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픽사애니 '업'의 인트로를 좀더 디테일하게 풀어놓은 느낌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이들이 만나 사랑하고 살아가고 또 이별한다. 이렇게 삶이 피고 지는구나, 라는 짧은 탄식 속에 진하게 졸여진 감정을 표현하기엔 단어가 모자란다. 슬프다기엔 아름답고, 아름답다기엔 애잔하다.

아름답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다. 가진 것도 없고 딱히 야심이나 욕망을 품지도 않았다. 절름발이 무능력녀와 생선잡이 괴팍남의 첫만남은 그래서 좀더 잿빛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단지 어디로던 탈출하고 싶었던 여자의 니즈와 가정부가 필요했던 남자의 니즈가 가까스로 합을 이루었던 위태롭고 앙상한 조합.

말 잘 들으라며 따귀를 맞던 여자가 어느 순간 남자가 끄는 손수레 뒤를 절룩거리며 따라다니고, 또 어느 순간 손수레 위에 앉아 같은 풍경을 보기도 하고 서로 얼굴을 맞대기도 한다. 여자는 이제 남자의 주먹구구식 밥벌이에도 개입해 훨씬 정연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고 있다. 마치 그의 돼지우리같던 오두막이 변신한 것처럼.

그녀의 그림이 없었어도 그와 그녀의 삶은 그만큼 아름다웠을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창문 프레임 바깥 풍경과 같은 것을 그가 보지 못한다 해도, 그래서 '고작' 난 당신-내 아내-만 본다며 서툰 경상도 남자같은 고백으로 평생을 버텨냈다 해도,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속엔 이미 그가 가득했으므로.

#내사랑 #maudie #에단호크 #세종문화회관 #소소마켓 #야외상영

#자전거도둑 #bicyclethief #italy #movie #classic #영화스타그램 #고전

1948년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고전. 이토록 강력한 영화라니. 충격과 반전의 후반부는 말그대로 입을 떡 벌리게 만들었고, 인간과 삶에 대한 김기덕 류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폭발이 아니라 세련되고 담백한 표현만으로도 그정도 성취에 이를 수 있음을 웅변한다.

2차대전후 피폐해진 이탈리아,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 가족이 바라보는 건 아버지뿐이지만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직업소개소에서 용케 소개받은 일자리는 자전거가 꼭 있어야 일할 수 있다는데 정작 전당포에 팔아먹은지 오래. 침대보와 베갯잇을 다시 전당포에 잡히고 자전거를 꺼내오는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에게, 아니 그의 가족에게 자전거는 당장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수단인 셈이다. 그런 자전거를 도둑맞고서 그가 느꼈을 암담함과 좌절감은 얼마나 깊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은 러닝타임 내내 계속되는 자전거와 자전거 도둑에 대한 추적이 줄곧 무위로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짜증과 답답함으로 변질될 지경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경찰, 나몰라라 하는 주변인들, 증거내놓으라며 뻗대는 관련자들.

그러게 왜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그러냐. 같이 돌아다니는 꼬맹이 아들은 무슨 잘못인데 왜 화풀이하고 그러냐. 겨우 도둑에게까지 가닿았다 싶은데 무기력하게 빈손으로 되돌아설 때쯤에는 애꿎은 화살이 급기야 피해자인 남자에게 쏠리고 말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전개. 사실 충격이라기엔 사람 심리가 그런 거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날벼락같은 피해를 입었고, 누구도 내게 도움을 주지 않고 관심도 없다면, 어쩌겠는가. 도둑맞은 이가 도둑이 될 수 밖에. 사진이 바로 그 갈등의 순간.

그리고 한번 더 인상적인 반전이 등장한다. 순식간에 잡혀버린 그는 아이 앞에서 따귀를 맞고 다구리를 당하지만, 잡힌 도둑 앞에서, 다시금 안전하게 수중에 들어온 자전거 앞에서, 이번 피해자는 관대함을 과시한다. 경찰서로 끌고 가는 대신 그냥 아이와 함께 보내주겠다며 풀어주는 것.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망연자실한 표정이라니. 사방으로 휘적대는 눈빛은 어딘가 목을 매달 곳, 죽어버릴 곳을 찾는 것만 같다. 칼날 위에 선 듯 위태로운 파국을 맞을 것만 같은 긴장감이 팽팽한 순간, 아이가 내미는 손을 잡고 비척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 아, 이게 사는 건가, 싶은.

#옥자 #넷플릭스 #영화스타그램 #봉준호
 
소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장악한 '보여줄 권리'에 넷플릭스가 참신하게 덤벼들며 꺼내든 무기..란 측면에서, 역시나 잘 만든 오락영화가 답이었으리란 생각. 전연령이 시청이 가능하고, 특정 마켓에 한정된 소재나 장르가 아니며, 소녀와 반려동물의 이야기는 유니버설하게 먹힐 수 있는 원형과도 같은 소재랄까나. '잘 만든 오락영화'란 건 그 본령이 엔터테이닝에 있으되 이것저것 슬쩍 얹어낸 양념과 고명이 과하지도 앙상하지도 않았을 때 가능한 표현인 것 같다.

공장형 대량축산, 유전자조작식품, 먹거리를 둘러싼 신념과 현실 간의 낙차, 글로벌 종자기업들의 패권성, 육식 자체의 도덕성 등등 다채롭게 읽힐 수 있는 힌트들은 무성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그런 부분에 집중하는 건 아닌 거 같단 이야기. 조금 도발적으로는 그저 영악하게 잘 갖다쓴 소란스런 이슈들-논란을 일으켜 대중을, 돈을 끌어모을 소재들-이란 표현이 맞겠고, 조금 호의적으로는 가족영화/오락영화에도 사회적 이슈를 적절히 반영했다고 할 수도.

옥자와 미자, 반려동물과 인간간의 숱한 애정담에 대한 봉준호식의 변주. 내 기준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이건 아마도 속편이 있겠다 싶은 내 촉이 맞을까 하는 부분. 던져진 채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장면과 떡밥들이 적잖은데, 아무래도 봉감독은 속편까지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싶은데..모르겠다.

#자백 #영화 #영화스타그램 #뉴스타파

힘을 가진 그들에게 다른 보통사람들은 그저 본인을 위한 발판으로만 보이는 걸까. 사람들 눈과 귀를 가리는 건 일도 아니고, 랜덤으로 찍어걸린 이들을 윽박지르고 강압하여 자백 아닌 자백을 이끌어내는 스킬은 수십년간 갈고 닦아왔던 거다. 억울함에 울부짖던 자살시도를 하던, 남은 가족들이 울화병으로 뒷목잡고 쓰러지던, 그런 건 알 바 아니다. 김기춘과 그 후예들이 조작한 사건 피해자들을 대하는 방식은 확실히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숨막히도록 끝없이 이어지는 '자백'에 근거한 사형/무기징역/수십년의 징역과 수십년늦게 바로잡힌 무죄판결의 기록들은 97년 이후 잠시 멈칫하다가 2013년부터 슬슬 되살아났다. 한참 레벨업되었던 스킬을 새삼 오늘에 되살리려니 아무래도 좀 부족한 점들이 있었던 거려나. 최고권부라는 검찰도 국정원도 일처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게, 뉴스타파의 취재로 저렇게 정면반박당하고 깨갱하고 말다니. 영화를 보다 옆자리 아저씨가 탄식처럼 크게 '저런 개새끼들', 할 수 있는 만큼의 시대가 된 덕분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주로 다루는 2013년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 대법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기까지의 3년여 시간을 촘촘히 따라가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당시 이명박정부가 박원순시장을 찍어내려 간첩사건을 만들어냈다는 해석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탕봉지에서 사탕 빼먹듯 북한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쥐고 흔들며 내키는대로 사건을 창작해내는 사람들,  그들의 장난질은 한순간의 정략과 정치기획이었겠지만 그 파급력은 개인에게는 너무나도 크고 가혹하다. 그 조작으로 이득을 보려던 사람의 관심은 식었고 정권도 바뀌었지만,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조작사건은 사회 시스템 안에서 엄연한 사건이 되어 희생자에겐 길고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남기는 거다.

어처구니없지만 웃을 수도 없는 부조리극. 보통사람들에게 그건 일종의 천재지변이었고, 힘센 사람들에게는 그저 게임을 위한 장기말 배치같은 것. #이게나라냐



#죽여주는여자 #영화 #윤여정 #이재용

죽여준다는 표현이 갖는 이중성, 말그대로 죽여주겠다는 살벌한 의미일 수도 있고, 또 죽여줄만큼 좋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렇게 두가지의 '죽음'을 (남자에게) 가져오는 사신같은 여자 윤여정의 인생과 현재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마치 포스터 속 그녀의 복잡해 보이면서도 멍해보이는 표정 그대로. 대체로 그건 수동적이고, 왠지 알아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에 맞부딪힌 자의 표정이다.

등장인물들간의 욕망이 향하는 세기나 방향을 바탕으로 등고선지도를 그려보면 어떨까. 윤여정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욕망의 등고선은 두가지 죽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의미 모두에 있어서 그렇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탑골공원의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같이 좋은 섹스를 맛보고자 하고, 또 그렇게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조차 불러오려 하니까. 그녀는 모든 (남성들의) 욕망이 흘러내려오는 곳, 배꼽같은 저지대일 뿐이다. 그녀의 삶은 늘 그랬으니까, 어쩌면 그 표정은 지쳐 체념한 데서 비롯한지도 모른다.

주변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다소 복잡한 지형을 보인다. 오타쿠같은 장애인 남성, G-spot이라는 야릇한 이름의 트렌스젠더바에서 일하던 트렌스젠더. 이들은 영화의 욕망이 단순히 남녀의 이분법으로만 읽히는 걸 막고 좀더 건전한 욕망의 교류, 등가교환에 가까운 뭔가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섹스관광의 결과로 태어난 코피노(코리안+필리피노) 꼬맹이. 윤여정에게서 뻗어나가는 유일한 욕망 한가닥이 있다면 그것, 그 꼬맹이를 통해 과거 젖도 못뗀 아이를 입양한 기억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한가닥 욕망조차 제대로 채우기 쉽지 않다. 방해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남성들)의 욕망이 사회의 전지적인 권한을 침범하는 시점. 구성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전권을 행사해야 하는 사회는 그 통제를 벗어난 늙은 남성들의 잇단 죽음을 주목한다. 영화속 현실에 충분히 노출된 지금의 현실, 고 백남기농민이나 한상균 민노총위원장의 뉴스가 그 사회가 가진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들이었다면, 이제 그 힘으로 윤여정을 단죄해 위신을 유지할 때인 거다.

그렇게 그녀는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죽여주는 여자가 되어 평생을 살았고, 자신의 작은 욕망 하나 채우지 못한 채 삶을 마친다. 대체 그녀의 삶은 뭐였을까, 아니. 이렇게 묻는 건 스크린 너머 내가 그녀의 삶에 여전히 코박을 만큼 가깝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제각기 남들이 알 수 없는 내밀한 속사정과 맥락이 있는 법이고, 그녀의 삶 역시 나름의 만족과 안온함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손을 빌어 세상 밖으로 구출해낸/죽여버린 그들의 감사함에서 작은 의미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그가돌아왔다 #넷플릭스 #히틀러 #나의독재자 #영화

2014년, 그가 삶을 마감했던 지하 벙커 바로 그 자리에서 히틀러가 되살아났다. 우선 보여줄 거리는 60여년의 시간차로 인한 어벙한 모습들, 그로 인한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기. 기울어가는 전쟁 한복판에 있던 그가 평화로운 베를린 한복판에서 거리의 공연을 펼치는 이들과 자리다툼하는 모습이라거나, 군복을 몽땅 벗어 세탁소에 맡기는 모습 같은 것들.

