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진! 달래, 아리야!

“사람이 챙길 수 있는 최대한의 지인 수는 삼백 명 어간이라고 한다. 여태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고양이들은 맥주, 달래, 아리와 삐노에 더해서 주변 친구들의 오월이, 미달이,
영달이, 똘망이, 찡코, 뭉치, 토리, 엔조, 토르 정도일까. 아무리 박박 긁어 모아 봐야 삼백
마리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내게 고양이 녀석들 한 마리 한 마리는 더욱 각별하고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결에 저자에게는 고양이와 여행 사이에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결고리가 생겨버렸다.
이제는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들을 보고 있으면 여행지에서 만났던 녀석들까지 덩달아
연상된다고 한다. 단숨에 여행의 조그마한 순간들까지 뻗어나가 생생한 추억으로
되살아나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들은 고양이를 빨랫줄 삼아 여행의 순간들을
널어둔 셈이다. 여행하는 와중에 예기치 않게 고양이들을 만나기도 하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면서 문득 지금 자신이 여행 중이구나 느끼기도 했던 순간들 말이다. 그 순간들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 조금은 구김이 지거나 원래 모양새와는 달라졌을지 몰라도 엄연히
자신이 한때 온전히 살았던 것들이다. 내키면 언제고 다시 팔다리에 꿰어보거나 그저 다시
한 번 바라보면서 지금의 자신은 어떤 여행을 하는 중인지 가늠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이러니저러니 결국 고양이에 빠져들고 나서는 좀처럼 헤어나올 길이 없다고
고백한다.

고양이는? 여행은?

아침마다 해가 뜨고 새로운 날이 오는 게 그렇게도 신기하고 좋은지 우다다, 변함없이
신나고 열정적으로 하루를 맞이한다. 벌써 수백 번은 돌아봤을, 크지도 않은 집의
귀퉁이마다 낯설고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양 꼼꼼하고 조심스레 돌아본다. 코를 킁킁거리고
앞발로 톡톡 쳐보다가는 고개를 갸웃거리길 반복이다.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매일 보는 얼굴이나 손길인데도 질릴 줄 모르고 빤히 바라보다가는 문득 새로이 큰
결심이라도 내린 것처럼 슬그머니 다가와서 찬찬히 살피고 코로 냄새를 맡는다. 마주하는
사람에게도 덩달아 어떤 설렘이나 새로움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다. 사랑이 막 시작되려 할
때처럼 마구 애정이 솟아난다. 그렇게 애정을 담되 낯설게 볼 줄 알고, 또 미련 없이
돌아설 줄도 안다. 쓰다듬거나 안아달라며 마구 보채다가도 충분하다 싶으면 훌쩍
내려서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난다. 가히 어딘가에도 매이지 않는 올곧은 여행자의
자세답다.


삐노의 짙은 파랑 눈빛과 대비된 새하얀 털빛은 인도의 타지마할을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달래의 초록빛이 일렁이는 눈빛은 요정들이 산다는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의 초록 물빛을
연상하게 한다. 그런가 하면 호안석처럼 묵직하고 몽환적인 아리의 노랑빛 눈은 이집트
시와에서 마주했던 장엄한 사하라사막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어디 하나 뭉툭하거나
날카롭지 않게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몸은 그 자체로 호주의 울룰루나 사하라사막의 듄에서
느꼈던 자연스럽고도 우아한 선을 닮았다. 게다가 녀석들이 우아하게 움직일 때 거죽
아래에서 불끈거리는 근육의 움직임이라니, 두브로브닉이나 울릉도 앞 먼바다의 두터운
파도가 미묘하게 움직이는 그 섬세함을 꼭 닮았다.


녀석들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도 여행의 매력과 닮았다. 다른 종의 생물이니
당연한 일 같기도 하지만, 정말이지 워낙 다른 게 많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습관이나
패턴이 있는 건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많은 고양이를 접하고 길러봐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자기들끼리도 장난치다가 엉뚱한 짓으로 튀어버리는 걸 보면
고양이들끼리도 말이 통하기는 하려나 의심스럽기도 하다. 대충 눈빛이나 꼬리의 움직임,
분위기로 어림짐작이나 할 뿐 끝내 낯설기만 할 테니, 사람과 고양이의 만남이란 생판 처음
접하는 나라의 외국인 아니 외계인과의 조우에 비길 만큼 엄청난 일 아닐까. 그런 데다가
녀석들이 바라보는 세상이란 걸 따져보자면 사람들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거다. 고양이
눈이란 사람 발목쯤에나 달려 있는 셈이니 눈높이가 다르고, 대체로 시각에 기대는
사람과는 달리 후각에 기대어 세상을 감각하고 있을 텐데 그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책 속으로


정말이지 고양이의 앞발은 대단한 물건이다. 내게 ‘어느 손가락이게' 놀이를 시전할 만큼
섬세하고 정교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고양이의 기분을 나타내는 바로미터라는 꼬리
못지않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 (21쪽)

그러고 보니 이스탄불 곳곳에서 길냥이들을 많이도 만났다. 원래 이스탄불이 대륙간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고 중요한 항구 거점이다 보니 계속 새로운 종류의 고양이들이 유입됐다고
한다. 머나먼 이국에서부터 항해해온 배들은 으레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한두 마리씩
싣고 있기 마련이었고, 그 녀석들이 지금 이스탄불의 이 다채로운 고양이들의 조상이 된
거라고. (31쪽)


처음 취직 준비를 할 때 자기 소개서에 줄창 그 표현을 써먹었다. ‘고양강아지’라고. 틀에
박힌 자기소개서 항목 중 하나인 ‘본인의 성격을 묘사하고 장단점을 말하시오’였던가, 그
비슷한 항목에 항상 욱여넣었던 단어였다. 고양이처럼 야무지고 자존감이 강하면서도,
강아지처럼 성실하고 충성심도 높다, 뭐 이런 이미지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56쪽)


제 멋대로이고 혼자 세상사는 표정이지만, 사실은 애교도 많고 살가운 동물, 고양이에 딱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성에서 만났던 공장 직원들, 음식점
접대원들도 모두 그 표현에 맞춤해 보였다. 그네들을 칭하기에 가장 적당한 단어가 아닐까
싶었다. 심지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내 카메라에 찍힌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샅샅이
검열하던 북한 군인까지도 무표정한 ‘츤츤함’ 가운데 왠지 ‘데레데레함’이 느껴졌다면
나만의 착각이었을런지. (69쪽)


고양이 알러지가 심하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2009년이었다. 새해 벽두부터 ‘용산
참사’라는 야만적인 사건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고, 그 김에 고양이 카페를 처음 가보기도
했던 터라 기억이 선명하다. (72쪽)


고양이들이야말로 영역 동물이다. 자기의 ‘나와바리'를 지키며 그곳 안에서 독립적으로 먹고
자다 보니, 그곳을 떠나면 다른 고양이의 공격에 직면하거나 생존이 위협받게 되는 거다.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재개발이나 재건축이 시작되면 하루아침에 집을 잃게 되는
셈이라 선진국에서는 이런 대단위 철거가 진행될 때면 길고양이들의 이주와 구조 작업을
병행한다고 하는데 아직 한국은 아쉽게도 그렇게 체계적이지는 않은 듯하다. (88쪽)


고양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기 위해 소리를 내는 거라 한다. 고양이를 키우고 나서야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이다. 자기들끼리는 아마 기분이 안 좋을 때 으르렁대거나 하악질하는 정도
혹은 짝짓기를 위해 짝을 찾을 때 애기 울음소리 내는 정도로 의사소통하는 게 아닌가
싶다. (104쪽)


볼 때마다 짜릿하고 늘 새롭다. 역시 귀여운 게 최고인 건가. 이런 일상의 작은 순간마다
행복한 정도가 정점을 찍는다. 진부하지만 우리가 모두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면 그냥 저
녀석들과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보듬고 기억하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렇다고 이런 뻔한 마무리가 여전히 오빠와 형 사이에서 버퍼링을 면치 못하고 있는 자신에
게 은근슬쩍 면죄부를 주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써야겠다고 반성하
고 있다. 형아가 밥 주러 간다, 기다려라 삐노야. (134쪽)

그렇지만 살짝 억지를 부려 보자면, 고양이들이 정말 이런 것들을 장점이라고 여기며
중성화 수술을 기꺼이 받겠다 할까. 고양이가 잔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할지
알 수 없다. 당장 아픈 곳 없이 건강한 상황에서 생살을 찢고 잘라내는 확실한 고통과
발생할지 않을지도 확실치 않은 질병으로 인한 장래의 고통, 그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것을 고르는 게 맞을지는 사실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다. 녀석들이 바라는 행복한
삶에 그런 식으로 당장의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도 포함되어 있을지 알 수 없다.
(156~157쪽)


지은이 소개

자신의 평소 모습과 다른 새로운 면모를 내세우는 ‘부캐’라는 단어가 유명해지고 나니
어떻게 살고 싶은 건지 이야기하기가 한결 쉬워졌다. 한 가지 캐릭터에 갇히지 않고,
그러니까 몸과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밥벌이 캐릭터에 갇히지 않고서, 가능한 다방면으로
부캐를 키워내고 싶다. 그중 오래된 하나는 글을 쓰고 인세를 받아 은퇴까지 노리는 야심
찬 녀석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다 싶어서 다른 영역들도 열심히 키우려는 중이다.
고양이 집사로서의 정체성은 최근 두드러지게 약진 중이지만, 사실은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길러온 병아리와 열대어, 십자매와 다람쥐, 그리고 구워 먹으면 초콜릿 맛이 난다는
타란툴라 브리더로서의 면모를 이어받은 셈이다. 그 외에도 늘 새로운 것, 재미있는 것을
찾아 벌려놓고 있는 와중에 자칫 산만할 수 있는 여러 관심사를 묶어주는 역할을 해주는 게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여행을 매개로 부캐들끼리의 시너지가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여, 여행과 사진과 온갖 잡글이 합쳐져서 2009년부터 6년 연속 여행 분야 우수 블로거에
선정되기도 했고, 여행 에세이 『삼거리에서 만나요』를 쓰기도 했다.


차례


프롤로그 - 여행보다 강한 마력, 고양이


1부 - 고양이로의 여행
이집트 다합, 처음으로 고양이를 품던 순간
프랑스 파리, 플리마켓에서 만난 고양이 인형
터키 이스탄불, 고등어케밥이 불러낸 똥고양이들
보스니아 모스타르, 하드보일드 버전 <캣츠>의 세상
네팔 히말라야, 인간과 고양이의 거리 두기
싱가포르, 이 정도면 29금 스킨십을 즐기는 고양이
베트남 하노이, 전설의 고양강아지 등장하다
일본 아키하바라, 코스프레 구경 대신 고양이 까페
북한 개성, ‘츤데레’ 고양이 왕국에 다녀오다
용산 남일당, 고양이의 위로라도 도움이 된다면
서해 승봉도, 하얀 고양이와 무아지경 플라워댄스
서울 둔촌동, 고향 잃은 고양이들과 내 영역


2부 - 고양이와의 여행
내 첫 고양이는 맥주가 되었다
고양이와 AI 로봇의 무쓸모 대결
고양이 울음소리를 가장 많이 내는 사람
천재 고양이, 전쟁을 개시하다
세상은 놀이터요, 만물은 놀거리라
셋째 고양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난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다
아기 고양이에 대한 이상과 현실
약쟁이 고양이들의 먹는 재미 지켜주기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집사의 자세
고양이에게 피임약과 섹스 토이를!
맥주를 떠나보내던 날


에필로그 - 맥주와 달래와 아리와 내가 아는 고양이들에 대하여


#장수고양이의비밀 #무라카미하루키 #캣스타그램 #책스타그램 #하루키에세이클럽

책읽는 것도 좋고 고양이도 좋다. 고양이에 대한 책을 읽는 건 더 좋다. 게다가 하루키. 그가 빚어내는 픽션이 유리오르골같은 섬세함과 정제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가 전면에 나선 에세이는 방망이깎는 장인의 거친 손을 더듬어 잡는 듯한 생생함과 고집스러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약간의 애정만 있다면 다소 '빈티지'스러운 말장난이나 특유의 위트는 역시 하루키스러운 부분이라며 너그러워진다.

이번에도 그의 에세이는 가볍고 재미있다. 그리고 계속 읽힌다. 소설보다 에세이가 낫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의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나 경이로운 사실이다. 전라로 집안일하는 주부라느니 모텔이름 고찰이라느니 고객불만 편지를 쓰는 법이라느니 살짝 외설적이거나 시답잖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데다가, 왠지 자신없는 말투지만 근성있게 웅얼웅얼, 누구도 캐묻지 않은 것에 대한 소심한 변명이나 설명을 덧붙이는 궁시렁쟁이가 있을 뿐인데 말이다.

그 비밀은 아마도 드물게 그가 정색하며 쓰는 문장, 혹은 역시 쓰려다 말고 눙치되 감정을 흘려둔 문장들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남녀관계나 나이먹음에 대해 말하다 말고 문득, 역시 일반론은 그만두어야겠다고 슬쩍 넘어갈 때. 백화점의 장애인 안내문구를 놓고 그 이면의 비정함과 둔감함에 (그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분노를 표할 때. 전집 간행문제로 자신과 불화한 당사자가 마음고생으로 자살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면서도 역시나 자신은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 명토박을 때. 그가 굳이 말하지 않고 에세이에 숨겨둔 것들은 그런 것들이다.

그의 문장을 조금 고쳐 말하자면, 아무리 작가라 해도 모두가 웃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불가능하고, 그 책임은 본인이 오롯이 짊어지고 살 일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다, 식으로 늘 조심스럽게 열어두는 방식의 태도를 견지하는 그가 이럴 때 보여주는 진지함과 날카로움은 서늘할 정도다. 그럼에도 말하자면 출산하는 고양이와 한밤중에 몇시간씩 마주하고 있던 때의 완전한 느낌, 그처럼 아름답고 성실한 묘사로 한순간이나마 그에 공감할 수 있게 해준 건 역시나 하루키여서 가능한 마법이었다.

#거실의사자 #애비게이터커 #마티 #캣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고양이 #애묘 #집사필독서

오랫동안 cat-person을 자처해왔지만 문득문득 그런 의문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 앙증맞고 새침한 동물은 대체 뭐하는 동물이길래 사람 맘을 홀리는가. 딱히 쓸모도 없고 충성심도 없어 스크래치를 온사방에 내기 일쑤인 이 이기적인 동물이 어떻게 길과 거실을 온통 장악해버릴 만큼 번식하고 넘쳐나 버렸는가. 심지어 이제는 사진첩과 SNS피드를 정복해 버렸으니 말이다. 의문들은 으레 일종의 경외감과 숭배의 마음으로 찜찜하게 마침표를 찍곤 했었다.
 
이 책, 거실의 사자는 그런 고양이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흥미로운 사실들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애초 거대고양잇과 육식동물의 간식에 지나지 않았던 인류가 그들의 고기를 훔쳐먹고 차츰 도구로 무장하며 세력이 비등해지는 것에서 고양이의 가축화 아닌 가축화가 시작된다. 고양이는 개나 소와는 달리 가축화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특별한 동물이란다. 그러면서도 사람에게 복속되지 않고 종적인 일관성을 유지한 채 골격과 체형을 지금까지 유지했다고. 개와 달리 종 자체가 고작 털색으로 구분되는 얄팍한 다양성을 가진 걸 감안하면 알 만하다.

