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지티브 Ver. : '빽투더퓨처'

점점 시야가 좁아들어지더니 어느 시점에서 점 하나, 그 점조차 팟 꺼져 버리는 시점이 분명

있었을 거다. 언제가 되었건, 누군가 그런 미래를 바로잡고 나를 돕고자 2010년으로 되돌아와

알게 모르게 암시를 계속 내렸던 건 아닐까. 어떤 이유로든 안과에 나를 데려다 앉혀놓으면

나머지는 의사가 알아서 하리라고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덕분에, 아주아주 초기에서부터

발견해 내어 잘 관리할 수 있게 된 셈이니 미래는 바뀌었다.



#2. 네가티브 Ver. : '안경탈출 대작전 대실패'

국민학교 1학년 때니까 어느새 20년도 넘었다. 첨엔 물색없이 '박사님'처럼 보인다는 말에

기뻐했던 꼬마녀석이 이젠 겨울철에 더운 방안에 들어오면 훅 끼쳐오는 안개를 불편해하고

점점 두꺼워진 안경알에 얼굴선이 왜곡되는 걸 신경쓴지 오래인 시간. 문득 마음을 먹었고

이십여년 만에 안경으로부터 탈출하나 싶었더니 보기 좋게 좌초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맘에

들지 않는 건, 이제 평생 관리해야 할 만성질병 한두개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는 건가 싶은 막막한 피로감.



#3. Fact 1. (압구정 Y안과, 강남 S안과)

시력교정 수술에는 라식, 마이크로라식, 무통라섹, M-무통라섹, ICL(렌즈삽입술) 등이 있으며,

고도근시의 경우 대개 M-무통라섹을 통해 각막두께를 약 50마이크로미터쯤 상실하는 것으로

교정 시력에 근사한 시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수술 후 3일 정도 어두운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버텨야 눈에서 피눈물이 멈춘다고 하는 속설이 있으나, 직접 체험하기 직전에 수술이

취소되어 검증할 방법이 없어지고 말았다.



#4. 시니컬 Ver. : '빼도박도 못하는 서른 인증'

A: 녹내장? 치료받으면 나아?

B: 아니, 리미트엔이 무한대로 갈 때 실명. 낫진 않고 평생 관리. 고혈압같은 거래.

A: 내 통풍이랑 비슷한 건가. 아님 무좀이라거나.

B: 글치.

A: 자넨 안경 쓰는 게 그나마 지적으로 보인다구.

B: 이제 무좀이니 통풍이니 뭐니 고질병 한두개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B: 슬슬 고장나기 시작하는 나이란 게 맘에 걸리고,
B: 그리고 안경이 다시 얼굴에 찰싹 들러붙었단 것도 꿀꿀해.

A: 하긴, 벌써 서른을 넘었으니. 어째 우울한데.

B: 그러고 보니 이제 빠른 생일이네 만나이네 어쩌네 빼도박도 못하고 서른의 영역이야.



#5. Fact 2. (강남 S종합병원)

녹내장이란 안압상승 및 다른 여러 가지 위험요인으로 초래된 진행성의 시신경 손상과

이에 따른 특징적인 시야장애를 보이는 질환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가장 큰 위험인자는

나이와 안압이며, 근시, 당뇨병, 편두통, 고혈압, 저혈압 등이 있을 때 더 잘 발생한다. 가족 중

녹내장 환자가 있을 경우 발생률이 높아진다고 알려져 있다..환자 자신이 자각할 수 있는 증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겉으로는 정상처럼 보이므로 조기에 발견하여 적절한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이미 손상된 시신경은 회복시킬 수 없기 때문에, 조기에 발견하여 진행을 억제하는

것이 최선의 치료이다.



#6. 시니컬 Ver.2 : 짝부랄아외로워가 쓴 밤일과 녹내장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문

B: 육체의 내구연한이 다 되어가나 봐.

A: 밤일 좀 줄이시죠.

B: 밤일 이지랄ㅋㅋㅋ 씨발로마ㅋㅋㅋㅋㅋㅋ

A: 밤일과 녹내장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논문있던데. 이미 입증된 거임.

B: 아 그래?ㅋㅋㅋㅋ 하지 말라던?ㅋㅋㅋㅋ

A: 남아공 붕가붕가유니버시티에 짝부랄아외로워씨가 쓴 논문

B: 그리곤 제적당해 니미씨부럴털털카를 몰고 기둥서방노릇하며 나쁜 남자노릇한다는 그 아저씨 말이지?

A: ㅋㅋㅋㅋㅋㅋㅋㅋㅋ



#7. Quotation.


모든 것들에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

내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으로 하고 싶다.

<중경삼림>



모든 것들에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

내 육체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년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백년만이라도 무탈하게 아무 말썽없이 굴려먹을 수 있기를.





#8. 남은 것.

라섹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삼일 정도 장님놀이하려고 냈던 휴가가 휑하니 비어버렸다.

지방에나 한바퀴 빙 둘러보고 친구들 만나고 올까 생각 중이다. 아침마다 낯선 잠자리에서

일어나 제일 먼저 안경을 더듬더듬 찾겠지. 씁쓸하다.






나름 여러 공연이나 연주회들을 다니려고 애쓰긴 했지만 이런 '공연장'은 처음이었다. 한옥의

기와지붕 그림자가 그대로 떨어지는 무대에, 공연자 뒤에 나무대문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슬쩍

열렸다 닫히는 배경,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고아하고 아름다운 전통 한옥

툇마루에 이불을 깔고 다닥다닥 앉아듣는 객석의 운치라니.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라는 경북 안동의 '수곡고택', 정조 시절 권씨 가문이 세운

건물인데 여전히 그 후손들이 살면서 수백년의 숨결을 입히고 있던 곳이다.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이 곳 '수곡고택'과 인근 '고산서원'이나 '묵계서원' 같은 곳에서 야간 고가공연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11월에 가서도 공연을 볼 수 있던 건 일종의 특별공연, 밤날씨가

조금 쌀쌀했지만 공연을 즐기기엔 무리없던 가을밤.

까맣고 탱탱해보이는 찰옥수수가 알알이 반짝거리는 기둥 옆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실 가을이라기도 뭐할만큼 기온도 떨어졌고 해도 금방 지는 11월 말의 안동. 아무래도 서울보다

지방으로 내려오면 더욱 날씨도 춥고 바람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느낌이 있다.

공연장으로 변신하며 커다란 앰프도 놓이고 건반도 놓이는 옛 양반집의 앞마당, 언젠가 설치된

수도꼭지마저 나뭇빛 은은한 건물의 풍채와 운치에 묘하게 합류하는 공간에서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기분이란 건 굉장히 묘하다. 자꾸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거다. 계속 내 시선을

붙잡았던 건 그 수돗가 바닥에 꼼꼼하게 박혀있던 돌멩이들, 기왓장과 맷돌과 다듬잇돌이 얼핏

무질서한 듯, 그렇지만 흔들림없이 제자리를 박은 채 박혀있던 모습이 재미있었다.

첫번째 공연, 퇴계 이황과 단양관기 '두향' 사이의 사랑 이야기를 맛깔나게 풀어주던 아저씨가

덥썩 대금을 집어들었다. 안동국악단에서 '450년 사랑'이란 제목으로 공연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퇴계가 48세 때 단양군수로 봉직하던 9개월 동안 18살짜리 기생 두향이와 나눴던 짧은 사랑,

그리고 20년 동안의 긴 이별동안 서로를 그리며 끝내 다시 한번 보지도 못한 두 사람의 간절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게 했다. 차갑고 둔탁한 가을밤에 녹아드는 대금 소리가 그런 로맨틱한

이야기의 뒷맛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것 같았다.

두번째로 나선 앳된 판소리 명창, 작고 갸름한 태와는 달리, 인사를 할 때의 발랄한 목소리와는

달리 두텁고 허스키한 목청으로 노래를 하는데에는 늘 놀라고 마는 거다. 이끼가 나무껍질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는 기와지붕 아래 황토벽면을 양쪽 배경으로 하고는,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기둥 사이에 선 명창의 노래를 듣다 보니 나 역시 한복을 입고 조선시대 어디메쯤에서 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렁인다.

마음을 아프게 했던, 자꾸 바람이 열어놓고 도망치는 대문의 정체. 특히나 이 명창 아가씨가

노래를 하던 와중에 자꾸 문이 열리고 바람이 들어와 못내 신경이 쓰였었다.


폭신하고 따뜻한 이불이 깔린 대청마루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고구마를 까먹으며

퍼지고 앉아 노래를 듣다가 끝내 따뜻하게 덥혀놓은 내 자리와 고구마를 마다하고 마당 여기저리로

튀어나와 사진을 찍고 말았던 건, 이 아가씨가 넘넘 맘에 들어서라기보다는 그저 노래가 넘 좋았기

때문...정도로 해두는 게 좋겠다.

세번째 공연, 들고 나온 악기는 안 그래도 공연 전 저게 가야금이네 거문고네 말이 많던 거였다.

아무래도 줄이 스물몇개씩 잔뜩 있어서 한국악기는 아닌 거 같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중국악기인

고쟁, 연주자 역시 한국에 공부하러 왔다는 중국인이었다.

고쟁은 가야금과 거문고의 원조가 되었다는 중국의 고대 악기이자 20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틴

저력있는 악기, 여러 개량이 있었고 다양한 형태로 갈려 발전하기도 했다지만, 아무래도

현을 뜯으며 내는 그 소리에 담긴 원초성이랄까, 직접 감성에 호소하는 듯한 적나라함은

마력적이다. 더구나 그 연주자가 가늘고 긴 손가락을 줄 위에서 휘저으며 움직이는 모습까지

함께 보게 되면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자체 하나의 예술이라 생각하게 되는 거다.


더구나 이런 기와 지붕의 그늘이 드리워진 공간, 이제는 문을 꼭꼭 닫아걸어 내 맘도 조금

걱정을 덜어낸 공간에서 그다지 넓지않은 양반집 앞마당을 꽉 채워내는 선율이라면야.

이런 분위기가 자아내는 묘하지만 매력적인 느낌이 훌륭한 공연에 더해지니 더욱 기억에

남을 시간이 되는 것 같다. 이런 건 공연장이나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쉽지 않을 거다.

마지막을 장식했던 안동의 '소울'이라는 남성4인조 성악단. 유쾌하고 재미있던 그들의 공연 앞에

어느 때보다 많은 카메라 셔터소리를 들었던 거 같다. 솔직히 안동에서 볼 수 있는 공연의 퀄리티란

한 수 접고 너그러이 봐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맘이 처음엔 있었는데, 첫번째 대금에서부터 두번째

판소리, 세번째 고쟁을 지나 마지막 이들 '소울'의 공연을 만끽하면서 그런 맘은 싹 지워버리고

말았다. 굳이 너그러이 봐줄 것도 없이, 이들의 공연은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품위있었다.

물론 그런 후한 평가에는 이 '수곡고택'이 한 몫했음을 부인하긴 어렵겠다. 기와가 낭창낭창하게

리드미컬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담백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의 황토벽이 공연장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으며, 야트막하고 완만한 지붕 너머로 별빛이 쏟아지는 안동의 맑은 밤하늘까지.

툇마루에 다닥다닥 붙어서 이불을 깔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목도리를 머리에 둘둘 감고 공연을

즐기던 사람들. 꼭 여미고 있던 이불과 담요들을 쥐고 있던 손이 조금씩 박수치는데 동원되더니

공연 끝날 무렵에는 전부 무장해제, 추위고 뭐고 공연에 몰입해선 한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아침에 다시 둘러본 수곡고택, 옥수수가 여기저기 걸려있었는데 미처 못 봤었다. 밤에 본

나무기둥의 질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붉은 나무기둥. 까만 옥수수의 알이 탱탱하게 박힌 건

여전하고.

수곡고택 뒤로 완만하게 능선을 내리뜨리는 산이 버티고 섰고, 고택 앞에는 '야간고가 음악회'를

열고 있다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자세한 내용은 들고 온 팜플렛에 자세히 적혀 있어 아예 스캔.

2010년 4월-10월에 있었던 야간 고가공연 내용이니 2011년에도 이와 비슷하게 간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아무래도 11월 이후부터 3월까지의 동절기에는 날씨도 춥고 공연자들도 제 솜씨를

내기에는 애로가 없지 않을 테니까.

수곡고택에서 이렇게 맛을 보고 나니까, '묵계서원'이나 '고산서원'에서 즐기는 공연은 어떨까

굉장히 궁금해졌다. 그저 건물 껍데기만 이리저리 구경하고 마는 여행이 아니라, 그 툇마루에

앉아 조선시대 어디메쯤으론가 옮겨간 느낌에 젖어 이런저런 공연을 만끽하는 여행을 내년엔

떠나야겠다. 그야말로 '만끽', 흠뻑 그 정취에 젖을 수 있는 여행이 될 거 같다.





얼마전 '고양이가 숨어있는 사진'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 갈색 얼룩무늬 고양이가

밭고랑 사이 같은 곳에 숨어있어 좀처럼 찾기가 어려웠더랬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온통

마르고 비틀려져 갈색빛 가득한 풀밭에서 메뚜기 한쌍을 알아보기란 꽤나 난이도가 있는

퀴즈인 셈이다. 그나마 한 마리가 아니라 한 쌍이라 조금은 눈에 잘 띌 테니 다행이다.

이들에겐 사랑, 혹은 종족보존을 위한 절실한 움직임이겠지만, 경련하듯 꿈틀거리며 뭔가 나른한

메뚜기의 앙상한 다리와 얼기설기한 문양과 질감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뭔가 거북살스럽다고나

할까. 아니면 '채털리부인의 사랑'의 한 대목처럼 대충 "그 우스꽝스러운 엉덩이의 움직임과

성급하고 눈먼 애무에 더한 섣부른 탄식" 나부랭이 운운하듯 대충 우습다고나 할까. 우야튼 과히

우아하거나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다. 너무 가깝게 들여다봐서 그런 거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보면 둥글둥글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이 일정 간격 이상으로

바싹 붙어서 관찰하게 되면 맘에 걸리는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저 외롭고 추운 두

곤충이 서로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짝지를 찾아 사랑도 하고 종족도 보존하는 아름다운

그림인 건데, 너무 들이대서 보니까 이 녀석들의 서툴고 단조로운 움직임이 보이고,

얄포름한 여섯 다리와 거칠고 칙칙한 피부가 눈에 들어온다.






