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연휴 마지막날이자 내생일이었어서, 뭘 할까 생각하다가 며칠전부터 맘에 담아두었던 사진전을 보러가기로

했다. 혼자 유유히 전시회 보러다니는 걸 함께 보러다니는 것 만큼이나 좋아함에도 한동안 혼자 뭘 보러 갔던 적이

없었단 걸 문득 깨닫고,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처럼 서울역사로 향했다.
번듯한 서울역사의 높다란 계단위에서 바라본 옛 서울역사는 커다랗고 밋밋한 건물들 사이에서 위축되어 보였다.

낡고 닳아보이는 담갈색의 벽과 청회색의 지붕에서 풍기는 고즈넉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차갑고 깍쟁이같아 보이는

유리와 철의 배합인 서울역사에 비기자면, 못나고 수더분한 시골아지매같다. 서울역사에 갓 상경한 할머니같은.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거리로 올라설 때면 늘 뭔가 당혹스러움과 낯섬이 포함된,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한쪽에선 으레 종교를 선전하는 악다구니가 들리고, 이공간의 분위기에 녹아들지 않는 타인들이 돋을새김처럼

눈을 어지럽히며, 겨울임에도 코를 찡하게 파고드는 노숙자들의 노골적인 냄새. 게다가 대개 이곳에선 성난

사람들이 파도처럼 넘실대며 사기를 북돋우는 장면을 마주하길 기대했었고, 나 역시 그런 열기를 품고 오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적 284호. 옛 서울역사는 사적 284호였다. 둘레를 온통 칭칭 감고 있는 저 출입금지의 팻말이 어디서 끊겨있을까.

아마 그곳이 이 안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에 입장하기 위한 입구일 테다.

마치 폴리스라인처럼 둘러쳐진 출입금지선 너머엔 비둘기들만 유유히 주인인 양 뽐내며 걷고 있다. 그 위에서부터

운치있게 나려드는 아치형의 기둥, 달랑 내려뜨려진 조명등이 작동은 할까, 문득 궁금했다.

옛 서울역사의 야트막한 2층 건물은 꽤나 넓은 양지바른 공간을 노숙자들에게 許하고 있었다.

건물이 높아지면 그늘도 길고 짙어진다. 바랜 갈색잎을 잔뜩 달고 섰는 나무를 살짝 굽어보는 퇴락한 역사.

빙 둘러쳐져 있는 출입금지 폴리스라인에 난 균열을 발견했다. 2008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언뜻 보면 잘 알아채기

어렵겠다 싶은 게, 바로 앞에 있는 화단의 앙상한 나무가지들이 수북히 시야를 가리고 있다. 옆으로 틀어서 잘

보이게 사진 한장.

들어섰다. 팔천원짜리 대인 표를 끊고 썰렁한 전시장으로 들어섰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천장. 가뜩이나

관람객이 드문 점심때쯤의 휑함과 누추함을 더 강렬하게 하는 천장의 터져나간 페인트와 장식무늬. 단정하고

심심한 네모무늬 창문에서 쳐들어오는 햇살도 천장에는 가닿지 않는다.

태극무늬가 바로 세워지게 딱 각맞춰 한번 찍어본다. 태극무늬를 품고 있는 봉황 네마리가 박제처럼 뻣뻣해 보이는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예전엔 좀더 금빛으로 번쩍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1층 홀 한가운데에서는 "Black Dogs"라는 이름이었던가,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은 작가의 특별전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뒷모습만으로도 저런 느낌을 낼 수 있구나, 라는 내 감탄은 어쩌면 그 옆에 나란히

전시되었던 그들의 고백과도 같은 짧은 수기로부터 온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과 글, 두가지 텍스트가 조합되면

그중 하나만 쓰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깊이있게 자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사진과 이 텍스트는 사실 제 짝은 아니었는데, 머 사실 이렇게 저렇게 얽어놓으면 다 그럴듯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고 비로소 생각해본다. 어쨌든 텍스트는 "나는"이라고 말을 시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순간 낯설게

만들어주었던 일종의 화두랄까. 그리고 꽃덤불이 땅속에서부터 피어오르듯 단단히 땅위에 피워올려진 저 사람.

