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사 직후 독후감 숙제를 받았던 책 중의 한 권, 그 때 냈던 '숙제'를 일부 수정하여 올립니다.   

배려 - 6점
한상복 지음/위즈덤하우스

 


어느 사이엔가 수많은 자기계발서, 혹은 인생지침서들이 범람하고 있는 세상이다. “몇 억 만들기”같은 재테크를 위한 실용서들보다는 무언가 나름의 깨달음에 기반한 책들이겠지만, 대부분 무게감 느껴지는 근본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얄팍한 스킬이나 임기응변적 처방에 치우쳐 있거나 다소 독단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강변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외국에서는 크게 반향이 없었던 『머시멜로우 이야기』같은 류의 책이 유독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도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번에 인사팀에서 선물받은 도서 『배려』를 처음 받았을 때에도 역시, 그런 류의 책이겠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책을 보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내리면서 약간 놀라기 시작했다. 보통 잠언이나 짧은 이야기를 빙자해서 얄팍하고 설득력 떨어지는 상황을 제시하는 책들과는 달리, 가족의 문제, 팀에서의 문제, 회사에서의 문제 나아가 인생에서의 문제를 골고루 짚어줄 만큼 탄탄한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위는 정말 주위에 있을 법한 그런 사람으로 현실감있게 다가왔고, 무언가 그럴듯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꾸며진 앙상한 스토리가 아니라 차근차근 잘 다져진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에 몰입한 채 마지막 장까지 달려가다 보니, 중간에 몇 번이고 잠시 멈칫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


스스로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에 더해서, 지금의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대담함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고 새롭게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초심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공간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말하지만, 사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차이처럼 문제는 자신의 마음인 거다. 하루하루 새롭고 청신한 눈으로 스스로를 확인하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삶의 목표가 있고 비전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역시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닐까. 비록 다소 유치해 보이기도 하고 막막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행복은 삶의 과정에서 언제든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인도자의 말은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나와 더불어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사람에게 다가서는 첫번째 예의이기도 하고, 함께 즐겁게 살기 위한 필요 조건이기도 하다. 상대의 마음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눈높이를 유지한 채 상대를 대하는 것은,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독선자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밥퍼운동본부의 최일도 목사님은 그러한 식의 독선적인 태도나 말만 앞선 소란스러움 때문에 전체 종교인들이 비판받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하나님을 앞세우지 않은 실제적인 활동으로 지금은 전세계에 걸친 구빈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직접, 솔직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타인에게 말을 거는 최일도 목사님의 배려하는 태도는 그의 공동체가 타인의 관점과 입장을 배격하지 않는 낮은 자세로 섬기기 위한 기초가 되었고, 모두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하루하루의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끊임없이 이루고 있는 것이다. 비단 봉사의 문제만이 아니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는 숱한 대화와 행동들이 모두 상대방의 관점을 배려하는 것이라면 삶이 훨씬 즐거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배려심이 모두에게 더욱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배려」라는 책이 묘사하는 시각적인 이미지 중에서 가장 강렬했던 것은 11층에서 바라본 차도 위의 차량 행렬이 구급차의 신호에 따라 정연하게 길을 내어주는 모습이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할 때 구급차에게 차선을 양보해 주는 개개인의 작은 행동들이 저러한 장관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었다. 트레이드센타 51층의 창밖으로 내다보는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귀엽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해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잡아낼 수 있는 통찰력. 그게 어디든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나 자신의 학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내 마음을 전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소통의 기반에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성공이라면, 보다 풍요로운 내용을 갖기 위한 지혜가 바로 통찰력일 것이다.


굳이 어떻게 성공할지,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지 캐어묻는 책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삶의 기본기를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이 책의 말대로, 받기 전에 먼저 주는 배려는 나와 상대방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공존의 원칙이며 사회의 기반이 된다. 지금까지 스스로에 대한 배려에 예민한 채,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배려를 해야 할 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지냈던 게 사실이다. 밥퍼운동본부에서 몇시간에 불과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천명에 가까운 어르신들의 점심을 전쟁치르듯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걸 뿌듯하게 느꼈다.




전반적으로 그의 소설에는 스윙 리듬같은 늘어짐이랄까, 천연덕스러우면서도 요즘 세상에선 다소 밋밋한 정도의

재기발랄함과 도발적인 호흡이 느껴진다. 뭔가 당시에는 관습이나 장르 따위 모종의 경계를 희롱하였을 게 틀림없는

그의 참신한 시도나 발상으로 말미암아 그의 글들은 재즈 시대라 불리던 당시엔 매우 흥미롭고 자극적인

소설이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상상력과 표현력이 극한까지 치닫는 요즘에는 다소 퀘퀘한 맛이 외려 매력적이지 않나

싶다. 살짝 고리타분한 묘사라거나 글투는 요즈음의 소설과는 전혀 달라서 신선한 느낌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매력적인 오프닝. 주치의는 두 손을 비비다가 버럭 짜증을 내고, 간호사는 복도에서 달아나려던 거센 욕구를 가까스로

억누르지만 새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쨍그랑 덩! 쨍그랑! 대야는 요란스럽게도 일층 바닥까지 굴러떨어진다.

"댁이 내 아버진가?" 경어법이 존재하는 한국어의 맛을 절묘하게 살려낸 한마디 아닐까. 칠십세 노인에서부터 시작한

삶이 거꾸로 흘러 갓난애기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상상력이 반짝거린다.


"그녀는 자기 틀 안에 지나치게 안착해 버렸다. 너무 평온하고 너무 만족하고 너무 흥분을 모르고 취향도 너무

점잖았다." 어린이가 되어가는 어른이 보기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가며 파란 물감같던 눈빛을 잃고 싸구려 도자기

같은 색을 띄게 되기 마련이란다. 다들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그 도저한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보고 느끼는 걸 통해

나이 먹음-인생-삶을 낯설게 보게 된다.


'젤리빈'

밤새도록 생각하여 마음속에 세워졌을 거대한 결심, 수치심과 패배감의 은사를 입은 그 단단한 결심이었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내뱉기 전에는 황금과도 같았을 다짐이, 입밖에 뱉어지고 조건과 마주하는 순간 똥으로 변한다. 그건

피츠제럴드의 말마따나 일종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거의 화학적인 변화'. 갈지자로 분탕질치는 누군가의 행위 저간에는

그토록 심오한 심적 갈등과 고뇌, 영겁과도 같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던 게다.


'낙타 엉덩이'

그토록 매력적이고 앙칼지지만 맘여린 아가씨라면, 낙타 앞몸뚱이가 아닌 엉덩이 부위를 담당해서라도 들이대 보겠다.

특히 와닿았던 표현. "코르크가 (아마도 : 그보다 더 딱딱하게 메말라버린) 내 심장을 본다면 치욕에 못 이겨 저절로

떨어져 나갈 테니." 아..이런 표현을 자연스레 구사하던 사람들이 살던 시대란. 무도회와 고풍스런 자동차. 실크햇과

평등하지 않은 인간.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


'도자기와 분홍'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일종의 꽁트랄까.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며 무대 위 연극을 설명해주는 연사가 있고, 무대 위엔

복숭아빛 처자들이 있다. 정확히는 '연분홍색을 띤 흰색'의 오랜 옷을 입고 있는 도자기 욕조 속 줄리. 왠지 방정환선생이

쓴 '만년샤쓰'던가, 그런 소설의 김창남이 떠올랐지만, 김창남은 여유로움보다는 오기와 자존감이 강조된 캐릭터.

그에 비해 줄리의 재치있는 입담과 센스넘치는 받아침을 보건대, 그녀는 호기롭고 당찬 신여성.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그저 안타까울 뿐. 왜 그녀는 멍청하게도 가난을 예견하며 설레하는 건지. 가난을 모르던 그녀들의 낭만이란, 이제야

비로소 밤하늘 별들을 보곤 다이아몬드와 직통으로 연결짓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키스미키스민, '키스민'이라는

센스넘치는 이름이라니 조금은 봐줄 수도 있지만,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를 두고 '다이아몬드엔 좀 질렸어'

따위로 말하다니.


작가가 의도한 게 이토록 가당치도 않은 거대한 부를 실감나도록 상상케 만들어 허기를 느끼고 가상이나마 채우도록 한

거였다면, 그리고 그게 성공했다면, 왜 마지막엔 모든 걸 한낱 꿈으로 만들어 버린 거냐. 되려 허기만 심해지고 말아서,

스스로의 낭만과 여유로움의 바닥을 들여다봤다. 


'메이데이'

누군가는 삶과 사랑에 지쳐 권총을 물고, 누군가는 건물에서 자유낙하해 머리가 깨져 죽고, 또 누군가는 무도회의

여왕처럼 대접받다간 사건에 휘말려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오고, 술에 취한 미스터 인앤아웃은 천국행 엘레베이터를

잡아 탄다. 그런 식의 스케치..좀 지루했다. 차라리 고든과 이디스의 어긋난 감정과 타이밍에 집중한 이야기를 했다면.

"'사랑은 덧없는 거죠.'...새로운 사랑의 말들, 새로 배운 부드러움은 다음번 연인을 위해 소중히 간직되었다." 이런 식의

마무리도 깔끔하지 않았을까.


'치프사이드의 타르퀴니우스'

한국 환타지문학의 거두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비롯한 작품들엔 꼭 이런 인물들이 나온다. 수다스럽고도 고풍스런

말투를 구사하며 다소간의 현학과 숨겨진 위트를 즐기는. 드래곤 라자의 후치같은 캐릭터. 이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제목의 소설은 그러한 캐릭터의 원형이 혹시 이로부터 비롯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기시감을 선사한다.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

난 이 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너무 밍숭맹숭한 스토리, 그리고 내가 놓친 게

있다면 넘 어려운 스토리..라고 치부하고 넘어간다.


'행복의 잔해'

작가가 좀 나이를 먹고 쓴 게 아닐까. 그 이전의 발랄한 분위기와 특이한 사건 위주로 흘러가며 만담하듯 읽히던

단편들과는 달리, 차분한 호흡에 담백한 스토리. 가당치도 않게 행복의 잔해 위에 선 두 남녀의 새로운 러브 스토리,

혹은 정사신의 여운이라도 남길 바랬던 스스로에게, 자극들로부터의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Mr. 이키'

유머러스하게 닫히는 1막짜리 연극 대본같은 소설. 근데..방충제가 등장한다는 거 말고는 포인트를 못 잡겠다. 뭐지.


'산골 소녀, 제미나'

짤막한 사랑이야기. 유일한 선생을 알콜중독으로 사망시킨 양조장 소녀가 국자로 위스키를 퍼먹다가 만난 외지인,

그리고 '인간 알코올램프' 그녀와 외지인은 전투중에 발가락 숫자를 세다가 함께 죽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인데,

웃기고 만 이야기.


'작가의 말'

"변화하는 유행의 권태로움이 나와 내 책들과 이 단편소설을 모두 한꺼번에 짓누를 때"...를 그는 기다렸던 거다.

그는 불후의 거장이 되겠다거나 인간의 변함없는 뭔가를 글 속에 간직하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당대의 욕구와 취향을

가장 잘 반영하고 선도하고 또 따르려는 욕심을 가졌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당시 유행을 선도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식의 농담을 했는지, 어떤 유희를 즐겼는지 살아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당대를 넘어 불변하는 뭔가를 끝내 쥐어내고 시대를 버티어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시대에 오체투지하듯

몸을 던져 흐름에 완전 영합함으로써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도 있기 마련인가 보다. 살짝 풍기는 노인네의 구렁내같은

골동품의 냄새도 이정도면 오묘한 향수 축에 끼워줄 수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6점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문학동네




먹히면 죽는다. 내 군생활을 시작하면서의 다짐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학부에 남아있기 쪽팔리다 싶어 사회에 쭈뼛대며 나섰을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먹히면 죽는다. 이전에 비해 업그레이드된 점은, 이제는 그 다소 부담스런 비장감을 덜어낼만큼의

여유로움도 챙기고 싶었다는 정도.


그도 그랬나 보다. 허지웅.