'새삼' 블로그 소개와 미야자키 하야오 팬레터. 에서 미리 올렸었던 글, 아무런 가감도 되지 않은

그대로 책 끄트머리에 소개되었다. 여기저기에 넘겼던 글들이 약간씩 손질되었던 경험을 떠올려

보자면 정말 가장 고마운 부분이기도 하다. 사진이 전부 담기진 않았지만 그래도 뭐. 무엇보다

저 반지 사진이 그대로 실렸다는 게 꽤나 반가웠다는.

다음 장에는 내가 도쿄의 '에도도쿄건축공원'에서 찍고 이 블로그에 올렸던 사진들이 컬러로

보기 좋게 편집되어 담겨 있었다. 전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리게 하는 배경들이다. 다시금 올 여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듯.



내 사진들과 블로그 소개글이 담긴 '예술분야' 신간은 "애니메이션 사랑을 탐하다"라는 책이다.

대학교수님이신 저자는 우리나라에서 애니메이션을 유치한 아이들용으로만 여기는 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우선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와 상징들을 말글로 쉽게

풀어내고자 한다. 그의 애니메이션 한 편으로 이렇게 풍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잔뜩 뽑아낼

수 있다는 건 사실 나 역시 크게 공감한다. 그의 작품 하나를 리뷰하기란, 왠만한 책이나 영화를

리뷰하기보다 훨씬 어렵던 거다. 숨어있는 의미도 많고, 이리저리 읽힐 수 있는 결도 많고.


아마 애니메이션은 그 안의 공간을 세세한 소품 하나하나까지 전부 창조해 내야 하기 때문 아닐까.

그런 데다가 하야오가 만들어 내는 그 같은 듯 다른 세계의 정밀함과 '레알'함이 더해지니 더더욱.

이 책만 해도 작품 네 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모노노케 히메',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그리고

'추억은 방울방울', 이 네 편으로 책 한권이 만들어졌다. 사실 개별 작품 하나하나로도 책 한 권의

이야기는 나올 수 있는 이미지와 스토리가 꾹꾹 눌러담긴 것들일 텐데, 저자가 욕심을 버린 게다.

그리고 마지막 부록으로 담겨 있는 '이미지를 제공해준 블로그'. 거기에 내 블로그 소개글과

컬러판 사진이 담겨있다. (읽고 싶으신 분은 가까운 서점을 찾으시길..현재 '예술'분야 신간부문에서

괄목할 판매성적을 보이며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되었다던데.)

내 이미지들이 들어가 있는 1장,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다룬 챕터의 제목은 '그리움'.

저자는 하야오의 작품 네 편에서 그리움, 두려움, 입맞춤, 결혼이라는 네 가지 열쇳말을

잡아내어 강의하듯 이야기를 풀어간다. 실제로 대학교 교양수업 강의자료로 쓰일 예정인데

이런 식으로 애니메이션을 인문학적 소양을 갖고 분석하고 이야기를 이리저리 진지하게

들춰보는 책은 처음인 거 같다. 아직은 몇 페이지 들춰본 정도지만, 술술 읽히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개론서와 본격 서적 사이의 균형을 잘 잡고 있는 듯.



뭐, 대학교 교양수업에서 쓰인다니 책이 많이 많이 팔리지 않을까 기대되지만 내게 좋은 건

딱히 없고. 다만 그 학생분들께옵서 이 미천한 블로그를 몸소 방문하시어 이리저리 구경하다

가면 좋을 텐데. 난 사진을 발로 찍는 것 같다, 라는 불만에 빠져있던 요새 굉장히 기분좋은

일이었다. 본문에 드문드문 들어가 있는 사진들에 ⓒytzsche.tistory.com 이란 문구가 전부

붙어있는 데다가 은근히 많이 쓰여서 좋았지만 굳이 아쉬운 걸 잡아내라면, 그 사진들이

칼라가 아니라 흑백이어서 조금 아쉬웠다는 정도. 내 평생의 소원 중의 하나인 내 이름이 박힌,

내가 쓴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사진들이 들어가 있고 내 글이 두 페이지에 빼곡히 실려있어

사적인 애정이 듬뿍듬뿍 담기는 책이다.




A: 용감한 선생님의 사진이 막 돌아다니는구만

B: 사랑이야
B: 뭐 둘이 사랑하면 잘 수도 있고
B: 선생제자 따위 관계야 뭔 상관이여, 고딩3년이나 대딩1년이나.

C: 선생 애가 초등학생이래자노ㅜ


A: 난 폭간 남녀라고 생각함

B: 바람 한번 핀다고 이렇게 죽어라 광고당하며 돌팔매질 당할 일인지

C: 역쉬

B: 온국민으로부터 돌맞고 있자나
B: 남들 먹는 만큼만 욕먹음 된다구

C: 어떤사람들은
C: 그 여자를 부러워할지도몰라
C: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 동영상도있대

B: 사실 이렇게 되풀이 반복재생하는 이유는,
B: 남자의 경우 어린시절의 환타지를 대리만족하는 쾌감
B: 여자의 경우 낯설고 금기된 조합에 대한 호기심과 유혹
B: 뭐 그런거겠지 
B: 결국 저 둘을 대표선수로 차 안에 가둬놓고 차흔들어대는 거 온국민이 구경하는 꼴 아닌가

A: 명쾌한데

C: 글게

A: 그래도 폭간남녀

C: 글서 너는


A: 아무나 못함

C: 대리만족 느꼈어?ㅋ

B: 아니 뭐, 카섹 이야기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고
B: 이십살정도 나이차도 별거 아니고

C: 흐잉
C: 나한텐 별건데
C: ㅜㅜ

B: 섹스 자체도 별거 아니고
B: 그냥 남녀가 신체를 갖고 서로 행복하게 해주는 거자나
B: 마음으로 행복하게 해주나, 말로 행복하게 해주나,
B: 몸으로 행복하게 해주나.

C: 근데, 누군가에겐 상처자나.
C: 그 남편이나 애나

B: 그니까 남들 먹는만큼만, 욕해도 좋은 사람으로부터 욕먹어야지
B: 사진도 돌고 신상털리고, 이제 둘다 자살하면 잠시 조용했다가 또 사냥감찾아나서겠지 모
B: 물론 잔뜩 기사화해놓고 '네티즌수사대' 발동시켜 놓고 뒷짐지고 구경하는 찌라시들의 문제가 더 크지만.

C: 울나라사람들.
C: 캐는거엔 다들 전문가자나 ㅋㅋ
C: 걍 재섭게걸린거지모

A: 폭간남녀야

B: 부러움 걍 닥치고 보면 될 텐데 ㅉㅉ
B: 한마디씩 하면서 '난 순결해' 요따구 자기과시 내지 자기증명하려고 기를 쓰는 거야

A: 변태들
 


* 엊그제 두남자 한여자의 메신저 토크, 살짝 재구성.

 

투르크메니스탄이란 나라가 생겨난 건 1991년 10월 27일, 무너져내리는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날이다.

이후 15년간 니야조프 초대 대통령의 독재가 이어져왔지만, 정치적 반대세력도 많지 않고 국민만족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2006년에 니야조프가 사망한 뒤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건 그의 주치의였던

치과의사 출신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 투르크메니스탄의 모든 건물 로비, 건물 내 사무실들, 심지어는

투르크메니스탄 국적 항공기에도 티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의 커다란 초상화가 붙어있는 나라다.

그런 나라인지라, 초대 대통령의 묘소가 으리으리하게, 마치 파리에 있는 나폴레옹의 무덤 앵발리드를 떠올리게

하듯 금빛 번쩍이는 돔 형태의 지붕과 대리석 뻑적지근한 건물로 꾸며져있는 건 새삼 이상할 것도 없을지

모르겠다. ([파리여행] 나폴레옹의 휴식처, 앵발리드) 사진 촬영조차 금지된 채, 니야조프 초대 대통령과

그의 부모, 그리고 두 형제를 위한 다섯개의 대리석 관이 봉안된 그 곳에서 가이드 압둘라는 낭랑한 목소리로

죽은 이의 안식을 비는 코란을 노래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유해도 못 찾았고, 어머니와

두 형제는 45년인가, 투르크메니스탄에 있었던 대지진때 전부 돌아갔다고 한다. 압둘라는 그가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망자에 대한 무슬림의 예의로 코란을 읊었다 했다.

그리고 이 건물, Ertogrul Gazy 모스크가 그 묘소 바로 옆에 있었다. 1998년 터키가 건설해서 투르크메니스탄에

선물했다는 건물, 남자 5천, 여자 2천이 한꺼번에 수용가능한 거대한 모스크라고 한다.

현대에 만들어진 모스크라 그런지 전통적인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면서도 뭔가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거 같다.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새하얗게 반짝이는 대리석과 화려하게 번쩍이는 금박이 아직 그 풋풋함이랄까 신선함을

잃지 않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빼곡히 세워진 채 미나렛 첨탑을 따라 위로 쭉쭉 솟은 가로등들 때문일지도.

황금빛과 나무색이 섞인 기하학적 문양이 가득한 문을 지나면 바로 모스크 안으로 입장, 더이상 사진촬영은

불가능한 공간에서 잠시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1층은 남자를 위한 기도공간, 2층은 여자를 위한 기도공간이라고.

여느 모스크들과 다를 바 없이, 기도를 바칠 때 메카 방향을 알 수 있도록 살짝 움푹 패인 '키브라'가 꾸며져

있고 천장의 커다란 돔에는 알라를 의미하는 아랍어가 쓰여있고, 우상숭배가 금지된 그들의 교리 덕분에

발달한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공간.

다만 이집트나 다른 아랍국가의 모스크에서 느꼈던 편안함이나 여유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 아쉬웠다. 아무래도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특별한 '과시용' 모스크이기 때문이겠지만, 사람들의 일상에 콕 박힌 채 누구라도 편히

와서 기도하고 쉬고 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어서 그랬을 거다. 더구나 바로 옆의 초대대통령 묘소와 맞물려서

더욱 경건하게 위엄을 부리려는 탓도 있을 테고.

사막의 나라 투르크메니스탄, 그곳에서 이런 분수를 넓게 조성해 놓고 또 저렇게 녹색 정원을 잘 관리하는 것은

꽤나 많은 돈과 시설을 필요로 할 거다. 중동의 여러 아랍국가들에서 그렇듯, 이곳 역시 정원과 분수는 부와

권력의 상징. 이 사원은 그런 점에서도 역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소망교회'쯤 위상을 차지할 거 같다는.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계율이 있다고 한다. 보통 다른 모스크들은

입구 앞 정면에 몇 개 수도가 설치되어 있어서 거기에서 손발을 씻고 들어가는데, 여기처럼 칠천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대한 모스크는 고작 몇 개의 수도시설로 택도 없는 거다. 하여 지하에 목욕탕처럼 잔뜩

설치된 수도꼭지들. 왠만한 사이즈의 목욕탕은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공간이다.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의 조명, 그 등불이 천장에 그려내는 격자살 무늬 그림자가 인상적이었다.

Ertogrul Gazy 모스크에서 돌아나오는 길, 사실은 여기에서 초대 대통령 묘소를 향해 사진을 찍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그새 살짝 움직인 태양, 덕분에 잔뜩 역광을 받고 선 모스크를 향해 사진 몇 장을 더

찍으며 압둘라에게 물었다.


투르크 사람들은 이번 대통령이 죽고 나서도 저런 화려한 대통령 묘소를 지으려고 할까. 그는 아마 그럴 거라고

했다. 대통령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님 그만큼의 애정인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 착잡했다. 십여년

독재를 해온 대통령에 대해 불만없이 수긍하며 죽고 나서도 계속 그의 죽음을 기리는 사람들. 물론 엄청난

부존량을 자랑하는 석유가스 자원이 가져다 주는 '먹고사니즘'의 해결이 그 일등공신이겠지만, 그게 다일까.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마침 밤기차로 서울역에 도착하고 나니 3시반. 전철다니길 기다리기로 하고 여관과
아가씨를 권하는 여성분들께 죄송해하며 비됴방으로.


모든 곳에서 의미를 찾으며 모든 곳에서 이러저러한 지침을 받으려는 건 물론 아니지. 때론 시간 때우기 용으로
보기도 하고 그저 일종의 재미만 요구하는 경우가 태반이기도 하고. 그치만 하다못해 무협지나 만화에도

무언가-말투던 단어건간에-得이 될만한 게 있다는 게 내 경험이라서. 이 영화보고 나서 잠시 어리둥절했다.

멋진 영화인데..무언가 완벽하게 속아넘어간 느낌. 마술을 볼때처럼, 박수를 치고 감탄을 하면서도 왠지 한구석이

미진한 느낌이랄까. 스토리 끝의 갑작스런 반전에 원인이 있었나..


그 생경함의 출처는, 숙고 끝에 다다른 답안인데 아마도 이질감인 거 같다. 전혀 말이 안 되는 환타지틱한

이야기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풀어 나가며 '빙의(라 부를만한 것)'의 허무맹랑함을 거의 완벽히 지워버렸으니

말이지. 하긴 동감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그거보다 정도가 훨씬 세지 싶네. "우리는 우주에서 왔어!" 정도로.


마지막의 히로시에 료코가 '까슬까슬' 아빠-남편의 턱을 만지는 장면에서야 군더더기같던 결혼식 장면이 이해가
 
되었다. 결국 남편이 그녀를 딸로 호명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녀는 멋지게 그 변화-아내에서 딸로의-를 이루기
 
위한 연극을 했던 거..남편-아빠는 잠시 발끈해서 그녀의 새 신랑에게 제의를 하고..두대 갈기겠다는, 한대는

딸내미를 위해. 한대는 그녀를 위해. 한대를 있는 힘껏-머리도 희끗해졌으면서-갈기고서 잠시 pause..

그리고 그녀에게 말한다. 새인생이 시작된 걸 축하해.