아마 엉덩이 밑으로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뿌리가 뻗어나가 있을 거 같다.

서울역사 안에 있는 커다란 시계는 여전히 안녕했다. 제 시간에 맞춰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혹시 알고 있으려나.

2009년에는 1초가 늘어난다지 아마. 누군가 챙겨줘야 할 텐데. 음..파리의 오르세미술관에 있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시계와 비교하기는 많이 담백하달까.

뭐랄까, 롯데월드 어드벤처같은 놀이공원에 가면 돌처럼 위장한 속이 텅텅 빈 플라스틱 껍데기들로 포장된 공간이

많이 보인다. 대리석 대신 시멘트 위 처덕처덕 발라진 하얀색 페인트를 조명빨로 숨기고 있기도 하고. 그런 느낌.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세워진 대리석기둥들과 요모조모 장식이 곁들여진 천장과 사면의 벽들을 보고 있으면 뭔가

어색한 키치의 냄새가 난다. 그런 위화감과 조악함이 한국이 근대를 수입해온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트렌드랄까

지배적인 심상이였을지도 모르겠다.

허옇게 분칠된 고등학생의 어설픈 화장술이 자꾸 연상되던 대리석 기둥들.

한 옆에는 사람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게시판이 있었다. 각자 찍은 사진을 들고 오면 한명이 무료입장 가능하댔나.

그리고 관람객들이 맘에 드는 사진에 스티커를 붙여 가장 많이 받은 사진 출품자에게 상품을 준다는 식이다.

꼭 저렇게, 엉덩이 한가운데 붙이고 양 볼에 연지곤지를 붙여넣는 사람들이 있다.(내 취향이다..랄까.)

역사에 있는 방들, 복도들을 모두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제각기 특징을 가진 문들을 지나 다른 공간으로

넘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방의 인테리어, 그리고 새로운 느낌의 사진들. 비록 문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이

소화기였다는 사실이 계속 걸리적거렸음에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전선이 빨랫줄마냥 늘어져 있고, 온통 헐벗은 벽면에 뼈대가 드러난 채 설치된 조명시설들. 사진보다는 그 전시

공간 자체에 한동안 눈이 먼저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귀퉁이가 깨진 천장에는 그래도 예전엔 꽤 발랄한 선홍색으로 발색했을 이국적인 문양들도 보이고, 드문드문

이빠진 채이긴 하지만 불을 밝힌 샹젤리제도 있고. 이곳이 역사로 활용되던 시절 이곳은 무슨 공간이었을까.

철창살이 끼워진 유리창 너머 보이는 출입금지의 표지. 정말 철창살 너머, 저런 폴리스라인같은 경계선을
 
바라보자니 어딘가 사건 현장 한가운데 들어와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치 이 건물과 이 공간이 보이지도 않는

양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외부의 사람들. 하기야 밖에서 보면 딱 철거되기만을 기다리는 노쇠한 건물이다.

건물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찬송가 소리,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울려퍼지는 선전선동 소리.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닥에 엉성하게 화살표를 만들어 붙여놓는 데에도, 출입금지 구역을 막아놓을

때에도, 그리고 벽면에 동선을 그려넣거나 들어가면 안 되는 문에 엑스자 표시를 할 때에도, 게다가 하다못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 딱지를 붙여두는 데에도 모두 빨간색 테이프를 활용했으니..가히 만능 테이프라 할만하다.

건설현장에서 노가다할 때 느꼈던 콘크리트 건물 날것의 싸한 냉기와 살짝 두렵기까지 한 낯선 느낌. 이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 차있고 손때를 탔다면 훨씬 인간적이고 따스한 공간이었을 텐데, 여긴 더이상 쓰이지 않고 버려진

곳. 사람의 온기를 잃고 뭔가 괴물같고 초현실스런 느낌이 뭉실뭉실 커나가서는 순식간에 공간이 황막해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역시 역사를 개조해서 만든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을 상상하면서 왔었지만, 막상 와보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철거를 기다리는 건물을 잠시 재활용하는 정도인 듯 하다. 나름의 운치도 있고 외려 그런 막나가는

인테리어가 내 맘에야 꼭 들지만, 어쨌든 이상태를 보면 계속 전시공간이나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생각은 아닌것

같다. 파이프가 이렇게 구불구불 벽과 천장을 타고 구불거리는 걸 보면 외려 퐁피두미술관하고 비슷하다.

