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3가의 허름한 낙원상가 4층에는 '서울아트시네마'가 있다는데, 아직 실제로 가본 적은 없었다.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나면 늘 그렇듯, 잔뜩 피곤하고 뭔가에 절어버린 듯한 느낌으로..한동안 고심했다.
시사회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피곤하기도 하고, 혼자 영화를 보고 전시회를 보는 게 요샌 별로 땡기지도 않고,
금요일 저녁에 사람 복작대는 종로통에서 헤매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시사회 티켓교부처에서 이름을 말하고 티켓 두 장을 받았다. 한 장은 됐다고 돌려줄까 하다가, 그냥 받았다.
담배를 피는 커플들 틈에 끼어 낙원상가 옥상에서 종로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약간 헤매며 찾은 이곳은, 말하자면
낙원상가 건물 옥상에 위치한 모양새의 영화관인 거다. 카메라를 들고 왔어도 뭔가 신기한 것들이 잡혔겠다고
살짝 아쉬워했지만, 어차피 영화시간에 딱 맞춰 근근히 도착했으니 할애할 시간도 얼마 없었다. 입장 전에 티켓
한 장은 아예 가방에 밀어넣고, 나머지 한 장만 손에 쥔 채 조용히 통과했다.
처음 이 영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다, 갯벌 어쩌구 하길래 난 왠지 당연히 '태안 앞바다'겠거니 했었다.
그렇지만 아니었다. 영화는 근 15년간 끌어왔던 '새만금 간척사업' 에 대한 이야기였다. 망가지는 갯벌을 보여주며
자연 다큐처럼 시작해서는, 간척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농성이나 천막투쟁을 보여주고, 그간 간척 사업을 둘러싼
간략한 역사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간척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분열'되고 '패배'했는지,
또한 그러면서도 바다를 터전삼아 살아가는 여성어민들이 얼마나 강인하면서 인간적인지를 보여준다.
대책위의 지지부진한 행동, 불분명한 입장표명, 그리고 간척사업으로 인한 피해가 고르지 않게 돌아가는
선주들과 非선주들 간의 미묘한 입장차. 최종적으로 33킬로에 달하는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기 전까지 몇번이나
예고되었던 대규모 선상시위의 뉴스는 나도 들은 기억이 있지만, 그렇게 허탈하고 무기력하게 대응했던 건지는
몰랐다. 엉엉 울면서 하소연을 하는 젊은 아저씨의 붉은 눈시울이 가슴에 와 닿았고 물막이 공사현장을 점거하곤
밤늦도록 핏대높여 자신들끼리 방향을 두고 싸우던 그들의 절실하고 필사적인 모습이 먹먹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복잡하고 미묘한 그림을 보여주는 다큐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뭐니뭐니해도 어머니들이 앞장섰다. 어느 분은 감성적인 소녀처럼 바닷가 생명들이 죽어나간다며 한숨지었고,
또 어느 분은 자식넘이 들고 온 돈내라는 가정통신문이 겁난다며 분노했고, 그렇게 제각기의 포인트는 달랐지만
결론은 같았다. 해수유통. 물막이댐을 터서 바다를 되살려내라. 그렇게 청와대 앞에서 일인시위도 하고, 농림부로
찾아가 책임자와의 면담도 요구하고, 해상 시위에도 앞장서고. 그리고 결국 한 분은 갯벌을 베고 돌아가셨다.
개인적으로는 농림부에 찾아갔던 그분들이 대체 누구를 보고 소리치고 호통을 쳐야 할지 모른 채, 사방에 대고
소리지르는 장면이 너무 와닿았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누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가. 그(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길래 화면 귀퉁이에도 나오지 않는가. 그분들의 흥분한 눈초리와 새된, 그러다가 쉬어버린
목소리는 농림부나 청와대, 혹은 국가기관 그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한 채 허탈하게도 증발해버린다.
대법원에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기각된 어느 날, 어민 한분이 초딩 4년짜리 딸내미에게 술김
훅훅 뻗치며 허탈하게 말한다. "넌 나중에 공부 잘해도 판사 하지 말어, 그럼 아빤 너 안 봐." "차라리 시인되라.
시인이나 철학자. 그래서 이 사회 썩어빠진 거 전부 비판해 버려." ..그렇게 갯벌은 하얗게 소금기가 낀 벌판이
되어간다. "물막이한 게 뭐라고 태극기를 흔들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도 아녀." 그러게요, 그러게 말입니다.
터전을 상실한 그분들이 다른 지역의 바다로 옮기면 되지 않나..하고 살짝 생각했지만, 내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
한 분이 말씀하신다. 마치 농부가 대지에 민감하듯, 어부는 바다에 민감한가 보다. 다른 지역은 영 다른 환경에
다른 기술과 도구가 필요한, 말하자면 다른 기술을 요하는 다른 '직종'인 셈이랄까. 당신들의 직장을 한순간
상실해버린 채 제대로 된 보상조차 못 받고 등떠밀리는 상황..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랐었다
하긴, 나는 바다, 갯벌, 생태라고 하면 기껏 '태안' 밖에 생각해 내지 못하는 시크한 도시 남성인데다가, 물막이
공사가 끝났을 뿐 여전히 그곳에는 거대한 바다(랄까 호수랄까)가 버티고 있음을 상상도 못했던 상상력 빈곤한
녀석인 거다. 그 곳을 매립하기 위해서는 인근 반경 60킬로 내의 야산을 모두 깨야 한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어느
주민 한 분이 말했던 것처럼 (미국 뉴올리언주를 덮쳤던 카트리나 같은) 재해가 닥쳐서 차라리 저 물막이댐을
쓸어가 버리면 어떨까..
* 2009 희망다큐프로젝트는 1월 '워낭소리'를 시작으로, 2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3월 '할매꽃',
4월 '살기 위하여', 그리고 5월 '길', 6월 '3xFTM'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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