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마음 속의 동요(Riot in empty heart), 고상우라는 작가의 작품이다. 구불구불 잘 말린 머리칼과 비대칭의

앞머리. 그리고 새침하게 내려뜨린 기인 속눈썹 밑에는 어떤 눈빛을 숨기고 있을까. 뺨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은, 그녀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었음을 은유하는 걸까. 한참동안 바라보았지만 좀체 그녀의 속내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2층에는 좀더 그럴 듯한 공간이 있었다. 아마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쓰이던 공간이었는지 중간중간 흔적이 남아

있기도 했다. 그 너른 공간을 채운 커다란 사진작품들은 그 몽환적이고 묘한 느낌의 색감으로 뭐랄까, 공간 자체를

익숙한 것으로부터 스멀스멀 밀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색이 뒤집어진 사진들과 죽어버린 듯한 색감의 역사만으론

도무지 안 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와타나베 曰) 사람 두 명을 집어넣다.

몇 개씩 천장에 달려있는 샹젤리제들하며 높은 천장, 아마 1, 2층 통틀어서 이공간이 가장 야심차게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전시된 작품들도 대형작품이나 연작이 많았다. 이 전시회 관련 기사에 함께

뜨는 사진들이 모두 이 곳에서 찍힌 것들임을 와보니 알겠다.

이 곳이 한때 "한국철도공사"가 운영하는 서울역사의 일부였음을, 그리고 또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쓰였던 곳임을

증거하는 흔적들. 그니까 여긴 '교양실'이자 '제1전시실'이었던 건가. 아님 '교양실'이었는데 '제1전시실'로 바뀐

걸까. 어느 쪽이던 이상하다. 저 눈에 잘 띄지도 않을 만큼 소심하게 문짝 위에 올라붙은 명패는 대체.

사진들이 보통 잔뜩 헐벗고 남루해진 벽들을 가리듯이 걸려있던 다른 방들과는 달리, 이방은 그래도 멀끔한

나무장식들도 살아있다.

정확한 이름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라디에이터라 그러나. 흔히 보는 것과는 다른, 조금은 고색창연해보이는 모습의

라디에이터가 수줍게 벽면 안쪽으로 숨어있었다. 저건 혹시 일제시대때 설치된 건..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생김새나 때깔이 그때까지 거슬러가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한 켠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런 벽난로도 있고, 여기 그러고 보니까 댄스홀 정도로 써도 별 손색이 없겠는걸

하고 생각했다. 터키의 톱카프 궁전이나 파리근교의 베르사유 궁전, 머 이러저러한 궁전들에서 보았던 천장높고

화려하게 치장된 방들에야 못 미친다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준수하지 싶다. 다소 키치스럽긴 하지만 유럽의

고풍스런 건물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왼갖 장식들. 아님 이 방에 들어서기 전 내가 지나온 곳들이 워낙 눈높이나

기대치를 낮췄던 탓일까.

그 방을 빠져나오니 다시 시작된 버려진 건물 순례. 깻잎처럼 붙어있는 낡고 닳은 벽지조각과, 온통 터져버린

페인트칠, 그리고 배관설비와 전깃줄이 몽창 드러난 헐벗은 곳에 드문드문 이빨빠진 샹젤리제의 불빛이

붕붕 떠있다.

이게 그 깻잎사이즈로 벽에 남은 벽지의 추억..이랄까.

고색창연한 문짝에 달린 놋쇠장식들. 둘러보다 문득 들었던 생각은, 조선시대의 기와집이나 궁궐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어정쩡한 근대 따라잡기 시대에 지어졌던 이런 건축물들도 우리가 지켜야 할 (전통)문화가 아닐까

싶었다. 그게 비록 서구 문화의 껍질만을 흉내낸 거라거나 어색하고 어설픈 미성숙의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시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지금까지 흘러온 걸 테니까 말이다.

창문에 저렇게 흰색 천을 늘어뜨리고 빛을 가려놓았다. 영화 '디 아더스'같은 데 나왔을 법한 주인없는 집에서

가구들이 모두 흰색천을 뒤집어쓰고 창문에도 흰색천을 가려놓는 장면이 떠올랐다.

2층 어디메쯤에서 내다 본 옛 서울역사의 머리꼭대기. 분명 새파랗게 맑을 하늘이 지저분한 유리창에 겹쳐서는

누덕누덕해졌다. 어디쯤에선가 방에 들어서면 새로 지어진 서울역사에서 KTX가 출발함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고스란히 들리기도 하고, 또 기차가 덜컹거리는 소음과 진동이 몸으로 전해지기도 했다.

같은 장소를 찍는데 카메라 렌즈가 빛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머금느냐에 따라서 사진의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사진전을 보면서 카메라를 찰칵대려다 보니 왠지 주눅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좀더 잘 찍어야 되지 않겠냐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저런 각도, 저런 느낌의 사진은 따라 찍어봐야겠다 싶어 눈여겨보게 된다.

