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띠보님께서 [이벤트] 14회 한겨레문학상 <열외인종 잔혹사> 리뷰어 모집이란 포스팅에 "예쁘게 귀엽게 섹시하게
 
당황스럽게 유머러스한 댓글"
을 달면 '열외인종 잔혹사'라는 책을 배려해 주시겠다 하였다. 전혀 예쁘지도 귀엽지도

섹시하지도 당황스럽지도-아마 1그램쯤 당황스러우셨을까-유머러스하지도 않은 댓글을 달았지만, 경쟁률이 1:1이 되지
 
않았던 예기치 못한(나로서는 기적적인!) 사정이 도래하여 책을 받아 보았다. 봉투에 찍힌 도깨비 그림 도장이 귀엽다.


이야기는 단숨에 읽혔다. 책을 받아보고 잠시 몇장 펼쳐볼까 했던 게, 세네 시간만에 다 읽어버렸다. 그런데 읽고 나니

뭐랄까..너무 허했다. 이야기의 구조나 전개가 무슨 골다공증 마냥 구멍 숭숭 뚫린 엉성한 모양새여서가 아니라, 아주

매력적이고 스피디하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은 지독하고 잔혹한 현실에 대한 지독한 은유였기 때문이다.


뫼비우스 띠의 앞면.

주위에서 너무 쉽고 익숙하게 접하던 캐릭터와 공간들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천만명이 사는 서울에선 딱히 희소할 것도 없는 10대 불량청소년 하나, 눈에 밟히고 발에 채이는 30대 남성노숙자 하나,

고만고만한 대학을 나와 인턴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며 수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정규직이 되려는 20대 여성 하나와

매일 군복을 갖춰입고 탑골공원에서 온갖 빨갱이들이 등장하는 시국연설에 열을 올리는 60대 할아버지 하나라는 등장

인물들 말이다. 그리고 마치 길안내하듯 자세하게 그려지는 압구정역 3번 출구 옆 맥도널드와 코엑스 배스킨라빈스와

푸드코트, 혹은 홍제동과 독립문역의 풍경까지.


어쩌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들이다. 노숙자에, 구직자에, 완고한-시니컬하게 표현하자면 '시대의 부산물'이랄-

친미보수우익 노인네, 그리고 번쩍거리며 재탄생한 용산역과 한국 자본주의경제의 상징, 코엑스몰과 압구정까지.

코엑스몰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이 잊지 않고 순례하는 명소 중 하나로 자리잡은 지 오래기도 하다.


그런 공간이 어느 순간 전쟁터로 변한다. 방화용셔터가 전부 내려가 외부로부터 격리되며, 대량의 인질극이 발생하고,

여차하면 당겨진 방아쇠로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 내가 아는 구체적인 지역에서 벌어진다는

생생한 현실감에 되려 서늘한 날이 서면서 그 공간이 낯설어진다. 어라. 마찬가지다. 지하철 안에서, 혹은 버스 안에서

한번쯤 마주쳤을 동시대인들이 문득 괴물같은 상황에 떠밀려 '모처럼 심장터져라 뛰는' 지경에 이른다. 낯설다.

그러고 보니 저렇게 아드레날린이 폭주하는 상황이란 건 얼마나 드문 상황인가. 머리끝까지 열이 뻗치거나 강렬한
 
열망에 의해 쉼없이 뛰어다니는 상황이라는 건. 혹은 스스로의 괴물같은 내면을 마주하게 되는 건.

"뭐 이런 카니발도 나쁘진 않네요. 사람 죽어나가는 게 좀 끔찍하긴 해도, 서울에서 하루에도 수백명씩 교통사고와 암으로 송장이 되어 죽어나가는데 이깟게 뭐 대수겠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뭐랄까? 이번 정규직 사원 인사 발탁 건 말이에요. 음..."


뫼비우스 띠의 뒷면.

연미복에 양머리를 뒤집어쓴 '최악'의 멤버들. 양털이 복슬복슬한 그 양머리는 단정하지만 과장스런 연미복 차림과

기괴한 매치를 이루며 왠지 이 땅위에 있어서는 안 될, 혹은 있으리라 상상할 수 없는 기괴한 생명체로 나타난다.

그들의 '양머리 카니발'이란 게 시작되는 순간 더더욱 비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공간. 노숙자들의 서툰 쿠데타가

가십처럼 벌어졌던 용산역에서처럼, 그치만 그보다 훨씬 강력하고 전면적으로 세상이 낯설어진다.


그런 낯선 것들은 어느 순간 온전한 지금 이대로의 모습과 겹쳐져 보이니 또 이상한 노릇이다. 양머리를 뒤집어

쓰고 사방에 총을 난사하는 그들, 그리고 그들의 잔혹한 살인행위와 웅얼대는 혁명선언도 묘한 기시감을 수반한다.

그러다 보면 번쩍이는 은빛 총을 움켜쥐고 양머리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는 게임중독 10대 청소년이 양머리들보다

괴물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에 봉착하기도 하고, 양머리들의 난동이 되려 인간적이랄까, 안쓰럽달까, 그런

동정 혹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게다.

"그런데 우리들은 모두 양머리들뿐이야. 목자가 없어. 그래서 불안해지기 시작한 거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어. 그래서 우리는 목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지. 그런데 왠걸. 우리가 목자라고 믿고 싶던 대상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기대를 배반했어. 또 어떤 얼어 죽을 사이비 목자들은 우리를 썩은 오물통 속으로 밀어넣기도 하고 말이야."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게 된 "열외인종"

그렇게 띠의 앞면과 뒷면, 각기의 흐름을 타고 일상에서 비일상을, 비일상에서 일상을 퍼올리던 흐름은 어느순간

하나로 합쳐진다. 그야말로 뫼비우스 띠처럼. 양머리를 쓴 노숙자는 더이상 띠의 앞면에도, 뒷면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가 낑낑대며 끌어올렸을 거대한 돌덩이가 거친 소리와 함께 산비탈을 달려내려가듯

차라리 호쾌하게 내려닫는 이야기의 결말이라니. 그전까지 가벼운 조증에 걸린 듯 시니컬하면서도 신나게

이야기하던 화자는 갑작스레 브레이크를 밟고는 완전히 시니컬해진다. 혹은 어리둥절해하는 독자를 보며

가학적인 쾌감이라도 느끼듯, 돌연 잔혹하고도 엄연한 현실을 불러낸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제의 일을 다 알고 있다!"라는 외침. 그 외침이 누구의 관심도, 누군가로부터의 반향도 얻지 못하고

헛헛하게 공중을 맴돌다 사라져버리는 기분은 어떨까. 아니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10대, 20대, 30대,

아니 세대를 막론하고 뭔가 스스로의 의지나 행위와는 달리 제알아서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세상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당장 치솟는 어리둥절함과 분연한 의기, 그 뒤를 바싹 좇는 무기력감과 소외감, 억울함과

열패감까지. 이런 결말이라니 잔혹하다. 이런 세상이란 걸 깨닫게 해주는 이런 결말이라서 잔혹하다.

"어떻게 천만 인구가 아웅다웅 모여사는 서울특별시에서 적어도 오십 명 이상 죽어나간 이 대대적인 인질극에 대해 한마디도 없냔 말이다. 별 볼일 없는 연예인 부부의 이혼 소식조차 탑 이슈로 보도하는 이 판국에."


열외인종 잔혹사 - 10점
주원규 지음/한겨레출판




플로베르는 말했다. "나는 귀두에 뻣뻣한 털을 세우고 그것으로 암놈을 찢어버리는 호랑이와 같다."


이런 식의 '당당한' 마초적 발언들이 누대에 걸쳐 이어져서일까, 남성은 먼 옛날 사냥꾼의 본능을 이어받아

끊임없이 이 여자 저 여자를 찝적거리며 육체적 쾌락에만 몰입한다는 식의 신화가 알게 모르게 전승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미 진부해진 나쁜 남자 신드롬이니, 마초니 하는 것도 그렇고, 최근에 돌연 부상한 초식남이니

건어물녀니 하는 신조어들의 본질이 그 '섹스에 무관심한, 무성적인' 부분에 있다는 점도 되려 이전의 남성상이

성적 욕망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에게 육체적 사랑이 중요하다는 신화, 혹은 사랑보다 섹스를 탐하는 남자들..이라는 유서깊고도 심증 짙은
 
의구심을 주목한 출판사는 책이름을 선정적으로 비틀어버렸다. 원제는 "Man, Love and Sex". "남자, 사랑과

섹스" 정도로 번역될 만한 원제의 세 단어에 조사를 조금씩 바꾸니 이런 도발적인 제목이 나타난다.

"남자의 사랑은 섹스다." 저번주 내내 왠지 이 블로그 유입 키워드 2, 3위를 놓치지 않았던 문장이었다.
 
처음엔 사실 책 제목인지도 몰랐다. 단지 책이나 영화 제목이겠거니, 했을 뿐.


하도 궁금해져서 점심 시간에 밥안먹고 서점가서 책을 찾아 읽었다. 그림을 좀 첨부해볼까 하다가, 그닥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라 말기로 한다. 2009년 8월 10일에 초판발행된 따끈한 책이었다. 미국의 'Mens' Health'라나

남성잡지 편집자이자 남자행동분석전문가라는 저자가 말하는 방식은, 뭐랄까, 왜 남자 맘을 몰라주냐고 여성들에
 
투덜대고 떼쓰는 느낌이었다. 단적으로 책 중간에 'Q&A 코너'를 빌어 여성의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 있었다.

Q: 왜 남자들은 화장실 변기를 더럽히며 소변을 보나요?
A: 남성의 방광이 어쩌구...거기에 마이크로칩이 달린 것도 아니고...시작과 끝에 흔들림이 있을 수 밖에 없으니 이해해주시고...(결론) 남성용 소변기를 화장실에 설치하세요.

내 기억과 짧은 메모에 의지해 복구한 내용이지만 거의 비슷할 거다. 하다못해 '남성다운 남성'의 상징 최민수조차

티비 토크프로그램에 나와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본다고 떳떳이 말하고 있는데, 남성용 소변기를 설치하라는 건

뭥미. 말그대로 '뭥미'다. 남자들을 좀 이해해 달라, 남자들을 배려해 달라면서 실은 계속된 기득권을 견지하겠다는

욕심꾸러기 떼쟁이 악동같은 태도.


책의 주제인 남자의 사랑과 섹스를 말하는데 줄곧 같은 자세를 견지한다는 게 문제다. 남성이 섹스 후 당신의 아파트에서
 
자지 않고 간다면? 다음날 칫솔과 면도기가 있는 자신의 집에서 눈뜨고 싶은 남성의 현실적인 태도니 이해해라. 남성이
 
섹스 후 당신의 아파트에서 자고 간다면? 다음날 회사에 안 나가니 편하게 쉬고 싶은 남성의 현실적인 태도니 이해해라,

라는 식이다. 당신을 사랑해, 라고 말하면 그저 사랑하는구나 믿고, 일하면서 별일 없었어, 라고 말하면 아 별일 없었구나

라고 믿으면 된단다. 단 이전에 다른 여자와의 경험이 다섯번이라 하면 열두번이겠거니 하면 된단다. 또 처음 데이트할

때에 비해 많이 활동성이 줄었는데 왜 그럴까. 십오만 킬로를 달린 차는 이제 차고에 들어가 편히 쉬고 싶지 않겠나, 이런
 
식이다. 이런 게 잔뜩 있지만 굳이 더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미 충분하다 싶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같은 '가이드북'은 성별에 따라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가진 두 인류가

서로를 이해하고 조금더 잘 소통하기 위한 (그야말로) 일반화된 수준의 길잡이를 제공하는데 작으나마 그 미덕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미 그러한 류의 책은 다양한 변주를 거쳐 포화상태에 이르렀으니 '섹스'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끄집어

내고 싶었을까. 혹은 사회적으로 다소 터부시되는 그 소재에 대해 용감하게 발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결과는

신통찮다는 게 내 개인적인 결론. (사실 이 책은 미국 남성을 기준으로, 미국 남성을 위해 쓰인 거라서, 사실 미국에선

그다지 선정적이지도 않았을 것 같다. 더구나 저런 '온건한' 영어 원제목으로는 더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내용이 거의 없는 책인데 그 선정성에 기대고 있을 뿐인 그런 책이라 불만인 거다. 그리고 그게

애초 목적이라 표방된 "남자를 이해해줘"라는 의도조차 무색할 정도로, 오히려 남여간의 사이만 멀게 만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배려심없고 이기적으로 보여서 불만인 거다. 


책의 마지막 메시지는 나름 의미심장하다. 의미심장한데, 책의 전개가 전혀 그런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질 못했다.

사실 그 메시지는 한국에서 번역된 책 제목과는 영 딴판이기도 하다. 메시지는, 불만족스러운 관계에 만족스러운

섹스라봐야 기껏해야 관계를 조금더 지속시키는 매개에 불과하다는 것. 뒤집어 말하자면 남녀간의 관계가 탄탄하고
 
만족스럽게 맺어져 있는데 섹스까지 훌륭하다면 더할나위없다는 거다. 그래서 남자들이 바라는 건 단순히 섹스가

아니라 사랑과 친밀한 의사소통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게다, 저자는. 뭐, 지극히 상식적인 내용인데 그걸로는

책 한권을 만들어내기가 어려웠나부지, 라는 지독히도 시니컬한 반응을 부르는 책. 제목에 낚이지 말길.



덧댐. Q. 뭔가 남자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은데 무엇을 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A. 섹스를 선물하라. 그것도 이왕이면 근사한 포장(?)이 된 거면 더욱 좋겠다.(ⓒ 남자의 사랑은 섹스다)

남자의 사랑은 섹스다 - 2점
데이비드 징크젠코 지음, 김경숙 옮김/더난출판사








시사IN 제1기 독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할 때, 시사IN에서 처음으로 단행본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였던가, 회의실 밖에 붙어있는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책 표지 가안들을 구경했고, 우리들도 각자

원하는 책 표지 도안에 스티커를 하나씩 붙였었다. 그리고 며칠 후 시사IN에서 책을 배려해주었다.

내가 스티커를 붙였던 바로 그 시안대로 표지가 나왔다. 사실은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제목이 좀 맘에 안 들었지만,

어쨌든 그 책제목을 시각적으로 살려주며 흥미를 돋구는 디자인인 거 같아 만족.


제목이 불만이라 했지만, 사실 요새같은 때 거꾸로 희망을 보자는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이빨이나 들어갈까 싶어서다.

흔히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하고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 하며 위기가 곧 기회라 하지만, 그건 꽤나 장기적인
 
안목을 유지하는 사람이거나 희망섞인 기대와 당위로 '오염'된 예측일 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야 박정희도 무너졌고

전두환, 노태우의 시대도 무너졌지만...케인즈가 시장의 자연회복을 기대하는 시장주의 경제학자들과 싸우면서 했던

말이 딱 어울린다. "장기적으로 (경제야 물론 살아나겠지만) 그때는 이미 우린 모두 죽어 있을 거다."


게다가 아침이슬의 첫대목에서 보이는 "긴밤지새우고.." 류의 인고의 정신, 지금의 고난을 기꺼이 맞닥뜨려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강인한 의지란 건 꼭 사회적 약자, 구조적 약자의 전유물은 아닌 거다. 뒷산에 올라 요새도 즐겨부르고 있을지

모르는 거다. 사실 그와 그의 따까리들 역시 나름 곤란한 상황을 맞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심지어 어제 동아일보는

사실을 통해 그들을 보수주의자가 아닌 '보신주의자'라 일갈했던 바 있다. 하여, 결국 '살 맛이 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바쳐야 할 건, '거꾸로 희망을 보라'라는 무슨 자기계발서나 경영기법에 나올 법한 아포리즘이라기보다는, 그 안에

담겨 있는 컨텐츠다. (자칫 그들이 이런 제목만 보고, 그래 위기가 기회다~하며 더 치고 나올까 무섭다.)


역시 시사IN, 책의 내용은 훌륭하다. 나름의 '특수관계'를 의식한 말이 아니라, 정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사실 이 책은 올초, '혼돈의 시대, 위기 속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벌어진 여섯 차례의 강연회를 엮은 강연록이다.

시사IN 독자위원회 때 늘 나오던 이야기 중 하나는, 좌담회 형태의 기사란 게 영양가 있고 재미있게 쓰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현란하게 짜인 액션영화처럼 잘 짜여진 '합'에 따라 정말 예술적인 수준의 문답이 오고 가야 하는데

그건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과 적잖은 준비를 통해 질문자와 응답자 간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야기의 강약에 대한

감이 서있어야 가능할 거다. 그에 더해 서로의 말하기 스타일에 대한 감까지 있다면 더욱 유려한 대담이 될 테고.


쟁쟁한 강사들에, 쟁쟁한 질문자들이었다. 하나하나 강연 내용 자체가 완결적이었던 건 강사의 온전한 이야기에 더해,

강사가 품고 있는 겉내와 속내의 이야기,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질문자가 틈새를 잘 보완하고 완급을 추스렸기 때문일

거다. 어렵거나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소재들에 대한 내용을 말글로 풀어내어 훨씬 쉽고도 깊은 내용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여섯 건의 강연 내용과 문제의식을 얼추 소개하자면 이렇다.


* '생태적 상상력'을 묻는 이문재 시인, 말하는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 

경제불황 속에서 일본의 샐러리맨들이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다는 관찰이 있었다고 한다. 해고나 근무시간 단축을 통해 남아돌게 된 시간에 꽃과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되려 가지게 되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녹색'의 삶이란 뭘까.

*'위기의 심리'를 묻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말하는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심리적 견지에서 대통령의 자격요건을 묻는 김어준다운 질문에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자기성찰능력이라는 명쾌한 대답. 불안한 사람들은 각자의 섬으로 스스로를 유폐하지만, 불안을 터놓고 공유할 때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

* '자본의 미래'를 묻는 정태인 경제평론가, 말하는 김수행 교수 ;

정통 맑스주의자인 김수행교수는 역시 경제공황의 필연성을 이야기한다. 특히 개인이 부자가 되는 것과 모든 국민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임을 강조하며,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자고 한다.

* '문화적 상상력'을 묻는 우석훈 경제학박사, 말하는 조한혜정 교수 ;

문화적 자유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틈새에서 '소모성 건전지'를 자처하며 말라죽어간다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다. '소수를 살게 하고 다수를 죽게 내버려두는 체제' 말고 다른 체제를 꿈꾸자고 말한다.

* '대안경제'를 묻는 하승창 시민운동가, 말하는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재단, 희망제작소까지 끊임없이 시민들을 자극하려는 박원순. 경제는 경제자체로만 수직상승할 수 없으며 사회적 복지라거나 사회적 평등, 생태의식과 같은 국민들의 의식수준에 비례한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 '역사의 위기'를 묻는 정해구 교수, 말하는 서중석 교수 ;

현대사를 전공한 서중석 교수는 한국 뉴라이트와 일본 극우세력의 유사성을 지적하고, 최근의 '건국절' 논란이 그들의 태생적인 한계랄까 아킬레스건를 반증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다만 오바마의 당선과 촛불시위를 한국 민주주의의 역진에 대한 전환 모멘텀으로 삼고 있는 점은...두고 봐야 할 듯.


각기 상당히 다른 부분들을 건드는 주제이면서도, 결국은 '거꾸로, 희망을 찾아보지 않으련' 정도의 메시지로 수렴된다.

골이 깊고 어둠도 짙고, 누구랄 것 없이 위기라며 한숨을 물고 사는 시대라서 그렇다.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조금은 더

낫게, 사람사는 것처럼 살고 싶으니까 고개 끄덕일 수 밖에 없다. 희망을 찾아보자고.


