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서로의 곁을 얼마만큼 내주고,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는 걸까. '사랑'이란 말이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순간이란, 얼마나 짧고도 덧없는 것일까.


영화에서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는 이 조형물..연인들은, 아늑한 공간을 확보한 저 높이만큼 계단을

올라가서 편안하고도 행복한 포즈를 취한다. 시간이 다소 흐르면, 남자는 당연한 듯 여자에게 반말을 하고,

여자와 남자는 어딘가의 찻집에서 말다툼도 한다. 위로 오를수록 가팔라지고 위태로와지는 계단.
 
오를수록 폭이 좁아지며 제 한몸 운신하기도 벅찬 계단은, 게다가 받침대마저 없다. 그 계단은 어디로도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여자는 흔들리는 계단 어딘가쯤에서 리셋을 원했고, 성형을 해서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해보지만..결국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나락.


'관계'에 '시간'이 더해지면 예외없는 나락이다. 껍데기를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몇가지 취향과 특징을

좇아 사람을 공들여 찾는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다. 결국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나와 당신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김기덕의 답, 혹은 내가 읽은 김기덕의 답은..항상 그렇듯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변하는 것이다.

시간의 표백력은 그토록 강력한 것이고, 저 계단을 함께 설레며 올랐던 '관계'들은 어느순간 다 깨어져나간다.

행복했던 기억은 사진으로만 남을 뿐, 그 사진마저 바꿔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이래도 세상을 살아볼테냐, 이래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보겠단 거냐, 라고 그는 몰아세우는 거다. 사람이란

이토록 불완전하고 아름답지 못한 존재다라고.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초인(ubermensch)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사정없이 몰아부친 김기덕의 공격을 모두

긍정해 낼 수 있다면, 한자 남짓한 '재겨딛을' 공간조차 보이지 않는 그 코너에서 웃을 수 있다면. 하지만 영화는

수미상관, 다시 변주된다. A에서 A'로.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삶을 이어나가려면

적당한 타협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고. 내가 생각해낸 타협점은 이거다. "Art Of Love." 우리가 함께 딛고 오르기

시작한 이 계단이 우리를 아무데로도 데려다주지 못하는 건 변함이 없다 하더라도, 그 계단 한칸, 한칸을 지그시

즈려밟으며 가능한 오래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파국의 지연..이랄 수도. 통속적이게도, 오래 관계를 유지하려면

역시나 서로의 노력이 절실하단 거다.



더하기. 혈연(이른바 귀속지위 등)으로 묶인 관계를 제한다면,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엮어내는 관계란 얼마나

귀한 걸까..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랑한다는 거. 영화 도중, 살짝 쌩뚱맞아보이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많이 사랑하시나봐요"란 대사에서, 그래서 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어쩌면 연애지상주의자인가..라고 생각을 해보기도.ㅋ


더하기2. 김기덕..내가 이 감독에 환장하는 이유는, 그의 감성과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는 '계급, 계층, 젠더'같은

틀에 얽혀있지 않으며, '긍지높은 인간'이길 포기하되 관계와 소통의 가능성을 물고 늘어지도록 끝까지

몰아세운다. 어줍잖은 위로도, 환타지도 없는 그의 '보여주는(showing)' 영화 그자체는 항상 내게 모종의

좌절감을 맛보여주고, 나는 그 좌절감을 아껴 핥으며 바닥을 단단하게 감촉하는 것이다.
 
다소 드라마가 강화되고 대사의 비중이 늘어났으며, 하드보일드한 장면들이 많이 거세된 '시간' 역시, 그의

실험정신과 좌절스런 주제의식은 그대로여서..언제나 그렇듯 실망하지 않았다. 13th.



(2006.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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