허지웅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가 프리미어 기자라는 것도, 종종 시사지에서 마주쳤던 좋은 글들에 달린

바이라인에 그의 이름 석자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나와 거의 비슷한 동년배라는 것은

더더욱.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어리다며, 생리적 나이와 관계없이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이 '울었다'는 고백을 겁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먹히면 죽는다'는 결기에 더해 가오를

좇는 센스까지 갖추어 삶을 살아내고 있다. 꼰대와 야메 마초가 되길 거부하며, 한걸음한걸음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다. 분노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며, 울기도 잘 울고, 난잡하다는 평에 안도한다.

'대한민국표류기'에 활자화된 그는 아직, 여전히 말랑말랑한 사람인 것 같다.


사람들은 조금씩 딱딱해진다. 대학에 들어와 기고만장해지면서, 이삼년 대학다니고는 '캠퍼스의 낭만'을

실컷 즐겼다며 취직 준비를 하면서, 군대를 다녀와선 세상의 부조리함에 만성화되면서,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특히 요새 이른바 88만원 세대들은 더더욱 어쩔 수 없이-옹이구멍만한 눈으로 밥벌이구하기에

매달리면서, 사회에 나와선 나름의 방식으로 익힌 처세술과 가면 뒤에 숨어서. 언제 딱딱해지기로

결정했느냐, 시간의 문제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앞서거니 뒷서거니 어른을 자처하며

에스컬레이터 위의 삶을 취한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참 쉽지 않아졌다고 생각했다.

회사원을 만나 연애하는 것이 학교 때와는 또 다르다는 이야기야 익히 들었지만 비단 연애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 역시도 그런 면이 없잖겠지만,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딱딱해진다. 이미 타인에 대한 신뢰나

기대감에 적잖이 상처입어서일 수도 있고,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다. 얄포름해지고, 둔감해지고, 물기가

말라버린 느낌.


그런데 그런 생각은 기실, 대학 들어왔을 때도 생각했던 거다. 대학 들어왔을 때는 대학 친구들과

고등학교 친구들을 비교하며, 그 이전에는 고딩/중딩 친구들과 불알 친구들을 비교하며. 사회

친구들과 대학 친구들을 비교한 후에는 또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게 될까. 그러고 보면, 딱딱해졌다고

생각했던 그들 중에도 술 한잔 하며, 커피 한잔 하며 수다를 떨다보면 의외로 여전히 말랑말랑한 구석이

온존함에 놀랍고도 반가웠던 적이 있다. 말랑말랑한 사람들과, 딱딱해져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속은

여전히 말랑대는 사람들과, 정말로 딱딱해져 버린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와중이다.

아직 말랑말랑하다고, 적어도 말캉말캉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의 (영화평론을 포함한)

에세이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내 속의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듯 했다. 그런 말랑말랑함이

필연적으로 동반할 (꼰대 세계의 눈으로 본, 가치평가가 담긴) '불완전함'과 '불안정함', 그런

'질풍노도'의 표류기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계속 말랑대며 살고 싶은

내가 그랬듯.


ps. 개인적으로 정말 한번 만나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첨엔 비슷한 나이의 그가 이런 책을 냈다는

사실에 살짝 질투도 느끼고 괜히 치기어린 구석은 없나, 꼬투리 잡을 거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조금씩 그의 글들을 읽으며 99% 싱크로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만난다면 특히나, 흡사 하나의

세계였던 그녀가 허물어지면서 그가 느꼈던 결락감을 지금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도 묻고 싶고.


대한민국 표류기 - 10점
허지웅 지음/수다




지난 [나눔] 책에 날개를 달아봅니다. 이벤트에 열화와 같은(응?) 성원을 해주신 여러 이웃 블로거님들 덕분에

용기를 얻고, 두번째 나눔을 시도해보려 합니다^^


첫번째로 시도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눈의 여왕"은 어제 빠른 등기로 부쳐드렸구요, 이번주 중으로 댁에

무사도착하지 않을까 싶네요. 거두절미, 어두육미, 어쨌거나 두번째 날개달 책들 소개드립니다.ㅎㅎ


#1. "메이저리그 경영학"

[메이저리그경영학] 야구를 경영에 빗대보려는 아이디어는 반짝였지만.

#2. "엄마를 부탁해" : 어버이날 맞이 특별 방출!

[엄마를 부탁해(신경숙, 창비)] 책의 여운이 남아있는 동안이라도.


#3. "화폐전쟁"

[화폐전쟁(쑹훙빙, 랜덤하우스)] 한국에선 무슨 의미가 있는 책일까.

#기타. 이녀석 꽤나 재미있답니다. 연애란 게, 사랑이란 게 '통과의례'라니..?

[이니시에이션 러브] '역시 그렇게 되는구나...'라지만.




신청방법!!

비밀댓글로 남기시는 게 편하시겠죠? 개인정보를 로봇들이 퍼나르는 시대라니까요.ㅎㅎ

"성함, 주소, 전화번호" 남겨주시면 제가 빠른 등기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책 앞에 뭐라뭐라 살짝 낙서처럼

끄적여 보내드려도...괜찮죠?^^; 뭐, 그런 식으로 온라인의 존재감을 오프라인으로 연장해 보려는 가냘픈 손짓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당.ㅎ

기본적으로 하루정도 신청하신 분 중에서 제 맘대로  선정하도록 할께요, First come, first get의 룰은 참고만 하지요.


제일 중요한 점!!

받으시게 될 분은 다 읽으신 후에 리뷰를 포스팅해 주시구, 또 그 책을 다른분께 날려주세요.

그렇게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앞으로앞으로 나가면 그 끝엔 뭔가 희망찬 미래가...(엉?)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블로그와 나눔]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 시사인 홈페이지(www.sisain.co.kr)

지난달부터 시사IN 제1기 독자위원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4월 6일에 있었던 첫 시사IN 독자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려고, 회사에는 집안일을 빙자해 30분 일찍 퇴근하고

독립문역 옆에 있는 시사IN 편집국으로 고고싱. 대구에서 섭도 째고 올라온 열혈독자분도 있었고, 기자분들

수고하신다고 음료수를 양손가득 들고 온 분도 계셨다. 나는? 넥타이만 덜렁대며 갔다가, 나 빼고는 전부

대학생 혹은 졸업생이라 얼른 넥타이만 풀어버리고 말았다.


관련기사들 :

“시사IN 너마저 제목 장사를…”

끈질긴 <시사IN> 저력 보여주길

그래도 하고 싶은 말 말 말

독자위원 눈길 사로잡은 기사

“배달 그것이 알고 싶다.”



애초 한시간 반 정도를 예상했던 독자위원들의 리뷰는 두시간을 꽉 채우고서야 끝났다.

내가 말을 좀 많이 했다 싶긴 했는데, 실제로도 좀 많이 하긴 한 듯..정리해준 변진경 기자님이 워낙 깔끔하게

정리해 주어서 다들 그럴듯하게 이야기한 것처럼 나오는데, 감사할 따름.ㅋ


아래 사진들은 여섯 명의 독자위원 중 한명이었던 도윤씨가 찍은 시사인 편집국의 풍경들.

우리가 모였던 편집국 회의실은 도서관도 겸하고 있었다. 무질서한 모습이지만, 오히려 그만큼 자주 저 책들을

들춰보고 있다는 반증 아닐까 싶다. (단순히 정리할 시간이 없는 거였는지도 모르지만..당장 누가 꺼내 들춰봐도

전혀 부담스럽거나 어색하지 않을 저 분방한 분위기라니.)

작년이었던가, 시사IN 표지를 장식했던 MB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이미지지만, 지금은 다소 MB의 명징함이

떨어지고 있다. 'MBC 내부의 적들'도 그렇고 反MB 진영내의 불분명하고 '정치공학'적인 문제들도 그렇고.

역시 작년 언젠가, MB와 부시의 회동을 시사하는 표지 모델로 나섰던 인형. 그때 이 표지를 보면서, MB가

앞에서 말고삐를 잡고 있고 측면에서 화면을 잡았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했었다.

고이즈미, 정동영, 박근혜에서 박제동에 이르기까지 삼등신으로 재구성된 그들의 인형이 내려다보는 편집국 내부.

시사IN, 난도질에 가까운, 선혈이 낭자한 '하드코어 리뷰'를 바란다면 기꺼이. 그렇지만 애정을 가지고.


참 요란스런 껍데기다. 중국에서 판매속도가 가장 빠르다느니, 수백만 매체가 어떻고 몇십주동안 1위가 어떻고.

빌게이츠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 규모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로스차일드가문이 세계 금융을 쥐고 흔든지

어언 이백여년이 되었다거나, 링컨과 케네디의 암살, 미국의 남북전쟁, 심지어는 유럽의 전쟁들과 1, 2차

세계대전까지도 그들 일부 '배후세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런 식의

허무맹랑한 음모론은 이런 식의 의문을 낳는다.




그런 음모론에 경도된 책의 앞머리 절반쯤을 읽으며 한 댓번은 "그래서 어쩌라규~"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불태환화폐가 고작 몇십년의 역사밖에 지니지 못한, 아주 특이한 경우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듯 하다. 태초부터 그랬던 듯 단단하고 완전무결해 보이던 지금의

시스템이 실은 역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 그리고 변경가능하다는 상상력의 자극. 그게 지금 시스템의

문제점을 바꾸는 단초일 테니까.


지은이가 말하는 대로,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은행들의 지급준비금제도에 기댄 불태환화폐제도가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돈'을 출현시켰다. 금이나 은과 같은 진정한 부(wealth)를 증거하는 화폐가 아니라, 은행으로부터

액면가만큼을 빌렸음을 의미하는 차용증서로서의 화폐. 그리고 그러한 화폐의 발행이 점차 팽창하면서 이른바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 [각주:1]효과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그에 더해 전지전능한 '그들'의 입맛에

맞는 타이밍과 성과를 기한 세계적 차원의 경기변동이 유도되어 특정국의 자산과 부를 고스란히 가로챈다고 한다.

그게 지은이가 말하는 '양털깍기'의 의미이다. 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다가, 어느 순간 거품이

잔뜩 끼었다 싶을 때 훌떡 경제를 말아버리고는 싼값에 주요 기간산업과 기업들을 차지하는 것.


결국 이 책의 요지는, 제9장 달러의 급소와 금의 일양지 무공, 그리고 제10장 긴 안목을 가진 자, 요 두 챕터에 전부
 
담겨 있는 듯하다.(제목도 참...중국스럽다.) 중국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기 전에, 황금에 기반한 화폐제도로 조금씩

위안화를 바꾸어나가며 미국의 국채나 달러 대신 금을 중국내에 쌓아두라고. 그렇게 서서히 세계의 기축통화로

등극해서 중국이 다시금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낸 패권국으로 등장하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다.


근데, 한국의 경제위기 당시에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국내자본과 해외자본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은이는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중국 내의 금융자본도 역시 자기증식을 통한 이윤 추구라는 논리에 충실할 뿐 아닐까.

지금이야 세계 금융시장에서 수세를 점하고 있기에 방어에 급급할 뿐이지만 그들 역시 언제든 '로스차일드가문'이

그랬듯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바꾸고 국가를 변형시킬 집단인 거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국내자본' 대

'해외자본'의 구도 혹은 '중국' 대 '외부의 적'의 구도라기보다는, '공공영역의 수호자인(여야 하는) 정부' 대

'자본'의 구도가 더 설득력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금태환화폐 시스템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라도, 중국 내

자본과 협력하는 것보다는 타국 정부들과의 협조가 더욱 중요하고 효과적일 것 같다.


하나 더, 중국은 패권국을 추구한다고 치고, 한국에는 어떠한 함의가 있는 걸까. 이책. 중국 정도 되는 나라니까

외부 금융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던, 로스차일드가문이 전세계를 집어삼키겠다고 음모를 꾸미던 말던 그에 대항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거지, 우리 나라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야 이 책이 뭔가 대국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라거나 괜히 어깨 으쓱하는 사명감을 느끼게 했을지 몰라도,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태환화폐 시스템의 역사적 형성과정이나 그 문제점들이란 건, 사실

이 책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을 텐데...? 한국의 CEO들이 추천하는 책이라는데 왜 그럴까.