그저 맹목적인 애정 내지 의욕만으로는 무언가를 이루기에 턱없이 부족하거나 제대로 이뿌게 만들어내기가

곤란하다. 그저 무작정한 친밀하고도 따스한 분위기만이 맥없이 흐르는 경우가 어찌나 많은지. 담을 그릇을

잃어버린 정신이 역할갈등을 겪으면서..어찌할 수 없는 그 변화를 수긍하기 위한 서로의 노력. 그 노력을 눈멀지
 
않게 하기 위한 이벤트가 결국 영화의 중종반간의 스토리지 싶다. 거의 성공해가는 단계에서 굳이 그걸 폭로하는

그녀의 의도가 남편에게 전해지는 순간, 주먹은 멈추고 그는 웃어 줄 수 있게 되어 결국 사랑이 성공하는 셈이랄까.


성공...이란 말보다는 매듭..이란 말이 더 나을라나. 사랑의 매듭.


어쨌거나 지금은 비됴보고 집에 와서...방구석에 틀어박혀 있다.ㅋㅋㅋ



(2003.12.24)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 10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청미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보면..사랑이 싹트고 자라고 피어나고 시드는..그 과정들에 대한

단락구분이 절묘하다. 예컨대 이상화..진정성..정신과 육체..사랑이냐 자유주의냐..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행복에 대한 두려움..이런 식이다. 이를테면 관계의 절정에 달했달 부분인, '행복에 대한 두려움' 챕터 이후에

오는 것들은, 수축..낭만적 테러리즘..선악을 넘어서..예수 콤플렉스..사랑의 교훈..운운 이런 이별을 예감하고

준비하고 맞이하고 되새기는 과정들에 대한 압축적인 소제목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스물다섯 쯤에 쓴 처녀작이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그의 감성과 능력에 질투를 느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그는 '이별하는 법'을 말하지 않았다. 이별을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하는게 좋은 이별이고

어떤 게 나쁜 이별인지 말하지 않았다. 애초 그가 배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이별 따위 없는 거고, 이뿌게

돌아서는 것 따위 없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별은 언제나 당하는 것일 뿐..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별은 상대로부터 오는 건지도, 혹은 자신이 만들어낸 마음속의 환영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와, 누구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배우지 않은 것들, 배울 수 없는 것들은 도무지

막막할 뿐이다. 다만...그에게 힌트를 얻는다. 그는 그 기승전결의 루트를 돌이키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주의와
 
나약함을 가감없이 대면하고, 묻는다. 묻어버리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저 매순간..진심을 담아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더할 수 있는 팁일까.



(2008. 12. 28)

ㅇ 제출 테제 : 사랑은 (뿅뿅뿅)야 나머지 반은 네가 입었어.

ㅇ 출제 의도 : 사랑은 뭘까요.

ㅇ 응답 방법 : 밑줄치고 기울이고 가로치고 글자키운 (뿅뿅뿅)
                     세 글자를 맞춰주시면 됩니다.


ㅇ 정답 선물 : 티스토리 초대장 5장 선착순 배포


감사합니다~* (특히 진리를 깨치신 조석님 감솨.ㅋㅋ)









빨강색 러브, 근데 뭔가 이상하다. 영문 알파벳이 아니라 저건 한글 모음들인 거다. L을 대신하는 니은, O를

대신하는 이응, E를 대신하는 ㅌ, 티읕. 그리고 거꾸로 물구나무선 시옷이 제대로 V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조그마한 금속링들을 붙여서 만들어낸 커다란 수탉. 벼슬과 부리의 위엄도 볼 만 하지만, 아직 성글게 자라난

꼬리깃이 좀만 더 풍성해지면 완전 볼 만 하겠다 싶었다. 중닭에서 완연한 장닭으로 변신 뾰로롱.

토이뮤지엄에서 만났던 커다란 인형, 그리고 햇살 가득 들여보내주는 관대한 창문 아래 나뭇빛 책상과 소품들.

화장실 표시가 귀엽긴 한데, 가만 살펴 보면 대체 저 쩍벌녀 꼬맹이는 급하다면서 전화기를 잡고 있으며, 저

어정쩡한 표정은 또 왜 짓고 있으며. 혹시 저 의자가 휴대용 변기인 건가..;

몇 장 너무 재미있는 그림들을 방문객들이 남겨두었길래, 차마 혼자 보기 아까워 사진을 찍어버렸다. 지재권은

전적으로 그리신 분들께 있으며 원치 않으실 경우 변호사 선임 및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

'거짓말하면 묻히는 거다'. 그 아래 정말 묻혀있는 피노키오.ㅋㅋ

어리다기엔 뭔가 '중닭' 정도 크기로 자라난 듯한 '어린왕자'. 소년의 복숭아빛 두 뺨은 싱그럽건만 눈빛속엔

번뇌가 눈물처럼 차올라 있으니 나이먹는 게 아쉬울 따름인가 보오.

입체 카드의 허점. 사람의 시선이 항상 최적의 위치에서 카드를 펼쳐보거나 바라보는 것만은 아닌 거다.

온통 깨어지고 뒤틀린 사자의 얼굴과 앞발바닥. 이글이글 불길처럼 타오르는 갈기, 라기보다는 그냥

되는대로 자르고 구겨놓은 쓰레기뭉치에 불붙은 거 같다.

토이 뮤지엄 앞에는, 심지어 이런 공공 시설물까지 이쁘게 포장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포장. 무슨

거대한 선물상자같은 게 길가에 떡하니 놓여있길래 뭔가 했더랬다.

그리고,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에 나옴직한 장면. 거대한 나무가 건물 안쪽 어딘가에서부터 무럭무럭 자라났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는 덜 떨어진 질문을 좀더 참신하게 바꿔볼 수 있을 듯. 건물이 먼저냐 나무가 먼저냐.






가면의 고백 - 10점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잔뜩 힘이 들어가기 쉽다.

자신의 지난 사랑, 심지어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다. 그토록 진실되고 아름답고 뜨거웠던 사랑은

두 번 다시 못 올 거라는 듯이,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또 자신에 대한 상대의 마음이 단색으로 칠해진다.


사실은 아니다. 금송아지라도 껴안고 있었던 듯한 지난 삶은 사실 적지않이 누덕누덕한 채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모인 것에 불과했으며, 지난 사랑 역시 어거지로 강변했던 단심(丹心)의 모노톤이 아닌

선명하고 흐릿한 스펙트럼 내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쉼없이 급변하며-그렇지만 역시 남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냉온탕을 거쳤던 거다.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렇게 어렵다. 나의 삶, 나의 사랑 이야기란.


미시마 유키오는 그런 이야기를 한다. '가면의 고백'이란 아이러니한 제목으로, 자신의 삶과 첫사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는 자신의 탄생부터 유년시절, 청년시절에 이르는 성장기를 자세히 묘사하며 동시에 자신의

성 관념이 어떻게 변전해 나가는지, 동성애적 성향이 어떻게 발현되고 자신을 괴롭혀 왔는지 고백한다.


그의 첫사랑은 아마도 동성과 이성, 양자를 나누어 따져야 할 듯 하다. 동성애적 성향을 발견시켜주고 이후

하나의 전범이 되었던 동성의 첫사랑, 그리고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과 싸우며 키워나가다 무참히 깨뜨리고 말았던

이성의 첫사랑. 그러니 어쩌면 '첫사랑'이라는 무디고 닳아빠진 단어에는 잡히지 않는 게 그의 복잡다단하고

종잡기도 어려운 첫사랑 이야기, 혹은 첫사랑을 경과하는 그의 심리관찰 이야기다.


아니, 비단 '첫사랑'이란 단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야기라는 게 그렇다. 불연속적이고 중첩적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총보를 악장별로, 파트별로 구별해 채보하는 작업과 같은 게 아닐까 싶다. 덩어리진 채 자신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어렴풋이 느끼기만 할 뿐인 그런 불안감, 초조감, 만족감, 기대감...그런 것들의 카오스적인

혼합물에 제각기 이름을 붙여내고 인과관계의 레시피를 구성해 내는 것. 비록 어느순간 자신이 실제와는 한참

동떨어진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지라도.
 

실제 삶이란 건 정신병자의 읊조림같은 분절적인 자동기술법에 지나지 않거나,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미친년 널뛰듯 하는 조증과 울증의 연속과 오히려 같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무 위태롭고 위험하다. 사건과

감정의 선후, 인과관계에 대한 명료하고 선명한 정리가 필요한 거다. 자신의 불안정하고 규정불가능한 감정선에
 
규칙적이고 모범적인 법칙을 부여하고 특정한 이름을 붙여내어 가닥가닥 구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불안스럽도록

구체적인 카오스 덩어리는 그저 하나의 식별가능하고 이해가능한, 그리고 무독무해한 추상으로 변해버린다.



그의 고백은 그런 '가면'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너무도 잘 의식하고 있어서, 차라리 그 '가면'과의 대결이라

하는 게 낫겠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가능한 가감없이 철저하게 되새기고 손실없이 전달하고자 한문장 한문장

심혈을 기울여 뽑아낸다. 너무도 무디고 둔탁한 언어와 어휘를 가지고 종횡무진 사방으로 뛰노는 감정선들을

추스려 표현하기란, 거의 잠자리채로 바람을 잡아보겠다고 나대는 꼴과 같을지 모른다. 비록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가면'을 벗을 수야 없겠지만, 잠자리채로 바람을 낚을 수야 없겠지만, 그는 정말 낚아챌 기세다.


그의 삶의 행적과 사고과정을 오늘의 시각에서 아귀가 딱딱 맞도록 시간과 인과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몇가지
 
대표적 감정으로 칠하여 간결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하려는 의도 따위는 전혀 없다. 행동하는 그 순간, 심지어

그 이후의 순간까지도 서로 충돌하고 모순되고 중첩되는 수만가지 온갖 단상들이 머릿속에 가득차 윙윙대고

있었음을 힘들여 기억해내고 있다. 거기에는 삶과 사랑을 미화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 단지 자신의 내면에

철저하게 솔직하고자 한다. 그게 그의 '고백'이다.


어떤 면에서, 그는 삶이 마치 모네의 '수련' 작품과 같음을 보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멀리서 볼 때는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어나는 그 형체란 게 사실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물감 범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굳이 그가 왜 단순하여 아름다울 '사랑'과 '삶'의 궤적을 그토록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들여다 보아 온갖 진창과 같은 감정과 진실들을 떠올리고 말았냐고 묻는다면, 어쩌면 그것은 스스로의 삶과

지난 사랑을 스스로 납득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일 거라고 대답하고 싶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뼈아픈 후회, 황지우 詩)



w/ '프리미엄 막걸리' 우리쌀 청정수 솔바람. 딱히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냥 탁주.




이선균이 부러웠다. 여복(女福)이구나. 그는 첫사랑인 두살 연상의 운동권 누나와, 파주에 내려와 만난

착하고 발랄한 아내와, 그리고 어리지만 강렬한 매력의 아가씨, 아내의 여동생까지 만수산드렁칡처럼

이리저리 얽힌 거다. (게다가 그녀는 근래 내가 기대감을 품고 영화를 찾아보게 만드는 '서우'란 말이다.)


그가 첨엔 멋져보여서, 나중엔 받은 게 많아서 계속한다던 철거민대책위원회 등 사회 운동, 그건 첫번째

첫사랑과의 접점이자 그녀를 기리는 그만의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이상 계속하는 이유를 못

찾으면서도 추억을 되새기듯, 그녀에게 인정받겠다는 듯 철거촌에서 화염병을 던진다. 아내 역시 그의 삶에

늘 존재한다. 파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로, 첫사랑과의 관계에 대한 죄씻음의 고백으로.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다,는 고백은 아내를 여전히 놓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거꾸로 보여주기도 한다. 계속 허점을 내보이고

유인해내다가 끝내 입술을 덮치고 단추를 끌러내린 서우에 대한 맘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가 누구를 사랑하는 걸까, 어느 순간 헷갈리기 시작했다. 여복이라기보다 여난(女亂)이란 단어가 가깝겠다

싶어지기도 했다. 어느 마음 하나 스쳐가거나 가짜였던 것은 아닌 거 같은데. 어느 것 하나 놓지 않은 거라면,

어느 순간부터 두 번째, 세 번째 사랑이 시작된 걸까, 그건 아예 구분조차 못하겠다. 아무리 사랑이란 감정이

칼로 잘리듯 툭 끊기고 툭 시작되는 감정이 아니라지만, 어쩌면 그는 영화가 끝나도록, 그가 삶을 다하도록 

세 명 모두를 가슴에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우 역시 혼란스럽긴 매한가지. 그녀는 언니를 위한다며 형부를 미워하고, 사랑하고, 떠나고 돌아온다.

그녀가 놓인 세속의 문제들-보험금 문제라거나 사고 원인이라거나-따위가 그녀 내면의 모순과 뒤숭숭함을

더욱 강화하는 거다. 그녀는 언니에 대한 사랑과 형부에 대한 사랑 사이에 끼인 채, 언니와 형부의 사생활을

불편함과 호기심이 복합된 눈초리로 바라보고, 언니를 위한 가출에 형부 사진을 잘라 품고 간다.


파주는, 계속해서 안개 속이다. 파주로부터 나가는 길, 들어가는 길 모두 몽환적이게도 짙고 무겁게 떠도는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뭐 하나 뚜렷하지도 칼처럼 구분되지도 않는 그런 안개속, 이선균과 서우는 파주에 있다.



"숭, 숭숭,내 말 좀 들어봐."
"끽끽"
"숭, 사랑은 시소와 같대. 서로의 마음이 얼추 비등비등해야 재미있어진다던가. 누구 한 명의 마음이 가벼워지면 다른 한 명이 무거워지면 되고, Vice Versa. 뭣보다 상대가 있어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거기도 하고. 뭔 말인지 알겠어?"
"끽끽"

"끽끽"
"잘 듣고 있어 멍충아"
"끽끽끽끽 끽끽끽 끽끽끽끽끽끽끽끽 끽끽끽끽"
"니미뿡이다."


@ 미술관 옆 동물원.