가볍게 그의 시대착오적인 연설을 끄집어내어 실소를 머금게 하는 것도 좋겠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그의 말투는 한소절만 들어도 웃음이 터지는 개그물일 뿐이니까. 난민, 청년 실업, 노인 빈곤, 국가 채무, 멍청한 텔레비전...어라. 생방송 프로그램에 개그맨으로 발탁된 그의 연설솜씨는 전혀 우습지 않다. 그의 주제 역시 전혀 터무니없거나 미친소리 같지 않다.

일약 사회문제로 떠오른 티비 히틀러. '히틀러의 지적이 독일 사회문제의 정곡을 찔렀다'거나 '정치가 뭔지를 아는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따위 폭발적인 찬사가 이어진다. 대중은 그를 좋아하고, 언론은 그를 잘 포장하여 대중 앞에 대령하며, 자신이 진짜 히틀러임을 셀수없이 선언한 그에게 재차 이름을 묻는 사람은 사라졌다.

영화는 집요하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마치 1933년 드라마틱한 그의 집권을 전후한 시대상과 현재의 상황을 정면으로 충돌시킬 생각인 거 같다. 그것도 있는 힘껏. 히틀러의 뼈대가 되었던 우생학과 아리안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가 얼마나 농담같이 시작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상식이 되었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게 히틀러라는 악인의 등장이라는 돌발변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이름의 누구라도 대행할 수 있었을 인류의 한 국면이었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건 꼭 '악의 평범성'으로 풀 이야기만은 아니다. 히틀러를 낳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무르익으면, 그 화약고에 불붙이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독일 걱정에 밤잠을 못이룹니다"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정작 독일을 불구덩이로 집어넣었었고 또다시 집어넣을지 모르는 역사의 반복, 이건 두번 다 틀림없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 거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이를 가진 어떤 나라에도 불길한 전조를 드리운다.

그렇게 소름돋게 만드는 영화의 마지막, 2014년의 히틀러는 이제 대중의 인기와 언론매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슬슬 본색을 드러낸다. 잡종개를 총으로 쏴죽이고 유태인의 피를 혐오하며 유색인종은 육체노동이나 하라고 농담처럼 밑밥을 깔아둔 터였다. 난민을 위한 집단수용소에 대해선 전문가라며 자신감을 보인 터였다. 더이상 그는 어릿하고 후져보이지 않는다. 눈빛은 명민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카리스마는 백퍼센트 충전됐다. 이제 어디로 독일 국민들을 끌고 갈까.

설경구가 스스로를 김일성으로 착각한다는 설정의 '나의 독재자'를 초반에 살짝 떠올렸으나, 전혀 다른 종류의 영화. 대충 얼버무리거나 금기시되어버린 히틀러라는 이름이 갖는 미묘한 지점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사람들을 당혹시키려고 작정한 작품이고,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그 목적을 초과달성한다.

#돼지의왕 #연상호 #부산행 #창 #영화스타그램 그림체는 낯설고 동작은 엉성하다. 움푹 패인 눈매와 불쑥 솟은 광대를 강조한 인물들은 만화의 미덕인 '뽀샤시'의 덕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 영화를 보고 몇번이나 전율이 돋고 말았다.

학원폭력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보다는 어떤 사회적인 관계에서던 약자의 위치에 선 사람들에 대한 집요하고 사정없는 묘사라고 말하는 게 낫겠다. 약자라고, 피해자라고 선하거나 순할 것만 같은가. 그네들의 어둠은 오히려 가해자들의 일방적인 것보다 더욱 깊고 독하지 않을까.

표출되지 못한 분노와 폭력성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것들이 애니메이션으로 표현된다면, 그래. 이렇게 어둡고 음침하고 일그러진 세상에 사람들일 수 밖에 없는 거다.

p.s.그러고 보니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었다. 아..이 사람 뭐지.



#동주 #영화스타그램 막 핫하게 사람들이 찾는 건 피하고 싶은 묘한 심리가 있다. 덕분에 이제야 보게 된 영화, 동주.

언제고 세상이 순탄했냐만은, 개인의 삶이 본인 맘먹은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리라 믿는 것까진 아니라 해도 이토록 방해받은 삶이라니. 시를 쓰는 것도, 시인이 되려 한 것도, 그 와중에 시가 그저 본능처럼 쓰여지는 것도 모두 부끄러워 해야 하는 동주의 삶.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곤 해도, 역시 부끄러울 수 밖에 없는 거다.

순수냐 참여냐, 이 해묵은 논점에 대한 동주와 몽규의 언쟁은 전형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문학으로의 도피가 아니냐는 지적에 대한, 언제는 이념이나 사상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었더냐는. 그거야말로 시류에의 영합 아니냐는 이야기는 특히나 한국 현대사에 대보자면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영화는 어쩌면 동주와 몽규의 로맨스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무리려나.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함께 하고픈 애절한 마음과 구태여 발동시키곤 했던 어깃장까지.





45일안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로 변신시켜버리는 호텔이 있다. 아니 그전에, 짝을 짓고 이를 유지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유배시키는 사회가 있는 거다.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발사이즈는 14인지 15인지 그 중간의 선택지는 도무지 제공하지 않는 호텔은 그렇게 결혼을 강압하는 사회의 반영인 셈이다.


짝을 찾을 의욕도 없어 보이던 사람들은 사회와 호텔로부터 탈출한 자발적 외톨이들을 사냥하는 경험과 동물로 변할 거라는 공포감에 떠밀려 짝을 찾아나선다. 거짓으로 공통점을 꾸미고 우연을 가장해 짝을 구하는 과정은, 마치 섹스중이던 채털리부인이 차가운 정신으로 한발뒤에서 바라보던 우스꽝스런 엉덩이의 움직임과 같다. 열정과 로맨스는 없고 기계적인 몸짓뿐이다.


짝을 찾은 후에 위기가 닥쳐도 걱정없다. 호텔은 그들에게 아이를 배정해주니까. 혹 그/녀의 가족 문제가 그들의 가정으로 쳐들어와도 적당히 화장실로 끌고가 사라질 때까지 발로 밟아버리면 그만이다. 짝을 이룬 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텔의 숙박공간과 서비스는 좋아지니 여하간 남는 장사 아닌가 말이다.


물론, 당신의 사랑을 15점 만점에 몇점이냐고 누가 총을 겨누고 묻는다면. 짝 대신 자신이 죽어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상대의 눈을 잃게 했으니 당신 역시 눈을 내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러한 질문 앞에서는 속절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는 건 넘어가기로 하자. 애초에 그런 질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이런가.


혹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그런 질문 앞에서 쪼그라붙고 위축된다고 사랑이 아닌 건가. 어차피 사랑이란 건 영화속 한장면처럼, 너와 나의 플레이어로 각자 듣는 음악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추려는 시도같은 것으로 충분할지 모르는 거다. 같은 노래를, 같은 타이밍에 들을 수 있는 행운이란 건 그렇게 흔치 않으니. 게다가 그에 더해 너와 나의 몸짓이 아름다운 몸짓을 그려내는 행운이란 건 더더욱.




p.s. 랍스터가 되고 싶다던 남자, 바다를 좋아하는 데다가 랍스터가 백살도 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랍스터를 택했다고 했다. 나는-영화 제작사에서 준비한 퀴즈에 따르자면-고양이로소이다. (링크는 여기)




 

 

 

무드 인디고.

 

 

꽃처럼 피고 지는 사랑, 사랑처럼 피고 지는 꽃. 꽃이 은유인지 사랑이 은유인지 헷갈릴 만큼 미셸 공드리의 환타지는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사라진다.

 

그게 과연 환타지였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마음이 모두 한송이 꽃이라면 세상은 온통 꽃이 지천에 피고지는 거대한 꽃밭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국제시장.

 

 

 

작정하고 울리려드는 신파라는 점에서는 '칠번방의 선물'에 못지 않아 머리가 아팠고, 후손들에게 길이 남을 업적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끌어올리는 점에서는 '명량'과 비슷한 부담스러움이 있던 영화. 희극적이고 과장스런 연기와 앙상하고 작위적인 스토리, 엉성한 분장까지. (게다가 김윤진의 발음과 발성은 너무 어색했다) 영화적 완성도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냥 이정도로 충분해 보인다. 현재는 이 영화의 시선과 내러티브에 대한 진영논리에 갇힌 선정적인 비난이 교차하면서-게다가 수첩공주의 애드립이 더해서-괜시리 입소문만 더 타고 있어 보인다.

 

그보다 더 흥미로워보이는 지점은 사실, 신산한 한국사를 관통해 살아낸 그들이 아버지를 줄곧 필요로 하고 혹은 그걸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있다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비전이나 전략도 분명히 제시하지 못하면서 거의 신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작동했다고 믿어지는) 아버지의 리더십을 초혼해내는 '명량'보다 한발 더 분명...히 나간 이 영화는, 한국의 보통사람들이 살았던 그 시절과 그때의 아버지들을 그저 무비판적으로 감싸안고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상징할 수 있는 뒷배경/자산/경험 등이 없던 시기 가정을, 사회를, 역사를 끌고 간 게 그들이었다는 이유로.

 

사실 이와 비슷한 작품들, 사회와 역사를 이끌어 왔다며 아버지들을 상찬하고 새삼 위무하던 작품들은 이미 IMF 때 있었다. 당대의 비전이나 미래가 흔들릴 때 원기회복을 위해 쉽게 돌아갈 곳은 여태 쌓아온 과거, 그리고 그 일꾼들이니까. '아버지'란 삼류소설이나 유사한 아류 작품들이 그런 건데, 경제위기 직전의 한세대만을 주목했던 그때보다 지금은 좀더 멀리 길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아마 앞으로의 비전이나 전망이 불투명하고 불안감이 확산되는 시기가 다시 올 거라는 예후 혹은 이미 도래했다는 징후는 아닐까.

 

 

+ 또다른 문제는, 이 '아버지 만세'의 퇴행적 스토리가 불가결하게 견지하는 여러 단순하고 유치한 사고방식과 관점들일 수 있다. 미군은 그저 착한 해방군이고, 베트콩은 사악한 전사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도 그렇지만, 심지어 젊은애들은 어른들의 공헌을 전혀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다는 듯한 거짓된 세대갈등을 빚도록 피해의식을 양산하는.

 

 

 

 

 

님아 그강을 건너지 마오.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일찍 죽어버려 다행일 거라던 누군가의 독설은,

 

차라리 사랑이 시든 자리에 피어나곤 하는 방만하고 권태로운 관성에 대한 자괴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삼개월이면 사랑은 끝난다느니 결혼하면 의리로 산다느니 하는, 온통 사랑이야기뿐인 시대에 외려 득세하는

 

사랑에 대한 허무주의.

 

 

그리고 여기 이들이 있다.

 

죽음으로야 비로소 잡은 손 놓게 되는 그런 사랑을 하는 이들.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한다는 그런 사랑,

 

말과 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님을. 그래서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은 십대보다 풋풋하고 이십대보다 온전하며

 

삼십대보다 원숙해보인다. 온갖 곡절이 있는 삶이었겠지만 더욱 단단하고 깊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겪어냈기에 가능했을 거다.