왠지 Snob effect란 단어가 오랜만에 떠오르는 듯.ㅋ


화폐전쟁 - 6점
쑹훙빙 지음, 차혜정 옮김, 박한진 감수/랜덤하우스코리아







  1.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란 내가 기억하는 한도내에서 설명해 보자면 이런 거다. 화폐공급량이 늘어나 물가가 상승하게 되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는데, 그 자산의 하락한 가치분만큼을 화폐발행의 책임이 있는 정부에 세금으로 낸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부가 초래한 인플레이션에 따라 사람들의 부가 스물스물 정부로 이전되는 효과랄까. [본문으로]
위드블로그에서 이런저런 리뷰 신청을 하다가, '화이트 벤토나이트'라는 것을 주성분으로 했다는 '케어닉

스킨닥터'의 리뷰 신청을 보고 냉큼 신청했었다. 비록 벤토나이트니 신비의 광물질이니 이런 단어들은 뜬금없게도

내게 슈퍼맨의 힘의 원천 클립토나이트를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그리고 제조사도 '(주)발렌티노 씨엔씨'라나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그렇다고 다른 뭔가 귀에 익은 제조사가 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지만), 일단 그런건

되고 나서 생각하자고 다짜고짜 신청부터 했었다.


그리고 집에 배달된 케어닉 스킨닥터 제품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이걸 과연 써도 될지, 부터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이 사실이다.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라는 세상 아닌가. 책이나 음반류와는 달리 심각한 부작용이나

적어도 피부트러블의 위험을 자초한 게 아닌가 잠시 두근두근.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웠다. 마뜨하게 스며드는 느낌도 그렇고, 각종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해서 그런지 피부톤도 좀 밝아지고 건강해진 듯한 느낌이다. 찡그린 표정에 칙칙한 톤의 사진을 비퍼(Before)라

칭하고, 활짝 웃는 낯에 뽀샤시한 톤의 사진을 애프터(After)라 하며 자사의 제품 효과를 광고하는 온갖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벤토나이트 케어닉 스킨닥터를 체험해 본 근 3주간의 내 생활을 하나하나 적시하며 효능이

있음을 증명키로 한다.


< 내부 요소 >

1. 수면 부족 : 주말에도 거의 매일 밤 2-3시에야 잠들어, 이른바 피부재생의 시간이라는 밤 10-12시 타임을 전부

수면이 아닌 다른 것에 할애했다. 기상시간 역시, 10시쯤 일어났던 주말을 제하고는 매일 7시이전..

2. 음주 : 한 주에 3일 정도는 술을 마셨던 듯 하다. 맥주, 소주, 소맥, 양주, 와인, 빼갈...

3. 흡연 : 마침 직간접 흡연이 절정에 달했던 기간. 담배를 몇년간 안 피다가 다시 피게 되었고, 하루에 많을 때는

한 갑씩도 태웠다.(최근 다시 끊었다.)

4. 스트레스 : 별다섯개, 그것도 왕별 다섯개짜리 스트레스가 쭉. ★★★★★


< 외부 요소 >

1. 황사 : 올해는 그나마 황사가 덜한 편이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황사는 '피부의 적'이다.

2. 건조함 : 비무장지대에서 잘도 번지고 있다는 대형 산불 탓도 있을 테고, 버석버석한 느낌의 계절..봄.

3. 컴퓨터 : 근자에 동영상 강의를 듣는 것도 있고 블로그에 좀 시간을 더 할애하는 듯 하니, 아무래도 컴퓨터의

전자파나 열기가 피부에 도움이 될리는 없고, 인체에 유해할 거다.



< 기타 요소 >

1. 닭튀김 : 후라이드 치킨을 몇 차례 맥주안주로 먹은 바, 특히 날개와 껍데기에 탐닉하여 콜라겐을 섭취하려

애썼으나 그 양이 소량인 고로 피부에는 미미한 효과를 미치는 데 지나지 않았으리라 사료됨.

2. 흑초 : 상무님이 드셔야 할 흑초를 1:3의 비율로 냉수와 희석하여 아침마다 장복한지 몇주 되어가는 듯 하며

배변생활에서의 명랑함을 기하고 있기는 하나, 아직 피부에까지 효험이 이르지는 못한 듯 하여 기각함.



..이런 와중에도 피부가 뒤집어지지 않고 최소한 Before와 After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은 반대로 당시

체험중이던 '벤토나이트 케어닉 스킨닥터'의 탁월한 효과를 반증하는 건 아닐까. (이건 왠지 서프라이즈의

믿거나, 말거나 하는 나레이터 톤을 연상시키는 듯..)


휴대폰도 되고 카메라도 된다는 '컨버전스', 혹은 엠피쓰리도 되고 USB도 된다는 '양수겸장'의 아이디어 상품은

종종 성공적이지 못하다. 어느 한 쪽의 기능이나마 제대로 살아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 다른 한 쪽의 기능이

물귀신처럼 우월한 쪽의 기능을 물고 늘어져 두 가지 기능 모두 어정쩡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읽기에 따라 연애소설이 될 수도, 미스터리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강조하는 건,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는

쉽게 와닿기는 힘들 듯 하다. 우선 미스터리를 구성하기 위해 치밀히 고안된 복선들과 상징들이 일본 '내수용'의

것들이어서 내 눈에는 별로 걸리지 않았다. 다만 A면, B면이라 이름붙은 두 챕터가 알고 보면 동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기록이라는 흐릿한 의심은 뒤로 가면서 더욱 짙어졌었고,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나름 성공적으로 그간의 긴장을 날려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참신하고 재치있는 구성의 묘미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애소설의 측면에서는. 글쎄. 얼핏 생각하면 그 소설에서 제일 눈에 띄는 아포리즘은 이건가 싶다.

인간에겐, 이 세상에는 절대란 건 없다고. 그걸 알게 되면 비로소 어른이라고 해도 좋다고.

이 사람이라면 평생 사랑할 수 있겠다는 느낌, 헤어진 뒤에도 그 이상으로 좋아하게 될 상대는 앞으로 평생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런 건 모두 어린 시절의 무지한 신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절대'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연애가 바로 일종의 통과의례,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러브라고.


그런 거구나, 하면서 제길, 하면서 끄덕끄덕 하려다가 왠지 반감이 인다. 내가 품은, 그녀가 품은 애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당사자들도 알지 못하고 확신도 없는 게 '어른들의 사랑'이라고? 사람을 사랑하면서 믿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얄팍하고 찰나같은 진실이란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고작 그정도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절대'라느니, '(성숙한) 어른의 사랑'이라느니 상대적으로 (미성숙한) '아이의 사랑'이라느니.

자존심을 다칠까 마음을 다 못주는 연약함, 상대로부터 거부당한다는 걸 견딜 수 없는 두려움, 그런 걸 왠지 다

컸다는 느낌을 강변하는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로 뭉개버리려는 건 아니고?


섹스 파트너를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그녀, '역시 그렇게 되는구나..'라는 그녀의 한 마디.

그녀는 마치 열혈 기독교도처럼, 자신이 이미 알아버렸다고 생각한 그 황량하고 불가역한 '진실'이 남자에게도

유효할 것이라 이야기했지만..막상 그녀로 인해 황량해져버린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상처나 공허함을 타인에게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얼마나 기다려야 다시 예전처럼 신선하고

건강한 핑크빛 하트로 회복되냐고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게 계속해서 상처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면...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처투성이 마음으로 사랑을 다시 해야 한다면, 그게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인지도 모른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 6점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북스피어
#1. 시크릿은 실컷 웃을 수 있는 연극이다.

공연 소개를 아무리 보아도 이게 대체 어떤 류의 이야기를 할 지는 감이 잘 안 왔다. 대충 사랑이야기이겠거니,

게다가 정신병원이 배경이고 니가 미쳤니 내가 미치고 있느니 사실은 미치지 않았느니 운운 이야기하는 걸로 보아

뭔가 '미쳤다'는 것이 갖는 의미를 보여주려는 연극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한시간 반 정도의 공연 시간, 한시간 십분 정도는 계속 웃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삼십분 정도는 빵 터졌으며, 또

그 중 이십분 정도는 박장대소를 했던 듯 하다. 정신병원이란 배경에서 능히 상상할 수 있을 또라이 연기를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배우들도 훌륭했고, 이러니저러니 덧붙은 살들이 있긴 했지만 역시나 재미를 극대화하는데

주력한 티가 역력한 에피소드와 개별 씬들도 딴 생각없이 실컷 웃을 수 있을만큼 재미있었다.


#2. 시크릿은 관객과의 소통을 특히 유의한 연극이다.

어느 연극이 안 그렇냐만은 초반부터 무대와 관객석 간의 유리장벽이 통쾌하게 부숴진다. 쉼없이 관객을 호명하는

배우와 그에 응하며 맘껏 즐기는 관객들의 호흡이 역시 연극에 대한 만족도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지 싶다.

내가 보았을 때는 특히 반응이 좋았던 관객 한 분이 계셨어서 더욱 큰 웃음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던 것 같지만,

시크릿이란 연극 자체가 관객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다만 다소 '상식적인 수준'에서 쉼없이 이야기되는 정치나 시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에잇, 까놓고 말해 이명박에

대해 빈정대며 이리저리 비난/비판하는 대사들은, 오히려 너무 '대통령 까댐'이라는 시류에 편승한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진부하고 내용이 없어서 아쉬웠다. 차라리 좀더 생생하고 와닿는 이슈를 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희롱했다면 좀더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3. 바이올린 현이 파들파들 떨며 우는 소리는, 자칫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첩경이기 쉽다.

메시지나 교훈 따위 끄집어내지 않고 그냥 실컷 웃고 즐기면 되는 연극이라고 생각했는데, 불쑥 바이올린 현이

길게 울다간 파들파들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극의 분위기를 급냉각시키며 분위기를 잡으면 좀 당황스럽다. 이러한

경우 그런 감정의 오르내림을 함께 하며 몰입할 수 있다면 멋지겠지만 대부분 관객들이 그간의 몰입 상태에서

튕겨나오는 당혹감을 느끼기 때문에 다소 아쉽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불평하곤 하듯이, 웃겼다 울렸다 관객을

주무르려는 제작자의 의도에 대한 반감은 이러한 튕겨나옴에서 비롯하는 걸 거다.


설득력이 약하거나 다소 급작스럽다 싶은 감정의 과잉 분출, 변환이 역시 시크릿에서도 나타난다. 뭔가 인생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사랑에 대해 한 마디 해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는지 정신병원의 노인은 광소를 터뜨리며

뭔가 아포리즘이 담긴 문단을 읊고는, 기적처럼 스르르 제혼자 열린 문으로 퇴장하는 거다. 좀더 작은 목소리로,

좀더 담백하게, 그리고 좀더 간접적으로 담을 수도 있는 이야기였을 텐데 너무 전면에 불쑥 내세워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굳이 그전까지의 유쾌한 분위기를 확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는지 싶기도 하고.


#4. 비록 손발은 잠시 오그라들었지만.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재미있었던 연극이었다. 그리고 연극계 최초로 관객들을 대상으로 '다단계식' 홍보를 한다는

당찬 선언에 맞게 대박났으면 좋겠다. 갠적으론 홀로 감정몰입해 흐느끼는 바이올린 선율은 왠만하면 쓰지 않았음

좋겠다. 이미 배우의 연기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에 바이올린 소리까지 더하는 건 오바 아닐까 싶다. 그리고도 넘

진부한 연출 아닐까.


애초 위드블로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리뷰어를 신청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차례로

그의 미술작품들, 그의 수기노트들, 그리고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그의 삶 어느 순간순간에 포진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일어난 이미지들이 바로 내가 지금껏 다 빈치 그에 대해

그나마 갖고 있던 조각조각 분절된 정보들이었던 게다.


사람들은 자신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앞에 두고 쉽게

멈추어 버리곤 한다. 그렇게 자신의 동서남북 사방으로 멈추어선 경계 그 내부를 세계의 전부인양 살아가지만,

때론 그 경계를 거침없이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오늘날 현대과학이

검증해낸 과학적 사실들을 일찍이 깨우쳐버린 다 빈치나 갈릴레이 같은 사람들.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과 당대의 상식에 반함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 실험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프로이드나 니체 같은 사람들.