작년에 말그대로 (햇빛만 받으면) '샤방샤방한' 뱀파이어가 나와서는 '우쥬 매리 미'로 끝내던 '뉴문'이 개봉하던

때, 비슷한 제목으로 몇 개 안 되는 스크린수로 개봉했다가 금방 내린 영화가 있었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끝내 못 보고 놓쳤던 영화, '더문'.


공룡시대에서 세계종말까지의 시간축, 한국에서 남극 혹은 외계까지의 공간축, 그 위에서 '나'란 존재는 유일무이,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고 그야말로 유니크하다는 믿음은 쉽사리 건들 수 없는 신앙같은 부분이다. '나'란 사람은

내가 부모의 정자와 난자라부터 이어받은 유전적 형질에 더해 지금껏 쌓아온 독특한 경험과 교육, 교훈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며, 그렇기에 일란성 쌍둥이라 해도 엄연히 제각기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거다. 요는, '개성'이다.


조금만 거창하게 나가자면, 그러한 '개성'이 존재함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뢰가 자신의 개별적인 삶의

근본적인 이유이자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란 민주주의적 공리를 아무도 감히 반박하지 못하게 만드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내가 왜 숱한 사람이 앞서 걸어간 인류의 자취를 따라 굳이 수고로운 삶을 살며 하나의 자국을

남겨야 하는지, 나와 당신이 함께 지지고 볶고 싸우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 바로

그 '개성'이기 때문이다. 난 앞선 누구와도 다르고, 함께 사는 누구와도 달라. 조금 깊어진 생각으로라면,

그 '다름'이 '우열'의 판단과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런 관용을 발휘해 민주주의를 운용하는 기반이 될 거다.


그렇지만, 너무도 흔히 쓰이는 단축키 두 개를 상상해 본다. ctrl+c, ctrl+v. 파일 복사, 그리고 붙여넣기의 마법.

생성된 시간만 다를 뿐, 내용은 어느 것 하나 변하거나 달라진 구석이 없다. 나중에, 그런 명령어를 지시받는

컴퓨터가 인간과 자유로이 대화할 지경이 된다면, 그(녀) 컴퓨터는 인간이 가진 그 '알량한 개성'이란 걸

어떻게 생각할까.


파일이 가진 내용, 히스토리, 혹은 약간의 특질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금세라도 ctrl+c, ctrl+v의 마법으로

재현해 낼 수 있는. 영화에서 그런 컴퓨터 '거티'는 두 명의 존재에게 같은 이름을 부르고 같은 친근함을

표하며 같은 '동일자'로 부르는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던 거다. '개성'이라고 그토록 자부심을 갖고 자아의

원천이라 여겼던 그 뿌리가 이토록 쉽게 복사되고 다른 그릇에 부어질 수 있는 거라면, 대체 인간은 어디에서

그 삶의 이유를, 의미를, 목적을 찾아야 할 것인가 묻게 되는 영화다.


어딘가에 나와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상상, 얼굴도 같고 성격도 같고 심지어 갖고 있는 기억조차 같다면.

그런 상대라면 우리는 아마도 그 상대를 죽여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지 모른다. 솔직히 그런 식의 상상은

이미 했었다. 하느님인지 하나님인지 알라인지 부처님인지 태을인지간에, 그 신이라는 작자의 상상력이 워낙

빈약하고 노력이 미천해서, 초딩 5년의 국한이와 중딩 2년의 태호, 고딩 3년의 상은이와 대딩 1년의 석훈이가

어쩌면 같은 붕어빵틀에서 찍혀나온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서로 모르고 있을 뿐 어딘가에 그(녀)와 똑같은

그(녀)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역시 그런 상상의 위험한 칼날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했을 뿐이었다. 만약 어딘가에 나와 똑같은

외모, 똑같은 성격, 똑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역시나 나는 칼을 쥐고 그를 향하거나 나를 향할 거라

생각한다. 내가 믿어왔던 세상, 내가 진짜라고 믿어왔던 발밑의 기반이 허물어지는 충격일 거다. 그럼 두려움,

혹은 황당함을 빌미로 생각조차 하기 싫어진단 건, 내가 지금 모종의 경계-빨간약과 파란약 중 하나를 골라

잡아야 하거나, 프로그램 속 세상의 외피가 벗겨질 즈음의 지점-에 서있다는 경고 신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서로의 곁을 얼마만큼 내주고,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낼 수 있는 걸까. '사랑'이란 말이 현재진행형일 수

있는 순간이란, 얼마나 짧고도 덧없는 것일까.


영화에서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강조되는 이 조형물..연인들은, 아늑한 공간을 확보한 저 높이만큼 계단을

올라가서 편안하고도 행복한 포즈를 취한다. 시간이 다소 흐르면, 남자는 당연한 듯 여자에게 반말을 하고,

여자와 남자는 어딘가의 찻집에서 말다툼도 한다. 위로 오를수록 가팔라지고 위태로와지는 계단.
 
오를수록 폭이 좁아지며 제 한몸 운신하기도 벅찬 계단은, 게다가 받침대마저 없다. 그 계단은 어디로도 이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여자는 흔들리는 계단 어딘가쯤에서 리셋을 원했고, 성형을 해서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해보지만..결국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나락.


'관계'에 '시간'이 더해지면 예외없는 나락이다. 껍데기를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몇가지 취향과 특징을

좇아 사람을 공들여 찾는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다. 결국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이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어야 나와 당신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가.


김기덕의 답, 혹은 내가 읽은 김기덕의 답은..항상 그렇듯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변하는 것이다.

시간의 표백력은 그토록 강력한 것이고, 저 계단을 함께 설레며 올랐던 '관계'들은 어느순간 다 깨어져나간다.

행복했던 기억은 사진으로만 남을 뿐, 그 사진마저 바꿔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린다.

이래도 세상을 살아볼테냐, 이래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보겠단 거냐, 라고 그는 몰아세우는 거다. 사람이란

이토록 불완전하고 아름답지 못한 존재다라고.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초인(ubermensch)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사정없이 몰아부친 김기덕의 공격을 모두

긍정해 낼 수 있다면, 한자 남짓한 '재겨딛을' 공간조차 보이지 않는 그 코너에서 웃을 수 있다면. 하지만 영화는

수미상관, 다시 변주된다. A에서 A'로.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삶을 이어나가려면

적당한 타협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고. 내가 생각해낸 타협점은 이거다. "Art Of Love." 우리가 함께 딛고 오르기

시작한 이 계단이 우리를 아무데로도 데려다주지 못하는 건 변함이 없다 하더라도, 그 계단 한칸, 한칸을 지그시

즈려밟으며 가능한 오래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파국의 지연..이랄 수도. 통속적이게도, 오래 관계를 유지하려면

역시나 서로의 노력이 절실하단 거다.



더하기. 혈연(이른바 귀속지위 등)으로 묶인 관계를 제한다면,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엮어내는 관계란 얼마나

귀한 걸까..라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랑한다는 거. 영화 도중, 살짝 쌩뚱맞아보이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많이 사랑하시나봐요"란 대사에서, 그래서 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난, 어쩌면 연애지상주의자인가..라고 생각을 해보기도.ㅋ


더하기2. 김기덕..내가 이 감독에 환장하는 이유는, 그의 감성과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는 '계급, 계층, 젠더'같은

틀에 얽혀있지 않으며, '긍지높은 인간'이길 포기하되 관계와 소통의 가능성을 물고 늘어지도록 끝까지

몰아세운다. 어줍잖은 위로도, 환타지도 없는 그의 '보여주는(showing)' 영화 그자체는 항상 내게 모종의

좌절감을 맛보여주고, 나는 그 좌절감을 아껴 핥으며 바닥을 단단하게 감촉하는 것이다.
 
다소 드라마가 강화되고 대사의 비중이 늘어났으며, 하드보일드한 장면들이 많이 거세된 '시간' 역시, 그의

실험정신과 좌절스런 주제의식은 그대로여서..언제나 그렇듯 실망하지 않았다. 13th.



(2006.8.27)
#. 자동차의 앞모습을 보고 저녀석 웃고 있구나, 인상쓰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밍숭밍숭한

헤드라이트를 가진 프라이드는 왠지 멍청해 보였고, 캐피탈 정도는 왠지 지적이란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갖고

있었고. 마티즈 정도는 내게..상당히 세련되면서도 은근 얍쌉하다는 느낌을 주었고. 뉴그랜저 정도는 적당히

무게 있는 표정과 적당히 올라간 눈꼬리를 갖고 있고.


유지태의 코란도는 그런 거였다. 이영애와 잠시 분위기가 틀어져 분위기가 싸해지면 디젤엔진 특유의 덜덜거리는
 
소음이 그 공간을 더욱 야박하게 했고, 새로 뽑은 이영애의 마티즈와 엇갈려 한눈에 잡힐 때에는 더욱더 그

무지근한 덩치와 투박함이 두드러져 보이는. 봄날은간다, 이영화에서 자동차는 그 인물들의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하나의 적나라한 힌트였다.


이영애가 끌린 다른 남자, 그의 뉴그랜저는 그녀가 그에게 첨으로 관심보였던 선그라스만큼이나 짙은 검은색의

반들반들한 보디를 갖고 있었고, 유지태의 각진 코란도는 제대로 광이라곤 났던 적이 없는 거 같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내겐 '사랑은 역시 변하는구나', 정도로 들렸다. 관계가 힘들어지거나, 유지태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시계나, 하다못해 달력이라도 나왔다. 조막만한 공간이었고, 그만큼

시계가 세상에 널려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와 그가 충일감을 느끼던 그런 시간들에는 한번도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가 첨으로 화를 내던 시간 아침 10시반, 그후 혼자 남자가 꾸역꾸역 밥먹는 시간 11시, 남자의 할머니를 찾은

시간 밤 10시..그런 식으로, 계속 화면의 한구석에서 집요하게 시간이 흐르고, 안쓰러운 감정의 흐름과 관계의

변천을 의식시킨다. 결국 그런 아연스러운 시간의 흐름...그 극단의 형태는 마지막...남자와 여자가 서로 등을

돌리기까지..화면의 모서리로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몇번씩 서로 눈길이 엇갈리며 하염없이 부질없는 희망을

갖게 만드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다.
 

그간의 관계를 집약해서 보여주듯 때론 같이, 때론 홀로..상대를 되돌아보고, 무언가를 기다리듯 애절하게 잠시

멈춰서 마주보지만..시간이 멈춰진다면 잠시나마 기대앉아 울어보기라도 하겠지만...


시간은 흐르고 봄날은 가고.


마티즈의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그녀였지만, 악수를 핑계로 먼저 등을 보여주는데 성공했지만, 역시 사랑을

세련되게 혹은 잘 정돈된 모습으로 한단 건 불가능하다. 가슴이 터질듯한 안타까움..대체 세상은 왜 이따위인

거냐고 고래고래 내지를법한.


#. 그래도 남자에겐 기댈 곳이 없다. 이미 훌쩍 커버린 그에게는 고작 친구녀석과의 짧막한 대화나, 할머니가 주는

사탕 정도가 남아있을 뿐...떠나간 사람을 내처 못잊는 할머니에게, 자신에게 화를 내고, 고함치고,

울어버리지만...허물어질듯, 무너져내릴듯 하면서도 자그마한 할머니의 어깨는 너무도 야위고 약하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서 둘은 세상 한가운데서 오직 서로의 품에서만 기댈 곳을 찾았던 거였고.

그런데 더이상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거둬내고 씻어주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영혼에 스며있는 것. 둘이 되어 그 외로움이 더욱 커질 때, 빈틈이 늘어나고 균열이 깊어질 때 봄날이

가버렸다. 최악보다 차악,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남자는 다시금 시간의 흐름이 숨겨진 곳에서 바람을 느끼며 헤어진 후 처음으로 웃음을 띄우지만...글쎄,

그 뒤에는 아마도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정도...를 붙여서 생각해야 하지않을까.


봄날은 가버렸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봄날이 오겠지만, 시간을 비끄러매고 태양을 묶어둘 재간이 없는 이상..

다시 봄날은 가고. 언젠가 분홍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분홍빛 양산을 드리운채로 햇살 가득한 봄날의

끝물쯤에서 세상을 등질지 모른다.


(2005.4.25)
#1. 매해 추석은, 추석뿐 아니라 명절날 아침은 왠지 약간 어리어리한 시각적 이미지가 남아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은 늘 아침일찍 일어나 차린 차례상의 제사주를 음복할 때. 아, 작년 이맘때도 아침 댓바람부터

술을 몇 잔씩 마셨었구나, 그래서 아침부터 발갛게 살짝 취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온다.


#2. 제사주를 일본주로 올렸다. 조상님들도 늘 우리것만 맛보실 게 아니라 물 건너온 외국것도 좀 맛보시는게

어떨까 싶어서, 라곤 하지만 따로 차례주를 사자니 마침 집에 많은 일본 청주-사케-를 올려도 되지 않겠냐고

내가 쿡쿡 찌른 탓이다. 사실 한때 광풍처럼 일었던 '신토불이'의 프로파간다가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있는

곳이 제삿상, 차롓상인 거 같은데 이거 좀 의심스럽다. 제삿상 음식을 꼭 과거 어느 한지점에 고정된 것으로

바득바득 챙겨야 하는지도 의심스럽고, 술이니 음식이 꼭 국내산이어야 하는 이유 역시.


#3. 추석이니 설이니, 친척들 바글바글 모인 풍경의 한 귀퉁이에는 으레 왠지 '촌스런' 화면을 뱉어내고 있는

티비가 시끄럽기 마련이다. 올해도 작년처럼 사람들의 응원소리가 소음처럼 고스란히 담겨있는 야구 경기를

하나쯤 보았고, 한복을 차려입은 진행자들이 우글우글한 프로 몇개를 보았으며, 경이로운 '동안'이라며

시청자에게 억지부리는 프로그램도 빠지지 않았다.


