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라는 부분에까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을 시도할 수 있게 만든 게 전적으로 프로이트의 몫이라고

말하는 건 과할지 몰라도, 그로부터 정신분석이라는 '과학'이 출발한 건 사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고찰하고 분석해내는 인간의 능력이 정신 자체에까지 뻗어가 체계를 갖추고, 인과(내지
 
상관)관계를 발굴하고..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이성과 정신세계 자체를 분석 대상에 올렸다는 점에서, 자칫

외부 세계의 존재 그자체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극한의 지적 탐험이랄 수 있겠다.


흔히 정신이라고 뭉뚱그려지고 있는 것이 실은 의식의 얇은 표피 이면에 광대한 무의식의 세계(그의 후기엔 이드,

에고,슈퍼에고로 나누기도 하지만..)로 존재한다는 것 하나, 꿈이나 히스테리, 혹은 예술가의 승화된

작품세계에서 순치되거나 굴절된 형태로 그 무의식이 나타난다는 것 둘, 그리고 의식의 세계, 혹은 문명의 세계가

압박하고 있는 그 무의식 혹은 원시적 세계의 본령인 원초적 성적 본능(리비도)의 충족을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는 것 셋.(물론 융 같은 경우는 무의식의 본령이 성적 본능에 있다는 전제에 문제제기를 했다지만)


모든 문학작품에서 '발견'해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보이듯 모든 것을 성욕의 충족 내지 표현으로

환원하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없지 않다. 그리고 유아기의 성욕과 그로 인한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를 이후

삶의 방식들에서 확장된 은유로써 유추해 내는 건, 어쩌면 일상의 권력관계의 양태를 뭐랄까, motherous and

fatherous(이런 단어가 있다면)의 두 대표적 형식으로 대별하는데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담
 
그의 정신분석학은 일종의 정치학으로 평가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잡생각.


우야튼 이런 점에서, 무의식이 단지 유아기의 성적 욕망으로 결정된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융의 비판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만인은 무의식 앞에서 평등하다." 만약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란 당위적이기만 한 속빈 선언의

내실을 채우고 싶다면, 아마도 "무의식 앞에서'라는 한정적 수식어가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모나리자를 그려낸 다빈치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도, 그리고 히스테리를 앓거나 개꿈을

꾼 갑남을녀도, 무저갱의 무의식으로부터 끌어올려진 욕망의 발생/저항/충족(혹은 왜곡된 충족)이라는 점에서

동일성을 획득한다. 어미의 젖을 탐욕스럽게 빠는 어린애의 욕정, 한용운도 어디선가 애타게 불렀던 '우리

누이'에 대한 은밀한 애정, 다빈치가 그려낸 불쾌한 '어머니의 유혹하는 미소'(@ 모나리자).


도발적이고 흥미로운 관점인데다가, 세상을 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해주는 풍요로운 만화경이다.

원하면 사서 끼고, 싫음 말고.

예술, 문학, 정신분석 - 8점
프로이트 지음, 정장진 옮김/열린책들

"사람들이 계속해서 아이들을 낳으려면, 덜 방황하려면, 거대한 고독 속에서 사회적 위험물로 변하지 않으려면

모두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해야 한다는 것이 통치자들의 판단이었다...진정한 사랑이라는 신화를 장려해야 했다.

개인들의 실패한 사랑은 어디까지나 실수로 여겨져야 한다. 물론 한두 번 실패했다고 믿음을 잃어선 안 된다.

제 몫으로 만들어진 반쪽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적 신화를 믿는 한 사람들은 맞는 짝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그 광적인 요구는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몇몇 운 좋은 사람들이나 사랑을 누렸지만 이제 좋은 것은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는 민주주의 이상에

따라 우리 사회는 사랑을 모든 이와 그네들 일생의 중심이자 기본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 구도가 완성되려면

어느 정도 성적 충동을 해방시켜야 했지만 대신 성행위는 어디까지나 사랑의 수단이란 걸 인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랑 없는 섹스는 모욕이고 착취이며 상대를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란 생각은 금세 만인의 지지를

얻었다...


공권력은 일체의 감상적 사랑을 배제한 섹스만으로는 대단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간파했다. 그러므로

대중을 시장 원리에 복종시키려면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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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를 보다 보면, 모든 것이 사랑을 위해, 혹은 사랑을 기다리기 위해 준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녀와 데이트를 하고 싶으면 자동차부터 장만하고, 멋진 남자를 잡으려면 마스카라부터 사라고, 남편에게

사랑받으려면 밥솥을 바꾸고, 아이들의 사랑을 얻으려면 보험에 들어라는 식이다. '죽어도 좋아'란 영화는,

이제 어르신네들까지 쑤석거리면서 그 사랑찾기 대열에 합류시키려는 '놈들'의 프로파간다일지 모른다.

OST는 끝까지 반짝반짝했지만, 스토리는 갈수록 값싼 광택을 내는 플라스틱보석처럼 후져버린 '소울메이트'..