그 중 운 좋은 사람은 후대인들을 자신의 어깨 위에 태워 좀더 넓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나중에야 재평가되고, 아 이러저러한 것들은 이미 그가 얘기했던 것들을 '재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는 식으로 그치곤 한다. 다 빈치가 그렇다. 그의 아이디어와 과학적 시도, 방법론들은 너무

일렀다. 그야말로 그는 '너무 일찍 깨어난 사람'이었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책에서는 특히 그가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할 만큼 엄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현상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작동 원리를 탐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난잡한 수기 노트에 적힌 글과 그림을 봐도

그가 얼마나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 했는지 열의가 느껴진다.

물론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생을 재구성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책이다.

그가 자신의 사고를 기록해둔 수기노트들조차 제대로 재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의 삶을 좀더

명료하게 알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사실 욕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 빈치 앞에 붙는 온갖 수사들, 천재니 편집증

환자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사생아였다느니 등등 손쉽게 레테르를 붙이고 멈추는 게 아니라 조금은

더 그의 삶이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따라가며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풍성하고 탐스러워 보이는 하얀 수염이 뒤덮인 늙은 현자로서 멈춰있는 다 빈치가 아니라, 그의 어릴 적 모습과

커나가는 모습, 그리고 인간적인 여러 고민과 어려움들 앞에서는 지금의 나와 별다를 바 없는 그의 반응을 보면서

왠지 친밀한 느낌이 한층 커져 버렸다.

이 책은,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용 인문/사회 도서다. 몰랐다. 처음에는 책을 받고 나서 이런 책을 보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다소 망연했었지만 생각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또 무엇보다 책 마지막 쯤에 있는 다 빈치의

수기노트를 웹상에서 일부 열람 가능토록 한 웹사이트 주소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현재 그의 수기 중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빌 게이츠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레스터 사본은 물이 가진

모든 성질과 움직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한다. http://www.amnh.org/exhibitions/codex/index.html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으니 한번 죽 읽어보며 수기노트에 담긴 그림 일부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


또 영국국립도서관의 사이트에서는 마치 책장을 넘기듯 그의 수기노트를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데,

왜 그런지 난 계속 못 보고 있다. http://www.bl.uk/collections/treasures/digitisation.html#leo 


레오나르도 다 빈치 - 10점
캐슬린 크럴 지음, 장석봉 옮김, 보리스 쿨리코프 그림/오유아이
안데르센의 대표적인 동화들인 '인어공주', '백조왕자', '장난감 병정', '성냥팔이 소녀'와 '눈의 여왕' 등 총 6편의

작품들이 '어른들을 위한' 새로운 버전으로 출간되었단다. 어른들을 위한 버전이라니, 인어공주와 왕자와의 종을

넘어선 정사 장면이라도 묘사되었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장난감 병정이 실은 메조키스트였다는 충격 고백이 독점

게재되어 있을지 궁금했지만, 글쎄, 그림체가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정묘해진 덕분에

어른들이 들고 다니며 읽어도 '모냥새 빠지는 일'은 없겠다 싶은 정도 외에는 뭘 바꿨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사실 큰 공헌일지 모른다. 어렸을 적의 '내'가 이해했던 그 내용과 교훈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그 동화를 공식적으로 어른이 된 '내'가 다시 한번 집어들어 펼쳐볼 만한 유인을 제공한다는 것 자체로

말이다. 동화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마주쳤던 건,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 마치 화석처럼 조용히

내 어딘가에 새겨졌던 느낌들과 나름의 해석이었고, 또 그것과 부딪히고 반발하는 지금의 '나'였다.
어렸을 적에는 진짜 감정과 가짜 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우습게도 나는 인어공주가 되어 나의 감정만을 유일시했으며, 나를 넘어 옆나라 공주를 바라보는 왕자의 감정은,

그리고 그에 호응하는 옆나라 공주의 눈빛은 가짜라고 여겼다. 굳이 악의가 철철 흐르는 '바다마녀'라거나 장난감

병정에게 시련을 안기는 '괴물 인형', 혹은 '눈의 여왕'이 아니라 해도 주인공의 감정을 가로막고 좌절시키는 것은

모두 가짜, 혹은 나쁜 놈이었다. 어쩌면 동화 속 주인공 자리는 항상 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옹이구멍만한

시야와 턱없는 자존감이 바로 내 모든 감정이야말로 진정한 것, 순수한 것이라고 믿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받아들여지는 감정과 받아들여지지 않는 감정이 있을 뿐인 것 같다.

모두 진짜라면 진짜고, 또 가짜라면 모두 가짜일 그 감정들의 흐름 속에서 때로 막히고 때로 뚫리면서 슬펐다가

기뻤다가, 그렇게 아프고 행복한 것 뿐인 건 아닐까.


기억도 나지 않는 어렸을 적부터 주입되었던 '선은 반드시 악에 승리한다'는 기묘한 믿음이 조금씩 사각대며

부식되고 있으면서도, 아직 공룡뼈처럼 완고히 남아있는 최후의 보루랄까,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그리고 나만이

진심이다)라는 식의 잔재가 남아 자신의 감정이 거부됨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도 얼마나 혼탁하고, 변덕스러우며, 진실하지

못한가. 마음이 진실하다는 건 또 뭐냐, 흘러가는 감정을 '단어'와 말의 힘을 빌어 오롯이 퍼올릴 수 있을까

따위 근본주의적인 질문엔 잠시 등을 돌린 채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차이는 어쩜 아주 작은 것

하나 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마치 망망대해에 점점이 솟아오른 섬과 같다면, 좀처럼 이어지기 힘든 

인근 섬 그 어딘가에게 연결되고 회신을 받을 수 있는 감정,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걸쳐지지 못한 채 힘없이

자유낙하하다 바다 저 아래로 가라앉을 뿐인 감정. 그렇게 이어지고 이해받는지, 아닌지의 차이.


인어공주의 마음은 왕자에게 전해지지 못했으며,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되돌려받지 못했을 뿐이다.

옆나라 공주의 마음은, 왕자의 마음은, 서로에게 전해졌으며, 받아들여졌고, 그리고 어렸을 적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 믿는 건 잠시 유예할지라도 당분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을 되먹여줄 게다. 그리고

인어공주의 아픈 감정만큼 그들의 달콤한 사랑 역시 진실하다.


동화 속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주인공일 수 있고, 저마다 감정을 쌓아온 역사와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진심은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감정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답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소모하느니 감정이 받아들여지도록 최선을 다해 움직여라, 정도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훌륭한 교훈이 아닐지. 


그렇게 자신의 진심이 언제고 거부당할 수 있다는 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잔인하지 않은가. 어른들에게조차.




눈의 여왕 - 6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김양미 옮김, 규하 그림/인디고


조커는 번번이 화가 났다.

갱단이라는 것들은 '가오'도 잡을 줄 모르고 돈만 밝히며, 경찰은 화끈하게 자신과 놀아주기는 커녕 빌빌거리다가

뒤로 돈이나 찔러주면 좋다고 실실거린다. 범죄자라고 감옥에 처박힌 것들도 조금만 겁주면 오줌이나 질질 싸거나

눈물부터 흘리는 심약한 것들이고, 그런 범죄자와 자신은 다르다며 고고한 척 하는 '시민'들 역시 애써 자신들

마음 속에 있는 악마적 요소들을 외면하고 있을 뿐 다를 게 없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선하고 나무랄데

없는 '문명화된' 사람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이 조커 그에겐 역겹기까지 하다. 착한 척, 질서잡힌 척, 교화된 척이나

하지 말던가.


그는 생각한다. 나는 억울하다.

인간은 누구나 악한 거다. 네놈들은 분칠한 내모습이 무섭다고 손가락질하지만, 네놈들이 위선과 허영으로

자신의 악한 모습에 덕지덕지 분칠해 놓은 것은 더더욱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선한 척, 고상한 척, 고결한 척

하며 애써 겁먹지 않은 척 자신에게 대적하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니들 마음속의 악마를 보란 말이다. 우린

다르지 않아. 왜 나를 별종(Freak)이라고 몰아가지? 왜 나만 나쁜 놈이라 비난하지? 니들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은 원래 혼돈 그 자체이고, 악과 선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는데, 왜 날 거세하려 들지?


그렇다면 좋다.

니들이 스스로의 가면을 벗도록 해주지. 난 돈 따위 관심없어. 다만 당신들이 스스로 각성하길 바랄 뿐이야.

조커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심판을 내린다. 기독교적인 의미의 '심판의 날'에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계량하고

본모습을 대면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린 속내와 직면하고, 그걸 따르도록 강제, 혹은

유인코자 한다. 덴트 검사야말로 배트맨이 '백기사'이자 영웅으로 세워내려할 만큼 강하고 훌륭한 '가면'을

갖고 있었지만, 이런 그 역시 조커에 의해 '투페이스'로서의 광기에 먹히고 만다.


여기서 꼭 항변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건, 그 광기 자체를 내가 불러낸 건 아니란 사실이야. 검사 양반 그가 그토록 크고 강한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반대로 그가 그만큼 크고 강한 악의를 감추고 있었단 이야기도 되지. 그는 자신의 속에 애초부터 존재하던

'광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뿐야, 약간 내가 돕기는 했지만 말이지. 그가 왜 받아들였냐고? 그 이름모를 여자의

죽음이 마치 방아쇠처럼 그의 가면을 깨뜨리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알 바 아냐. 어쨌든 난 또다시 내

주장을 강화하는 커다란 샘플을 얻었지. 세상의 것들은 온통 타락했고, 악하며, 세상의 본질은 카오스 그 자체라는.

그런데 영 맘에 안드는 자식이 있다. 배트맨.

내가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추의 한쪽 끝, 극단이라면 또다른 한쪽 끝에 서서 균형을 잡고 있는 녀석. 그런데 그는

나를 없애려고만 드니 골치가 아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나를 죽일 용기도 없는 '찌질이'다. 그러니 더

배알이 꼴리는지도 모르지. 내가 그를 희롱하고 놀리듯이 그도 나와 놀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유머감각도 없고 '균형'이란 걸 생각지도 못하는 꽉 막힌 놈이다. 몇번이고 말하지만, Why, so, serious?

난 몇번이고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시험해 보았는데 이젠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나처럼 별종(Freak)이다.

그의 것은 '가면'이 아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박쥐가면을 쓴 찌질이와 허연 분칠을 한 입째진 조커만이

실은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그가 적당히 섞인 채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조심스런 미소와 겸손한 태도를 가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거다. 사람들이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결국 배트맨 너와 조커 나는 사이좋게 정신병원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거다. 너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리지 않은 동전 앞면'이 나오는 녀석과, 나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린 앞면'이

나오는 존재는 '사람처럼' 살 수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를 다수결원칙으로 정의한다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이, 배트맨 너와 나는 이미 '사람'이란 종에 속하지 않는지도 모르니까.


아마도 그래서 우린 살아남았다.

서로 몇번씩이나 죽일 수도 있었지만, 지겹고 이가 갈리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일 지경이겠지만, 니가 없이는 내가

무너지고, 내가 없이는 니가 무너지겠지. You, complete, me. 다음엔 좀더 멋지게 해보자구. 넌 여전히 사람들이

본래 선하고 질서를 선호한다고 믿고 있겠지만, 내가 그 믿음을 산산이 깨뜨려 보여주지. 아직까지 우리의 싸움은

오십 대 오십. 잠깐 어느쪽으로 추가 기운 듯 보일 수야 있겠지만, 아마 앞으로의 싸움도 오십 대 오십.



P.S. 그렇지만 말야 친구, 결과를 안다고 재미없어지는 건 아냐. 난 당신과 춤추듯 스텝을 밟을 뿐야.

누가 리드하던, 한발 앞으로 딛었다가 한발 뒤로 뺐다가, 날렵하게 턴을 하기도 하고 말이지. 멋지지 않아?

끝도 결말도 없는 선과 악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지. 우리는 그 속에서 살고 그 속에서 가는 거라구.





한국 힙합 뮤지션은, 글쎄..그다지 장르를 가려듣는 편은 아니지만 힙합은 딱히 땡기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아마도 '거리의 시인들' 정도가 내가 최근까지 굳이 앨범을 사가면서 들었던 한국 힙합 뮤지션이던가 싶을 정도.

그만큼 힙합이란 장르는 내겐 꽤나 낯선 것이다. 


견문이 천박해서겠지만, 왠지 힙합은 다소 겉멋에 치우쳐 수입되고 소비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있었다.

