좀더 풍부한 화음이 장점이지 싶다.

아무래도 솔로와 밴드의 차이겠지만. 점수를 주라면 솔직히 바네사 메이에 쏠리겠지만, 데뷔 초의 그녀와 비기는게

공정한 거고, 그렇다면 글쎄. 오십보 백보의 점수를 받지 않을까.

멋진 앨범이었지만, 다만 한 가지. 배송 상태가 왜이렇게 엉망인지 씨디 케이스를 열자마자 나뒹구는 씨디와

옥수수 강냉이 이빨빠지듯 사방으로 튀겨나가는 씨디 케이스 쪼가리들. 에어캡을 좀더 감던가 택배직원에게

좀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하던가, 씨디를 열 때마다 조심스레 수평맞춰 여는 일이 없도록 다음번에는 신경을

좀 더 써주었으면 한다.







위드 블로그가 조금씩 품목들이 다양해진다 싶더니, 선크림도 리뷰 품목에 올랐길래 이렇게 적었댔다.

"남성들도 피부를 가꿔야 한다느니, 꽃남이 대세라느니 말은 많지만 일단 선크림부터 찍어바르는 게 시작이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얗게 들뜨거나 끈적거리는 느낌이 싫어 안바르고 있었는데, 액티브 썬크림은 어떨지 기대도 되고요, 마침 여름휴가철이니 본격적으로 사용할 기회도 많을 거 같아 신청합니다~!"

용케 당첨이 되었는데, 생각보다 여름 휴가가 많이 미뤄졌다. 해서 우선 집 밖에 나다닐 때 바르기로 하고 택배상자 개봉!
 
생각보다 커다란 상자에 에어쿠션이 잔뜩 들어있었고, 그 밑에서 사뿐히 자리잡고 있던 선크림과 보디워시, 로션까지.

이런 걸 그리고 임기응변에 강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좀 성의없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박스 한쪽 뚜껑에 적힌

메시지와 하트 마침표. 조금만 더 신경썼으면 메시지의 진심이 훨씬 잘 와닿지 않았을까 아쉬웠던 대목.

본격적인 사용후기 #1. '프레쉬 바디워시 & 바디로션'

선크림보다 먼저 써본 건 받고 나서 바로 써본 바디워시와 바디로션이었는데, 좀 실망이었다. 향이 너무 달기만

하고 산뜻한 느낌이 없어서, 화장실 내의 공기가 온통 무겁게 축축 처지고 가라앉는 듯 했달까. 게다가 로션은

뭔가 처덕처덕 바른다는 식으로 점도가 높아서 피부에 마뜨하게 스민다기보다 발라놓고 말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뭐...사실 이 품목들은 보너스로 온 셈이니까 딱히 리뷰를 할 필요는 없을지 몰라도, 그래도 의견을 표해주면 좀더

좋은 제품이 나오리라는 기대를 하며 몇마디 꿍시렁꿍시렁.

본격적인 사용후기 #2. 'CS3 for Men'

사실 선크림을 잘 바르지 않아 대조군이 딱히 없다. 그나마 내가 선크림을 발랐던 기억이라면 이집트와

태국의 작열하는 태양아래 뿌옇고 텁텁한 선크림을 쓴 약삼키듯 억지로 발랐던 것, 그리고 어쩌다 한 번

바르곤 씻어낼 때 물 위에 기름이 동동 뜨며 잘 씻겨지지도 않던 그런 불쾌한 느낌? 그런데 좀 나은

느낌이 들었다. 그새 기술이 진보한 건지, 아님 내가 예전에 썼던 게 구렸던 건지 모르겠지만, 뭔가

피부에 스며들어 텁텁한 느낌이 훨씬 덜하고, 바르면서도 뭔가 군인들 위장크림 바른다는 그런

처덕처덕한 느낌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뭐랄까, 양말 신고 그 위에 두텁고 둔한 등산양말 신는 느낌?

그런 느낌에서 조금은 많이 멀어져 있었다.


이제 다음주에 태양이 가득한 나라로 뒤늦은 여름휴가를 떠나는데, 꼭 가져가야 할 아이템으로 메모해 두었다.

가서 씻고 나서 스킨/로션 다 바르고, 그 위에 썬 크림 바를 때 조금은 덜 찝찝한 기분으로 바를 수 있을 것 같다.




이웃 띠보님께서 [이벤트] 14회 한겨레문학상 <열외인종 잔혹사> 리뷰어 모집이란 포스팅에 "예쁘게 귀엽게 섹시하게
 
당황스럽게 유머러스한 댓글"
을 달면 '열외인종 잔혹사'라는 책을 배려해 주시겠다 하였다. 전혀 예쁘지도 귀엽지도

섹시하지도 당황스럽지도-아마 1그램쯤 당황스러우셨을까-유머러스하지도 않은 댓글을 달았지만, 경쟁률이 1:1이 되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나로서는 기적적인!) 사정이 도래하여 책을 받아 보았다. 봉투에 찍힌 도깨비 그림 도장이 귀엽다.


이야기는 단숨에 읽혔다. 책을 받아보고 잠시 몇장 펼쳐볼까 했던 게, 세네 시간만에 다 읽어버렸다. 그런데 읽고 나니

뭐랄까..너무 허했다. 이야기의 구조나 전개가 무슨 골다공증 마냥 구멍 숭숭 뚫린 엉성한 모양새여서가 아니라, 아주

매력적이고 스피디하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은 지독하고 잔혹한 현실에 대한 지독한 은유였기 때문이다.


뫼비우스 띠의 앞면.

주위에서 너무 쉽고 익숙하게 접하던 캐릭터와 공간들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천만명이 사는 서울에선 딱히 희소할 것도 없는 10대 불량청소년 하나, 눈에 밟히고 발에 채이는 30대 남성노숙자 하나,

고만고만한 대학을 나와 인턴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정규직이 되려는 20대 여성 하나와

매일 군복을 갖춰입고 탑골공원에서 온갖 빨갱이들이 등장하는 시국연설에 열을 올리는 60대 할아버지 하나라는 등장

인물들 말이다. 그리고 마치 길안내하듯 자세하게 그려지는 압구정역 3번 출구 옆 맥도널드와 코엑스 배스킨라빈스와

푸드코트, 혹은 홍제동과 독립문역의 풍경까지.


어쩌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이다. 노숙자에, 구직자에, 완고한-시니컬하게 표현하자면 '시대의 부산물'이랄-

친미보수우익 노인네, 그리고 번쩍거리며 재탄생한 용산역과 한국 자본주의경제의 상징, 코엑스몰과 압구정까지.

