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센터 김씨와 처음 만났을 때, 밀양의 한자 의미를 아냐는 생뚱한 질문을 던져 대화의 허리를 댕겅 잘라버렸던

그녀. 그 질문은, 어지럽게 자란 둑방 풀섶에 앉아 뜬금없이 '좋다~'라는 말을 내뱉었던 만큼이나 맥락이 없었다.

그래도 횡뎅그레하게 던져진 이 말에는 되바라진 아들녀석이 "뭐가 좋아?"라고 받아치기라도 했었다. 도시인인

자신이 촌에 '내려왔다'는 현실에 더해 그럴듯한 비장미와 낭만이 서려있음을 만끽하는 그녀.


그녀는 허영쟁이다. 그녀는, 밀양에 내려온 자신이 무언가 특별해 보이기를 원했고, "죽은 남편을 못잊어 남편의

고향에 내려와 살기까지 하는 여자", "서울에서 내려온 돈많은 여자", 혹은 (김씨의 장단에 맞추어) "국제 콩쿨서
 
우승도 한 피아니스트"같은 아우라를 덮어쓰고 싶어했다.


이런 자잘한 허영심은 그녀의 아이를 데려간다. 이제 "남편에 이어 자식까지 잡아먹고 만" 신애에겐 남은 게 없다.

신을 믿노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감염되어, 그녀는 신의 허울을 빌린 거대한 허영심으로 살아남고자 한다.

신, 신을 아는 자, 신을 모르는 가엾고 불쌍한 자의 위계 속에서 그녀는 다시금 굽어볼 발판을 마련했다. 급기야

전장에 나가는 장수처럼 빗발치는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러 나선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자에 대해 갈갈이 찢어죽이겠다는 증오 대신 주님의 사랑을 전파하러. 메조키스트나 할 법한 묘한 방식의 승리

선언을 위해.


그녀가 '사랑과 용서'로 굽어보려 했던 그는 이미 같은 무기, '신의 사랑과 용서'를 장착하고 있었다. 좌절한

그녀의 허영심. 십자가 아래 그를 무릎꿇리고 가련한 존재로 격하하려던 사디스트적 욕망이 픽 소리를 내며 꺼져

버렸다.


그렇다, 신애는 깨닫는다. 처음 교회에 나가 온몸으로 울던 것은 신의 가피 따위에 위로받은 것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운 그녀는 예기치 못한 지렁이 한마리에도 와락 허물어지지 않았던가.

신 = 지렁이. BGM은 김추자의 '거짓말이야'.(전두환이 이노래듣고 불같이 화내며 방송금지시킬만 하다고

처음으로 공감했다.ㅋ)


그녀는 경건한(?) 야외 집회를 망치고, 집사의 성욕을 불지르고, 끝내는 한결같은 김씨의 감정마저 농락하면서,

신에게 복수하려 한다. 그녀의 복수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결정적으로 상처받고 만 그녀의 허영심? 끊임없이

주기만 하는 연애같은 종교에 대한 실망? 허영심에 젖어있던 그녀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스스로의 의지로

2등칸에서 '불쌍하고 가련한' 3등칸으로 물러난 그녀는, 신에 대한 복수의 계속되는 실패 속에서 손목을 긋고서야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이었다. 살려주세요. 나 지금 아파요. 사람 살려요..


왜 하필 그시간에 그곳에 있었냐던 미용실을 뛰쳐나온 그녀는, 장독 위에 거울을 걸쳐놓고 혼자 힘으로 머리를

깎으려 한다. 목을 이리저리 빼고, 팔은 불편하게 굽힌 채다. 김씨의 등장, 그리고 적당한 높이에 든든히 세워진

거울. 햇빛 한 조각에 신이 숨어있던 말던, 그녀는 인간스러운 그로부터 베풀어진 그 정도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위계에 기댄 자기파괴적인 허영심이 무독하고 고상한 자존심으로 순화되는 순간. 그것은 또한, 살려달라던

그녀의 호소가 답을 얻은 순간.


김씨는, 여러모로 놀라운 인물이다. 교도소에 굳이 찾아가겠다는 신애에게 사람들이 '화이팅' 어쩌구 외칠 때

코웃음을 던지고, 계속 교회에 다니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안나가면 섭섭하고 나가면 맘편해서, 습관이

되어서 계속 다닌다고. 아편의 사용법에 대한 그 나름의 갈파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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