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픽사애니 '업'의 인트로를 좀더 디테일하게 풀어놓은 느낌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이들이 만나 사랑하고 살아가고 또 이별한다. 이렇게 삶이 피고 지는구나, 라는 짧은 탄식 속에 진하게 졸여진 감정을 표현하기엔 단어가 모자란다. 슬프다기엔 아름답고, 아름답다기엔 애잔하다.
아름답지도 않고 완벽하지도 않다. 가진 것도 없고 딱히 야심이나 욕망을 품지도 않았다. 절름발이 무능력녀와 생선잡이 괴팍남의 첫만남은 그래서 좀더 잿빛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단지 어디로던 탈출하고 싶었던 여자의 니즈와 가정부가 필요했던 남자의 니즈가 가까스로 합을 이루었던 위태롭고 앙상한 조합.
말 잘 들으라며 따귀를 맞던 여자가 어느 순간 남자가 끄는 손수레 뒤를 절룩거리며 따라다니고, 또 어느 순간 손수레 위에 앉아 같은 풍경을 보기도 하고 서로 얼굴을 맞대기도 한다. 여자는 이제 남자의 주먹구구식 밥벌이에도 개입해 훨씬 정연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고 있다. 마치 그의 돼지우리같던 오두막이 변신한 것처럼.
그녀의 그림이 없었어도 그와 그녀의 삶은 그만큼 아름다웠을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창문 프레임 바깥 풍경과 같은 것을 그가 보지 못한다 해도, 그래서 '고작' 난 당신-내 아내-만 본다며 서툰 경상도 남자같은 고백으로 평생을 버텨냈다 해도,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속엔 이미 그가 가득했으므로.
1948년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고전. 이토록 강력한 영화라니. 충격과 반전의 후반부는 말그대로 입을 떡 벌리게 만들었고, 인간과 삶에 대한 김기덕 류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폭발이 아니라 세련되고 담백한 표현만으로도 그정도 성취에 이를 수 있음을 웅변한다.
2차대전후 피폐해진 이탈리아, 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 가족이 바라보는 건 아버지뿐이지만 그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수많은 경쟁자를 뚫고 직업소개소에서 용케 소개받은 일자리는 자전거가 꼭 있어야 일할 수 있다는데 정작 전당포에 팔아먹은지 오래. 침대보와 베갯잇을 다시 전당포에 잡히고 자전거를 꺼내오는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돈을 벌기 시작한다.
그에게, 아니 그의 가족에게 자전거는 당장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유일무이한 수단인 셈이다. 그런 자전거를 도둑맞고서 그가 느꼈을 암담함과 좌절감은 얼마나 깊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은 러닝타임 내내 계속되는 자전거와 자전거 도둑에 대한 추적이 줄곧 무위로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짜증과 답답함으로 변질될 지경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경찰, 나몰라라 하는 주변인들, 증거내놓으라며 뻗대는 관련자들.
그러게 왜 자전거를 잃어버리고 그러냐. 같이 돌아다니는 꼬맹이 아들은 무슨 잘못인데 왜 화풀이하고 그러냐. 겨우 도둑에게까지 가닿았다 싶은데 무기력하게 빈손으로 되돌아설 때쯤에는 애꿎은 화살이 급기야 피해자인 남자에게 쏠리고 말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전개. 사실 충격이라기엔 사람 심리가 그런 거 아니겠나 싶기도 하다. 날벼락같은 피해를 입었고, 누구도 내게 도움을 주지 않고 관심도 없다면, 어쩌겠는가. 도둑맞은 이가 도둑이 될 수 밖에. 사진이 바로 그 갈등의 순간.
그리고 한번 더 인상적인 반전이 등장한다. 순식간에 잡혀버린 그는 아이 앞에서 따귀를 맞고 다구리를 당하지만, 잡힌 도둑 앞에서, 다시금 안전하게 수중에 들어온 자전거 앞에서, 이번 피해자는 관대함을 과시한다. 경찰서로 끌고 가는 대신 그냥 아이와 함께 보내주겠다며 풀어주는 것.
