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참사 2개월이 지났음에도 도무지 지지부진한 채 '망각'되기만을 기다릴 뿐인 듯한 상황을 보다 못한 만평

그리시는 분들이 나섰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보았었다. 그래서 내 다이어리에 남았던 짧막한 메모 한 줄.

"3.27-4.9. 용산gaja전. 이대 1번출구방향 공정무역카페 '티모르'".

메모를 따라 찾아간 '티모르'는 자칫 놓치기 쉬울만큼 조그마한 입구를 따라 오르면 2층에 있는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전시회를 까페에서 어떻게 한다는 걸까 궁금했었는데, 아주 단순했다. 벽면을 따라 빼곡히 만평들을

걸어놓았고, 까페에 오르는 계단 양옆에도 크게 프린트된 만평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리를 잡기 전 그림들을

따라 한바퀴 까페를 돌았다.

이번 만평전은 용산, 그리고 가자지구의 참사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용산 문제는 아무래도 이명박 대통령에게

화살이 귀결되기 마련인지라, 이명박을 직접 때리는 만평이 대다수였다. 입구에서 마주쳤던 이 사진작품은,

뚜비,나나, 뽀 버전 보라돌이 이명박..정도 되려나.

올해 2월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며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비판과 항의에도 불구하고

가자지구를 맹렬히 공격했을 때의 이야기를 담은 만평이다. 당시 이스라엘 집권당에서 코앞에 닥친 총선을 위해,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총풍'을 불어오기 위해 가자지구의 피바람을 일으켰다는 날카로운 지적. 역시..절묘하게

핵심을 짚은 그림은 살짝살짝 빗겨나가며 주절대는 몇백마디 말보다 강력하다.

사진 한 컷, 그림 한 장, 그리고 짧막한 촌철살인의 대사 몇 마디. 까페 안에 전시된 만평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용산참사, 그리고 가자지구의 그칠날 없는 피바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정제되고 압축된 프레임 속에서

거의 유사한 지위의 집단으로 나타난다. 사회에서 배제된, 존재를 부정당하는, 약자. 

그 반대편에 선 것은, 탱크와 총칼과 콘테이너박스로 무장한..스스로 합법화한 폭력 집단.

단지 한 컷짜리 만평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이미 한번쯤 본 기억이 있는 프레시안의, 경향의, 그리고

죄송스럽게도 이름조차 생경한 각종 지역신문의 네컷짜리, 혹은 그보다 긴 컷을 가진 만화들도 있었다.

마침 내가 갔을 때엔 까페 안에 사람들이 없어서 맘편히 돌아다니며 전부 구경할 수 있었다. 아마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차를 마시거나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그 자리 윗켠에 붙은 만평들을 보는 건

아쉽지만 포기해야 했을 거다.

까페 '티모르'는 동티모르에서 공정무역 원칙에 입각해 재배한 커피를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이대 근처에 이런 까페가 있다니, 주말에 혼자 커피 한잔 시키고 앉아서 책 한권 늘어지게 보기 좋은

곳인 듯 하다. 만평들을 보는 것 외에 예기치 못하게 얻은 또 하나의 소득.

원래 만평가분들이 구경온 사람들의 캐리커쳐도 무료로(!) 그려준다고 읽었어서, 카운터에 물어봤더니

그 분들은 어제그제 계시다가 오늘은 안 나오셨다고 한다. 자못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으니 일단 한구석의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자그마한 수첩이 낙서장, 혹은 메모장의 소임을 띄고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요런 게 바로 만평 아닌가. 조금만 더 시의성 있는 이슈를 공간 내에 넣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저 근육과 주름살이 꿈틀대는 이명박의 얼굴을 보라. 둘러멘 삽자루 하며. 어느 센스높으신 분의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혼자 메모장을 첨부터 끝까지 구경하는 내내 킬킬거렸다.

테이블 위에 낙서장과 함께 놓여있던 필통..이랄까. 엉성하게 깍인 몽당연필 세자루가

차곡차곡 메모장에 더해지고 있겠지.

내가 자리잡은 테이블 위에 내려뜨려졌던 귀여운 새모양 장식.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빨강새가

둔탁하니 길지도 않은 날개를 활짝 핀 채 테이블 위를 날고 있었다. 이슈가 이슈이니만치 때론 살벌하고

독하다 싶은 만평들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띌 수 밖에 없던 귀엽고 앙증맞은, 속 편한 빨강새.

이런 식인 게다. 용산을 밟아버린 용역, 견찰, 검찰, 그리고 그 위의 돈다발로 사자머리인양 치장/위장한

개발사업자(x데) 개 네마리가 서로 학학대며 붙어먹고 있는 그림. 더욱 가관인 건 그 개 네마리뒤에 붙은

검은 쥐 한마리가 '사랑했읍니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 그들의 단백질 팽팽하게 곤두선 넓적다리 아래에는

꼬물대다가 이리저리 밟히는 '벌레'들의 꽥꽥대는 소리. 빨강새의 핀트가 나가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정말 잔혹하달까, 그림이..그리고 세상이.

만평들로부터 눈을 돌려 창밖을 내려보니 꽉찬 3월의 햇살이 유유하다. 내 맞은편으로 아까운 줄도 모르고

떨어져내리는 햇볕이 빛과 어둠의 영역을 가르지만, 까페 안에는 온통 용산과 가자지구를 '망각'으로부터

구출해야 한다는 외침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햇살이 좋은, 여느 때와 별다를 바 없는 날에도 사람이 죽고,

기억에서 밀려 또다시 죽곤 하는 거다.

그냥, 가슴이 답답해져서 나왔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이슈들, 이제는 왠만한 건으로는 놀라거나 분노하지도 않을 만큼 굵어져버린 신경줄,

너무나도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세상이라 사람 몇 명 죽어나간 건 고작 한 달짜리 단기기억으로 족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어쩜 계속 이 문제를 잡고 시비거는 사람이 '쪼잔하고 순진해 빠진,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이라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미안한 척이라도, 립서비스라도 해줄 생각않는 그 오만함과 막장스러움은

역시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 3. 27 ~ 4. 9 "용산 GAJA 전", @ 까페 '티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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