인간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고양이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개와 달리 고도의 육식동물인 고양이는 인간에게 소처럼 편하고 안정적인 단백질원이 될 수도 없었고, 쥐를 잡는다는 오랜 통념과 달리 쉬운 먹이를 취하느라 쥐 박멸엔 큰 효과를 내지 못했고, 다양한 표정과 감정표현을 진화시킨 개와 달리 단독사냥꾼 고양이는 늘 새침한 표정으로 곁을 내주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번식기계 고양이는 폭발적인 번식속도와 인류 이동에 힘입어 전지구로 퍼져나갔다. 이집트에서 발원한 고양이는 신대륙과 남극까지 퍼지며 토착생물의 씨를 말리고 급기야 인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번성하는 동물이 되었다. 미국에서만 하루에도 길고양이 수만마리가 살처분되고 있지만 숫자는 줄어들 줄 모르고 중성화조치(TNR)는 애묘인과 인도주의자를 의식한 요식적인 눈가림일 뿐이란다.

이쯤되면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 만물의 영장이 맞나 다시 물어볼 때다. 고양이님들의 집사를 자처하는 인류는 먹이사슬의 맨꼭대기를 고양이에 양보한 건 아닐까. 소위 '양육 본능의 오발'을 유발할 만큼 귀엽고 애기같아지는 식으로 진화한 고양이의 매력 앞에 저항할 수 있는 인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책중에 소개된 '톡소플라스마'의 전인류적 감염으로 고양잇과 동물에 대한 저항력과 경계심이 제거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이토록 귀여운 책표지를 만든 디자이너는 분명히 그런 환자임에 틀림없다.

고양이의 매력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왜 스스로 고양이 앞에선 애기 어르듯 하며 집사를 자처하게 되는 건지 궁금한 사람에게 강추강추하고 싶은 책. 냐옹♡

오나의여신님.

울드와 스쿨드와, 뭐니뭐니해도 베르단디.

내 중학교 시절 그녀의 화려하고도 섬세한 머릿결을 칼로 한올한올 파서 코팅하던 녀석과 친구였는데, 유유상종이었던 것이다. 오나의여신님 극장판 ost의 라이브공연 버전을 들으며 공부를 하는 척 그 간드러지고 꿀떨어지는 목소리에 집중했었더랬다. (지금 생각하면 오나의여신님의 그림체는 무하의 그것과 비교함직하지 싶다.)

십년 넘도록 연재되어온 스토리를 갈수록 희귀해지는 만화방을 찾아 잘도 따라오면서, 어디선가의 애니 팬시샵이던가 전시회던가에서 사왔던 책받침, 콘티 자료집과 네컷 만화집까지 지금까지 고이 갖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면서도,

또 그와중에 종반에 이르러 케이를 고자로 만들었던 베르단디의 '속임수'라는 설정에 잠시 멘붕했다가, 초반에서 중종반을 지나며 같은 베르단디를 그리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심각하게 변신해 버린 작가의 그림체에는 만성적으로 뜨악함을 느끼면서도, (갠적으론 초반의 통통함과 종반의 각진 달덩이 그 사이 어디쯤이 참 좋았는데)

이렇게 오그라들면서도 아름다운 결혼식 장면으로 완결되었다는 건 뭔가 내 안에서도 함께 슥 완결되는 느낌을 던져주는 거다. 뭐, 물론 전적으로 남성 위주의 하렘물이라거나 입맛에 맞춘 캐릭터들의 진열 등등의 부분은 이미 쇽 극복한지 오래지만서도. (코슥)

#서푼짜리오페라 #브레히트 #희곡 #책스타그램

브레히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저 공산당에 가입한 적 없는 자칭 맑시스트란 점, 그리고 극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끊임없이 방해하며 고전적인 카타르시스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낯설게 하기'의 선구자란 점 정도. 희곡을 텍스트 자체로 읽는 건 상상하며 읽을 여지를 남기기 마련이지만, 합창과 대사와 방백이 뒤섞인 그의 희곡은 곳곳에서 제동을 걸어왔다.

서푼짜리오페라에서 그는 등장인물로 하여금 계속해서 초기 자본주의시기, 아마도 19세기 초반쯤을 냉소하는 대사를 내뱉도록 한다. 거지 왕초와 갱 두목간의 이야기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고, 또 누구와 대척하며 누가 자신들을 억압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그들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그게 무엇이든, 우정이던 애정이던 전부 돈으로 환전되는 모습도 적나라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갱 두목이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끝나나 했던 이야기는 그야말로 우왁스럽게 방향을 틀어버린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할 수 밖에, 맥락없고 뜬금없는 사면령에 더해 귀족 작위라니. 피첨 부인과 피첨이 관객에게 직접 던지는 마지막 대사는 씁쓸하고 당황스러운 울림을 남긴다. "왕의 말탄 사신이 항상 온다면 우리네 인생도 이렇게 손쉽고 평화로울 텐데." "하지만 현실에서 그들의 끝은 비참하네..."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말라는 주문이자 집요한 요청.

#문상 #김금희 #책스타그램

매듭. 매듭. 옮겨온 흔적. 꽁꽁 싸맨 채 이고지던 보퉁이를 어딘가에 던져버리고 과거, 라고 퉁쳐버리고 나선 다시 시작하는 현재란 거. 그런 매듭. 매듭진 삶.

#미국의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 #교유서가 #리처드호프스태터 #지식인 #책스타그램

책을 손에 쥐면서부터 이유모를 겸연쩍음이 계속됐다. 반지성주의란 단어가 활자화되어 다뤄진 자체가 워낙 강렬하다고 느꼈기 때문일까, 우르르 몰려다니는 대중 따위 반지성적이라며 냉소했던 나 자신은 정작 뭔가 싶은 혼란스러움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대학 새내기시절 읽었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책이 던졌던 오래된 질문을 환기시킨다. 지성은 뭐고 지식인은 누구이며 뭘 하는 존재들인가. 관료나 작가가 지식인인가, 월급노예는 그럼 뭐지. 나이와 위치에 맞게 좀더 현실화된 고민이다. 그리고 왠지 낯간지럽고 겸연쩍은 고민.

지성과 지식인의 특별함을 말하는 건 이제 그런 간지러운 느낌인 시대다. 혹자는 X선비질하지 말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민주주의와 평등이 보편가치가 되었고, 지식과 정보는 네이버 지식인에 물어보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데다가 교수와 철학자의 이야기는 온라인 상에서 댓글과 과히 다를 것 없는 무게감을 갖는다. 정치와 역사와 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특허나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닐진대 대체 저 '척'하는 먹물들은 왜 그걸 독점하려 드는가 말이다. 그리고 쉽고 짧게 말하면 될 걸 왜 괜히 어렵고 복잡하게 말이 길어지냐 말이다. 그냥 실용적이고 돈되는 이야기나 하지, 구름잡는 이야기 따위 일자리 한개라도 만드는데 보탬이 되나 말이다.

저자는 미국의 건국과 대서부시대 이래 1950년대 매카시 광풍이 지나간 시점까지 지식인들의 역할과 지식인사회-대중간의 긴장을 국면국면의 스냅샷처럼 찍어 세밀히 묘사한다. 미국의 특유한 '반지성주의'가 형성된 곳을 크게 종교와 정치, 사업과 교육에서 찾고 있다. 엄밀한 의례와 교의를 갖춘 종교와 대척하여 개인의 신비체험을 강조한 복음주의교파들, 지성보다 인성을 강조하며 귀족계급의 리더십을 타파한 평등주의적 정치이념, 고급문화의 정신적 가치 대신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삼은 교육과 사업에서의 실용주의자들. 미국 역사의 굵직한 사건들과 흐름을 '지성 vs 반지성'의 오랜 갈등사로 재구성한 스토리는 굉장히 설득력있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적실한 프레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유지하고 있는 지식인상이 정치와 문화, 체제에 대한 비판정신으로 표상되는 점이 여전히 난 맘에 든다.

그렇지만 몇가지 떠오르는 질문들을 남겨놓자면. 1.이게 정말 미국만의 상황이었을까. 유럽 이외의 모든 국가에 보편적인 양상은 아니고? 어쩌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유럽의 '지성주의'가 예외적인 건 아닐까 싶어서 하는 이야기다. 2.2000년대를 경과한 미국도 같은 프레임으로 읽을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 같은 표피적인 사건말고 예컨대 서부 IT기업들의 기업문화는 반지성주의와 어떻게 엮일까. 실용성과 기술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역시 반지성주의의 흐름에 있다고 봐야 할지. 3.AI 등의 논의는 인간과 지성이란 테마에 어떤 자극을 줄까. AI를 둘러싼 논의가 온통  정보처리에 집중되어 있어 지성 따위 잊혀진 건 아닐까 싶은데 그럼 안되는 거 아닌가.. 4.한국의 반지성주의를 따져본다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미국의 그것과 별반 차이없이 종교와 정치, 비즈니스와 교육이 큰 요소인 건 변함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치만 한국이 타파해야 할 귀족적/특권계급적인 지적공동체, 앙시앙레짐이 애초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쇼와육군 #글항아리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일본 #전쟁 #쇼와 #육군 #위안부 #박유하 #제국

저명한 르포르타주 작가이자 '자성사관'의 주창자인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그중에서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견인한 세력이 누구이며 어떤 관점과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천착한다. 그저 '일본이 나빴다'거나 도조히데키 개새기,라는 두루뭉술한 선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여전히 피가 흐르는 동시대사를 갈무리된 역사로 넘기기 위해서도 구체적이고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단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일본의 정치와 전쟁을 줄곧 주도해온 세력을 육군, 그중에서도 대본영 육군부(참모본부)의 엘리트 군관료집단이라 본다. 군대에 대한 통수권이 국민에 대한 통치권보다 우위를 점한 채 전혀 간섭받거나 통제되지 않던 시대. 육군은 오로지 천황의 재가에 따라 움직이는 황군이라지만, 천황이 허울뿐인 총괄을 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변과 사건들이 풍부하게 등장한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은 육군 엘리트들은 군대조직의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자존 자위를 말하며, 그에 따른 안보선은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내지를 보전하기 위한 중국 침략, 중국을 보전하기 위한 러시아 견제 혹은 동남아 침략, 급기야 미국에 대한 침략으로. 그렇지만 빈약한 정보와 준비되지 않은 병참, 무엇보다 국가총동원체제로 치뤄지는 전쟁에서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엔 정신력과 충성심만으로는 중과부적.

책을 덮으며, 그간 우리는 승자의 기록에 손쉽게 편승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해방이라는 혜택을 입은 이해당사자로서(얼마나 다행인가, 일본이 폭주하여 스스로 자멸했단 건!), 엄밀하고 냉정한 분석을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41년말 진주만폭격으로 시작된 미일전쟁, 그리고 그전의 독이일 삼국동맹과 연합국간 다툼을 두고 단순히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나 제국주의 시대였고, 일본은 뒤늦게 시장쟁탈전쟁에 가담한 국가 중의 하나였을 뿐.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과 자유민주의 원칙들은 기실 타국의 대외정책을 견제하고 자국의 통상이익을 수호하는 국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증거로 뒤늦게 제출되었지 않나.

책의 한계 하나, 저자는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데올로기가 허위적이고 가식적으로 쓰였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그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혹은 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와 서양을 대비시키며, 식민지 지배자와 해방자를 대비시키는 구도는 너무 단순하고 나이브하지 않나. 게다가 동남아 전선에 버려진 수천의 무명용사들이 각국의 해방전쟁에 자의로 가담했음을 근거로 대동아공영권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건 비약이다. 그들의 의도와 맥락에 대한 분석없는 점프의 결과는 보편적인 인류애나 가치관이 아닌, 인종과 지역을 근거로 한 대동아공영권 아이디어 자체가 복권될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두번째 한계를 굳이 더하자면, 천백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월간지에 연재된 원고를 근간으로 쓰여지다보니 압축적이지 못하다. 관련자에 대한 심층취재의 생생함을 더하려 했다 해도 겹치는 내용과 장면이 많아, 예컨대 위안부나 전후배상 문제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부분이 아쉽다. 전시는 평시와는 다른 가치관과 결정을 필요로 하며 또 당대는 지금과 다른 감각으로 위안부 정책 등이 수행되었다, 는 다소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들이 뭉뚱그려졌다. 저자 말대로 이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조사가 선행되어야 그에 따른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가능한 부분일 텐데, 1991년에 씌여진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후 그다지 계승되지 못한 듯 하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봐야겠다.


단지 착취나 억압의 피해자가 된다고 해서, 혹은 그에 저항한다고 해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심지어 남성들도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것이 트렌드라곤 하지만, 페미니즘이 무엇이며 어떤 문제의식과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인지 차분한 이야기를 나누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저자는 명료하게 말한다. 페미니즘이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남성을 여자 아래로 끌어내리고 여성을 남자 위에 세워올리는 게 아니다. 남성과 여성간의 젠더 전쟁을 벌이자는 건 더더욱 아니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 내면화된 성차별주의를 바꿔나간다는 건 그저 '피해자 여성'이 '가해자 남성'에 분노한다는 것 이상을 말함이다.

외부의 적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선 내면의 적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스스로 바뀌기 위한 진단과 공부가 필요한 거다. 자신과 타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어떻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지 하나하나 철저히 되짚어 보아야 한다. 여성 내부에 체화된 가부장제적인 감수성과 인종적, 계급적인 차이를 무시하는 태도를 유지하고서는 기득권에 편승중이라며 공격받는 남성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셈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종, 계급, 민족 등 스스로가 놓인 지형에 대한 성찰과 고민없는 일부 얼치기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기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수혜자들인 남성과 얼마나 닮았던가. 강자와 약자가 그대로 온존하는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로라면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개인의 출세나 자기만족을 위한 하나의 발판처럼 쓰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비단 페미니즘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분명한 건 이런 '미러링'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여성과 남성 모두, 페미니즘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풍경을 조심스레 따라가볼 필요가 있는 거다.


#모두를위한페미니즘 #페미니즘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코스모스 #칼세이건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기념비적인 과학교양서, 라는 말은 다소간의 경계를 요한다. 기념비에 먼지가 채 내려앉기도 전에 속속 밝혀지는 많은 오류와 논쟁중인 해석이 대중화를 위한 설탕옷을 입고 간명한 진실인양 행세하기 쉽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자가 쓰는 비유와 전문영역이 아닌데서 끌어오는 배경지식은 자칫 오해나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깐.

그런 점에서 1980년에 첫 출간된 이 고전 역시 비켜갈 수 없는 한계들은 엄존한다. 과학에는 전혀 전문성이 없는 내 눈에도 당장 보이는 건 DNA에 대한 과한 기대감이라거나, 우주공간에서의 핵 사용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라거나, 무엇보다 그가 그렸던 수십년 후의 미래를 살고 있는 지금이 그의 상상과는 꽤나 다르다. 인간 이성을 신뢰하고 과학의 발전이 인류에 공헌할 거라던 그의 신념 혹은 의지는 그다지 전해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책의 주된 메시지는 여전히 엄청나게(!) 유효하다. 과학 자체와 과학의 결과물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하기'의 과정과 문제의식에 대해 바쳐진 그의 열정과 단호함이 인상적이다. 결론은 언제든지 틀릴 수 있다. 관건은 그 결과물이 왜 잘못 해석되었거나 예견되지 못했는지, 그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틀거리를 만들어내는데 있다.