코엑스몰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잊지 않고 순례하는 명소 중 하나로 자리잡은 지 오래기도 하다.


그런 공간이 어느 순간 전쟁터로 변한다. 방화용셔터가 전부 내려가 외부로부터 격리되며, 대량의 인질극이 발생하고,

여차하면 당겨진 방아쇠로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 내가 아는 구체적인 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생생한 현실감에 되려 서늘한 날이 서면서 그 공간이 낯설어진다. 어라. 마찬가지다. 지하철 안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한번쯤 마주쳤을 동시대인들이 문득 괴물같은 상황에 떠밀려 '모처럼 심장터져라 뛰는' 지경에 이른다. 낯설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아드레날린이 폭주하는 상황이란 건 얼마나 드문 상황인가.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거나 강렬한
 
열망에 의해 쉼없이 뛰어다니는 상황이라는 건. 혹은 스스로의 괴물같은 내면을 마주하게 되는 건.

"뭐 이런 카니발도 나쁘진 않네요. 사람 죽어나가는 게 좀 끔찍하긴 해도, 서울에서 하루에도 수백명씩 교통사고와 암으로 송장이 되어 죽어나가는데 이깟게 뭐 대수겠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뭐랄까? 이번 정규직 사원 인사 발탁 건 말이에요. 음..."


뫼비우스 띠의 뒷면.

연미복에 양머리를 뒤집어쓴 '최악'의 멤버들. 양털이 복슬복슬한 그 양머리는 단정하지만 과장스런 연미복 차림과

기괴한 매치를 이루며 왠지 이 땅위에 있어서는 안 될, 혹은 있으리라 상상할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로 나타난다.

그들의 '양머리 카니발'이란 게 시작되는 순간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공간. 노숙자들의 서툰 쿠데타가

가십처럼 벌어졌던 용산역에서처럼, 그치만 그보다 훨씬 강력하고 전면적으로 세상이 낯설어진다.


그런 낯선 것들은 어느 순간 온전한 지금 이대로의 모습과 겹쳐져 보이니 또 이상한 노릇이다. 양머리를 뒤집어

쓰고 사방에 총을 난사하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잔혹한 살인행위와 웅얼대는 혁명선언도 묘한 기시감을 수반한다.

그러다 보면 번쩍이는 은빛 총을 움켜쥐고 양머리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게임중독 10대 청소년이 양머리들보다

괴물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에 봉착하기도 하고, 양머리들의 난동이 되려 인간적이랄까, 안쓰럽달까, 그런

동정 혹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게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두 양머리들뿐이야. 목자가 없어. 그래서 불안해지기 시작한 거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어. 그래서 우리는 목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지. 그런데 왠걸. 우리가 목자라고 믿고 싶던 대상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기대를 배반했어. 또 어떤 얼어 죽을 사이비 목자들은 우리를 썩은 오물통 속으로 밀어넣기도 하고 말이야."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열외인종"

그렇게 띠의 앞면과 뒷면, 각기의 흐름을 타고 일상에서 비일상을, 비일상에서 일상을 퍼올리던 흐름은 어느순간

하나로 합쳐진다. 그야말로 뫼비우스 띠처럼. 양머리를 쓴 노숙자는 더이상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낑낑대며 끌어올렸을 거대한 돌덩이가 거친 소리와 함께 산비탈을 달려내려가듯

차라리 호쾌하게 내려닫는 이야기의 결말이라니. 그전까지 가벼운 조증에 걸린 듯 시니컬하면서도 신나게

이야기하던 화자는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밟고는 완전히 시니컬해진다. 혹은 어리둥절해하는 독자를 보며

가학적인 쾌감이라도 느끼듯, 돌연 잔혹하고도 엄연한 현실을 불러낸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제의 일을 다 알고 있다!"라는 외침. 그 외침이 누구의 관심도, 누군가로부터의 반향도 얻지 못하고

헛헛하게 공중을 맴돌다 사라져버리는 기분은 어떨까.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10대, 20대, 30대,

아니 세대를 막론하고 뭔가 스스로의 의지나 행위와는 달리 제알아서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세상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당장 치솟는 어리둥절함과 분연한 의기, 그 뒤를 바싹 좇는 무기력감과 소외감, 억울함과

열패감까지. 이런 결말이라니 잔혹하다. 이런 세상이란 걸 깨닫게 해주는 이런 결말이라서 잔혹하다.

"어떻게 천만 인구가 아웅다웅 모여사는 서울특별시에서 적어도 오십 명 이상 죽어나간 이 대대적인 인질극에 대해 한마디도 없냔 말이다. 별 볼일 없는 연예인 부부의 이혼 소식조차 탑 이슈로 보도하는 이 판국에."


열외인종 잔혹사 - 10점
주원규 지음/한겨레출판




시사IN 제1기 독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할 때, 시사IN에서 처음으로 단행본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였던가, 회의실 밖에 붙어있는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책 표지 가안들을 구경했고, 우리들도 각자

원하는 책 표지 도안에 스티커를 하나씩 붙였었다. 그리고 며칠 후 시사IN에서 책을 배려해주었다.

내가 스티커를 붙였던 바로 그 시안대로 표지가 나왔다. 사실은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제목이 좀 맘에 안 들었지만,

어쨌든 그 책제목을 시각적으로 살려주며 흥미를 돋구는 디자인인 거 같아 만족.


제목이 불만이라 했지만, 사실 요새같은 때 거꾸로 희망을 보자는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이빨이나 들어갈까 싶어서다.

흔히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하고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 하며 위기가 곧 기회라 하지만, 그건 꽤나 장기적인
 
안목을 유지하는 사람이거나 희망섞인 기대와 당위로 '오염'된 예측일 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야 박정희도 무너졌고

전두환, 노태우의 시대도 무너졌지만...케인즈가 시장의 자연회복을 기대하는 시장주의 경제학자들과 싸우면서 했던

말이 딱 어울린다. "장기적으로 (경제야 물론 살아나겠지만) 그때는 이미 우린 모두 죽어 있을 거다."