특히 팝송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판에 알아듣지 못할 영어 라임으로 꽉찬 힙합 음악을 듣는다는 건 뭐랄까, 정작

중요한 부분을 놓친 채 나머지만을, 심하게 말하자면 겉멋만을 취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더군다나 그들의

노래는 대부분 분노한, 상처받은 목소리로 뱉듯이 읊어지고 있었기에 더욱 그 가사가 중요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런 데다가, 락을 좋아하던 시절에 락 스피리츠 어쩌구 했던 것처럼, 힙합의 소울이란 게 있다고는 하지만, 과연

한국의 힙합이라는 게 '비주류와 저항의 음악'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대한 살벌하고 나름

거침없는 비판을 던지던 '거리의 시인들', 그 중 한 멤버인 노현태가 이명박의 대선 캠프에서 홍보송을 부른 것도

모자라 대운하 찬양송까지 불렀다는, 최근에야 뒤늦게 알게 된 뉴스는 한국에서 소비되는 힙합이란 건, (본토에선

어떤지 잘 모르겠으되) 이미지가 중요한 일개 상품일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을 더욱 굳혀 놓았었다.


그런데 화나, 그의 첫 정규앨범이라는 이 앨범은 그 두가지 면에서 모두 살짝 내 흥미를 간지럽힌다.

그는 '라임폭격기'라거나 '라임몬스터'라는 별칭으로 불리나 보다. 그의 라임은 어쨌든 몇번을 들으면 귀에 익어

뜻이 전달될 수 있는 한국어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어쨌든 난 네이티브 한국인이니까-, 중간중간 폭발하는 듯

내달리는 라임들이 여전히 의미불명이긴 하지만 대개 메세지를 이해하며 듣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음색. 불만에

차서 분노를 터뜨리는 듯, 때론 냉소하듯, 또 때로는 잔뜩 칼날이 쑤셔박혀 상처입은 듯 아파하는 목소리까지

왠지 뭔가 중독성있게 귓가를 맴돈다. 그의 이름이 왜 화나, 일까..화난 목소리가 매력적이어서? 따위 말도 안되는

상상까지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예전에는 곡 하나하나를 뜯어서 듣는 스타일이었는데, 요샌 갈수록 노래를

BGM으로 쓰고 있어서 딱히 몇 번 트랙 무슨 노래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더라, 라고 기억해내지는 못하겠지만..


이번주 시사인 잡지에 실린 조국 교수의 에세이에 보면 최인훈의 '서유기' 중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다.

"당대가 이른 가장 높은 문명 감각의 정상에 서서 당대가 이른 가장 높은 현실 정치에 대해서조차 비판하는 것,

이것이 진보가 살 길이다."

약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거창한 역사의 진보라느니, 의식적인 지향이 아니더라도, 어떤 음악은

"현재 이곳에서 이뤄진 가장 현대적인 감각의 정상에 서서 현재 이곳에서 이뤄진 가장 당연해 보이는 기득권에

대해서조차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힙합 자체를 순치되고 상업화된 형태로 소비하는 것 자체도 부정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없다.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래도 '비주류와 저항의 음악'으로서 힙합을 자처하고자 하는 뮤지션들은 계속해서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또 개인적으로는 나왔으면 한다. 누군가는 문화와 음악이 태생에서부터 비주류와

저항의 몸짓을 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마도 화나도 그런 묵직한 힙합을 계속 할 수 있지 않을까.




#1. '남편'이 아니라 '아내'가 결혼한 이유.

'남편이 결혼했다'란 제목은 '아내가 결혼했다'는 지금의 제목보다 더욱 비현실적일 뿐더러 그닥 신선하지도 않다.

왜 그럴까. 한국에서 남자로, 혹은 남편으로 산다는 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굳이 따로 결혼을 생각할 만큼 머리가

복잡한 일이거나 채워지기 힘든 불만족을 떠안고 지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단순하기

때문일지는 모르지만, 한국 남자에게 결혼은 아직 '남는 장사'고, 하고 나면 장땡인 '쑈부'인 게 사실이다. 


그리고 굳이 '결혼'이란 형식으로 새로운 관계를 틔워놓아야 할 만큼 절박하지도 않으며, 언제든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즐기고..그게 또 '남자답다'는 식으로 용인받기도 하는 게 아직은 사실인 듯 하다. 여전히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고, 영화 중의 대사말마따나 '바람핀 뇬 용서못하고 차버리고 떠난

놈 용서못한다'는 게 일종의 관습법인 게다.

결국 남편이라면, 굳이 또다시 결혼을 할 생각을 할 유인이 적다. 그래서, 아내가 결혼했다.


#2. 목마른 그/녀가 우물을 팔 뿐.

그렇지만 이 영화를 꼭 페미니즘적인 시각, 그러니까 가부장제적인 가족제도 하에서 구속받고 억압받고 있는 

여성의 해방이란 측면에서 보아야 할 지는 모르겠다. 더구나 남자 둘, 여자 하나 간의 섹스에 대한 문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할 뿐, 어정쩡한 선에서 봉합하고 있다고 보이니 그다지 적극적으로 '성 해방'을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요사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코드로 읽어내려가려는 내 편향성이 걸리긴 하지만, 이 영화 역시도

어쩔 수 없이 사랑을 끝까지 추구하고 지켜나가려는 이야기..란 느낌이다.


그녀는 사랑이 하나가 아닐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반으로 쪼개지냐는 그의 항변에,

뻔뻔하지만 또 사랑스럽게도 그녀는 이렇게 응수한다. 사랑이 절반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 배가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마음이 상대의 장점, 단점, 그리고 온갖 고유한 특성들을 다 껴안아 주는

거라면, 그는 그녀가 믿고 있는 이러한 애정관을 미리 알았어야 했고, 껴안거나 내치거나 해야 했을 거다.


그는 그렇지만 '그녀가 원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녀의 연애 생활을 무덤 속으로 끌고

가려고' 결혼을 이미 해버렸다. 결혼은 그런 게 아닐 텐데, 아니어야 할 텐데, 뒤늦게 수업료가 어마어마하다.


사랑은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애초 서로에게 마법같이 끌려들었던 그 감정을 그대로

지켜 나가는 두 사람에게 이해되고 용인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문제될 것은

없을 거 같다. 그리고 남1과 여, 남2와 여는 그렇게 우여곡절과 자기부정과 관계부정을 거쳐, 자신들의 '사랑'을

새롭게 정의하고 단단히 다져나간다. 그들은 아마, '축구공'을 차고 노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어릴 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걸 게다. 그들 인생의 축구공을 단단히 쥐고 함께 살아가기를.


#3. 사랑을 유지시키는 신기술, 두 번의 결혼?

그런데 꼭 또 한번의 결혼이어야 했을까. 그보다, 그녀가 남2에게 느꼈던 것은 사랑이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상대의 도드라진 점만 보는 연애와는 달리, 결혼은 삶 자체가 포개지는 느낌이라고, 새로운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행복을 남2와도 나누고 싶다고.


어쩌면 그녀는 흔히들 결혼을 핑계로, 변화를 핑계로, 혹은 다른 무엇인가 적당한 핑계로 사랑이 식고 '情'으로

굳히기에 들어가는 관계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번에 두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있다, 혹은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말하는 거고, 평생에 걸친 '영원한 사랑'의 판타지는 여전히 흔들림없는 게다. (상대가 하나던 둘이던

간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 "평생 한사람만 사랑할 자신이 있냐"고 묻는 도발적인 카피는 사실 좀 초점이 엇나가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어쩜 덧없고 허무한 '사랑'의 불꽃을 계속 신선하고 뜨겁게 지켜내기 위해 다소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꼼수를 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이 사랑이었다고, 혹은 자기합리화라고 재단할 생각은 없다. 그건, 그녀와 사랑하는 자의 몫이다.


#4. 내게 묻는다면.

다만, 내가 그라면, 그녀를 이해하려고 애써보긴 하겠지만..끝내 못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이 하나가 아닐 수 있을까. 게맛살 쪼개지듯이 사람 맘이 두 곳으로 쫙 쪼개져서 둘다 진짜임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건 잠정적인 과도기일 뿐 결국은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도덕적으로 누구에게 미안하고

못할 짓이고 라는 식의 비난이 아니라, 결국 그 두 사람 모두에게서 외로움만 더 커지고 마음의 상처만 깊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한 명씩이었다면 그 순간 상대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으며, 또 자신의 것-"내꺼"-이라고 믿으며

한때나마 충일감을 느끼고 외로움을 떨쳤겠지만, 그런 기적과도 같은 마법을 온통 망쳐버리는 짓 아닐까.


그래서 나라면, '영원한 사랑'의 판타지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영원한 기간동안 그녀가 나와 또다른

남자를 사랑할 거라는 선언을 받아들여 그녀를 사랑할 자신은 없다. 물론 모, 닥쳐봐야 아는 일이지만.



덧댐. 아마도 '채털리부인의 사랑'에서 나왔던 대목을 차용한 거 같은데, 맨살-혹은 우비만 입고-로 소낙비

빗방울을 후두둑후두둑 맞으며 사랑하는 이와 야외 섹스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환타지, 그걸 실제로 남2와

했었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내가 이 영화를 그다지 강하거나 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이유다.


덧댐2. 손예진의 매력이란...그리고 뮤직비디오로 '요조'의 모닝스타가 쓰였는 줄은 몰랐다.


#1. 지워진 테입에 덧씌워진 '새롭고 오랜 기억'.
 
제리(잭 블랙)이 사고로 자석인간이 되고 나서 친구 마이크(모스 데프)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의 비디오 테입이

전부 지워진다. 그렇게 아무 내용이나 기억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 채 허망한 타이틀과 앙상한 시놉시스만 걸치고

남아있는 테입들이지만, 그들의 필사적이고도 기발한 재창조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롭지만 익숙한 무엇들을

품게 된다.


옛 영화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묘하게 코믹하고, 또 묘하게 감탄하게 만드는 그들의 새 영화들은, 마치 자신의

실수로던 어떤 이유로던 서둘러-예기치 않게-지워버린 과거의 사랑을 다시금 기를 쓰고 기억하고 각인해낸..

그런 결과물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큰 얼개와 스토리 전개는 비슷하다 해도, 자신의 입맛과 현재 상황에 맞춰

이리저리 각색되고 힘을 덜 빼고 더 넣은 장면들.


그들의 '새롭고도 낡은' 영화는 대박이 났다. 사랑이 지난 후의 '새롭고도 낡은' 기억 역시 대개 대박이 되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쩜 평생 품을 가슴시린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2. 지워지는 '파사익의 팻츠'에 덧씌워지는 '새롭고 오랜 기억'

비디오 가게 주인 플레처(대니 글로버)는 이 마을, 파사익(Passaic)과 자신의 가게가 있는 건물에 얽힌 '팻츠'란

재즈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하곤 했다. 사람들이 그 뮤지션을 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비감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라곤 마이크와 제리 뿐이었던 듯 하다. 건물을 철거하려는 당국의 시도에

끈질기게 저항해 보았지만 끝내 일주일 후 건물이 해체되기로 통보를 받은 날, 그는 사실 '팻츠'와 그 건물, 그리고

그 마을을 묶어주던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의 재구성. 신부님, 독실한 교인,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풀어내는 '구라'들이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펑, 소리내어 부정당할 뻔 했던 '팻츠'와의 이야기끈을 더욱 딴딴하고 풍요롭게 비끄러

매어주는 동앗줄이 되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불러낼 만큼 힘있는 '사실'이 된다.


그렇게 가게 주인 플레처가 지워 버리려던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이야기는 다시금 생명력을

얻고 또다시 '새롭고도 낡은' 기억으로 화한다. 그건 더이상 플레처가 말했던 그 내용과도 다르지만, 또 예전과

같이 얄팍하고 의미박약한 이야기도 아니다.



#3. 시간에 씻겨나가는 기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사실 'Be Kind, Rewind' 이 영화 코미디라고 분류되어 있다. 그냥 배우들의 재기발랄한 표정과 연기를 즐겨주고,

또 노골적으로 조악한 특수효과, 그렇지만 그 통통 튀는 상상력과 표현력에 탄복하며 살짝 마지막에서 감동해

주면 그만일 영화인데, 괜히 심각한 척 다른 데를 보며 되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비카인드 리와인드', 되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도로 의역될 수 있을까. 비디오 가게에 크게 적혀

있기도 한 이 제목은 그렇지만 괜히 이런저런 다른 생각으로 나를 계속 몰고 간다.