과학 정신을 궁극까지 밀고 나가는 것. 그건 안으로는 인간 내부와 기원을 향하고 밖으로는 지구와 별과 우주로 향하지만, 결국 이는 만나게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자 그대로 인간은 우주에서 생겨났으니까. 그런 통찰을 가로막았던 건 지상의 왕들과 신들과 권위자들이었다. 그렇게 기원전 깨인 자들의 탐구 대상이 되었던 우주가 수십세기동안 미신과 미망의 원천으로 전락하고 나서야 다시 인류는 우주에서 코스모스, 질서와 규칙을 찾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 초판 내지 개정3판 정도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언젠가 천문대에서 별들을 바라보고 은하계 변방의 작은 티끌의 티끌에 불과한 지구를 실감했던 날의 소름이 오소소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런 보잘것 없는 곳에서 찰나를 살다가는 인류라니. 게다가 난 그 인류의 아주아주 작은 점 하나일 뿐이라니. 그건 일종의 신비체험이기도 했고, 내가 찾아낸 겸손해질 수 있는 가장 그럴 듯한 이유이기도 했던 것 같다.



#히틀러의비밀서재 #히틀러 #서재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어떤 책을 읽어왔고 어떤 책을 소장하고 있는지, 그런 것들은 사람을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근거가 될까. 적어도 1만6천권의 장서를 개인소장했고, 그의 사상과 행동이 역사를 뒤흔든 사람이라면 그의 독서이력과 서재는 큰 힌트가 된다는데 이견은 없겠다. 사실 나는 그보다 자취가 작은 일반인, 한국같은 작은 나라의 대통령이라거나 평범한 갑남을녀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애서가를 자처했고 늦은 밤까지 하루 한권의 책을 읽어내는 것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의 제3제국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철학자로 니체나 쇼펜하우어를 들먹인 것도 주효했을 거다. 지독한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뒤범벅된 그의 이른바 민족사회주의는 그래서 더욱 파악하기 어려워보이는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대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어떻게 엮어내겠단 건지, 거기서 파생되는 논리적 귀결들이 서로 절그럭거리는 건 어떻게 해소하겠단 건지. 유대인은 왜 이렇게 늘 인류의 적이 되어 왔으며, 아리아인종이란 건 대체 어디서부터 순수하고 어디서부터 '오염'된 건지도. 등등, 끝이 없다.

그렇지만 과연 그가 그만큼의 소화력을 갖고 있었는가 하면, 아니었단 게 이 책의 일관된 메시지다. 그는 체계적인 독서를 한 적이 없고, 그의 사고는 독서와 함께 부딪히고 발전하고 변화한 게 아니었단 이야기다. 문제는 그의 독서법. 그는 자신의 근거없는 신념과 망상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조각들을 찾는 방식의 독서를 했고, 개별 철학이 진지하게 구축하려 한 세계와 의미에 대해 제대로 음미하지도 못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그런 아전인수식의 발췌독은 현란한 수사와 웅변에 필요한 벽돌은 제공할지언정 본인의 사고와 사상을 위한 자양분은 뽑아내지 못한단 이야기렸다.

이 대목을 아전인수식으로 다시 인용해보자면, 글쎄. 양보다 질이다. 몇권을 봤는지가 아니라, 개개의 책들이 어떤 맥락과 통찰력을 갖추고 본인에게 도전해왔는지가 중요하단 말이다. 교양을 진열하기 위한 지대넓얕식의 지식 소비가 갖는 위험성은, 혹은 장학퀴즈/일대백식의 퀴즈쇼에 특화된 암기지식이 갖는 위험성은 전혀 본인을 흔들지 못하는 그 무독한 지식에 있다. 백번을 흔들리고, 아프고 또 아파야 하는 건 청춘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개개인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지식이라면 결국 애서가이자 웅변가 '히틀러'가 되는 게 고작일 테다.

이 책의 또다른 장점, 독서 경험과 서재의 구비를 통해 히틀러의 뼈대가 될 신조와 인생을 짚어준다는 것. 사실 지금까지 과문한 바 히틀러의 삶과 그의 신념에 대해 제대로 짚어본 적이 없었다. '나의 투쟁'을 읽어보는 건 고사하고 그가 외계인도 남장여자도 사이코패스도 아닌데 대체 왜 그런 반인류적인 짓을 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조각 하나 찾지 못했으니깐. 그렇지만 그의 사고퍼즐을 담당한 책들이 직조되면서, 그 역시 평범한, 혹은 다소 지적으로 부족하거나 성찰력이 부족한, 그래서 결단력만 가득한 멍청이였지 않을까 상상하고 이해해보게 만든다.


#세계최초의증권거래소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주식 #투자 #증권

격물치지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한다. '사물의 원리를 디립다 파헤쳐서  자기의 지식을 확실하게 넓혀나간다' 정도의 뜻이려나. 특히나 생활에 필요한 만물을 직접 하나씩 고안하고 구비해나가던 과거와는 달리, 점점 복잡해지는 생산과 창조의 말단으로 밀려나기만 하는 처지로서는 뭐하나 이해하기 쉬운 사물이 없다. 자동차는 어케 굴러가는지, 인터넷 검색은 어케 가능한 건지, 하다못해 냉장고와 에어콘은 어케 기능하는 건지.

주식회사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주식시장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책이다. 그저 현재의 효용이란 관점에서 주식투자방식을 연구한다거나 주식시장의 작동원리라거나 인간의 탐욕 운운하는 게 아니라, 이 독특하고 복잡한 시스템이 어떤 목적과 경로로 시작되었는지 말이다. 수많은 주주로부터 장기간동안 거대한 규모의 자본을 확보하여 사업을 가능케 해주는 주식회사, 한편 그 주식 지분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주식시장과 그 플레이어들.

물론, 책에서 주목하는 17세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전세계 주식시장의 원형이자 실질적인 발원지인지는 잠시 유보해 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각 국가마다의 필요성과 특수성이 있었을 테고, 어쩌면 제각기 중구난방식으로 비슷한 아이디어를 현실화한 건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분명한 건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의 설립과 더불어 보여지는 모습들이 지금과 너무도 유사하단 사실이다. 선물, 옵션, 파생상품, 그리고 투기로 인한 버블과 위기 상황까지. 덕분에 우린 좀더 심플하고 간명한 그림으로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된 듯 하다.

#나는단순하게살기로했다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미니멀리즘 #대지진 #일본

저자가 말하는 단순한 삶을 설명하는 글과 논리는 전혀 단순하지 않다. 게다가 도무지 사기만 하고 버리지는 않는, 청소나 정리 따위 하지 않고 쟁여두기만 하는 창고형 인간이라니, 이런 인간형이 흔할까 싶어서 공감도 떨어진다. 선이니 미니멀리즘같은 단어로 그럴듯하게 치장하고 잡스와 마더테레사와 간디를 운운하고 인간 정신과 역사를 들어 정신사납게 쓰고 있는데, 결국 '미니멀하게 말하자면' 내가 파악한 키워드는 두 가지다. 디지탈로의 이동(digitalization), 그리고 우선순위 정하기(prioritization).

일본만화 드래곤볼에 등장했던 기똥찬 발명품, 호이포이캡슐. 집이던 차던 수십톤의 물이던 전부 조그마한 캡슐 안에 집어넣었다가 꺼냈다가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었더랬다. 아마 그걸 가장 가깝게 구현할 수 있는 게 디지털로의 이동 아닐까. 무게도 부피도 없어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지만 언제든 꺼내어 보고 들을 수 있는 디지털 컨텐츠의 물성. 저자가 말하는 지독히 단순화된 '물건구매-만족-익숙해짐-싫증'의 무한루프가 실제로 존재하며 동시에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가 제안하는 미니멀한 삶에서조차 이 루프는 사실 끊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대체 그가 마지막까지 버릴 수 없어 남겼다며 예찬해 마지않는 애플의 고성능 컴퓨터/스마트폰 속 데이터는 얼마나 빠르게 소비되고 쌓이고 있을까. 현실세계의 물건들을 처분하고 사진파일로 옮겨둔 그 디지털 세계, 씨디와 책 대신 인터넷 속 온갖 컨텐츠와 정보로 갈음하는 그 세계 속에서 그는 미니멀리즘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그의 시도가 부질없다거나 기만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주변정리의 차원에서, 무한욕구의 궤도에서 탈출해 보다 자족적인 삶을 추구한다는 차원에서도 그는 나름 의미있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니깐. 우선순위를 정하고 핵심이 아닌 것들을 지워내보자는, 너무도 담백하고 당연한 이야기라서 김이 좀 빠지긴 하지만 말이다. 저자같이 극단적인, '지저분한 방 출신의' 인간 말고 좀더 평균적인 인간을 들어 말해보자면, 평소 하듯 오래되었거나 낡았거나 안 쓰는 물건은 버리던 팔던 하자는 거다. 그렇게 물건들이 들고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은 것들, 그런 것들은 꼭 필요한 것들이니 잘 챙기고, 나머지는 그보다 덜 중요한 것들이니 과감하게 덜어내어 버리던 혹은 마음만 덜어내던 그러자는 거다. 뻔하다고? 어디 이런 류의 책이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 하던가.

결론적으로 미니멀리즘이라는 단어를 온전히 짊어지기엔, 저자가 펼치는 철학은 그다지 근본적이거나 철저하지 못하며 차라리 극단적인 버전의 집정리 스킬에 가깝다. 그런데 외려 내 흥미를 끈 건 이 부분이었다. 아날로그 물건들의 디지털로의 피난, 그건 저자가 의식한 것 이상으로 2011년 동일본대지진의 후과인지도 모른다. 대지진이 터지고 방사능이 만연해도 아날로그 세상 그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한다는 걸 깨달은 이들이 준비하는 신천지 디지털로의 노마드행.



#군자를버린논어 #논어 #공자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공자를 위시한 유가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유가철학이라고 하면 왠지 공자왈맹자왈, 옛 한문을 글자 그대로 암송해야 할 듯한 고루함에 더해 군주-백성의 관계를 다룬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지 않으려나. 그래서 어쩌다 그저 한두구절만 떼어 볼지언정 논어를 통으로 읽을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꽤나 획기적이고 도발적이기까지한 논어 읽기를 시도한다. 말그대로 '군자'란 표현을 버리고, 대신 지식인/지성인/지도자 등의 현대적인 표현으로 대체한다. 수레를 모는 대신 차를 운전하는 건 애교 수준. 공자가 애정한 안연, 자로 등 제자들의 재미있는 캐릭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건 그들의 대화가 오늘날의 말글처럼 재연되었기 때문일 거다.

내용면에서는, 역자가 여러모로 공자와 논어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시도한다. 시사적인 이슈와 문제의식을 접목해서 공자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공자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어떻게 달라지고 여전히 같을까, 등등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거다. 글쎄, 다소 인상비평에 그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최소한, 공자가 여전히 현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이야기할 거리가 있다는 시작점으로는 충분해 보인다.


#우리는어떻게괴물이되어가는가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신자유주의인격의탄생

왜 이렇게 '또라이'가 많아진 걸까. 터무니없이 공격적이거나 패배적이고, 온갖 심리장애 증상들은 날로 늘어만 간다고 정신분석학자인 저자는 진단한다. 직장이나 학교의 왕따 문제는 글로벌해진지 오래고, 묻지마범죄에 특정집단에 대한 혐오범죄 등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전반적인 사회 풍조,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나 '상식'화된 신념들이 문제인 건 아닐까. 그것들이 사회 안의 인간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하고 윤리체계를 설정해준다면, 지금 우리 사회가 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이상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건 아닐까. 저자가 책의 절반을 할애해 꽤나 설득력있게 그 연관성을 논하고 있듯이.

그 기반에서 신자유주의라는 포괄적인 이데올로기를 호명하며 저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건 경제 능력주의와 교육 능력주의의 결합이다. 호봉이나 직급이 아닌 능력에 따른 평가를 강조하는 시스템이 초기엔 효율적인 듯 보이나, 이내 숫자로 환산가능한 지표와 결과에만 매몰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 체제의 중기 이후를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렇게 시스템 효율화를 위한 능력주의는 기존의 노동윤리와 공동체윤리를 해체하고, 아무것도 그자리를 대체하지 않는다. 공동체가 깨어진 지점에서 남는 건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모두가 모두에게 늑대일 뿐인(Homo homini lupus est) 계약 이전의 정글상태. 그게 현재 사람들이 병든 이유이며, 신자유주의가 주조하는 인간형이라는 결론이다.

길게 써봤지만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진다. 책이 그렇다. 사회가 정체성과 윤리 체계를 형성한다는 부분에 대한 원론적인 설명은 꽤나 매혹적인데, 이를 신자유주의에 대입하는 과정에서 헛점들이랄까 말해지지 않은 부분들이 보이기 때문일 거다.

우선 신자유주의가 최악인 시스템이란 것에 대한 분석이나 합의가 부재하다. 모든 사회는 나름의 지배사조와 그로부터 주형된 정체성과 윤리체계가 있을 텐데, 신자유주의 하에서 유독 정체성과 윤리체계가 파괴되었다는 진단이 과해보이는 거다. 그래서 또라이가 양산된 현상이 현대 사회에 고유하거나 유별나다는 것에 대해 납득시키지 못했다.

둘째로는, 서유럽에 기반한 분석이 과연 기타 지역, 한국에도 유효한지에 대한 의문이다. 예컨대 한국의 전통적인 노동윤리와 공동체윤리는 서유럽의 그것과 같았던가. 능력주의의 부작용은 공통될 수 있으나 그것이 타파한 과거의 온정주의적 평가는 한국과 서유럽이 같았을까. 등등.

마지막으로, 서유럽의 실업률이 높은 것에 대한 원인을 능력주의와 성공에 대한 환상으로 인한 미스매치로 치부하는 것, 젊은 세대에 대한 능력주의식 교육의 산물로 치부하는 것은 올바른 분석일까.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교육(과 자기계발열풍)에 미친 영향에 한정하여 이야기를 집중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젊은이는 자신을 미니 기업으로 보아야 하며, 경제적 의미 차원에서 지식과 능력이 처음이자 마지막 심급이다."같이 잘 정제된, 까기 좋은 언명을 모처럼 잘 골라놓았는데 말이다.



#예술과경제를움직이는다섯가지힘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비추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한다. 자라와 솥뚜껑이 닮았다는 관찰은 제법 참신하고 재기넘쳐보일 수 있지만, 본질이나 근본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이런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란 의미로 새길 수도 있을 거다. 예술과 경제를 함께 얽어내는 이런 책이 인문학을 살짝 얹은 천박한 교양서나 잡서가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대체 예술과 경제를 비교하기 위한 잣대가 뭔지부터 살펴보자. 머릿말에서 저자는 그걸 '명쾌하게' 다섯가지로 집약한다. 투시력, 재정의력, 원형력, 생명력, 중력-반중력. 각각에 대한 자의적인 설명은 그렇다치고라도, 그 다섯가지가 왜 근본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납득이 안 간다. 게다가 정의상 서로 충돌하거나 중첩되는 것들까지.

