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 월터 아이작슨 지음, 안진환 옮김/민음사 |
고등학교 때였던가, 문/이과의 커다란 갈래길 앞에서 문과를 택한 이후로 내게 컴퓨터라거나 공학이라거나 IT 같은 것들은
점점 낯선 영역이 되고 있었다. 2000년대 초에 닷컴열풍이 불었을 때라거나, 한국 내의 싸이월드니 아이러브스쿨이니 뭐니
싸이트를 개발한 사람들이 돈을 엄청나게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나 길을 잘못 들었던가, 하고 가볍게 생각했을 뿐.
사실 1999년, 대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컴퓨터를 사고 인터넷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그런 기기장치라거나 IT와 관련된
것들은 그저 '주어지는 것'들이었다. 어떤 기반으로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발전 양상이나 추세가 어떤지, 어떻게
더 편하고 그럴 듯한 기능을 추가할 수 있을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기술'보다는 '컨텐츠'가 중요하다 생각했다.
뭐랄까, 이과생에 대한 문과생의 다소 근거없는 우월감 같은 게 작용했던 거다. 한국의 '사농공상'의 뿌리깊은 이공계
천시는 아니라지만, '기술'의 발전은 당대의 사회적 필요와 철학에 의해 이끌어지며 그 기술을 활용할 알맹이가 있어야
비로소 유의미한 그릇 같은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사회와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했다.
지금도 일정 부분은 그렇게 생각한다. 트위터가 마치 세상을 바꿀 1인 미디어의 도래를 알리는 듯 요란을 떠는 사람들이
있었고 넷북이 제3세계의 교육환경을 혁신할 듯 기대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며, '아이폰'의 도래로 사람들의 생활이 엄청
스마트하게 변할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지만, 실제로 세상이 어디 그렇게 변했거나 변하고 있나. 아니다.
스티브 잡스, 그의 전기는 그렇게 '기술'에 대해 무지하고 관심도 없던 내게 제법 재미있게 컴퓨터의 발전 과정이라거나
웹브라우저 표준 경쟁, 기타 IT 디바이스들의 진화와 응용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가 천재라거나 대단한 위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현재의 IT세상이 어느정도 보이는 거다.
저자는 제법 공정하게 스티브 잡스의 성격이라거나, 그의 리더십, 독특한 스타일 등을 묘사하고 있다. 묘사된 내용에
따르자면 스티브 잡스는 동양 철학, 혹은 선(禪)이나 뉴에이지에 영향을 짙게 받았으면서도 본인의 까칠하고 냉정한
성격이나 사회적이랄까 사교적이지 못한 대인 관계를 고수한, 결점 많은 보통 인간이다. 결함이 남들보다도 많아 보인다.
그렇다고 능력있는 CEO였거나 개발자였을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를 다시 애플로 돌아오게 했던 건, MS와의
싸움에서 일체형, end to end의 폐쇄형 방식을 고수하다 패배했던 그의 고집스러움이었다.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패배하고 이후 여러 시도들이 무위로 돌아갔는데, 아이팟을 필두로 폐쇄형 방식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면서였다.
풍향이 바뀌었을 뿐 아닐까. 우연히, 혹은 자연히 풍향이 바뀌면서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애플의 잠재력이 부각되었고,
그에 더해 아이팟이니 아이폰이니 아이패드니, 몇가지 아이템을 떠올리면서 이런 대역전극이 벌어진 셈인 거 같다.
잡스가 위대해서라거나, 혁신적이라거나, 천재라거나, 조직을 잘 운영했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마케팅은 잘 했지만.
애플의 이미지가 갖는 '(독재자/빅브라더에 저항하는) 전사'의 이미지, '범속한 대중에 휩쓸리지 않는 섬세한 취향을
가진 생산자'의 이미지 같은 것들이 그런 거다. 그에 더해 그의 극적인 신상품 발표라거나, 특히나 한국의 경우
시대에 뒤처진 공룡 몇마리가 횡행하던 쥬라기공원같은 국내시장에 아이폰이 던진 충격으로 더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카카오톡같은 어플 하나로 얼마를 벌었네, 페이스북이 기업공개해서 얼마를 벌었네, 하는 기사들, 정확히 말하자면
소위 '대박'꿈을 확대재생산하는 기사들이 쉼없이 쏟아지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평전, 그의 평전을 덮으며 얻었던 건
그의 인생을 따라 훑어볼 수 있었던 IT의 발전상, 그리고 (금전적) 성공이 한 사람의 선택과 인생을 어떻게 우상화하는지.
기본적으로 남의 인생, 우연으로 점철되어 굴곡진 인생을 따라 읽으며 배울 점이란 게 있을까. 그의 철학이나 신념이
전면에 드러나는 인생이라고 해도 그럴진대, 마케팅에 능했던 한 기업가의 인생이란 걸 보면서. 매번 이런 류의
평전을 보면서 부딪히는 회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은 잘 쓰고 있지만, 그의 삶엔 관심없단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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