거꾸로, 희망이다 - 10점
김수행 외 지음/시사IN북




무라카미하루키되기(http://cafe.daum.net/harukimake)란 까페에서 최근 공지가 올랐었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출간 20주년을 맞아 한겨레21에서 기획기사를 쓰는데,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몇 명 모아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딱히 누군가에 대한 '팬질'은 해 본 적이 없는데다가 작가가 좋아

글을 읽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하루키의 소설들은, 적어도 고베 지진의 영향이 드러나기 이전의 작품들은 모두

워낙 마력적이었고 하루키 역시 딱 그만큼 특별한 작가였다.


저번주 수요일, 퇴근을 서둘러 홍대의 '한잔의 룰루랄라'라는 만화책방으로 향했다. 내가 5명의 인터뷰이 중 하나로

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하루키를 20년동안 알아왔다는 것, 그래서 초딩 때와 고딩 때와 대딩 때와 군인 때, 그리고

지금 어떤 느낌으로 읽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였던 것 같다. 초딩 때 영문모르고 펼쳤던 '노르웨이의 숲',

레종 데트르(raison detre)라던가, 주인공 와타나베가 하루동안 걸었던 발걸음을 세고, 오르내린 계단수를 세지만

아무도 그런 것엔 관심을 갖지 않는단 걸 알아차리는 부분이 깊이 인상에 남았었다. 그에 더해 나오코의 희뽀얀

육체가 달빛아래 노출되는 초딩에겐 다소 자극적인 장면도 틈날 때마다 발췌독하는 부분이었고.

(나중엔 책만 펼치면 자동으로 책장이 갈라져 그 페이지가 딱 열리곤 했었다는...ㅡㅡ;)

그런 얘기를 했다. 2006년쯤 싸이 미니홈피에 올렸던 감상을 인쇄해서 가져갔었다. 그때의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루키의 소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미묘한 상실감과 허무함에 특정 '주의'의 틀을 씌워내며 그의 작품에서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제멋대로 유추해 내는 과정에, 과하리만큼 90년대 초중반을 경과하는 시대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있다는 거다. 누구나 그의 작품에서 느낄 흡입력과 강한 공감, 그런 것들에 이름을 부여하고 의미를 찾아내는 적극적인 독해의 작업이 그 하루키 작품 전부에 붙어있는 '친절한' 해설, 서평 등속의 것들, 그리고 그의 작품의 표지디자인, 카피..그런 것들로 제한되고 굴절되어 거개가 비슷한 시야로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작품들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서(실제로는 한국에 한정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인기를 끄는 이유를 일반화하여 ready-made해낸다.

뻔하게 나오는 큰틀은 그렇다. 60년대말70년대초 전공투라는 이상주의적이고 환상적인(미망과도 같은) 경험을 하고 이에 대한 환멸을 겪은 하루키는 9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판단하겠지? 그 평론가입네 하는 작자들은?-시대적 경험의 동질감을 던져주며 인간 내부로 침잠하여 삶의 상실감과 허무함을 염세적 현실주의라는 스타일을 빌어 아주아주 매력적인 기교로 풀어낸다는 식이다. 글쎄......뭐랄까. 90년대 초에 지성계를 휩쓸었다는 유행..청산주의의 냄새가 너무나 짙다.

거대이념과 근대적 사고-합리와 인과가 보장되는-가 더이상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고, 사회주의의 실험은 거대한 사기극이었으며 68년으로부터 한국의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혁명적인 열기의 분출은 치기어린 '젊음'탓이었다는. 그리고 그러한 과거를 가진 인간은 현실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못받고 "아무곳으로도 갈 곳이 없다"는 허무함만을 채워가며 이것이 하루키의 작속 인물들의 전형, 내지는 기본적인 형상이라는 게 그들의 분석이다.

과연?

하루키의 작품에 드러나는 '상실'을 그런 식으로밖에 이야기할 수 없을까? 그러한 역사적인 실패, 그리고 후쿠야마식의 '역사의 종언' 이후 등장한 인간군상이 아니라, 하루키 자신이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듯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본질적인 상실감이라는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의 작중 인물들은 애초부터 갖고 있던 상실의 요소들이 외화되어 드러나면서 현실을 일그러뜨리기 혹은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적 형태로 맞추어진 가족이 해체되고, 직업(직장)으로부터 탈출하며 등등, 그러한 조건들이 충족되고 난 후 쯔음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은 조금씩 일그러져 리얼리티를 잃어가며 주인공-아니, 이말은 그의 소설에 적절치 않다..그냥 일인칭 "나"가 온당할 듯-여튼 그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놓쳤다, 잃어버렸다, 잊었다 라는 인식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가 대응하는 방식은 상당히 영웅적이다.
 
새로운 방식의 영웅성, 마치 바싹 마른 녀석이 다리를 부들부들떨며 돌띵이를 들어올리는 듯한, 자칫하면 깔릴 듯 위태로우면서도 한편으로 우스운. 적극적으로 현실을 일그러뜨리고 자신의 상실된 부분을 찾고자 나서는데, 그 여로는 사실상 사회로부터의 절연, 자신 내부로의 침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끊임없이 돌덩이를 밀어올리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림자가 언뜻 겹치기도 한다. 그 사회로부터의 절연은 약간 모호한 방식이긴 하고, 그래서 보르헤스같은 환상 문학의 냄새가 짙어지는 거겠지만 그걸 현실 도피라고 일률적으로 재단하는 건 온당치 않다.

중요한 건 애초에 상실이 있었고, 그 상실의 원천이 된 온갖 사회적 관계들, '일상'이라 불리거나 상식이라 불릴만큼 당연한 흐름으로부터 유리되어, 상실감을 느끼게 된 시점부터 일그러지고 얼개가 맞지 않는 현실을 더욱더 뒤틀고 단속적으로 토막냄으로써, 적극적으로 자신의 결락감(!)을 메워내고자 하는 하루키의 시도들. 그게 그의 작품 세계 아닐까..

태엽 감는 새, 이 작품에 슬쩍 드러나는 태엽감는 새 연대기 어쩌구의 맥락도 그렇다. 사실 세상은 인과가 뚜렷하고 합리적인 사고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대기처럼 하나하나 자체로 완결되어 닫혀 있는 사건이라는 게 하루키의 인식 아닐까. 거기에는 물론 이성에 대한 불신, 과학적 인과법칙에 대한 회의 등 포스트모더니티의 요소들이 담겨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세계관에 있어 근본적인 모순이라 할 만한 그 '상실감'은 현 세상의 '관계'들로부터 비롯되는 거라는 얘기다.

그의 글빨은 정말...멋지다. 정점에 다다른 기교와 깊은 통찰력, 그리고 장면별로 완전한 함축과 은유들. 더구나 태엽감는 새에서처럼 그러한 장면들이 결국엔 합류되어 하나의 직조된 의미를 그려내는 데에 이르면. 마치 짜라투스투라..처럼, 여러 잠언들과 금언들을 화려하게 짜깁기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을 정도다. 운명에 관한 대목..에서 내가 받은 느낌은 그런거다. 마치 재봉틀로 재봉질하듯, 이미 박힌 부분은 운명, 아직 박히지 않은 부분은 일반론이 지배하는 공백. 어차피 박히고 나면 운명이 되고 말. 여튼, 그람시와 연관지으면, 하루키는 그람시가 말한 '효소'의 개념을 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거 같다. 그리고 그보다 더, 하루키에 대한 판에 박힌 평들을 서로서로 베껴가며 재생산해내는 평론가들은 '효소'가 뭐에 써먹는건지부터 좀 생각해야 될 거 같다."



대체 어쩌자고 하루키의 소설에 그람시를 연결지으며 글을 마쳤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효소'란 개념이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니 대체 어떤 맥락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어쨌든, 하루키의 세계를 단지 자기 내면으로의 퇴행이라거나

도피로만 해석하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하루키가 내세우는 인물은, 주의주장, 이른바 '이즘'을 넘어선 인물이다. 어떤 사회 시스템으로도 해결되지 않을

인간 내면의 문제에 집중하는 인물이다. 어떨 때 자신의 감정이 파르르 떨리는지, 어떤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과

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죽기 전까지 함께 할 그 '결락감', 공허함 혹은 외로움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늘 유지하는 인물이다. 피곤한 인물이다. 하루키를 읽으면 내면 깊숙이 숨겨졌을 뿐이던 대답하기 어렵고 곤란한

문제들이 모처럼 밖으로 끄집어져 바람을 쐬었다는 후련함과 함께 망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요새는 또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해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 아무리 고민해도 답없는 문제, 가끔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의아해질 때 하루키를 펼쳐보며 그런 문제를 맞닥뜨리는 것도 좋겠지만, 어쩌면 대개의 시간엔

그걸 덮어두고 지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여유가 없어진 건지도, 그저 피곤해진 건지도, 삶에 대한 눈먼 열정과

두려움없는 궁금증이 부담스러워진 건지도 모르겠다.



밤에 잠이 안 오고 마냥 종잡을 수 없는 얄따꾸레한 생각들만 치밀어오르기로 걍 이부자리를 걷고

모처럼 책장을 디볐다. 손창섭..내가 그간 즐겨 읽던 작가이면서도 여태 이름에 주의하지 않았더랬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약간씩은 일그러지고, 그로테스크한 배경과 그와 비슷한 분위기의 이질적인-

그야말로 어불성설격인-인물이 등장하곤 한다. '인간동물원'이라거나 '잉여인간', 아님 '비오는날'..


무엇보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인 '신의 희작'에서 드러나는 냉소와 비정상성은 해방 전후를 기해 한국

문학계가 잡아낸 온갖 이물감과 혼란, 방황의 극치랄까, 이보다 더 극적으로, 혹은 '선정적으로' 드러낸

작가는 없는 거 같다. 그의 묘한 문체와 행간에서 배어나오는 짙은 냉소, 자포자기식의 쾌감. 그러한 말투로

읊어내는 비현실적 사건과 배경은 그 자체로 음울함을 잔뜩 독가스처럼 품고 있다.


푸닥거리하듯 그의 자멸적이고 자학적이랄만한 작품들을 쏟아내고 마지막으로는 '신의희작'에서 그 작품들에

대한 열쇠로 보여질만한 자기고백을 하면서 그는 대략 진정된 거 같다. 소위 문학을 통한 승화, 구원이랄 만한.

그담엔 더이상 쓸 게 없었을까..더이상 별다른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68년인가 일본으로 아예

귀화해버렸다고 하더군. 하긴, 그가 '신의희작'에서 연기한 인물은 갈데까지 간셈, 막장중의 막장이었다.


그 탓일까, 내 생각엔 손창섭이 그다지 평가받지 못한 게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이른바 한국인의 특성이라는
 
애이불비, 혹은 아무리 힘든 고난과 역경에도 한줄기 빛무리를 (무책임하게) 던져놓고 마는 식의 통속적이고
 
도식적인 구도가 아닌거다. 왠지 그래야할 듯한 도덕적인 압박감이나 (계몽이건 격려건) 무책임한 낙관으로

회귀하고 마는 잘 짜여진, 닫힌, 완결된, 기승전결의 작품이 아닌 거다. 이게 내 생각엔 손창섭과 김기덕, 그런 류의
 
내가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공통점인거 같다는 생각이 불끈 드는데, 그저 현실의 어느 한 부분을 '따왔을 뿐'인거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걍 하나의 주제의식이나 의식적인 부르짖음을 위해 현실을 보기좋게 매무새지어 마지막에

마침표로 마치는 것이 아닌...뭐랄까, 그저 작품 앞뒤에 말줄임표로 그 연속성과 함축성을 열어놓는달까.

"..." 이런 식으로나 표현할 수 있을까.


해서, 그는 어설픈 냉소나 겉멋든 자포자기가 아니라, 갈데까지간 냉소와 그로테스크함을 보여준다. 이쯤이면 되겠지,
 
이쯤에서 반등해서 밝은곳으로 상승해야지, 하는 게 아니라 도무지 그 음울함과 비정상성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그저 맷돌에 갈리듯, 한없이 침잠할 뿐.



그러고 보니 하루끼 역시.




유달리 강하지는 않아도 제 식솔에 대한 책임은 아는 사람, 아버지..라는 게 소설의 메시지인 듯 하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지나치게 호들갑스런 묘사도 아니었고, 어떻게든 눈물을 뽑아내겠다는 의욕이 과해보이는

스토리도 아니었다. 소설은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특정 상황을 묘사하는 몇몇 표현이 생생하고 신선한 게 눈에 띄긴 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말투는

담백하고 건조하기까지 하다. 그건 아버지에 대한 이 소설을 '아버지'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가져가고 싶어서였을까.

대개 아버지의 이미지란 건 과묵하고, '소처럼 묵묵히' 일만 하며,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그런 거니까.


그래서일 거다. 난 이 소설이 그다지 와닿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새삼 깨닫게 되지도 않았으며, 뭔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겠다, 라는 커다란 심적 동요가 오지도 않았다. 그저 조그마한 소득이라면, '아버지'들은

이렇게 생각하나 보군, 정도 감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랄까. 감정의 기복을 격하게 탄주하지 않고 덤덤하게 가는 건

좋은데, 그러다 보니까 감정이입도 별로 안 되고 밋밋하고 지루하다. 재미가 없다.


어허, 엄숙하고도 거룩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밋밋하고 지루하다고 해서야 되겠는고, 하고 누군가

꾸지람할지 몰라도, 솔직히 이 소설에서 화자 엄세웅의 병든 형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그나마 남아있던 한 줌의

설득력조차 사라질 뻔 했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을 하던 가족들 먹여살려야 한다는 의지 하나로 불도저처럼

살아가는 아버지, 주변의 평판은 내팽개친 채 편집적으로 소지품정리에 매달린다는 아버지, 죽고 난 후의 일을

추스리려 발신번호만 몇차례씩 남기면서도 살아있을 때의 일은 돌보지 않는 아버지.


굳이 난 그런 아버지에 반댈세, 라고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그런 아버지도 있을 수 있을 테고, 당신의 삶이니까.

또 그게 아버지의 '사랑방식'이라면야 더 할 말 없다. 그치만 난 그들의 '책임'이란 게 단순히 식구들 밥 안 굶기는 걸로

끝난다고 생각지도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것,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보통 '아버지'들의 사랑 표현방식이나, 이 책이나, 똑같은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 같다. 표현을 안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려니 '밥먹여 살리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다는 착각에 빠지고 만다. 게다가 함께 한 스토리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공감도 어렵다. 차라리 IMF 직후엔가 나왔던, 주절주절대는 신파조의 '아버지'가 나았다고 생각한다.




경찰, 용산 철거현장 강제 진압... 5명 사망 참사
"특히 특공대들은 수십미터 높이의 대형 기중기에 매달린 컨테이너 박스를 타고 참극이 벌어진 농성 현장에 접근했다. 철거민들을 상대로 사실상 대테러 작전을 펼친 것."(데일리중앙, 2009. 1. 20)

 
 

점유 형태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강제 퇴거, 괴롭힘 또는 기타 위협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점유에 대한 법적 안정성을 보장받아야 한다.  (유엔 사회권위원회 사회권규약 일반논평4)


책을 보았다. '여기 사람이 있다'. 몇장 힘겹게 넘기다가 울컥, 눈물이 쏟아져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던 책이었다.

그러다 문득 기사를 보았다. 쌍용차 공장에서도 용역과 경찰의 합동작전이 버젓이 이뤄지고 있다는 기사였다.
 
"법을 얘기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쌍용차 공장에서는 용역들이 새총을 쏘고 불을 지르고, 용산참사에서처럼 똑같이 합니다. 경찰이 엄호하고 합동작전도 하고 경찰 장구도 빌려줍니다. 경찰력 제대로 된 나라에서는 자존심이 있지, 일반 용역깡패에게 지위 안 넘깁니다. 경찰은 경비업법 위반과 중상해죄, 공무원 사칭의 공범입니다. (권영국 변호사)"("테이저탄 맞아 뺨 썩는데 항생제 없이 수술..." - 오마이뉴스)


어제그제, 울음을 삼키며 책을 읽어내렸다. 그게 그러니까 올 초였다. 사람이 여섯 명이나 '학살'당했다. 경찰특공대는
 
용역과 손발을 맞춰 '도심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엄혹한 군사작전을 성공리에 펼쳤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고,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반년이 지났다.
그분들은 장례조차 못 치르고 있다. 만평 그대로, "뒤는 걱정않고 뭉개버렸던"
 
그들은 여전히 건재한 채 또다른 살인, 또다른 학살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재개발문제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고, 2000년의 봉천3동 철거촌에서 며칠 깔짝대며 나름대로 남들보다 보고 들은 게

있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오늘은 봉천 3동에서 이루어진 동계 노동자 빈민 학생연대투쟁(줄여서 빈활)의 첫날이었다.

이미 포클레인에 무참히 무너져내린 빈 집들이 쭉 좌우에 도열한 가운데 성했을 무렵에도 꽤나 볼품없었을 그런 집의 길쪽 창가에나마 여전히 갸날프게 매달려 있던 방범철창들...그건 공권력에 대한 순진한 기대를 비웃는 듯 했다.

겨울철에는 재개발을 위한 철거가 불법임에도, 이주 비용조차 없는 빈민들을 위한 가수용단지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음에도, 철거깡패들을 동원한 폭력과 방화 등의 살인적인 강제 철거가 지금에도 계속 사실상 경찰의 비호 아래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빈민들-대부분이 세입자인데-에게는 약간의 이주비 외에는 아무런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재개발 사업 지역에서 충돌이 그치지 않는 주된 이유의 하나가 되는 거 같다.
가옥이 재산으로만 파악이 될뿐, 실지로의 삶의 터전, 즉 주거의 공간으로는 인정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들을 '빈민'으로 칭하던 그때의 대학생이 사회인이 되고 나니 알겠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가진 꿈은 '내집 마련'.

한국의 주택보급률은 이미 100%를 넘은지 오래건만, 전체 가구의 40%가 전월세로 살고 있다. 10명이 5,508채를

소유하고 있다는 현실이라거나, 전체 인구의 1%가 전체 사유지의 60%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그냥 넘기기로 한다.

소득불균형이 아니라 부의 불균형을 따진다면 나라가 벌써 엎어졌을 거라던 이준구 교수님의 이야기도 그러려니 한다. 


정말 복장터지도록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거다.

왜. 미분양 아파트는 쌓여만 가는데, 계속해서 더욱 비싸고 넓고 고급스런 아파트만 지어지고 있는 걸까.


좀더 적은 세대수를 가진, 좀더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유효한 아파트를 위한 현재 방식의 재개발이 지속되는 한,

철거민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집이거나, 혹은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밥그릇' 그 자체를 일부 땅주인들과

건설업자, 공무원들의 이익을 위해 통째로 넘겨야 하는 상황이라면. 세입자 보상은 재개발 사업의 너무 늦은 단계에서,

거의 모든 것이 정해진 상황에서 그저 강요된 독배처럼 이뤄진다면.
가게에 대한 투자금과 전세금
등을 100% 보상받지

못할 뿐 아니라, 기존의 영업지역, 생활권 이외의 지역에서 다시 장사를 일으키라며 막무가내로 내쫓는 거다. 게다가 이미

인접지역은 재개발 열풍에 휘말려 잔뜩 전세금이 올라버린 상황, 사람들은 체념을 강요당한다.


그나마 아직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

가능한 재원을 박박 긁어모아 가능한 인근한 주거지로 옮겨간다. 물론 순식간에 두배 이상 뛰어버린 전세금을 감당하기

쉽지 않고 사고처럼 닥친 '재개발사업'에 재산도 반토막났지만, 그래서 이전보다 좁고 열악한 환경으로 가기 일쑤지만,

어쨌든 '입에 풀칠하란 법은 없다'는 속담이 아직 힘이 된다. 이전에 비해 더욱 힘겨워진 삶이고, 심지어 집주인들조차

잔뜩 올라버린 집값을 감당치 못하고 튕겨나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주변에 그나마 연착륙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철거되는 지역에서 곧 철거될 지역으로 이동한다. 계속

낙후한 곳으로 밀려나고 밀려나 어느순간 '소시민'에서 '거지'로 전락해버린 걸 깨닫는 사람들. 그렇게 밀려날 수 없어서

항의를 시작한 사람들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고 만다.