뒤늦게서야 우르르 봐버리고 나서의 씁쓸한 뒷맛을 말끔히 씻어낸 소독용의 매콤한 공업용 메탄올같은 책.

단 메탄올은 에탄올이 없을 때 고작해야 입에 머금을 정도의 대용품일 뿐, 삼키면 죽는다.

사랑하면 죽는다 - 6점
마르셀라 이아쿱 지음, 홍은주 옮김/세계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닌 게 아니라, 유난히도 뚜렷하게 새겨지는 스와치 시계의 초침소리를 들으며, 일초일초 늙어가고 있다고

실감할 때가 있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댁에서 있던 구식 괘종시계의 똑, 딱, 하는 초침소리도 그렇게 명징했지만,

어느새 다가오는 '늙음'의 표징들-그러니까 '졸업', '취업', 쉽게 가시지 않는 '숙취'..같은 것들-을 무시하지

못하게 된 지금에야 초침소리 속의 재우침을 느낀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렇게 계절은 돌고 돌 뿐이지만, 인간은 한 철 살고 지는 메뚜기처럼 그렇게 뛰다가

만다. (비록 47층에서 바라보는 하늘이야 늘상 흐린 황토빛이지만..) 어쨌든 봄빛이 일렁이는 와중에 나는, 살찐

돼지가 되어가는 게 아닐까 우울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봄빛 - 8점
정지아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시간이 없어서 대강 얼개만 써두었던 리뷰..다시 풀어서 쓰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를 쏟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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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후퇴

2007년에 87년 6월 항쟁 20주년 기념으로 프레시안이 주최했던

좌담회를 모은 책. 당시 대선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상황서

나온 이야기들은 불과 1년도 안 되어 너무 멀어진 '얘기'거나 혹은

너무 섬뜩해진 '예기'가 되어 버렸다.

이제 한국은 어느정도 민주주의가 고착되었노라고 생각했던,

그래서 농담삼아 MB가 되면 이민간다했었는데..이렇게 쉽사리

국내외 정치/경제/사회의 전분야에서 망가져버릴 줄은 몰랐다.

지난 20년을 조망하는 책을 보면서, 고작 지난 몇달간..그리고 향후

5년간 얼마나 '희망'과 '성숙'이라는 단어와 멀어져야 할지

답답한 마음에 몇번이나 책을 처박아두곤 했다.


#1.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역량 간의 갭

불꽃놀이 같은 열망의 폭발은 소진의 징후일지도. 예컨대 87년 5월항쟁의 폭발은

6,7,8월의 노동자대투쟁을 외면했다. 딱 그만큼의 각성에 알맞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그 소란스러움과 야단스러움을 감당할

준비가 된 '시민'을 키우지 않는 교육/매체. 오히려 시민 의식과

역량을 소진시키기만 하는 교육/매체. 타협과 협상, 소통을 모르는

이뭐병..MB는 어쩜 이 시대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그를 뽑은 '우리'라는 양비론으로 가고 싶지도 않고,

뽑았으니 닥치라는 놈은 너나 닥치시고, 정치적 상품으로서의 MB리콜운동을

말하며 정치를 경제적 메타포로 헷갈리게 하고 싶지도 않다.)


#2. 열망이 있기는 할까?

독재/군사정권/억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민주주의' 말고.

절차적 민주주의 말고, 인간답게 살기 위한 선결조건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먹고 사는 데 도움 안되는 것들로 싸잡아 평가절하되는 것들.

'실용'이라는 단어에 매료당한(당했던) 사람들.


#3. 몇가지 내 생각

한국에서 민주적 문화의 성숙을 막는 몇가지 질곡. 군대/군대식

학교/군대식 기업/유교적 가부장제/되먹지 않은 어른들.

촛불든 아이들을 보면서, 이제 난 아무리 싫어도 책임을 져야 하는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이 사회에 이러저러한 빚을 지고 있으며

이러저러하게 사회를 변화시켜왔던 어른. 평생 아이인 척 살 수

없을 바에야 제대로 된 어른이 되어보겠다고 비로소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하준식의 사회적 대타협이란...현상에 대한

문제의식과 우려, 그리고 지향까지 동의하지만 경로면에서

매우매우 불만스러운 이야기.

또하나, 비판만이 아닌 삶의 긍정을 말해야 하는-자본주의의

공포 문화/선망 문화를 넘어서기 위해-시민운동 혹은 문화운동이

사회나 삶의 모순, 질곡의 근본원인들을 지적해내는 까칠하고도

불만섞인 시각과 어떻게 엮일 수 있을까. 항상 궁금했던 문제..


지금 내 삶이, 사회가 이러이러하게 문제가 있다, 불만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지금 당신 삶이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으니 괜히

경쟁의 논리와 박탈의 틀 내에서 시기하거나 좌절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한입으로 두말하기..의 위험을 벗어나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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