게다가 아침이슬의 첫대목에서 보이는 "긴밤지새우고.." 류의 인고의 정신, 지금의 고난을 기꺼이 맞닥뜨려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란 건 꼭 사회적 약자, 구조적 약자의 전유물은 아닌 거다. 뒷산에 올라 요새도 즐겨부르고 있을지

모르는 거다. 사실 그와 그의 따까리들 역시 나름 곤란한 상황을 맞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심지어 어제 동아일보는

사실을 통해 그들을 보수주의자가 아닌 '보신주의자'라 일갈했던 바 있다. 하여, 결국 '살 맛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쳐야 할 건, '거꾸로 희망을 보라'라는 무슨 자기계발서나 경영기법에 나올 법한 아포리즘이라기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컨텐츠다. (자칫 그들이 이런 제목만 보고, 그래 위기가 기회다~하며 더 치고 나올까 무섭다.)


역시 시사IN, 책의 내용은 훌륭하다. 나름의 '특수관계'를 의식한 말이 아니라, 정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올초, '혼돈의 시대, 위기 속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벌어진 여섯 차례의 강연회를 엮은 강연록이다.

시사IN 독자위원회 때 늘 나오던 이야기 중 하나는, 좌담회 형태의 기사란 게 영양가 있고 재미있게 쓰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현란하게 짜인 액션영화처럼 잘 짜여진 '합'에 따라 정말 예술적인 수준의 문답이 오고 가야 하는데

그건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과 적잖은 준비를 통해 질문자와 응답자 간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야기의 강약에 대한

감이 서있어야 가능할 거다. 그에 더해 서로의 말하기 스타일에 대한 감까지 있다면 더욱 유려한 대담이 될 테고.


쟁쟁한 강사들에, 쟁쟁한 질문자들이었다. 하나하나 강연 내용 자체가 완결적이었던 건 강사의 온전한 이야기에 더해,

강사가 품고 있는 겉내와 속내의 이야기,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질문자가 틈새를 잘 보완하고 완급을 추스렸기 때문일

거다. 어렵거나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소재들에 대한 내용을 말글로 풀어내어 훨씬 쉽고도 깊은 내용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여섯 건의 강연 내용과 문제의식을 얼추 소개하자면 이렇다.


* '생태적 상상력'을 묻는 이문재 시인, 말하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 

경제불황 속에서 일본의 샐러리맨들이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관찰이 있었다고 한다. 해고나 근무시간 단축을 통해 남아돌게 된 시간에 꽃과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되려 가지게 되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녹색'의 삶이란 뭘까.

*'위기의 심리'를 묻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말하는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심리적 견지에서 대통령의 자격요건을 묻는 김어준다운 질문에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자기성찰능력이라는 명쾌한 대답. 불안한 사람들은 각자의 섬으로 스스로를 유폐하지만, 불안을 터놓고 공유할 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

* '자본의 미래'를 묻는 정태인 경제평론가, 말하는 김수행 교수 ;

정통 맑스주의자인 김수행교수는 역시 경제공황의 필연성을 이야기한다. 특히 개인이 부자가 되는 것과 모든 국민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강조하며,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자고 한다.

* '문화적 상상력'을 묻는 우석훈 경제학박사, 말하는 조한혜정 교수 ;

문화적 자유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틈새에서 '소모성 건전지'를 자처하며 말라죽어간다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다. '소수를 살게 하고 다수를 죽게 내버려두는 체제' 말고 다른 체제를 꿈꾸자고 말한다.

* '대안경제'를 묻는 하승창 시민운동가, 말하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재단, 희망제작소까지 끊임없이 시민들을 자극하려는 박원순. 경제는 경제자체로만 수직상승할 수 없으며 사회적 복지라거나 사회적 평등, 생태의식과 같은 국민들의 의식수준에 비례한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 '역사의 위기'를 묻는 정해구 교수, 말하는 서중석 교수 ;

현대사를 전공한 서중석 교수는 한국 뉴라이트와 일본 극우세력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최근의 '건국절' 논란이 그들의 태생적인 한계랄까 아킬레스건를 반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다만 오바마의 당선과 촛불시위를 한국 민주주의의 역진에 대한 전환 모멘텀으로 삼고 있는 점은...두고 봐야 할 듯.


각기 상당히 다른 부분들을 건드는 주제이면서도, 결국은 '거꾸로, 희망을 찾아보지 않으련' 정도의 메시지로 수렴된다.

골이 깊고 어둠도 짙고, 누구랄 것 없이 위기라며 한숨을 물고 사는 시대라서 그렇다.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조금은 더

낫게, 사람사는 것처럼 살고 싶으니까 고개 끄덕일 수 밖에 없다. 희망을 찾아보자고.


거꾸로, 희망이다 - 10점
김수행 외 지음/시사IN북




유달리 강하지는 않아도 제 식솔에 대한 책임은 아는 사람, 아버지..라는 게 소설의 메시지인 듯 하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지나치게 호들갑스런 묘사도 아니었고, 어떻게든 눈물을 뽑아내겠다는 의욕이 과해보이는

스토리도 아니었다.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특정 상황을 묘사하는 몇몇 표현이 생생하고 신선한 게 눈에 띄긴 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말투는

담백하고 건조하기까지 하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이 소설을 '아버지'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가져가고 싶어서였을까.

대개 아버지의 이미지란 건 과묵하고, '소처럼 묵묵히' 일만 하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그런 거니까.


그래서일 거다. 난 이 소설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되지도 않았으며, 뭔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 라는 커다란 심적 동요가 오지도 않았다. 그저 조그마한 소득이라면, '아버지'들은

이렇게 생각하나 보군, 정도 감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랄까. 감정의 기복을 격하게 탄주하지 않고 덤덤하게 가는 건

좋은데, 그러다 보니까 감정이입도 별로 안 되고 밋밋하고 지루하다. 재미가 없다.


어허, 엄숙하고도 거룩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밋밋하고 지루하다고 해서야 되겠는고, 하고 누군가

꾸지람할지 몰라도, 솔직히 이 소설에서 화자 엄세웅의 병든 형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그나마 남아있던 한 줌의

설득력조차 사라질 뻔 했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을 하던 가족들 먹여살려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불도저처럼

살아가는 아버지, 주변의 평판은 내팽개친 채 편집적으로 소지품정리에 매달린다는 아버지, 죽고 난 후의 일을

추스리려 발신번호만 몇차례씩 남기면서도 살아있을 때의 일은 돌보지 않는 아버지.


굳이 난 그런 아버지에 반댈세, 라고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그런 아버지도 있을 수 있을 테고, 당신의 삶이니까.