다소 참신하고 풍부한 시각으로 예술의 표피로부터 경제에 대한 메타포를 끌어낼 뿐인 책이다. 경제에 대한 자신의 시각과 의견을 표출하기 위해 이리저리 썰어내고 구부러뜨린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 다시금, 이런 류의 '통섭'이나 '지적 네트워킹'을 말하는 자들에 대해 실망하고 말았다.


#0. 시작은 블로그 방명록에 남은 그리 길지 않던 안내글 하나였다.

 

"안녕하세요 ^^
저는 문화의 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탑스피커즈 프로젝트 매니저입니다.

저희는 저자강연회와 사회공헌프로젝트를 같이 묶어서 하는 강연회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참가비로는 중고책을 받고, 그 수익금 전액으로 태국 메솟의 고아 난민들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블로거님과 함께 하고 싶어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정철 선생님의 신간 <머리를 9하라>리뷰 블로깅을 통해 함께 해주신다면 저희가 작지만 감사의 의미로 ‘정철 선생님의 머리를 9하라’ 신간과 ‘인생사전’, ‘만년필’, ‘제주도 리조트 사우나 이용권’을 선물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책과 강연'을 좋아하고, '손쉬운 재능 기부'로 '난민 아이들 돕기'에 뜻을 같이 하실 수 있는 분들은 의사를 알려주시고 주소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서울에서의 저자 강연회는 6월 4일 이화여대에서 열릴 예정입니다.
그리고 추후 정철 선생님과 함께 식사도 있을 예정입니다^^
문화의 선한 바람에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재능 기부, 한때는 뭔가 트렌디한 물결처럼 덮쳐왔다가 요새는 '공짜로 상대의 재능을 착취하겠다'는 의미와 등치되기에까지 이른

 

단어가 튀어나왔고. 누가 쓴 건지 책을 준다고 하고. 또 만년필을 준다고 하여-만년필에 대한 애착이 있는지라-이쯤 되면 딱히

 

재능이랄 것도 없는 리뷰 포스팅 하나로 좋은 뜻에 함께 할 수 있겠다, 딱히 착취랄 것도 없겠다 싶어 대뜸 손을 들게 되었다.

 

 

 

#1. 책이 왔다. 정철의 '머리를 9하라'

 

 

사실 책보다 먼저 눈이 갔던 건, 색지를 자르고 풀로 편지를 붙인 듯한, 게다가 직접 펜으로 이름을 일일이 쓴 듯한 편지였다.

 

재능을 기부해주어 감사하며, 이는 태국 메솟 지역에 있는 난민 고아들을 위한 기부금으로 적립될 것이라는 안내. 뿌듯했다.

 

근데, 정철이 누구지? 사실 책에 대해서는 거의 기대하는 것도 없었다. 워낙 나무에게 미안한 책들이 많은 세상이니까.

 

 

 

#2. 책을 펼치고, 그의 직업이 '카피라이터'였음을 알게 되다.

 

이런 재기발랄함이 책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채 '상식'의 틀 안에서 안전하고 무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철은 뇌 근육을 한번 움직여보고, 꾸준히 움직여 훈련하라고 권해주는 거다.

 

덕분에 이런 발랄한 그의 카피나 짧은 문구들, 단문들이 나오는 것이리라. 다소 뻔뻔하기까지 한 그의 자기 자랑, 혹은 자기

 

작품에 대한 '감상' 요청은 어느결에 마음을 열고 나 역시도 지지 않겠다며 뇌근육을 꿈틀대도록 하는 자극이 되는 거다.

 

'구두에서 가장 때가 타기 쉬운 곳은 밑창인데'로 시작해서, '마음이 정말 구두 밑창 같으시네요'로 끝나는 찰진 문장.

 

 

#3. 머리를 좌우로 돌렸다 앞뒤로 돌렸다가. 목운동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재기발랄함, 카피 한 줄이 갖는 팽팽한 긴장감과 잘 다듬어진 아름다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결과물이 아니다.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때문에 독자로 하여금 게으르게 책을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잠시라도 읽기를 멈추고 직접

 

머리를 써보기를 권한다. 그런 부지런함과 집중, 대상에 대한 몰입은 심지어 장미의 붉은 입술마저 열게 했댄다.

 

 

그리고 이렇게 그가 일을 할 때의 작업 노트가 몇 장 실사로 담겨 있기도 했다. 역시, 허투루 얻어지는 한 문장, 한 단어가 아니었다.

 

작업노트를 온통 까맣게 메운 단어들과 문자들, 그 중에서 얼마나 살아남아 빛을 보고 대중들에게 공개되었을까.

 

 

#4. 현재 시점에서 가장 맘에 와닿던 카피라이터 정철의 작품 두 점 감상.

 

 

여행.

 

빈틈없는 계획이 섰니?

 

그럼 가지 마.

 

여행은 틈을 만나러 가는 거야.

 

 

 

별과 달 중에.

 

별과 달 중에 누가 더 외로울까.

 

힌트는 별은 무수히 많은데 달은 혼자라는 것.

 

그래, 별이 더 외롭지.

 

무수히 많은 속에서 혼자인 게 훨씬 더 외롭지.

 

당신처럼.

 

나처럼.

 

 

 

#5. 사회공헌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쭈욱.

 

정철의 작품을 더러는 곰곰이 되씹으며, 혹은 그냥 심상하게 지나치기도 하며 후루룩 한 권을 쉽게 읽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처음보다는 정철이란 사람이 쓴 이 책에 호의적인 감정이 생겨났다. 최소한, 나무에게 아까운 책은 아니고 더구나 꽤나

 

머리를 요리조리 돌려보고 발상을 자유로이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인 거다.

 

 

이런 재미에, 그래도 전혀 기대치 않았던 책에서 나름 몇몇 포인트-폰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남겨두고 싶은 것들-을 찾아낼 때의

 

쾌감 덕분에 새로운 책에 대한 은근한 기대를 놓을 수가 없는지도 모른다. 계속 기회가 닿으면 함께 해도 좋겠다 싶은 프로젝트다.

 

 

 

 

 

 

작년 말, 2030세대에 대한 선험적이고 편의적인 규정과 비난이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자성에 기반해서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가 기획한 2030세대와 4050세대 간의 이해를 도모한다는 좌담회가 있었다.

 

 

어쩌다보니 '30대 직장인' 대표 패널로 나서게 되었는데, 사실 세대론 따위는 (비록 그 편의성과 명료성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세대' 대신 '계층'이나 '계급'을 통한 사회 분석이 적절하다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보니 생각보다 말을 많이 하게 되어버려서 다른 패널분들께 민폐를 끼친 거 같기도 하고,

 

'세대론'이란 걸 깔고 이야기를 하려 했던 애초 취지를 상당부분 불식시켜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하여튼, 사실 대선 이전에 출간되어 2030세대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바탕으로 범진보 야당세력을 정신차리게 하려던

 

이 책이..이제야 나오게 되어 제2의 박통 시대를 맞게 된 건 아닐지, 하는 생각도 해보고.

 

 

또 하나는, 대선 후 평가 국면에서 또다른 반편향으로 치닫던 5060세대 ㄱㄱㄲ론 같은 것도 결국 '세대론'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데, 그 역시 마찬가지로 뭐 하나 설명하지 못하는 동어반복에 가까운 주문일 뿐이란 생각이다.

 

 

단적으로, 대형차 타고 골프치러 다니는 60대 부부와 리어카 끌고 폐지줏으러 다니는 60대 부부가 하나로 묶일까.

 

해외어학연수 다니고 온갖 학원 등록해서 다니는 소위 있는 집 대학생과 등록금 하나 감당하기 힘든 없는 집 대학생이 같을까.

 

 

아래는 참여사회연구소에서 내보낸 보도자료, 그리고 본문 중 내가 발언했던 부분들 중 일부 캡쳐.

 

 * 보도자료, "참여사회연구소, 단행본《2030 크로스》출간, '불임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붙임의 세대론'" 中

1.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소장 : 홍윤기 동국대 교수)는 3월 4일 단행본 ≪2030 크로스 ― 불임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붙임의 세대론≫(참여사회연구소 기획, 양정무‧윤홍식‧이상호‧이양수 엮음, 이매진 펴냄)를 출간했다. 이 책은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백수와 음악가, 의사와 시민단체 활동가, 결혼을 앞둔 20대와 비혼주의자, 동성애자 등 다양한 20, 30대와 참여사회연구소의 40, 50대 편집위원들이 필자로 참여해, 2030세대의 현실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세대 간 이해와 통합을 위한 단초를 고민한다.

 

 

2. 1부에서는 2030세대 24명이 직접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았고, 2부에서는 이른바 사회분석 전문가들이 세대 담론을 되짚었으며, 3부에서는 청년과 기성세대가 모여 진행한 난상토론을 글로 담아냈다. 불안하고 불평등하며 불합리한 ‘불임’의 시대를 사느라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채 살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도 보수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끊임없이 ‘오해’를 받는 2030세대가 과연 어떻게 4050세대와 ‘크로스’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

 

5. 3부 ‘2030 크로스 4050’에는 20, 30대와 40, 50대의 난상 토론을 담았다. 2030과 4050이 한자리에 모여 왜 자꾸 2030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세대 구분의 의미와 한계는 무엇인지, 2030은 동질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세대를 넘어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해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6. 지금의 청년들은 정치에 관심도 없고 이기적이며 보수적인 집단이라고 비판받는다. 그러나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불임의 시대’에서 청년들에게만 진보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비겁하다. 따라서 4050세대는 어설픈 위로 대신 2030세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혐오하는지 제대로 보아야 하며, 있는 그대로 자신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이젠 2030세대와 4050세대가 함께 불안을 잘라내고 희망을 붙이는 ‘붙임’의 세대론을 모색해볼 시간이다. 

 

 

 

 

 

 

 

 

 

 

 

 

 

 

 

 

@ 까페 꼼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권 출간기념, 도정일 평론가의 강연.

'순교자'란 책,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미국으로 건너간 32살의 김은국이 쓴 소설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실존적 한계, 그리고 종교적 위안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한 극한까지 뻗어가는 이야기였는데, 한국인 출신으로 최초로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던 작품이었달만큼 강력하다. (서평은 http://ytzsche.tistory.com/1453)

 

그런 책을 번역했던 역자 도정일, 문학평론가이자 시민운동가이기도 한 그가 '이 시대에 문학읽기는 왜 중요한가'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고, 난 끝내 손을 들어 질문도 하고 나름의 답이나 공감도 얻었고. (사실 답없는 질문에 정답없는 대답이었다지만)

 

 

내 질문은 크게 두 가지였다.

 

Q1. 책의 역자로서 도정일 평론가는 도스토옙스키와 까뮈, 멀찍이는 욥에 이르는 실존주의 철학에 '순교자'라는 작품과 김은국 작가를 연관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 '이 대위'와 '신 목사'라는 사람은 그런 실존적 질문 앞에 직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또다른 등장인물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위는 니체식으로 그런 실존적 질문을 극한까지 몰고 나가려 하지만, 신 목사는 그들 일반 대중들을 위해 끝까지 존재의 이유, 포장지를 씌워주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작품의 포인트나 문제의식이 신 목사에게 많이 맞춰져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측면에서 앞서 언급한 실존주의 작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의 포인트나 결이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Q2. 또 하나로는, 그렇게 '진실을 알아버린', 매트릭스를 비겨 말하자면 '빨간 알약을 먹어버린' 신목사나 이대위와는 달리 일반 대중과의 격차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신목사가 그들을 위해 진실을 가려주고 위로를 제공하려 든다는 점에서 일종의 엘리티시즘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멋진 신세계 - 10점
올더스 헉슬리 지음, 정승섭 옮김, 바나나몽스 그림/혜원출판사

 

흔히들 말하듯 유토피아의 반대가 디스토피아, 그런 간단한 말로 축약될 때 뭉개지는 것들이 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의 이지가 확장되면서 예견하는 밝고 풍요한 미래, 그 자신만만한 예측과 전망이

 

유토피아의 밑그림이 되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실은 그대로 디스토피아의 깔개가 되기도 하는 거다.

 

 

"삶의 요소가 획기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생활의 학문이라는 수단에 의해서뿐이다...

진정 혁명적인 혁명은 외적인 세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육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천국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영혼이라는 것과 불멸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르핀과 코카인을 복용했습니다."

 

"감정은 욕망과 그 욕망의 달성 사이에 있는 시간 속에 숨어있다."

 

 

이런 얕지 않은 성찰과 반성을 기반으로, 인간의 물질적/정서적 필요를 최대한 신속정확하게 충족시키고

 

부정적인 감정과 불편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건 사실 대부분의 근대화 프로젝트가 공유하는 야심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가용한 모든 자원과 기술, 사회제도까지 송두리째 기울여지는.

 

 

"정말로 능률적인 전체주의 국가라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정치적 우두머리인 간부들과 그들 아래의 많은 관리층이

노예생활을 사랑하기 때문에 억압할 필요가 없는 노예를 통제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헉슬리가 묘사한 건 그런 야심을 거대한 뿌리로 삼은 커다란 나무가 키워낸 어느 굵은 가지의 한 극한이다.

 

사회적 역할과 운명이 결정된 인공 수정과 공동 양육, 자유로운 성생활, 더이상의 철학과 상상이 용인되지 않는

 

'완전한' 사회제도, 정교한 톱니바퀴와 같이 인간이 결핍을 느끼기도 전에 제공되는 물질들, 그리고 신경안정제까지.

 

 

아니, 그 '멋진 신세계'에서 완벽하게 충족되는 건 '인간' 일반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의 의미는, 마치 서서히 끓어오르는 물에 빠진 개구리와 같이 인간은 특정 사회제도와 분위기에 함몰된 채 휩쓸려가기

 

쉽다는 함의도 포함한다. 미래상을 늘어놓기만 하던 소설이 생명력을 얻는 건 버려졌던 땅의 '야만인'이 나타나면서부터다.

 

 

그는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이라 여기는 것들 하나하나에 당혹감을 느끼고, 어느 순간 굉장한 거부감을

 

토해내게 된다. 그는 셰익스피어 문학에 표현된 '옛 시대' 인간들의 정서와 상식에 기대어, 어느 극단적인 정점에 올라선 채

 

더이상 과거와 같은 인간이 살 수 없게 된 세계가 얼마나 기형적이고 추한 얼굴을 갖고 있는지 보는 눈을 가진 자다.

 

 

결국 그는 사람들로부터 구경거리가 되어 조롱받고 희화화되다가, 끝내 자살하고 만다. 그 '눈'을 감아버린 셈이다.

 

그의 죽음이란 현재 인류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라거나 역사발전의 이상향 같은 게 끝내 도달하게 될 미래가 얼마나

 

황량하고 비인간적일지에 대한 감각을 극적으로 폭발시키는 장면이 아닐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끝내 못버텨낼 그런 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더 짚어보고 싶은 부분이 생긴다.