 

 

그야말로 가능하다, 라고 말해주는 영화.

 

사랑은, 로맨스는, 계속 될 수 있다고 아름다운 그들의 삶을 들어 웅변해주는 것만 같던.

 

 

 

이를테면 육체를 (잃어)버린 시대의 사랑에 대한 영화랄까. 영화 속의 풍경은 현실같으면서도 묘하게 비틀려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OS를 개인비서삼아 말로써 기능을 조작하고 명령을 내리고, OS와의 연애가 쿨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인공지능을 가진 OS는 한꺼번에 팔천명의 사람과 대화하고 그 중 육백명의 사람에게 사랑을 말한다. 섹스는 스마트폰 너머 누군가와의 스마트한 폰섹으로 대체되거나 인공지능을 가진 OS에 이끌린 자위로 대체되는 형편이다. 거리에 나서보아도 사람들은 전부 OS와 이야기하느라 허공에 대고 침튀겨 말하거나 손짓을 해대며 지나쳐 갈 뿐이다. 서툴고 상처받은 사람과 사람이 기껏 만나봐야 잠시 셈을 따지곤 도망칠 뿐이고.

가히 묵시록적인 풍경이지만, 지금의 모습과 멀지 않아 보인다. 스마트폰...이라는 창구로 연결된 OS와 인간들의 링크는 이미 탯줄만큼이나 단단해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거리에서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다. 육체를 빌어 이어졌던 관계는 이제 육체로 인한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되기 위해 분해되는 중이다. 이미 카톡 너머, 페북 너머 당신들이 실재하는지 여부는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육체는 불필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육체적 애정행위로서의 섹스 역시 (남자의 표현을 빌자면) 신혼시절에나 열심히 할 뿐인, 누구와 아무래도 좋은 욕망의 배설행위 정도로 격하되어버렸다. 앞으로는 구글글래스니 뭐니로 제공되는 새로운 자극만 충분하다면 굳이 육체를 통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로맨스를 표방하는 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OS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메타포 그 자체일 수 있어서일 거다. 사람과 사랑에 서툰 이들에 대한, 사랑을 소유의 문제로 쉬이 치환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고 사랑이 서로를 어떻게 격려하며 키워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사랑과 그로 인한 혼란의 감정을 처음 맛보고, 사랑하는 이의 피부와 육체를 감촉하며, 실수와 실망 속에서도 상대와 스스로를 함께 한걸음 성숙시켜낼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이끄는 상대. 그런 상대라면 그게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OS가 되었건 피와 땀이 흐르는 '미도리'가 되었건 사람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거다.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는 정말, 외모에 휘둘리지 않고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단 걸 깨닫게 해줬다.
++감독의 전작 '존말코비치되기'에서 보였던 기괴하고도 발랄하던 아이디어와 풍성한 메시지를 읽어내도록 했던 복잡한 이야기능력은 더욱 심오해진 것 같다.

 

 

 

 

메가박스의 2012 시네마 리플레이. 작년에 개봉한 좋은 영화 10개를 모아 한번씩 더 상영한다는 기획이다.

 

저번주 멜랑콜리아에 이어 봤던 건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그대로

 

영화속 영화의 소재가 되고 영화 자체의 주제가 되었으며, 끝내 감독 알랭 레네와 합일하기에 이른 거 같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못했다. You Haven't Seen Anything Yet, 2012

 


 

오르페우스 신화는 다들 알겠지만. 류트를 연주하는 예술가 오르페우스가 사랑하는 그의 아내를 죽음의 신으로부터

 

구해오려 하데스 앞에서 연주를 하곤 그를 감동시켜 아내를 구출해 오다가, 세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따라오는 그녀를

 

보지 말라는 금기를 깨버리고 영영 아내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

 

 


거기서 취할 수 있는 지점들은 다양하다. 오르페우스와 아내의 지극한 사랑, 금기를 깨버리는 그의 불안... 혹은 불신,

 

죽음의 신까지도 감동시켜 이겨낼 수 있는 예술의 힘(혹은 끝내 아내를 구하는데 실패했으니 최종적인 실패를 말하는지도

 

모른다)...그 하나하나 영화의 주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판에, 그 이야기를 모두 아우르고 게다가 영화적 문제의식마저

 

녹여내는데 성공했달까.

 

 


기억과 상상의 힘으로 시공간을 극복해왔다는 알랭 레네는 익숙한 영화적 문법과 상식을 줄곧 파괴하며 영화속 현실의 틈새에

 

분절된 시간과 공간을 촘촘이 박아넣는다. 아마 그는 영화예술의 오르페우스가 되고 싶었던 거 같다. 자신의 영화로

 

지난 시간과 기억을 구원해내고, 그러나 끝내 실패하여 죽음이 도래하는 그런 반영웅담 혹은 비극.

 

 

 

지인의 평이 그랬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비관과 좌절에 대한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울줄이야."


예술이 가진 힘이란 뭘까, 예술 중에서도 영화예술로 가능한 자유로움의 한계는 어디까지이고, 그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 이 영화는 그런 오랜 화두에 대한 구십살 노장의 단단한 비관에 발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월 9일 코엑스 메가박스 M2관, '클라우드 아틀라스' 상영이 끝난 후 한 시간 가까이 배두나와의 무비 토크가 이어졌다.

 

우선 영화에 대해 말하자면, 그 이전 워쇼스키 남매(前 형제)의 작품-특히 '매트릭스'-에서 풍기던 철학적인 냄새가 많이

 

희석되고 좀더 호쾌하고 재미있는 즐길거리로 집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 배우도 줄줄이 나오는.

 

 

물론 기본적인 베이스는 살아 있다. 수백년에 걸쳐 이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변하지 않는 약자에 대한 억압,

 

'상식'이라 당연시되는 편견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세대 갈등과 나아가 복제 인류(혹은 식용 인류)에 대한 차별까지


뻗어나가는 그럴 듯한 상상력이 그렇고, 생을 거듭하며 나타나는 삶의 궤적이나 연속성이랄까, 그런 불교적 뉘앙스도 그렇다.

 

 

그렇지만 그런 풍부한 은유와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몇 개의 인생이 퍼즐처럼 흩어진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겁거나 어렵지 않고, 기본적으로 스펙타클한 장면과 현란한 효과들에 무게를 실은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아바타의 뒤를 잇는다'는 광고 카피라거나, 이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배두나씨가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인 듯.

 

 

결론. 아바타 때도 사실 규모만 크고 뻑적지근했지 내용은 별 거 없다 생각했었는데, '클라우드 아틀라스'도 그렇다.

 

다만, 그 스펙타클함 때문에 영화관에서 보면 더 재미있을 영화.

 

 

 

p.s. 다만 이 영화에 나오는 2300여년의 서울을 두고, 드문드문 나오는 한글을 두고, 혹은 영화의 여주 배두나를 두고,

 

'한국부심', 애국심을 느끼는 건 정말 뜬금없지 싶다. 그때는 이미 지금과는 국가의 개념도, 민족과 국경의 개념 역시

 

달라졌다는 전제를 깐 미래의 어느 지역일 뿐. "서울이 배경인데 왜 왜색이 느껴지냐" 따위의 불쾌감을 느끼기 전에

 

그저 아주아주 먼 미래에 어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다룬 픽션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p.s.2. 그나저나, 가져간 Pentax의 77 limited 렌즈로 D열에 앉아서 찍은 사진들인데 역시나, 거리와 조명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많이 흔들리고 선예도도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두나는 참 이쁘더라는.

 

그녀는, 아니 그녀의 연기는 '고양이를 부탁해'로부터 '공기인형'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담아두게 된다.

 

[공기인형] 짤그랑대는 기네스 병맥주,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9월의 인디포럼 월례비행 작품은 박준석 감독의 '낯선 물체'.

 

극도로 절제된 대사와 카메라 무빙, 그리고 내러티브보다는 메타포가 갖는 의미를 전개해나가는데 집중한 작품이었다.

 

전체 비용이 백만원 들었다나, 밥값 오십 포함해서. 물론 배우들의 개런티같은 비용은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을 거다.

 

그야말로 핸드헬드 8미리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영화를 찍는 '시네마 키드'의 날것 같은 모습으로 찍은 영화랄까.

 

 

그렇지만 영화의 참신함이라거나 아이디어, 그런 독립/예술 영화 특유의 강점은 말할 것도 없고 감독이 조탁해낸

 

화면의 아름다움 역시 여느 대작영화나 상업영화-그런 식의 구분이 유의미한지는 차치하고라도-에 뒤지지 않았다.

 

한시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사방에서 야금야금 짚어내는 학교 건물의 구석구석 장면, 그리고 그 공간들을 다시

 

치밀한 프레이밍을 통해 사방에서 조망하여 선과 면과 반복적인 패턴의 스틸샷으로 잡아내는 공력이라니.

 

 

빛이 사라진 눈길의 남자가 있다. 그는 기계적인 동작으로 텅빈 듯한 건물 안을 청소하고 있다. 세피아톤의 가라앉은

 

화면, 숨죽인 듯 절제된 카메라 무빙, 그리고 엉성하게 휘두르는 대걸레의 쓱싹이는 소리만 가득한 공간 안으로,

 

문득 '낯선 물체', 커다란 공 하나가 통통 튀며 굴러들어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가만히 공을 굽어보다가 가만히

 

두 팔 가득 공을 품에 안고는 건물 안의 통로와 방들을 살핀다..굳이 말하자면 이런 식의 내러티브가 가능하려나.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에는 확연히 갈리는 듯한 전반부와 후반부의 이야기 중 전반부를 영화 속 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도 읽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의 예술적 자아가 어떤 경로로 성장했는지, 마치

 

개인의 삶과 그 와중의 인간관계를 선과 면과 반복적인 패턴으로 가득한 건물 안에서 응축해보여주는 듯한 압축된 회상신이랄까.

 

그리고 그런 포부와 기대를 배반하는 현재의 열악한 환경과 무딘 재능 따위로 얼마나 답답한 상황인지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

 

 

낯선 물체. 그건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에 다가온 하나의 소소한 계기라거나 고민 한줌이라고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문득 세상이 낯설게 보이고 당연하던 것들에 새삼 의문이 제기되는 계기. 영화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처음에 주인공을

 

깨어나게 했던 그 '낯선 물체' 공 하나가, 영화 마지막엔 두개로 늘어나는 것. (감독 말로는 돈만 더 있었으면 화면 가득

 

'낯선 물체'를 채워넣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늘어난 고민, 혹은 의식된 무게감만큼 감독은 성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한시간여의 상영 이후 감독이랑 이송희일 평론가, 김곡 감독과 대담하는 시간이 또 그만큼의 시간동안 있었는데

 

그 덕분에 더욱 재미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결과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영화의 해석을 하나씩 짚어보고, 다른

 

사람들의 시각과 이야기를 더불어 버무리며 더욱 풍부하게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미 두 편의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 네 장의 초대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영화 네 편을 보거나, 데이트를 두 번 하거나.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 그리고 프랑스 영화다운 '시작은 키스(원제 : delicacy)'를 보고 난 참이었고, 조금 지치고 살짝

 

실망했던 참이었다. 홍상수식의 갈림길을 빙자한 순환도로라거나 미묘하고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원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영화를 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므로, 초대권 한 장은 남기고 일요일날 아트하우스 모모의 마지막 영화였던

 

'블루 발렌타인'을 보기로 했다.