그의 흔들리는 눈빛과 망연자실한 표정이라니. 사방으로 휘적대는 눈빛은 어딘가 목을 매달 곳, 죽어버릴 곳을 찾는 것만 같다. 칼날 위에 선 듯 위태로운 파국을 맞을 것만 같은 긴장감이 팽팽한 순간, 아이가 내미는 손을 잡고 비척거리며 집으로 향하는 뒷모습. 아, 이게 사는 건가, 싶은.
소수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장악한 '보여줄 권리'에 넷플릭스가 참신하게 덤벼들며 꺼내든 무기..란 측면에서, 역시나 잘 만든 오락영화가 답이었으리란 생각. 전연령이 시청이 가능하고, 특정 마켓에 한정된 소재나 장르가 아니며, 소녀와 반려동물의 이야기는 유니버설하게 먹힐 수 있는 원형과도 같은 소재랄까나. '잘 만든 오락영화'란 건 그 본령이 엔터테이닝에 있으되 이것저것 슬쩍 얹어낸 양념과 고명이 과하지도 앙상하지도 않았을 때 가능한 표현인 것 같다.
공장형 대량축산, 유전자조작식품, 먹거리를 둘러싼 신념과 현실 간의 낙차, 글로벌 종자기업들의 패권성, 육식 자체의 도덕성 등등 다채롭게 읽힐 수 있는 힌트들은 무성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그런 부분에 집중하는 건 아닌 거 같단 이야기. 조금 도발적으로는 그저 영악하게 잘 갖다쓴 소란스런 이슈들-논란을 일으켜 대중을, 돈을 끌어모을 소재들-이란 표현이 맞겠고, 조금 호의적으로는 가족영화/오락영화에도 사회적 이슈를 적절히 반영했다고 할 수도.
옥자와 미자, 반려동물과 인간간의 숱한 애정담에 대한 봉준호식의 변주. 내 기준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대목은 이건 아마도 속편이 있겠다 싶은 내 촉이 맞을까 하는 부분. 던져진 채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장면과 떡밥들이 적잖은데, 아무래도 봉감독은 속편까지 염두에 둔 게 아닐까 싶은데..모르겠다.
힘을 가진 그들에게 다른 보통사람들은 그저 본인을 위한 발판으로만 보이는 걸까. 사람들 눈과 귀를 가리는 건 일도 아니고, 랜덤으로 찍어걸린 이들을 윽박지르고 강압하여 자백 아닌 자백을 이끌어내는 스킬은 수십년간 갈고 닦아왔던 거다. 억울함에 울부짖던 자살시도를 하던, 남은 가족들이 울화병으로 뒷목잡고 쓰러지던, 그런 건 알 바 아니다. 김기춘과 그 후예들이 조작한 사건 피해자들을 대하는 방식은 확실히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아니다.
영화 마지막에 숨막히도록 끝없이 이어지는 '자백'에 근거한 사형/무기징역/수십년의 징역과 수십년늦게 바로잡힌 무죄판결의 기록들은 97년 이후 잠시 멈칫하다가 2013년부터 슬슬 되살아났다. 한참 레벨업되었던 스킬을 새삼 오늘에 되살리려니 아무래도 좀 부족한 점들이 있었던 거려나. 최고권부라는 검찰도 국정원도 일처리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게, 뉴스타파의 취재로 저렇게 정면반박당하고 깨갱하고 말다니. 영화를 보다 옆자리 아저씨가 탄식처럼 크게 '저런 개새끼들', 할 수 있는 만큼의 시대가 된 덕분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주로 다루는 2013년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 대법에서 최종 무죄판결을 받기까지의 3년여 시간을 촘촘히 따라가며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당시 이명박정부가 박원순시장을 찍어내려 간첩사건을 만들어냈다는 해석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탕봉지에서 사탕 빼먹듯 북한에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쥐고 흔들며 내키는대로 사건을 창작해내는 사람들, 그들의 장난질은 한순간의 정략과 정치기획이었겠지만 그 파급력은 개인에게는 너무나도 크고 가혹하다. 그 조작으로 이득을 보려던 사람의 관심은 식었고 정권도 바뀌었지만,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조작사건은 사회 시스템 안에서 엄연한 사건이 되어 희생자에겐 길고 돌이킬 수 없는 파장을 남기는 거다.
