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는 번번이 화가 났다.
갱단이라는 것들은 '가오'도 잡을 줄 모르고 돈만 밝히며, 경찰은 화끈하게 자신과 놀아주기는 커녕 빌빌거리다가
뒤로 돈이나 찔러주면 좋다고 실실거린다. 범죄자라고 감옥에 처박힌 것들도 조금만 겁주면 오줌이나 질질 싸거나
눈물부터 흘리는 심약한 것들이고, 그런 범죄자와 자신은 다르다며 고고한 척 하는 '시민'들 역시 애써 자신들
마음 속에 있는 악마적 요소들을 외면하고 있을 뿐 다를 게 없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선하고 나무랄데
없는 '문명화된' 사람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이 조커 그에겐 역겹기까지 하다. 착한 척, 질서잡힌 척, 교화된 척이나
하지 말던가.
그는 생각한다. 나는 억울하다.
인간은 누구나 악한 거다. 네놈들은 분칠한 내모습이 무섭다고 손가락질하지만, 네놈들이 위선과 허영으로
자신의 악한 모습에 덕지덕지 분칠해 놓은 것은 더더욱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선한 척, 고상한 척, 고결한 척
하며 애써 겁먹지 않은 척 자신에게 대적하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니들 마음속의 악마를 보란 말이다. 우린
다르지 않아. 왜 나를 별종(Freak)이라고 몰아가지? 왜 나만 나쁜 놈이라 비난하지? 니들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은 원래 혼돈 그 자체이고, 악과 선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는데, 왜 날 거세하려 들지?
그렇다면 좋다.
니들이 스스로의 가면을 벗도록 해주지. 난 돈 따위 관심없어. 다만 당신들이 스스로 각성하길 바랄 뿐이야.
조커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심판을 내린다. 기독교적인 의미의 '심판의 날'에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계량하고
본모습을 대면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린 속내와 직면하고, 그걸 따르도록 강제, 혹은
유인코자 한다. 덴트 검사야말로 배트맨이 '백기사'이자 영웅으로 세워내려할 만큼 강하고 훌륭한 '가면'을
갖고 있었지만, 이런 그 역시 조커에 의해 '투페이스'로서의 광기에 먹히고 만다.
여기서 꼭 항변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건, 그 광기 자체를 내가 불러낸 건 아니란 사실이야. 검사 양반 그가 그토록 크고 강한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반대로 그가 그만큼 크고 강한 악의를 감추고 있었단 이야기도 되지. 그는 자신의 속에 애초부터 존재하던
'광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뿐야, 약간 내가 돕기는 했지만 말이지. 그가 왜 받아들였냐고? 그 이름모를 여자의
죽음이 마치 방아쇠처럼 그의 가면을 깨뜨리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알 바 아냐. 어쨌든 난 또다시 내
주장을 강화하는 커다란 샘플을 얻었지. 세상의 것들은 온통 타락했고, 악하며, 세상의 본질은 카오스 그 자체라는.
그런데 영 맘에 안드는 자식이 있다. 배트맨.
내가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추의 한쪽 끝, 극단이라면 또다른 한쪽 끝에 서서 균형을 잡고 있는 녀석. 그런데 그는
나를 없애려고만 드니 골치가 아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나를 죽일 용기도 없는 '찌질이'다. 그러니 더
배알이 꼴리는지도 모르지. 내가 그를 희롱하고 놀리듯이 그도 나와 놀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유머감각도 없고 '균형'이란 걸 생각지도 못하는 꽉 막힌 놈이다. 몇번이고 말하지만, Why, so, serious?
난 몇번이고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시험해 보았는데 이젠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나처럼 별종(Freak)이다.
그의 것은 '가면'이 아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박쥐가면을 쓴 찌질이와 허연 분칠을 한 입째진 조커만이
실은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그가 적당히 섞인 채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조심스런 미소와 겸손한 태도를 가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거다. 사람들이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결국 배트맨 너와 조커 나는 사이좋게 정신병원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거다. 너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리지 않은 동전 앞면'이 나오는 녀석과, 나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린 앞면'이
나오는 존재는 '사람처럼' 살 수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를 다수결원칙으로 정의한다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이, 배트맨 너와 나는 이미 '사람'이란 종에 속하지 않는지도 모르니까.
아마도 그래서 우린 살아남았다.
서로 몇번씩이나 죽일 수도 있었지만, 지겹고 이가 갈리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일 지경이겠지만, 니가 없이는 내가
무너지고, 내가 없이는 니가 무너지겠지. You, complete, me. 다음엔 좀더 멋지게 해보자구. 넌 여전히 사람들이
본래 선하고 질서를 선호한다고 믿고 있겠지만, 내가 그 믿음을 산산이 깨뜨려 보여주지. 아직까지 우리의 싸움은
오십 대 오십. 잠깐 어느쪽으로 추가 기운 듯 보일 수야 있겠지만, 아마 앞으로의 싸움도 오십 대 오십.
P.S. 그렇지만 말야 친구, 결과를 안다고 재미없어지는 건 아냐. 난 당신과 춤추듯 스텝을 밟을 뿐야.
누가 리드하던, 한발 앞으로 딛었다가 한발 뒤로 뺐다가, 날렵하게 턴을 하기도 하고 말이지. 멋지지 않아?
끝도 결말도 없는 선과 악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지. 우리는 그 속에서 살고 그 속에서 가는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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