 

 

맞다. 어떤 노래는 듣게 되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거다. 어떤 사람은 만나게 되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런 노래가,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전까지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현자같은 소리만 주워섬기거나, 이런저런 연애의 온갖 일반론들을

 

꿰차고 있는 척 해도,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는 그런 상대. 흔히 천생연분이라거나 소울메이트라거나 운명이라거나,

 

혹은 영원과 불멸을 다짐하는 그런 상대를 만나고 나면, 방법이 없다. 그런 인연 앞에 서고 나면, 마치 여태 어느 인류도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처음으로 밟는 기분으로 사랑에 빠지고 마니까.

 

 

뜨거운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평소에 '사람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 따위의 믿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람과의 이런 순간들이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도 모두 옛 허물과 과오와

 

부끄러움을 태워버리고 불사조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겠다 믿었을지 모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그녀를 잡아주는 그의 손길, 한순간의 불편한 침묵도 끼어들지 못하는 남김없는 대화. 베르나르가 소설 '개미'에서 말했던

 

더듬이를 포갠 개미들의 완전소통이란 건 이런 느낌이겠구나, 어렴풋이 알 거 같은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거리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택시와 버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브루클린 다리 교각 위에 올라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모습들이 아름다운 건 더없이 오만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뿌듯하고, 거침없이 자랑스러운 그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이 뭔지 맛보지는 못했을 거라고, 그와 그녀는 감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맞다. 어른들의 경험이라봐야 누추하고 실패한 인생을 반추했을 뿐,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황홀한 건지, 한 순간 남김없이 충만함으로 가득했는지를 가르쳐 준 적은 없었다. 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인가.

 

 

그런데. 무엇이 모자랐던 걸까. 도가니를 달구는 화력이 점점 떨어진 건,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땔감이 부족해서였을까.

 

착하고 유머러스하고 순수하던 그는 그대로 가정적인 남편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받아 안아주었던 그였고,

 

그의 마음은 좀처럼 변함없이 그녀를 향한다. 아마 그는 변했어야 했다. 그녀가 조금은 덜 세상에 찌들도록 자신이 조금

 

더 세상에 찌들거나, 그녀가 조금은 덜 독해지도록 자신이 조금 더 독해졌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때의 천진한 마음과 순진함을 지켜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뿐일까. 그가 조금 변했다고, 아니면 그녀가 조금 변하지 않았다고 해결될 문제였을까. 과연 이런 당황스러운

 

피로감과 거리감은, 그와 그녀의 잘못인 걸까. 무엇이 모자라 그토록 펄펄 끓던 도가니에 냉기만 감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나 그녀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와 그녀는 만났고, 사랑했으며, 기꺼이 서로를 책임지고 동반하려

 

함께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와 그녀는 서로가 상대로부터 뻗쳐나온 냉기와 거부감으로 손끝 하나 마음대로

 

옴쭉달싹 못하게 된 상황임을 깨닫고, 숨을 헐떡거리며 아귀처럼 싸우기 시작하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졌듯,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균열.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도, 싸우지 않으려 애써

 

웃음을 짓고 노력해보아도 어쩔 수 없다. 굳이 찾아냈던 사랑의 이유들, 유머러스하고 천진난만하고 밝고 착하고. 그런

 

장점들은 그대로 단점이 되어 증오의 이유가 된다. 대체 왜. 대체 왜일까. 어쩌면. 사랑 따위 처음부터 환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유효기간 만년짜리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작해야 반평생 버티면 성공했다 쳐주는 게 사랑일까. 애초에

 

그와 그녀가 부지불식간에 감지했던 온갖 위험 신호와 불길한 징조를 외면하고 조롱했던 벌을 받는 걸까.

 

 

우리는, 나와 당신은,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평행선이었던 걸까. 어쩌다 한번 사다리 타듯 옆길을 타고 완벽하게

 

합쳐졌지만 어느 순간인가 다시금 옆길로 새버리고, 처음부터 그랬듯 각자의 길을 따라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평행선을

 

긋고 있을 뿐인 걸까. 그렇다면 나는, 그는, 앞으로 절대 다시 겹치지 않을 순간들을 저주해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찰나의 순간이나마 완벽하게 겹쳤던 잠깐의 순간을 기적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하는 걸까. 분명한 건, 그런 겹침의 순간은

 

결혼 따위 인습적 구속이나 사회적 책임감 따위, 사랑이 아닌 '부부애'나 '정' 따위로 지속되진 않는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어른해진 눈길을 붙잡는 건 크레딧 가득 번쩍거리며 터져오르는 불꽃놀이 불꽃들.

 

그 불꽃들은 그와 그녀가 사랑하던, 그에게 그녀가 전부였고 그녀에게 역시 그가 전부였던 그런 시절의 풍경들을

 

하나씩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다시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있었다. 허름하고 난잡한 해수욕장의 싸구려 불꽃을 보고

 

아름답다 느낀 적은 없었다. 왠지 그저 슬프고 안쓰럽단 느낌, 부질없단 느낌 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저 정도 불꽃을

 

피워낸 불꽃놀이 폭죽이라면, 내가 그런 불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웠길 바랄 뿐.

 

 

 

 

 

 

 

 

 

 

 

 

말하는 건축가, 요새 대세인 건축학개론 말고. 고 정기용 건축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사실 건축이란 거, 여태 관심이 없었던 게 이상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예술인 거다. 사람을 에워싼

 

공간을 확보하고 형체를 부여하는 것. 그런 건축물들이 이번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새로 짓는 공모전에서

 

드러났듯, 그리고 청계광장의 빨갛고 파란 골뱅이탑에서 드러났듯, 인간과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배려없이는

 

쉬이 위압적으로 되어 천박하고 자기완결적으로 폐쇄된 '바벨탑'이 되고 마는 거니까.

 

 

그는 등나무에 기대어 선 운동장과도 같은 무주의 공공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제주도니 어디니 전국 곳곳의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어내는 등 쉼없이 건축의 윤리성을 묻는다. 건축이 지향해야 할 바, 건축이 가져야 할

 

가치를 묻는 그의 태도는 대단히 완강하고 보수적이랄 수도 있겠지만-그래서 그의 건축은 첨단소재나 기법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한 가지 질문에 대한 나름의 성실한 답을 내놓는다.

 

 

공간을 실제로 활용할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평생 인간을 위한 공간, 형체를 만들기위해 애썼던 그가

 

자신이 지어올린 건물-목욕탕 겸 마을회관-옆에 앉아 볕을 쬐며 노인들과 담소하는 모습이란, 그가 꿈꾸던 인간적이고

 

공적인 건축물의 현현이자 그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을 보여주는 거 같았다. 그 건물을 누가 지었는지 관심조차 없는

 

노인들 옆에서, 다만 쓰잘데기없는 마을회관 대신 꼭 필요했던 목욕탕이 생긴 걸 기뻐하는 그들 옆에서, 가만히 웃는 그의 모습.

 

 

건축가로서 차츰 드러나던 그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이 보였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건축가로서의

 

시선을 갈무리하고 평생의 성취를 내보이는 회고전을 치루는 모습은, 그렇게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무리를

 

단단히 지으려는 모습은, 이미 특정 분야의 그렇고 그런 '전문가'의 모습을 넘어서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을 매듭짓는 모습 자체로 모든 이의 공감과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거 아닐까.

 

 

'고양이를 부탁해'를 찍었던 정재은 감독은 그런 그의 죽음을 두고 괜히 눈물샘을 자극하지도, 턱없는 아량과

 

하릴없는 상찬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성대결절로 고생하는 병든 건축가의 갈라진 목소리를 자막도 없이 그대로

 

드러내며, 관객들이 모두 숨죽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꼭꼭 새겨듣도록 한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거슬린다 싶더니, 어느 순간 그 목소리가 너무도 뭉클하게 다가왔을 만큼 강력한 영화였다. 영악한 감독 같으니.

 

 

 

 

 

 

 

 

"파편화된 채 무기력한 대중으로부터 '클립토나이트'를 빼내고 모두를 당당한 슈퍼맨으로 각성시키고 싶은 영화." ytzsche.

 

 

한국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배우들이 이런 류의 영화를 찍은 건 얼마나 될까. 황정민과 전지현의 러브라인은 전혀

 

기대할 수 없으니 로맨스나 멜로도 아니고, 계속해서 비유가 가닿는 지점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해석하게 만드니

 

코미디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화의 현실성에 기댄 채 눈물을 짜내는 '휴먼 다큐'식의 신파도 아니다.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장르도 더더욱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순간에 잡아채이곤 그의 삶을 들여다보다간

 

함께 걷는 이야기랄까. 한국의 주류 영화마켓에서 이런 잔잔하고 대중적이지 않을 영화에 황정민이나 전지현같은

 

대형배우가 출현하다니. 그들의 영화 선구안과 용기(?)에 조금은 감탄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일종의 우화로 다가온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믿는 가슴따뜻한 바보들의 이야기는 많았다지만,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신파나 로맨스나 휴먼다큐의 유혹을 피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차근차근 동화속 세상으로 바꾸어나간다.

 

스스로를 슈퍼맨이라 믿는 황정민을 지천에 널린 또라이처럼 여기며 일회성 방송 소재로나 생각하던 전지현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그의 친구가 되어 그와 같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처럼,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세상의 모습이,

 

상식이 낯설게 바뀌는 거다. 계속해서 번갈아 보여주는 황정민의 날고 뛰고 악당과 싸우는 머릿속 슈퍼맨 이미지와

 

옆에서 보이는 누추하고 엉성한 뜀박질과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질, 어느 순간 어떤 게 진짜인지 알 수 없어졌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조금씩 잠식하던 슈퍼맨의 저력은 마지막에 폭발한다. 아이를 구하려 3층에서

 

날아올라 무사히 땅에 착지한 건지, 아니면 무거운 쌀포대가 추락하듯 툭, 땅에 널부러지고 만 건지 잠시동안

 

혼란에 빠지는 거다. 물론 이어지는 후일담은 그가 결국 죽었다는 빼도박도 못하는 현실을 명시하고 있다곤 해도,

 

차근차근 그의 이야기에 스며들었던 그녀처럼 나 역시 황정민이 비로소 클립토나이트로부터 해방되어 날아올랐어도

 

이상할 게 없겠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서 그가 '자기의 별로 돌아갔다'고 한 전지현 그녀의 대사처럼,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그는 정말로 대머리악당의 저주와 같은 클립토나이트로 초능력을 잃은 슈퍼맨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끝내 80년 5월의 광주까지 가닿는 욕심많은 영화라니. 어쩌면 이 영화는 우화나 감동 드라마인 척하며 힘을

 

빼고는 있지만 굉장히 정치적인, 실천적인 영화로 읽히는 게 온당할지 모른다. 광주를 짓밟은 계엄군의 총탄이

 

슈퍼맨을 일반인,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지구인'으로 만든 클립토나이트랜다. 그를 그렇게 만든 악당은 대머리고.

 

위기의 사고 현장이나 어려운 사람 앞에서 모두가 못 본 척 외면하거나 발만 구르고 무기력하게 손놓고 있을 때

 

'슈퍼맨임을 잊지 않은', 슈퍼맨이었다는 그가 먼저 한발 앞으로 나서는 거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물결이 봉쇄된

 

80년 광주의 상흔을 갖고 기억을 봉인한 한국사회가 무기력하고 무비판적으로 남아있음을 말하는 건 아닌지.

