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일요일 오후, 육천원짜리 전시를 보았으면 사진찍는 솜씨가 조금이라도 나아져야 하지 않겠나 싶은데.

확실히 겨울이었다. 들어갈 땐 흐릴 지언정 사방이 환했는데, 몇시간 지나지 않아 금세 어둠이 짙게 나렸다.
 
어둠 속, 문득문득 도심의 야만스런 불빛과 소음이 정적을 깨뜨리는 가운데 둥실둥실 떠오른 덕수궁 내 중화전.

배병우 작가는 어부였던 아버지를 닮아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하루의 농사를 준비했다고 했다. 그가 찍은 사진

중 태반은 해뜨기 직전, 실내는 묘한 공기에 감싸이고 바깥은 몽환적인 보랏빛이나 초콜렛빛 어둠이 출렁이는

그런 시간에 얻어졌다고 했다. 뭐, 사진이 쉽게 찍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상당부분 '우연'이란

요소가 짙게 작용하는지도. 일단 빛이라는 것부터가 그러니까 말이다.

뭐 그런 노력에 비견되랴만은, 쉼없이 눌렀던 셔터, 그렇게 남았던 몇개의 흔적 중 그래도 조금은 봐줄만

하다 싶은 사진들. 진눈깨비처럼 펄럭이며 내리는 빗물 탓이기도 했지만, 한동안 덕수궁미술관 입구 처마 안에

우두커니 선 채 셔터만 눌렀다.

미술관에서 몇 걸음 내딛다가 뒤로 돌아 한 방, 날려줬다. 이녀석 깜짝을 놀랬을 거다. 아닌게 아니라, 하얗게
 
질려버렸다. 스크림의 그 유령 마스크가 떠오를만큼.

확실히, 몸이 움직이니 구도가 바뀐다. 부지런해야 하는구나. 그러고 보면 그동안 내가 찍었던 사진은, 무쟈게

실용적이었던 것 같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눈여겨본 것, 그런 것들을 기억에 남기기 위한, 일종의 USB였다.

기억의 외장하드. 딱히 미감이나 예술적인 측면을 고려했던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솔직한 고백. 아..사진 좀

잘 찍고 싶다. 카메라도 질렀는데 제길.

조금 걷는데 하얗게 질린 덕수궁미술관 벽면에 얼룩이 졌다. 무슨 백한마리 달마시안도 아니고, 괴기스럽게

부풀고 꺽여든 나뭇잎들의 그림자가 벽면에 대고 간질간질, 간지르듯 간만 보고 있었다.

아까 밝을 때만 해도 카메라 수십대가 쏠렸던 광명문, 지금은 나와 일대일, 독대하는 중이다. 역시 빛이 부족한

건가. 커다란 구리 종색깔같은 처마 위 하늘 색깔이 제일 맘에 드는 구석이다.

돌아나가는 길, 느지막히 아침 겸 점심만 먹고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참이었다. 배가 고파서 몸은

뭔가 먹을 것이 있으리라 여겨지는 앞으로만 계속 내달리고 싶어하는데, 손이랑 눈이 브레이크를 잡는다.

참..별 것도 아닌 사진 찍겠답시고 계속 멈춰서서 이리저리 배회하는 모습이라니.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사실 그렇다. 낮에 이미 사람들이 우르르 훑고 다닌 길에 닳을 대로 닳아버렸을 구도일 게다. 꼭 내

카메라로 내가 다시 찍어서 내가 다시 간직하고 다시 이렇게 블로그에 올려야 할 이유는 뭘까. 뭐, 모르겠지만

일단은 재미있으니까, 정도의 답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데세랄 지른지 아직 한 달도 안 된 터에 이런 회의와

시니컬한 구렁텅이 따위 빠져들 시간이나 여유는 없는 게다.)

알고 보면 꽤나 넓은 덕수궁과 외부를 연결하는 대한문, 혹은 입장료 내/받는 곳. 특정 포인트를 향해 정연하게

벌어진 등불들과 달리 외부 세상의 불빛은 사방을 향한 사방으로부터의 불빛이다. 잊을만하면 툭툭 떨어지는

산만한 물방울들만큼이나 무질서하고 정신없는 세상이다.

안녕 대한문. 그러고 보면 덕수궁은 꽤나 자주 들르는 곳이다. 일년에 두세번은 가는 듯. 창덕궁 후원-흔히

비원이라 불리는 곳이 여기라던가-을 한번 가봐야겠다고 맘은 먹는데, 아직 한번도 못 가봤다. 배병우 작가가

'생산'해낸 작품 중 소나무를 소재로 한 것은 SNM, 비원을 소재로 한 것은 BWN이란 약자로 시작하는 작품

번호를 가졌다던가.



* 이제부터는 오로지 카메라 자랑을 위한 사진들.

사진으로 일단 찍은 후에 한번 하얗게 불살라 버린듯한 느낌.

사진이 뻘겋게 타버렸다. 그러면서도 묘한 깊이가 느껴지는.

제대로 오래된 사진 느낌..혹은 일반적으로 느끼는 오래된 사진의 분위기란 게 이런 거 아닐까. 누렇게 변색된.

찍고 나서는 아궁이불이 들어오는 구들장 같은 데 기름먹은 장판 속에 한 이십년쯤 묵혀둔 듯한 사진. 

비슷하게 구들장에서 타버린 느낌이긴 한데, 조금 다르다. 타고 나서는, 차가운 가을바람에 한 삼년쯤 식혀진.

뭐, 이문세의 '조조영화'던가, 그런 노래가 떠오른 이유는, 아마 저 오른쪽 창구가 영화티켓 예매소, 그리고

입구는 극장 입구스러워서일 게다. (대체 어디가? 라고 물어도 별로 대답할 말은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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