 

 

어쩌면 그 '원시인'은 단지 일종의 '타임-슬립'으로 인한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건 아닐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그는 그 '멋진 신세계'에 적응이 실패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원시의 자연에 살다가 문득 발견된 사람의 아이들이

 

사회 적응에 실패해서 자살하거나 다시 자연으로 도망가는 사례가 없지 않은 것처럼, 그도 자신이 준거로 삼은 시대-

 

그것도 고작 세익스피어의 책 속에 그려진 시대-로 '퇴행'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보다 중요한 건, 책에 그려진 그 '멋진 신세계'의 모습이 진심으로 정말 그렇게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인지 하는 문제다.

 

"문제의식은 옳았다, 그러나 해결방식이 너무 극단적이었다?" 따위의 어정쩡한 봉합 말고, 인간의 생래적 한계를

 

극복하고 신체적, 사회적 모순을 해소하려는 그 가상한 문제의식과 상황판단을 공유했을 때 어떤 다른 그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원시인과 함께 했던 둘셋의 지식인들이 가진 먹물 고유의 불만은 그렇다치고, 책의 마지막장까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닌가.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들에서 더욱 가슴 서늘하게 느끼게 되는 부분은 사실 소설 외부에 있다. 사실 지금 도래한

 

매순간이 외부에서 온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른다. 상식과 비상식이 어지러이 경합하는 와중에

 

무엇인가는 쉼없이 탈각되고 생성된다. 일일이 감응할 수 없는 보통사람에게는, 대체로 행복한 시대다. 소설 속 그들처럼.

 

 

우리는 어떤 비인간과 어떤 황량한 풍경을 껴안고 살고 있는 것일까. 알량한 행복감에 젖은 채 놓치고 있는 건 뭘까.

 

 

 

정의란 무엇인가 - 4점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김영사
 

돌려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조금 맘을 잡고 읽어본 정의란 무엇인가 나부랭.

 

베스트셀러니 어쩌구 하는 책들을 전혀 신뢰치 않기에 좀체 볼 마음이 동하지 않은 채 반년이 지난 셈이다.

 

마침 최근에 방한한 샌델이 스타 대접을 받으며 동시에 각종 찌라시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다면 읽지 않은 채로

 

돌려 줬을지도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본심이다. 책을 읽기 전이나 읽고 나서나, 그런 양면의 거품은 불편하다.



간단한 소감. 이 책은 결국 '성찰'에 대한 책이다. 세사에 대해 신문 찌라시나 일상에 (잘난 척) 횡행하는 단언들과

 

자극적인 타이틀에 절어버린 입맛 앞에 대령하는 수십수백 페이지짜리 각주랄까. 세상사 간단하고 확실한 정답이나

 

규정은 없으며 난망한 이러저러한 면이 있다면서 각종 사례들을 사방으로 뒤채며 보여주고 있는, 그야말로 역시나 교과서다.

 

사고와 성찰이란 건 이런 베이스로 작동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학교 교양섭 기본 강의 수준.


 

예를 들어 최근 술마시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이른바 '주폭' 문제가 갑작스레 부각되고 있는데, 이를 보고 단순히

 

"술을 못 먹게 해야 돼"라거나 "술값을 올리면 돼"라는 처방을 제시하는 게 한국사회다. 심지어 '주폭' 문제를 진단한다는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이런 수준에서 과히 벗어나지 않는다. 샌델 식으로 말한다면 어떨까.

 

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높은 스트레스와 불만지수, 저소득층 성인의 유일한 즐길거리, 전반적인 놀이문화의 부재를 살피고,

 

조금 다른 면으로는 '주폭'을 방지하기 위해 술을 막아야 할지 범죄가 발생한 후 일벌백계해야 할지 등등 한없이 뻗어간다.

 

 

그런 수많은 결들이 단순한 것처럼 보이는 문제 뒤에 숨어 있다는 것,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를 따지기 위해선

 

이쪽과 저쪽에 서서 가능한 모든 측면을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 사실 일종의 상식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영어 원제가

 

그러한 의미를 함축한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걸 생각하면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좀 '정의'라는 단어를

 

앞세웠다는 느낌이 있다. 그건 한국 사회가 그만큼 '정의'에 목말라있다는 걸 감지한 영리한 상술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사회의 또다른 상식은, '전봇대가 걸리적거리면 불도저를 동원해 깡그리 밀어버리'는 걸 추진력과 유능함으로

 

치부해 왔으니까. 내 판단으로는 성찰을 말하는 이 책 역시 베스트셀러로, 일종의 유행으로 소비해버리고는 저자에 대한 '팬질'을

 

시작해 버린 굉장한 나라다. ('팬질'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대상이 가진 입장과 의견에 대한 숙고 과정과 성찰이 생략되어 버린단

 

점에서 샌델의 메시지와 반하거나 최소한 무관하다.)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화려하고 선정적인 답을 찾을 게 아니라 답찾는 과정,

 

자못 지루하고 고루하며 담백한 그런 입맛을 길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이런 식으로 소비되는 책이, 우리 사회에 어떤 유익함과 성찰, 자기 반성을 남겼고 남기고 있을까. 2010년 '올해의 책'에 선정되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지 이미 수년이 흘렀는데 여전히 사회 곳곳에는 '정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고 따지지도 않은 채 '부자'가

 

되겠다는 야만과 몰상식이 횡행한다.(심지어 자장면 한 그릇 먹는데도 맛있게 먹고 부자되란 말이 복음처럼 전파된다.) 샌델에 대한

 

팬질은 물론이고 나꼼수니 노무현이니 김연아니, 보다 오랜 대상으로는 박정희니 박근혜니 등등 팬질은 거침없이 하이킥중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단숨에 밀어붙이고 싶은 열망은 곳곳에서 파열하며 총선과 야권연대를 말아먹었고, 사람들은 '140자'로 표상되는

 

 SNS 시대에 걸맞는 짧고 자극적인 이야기에 열중하는 와중에, 성찰을 말하는 책에 대고 '정의'가 뭔지 말해달라며 개미떼처럼

 

달려들고 말았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례없이 대히트를 치며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나라의 이야기다. 암울한 세상이다.

 

 

 

 

 

 

 

 

어렸을 때 봤던 '백 년 동안의 고독',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랄까, 혹은 소개글이랄까.

 

게다가 연애감정을 단순히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만으로 묘사하는 단순한, 그래서 그만큼 거짓된 이야기들이 창궐한 세상에서

 

이렇게 정서적 혼란이 난무하는 것 자체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란 걸 짚어주는 것 자체로도 위로가 되는 글이다.

 

 

 

 

이별 통보하며 던진 말 "널 지독히 사랑해!" (프레시안, 2012-05-11)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연재를 시작하며

사랑에 빠진 젊은 당신에게 묻는다. 행복하세요?

허세를 좋아하지 않는 청년이라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적인 말씀 앞에서 청년은 기가 죽는다. 그리고 한탄한다. 실은 나 사랑에 빠진 죄로 피를 뚝뚝 흘리며 고통 받고 있는데, 어디 가서 하소연할꼬? 어떻게 말로 할 수 없는 이상한 마음에 빠져 있는데, 이 혼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러다가 내가 미치는 게 아닐까?

선남선녀가 첫눈에 반해서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연애담의 다가 아니듯이,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연애 심리의 다가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종종 극심한 정서적 혼란을 겪는다. 더욱 곤란하게도 그들은 혼란의 정체조차 모른다. 연애는 기묘한 인간 심리가 난투극을 벌이는 장이다.

훌륭한 소설들은 이런 미친 듯한 기묘한 심리들을 발견하고 묘사했다. 이 연재는 명작 소설에 나타난 기이한 연애 심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각 이야기의 서두에는 민, 경, 희, 연, 도 등 익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소설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이다. 연애 때문에 고민하는 혹은 고통 받는 독자이다. 그들은 소설에서 비슷한 증상(?)을 발견하고 공감하거나 위로 받거나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그들의 실제 연애담을 먼저 이야기하고, 본문에서 그와 관련된 소설 속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또한 질문한다.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경증인가? 판타지인가? 유일한 구원인가? 이 질문 앞에서도 명작 소설들은 이미 멋진 답안들을 제출하였다. 연재를 진행하면서 이 답안들, 유식하게 말해서 '사랑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훔쳐보는 즐거움도 누릴 것이다.

사족

그런데 필자 양반, 왜 이런 글을 쓰세요?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본 게임 전에 하는 말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우선 연애 때문에 마음 아픈 당신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당신의 기묘한 심정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 말하고 싶었다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명작 소설이 아픈 마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담은 '마음의 백과사전'임을 보이고 싶었다고, 아울러 소설을 깊이 읽는 한 방식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이런 식의 소설 읽기를 통해서 점점 독자를 잃어가는 소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기적도 아주 가끔 꿈꾼다고만 이야기해 두겠다.

 


첫 번째 상담

민이 연인에게 결별을 고했다. 일방적으로. 사람들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민을 부러워했는데. 그녀의 연인은 보기 드물게 자상했다. 어디에 가든, 그는 그녀와 동행했다. 우습게도 그는 혼자 있는 그녀가 혹여 사고나 당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들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녀의 안부였고, 그녀는 사소한 걱정이나 부끄러운 험담을 그에게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 그녀는 가장 흥미로운 텍스트였고, 그는 그녀의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데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 쏟아지는 질문에 그녀는 침묵으로만 응대했다. 그와 그녀의 이별 후유증에 대해서는, 말을 말자.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을 읽는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해했으므로 드디어 그녀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붉은 화인으로 남은 청춘의 한 때, 그녀가 빠져든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어리석음을 애도하면서 혹은 찬란함을 질투하면서.

그때, 난 천국에서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어. 천국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외줄 아래는 무시무시한 낭떠러지야.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다리가 늘 후들거렸어. 끝장나게 행복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불안했단 말이지. 그 상태를 더 이상 지속할 힘이 없었어. 무엇보다 외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어.

사랑은 왜 그렇게 피곤한 걸까? 그리고 그 피곤한 사랑을 도대체 왜 하는 걸까?

정열과 고독, 그 기이한 함수관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불안감은 침대 안에서가 아니고는 평화를 찾지 못하리라.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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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문학사상사

사랑할수록 처절하게 외롭다. 말장난이 아니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체험적 진실이다. 이 소설의 레베카와 아마란타 역시 사랑 때문에 외롭다. 그들은 동시에 피에트로 크레스피를 사랑하지만, 레베카는 사랑을 차지하고 아마란타는 그러지 못한다. 정황이 다르기에 그녀들의 외로움의 색깔은 다르지만, 이는 사랑의 짝패인 고독의 두 가지 전형적 사례이다.

우선 사랑에 응답 받지 못한 아마란타의 외로움은 쉽게 납득된다. "변소를 닫아 잠그고 안에 들어앉아서 절망적인 정열의 고뇌를 쏟아버리려고 정열적인 편지를 써서는 그 편지들을 트렁크 깊이 감추"(81쪽)기를 반복하는 아마란타의 고독한 정열. 응답 받지 못한 정열은 고독을 부추기고 고독은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외사랑이 깊어질수록 저 홀로 타는 정열의 불길은 거세어진다. 응답을 받았으면 평범했을 정열은 종종 응답을 받지 못했기에 더욱 광포하게 날뛴다. 걷잡을 수 없게 된 정열 때문에 점점 더 사랑을 얻기 어려워지고, 더 고독해진다. 아마란타는 고독하기에 정열적이고, 정열적이어서 더욱 고독하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아마란타 못지않게 사랑을 얻은 레베카도 외로우니, 어쩌면 더욱 처절하게 고독하다. 레베카는 피에트로 크리스피의 편지를 매일 기다린다. 우편배달부는 2주에 한 번씩 온다. 그런데 실수로 다른 날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매일 오후 4시마다 배달부를 기다린다. 그러나 다른 날 우편배달부가 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와야 할 날에 오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날 레베카는 "절망에 미칠 것 같아서 레베카는 한밤중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고통과 분노로 흐느껴 울면서 흙을 닥치는 대로 손으로 퍼서 집어삼켰고, 매끈매끈한 지렁이를 막 씹어먹었으며, 달팽이 껍질이 입안에서 아삭아삭 바스러졌다. 레베카는 동이 틀 때까지 먹은 것들을 토해냈다. 열병에 걸린 듯 레베카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79쪽)

광란에 빠진 레베카는 실연을 당했거나 외사랑에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이다. 피에트로는 극진하게 레베카를 사랑했다. 편지가 오지 않는 경우도 피에트로가 무성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우편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편지는 대개 정기적으로 도착했다.

이렇게 보면 레베카의 광적인 절망은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것이 된다. 드높은 인격과 향기로운 미덕을 갖추신 분들은 레베카를 맹목적인 탐욕에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맹목적인 탐욕이란 사랑이 필연적으로 거느리는 것, 사랑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사랑의 응답은 언제나 모자란다. 충만하다 못해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사랑의 응답도 필경 결핍만을 부각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픔을 느끼는 야차와도 같이, 사랑에 빠진 자는 악무한의 굶주림에 시달린다. 사랑에 빠진 자의 이런 허기를 마르케스는 '고독'이라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속뜻을 품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 레베카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사랑에 빠진 아우렐리아노뿐이었다.

열애 중인 연인은 고독이라는 인간의 천형을 사면 받는가?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열정의 노예가 된 사람은 연애 중에 오히려 더한 외로움을 느낀다. 아마란타와 마찬가지로 레베카의 사례에서도, 고독은 정열의 크기에 비례해서 깊어진다.

정열이 깊을수록 상대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많아진다. 많은 것을 기대하면 자연스럽게, 만족하기보다는 결핍을 느끼기 쉽다. 그러니 고독할 수밖에. 또한 그는 고독하기에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결핍을 느끼면 그것을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어지간해서는 체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맬망정 배고픔을 잊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열이 고독을 부르고 고독이 정열을 부르는 이 원환(圓環).

냉혈한인 그녀, 사실은 두려워서 사랑을 포기한 연약한 영혼

여자는 거리낌 없이 그를 만져댔고, 그는 그 여자의 손길에 몸을 부르르 떨며 쾌감보다는 두려움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38쪽)

상대의 마음은 대체로 나와 같지 않고, 마음이 맞는다 하더라도 이른바 '맺어지기' 전 결별의 요인은 너무나 많다. 그러니 사랑이 '맺어지기'란 구우일모(九牛一毛)나 다름없는 진귀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운 '맺어짐'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과연 기쁜가? 진실을 토로하라면 그때 표현하기 힘든 혼란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질투에 휩싸인 아마란타는 레베카와 피에트로의 결혼을 극성스럽게 방해하고 레베카를 독살할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레베카는 피에트로와 헤어진다. 아마란타가 방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레베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피에트로와 아마란타는 자주 만나서 조용한 사랑을 키워간다.

피에트로는 미쳐 날뛰는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따뜻하고 고요한 사랑에 도취하여 아마란타와 결혼하려고 결심한다. "억누를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쫓겨서라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따르자는 뜻"(125)에서. 그런데 청혼을 받은 아마란타의 대답은 어떠했나.

"나는 죽으면 죽었지, 당신하고는 결혼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정말로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앞으론 다시는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요." (126쪽)

이제 피에트로는 흐느껴 울며 비굴하게 애원한다. 비 오는 밤이면 아마란타의 침실을 바라보며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목소리"(127쪽)로 노래를 부르며 그녀를 설득한다.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절망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살하고 만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서 석탄불에 손을 지진다. 평생 화상의 흔적 위에 시꺼먼 붕대를 감고 산다.