어쩌면 그들의 잘못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애초 도심에 비비고 살고 있었던 게 잘못이다.

원하던 원치않던 자녀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거나 학원을 옮기는 등 아이들 교육 환경이 바뀌는 게 뭐가 대수라고.

원하던 원치않던 다니던 직장이 조금 멀어지고, 출퇴근이 조금 어려워지는 게 뭐가 대수라고.

원하던 원치않던 조그마한 가게 없어지면, 어디서든 새로 열어 손님 새로 만들고 단골 만들면 되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이웃간의 정이니 마을의 화목함 따위야 돈없고 촌스런 자들의 자기위안일 뿐이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보다 쾌적하고 안락하며 고급스러워서 돈되는 건물을 올리겠다는데. '보이지 않는 손'이 이끄는 대로 국가발전을 위한

최적의, 최고효율의 자원 배분을 하겠다는데. 그게 비록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보일지 몰라도 그것은 착각.


사과라도 해야 할 판이다. 가난한 사람이면 가난한 사람답게 교육에도 욕심 안 부렸어야 했고, 직장이니 가게니 어차피

당신들 눈에 보이기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텐데 그런 걸로 쪼잔하고 구차하게 굴지 말아야 했으며, 삶의

터전이니 뭐니 촌스러운 단어로 '떼잡이질'했던 것들 너무너무 반성하고 죄송한 마음 뿐이라고. 그런 건가.


용산은, 용산4구역 철거민대책위원회는 두 가지를 요구했었다. 지금까지 장사해왔던 이곳에 주상복합 상가를 지은 후
 
다시 이 곳에서 영업할 수 있도록 상가를 임대조건으로 제공하라는 것이었고, 두번째로는 공사기간 중 영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가수용상가를 개발지역 내에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밥그릇 싸움이다. 다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밥그릇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이다. 개발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살던 곳에서 살 수 있을
 
만큼의 생존권만을 확보해 준 상태에서 개발을 하라는 거다. 세입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집주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대안도 내놓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 손해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 항의했던 거다.


그리고 그건 모두를 대신한, 생업에 바쁘고 어쨌던 삶을 이어가기에 바쁜 사람들을 대신한 항의였다. 서울에만 50개가

넘게
짓겠다는 뉴타운 공약을 비롯 전국각지에서 벌어지는 재개발 사업, 그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재개발 지역의 혼란상.
 
잔뜩 올라버린 집값과 앉은 자리에서 슬금슬금 빼앗기고 있는 우리네 재산. 없는 이들의 재산이 있는 자들, 세입자 한번도
 
안 해봐서 세입자 심정 모르겠다며 똥배짱 튕기는 용산구청장, 건설자본들의 배만 불리고 있다는 고발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용역과 경찰과 법과 언론에 위협받았으며...끝끝내 살해당했다.


"지금, 오늘날 한국에서 행복해하는 자는 다음 두 부류 중 하나다. 하나는 도둑이고, 하나는 바보다." 난쏘공의 저자

조세희 작가님은 말한다. 불행한 사람들, 불행한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연대의 깃발 하나로 목숨을 건 전철연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이 돈을 받았다느니 어쨌다느니 언론이 떠들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계절 넘게 망루 투쟁을

벌였던 용인 어정상가/공장 철대위분들은 자신들 대신 돌아가신 거라며 눈물흘렸고, 용산4구역 철대위분들은 자신들

도와주러 왔다가 돌아가신 분들때문에 고개를 못든다며 눈물을 흘린다.


아무래도 조세희 작가가 놓친 한 부류가 더 있다. 행복해하는 자, 혹은 최소한 눈물흘리지 않는 자의 한 부류가 더 있으니,
 
그들은 살인자다.


아무리 그들이 돈없으면 죄인이요, 망루가 너희를 반기리니 회개할지어다..라고 떠들지라도, 세상이 온통 가진자

위주로 돌아간다는 섬뜩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실이 정말 끝끝내 진실이라 할지라도, 모처럼 하루 휴가를 낸 내일,
 
내일은 박카스라도 한 박스 사들고 용산에 가야겠다. 돌아가신 분들, 그리고 사는 것 같지않게 살아가시는 분들..

여기도 사람이 있다고, 죄송하다고 찾아뵈야겠다.



용산참사 반년, 사회 원로 대표 시국선언(7.23)


- 이전 포스팅들

▶◀ 불도저식 진압, 이건 살인이고 학살의 시작이다.

용산참사 후 2개월, "용산GAJA展"에 다녀왔습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촌스러운' 용산참사와의 부끄러운 데자뷰







여기 사람이 있다 - 10점
강곤 외 지음/삶이보이는창




어줍잖은 소설론 - 소설은 분재같은 거 아닐까.

소설을 보면 애초 영감처럼 떠올랐을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아무리 참신하고 흡인력 강하다고 해도, 그 줄기에서부터

뻗어나가는 가지들이 영 실하지 못하거나 볼품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늘 아쉬웠다. 마치 하나의 잘 다듬어진

분재처럼-그 어거지로 비틀고 구속하는 작업에 대한 반발감은 논외로 하고-개성있지만 기품있게 자리한 줄기와

그와 적절히 균형을 이루며 고른 각도로 뻗어나간 가지들의 비례와 배치에서 기인하는 미감이랄까.  그런 소설이

정말 만나기 힘든 잘 쓴 소설이 아닐까, 뭐 내가 요즘 소설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말이다.


최대한 자연을 흉내낸 '자연스런' 분재처럼, 최대한 사회를 흉내낸 '사회스러운' 소설. 사회스럽단 말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쉽게 말하기 힘들지만 그건 확실하다. 자연을 인간의 손으로 빚는다는 거 자체가 다소 어불성설에

가까운 최고난이도의 작업이듯, 사회를 고작 몇 페이지의 글로 구현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사실. 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회'란 신문 사회면에 실릴만하다는, 그 좁은 의미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인간 세상을 말한다.


세상을 타워 속에 집어넣다.

674층 높이에 인구 50만이 살고 있는 빈스토크(beanstalk), 그 유례없는 초고층 건물 자체가 대외적으로 주권을 승인받은

하나의 국가라는 설정에서 이야기들은 뻗어나간다. 이야..이런 참신한 발상은 대체 어떻게 잡아낸 걸까. 건물이 나라의

영토가 되고, 그 건물의 입주자가 국민, 방문객에 대한 절차가 출입국 통관절차로 바뀌게 된단 얘기다. 건물 경비원들은

이제 외적에 대해 '영토' 빈스토크를 방어하는 '합법적 국가폭력' 군대가 되는 거고, 아마 건물주는 빈스토크의 국왕이

되는 셈인가, 음..일종의 도시국가라고 볼 수도 있겠으니 시장이란 게 맞겠군.


아마 이런 식으로 배명훈의 머릿속에서 '국가'를 '타워'로 대치하는 작업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작가의 상상력이

어떻게 발현되었을지, 어떻게 가지를 뻗고 세세한 디테일을 장악하기 시작했을지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게다가, 초고층 빌딩을 그 영토로 가진 국가라는 건 무척이나 특이하다. 어느 나라 영토가 시루떡처럼 층층이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던가 말이다. 그건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엄청나게 취약하기도 할 거다. 이미 우리가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리고 먼 옛날 바벨탑이 신의 불같은 분노로 무너져내렸던 것처럼. 


'빈스토크' 절개면의 에피소드들

이 소설 타워의 미덕이랄까, 구성상의 장점은 '연작'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리하게도 배명훈 그가 창조해낸

'빈스토크'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며 재기발랄하고도 함축력짙은 사건들을 묘사하기엔, 긴 호흡의 소설이 아니라 단편

에피소드들이 연이어지는 연작소설의 형태가 맞춤하다는 것을 알았던 게다. 그렇게 나열된 에피소드 하나하나는

빈스토크라는 고층빌딩 내 구현된 사회의 면면을 날카롭고 재치있게 버혀내어 준다. 어쩔 수 없이 작금의 시대와

견줘보게 되는 건 작가가 작정하고 블랙유머를 날린 걸까, 아니면 내 편향 때문일까.


좀더 자세한 스토리..라기 보다는 스토리 각기에 대한 이미지 스케치가 궁금하다면 열어 보기~*




바벨탑은 이미 지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한국 사회를 되짚어 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생식능력 없는 남자가 되었다가
 
심지어 여자가 되고 말 욕을 부르는 자, "곧 성행위를 할 사람"들이나 "생식기같은 자"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굳이 빈스토크를 지어내어 그 안의 인간군상을 보여준 작가의 의도는, 어쩌면 그 안에서 평행우주처럼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낯설게 하고, 나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바벨탑'을 어쩔 건지

묻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나라 전부는 나도 잘 모르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사는 동네만큼은 바벨탑이 아니"라고.



타워 - 10점
배명훈 지음/오멜라스(웅진)




아빠 어디 가? - 8점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열림원

희생-선택을 해야 한다면 작은 희생보다는 큰 희생이 선호된다 : 왜냐하면 큰 희생에 대해서는 작은 희생에서는 불가능한 자기찬미를 통해서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아이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이년 후 한 웅큼의 불안과 함께 태어난 두번째 아이도 장애아였다.

저자는 "두번째 세상의 종말을 맞았다"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막장드라마가 아무리 창궐했다고는 해도, 이건 너무

현실감이 떨어지는 데다가 오버스러워서 드라마로 치자면 되려 실격이다. 같은 부모의 두 아이 모두가, 그것도

같은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니, 이렇게 억지스럽고 말도 안되는 설정은 '감정이입'도 '개연성'도 너무나 떨어진다.


감정이입도 쉽지 않고 개연성도 떨어지지만, 현실이다.

저자는 "세상으로부터 감동적이고 훌륭한 아버지라는 역할을 배정받았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마치 로또에 두번

연이어 1등 당첨된 만큼이나 희소한 경험을 하고 있는 애비로서 세상의 주목을 끌 수 있으며, 그의 두 아이들을

내세워 스스로를 치장할 수도 있다는 걸 안다. 장애아는 하늘의 선물이야, 라며 초췌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거나, 혹은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불행함의 기운을 풀풀 뿜어내는 식이다.


불행-누가 어떤 사람에게 "그러나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보통 항의할 정도로, 불행에 들어 있는 특별한 명예(마치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천박함, 겸허함, 평범함의 표시인 것처럼)는 대단히 크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그렇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애써 음울한 표정만을 고수하지도, 고상하고 이타적인-모범적인-마음가짐만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그는 수많은 군중 속에서 '기적처럼' 자신의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거라

가쁜 호흡의 문장으로 기대해 보기도 하고, 아이들의 장애인 증명서 덕분에 불법주차를 버젓이 할 수 있다며

자랑삼기도 하고, 또 자신 아이들 "똥강아지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지푸라기만 잔뜩 들었단 말을 몇번이나 되풀이하며

얼핏 무지하게 씨니컬하고 까칠한 말들만 내뱉는다.


그러면서도 또 아이들이 남들과 '다를' 뿐이라며, 아인슈타인이니 모짜르트가 모두 남들과 심각하게 달랐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스스로에게 주입한다. 밤중에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똑똑해서 아주아주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이라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끝내 "내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못생기고, 제일 멍청하다. 이게 다 내 잘못이다. 제대로

실패한 것이다"라며 펑..."도대체 뭐가 뭔지, 어느 상황에 있는지...알 수가 없다...내 길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내 삶은 막다른 길에서 끝이 난다."라며 폭발하기도 한다.


수정된 누가복음 18장 14절-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


아마 하루에도 수백번, 이런 감정의 기복, 인내심의 기복을 경험하지 싶다. 그게 솔직하게 와닿았다.

사실 아무리 불행해보이는 사람도 하루에 몇번쯤은 삐쭉삐쭉 웃게 되고, 또 아무리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푸는

듯 보이는 사람들-대표적으로는 부모님들-도 가끔은 심술을 부리거나 지쳐서 시니컬해지기도 하는 거다.


감정선이 그렇게 들쭉날쭉 널뛰기를 하는 것이, 심장의 쿵쾅대는 맥박뜀과 겹쳐 보이며 '인간적'이라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그렇지만 장애아를 둔 아버지의 적나라한 감정선의 맥놀이를 드러낸다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그의 삶을 온통 불행일색으로 칠해놓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쉽게

동정할 수 있도록 자세를 낮춰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정상아'들이 입주위에 온통 케잌을 묻히며 먹는 모습에는 웃는 사람들이, '장애아'의 같은 모습에는 절대

웃지 않는 게 사람들인 거다. 장애아라 해서 우리를 웃음짓게 하는 특혜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끝내 방송전파를 타지 못했다고 했다.









엄마의 은행 통장 - 8점
캐스린 포브즈 지음, 이혜영 옮김/반디출판사

# 공감하는 입장.

다섯 아이를 키우면서 늘 쪼들렸을 게 틀림없는 살림에도, 아이들을 불안하고 겁먹게 하고 싶지 않은 엄마 마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아이의 마음을 섬세하고도 다정하게 헤아려 손잡아주려는 엄마 마음.

차갑고 쌀쌀맞은 주변 사람들조차 감화시켜 '엄마'를 축으로 한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에 포함시키고야 마는 엄마 마음.

가족들을 늘 먼저 생각하느라 당신을 위한 선물은 커녕 당신의 소중한 것조차 선뜻 포기하는 엄마 마음.


그런 엄마다.

이 소설의 화자는 카트린, 그녀의 엄마 이외에 시그리드 이모니 트리나 이모니, 제니 이모니 많은 등장인물에

둘러 쌓여 있지만. 그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한번씩 시큰하게 뒤돌아 보며 되새기게 되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기억 귀퉁이를 건드린다. 문득 그녀의 엄마에게서 우리, 나의 엄마가 겹쳐보일 때가 있다.


어떤 면에서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보다 더한 리얼리티를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다. 신경숙의 작품에서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한 특정 '엄마'를 살리는데 좀더 신경을 썼다면, 이 책에선 다소 동화적이고 치밀하지 않은 행간과

여백을 남겨 두어 모두의 '엄마'를 투영시킬 만큼의 여유로움이 보이기 때문일까.



# 시니컬하자면.

근데, '엄마'의 이름은 뭘까. 넬스, 카트린, 크리스틴, 다그마르, 카렌의 엄마이자 무슨무슨 이모들의 막내여동생인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날 때부터 엄마는 아니었을 텐데, 그런 이야기는 아마 화자인 카트린이 좀더 컸어야 가능했을까.


결국 끝이 좋았으니 모든 게 좋았단 식의 이야기. 온갖 풍랑이 밀어붙였지만 끝내 살아남았으니, 제 발로 섰으니

용케 망가지지 않고 쓰여질 수 있었던 이야기는 아닐까. 다행히도 엄마의 은행통장을 실제 꺼내야 할 일은 없었고,

다행히도 아빠는 회복했으며, 다행히도 크리스틴은 엄마의 뜻을 좇아 고등학교로 돌아가고, 다행히도 카트린의

학교생활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안착했으며, 다행히도 크리스틴은 순산했다.


세상은 아름답다, 모정은 위대하다, 라는 식의 이야기에서 내가 느끼는 시니컬함은 이 정도로만.

그렇게 억지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그리지도 않았고 눈물을 짜내겠다는 '불순한 의도'도 크지 않아 보이는 책이다.

잔잔하지만 앙증맞고 사랑스러운 소품 같은 에피소드들.



이준구 교수의 말에 따르자면 시장근본주의자들이 날뛰는 세상이다.

그들은 정부의 규제를 죄악시하고 시장을 만병통치약이라 여기지만, 사실 이미 경제 활동의 발목을 모질게 잡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그들이 방기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시장 실패, 혹은 시장 왜곡이다. 경제활동 현장에서 예컨대 무역

애로를 발굴하라거나 불편한 규제를 적시해서 해소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해도, 그건 전봇대 몇 개 뽑는 식의 간단한

제거, 지움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정비하고 시장 자체가 제대로 돌아가게 만들려는 노력을 요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게 문제인 세상.


이준구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것에 대해,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는 다들 그랬었다. 시장주의자도, 시장근본주의자도. 하물며 노무현보다 왼쪽에 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 한미FTA를 반대하고 이라크파병을 반대했던 사람들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실정에 대해서 대개 한 목소리의

비판을 낼 수 있었다.


물론 약간씩 다른 목소리가 간간히 섞여 나왔다. 이준구 교수는 새만금 사업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건 환경지상주의도,

온정주의도 아니었다. 철저히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대규모 '토목 공사'가 효용이 없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좀더 정밀하고, 좀더 보완되면서도 강력한 효과를 갖도록 주문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목소리를

두고 딱히 좌/우의 색깔론이 불러내질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노무현에 대한, 노무현의 정책에 대한 비판 일색의

지형에서 그 비판이 좌로부터 오던 우로부터 오던 따지는 건 부차적인 일이었다.


이명박이 당선되고, 종부세에 한을 품은 사람이 장관이 되고 종부세는 거덜이 났다. 새만금 따위는 기억 저편에 묻힐

만큼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4대강 유역, 전국토에서 벌이겠다고 움직거리기 시작했고, 교육은 오로지 경쟁의 논리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그리고 이준구 교수는 '좌빨'이 되었다.


그는 경제학자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원칙적으로 믿는 시장주의자다. 그런 사람을 일러 좌빨이라 칭하는

사회에서는 두가지 문제가 생긴다. 미쳐 돌아가는 시장탈레반주의자, 혹은 뭐라 이름붙일 '주의-이즘'도 없는

깡패 권력자 집단에 쉽사리 농단되고 희롱당하는 희생자가 수도 없이 나온다. 도심 테러분자라 희롱당한 용산,

논두렁에 1억시계를 버렸다는 식으로 하지도 않은 말들이 첨가되어 희롱당한 노무현, 고공농성 중인, 파업중인,

혹은 스스로 산화한 노동자들까지.


두번째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런 공간에선 '시장주의자' 이준구를 비판할 여지조차 협소하다. 왜 그는 한미FTA를

한번 걸어볼만한 도박이라 생각하는가. 왜 그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규제 자체를 모두 피해야 할 것으로 매도하는가.

공익을 위한 규제라면, 좀더 정밀하게 가다듬어진 규제라면 오히려 좋은 결과를 이끌 수도 있지 않을까. 단적으로,

유럽의 자동차 시장에 대한 품질 규제는 지금 그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환경까지 보호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어쨌거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의 정국에 대해 특히 이준구 교수의 혜안이 발휘되는 대목.


"주택가격 폭등을 위시한 주택정책 전반에 대해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것은 물론 (당시 노무현) 정부다.

정부는 일관된 방향으로 정책을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주택시장을

더 큰 혼란에 빠뜨리기까지 했다."


"백약이 무효'인 상태를 가져온 결정적인 원인은 정부, 그리고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신뢰의 결여에 있었다.

...그렇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이 현 정부(노무현 정부)가 들어오면서 새로이 나타난 현상은 결코 아니다...정부와

정책에 대한 불신과 관련해 현 정부(노무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크지만, 모든 책임을 현 정부에 뒤집어씌우는

것은 공평한 일이 아니다."