또 그게 아버지의 '사랑방식'이라면야 더 할 말 없다. 그치만 난 그들의 '책임'이란 게 단순히 식구들 밥 안 굶기는 걸로

끝난다고 생각지도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것,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아버지'들의 사랑 표현방식이나, 이 책이나, 똑같은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 같다. 표현을 안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려니 '밥먹여 살리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게다가 함께 한 스토리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공감도 어렵다. 차라리 IMF 직후엔가 나왔던, 주절주절대는 신파조의 '아버지'가 나았다고 생각한다.




이건, 요새 봤던 왠만한 영화 중에 최고다.

Wall-E에 이어 픽사가 또다시 잊지 못할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업(UP) 말이다.

메가박스 영화관 한가운데에 전시된 풍선이 주렁주렁 매달린 집을 보았을 때도, 다른 영화를 보기 전 예고편으로

할아버지와 뚱뚱한 꼬맹이가 나왔을 때도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감동적이고 흡인력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애니메이션이 더이상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은 이미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이제 굳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표현

방식을 지적하며 다른 실사 영화와는 다른 기준으로 그 예술성이나 완성도를 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건, 요새 봤던 왠만한 영화 중에 최고다. 이야기를 이끄는 호흡의 완급에 있어서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에

있어서나, 어느 모로 보나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인 것 같다. 감동을 마구 먹어버렸다.

스포일러의 요소를 최대한 피하겠지만, 사실 이건 영화를 직접 봐야 느낄 수 있으니 별로 스포일링되지 않을 듯.


영화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눈물이 한번 고여버렸다.

할아버지가 거대한 풍선다발에 집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오르기까지의 삶, 그러니까 그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초반의 장면들이란 건 뭐랄까, 누군가의 인생에 순식간에 감정이입하면서 문득 일흔세살의 노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준다. 어느순간, 내가 그 '칼'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그의 백발이

이전엔 검은 머리였음을 알고, 그의 완고한 표정과 눈매가 이전에는 훨씬 부드러웠고 누군가에겐 애정이 가득했음을

알고 있다. 비행선을 동경하며 늘 모험을 꿈꾸던 아이가 어른이 되고 홀로 남게 된 그런 상황, 영화는 그제서야

시작이다. 영화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눈물이 한번 고여버렸다. 이런 영화는 본 적이 없다.

"Adventure is up there"?

스토리를 구구절절 이야기할 생각은 없으니 급마무리랄까. 할아버지가 집을 위로 띄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

주위가 온통 재개발에 들어가 고층빌딩이 조그마한 집을 포위한 터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집을 띄우고 남아메리카까지

날아가기로 한다. 비행선을 동경했던 할아버지 내외의 가슴에 새겨져있던 탐험가의 말, "Adventure is up there"는

늘 '칼' 할아버지에게 하늘을 쳐다보게 만들었댔다. 이야기가 끝낼 때쯤에야 바닥에 안착하는 집의 이미지가 보여주듯

모험이란 건 다소 들뜨고 불안정한 상태,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고 부유하는 상태에서 이뤄지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건,

모험을 하려면 약간은 바닥에서 거리를 두고, 원경에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Adventure is ubiquitous!

'유비쿼터스'란 단어가 한때의 트렌드였던 적이 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편재하는' 정도의 뜻을 가진 이 단어가

아마도 이 이야기와, '칼' 할아버지를 이끄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위(up)' 어딘가 기다릴 모험을 찾아 떠난

길이지만 실은 그의 삶 전부가 모험에 다름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특정 장소에 도착해야 비로소 모험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그냥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하며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던 거다. 흔히 여행이란 방식으로
 
낯선 곳에 떨어지고 나서야 하루하루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곤 하듯이 말이다.


'칼' 할아버지는 과거의 일상이 모두 소중한 모험이었음을 깨닫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지금의 순간을 적극적으로

'탐험'하기 시작한다. 그의 집이 비록 과거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과거에 약속한 모험을 이루기 위해 위로 떠오르긴

했지만, 수천개의 풍선은 이제 지금의 순간을 위해, 지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으레 삶의 전성기를 지났다 여겨지는 노인들이 그러듯 어떤 삶의 순간에 멈춰버리지 않고, 다시금 계속해서 살아간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며.



p.s. 다시 생각해보면 애니메이션이어서 유리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이라서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장면 하나하나에 스토리의 흐름에 필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움직임
 
하나, 소품 하나까지 의도에 맞게 정밀하게 세공해낼 수 있는 게 애니메이션이니까. 중간중간 화면 전체에 의미가 꽉 차

있다고 느껴지는 장면들이 더러 있었다. 게다가 어떤 건물의 창문밖을 슥 지날때 풍선을 투과해서 집안 내부에 비쳤던 

알록달록한 조명도 그렇고, 집에 묶여 바람에 나부끼는 색색의 풍선들이 보여주는 음악같은 율동감과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이라니. 물론 이야기 초반에 나오는 압축적이고도 압도적인 삶의 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또 하나 만화라서 되려 유리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한 부분이 있다면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육체적으로

쭈글쭈글하여 '아름답지' 않으며 뭔가 모험이나 역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져 극을 이끄는 주인공으로는 잘

캐스팅되지 않는 그런 캐릭터를 무리없이, 감정이입이 쉽게 구현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애니메이션이 갖는 '미화'의 힘

때문은 아닐까. '칼' 할아버지는 사람이 살면서 자연스레 외면에 쌓게 되는 온갖 흔적들로부터 자유로운 건 사실이니까.

어떤 배우가, 어떤 사람이 '칼' 할아버지를 이만큼 연기해낼 수 있을지 잘 상상이 안 간다. 만화라서 유리한 건 역시

역사성 없는 할아버지 캐릭터랄까. 삶의 구린내가 전혀 풍기지 않는 동화(만화) 속의 할아버지여서, 그의 삶에 더욱

쉽게 감정이입하고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살풋 들었다.







프랑스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 - 가랑비.

프랑스 영화는 굴곡이 없고 밋밋한 거 같아.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것 같다가 어느순간 크레딧이 올라간다구.

'비퍼 선셋'이 '비퍼 선라이즈' 이래 9년만에 만난 두 남녀의 자잘한 수다로 일관하다 어느순간 끝났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물론 그 영화가 싫었단 건 아니지만, 그 영화는 그야말로 "프랑스영화"였다는 얘기지.