"종종 짜증나고 싫던 기억들, 다시 되감아 조금 더 여유롭고 아름답게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만의 기억이라 여겨지던 것, 다시 되감아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어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말입니다...


나만 가슴이 살짝 아프게 본 걸까. 모르겠다.



덧댐. 참, 영화를 다 보고 이 영화 출연진들을 일별하는데 깜짝 놀랬다. 시고니 위버가 나왔었다고..??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oscar@momo: 아카데미의 보석들]에서 상영된 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하다

놓쳤거나, 기대하고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그래도 몇 개 딱히 끌리지 않는 작품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더 레슬러". 제목만 봐도 뭔가 센스없어 보이고 무성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시놉시스를 약간 보니

대충 '은퇴한 레슬링 영웅의 눈물겨운 부활..' 그런 식의 뻔한 레퍼토리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 2008/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105분/청소년관람불가

은퇴한 노년의 레슬러의 눈물겨운 재기를 그려낸 작품으로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주연을 맡은 배우 미키 루크의 화려한 재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으며, 이미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미키 루크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쥘 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998년 장편 데뷔작 <파이>와 2000년 <레퀴엠>으로 영화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작이며, 1992년 <내 사촌 비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후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마리사 토메이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듯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면서, 두번째 여우조연상에 도전한다.(씨네아트 상영작 정보 中)


그렇지만 시간상의 제약으로 다소 체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던 이 영화는, 의외였다.

노쇠한 영웅의 재기..라는 뻔한 주제에 따라붙기 쉬운 뻔한 묘사들, 뻔한 동기 부여들에 더해 그냥 괜찮은 영화로

남는 게 아니라, 그나마 남아있는 삶의 안온한 부분들을 전부-자의던 타의던-던져 버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에센스로 바로 돌진하고 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느순간 자신의 지난 삶이 실은 자신의 황금기였음을 깨닫는 것 같다. 자신에게 현재 남아있는 건

소원해진 가족, 얼굴도 까먹은 친구들, 그리고 밥벌어먹고 사느라 망가져가는 몸뚱이, 그렇게 누추해진 삶일 뿐.

그러면 보통 며칠 싱숭생숭하다가 술 한잔 하고 풀기도 하고-더러는 눈물을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혹은

돌아올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있는 여행을 다녀온다거나..그렇게 어떻게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현재의

자리로 고분고분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건 뭐랄까, 추운 겨울날 아침 눈을 딱 떴을 때, 그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벗어나기 싫어 더욱 안으로 

파고 들듯..그렇게 '남아있는 행복'들에 집착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레슬러는 달랐다. 그나마 그에게 안온함을 주고 남아있는 삶의 행복쪼가리들이라도 꼭꼭 지키며 남은 삶을

방어하려는 자세를 굳힌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쳐진 링으로 돌아가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는 살이 깨끗하게 발라진 뼈다귀만 애꿎게 핥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진 않았던 게다.


그는 착하지도 않고, '사회성'도 떨어지며, 사람에 대한 속깊은 사랑이나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알았고, 다른 대체물들로 대리만족을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어나가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아마도 그 점이, 가게에서 쌍욕을 하고 자해를 하며, 스테플러 철심을 몸에 박아넣고 피칠갑을 하는 그를 끝내

연민하고 응원하게 되는 이유지 싶다.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막말을 하는 외톨이 레슬러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





운좋게도 위드블로그에 베타테스터로 선정되어 활동을 시작한 지 한달도 채 안된 기간에 적벽대전2, 레저베이션

로드, 더 레슬러 같은 영화도 볼 수 있었고,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 같은 책도 읽을 기회도 잡는 등 솔찮이 재미났던

게 사실이다.


물론 그때마다 리뷰를 남겨야 하는 건 다소 부담이 없잖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런 엄연한 외력을 빌어

자발성을 빙자한 리뷰를 써제끼면서 혼자 즐거웠으니 됐지 싶다. 내가 무슨 IT 첨단제품에 대해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얼리어답터도 아니어서 별로 신제품에 관심도 없고. 걍 클래식하게 영화나 책 같은 거나 보고

끼적대는 게 딱이다 싶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문득 오즈에서 체조위젯을 리뷰해달라면서 신청자를 받고 있다는 걸 보고 냉큼 신청해

버렸으니. 나도 몰랐지만 아마 사무실에서 온종일 엉덩이만 키우며 앉아있는 게 꽤나 무료했나 보다.


이제 보니 저런 식으로 신청을 해놨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름 사무실에서도 찌뿌드드한 몸을 펼 수 있는 몇 가지

쓸만한 동작들이 있어서 몇개씩 따라해 보다가 내게 가장 잘 맞는 운동을 찾아냈다.

바로 이민기의 졸음예방체조.


점심먹고 돌아와 앉으면 쏟아지는 졸음과 무기력증, 뻣뻣해지는 근육들의 아우성을 입막음하기 위한 나름의 비책.

구분동작으로 알아보고 실생활에 응용키로 한다.

이민기가 활짝 웃고 있는 첫 화면.
에헤이~ 남은 바빠죽겠는데 또 조신다~ (니가 뭘 안다고 에헤이~냐?ㅡㅡ+)
자, 따라해 보세요~ (너 이자식 계속 짝눈 뜨고 이러고 있다)
하나~
둘~
하나~ (반대편으로)
둘~
에헤이~ 왼쪽 어깨 따라가면 안돼요~ (나랑 대화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려는 꼼수 따위..통할지도.)
그렇지, 그렇게요! (친한 척 하는 건 맘에 안 들지만, 칭찬받으니 왠지 기쁘다는..)
상체는 세우시고요, (두 팔을 깍지껴 뒤로 젖히고는 아래로~)
(또 위로~)
어때요? 잠이 확 깨시죠? (이러면서 얼굴이 커졌다 작아졌다, 열심히 들이대는 민기)




남자들은 보통 군대를 다녀오면서 '엄마'라는 호칭을 떼어버리곤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갈아탄다고 한다.

그렇지만 첫휴가 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부모님께 제대로 '필승!'하고 경례 한번 한 적 없는 내 유별난 군대

혐오증 탓인지, 턱도 없이 군대를 빌어 뭔가 더 철든 척 하고 어른스러운 척 하기는 싫었던 터라

내게 엄마는 여전히 엄마다.


그런 엄마가 어느날 날 쿡쿡 찌르며 한번 읽어보라 했던 책.

누가 바라보는 건지, '엄마'도 아니고 '신'도 아닌 거 같은데, 뜬금없지만 집요하게 쓰이는 '너'라는 지칭에 다소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또 '엄마'란 존재가 또다시 자식들에게 헌신하고 남편에게 평생 봉사하고 모든 것을

다 챙기고 끊임없이 사랑을 퍼올리는 근원으로 이상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다소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찔끔이게 되는 건, 그 '엄마'에게서 스스로의 엄마 모습을 찾아내기 때문일 거다.


일찍 퇴근하는 날에도 늘 뭔가 약속이 있다며 주중엔 맨날 놀다가 늦게서야 집에 들어와서 피곤타고 짜증내고,

들어가 잔다고 뻥치고는 시덥잖은 컴터나 하고 앉아선 밤늦게 자기 일쑤고, 아침엔 혼자 못 일어나서 맨날

'오분만오분만~' 웅얼대는 게 일이고, '애미애비도 몰라볼 만큼' 술퍼마시곤 동네 놀이터에서 뻗어자기도 하고,

뭐 그런 것들. 그때마다 엄마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했다는 새삼스런 반성.


조금은 더 엄마한테 덜 틱틱거리고 덜 투덜거릴 수 있게 날 잡아 주겠지만, 또 다시 당신이 예전에 불리던 이름과

예전에 가졌던 꿈들에 대해 살짝 무뎌져 버리면 금세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책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동안이라도.

'엄마를 부탁해'라는 건,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게 그 피에타.

엄마를 부탁해 - 6점
신경숙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www.idoser07.blogspot.com


"19일 이 인터넷 사이트는 항불안성, 항우울성, 마약성, 진정제, 성적흥분 등 모두 10개 부문으로 나눠 73개의 아이도저 MP3 파일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마약성 부문에서는 코카인, 헤로인, 마리화나 등 모두 28가지의 마약을 느낄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이 파일을 들으면 해당 마약을 흡입한 것과 같은 환각 증상을 준다는 것."(09.02.19. 헤럴드경제)


사이버 마약이라고 해서 궁금했다. 대체 뭘까 싶어서, 우연찮게 알게 된 싸이트에 접속해 들어갔더니 수십개의

트랙이 무료로 다운로드가 가능하단다. 다소 시간을 잡아먹는 광고를 기다려 다운을 몇 개 받아서 들어보았더니

이게 뭔가 싶다. 중학교 다닐 때던가, 옆친구가 쓰던 엠씨제곱을 잠깐 빌려 들어본 느낌이랄까.


"사이버 마약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알파 파장(7~13Hz)과 지각과 꿈의 경계상태로 불리는 세타파(4~8Hz), 긴장, 흥분 등의 효과를 내는 베타파(14~30Hz) 등 각 주파수의 특성을 이용해 사실상 환각 상태에 빠져들게 하는 것으로 일명 ‘아 이도저(I-Doser)’로 불린다." (09.02.19, 헤럴드경제)


계속해서 삐이이이이~ 하는 소리가 약간의 파동을 치며,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쉼없이 들려온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살짝 꾸룩꾸룩거리면서 전혀 다른 파동과 빠르기로 옮겨가기도 하고.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어찌 마약을

느낄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미 우리는 뇌파에 자극을 주어 집중력을 강화하거나 긴장을 풀어주거나

할 수 있다고 공인된 기계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 않나. 뭔가 효과가 있겠거니, 참고 계속 들어봤다.

10분짜리 음악..이랄까 소리..랄까 다 끝나갈 때쯤 소리가 귓전을 쨍-하고 울리며 점점 고조되어 갈 때엔 뭔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들긴 했는데, 만약 이게 맞다면 정말 약한 것 같다.

기껏해야 빈 속에 말보로 레드를 두 대쯤 연달아 피웠던 느낌 정도? 아님 PVC파이프를 갈아 만든 듯한 중국산

담배를 소주와 함께 피우는 정도? 스트롱버전도 있다니 나중에 한번 해볼까 싶기도 하고.


뭐랄까, 어렸을 적 '전생여행'이라는 책을 사며 부록으로 전생으로의 퇴행이 가능하다는 정신과의사의 최면테입을

열심히 들어 보던 때가 자꾸 기억이 났다. 누워서 릴랙스하며 발끝부터, 손끝부터 긴장을 빼고 심연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가지려 애쓰다 보면, 어느 순간 숙면을 취하고 말았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도 나름 부작용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신문에선가, 신문에서 봤다는 친구의 입을 통해선가,

혹은 그 친구에게 들었다는 친구의 입을 통해선가, 어느 학교 학생들은 그걸 시도하다가 최면이 깨질 않아 병원에

실려 갔다느니, 심각한 정신적 충격이 있었다느니..모든 것들은 부작용을 수반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제쳐

놓더라도, 이렇게 뇌파를 직접 자극해서 감각을 상상시키는 시대가 오다니. 여기에 약간의 3D 입체영상만

구비된다면 마치 공각기동대에서 나올 법한 한 장면 아닌가 싶다. 가상이 실제를 조금씩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우려거니와, 살짝 머리가 아픈 거 같다. 하갸 실제 마약류도 두통이 수반된다고

들었지만.



뭐, 어쨌든 한번은 되었다 싶을 때까지 들어볼 생각이다.

생각있는 분들은 한번 시도해 보시길. 누굴 해하는 것도 아니고, 방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요 머.


요런 것도 있는데, 글쎄..궁금하신 분은 시도해 보시길. 정말 그 표정부터 공각기동대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관련기사 : '사이버 마약' 아이도저 급속 확산중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9/02/19/200902190199.asp)





어쩌다 보니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 VIP시사회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VIP로 대접받고

싶어하고, 행사가 있으면 헤드테이블에 앉겠다고 난리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치 그런 거다. 내가 뜬금없는

호텔 VIP로 대접받아 영화시사회에 초대받는 상황.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러고 보면 요새 영화는 전부 시사회에 초대받아 보고 있다. 요새 좀 그렇다.)


