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지 내용이야 다들 알 텐데 굳이 스포일러를 경계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다만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리듯 오우삼이란 이야기꾼은 무엇을 어떻게 강조하고 드러내고 싶었는지를 느낀대로 말하는 정도랄까요.

어렸을 적 아버지와 함께 주말의 명화 시간에 몇 번이고 봤던 영화가 몇 편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벤허'도

질릴 줄 모르고 봤던 작품들이었지만 무엇보다 The Towering Inferno, 한국어 제목으로는 심플하게 '타워링'을

빼놓을 수 없다.


재난이라고 하면 으레 폭풍, 해수면 상승, 우주인, 화산폭발..같은 어느정도 인력을 벗어난 것들을 다루고 있는

영화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가히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영화는 독특하게도 대화재에 휩싸인
 
초고층건물에서 쥐잡듯 몰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아주 조그마한 스파크에서 시작해 급기야 초고층빌딩

전체를 거대한 횃불처럼 살라먹으며 세 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 내내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는 영화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불(火). 위협적으로 시뻘겋게 낼름이는 화염의 이미지가 어찌나 강렬하게 남았던지, 초등학교

혹은 이후의 유년시절에서도 화재방지 포스터 같은 걸 그릴라치면 가장 먼저 '타워링'의 장면들이 오버랩됐더랬다.

"적벽대전 2 : 최후의 결전". 흔히 나관중 삼국지의 스토리에 익숙한 사람들이건 아니건 큰 상관없도록 한

배려인 건지, 영화는 삼국지의 전체적인 맥락과 큰 그림을 모르는 사람도 쉽게 즐길 수 있도록 이야기를

살짝 단순하게 변주한다는 느낌이다. 한국에서야 삼국지를 열여덟번 읽어야 서울대를 간다느니 하며 위풍당당한

동양의 고전임에는 틀림없지만, 역시 삼국지가 익숙치 않을 넓은 세계시장을 겨냥하고 있는 오우삼감독이라

그런지 이야기하는 데에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 같다. 심지어 '적벽대전 1'을 보지 않은 사람조차 그다지

영화를 따라가는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니까. 2편 스토리도 사실 크게 복잡하지 않은 게, 화계를 사용한 이후의

전쟁씬을 묘사하는 데 더 열중하는 듯.


물론 등장해야 할 사람들은 빠짐없이 등장한다. 천하삼분지세를 유지할 조조, 공명, 주유의 세 축을 비롯해

유비 삼형제, 손권, 조자룡, 감녕, 채모, 장윤, 화타..등등에 더해, 주유의 아내인 소교, 그리고 손권의 여동생인

'돼지' 상향과 숙재던가, 바보스럽고 우직하지만 축구를 잘해 천부장이 된 조조의 병사가 새롭게 비중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 영화 역시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긴 시간동안 영화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주인공은 불(火)이다.

바람의 힘을 빌어 화계를 쓰겠다고 양 진영에서 모두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부터, '적벽대전'이라 후세에 알려진

그 처참한 싸움이 있었던 전장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건대, 통제불가능한 수준의 대화재를 조장하고 방기한

거대재난지역으로 예정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애초 불화살과 화염탄의 성능을 키우지 못해 안달내던 감녕이 전장에서 마주치게 되는 건, 이제 더이상 사람이

손쓸 도리도 없을 만큼 자체의 생명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화마(火魔) 그 자체다. 조조군이나 손권군, 소속을

불문하고 화염이 무차별하게 너울지며 사방으로 번져나가는 광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새삼 망연하고 경악스럽다.

그런 질린 듯한 표정의 끄트머리를 타고 얼굴에 선연해지는 결기, 혹은 광기의 힘을 빌어 그들은 앞의 상대를 베고

찌르고 자르고 부수고 으깬다.

의외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인물은, 이미 주인공 노릇에 진부할 대로 진부해진 거물 정치인들이 아니라 손권의

여동생 상향과 그 '착한 멍청이' 숙재인지도 모르겠다. 조조의 노련한 선전선동에 자리를 털고 일어난 환자들이

'승! 리!'를 거푸 외치며 전의를 불사르는 모습은 그 정도의 정치적 깜냥도 안 되어서 '오해다'란 말을 유행어로

미는데 정신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뿐, 왠지 기괴하고 불편해 보였다. 그에 반해 이름조차 몇번 나오지 않는

숙재는 단지 세금을 삼년간 면하고 먹고 싶은 걸 맘껏 먹고 싶은 단순한 마음으로 참전했고,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줏대있는' 젊은이다. 그와 상향은 마치 에반겔리온이 AT-필드를 무력화시키듯이

소속과 명분의 이데올로기 싸움을 뻘쭘하게 만드는 소소한 연애담과 이벤트들로 사람냄새를 폴폴 피운다.

우연찮게도 그들은 모든 걸 덮치고 불살라 버리는 탐욕스런 불길이 빚어낸 재난에서는 한발 빗겨서 있는 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들이 비극적 결말을 피하는 데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비록 영화 자체는 조조가 무도한 역적으로, 주유와 공명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는 식으로, 게다가 주유는

천하삼분지계를 위해 조조를 살려두고 말았다는 식으로 다소 가치판단을 유도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그들은 정치인. 혹은 지배계층. 혹은 권력자.

조조에게, 주유에게, 그리고 공명에게 불을 이용한 화계라는 건, 각자의 명분을 실현하고 이익을 취하기 위해

기꺼이 마수(魔獸)를 풀어버릴 수 있다는 판단을 전제한다. 그 마수에게 어느순간 통제권을 빼앗기고 적과 내가

동시에 쫓기는 상황이 될지라도, 내가 상대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화마(火魔)를 불러내겠다는 그런

권력욕과 광기어린 정복욕은 불길이 과시하는 끝없는 탐욕과 순수한 비인간성과 통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유는 마지막에 신음을 토해내듯 말한다. 이 싸움에서 승자는 없다고. 애초 유황을 실은 배

몇 척으로 시작했던 화계가 어느 순간 온 바다와 산야를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번져오른 데에 대한 자각이나

반성이었을까. 복잡한 눈빛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읽혔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소개 사이트에 보이는

이 영화에 대한 시놉시스(http://cinema.ticketlink.co.kr/detail/place_end01.jsp?pro_cd=A0009565)는 삼국지의

'적벽대전'이란 사건에 대한 요약일 뿐 이 영화 자체에 충실한 시놉시스라고 하긴 어렵지 않을까. 불타오른다, 는

그야말로 딱 떨어지는 표현 하나를 제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하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인간이 불러내고 만들어낸 재난에 대한 영화이자, 그 권력자입네 하는 인간들
 
자체가 다른 이들의 삶을 재앙에 빠뜨리는 재난임을 말하려고 한 영화는 아닐까. 조조군에 혈혈단신 찾아갔던

소교가 무지막지한 칼날 앞에서 하릴없이 횃불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장면이 자꾸 눈에 밟혔다. 주유의 아내가

아니라 백성을 대표해 조조 앞에 나섰다고 했던 그녀가 들고 있던 불은 고삐가 매인, 잘 통제되어 무섭지도 않은

그런 잔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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