어처구니없지만 웃을 수도 없는 부조리극. 보통사람들에게 그건 일종의 천재지변이었고, 힘센 사람들에게는 그저 게임을 위한 장기말 배치같은 것. #이게나라냐
죽여준다는 표현이 갖는 이중성, 말그대로 죽여주겠다는 살벌한 의미일 수도 있고, 또 죽여줄만큼 좋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영화는 그렇게 두가지의 '죽음'을 (남자에게) 가져오는 사신같은 여자 윤여정의 인생과 현재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마치 포스터 속 그녀의 복잡해 보이면서도 멍해보이는 표정 그대로. 대체로 그건 수동적이고, 왠지 알아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에 맞부딪힌 자의 표정이다.
등장인물들간의 욕망이 향하는 세기나 방향을 바탕으로 등고선지도를 그려보면 어떨까. 윤여정을 중심으로 그려지는 욕망의 등고선은 두가지 죽음,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의미 모두에 있어서 그렇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탑골공원의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같이 좋은 섹스를 맛보고자 하고, 또 그렇게 시든 남성들은 그녀를 빌어 죽음조차 불러오려 하니까. 그녀는 모든 (남성들의) 욕망이 흘러내려오는 곳, 배꼽같은 저지대일 뿐이다. 그녀의 삶은 늘 그랬으니까, 어쩌면 그 표정은 지쳐 체념한 데서 비롯한지도 모른다.
주변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다소 복잡한 지형을 보인다. 오타쿠같은 장애인 남성, G-spot이라는 야릇한 이름의 트렌스젠더바에서 일하던 트렌스젠더. 이들은 영화의 욕망이 단순히 남녀의 이분법으로만 읽히는 걸 막고 좀더 건전한 욕망의 교류, 등가교환에 가까운 뭔가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섹스관광의 결과로 태어난 코피노(코리안+필리피노) 꼬맹이. 윤여정에게서 뻗어나가는 유일한 욕망 한가닥이 있다면 그것, 그 꼬맹이를 통해 과거 젖도 못뗀 아이를 입양한 기억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 한가닥 욕망조차 제대로 채우기 쉽지 않다. 방해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녀를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남성들)의 욕망이 사회의 전지적인 권한을 침범하는 시점. 구성원의 삶과 죽음에 대해 전권을 행사해야 하는 사회는 그 통제를 벗어난 늙은 남성들의 잇단 죽음을 주목한다. 영화속 현실에 충분히 노출된 지금의 현실, 고 백남기농민이나 한상균 민노총위원장의 뉴스가 그 사회가 가진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들이었다면, 이제 그 힘으로 윤여정을 단죄해 위신을 유지할 때인 거다.
그렇게 그녀는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죽여주는 여자가 되어 평생을 살았고, 자신의 작은 욕망 하나 채우지 못한 채 삶을 마친다. 대체 그녀의 삶은 뭐였을까, 아니. 이렇게 묻는 건 스크린 너머 내가 그녀의 삶에 여전히 코박을 만큼 가깝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제각기 남들이 알 수 없는 내밀한 속사정과 맥락이 있는 법이고, 그녀의 삶 역시 나름의 만족과 안온함이 있었으리라.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손을 빌어 세상 밖으로 구출해낸/죽여버린 그들의 감사함에서 작은 의미를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2014년, 그가 삶을 마감했던 지하 벙커 바로 그 자리에서 히틀러가 되살아났다. 우선 보여줄 거리는 60여년의 시간차로 인한 어벙한 모습들, 그로 인한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기. 기울어가는 전쟁 한복판에 있던 그가 평화로운 베를린 한복판에서 거리의 공연을 펼치는 이들과 자리다툼하는 모습이라거나, 군복을 몽땅 벗어 세탁소에 맡기는 모습 같은 것들.
가볍게 그의 시대착오적인 연설을 끄집어내어 실소를 머금게 하는 것도 좋겠다.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그의 말투는 한소절만 들어도 웃음이 터지는 개그물일 뿐이니까. 난민, 청년 실업, 노인 빈곤, 국가 채무, 멍청한 텔레비전...어라. 생방송 프로그램에 개그맨으로 발탁된 그의 연설솜씨는 전혀 우습지 않다. 그의 주제 역시 전혀 터무니없거나 미친소리 같지 않다.