커다란 사진작품들이 걸려이씨고, 그 옆에 그 사진보다 작은 조그마한 문이 나있다. 왠지 사물의 비율이나 크기에

대한 감각이랄까 현실감각이 시험에 든 느낌이 들었다. 원더랜드에 와서 하얀토끼를 쫓는 앨리스같은. 그치만

이 원더랜드는 많이 헐었군. 파이프가 얼기설기 벽을 기어다니고, 하얀색 백열등은 할짝대며 사진을 탐한다.

그리고 어둠이 들이찼던 공간은 사람이 연다.

이런 풍경. 사진 자체가 이미 '익명성'이란 제목의 초점잃은 누드사진이었으니..내 시선이 가닿았던 곳은 사진들이

아니라 역시 오래되어 자갈처럼 쌓여있는 벽돌들이었다. 뭐든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러워진다. 반듯반듯 모서리의

까칠함까지 살아서 잔뜩 긴장한 채 열맞춰 쌓여있었을 벽돌들이, 비록 그 모서리의 까끌함이야 여전하다 할지라도

훨씬 긴장이 풀린 채 처억 척 늘어서 있다. 저대로 수천년쯤 지나면 피라밋이 마치 자연적인 산처럼 느껴지듯

그런 무위'자연'의 경지에 들지도 모른다. 가만히 냅둔다면.

문득 들어서니 이방의 테마는 뭐야, 거울의 방정도로 잡은 건가. 사진작품이 내걸려있는 벽면이 온통 맞은편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엉거주춤한 상태로 사진 한 장. 혼자 다니는 데 치명적인 약점 하나는, 자신의 사진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 행인지 불행인지.

문득 눈앞에 나타난 문을 통과하려다 눈에 띄었다. 저 스테인드글라스. 원래 있던 거였겠지? 뭔가 조잡하다 싶은데

살짝 유쾌해지려고 했다. 그 쌩뚱맞음도 그렇거니와, 대체 이 공간은 어떻게 쓰였던 거지 상상하면서 말이다.

제법 운치있고 잘 보존되어 있는 방이었다. 천장에 붙은 장식들도 그랬지만, 벽지 가운데쯤 둘린 띠도 그렇고,

가지런히 내려앉은 커튼도. 노란색 불빛이 따스하다.

방마다 심심치 않게 보이는 저 벽난로들. 실제로 쓰였던 건지는 모르겠다. 애초 쓰였는데 벽돌로 막아둔 것 같기도
 
하고, 애초 장식용으로 설치된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고. 저런 벽난로가 있는 방,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면

참 볼 만 했을 텐데 아쉬웠다.

어떤 전시실은 이전의 허름한, 그치만 나름 자부심을 가졌을 명찰을 채 떼지도 않고 있었다. "귀빈실". 일종의

VIP대기실이란 얘긴데, 역시 이곳저곳 망가지고 해어진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한쪽 천장이 온통 무너져내려있었다. 참 심하다 싶으면서도, 저 상태 그대로 안전사고의 위험없이 보존될 수 있다

하면 그 또한 살짝 파격적인 전시 공간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아니라면 뭐, 리모델링을 싹 하던가 해서

조금은 더 깔끔하게 꾸며도 좋을 거 같고. 1층을 이리저리 종횡하면서 옛 서울역사가 어떻게 무너지고 망가지고

있는지도 많이 보았지만, 건물 자체가 나름 매력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잔뜩 허름해보이지만, 과거에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면서 서울로 올라와 출세를 꿈꾸고, 누군가는

시골(지방)으로 되돌아가서 남겨둔 사람들을 그리기도 하고. 그렇게 버글버글했을 그림을 맘속에 그려보면

금방 또 이미지가 퍼올려진다. 그리고 그런 그림들은 서울역사에서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를 배웅했던 기억들과 함께 이 삭아가는 건물에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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