영화는, 사람 얼굴을 쉽게 외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소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인물을 깔아두면서 시작했다.

그들의 사랑이 때론 막 깨어져 나갔고, 진행중이기도 하고, 혹은 피어나는가 싶더니 피시식 꺼져버리는 이야기들.

그런 짧막한 에피소드들이 서로 하나씩 단서들을 물면서 연결되고, 누군가의 불꽃같은 사랑은 또다른 누군가에겐

결혼생활을 송두리째 회의케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감정에 빠진다는 것은,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취사선택을 요구받았던 두 개의 알약 중 하나를 삼켜야

하는 바로 그 타이밍에 빠져드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생활, 지금까지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뭔가 낯설고 거슬리는

균열을 발견하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다만 매트릭스의 알약과 사랑의 차이라면, 이번

'핑크 알약'은 한번 먹어서 될 일은 아니라는 거 아닐까.


소설 하나를 쓰는 기분으로 연애나 사랑을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감정의 변곡선의 위태위태한

궤적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어디서 언제쯤, 어떤 대사를 동원해 결말까지 써내리겠다는 다짐을 나 자신도 모르게

어느 시점에 했을 거라 자각했던 건, 늘 그 사랑이 지나고 난 바로 다음이었다. 그대로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해도,

사랑에 빠진 스스로의 감정을 즐기며, 그렇게 암묵적인 개요와 아웃라인에 맞춰 결말까지 숨가쁘게 한판 달리고

나선 문득 이건 자기애가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이기적인 '사랑'놀음을 깨고, 마치 영화에 나오는 알렉스가 지지에게 빠져버리듯 그렇게

최초의 '핑크 알약'을 맛봤던 그런 순간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퇴락하거나, 무의미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투적인 사랑이야기라기엔, 그리고 상투적인 변곡선들이 넘나들며 결국은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식의 뻔한

스토리라고 치부하기엔,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 커플(혹은 홀로 선 깨진 커플조차)의 모습이 이쁘다.

타인의 시각으로 보기엔 참 뻔하고 식상하고 닳고 낡은 이야기일지 몰라도, 지금 사랑에 빠져 있고, 그 사랑이

자신을 사랑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유치하고 이기적인 수준이 아니라면, 그 둘만의 이야기는 참 충만하고

내밀한 달콤한 소근거림으로 가득할 거다.


마침 발렌타인 데이란 게 다가왔고 또다시 솔로들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겠지만,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들은 부디 자신들의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소근대기를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어딘가엔

"He's just not that into you"라는 살벌한 가능성이 으르렁대며 웅크리고 있을지라도, 그저 매순간 진심을 따라

행동한다면, 그리고 그 진심에 감응한 또다른 진심이 용기를 낸다면,


He can be absofuckinglutely that into you. 비록 언젠가 마침표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찍게 될지라도.



강준만 교수의 글은 대학 다닐 때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었던 그의 말마따나 그의 글은

시간의 힘을 오랫동안 이겨낼만큼 깊이있고 섬세하게 다듬어졌다기보다는, 시사적인 이슈에 맞춰져 다작으로

승부하겠다는 느낌이 짙었던 탓이다. 아마도 그런 탓인지 다소 까칠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말글같은 그의

줄글에 담긴 내용이란 현상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제기, 혹은 약간 더 치고 나간 정도의 이야기정도라고

생각했었다. 조선일보에 대해서나 학벌문제에 대해서나 지역갈등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이 책은 제목을 어디선가 들었을 때부터 꼭 한번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과 지방 사이의

간극이란 문제에 대해서 좀 관심이 뻗어있을 때기도 했고, 외교학과(라고 쓰고 국제정치학과 혹은 국제관계학과라

읽어야 할 거다)를 나온 탓에 어디서 줏어듣기는 한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의 개념을 빌어 한 나라의 중앙과

지방 사이의 문제를 논하려 하는 듯한 아이디어 자체가 참신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필명을 얻었을

때 쓰던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풍모가 그대로 묻어나는 제목, "지방은 식민지다." 그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다.


'내부식민지론'은 한 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중앙과 지방 간의 극심한 총체적 격차가 구조화되어 급기야 지방이

중앙의 발전 및 유지를 위한 착취의 대상, 즉 식민지로 기능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최장집교수 등이 이러한

내부식민지론을 한국에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경우 환원론에 빠질 수 있다는 비판하는 데 대해, 강준만교수는

풍부한 사례를 들어 강력히 반박하고자 한다. 교육, 경제, 사회, 문화, 정치..그 어느 면에 있어서나 한국 사회의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주요한 사회 모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의 자잘한 칼럼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그에 더해 지방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라는 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지방 언론이

가져야 할 마땅한 책무와 역할에 대해 유독 강조하고 있다. 물론 지방언론이 실제로 지방 자치제도와 경제성장의

도모, 기타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침 이 책을 다 읽어갈 즈음, 설날을 맞이해 '지방'이 모처럼 방송 앞머리를 장식했다. 휴식과 여가의 공간이자

도시인들(서울사람들)의 향수와 감정적 치유의 원천으로 남겨진 공간,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원형적 전통과

문화, 그리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환경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고 믿어지는 그곳. 그곳으로 도시인들은 꾸역꾸역

밀려내려갔고, 또 다시 '출세를 위한 공간', '한국의 중심' 서울로 되밀려 꾸역꾸역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잠복했던 한국의 지방은, 강호순이 지방의 야산과 한적한 국도를 휘저으며 연쇄살인을 저지를 때에야 또 방송에

출현하고 있는 거다.


그의 짧은 칼럼들을 교육, 정치, 언론 등 큰 주제에 따라 모아놓은 이 책에는 반짝거리는 아이디어와 당장 실천

가능할 법한 방책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다. 서울 소재대학들이 경쟁우위를 갖는 것은 바로 서울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고 일갈하면서 그것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쓰자는 이야기나, 지방에 난립해 있는

토호친화형 언론들을 솎아내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소수의 언론을 밀어주자는 이야기, 그리고  연고주의를

강고하게 재생산하는 비공식적 집단들인 동창회, 향우회 등이 차라리 공익적인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조금은 쇄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등등.


그 모든 이야기들은 언제나 원칙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의 회의적이고 시니컬한 반응을 유발할지 모른다.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거나 임기응변에 불과하다는 식의 참 쉽고도 힘빠지는 비판말이다. 그걸 의식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는 매 칼럼마다 꼭 지레 항변하곤 한다. 이것 말고 실제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더 좋은 대안이

있다면 말해달라. 무릎꿇고 경청하겠다, 하고.


안타까운 건, 그렇게 현실적인 제약을 십분 고려하고 원칙을 어느 정도 양보하며 제시하고 있는 그의 대안들조차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다. 그는 지방자치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기제를 이야기했지만 외려

지방자치제도 자체를 폐기하거나 유명무실화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설득력을 얻으며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는 지방문화와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매끈한 '서울공화국'에 약간의 균열을 희망하며 그 모루와

망치로써 지방 언론을 주목했으나, 오히려 지방 언론들은 전부 말라죽어버리거나 더욱 지방 토호와 협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 그가 말한 내부식민지로서의 지방이 중앙에 상납해야 할 몫은 점점 커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강준만 교수는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원칙을 좀더 양보하고 보다 유연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다시

궁리해 낼 것인가, 혹은 다시 원칙을 내세우고 다소 선동적이고 비타협적인 이야기-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소간 선정적일 이야기-를 할 것인가. (어떤 경우든 그는 그가 제시한 '내부식민지론'이 강고해진다는 점에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등장 초기에 비해 조금씩 힘이 빠지고 퇴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식의 진동을 그가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대안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딪히게 될 한국의 완고하고도 답답한 현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방은 식민지다! - 8점
강준만 지음/개마고원


* 스포일러가 약간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스포일러는 뭐니뭐니해도 "손수건을 준비하라"는 팁..이 아닐지.


사랑하는 열 살짜리 아들이 한순간 눈앞에서 스러져 버렸다. 그것은, 처음에는 사고였다.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을 가누어가는 남은 세 가족, 에단, 그레이스, 그리고 딸-여동생이 있다.

에단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비난할 사람을 찾고 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아들의 부재, 그런 당혹스럽고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누구인지, 누가 그의 아들을 치고 도망갔는지 밝히고야 말겠다며 광기에 가까운

집념과 증오심을 불태운다. 어쩌면 그건 그의 아내 그레이스가 자칫 자책감을 갖지 않을까 염려해서, 혹은

자신조차 아내에게 원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억지로 몰고 나간 감정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레이스는 이미 떠난 그녀의 아들을 정리하고 남은 가족들을 잘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며, 핸드헬드로 촬영되어 연신 경련하듯 흔들리는 화면은 그녀의 바스라질 듯한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더이상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니 법적 절차니 운운하며 떠난 아이의

아픈 기억을 들추는 건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아픔을 참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고 입술에 힘을 주며,

그 슬프고 힘겨운 바람이 멎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는 느낌. 보고 있는 것조차 너무 아팠다.


사이좋던 오빠를 잃은 여동생은, 영문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 꼬맹이지만

또 하늘에 있을 오빠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바칠 줄도 아는 녀석이다. 어쩌면 죽음 앞에서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라는 식의 당위 없이 있는 그대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또 보낼 줄 아는 게 아이들 아닐까.



그 사고로 인한 슬픔을 가누어가는 또다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고를 살인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고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었던 그였는지라, 실수로 쏟아버린 물처럼

의도치 않게 벌이고 만 사고는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 괴로움을 안기고 만다. 그렇게 그가

괴로워하면서 시간을 끌고, 거의 반사적으로 증거를 은폐하고, 또 겨우 짜낸 용기도 무성의한 경찰들 앞에서

사그라들어 버리면서 타이밍을 놓치는 사이, 그 사고는 살인으로 바뀌어 간다.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그의 압박감과 죄책감, 그리고 어느새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걸 둔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끼도록 바꿔버리는 시간의 강력한

산화력에 대항해서, 그와 에단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된다. 마주치면서 조금씩 높아지는 가슴의 떨림, 그리고

그 진동을 상대가 눈치채면서 이야기는 폭발하듯 터져오르는 순간으로 급속히 달려나간다.


비극이란 건, 단순히 이야기가 슬퍼서 비극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그 인간의 숙명같은 것..뭐랄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뒤얽히고 결국은 옴쭉달싹 못하게 되는 그런 '통발'같은 스토리를 이른다고 했다.

어느 한편을 들어서 쉽게 다른 한 편을 손가락질하고 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더욱 가슴이 답답하고 꽉 메이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게 만드는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의 비극.



모두가 아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 사고라면, 누군가에게 아픔을 적극적으로 떠넘기는 게 살인 아닐까.


결국 한 아이의 사고는 남은 가족들이나, 그 죽음을 직접 초래하고 만 당사자, 그리고 그의 남은 가족들에게 모두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을 남긴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그 사고, ACCIDENT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걸 다른 단어가 아닌 '사고'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고와 살인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은 자들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모두 전가해버리려는 의지를 갖고 행하는 건 범죄, 살인.

그리고 남은 자들의 아픔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모르쇠하려는 게 아니라 기꺼이 내 몫을 나누어 받겠다는 자세라면

실수, 사고.


사고를 낸 드와이트, 죽은 아들의 부모인 에단과 그레이스가 모두 '인간'이어서 다행이다. 그들은 삶을 살아나가다

예기치 않은 사고를 맞닥뜨렸으며, 그들 모두 그 사고의 피해자였던 것 아닐까..



* 삼국지 내용이야 다들 알 텐데 굳이 스포일러를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다만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듯 오우삼이란 이야기꾼은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고 드러내고 싶었는지를 느낀대로 말하는 정도랄까요.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주말의 명화 시간에 몇 번이고 봤던 영화가 몇 편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벤허'도

질릴 줄 모르고 봤던 작품들이었지만 무엇보다 The Towering Inferno, 한국어 제목으로는 심플하게 '타워링'을

빼놓을 수 없다.