예컨대 요런 사진도, I'm lost without you. 작가가 적당한 느낌의 벽에 저렇게 낙서를 해놓고 사진을 찍은 건지

아니면 우연찮게 저런 낙서를 발견하고 찍은 건지야 알 도리가 없지만, 중구난방 쓰레기통같이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는 맘속에서도 뚜렷이 형체를 갖추고 한가운데서 소곤거리고 있는 저 문장. 저 마음.

세상에 막 출현한 아이. 아직은 삶이란 더러운 것임을 기억하고 있는 지라 인상이 바가지다. 금세 잊고 찡얼대며

젖을 찾고선 배시시 웃겠지만.

나도 파리를 갔었고, 그 중 며칠은 비가 내렸으며, 에펠탑은 지나는 길에 몇번이나 발에 채였음에도, 더구나 노란

색이 아닌 파란 색 에펠탑이었거늘. 사랑은 ㅁ다. 사진도 ㅁ다. ㅁ은 타이밍. 그치만 사진은 ㅁ+ㅁ'랄까.

ㅁ'는 역시나, 영감 혹은 스킬. 꽤 다른 것들인데 하나로 묶고 만다.

내가 에펠탑이 보이는 저 샤요궁전 발코니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게 바로 저런 포즈..

Reflection. 올해 계획 중 하나는 데세랄을 기어코 사는 거다.

뉴욕에 있을 때 그래피티들에 열광했었다. 그렇게 화려하고 멋지진 않지만, 자연스레 박살난 합판 벽재와 뻘건

글씨의 낙서들은 이미 뭔가 자체의 생명력을 얻은 듯 했다.

고대의 벽화를 보는 것도 아닌데, 고작 백년은 커녕 수십년밖에 안 되었을 사람의 더께가 조각조각 부서져내리는

광경이라니. 저런 식으로 계속 벗겨지고 벗겨지면 차라리 엄청나게 깔끔하고 깨끗한 뭔가가 드러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마치 여름철 뙤약볕에 잔뜩 탄 살결에서 보풀이 벗겨지는 것 같다.

걱정스럽던 건 여기 정말 불이라도 나면 비상구 표시등은 제대로 켜지기나 할까, 스프링쿨러 따윈 언감생심일테고.

그래서였을지는 모르지만, 문들을 활짝 열고서 고정시키는 데에는 어김없이 통통하고 짜리몽땅한 빨간 소화기가.

소화기들을 엊그제쯤 일제점검하며 한번 걸레질이라도 했는지 다들 유난히도 반짝거려서 조그만 위화감도 일었다.

무슨 영화 세트장같은 느낌이었다. 침침한 조명 아래 한켠엔 사진액자가 열맞춰 늘어서 있고, 다른 쪽엔 오래전에

쓰였을 뿐 더이상 쓰이지 않는 물건들이 늘어서있고. 창틀에 걸려 부서진 햇살은 복도끝에 정좌한 액자에 무심히

내려앉는 중이다. 차분히 아래를 굽어보는 있으나마나한 샹젤리제까지.

깨진 유리창 이론이 어쩌면 이 곳의 전시 스타일을 설명할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잔뜩 낡고 부서져내리는 공간에

사진을 전시하려다 보니 빨간 테이프로 대충 창문틈도 바르고, 화살표도 바닥에 대충 찍찍 만들어 붙이고, 조명

틀 역시 각목으로 대충 뚝딱해서 훤히 드러나게 세팅하고. 또 그래야 공간과 전시가 어우러질 테고. 실제로 깨져

있던 창문이 하나 눈에 띄었지만, 그렇다고 저걸 보고 사람들이 나머지 유리창도 발로 차거나 돌을 던져 깨뜨릴 것

같지는 않다.

그 허술하고 긴장감없는 전시 기획을 한 눈에 보여주는 간이 의자..랄까, 이거 제대로 버틸까 겁나서 앉을 엄두도

못 냈다. 널빤지 몇개로 뚝딱거리고는 자주빛 벨벳같은 걸 살짝 얹어선 스테이플러로 고정시킨 거 같은데 전시장

전체에 적지않게 살포해 놓았더랬다. 하기야 이곳에서 가죽이 매끈한 푹신 의자를 바라지도 않는다.

날 상당히 감동시켰던 문구들. 촬영자(작가..라는 거창한 말 말고라도)의 인문학적 배경과 감성적 섬세함, 결국엔

촬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장의 사진. 애매모호하고 사적으로 보일지라도, 작가 그자체를 바로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는 얘기. 언어나 문자에 비해 직관적으로 성큼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긴 한 것 같다.

물론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룬 사람들에 한한 이야기일 테지만, 사진을 좀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은 욕망이 불끈.

드디어 세시간여 관람을 끝내고는 출구를 찾아 다시 입구로. 사진전에 왔으니 사진들을 보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옛 서울역사를 이렇게 구석구석 구경하고 다닐 수 있던 것도 무지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경험이었던 것 같다. 그게

고작 세시간 돌아보고는 관련 포스팅을 세개나 하며 사진을 덕지덕지 올리면서 주절주절대는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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