그런데 사실 기승전결이 뚜렷치 않고 감정선이 뭔가 펑하고 터져나가는 순간이 없다는 거 자체는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하나의 스타일인 거지 뭐. 천둥이 내려꽂히듯 번쩍 하는 깨달음이나

카타르시스의 순간도 있을 수야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조근조근 젖어들 수도 있는 거니까.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광화문

그녀와 나는 월요병에 걸린 상태였어. 주말 내내 자알 놀았던 나는 사무실 책상 앞이 어설프고 어색해서 종일

엄지손가락 열개로 타자를 쳤고, 토요일밤부터 월요일을 의식하던 그녀는 결국 매우매우 녹초가 된 데다가 둘다

저녁을 먹지 않아 굶주린 상태였거든. 잔뜩 꾸물꾸물한 날씨, 왠지 전철이 광화문에 가까워질수록 몸도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어서, 몇마디 말도 나누다 끊겼던 듯 해. 게다가 광화문에 내려 시네큐브로 몇발짝 걷기도

전에 후두둑 후두둑 내깔겨지는 빗방울이라니. 좀, 좋지 않은 날에 좋지 않은 날씨, 영화도 그닥 기대만발이거나

막 보고 싶었던 영화가 아닌, 뭔지도 모르고 '프랑스영화' 보러 가는 길이었으니. 괜한 스케줄이었나 싶었지.


자그마한 우산들, 그리고 다시 비.

따뜻한 커피부터 한잔. 우중충하고 눅눅한 날이어선지 뜨거운 김이 폴폴 오르는 커피가 땡기는 거야. 한모금

마시고 나니 후끈한 커피기운이 마치 뜨거운 다리미처럼 몸을 뽀송뽀송하게, 게다가 날선 와이셔츠처럼 빳빳히
 
다시 풀먹여주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나니 둘다 기분이 매우 좋아졌었지. 다소 흐릿했던 눈매도 어느새 초롱초롱

총기가 반짝거렸고 심지어는 장난끼까지 어른거릴 정도로.
 

다리를 쭉 펼 수 있던 넓은 영화관, 절반도 채 차지 않았던 듬성대는 인구밀도, 게다가 어디선가 아스라히 들리는

빗방울 소리. 그건 마치, 여름날 매미가 벗어둔 허물같은 소리였어. 아니면 엄청시리 크게 틀어둔 엠피쓰리의

주인없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얇고도 빈약한 소리랄까. 적당히 포근하고 또 적당히 감정을 흔드는 그런.


한숨 죽인 빗소리가 쏴아.....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지. 레인. 

언제나 화창하길 바라지 않아. 이 영화 원제가 뭔지 알아? 렛 잇 레인. 비는 내리거나 말거나. 날씨 핑계를 대며
 
우울해할 수야 있지만, 사실 성철스님 말마따나 비는 비요, 사람은 사람이라구. 그보다 덜 가다듬어진 대사도 하나 

있었지 아마. "자기만 있으면 난 언제나 해가 쨍인걸!" 이렇게 오바스런 대사는 상자에 넣고 청테이프로 둘둘

감아 뻥하니 발로 차버리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니 밖에서 그악스레 내려대는 빗방울 따위 심장까지 스며들어오지

않겠다는 자신감 혹은 여유가 생겼달까. 그런 영화였어.




* 영화 '레인'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그치만 영화의 흐름과 느낌에 매우매우 충실하려 애썼던,

비에 대한 이야기..


* 오늘도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이런 식이다.

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



장면#1.

오랜만에 친구들과 놀러가기로 한 수영장, 이게 얼마만인가.

옛 기억을 더듬어 촌스런 무늬의 수영복과 수영모를 꺼내다 보니 옆에서 뒹굴대며 함께 나오는 수경과 튜브.

일단 수영장에 들고 가기는 했는데..막상 바람을 불어넣고 나니 그 앙증맞은 사이즈란.

예전 기억에는 마냥 거대하기만 했던 초등학교 교정이 어느새 손바닥만한 사이즈로 변했듯,

허리에서 훌라후프처럼 돌아가던 튜브가 허벅지에서 멈춰버렸다.


장면#2.

수영장에서 수영만 하고 노는 사람이 어디있나. 쌩돈내고 바가지쓰는 기분으로 사든 튜브.

근데 모양이..아까 그 '어린이용' 튜브와 다를 게 없다. 나는 어린 아이들보다 최소한 일만이천육백구십삼개의

(튜브와 함께 하는) 영법을 더 상상할 수 있는 어른이란 말이다.


장면#3.

여자친구와 함께 간 수영장.
 
가뜩이나 수영장이니만치(!) 한뼘의 빈틈도 허용치 않고 바싹 붙어있고 싶은 마음일 뿐이건만,

맘과는 달리 자꾸 멀어지는 둘의 거리. 도넛같이 두터운 튜브가 자꾸 쿵쿵 부딪혀서 서로를 밀어낸다는.

에라, 차라리 튜브 두개를 끈으로 묶어버릴까.



그에 대한 해답?!

아직 시험은 못 해봤지만...능히 이런 세가지 상황을 손쉽게 해소할 수 있는 그야말로 '정답'이 아닐까.


 

 
 
 
 
 
어줍잖은 소설론 - 소설은 분재같은 거 아닐까.

소설을 보면 애초 영감처럼 떠올랐을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무리 참신하고 흡인력 강하다고 해도, 그 줄기에서부터

뻗어나가는 가지들이 영 실하지 못하거나 볼품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늘 아쉬웠다. 마치 하나의 잘 다듬어진

분재처럼-그 어거지로 비틀고 구속하는 작업에 대한 반발감은 논외로 하고-개성있지만 기품있게 자리한 줄기와

그와 적절히 균형을 이루며 고른 각도로 뻗어나간 가지들의 비례와 배치에서 기인하는 미감이랄까.  그런 소설이

정말 만나기 힘든 잘 쓴 소설이 아닐까, 뭐 내가 요즘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말이다.


최대한 자연을 흉내낸 '자연스런' 분재처럼, 최대한 사회를 흉내낸 '사회스러운' 소설. 사회스럽단 말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쉽게 말하기 힘들지만 그건 확실하다. 자연을 인간의 손으로 빚는다는 거 자체가 다소 어불성설에

가까운 최고난이도의 작업이듯, 사회를 고작 몇 페이지의 글로 구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사실.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란 신문 사회면에 실릴만하다는, 그 좁은 의미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 세상을 말한다.


세상을 타워 속에 집어넣다.