#4. 젊은 것들의 대중가요 세계가 온통 핫하고 쿨하고 섹시하며 불끈불끈한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트로트의

세계는 그 죽일놈의, 끈끈하다 못해 더럽고 무섭다는 '情'이 담겨있다. 몇 번의 사랑을 거치고 나면 사랑이

아니라 정 때문에 살아가고, 정을 추억하며 살아가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이나 '사랑'이니 정의내리기

어렵긴 매한가지지만, 어느 지점에서 '사랑'이 '정'으로 바뀌었음은 자각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트로트의

세계가 새롭게 보이는 나이대로 진입하고 있는지도.


#5. 개천절이니 일요일이니 토요일이니 추석이니 연휴가 겹쳤으면 겹친 만큼, 그만큼 찐하게 쉬어주고 놀아

줬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늘 허무하게 끝나는 명절 연휴. 명절은 쉬는 날이 아닌 탓이다.






비자림, 어렸을 적 바둑을 잠깐 배웠을 때 적당한 두께의 비자나무 바둑판이 최고급이라는 풍월을 들었던 거 빼곤,

비자나무라는 이름 자체가 낯설기만 했다. 제주도의 서북쪽께, 제주시와 성산일출봉 중간쯤에 있는 비자림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대단히 희귀한 비자나무 숲이라고 한다.

티켓을 받아들고 이거 뭐야, 했다. 왠지 글씨체가 북한에서 많이 쓸 법한 격정적인 궁서체여서, 전반적인 티켓의

색감도 왠지 남한보다는 북한에서 많이 쓸 법한 느낌? 개성공단에 갔을 때 보았던 한글 간판들의 궁서체와 꽨

흡사하다 싶다. (이런 글 쓰면 조만간 티켓 디자인 바뀌는 거 아닐까 몰라. 근데 특징적이란 얘기지 절대 싫다거나

혹은 '표 디자이너'가 빨갱이 아냐, 란 식의 이야길 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아 이 기나긴 자기검열과 지레 핑계대기)

매표소에서부터 4-50분 걸으면 비자림을 한바퀴 여유있게 걷고 나올 시간이 된다고 한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하트 모양 뚫려 있는 바위와 잘 조성된 정원. 연인끼리 간다면 하트를 마주한 채 양쪽에 설 법한,

전형적인 포토존이다.

비자나무의 이름은, 잎의 뻗어나간 생김생김이 한자 아닐 비(非)자(字) 닮았다고 해서 비자(非字)나무라고 한다.

은행열매랑 비슷하게 생긴 누런 빛의 열매가 투둑투둑 떨어져 있었는데, 은행열매의 고약한 똥내와도 다르고

살짝 시큼한 느낌, 혹은 비린내가 풍겼다. 왜 오존발생기에 코를 박으면 맡을 수 있는 그런 비릿한 냄새같기도 하고.

돌에 잔뜩 끼어있는 이끼는 볼 때마다 신기하다. 대체 저 돌멩이에 빨아먹을 양분이 뭐가 있다고.

'숲'이란 건 왠지 생소하다. 무럭무럭 자라난 나무들이 이렇게 하늘을 가리울 만큼 커진 채 무리를 이루고 있는 걸

보기가 쉽지 않은 탓이기도 할 거고, 숲이라고 불릴 만큼 너른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들을 보기도 쉽지 않아서다.

그런 점에서 비자림은 꽤나 숲다운 숲이었다. 울창하고, 푸르고, 아늑한 느낌에다 살짝 비릿하지만 상쾌한 내음까지.

연리지. 아마 이 단어를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건 최지우가 주연을 맡았던 동명의 영화보다도, 각종 퀴즈프로에서

심심치 않게 나왔던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 비자나무에 영원한 사랑을 빌어보세요."

사진이 좀 흔들렸지만, 한때 나의 드림카였던 푸조 시리즈. 무려 '푸조나무'라는 나무가 있어서 신기해서 한방.

이름이 무려 "새천년 비자나무". 2001년인가, 당시 수령이 830여세의 이 나무를 두고, 비자림에서 니가 짱먹으라며

붙여준 이름이란다. 당시 '새천년'이란 단어가 유행하긴 했지만 나무에도 이런 악취미한 작명이라니. 뭔가

비자림을 관장하는 숲의 신이 깃들어있는 듯한 포스를 쫌 말아먹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내려오는 길, 비자림을 걷는 사람들이 발을 씻거나 신발을 씻고 갈 수 있도록 마련해둔 수도꼭지도 범상찮다.

종종 신발을 벗어들고 맨발로 걷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는데, 따라하고 싶은 맘이 쿡쿡 솟아났지만 참았다.

'새천년 비자나무'를 기점으로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이 다른데, 그곳까지 걸어들어가는 길이 나무가 잔뜩

우거진 숲길이었다면, 그곳에서 걸어나오는 길은 잘 정돈된 산책로 같았다.

그림같은 길. 걷기도 편하고. 현무암 돌담길을 옆에 끼고, 황토빛 흙길에 떨궈진 비자열매들을 즈려밟으며,

내딛는 걸음걸음 뚝뚝 끊어져 내린 햇볕들과 희롱하다. 약간의 저항감이 느껴지던 열매가 터질 때 퍼지는

비자열매의 향기란.

이상하다 싶도록 심심찮게 등장하는 이 사람. 누구냐 넌. 안 올리려다 배경이 워낙 이뻐서.

걷는 속도로 사진찍기. 멈춰선 사진엔 왠지 직접 걸으며 느끼는 실감이 덜하겠다 싶어서.

거의 입구까지 돌아나온 길, 한 쪽에는 벼락맞은 비자나무가 있다.

하트무늬로 구멍뚫린 돌 옆도 다시 지나고, 저거 자연적으로 생긴 걸까, 그렇담 정말 멋진데.

이제 제주도에서 꼭 빼놓을 수 없는 마지막 장소만 남겨두고, 비자림을 떠났다. 아무래도 밤비행기를 타기까지

하루코스는 정말 잘 짠 거 같다. 아침부터 오설록녹차박물관-아프리카박물관-서귀포시 점심-천지연폭포-

-비자림-그리고 바로 그곳-제주시 저녁까지.




수십명 남녀의 난교, 여성의 자위, 남성의 아크로바틱한-스스로의 입을 사용한-자위, 남자들/여자들의 동성애, 남자들의

쓰리썸, 관음증에 S/M까지. 왠만한 성인영화나 포르노물에서도 한꺼번에 다루기 힘든 소재들이다.

그런 이슈들을 한꺼번에 다룬 '발칙한' 영화, 그래서 한국에 수입될 때 이런저런 말들도 많고 제약도 적잖았던 영화,

숏버스. Short Bus. 숏버스란 '능력있고 결함있는' 자들을 위한 뉴욕의 어느 모임 공간의 이름.


제이미와 제임스를 넘나드는 주인공 남남 커플의 이야기가 중심축이랄 수도 있겠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겨졌던

장면은 스무살 어간의 뽀송뽀송하고 아름다운 청년-그것도 모델출신-이 숏버스에서 어디선가 많이 본, 낯익은 할배와

조우하는 장면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 "그럴 수밖에, 내가 뉴욕시장이었으니까."


희끗희끗 헐벗은 머리에 쭈글쭈글한 얼굴을 가진 그 뉴욕 전 시장 할아버지는, 알콜 기운도 없이, 맨 정신으로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물론 한쪽 방에선 벌거벗은 젊은 남녀의 난교가 질펀하고, 대마 연기 자욱하게 피어올려지는

공간에선 여지없이 남녀/남남/여여/혹은 '창의적인 방식'의 교합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이긴 하다.) 자네는 무슨

잘못을 하고 여기에 왔는가. 별거 아닌 거였겠지. 고향이란, 자신의 정서적 보금자리라 여겨지는 고향이란, 때론 무지하게

가혹하고 냉엄해질 수 있다네. 그게 뉴욕처럼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오랜 것을 존중할 줄 아는, 세상에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이라 해도 말일세.



잘못이란 건, 자신이 저지른 것일 수도, 혹은 누군가 무엇인가 자신에게 각인시켜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뇌와

클리토리스를 연결해 오르가즘을 만들어낸다는 일종의 마법회로처럼, '나'와 '내가 느끼고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알기
 
힘든 블랙박스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제임스(혹은 제이미)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성적

가혹행위나 매춘의 트라우마 때문에 사랑을 돌려주지 못한다. 외견상 문제될 게 크게 없는 커플 상담가/섹스 카운셀러

유부녀는 엄격한 동양적 가정교육과 아버지의 도착적이다시피한 감시로 인해 정작 오르가즘을 못느끼는 석녀란다.

새디즘을 만끽하며 가죽옷과 채찍에 탐닉하는 '제니퍼 애니스톤'은 정작 자신의 이름조차 철저히 숨겨온 여리고

상처투성이인 영혼일 뿐이고, 주인공이랄 남남 커플의 일상을 쉼없이 따라가는 스토킹행위로 관음증적 욕망을 해소하는

맞은 편 집의 남자는 사실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는 것조차 숨막혀 하는 순둥이다. 그런 식이다. 뭐 때문에 뭐, 이렇게

단선적으로 말하기 힘들고, 그렇다고 백퍼센트 자신의 모자름이나 부족함 때문이라 말하기도 힘든 상황,

그래서 블랙박스, 마법의 회로일 게다.


섹스야 제각기 침대 속의 내밀한 이야기이듯, 사실 이 영화에서 각자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블랙박스'의 해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은 자살시도라는 격하고 돌출적인 행위를 통해,

혹은 반편향의 과도하고 도발적인 성적 탐닉을 통해, 혹은 스스로 흘러내리는 껍질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등의 방식이 있겠지만, 해결책이야 각자가 꼬여있는 방식이 다른 만큼이나 다양할 수 있고, 심리적인 문제가 으레 그렇듯

겉으로 드러나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거다. 제각기의 방식으로 제각기 맞닥뜨려야 할 문제.


정작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건 그들이 문제에 직면하는 방식이었다. 뉴욕의 시장이었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중후한 연세의 '아저씨', '아줌마'이든, 남녀노소 미추를 불문하고 각자의 '계급장'과 '사회적 자본'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막혀버리고 뒤틀려버린 감정선을 되찾겠다 나서는 것, 그리고 전 뉴욕시장 할배가 그랬듯 얼마나

나이가 들었고 외부의 평판을 쌓아놨던 간에 스스로의 결핍과 부족함을 자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건 '여태 경험치

못한 오르가즘을 되찾는 모험'일 수도,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는 무작정한 몸부림(자살까지 감수하는)'일 수도,

'한평생 쌓아올린 경력과 평판보다 스스로의 가치와 취향을 지켜내려는 자존감의 싸움'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럴 수 있을까. 성적 쾌락에 대한 탐닉과 '비정상'적인 성적 취향, 성적 흥분의 인과를 차갑게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렇게

벌거벗은 상태로 스스로를 응시하고 자신의 감각에 충실한, 결국은 스스로의 자존을 지켜낼 수 있는 용기를 지켜내고
 
있을까. 그 시험대가 대마초 연기 자욱하고 아마도 땀내와 정액냄새 질펀할 그런 공간이란 건 딱히 중요치 않다. 오히려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억눌리고 비틀린 욕망을 마주할 수 있는 근본적인 곳이란 '그럴듯한 포장'도

가능할 거고, 간단하게는 그저 '어디라도 상관없었다'라는 식의 빗겨나감도 가능할 거다. 어디서든, 그게 성당의 고해소가
 
되었건 사랑하는 이의 품속이 되었건 온갖 욕망과 희열이 둥둥 떠다니는 성적 해방구가 되었건, 스스로를 외면하거나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면 되는 거다.


아마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을 의식한 듯한 그 할아버지 캐릭터는, 그런 혼몽하고 '난잡한' 분위기에 자신을 맡겨버리고

멍하니 휩쓸리지 않고 되려 중심을 잡은 채 스스로를 건져내고 지켜내러 그곳에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서 그 궤적을

좇는 다른 몇몇 젊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단순히 살색 그림-검은색이던 분홍빛이던 노란색이던-만

노출되었던 다른 수많은 영혼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중심을 잡으러 왔는지 휩쓸리러 왔는지. 그것 역시 실은 지극히도

개인적인 영역,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영역인 게다.


다만, 나이가 몇이 되었건 사회적 지위와 성취가 어찌 되었건, 그들은 뭔가를 찾으러 왔다고 생각했다. 뭔가를 찾으러

움직일 만큼의,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것저것 다 벗어제낄 만큼의 용기와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꼭 섹스여야 하는지, 동성애나 SM이나 관음증이나 쓰리섬이나 난교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결핍과 결락감을 인정하고 새롭게 (되)찾으려 드는 그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육체의 리드미컬함은 아니었다.


사실 또 개인적으로는 그렇게도 생각한다. 꽤나 멀리, 그리고 이상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른바

'시초축적'이 시작되고 역사가 시작된 건, 자유로운 성욕을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이데올로기로 비끄러매면서부터

비롯한 건 아닐까 하고. 사랑할 만큼만 먹고 살면 되었을 세상이, 누군가를 먹여 살리고 안정적이고 반영구적인 잉여를

남기기 위해 사랑하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버린 건 일종의 비극일지 모른다고.


총구에 장미꽃을 일일이 꽂아주었던 68혁명의 정신, 히피의 정신이란 게 그런 건 아니었을까. 생명살상을 위한 총알이
 
발사되는 총구가 상징하는 차갑고 흉폭한 남성성에 여리고 섬세한 장미꽃,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 그걸 가능케 하는

세상의 몇 남지않은 해방공간, 개인적으로도 직면하기 쉽지 않은 자각의 순간, 다 벗어던지고 알몸의 스스로를

새삼스럽게 쳐다볼 수 있게 해주는 '숏버스'.
 

거긴 머물러 살 곳은 아니지만, 최소한 잊지 않고 가끔씩 들러줘야 하는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동시 나눔이 시작되던 세달 전쯤, 이웃 블로거님인 Adios님이 주도적으로 발의하셔서 가칭 '나눔 블로그'란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러저러한 일상에 치여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Adios님, BlogIcon 함차家 님이나 BlogIcon 윤뽀 님 등 다른 참여하신 이웃분들께서 워낙 출중하셔서 이렇게

그 첫 고고성을 울리게 되었습니다^^


1. 나눔 블로그란

- 블로거 (Blogger)들이 모여 만든 나눔 공동체 입니다. 비영리적이며 블로그가 없는 일반인, 블로거, 기업체 등 누구나 참여 가능한 팀 프로젝트입니다.