아마란타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외롭게 했고, 질투심에 불타게 했으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던, 그리고 여전히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피에트로의 청혼을 고집스럽게 거절했을까? 피에트로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마란타의 어머니 우르슬라는 이렇게 분석한다.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의 마지막 분석 과정에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여인이었음이 분명해져서, 우르슬라는 아마란타에 대해 동정을 느꼈고, 피에트로로 하여금 부당한 고통을 받게 만든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자신이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시 사건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으며, 마침내는 아마란타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에 대해서 느끼고 있던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280쪽)

그 비극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다고 한다. 냉정하다는 평판과 달리 누구보다도 마음이 여린 아마란타는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에 굴복한 가엾은 영혼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피에트로를 깊디깊게 사랑했으나, 사랑의 동반자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꼿꼿한 직립이 가능한 굳은 땅 위인가, 천길낭떠러지 옆에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좁은 비탈길 위인가? 마음이 연약하고 깊은 이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깊은 사랑과 동시에 두려움에 몸을 떠는 사람은 이렇게 되뇐다.

그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토록 모자란 나를. 그는 언젠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사랑은 변하게 마련이니 결국 나는 사랑을 잃게 될 것이다. 잃은 후의 절망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나. 게다가 미쳐 날뛰는 정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열이 벼려 낸 내 안의 칼이 그를 찌르면 어쩌지. 사랑 속에서 나 자신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많다.

사랑에 빠진 자가 모두 사랑을 쟁취하려고 동분서주하는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경우 그는 사랑의 성취 바로 앞에서 비겁하게 몸을 사리고 도망쳐 버린다. 사랑의 깊이와 두려움의 깊이는 비례하므로, 피에트로를 죽음으로 이끈 아마란타의 냉혹함은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아마란타는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폭력적인 사랑의 심연을 두려워했을까. 그랬을 수도.

어쩌면 두려움은 행복 자체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란타는 눈앞에 다다른 행복 앞에서, 단지 행복해지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오랫동안 꿈꿔 왔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어떤 이는 환희보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행복이란 워낙 드문 것이기에, 사람은 그것을 만나면 낯설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 줄 모른다.

행복은 과거와 미래 속에서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과거에 행복했다고 다소 왜곡해서 기억하거나, 미래에 행복하기를 기대할 뿐이지, 현재 행복하다고는 거의 느끼지 않는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청미래 펴냄, 2007년), 197~200쪽).

지금 이곳에서 행복은 항시 부재중이다. 없어야 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순간 닥치는 행복은 '원래 없어야 하는 것'인데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이므로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편,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다. 줄기차게 추구해온 욕망의 정점에 아무것도 없음을. 그 텅 빈 정점을 보는 순간 느낄 참혹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기에, 꿈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에 도망쳐 버리는 게 아닐까. 꿈꾸는 대상이 허상이었음을 인정하기 두려워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마르케스를 만나면서도 되풀이 두려움을 느낀다. 여러 해에 걸쳐서 거듭 사랑을 고백하고 정성을 기울인 게리넬도에게 아마란타는 "자기 자신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면서, "죽는 그 날까지 혼자서 울면서 고독하게 평생을 보내리라고 결심하고는"(187쪽)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그녀의 이런 처사가 그동안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사람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후 우르슬라는 피에트로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이 깊은 사랑과 두려움의 싸움에서 두려움이 사랑을 이긴 결과라고 이해한다. 사랑이 깊기에 사랑이 사랑을 죽인 것이다.

내적 분열, 사랑의 핵(核)

그는,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만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39쪽)

인간의 마음은 본디 분열적이다. 무엇을 하고 싶을 때 동시에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이러한 내적 분열을, 연애하는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게 체험한다. 사랑하면서도 밀어내고, 도망치면서도 사랑한다. 아마란타가 게리넬도를 대하는 모습은 내적 분열하는 연애 심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게리넬도에게서 과거 피에트로에게 느꼈던 정열을 되살려보려고 애를 쓴다. 애를 쓴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정열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죽을 만큼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게리넬도를 거절한 후에도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에게 전쟁에 대한 최근의 형세를 알려주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으나 밖으로 나가서 그를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겨우겨우 그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160쪽)

사랑의 빛깔은 형형색색이라, 격렬한 정열이 아니어도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심정도 있고,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으면서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심정 또한 있다. 이런 분열적인 심정은 노년에도 그대로여서,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노인을 만나면서 추억으로 마음이 아파질 때면 공연히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서 그를 괴롭힌다.

 

ⓒ프레시안(손문상)

/박수현 문학평론가

맹신자들 - 4점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궁리

(네줄 요약)

객관을 빙자한 '반공주의자', '극렬 개인주의자'의 악의적인 프로파간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진영에 대항하는 자유세계

(1세계) 예찬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에 더해 사회 비판의 목소리들에 '니 마음이 병들어서 그래'라고 묵살할 수 있는

그럴 듯한 근거와 '단상'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중 운동' 자체를 냉소적이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이 책이 갖고 있는 날카로움은 대체로 (변화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의) 반공보수세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될 거다.




사람들의 불만, 현실을 타파하려는 열정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구체적인 불편함과 고단함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에, 멘토를 자처한 자들의 성공담과 정서적인 위무에 녹아내리거나 혹은

앞장선 누군가의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따라 피아식별 따위 없이 만만한 마녀를 사냥하며 '자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은 지금도 그런 모습들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맹신자들'이란 제목이 뭔가 힌트를 줄 거 같은 기대감을 던졌다.


사실 에릭 호퍼의 이 책은 그런 내 나름의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자는 이른바 '대중운동의 역동기', 맹신자들이

형성되고 사태를 압도하는 시기의 동학을 살피고 그들 내부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전제는 간명하다 못해

저열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에는 맹신자들이 위세를 떨치며, 그들은 주로 좌절한 채 증오와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는 대중 운동의 비전이나 내용엔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일반적인 양태와 동력원를 분석하려 한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일견 굉장히 야심차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어느 순간 사회를 들썩이는 무정향의 대중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원천에 대해 설명을 해보려는 거다. 무엇을 주장하고 요구하던 간에, 어느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간에

중요한 것은 그런 움직임 뒤에 숨어있는 에너지 덩어리이며, 그건 시공간을 초월한 일종의 규칙과 단계를 따른다는 가설.

촛불집회가 되었건, 황우석 사태가 되었건, 87년 민주화항쟁이건 아니면 광주항쟁이던 간에 그 기저엔 같은 게 있단 이야기다.


문제는 여러가지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왜 새삼 '맹신자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헤친 이시대의 고전'이란 카피를 달고 나왔는지,

그리고 조선이니 동아 따위 보수언론에서 이 책을 화제의 신간으로 내세웠는지 의심하고 있을 정도다. 그들이 이 책을 앞세워

말하려는 맹신자들은 누구일까,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을 강조함에도 종내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득 드러내는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에릭 호퍼의 반세기전 저작이 새삼 고전으로 떠받들릴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저자가 '대중 운동'의 정의조차 없이 글을 열며 '좌절한', '광신', '맹신' 따위 모호하고 무책임한 용어를 남발하는 건 참는다 치자.

우선 개인의 병리적 심리에 대한 통찰은 제법 날카로우나 이를 사회의 동학에 그대로 이입하고 충분한 근거없이 일반적인 동력으로

단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또 하나, 저자가 살던 냉전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채 반공 이데올로기와 오리엔탈리즘

따위의 편향된 사고 프레임에 기반한 편견들을 근거라고 제시하고 있단 점이다. 근거박약한, 응집력없는 조각난 '단상'들일 뿐이다.


결국 그는 '대중 운동'을 암묵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자율적이고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주적인 사람'은

대중 운동을 조장하고 독려하는 일부 음모가, 불평분자에 넘어가지 않으나 심리적으로 공허하거나 불안정한 사람, 소위 좌절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 운동이 촉발되고 진행된다는 식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심리 문제와 트라우마, 불만족스러움이

어떤 식으로던 현실을 타파하고 조직적 가치와 지향에 스스로를 투신하려는 자기 희생 의지를 낳는다는 거다.


저자는 사회 변화 혹은 소란의 원인과 에너지원을 개인에서 찾고 있지만, 정말 그런가. 그들이 어떻게 양산되고 있는지, 개인의

도덕성이나 참을성 이전에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지 않을까. 예외적으로 생겨난 불평분자가 아니라 특정 계층과 그룹에서 공통된

지반을 갖춘 불만과 좌절이 형성되고 있다면, 역시 구조적인 문제 혹은 모순이 있다고 봐야 한다. 저자는 그들을 그저 문제 해결의

의지나 탐색 노력은 없이 어떤 방향으로던 불만을 터뜨려 버리겠다는 마음만 가득한 '맹신자', 혹은 '광신자'라 일컫지만 말이다.


저자의 성찰 역시 견고하진 않으며, 그의 단호한 어조를 뒷받침할 사례들 역시 빈약하긴 매한가지다. 냉전기 전형적인 체제경쟁과

상호비방의 '자유진영' 논리와 어투를 그대로 가져다 쓴 소련 공산주의 비판에서는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적 한계와 이에 편승한

저자의 몰역사적 인식이 드러나고, 중국이나 아시아에 대한 언급들은 이들 지역이 오랜 기간 역사적 저발전 단계에 있었던 것처럼

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묻어난다. 그가 드는 사례들 역시, 단편적이고 편의적인 취사선택을 거쳐 주워섬길 뿐이다.


그저 당대의 믿음과 당대의 '상식'에 기댄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다. 아무래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승전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이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세력에 대한 냉전을 새롭게 시작한 시점에 인간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자유세계

이데올로그의 냄새가 너무 난다. 저자도 수차례 '악마'라 지칭하고 있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그리고 '광신자'로 싸잡아 묘사되는

'대중운동가', '사회 불평분자'에 대한 혐오는 왠지 2010년대 가스통을 들고 있는 '어버이연합'과 같은 냄새를 풍긴다.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 그의 책은 니체의 관점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목적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가족과 부족과 국가와 종교와 같은 특정 조직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필연적으로 제약하고 억압하게 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라는 점에서 니체가 떠오르는 거다. 그러나 니체가 보통 일반인과 초인(ubermensch) 사이의 간극을 말하며

인간의 고양을 말했다면, 이 책의 구도는 굉장히 협소하고 불편하다. 지독한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버전이랄까.


아마도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애초 저자의 의도와도 같이 사회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거나 '대중 운동' 일반에 대한 해명을

위한 참고 자료로 인용되기보다는, 주로 종교적 광신자나 폭탄테러범의 내면 심리를 읽는데 제한적으로 참조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책을 지금 한국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역시 마찬가지 맥락을 짚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개독인'들이 왜 '개독인'이 되고 말았는지, 라거나 '어버이연합'이 왜 '어버이연합'이 되었는지라거나.


물론 중간에 말했던 내 의심이 유효하다면, 이 책의 얼개를 손쉽게 뒤집어 씌운다면 '멍청하고 좌절한 대중'이 몇몇 선동가의

외침에 놀아나며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다'느니, '4대강이 무너진다'느니, 'FTA하면 나라 망한다'느니 따위의 선전선동을

'맹신'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가 더욱 간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런 책을 '고전'이라 상찬하며 서점 책꽂이에

진열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행간을 의심하게 되는 거다. 이 책에 시공간을 넘어설만한 통찰과 혜안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불안 - 8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은행나무

문득 불안해질 때가 있다. 내가 뭔가 길을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진 건 아닐까.

지금 살고 있는 게 제대로 사는 거 맞는 건가. 남들은 다들 잘 살고 있는 거 같은데 난 왜 아직도 이런 걸까. 왜 나만.

남들보다 뒤쳐지는 건 아닐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너무 아무 생각없이 살았던 건 아닐까. 뻔한 삶이 되는 건 아닌가.

흔히들 하는 말로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라는 혼란감에 젖어들면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어진다.


일종의 발작과도 같다. 아무 문제없는 듯이 평온하게 혹은 무탈하게 지나던 일상에 '불안'이라는 돌멩이가 하나

던져지고 나면 그 파장은 삽시간에 전신을 훑고 오르내리며 점점 큰 울림을 일으킨다. 강변 테크노마트를 흔들었다던

공진현상의 생체적 발현인지도 모른다. 앙상하게 헐벗은 겨울나무가 문득 불어온 칼바람을 온몸으로 버티며 그저

바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듯, 그렇게 불안감과 뒤이은 자학, 자괴감, 패닉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불안의 대부분은, 남들과의 비교에서 온다. 알랭 드 보통은 그걸 '지위'에 대한 불안이라 말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 그렇다. 남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피고, 남들이 어떤 가치를 좇아 달리는지 살피고, 남들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는지

살피면서, 그들을 따라 어깨 나란히 달리며 같은 것을 좇고 심지어 보다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너무도 당연해서 다들

의식조차 않고 '평범한', '주류적인' 길을 따라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다가, 문득 불안해지는 거다.


남들보다 더 갖고 더 사랑/존중받고 싶다, 라는 마음.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질리 없는 그 만족감,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가 눈앞에 나타나는 무한한 쳇바퀴 위를 달리는 것 자체도 지치는 일인데, 자기보다 앞서는 남들이 보이는 것은

더더욱 힘빠지고 좌절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 이러다가 쳇바퀴 위에서 아예 탈락하고 낙오자, 패배자, 루저 낙인이

찍힌 채 게임 오버되는 건 아닐까 싶어 가슴이 타들어간다. 더구나 실체도 불분명한 '능력'으로 열세우는 현대사회에선.


특히나 한국에서는 더더욱 심해지는 거 같다. 중고등학교부터 성적으로 줄세워지고, 직장에 들어가면 연봉으로

줄세워지며, 이후엔 결혼이니 사는 곳이니 집 따위로 다시 줄세워지는 끝없는 비교의 연속. 천박하고 단순한 잣대일 수도

있겠지만, 알랭 드 보통이 말하듯, '능력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창궐한 이 시대에는 남들보다 앞서고 성공하는 건

도덕적으로도 올바르고 바람직한 일이라고 선전되고 있는 거다. 그 결과 대부분의 경우 불안에 불안이 더해진다.


알랭 드 보통이라고 뾰족한 답을 갖고 있진 않다. 다만 그 불안감을 만들어내는 음습하고 악의적인 기반에 조금씩

균열을 만들어 내고자 한다. 그는 성공과 실패, 명예와 수치의 기준선을 바꾸고 개념을 흔들어보려 한다. 그런 작업들은

사실 철학과 예술,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뿌리깊게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것들이기도 하다. 주류적인 가치관과

위계감각에 기대지 않고, 나름의 가치와 철학을 갖고 중심을 세워 살아보려는 사람들이 이미 걸었던 길을 따르는 과정.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마르크스는 말했다. 이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능력이 있으면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 마련이라는 '능력주의' 아닐까. 한국의 경우 IMF 더욱 노골적으로 재물과 부유함만을 쫓아 달리는

물신주의는 굉장히 단순하고 명료한 기준 하나를 제시한다. '스펙'이라 이야기되는, 연봉과 가격으로 말해지는 화폐숫자들.