 

 

그렇게 읽는다면, 그런 맥락과 떨어뜨려 놓고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몇몇 영화속 대사들은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담게 되는 것 같다. 예컨대 이런 것들.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아예 잃어버려요. 그럼 내가 누군지 아예 까먹어버리죠. 악당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에요. 그래서 난 계속 사람들을 도우려 해요."

 

 

"(전지현이 잡고 있는 줄을 잡아당겨 그녀를 끌어당기며)가 이 줄을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거기 있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와 있어. 미래가 바뀐 거지. 남을 돕는다는 건 바로 이런 거야. 누군가의 미래를 바꾸는 것."

 

 

"커다란 쇠문을 여는 것은 힘이 아니라 조그만 열쇠이다. 우리 모두 열쇠를 하나씩 갖고 있다. 다른 미래의

문을 열 수 있는."

 

 

영화가 굳이 전지현의 남자친구를 몽골로 떼밀어놓은 채 이야기를 전개해서 황-전의 로맨스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해 버리는 거나, '지구가 더워지고 북극이 녹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지구인들(한국인들)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세세히 주목하는 거나, 황정민이 끝내 어릴 적 80년 광주에서의 자신에게로 돌아가 길잃은 흉탄을 막아내는 장면을

 

넣은 거나,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쯤되면 또렷해진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단순히 어느 마음이 힘들고

 

조금은 모자란 사람의 '포레스트 검프' 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고 파편화된 무기력한 대중으로부터

 

'클립토나이트'를 빼내고 다시금 모두를 당당한 슈퍼맨으로 각성시키고 싶은 영화.

 

 

애초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새삼 아쉽다.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와 삼성프린터

 

광고 속 이미지로 성공했지만 그로부터 벗어나는데 끝내 실패했다고만 여겼던-특히 헐리우드 진출작인 '블러드'를

 

시사회에서 보고 나서-전지현 그녀가 이런 영화도 찍었었다니, 하고 뒤늦게 감탄하고 말았다. 2008년작인 이 영화에서

 

그녀는 제법 연기자다운 결기를 보여준 거 같다. 하나도 꾸미거나 이뻐보이려 하지 않는 맨 얼굴의 모습들, 적당히

 

시크하면서도 삐뚤어진 성격을 잘 드러낸 연기, 그리고 너무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감정의 표현이랄까. 다만

 

목소리의 톤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다시보기'로 좋은 영화 하나 건졌다.

 

 

 

p.s. 전지현씨, 결혼 축하해요~* 앞으로 더 좋은 연기, 좋은 영화에서 많이 보여주시길.

 

(혹시 이 리뷰를 언제고 읽게 된다면 실명으로 댓글이라도 하나 남겨서 의견주시면 좋을 텐데요.ㅎㅎ)

 

 

 

 

 

 

 

대만에서도 8,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복고풍 영화가 유행인 걸까. '점프 아쉰'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만영화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 시절을 추억하려거나 이쁘게 분칠하려는 투는 아니다. 그 시절 태어나서 자라나 방황하고

 

사랑하고 턱없이 진지하다가 이내 웃음이 빵 터지는 그런 청춘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감독의 친형이 살았던

 

삶을 재구성한 실화라고 하니까 더욱 단단하고 거품없는 현실감이 느껴지는 거다.

 

 

영화는 제법 길다. 러닝타임이 두시간이 넘어가니 꽤나 긴 셈이다.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체조'를 소재로 한

 

영화라고만 알고 시사회를 갔는데, 영화 속에 체조도 있고 빗나간 청춘도 있고 남자들의 우정도 있었으며 부모와의

 

화해라거나 살짝 시큰한 사랑 이야기까지, 말하자면 일종의 갈라쇼 같은 영화이기도 했던 거다. '빌리 엘리어트'와

 

'비트'와 '친구' 같은 영화들이 각각 하나에 담았던 이야기가 노련하게 하나의 인물에, 하나의 이야기에 꿰여든다.

 

 

그런 영화는 허를 찌르는 반전이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영광의 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만 8,90년대의

 

풍경이나 정서가 살짝 오글거릴지언정 줄곧 따뜻한 시선으로 아쉰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가며 다음번 그의 스텝은

 

어디로 얼마나 '점프'하는 게 될지 바라보게 되는 거다. 예측했던 곳에 예측했던 멋진 동작으로 착지할 걸 기대하고,

 

실제로 그가 다소간의 우회나 방황을 거쳐 예측했던 곳으로 무사히, 멋지게 귀환하는 걸 보면 충분하니까.

 

 

자칫 산만하거나 늘어질 수도 있었을 곡절많은 스토리를 탄탄하게 한 호흡으로 꿰어낼 수 있었던 건, 영리하게도

 

감독이 남자의 감정을 적절한 선에서 끊어준 덕이 크지 않을까 싶다. 어머니와의 화해라거나 호출 교환원 그녀와의

 

애틋한 사랑, 비장미와 남성미가 물씬했던 불량 청소년들의 싸움과 비극, 심지어 그가 세계대회에서 멋지게 뜀틀을

 

딛고 몸을 휘돌아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영화는 먼저 눈물을 보이거나 유도하지 않는다.

 

 

그건, 표현의 진부함을 감수하고라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영화, '재미와 감동'을 모두 갖춘 이 영화가 남긴

 

명대사 하나로 충분히 수렴될 것 같다. "만약 울고 싶다면 물구나무서기를 해. 그럼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을 거야."

 

그 대사를 발판으로 아쉰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 멋진 도약을 성공시켰고, 감독은 이 영화를 여느 숱한 청춘영화와는

 

다른 차원으로 차별화하는데 성공한 거 아닐까.

 

 

 

 

 

 

 

 

두 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가 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한 네 개의 사랑이 있다.

 

 

#1. 첫번째 남자. 사랑이란 '상대'라는 책을 남김없이 읽고 이해하 것이라 믿는다.

 

우선 쥬드 로가 연기한 댄. 그는 자신이 매력있다는 걸 아는 남자다.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 자신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고 상대를 끌어내는 방법을 아는 사람. 그에게 포섭된 건 두 명의 여자였다. 먼저 그가 손에 넣고 싶다 생각한 건

 

앨리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발판삼아 만나게 된 안나. 두 명의 여자 사이를 진동하며 그는 자신의 소유욕을 한껏

 

채우려 든다. 맞다. 그의 사랑은 소유욕의 형태를 띈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관대하고 진실한 사랑을 과시하려 들면서

 

상대가 자신에게 완전히 무장해제한 채 앞에 설 것을 요구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마음 밑바닥까지 검열하고

 

타인의 흔적을 지우거나 공유하려 한다. 감내할 수 있을까. 그녀, 그리고 그가.

 

 

때로 그렇다. 끝내 견뎌내지 못할 '진실', '진심'을 알고 싶다며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채근하거나 옛 애인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보는 불퉁맞은 심술이 있다. 그게 심술을 넘어 내 안의 불안감과 결벽증으로 발전한다 싶을 때도 있다.

 

우리의 사랑이 아름답기 위해서, 완전하기 위해서는 마치 백퍼센트의 순금을 정련하듯 당신과 나의 마음 속에서 티끌과

 

부스러기들을 모두 쓸어내야 한다는 강박이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맹렬히 불붙었을 때,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쌍끌이 어선으로 샅샅이 긁듯이 읽어내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의 발현이기도 하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게 상대를 남김없이 알아야 한단 건 아닌데,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하는 무모한 짓을 벌이고 말았다.

 

 

 

#2. 두번째 남자. 사랑이란 적당한 스킬과 경험치로 쌓아올려진 섹스와 비슷한 것이라 믿는다.

 

클라이브 오웬의 래리. 그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남자다. 어떻게 해야 여자가 웃을지, 어떻게 해야 여자를

 

안심시킬 수 있을지, 그리하여 어떻게 해야 여자가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남자를 연기할 수 있는지 아는 남자다.

 

그렇게 댄으로부터 안나를 끝내 되찾아오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척,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척 하지만 정작 앨리스가 그녀의 본명을 말할 때조차 그 진심을 읽어내지 못한다. 사실 안나를

 

되찾아 온 것도, 안나의 마음을 읽어서라기보다는 같은 남자인 댄의 조바심을 읽고 상처를 예비했기에 가능했던 거니까.

 

 

아는 척 하는 남자. 선수인 척 하는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이 꽤나 있다. 연애를 많이 해봤다느니, 이럴 땐 이렇고

 

저럴 땐 저러면 된다는 식의 일반론들. 전부 시덥잖다. 래리가 그런 재기발랄한 몇 마디 말들로, 시의적절한 이벤트와

 

감동을 안길 수 있는 멘트로 상대의 마음을 얻었던 건 잠시뿐, 그조차 상대의 마음 깊은 곳은 미동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허랑한 지식이니 얕은 경험 따위를 양손에 쥐고 요리할 수 있는 상대란 없는 거다. 래리에게 부족했던 건 뭘까,

 

그는 여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려고 한 게 아니라 아는 척 연기했던 거 아닐까. 그가 집착하는 '섹스'를 위한 지름길이라

 

여기며 스스로 감탄할지 몰라도 그의 옆에 남은 여자, 안나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3. 첫번째 여자. 사랑이란 자칫 방심하면 자신이 다치는 불, 어느때고 꺼버릴 준비가 필요하다 믿는다.

 

나탈리 포트만, 그녀가 연기한 앨리스 혹은 제인. 그녀는 누굴까. 그녀는 댄을 진짜 사랑했을까, 래리도 사랑했던 걸까.

 

뭐 하나 쉽지 않다. 그녀의 이름. 왜 본명을 숨겼을까. 그저 순간의 장난이었을지도, 잊고 싶던 과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 잘 있어"라는 말로 상대가 더는 말도 못 붙이게 하고 떠나버린단 말. 어떻게 그렇게 모질 수 있을까.

 

그건 흔한 말로, 이전 사랑의 상처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그녀만의 사랑법일 뿐인지도 모른다. 댄에게 그녀가 이별을

 

선언할 때는 이 말을 덧붙였었다. '난 평생 널 사랑하려 했는데.' 진심일 수도 있었을 거고, 혹은 미안함의 발로였을 수도.

 

진심이라기엔 끝내 숨겼던 그녀의 본명이 걸리고 '진실'을 강요하는 댄의 익숙한 유치함을 참아주지 않은 게 걸린다.

 

 

문득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길 겁내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라도 한발 뒤로 뺄 구석은 남겨두고,

 

본명 뒤로, 사랑하지 않는단 야멸찬 선언 뒤로 숨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남자와 희롱하거나 댄과 이야기할 때의

 

그녀는 사랑을 비웃고 쿨한 척 굴지만, 그건 일종의 징후다. 그녀는 분명 사랑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 영리한 척 어리숙한

 

남자 둘보다 훨씬 더. 첫눈에 반한 사랑이 숙명이라며 안나와의 '바람'을 정당화하려는 댄에게 그녀가 한 말,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란 말의 노회함이라니. 그렇지만 정작 그녀야말로 사랑을 많이 아는 만큼 겁내게 되어버렸고, 끝내 뜨뜻하게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사랑만 취하고 떠나는 사람이 된 건 아닐까. 여전히 마음은 시리고 문득 눈물로 무너져내릴지언정.

 

 

 

#4. 두번째 여자. 사랑이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면 그뿐, 운명이라 믿는다.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안나. 그녀가 댄과 래리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을 보고 살짝 답답증이 일었던 것은, 대체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분명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댄에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꼈으며, 또한 래리에게서

 

또다른 매력과 호감을 느꼈다. 어떤 걸 사랑이고 어떤 건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약간은 도발적이고 위태로운

 

관계, 그리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로부터 비롯했을 뿐 두 가지 모두 사랑이라 하면.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사랑 중에서 무엇을 택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저 둘다 갖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데 혐의를 두는 게 낫겠다.