- 집이나 회사 등 책장에 묵히고 있는 책들을 책이 필요한 곳에 보내주는 사랑의 책나눔 운동이 주된 프로젝트의 목적입니다. 나눔활동이 왕성해 지면 물건 나눔, 책장만들어주기, 자원봉사활동 등의 프로그램과 연계할 예정입니다.
- 책은 주로 아이들 공부방, 복지시설, 농어촌, 산골마을 도서관 등 책 읽기가 힘든 곳을 중심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 책 나눔을 통해 책이 필요한 곳에 소중히 쓰일 수 있도록 나눔블로그에서 중간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2. 첫 나눔 대상기관인 "SOS아동보호센터"는 어떤곳?

- 대구지역의 아동들 중 가정 문제로 버림받거나, 위기상황에 놓인 아동들이 마음의 안정을 찾도록 3개월간 임시로 머물며 심리 상담 및 관찰 보호 되는 곳입니다. 갑작스러운 가정의 무너짐이나 실직으로 어려운 위기에 처한 가정의 아동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고를 일으키거나 문제가 있어 심리 상담과 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의 교육과 심리치료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놀이, 그림, 심리치료 활동으로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고 밝게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입니다.
- 도서관이 따로 마련되어 아이들과 함께 독서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출판협회로부터 약간의 도서를 지원받고 있지만 현재 도서관 내에 비치된 도서들은 그 수량이 적고 기존의 도서들은 오래되었거나 만화책 등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아동들이 머무는 보호센터의 성격과 맞지 않는 도서들이 대부분입니다.



3. 어떤 책들이 필요한가요?

- 도서종류는 장르는 관계없으나 다양했으면 합니다. 보호아동 연령이 다양해서 취학전아동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동들이라 미취학 아동, 초등학생들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으면 합니다.
 
예를들어 청소년권장도서 부터 세계명작단편집, 어린이동화책, 한국의 야생화, 과학도서, 문화유산관련도서, 한국의 전통한옥, 등등 아동들이 대체로 사진과 그림이 있는 도서가 SOS아동보호센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4. 나눔에는 어떻게 참여하나요?

- 방명록이나 메일보내기로 연락처(메일주소or 블로그주소)와 나눔할 도서종류와 수량을 알려주시면 저희가 책 보낼 주소와 연락처를 알려드립니다. 받으신 연락처와 주소로 직접 포장을 해서 택배나 등기로 발송 (배송비는 본인부담)해 주시면 저희 나눔블로그에서 책을 받아 직접 대구 SOS아동보호센터에 찾아가 전달할 것입니다.

* 방명록에 나눔 참여 신청글 남기기:    글남기기
* 이메일로 나눔 참여 신청글 보내기:    메일 보내기 



*                                                                           *                                                                           *

아직 첫걸음이니만치 미숙하기도 하고, 뭔가 구색이 안 맞는다는 느낌이 드실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움직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마치 동시나눔이

이러저러한 소중한 분들의 힘으로 어느덧 네번째를 향해 달리고 있듯이 말입니다.    

"전국 블로거들의 힘을 !! ^^  집에 묵혀두고 있는 책을 소중한곳에 쓸 수 있도록 기획햇습니다.
블로그 한명이 한권의 책만 모아도 몇십권의 책을 보낼 수 있습니다.
책이 필요한 공부방, 농촌,어촌,산골마을, 시민단체의 지원이 적게 미치는 곳에 블로거들이 책을 보내는 운동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다양한 봉사활동도 연계할 수 있도록 그 첫 준비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Adios님)

이런 아이디어에 공감하신다면, 거기서부터 한걸음씩 같이 내딛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동용 도서 있으신 분 많은 관심과 기증 부탁드려요~^^*

http://nanumbook.tistory.com/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블로그와 나눔]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플로베르는 말했다. "나는 귀두에 뻣뻣한 털을 세우고 그것으로 암놈을 찢어버리는 호랑이와 같다."


이런 식의 '당당한' 마초적 발언들이 누대에 걸쳐 이어져서일까, 남성은 먼 옛날 사냥꾼의 본능을 이어받아

끊임없이 이 여자 저 여자를 찝적거리며 육체적 쾌락에만 몰입한다는 식의 신화가 알게 모르게 전승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미 진부해진 나쁜 남자 신드롬이니, 마초니 하는 것도 그렇고, 최근에 돌연 부상한 초식남이니

건어물녀니 하는 신조어들의 본질이 그 '섹스에 무관심한, 무성적인' 부분에 있다는 점도 되려 이전의 남성상이

성적 욕망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에게 육체적 사랑이 중요하다는 신화, 혹은 사랑보다 섹스를 탐하는 남자들..이라는 유서깊고도 심증 짙은
 
의구심을 주목한 출판사는 책이름을 선정적으로 비틀어버렸다. 원제는 "Man, Love and Sex". "남자, 사랑과

섹스" 정도로 번역될 만한 원제의 세 단어에 조사를 조금씩 바꾸니 이런 도발적인 제목이 나타난다.

"남자의 사랑은 섹스다." 저번주 내내 왠지 이 블로그 유입 키워드 2, 3위를 놓치지 않았던 문장이었다.
 
처음엔 사실 책 제목인지도 몰랐다. 단지 책이나 영화 제목이겠거니, 했을 뿐.


하도 궁금해져서 점심 시간에 밥안먹고 서점가서 책을 찾아 읽었다. 그림을 좀 첨부해볼까 하다가, 그닥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라 말기로 한다. 2009년 8월 10일에 초판발행된 따끈한 책이었다. 미국의 'Mens' Health'라나

남성잡지 편집자이자 남자행동분석전문가라는 저자가 말하는 방식은, 뭐랄까, 왜 남자 맘을 몰라주냐고 여성들에
 
투덜대고 떼쓰는 느낌이었다. 단적으로 책 중간에 'Q&A 코너'를 빌어 여성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 있었다.

Q: 왜 남자들은 화장실 변기를 더럽히며 소변을 보나요?
A: 남성의 방광이 어쩌구...거기에 마이크로칩이 달린 것도 아니고...시작과 끝에 흔들림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이해해주시고...(결론) 남성용 소변기를 화장실에 설치하세요.

내 기억과 짧은 메모에 의지해 복구한 내용이지만 거의 비슷할 거다. 하다못해 '남성다운 남성'의 상징 최민수조차

티비 토크프로그램에 나와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본다고 떳떳이 말하고 있는데, 남성용 소변기를 설치하라는 건

뭥미. 말그대로 '뭥미'다. 남자들을 좀 이해해 달라, 남자들을 배려해 달라면서 실은 계속된 기득권을 견지하겠다는

욕심꾸러기 떼쟁이 악동같은 태도.


책의 주제인 남자의 사랑과 섹스를 말하는데 줄곧 같은 자세를 견지한다는 게 문제다. 남성이 섹스 후 당신의 아파트에서
 
자지 않고 간다면? 다음날 칫솔과 면도기가 있는 자신의 집에서 눈뜨고 싶은 남성의 현실적인 태도니 이해해라. 남성이
 
섹스 후 당신의 아파트에서 자고 간다면? 다음날 회사에 안 나가니 편하게 쉬고 싶은 남성의 현실적인 태도니 이해해라,

라는 식이다. 당신을 사랑해, 라고 말하면 그저 사랑하는구나 믿고, 일하면서 별일 없었어, 라고 말하면 아 별일 없었구나

라고 믿으면 된단다. 단 이전에 다른 여자와의 경험이 다섯번이라 하면 열두번이겠거니 하면 된단다. 또 처음 데이트할

때에 비해 많이 활동성이 줄었는데 왜 그럴까. 십오만 킬로를 달린 차는 이제 차고에 들어가 편히 쉬고 싶지 않겠나, 이런
 
식이다. 이런 게 잔뜩 있지만 굳이 더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미 충분하다 싶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같은 '가이드북'은 성별에 따라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두 인류가

서로를 이해하고 조금더 잘 소통하기 위한 (그야말로) 일반화된 수준의 길잡이를 제공하는데 작으나마 그 미덕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미 그러한 류의 책은 다양한 변주를 거쳐 포화상태에 이르렀으니 '섹스'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끄집어

내고 싶었을까. 혹은 사회적으로 다소 터부시되는 그 소재에 대해 용감하게 발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신통찮다는 게 내 개인적인 결론. (사실 이 책은 미국 남성을 기준으로, 미국 남성을 위해 쓰인 거라서, 사실 미국에선

그다지 선정적이지도 않았을 것 같다. 더구나 저런 '온건한' 영어 원제목으로는 더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내용이 거의 없는 책인데 그 선정성에 기대고 있을 뿐인 그런 책이라 불만인 거다. 그리고 그게

애초 목적이라 표방된 "남자를 이해해줘"라는 의도조차 무색할 정도로, 오히려 남여간의 사이만 멀게 만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배려심없고 이기적으로 보여서 불만인 거다. 


책의 마지막 메시지는 나름 의미심장하다. 의미심장한데, 책의 전개가 전혀 그런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질 못했다.

사실 그 메시지는 한국에서 번역된 책 제목과는 영 딴판이기도 하다. 메시지는, 불만족스러운 관계에 만족스러운

섹스라봐야 기껏해야 관계를 조금더 지속시키는 매개에 불과하다는 것. 뒤집어 말하자면 남녀간의 관계가 탄탄하고
 
만족스럽게 맺어져 있는데 섹스까지 훌륭하다면 더할나위없다는 거다. 그래서 남자들이 바라는 건 단순히 섹스가

아니라 사랑과 친밀한 의사소통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다, 저자는. 뭐,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인데 그걸로는

책 한권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나부지, 라는 지독히도 시니컬한 반응을 부르는 책. 제목에 낚이지 말길.



덧댐. Q. 뭔가 남자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무엇을 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A. 섹스를 선물하라. 그것도 이왕이면 근사한 포장(?)이 된 거면 더욱 좋겠다.(ⓒ 남자의 사랑은 섹스다)

남자의 사랑은 섹스다 - 2점
데이비드 징크젠코 지음, 김경숙 옮김/더난출판사








오감도 홈페이지(http://www.eros2009.co.kr/)엔 자유게시판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랑을 원하시나요?"라는 제목아래

간단한 메시지를 포스트잍틱한 비주얼로 남길 수 있게 되어있는데, 온통 욕이다. 트랜스포머2 개봉에 맞춰, 그리고 실은

'대한늬우스' 강제상영에 맞춰 9,000원으로 오른 영화값에 대한 분노, 노출신에 맞춰진 홍보만 믿고 살색그림 펑펑

터져나오는 걸 보고 싶었는데 낚였다는 분노, 혹은 (애국시민의) '한국영화'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분노까지.

그렇게 욕먹을 영화인지는 모르겠다. 실은, 꽤 괜찮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다섯 가지 사랑이야기가 뚝뚝 끊어져 나온다. 김수로의 캐릭터가 겹치긴 하지만, 스토리는 각각 전혀 다른 측면의

사랑을 포착해낸다.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단물빠진 소재들, 다소간의 동성애 코드나 의외의 반전조차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하여 그다지 강력하진 않았지만, 그건 어쩌면 주재료인 '사랑'의 맛과 향을 고스란히 살려내기 위해

일부러 한번쯤 위력을 줄여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클린턴 식으로라면, "Stupid, it's love."


즉석복권과도 같은 기차 티켓을 매개로 벼락처럼 마주친 두 남녀의 감정이 각자의 경험치와 스킬에 따라 어떻게

번져나가고 기어코 그 목적한 바를 이루게 되는지, 그렇지만 그 과정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쉽지 않은 내적인

꼼수와 갈등들을 지나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His Concern)는 첫 섹스를 하고 난 후 느닷없이 고개를 드는 낯섦과

막막함, 외로움을 보여준다. 또 그 다음 에피소드 '나 여기있어요'는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다"고 한줄 정리할 법한

이야기를 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했으며 어떤 때 가장 행복했는지, 그리고 남은 자의 눈물이 언제 흘려지고 언제

닦이는지..그렇게 잔뜩 응축된 화면과 스토리로 속삭인다. 알몸으로 있을 때 가장 섹시하지만, 또 알몸으로 안아줄

때 가장 행복하지만, 굳이 섹스는 없어도 된다. 섹스가 없어도 사랑이다.


이런 때라면, 확실히 육체적 '사랑'은 그다지 의미가 없거나 무언가 품격이 떨어지는 뭔가로 보인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 한대목을 빌자면, "이 어이없는 엉덩이의 율동, 초라하기 짝이 없는 축축하게 젖은 조그마한 페니스가 시들어

가는 바로 이것...결국 여기에 경멸감을 느낀 현대인은 옳은 것이다."
라고 볼 법하단 이야기다.


그렇지만 사랑은 역시 자극적이고 치명적인 무엇이기도 하다.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페로몬 향내따라 내달리는 남자들이, 혹은 여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33번째 남자'에서 나오듯 자극만을

좇다보면 어느새 피향기 가득한 식탁 위에 사지가 올라있을지도 모르지만..그럼에도 서른세번째, 서른네번째, 사냥감은

쉼없이 덤벼든다. 상대가 이성이던 동성이던 그것은 별반 다를 바 없다. '끝과 시작'에서 나온 엄정화와 김효진은

이룰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 때로 사랑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스스로의 정상적인 생활

자체를 파멸로 몰고 가더라도,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생활을 온통 갈아엎어버릴지라도, 그런 사랑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섹스는 격렬하다. 끈이 동원될 수도 있고, 피를 볼지도 모른다. 좀더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무언가가 된다.


어쩌면, 섹스는 그 자체로 사랑인가. 다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빌자면, "이 세상에 남은 가장 좋은 것"인지도 모르고,

"당신 속에 들어갈 수 있으니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건 그 번다하고 다소 용두사미로

보일지 모르는 행위로부터 "우아하고 힘찬 육체의 고요함"을 찾아낼 수 있어야 가능하겠지만.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 안에

들어가고, 또한 당신을 사랑하니 당신에게 열어준다는 메타포의 현현.