일약 사회문제로 떠오른 티비 히틀러. '히틀러의 지적이 독일 사회문제의 정곡을 찔렀다'거나 '정치가 뭔지를 아는 그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따위 폭발적인 찬사가 이어진다. 대중은 그를 좋아하고, 언론은 그를 잘 포장하여 대중 앞에 대령하며, 자신이 진짜 히틀러임을 셀수없이 선언한 그에게 재차 이름을 묻는 사람은 사라졌다.
영화는 집요하다. 웃음기는 사라지고, 마치 1933년 드라마틱한 그의 집권을 전후한 시대상과 현재의 상황을 정면으로 충돌시킬 생각인 거 같다. 그것도 있는 힘껏. 히틀러의 뼈대가 되었던 우생학과 아리안민족주의, 국가중심주의가 얼마나 농담같이 시작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 상식이 되었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게 히틀러라는 악인의 등장이라는 돌발변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어떤 이름의 누구라도 대행할 수 있었을 인류의 한 국면이었을지 생각하게 만든다.
그건 꼭 '악의 평범성'으로 풀 이야기만은 아니다. 히틀러를 낳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무르익으면, 그 화약고에 불붙이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독일 걱정에 밤잠을 못이룹니다"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정작 독일을 불구덩이로 집어넣었었고 또다시 집어넣을지 모르는 역사의 반복, 이건 두번 다 틀림없는 비극으로 귀결되고 말 거고,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이를 가진 어떤 나라에도 불길한 전조를 드리운다.
그렇게 소름돋게 만드는 영화의 마지막, 2014년의 히틀러는 이제 대중의 인기와 언론매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슬슬 본색을 드러낸다. 잡종개를 총으로 쏴죽이고 유태인의 피를 혐오하며 유색인종은 육체노동이나 하라고 농담처럼 밑밥을 깔아둔 터였다. 난민을 위한 집단수용소에 대해선 전문가라며 자신감을 보인 터였다. 더이상 그는 어릿하고 후져보이지 않는다. 눈빛은 명민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카리스마는 백퍼센트 충전됐다. 이제 어디로 독일 국민들을 끌고 갈까.
설경구가 스스로를 김일성으로 착각한다는 설정의 '나의 독재자'를 초반에 살짝 떠올렸으나, 전혀 다른 종류의 영화. 대충 얼버무리거나 금기시되어버린 히틀러라는 이름이 갖는 미묘한 지점들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사람들을 당혹시키려고 작정한 작품이고, 기대 이상으로 훌륭하게 그 목적을 초과달성한다.
#동주 #영화스타그램 막 핫하게 사람들이 찾는 건 피하고 싶은 묘한 심리가 있다. 덕분에 이제야 보게 된 영화, 동주.
언제고 세상이 순탄했냐만은, 개인의 삶이 본인 맘먹은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리라 믿는 것까진 아니라 해도 이토록 방해받은 삶이라니. 시를 쓰는 것도, 시인이 되려 한 것도, 그 와중에 시가 그저 본능처럼 쓰여지는 것도 모두 부끄러워 해야 하는 동주의 삶.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곤 해도, 역시 부끄러울 수 밖에 없는 거다.
순수냐 참여냐, 이 해묵은 논점에 대한 동주와 몽규의 언쟁은 전형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문학으로의 도피가 아니냐는 지적에 대한, 언제는 이념이나 사상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었더냐는. 그거야말로 시류에의 영합 아니냐는 이야기는 특히나 한국 현대사에 대보자면 정곡을 찌른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영화는 어쩌면 동주와 몽규의 로맨스물로 읽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무리려나.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함께 하고픈 애절한 마음과 구태여 발동시키곤 했던 어깃장까지.
45일안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로 변신시켜버리는 호텔이 있다. 아니 그전에, 짝을 짓고 이를 유지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유배시키는 사회가 있는 거다.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발사이즈는 14인지 15인지 그 중간의 선택지는 도무지 제공하지 않는 호텔은 그렇게 결혼을 강압하는 사회의 반영인 셈이다.
