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명 남녀의 난교, 여성의 자위, 남성의 아크로바틱한-스스로의 입을 사용한-자위, 남자들/여자들의 동성애, 남자들의

쓰리썸, 관음증에 S/M까지. 왠만한 성인영화나 포르노물에서도 한꺼번에 다루기 힘든 소재들이다.

그런 이슈들을 한꺼번에 다룬 '발칙한' 영화, 그래서 한국에 수입될 때 이런저런 말들도 많고 제약도 적잖았던 영화,

숏버스. Short Bus. 숏버스란 '능력있고 결함있는' 자들을 위한 뉴욕의 어느 모임 공간의 이름.


제이미와 제임스를 넘나드는 주인공 남남 커플의 이야기가 중심축이랄 수도 있겠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겨졌던

장면은 스무살 어간의 뽀송뽀송하고 아름다운 청년-그것도 모델출신-이 숏버스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낯익은 할배와

조우하는 장면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 내가 뉴욕시장이었으니까."


희끗희끗 헐벗은 머리에 쭈글쭈글한 얼굴을 가진 그 뉴욕 전 시장 할아버지는, 알콜 기운도 없이, 맨 정신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물론 한쪽 방에선 벌거벗은 젊은 남녀의 난교가 질펀하고, 대마 연기 자욱하게 피어올려지는

공간에선 여지없이 남녀/남남/여여/혹은 '창의적인 방식'의 교합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이긴 하다.) 자네는 무슨

잘못을 하고 여기에 왔는가. 별거 아닌 거였겠지. 고향이란, 자신의 정서적 보금자리라 여겨지는 고향이란, 때론 무지하게

가혹하고 냉엄해질 수 있다네. 그게 뉴욕처럼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오랜 것을 존중할 줄 아는, 세상에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이라 해도 말일세.



잘못이란 건, 자신이 저지른 것일 수도, 혹은 누군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각인시켜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뇌와

클리토리스를 연결해 오르가즘을 만들어낸다는 일종의 마법회로처럼, '나'와 '내가 느끼고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알기
 
힘든 블랙박스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제임스(혹은 제이미)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성적

가혹행위나 매춘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랑을 돌려주지 못한다. 외견상 문제될 게 크게 없는 커플 상담가/섹스 카운셀러

유부녀는 엄격한 동양적 가정교육과 아버지의 도착적이다시피한 감시로 인해 정작 오르가즘을 못느끼는 석녀란다.

새디즘을 만끽하며 가죽옷과 채찍에 탐닉하는 '제니퍼 애니스톤'은 정작 자신의 이름조차 철저히 숨겨온 여리고

상처투성이인 영혼일 뿐이고, 주인공이랄 남남 커플의 일상을 쉼없이 따라가는 스토킹행위로 관음증적 욕망을 해소하는

맞은 편 집의 남자는 사실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는 것조차 숨막혀 하는 순둥이다. 그런 식이다. 뭐 때문에 뭐, 이렇게

단선적으로 말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백퍼센트 자신의 모자름이나 부족함 때문이라 말하기도 힘든 상황,

그래서 블랙박스, 마법의 회로일 게다.


섹스야 제각기 침대 속의 내밀한 이야기이듯, 사실 이 영화에서 각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블랙박스'의 해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자살시도라는 격하고 돌출적인 행위를 통해,

혹은 반편향의 과도하고 도발적인 성적 탐닉을 통해, 혹은 스스로 흘러내리는 껍질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등의 방식이 있겠지만, 해결책이야 각자가 꼬여있는 방식이 다른 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고, 심리적인 문제가 으레 그렇듯

겉으로 드러나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거다. 제각기의 방식으로 제각기 맞닥뜨려야 할 문제.


정작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건 그들이 문제에 직면하는 방식이었다. 뉴욕의 시장이었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중후한 연세의 '아저씨', '아줌마'이든, 남녀노소 미추를 불문하고 각자의 '계급장'과 '사회적 자본'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막혀버리고 뒤틀려버린 감정선을 되찾겠다 나서는 것, 그리고 전 뉴욕시장 할배가 그랬듯 얼마나

나이가 들었고 외부의 평판을 쌓아놨던 간에 스스로의 결핍과 부족함을 자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건 '여태 경험치

못한 오르가즘을 되찾는 모험'일 수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는 무작정한 몸부림(자살까지 감수하는)'일 수도,

'한평생 쌓아올린 경력과 평판보다 스스로의 가치와 취향을 지켜내려는 자존감의 싸움'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럴 수 있을까. 성적 쾌락에 대한 탐닉과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 성적 흥분의 인과를 차갑게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렇게

벌거벗은 상태로 스스로를 응시하고 자신의 감각에 충실한, 결국은 스스로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를 지켜내고
 
있을까. 그 시험대가 대마초 연기 자욱하고 아마도 땀내와 정액냄새 질펀할 그런 공간이란 건 딱히 중요치 않다. 오히려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억눌리고 비틀린 욕망을 마주할 수 있는 근본적인 곳이란 '그럴듯한 포장'도

가능할 거고, 간단하게는 그저 '어디라도 상관없었다'라는 식의 빗겨나감도 가능할 거다. 어디서든, 그게 성당의 고해소가
 
되었건 사랑하는 이의 품속이 되었건 온갖 욕망과 희열이 둥둥 떠다니는 성적 해방구가 되었건,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되는 거다.


아마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의식한 듯한 그 할아버지 캐릭터는, 그런 혼몽하고 '난잡한' 분위기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멍하니 휩쓸리지 않고 되려 중심을 잡은 채 스스로를 건져내고 지켜내러 그곳에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 궤적을

좇는 다른 몇몇 젊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단순히 살색 그림-검은색이던 분홍빛이던 노란색이던-만

노출되었던 다른 수많은 영혼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중심을 잡으러 왔는지 휩쓸리러 왔는지. 그것 역시 실은 지극히도

개인적인 영역,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영역인 게다.


다만, 나이가 몇이 되었건 사회적 지위와 성취가 어찌 되었건, 그들은 뭔가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찾으러

움직일 만큼의,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것저것 다 벗어제낄 만큼의 용기와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꼭 섹스여야 하는지, 동성애나 SM이나 관음증이나 쓰리섬이나 난교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결핍과 결락감을 인정하고 새롭게 (되)찾으려 드는 그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육체의 리드미컬함은 아니었다.


사실 또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도 생각한다. 꽤나 멀리, 그리고 이상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른바

'시초축적'이 시작되고 역사가 시작된 건, 자유로운 성욕을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끄러매면서부터

비롯한 건 아닐까 하고. 사랑할 만큼만 먹고 살면 되었을 세상이, 누군가를 먹여 살리고 안정적이고 반영구적인 잉여를

남기기 위해 사랑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버린 건 일종의 비극일지 모른다고.


총구에 장미꽃을 일일이 꽂아주었던 68혁명의 정신, 히피의 정신이란 게 그런 건 아니었을까. 생명살상을 위한 총알이
 
발사되는 총구가 상징하는 차갑고 흉폭한 남성성에 여리고 섬세한 장미꽃,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 그걸 가능케 하는

세상의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 개인적으로도 직면하기 쉽지 않은 자각의 순간, 다 벗어던지고 알몸의 스스로를

새삼스럽게 쳐다볼 수 있게 해주는 '숏버스'.
 

거긴 머물러 살 곳은 아니지만, 최소한 잊지 않고 가끔씩 들러줘야 하는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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