"정책에 대한 신뢰의 상실을 가져온 데는 현 정부의 무능을 가장 소리 높여 비판해온 집단에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

...정부가 잘못하는 점이 많더라도, 추진하고 있는 모든 정책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하는 일

모두를 도매금으로 싸잡아 매도한 나머지 거의 '식물정부' 수준으로 몰아간 것도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얼마전 주택가격이 미친 듯한 폭등세를 보였을 때 이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다름 아닌 야당과 보수 언론이었다.

자신들이 집권하면 종부세를 크게 완화해줄 듯한 제스처를 쓴 야당,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종부세의 흠을 잡아

정부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 보수 언론 역시 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게 만든 데 책임의

일단을 갖고 있다."


노무현에 대한 균형잡힌 평가는 최소한 이 정도의 상식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쿠오바디스 한국경제 - 10점
이준구 지음/푸른숲




 * 입사 직후 독후감 숙제를 받았던 책 중의 한 권, 그 때 냈던 '숙제'를 일부 수정하여 올립니다.   

배려 - 6점
한상복 지음/위즈덤하우스

 


어느 사이엔가 수많은 자기계발서, 혹은 인생지침서들이 범람하고 있는 세상이다. “몇 억 만들기”같은 재테크를 위한 실용서들보다는 무언가 나름의 깨달음에 기반한 책들이겠지만, 대부분 무게감 느껴지는 근본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얄팍한 스킬이나 임기응변적 처방에 치우쳐 있거나 다소 독단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강변하고 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외국에서는 크게 반향이 없었던 『머시멜로우 이야기』같은 류의 책이 유독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도 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번에 인사팀에서 선물받은 도서 『배려』를 처음 받았을 때에도 역시, 그런 류의 책이겠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책을 보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내리면서 약간 놀라기 시작했다. 보통 잠언이나 짧은 이야기를 빙자해서 얄팍하고 설득력 떨어지는 상황을 제시하는 책들과는 달리, 가족의 문제, 팀에서의 문제, 회사에서의 문제 나아가 인생에서의 문제를 골고루 짚어줄 만큼 탄탄한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위는 정말 주위에 있을 법한 그런 사람으로 현실감있게 다가왔고, 무언가 그럴듯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꾸며진 앙상한 스토리가 아니라 차근차근 잘 다져진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에 몰입한 채 마지막 장까지 달려가다 보니, 중간에 몇 번이고 잠시 멈칫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


스스로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야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에 더해서, 지금의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처해 있는지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와 대담함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고 새롭게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초심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공간에서의 새로운 시작을 말하지만, 사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차이처럼 문제는 자신의 마음인 거다. 하루하루 새롭고 청신한 눈으로 스스로를 확인하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이미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저러한 삶의 목표가 있고 비전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역시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닐까. 비록 다소 유치해 보이기도 하고 막막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행복은 삶의 과정에서 언제든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인도자의 말은 설득력있게 다가왔다.


나와 더불어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그것은 사람에게 다가서는 첫번째 예의이기도 하고, 함께 즐겁게 살기 위한 필요 조건이기도 하다. 상대의 마음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눈높이를 유지한 채 상대를 대하는 것은, 지하철에서 시끄럽게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독선자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밥퍼운동본부의 최일도 목사님은 그러한 식의 독선적인 태도나 말만 앞선 소란스러움 때문에 전체 종교인들이 비판받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하나님을 앞세우지 않은 실제적인 활동으로 지금은 전세계에 걸친 구빈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직접, 솔직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타인에게 말을 거는 최일도 목사님의 배려하는 태도는 그의 공동체가 타인의 관점과 입장을 배격하지 않는 낮은 자세로 섬기기 위한 기초가 되었고, 모두의 마음을 움직여 결국 하루하루의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끊임없이 이루고 있는 것이다. 비단 봉사의 문제만이 아니다. 가정에서, 회사에서, 우리의 일상을 지탱하고 있는 숱한 대화와 행동들이 모두 상대방의 관점을 배려하는 것이라면 삶이 훨씬 즐거워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배려심이 모두에게 더욱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통찰력이 필요하다. 「배려」라는 책이 묘사하는 시각적인 이미지 중에서 가장 강렬했던 것은 11층에서 바라본 차도 위의 차량 행렬이 구급차의 신호에 따라 정연하게 길을 내어주는 모습이었다. 꽉 막힌 도로에서 운전할 때 구급차에게 차선을 양보해 주는 개개인의 작은 행동들이 저러한 장관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해보지 못했었다. 트레이드센타 51층의 창밖으로 내다보는 자동차들이 장난감처럼 귀엽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해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잡아낼 수 있는 통찰력. 그게 어디든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나 자신의 학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고 내 마음을 전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소통의 기반에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성공이라면, 보다 풍요로운 내용을 갖기 위한 지혜가 바로 통찰력일 것이다.


굳이 어떻게 성공할지, 당신의 비전은 무엇인지 캐어묻는 책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삶의 기본기를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이 책의 말대로, 받기 전에 먼저 주는 배려는 나와 상대방이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공존의 원칙이며 사회의 기반이 된다. 지금까지 스스로에 대한 배려에 예민한 채,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배려를 해야 할 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지냈던 게 사실이다. 밥퍼운동본부에서 몇시간에 불과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천명에 가까운 어르신들의 점심을 전쟁치르듯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걸 뿌듯하게 느꼈다.




전반적으로 그의 소설에는 스윙 리듬같은 늘어짐이랄까, 천연덕스러우면서도 요즘 세상에선 다소 밋밋한 정도의

재기발랄함과 도발적인 호흡이 느껴진다. 뭔가 당시에는 관습이나 장르 따위 모종의 경계를 희롱하였을 게 틀림없는

그의 참신한 시도나 발상으로 말미암아 그의 글들은 재즈 시대라 불리던 당시엔 매우 흥미롭고 자극적인

소설이었을지 모르지만, 이미 상상력과 표현력이 극한까지 치닫는 요즘에는 다소 퀘퀘한 맛이 외려 매력적이지 않나

싶다. 살짝 고리타분한 묘사라거나 글투는 요즈음의 소설과는 전혀 달라서 신선한 느낌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매력적인 오프닝. 주치의는 두 손을 비비다가 버럭 짜증을 내고, 간호사는 복도에서 달아나려던 거센 욕구를 가까스로

억누르지만 새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쨍그랑 덩! 쨍그랑! 대야는 요란스럽게도 일층 바닥까지 굴러떨어진다.

"댁이 내 아버진가?" 경어법이 존재하는 한국어의 맛을 절묘하게 살려낸 한마디 아닐까. 칠십세 노인에서부터 시작한

삶이 거꾸로 흘러 갓난애기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상상력이 반짝거린다.


"그녀는 자기 틀 안에 지나치게 안착해 버렸다. 너무 평온하고 너무 만족하고 너무 흥분을 모르고 취향도 너무

점잖았다." 어린이가 되어가는 어른이 보기엔,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가며 파란 물감같던 눈빛을 잃고 싸구려 도자기

같은 색을 띄게 되기 마련이란다. 다들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그 도저한 흐름을 거스르는 자가 보고 느끼는 걸 통해

나이 먹음-인생-삶을 낯설게 보게 된다.


'젤리빈'

밤새도록 생각하여 마음속에 세워졌을 거대한 결심, 수치심과 패배감의 은사를 입은 그 단단한 결심이었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내뱉기 전에는 황금과도 같았을 다짐이, 입밖에 뱉어지고 조건과 마주하는 순간 똥으로 변한다. 그건

피츠제럴드의 말마따나 일종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거의 화학적인 변화'. 갈지자로 분탕질치는 누군가의 행위 저간에는

그토록 심오한 심적 갈등과 고뇌, 영겁과도 같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던 게다.


'낙타 엉덩이'

그토록 매력적이고 앙칼지지만 맘여린 아가씨라면, 낙타 앞몸뚱이가 아닌 엉덩이 부위를 담당해서라도 들이대 보겠다.

특히 와닿았던 표현. "코르크가 (아마도 : 그보다 더 딱딱하게 메말라버린) 내 심장을 본다면 치욕에 못 이겨 저절로

떨어져 나갈 테니." 아..이런 표현을 자연스레 구사하던 사람들이 살던 시대란. 무도회와 고풍스런 자동차. 실크햇과

평등하지 않은 인간.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


'도자기와 분홍'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일종의 꽁트랄까.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며 무대 위 연극을 설명해주는 연사가 있고, 무대 위엔

복숭아빛 처자들이 있다. 정확히는 '연분홍색을 띤 흰색'의 오랜 옷을 입고 있는 도자기 욕조 속 줄리. 왠지 방정환선생이

쓴 '만년샤쓰'던가, 그런 소설의 김창남이 떠올랐지만, 김창남은 여유로움보다는 오기와 자존감이 강조된 캐릭터.

그에 비해 줄리의 재치있는 입담과 센스넘치는 받아침을 보건대, 그녀는 호기롭고 당찬 신여성.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

그저 안타까울 뿐. 왜 그녀는 멍청하게도 가난을 예견하며 설레하는 건지. 가난을 모르던 그녀들의 낭만이란, 이제야

비로소 밤하늘 별들을 보곤 다이아몬드와 직통으로 연결짓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키스미키스민, '키스민'이라는

센스넘치는 이름이라니 조금은 봐줄 수도 있지만,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를 두고 '다이아몬드엔 좀 질렸어'

따위로 말하다니.


작가가 의도한 게 이토록 가당치도 않은 거대한 부를 실감나도록 상상케 만들어 허기를 느끼고 가상이나마 채우도록 한

거였다면, 그리고 그게 성공했다면, 왜 마지막엔 모든 걸 한낱 꿈으로 만들어 버린 거냐. 되려 허기만 심해지고 말아서,

스스로의 낭만과 여유로움의 바닥을 들여다봤다. 


'메이데이'

누군가는 삶과 사랑에 지쳐 권총을 물고, 누군가는 건물에서 자유낙하해 머리가 깨져 죽고, 또 누군가는 무도회의

여왕처럼 대접받다간 사건에 휘말려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오고, 술에 취한 미스터 인앤아웃은 천국행 엘레베이터를

잡아 탄다. 그런 식의 스케치..좀 지루했다. 차라리 고든과 이디스의 어긋난 감정과 타이밍에 집중한 이야기를 했다면.

"'사랑은 덧없는 거죠.'...새로운 사랑의 말들, 새로 배운 부드러움은 다음번 연인을 위해 소중히 간직되었다." 이런 식의

마무리도 깔끔하지 않았을까.


'치프사이드의 타르퀴니우스'

한국 환타지문학의 거두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비롯한 작품들엔 꼭 이런 인물들이 나온다. 수다스럽고도 고풍스런

말투를 구사하며 다소간의 현학과 숨겨진 위트를 즐기는. 드래곤 라자의 후치같은 캐릭터. 이 전혀 정체를 알 수 없는

제목의 소설은 그러한 캐릭터의 원형이 혹시 이로부터 비롯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기시감을 선사한다.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

난 이 소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너무 밍숭맹숭한 스토리, 그리고 내가 놓친 게

있다면 넘 어려운 스토리..라고 치부하고 넘어간다.


'행복의 잔해'

작가가 좀 나이를 먹고 쓴 게 아닐까. 그 이전의 발랄한 분위기와 특이한 사건 위주로 흘러가며 만담하듯 읽히던

단편들과는 달리, 차분한 호흡에 담백한 스토리. 가당치도 않게 행복의 잔해 위에 선 두 남녀의 새로운 러브 스토리,

혹은 정사신의 여운이라도 남길 바랬던 스스로에게, 자극들로부터의 디톡스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Mr. 이키'

유머러스하게 닫히는 1막짜리 연극 대본같은 소설. 근데..방충제가 등장한다는 거 말고는 포인트를 못 잡겠다. 뭐지.


'산골 소녀, 제미나'

짤막한 사랑이야기. 유일한 선생을 알콜중독으로 사망시킨 양조장 소녀가 국자로 위스키를 퍼먹다가 만난 외지인,

그리고 '인간 알코올램프' 그녀와 외지인은 전투중에 발가락 숫자를 세다가 함께 죽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인데,

웃기고 만 이야기.


'작가의 말'

"변화하는 유행의 권태로움이 나와 내 책들과 이 단편소설을 모두 한꺼번에 짓누를 때"...를 그는 기다렸던 거다.

그는 불후의 거장이 되겠다거나 인간의 변함없는 뭔가를 글 속에 간직하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당대의 욕구와 취향을

가장 잘 반영하고 선도하고 또 따르려는 욕심을 가졌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의 글들을 읽다 보면 당시 유행을 선도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생각을 했으며, 어떤 식의 농담을 했는지, 어떤 유희를 즐겼는지 살아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당대를 넘어 불변하는 뭔가를 끝내 쥐어내고 시대를 버티어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시대에 오체투지하듯

몸을 던져 흐름에 완전 영합함으로써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도 있기 마련인가 보다. 살짝 풍기는 노인네의 구렁내같은

골동품의 냄새도 이정도면 오묘한 향수 축에 끼워줄 수 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6점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문학동네




먹히면 죽는다. 내 군생활을 시작하면서의 다짐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학부에 남아있기 쪽팔리다 싶어 사회에 쭈뼛대며 나섰을 때도, 그런 마음이었다.

먹히면 죽는다. 이전에 비해 업그레이드된 점은, 이제는 그 다소 부담스런 비장감을 덜어낼만큼의

여유로움도 챙기고 싶었다는 정도.


그도 그랬나 보다. 허지웅.

허지웅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가 프리미어 기자라는 것도, 종종 시사지에서 마주쳤던 좋은 글들에 달린

바이라인에 그의 이름 석자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나와 거의 비슷한 동년배라는 것은

더더욱.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어리다며, 생리적 나이와 관계없이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는 자신이 '울었다'는 고백을 겁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먹히면 죽는다'는 결기에 더해 가오를

좇는 센스까지 갖추어 삶을 살아내고 있다. 꼰대와 야메 마초가 되길 거부하며, 한걸음한걸음 자신의

힘으로 살고 있다. 분노하고, 사랑하고, 의욕하며, 울기도 잘 울고, 난잡하다는 평에 안도한다.

'대한민국표류기'에 활자화된 그는 아직, 여전히 말랑말랑한 사람인 것 같다.


사람들은 조금씩 딱딱해진다. 대학에 들어와 기고만장해지면서, 이삼년 대학다니고는 '캠퍼스의 낭만'을

실컷 즐겼다며 취직 준비를 하면서, 군대를 다녀와선 세상의 부조리함에 만성화되면서, 대학을 졸업할

때쯤엔-특히 요새 이른바 88만원 세대들은 더더욱 어쩔 수 없이-옹이구멍만한 눈으로 밥벌이구하기에

매달리면서, 사회에 나와선 나름의 방식으로 익힌 처세술과 가면 뒤에 숨어서. 언제 딱딱해지기로

결정했느냐, 시간의 문제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앞서거니 뒷서거니 어른을 자처하며

에스컬레이터 위의 삶을 취한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게 참 쉽지 않아졌다고 생각했다.

회사원을 만나 연애하는 것이 학교 때와는 또 다르다는 이야기야 익히 들었지만 비단 연애 이야기만은

아니다. 나 역시도 그런 면이 없잖겠지만,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딱딱해진다. 이미 타인에 대한 신뢰나

기대감에 적잖이 상처입어서일 수도 있고,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다. 얄포름해지고, 둔감해지고, 물기가

말라버린 느낌.


그런데 그런 생각은 기실, 대학 들어왔을 때도 생각했던 거다. 대학 들어왔을 때는 대학 친구들과

고등학교 친구들을 비교하며, 그 이전에는 고딩/중딩 친구들과 불알 친구들을 비교하며. 사회

친구들과 대학 친구들을 비교한 후에는 또 누구와 누구를 비교하게 될까. 그러고 보면, 딱딱해졌다고

생각했던 그들 중에도 술 한잔 하며, 커피 한잔 하며 수다를 떨다보면 의외로 여전히 말랑말랑한 구석이

온존함에 놀랍고도 반가웠던 적이 있다. 말랑말랑한 사람들과, 딱딱해져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속은

여전히 말랑대는 사람들과, 정말로 딱딱해져 버린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 와중이다.

아직 말랑말랑하다고, 적어도 말캉말캉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의 (영화평론을 포함한)

에세이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내 속의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듯 했다. 그런 말랑말랑함이

필연적으로 동반할 (꼰대 세계의 눈으로 본, 가치평가가 담긴) '불완전함'과 '불안정함', 그런

'질풍노도'의 표류기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계속 말랑대며 살고 싶은

내가 그랬듯.


ps. 개인적으로 정말 한번 만나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첨엔 비슷한 나이의 그가 이런 책을 냈다는

사실에 살짝 질투도 느끼고 괜히 치기어린 구석은 없나, 꼬투리 잡을 거 눈에 불을 켜고 찾았지만,

조금씩 그의 글들을 읽으며 99% 싱크로하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만난다면 특히나, 흡사 하나의

세계였던 그녀가 허물어지면서 그가 느꼈던 결락감을 지금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도 묻고 싶고.


대한민국 표류기 - 10점
허지웅 지음/수다




평소 경영학 지식서나 자기계발서에 대해 전혀 '식욕'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우연찮게도 이 책은 최근 며칠에 걸쳐서

내게 몇 번씩이나 노출되어 있던 상태였다. 회사에서 주관했던 CEO조찬회에서 선물로 나눠줬다는 이야기나, 누구였더라

높은 분이 일장 연설을 하실 때도 이 책의 내용을 일부 인용키도 했었고, 주변에 책을 사서 들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고.


그렇게 읽게 된 메이저리그 경영학. 야구를 경영에 빗대어 보겠다는 아이디어가 참신했다.

야구에서 진루 순서를 바꿀 수 없듯, 경영에 있어서도 운영관리, 인력관리, 자기관리, 그리고 변화관리라는 네 개의

베이스를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는 메타포는 정말 반짝거렸다. 


그걸 조금 정식화시킨 게 바로 이 책의 목차이기도 하며, 목차보다 명료하게 제시된 건 책의 양날개에 있는 요약.

65% 앞서 가는 경영의 기본 운영 관리, 1루 진출.

35%만이 진루에 성공한다는 인력 관리, 2루 진출.

자신을 분석해야 15% 안에 든다는 자기 관리, 3루 진출.

변화를 주도하는 최후의 5%를 위한 변화 관리, 홈 밟기.


이제 남은 문제는, 야구의 통계에서 빌려온 이러한 65%니, 35%니 하는 (있어보이는) '믿음직한 수치'를

경영기법의 문제에서 어떻게 설득력있게 제시하는가, 그리고 얼마나 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최소한 뻔한 이야기라도 조금은 더 새롭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가.


야구의 온갖 일화들, 비화들은 재미있었다. 야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크지 않은 나같은 사람도

흥미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인 일화들도 있었고, 풍부한 사례들로 지루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야구에 흥미를 가지게 된 것도 작지 않은 소득이라고 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야구에 빗대 경영을 이야기하려는 애초의 반짝이던 아이디어가 광택을 확 잃었달까.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어느 순간 너무 도식화된 틀에 얽매여서는 야구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경영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예의 '자기계발서/경영서 혐오증'이 울컥 일었는지, 대체 왜

이런 뻔한 이야기를 뱅뱅 돌리고 돌려서 있어보이게 포장하려고 급급한 건지 짜증이 나기에 이르렀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디테일로 들어가선 온통 구멍숭숭 뚫린 치즈같은 느낌이었다.

조금 더 씨니컬하게 말하자면, 애초 이 책이 삼백여 페이지나 할애해 가며 쓸만한 아이디어를 품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아, 야구 경기의 운영을 경영에 비유해 볼 수 있겠구나, 라는 짧막한 깨우침이랄까, 그걸 말하고

싶었다면 열페이지로도 충분했을 게다. 야구에서의 사례를 풍부하게 인용하고 싶었다곤 해도, 인용의 과잉이다.