짝을 찾을 의욕도 없어 보이던 사람들은 사회와 호텔로부터 탈출한 자발적 외톨이들을 사냥하는 경험과 동물로 변할 거라는 공포감에 떠밀려 짝을 찾아나선다. 거짓으로 공통점을 꾸미고 우연을 가장해 짝을 구하는 과정은, 마치 섹스중이던 채털리부인이 차가운 정신으로 한발뒤에서 바라보던 우스꽝스런 엉덩이의 움직임과 같다. 열정과 로맨스는 없고 기계적인 몸짓뿐이다.
짝을 찾은 후에 위기가 닥쳐도 걱정없다. 호텔은 그들에게 아이를 배정해주니까. 혹 그/녀의 가족 문제가 그들의 가정으로 쳐들어와도 적당히 화장실로 끌고가 사라질 때까지 발로 밟아버리면 그만이다. 짝을 이룬 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텔의 숙박공간과 서비스는 좋아지니 여하간 남는 장사 아닌가 말이다.
물론, 당신의 사랑을 15점 만점에 몇점이냐고 누가 총을 겨누고 묻는다면. 짝 대신 자신이 죽어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상대의 눈을 잃게 했으니 당신 역시 눈을 내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러한 질문 앞에서는 속절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는 건 넘어가기로 하자. 애초에 그런 질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이런가.
혹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그런 질문 앞에서 쪼그라붙고 위축된다고 사랑이 아닌 건가. 어차피 사랑이란 건 영화속 한장면처럼, 너와 나의 플레이어로 각자 듣는 음악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추려는 시도같은 것으로 충분할지 모르는 거다. 같은 노래를, 같은 타이밍에 들을 수 있는 행운이란 건 그렇게 흔치 않으니. 게다가 그에 더해 너와 나의 몸짓이 아름다운 몸짓을 그려내는 행운이란 건 더더욱.
p.s. 랍스터가 되고 싶다던 남자, 바다를 좋아하는 데다가 랍스터가 백살도 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랍스터를 택했다고 했다. 나는-영화 제작사에서 준비한 퀴즈에 따르자면-고양이로소이다. (링크는 여기)
작정하고 울리려드는 신파라는 점에서는 '칠번방의 선물'에 못지 않아 머리가 아팠고, 후손들에게 길이 남을 업적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끌어올리는 점에서는 '명량'과 비슷한 부담스러움이 있던 영화. 희극적이고 과장스런 연기와 앙상하고 작위적인 스토리, 엉성한 분장까지. (게다가 김윤진의 발음과 발성은 너무 어색했다) 영화적 완성도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냥 이정도로 충분해 보인다. 현재는 이 영화의 시선과 내러티브에 대한 진영논리에 갇힌 선정적인 비난이 교차하면서-게다가 수첩공주의 애드립이 더해서-괜시리 입소문만 더 타고 있어 보인다.
그보다 더 흥미로워보이는 지점은 사실, 신산한 한국사를 관통해 살아낸 그들이 아버지를 줄곧 필요로 하고 혹은 그걸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있다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비전이나 전략도 분명히 제시하지 못하면서 거의 신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작동했다고 믿어지는) 아버지의 리더십을 초혼해내는 '명량'보다 한발 더 분명...히 나간 이 영화는, 한국의 보통사람들이 살았던 그 시절과 그때의 아버지들을 그저 무비판적으로 감싸안고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상징할 수 있는 뒷배경/자산/경험 등이 없던 시기 가정을, 사회를, 역사를 끌고 간 게 그들이었다는 이유로.
사실 이와 비슷한 작품들, 사회와 역사를 이끌어 왔다며 아버지들을 상찬하고 새삼 위무하던 작품들은 이미 IMF 때 있었다. 당대의 비전이나 미래가 흔들릴 때 원기회복을 위해 쉽게 돌아갈 곳은 여태 쌓아온 과거, 그리고 그 일꾼들이니까. '아버지'란 삼류소설이나 유사한 아류 작품들이 그런 건데, 경제위기 직전의 한세대만을 주목했던 그때보다 지금은 좀더 멀리 길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아마 앞으로의 비전이나 전망이 불투명하고 불안감이 확산되는 시기가 다시 올 거라는 예후 혹은 이미 도래했다는 징후는 아닐까.