그리고 '순간을 믿어요'. 사실 이 다섯번째 에피소드는 좀 패착이 아닐까 싶은데, 10대 또래로 구성된 세 커플이 서로의

상대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다소 도발적인 스토리다. 아마 십대의 발랄함과 미성숙함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그보다

나이많은 이들의 '시험'이었다면, 그래서 일종의 스와핑으로 나타났다면 좀더 위태롭고 좀더 위험했을 게다. 감독은

거기까지는 (아마도) 차마 나가지 못하고 만다. 에피소드 다섯개의 배열이 결국 섹스와 사랑의 관계를 좀더 진지하게

묻고자 했던 의도를 품고 있었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치열함이 조금 부족했고 도발성은 매우 부족했던 거 아닐까.


마지막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며 나오는 내레이션이 보다 분명히 이 영화의 의도를 전달한다.

아마도 그건 섹스와 사랑, 좀더 눈에 익은 편한 단어로는 육체와 정신, 그 중간의 황금비율에 대한 이야기.

내레이션으로 의도는 알겠는데, 답을 주지는 않았다. 나 역시 답은 모르겠다. 다만 영화제목의 권위를 빌자면, 역시

사랑은 오감을 모두 동원해야 하는 것...일까, 라는 정도?



* 사실 영화는 그렇게 야하지 않다. 그 흔한 가슴 한번 나오지도 않고, 부모님과 함께 봐도 별로 안 민망할 듯..

살색그림의 향연을 기대하고 보러 간다면 그닥 비추.



이사를 하고 난 후 강남역, 역삼, 선릉, 삼성역 방면에 나갈 때 그냥 걸어다니고 있다.

강남에서 술 한잔하고 걸어서 집으로. 선릉에서 술 한잔하고 걸어서 집으로. 삼성역 근처에서 술 한잔하고 걸어서 집으로.

빠른 걸음으로 삼십분 정도면 대략 집에 도착하는데, 보통 열두시를 전후한 한밤인데다가 동네가 동네니만치

넥타이 맨 아저씨들과 화장진한 아가씨, 혹은 화장진한 아주머니들의 술냄새 섞인 스킨십을 종종 지나친다.


처음엔 별 생각없이 유흥가가 워낙 밀집한 동네니까 그러려니, 했다. 세상에 지치고 감각이 딱딱히 굳어져버린 채
 
말초적인 쾌락을 구매하는 중년의 남자와 신산한 사연과 응분의 대가를 가진 중년 여자 한쌍이려니. 굳이 여자의 허리를

부둥켜안은 남자의 욕정어린 손길과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 그리고 끈적한 대화를 들으면서, "저들이 부부가 아니라는데

내 가진돈 전부와 오른손모가지를 걸지. 쫄리면 뒈지시던가." 따위 객기를 부릴 필요도 없었다. 그런 객기는 음식점에서

서로 밥을 먹여주거나 반찬을 집어주는 중년의 남녀 커플을 향하거나, 다정히 손을 맞잡고 산에 오르내리는 어른들을

향할 때에나 쵸큼 효과가 있으려나. Chocolate이니 秘니, 그렇고 그런 이름의 단란한 주점들 앞에서 택시를 잡는

사람들은 빤해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방금 지나친 그 중년커플의 지쳤지만 다정한 분위기와 오랜 관계였음을 암시하는 대화

몇 마디를 듣고 난 다음이었을지 모른다. 그것 역시 사랑일지 모른다.


공정하지 않다.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어떤 정신적 육체적 관계를 맺어 왔는지, 어떤 사연으로 둘은 이 야밤에 술에

취한 채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건지도 모르면서. 그들의 관계와 감정을 한낱 '매매'려니 치부하는 건 흔해빠진 편견이다.


젊음의 생기발랄함을 잃은 채 시들고 주름진 그네들의 육체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네들의 나이에, 그네들의 육체에 걸맞는 건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란 단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젊고 팽팽하고 발랄하고 싱싱한...그런 것이 바로 '사랑'이란 감정을 위한 필수조건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사랑'이란 단어는 젊음의 특권인 듯 사고하는 건, 젊음을 포기하고 뒷사람에게 물려주면서 '사랑' 역시

자연스럽다는 듯 내치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닐까. 더이상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리거나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허용되지 않으며, 단지 가끔 상념에 젖어 어렴풋이 추억하는 게 고작이라는 듯. 그게 '어른'이라는 듯이.


물론 '불륜', 내지 '바람'이라는 편리한 딱지도 준비되어 있다.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불륜이 사랑이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키의 신작, 'IQ84'가 일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팔리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는 언제쯤 나오려나..일본어를 진즉 배웠어야 했다는 후회가 절실할 정도로, 그의 신작이 궁금하다.

어느 순간 이질적인 반짝거림과 냉소적인 아름다움을 상실했던 그의 소설에 뭔가 변화가 생겼을까.


엄마는 티비에서 유리상자를 볼 때마다 둘 중 한명을 짚으며 널 닮았다 하신다. 칭찬인지는 모르겠고,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티쪼가리 입고 돌아다니지 말고 좀 '어른스럽게' 입고 '어른스럽게'

머리도 하고 다니라는 압박이다. 근데 엊그제던가 살짝 들었던 그들의 신곡은 아주아주아주아주 실망이었다.

둘다 결혼을 해서 그럴 게다. 사랑을 하면, 왠지 예술가로서 결격사유가 되는 느낌이다.


신해철, 이승환, 이상은, 이적, 서영은..유리상자도 이제 그 샘플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

예술은 그들의 비극과 허무함과 가슴공허함을 먹고 자라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그들을 무디게 만들고, 나태하게 만들며, 만족하게 만드니까. 배부른 영혼은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승환이형의 아픔은 어떤 점에선 그의 음악에 큰 공헌을 하지 않았나 싶다)


뭐, 비비 꼬인 소리였고, 밖에는 비가 그칠 줄 모르고, 잠은 올 줄 모르고.


(뜬금없이) 몇 가지 요새 반성하는 점.


아닌 척 하면서도 숫자에 휘둘려 조바심을 쳤다는 심증이 있다. 서른이 꽉 차가면서, 왠지 남들 결혼하는 거 보면서

은근히 압박도 받고 부담스러워도 하고 조급증도 나고 했던 것 같다. 바보. 그랬단 걸 알았으니 이제 피할 수 있겠지.

어차피 내가 자웅동체 달팽이도 아니고, 짝지는 만나야 뭘 하던 할 거 아니냐.


또 뭔가 다른 사람의 평에 기대어 과시하고 싶었달까. 좋은 사람 노릇하면서 여기저기에 무리를 해선, 스스로를 좀

힘들게 만들고 짜증나는 코너에 몰아넣은 격이 되고 말았다.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왜 이야기를 못해. 가끔

나는 만인의 마음을 얻겠다는 듯이 행동할 때가 있고, 예외없이 금방 후회하곤 한다.


중심이 흔들렸다. 집에도, 회사에도, 어디에도 중심이 없었다. 몸은 움직이는데 마음은 어디선가 부유하고 있다.

크게 한번 흔들리고 나니 좀처럼 회복되질 않는다. 당분간 답을 찾아, 마음을 찾아 다녀야 할 듯 하다.

어디서 뭐하고 있냐. 이건 반성할 점은 아니다. 좀더 마음을 풀어주고, 마음을 따라야 해결될 문제인지도 모른다.


요새 새삼스레 X-Japan을 다시 듣고 있다. 그들의 감각적인 가사하며 맥놀이하듯 뛰노는 멜로디라인하며..
 

I awake from my dream

I can't find my way without you.





#1.

국회의원 누군가가 'XX'신문사주가 장자연 리스트에 올랐다고 실명을 거론하고 나니, 조X일보에서 강력하게

항의를 하고 나섰다고 한다. 퇴근 후 동아일보사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바라본 조선일보사옥의 대형TV에서는

'3대 공공 노조 민노총 탈퇴'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민노총 흔들기는 이미 수년째고, 산별 노조가 아닌 기업별

노조를 추구하는 '제3의 노총'을 향한 그들의 부추기기 혹은 과장보도는 여전하다. 시간이 남아 광화랑을 한바퀴

돌아보고 동아일보 신문박물관 앞을 얼쩡대다가 알았다. 4월 7일 신문의 날을 맞아 4.1~10 무료입장이랜다.


#2.

정확히는 어제 4월 6일, 독립문역 근처의 시사IN 편집국을 찾아 제1기 시사IN독자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2시간여 쉼없는 리뷰와 비판과 애정어린 질책이 쏟아졌고 뒤이은 술자리는 가벼운 맥주와, 그제서야 늦은 저녁을

먹는 내게 맞춤한 푸짐한 안주가 나왔다. 허름한 건물 6층에 있던 시사IN의 편집국은 과거 우연찮게 경험했던

동X일보의 그럴듯한 사옥과 대비되었고, 가벼운 맥주의 부담없는 술자리는 폭탄주가 처녀비행했던 그때의

술자리와 대비되었다. 심지어 독자위원들을 맞이했던 편집국장님의 '허름한' 머리마저 그쪽의 '번쩍이는' 머리와

각을 이뤘달까.


#3.

광화문에서 만났던 누군가는 저번주 일요일에 죽으려고 했었다. 이만한 일은 견디어야 한다, 남에게 쪽팔리게

말하고 다니지 말라, 라는 부모님의 오랜 교육 탓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감정을 잘도 흘리고 다니며 최소한 감정을

따라 끝까지 치닫고 싶어하는 맘을 가진 사람도 가끔은 죽으려 하는데, 많이도 힘들었겠다 싶었다. ....때문이었다.

사랑 때문이었다. '중요한 일'때문에 오늘도 늦는다던 것에 대해 궁금해하던 엄마한테 '사랑' 때문이라 했더니,

웃으셨다. 난 그게 웃을 일인지 모르는 나이인 게다. 우연의 연속에 불과하다 하여도, 그걸 인연이라 이름붙이고

싶은 게 욕심인 걸까.


#4.

그와 내가 만나는 장소는 항상 조금 묘했다. 저번에는 남자 둘이 광화문 베니건스를 갔는데, 이번에는 남자 둘이

종로3가 티포투를 갔다. 아마 그 전에도 뭔가 찻집을 갔었던 듯 하다. 나는 등받이 쿠션을 품에 안고 턱을 괸 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추임새를 넣어주었고, 그는 목에 좋다는 루이보스차를 마시며 쉼없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사이가 좋다. 그는 나의 말하고 듣는 방식을 두고 '여성적 말하기, 듣기'라 했지만, 그도 못지 않다. 정 안되면

취향을 살짝 바꿔 우리 서로 기대보자 했다. 사랑 때문에 죽을 생각을 하는 게 웃을 일인지는 모르겠는 나이이되,

틈새시장을 개척, 공략할 나이가 도래하는 건 맞는 게다.



[술잔#1] 조각만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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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한쪽 끝에 서면, 다른쪽 끝이 보일만큼 자그마한 섬에 가보고 싶다.
내가 가보았던 섬들은 모두 너무도 크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김한길이 이야기했던가, 북극곰은 다른 곰을 만나면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고. 평생 한번 만날지조차 기약없는 만남이므로. 그렇게, 조각만한 땅뙈기에서, 술잔과 오른손의 인연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술잔#2] 그녀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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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마주섬에서 시작된다. 설레이며 눈을 마주치고, 술잔과 오른손은 서로가 품고 있는 표정과 이야기를 알고 싶어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감정과 상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채 두손 떨구고 어설픈 사랑.



[술잔#3] 목소리 좀 들려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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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동하면 몸이 움직인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이 간다.
입밖으로 소리내어 사랑을 말하는 순간 손가락은 술잔에 매료되고 말았다. 당신도 날 보고 있었나요..우선, 술잔 당신의 매끄럽고 후끈한 목소리를 좀 들려줄래요. 우리 목소리부터 익혀나가는 건 어떨지. 손길이 닿으면 갸냘프지만 분명한 술잔의 응답. 말꼬리를 땋기 시작했다.



[술잔#4] 살짝 접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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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잔은 위험하지 않다고, 냄새와 향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손을 뻗어 만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꿈이었던양 떠나버릴 것 같아..오른손은 술잔의 부피와 질감을 확인하기 시작하다. 이 세상에 있었구나, 조각만한 세상에서 병아리오줌만한 인연을 타고. 고마워서.



[술잔#5] 외전. 기어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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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오른 유리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니미럴 절라 높네.



[술잔#6] 니 이야기를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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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되고, 나도 니가 될 수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하루가 하루를 지랄같이 소모시켜도 기꺼이 온몸으로 귀가 되어주는 술잔이 있었기에. 서로의 사용설명서를 꼼꼼이 읽어내리며, 조금씩 마카로니 치즈의 맛을 음미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몇번씩의 구역질과 거부감을 인내한 후에야.



[술잔#7] 어깨 빌려 사람人의 뜻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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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휩쓸려 가라앉지 않으려면 댄스댄스댄스. 끊임없이 똑딱이며 빛바래가는 세상 속에서 오른손의 이정표는 술잔. 생기와 의욕을 말려버린채 기어코 삶의 뒷켠으로 내리눌러버리겠다는 시간을 비웃으며 어깨도 걸어보고. 가벼운 스텝으로 하루하루 생을 더해갈 수 있다면. 하루치 삶의 의미를 아침마다 떠올릴 수 있다면.



[술잔#8] 손잡고 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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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다 힘들면 쉬었다 가기도 하고, 손잡고 가기도 하고.
지겨워서, 힘들어서, 살다가 지쳐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손내밀어 이끌어주기도 하는. 어차피 시작해 버린 인생, 최종 목표는 트루 러브라 외치는 술잔과 오른손. 그 치기어린 말과 행동은 한때..아름답다.



[술잔#9] 기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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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기. 허물어지듯 무너지더라도, 두팔가득 받아줄 술잔이 있다면 나중나중에 다시 일으켜세워볼 요량도 생기겠지. 세상이 무거워졌다고 느낄 때 대신 하늘을 빤히 노려봐주는 노랑색눈깔의 술잔.