그게 아마 이 책이 경영서인지, 야구 상식대백과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이유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쐐기를 박아주는 멘트. "만약 당신이 위의 네가지 경영 전략을 마스터한 5%에 들 수 있다면

이제 티켓을 맘대로 끊을 수 있다. 그것도 VIP귀빈석으로." 이런 유치찬란하고 싸보이는 멘트...이건 전적으로 내

취향에 달린 문제겠지만, 사람들을 경마경기의 말들처럼 앞만 보고 내달리라고 꼬드기는 이런 말...

아무리 자기계발서라고 해도 요샌 이렇게 대놓고 천박하게 굴지는 않으며, 믿는대로 이뤄진다는 식으로 사이비

약장사처럼 굴지도 않는 것 같던데.



참 요란스런 껍데기다. 중국에서 판매속도가 가장 빠르다느니, 수백만 매체가 어떻고 몇십주동안 1위가 어떻고.

빌게이츠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는 규모의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로스차일드가문이 세계 금융을 쥐고 흔든지

어언 이백여년이 되었다거나, 링컨과 케네디의 암살, 미국의 남북전쟁, 심지어는 유럽의 전쟁들과 1, 2차

세계대전까지도 그들 일부 '배후세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통제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런 식의

허무맹랑한 음모론은 이런 식의 의문을 낳는다.




그런 음모론에 경도된 책의 앞머리 절반쯤을 읽으며 한 댓번은 "그래서 어쩌라규~"를 외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불태환화폐가 고작 몇십년의 역사밖에 지니지 못한, 아주 특이한 경우임을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듯 하다. 태초부터 그랬던 듯 단단하고 완전무결해 보이던 지금의

시스템이 실은 역사적인 구조물에 불과하다는 인식, 그리고 변경가능하다는 상상력의 자극. 그게 지금 시스템의

문제점을 바꾸는 단초일 테니까.


지은이가 말하는 대로, 금본위제가 폐지되고 은행들의 지급준비금제도에 기댄 불태환화폐제도가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돈'을 출현시켰다. 금이나 은과 같은 진정한 부(wealth)를 증거하는 화폐가 아니라, 은행으로부터

액면가만큼을 빌렸음을 의미하는 차용증서로서의 화폐. 그리고 그러한 화폐의 발행이 점차 팽창하면서 이른바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 [각주:1]효과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그에 더해 전지전능한 '그들'의 입맛에

맞는 타이밍과 성과를 기한 세계적 차원의 경기변동이 유도되어 특정국의 자산과 부를 고스란히 가로챈다고 한다.

그게 지은이가 말하는 '양털깍기'의 의미이다. 경제가 호황을 이루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다가, 어느 순간 거품이

잔뜩 끼었다 싶을 때 훌떡 경제를 말아버리고는 싼값에 주요 기간산업과 기업들을 차지하는 것.


결국 이 책의 요지는, 제9장 달러의 급소와 금의 일양지 무공, 그리고 제10장 긴 안목을 가진 자, 요 두 챕터에 전부
 
담겨 있는 듯하다.(제목도 참...중국스럽다.) 중국이 금융시장을 개방하기 전에, 황금에 기반한 화폐제도로 조금씩

위안화를 바꾸어나가며 미국의 국채나 달러 대신 금을 중국내에 쌓아두라고. 그렇게 서서히 세계의 기축통화로

등극해서 중국이 다시금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워낸 패권국으로 등장하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다.


근데, 한국의 경제위기 당시에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국내자본과 해외자본이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은이는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중국 내의 금융자본도 역시 자기증식을 통한 이윤 추구라는 논리에 충실할 뿐 아닐까.

지금이야 세계 금융시장에서 수세를 점하고 있기에 방어에 급급할 뿐이지만 그들 역시 언제든 '로스차일드가문'이

그랬듯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바꾸고 국가를 변형시킬 집단인 거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는 '국내자본' 대

'해외자본'의 구도 혹은 '중국' 대 '외부의 적'의 구도라기보다는, '공공영역의 수호자인(여야 하는) 정부' 대

'자본'의 구도가 더 설득력있지 않을까. 현실적으로 금태환화폐 시스템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라도, 중국 내

자본과 협력하는 것보다는 타국 정부들과의 협조가 더욱 중요하고 효과적일 것 같다.


하나 더, 중국은 패권국을 추구한다고 치고, 한국에는 어떠한 함의가 있는 걸까. 이책. 중국 정도 되는 나라니까

외부 금융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던, 로스차일드가문이 전세계를 집어삼키겠다고 음모를 꾸미던 말던 그에 대항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거지, 우리 나라는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야 이 책이 뭔가 대국인으로서의 역사적

책무라거나 괜히 어깨 으쓱하는 사명감을 느끼게 했을지 몰라도,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해도, 한국에서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태환화폐 시스템의 역사적 형성과정이나 그 문제점들이란 건, 사실

이 책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을 텐데...? 한국의 CEO들이 추천하는 책이라는데 왜 그럴까.

왠지 Snob effect란 단어가 오랜만에 떠오르는 듯.ㅋ


화폐전쟁 - 6점
쑹훙빙 지음, 차혜정 옮김, 박한진 감수/랜덤하우스코리아







  1.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란 내가 기억하는 한도내에서 설명해 보자면 이런 거다. 화폐공급량이 늘어나 물가가 상승하게 되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게 되는데, 그 자산의 하락한 가치분만큼을 화폐발행의 책임이 있는 정부에 세금으로 낸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정부가 초래한 인플레이션에 따라 사람들의 부가 스물스물 정부로 이전되는 효과랄까. [본문으로]
휴대폰도 되고 카메라도 된다는 '컨버전스', 혹은 엠피쓰리도 되고 USB도 된다는 '양수겸장'의 아이디어 상품은

종종 성공적이지 못하다. 어느 한 쪽의 기능이나마 제대로 살아있다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 다른 한 쪽의 기능이

물귀신처럼 우월한 쪽의 기능을 물고 늘어져 두 가지 기능 모두 어정쩡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읽기에 따라 연애소설이 될 수도, 미스터리소설이 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강조하는 건,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는

쉽게 와닿기는 힘들 듯 하다. 우선 미스터리를 구성하기 위해 치밀히 고안된 복선들과 상징들이 일본 '내수용'의

것들이어서 내 눈에는 별로 걸리지 않았다. 다만 A면, B면이라 이름붙은 두 챕터가 알고 보면 동시간에 일어나는

사건들의 기록이라는 흐릿한 의심은 뒤로 가면서 더욱 짙어졌었고,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나름 성공적으로 그간의 긴장을 날려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참신하고 재치있는 구성의 묘미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연애소설의 측면에서는. 글쎄. 얼핏 생각하면 그 소설에서 제일 눈에 띄는 아포리즘은 이건가 싶다.

인간에겐, 이 세상에는 절대란 건 없다고. 그걸 알게 되면 비로소 어른이라고 해도 좋다고.

이 사람이라면 평생 사랑할 수 있겠다는 느낌, 헤어진 뒤에도 그 이상으로 좋아하게 될 상대는 앞으로 평생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 그런 건 모두 어린 시절의 무지한 신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절대'란 게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연애가 바로 일종의 통과의례, 이니시에이션(Initiation) 러브라고.


그런 거구나, 하면서 제길, 하면서 끄덕끄덕 하려다가 왠지 반감이 인다. 내가 품은, 그녀가 품은 애정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당사자들도 알지 못하고 확신도 없는 게 '어른들의 사랑'이라고? 사람을 사랑하면서 믿을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지금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얄팍하고 찰나같은 진실이란 걸 부정하는 건 아니다. 고작 그정도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절대'라느니, '(성숙한) 어른의 사랑'이라느니 상대적으로 (미성숙한) '아이의 사랑'이라느니.

자존심을 다칠까 마음을 다 못주는 연약함, 상대로부터 거부당한다는 걸 견딜 수 없는 두려움, 그런 걸 왠지 다

컸다는 느낌을 강변하는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로 뭉개버리려는 건 아니고?


섹스 파트너를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마음을 얻으려 했던 그녀, '역시 그렇게 되는구나..'라는 그녀의 한 마디.

그녀는 마치 열혈 기독교도처럼, 자신이 이미 알아버렸다고 생각한 그 황량하고 불가역한 '진실'이 남자에게도

유효할 것이라 이야기했지만..막상 그녀로 인해 황량해져버린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상처나 공허함을 타인에게도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나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그들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얼마나 기다려야 다시 예전처럼 신선하고

건강한 핑크빛 하트로 회복되냐고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게 계속해서 상처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면...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상처투성이 마음으로 사랑을 다시 해야 한다면, 그게 '어른의 사랑'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인지도 모른다.



이니시에이션 러브 - 6점
이누이 구루미 지음, 서수지 옮김/북스피어

김수행 교수님의 아카데미시즘

김수행 교수님은 아직 상대평가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부터 수강생들에게 엄격한 학사관리를 한다는

평판이 높았다. 수업에서 듣는 내용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다고 생각했던 일부 사회대 학생들은 이른바

'마르크스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그런 것도 몰라주고 엄격한 출결관리와 냉정하고 야박한 학점을

고수하는 데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었지만, 사실 '상대평가'와 '사회주의적 가치'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할 이유 따위는 찾지 못했었다. 교수님은 특히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하고자 수업을 듣는 학생이라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했었다.


이 책에서 교수님은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명확히 고백한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자면 자신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을 하는 데서 그칠 뿐, 예컨대 '김수행노믹스' 식의 구체적이고 미시적인 현실

정책이나 개별 사안에 대한 디테일한 평가가 가능할 만큼 공부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는 것. 지승호와

인터뷰할 때의 교수님은 때로는 시사 이슈에 대한 대중적 이해 수준에 머물거나, 혹은 솔직히 '그 부분은

공부를 안 해서 모르겠다'고 한 발 물러선다. 농업 경제학의 문제, 영국 복지정책 후퇴에 대한 해석의 문제..


그렇지만 한국 사회와 같은 황량한 지형에서 '자본론'에 기대어 한국경제를 읽어낼 만큼의 공력이 있는

경제학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김수행 교수님에게 구체적인 경제정책을 내놓으라거나,

혹은 개별 사안에 대한 입장과 논평을 요청하는 건, 일개인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서울대학교에서조차, 그분의 퇴임과 함께 마르크스 경제학은 주류 계량경제학의 틈바구니에서 또다시

밀려나 버리는 상황인 거다.


자본론의 부활을 말할 때

누군가 진보 세력의 특징은 개인이나 요소가 아닌 구조와 동학을 주목하고, 반대로 보수 세력의 특징은

개인과 요소에 우선적인 책임과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동의하는 말이다. 맑스도 그랬지만

김수행 교수도 개별 사안이 아닌 구조 자체를 천착하고 있다. 케인즈도 '구성의 모순'이라며 개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전체로서의 합리적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지적을 했으니, 꼭 빨갱이만 구조적

모순과 시스템의 불합리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닐 거다.


실제로 주류 경제학이 'Ceteris Paribus'(다른 모든 조건이 일정하다면)이라는 비현실적 전제 하에서 완전

경쟁을 상정하는 것과 달리 정부가 시장판 자체를 유지, 존속시키는 역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의 가능성을 최소한 이전에 그랬듯 지금 굴러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반성적

역할에 한정하더라도, 시장의 역사성이나 생산의 원천 및 분배에 대해 풍요로운 시사점을 충분히 던질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마르크스와 그의 경제학을 아예 도외시하고 있는게 문제다.


90년대 'IT 경제' 혹은 '지식경제'가 유행하면서 실물경제의 중요성이 약화되었다느니, 노동-자본의 구도

자체가 무화되었다느니, 혹은 비정규직 문제가 주목받으면서 '노동'을 덩어리로 보는 기존 시각과

맑시즘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느니 많은 지적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금융경제의 거품이

급속히 꺼져들어가는 세상에서 맑스와 김수행 교수가 주목하는 날것의 구조와 시스템, 실물 경제 그리고

강고한 노동-자본의 구도는 요요히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미상 열려있고 내용이 굳어지지 않은 '새로운 사회'

김수행 교수님은 '사회주의', '공산주의'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종말론적인, 목적론적인 '닫힌 미래'를 항상

경계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에 '조응'한다고 했던, 그 '조응'이라는 애매한 단어에

기대어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 그러니까 경제가 발전하면 자연히 사회가 발전한다는 식의

'경제주의'도 경계하고자 했던 교수님은,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말한다.


그건 어떻게 올 지, 어떠한 형태가 될 지, 언제 올 지 아무도 모른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그의 단편적인 아이디어들을 여기저기 흘리고 있을 뿐, 기계적인 도식 따위 그린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하는 건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교수님도 이야기하듯)

새로운 사회를 그릴 수 있는 상상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책 마지막 장의 우석훈교수가

말했던 좌파 경제학의 정의가 와닿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지키는 것은 (주류)개발경제학이고, 말 못하는

사람-소외 받은 쪽이나 소수자나 약자들-을 지키는 것이 좌파경제학이라는 이야기.


얼마 전 만났던 기자 선배가 했던 이야기가 오버랩되었다. 자신이 되고 싶은 기자란 건, 항상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줄 수 있는 기자라고. 그렇게 지금 사회의 약자들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보고 이야기하면서

문제를 가다듬어 나가고, 또 그에 대한 반응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첩경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라는 이미 그 의미와 내용이 가득 차 굳어버렸거나, 심지어

오염되어 버린 면이 없지 않다.


남북 경협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그러나.

개성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남북 경협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들은 남북관계가 너무 호전되면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자 관리하기도 힘들거라

염려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지금처럼 최악으로 경색되기 이전의 '배부른 고민'이었다.) 김수행 교수도
 
지금과 같은 식으로 투자해서 바로 자본주의적 이윤만을 좇는, 값싼 노동력만을 착취하는 경협은

별 의미도 없고 남북통일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물론 경협 자체만으로도 남북간 합작의 훈련이 될 수 있고, 자본주의의 이식을 위한 훌륭한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 반대편 시각과 그 근거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해 볼 만한 내용 아닌가.

'새로운 사회'를 상상하는데 필요한 훌륭한 자극이 될 수 있는 꼬투리가 될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그조차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여전히 웃기지도 않는 '불온도서' 운운하는 세력이 굳건하다.


덧붙임. 인터뷰의 미학.

마구잡이로 치고 빠지는 '합이 짜이지 않은' 날것의 싸움이 막장으로 가는 개싸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그럴 듯해 보이거나 심지어 아름다워 보이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액션 영화나, 토론회, 혹은

'리얼'을 표방하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조차 기본적인 '합'을 짜두기 마련이다. 내가 이렇게 치면

넌 이렇게 막고, 니가 이렇게 반격하면 난 저렇게 피한다는 식의 '합' 말이다.


지승호와 김수행의 질문과 답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김빠진 문답도 아니었지만, 어느 한쪽의 기세가

등등한 위압적인 문답도 아니었다. 둘다 최선을 다해 질문하고, 최선을 다해 답하고 있다는 느낌, 

그들은 질문과 답을 함께 만들고 있었다. '합'을 미리 짜두어서라기보다는, 서로가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충실히 알고, 또 아는 것을 최대한 노이즈없게 전달할 만큼 충실히 숙성시킨 사람들이어서 그런 게다.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 - 10점
김수행 지음, 지승호 인터뷰/시대의창


애초 위드블로그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리뷰어를 신청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난 차례로

그의 미술작품들, 그의 수기노트들, 그리고 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이 그의 삶 어느 순간순간에 포진해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일어난 이미지들이 바로 내가 지금껏 다 빈치 그에 대해

그나마 갖고 있던 조각조각 분절된 정보들이었던 게다.


사람들은 자신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혹은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앞에 두고 쉽게

멈추어 버리곤 한다. 그렇게 자신의 동서남북 사방으로 멈추어선 경계 그 내부를 세계의 전부인양 살아가지만,

때론 그 경계를 거침없이 넘어서는 사람들이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오늘날 현대과학이

검증해낸 과학적 사실들을 일찍이 깨우쳐버린 다 빈치나 갈릴레이 같은 사람들. 이해하기 꺼려지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과 당대의 상식에 반함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고 실험을

극한까지 밀고 나갔던 프로이드나 니체 같은 사람들.


그 중 운 좋은 사람은 후대인들을 자신의 어깨 위에 태워 좀더 넓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나중에야 재평가되고, 아 이러저러한 것들은 이미 그가 얘기했던 것들을 '재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구나, 하는 식으로 그치곤 한다. 다 빈치가 그렇다. 그의 아이디어와 과학적 시도, 방법론들은 너무

일렀다. 그야말로 그는 '너무 일찍 깨어난 사람'이었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 책에서는 특히 그가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할 만큼 엄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현상과

그 이면에 감추어진 작동 원리를 탐구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난잡한 수기 노트에 적힌 글과 그림을 봐도

그가 얼마나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고 싶어 했는지 열의가 느껴진다.

물론 이 책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생을 재구성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책이다.

그가 자신의 사고를 기록해둔 수기노트들조차 제대로 재구성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니 그의 삶을 좀더

명료하게 알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사실 욕심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 빈치 앞에 붙는 온갖 수사들, 천재니 편집증

환자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사생아였다느니 등등 손쉽게 레테르를 붙이고 멈추는 게 아니라 조금은

더 그의 삶이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따라가며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풍성하고 탐스러워 보이는 하얀 수염이 뒤덮인 늙은 현자로서 멈춰있는 다 빈치가 아니라, 그의 어릴 적 모습과

커나가는 모습, 그리고 인간적인 여러 고민과 어려움들 앞에서는 지금의 나와 별다를 바 없는 그의 반응을 보면서

왠지 친밀한 느낌이 한층 커져 버렸다.

이 책은,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용 인문/사회 도서다. 몰랐다. 처음에는 책을 받고 나서 이런 책을 보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나 다소 망연했었지만 생각보다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또 무엇보다 책 마지막 쯤에 있는 다 빈치의

수기노트를 웹상에서 일부 열람 가능토록 한 웹사이트 주소를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현재 그의 수기 중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빌 게이츠가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레스터 사본은 물이 가진

모든 성질과 움직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한다. http://www.amnh.org/exhibitions/codex/index.html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으니 한번 죽 읽어보며 수기노트에 담긴 그림 일부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듯.


또 영국국립도서관의 사이트에서는 마치 책장을 넘기듯 그의 수기노트를 열람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데,

왜 그런지 난 계속 못 보고 있다. http://www.bl.uk/collections/treasures/digitisation.html#leo 


레오나르도 다 빈치 - 10점
캐슬린 크럴 지음, 장석봉 옮김, 보리스 쿨리코프 그림/오유아이
안데르센의 대표적인 동화들인 '인어공주', '백조왕자', '장난감 병정', '성냥팔이 소녀'와 '눈의 여왕' 등 총 6편의

작품들이 '어른들을 위한' 새로운 버전으로 출간되었단다. 어른들을 위한 버전이라니, 인어공주와 왕자와의 종을

넘어선 정사 장면이라도 묘사되었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장난감 병정이 실은 메조키스트였다는 충격 고백이 독점

게재되어 있을지 궁금했지만, 글쎄, 그림체가 어린이들을 위한 그림보다 조금 더 섬세하고 정묘해진 덕분에

어른들이 들고 다니며 읽어도 '모냥새 빠지는 일'은 없겠다 싶은 정도 외에는 뭘 바꿨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자체로 사실 큰 공헌일지 모른다. 어렸을 적의 '내'가 이해했던 그 내용과 교훈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그 동화를 공식적으로 어른이 된 '내'가 다시 한번 집어들어 펼쳐볼 만한 유인을 제공한다는 것 자체로

말이다. 동화를 읽으면서 계속해서 마주쳤던 건, 언젠가 기억도 나지 않는 까마득한 옛날, 마치 화석처럼 조용히

내 어딘가에 새겨졌던 느낌들과 나름의 해석이었고, 또 그것과 부딪히고 반발하는 지금의 '나'였다.
어렸을 적에는 진짜 감정과 가짜 감정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우습게도 나는 인어공주가 되어 나의 감정만을 유일시했으며, 나를 넘어 옆나라 공주를 바라보는 왕자의 감정은,

그리고 그에 호응하는 옆나라 공주의 눈빛은 가짜라고 여겼다. 굳이 악의가 철철 흐르는 '바다마녀'라거나 장난감

병정에게 시련을 안기는 '괴물 인형', 혹은 '눈의 여왕'이 아니라 해도 주인공의 감정을 가로막고 좌절시키는 것은

모두 가짜, 혹은 나쁜 놈이었다. 어쩌면 동화 속 주인공 자리는 항상 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옹이구멍만한

시야와 턱없는 자존감이 바로 내 모든 감정이야말로 진정한 것, 순수한 것이라고 믿게 하는 원동력이었을 게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받아들여지는 감정과 받아들여지지 않는 감정이 있을 뿐인 것 같다.