+ 또다른 문제는, 이 '아버지 만세'의 퇴행적 스토리가 불가결하게 견지하는 여러 단순하고 유치한 사고방식과 관점들일 수 있다. 미군은 그저 착한 해방군이고, 베트콩은 사악한 전사인 것처럼 보여지는 것도 그렇지만, 심지어 젊은애들은 어른들의 공헌을 전혀 이해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다는 듯한 거짓된 세대갈등을 빚도록 피해의식을 양산하는.
이를테면 육체를 (잃어)버린 시대의 사랑에 대한 영화랄까. 영화 속의 풍경은 현실같으면서도 묘하게 비틀려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OS를 개인비서삼아 말로써 기능을 조작하고 명령을 내리고, OS와의 연애가 쿨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인공지능을 가진 OS는 한꺼번에 팔천명의 사람과 대화하고 그 중 육백명의 사람에게 사랑을 말한다. 섹스는 스마트폰 너머 누군가와의 스마트한 폰섹으로 대체되거나 인공지능을 가진 OS에 이끌린 자위로 대체되는 형편이다. 거리에 나서보아도 사람들은 전부 OS와 이야기하느라 허공에 대고 침튀겨 말하거나 손짓을 해대며 지나쳐 갈 뿐이다. 서툴고 상처받은 사람과 사람이 기껏 만나봐야 잠시 셈을 따지곤 도망칠 뿐이고.
가히 묵시록적인 풍경이지만, 지금의 모습과 멀지 않아 보인다. 스마트폰...이라는 창구로 연결된 OS와 인간들의 링크는 이미 탯줄만큼이나 단단해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거리에서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다. 육체를 빌어 이어졌던 관계는 이제 육체로 인한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되기 위해 분해되는 중이다. 이미 카톡 너머, 페북 너머 당신들이 실재하는지 여부는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육체는 불필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육체적 애정행위로서의 섹스 역시 (남자의 표현을 빌자면) 신혼시절에나 열심히 할 뿐인, 누구와 아무래도 좋은 욕망의 배설행위 정도로 격하되어버렸다. 앞으로는 구글글래스니 뭐니로 제공되는 새로운 자극만 충분하다면 굳이 육체를 통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로맨스를 표방하는 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OS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메타포 그 자체일 수 있어서일 거다. 사람과 사랑에 서툰 이들에 대한, 사랑을 소유의 문제로 쉬이 치환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고 사랑이 서로를 어떻게 격려하며 키워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사랑과 그로 인한 혼란의 감정을 처음 맛보고, 사랑하는 이의 피부와 육체를 감촉하며, 실수와 실망 속에서도 상대와 스스로를 함께 한걸음 성숙시켜낼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이끄는 상대. 그런 상대라면 그게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OS가 되었건 피와 땀이 흐르는 '미도리'가 되었건 사람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거다.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는 정말, 외모에 휘둘리지 않고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단 걸 깨닫게 해줬다. ++감독의 전작 '존말코비치되기'에서 보였던 기괴하고도 발랄하던 아이디어와 풍성한 메시지를 읽어내도록 했던 복잡한 이야기능력은 더욱 심오해진 것 같다.
우선 쥬드 로가 연기한 댄. 그는 자신이 매력있다는 걸 아는 남자다.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 자신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고 상대를 끌어내는 방법을 아는 사람. 그에게 포섭된 건 두 명의 여자였다. 먼저 그가 손에 넣고 싶다 생각한 건
앨리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발판삼아 만나게 된 안나. 두 명의 여자 사이를 진동하며 그는 자신의 소유욕을 한껏
채우려 든다. 맞다. 그의 사랑은 소유욕의 형태를 띈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관대하고 진실한 사랑을 과시하려 들면서
상대가 자신에게 완전히 무장해제한 채 앞에 설 것을 요구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마음 밑바닥까지 검열하고
타인의 흔적을 지우거나 공유하려 한다. 감내할 수 있을까. 그녀, 그리고 그가.
때로 그렇다. 끝내 견뎌내지 못할 '진실', '진심'을 알고 싶다며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채근하거나 옛 애인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보는 불퉁맞은 심술이 있다. 그게 심술을 넘어 내 안의 불안감과 결벽증으로 발전한다 싶을 때도 있다.