674층 높이에 인구 50만이 살고 있는 빈스토크(beanstalk), 그 유례없는 초고층 건물 자체가 대외적으로 주권을 승인받은

하나의 국가라는 설정에서 이야기들은 뻗어나간다. 이야..이런 참신한 발상은 대체 어떻게 잡아낸 걸까. 건물이 나라의

영토가 되고, 그 건물의 입주자가 국민, 방문객에 대한 절차가 출입국 통관절차로 바뀌게 된단 얘기다. 건물 경비원들은

이제 외적에 대해 '영토' 빈스토크를 방어하는 '합법적 국가폭력' 군대가 되는 거고, 아마 건물주는 빈스토크의 국왕이

되는 셈인가, 음..일종의 도시국가라고 볼 수도 있겠으니 시장이란 게 맞겠군.


아마 이런 식으로 배명훈의 머릿속에서 '국가'를 '타워'로 대치하는 작업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작가의 상상력이

어떻게 발현되었을지, 어떻게 가지를 뻗고 세세한 디테일을 장악하기 시작했을지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게다가, 초고층 빌딩을 그 영토로 가진 국가라는 건 무척이나 특이하다. 어느 나라 영토가 시루떡처럼 층층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던가 말이다. 그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엄청나게 취약하기도 할 거다. 이미 우리가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먼 옛날 바벨탑이 신의 불같은 분노로 무너져내렸던 것처럼. 


'빈스토크' 절개면의 에피소드들

이 소설 타워의 미덕이랄까, 구성상의 장점은 '연작'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리하게도 배명훈 그가 창조해낸

'빈스토크'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며 재기발랄하고도 함축력짙은 사건들을 묘사하기엔, 긴 호흡의 소설이 아니라 단편

에피소드들이 연이어지는 연작소설의 형태가 맞춤하다는 것을 알았던 게다. 그렇게 나열된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빈스토크라는 고층빌딩 내 구현된 사회의 면면을 날카롭고 재치있게 버혀내어 준다. 어쩔 수 없이 작금의 시대와

견줘보게 되는 건 작가가 작정하고 블랙유머를 날린 걸까, 아니면 내 편향 때문일까.


좀더 자세한 스토리..라기 보다는 스토리 각기에 대한 이미지 스케치가 궁금하다면 열어 보기~*




바벨탑은 이미 지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한국 사회를 되짚어 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생식능력 없는 남자가 되었다가
 
심지어 여자가 되고 말 욕을 부르는 자, "곧 성행위를 할 사람"들이나 "생식기같은 자"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굳이 빈스토크를 지어내어 그 안의 인간군상을 보여준 작가의 의도는, 어쩌면 그 안에서 평행우주처럼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낯설게 하고,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바벨탑'을 어쩔 건지

묻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나라 전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는 동네만큼은 바벨탑이 아니"라고.



타워 - 10점
배명훈 지음/오멜라스(웅진)




3개월, 3회에 걸친 독자위원회 활동을 마쳤다. 시사인의 독자층을 반영하는 듯 6명의 독자위원이 모두 20대였고 그 중

직장인은 내가 유일했다. 빠른 생일 덕에 20대에 꼈으니, 그냥 세대 다양화를 위해 30대로 치고 좀더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겠노라 다짐했는데 막상 돌이켜 보니 '직장인으로서', '30대로서', 꺼냈던 지적이나 요청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직장인' 혹은 '30대(준)'라는 자각이 없는 탓이다. 게다가 직장인의 정체성, 30대의 정체성을 내걸고 짚을 수
 
있는 부분이란 건...뭘까. 재테크 관련 정보를 달라고? 결혼준비를 위한 정보? 직장상사와의 관계 노하우? 진지하게라면

직장에서 제공하는 삶의 질 문제라거나 안정성, 그와 이어지는 비정규직 법안이나 노조탄압 문제..파업이나 투쟁에 대한

적대적인 언론 프레임에 대한 문제제기..근데 이미 그런 것들은 시사인이 민감하게 다루고 있는 편이니, 딱히 더

할말이 없었던 거 같기도 하다.


Dynamic Korea. 워낙 껀수가 많은 나라인 탓에, 게다가 위정자가 귀머거리인 탓에, 해결은 커녕 최소한의 봉합조차

이뤄지지 않고 시간에 쓸려가는 사건들이 부지기수다. 용산에서 피어오른 화마가 잡아먹은 사람이 6명. 언론들이

만들어놓은 '냄비근성'의 사람들은 새로운 자극과 더 강한 충격을 좇아 달리는 중이고, 이제 전대통령의 죽음조차

겪은 사람들이 대체 무엇에 충격받고 분노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다. 


사실 끊임없이 New를 찾아 달려야 하는 언론에게 새로 밝혀야 될 것이 아니라 이제 그걸 토대로 추궁하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책임까지 지우는 건 과하다. 이른바 '기자정신'이 얼마나 비장하고 끈덕진지는 몰라도, 그건 'New'를

찾아내기 위한 거지, 그 뉴스로 촉발될 수 있는 후폭풍까지 끌어내기 위함은 아닐 거다. 그래서 더 답답한지도.

용산참사의 경우 합법/비법/불법을 동원해 면죄부를 쥐어주긴 했지만 '죄'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더이상 New가

아닐만큼 판단이 섰다고 보는데. 노 전대통령의 경우도 누가 사과를 해야하는진 더이상 New가 아니며, 사람들이

그걸 받아내지 못하는데 언론에서 계속 '사과해라사과해라'할 수도 없는 거고. 계속 뉴스를 발굴하는 건 별개지만.


* 용산참사 직후에 썼던 난쏘공 리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촌스러운' 용산참사와의 부끄러운 데자뷰

진보신당이 왜 민노당 뒤에 타고 있는지에 대한 농섞인 질문을 하게 만들었던 표지. 사실 원내 의석수나 지지율 등으로

따지면 당연한 걸 텐데..뭐 그랬다. 그리고 '초식남'에 대한 여성 패널들의 빈정거림만 가득했던 기사에 대한 불만을 잔뜩

털어놨던 자리. 초식남에 대한 빈정거림은 마초와 남성 일반으로 번져갔고, '자아'가 최대 수출품목이라는 네팔에 다녀온

남자는 우스워지고 까페에 앉아 책을 본다거나 와인을 즐기는 남자는 자뻑 나르시즘에 쩔어버린 속물로 취급당했다.

여러번 뜨끔뜨끔, 했던 탓도 있지만 그건 아니다. 더구나 '된장녀'니 '신상녀'니 여성들에 대한 그런 식의 딱지붙임이

불쾌해서 네넘들도 한번 당해봐라, 이런 맘으로 기획된 거라면 더욱 아니다.