모두 진짜라면 진짜고, 또 가짜라면 모두 가짜일 그 감정들의 흐름 속에서 때로 막히고 때로 뚫리면서 슬펐다가

기뻤다가, 그렇게 아프고 행복한 것 뿐인 건 아닐까.


기억도 나지 않는 어렸을 적부터 주입되었던 '선은 반드시 악에 승리한다'는 기묘한 믿음이 조금씩 사각대며

부식되고 있으면서도, 아직 공룡뼈처럼 완고히 남아있는 최후의 보루랄까,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그리고 나만이

진심이다)라는 식의 잔재가 남아 자신의 감정이 거부됨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도 얼마나 혼탁하고, 변덕스러우며, 진실하지

못한가. 마음이 진실하다는 건 또 뭐냐, 흘러가는 감정을 '단어'와 말의 힘을 빌어 오롯이 퍼올릴 수 있을까

따위 근본주의적인 질문엔 잠시 등을 돌린 채 나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보면, 차이는 어쩜 아주 작은 것

하나 뿐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마치 망망대해에 점점이 솟아오른 섬과 같다면, 좀처럼 이어지기 힘든 

인근 섬 그 어딘가에게 연결되고 회신을 받을 수 있는 감정, 그리고 누군가에게도 걸쳐지지 못한 채 힘없이

자유낙하하다 바다 저 아래로 가라앉을 뿐인 감정. 그렇게 이어지고 이해받는지, 아닌지의 차이.


인어공주의 마음은 왕자에게 전해지지 못했으며,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며, 되돌려받지 못했을 뿐이다.

옆나라 공주의 마음은, 왕자의 마음은, 서로에게 전해졌으며, 받아들여졌고, 그리고 어렸을 적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 믿는 건 잠시 유예할지라도 당분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감정을 되먹여줄 게다. 그리고

인어공주의 아픈 감정만큼 그들의 달콤한 사랑 역시 진실하다.


동화 속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주인공일 수 있고, 저마다 감정을 쌓아온 역사와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진심은 반드시 통하는 것은 아니며 자신의 감정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답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소모하느니 감정이 받아들여지도록 최선을 다해 움직여라, 정도가 어른들을 위한 동화의 훌륭한 교훈이 아닐지. 


그렇게 자신의 진심이 언제고 거부당할 수 있다는 걸 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잔인하지 않은가. 어른들에게조차.




눈의 여왕 - 6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김양미 옮김, 규하 그림/인디고

남자들은 보통 군대를 다녀오면서 '엄마'라는 호칭을 떼어버리곤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갈아탄다고 한다.

그렇지만 첫휴가 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부모님께 제대로 '필승!'하고 경례 한번 한 적 없는 내 유별난 군대

혐오증 탓인지, 턱도 없이 군대를 빌어 뭔가 더 철든 척 하고 어른스러운 척 하기는 싫었던 터라

내게 엄마는 여전히 엄마다.


그런 엄마가 어느날 날 쿡쿡 찌르며 한번 읽어보라 했던 책.

누가 바라보는 건지, '엄마'도 아니고 '신'도 아닌 거 같은데, 뜬금없지만 집요하게 쓰이는 '너'라는 지칭에 다소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또 '엄마'란 존재가 또다시 자식들에게 헌신하고 남편에게 평생 봉사하고 모든 것을

다 챙기고 끊임없이 사랑을 퍼올리는 근원으로 이상화되고 있다는 느낌이 다소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찔끔이게 되는 건, 그 '엄마'에게서 스스로의 엄마 모습을 찾아내기 때문일 거다.


일찍 퇴근하는 날에도 늘 뭔가 약속이 있다며 주중엔 맨날 놀다가 늦게서야 집에 들어와서 피곤타고 짜증내고,

들어가 잔다고 뻥치고는 시덥잖은 컴터나 하고 앉아선 밤늦게 자기 일쑤고, 아침엔 혼자 못 일어나서 맨날

'오분만오분만~' 웅얼대는 게 일이고, '애미애비도 몰라볼 만큼' 술퍼마시곤 동네 놀이터에서 뻗어자기도 하고,

뭐 그런 것들. 그때마다 엄마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했다는 새삼스런 반성.


조금은 더 엄마한테 덜 틱틱거리고 덜 투덜거릴 수 있게 날 잡아 주겠지만, 또 다시 당신이 예전에 불리던 이름과

예전에 가졌던 꿈들에 대해 살짝 무뎌져 버리면 금세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책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는 동안이라도.

'엄마를 부탁해'라는 건,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게 그 피에타.

엄마를 부탁해 - 6점
신경숙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1. 데자뷰로 위장된 변함없는 일상

가끔씩은 어제 신문이 오늘 신문같고, 또 오늘 신문이 내일 신문같을 때가 있다. 기자들은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진

듯이 떠들고 이런저런 의미와 중요성을 부여하려 애쓰지만, 그건 어쩌면 매일매일 새로운 NEWS를 찾아내야 하는

그네들의 직업적 특성이거나 생계유지를 위한 언론인들의 암묵적 공모인지도 모른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쏘공이 씌여진 그 때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나보다. 난장이를 알아보고

이해하고, 나아가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임을 말하는 신애도 그렇게 말한다.


"사회 부조리 시정 촉구한 고위층, 당직 개편 않겠다고 밝힌 야당 당수, 사회 안전법 해설, 남북한 대화 촉구한

UN사무총장...10년 동안에 여덟배로 늘어난 강력범죄, 학교 돈 1억원을 횡령한 재단 이사장...경기 회복되어도

계속 흐릴 고용전망...한 개에 1천만원이 넘는 기둥 스물 네개로 떠받들여진 여의도 새 의사당, 30만 원이 없어

아파트 입주 포기하고 새 터전 찾아 떠나는 재개발 지구의 철거민들...톱밥으로 만든 고춧가루...어제의 신문과

다를 것이 없다. 이상할 것도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날마다 같은 신문을 찾아 읽는다."



그렇지만 일종의 데자뷰, 기시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난쏘공의 나오는 사람들이 내뱉는 탄식, 절망, 분노는

낯설지 않다. 사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침없이 터져나왔던 것들이지만, 근래 다시 그들에게 마이크가 향했다는

점이 새삼스런 오버랩을 가능케 했을 거다.



#2. 난장이와 난장이 가족들, 난장이와 한편인 사람들의 이야기

난장이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하도록 자극했던 지섭, "일만년 후의 세계"라는 책만 읽는다는 지섭에게 과외를

받았던 윤호 역시 탄식한다. "여기서는 무엇 하나 이룰 수가 없어. 시간을 터무니없이 낭비하고, 약속과 맹세는

깨어지고,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난장이가 '난장이의 가족'들과 함께 살던 서울시 행복동 집에 철거계고장이 날아온 날, 아파트 입주할 돈이 없어

입주권을 팔고 원치 않게 추방당한 그들의 가족들은 분개하지만 난장이는 말한다. "그들 옆엔 법이 있다."


난장이의 큰 아들, 그의 속깊음과 따스함으로 결국 사형대에까지 떠밀린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깨닫고 있었다.

무허가건물이 난립한 그의 동네에 찾아와 철마다 표를 구걸하던 거짓말쟁이들은 계획을 내세우고 있었지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는 사실. "이미 많은 계획들이 나왔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고, 설혹 무엇이

달라진다 하더라도 그건 실제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되리라"
는 깨달음.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으로 나가고 나니 마음이 차라리 편해졌다던 그들. 난장이의 아들딸들. 보이지 않는 보호를

받고 있다나. 그 보호란 건 그 구역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보호였고, '공부를 한 자'와 '못한 자'로

엄격히 나누어진 세계에서 이질집단으로 평생 낙인찍힌 채라야 받을 수 있는 보호였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마음이 편하댔다. 그러면서도 바다에 떠있는 늙은 수부가 목말라 괴로워하듯, 회색에 감싸인 축소된 집과 축소된

가족들을 들여다 보며 "물, 물, 어디를 보나 물 뿐, 그러나 한 방울도 마실 수 없다"
고 또한 괴로워했다.


공장의 사장은 지금이나 그때나 똑같은 이야기로 그들을 위협했다. 회사가 당면한 위기를 말하고,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지면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혹은 힘껏 일한 후 함께 누리게 될 부와 희망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다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이른바 '파이 논쟁', 키워서 나눌지 나누면서 키울지가 2009년까지도 여러 사람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들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변화는 없었다. 나빠질 뿐이었다."


#3. 새삼스레 촌스러운 이야기, "촌스러운" 용산참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이 없는 세계라고 했다. 배운 사람들은 책상 앞에 앉아 싼 임금으로 기계를 돌릴 생각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필요하다면 밥 대신 모래라도 먹일 사람들이란 게 난장이 아들딸의 생각이었다. 폐수 집수장

바닥에 구멍을 뚫어 폐수를 직접 바다로 흘려넣는 사람들이란 게 난장이 아들딸의 생각이었다. 촌스럽다.


지섭도 말했다. 달나라의 이름으로 펼쳐보였던 그 사랑이 가득한 세상은 이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한다고. 그는

목사, 과학자와는 달리 스스로가 많은 희생자 중 하나로서 노동자였다. 작품을 통틀어 계속해서 끈질기게

자칭 타칭 '근로자'라 불려왔으나, 손가락 두개를 잃은 지섭의 재등장과 함께 '노동자'라는 단어가 비로소

등장한다. 근로자와 노동자의 어감 차이, 그건 단순히 근면성을 강제하는 뉘앙스의 차이만이 아닌 거다. 못 배운

사람, 약자에게 경제적 고문을 퍼붓는 시대에 A대학 법학부에서 쫓겨난 그는 노동자, 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역시 촌스럽다. 현장에 뛰어드는 학출 노동운동가라니, 촌스럽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업들의 구태는 말하자면 '우리의 대표브랜드'라는 세련된 분장 뒤에 숨었다.

"협조적인 사람이 이끄는 노조라고 해도 그것이 기업에 이익을 줄 리는 없으며, 기업에 해롭고 우리 모두에게

해로운 노조는 우리 전체의 구조를 약화시키는 악마의 도구"
라는 마인드는 더더욱 촌스럽지만, 천박하게 번쩍이는
 
도금 광택으로 세련됨을 강변한다. 용산 참사 뒤에 숨은 대자본 건설사의 야만성과 촌스러움, 경찰과 검찰의

비열함과 촌스러움, 사과조차 없이 뭉개고 앉았는 위정자들의 더러움과 촌스러움, 그리고 여론을 스스로

자처하는 보수 언론들의 저열함과 촌스러움 역시 무엇인가로 위장되거나 혹은 스스로 세련됨을 강변하고 있다.


난장이의 아들딸이 보기에 그들이 살았던 사회와 같다던 먹이 피라밋은 여전히 유효할까. 아님 더욱 강해진 것은

아닐까. 대학교 신입생의 구성이라거나, 소위 좋은 직장의 신입 직원 구성이라거나, 무엇보다 세습을 포함한 부의

불균등한 분배에 이르면 더욱 공고하고 가팔라졌다는 느낌이다. 대학교 때 토지경제학을 가르치셨던 이정전교수는

우리 나라에선 절대 부의 불균형에 대한 통계를 낼 수 없다고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봉과 같은 소득 불균형

자체도 이미 이렇게 심각하지만 부동산이나 물려받은 재산등이 포함된 '부'의 불균형이 공표되는 순간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하셨던가. 분명치는 않지만. 


이미 난장이의 아들은 자신의 최후를 예견하고 있었던 게다. 부모는 그의 자식들이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바라지만, 이미 자식들은 첫번째 싸움에서 져버렸다. 노비 매매문서에 적힌 그들의 조상에서 넘겨진 삶의 무게와

질곡에 눌린 아버지는 난장이가 되었고 난장이의 아들은 그보다도 작은 어릿광대로 눈을 감을 것이라는 예감.


#4. 悲

언론의 또다른 특징은, 새롭지도 않은 NEWS의 행진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해 무언가를 계속해서 놓아버린다는

점이다. 혹자는 한국인의 냄비 근성을 탓하기도 하지만, 이미 한달여가 지나 OLDS가 되어버린 용산 참사,

그리고 사실 조세희가 이 소설을 쓴 때부터 OLDS였던 철거민 문제, 그런 것들이 대장 속에서 쉼없이 연동하는

그런 것들처럼 계속해서 뒤로 밀려나고 잊혀진다. 의도적이던 아니던.


용산 참사 후 한 달, 참사 이후 달라진 것은 없다. 한 철거민은 "박정희도 이러진 않았다"고 말한다.

"내가 테러리스트란다. 진짜 도둑은 따로 두고…"(프레시안, 09.02.20)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뫼비우스의 띠 장마 외 - 10점
조세희.윤흥길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2. 탈주를 잠재운 약빨.


촛불집회가 들불처럼 번지고 뭔가 '주권'이라는 게 한줌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강부자 정부가 아니라 시민들에게

있다고 살풋 실감날라던 때가 있었다. 6월 10일. 백만 가까이의 인파가 어게인, 87년 6월을 외치며 모였었고 이후

6월말까지, 아무 대책도 수습책도 없이 손놓고 있는 정부를 거침없이 압박해 가는 모양새라고 생각했다. (그치만

이런 끈덕진 무대책과 무반응이란 건 이 정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인 것 같다. 요새 강호순 사건으로 용산

참사를 덮으려는 심각한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는 온갖 심증과 물증에도 일절 언급을 피하는 청와대'꼬라지하고는.')


어느순간 기류가 바뀌었다. 고병권은 그게 6월말 7월초, "80년대식 강경진압을 한번 해봐야겠다"는 경찰 고위직의

말대로 거침없는 폭력이 행사되고 난 후, 각계 종교계인사들이 대거 나서서 '비폭력' 행진을 하면서부터라고 본다.

압도적이고 적나라한 국가 폭력 앞에서 잠시 멈칫했던 시민들의 분노가 채 어떤 모양새를 갖추고 어떻게 분출될지

결정될 그 중요한 시점에 종교인들이 촛불시위대의 지도부 역할을 자임하면서 급속도로 그 분노와 '폭력성'이

사그라들어 버렸다는 거다.


물론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폭력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역사를 움직이는(진전이건 후퇴건)

중요한 동력인 건 틀림없는 데다가, 민주화의 대표적 상징이 되어버린 87년 6월 항쟁이나 80년 광주항쟁 등을 봐도

스스로를 합법화하는 폭력인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폭력은 이번 촛불집회 때의 양상 따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렬'했던 것이 사실이다.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빚어졌고, 그때도 언론들은 법질서

확립 운운하며 떠들었던 터다. 형식적인 민주화가 쟁취되었고 어쨌든 '우리가 뽑아놓은 대통령'이니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글쎄.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교인'들이란 사람들은, 그 습성상 사람들을 자신들이 구제하고 계도하고 이끌어야 할 '어린양'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마치 그들이 사람들의 아픔을 직접 어루만지고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 짊어질 몫이라며

앞장서서 떠맡고자 한다. 아름다운 마음이고, 감동적인 자세라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지상의 법'이다. 그들이

가진 숭고한 인류애, 희생정신,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의 허물을 보려는 자세,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구도자의

자세..그런 것들은 말이 통하고 눈높이가 맞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내용이다. 누가 잘못했고 어떤 현실적 해법을

구해야 할지, 끈덕지게 물고 늘어져서 조금이나마 그 왜곡을 풀어내야 하는데, 종교인들은 (거칠게 말하건대)

'모두가 죄인'이고 '폭력=죄'란 구도를 순식간에 형성해 버렸다. 노신이 얘기했던 것처럼 물에 빠진 개는 건져

올려봐야 다시 버릇 못버리고 물겠다고 컹컹댈 게 뻔하니, 우선 죽기 전까지 때렷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을 텐데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촛불정국이 (단기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못 남기고 만 상황을 보며 마치 1919년 삼일절 독립만세

운동의 귀추가 오버랩되는 감이 있었다. 훌륭하고 고매한 정신세계를 가진 33인의 '민족대표'란 사람들은 휘황한

문구와 이상적이고 또 그만큼 종교적인 의미와 맞닿는 독립선언서를 쓰고는 채 제대로 낭독조차 안하고서 감옥에

걸어들어간다. 그들의 독립선언서에서 보이는 건 국외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써내린 또다른 독립선언서에서

풍기는 피 냄새와 일전불사의 자세가 아니라, 어쩌면 조선인민 내부 회람용이 아닌가 싶을 만큼 자족적이고, 또

타협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비폭력'을 내세우며 상처입고 버려진 국민들을 종교인들이 끌어안는

순간, 정부를 향했던 촛불들은 어느새 둥그렇게 안을 보고 모여선 캠프파이어가 되어 버렸다.


잘은 모르겠다. 고병권은 간디와 루터킹목사의 '비폭력'투쟁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최초 촛불들이 공권력과 '빠이와 꽃병'으로 맞대응하기보다 공권력의 구획과 질서를 희롱하면서 겁먹지

않던 그 때의 분위기가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어쩌면 한층 적나라하고 짐승스러웠던 7월초의 분위기를

넘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쿨하게 그렇게 갈 수 있었다면..비록 자연스레 격한 감정과 액션들이 간헐적으로 분출될

지라도..지레 겁먹고 수위를 통제하려던 것 같았던 데다가 전혀 지엽적이라 느껴지던 폭력/비폭력 논쟁으로

힘을 소진하진 않았을 거 같다.


종교가 현실 세계에 미치는 힘은 여전히 꽤나 크다. 긍정적인 면도,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맑스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양면적인 면을 가리키는 표현 아닌가. 잘만 쓰면

효능 좋은 약이지만 잘못 쓰면 사람 병신만드는 게 아편인 게다. 신, 그리고 종교는 어디까지나 지상의 인간들이

보다 인간답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만들어진 창조물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지 않더라도, 종교적인

위로와 정신적인 고양감만으로는 당장 내 살과 뼈를 발라내겠다고 덤벼드는 아귀들을 막아낼 수 없다는 건

불문가지다.


선종하신 김수환추기경님의 덕성과 고매한 인격을 의심할 바야 없지만, 그 분이 때로 보였던 보수적이거나

양비론적이고 애매한 입장들이 갖는 효과들은 따로 떼어 생각해 보아야 할 거라 생각한다. 그게 어쩌면 종교인에

짐지워진 하나의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지 모른다. 하기야, 신의 말씀이라는 성경, 성서, 코란 등등 조차도

정치적으로 읽힐 수 밖에 없고, 또 그렇게 읽혀왔다는 걸 상기한다면, 그 분 역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앞선 글 : [추방과 탈주(고병권, 그린비)] (이명박) 정부로부터의 '탈주' 선언(1/2)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0. 들어가기 전.