 

 

어쩌면 그녀는 앨리스(혹은 제인)와 정반대의 애정관을 가진 인물, 그녀에게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레

 

다가온 운명이며, 감히 먼저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운명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렇게 두 조각난 자신의 세계를

 

가까스로나마 보호할 수 있을 거다. 댄의 세계와 래리의 세계, 두 세계가 합쳐져야 그녀에게 완전하니까. 그 두 세계

 

어디에도 완전히 투신할 수 없는 그녀, 선택을 강요받는 지경에 이르러 댄이건 래리건 누군가의 옆에 머물게 되었지만

 

이미 그녀는 조각난 세계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                                                             *                                                           *

 

그래서, 두 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가 만들어낸 네 가지의 사랑이야기는 모두 비극이다. 그게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믿어지던, 혹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누군가를 향해 열었던 마음이었던, 결국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방식의 사랑을 쌓아올리다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사랑이 어디에 이르러 하트 모양의 공을 터치다운해야

 

비로소 성공하고 완성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모든 건 사랑에 빠지기로 '순간의 선택'을 하고 나서 '당신'이라는 거대한 블랙박스 앞에서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치를 살려서 그 드문드문한 신호들을 해독해 보려 애쓰면서부터 예정된 비극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웃음이, 당신의 손짓이 가진 알 수 없는 뉘앙스와 의미에 겁먹지 않고 내게 친숙하고 익숙한

 

것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는 대체로 오해와 균열을 낳고 만다.

 

 

사랑을 한다는 건 서로 완강히 뻐팅긴 채 멀어지려는 직선 두개를 잡아매두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한땀한땀, 두꺼운 무명실을 대바늘에 꿰어 직선 두개 허리춤에 둘둘 묶어서 촘촘하게 바싹 붙여두는 식이랄까나.

 

그건 시지프스의 신화에 비견될만큼 지난하고 고단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어쩌나.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면, 허리춤이 아니라 속고쟁이라도 잡고 늘어져야지.

 

 

왠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소라의 노래 가사 한 대목이 떠오른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바람이 분다, 2004)

 

네 명의 사랑 이야기가 비극적이란 점에서 이렇게도 한결같을 수 있구나, 싶어서일까. 또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싶어서일까. 또, 결국 Hello, Stranger로 시작한 영화가 Bye, Stranger로 끝나는 거 같아서일까.

 

 

영화는 짧았지만 생각이 한없이 늘어진다. 한번 보고, 다시 또 보고, 그러고 나서도 할 말이 정제되지 않아 이렇게

 

길어지다니. 영화의 여운도 여운이지만 노래 탓도 크다. 요새 잠들기 전 꼭 한번은 듣고 잠드는 노래.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would be
Life goes easy on m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shorter story
No love, no glory
No hero in her sky

당신이 말한 대로 되어 버렸죠.

대부분의 시간, 나는 인생을 편하게 받아 들이게 되었죠.

그건 아주 짧은 이야기죠.

사랑도 없고, 영광도 없고,

그녀의 하늘에는 영웅도 없는,

짧은 이야기..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should be
We'll both forget the breez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colder water
The blower's daughter
The pupil in denial

그래요.

당신이 말했던 것 처럼,

대부분의 시간에는

우리 둘 다 그 소문들은 잊어야 할 거예요.

그래요.

차가운 물.

허풍쟁이의 딸.

부정하는 눈동자..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Did I say that I loathe you?
Did I say that I want to
Leave it all behind?

당신이 싫다고, 내가 얘기 했었나요?

내가 말했었나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 버리고 싶다고..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My mind...my mind..
'Til I find somebody new

내 마음을 당신에게서 뗄 수가 없어요.

내 마음을..내 마음을..

새로운 누군가를 찾을 때 까지는요.

 

 

 

 

 

영화는 어떤 기술적 진보에 대한 '아티스트'의 반감과 편견이 끝내 녹아내리고 새롭게 진보한 '그릇'에 어울리는 형태의

 

'아트'를 다시 재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소리가 지워진 영화세트장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표정과 몸짓으로 연기하던 그가

 

먼 길을 돌아 다시금 모두들 소리를 죽인 영화세트장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그가 발굴하고 영감을 건넸던 젊은

 

여배우와 경쾌하게 탭댄스를 추는 장면에서 구둣발을 어찌나 감각적으로 타닥탁탁 거리던지. 타닥탁탁.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구둣발이 내는 소리를 살려내면서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더욱 넓혀내는데 일조한 셈이다.

 

 

어쩌면 영화는, 2011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인 이 영화는, 영화에 꼭 '소리'가 필요한지에 대해 새삼스레 확인해 보고,

 

영화 속 세계에 당연하게 포함된다고 생각했던 '소리'를 어떻게 해야 인상적으로, 인습적이지 않게 재발견할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소리의 힘을 빌지 않고 표정과 몸짓과 최소한의 대사 텍스트로

 

스토리를 진행해 가다가 문득, 남자를 괴롭히거나 희롱하다가 결국엔 화해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릴 때마다 사운드가

 

지닌 나름의 강력한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 거다. (그보다 무성영화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더욱 감탄했지만.)

 

 

영화에선 크게 두개의 갈등이 노정되고 있는 듯 하다. 새로운 기술적 발전과 그 결과물에 대한 시선의 문제에 더해,

 

'세단 지나간다니 똥차 빼주자'는 세대간의 문제랄까. 기술 혁신과 그로 인한 변화의 가능성이란 건, 반기는 사람에겐

 

세상이 확 바뀌고 나아지리라는 열광을, 시큰둥한 사람에겐 조잡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생겼다는 기피감과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사진기술이 개발되거나 영화가 발명되거나, 영화에 소리가 들어가거나 혹은 3D기술이

 

생기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이 생기거나 따위에 대한 찬반. 그건 대체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경계와 겹치곤 한다.

 

 

그렇지만 그건 '아티스트'에서 보여주듯, 어쩌면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에서부터 웅변하듯, 그러한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요소'에 비기면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인 거다. 기술 발전이 어떠한 방향으로 얼마나 혁신적인 가능성을

 

확장시킬지라도, 혹은 그것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식의 디그레이드가 될 여지가 크다 할지라도, 그걸 활용하고

 

가능성을 구현하고 제 몸에 맞는 옷으로 적응시키는 건 결국 인간. 그런 작업에 요하는 창의성과 창조성을 감안한다면

 

일종의 예술이라 해도 무방할 테니 결국 쉼없는 기술혁신기에 처한 인간은 모두 아티스트인지 모른다. 마치 그가

 

그녀와 함께 유성영화 속에서 구둣발을 타닥탁탁 하며, 목소리 대신 새로운 사운드를 들려주듯이.

 

 

그러거나 저러거나, 오랜만에 보는 무성영화-최근에 봤던 무성영화는 어느 따뜻한 나라로 떠나던 외국의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찰리채플린의 클래식이었다-는 역시나 물기를 함뿍 머금은 듯 부드럽고 촉촉한 화면의 느낌이라거나, 동작 하나

 

표정 하나 사려깊게 배치된 섬세한 세공이라거나, 그리고 무엇보다 자칫 자극적이고 번다하기 쉬운 소리의 쓰임없이도

 

보는 사람을 흡인하고 이야기의 끝까지 함께 달려가게 만드는 그 힘 같은 것들에 다시금 매혹되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2011년에 만들어진 새삼스러운 무성영화, '아티스트'를 찾아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어느 순간까지는, 사랑하던 남녀의 이별, 갑작스레 '차인' 상황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녀, 빵빵하게 부풀었던 질긴 풍선처럼 자신의 세상 구석구석까지 채웠던 그녀가

 

남기고 간 결핍감, 공허감,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현실부정의 몸부림까지. 대체 왜 사라져버린 건지 감도 잡지 못한채

 

그저 몇몇 단서로 더듬거리듯 추측이나 해볼 뿐인 상황에서 남자는 때로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비통함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라져버린 여자에 대한 광기어린 분노와 질투, 증오를 폭발시키던 거다.

 

 

살아가면서 맺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란 게 고작 핸드폰 번호 하나, 이메일 주소 하나 만으로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를 떠난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참 쉬운 건지도 모른다. 전화를 꺼버리고 이메일 계정을 삭제한 채

 

커다란 알사탕에 바글바글 꼬여있는 개미떼같은 인간들 틈속으로 슬쩍 스며들면 그뿐이니까. 그렇지만 급속도로 불어난

 

인류의 비대해진 몸집을 전혀 따라잡지 못한 인류의 마음이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남자는 칼처럼 자신을 끊어버리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만 여자를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이제 그녀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어떻게 웃었으며 말할 때 버릇이 뭐였는지, 자신이 알던 그녀가 그녀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믿기지 않는, 도무지 현실같지 않은 현실에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온기를 찾는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잠시일지언정

 

함께 누웠고, 웃었으며, 꿈이 아닌 '레알'로 존재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 뿐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시간과 기억을

 

배반하고 부정하지 않으려는 그 숭고한 의지는 대개의 경우 상대의 싸이나 카톡 사진을 들춰보는 걸로, 술에 취한

 

새벽 두시쯤 전화 한번 해보거나 여차하면 집앞에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로 귀결되기 마련이지만, 영화 속

 

남자는 여자의 뒤를 쫓으며 예기치 않은 어둠의 장막을 들춰보게 된다. 계획된 살인과 본격적인 정체성의 은폐공작.

 

 

스릴러가 풀려가는 방식보다 더욱 재미있었던 건, 그 모든 걸 일종의 메타포로 읽어내렸을 때 남자의 반응이었다.

 

남자는 왜 여자의 뒤를 기를 쓰고 쫓으려 했을까. 남자는 왜 여자의 옛 남편까지 만나보려 했을까. 남자는 대체 왜,

 

기어이 여자를 만나고 껴안고 다시 놓아줬을까. 자신이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랑의 순간들이 그녀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부질없는 조각들로 무화되는 걸 막아내려 필사적이었고, 그렇게 지켜낸 사랑의 이야기(서사)에 나름의 소망이 담긴

 

엔딩을 그려보려 하는 안간힘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는 그녀가 시든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낙화하는 그 순간을 막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내달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던 건, 그녀가 끝내 살아남는 것. 자신과 함께 했던 순간들, 마지막으로 마주서서 끌어안았던 순간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은 채 그래도 한조각 가슴에 품고 살아갈 만한 진심을 건네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대 잡히지 말고

 

어디서던 무슨 이름으로 어떤 얼굴로 누구로 살아가던 간에 꼭 살아남기를 바랬던 건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가 했던

 

사랑을 지켜내기를,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랬던 게 남자의 깊숙한 속내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여자의 선택은, 코너에까지 몰려버렸다고는 해도, 그의 기대와 소망을 다시금 흔들어버린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그녀가 함께 했던 시간동안의 '사랑'에 대한 남김없는 배신일지도 모르겠다.

 

 

 


"강릉을 넘어 현실에까지 범람한 그와 그녀의 사랑. 그들의 로맨스는, 그들의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ytzsche.



강릉과 非강릉, 영화와 현실의 공간.

