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 VIP시사회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VIP로 대접받고

싶어하고, 행사가 있으면 헤드테이블에 앉겠다고 난리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치 그런 거다. 내가 뜬금없는

호텔 VIP로 대접받아 영화시사회에 초대받는 상황.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러고 보면 요새 영화는 전부 시사회에 초대받아 보고 있다. 요새 좀 그렇다.)


영화는, 사람 얼굴을 쉽게 외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소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인물을 깔아두면서 시작했다.

그들의 사랑이 때론 막 깨어져 나갔고, 진행중이기도 하고, 혹은 피어나는가 싶더니 피시식 꺼져버리는 이야기들.

그런 짧막한 에피소드들이 서로 하나씩 단서들을 물면서 연결되고, 누군가의 불꽃같은 사랑은 또다른 누군가에겐

결혼생활을 송두리째 회의케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감정에 빠진다는 것은,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취사선택을 요구받았던 두 개의 알약 중 하나를 삼켜야

하는 바로 그 타이밍에 빠져드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생활, 지금까지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뭔가 낯설고 거슬리는

균열을 발견하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다만 매트릭스의 알약과 사랑의 차이라면, 이번

'핑크 알약'은 한번 먹어서 될 일은 아니라는 거 아닐까.


소설 하나를 쓰는 기분으로 연애나 사랑을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감정의 변곡선의 위태위태한

궤적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어디서 언제쯤, 어떤 대사를 동원해 결말까지 써내리겠다는 다짐을 나 자신도 모르게

어느 시점에 했을 거라 자각했던 건, 늘 그 사랑이 지나고 난 바로 다음이었다. 그대로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해도,

사랑에 빠진 스스로의 감정을 즐기며, 그렇게 암묵적인 개요와 아웃라인에 맞춰 결말까지 숨가쁘게 한판 달리고

나선 문득 이건 자기애가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이기적인 '사랑'놀음을 깨고, 마치 영화에 나오는 알렉스가 지지에게 빠져버리듯 그렇게

최초의 '핑크 알약'을 맛봤던 그런 순간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퇴락하거나, 무의미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투적인 사랑이야기라기엔, 그리고 상투적인 변곡선들이 넘나들며 결국은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식의 뻔한

스토리라고 치부하기엔,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 커플(혹은 홀로 선 깨진 커플조차)의 모습이 이쁘다.

타인의 시각으로 보기엔 참 뻔하고 식상하고 닳고 낡은 이야기일지 몰라도, 지금 사랑에 빠져 있고, 그 사랑이

자신을 사랑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유치하고 이기적인 수준이 아니라면, 그 둘만의 이야기는 참 충만하고

내밀한 달콤한 소근거림으로 가득할 거다.


마침 발렌타인 데이란 게 다가왔고 또다시 솔로들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겠지만,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들은 부디 자신들의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소근대기를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어딘가엔

"He's just not that into you"라는 살벌한 가능성이 으르렁대며 웅크리고 있을지라도, 그저 매순간 진심을 따라

행동한다면, 그리고 그 진심에 감응한 또다른 진심이 용기를 낸다면,


He can be absofuckinglutely that into you. 비록 언젠가 마침표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찍게 될지라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