이 책은 형식상 두 파트로 나뉜다. '대중의 흐름', 그리고 '지식의 운명'. '운동의 선언'이란 파트가 덧붙어 있기는
 
하고,
특히 마지막의 '코뮨주의 선언'은 앞선 '대중의 흐름' 파트의 행간을 더욱 풍요롭게 읽을 수 있는 힌트들이

가득
담겨 있지만, 일단은 선언들을 제하고 앞의 두 커다란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 담긴 것들이 너무 많다. 1부에서는 아감벤이 말했던 '배제함으로써 포섭하는 생명정치'에 대한 이야기

(이미 나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해 포스팅한 바 있다.[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부터

시작해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가속화된 국민의 추방, 촛불시위의 전말에 대해 내가 본 중 가장 깊이있고

냉정하게 내려진 해석, 폭력의 문제와 혁명의 문제 등이 줄줄이 다루어진다. 물론 그것들은 연속해 있지만, 동시에

하나하나 녹록치 않은 어려운 문제들이기도 하다. 그만큼 생각이 가지를 뻗어나갈 여지도 풍부한 소재들이란

뜻이다. 거기에 더해 2부에서는 지식인의 현재적 의미, 대중지성과 그에 대척하는 테크노크라트의 문제, 그리고

현장인문학이란 문제의식의 제기, 앎과 삶의 관계가 말해진다. 고병권 그가 생각하는 선언이란 "말한대로 살아야

하고, 살아온 대로 말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충실한 살아있는 무엇인가이며, 그의 이 책 역시 그 자체로 "이명박

정부, 정부로부터의 탈주"를 선언하는 선언문 같아 문득 이 책을 읽는 자세를 가다듬기도 했다.


어떻게 리뷰(혹은 이 책의 얼개를 뜯어 내 사고와 뭉쳐내어선 다시 풀어낸 글)를 쓸까 고심하다가, 나름 중요하다

생각하는 세 가지 지점을 잡기로 했다. 우선 국민들을 추방시키고 있는 정부(특히 벌써 망각되고 있는 용산참사와

관련해서), 두번째로는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사제들의 개입과 승리선언의 평가, 마지막으로는 '선언'이라는 단어로

고병권 그가 담고자 하는 실천적 의미가 무엇일지. 한없이 길어지겠다 싶어서 두번으로 나누어 올릴까 생각중이다.



#1. 국민을 추방하는 (이명박) 정부.


정확히 말하자면 노무현과 이명박 정부, 그리고 그 앞선 시대의 정부들에 대한 환상을 던져버리라 한다.

사실 이미 사람들은 모두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환상이 부질없음을 알고 있으며, 질릴 대로 질려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누가 되건 똑같은데 왜 괜히 핏대 세우나." "지들끼리 해먹지."

              ▲ ⓒ연합뉴스

이명박이 지금 벌어지는 만악의 근원일까. 이명박 등장 이후 부쩍 늘어난 노무현에 대한 향수, 그리고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 무엇보다 마치 이명박 정부 혹은 이명박 개인이 이 모든

사회문제의 근원인 양 치부되는 경향이 없지 않은 사회 분위기를 본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급기야 경찰국가,

민주주의독재국가로 치닫고 있는 이명박 자신이 자초한 면이 매우 크지만, 또한 노무현의 말만 앞섰던 번지르르한

립서비스가 남긴 잔상들 탓도 있을 게다.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의 재개발 정책, FTA 추진을 비롯한 시장개방 정책, 감세 정책, 무한경쟁식 교육 정책,

부동산 정책, 비정규직 처우와 관련한 노동 정책 등등. 하나하나 논의의 여지가 큰 이슈들이지만,그런 것들은 사실

노무현 정부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이 중론이고, 말마따나 '설거지만 하는 수준'으로 이어받았다 자인하기조차

하는 게다.  그렇다면 최소한 지난 십여 년간의 한국 사회를 꿰뚫는 연속적인 흐름은 잡아내는데 무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실은 고병권 그가 말했던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의 연속성을 실증적으로 책 안에서 보여주지는

않고 있지만, 중요한 건 정권 교체 따위로 역전되지 않는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신자유주의라 한다. IMF가 잠시 거세게 몰아치는 삭풍이라 여기며 잠시 후면 다시 잔잔한 일상이 도래할 것이라

여겼던 사람들이 직면했던 것은, 그칠 줄 모르고 불어제끼는 삭풍이 곧 일상으로 화해 버린 현실이었다. 구조조정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구조가 되어 위기를 일년 365일 안고 살아야 하게 되었다는 인식. 그런 상시적 위기는 마치 

녹아내리는 빙하 위에 빼곡히 올라앉은 사람들을 가장자리에서부터 조금씩 바닷속으로 밀어내듯, '국민'이란

이름으로 지켜지는 사람들을 조금씩 줄이고 있다. 이주 노동자, 여성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철거민, 농민, 빈민,
 
노점상인, 장애인, 공고 졸업생, '지잡대' 졸업생, 4년제 대학 졸업생, 20대 청년...계속해서 밀려나고 있는 거다.

취업시장은 얼어붙었고, 채 세워지지도 않은 사회적 안전망은 허물어졌고, '금모으기운동'은 씁쓸하고 부끄러운

기억이 되었다. 

         [손문상의 그림세상]<172>"세입자도 국민이여…"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130165117&section=03)

그들은 이제 '국민'이 아닌 국가 내부의 난민이 된다. 더이상 이들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국민','시민'이란

단어로 불리워지지 않으며, 다만 점점 줄어가는 그 정체모를 '국민'의 이해를 위해 계속해서 양보를 강요당하게

된다. 용산참사에 대한 반응도 그렇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그들은 대한민국 내부의

테러리스트"라는 등, 철거민(세입자)는 더이상 우리와 같은 국민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병권의 지적처럼,

이러한 경계로 몰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날것의 국가권력을 두고 합법과 불법을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통제받지 않는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며 게다가 일부 언론과 검찰의 사후 추인을 동원하는 

국가권력에 비해, 존재 자체가 불법이 되고 말아 법의 보호를 받을 수도 없는 "추방된 국민"들이란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그렇지만 얼마나 빠른 속도로 그들이 불어나고 있는 것인지.

               ▲ ⓒ프레시안

경찰국가, 혹은 민주주의 독재국가가 도래했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추방당한 사람들에 대해 더이상 세련되고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데서 기인한다는 게 고병권의 지적이다. 국민된 권리로부터

추방당한 채 방치된 '2등 국민, 3등 국민'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정부의 위협 요인이며 불안 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연인원 수백만명이 거리로 나섰던 지난 촛불정국에서, 명박산성으로 상징되는 이명박정부의 앙상한 대응태세는

권위와 시스템의 외피가 지워진 국가권력의 추하고 무능력한 쌩얼을 드러낸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때 잠시나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노래부르던 사람들에게 힘이 돌아왔다고 느낄 정도로, 정부의

절대적이고 늘 신성해야 할 외관은 심히 손상되고 헐벗어 있었다.


용산참사를 두고 찧고 까부는 사람들 역시 분칠된 국가권력의 추악성, 비인간성을 노출시키고 있다.

인간으로 살아갈 기본적인 권리, 생존권을 절박하게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사회의 법질서를 우선하라고 윽박지르는

것만큼이나 추악하고 본말이 전도된 장면이 또 있을까. 민주주의의 허울을 쓴 채 덕지덕지 존엄함과 지고함을

두르고 있는 정부 시스템이 요란스레 작동해서 '국민 모두가 살 길', '재발 방지와 선진화의 길'의 찌라시를 뱉는

동안, 그 '국민이 주인된다는' 권력의 원천인 여섯 생명이 한줌 재로 화했던 충격적인 사건에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있는 장면. 비극적인 것은, 국민들이 계속해서 추방당해 '한발 재겨딛을 곳조차 없는' 백척간두의 위기속으로

몰리게 될수록, 이러한 추악한 권력의 맨얼굴을 대면할 일이 점점 늘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추방과 탈주 - 10점
고병권 지음/그린비


강준만 교수의 글은 대학 다닐 때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읽었던 그의 말마따나 그의 글은

시간의 힘을 오랫동안 이겨낼만큼 깊이있고 섬세하게 다듬어졌다기보다는, 시사적인 이슈에 맞춰져 다작으로

승부하겠다는 느낌이 짙었던 탓이다. 아마도 그런 탓인지 다소 까칠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말글같은 그의

줄글에 담긴 내용이란 현상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제기, 혹은 약간 더 치고 나간 정도의 이야기정도라고

생각했었다. 조선일보에 대해서나 학벌문제에 대해서나 지역갈등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이 책은 제목을 어디선가 들었을 때부터 꼭 한번 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과 지방 사이의

간극이란 문제에 대해서 좀 관심이 뻗어있을 때기도 했고, 외교학과(라고 쓰고 국제정치학과 혹은 국제관계학과라

읽어야 할 거다)를 나온 탓에 어디서 줏어듣기는 한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의 개념을 빌어 한 나라의 중앙과

지방 사이의 문제를 논하려 하는 듯한 아이디어 자체가 참신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필명을 얻었을

때 쓰던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풍모가 그대로 묻어나는 제목, "지방은 식민지다." 그 제목 그대로의 이야기다.


'내부식민지론'은 한 국가 내부에서 발생한 중앙과 지방 간의 극심한 총체적 격차가 구조화되어 급기야 지방이

중앙의 발전 및 유지를 위한 착취의 대상, 즉 식민지로 기능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최장집교수 등이 이러한

내부식민지론을 한국에 '도식적으로' 적용하는 경우 환원론에 빠질 수 있다는 비판하는 데 대해, 강준만교수는

풍부한 사례를 들어 강력히 반박하고자 한다. 교육, 경제, 사회, 문화, 정치..그 어느 면에 있어서나 한국 사회의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주요한 사회 모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이 책의 자잘한 칼럼들이 한목소리로 말하고자

하는 바라고 생각한다. 그에 더해 지방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라는 점에서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지방 언론이

가져야 할 마땅한 책무와 역할에 대해 유독 강조하고 있다. 물론 지방언론이 실제로 지방 자치제도와 경제성장의

도모, 기타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침 이 책을 다 읽어갈 즈음, 설날을 맞이해 '지방'이 모처럼 방송 앞머리를 장식했다. 휴식과 여가의 공간이자

도시인들(서울사람들)의 향수와 감정적 치유의 원천으로 남겨진 공간, 그리고 한국이라는 나라의 원형적 전통과

문화, 그리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환경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고 믿어지는 그곳. 그곳으로 도시인들은 꾸역꾸역

밀려내려갔고, 또 다시 '출세를 위한 공간', '한국의 중심' 서울로 되밀려 꾸역꾸역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잠복했던 한국의 지방은, 강호순이 지방의 야산과 한적한 국도를 휘저으며 연쇄살인을 저지를 때에야 또 방송에

출현하고 있는 거다.


그의 짧은 칼럼들을 교육, 정치, 언론 등 큰 주제에 따라 모아놓은 이 책에는 반짝거리는 아이디어와 당장 실천

가능할 법한 방책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다. 서울 소재대학들이 경쟁우위를 갖는 것은 바로 서울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고 일갈하면서 그것들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쓰자는 이야기나, 지방에 난립해 있는

토호친화형 언론들을 솎아내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소수의 언론을 밀어주자는 이야기, 그리고  연고주의를

강고하게 재생산하는 비공식적 집단들인 동창회, 향우회 등이 차라리 공익적인 활동을 강화함으로써 스스로를

조금은 쇄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 등등.


그 모든 이야기들은 언제나 원칙주의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의 회의적이고 시니컬한 반응을 유발할지 모른다.

근본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거나 임기응변에 불과하다는 식의 참 쉽고도 힘빠지는 비판말이다. 그걸 의식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는 매 칼럼마다 꼭 지레 항변하곤 한다. 이것 말고 실제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더 좋은 대안이

있다면 말해달라. 무릎꿇고 경청하겠다, 하고.


안타까운 건, 그렇게 현실적인 제약을 십분 고려하고 원칙을 어느 정도 양보하며 제시하고 있는 그의 대안들조차

'이빨이 들어가지 않는' 지금의 상황이다. 그는 지방자치를 보완하기 위한 제도적 기제를 이야기했지만 외려

지방자치제도 자체를 폐기하거나 유명무실화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설득력을 얻으며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는 지방문화와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매끈한 '서울공화국'에 약간의 균열을 희망하며 그 모루와

망치로써 지방 언론을 주목했으나, 오히려 지방 언론들은 전부 말라죽어버리거나 더욱 지방 토호와 협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마 그가 말한 내부식민지로서의 지방이 중앙에 상납해야 할 몫은 점점 커지기만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강준만 교수는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원칙을 좀더 양보하고 보다 유연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다시

궁리해 낼 것인가, 혹은 다시 원칙을 내세우고 다소 선동적이고 비타협적인 이야기-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소간 선정적일 이야기-를 할 것인가. (어떤 경우든 그는 그가 제시한 '내부식민지론'이 강고해진다는 점에선

기뻐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등장 초기에 비해 조금씩 힘이 빠지고 퇴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식의 진동을 그가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대안을 찾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딪히게 될 한국의 완고하고도 답답한 현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방은 식민지다! - 8점
강준만 지음/개마고원



"아감벤의 호모사케르를 다 봤는데 우울하네..거대한 수용소에 배제된 채 포섭된 벌거벗은 직딩이야."

- 힘내라 쉽지않지 뭐..

"얘는 근대국가서 숨쉬는 생명 자체가 trapped된 거라고 말하는데 어째야 할지는 모르겠단 거 같네.."

- 그게 사실이래도 나가죽을순 없잖냐ㅎ

"짐 이런 책 읽어 모에 쓰나 싶기도 하고ㅋㅋ 뜬금없어 보이기도 하고"

- ㅋ적당히 생각하고 살기도 쉽지 않은데 대단하네

"하도 멍청한데 요새 더 멍청해져서ㅋ 지극히 자족적이고 개인적인 이유랄까."


어제 퇴근하고 오는 길에 드디어 '호모 사케르'를 다 보았다. 저번달 말부터 읽기 시작하면서 주로 출퇴근 길에

짬짬이 읽다가, 휴가 기간 끼고 전철 안에서 자고 하다 보니 근 삼 주넘게 걸린 듯 하다.

뭐랄까,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다 보니 막막하기도 하고, 아직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치받아서 친한 선배와 문자를 주고 받았다. 고작 한 번, 그것도 띄엄띄엄 끊겨가며 읽었지만 이 책은 뭘

말하고 있는 걸까..그리고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뭘까 정리되길 바라며.


가장 눈에 띄는 건 배제는 곧 포섭이라는 일견 역설적인 아감벤의 지적이다. 구조로부터 배제됨으로써 곧

그 구조 자체에 포섭된다는 이야기는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매우 통찰력있는 지적이다.

고국의 정치 현실로부터 떠밀려난 망명자, 혹은 비적떼나 해적과 같은 경계지의 범죄자가 누구보다

그 정치적 상황에 민감하다는 사실, 아감벤이 지적한 대로 나치 하의 독일에서 금별 유대인과 검은별

집시 등이 있어 시민권과 생명을 박탈당함으로써 곧 그 구조 자체에 '배제자'로서 포섭되는 걸 보면 그렇다.

아, '예외'라는 라틴어의 어원상의 의미 자체가 '외부에 포함되다'라는 지적도 의미심장하다.


근대국가와 그 주권자는 누군가를 배제시킴으로써 포섭하고, 포섭함으로써 배제한다. 그러한 끊임없는

경계-지음은 사회의 존속에, 국가가 의도하는 시스템의 존속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자유주의적 정체든

사회주의적 정체든 '인민(people)'이란 단어가 갖는 수많은 균열선의 흔적이 그 강력한 증거 중 하나라고 하며,
 
그 점에서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의 정치적 상상력이 갖는 한계를 시사한다.


정치라는 것 자체가 희소한 자원인 권력을 불균등하게 나누는 행위라고 한다면, 그러한 경계(그게 계층이던

계급이던 혹은 다른 무언가던간에..) 자체는 유사 이래 지속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나치와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보여주었던, 혹은 푸코가 이미 지적했던 '경찰국가, 혹은 근대 행정의

탄생' 이래 인간의 몸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심화되는 현상이다. 아감벤은 아렌트와 푸코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도 인간의 생명 자체가 정치화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대 국가 혹은 주권 권력이 인간의

생명을 직접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지난 수천년동안 인간은 생명을 지닌 동물이면서 덤으로 정치적 삶을

누릴 능력까지 갖고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근대의 인간은

생명 자체가 정치에 의해 문제시되는 동물"로 바뀌었다.("~"는 푸코, "앎에의 의지" 중)


아감벤이 주목하는 건 나치 하의 수용소가 근거하고 있는 법적, 철학적 기반이다. 흔히 사람들은-그리고 아마

유대계 네트워크의 강력한 활동에 의해 추동된 사람들은-나치 하 유대인들이 겪었던 수용소 생활이라거나

비인간적으로 다뤄졌던 온갖 사례들에 분노하며, 그 '비정상성'과 '비인간성'에 탄식한다. 그렇지만 그에 따르면

나치 하에서 이루어진 수용소, 생체실험 등은 비단 전체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막론하고 생명 자체가 정치의 담보물이 되는 근대국가, 주권권력에 있다는 거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전체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책들은 꽤나 나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감벤은 그런

차원에서 한 걸음 더 근본적으로 들어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배제가 곧 포섭이라면, 이른바 푸코-그리고 아감벤-의 '생명정치'는 곧 '죽음의 정치'와 같다.

뇌사, 안락사의 문제에서 보이듯 일부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기인한 생과 사의 경계 획정문제자체가 정치화되어

주권국가와 그의 법에 좌지우지되는 생명의 개념, 복지국가의 아이디어에서 보이는 것처럼 인간(국민)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지고 그 생명의 생산성과 건전성을 확보하겠다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그치만 한국에선 여전히

낯설기만 한-오랜 추세, 국적을 벗어던지는 순간 인간으로서 아무런 존재증명이 불가능해지고 마는 불가사의한

난민의 지위, 나치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 영국 등에서도 쉼없이 행해졌던 재소자 및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한 생체실험(인간 모르모트). 그리고 아마 근대 이전과 달리 은밀하고 구조적으로 행해지는

사형제도 역시 그러한 생명정치, 곧 죽음의 정치가 만연한 하나의 징후가 아닐까 싶다.


그런 그림이다. 나면서부터 특정국가에 소속되어 생명을 담보잡히고, 그에 따른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는

대신 언제든 내 생명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주권 권력. 만약 그걸 거부한다면 '벌거벗은 생명'이 되어 사회적

생명뿐 아니라 신체적 생명까지 보호 내지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그런 상황에서, 나치 혹은 그와

유사한 국가권력이 언제든 '생명(국민)'의 정치적 헌신과 복종을 요구하는 경우 배제된 채 포섭된 유대인, 집시

혹은 타자화된 다른 누구라도 멸절시킬 수 있다는 거다. 그 모든 건 이미 거대한 수용소처럼 짜여진 국가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 생명을 보다 공고히 지배하고 장악하려고 혈안인 주권 권력.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뭐 여러가지로 빗대어 볼 수 있겠지만 가장 선명하게 나타났던 건 역시 최근의

쇠고기 사태에서 드러나는 것 아닐까 싶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국민의 생명을 볼모로'라는 문구가 관용구화되었단

사실 자체가 국민 생명의 소유권이 어디로 넘어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 무색치 않을 정도로 심각해진 '비정규'라는 예외의 문제라거나, 황우석 사태로 불거졌던 인간배아의

존엄 문제..등 다양한 영역에서 한국의 주권 권력은 생명을 쥐고 흔들려고 한다.