우리의 사랑이 아름답기 위해서, 완전하기 위해서는 마치 백퍼센트의 순금을 정련하듯 당신과 나의 마음 속에서 티끌과
부스러기들을 모두 쓸어내야 한다는 강박이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맹렬히 불붙었을 때,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쌍끌이 어선으로 샅샅이 긁듯이 읽어내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의 발현이기도 하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게 상대를 남김없이 알아야 한단 건 아닌데,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하는 무모한 짓을 벌이고 말았다.
#2. 두번째 남자. 사랑이란 적당한 스킬과 경험치로 쌓아올려진 섹스와 비슷한 것이라 믿는다.
클라이브 오웬의 래리. 그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남자다. 어떻게 해야 여자가 웃을지, 어떻게 해야 여자를
안심시킬 수 있을지, 그리하여 어떻게 해야 여자가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남자를 연기할 수 있는지 아는 남자다.
그렇게 댄으로부터 안나를 끝내 되찾아오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척,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척 하지만 정작 앨리스가 그녀의 본명을 말할 때조차 그 진심을 읽어내지 못한다. 사실 안나를
되찾아 온 것도, 안나의 마음을 읽어서라기보다는 같은 남자인 댄의 조바심을 읽고 상처를 예비했기에 가능했던 거니까.
아는 척 하는 남자. 선수인 척 하는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이 꽤나 있다. 연애를 많이 해봤다느니, 이럴 땐 이렇고
저럴 땐 저러면 된다는 식의 일반론들. 전부 시덥잖다. 래리가 그런 재기발랄한 몇 마디 말들로, 시의적절한 이벤트와
감동을 안길 수 있는 멘트로 상대의 마음을 얻었던 건 잠시뿐, 그조차 상대의 마음 깊은 곳은 미동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허랑한 지식이니 얕은 경험 따위를 양손에 쥐고 요리할 수 있는 상대란 없는 거다. 래리에게 부족했던 건 뭘까,
그는 여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려고 한 게 아니라 아는 척 연기했던 거 아닐까. 그가 집착하는 '섹스'를 위한 지름길이라
여기며 스스로 감탄할지 몰라도 그의 옆에 남은 여자, 안나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3. 첫번째 여자. 사랑이란 자칫 방심하면 자신이 다치는 불, 어느때고 꺼버릴 준비가 필요하다 믿는다.
나탈리 포트만, 그녀가 연기한 앨리스 혹은 제인. 그녀는 누굴까. 그녀는 댄을 진짜 사랑했을까, 래리도 사랑했던 걸까.
뭐 하나 쉽지 않다. 그녀의 이름. 왜 본명을 숨겼을까. 그저 순간의 장난이었을지도, 잊고 싶던 과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 잘 있어"라는 말로 상대가 더는 말도 못 붙이게 하고 떠나버린단 말. 어떻게 그렇게 모질 수 있을까.
그건 흔한 말로, 이전 사랑의 상처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그녀만의 사랑법일 뿐인지도 모른다. 댄에게 그녀가 이별을
선언할 때는 이 말을 덧붙였었다. '난 평생 널 사랑하려 했는데.' 진심일 수도 있었을 거고, 혹은 미안함의 발로였을 수도.
진심이라기엔 끝내 숨겼던 그녀의 본명이 걸리고 '진실'을 강요하는 댄의 익숙한 유치함을 참아주지 않은 게 걸린다.
문득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길 겁내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라도 한발 뒤로 뺄 구석은 남겨두고,
본명 뒤로, 사랑하지 않는단 야멸찬 선언 뒤로 숨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남자와 희롱하거나 댄과 이야기할 때의
그녀는 사랑을 비웃고 쿨한 척 굴지만, 그건 일종의 징후다. 그녀는 분명 사랑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 영리한 척 어리숙한
남자 둘보다 훨씬 더. 첫눈에 반한 사랑이 숙명이라며 안나와의 '바람'을 정당화하려는 댄에게 그녀가 한 말,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란 말의 노회함이라니. 그렇지만 정작 그녀야말로 사랑을 많이 아는 만큼 겁내게 되어버렸고, 끝내 뜨뜻하게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사랑만 취하고 떠나는 사람이 된 건 아닐까. 여전히 마음은 시리고 문득 눈물로 무너져내릴지언정.