그 이전까지는 개성공단을 살리자는 측과 죽이자는 측으로 단순했던 것 같다. 북한에서 개성공단 내 임금과 임대비용등을
 
몇 배로 올려달라, 중국을 다소 상회하는 수준으로 달라고 했더니 바로 살리자는 측이 쪼개졌다. 한국경제를 살리려고

개성공단을 이용하자는 건데 이럴거면 죽이자, 라는 것과 임금을 올려주는 것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라며 살리자는

입장으로 대별되지 않을까 싶다.


개성공단의 가격경쟁력이 천년만년 갈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저임금만을 경쟁력으로 삼아 버틸 생각이었나. 통일되고

나서도 북한의 저임금을 발려먹을 생각이었을 거다. 기업들이 앞장선 남북간 민간교류란 게 그렇게 흘러간다.


*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속내.  '개성공단 춤사건'을 기억하시는지. - 봉동관, 그리고 입경.(4/4)

아빠 어디 가? - 8점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열림원

희생-선택을 해야 한다면 작은 희생보다는 큰 희생이 선호된다 : 왜냐하면 큰 희생에 대해서는 작은 희생에서는 불가능한 자기찬미를 통해서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이년 후 한 웅큼의 불안과 함께 태어난 두번째 아이도 장애아였다.

저자는 "두번째 세상의 종말을 맞았다"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막장드라마가 아무리 창궐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현실감이 떨어지는 데다가 오버스러워서 드라마로 치자면 되려 실격이다. 같은 부모의 두 아이 모두가, 그것도

같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니, 이렇게 억지스럽고 말도 안되는 설정은 '감정이입'도 '개연성'도 너무나 떨어진다.


감정이입도 쉽지 않고 개연성도 떨어지지만, 현실이다.

저자는 "세상으로부터 감동적이고 훌륭한 아버지라는 역할을 배정받았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마치 로또에 두번

연이어 1등 당첨된 만큼이나 희소한 경험을 하고 있는 애비로서 세상의 주목을 끌 수 있으며, 그의 두 아이들을

내세워 스스로를 치장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장애아는 하늘의 선물이야, 라며 초췌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거나, 혹은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불행함의 기운을 풀풀 뿜어내는 식이다.


불행-누가 어떤 사람에게 "그러나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보통 항의할 정도로, 불행에 들어 있는 특별한 명예(마치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천박함, 겸허함, 평범함의 표시인 것처럼)는 대단히 크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애써 음울한 표정만을 고수하지도, 고상하고 이타적인-모범적인-마음가짐만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수많은 군중 속에서 '기적처럼' 자신의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거라

가쁜 호흡의 문장으로 기대해 보기도 하고, 아이들의 장애인 증명서 덕분에 불법주차를 버젓이 할 수 있다며

자랑삼기도 하고, 또 자신 아이들 "똥강아지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지푸라기만 잔뜩 들었단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하며

얼핏 무지하게 씨니컬하고 까칠한 말들만 내뱉는다.


그러면서도 또 아이들이 남들과 '다를' 뿐이라며, 아인슈타인이니 모짜르트가 모두 남들과 심각하게 달랐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스스로에게 주입한다. 밤중에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똑똑해서 아주아주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끝내 "내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못생기고, 제일 멍청하다. 이게 다 내 잘못이다. 제대로

실패한 것이다"라며 펑..."도대체 뭐가 뭔지, 어느 상황에 있는지...알 수가 없다...내 길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내 삶은 막다른 길에서 끝이 난다."라며 폭발하기도 한다.


수정된 누가복음 18장 14절-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아마 하루에도 수백번, 이런 감정의 기복, 인내심의 기복을 경험하지 싶다. 그게 솔직하게 와닿았다.

사실 아무리 불행해보이는 사람도 하루에 몇번쯤은 삐쭉삐쭉 웃게 되고, 또 아무리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듯 보이는 사람들-대표적으로는 부모님들-도 가끔은 심술을 부리거나 지쳐서 시니컬해지기도 하는 거다.


감정선이 그렇게 들쭉날쭉 널뛰기를 하는 것이, 심장의 쿵쾅대는 맥박뜀과 겹쳐 보이며 '인간적'이라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그렇지만 장애아를 둔 아버지의 적나라한 감정선의 맥놀이를 드러낸다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의 삶을 온통 불행일색으로 칠해놓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쉽게

동정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춰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정상아'들이 입주위에 온통 케잌을 묻히며 먹는 모습에는 웃는 사람들이, '장애아'의 같은 모습에는 절대

웃지 않는 게 사람들인 거다. 장애아라 해서 우리를 웃음짓게 하는 특혜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끝내 방송전파를 타지 못했다고 했다.









엄마의 은행 통장 - 8점
캐스린 포브즈 지음, 이혜영 옮김/반디출판사

# 공감하는 입장.

다섯 아이를 키우면서 늘 쪼들렸을 게 틀림없는 살림에도, 아이들을 불안하고 겁먹게 하고 싶지 않은 엄마 마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아이의 마음을 섬세하고도 다정하게 헤아려 손잡아주려는 엄마 마음.

차갑고 쌀쌀맞은 주변 사람들조차 감화시켜 '엄마'를 축으로 한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에 포함시키고야 마는 엄마 마음.

가족들을 늘 먼저 생각하느라 당신을 위한 선물은 커녕 당신의 소중한 것조차 선뜻 포기하는 엄마 마음.


그런 엄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카트린, 그녀의 엄마 이외에 시그리드 이모니 트리나 이모니, 제니 이모니 많은 등장인물에

둘러 쌓여 있지만. 그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한번씩 시큰하게 뒤돌아 보며 되새기게 되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기억 귀퉁이를 건드린다. 문득 그녀의 엄마에게서 우리, 나의 엄마가 겹쳐보일 때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보다 더한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다. 신경숙의 작품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한 특정 '엄마'를 살리는데 좀더 신경을 썼다면, 이 책에선 다소 동화적이고 치밀하지 않은 행간과

여백을 남겨 두어 모두의 '엄마'를 투영시킬 만큼의 여유로움이 보이기 때문일까.



# 시니컬하자면.

근데, '엄마'의 이름은 뭘까. 넬스, 카트린, 크리스틴, 다그마르, 카렌의 엄마이자 무슨무슨 이모들의 막내여동생인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날 때부터 엄마는 아니었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아마 화자인 카트린이 좀더 컸어야 가능했을까.


