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히면 죽는다. 내 군생활을 시작하면서의 다짐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학부에 남아있기 쪽팔리다 싶어 사회에 쭈뼛대며 나섰을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먹히면 죽는다. 이전에 비해 업그레이드된 점은, 이제는 그 다소 부담스런 비장감을 덜어낼만큼의

여유로움도 챙기고 싶었다는 정도.


그도 그랬나 보다. 허지웅.

허지웅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가 프리미어 기자라는 것도, 종종 시사지에서 마주쳤던 좋은 글들에 달린

바이라인에 그의 이름 석자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나와 거의 비슷한 동년배라는 것은

더더욱.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어리다며, 생리적 나이와 관계없이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이 '울었다'는 고백을 겁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먹히면 죽는다'는 결기에 더해 가오를

좇는 센스까지 갖추어 삶을 살아내고 있다. 꼰대와 야메 마초가 되길 거부하며, 한걸음한걸음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다. 분노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며, 울기도 잘 울고, 난잡하다는 평에 안도한다.

'대한민국표류기'에 활자화된 그는 아직, 여전히 말랑말랑한 사람인 것 같다.


사람들은 조금씩 딱딱해진다. 대학에 들어와 기고만장해지면서, 이삼년 대학다니고는 '캠퍼스의 낭만'을

실컷 즐겼다며 취직 준비를 하면서, 군대를 다녀와선 세상의 부조리함에 만성화되면서,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특히 요새 이른바 88만원 세대들은 더더욱 어쩔 수 없이-옹이구멍만한 눈으로 밥벌이구하기에

매달리면서, 사회에 나와선 나름의 방식으로 익힌 처세술과 가면 뒤에 숨어서. 언제 딱딱해지기로

결정했느냐, 시간의 문제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앞서거니 뒷서거니 어른을 자처하며

에스컬레이터 위의 삶을 취한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참 쉽지 않아졌다고 생각했다.

회사원을 만나 연애하는 것이 학교 때와는 또 다르다는 이야기야 익히 들었지만 비단 연애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 역시도 그런 면이 없잖겠지만,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딱딱해진다. 이미 타인에 대한 신뢰나

기대감에 적잖이 상처입어서일 수도 있고,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다. 얄포름해지고, 둔감해지고, 물기가

말라버린 느낌.


그런데 그런 생각은 기실, 대학 들어왔을 때도 생각했던 거다. 대학 들어왔을 때는 대학 친구들과

고등학교 친구들을 비교하며, 그 이전에는 고딩/중딩 친구들과 불알 친구들을 비교하며. 사회

친구들과 대학 친구들을 비교한 후에는 또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게 될까. 그러고 보면, 딱딱해졌다고

생각했던 그들 중에도 술 한잔 하며, 커피 한잔 하며 수다를 떨다보면 의외로 여전히 말랑말랑한 구석이

온존함에 놀랍고도 반가웠던 적이 있다. 말랑말랑한 사람들과, 딱딱해져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속은

여전히 말랑대는 사람들과, 정말로 딱딱해져 버린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와중이다.

아직 말랑말랑하다고, 적어도 말캉말캉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의 (영화평론을 포함한)

에세이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내 속의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듯 했다. 그런 말랑말랑함이

필연적으로 동반할 (꼰대 세계의 눈으로 본, 가치평가가 담긴) '불완전함'과 '불안정함', 그런

'질풍노도'의 표류기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계속 말랑대며 살고 싶은

내가 그랬듯.


ps. 개인적으로 정말 한번 만나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첨엔 비슷한 나이의 그가 이런 책을 냈다는

사실에 살짝 질투도 느끼고 괜히 치기어린 구석은 없나, 꼬투리 잡을 거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조금씩 그의 글들을 읽으며 99% 싱크로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만난다면 특히나, 흡사 하나의

세계였던 그녀가 허물어지면서 그가 느꼈던 결락감을 지금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도 묻고 싶고.


대한민국 표류기 - 10점
허지웅 지음/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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