강릉은 그런 곳이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파랗기만 한 바다에 연한 이 자그마한 소도시는, 외지에서 들고 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나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곳이다. 특히 여름에 바다를 찾는 향락객들에게는, 강릉이란 극중 민아의 자조섞인

표현처럼 일종의 '피서지용 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필요할 때 찾아와선 며칠 후엔 훌쩍 내버리는.


영화사 조대표도 잔뜩 지친 채 그렇게 불쑥 강릉으로 향한다. 딱히 일정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그저 바다를 보겠다

떠난 길이었으니 그에게 강릉은 일종의 비현실이었다. 그리고 투숙한 호텔에서 20년전 강릉에서 만나 하룻밤을 지냈던

민박집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그녀, 민아를 만나 함께하며 강릉은 20년만에 로맨스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느 연인들처럼, 그와 그녀 역시 스치는 손길 하나에, 미묘한 뉘앙스를 흠뻑 적신 단어 하나에, 그렇게 감정이 부풀어오른다.

그건 그가 호텔 로비에서 만나는 남자 맛사지사와 여성고객의 흥정 따위를 모두 성적인 의미를 함뿍 담아 읽어내린다거나,

그녀 역시 그를 조심스레 만지려 들며 그를 욕망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자연스러운 거다.



강릉에서의 로맨스, 강릉에서만 가능한 로맨스.

문제는 그들이-그의 생각대로라면-부녀간일 수도 있다는 것. 그는 드문드문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감정을 벌여놓는다. 그건 그가 강릉이란 곳을 대하던 태도에서 비롯할지 모른다. 여긴 '피서지'니까,

현실과는 다른, 영화 속과 같은 허구의 공간. 현실의 문법과 규율이 깨지는 그런 비현실의 공간. 이미 그는 20년전에도 그랬었다.


어쩌면 그녀도 그와의 사랑이 순간의 불장난이라거나, 두시간여만에 크레딧이 올라가며 끝나버릴 영화같은 기억으로 끝날 거라

지레 겁먹고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아픈 상처를 갖고 있던, 그리고 아마 그런 아픈 상처의 결과로 태어난 그녀다.

혹은 그녀는 아직 어려서, 깨질지언정 한번 그와의 이야기 마지막 페이지를 보겠다는 당돌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는 같다.


그와 그녀는 줄곧 손에 소니 핸드캠과 라이카 카메라를 쥐고 다닌다. 경포에서 주문진을 돌아다니는 길에, 그들은 쉼없이

서로의 이미지를 기록하고 저장한다. 일층에 미용실이 있는 이층 양옥집에 대한 엇갈린 기억이라거나, 새로 찍으려 하는

영화에 대한 즉흥적이고 암시적인 이야기들이라거나, 그러는 그들은 분명 그 예술적인 세계의 감독이나 배우처럼 굴고 있었다.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로맨스의 물결.

그녀가 그에게 먼저 고백한 때, 그는 그 직전 분명 그 타이밍에 마음을 전하려 결심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도망갔을까.

왜 강릉을 벗어나 자신이 속한 거대한 도시 서울로 한달음에 되돌아왔을까. 그녀의 고백에 퍼뜩 놀라 겁먹은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게 '로맨스'로서 어울리는 짧고 아름다운 결말이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울에 돌아와 안심했을까.


아마 그는 굉장히 찝찝하고 부끄럽고 지쳐버린 채 돌아왔을 거다. 어디선가 내 아이가 나도 모르게 자랐다는 상상, 그리고

그 아이에게 '핏줄이 당기는 것'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상상이 허용되던 다소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불쑥

냉혹하고 단정한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그리고 20년이 지나도 똑같이 그 공간에서 도망나와 문제를 피해버렸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영화같다'고 표현하는 식이라면, 여기서 그의 이야기 한토막은 크레딧을 올리며 끝내야 하는 타이밍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영화는 끝이 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해주는 데서

폭발하는 거다. 강릉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었던 그들의 영화같은 사랑이 비로소 그 속박을 끊고 현실까지 넘쳐들어오는 순간.


로맨스와 현실의 혼재, '강릉'이란 알리바이가 필요치 않은 사랑.

물론 대책없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녀는 그의 딸인 게 분명해지고,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의 나이차는 스무살.

그들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지,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물과 기름같이 겉돌던 로맨스와 현실을 비로소 뒤섞을 수 있게 되었다. 강릉과 非강릉의 벽을 넘어서.


어쩌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아닐까. 로맨스는 로맨스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생각하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영화에선

그게 '강릉 vs 非강릉'의 공간으로 표현되었다면,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거나, 연애 초 콩깍지와 리얼한 실재모습은 다르다는

식으로, 결혼 전과 후가 다르단 식으로 칸막이를 세워 놓고는 '(짧아서 아름다운) 로맨스 vs 현실'의 구도를 만들곤 한다.


아닐 수도 있을 거라 믿는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도 않고, 로맨스의 마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만치

뭐 하나 뚜렷하게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건 확실하다. 우리의 로맨스는, 우리의 영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다음 장면으로 함께 넘어갈 수 있는 한 끝나지 않는다. 그게 아마도 백년후에 크레딧을 올리는 비법.


각자 만들어가는 영화의,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라면. 배우와 감독이라면.



"미워할 수 없는 악인 캐릭터, 아니 차라리 그는 현대 도시에 뜬금없이 내던져진 정글소년 아니었을까." ytzsche.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그렇지만 그렇게 앞뒤 동강난 짧은 망상에 이야기가 붙어선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세상과 유리된 채 필요에 따라 조금 한숟가락 얹을 뿐인 초능력자. 일신에 품고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에 비해 참 단촐하고

소박하다 싶을 정도로 존재감없이 살고 있단 게 말이 되나 싶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그의

비극적 운명을 헤아려보면 등장부터 연민이 울컥 치미는 캐릭터인 거다.


초능력. 일반인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때 우린 초능력을 지닌 자, 초능력자라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분명 일반의 수준에선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초능력임에

분명하지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본인은 그로 인해 부모의 보살핌을 잃었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으며, 변변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막막한 도시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던 거다. 배트맨에 나오는 악역 펭귄맨 같기도 하고, 혹은

어쩌면 현대 도시에 나타난 '정글소년 모글리'같은 캐릭터인지 모른다.


분명 '정글소년 모글리'를 연상시킨 이유의 팔할은 강동원의 덕이다. 작고 갸냘픈 체구에, 상처받은 눈빛을 불안하게

흔드는 그의 표정이나 움직임은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한채 줄곧 바깥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이방인의 그것 같다.

사실 그는 자신의 특수한 능력 때문에 사회화될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 내에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근근이

전당포나 털어가며 살았던 거다. 그에 비하면 무작정 그를 뒤쫓는 고수의 캐릭터는 그래도 준수한 삶을 살고 있달까.

그에겐 피부색이 다른-그렇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친구도 여럿 있고, 허름하나마 직장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강동원이 연기한 이 매력적인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영화가 후줄근해진다고 느끼는 건,

전적으로 그의 탓이다. 그가 왜 그토록 강동원을 잡는데 집착하는지, 그가 다른 이들에게 보였던 연민과 따뜻함이

강동원에 이입될 수는 없었던 건지, 그리고 심지어 강동원을 잡아서 뭘 어쩔 건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단서도,

설득력도 없어 보인다. 둘의 조우가 반복될수록 고수가 왜 강동원을 쫓는지, 왜 그의 분노게이지는 떨어질 줄

모르고 무작정 상승하기만 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 거다.


차라리 강동원이 조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그의 능력으로 확실히 고수를 종결짓지 않고 불씨를 남겨두는 건

이해가 간다. 여태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않고 제대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을 그에게, 비록 맹렬한 분노일지언정

본인의 존재를 그토록 크게 인식하고 반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쾌감이자 행복, 혹은

그에 가까운 감정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둘만의 생존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승패 여부에 관계없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한껏 뿜어내며 고수와 대적해 나가는 거다.


가끔 그런 해외토픽 기사가 뜨곤 한다. 무성한 밀림에서 홀로 자라난 어린 아이가 문득 발견되어 도시로

이송되어서는 병원 치료도 받고 교육도 받는다는 기사 말이다. 강동원이 그렇듯 문득 도시로 떠밀려온

정글소년과 같다면, 그는 초능력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장애자',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고 해외토픽의 짧막한 후속보도가 그렇듯, 그렇게 사회로부터 떨어져 살며 사회화의 기회를 놓치고 만

사람들은 대개 죽어버리고 만다. 강동원이 그랬듯.









"아버지를 그리는 아버지의 영화, 하드보일드 버전의 '아름다운 인생'이랄까". ytzsche.


비우티풀Biutiful. 영어로 '뷰티풀'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는 딸에게 그가 알려주는 알파벳이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했으며, 떳떳한 일자리나 제대로 된 가정환경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아빠지만,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거다.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은 아니어도, 최소한 영어 단어 하나쯤은 주저없이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던 거다.


그의 삶은 '비우티풀'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경제 위기로 흉흉한 스페인,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들의 일당을 나눠갖는 게 그의 소득이다. 갈취, 혹은 등쳐먹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경찰의 단속을 막기 위해

뇌물을 먹이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렇게 그는, 스페인과 불법체류자 양쪽으로부터 멸시받고 혐오받는 사람이지만,

그런 멸시와 혐오의 대가로 근근히 이어지는 그의 삶은 초라하고 구질구질하기만 하다. 게다가 몇개월의 시한부 선고까지.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 앞에서 잔뜩 흔들려버린 그는, 전혀 떠날 생각이 없다. 아무리 영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엄마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아내와 두 조그마한 아이들 앞에서,

훌쩍 떠나갈 수는 없었을 거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도 아이들에게 아무 기억도 남기지 못한 채, 고작해야

몇달치 집세와 함께 가난만 남겨놓고 떠나가게 될 거란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젊은 나이에 스페인을 떠나 외국으로 일하러 떠났던 아버지는,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늘 그리워한다. 그가 자신의 파탄나버린 결혼생활과 위기에 처한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려 애쓰는 거나, 먼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는 건 모두

그의 아버지에 대한 결락감과 그리움에서 비롯했는지 모른다.


포르말린에 잔뜩 절어 미이라가 되어버린 젊은 아버지의 시신, 이장을 위해 열린 무덤 속에서 드러난 아버지 미이라의

얼굴을 한참동안 매만지는 그, 마치 아버지의 영혼과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 같다. 그렇다. 그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 그렇지만 영화는 이때 그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삶에 응어리나 원망이 남아 떠나지 못한 영혼과의 대화만 가능한 것.


아버지 미이라와의 조우 이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구질구질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과 불안감에

떠밀린 무리수는 그를 나락으로 몰아간다. 조울증으로 고생하는 아내와의 재결합 시도,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무리한 건설현장 일용직 투입..어느 것 하나 끝이 좋지 못했고, 그는 다시 아이 둘과 함께 하는 싱글파더로, 사고로

몰살당한 수십구의 시체 틈바구니에서 옴쭉달싹 못하고 돌아와버렸다.


그렇게 그는 한발한발, 죽음으로 다가간다. 그의 삶은 전혀 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불어 그의 아이들 역시 그가

아버지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다. 결국 죽음이 눈앞에 닥쳤고, 형편없이

너덜너덜해진 육체를 겨우 가누며 그는 죽음 직전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수십구의 중국인 영혼에게 고통받는다. 그건 그의

특수한 능력이 발현된 건지, 아니면 그저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의 발현이나 삶의 무게 그자체의 메타포었는지도 모른다.


죽음. 죽기 전 그는 딸애에게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며 자신을 잊지 말 것을 약속받는다.