재난이라고 하면 으레 폭풍, 해수면 상승, 우주인, 화산폭발..같은 어느정도 인력을 벗어난 것들을 다루고 있는

영화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가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대화재에 휩싸인
 
초고층건물에서 쥐잡듯 몰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주 조그마한 스파크에서 시작해 급기야 초고층빌딩

전체를 거대한 횃불처럼 살라먹으며 세 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 내내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불(火). 위협적으로 시뻘겋게 낼름이는 화염의 이미지가 어찌나 강렬하게 남았던지, 초등학교

혹은 이후의 유년시절에서도 화재방지 포스터 같은 걸 그릴라치면 가장 먼저 '타워링'의 장면들이 오버랩됐더랬다.

"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흔히 나관중 삼국지의 스토리에 익숙한 사람들이건 아니건 큰 상관없도록 한

배려인 건지, 영화는 삼국지의 전체적인 맥락과 큰 그림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이야기를

살짝 단순하게 변주한다는 느낌이다. 한국에서야 삼국지를 열여덟번 읽어야 서울대를 간다느니 하며 위풍당당한

동양의 고전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시 삼국지가 익숙치 않을 넓은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오우삼감독이라

그런지 이야기하는 데에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적벽대전 1'을 보지 않은 사람조차 그다지

영화를 따라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니까. 2편 스토리도 사실 크게 복잡하지 않은 게, 화계를 사용한 이후의

전쟁씬을 묘사하는 데 더 열중하는 듯.


물론 등장해야 할 사람들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천하삼분지세를 유지할 조조, 공명, 주유의 세 축을 비롯해

유비 삼형제, 손권, 조자룡, 감녕, 채모, 장윤, 화타..등등에 더해, 주유의 아내인 소교, 그리고 손권의 여동생인

'돼지' 상향과 숙재던가, 바보스럽고 우직하지만 축구를 잘해 천부장이 된 조조의 병사가 새롭게 비중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 역시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긴 시간동안 영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주인공은 불(火)이다.

바람의 힘을 빌어 화계를 쓰겠다고 양 진영에서 모두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부터, '적벽대전'이라 후세에 알려진

그 처참한 싸움이 있었던 전장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건대, 통제불가능한 수준의 대화재를 조장하고 방기한

거대재난지역으로 예정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애초 불화살과 화염탄의 성능을 키우지 못해 안달내던 감녕이 전장에서 마주치게 되는 건, 이제 더이상 사람이

손쓸 도리도 없을 만큼 자체의 생명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화마(火魔) 그 자체다. 조조군이나 손권군, 소속을

불문하고 화염이 무차별하게 너울지며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새삼 망연하고 경악스럽다.

그런 질린 듯한 표정의 끄트머리를 타고 얼굴에 선연해지는 결기, 혹은 광기의 힘을 빌어 그들은 앞의 상대를 베고

찌르고 자르고 부수고 으깬다.

의외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이미 주인공 노릇에 진부할 대로 진부해진 거물 정치인들이 아니라 손권의

여동생 상향과 그 '착한 멍청이' 숙재인지도 모르겠다. 조조의 노련한 선전선동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환자들이

'승! 리!'를 거푸 외치며 전의를 불사르는 모습은 그 정도의 정치적 깜냥도 안 되어서 '오해다'란 말을 유행어로

미는데 정신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뿐, 왠지 기괴하고 불편해 보였다. 그에 반해 이름조차 몇번 나오지 않는

숙재는 단지 세금을 삼년간 면하고 먹고 싶은 걸 맘껏 먹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줏대있는' 젊은이다. 그와 상향은 마치 에반겔리온이 AT-필드를 무력화시키듯이

소속과 명분의 이데올로기 싸움을 뻘쭘하게 만드는 소소한 연애담과 이벤트들로 사람냄새를 폴폴 피운다.

우연찮게도 그들은 모든 걸 덮치고 불살라 버리는 탐욕스런 불길이 빚어낸 재난에서는 한발 빗겨서 있는 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들이 비극적 결말을 피하는 데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비록 영화 자체는 조조가 무도한 역적으로, 주유와 공명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는 식으로, 게다가 주유는

천하삼분지계를 위해 조조를 살려두고 말았다는 식으로 다소 가치판단을 유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그들은 정치인. 혹은 지배계층. 혹은 권력자.

조조에게, 주유에게, 그리고 공명에게 불을 이용한 화계라는 건, 각자의 명분을 실현하고 이익을 취하기 위해

기꺼이 마수(魔獸)를 풀어버릴 수 있다는 판단을 전제한다. 그 마수에게 어느순간 통제권을 빼앗기고 적과 내가

동시에 쫓기는 상황이 될지라도,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화마(火魔)를 불러내겠다는 그런

권력욕과 광기어린 정복욕은 불길이 과시하는 끝없는 탐욕과 순수한 비인간성과 통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유는 마지막에 신음을 토해내듯 말한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없다고. 애초 유황을 실은 배

몇 척으로 시작했던 화계가 어느 순간 온 바다와 산야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번져오른 데에 대한 자각이나

반성이었을까. 복잡한 눈빛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읽혔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소개 사이트에 보이는

이 영화에 대한 시놉시스(http://cinema.ticketlink.co.kr/detail/place_end01.jsp?pro_cd=A0009565)는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란 사건에 대한 요약일 뿐 이 영화 자체에 충실한 시놉시스라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불타오른다, 는

그야말로 딱 떨어지는 표현 하나를 제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하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인간이 불러내고 만들어낸 재난에 대한 영화이자, 그 권력자입네 하는 인간들
 
자체가 다른 이들의 삶을 재앙에 빠뜨리는 재난임을 말하려고 한 영화는 아닐까. 조조군에 혈혈단신 찾아갔던

소교가 무지막지한 칼날 앞에서 하릴없이 횃불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장면이 자꾸 눈에 밟혔다. 주유의 아내가

아니라 백성을 대표해 조조 앞에 나섰다고 했던 그녀가 들고 있던 불은 고삐가 매인, 잘 통제되어 무섭지도 않은

그런 잔불이었다.




* 스포일러의 가능성은 없지 않으나...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훨씬

불쾌하지만) 질문이다...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우리에게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주진모는 왕이다. 그가 키워낸 호위무사 조인성은 그의 다정한 연인이다. 그들은 사랑한다.


왜 그들이 사랑하게 된 건지는 중요치 않다. 조인성이 어렸을 적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또랑또랑 말했을 때

시작된 건지, 갸름한 선의 어여쁜 아이가 칼을 휘두르며 수련하는 모습에 맘이 움직인 건지는 모른다. 그리고

조인성이 왜 주진모를 사랑하게 된 건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왕을 왕으로 받들고 아끼고 모셨을 뿐인데 왜

사랑하냐고 물으신다면.."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 왕 주진모에 대한 사랑은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 그들의 사랑도 이유없이, 마치 땅속에서 버섯이 솟아오르듯 문득 생겨났을
 
뿐이다.


그들의 다정하고 때로 후끈하지만 샤방샤방한 공기는, 그렇지만 이미 곳곳에 이물질이 침투하고 있었다.

원나라에서 온 왕후 송지효는 두 남자의 밀도높은 관계 속에 쐐기처럼 박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가 하면,

건룡위의 총관 조인성이 왕 주진모에게 입고 있는 총애를 질투하는 부총관도 도끼눈을 뜨고 있고, 후사가 없는

왕의 자리와 권세를 노리는 권문세족들도 호시탐탐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왕의 패착..이랄까. 핀치에 몰린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그리고 서로의 감정에 대해 굳은

확신이 있었다고는 해도, 주진모는 그와 조인성의 사랑을 "시험에 들게 했다." 사랑을 과신해서 함부로 휘두르다

자신도, 상대도 온통 상처투성이로 뻘밭에서 뒹구는 꼴을 많이 봤다. 곱게 품고 아끼고 소중히 다뤄도 언제고

깨지기 십상인 그 레어아이템을 덥썩 '욕정' 혹은 '또다른 사랑'과의 무한경쟁에 돌입시킨 남자 주진모.

사랑이란 감정이 세계일류를 지향할 것도 아닌 바에야 왜 다른 것들과 비기고 재어가며 질투하게 만드는 건지,

왕은 결국 자신이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던 상황에 스스로 갇혀버렸음을 깨닫는다.


"관계의 중심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나는 너를 원한다/나는 너를 원하지 않는다-양쪽 메시지 모두

그것이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이 시점에서 연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짝에게

다시 구애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낭만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대책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대한 응답을 강요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꾀를 부리기도 하고, 그

앞에서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그는 합방을 떡밥으로 조인성과 송지효를 시험에 들게 하고, 모든 것을 왕의 뜻에 따를 것임을 스스로 고백케

하며, 대식국의 말과 그림, 달콤했던 추억의 환기를 통해 조인성을 자신에게 비끄러매어두고자 당근을 내건다.

동시에 그는 검이 술(術)이 아니라 혼(魂)이라며 갈구기도 하고,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아마도 조인성의 사랑)을

이미 잃었는데 너의 목숨을 취해서 무엇하냐며 삐지기도 하고, 조인성과 송지효의 또다른 사랑을 '욕정'이라

이름하도록 위협하기도 한다. 그는 조인성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당연하다 여긴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라 믿지만, 사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할 방법이란 없다. 그게 불안하다.


그리고 미쳐돌아가는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통 뿌연 흙탕물로 흐트려놓듯 왕 주진모가 스스로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국사를 팽개치고 조인성에 대한 낭만적 테러리즘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왕의 여자 송지효에 대한 조인성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주진모와 송지효 그 둘 모두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 어정쩡한

포지셔닝은 주진모에게 신기루를 보여준다. 이건 욕정에 눈이 먼 한순간의 실수일 뿐이라고. 금방 원래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우리의 사랑은 결국 어려움을 겪고 한뼘 더 성장할 거라고. 실제로 더욱 격해지는 건 주진모의

집착, 그리고 질투일 뿐. 이제 어떤 식의 파국이 진행될 것인지의 문제만 남겨놓고 있었다.


"테러리스트가 된 연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을 길이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쓸모없다

해서 그 일을 반드시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꼭 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송지효는 왕후다. 그녀가 한때 질투하던 조인성은 왕의 호위무사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한다.

시작이야 어떻든, 굴욕감을 참으며 미동도 않던 그녀가 어느순간 입술을 열고 몸을 움직이며 사랑을 시작했다.

옆방의 왕이 문을 몰래 밀치고 숨어서 보든말든, 왕의 남자 조인성은 또다른 사랑이 왔음을 깨달았다. 왕은

그의 뿌리를 뽑아내고, 급기야 왕후의 목을 성벽에 내걸어 극도의 질투심이 담긴, 극한의 테러를 가한다.


그렇게 다시 눈앞으로 조인성을 불러내고는, 그는 다정히 묻는다. 왜 이제야 왔냐고. 여기 좀 앉으라고.

그는 기껏 조인성을 눈앞에 불러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그는 너무 많은 것을 흐트려 놓았고,

너무 많은 것들을 망쳐놓았다. 조인성에게 기대할 수 있던 건 단지, 단한번도 당신에게 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는,

당신을 정인이라 생각했던 적이 단한번도 없었다는 표독하고도 가슴에이는 대답뿐.


주진모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린다. 그는 못 보겠지만 나는, 그 독한 대답을 듣는 주진모만큼이나 독한 대답을

해내고 만 조인성의 눈빛도 심하게 부서지고 있음을 본다. 아마 그들이 서로의 부서진 눈빛과 마음을 알아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거다. 이미 그들의 사랑은 시험에 처했고, 수명이 다했고, 결코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망연하게 찢기는 주진모의 마음이 담긴 화폭, 부서져내리는 한때 그들이 뒹굴던 침소, 그리고 마치 푸닥거리하듯

온통 깨어지고 부서지는 그들의 내밀한 공간..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 서로의 심장에 칼을 후벼박고는

양패구상해서 둘다 무너져내리는 넝마같은 결말밖에는. 그리고 왠지 모를 후련함. 실컷 상처입고, 실컷 힘들어하고

그리고 바닥까지 온통 지랄같이 휘저어 흙탕물 범벅을 만들어놓고는 '이제 됐다'싶은 느낌.


"나는...사랑을 강요할 의지를 잃었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그건 어쩌면 비통한 체념. 아니면...자신의 마음을 상대에 강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의 후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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