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하녀의 탄생.

광고전단을 나눠주던 아주머니는 한 걸음에 한 장씩 바닥에 슬쩍슬쩍 '흘리기' 시작한다. 싸구려 수족관같은

노래방 건물 안의 여자아이들은 마이크를 꼬나쥐고 담배를 꼬나물었고, 막다른 골목길에서 담배를 숨가쁘게

땡겨 피우던 아주머니는 서둘러 손을 털고 가게로 돌아간다. 건물 옥상에서 아래까지의 높이를 가늠하던

여자는 담뱃재나 광고전단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아주머니는 광고전단을 흘렸고, 아이들은 마이크에

소리소리 질렀으며, 담배는 빨갛게 타올랐다.


어지러이 바닥에 엉겨붙은 광고전단들과 함께 그려진 그녀의 빨간 흔적. 아마도 그게 '하녀'의 탄생 배경.


#1. 아더메치+유, 돈과 뻔뻔함으로 지탱되는 세상.

거대하고 견고한 성 안으로 편입한 그녀는 기꺼이 스스로의 의지를 반납하곤 몸과 마음을 내맡긴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 찾아든 그 곳 어딘가에선, 자신 역시 그 성의 성주인 주인 내외와 같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단단하게 반짝이는 대리석 마루바닥을 밟고, 우아하게 입을 헹구듯 고급 와인을 맛보며,

모든 사람들을 한껏 내려보며 살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또 그렇게 살고 싶단 욕망에 충실하고자 한 거다. 이미 전례가

있지 않은가. 국자를 쥔 채 주방을 점령한 조여사 말이다. 주인 내외가 장악하지 못한 공간을 차지한 채 그들을

흉내내는 재미에 흠뻑 빠진 '아더메치+유'의 아주머니. 당장 전도연 그녀의 삶도 주인 내외와 닮아간다.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꺼우며, 치사하다. 그렇게 외치면서도 그 성을 떠받치고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다. 가오잡힌

스탭이 엉켜 볼품없이 비틀거릴지라도, 검사 아들을 만들어낸 '인간승리의 조여사'가 하잘것없는 시정잡배 아줌마로

천대받을지라도.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이라고 뒤에서 욕할지언정 앞으로는 공손히 봉투를 건네받는다.

그래서 유치하다. 어쩌면 그들, 주인 내외를 떠받드는 그들이 더 나쁜지도 모른다. '아더메치'에 더해 유치하기까지.

아더메치유, 란 단어는 그런 식의 호가호위에 어울린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주인 내외에 대한 비난은, 그래서

뻔뻔하다.


#2. 아더메치, 그렇지만 뻔뻔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녀는 차츰 돈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에 익숙해진다. 원했던 원치 않던 그녀는 과거의 너저분한 광고전단같던 그녀의

삶을 떠나버렸다. 새로운 삶의 방식은, 선택이랄 것도 없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그녀가 모시는 주인 내외야말로

약육강식 세상의 정점에 선 사람들, 그런 그들과 같은 저택에 머물며 '보통 사람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그들의 삶을

지탱하며, 돈으로 해결되는 세상 속에 한 배를 타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 세상은 결국 그녀를 배반한다. 그녀가 그 세상을 배반한 게 먼저일지 모른다. 처음엔 마냥 고압적이고

근엄하게만 보이던 대저택과 주인 내외가 조금씩 우스워지고 허술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고처럼 덜컥

생기고 말았던 아이 때문만도 아니고, 남편의 외도로 인간적인 흔들림을 보이고 만 아내의 잘못만도 아니고, 주인집

아이의 맑은 눈망울 때문만도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 그들이 죽어라고 손에 꽉 쥔 가면이 보였을 거고, 결코 그다지

즐겁다고만 할 수는 없는 가면놀이가 보였을 거다. 완벽해 보였던 남자가 하룻밤을 무마하는 화댓값을 건냈을 때처럼.

그래서 배신감을 느끼고 동시에 우습고 역겨워졌을 거다.


#3. 저택, 사람들의 일용할 허영심.

우스운 세상, 그녀는 횃불이 되고 말았다. 뻔뻔하지 못해서 횃불이 되었다. 자신 역시 진흙탕에 뒹굴렀으니 순교자는
 
아니었으되, 최소한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스스로를 되찾는 방법이었다. 그녀 역시 '아더메치'에 더해 '유치함'까지

갖췄던 그 저택의 부속이자, 호가호위의 여우였다. 다만 끝까지 뻔뻔하지 못했다는 게 그녀가 허물어진 이유라면

이유일 거다. 그래서 주인집 아이의 눈망울을 이겨내지 못했고,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모성애적(?)' 본능을

이겨내지 못했고, 돈 몇푼으로 쇼부쳐 보겠다는 알량하고 빤히 보이는 주인집 사람들의 속내를 알고도 모른 척
 
넘겨내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횃불이 되어 그 거대한 저택을 정화한다. 저택, 그 저택은 주인 내외의 욕망을 남김없이

만족시키고 과시하기 위한 거대한 전시장이자 그들을 뒷받침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용할 허영심이었다. '허위의식'

그 자체라고 칭할 수도 있을 만큼, 저택은 단단한 실체감을 가진 채 숭배자들의 동경심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 횃불이 되어 그 허위의식을 불사르고자 한 건지도 모른다.


#4. 악성 종양처럼 건재한 그들의, 우리들의 욕망.

감독은 시니컬하다. 충격적 결말 이후에 더욱 씁쓸한 에필로그를 굳이 덧붙인다. 주인 내외의 이전 저택은 전도연의

세례로 온전한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악성 종양처럼 다른 곳으로 옮겨와 건재하다. 그들의 저택은

돈으로 사면 되고, '조여사'의 대용품 역시 돈으로 사면 되고, 그들에게 필요한 뻔뻔함 역시, 돈으로 사면 되고.

필요하다면 언어 역시 언제든 한국어에서 영어로 바꿀 수 있다.


더욱 나쁜 건 전도연에게 울림을 전했던 맑은 눈망울의 주인집 아이가, 서투르게나마 샴페인 잔을 쥐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점. 전도연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담아 이야기했던 그 아이 역시, 저택으로 '용해'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마음이 철렁했다. 이미 그 아이의 눈매는 텅 비어 있었다. 돈을 의식하고, 뻔뻔함을 장착하고.


결국, 전도연에게 부족했던 건 돈 뿐 아니라 뻔뻔함이었던 걸까. 돈으로 세워진 그들만의 리그, 그 옆에 바싹 붙어

호가호위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스스로에 돌아올 칼날같은 자책을 피하려 허공에 대고 빈주먹을 흔들며

'아도메치' 따위 외쳐보아도 마음 한구석쯤은 찜찜함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다. 같이 '아도메치'해지며 더군다나

'유치'해지고 있음에 대한 자각 증상 따위, 끝내 눈돌리고 모른 척 할 수 있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


#5. 다시금 하녀의 탄생을 되짚다.

하녀는 광고전단지의 운명을 거부하려고 했다. 하룻밤 구역질처럼 토해지고 다음날 아침이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광고전단과 같은 삶이 아니라, 피둥피둥하고 축 늘어진 '프롤레타리아'의 살과 비비적대는 삶이 아니라, 팽팽하고

잘 관리된 '부르주아'의 살을 맞대고 그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누가 뭐랄 수도 없고 딱히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는,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울 욕망이다. 그렇다면,


전도연 그녀의 비극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단지 그녀가 단단치 못하여, 뻔뻔치 못하여 스스로 몸을 던진

것 뿐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