아이들이 따르게 된 사람에게 뒤를 부탁한다. 비록, 딸애가 언젠가 그 다이아몬드가 가짜라며 내팽개치고 그의 기억 역시

내팽개칠지 모르지만. 그리고 비록, 아이들을 부탁한 이주노동자 그녀가 돈뭉치를 들고 언제든 튈 수 있고 실제로도

한번 시도했었지만. 그정도의 흐릿하고도 갸냘픈 희망뿐이라지만, 그게 그가 죽기 전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희망.


아마 그는 그의 아버지 미이라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던 거다. 영화의 도입 장면에서 나타났던 그보다 훨씬 젊고

민활해 보이던 청년은, 이제 그가 그의 아버지란 사실을 알게 된 관객들 눈앞으로 영화 마지막, 그의 죽음 이후에 다시

나타난다. 잠깐의 어색함과 긴장감 이후에 둘이 나누는 눈빛, 흘려내는 웃음소리. 비로소 그는 아버지와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거다. 아마도 그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 아닐까.


어쩌면 그는 아버지를 그리던 한 생을 가장 아름답게 마감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신이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았던 삶 역시, 그 신산함과 누추함에도 불구하고, 그 낙관하기 쉽지 않은 자잘한 희망부스러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던 거다. 비우티풀. 그가 그의 아이에게 가르쳤던 대로, 비우티풀.





사람의 사고능력을 제한하는 건 뭘까. 돈일까, 명예 혹은 자존심일까. 어떤 게 더 강력할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살인사건에 대한 조각난 팩트들이 몇 개 널려있고,

그 팩트들을 어떻게 꿰어서 어떤 시나리오를 만들어낼지,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 할지는 자신의 입장이나

분노 유발조건들이 좌우하는 건 아닐까 싶었던 거다.


살인사건이 있었고, 검사(박희순) 측은 피살자의 남편(장혁)을 범인으로 확신한다. 그건 박희순과 장혁 간

이전에 얽힌 악연과 상처받은 자존심에서 출발한 건지도 모른다. 한편 변호사(하정우) 측은 장혁을 범인으로

모는 검사에 대항해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시나리오를 정밀하게 만들어간다. 그리고, 명예 혹은 자존심으로

눈먼 검사와는 달리, 변호사는 피고와의 계약관계로 구속받고 있다. 돈으로 얽혀버렸다.


그리고 '국민배심원'들도 있다. 최근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그들

역시 전문성이나 객관적이고 엄정한 판단력보다는 감정과 드라마틱한 연출에 영향받는 대중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되는 것 같다. 그들 역시 각자의 선험적인 가치관이나 입장에 따라 주어지는 파편들을 꿰고 있을 거다.


결국 누가 틀렸는지, 누구의 추리와 시나리오가 더 왜곡되어 있었는지를 보게 되는 게 이 영화의 최종장이다.

그 과정을 얼마나 스릴있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는지, 라는 점에서라면 정말 기대 이상으로 멋진 영화였다는

생각이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그 호흡마저 흐트러뜨리던 반전과 긴박감에 가장 가까웠던 한국 영화 아닐까.


다만, 마지막에 굳이 그렇게 착하고 자상한 사족이 붙었어야 했을지가 좀 아쉽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느꼈을,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며 술술 '권선징악'의 급마무리로 돌진하는 엔딩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지 않았을까. 그냥 범인의 악마성을 드러내거나 폭발시키는 순간으로 열어두는 건 어땠을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는 여전했다. 미세한 감정의 떨림, 격랑을 그대로 애니메이션 안의 풍경으로 떠올리는

그 섬세하고도 정교한 이미지라거나, 두말할 것 없는 음악, 무엇보다 문득 말려들어간 위기상황에서 흔들리는

세계를 부여잡고 어느새 훌쩍 커버리는 아이들의 대견하고도 안쓰러운, 그리고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 역시.


특히, 고작해야 고등학생인 그녀가 어머니에게, 좋아하는 선배가 생겼는데 알고 보니 그 선배의 아빠가

우리 아빠랑 같은 사람이에요? 라고 묻고는 그 대답에 끝내 허물어지며 눈물 터뜨리는 장면의 임팩트란.

불쑥 낯설어진 아빠와, 선배와, 그녀 자신의 세계를 어쩌지 못하고 그저 버텨낼 뿐이다가 무너지는 순간.


영화는 시간이 흘렀다 하여 변해서는 안 되는 것들, 간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침마다

깃발을 끌어올리는 그녀의 습관이라거나, 아빠엄마에 대한 신뢰 혹은 사랑이라거나, 첫사랑 선배에 어쩔 수없이

끌리는 마음이라거나, 그리고 '도시 미화'가 진행중인 와중에 동아리 건물을 지키겠다는 학생들의 의지같은.


아쉽게도 중간중간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 있었다. 그녀의 큰 갈등 요인이 되는 '출생의 비밀' 비스무레한 상황은

한국적인 상황에선 너무도 자주 써먹어버린 대표적 '막장 전개'의 소재인 거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한국의

막장 드라마의 뻔한 레퍼토리를 사전에 숙지하진 않았을 테니 그쪽을 탓하긴 어려울 거 같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지브리 스튜디오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그녀와 그 역시 영화가 끝날 때쯤엔 잔뜩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그들의 앞길이 모쪼록 행복하기를 바라게 되는 거다. 처음 등장할 때는 그저

바르고 착한 아이일 뿐이라 생각했던 그들이, 조금씩 눈매가 깊어지고 인생의 비밀이랄까 가치를 고민하며

진정으로 어른스러워지는 걸 고작 100분도 안 되는 영화 한 편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 건 축복같은 일이다.




'에일리언 비키니', 미모의 여자 외계인이 지구에 들어와 하룻밤새 원하는 정자를 얻어 임신을 해야 하는데,

막상 마주친 사람은 서른네살까지 연애 한번 못해본 혼전순결주의자에 숫총각인지라 그를 유혹하고 얼르고

고문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는 게 이 영화를 보기 전 마주했던 몇몇 시놉시스들의 대략적인 얼개.

시놉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고 신선하다 싶어 꼭 봐야겠다 싶던 영화였다.


굉장히 가볍고 발랄한 구성, 거침없는 표현과 상상력이 뭉게뭉게 피어나는데다가 배우들의 천연덕스런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무엇보다 결정적인 세팅은, 말하자면 '발정난 여자'와 순결을 지킨다며

'거절하는 남자'라는 전복적인 상황 그자체였다. 외계인이니 뭐니 장식된 설정들을 떼어내고 보면 결국 당장

남자의 몸을 바라는 여자가 남자를 달래고 얼르고 유혹하고 만지고 물고 빨고 심지어 때리는 상황.


마사지와 카마수트라, 최음제와 밧줄까지 동원되는 그녀의 '정자를 얻기 위한' 몸부림은, 여러 가지 장면과

자연스레 연결됐다. 여자는 그저 일종의 '정액받이'나 살아있는 공기인형처럼 다뤄지며 남자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나오는 온갖 포르노들, 그리고 포르노만큼이나 말초적이고 일방향적인

성희롱, 성폭력들과 돼지발정제니 최음제니 온갖 도구들. 그렇게 여자를 대하고 돈주고 사면서도 동시에

순결 이데올로기와 정조 관념 따위를 주입하려 드는.


그런 남자들의 거침없는 판타지와 본능이라 당연시되는 욕망이 영화속에서 여자의 것으로 표출되며 남성이

대상화되는, 그런 낯설고 미묘한 상황이 재미있으면서도 불편하고, 또 오히려 더욱 적나라하기도 했던

거 같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저 멍청한 남자녀석 같으니, 라는 울림이 쉼없이 울렸단 것도 사실이지만.


음. 스토리로 뽑아낼 부분은 그 정도란 게 맞을 듯 하다. 그 앞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그러니까 남자의

과거사라거나 외계인과 그 사이의 섹스 이후에 지구에 벌어진 일들 따위-은 애초 그렇게 남녀의 스타일이

역전된 상황에 덧씌워진 액자틀과도 비슷한 거 아닐까 싶어서다. 액자 속 그림과 액자틀 자체의 디자인이

잘 어울릴 수도, 혹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고 섞이지 못한다 싶을 수도 있지만 그건 부수적인 이야기일 듯.

아니, 부수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딱히 스토리라인에 편입되지 않는 이미지나 뚝뚝 끊어진 단상같은

거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만들고 싶진 않아서 그닥 별 의욕없이 만들어낸 기승전결의

허울을 위한 이야기랄까, 이야기가 딱히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하나의 반짝거리는

메타포-남녀의 성에 대한 관념과 행태가 뒤바뀐-를 공들여 세공하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싶다. 지구가 멸망해버리는 그 시니컬하고 터무니없는 새드 엔딩은 그래서 굉장히 맘에 들었다.



* 그런데 왜 이리 이 영화를 개봉하는 영화관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며, 막상 찾아서 들어가보면

이렇게 사람들이 적은 거냔 말이다. 아쉽고 아쉬웠던.




영화, 참 쉽게 만들었구나 싶은 게 첫 소감.


요새 3D가 트렌드라니까 한번 오토바이 경주씬이나 괴물이 육박하는, 쪼끔 맛보여줄만한 장면 좀 넣어주고,

여름 휴가 혹은 방학을 맞이한 관객들 많을 테니 일단 안전하게 '액션 블록버스터' 간판 내걸어주고,

한국에서 좀체 안 된다던 SF 크리쳐 영화장르를 '괴물'이 깼으니 비슷한 수준에서 괴물 하나 빚어내고,

그리고 빵빵한 투자사와 배급사 확보해서 온동네 영화관 다 확보해냈으니 훨씬 유리한 출발선에 선 데다가,

마지막으로 개봉 일자나 개봉 과정에서의 막판 작업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노이즈마케팅까지.

아, 게다가 뻔뻔스럽게도 마지막에 슬쩍 우겨넣은 뜬금없는 7광구에 대한 '민족주의 마케팅'..역겹더라.


뭐 다 좋다. 이야기의 개연성이고 흡인력있는 전개고 나발이고 간에, 아마도 이 영화가 따르고 싶었던 듯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간지나는 껍데기만 따르고 싶었다 치더라도, 재미는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봉준호의 '괴물' 때보다 발전한 CG기술이라도 현란하게 과시하던가, 뭐라도 스케일크게

뻥뻥 터뜨리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지원이 인상쓰고 뛰어다니는 것 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렸을 적 봤던

'에일리언1'의 시고니 위버가 보여줬던 연기나 그 영화 자체의 아우라와는 전혀 비교조차 불가한 수준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 영화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실수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괘씸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어 굳이 영화평을 적는 것. 비슷하게 생긴 괴물딱지가 나오는 것 빼고는

봉준호의 '괴물'이 도달했던 해석의 다양성이나 세상에 대한 은유 같은 깊이보다는 그저 이런 괴물 한번

만들어내서 뛰어다니게 할 수 있어, 를 과시하는데 그치는 '디워', 혹은 '용가리' 쪽에 가까운 얼개와 스토리다.

애초 그런 수준의 영화라고 딱 깨고 이야기를 했으면 괘씸하지나 않지, 무섭지도 긴장감 돋지도 독특하지도

않은 괴물이 뛰어다니는 걸 보며 뭔가 크게 낚였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나마 3D로 보지 않은 게 다행.


이런 영화, '피할 수 없는 놈과의 사투'가 시작된 게 아니니까 엔간하면 피해가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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