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라기보다는 그저 한없이 휴일에 가까웠던 느낌의 토요일, 일요일을 보내면서 얼마전 친구가 강력히 추천해

주었던 해롤드와 쿠마(Harold and Kumar) 1, 2를 한꺼번에 잡아보았다.


#1. 등장 인물

주인공 해롤드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40년전 미국에 자리잡은 부모의 이민 2세대라는 설정이다. 영화속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이리저리 치이는 모습과 함께, '계집애같고 공부만 잘하는 조용하고 왜소한' 동양계 남자아이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1탄 첫 장면에서 멍청해보이는 잠자리 안경을 끼고 어리버리한 표정을 짓던 그가

주인공이라니, 왠지 한국인(동양인)보다 얼굴근육이 네 개나 많다는 서양인들 사이에서 너무 어수룩 일변도라거나

표정이 쩔어 보이진 않을까 걱정했었지만 JOHN CHO, 피플지가 뽑았던 가장 섹시함 미혼남성 중 하나로 뽑혔던

그의 내면/외면 연기 모두 맘놓고 즐기기에 충분.



쿠마 역의 KAL PEN, 완전 마리화나에 쩔어 사는 약쟁이에 어떤 상황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무한한 낙천성까지.

병원 의사로 성공한 아버지와 형 못지 않은 훌륭한 의학적 재능과 머리를 지녔지만 소수민족으로서의 피해의식은

의외로 매우 예민하다. 인도계인 그의 검은 피부와 수염이 2탄에서 암스텔담행 비행기 안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그것과 오버랩되는 대목도 있지만, 이 친구와 마리화나 봉다리가 사랑을 나누고 심지어 쓰리썸을 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듯.

그리고 Neil Patrick Harris. 어렸을 적 동경하면서 보았던 야무진 천재소년 두기의 그 두기가 어른이 되었다.
그것도 보통 어른이 아니라, 여성의 엉덩이에 자신의 이니셜인 N.P.H 낙인을 찍어버리는 변태적 취향의

섹스 중독자랄까. 실제로는 그가 2006년경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란 걸 알고 있다면 영화속 그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더욱 빛을 발한다. 1탄과 2탄에 걸쳐 주인공 해롤드와 쿠마의 멋진 조연 역할을 하며 끊임없이 발정난 두기.



#2. 1탄..Go to White Castle..

스토리는 별거 없다. 1탄은 시덥잖은 화장실 유머와 섹스, 약에 대한 만담이 즐비한 가운데 티비에서 식욕을 마구

자극하는 '화이트 캐슬'의 햄버거를 먹기 위해 감옥에 갇히고, 차를 도둑맞고, 치타를 만나고, 절벽에 쫓기고, 그런

와중에도 끊임없이 약(마리화나)을 해대고, 약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그리고 결국은 햄버거를 먹는다는

하룻밤 이야기. 그들은 감옥에 갇히면 탈옥을 하고, 치타를 만나면 치타를 타고, 절벽에 몰리면 행글라이딩을

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스토리를 이어나간다. 웃기는 건 그런 말도 안 되는 툭툭 지르는 스토리가 외려

조심스럽고 설득력있게 보이려 애쓰는 왠만한 영화들보다 더욱 유쾌하고 흡인력있다는 사실.

동물원을 탈출한 치타를 만나서 한바탕 게거품물며 호들갑을 떨어주고는, 치타와 함께 마리화나를 피우는 장면.

치타 입에서 한오라기 연기가 피어오르는 순간 뻥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엉성한 씨지. 노골적으로 '나 싸구려B급보다 못한 영화다', 혹은 '초저예산 영화다'라고 광고하는 듯한

이 용가리보다 백만배 못한 씨지는 어쨌건 해롤드와 쿠마가 마리화나 동료 치타를 타고 달리고 있다는 의미 전달에

전혀 문제없이 성공. 치타와 두 사람과 배경을 되는대로 합성해놓은 듯한 따로 노는 그림에 몰입도가 떨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그 뻔뻔한 대담함에 더욱 매료되어 버렸다.

영화의 대미가 이런 거다.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화이트 캐슬'에 도착해서는, 인당 햄버거 40개에 콜라 5잔씩 먹고

우는 장면. 물론 운다는 따위의 감정적인 누수 장면은 1초도 안 되어 사라지고 또다시 모든것을 희롱하고 마냥

덮어놓고 놀려먹는 분위기로 돌아간다. 전혀 엄숙해야할 필요도, 심각할 겨를도 없는 영화. 그렇다고 단순히 머리

식히려 보는 킬링타임용 영화가 아니라, 그냥 그런 퍽퍽 치고 나가는 것 자체를 긍정하는 것 같은 영화다.