...그밖에, 내가 느끼는 감정은...그런 거였다. 예컨대 유모차 부대로 촛불시위에 나섰던 사람들이 경찰에 소환되고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이를 찬성하는 사람, 그리고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런 논쟁의 틀을 마치 체스판

위에서 양편의 말을 내려보듯 분석하며 보다 큰, 근본적인 이야기를 던지는 게 아감벤이다. 경찰조사가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법치를 내세우고, 반대하는 사람이 법의 횡포를 말한다 쳤을 때 아감벤의 이야기는 아마도 국민의

저항권 내지는 근본적으로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성찰쯤 될 수 있단 얘기. 너무 멀다.


대학교 다닐 때와 달라진 거라면 좀더 사고가 현실적이고 땅바닥에 붙어버렸다는 사실이지 싶다. 그때라고 뭐 이런

이야기들이 딱히 구체적인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와닿았겠냐만은, 최소한 그때는 지금만큼 몸이 무겁지는 않았고

마음도 무겁지는 않았다. 책을 보면서는 어떤 부담이나 이질감없이 그 사유체계를 내맘대로 유영할 만한 여유가

있고, 가능성이란 게 있었던 거 같은데..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이

그저 한번 읽었을 뿐인 책에다가 화풀이하듯 손에 잡히는 이야기를 해라, 대안을 내놓아라, 이렇게 딴지를

걸고 있다.

호모 사케르 - 8점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새물결

그대들의 결혼이 나쁜 결합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대들은 너무 빨리 결합된다. 그 때문에 결혼의 파탄이

뒤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의 왜곡과 결혼 속에 깃든 기만보다는 차라리 결혼의 파탄이 더 낫다. 어떤 여자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결혼을 파괴했어요. 그러나 그보다 먼저 결혼이 나를 파괴했어요!"


잘못 결합된 부부는 최악의 복수심으로 가득 찬 자가 된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더 이상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한단 사실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보복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정직한 자들이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 사랑하도록 노력하자! 아니면 우리의 약속을 실수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훌륭한 결혼에 적합한지 어떤지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일정한 기간과 짧은

결혼생활을 허락해다오! 항상 둘이 함께 지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나는 모든 정직한 자들에게 그렇게 권한다...앞을 향해서뿐만 아니라 위를 향해 그대들 자신을 고양시키는 데

결혼이란 정원이 그대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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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이따위로 해놓는 ㅆㅂㄻ에게 화있으라. 니체가 제공한 주례사의 모델#1. 여태 이만큼 좋은 주례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절반은, 결혼으로 사랑이 결실맺었다며 구라쳤고, 나머지 절반은 '에~'가 무한반복되는 심심한 애국조회를 하는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주례사는 준비되었다. 결혼하자, 여자야!"ㅎㅎ

#1. 신과 인간 자아와의 관계

신이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지, 외부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오랜 성찰에 대해, 비교신화학자인 저자는 구석기

인류의 모권중심적 세계관, 혹은 이를 보다 온전히 이어받은 동양신화의 세계관과 주로 레반트(중근동)에서

유래한 서양신화의 부권중심적세계관이 부딪히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신이 인간의 외부에 있다는 입장은

신의 역사하심(곧 신화)을 역사, 과학으로 해석하여 자기완결적인 계시로 완성시키고자 골몰한 나머지, 일종의

훈고학적인 강박이나 단일진리를 향한 광기를 불러내기 십상이란 점이 부각되었다.


실제로 수 가지의 원전이 수 세기에 걸쳐 편집된 'Sacred Book'의 오리지널리티 혹은 마술성에 대한 주장이,

각 종파들간의 '이단' 투쟁이나 그를 빙자한 정치투쟁에 원용되었다. 그에 더해서 경전상의 지역과 스토리를

역사에 덧씌우려는 노력으로 인한 '역사강역'의 침탈, 그로 인한 끊임없는 지역분쟁은 여전하다. 특히 '신의

은총'이라는 보이지 않는 공급독점의 상품이 여전히 개별 종교시장, 특히나 서구 기독교 계통에서 먹히는 이유도,

내 안의 신을 부정하고, 외부의 엄격하고도 질투심많은 심판자만을 바라보는 그들의 신화적 기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2. 전복된 상징과 이미지들.

그렇지만 부권중심의 신화가 모권중심의 신화를 전복하는 과정에서 변형해 차용한 과거의 상징, 이미지들은

여전히 그 내부에 이미 그와 반대되는 맥락과 이미지를 담고 있다. 그리스 신화 내의 많은 사례들-메두사에 대한

여러 변주된 이미지들-을 제치고라도, 무엇보다 선악과와 뱀을 둘러싼 이미지가 그렇다는 지적이다.

인류에 최초의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이후 삶의 고역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고 만 선악과, 그리고 그 죄를

범하도록 유도한 뱀의 사악성과 여성의 미욱함이라는 소재는, 기실 기독교신화 이전에 전혀 내용의 방향을

달리하던 것들을 새로이 짜깁기하고 정렬시킨 에 불과하다. 애초 삶에 대한 긍정과 지혜의 획득을 의미하던

사과와 지혜의 나무는 차마 오르지 못할 금기의 대상으로 바뀌고 세상을 주재한는 뱀과 여자(여신)는 남성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방해자로 변화했다. 그렇지만 짓눌린 과거의 이미지와 스토리는, 어느때고 여차하면 돌진하여

그 위에 지어진 텍스트를 공격한다.



#3. 헬레니즘 - 인간 중심주의..신과의 관계에서.

여호와가 큰뱀 리바이어던에게 승리를 거두며 뽐냈다는 기록이 바로 부권질서가 모권질서를 전복했다는

의기양양한 선언이라고는 하지만, 부권적이라 통칭하는 서양신화 역시 나름의 균열을 갖고 있다. 레반트의 전통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이 신 앞에서 인간적인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유럽의 토착전통인

그리스, 로마 등의 신화에서는 인간적 가치를 지키면서 그에 의거해 신들의 성격을 판단하는 굵은 구분선이

그것이다. 삶에 대한 열정과 긍정에 기초한 헬레니즘의 범신론은 인간의 본성을 '이성'으로 보고 있으며, 이러한

본성에 따라 희노애락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포도나무가 포도열매를 맺듯 인간은 선행을 한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갚아주실
 
터이니)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기독교 교리와의 관점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스토아학파의 내용은 이후 인간의 본성을 이성에서 신성(부활의 신비)으로 대치한 중세 기독교교리로 변질되어

인간중심적인 본래의 의미를 잃고 말았지만, 르네상스로 되살아나게 되었고 다시 신을 인간의 도구로 돌려놓은

게 아닐까.



p.s. 매달 한차례 점심시간에, 코엑스 모처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직장인 가톨릭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나는,

일종의 의식을 참관하고 그 인위적인 성스러움을 느긋이 즐긴다는 기분이다. 다채롭고 혼란스러운 원전들에서

재구성된, 그치만 나름 고도화된 신화를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쌓여 올려진 신비적 제의와 신학적 백업.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칭한 맑스의 말은 여러모로 맞다. '응급처방약'이란 걸 알고 적당히 쓰일 수 있겠고,

아님 중독되어 버린 나머지 그로 인해 피어오른 망상 속에 평생을 지낼 수도. 어느 쪽이냐면 나는,

(굳이 말한다면)

Q.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성체를 모실 수 있다. ( O )

제사상 음식 지분거리지 말라지만, 배고프면 전부치면서 먹잖아.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 8점
조셉 캠벨 지음, 정영목 옮김/까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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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우연찮게 득템한 '온가족이 함께 보는 만화-6.25전쟁 바로 알리기'. 이미 얼마전 유치원을 포함한
각급학교로 무리하게 배포했던 사건, 그리고 그 내용상의 시대착오적 문제점들로 인해 이슈가 되었던 그 책자가
아닌가. 게다가 이 내용에 대해 비판했던 전교조분들한테 찾아가 백색테러까지 가했던 폭력집단의 책자였던
게다. 정갈한 마음으로 일회독하려 몇번이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헛웃음이 나면서도 웬지 화가 나는..그런
부분들이 있었다.

근데 왜 맨마지막장에는 김연아가 활짝 웃고 있는 것일까. 그녀가 광고하는 '아이시스'에 대해서도 불매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개인적으로.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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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재향군인회..뭐하는 단체인가? 최근 대체복무제가 원점에서 재검토되도록 압박하는 주된 단체이기도
하고 걸핏하면 인공기-요새는 독도문제로 일장기도-를 불태우는 극우세력아닌가. 촛불시위에 대항해서 맞불
집회를 열어 '광우병괴담 좌파세력 응징하자'는가 하면, '대통령님 힘내세요'라며 전교조와 정의구현사제단,
민노당 등을 친북반미좌파..빨간 칠하는데 앞장서는 집단이다.

근데? 750만 향군회원의 뜻을 모아?? 얘네 정체가 뭘까. 위키에는 이렇게 나와있었다.

"1952년 2월 1일 창설된 후, 1963년 7월 19일 법률 제1207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에 의해 법적 법인이 된 단체로, “재향군인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군인정신의 앙양과 군사능력을 증진하여 조국의 독립과 자유의 수호에 공헌”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재향군인회법 제 5조에 의해 모든 군 전역자와 공익근무요원, 그리고 군 면제자까지 자동적으로 재향군인회 회원이 되어, 거의 대부분의 대한민국 성인 남자는 재향군인회 회원이 된다.

재향군인회는 민간단체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정부로부터 기금이나 국고보조의 형태로 매년 400억원대에 해당하는 예산을 지원받고 있다."

문제가 두가지다. 나도 회원이었다. 제길...탈퇴하고 싶은데. 다음에 청원이라도 해야겠다. 또하나, 명색만
민간단체지 사실상 어용단체, 게다가 재향군인회법 제 3조에 의해 재향군인회는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으나,
보수적인 일부 장성 출신들을 주축으로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 '노무현 탄핵 찬성' 등 말이 많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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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왜 우냐...전교조 선생님들이 저렇게 가르친다고? 제발 사실부터 제대로 하자..니넨 지금 김정일 추종에 눈이
벌겋게 충혈된 허수아비 하나 만들어놓고 그거 때리고 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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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함 얘기해봐라..과연 뭐가 북한이 남쪽에 비밀리에 조직한 인민해방군의 준동으로 벌어진 사건 두가지인데?
당신들은 지금 촛불집회도, 그이전의 국보법폐지투쟁도, 하다못해 노무현탄핵반대조차도 모두 북한의 지령을
받고서 빨갱이 허수아비들이 수행하는 '숙제'로 보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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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항쟁과 여순사건을 꼽고 있다..미친다. 정부는 이미 지난 2000년 특별법을 만들어 4·3항쟁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법적으로 완료했다. 여순사건 역시, 점차 외부적 지령에 의해서가 아닌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
자체적인 불만이 도화선으로 작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고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제주도의 양민들을 학살하란
명령에 불복한 상황, 제주도의 4.3항쟁이 복권되었다면 여순사건 역시 복권되는 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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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불길 속에서 찾아낸 단 하나의 희망! 그건 바로...국토통일이랜다.
역사속에 묻힌 북진통일의 구호를 오늘에 되살리는 이들은 대체 누군가.."지난 10년간 반미, 친북이 유행병처럼
번졌" 으며 "안보의 자화상은 나라가 망할 조짐"이라고 인식하는 이들은 재향군인회, 좀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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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서의 패배와 핵무기 개발시도가 직결되는 순간이다. 최소한 30년 정도의 시간차와 맥락차를 무시하고
무조건 갖다 붙이는 거다.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 왜? 걔들은 뱃속까지 시뻘겋고 항상 남쪽을 벗겨먹으려고만
생각하니까. 라는 식. 그런 식으로 북한이 변함없이 믿을 수 없는 상대라고 아이들한테 가르치고 싶었던 거다.
그 자연스런 귀결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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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북한의 무력도발, 그렇지만 "이 와중에도 우리정부는" 평화를 위해 애쓴다. 우리 정부는 진심이고
한결같이 북한과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는데-여전히 무력통일의 가능성을 버리고 있지는 않단 점은
감춰지고 있지만-항상 북한이 문제랜다. 그리고 계속되는 배신과 피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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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 쓰레기통 얘기는 처음 들었다. 내가 아직도 반공교육이 부족했던가..자성하는 부분이다.ㅋ
그나저나, 어렸을 때보았던 똘이장군, 각시탈 등등 온갖 반공물에서는 멧돼지나 여우, 귀신처럼 그려졌던
김일성이 그래도 사람으로 그려진 건, 비록 눈알없는 도끼눈의 심술궂은 악당이라지만...진보라고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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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돌려 하느라 힘들었겠다. 니들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까고 싶었던 게다. 북괴에 '무려 수조원'에 가깝도록
퍼줬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금강산 관광가는 사람들도, 니들이 좋아하는 맹박이 말마따나 '한사람한사람
북한을 도와주려고 가는 것'이니 참 한심해 보였겠다. 포용정책의 경제 측면, 안보 측면의 득실을 따지기란
쉽지 않단 거까지는 인정할 테니, 제발 흑백으로 보는 세상에 그레이 스케일을 도입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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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2차 정상회담은 사실, 적지 않은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단초들을 많이 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중
서해를 포함한 NLL관련한 부분이나 경제협력의 확대 등은 상당한 가능성이 있었다고 보이지만, 이명박은
들어서자마자 그 모든 것을 뒤엎어버렸다. 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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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는 '왜곡된 역사를 주입시키는 불법 만화', '시대착오적' 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통합민주당
대변인은 기자에게 "정부는 대한민국의 미래인 학생들에게 생명안정권도 지켜주지 못하고 있고 재향군인회는
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를 주입시켜 정신 건강을 해치고 있다." 고 비판했다. 또한 "서울시 교육청은 사교육
시장의 이익만 보장해주는 설익은 정책으로 국민을 지치게 하는 것도 모자라 역사 왜곡에 맞장구를 치는 꼴. 즉각 불법만화책을 전량 폐기하라." 고 촉구했다.
민주노동당은 논평을 통해 "7,80년대 반공영화 똘이장군을 연상케 한다. 재향군인회의 역사의식은 아직까지 과거
냉전시대적인 반공, 멸공에 머물러 있다." 고 비판했다. 또한 민노당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잘못된 역사의식과
시대착오적인 역사의식을 주입시키고, '똘이장군' 같은 헛된 꿈을 꾼다면 하루 빨리 꿈 깨길 바란다." 며 즉각
전량 회수하고 폐기 처분할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민노당은 "서울시 교육청은 정확히 실태를 파악하고 다시는
이와 같은 허무맹랑한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히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데일리 서프라이즈)

결국 이들이 생각하는 우리나라는, 그림에 나와있는 대기업 브랜드들로 대변된다고 말한다면 억측일까. 거기에
아래와 같은 영웅 맥아더, 은인 미국이라는 관념을 뼛속깊이 못새겨넣어 안달인 집단이라 한다면. 십분 인정한다
해도, 지금 '실용'을 내세운 친미정책이 어떠한 파국을 몰고 오는지 눈을 뜨고도 보이지 않는가. 당신들의
대한민국이, 시대착오적이거나 정신건강을 해친 인간들로 가득차길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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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진자료에 대한 권리는 재향군인회에...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치지 모.

한미 FTA의 의의에 대해, 진행 방식에 대해, 그리고 성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수업시간에 몇번씩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책이 나왔다는 말씀에 꾹꾹 참았었습니다^^

여러 교수님들의 논문이 묶인 책이고, 미처 한미 FTA가 급물살을 타고 타결되기 전인 작년 11월에 탈고한

책이지만, 윤영관교수님이 어떠한 대답을 하셨을지는 대략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미 FTA는 한국이 '개방형 통상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과정이란 사실은 아마 대부분 합의를

할 것 같은데요. 다만 책에서 지적되듯 로드맵도 무시하고 국내정치적인 협상도 건너뛰고 조급하고 임의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측면이 낳는 부작용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애초 동시다발적 FTA전략이란 과감한 전략

자체도 우선순위를 정해서 영향이 적은 소규모경제권부터 시작하기로 했던 것이니까요.


더구나 일단 FTA가 타결되고 나니까,마치 루비콘강을 건넌양 "돌이킬 수 없으니 계속 가자, 국제신용도도 그렇고

외국인투자도 그렇고 지금와서 반대해봐야 죽음뿐이다"라는 식으로 몰고 가는 여론이 우려스럽습니다.

한칠레 FTA도 국내 비준까지는 1년반이나 걸렸는데, 그보다 더욱 파장이 큰 한미 FTA는 한국측, 미국측 모두

비준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장애물과 난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재협상의 가능성도 조금씩

높아지는 것 같구요. 만약 최종적인 비준에 실패했을 때 한국에 미칠 역풍을 한국정부, 언론 등이 스스로 키우는

건 아닐까요. 초점을 맞춰야 할 건 장기적으로 개방형 통상국가가 되기 위한 비전이지, 졸속처리된 한미 FTA

자체의 가부결이 아닌 것 같은데요.

협상이 좌초한다고 해서 한국 경제가 당장 나락으로 구를 것처럼, 혹은 타결된다고 해서 당장 (깃발들고 말달리며
 
태평양을 건너) 미국시장을 호령할 것처럼 겁주고 어르는 것은, 전혀 한국 내부의 이익조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한미 FTA에 목매달고 있다고 광고해서 스스로의 협상역량을 부식시키는 일 같습니다. 저는 차라리 지금의

한미 FTA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우리의 로드맵에 따라 '개방형 통상국가'를 추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때엔 다른 한미 FTA를 협상할 수 있겠지요, 한국 내 여론을 수렴하고

피해상황도 좀더 분석된 후에요.


또하나, 흔히 자유무역의 장애물을 말할 때 반대 이익집단이 보다 집중화, 조직화되기 쉬워서 자유무역이

좌초되기 쉽다고 말하는데, 과연 한국에서도 그러한 일반적인 설명이 그대로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정당이나

합법적 채널이 모두 막힌 상황에서, 그야말로 집회, 시위, 폭력행위같은 강압적 채널만이 허용된 한국의 자유무역

피해집단(농민, 중소기업, 노동자 등)은 이미 그 자체로 여론과 정책집단에 대한 영향력을 일정정도 상실하고

시작하는 것 아닐지요. 찬성집단이 정당과 합법적 채널을 장악하고 유려하게 여론몰이를 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반대집단이 찬성집단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판단은 다소 피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책에서

지적된 대로 한칠레FTA 비준을 세차례나 연기시킨 역량이 있긴 했지만, 이미 판세나 여론은 찬성을 대세로 한

상황이었다고 보는데요. 한미 FTA 역시, 일부 반대 이익집단이 강력했다기보다는 교수들이나 사회단체들이

나서는 등 총론 차원에서 우려가 컸기 때문에 사회적 반발이 컸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이 '21세기 한국의 정치경제모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사회의 권력 분산이 시급하다는

진단에 비추었을 때 협상과정에서 끊임없이 노출되는 파열음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앞선 채널의 편재에

대한 얘기는, 여전히 권력이 대기업과 자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세계화와 개방을

이야기하면서 외려 대기업들은 반독점이나 공정 거래에 대한 국내적 규율을 약화시키기를 요구하고 있구요.

세계화의 진척이 도리어 한국의 권력 분포를 집중시킨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의 세계화 자체가 그러한 권력의

집중과 비민주화를 유인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나아간 질문으로는, 한국이 IMF라는 위기를 기회삼아 구조 조정과 권력 분산에 성공했다고 보시는지요??



아..전 왜 요새 언론 모냥새 보면서 계속 OECD가입했을 때의 장밋빛 일색이던 그 모냥새가 생각나죠?-.ㅡ^



from '국제정치경제' 수업 커뮤니티게시판.


세계정치 6 - 6점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엮음/인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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