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의 가능성은 없지 않으나...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훨씬

불쾌하지만) 질문이다...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우리에게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주진모는 왕이다. 그가 키워낸 호위무사 조인성은 그의 다정한 연인이다. 그들은 사랑한다.


왜 그들이 사랑하게 된 건지는 중요치 않다. 조인성이 어렸을 적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또랑또랑 말했을 때

시작된 건지, 갸름한 선의 어여쁜 아이가 칼을 휘두르며 수련하는 모습에 맘이 움직인 건지는 모른다. 그리고

조인성이 왜 주진모를 사랑하게 된 건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왕을 왕으로 받들고 아끼고 모셨을 뿐인데 왜

사랑하냐고 물으신다면.."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 왕 주진모에 대한 사랑은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 그들의 사랑도 이유없이, 마치 땅속에서 버섯이 솟아오르듯 문득 생겨났을
 
뿐이다.


그들의 다정하고 때로 후끈하지만 샤방샤방한 공기는, 그렇지만 이미 곳곳에 이물질이 침투하고 있었다.

원나라에서 온 왕후 송지효는 두 남자의 밀도높은 관계 속에 쐐기처럼 박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가 하면,

건룡위의 총관 조인성이 왕 주진모에게 입고 있는 총애를 질투하는 부총관도 도끼눈을 뜨고 있고, 후사가 없는

왕의 자리와 권세를 노리는 권문세족들도 호시탐탐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왕의 패착..이랄까. 핀치에 몰린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그리고 서로의 감정에 대해 굳은

확신이 있었다고는 해도, 주진모는 그와 조인성의 사랑을 "시험에 들게 했다." 사랑을 과신해서 함부로 휘두르다

자신도, 상대도 온통 상처투성이로 뻘밭에서 뒹구는 꼴을 많이 봤다. 곱게 품고 아끼고 소중히 다뤄도 언제고

깨지기 십상인 그 레어아이템을 덥썩 '욕정' 혹은 '또다른 사랑'과의 무한경쟁에 돌입시킨 남자 주진모.

사랑이란 감정이 세계일류를 지향할 것도 아닌 바에야 왜 다른 것들과 비기고 재어가며 질투하게 만드는 건지,

왕은 결국 자신이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던 상황에 스스로 갇혀버렸음을 깨닫는다.


"관계의 중심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나는 너를 원한다/나는 너를 원하지 않는다-양쪽 메시지 모두

그것이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이 시점에서 연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짝에게

다시 구애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낭만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대책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대한 응답을 강요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꾀를 부리기도 하고, 그

앞에서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그는 합방을 떡밥으로 조인성과 송지효를 시험에 들게 하고, 모든 것을 왕의 뜻에 따를 것임을 스스로 고백케

하며, 대식국의 말과 그림, 달콤했던 추억의 환기를 통해 조인성을 자신에게 비끄러매어두고자 당근을 내건다.

동시에 그는 검이 술(術)이 아니라 혼(魂)이라며 갈구기도 하고,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아마도 조인성의 사랑)을

이미 잃었는데 너의 목숨을 취해서 무엇하냐며 삐지기도 하고, 조인성과 송지효의 또다른 사랑을 '욕정'이라

이름하도록 위협하기도 한다. 그는 조인성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당연하다 여긴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라 믿지만, 사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할 방법이란 없다. 그게 불안하다.


그리고 미쳐돌아가는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통 뿌연 흙탕물로 흐트려놓듯 왕 주진모가 스스로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국사를 팽개치고 조인성에 대한 낭만적 테러리즘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왕의 여자 송지효에 대한 조인성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주진모와 송지효 그 둘 모두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 어정쩡한

포지셔닝은 주진모에게 신기루를 보여준다. 이건 욕정에 눈이 먼 한순간의 실수일 뿐이라고. 금방 원래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우리의 사랑은 결국 어려움을 겪고 한뼘 더 성장할 거라고. 실제로 더욱 격해지는 건 주진모의

집착, 그리고 질투일 뿐. 이제 어떤 식의 파국이 진행될 것인지의 문제만 남겨놓고 있었다.


"테러리스트가 된 연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을 길이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쓸모없다

해서 그 일을 반드시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꼭 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송지효는 왕후다. 그녀가 한때 질투하던 조인성은 왕의 호위무사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한다.

시작이야 어떻든, 굴욕감을 참으며 미동도 않던 그녀가 어느순간 입술을 열고 몸을 움직이며 사랑을 시작했다.

옆방의 왕이 문을 몰래 밀치고 숨어서 보든말든, 왕의 남자 조인성은 또다른 사랑이 왔음을 깨달았다. 왕은

그의 뿌리를 뽑아내고, 급기야 왕후의 목을 성벽에 내걸어 극도의 질투심이 담긴, 극한의 테러를 가한다.


그렇게 다시 눈앞으로 조인성을 불러내고는, 그는 다정히 묻는다. 왜 이제야 왔냐고. 여기 좀 앉으라고.

그는 기껏 조인성을 눈앞에 불러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그는 너무 많은 것을 흐트려 놓았고,

너무 많은 것들을 망쳐놓았다. 조인성에게 기대할 수 있던 건 단지, 단한번도 당신에게 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는,

당신을 정인이라 생각했던 적이 단한번도 없었다는 표독하고도 가슴에이는 대답뿐.


주진모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린다. 그는 못 보겠지만 나는, 그 독한 대답을 듣는 주진모만큼이나 독한 대답을

해내고 만 조인성의 눈빛도 심하게 부서지고 있음을 본다. 아마 그들이 서로의 부서진 눈빛과 마음을 알아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거다. 이미 그들의 사랑은 시험에 처했고, 수명이 다했고, 결코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망연하게 찢기는 주진모의 마음이 담긴 화폭, 부서져내리는 한때 그들이 뒹굴던 침소, 그리고 마치 푸닥거리하듯

온통 깨어지고 부서지는 그들의 내밀한 공간..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 서로의 심장에 칼을 후벼박고는

양패구상해서 둘다 무너져내리는 넝마같은 결말밖에는. 그리고 왠지 모를 후련함. 실컷 상처입고, 실컷 힘들어하고

그리고 바닥까지 온통 지랄같이 휘저어 흙탕물 범벅을 만들어놓고는 '이제 됐다'싶은 느낌.


"나는...사랑을 강요할 의지를 잃었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그건 어쩌면 비통한 체념. 아니면...자신의 마음을 상대에 강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의 후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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