결국 끝이 좋았으니 모든 게 좋았단 식의 이야기. 온갖 풍랑이 밀어붙였지만 끝내 살아남았으니, 제 발로 섰으니

용케 망가지지 않고 쓰여질 수 있었던 이야기는 아닐까. 다행히도 엄마의 은행통장을 실제 꺼내야 할 일은 없었고,

다행히도 아빠는 회복했으며, 다행히도 크리스틴은 엄마의 뜻을 좇아 고등학교로 돌아가고, 다행히도 카트린의

학교생활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안착했으며, 다행히도 크리스틴은 순산했다.


세상은 아름답다, 모정은 위대하다, 라는 식의 이야기에서 내가 느끼는 시니컬함은 이 정도로만.

그렇게 억지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리지도 않았고 눈물을 짜내겠다는 '불순한 의도'도 크지 않아 보이는 책이다.

잔잔하지만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소품 같은 에피소드들.



이준구 교수의 말에 따르자면 시장근본주의자들이 날뛰는 세상이다.

그들은 정부의 규제를 죄악시하고 시장을 만병통치약이라 여기지만, 사실 이미 경제 활동의 발목을 모질게 잡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그들이 방기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시장 실패, 혹은 시장 왜곡이다. 경제활동 현장에서 예컨대 무역

애로를 발굴하라거나 불편한 규제를 적시해서 해소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해도, 그건 전봇대 몇 개 뽑는 식의 간단한

제거, 지움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정비하고 시장 자체가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려는 노력을 요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게 문제인 세상.


이준구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것에 대해,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다들 그랬었다. 시장주의자도, 시장근본주의자도. 하물며 노무현보다 왼쪽에 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한미FTA를 반대하고 이라크파병을 반대했던 사람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실정에 대해서 대개 한 목소리의

비판을 낼 수 있었다.


물론 약간씩 다른 목소리가 간간히 섞여 나왔다. 이준구 교수는 새만금 사업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건 환경지상주의도,

온정주의도 아니었다. 철저히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효용이 없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좀더 정밀하고, 좀더 보완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갖도록 주문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목소리를

두고 딱히 좌/우의 색깔론이 불러내질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노무현에 대한, 노무현의 정책에 대한 비판 일색의

지형에서 그 비판이 좌로부터 오던 우로부터 오던 따지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다.


이명박이 당선되고, 종부세에 한을 품은 사람이 장관이 되고 종부세는 거덜이 났다. 새만금 따위는 기억 저편에 묻힐

만큼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4대강 유역, 전국토에서 벌이겠다고 움직거리기 시작했고, 교육은 오로지 경쟁의 논리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이준구 교수는 '좌빨'이 되었다.


그는 경제학자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원칙적으로 믿는 시장주의자다. 그런 사람을 일러 좌빨이라 칭하는

사회에서는 두가지 문제가 생긴다. 미쳐 돌아가는 시장탈레반주의자, 혹은 뭐라 이름붙일 '주의-이즘'도 없는

깡패 권력자 집단에 쉽사리 농단되고 희롱당하는 희생자가 수도 없이 나온다. 도심 테러분자라 희롱당한 용산,

논두렁에 1억시계를 버렸다는 식으로 하지도 않은 말들이 첨가되어 희롱당한 노무현, 고공농성 중인, 파업중인,

혹은 스스로 산화한 노동자들까지.


두번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런 공간에선 '시장주의자' 이준구를 비판할 여지조차 협소하다. 왜 그는 한미FTA를

한번 걸어볼만한 도박이라 생각하는가. 왜 그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규제 자체를 모두 피해야 할 것으로 매도하는가.

공익을 위한 규제라면, 좀더 정밀하게 가다듬어진 규제라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이끌 수도 있지 않을까. 단적으로,

유럽의 자동차 시장에 대한 품질 규제는 지금 그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환경까지 보호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어쨌거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의 정국에 대해 특히 이준구 교수의 혜안이 발휘되는 대목.


"주택가격 폭등을 위시한 주택정책 전반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은 물론 (당시 노무현) 정부다.

정부는 일관된 방향으로 정책을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주택시장을

더 큰 혼란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백약이 무효'인 상태를 가져온 결정적인 원인은 정부, 그리고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신뢰의 결여에 있었다.

...그렇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이 현 정부(노무현 정부)가 들어오면서 새로이 나타난 현상은 결코 아니다...정부와

정책에 대한 불신과 관련해 현 정부(노무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크지만, 모든 책임을 현 정부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공평한 일이 아니다."


"정책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가져온 데는 현 정부의 무능을 가장 소리 높여 비판해온 집단에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

...정부가 잘못하는 점이 많더라도, 추진하고 있는 모든 정책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하는 일

모두를 도매금으로 싸잡아 매도한 나머지 거의 '식물정부' 수준으로 몰아간 것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얼마전 주택가격이 미친 듯한 폭등세를 보였을 때 이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름 아닌 야당과 보수 언론이었다.

자신들이 집권하면 종부세를 크게 완화해줄 듯한 제스처를 쓴 야당,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종부세의 흠을 잡아

정부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 보수 언론 역시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게 만든 데 책임의

일단을 갖고 있다."


노무현에 대한 균형잡힌 평가는 최소한 이 정도의 상식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 10점
이준구 지음/푸른숲




저번달 초에 있었던 시사인 2차 독자위원회 리뷰가 최근 시사인 홈페이지(http://www.sisain.co.kr/)에 올랐다.

마침 노무현 특집이 있었고, 촛불집회 1년 특집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노무현을 겨눈 검찰의 칼날이 사정없이 

조여 들어오던 시점이었고, 꽤나 먼 일처럼 여겨지는 그 때에도 뭔가 위태함을 감지했던 듯 하다. 그래도 몇 마디
 
노무현, 혹은 '노무현의 가치'를 변호했었다.





그리고 촛불 1주년 특집 기획..에 대해서도. 무슨 타임캡슐 묻어놓듯이 사람들의 짧막한 단상들을 그러모아놓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심도있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마냥 상찬하고 떠받들 것이 아니라, 한계와

부족한 점들을 냉정하게 짚어내고 그에 따른 정확한 기대와 전망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끝장을 내달라 @ Sisain)

그 외에도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많이 하긴 했는데, 조금씩 잡지에 반영되어 변화를 이끌고 있다는 게 실감난다.

어제는 1기 독자위원 마지막, 세번째 리뷰를 진행하고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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