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전 가급적이면 그 영화에 대한 정보를 피하려는 성향이 언젠가부터 생겨버렸다.

위드블로그에서 있었던 이 영화에 대한 시사회 신청을 하면서도, 여주인공 이름이 (아기공룡 둘리의 그)

'둘리'라니 왠지 더 보고 싶다느니, 희미한 기억 속 친구의 멘트를 팔아가며 신청은 했지만, 사실 시놉시스나

평가같은 것들에 대해선 일부러 눈을 감고 신청했던 거다.


광화문 인근에 이런 영화관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다. 음식물 반입이 일체 금지된 데다가 전후좌우로 넓찍한

좌석공간, 그리고 세련된 마감재로 신경쓴 듯한 영화관 내부의 은근히 호기로운 분위기. 시네큐브에 도착해서야

내가 보게 될 영화의 제목을 확실히 각인했다. 그전까지는 블랙 스노우였는지 블랙 아이스였는지 계속 헷갈렸다.




알고 보니 여주인공은 둘리가 아니라 툴리였고, 영화는 그리스 비극과 같은 느낌을 풍겼다.

이렇게 발랄하게(!) 시작했던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심영섭 평론가님과 함께 했던 '씨네토크' 자리에서 누군가

지적했던 것처럼 '놀랍게도' 이 둘은 부부다. 주름살이 패이기 시작하는 마흔살 나이의 아내지만, 그 둘은

뜨겁고도 농염한 사랑을 나눈다. 나도 저랬으면 좋겠다, 고 잠시 생각할 만큼 행복해 보인다.


심영섭님은 일종의 나비효과라고 했지만, 이걸 나비효과라고 부를 수 있을지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행복하던

어느 한순간 기타케이스에서 갑작스레 떨어진 다섯개 들이 콘돔 한 통, 그 안에 내용물이 세개밖에 없었다는

데서 최초의 충격이 가해진다. 신뢰를 잃은 남편, 그렇게 살얼음판 위에 콱 내리찍힌 후에는 남편의 자잘한

거짓말을 타고 균열이 사방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녀, 사라가 의도치않게 '남편의 애인', 툴리를 만나면서 찌지지직, 손쓸 수 없는 속도로 번지기

시작한다. '남이 하면 불륜, 자신이 하면 멜로'라는 손쉬운 한마디는 모종의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남이 하는 

'불륜'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것도 역시 사랑이구나..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 모든 사람이 자신의

내부에서 들끓었던 감정의 흐름들, 그 복잡하고 미묘한 것들을 알아주길 바라는 건 무리라 해도 때로는

그런 것들을 설명하지 않고서도 이해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나 보다. 사라가 툴리에게 그랬다.

그게 심지어는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라 할 지라도. 남편을 빼앗긴 상처받은 사라는 남자를 빼앗고

불안해하는 툴리를 어떻게 죽이면 좋을지 수백번씩이나 생각하는 동시에, 가면 쓴 사라, 크리스타는 툴리와

은밀한 이야기를 공유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제 사라는 신뢰를 저버린 남편을

미워하고, 툴리에게도 불성실한 남편을 미워하며, 그럼에도 사랑하고, 깨어진 자신의 사랑을 슬퍼하고,

툴리를 정말 좋아하며, 남편을 뺏은 툴리를 증오하고, 툴리의 젊음을 시기하며, 스스로의 위선과 가식을

혐오하고, 툴리의 행운을 빈다. 이 모든 혼란스런 감정은 그대로 '진심'이다.


그런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사라와 툴리의 내면에서 들끓으며 더더욱 복잡하고 모순적인 그림을 보이면서도,

'남편의 외도를 알아챈 아내 vs 아내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통속적인 구도에서 비롯한 갈등은 또 자체의

동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속내야 어떻든 그녀들 둘은 서로 맞부딪혀야 하는 사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결론으로 치닫게 되는 인간의 운명을 그린 그리스 비극들처럼, 그 둘은 예정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균열이 극대화되는 순간, 핀란드의 백야는 끝나고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벗어난 자동차는 나무둥치에

들이박는다.


미워하는 사람을, 신뢰를 잃은 사람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결국 이 영화는 신뢰와 사랑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남편과 아내 간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보다 초점을 맞추는 건 오히려 사라와 툴리의 문제다. 어느 순간 (조금 많이 꼬아진) '델마와 루이스'가

왠지 연상되기도 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비극을 떠올리게 했지만, 그래도 그 둘은 비극적 결말로 끝나지 않을

진부하지 않은 희망의 메시지를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었다.


스토리를 요약하려 해도 참 쉽지 않다. 영화가 인물들의 행동이 아닌 감정과 심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덕분에 딱 떨어지는 느낌은 전혀 없이 혼란스럽고 지저분한 느낌마저 들기도 하고, 구불구불한 스토리 전개도

뭔가 폭발적인 한방을 바랬던 관객에게라면 어지러울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원래 사람 맘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 말로 하나하나 설명해내기엔 참 구구하고 재미없고 설득력도 없기 십상일 텐데, 이렇게 흡인력있고

짜임새있게 풀어낸 감독이 대단하다 싶다.


영화를 다보고 생각한다.

블랙아이스란, 당신과 나의 둘도 없이 친밀한 관계에마저 끼어있는 자그마한 살얼음판. 잠시 방심한 한순간이면

관계의 통제력을 잃게 만들어 한껏 감정을 휘젓다가 어디론가 꼬라박히게 만드는. 안전운전..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기엔, 저 멀리서 비웃고 있는 '운명'이란 녀석의 썩소가 맘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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