#4. 두번째 여자. 사랑이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면 그뿐, 운명이라 믿는다.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안나. 그녀가 댄과 래리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을 보고 살짝 답답증이 일었던 것은, 대체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분명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댄에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꼈으며, 또한 래리에게서
또다른 매력과 호감을 느꼈다. 어떤 걸 사랑이고 어떤 건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약간은 도발적이고 위태로운
관계, 그리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로부터 비롯했을 뿐 두 가지 모두 사랑이라 하면.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사랑 중에서 무엇을 택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저 둘다 갖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데 혐의를 두는 게 낫겠다.
어쩌면 그녀는 앨리스(혹은 제인)와 정반대의 애정관을 가진 인물, 그녀에게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레
다가온 운명이며, 감히 먼저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운명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렇게 두 조각난 자신의 세계를
가까스로나마 보호할 수 있을 거다. 댄의 세계와 래리의 세계, 두 세계가 합쳐져야 그녀에게 완전하니까. 그 두 세계
어디에도 완전히 투신할 수 없는 그녀, 선택을 강요받는 지경에 이르러 댄이건 래리건 누군가의 옆에 머물게 되었지만
이미 그녀는 조각난 세계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 * *
그래서, 두 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가 만들어낸 네 가지의 사랑이야기는 모두 비극이다. 그게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믿어지던, 혹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누군가를 향해 열었던 마음이었던, 결국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방식의 사랑을 쌓아올리다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사랑이 어디에 이르러 하트 모양의 공을 터치다운해야
비로소 성공하고 완성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모든 건 사랑에 빠지기로 '순간의 선택'을 하고 나서 '당신'이라는 거대한 블랙박스 앞에서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치를 살려서 그 드문드문한 신호들을 해독해 보려 애쓰면서부터 예정된 비극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웃음이, 당신의 손짓이 가진 알 수 없는 뉘앙스와 의미에 겁먹지 않고 내게 친숙하고 익숙한
것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는 대체로 오해와 균열을 낳고 만다.
사랑을 한다는 건 서로 완강히 뻐팅긴 채 멀어지려는 직선 두개를 잡아매두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한땀한땀, 두꺼운 무명실을 대바늘에 꿰어 직선 두개 허리춤에 둘둘 묶어서 촘촘하게 바싹 붙여두는 식이랄까나.
그건 시지프스의 신화에 비견될만큼 지난하고 고단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어쩌나.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면, 허리춤이 아니라 속고쟁이라도 잡고 늘어져야지.
왠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소라의 노래 가사 한 대목이 떠오른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바람이 분다, 2004)
네 명의 사랑 이야기가 비극적이란 점에서 이렇게도 한결같을 수 있구나, 싶어서일까. 또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싶어서일까. 또, 결국 Hello, Stranger로 시작한 영화가 Bye, Stranger로 끝나는 거 같아서일까.
영화는 짧았지만 생각이 한없이 늘어진다. 한번 보고, 다시 또 보고, 그러고 나서도 할 말이 정제되지 않아 이렇게
길어지다니. 영화의 여운도 여운이지만 노래 탓도 크다. 요새 잠들기 전 꼭 한번은 듣고 잠드는 노래.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would be Life goes easy on m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shorter story No love, no glory No hero in her sky
당신이 말한 대로 되어 버렸죠.
대부분의 시간, 나는 인생을 편하게 받아 들이게 되었죠.
그건 아주 짧은 이야기죠.
사랑도 없고, 영광도 없고,
그녀의 하늘에는 영웅도 없는,
짧은 이야기..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should be We'll both forget the breez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colder water The blower's daughter The pupil in denial
그래요.
당신이 말했던 것 처럼,
대부분의 시간에는
우리 둘 다 그 소문들은 잊어야 할 거예요.
그래요.
차가운 물.
허풍쟁이의 딸.
부정하는 눈동자..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Did I say that I loathe you? Did I say that I want to Leave it all behind?
당신이 싫다고, 내가 얘기 했었나요?
내가 말했었나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 버리고 싶다고..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My mind...my mind.. 'Til I find somebody n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