그렇지만 다들 체감하듯 그 '능력'이란 건 대개의 경우 우연적이고 필연적이다. 운, 그리고 환경과 조건의 영향이다.


여기가 자기최면적인 자기계발서가 파고드는 부분이다. 그리고 알랭 드 보통이 멈춘 지점이기도 하다. 별 생각없이도

남들만 따라가면 그뿐인 편하고 자연스러운 길, 물론 그길을 가다보면 만성적으로 불만에 휩싸이고 주기적인 공황상태에

빠질 지언정 그로부터 벗어나 곁길을 트고, 남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우러난 행복을 찾는 길이란 건

말이야 쉽지, 참 난감하고 막막한 일이다. 종교적인 메시지나 자기최면을 거는 진통제 같은 메시지 말고, 뭐 없을까.


글쎄. 책장을 넘기다 드문드문 맘에 와닿는 구절들은 있었다. 무엇보다 큰 위로가 되었던 건,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것들이 어느 시점엔가 나 혼자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불안감, 조바심에 대한 것들이었단 사실. 알고 보니 나 혼자만

갖고 있던 불안과 열패감이 아니라 모두에게 잠재해 있고 모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라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와 같이 그 쳇바퀴에서 내려서서 다른 길과 가치를 모색할 준비가 되었거나 모색하고 있다는 것.


어쨌거나, 불안과 싸우는 건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과 동의어일지도 모르겠다. 불안을 지워내고 걷어낼 수 없다면, 차라리

그 불안감의 정도를 통제하고 그에 잠식되지 않을 만큼 스스로 균형을 잡고 중심을 잡는 게 관건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와중에 필요한 건, 주어진 잣대와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스스로의 기준과 가치를 발견하고 세워내려는

노력,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함께 일구어갈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과 계속해서 교류하는 것 아닐까.



* 아래는 책에서 발췌한 몇몇 구절들.


"세상의 선은 역사적으로 거창하지 않은 행동들 덕분에 확장되기 때문이다. 당신이나 나나 더 나쁜 인생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렇지 않았던 것은 반은 드러나지 않은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다 지금은 사람이 찾지 않는 무덤에서 쉬고 있는 사람들 덕이다."

"부자가 되는 사람이나 빈자가 되는 사람이나 딱히 범주를 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즉 소득과 명예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다. 수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운과 환경도 있고, 병과 공포도 있고, 우연과 뒤늦은 발달도 있고, 적절한 시운과 불행도 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해본다면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창피해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의 행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힘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어떤 것에 계속 눈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것을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을 자꾸 보게 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이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것임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한다...정상에 오르면 곧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는 새로운 저지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직업에 포함된 많은 것들이 편집되고 오직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선망을 멈추지 못한다면, 엉뚱한 것을 선망하느라 우리 삶의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비할 것인가."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의 지위를 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격분한다. 그들이 냉혹하게 유혹의 책략을 썼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유혹을 당할 만큼 허영심이 컸다는 사실에도 화가 난다...아는 사람들 가운데 누가 입원실까지 와줄 것인지 생각해보면 만날 사람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부, 위신, 권력으로는 우리의 지위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지속되는 사랑밖에 얻을 수 없다면, 그렇게 살다가는 어린 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한다. 낡은 돌들을 보다 보면 성취에 대한, 또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 누그러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들, 우리를 기리는 기념비나 행렬이 없다 한들, 그게 어쨌단 말인가?"

"돈과 실용적인 직업이 영혼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또는 스탕달의 말을 빌리자면 "부드러운 감각"을 향유하는 능력을 부패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보헤미아의 역사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월든'의 소로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주류 문화와 갈등하면서도 자신있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직접적인 환경에서 작동하는 가치 체계, 우리가 사교적으로 어울리는 사람들, 우리가 읽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그래서 보헤미안들은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을 고르는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보헤미안들은 대도시에 살면서 지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을 피하고 대신 진정한 친구들과 매일 접촉할 수 있는 동네에 모여살았다."



스티브 잡스 - 6점
월터 아이작슨 지음, 안진환 옮김/민음사

고등학교 때였던가, 문/이과의 커다란 갈래길 앞에서 문과를 택한 이후로 내게 컴퓨터라거나 공학이라거나 IT 같은 것들은

점점 낯선 영역이 되고 있었다. 2000년대 초에 닷컴열풍이 불었을 때라거나, 한국 내의 싸이월드니 아이러브스쿨이니 뭐니

싸이트를 개발한 사람들이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나 길을 잘못 들었던가, 하고 가볍게 생각했을 뿐.


사실 1999년,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사고 인터넷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그런 기기장치라거나 IT와 관련된

것들은 그저 '주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기반으로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발전 양상이나 추세가 어떤지, 어떻게

더 편하고 그럴 듯한 기능을 추가할 수 있을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기술'보다는 '컨텐츠'가 중요하다 생각했다.


뭐랄까, 이과생에 대한 문과생의 다소 근거없는 우월감 같은 게 작용했던 거다. 한국의 '사농공상'의 뿌리깊은 이공계

천시는 아니라지만, '기술'의 발전은 당대의 사회적 필요와 철학에 의해 이끌어지며 그 기술을 활용할 알맹이가 있어야

비로소 유의미한 그릇 같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사회와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지금도 일정 부분은 그렇게 생각한다. 트위터가 마치 세상을 바꿀 1인 미디어의 도래를 알리는 듯 요란을 떠는 사람들이

있었고 넷북이 제3세계의 교육환경을 혁신할 듯 기대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아이폰'의 도래로 사람들의 생활이 엄청

스마트하게 변할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지만, 실제로 세상이 어디 그렇게 변했거나 변하고 있나. 아니다.


스티브 잡스, 그의 전기는 그렇게 '기술'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도 없던 내게 제법 재미있게 컴퓨터의 발전 과정이라거나

웹브라우저 표준 경쟁, 기타 IT 디바이스들의 진화와 응용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가 천재라거나 대단한 위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현재의 IT세상이 어느정도 보이는 거다.


저자는 제법 공정하게 스티브 잡스의 성격이라거나, 그의 리더십, 독특한 스타일 등을 묘사하고 있다. 묘사된 내용에

따르자면 스티브 잡스는 동양 철학, 혹은 선(禪)이나 뉴에이지에 영향을 짙게 받았으면서도 본인의 까칠하고 냉정한

성격이나 사회적이랄까 사교적이지 못한 대인 관계를 고수한, 결점 많은 보통 인간이다. 결함이 남들보다도 많아 보인다.


그렇다고 능력있는 CEO였거나 개발자였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를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했던 건, MS와의

싸움에서 일체형, end to end의 폐쇄형 방식을 고수하다 패배했던 그의 고집스러움이었다.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패배하고 이후 여러 시도들이 무위로 돌아갔는데, 아이팟을 필두로 폐쇄형 방식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면서였다.


풍향이 바뀌었을 뿐 아닐까. 우연히, 혹은 자연히 풍향이 바뀌면서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애플의 잠재력이 부각되었고,

그에 더해 아이팟이니 아이폰이니 아이패드니, 몇가지 아이템을 떠올리면서 이런 대역전극이 벌어진 셈인 거 같다.

잡스가 위대해서라거나, 혁신적이라거나, 천재라거나, 조직을 잘 운영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마케팅은 잘 했지만.


애플의 이미지가 갖는 '(독재자/빅브라더에 저항하는) 전사'의 이미지, '범속한 대중에 휩쓸리지 않는 섬세한 취향을

가진 생산자'의 이미지 같은 것들이 그런 거다. 그에 더해 그의 극적인 신상품 발표라거나, 특히나 한국의 경우

시대에 뒤처진 공룡 몇마리가 횡행하던 쥬라기공원같은 국내시장에 아이폰이 던진 충격으로 더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카카오톡같은 어플 하나로 얼마를 벌었네, 페이스북이 기업공개해서 얼마를 벌었네, 하는 기사들, 정확히 말하자면

소위 '대박'꿈을 확대재생산하는 기사들이 쉼없이 쏟아지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평전, 그의 평전을 덮으며 얻었던 건

그의 인생을 따라 훑어볼 수 있었던 IT의 발전상, 그리고 (금전적) 성공이 한 사람의 선택과 인생을 어떻게 우상화하는지.


기본적으로 남의 인생, 우연으로 점철되어 굴곡진 인생을 따라 읽으며 배울 점이란 게 있을까. 그의 철학이나 신념이

전면에 드러나는 인생이라고 해도 그럴진대, 마케팅에 능했던 한 기업가의 인생이란 걸 보면서. 매번 이런 류의

평전을 보면서 부딪히는 회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은 잘 쓰고 있지만, 그의 삶엔 관심없단 결론.



부의 미래 - 2점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청림출판

(2008년 입사 후 연수 과제로 제출한 글.)

시대를 막론하고 다들 자신이 살던 시대야말로 격동기이고, 앞날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위기의 시대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의 시대 역시 초강대국인 미국 중심의 일극 세계질서가 공고해지는가 싶더니 어느순간 근대 국가 중심의 세계질서가 흔들리며 국경의 개념, 시간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있다. 누구는 이를 미국 제국주의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자본의 거침없는 확장이라 보기도 하며, 혹은 전례없는 수준으로 인간 문명이 비약해 나가는 것이라고 낙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책 『부의 미래』의 저자 앨빈 토플러는 이러한 비관과 낙관 모두가 얼마나 취약한 현실인식에 기대고 있는지, 또한 지금의 변화가 얼마나 근본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는지에 대해 심도있는 성찰을 시도한다.


앨빈 토플러에 따르면 기존의 경제학이 갖고 있는 기계론적이고 몰역사적인 전제들에 대한 중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한다. 물질로 이루어진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지식이 그 가치의 중심을 이루는 지식상품들이 시장의 태반을 차지하고 비화폐경제가 갈수록 중요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경제이론에 기대어 사회 변화를 탐구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시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새로운 심층 기반, 즉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시공간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탐지하여 새로운 가설과 이론을 세워나가는 것이 다가오는 미래를 대비하는 현명한 방법이라고 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상용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인해 시간이라는 자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더이상 범용 인재를 생산하기 위한 규격화된 교육과 일반화된 커리큘럼으로는 지식사회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할 수 없으며, 포드식 공장제에 적응시키기 위한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체화시키는 것 역시 창의력과 개인의 영감에 기대야 할 미래 사회에서는 지양되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

그가 제시한 큰 문제 중 하나인 시간의 비동시성으로 인한 사회 발전의 지체 현상은 사실 한국사회에서 특히 두드러진 것이다. 농업에 기반한 전근대적인 시간개념, 산업화시대를 특징짓는 근대적 시간개념, 그리고 일부 첨단산업을 기반으로 한 탈근대적인 자율적 시간개념이 혼재되어 있으면서, 토플러가 말한대로 특히 관료 집단이나 구체제 세력이 사회 전반의 발전을 가로막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가 정신을 바탕으로 한 혁신적인 집단이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려 할 때, 이를 가로막는 구태에 젖은 집단들의 방해를 좀더 제어할 수 있다면 비동시적인 시간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 소모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공간상의 변화 역시 한국에서 여실히 감지된다. 한국이라는 일개 국가가 통제하기 쉽지 않은 가상 공간이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었고, 황사나 우주 산업 등 국가 차원에서만 접근할 수 없는 수많은 이슈들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어로 된 사이트가 세계에서 손꼽힐 만큼의 히트 수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은 이러한 공간상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이다. 다만 북한 사이트를 접근할 수 없도록 했다거나 영어병용 사이트가 많지 않아, 실제로 타국과의 자유로운 소통은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지만 이는 향후 개선될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최근에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 선정사업을 통해 우주산업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인 바 있지만, 이 역시 외국의 발사대, 선진적인 교육 기술, 우주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여러 국제적 합의들에 근거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토플러의 말대로 이 시대의 가장 획기적인 전기는 무엇보다 우주를 인간이 경제적으로 개척하기 위한 단초를 열고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역시 이러한 대오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토플러가 무엇보다 강조했던 것은 바로 지식 자체가 갖고 있는 혁신성이었다. 유사 이래 인간이 지금까지 이룩한 부를 가능케 했던 것은 바로 과학이었으며, 스스로에 대한 회의를 지속시키며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과학에 근거한 지식만이 이후 우리가 계속 발전하기 위한 원동력인 것이다. 프로슈머라는 단어가 어느 순간부터 유행하고 있지만, 생산하는 소비자라는 프로슈머는 과거의 상품경제가 지식 중심의 경제로 진보하는 하나의 중대한 지표로 이해하는 토플러의 깊은 통찰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더 많은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며 자본 경제에 더 많은 공짜 점심(free lunch)를 제공하고 있는 프로슈밍은, 생산성을 증가시키고 기존 관료와 구체제를 자극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예측이 전부 옳으리라 생각지는 않으며, 근본적으로 경제 기반이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석 연료에 기반한 지금의 경제가 분명히 난관에 봉착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과, 지식재를 다루는데 기존 경제학의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압축적인 성장 경로와 그로 인해 누적된 사회적 피로를 감안했을 때,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심도있는 성찰은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긍정의 배신 - 10점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부키


수많은, 그렇지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뿐인, 자기계발서 나부랭이들.

왜 이렇게 자기계발서니, 에세이니, 심리서적 따위가 많아진 걸까. 어느 순간 '멘토'를 자처한 사람들의 도덕교과서는

어떻고. 서점에 가서 자기계발서류의 도서가 빼곡한 공간에 가거나, 그런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굳이 섭렵하고 있다며

자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 어쩔 수 없는 답답함과 일종의 혐오감이 스물거리곤 한다는 걸 솔직히 고백한다.


"암은 내게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멋진 일이었다." - 고환암 생존자인 사이클 선수 랜스 암스트롱

"부정적인 인간들은 역겹다! 그들은 당신과 나처럼 긍정적인 사람들의 기운을 빨아먹는다. 그들은 훌륭한 회사, 팀, 관계의 에너지와 생명을 빨아먹는다...그런 사람들을 피하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이라 해도 당신을 고갈시키는 사람과는 관계를 끊어버려라. 당신은 그런 사람들 없이 더 잘 살 수 있다."

(* 보라색 구절들은 책에서 인용. 딱히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됨)


누군가 누군가에게 작정하고 가르치는 말투로 내리는 '교시'는 대개 뻔하다. 긍정적 사고, 긍정적 태도가 성공을 부른다!

긍정적인 생각은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끌어당깁니다, 라고 말하는 책들 말이다. '좋은 생각'류의

야릇한 '군대 정훈도서'같은 책이나 '시크릿'같은 책들은 제목만 바뀌고 저자만 바뀐 채 같은 메시지를 반복한다.


'긍정의 배신'이 보여주는 긍정적 사고의 허위성.

'긍정의 배신'은 이런 쓰레기들을 수십수백권 읽는 것보다 나은 하나의 성찰을 던진다.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는

메시지는 눈앞에 닥친 엄연한 위기와 곤란함을 오로지 자신의 마음의 문제로만 치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건 자신 이외엔

오로지 '자신의 성장, 발전, 성공'을 위해 존재하는 외부세계일 뿐이라는 자폐적이고 허위적인 태도를 낳고, 위기에 처한다.

(당연하다.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도 없이 무조건 답은 마음가짐의 문제, 한가지라고 하니까.)