[술잔#10] 좌우명은 올인(al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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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지 못하겠음 뛰어든다. 이리저리 재봐야 답도 안보이고 머리만 아플터. 맷돌에 장렬히 뛰어든 콩처럼 곤죽이 된채 설설 밀려나올지라도, 올인이다. 눈에 보이고 말이 섞이고 심장이 따라간다면. 오른손과 술잔의 이빨과 이빨이 부딪쳐 불똥이 튄다해도, 좌우명은 올인.



[술잔#11] 완전한 밀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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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길에 도착. 정점에 도달했으니 식도를 타고 내려갈 길만 남은 건가. 혹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속으로..? 완급의 조절, 호흡의 조절. 산낙지마냥 술잔에 엉겨붙은 오른손은 그저 좋댄다. 일생동안 흔치않을 황홀한 충만감. 손을 위한 술잔. 술잔을 위한 손.



[술잔#12] ..어디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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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충실한 게 술잔이라지만, 납득할 수 없는 오른손.
어디갔을까,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고 순식간에 말라붙은 술잔.



[술잔#13] 넌 왜..비어 버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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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에 비견될만한.
넌 왜 비어버렸니.
털썩, 절망한채 바닥에 무너져내리는 오른손.



[술잔#14] 술은 술이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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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만한 인연이 사그라들고, 잘록한 곡선과 짙은 향을 닮은 술잔을 다시금 어디선가 들어올리겠지만. 지나간 시간과 흘러간 이야기들은 사진첩에 봉인된 채 고이 '버려진다'. 찍히는 순간 죽어버리는 밴댕이같은 사진, 그리고 그속에 담긴 기억들처럼. 달그림자가 비치듯 그대의 마음에 잠시 비쳤던 것 뿐이니..슬퍼할 것도, 그리워할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어디선가 오른손의 이야기와 표정을 떠올려 준다면..

술은 눈코입으로 마시고 마음으로 마신다. 그리고 무엇보다...술과 술 사이, 그 비워진 잔 또한 마셔야 한다.

스포츠센터에 다니고 있다. 더이상 고수부지나 집근처 공원같은 공간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무한도전, 혹은

J-Channel같은 프로그램을 달린다. 촛농처럼 땀이 흐르고 난 조금씩 안쪽에서부터 녹아내린다.(고 상상한다.)

한시간반쯤 뛰면 머리가 멍해지는데, 그러고 나서야 쇳덩이 좀 들고 기구 좀 사용해 준다. 다른 부위는 모두

구속한 채 특정 부위만을 해방시키는 기구에 몸을 묶은 채 느슨해진 근육들에 긴장을 불어넣다 보면 어느새

두시간이 훌쩍 넘어있다. 꼬챙이에 꼽힌 채 커다란 칼로 살살살 벗겨내지는 케밥용 고기처럼 그렇게 내

껍데기에서는 지방이 벗겨지고, 안쪽에서부턴 왜소하게 박혀있던 근육들이 둔중한 부피감을 과시하며 차츰

밀려나와 안팎으로 꿈틀대는 중이다.(라고 상상한다.) 무리하고 있다. 왼쪽발목이 삐그덕대기 시작해서, 낼부터는
뛰지 말고 걸어야 하지 않을까..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걷고 있다. 강남구청역 바로 옆에 있는 영어 학원에 가려면 한시간반씩 걸리며 두번이나

환승해야 하는데다가, 층을 오르내리며 수업을 들어야 한다. 매일 9시부터 3시까지 있는 수업 역시 녹록치만은

않아서 오전중에 벌써 개풀처럼 지쳐버린다. 어쨌건 덕분에 끈떨어진 졸업생치곤 아주아주 근면성실하게 살고

있는 것같은 포만감은 들지만, 사실은 이게 다다. 헛배만 불렀다.



정몽구는 동아일보 인턴할 때 공판을 지켜봤었고, (인터뷰라기엔 살짝 머한) 짧막한 대화도 살풋 나눴었다. 그에

대한 항소심 판결을 보면서, 얼마나 유리처럼 취약한 세계관에 기대어 우리가 살고 있는지..한심스럽고도

가련했다. '저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도박을 하기 꺼려졌다'는 대목. 재판관은

법의 정신에 따라 판결만 하면 된다지만, 법조목에만 능한 그가 가진 경제적, 사회적 소양은 기껏해야 신문에서

줏어본 '상식'이다. 마치 외교과 교수들이 '국익'을 논하면서, 그저 경제학원론 수준의 경제적 이론-규모의 경제,

자유무역의 이익-을 전제한 채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과 같다. 전부다 기능인들 뿐이다. 그저 '상식적'인

이야기를 빌려온 채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양념을 뿌려 판.단.한다.

혐오스러운 기능인들. 최소한 자신이 기능인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자기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나이브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거다. 물론 그가 판결을 내리려면, 국제정치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하려면, 이러한 식의 거친 '상식의 개입'은 불가피하기도 하다.



사실은, 모든 종류의 세상살아가는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최근의 소설이 전부다 일인칭의

자기분석적 서술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지만,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판에 구태여 타인의

시각을 전지적으로 개재시킬 필요도, 능력도 없다는 포스트모던한 자각에서 비롯한 걸 거라고 생각한다. 상황을

해석하고 감정을 헤아리는데 있어서의 기능인. 자신의 감정에 투영시켜 상대를 보고, 자신과 같은 상대의 감정을

기대하는. 내가 갖는 느낌은 기껏해야 내 신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 그나마 운전을 할 때라거나 검도를 할 때. 내 존재가 차의 보디를 따라 연장/확장되는 느낌이 들면서, 바퀴가

돌을 밟으면 내 다리에 밟힌 것처럼, 엔진이 쿨럭이면 내 심장이 잠시 버거운 것처럼 감각한다. 검을 따라 내 팔이
늘어난 것 같은 감각 역시. 그치만 이것들은 도구화된 무생물일 뿐이다...



촛농처럼 땀을 흘리면서 징징대는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무한도전보며 웃다가 자빠질 뻔 하기도 하는 녀석이

무슨 감정을 품고 살고 있는지조차 스스로 알기 힘든 판이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상, 그리고 사람들은 그저

상식대로, 혹은 내가 바라는 '상식'대로 굴러간다고 믿는 게..편하다. 자기편의적인 효용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만 안 주면야, 내 편한대로 '상식'을 초혼하는 것도 괜찮을 법하다.



후희(post-play), 혹은 금단 현상(withdrawal syndrome).

감정이 달리는데 있어서 전희(fore-play)라는 게 갖는 비중만큼이나 후희라는 것도 중요하다면..오케이.

여전히 남은 온기와 따뜻함의 여운을 쓰디쓰게 되씹는게 충실한 후희.

#1. 갈피를 잃다.

취직하기 전엔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그 다음에 한숨돌리고 다음 길을 찾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루하루 그저 녹아내리는 느낌이다. '온세상 호랑이가 모두 녹아내려 버터가 되어버릴만큼.' 얼굴에 '장학퀴즈

출전자나 그럴법한 적당한 영리함과 발랄함'을 잔뜩 둘러친채 오전부터 오후까지 내내 대면해야 하는 사람들.

그것도 모자라 한기수 위 선배들이네 두기수 위 선배들이네, 게다가 노조네 어쩌구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들.

패턴인양, 저녁식사와 술 그리고 노래방과 3차 술집. '사람', '인간'관계가 중요한 고즈넉하고 고루한 협회라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사람'이 아니라 '동기'란 걸로 묶여버려서, 노래방에선 우르르 앞에 몰려나와 방방 뛰며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템버린을 흔들어대고-혹은 목에 걸고 온몸을 흔들어대고-선배님들 앞에서 재롱잔치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웃는 척, 즐거운 척 하고 있다.(적어도 난 그렇단 거다. 동기들은 어떻다..라고 묶어서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



#2. 술이 싫다.

술이 싫다. 정확히 말하자면, 술에 기대어 친한 척 환각에 빠지기도 싫고, 술에 기대어 인간적인 척 충고하고받고

그러는 것도 싫다. 바라건대 두 명, 최대한 네 명 이하의 술자리에서만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같아, 상대와

눈맞추며 열심히 얘기를 섞어보고 싶었다. 내 잘못도 있는지 모른다. 조용히 중간에 묻어있으려던 나는 어느새

'주량이 가장 세고' '말도 많고' '술도 좋아하는' 같은 라벨들이 덕지덕지 붙어버려서, 뺑끼조차 쉽지 않아졌다.


요약하자면, 요새 내가 느끼는 건. 선배들과 그런식으로 소모적인 술자리를 갖고 그다지 원치 않는 알콜을

반강제로 섭취하며, 일말의 죄책감을 가지고 한시간반이나 걸려 막차타고 집에 와야 하는 상황에 지쳐간다는

거다. 응. 신체적으로 힘들면 심리적으로 힘들어지는 법이다. 게다가 내가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내가 걸어갈

길의 막다른 끄트머리쯤에 몰린 건 아닌지 싶은 불안감이 더욱 커지고 있다.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책임질 수

있는 자리를 챙겨들었으니, 엉덩이만 비벼 주저앉는다면 마냥 늘어져 잠들지도 모르겠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한없이 무거워지는 발을 질질 게을리 끌면서 어느새 몽롱하고 탁해진 눈빛으로 재테크를 말하고, 부동산을

말하고. 그런 게 싫다는 게 아니라, 눈빛이 탁해지고 흐려진다고 스스로 느끼게 되는 상황이 싫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무엇 혹은 어디를 향하고 싶은지, 지금은 그래서 무얼 하고

있는지. 할 말이 없다.



#3. 고양강아지.

어느날 문득 세상 사람들이 개와 고양이 중 하나로 변신한다면, 난 틀림없이 고양이로 변신할 거라고 생각해왔다.

자존심강하고, 자신 고유의 영역을 고집스럽게 지키며, 누군가에 매이는 걸 아주 싫어하는 그런 사람. 내가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자존심은 때로 영악한 이기심으로, 때로 소아적인 소심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모든 걸

다해줄 듯 배려하는 척하는 립서비스의 이면에는 정작 나 자신의 영역과 자존심을 털끝도 다치지 않으려는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 깃들어 있기도 했던 것 같다. 이는 미리 다칠 걸 두려워한다는 그럴듯한 핑계 이외에도,

감정을 판돈삼아 벌이는 '연애게임'에서 누구에게도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다는 다분히 실리적인 계산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 거..게임이었을 때나 가능한 거였다. 상대의 반응을 예민하게 잡아내며 밀고 당기고를

유희처럼 즐기는 것은. 상대의 자존심을 무장해제하고 숨김없이 감정을 표현하도록 하면 이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얼마나 유치하고 치졸한 생각이었는지.


이제는 그렇다. 그녀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게 감싸주고 싶고, 그녀가 표현하기 전에 내가 먼저 표현해주고 싶고.

나 자신이 그녀에게 열려 있는 만큼 그녀가 훌쩍 다가와서 날 읽어주기를. 내 영역이라 할 것들을 풀어헤쳐 함께

공유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녀가 나를 확실히 길들여 우리의 소통을 방해하는 세상의 온갖 노이즈를

조금이라도 극복할 수 있기를.


욕심이 큰 걸까, 때론 우리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남..이었다는 사실을 잊곤 한다. 너와 내가 우리라는

단어로 미끈하게 묶이기 위해서는, 피라밋이 바위산으로 변해버린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터무니없는 낙관이 좋을 때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요새 나는 그녀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란 게 손에 와닿지 않는

이러저러한 것들이 아니라, 그녀 한사람이면 차고 또 넘칠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한다.

새벽에 눈을 뜨니 집앞 놀이터였다. 얼굴을 모랫바닥에 반쯤 파묻고선, 입안에선 알콜내음 물씬한 모래가 잔뜩

씹혔다. 팔다리를 어떻게 휘청이며 일어섰는지 기억이 없다. 하늘색 니트는 군데군데 얼룩진 갈색으로

변해있었고 바지 역시 토사물이 떡처럼 엉겨있었다. 다시는 엉망으로 술 먹지 않겠다는 약속, 깨뜨릴 때마다 뭔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엄마는 미친놈, 이랬다.


해가 중천을 지나서야 다시 집에서 같은 상황 반복. 뱃속은 돌로 변한 것처럼 딱딱하게 죽어있었고, 숨결엔

알콜이 실려나왔다. 물 한모금에도 바로 변기를 부여잡아야 했고 누가 옆에서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고 있어서

약국으로 향했다. 몇 걸음 걷다가 지쳐서 아파트 계단에 앉아 쉬는데 신물이 넘어왔다. 화단에 숨어들어가

숨넘어가듯 구토. 조금만 힘을 더주면 목으로 내장이 넘쳐 나올 것 같아서 참았지만, 이미 노란색 위액이

질펀하게 낙엽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치아는 말랑해지고, 나는 죽을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저녁에야 겨우 라면 하나 먹고 트림이 나왔다. 점심 때 미친놈 미친놈 이러면서 라면을 끓여줬던 엄마는, 그치만

물 400ml에 북어랑 파랑 다시마까지 넣어줬었다. 덕분에 국물이 바싹 쫄아들어 난 기갈스럽게 숟가락으로 냄비

바닥만 긁다말고 변기로 향했었고. 장이 다시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지렁이나 플라나리아가 앞으로 향하기 위해

꿈틀대는 그런 연동운동, 내 장에서도 재개됐다.


머리를 쪼개 두 개의 머리를 갖게 된 플라나리아처럼, 감정도 때로 두 개로 쪼개지는 시험에 들기도 하고, 또 때론

두 개 다 끈질기게 살아남기도 한다. 그래서 한 장면에선 두 사랑이 겹치더라도, 다음 장면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선택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장이야 연동운동을 제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어딘가로 가고

그러지야 않겠지만, 장이 아닌 바에야 거칠거칠한 모랫바닥이라 해도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해도 1mm라도

움직이는 기색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보낸 건 난데, 돌아오길 바라는 것도 나다. 악역을 맡고 싶은 사람은 없어서, 그래서 어디도 향하고 있지 않은

당신의 멘트를 뺏어 내가 대신했지만, 나 역시 악역은 싫었다. 정답이었는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을 들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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