#3. 2탄..Escape from Guantanamo Bay

1탄에 이어 4년만에 나왔다는 2탄, 바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암스텔담에 가면 마리화나가 합법이라며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1탄 마지막 대사를 치고는 바로 이어 2탄 첫머리에선 샤워를 하고 여행가방을 싼다.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잠시를 못참고 마리화나를 피우려다 테러범으로 몰려 도착한 관타나모 수용소..분명히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좌라거나, 우라거나 진지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국토안전부와 네오콘을 시종일관 놀려

먹으면서도, 정색을 한 메시지나 시사하는 바 따위는 찾기 힘들고 그저 과장된 근엄함과 진지함을 비틀기에

매진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이들이 뛰고 있는 링의 타이틀은 '정치적 좌파 대 정치적 우파'쯤이 아니라

아마도 '도덕적 엄숙주의 대 발랄한 유치찬란함' 정도로 붙어야 할 듯 싶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탈출해 플로리다 해안에 상륙해 텍사스까지 향하는 이들의 여정, 그들을 치졸하게 쫓고 있는

거대한 국가기관가 막 성공할려는 찰나 진중권의 표현을 빌건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

뜬금없이
호출된 부시대통령의 한마디에 눈녹듯 사르르 해결되어 버린다. 내 생각에 부시 대통령이 나와서 아버지

부시에 욕을 하고, 체니 같은 아버지 부시 친구에게 기죽고 지내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을 비판하기 위함도, 9.11 테러 이후 반민주적 퇴행을 야기한

그의 보수적 태도를 비난하기 위함도 차라리 부차적인 것에 불과한 거다.

바로, 부시 대통령마저 마리화나에 환장하는 약쟁이로 묘사하는 것. 부시가 2탄의 이야기를 끌고 나간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세팅된 것은, 다만 그가 해롤드 & 쿠마와 함께 마리화나 연기를 퐁퐁퐁 마시며

헤실헤실 웃어대는 장면을 담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이 얼마나 유쾌하고 상쾌한 장면인지.

그리고 이 멋진 질문. 당신이 이걸 그렇게 좋아하면, 왜 합법화시키지 않는 거죠? 쏘쿨.

엿이나 먹으라고 해, 관타나모.ㅋㅋㅋ 부시도, 부당하게 관타나모에 갇혔던 해롤드나 쿠마도, 그리고 그의 가족도

관타나모 자체에 대한 비판은 거의 찾을 수 없거나 무디기 짝이 없다. 테러 이후 반테러법 제정 등으로 제한된

기본권들에 대한 풍자 역시 마찬가지. 시사에 대한 신랄한 풍자나 해학이라기보다는, 시사를 배경으로 그 주어진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약쟁이와 오입쟁이들의 정신사나운 만담.


#4. 굳이 기억하려 애써본 대사.

관타나모에서 힘들었다는 해롤드가, 정부를 믿기가 쉽지 않다고 조심스레 부시에게, 친근하게 이야기한다. 함께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부시 대통령이 문득 현명해진 듯이 현자처럼 말한다. "나도 정부에서 일하지만 나도 정부를

신뢰하지는 않아. 착한 시민(good American)이 되기 위해 정부를 믿을 필요는 없어. 그냥 니들이 있는 나라를

믿으면 된단 말야." 그전까지 개개 풀려있던 부시의 눈이 일순 반짝거린다고 느낄 정도로 힘이 들어간 대사였지만,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오...뭔가 멋진데 하고 생각했지만 좀 이상하다.


뭔가 있어보이는 대사지만, 오히려 영화 전체를 위해서는 덜어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해롤드와 쿠마는 갑자기

부시 앞에서 착한 아이들처럼 굴고 있다. 비록 그들이 함께 마리화나를 피고 있다고는 해도, 그들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갑자기 철든 것처럼 진지해지고 '꼰대'에게 조언을 구하고는 다소곳이 귀를 기울이는 모습.

무질서와 혼란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혹은 끊임없이 그에 휘말리며), 그리고 기존 도덕과 질서에 무관심하고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들을 무기력하게 하는 그들이라면 내 생각엔 부시가 그런 소리를 할 때 코를 파거나, 휴지를
 
들고 마리화나 봉지랑 섹스를 하거나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대사의 내용이란 것도 실상 따져보면 이상하다. 그냥 니들이 있는 나라를 믿어라...나랏님의 나라를

믿으란 건가, 아님 민초들의 나라를 믿으란 건가. 이건 답을 준 것도 아니고 대답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2탄보다 1탄이 훨씬 무리없이 잘 빠진, 수미일관한 영화였지 싶다.

3탄도 계획중에 있다던데, 이번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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