"긍정적 사고에서 말하는 우주에 다른 사람들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것을, 예를 들어 똑같은 목걸이를 원한다면 어쩔 것인가? 아니면 선거나 축구 경기에서 우리와는 반대 결과를 희망한다면? '시크릿'에는 디즈니월드에 놀러갔다가 기구를 타기 위해 너무 오래 기다리는 바람에 실망한 콜린이라는 열 살 소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소년은 '시크릿' 영화를 보고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아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콜린이 '시크릿'에서 얻은 힘 탓에 뒤로 밀려나 기다리게 된 아이들은? 원하는 대로 여자에게 끌어당겨진 남자도 마찬가지다. 그 남자 역시 그녀와의 만남을 원했을까? 아니면 그녀의 환상 속에서 인질이 되어버린 것일까?"

"긍정적 사고의 세계에서 다른 사람은 당신의 보살핌을 받거나 당신에게 달갑잖은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당신을 보살펴 주고, 칭찬하고, 긍정해 주기 위한 존재다...사람들은 자기 감정을 차단하고, 그 결과 심각한 감정 결핍 상태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진정한 드라마로부터 물러선다는 것은 긍정적 사고의 핵심에 깊은 무력감이 놓여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왜 뉴스를 나 몰라라 하는가?...아무리 태도를 개조해도 '민간인 사상자 수가 늘고 있습니다.'라거나 '기근이 확산되어..'로 시작하는 뉴스 헤드라인을 좋은 소식으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부정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뉴스를 보지 말라는 것, 그러니까 환경을 바꾸라는 얘기는 우리가 희망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진짜 세상'이 저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셈이다. 이런 무서운 가능성에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찬성과 지지, 좋은 뉴스, 미소 짓는 사람들로만 조심스럽게 구성해둔 자신의 세계로 후퇴하는 것 뿐이다."



마음만 잘 먹으면 자신의 마음도 몸도, 심지어 온 세계가 자신에게 복종할 거라는 엉성한 환타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조잡하기 짝이 없는 '구라'일 뿐이다. 그 구라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신의 세계를 만들어낸 중세의 종교적 사고겠지만, 지금

'긍정적 사고'를 설파하는 저간의 흐름들은 이미 종교적 도그마를 넘어선 수준에서 사람들의 뇌를 딱딱하게 만들고 있다.


알면서 속아주는 '구라'의 효용(?)

물론 '구라' 나름의 효용은 있을 수 있다. 애초 이 책, '긍정의 배신'을 쓴 작가가 겪었듯 암이라거나 실직같은, 당장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아마 난 안 될 거야, 라는 패배적이고 부정적인

사고방식보다는 조금이라도 밝은 면을 보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며 의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태도를

강요하는 병원의, 사회의, 사람들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는 건 절대로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순간에 형을 면제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매달린, 죽어가는 사람의 낙관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실제로 암을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심리학자들은 자기들 용어로 '이점 발견'이라고 하는, 암에 긍정적인 감정을 키우는 방식으로 기울었다."

"그 도그마가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감정과 병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유방암 환자들에게 뭔가 할 일을 부여한다. 치료 효과가 나타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환자는 자기 기분을 관찰하면서 세포 차원의 전투를 돕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한다...동시에 그런 도그마는 암 연구 및 치료 산업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외과 의사나 종양학 의사 이외에 행동과학자, 치료사, 동기 유발 카운슬러, 훈계를 늘어놓는 자기계발서 저자들도 참여할 길이 열렸다."

"유방암을 선물로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자리에서 밀려나 빈곤을 향해 추락하고 있는 실업자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을 '기회'로 받아들이라는 말을 듣는다...긍정적이 되면 구직 기간에 기분을 더 좋게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더 빠르고 행복하게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들일지 모른다. 다들 알고 있지만 애써 눈돌려 밝게 보려고 하는 와중에 굳이 찬물을 끼얹는 건 무슨 놀부 심보냐고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력으로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일들에 대응하고 버텨내기 위해서 나름의 방식으로 '도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그 도전에 잘 대응하면 '더 큰 성취, 발전, 성숙' 따위가 수반될 거라는 믿음. 다만, 그 이면이 문제라 그렇다.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기 위해 억압되는 감정과 정당한 분노는 어떻게 해소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애썼음에도 끝내 실패하는 경우에는 어떡해야 하는가. 나아가서는, 개인적 차원의 긍정적인 사고 말고도

예컨대 발암물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거나 정리해고 실시요건을 강화하는 식의 구조적 해결책이 옳은 경우도 있지 않을까.


다시 묻는다. 가난, 실업, 비만은 개인의 마음의 문제인가.

그렇게 낙관론과 긍정적 사고 속에서 사람들은 개인적 차원에서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개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해왔다. 병을 이겨내고 취직을 하고자 긍정적인 마음, 밝은 생각만을 줄곧 가지려 노력하고, 가난을 이겨내고자 '치즈는

누가 옮겼는지' 주저앉아 따져볼 겨를도 없이 치즈를 찾아 바삐 헤매게 된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이제 그건 중요치 않다.


"암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은 감정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끔찍한 비용을 강요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긍정적 사고는 분노와 공포라는 실체적 감정을 부정하고 쾌활함의 분칠 아래 묻어 두도록 요구한다. 불평을 듣느니 가짜 쾌활함을 상대하는 것이 나은 만큼 의료 종사자나 환자의 친구들에게는 몹시 편리하다."

"긍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이제는 성공을 이끄는 자기실현적인 예언이 되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고용주나 긍정적 사고를 믿는 동료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의미심장한 실패로 이어진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분명히 그렇다. 권위자들은 부정적인 사람들을 떨쳐 버리라고 강조하면서 또 하나의 경고를 보내고 있다. 항상 미소를 띠고, 쾌활하게 행동하고, 흐름을 따라라. 그렇지 않으면 배척될 각오를 하라."

"긍정적 사고가 실패해 치료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암이 퍼지게 되면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럴 때 환자가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 충분히 긍정적이지 못했다고, 애초에 암이 생긴 것도 부정적인 태도 탓이었다고 자책하게 된다. 이 지점에 이르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는 '이미 피폐해진 환자에게 추가적인 부담이 된다'고 한다."

"작가로 변신한 한 생존자는 유방암이라는 선물을 계시적인 힘의 발현으로 해석했다. 그녀는 '암이 준 선물'이라는 책에서 '암은 진정한 삶으로 가는 차표다. 암은 진정한 뜻에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으로 가는 여권이다.'라고 썼다...이 모든 긍정적 사고는 유방암을 통과의례로 변형시켜 버린다."


그렇게 불만과 분노, 현실에 대한 성찰같은 걸 도외시한 결과는 자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야말로 사방에서 드러났다.

긍정적인 사고, 밝은 사고의 마법을 믿는 사람들의 눈빛은 대개 광신도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턱없이 순진한 기대와 희망을

부지런히 배반하는 현실 앞에서, 그들은 더욱 코너로 몰린다. 무조건 믿고 위로받을 것이 절실해질 만큼. 비합리의 세계다.


외부적으로는 당장의 현실적인 경고와 신호들을 무시한 채 긍정적 사고만 따르다가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세계금융위기가

책에서는 큰 예시로 꼽혔다. 나더러 예를 하나 꼽으라면, MB 정부의 숱한 정책적 실패 중 하나를 꼽겠다. 4대강 사업은 어떨까.

회의적인 목소리, 불평과 비판 여론을 무시한 채 자기들만의 낙관론 속에서 미친 듯 내달렸던 4대강은 파국을 맞고 있다.


인민의 아편, '긍정敎' 혹은 '정신승리법'을 권하는 사회.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않거나 못한 채 무조건 긍정하자는 절대적 메시지는 당연히 문제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위험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처음에 말했듯 갈수록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쓰레기같은 책들을 볼 때

느낀 답답함과 혐오감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정신승리법'을 점점 더 필요로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했다.


왜 그렇게 된 걸까. 왜 서점엔 갈수록 자기계발서니 동기유발 코치서적이니 따위가 기승을 부리는 걸까. 사람들이 '긍정적'이

되려 한다고 해서, 꼭 합리적인 의심이나 성찰, 회의적인 태도 따위를 버리기로 작정했다고 생각진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류의

책들이 잘 팔려나간다는 건 하나의 징후다. 거대한 무기력감, 절박함, 패배의식이 자라나고 있다는 반증 같은 것.


이 책이 아쉬운 건 그 지점이다. '긍정'의 힘을 전도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예견하지 못한 경제위기나 삶의 위기가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 반대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시기는 아닐지, 그렇게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구조적

난관에 봉착해 하릴없이 '정신승리법' 따위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거라면. 그에 대한 개인적 차원의 답은 있긴 할까.


"물질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태도를 바로잡고, 감정의 반응을 수정하고, 자신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자기를 향상시키는 다른 방법, 예컨대 교육을 통해 어려운 신기술을 습득한다거나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사회 변혁에 나서는 것은 생각할 수 없을까? 하지만 긍정적 사고에서는 모든 도전이 내면적인 것이며 의지를 통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만난 책 한 권, 책을 슬쩍 열어보니 미스코리아 머리를 한 어느 여자가 보인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 모르겠지만, 93년 11월에 나온 책이니만치 그 이전에 찍은 사진일텐데 지금이나 그때나

별 차이가 없다. 표정이 어색한 건 비슷하려나.

93년까지 썼던 일기들을 모아 발간했다는 책인데, 다시 한번 실감한다. 말이나 글을 그럴 듯하게 잘하기는 참 쉽다.

문제는 그런 번드르르하고 군자연한 말들이 아니라, 꾸준히 관찰하고 지켜보지 않으면 알수 없는 행동의 격.

93년 11월 1일 발간된 박근혜의 일기 모음집,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다.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눈에 띄인 책, 사실 눈에 뜨이게 전면에 배치되어 있기도 했다. 상실의 시대니 문화유산답사기가 저렇게 빼곡히

꽂혀있어 찾기가 쉽지 않은 것에 비하면, 책방에서도 공주 대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이 참 자극적이다 싶었는데-자기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나지 못해 아쉽다는 함의 속에 약간의

선민의식과 잘난척하는 '공주' 냄새가 난다면 과한 걸까-아니나 다를까, 몇년 후 이 일기 모음집은 '고난을 벗삼아

진실을 등대삼아'라는 이름으로 증보된다. 그 이름은 근데 더 잘못 지었단 느낌을 지울 길 없다. 고난과 진실이라.


기념삼아 사둘까 하다가 말고서는 집에 와서 찾아보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이 책은 이미 오래전 절판된 책.

헌책방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흥미로운, 그렇지만 다소 찝찝한 책이다.

당신이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생색내기 식 김치담기 쑈를 하면서 스티로폼 박스에 그대로

김치를 담지는 않았겠지요. 아이들한테 환경 호르몬을 잔뜩 주입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사진은 연합뉴스)




설득 (반양장) - 10점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문학동네

"사랑과 결혼, 그 풀리지 않는 함수관계에 대한 사려깊은 답안, 읽고 나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ytzsche.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으로 필명을 떨친 그녀가 죽기 일년 전에 남긴 유작이자 또다른 명작이라 감히 칭하고 싶다.

사랑이란 감정이 어떻게 맥놀이하는지를 보여주는 건 이미 숱한 작가들이 숱한 작품에서 묘사하려 애썼던 것이지만,

제인 오스틴이다. 그녀의 문장은 비단처럼 매끄럽고 섬세하며, 그 와중에 날카롭고 예민한 성찰까지 녹아들어 있는 거다.

게다가 이미 이전에 놓쳐버렸다,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다시 어떻게 안에서부터 불붙기 시작하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꺽이고 젖혀지는지, 그리고 다시 만개하는지를 이토록 흡인력있게 묘사해내다니.


결혼이란 문제는 흔히 사랑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 양 이야기하는 게 현명함을 가장하기 쉽다. 자못 어리숙하다느니,

세상물정 모른다느니, 결혼은 또다른 현실이라느니 따위의 야박한 '설득자'들 앞에서, 사랑과 결혼,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는

식으로 편히 갈라놓고 이야기하는 건 제인 오스틴이 목도했던 근대 초기의 세태와 작금의 세태가 과히 다르지 않은가 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프레임도 그런 식이다.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결혼을 디딤돌로 얻을 수 있는

물적 조건-적나라하게 말하자, 그때나 지금이나 재력과 '신분'을 업그레이드할 기회인 거다-에 집중하라!


오스틴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펼쳐 놓으며 그들의 결혼, 혹은 결합이 서로에게 어떤 시너지를 줄 수 있는지, 면밀히 따져묻는

당대인의 모습을 눈 앞에 보일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런 세밀화의 풍경엔, 불타오르는 사랑 앞에 모든 게 무너져내리는 듯하던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눈먼 사랑이라거나 그 반대의 팜므파탈이 나설 공간은 없다. 얼핏 보기엔 우리 옆을 스치는 여느 남녀의

범상한 연애담과 결혼담에 지나지 않을 법한 담담하고 평이한 풍경 속에, 그녀는 잃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마음이 다시 열리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 국면을 너무도 강렬하게 돋을새김해 놓는다.


하여, 사랑은 판타지일 뿐이라며 어른의 조언을 따르라는 '설득', 그에 반해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또다른 '설득', 혹은

지난 일은 어쩔 도리가 없이 지난 일일 뿐이라는 옛사랑의 '설득' 따위에서 방황하며 더러는 길을 잃고 더러는 홀로 야위어가던

앤 엘리엇은, 누군가의 설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로맨스를 찾아간다. 그건 처음부터 로맨스로 시작해 무책임한 결말을 비워두는

이야기도 아니고, 시니컬한 냉소로 시작해 황폐한 풍경만 지루하게 내뿜는 이야기도 아니다. 주위의 설득으로 이미 한차례,

로맨스를 버리고 '현실'을 좇았던 여인이 이제는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의 로맨스를 복구해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연애담 혹은 결혼담은, 둔한 눈으로 보면 얼핏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라며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삶의 어떤

결정적인 국면을 포착해내어서는 그 안에 숨어있는 내면의 폭풍과 결단의 순간들을 너무나도 특별하고 따뜻한 시각으로

어루만져 주는 거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감정이 격동했던 이유 아닐까 싶다. 평이한 일상에 그토록 밀도높은 생기와

현실감, 극적인 감각을 불어넣어준 오스틴 덕분에, 심장이 문득 두근거렸다. 어떤 의미로던 이 책 '설득'은 너무도 늦게 한국어로

번역된 거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철수와 박원순. 최근 갑작스런 등장과 폭발적인 지지도로 한국의 정당정치제도를 일거에 희화화하고 있는

그 두 명의 이름이 어느 까페, 어느 책에서 문득 눈에 띄어 집어들었다.


2008년 6월에 '안철수 연구소 사람들'이 써낸 책이라 되어 있는 이 책 앞머리에는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와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로 재직중이던 그의 추천사가 적혀있는 거다. "안철수연구소는 대한민국에서 기업과

기업인이 존경받을 수 있음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시민운동 영역과 재계(중소기업)의 영역, 서로 다르다면 꽤나 다른 영역이지만 두 사람 정도의 네임밸류라면

이미 2008년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을 테지만, 막상 요새 둘의 드라마틱한 등장과 이후 숨가쁜 전개를

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언제부터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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