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고 난 후 강남역, 역삼, 선릉, 삼성역 방면에 나갈 때 그냥 걸어다니고 있다.

강남에서 술 한잔하고 걸어서 집으로. 선릉에서 술 한잔하고 걸어서 집으로. 삼성역 근처에서 술 한잔하고 걸어서 집으로.

빠른 걸음으로 삼십분 정도면 대략 집에 도착하는데, 보통 열두시를 전후한 한밤인데다가 동네가 동네니만치

넥타이 맨 아저씨들과 화장진한 아가씨, 혹은 화장진한 아주머니들의 술냄새 섞인 스킨십을 종종 지나친다.


처음엔 별 생각없이 유흥가가 워낙 밀집한 동네니까 그러려니, 했다. 세상에 지치고 감각이 딱딱히 굳어져버린 채
 
말초적인 쾌락을 구매하는 중년의 남자와 신산한 사연과 응분의 대가를 가진 중년 여자 한쌍이려니. 굳이 여자의 허리를

부둥켜안은 남자의 욕정어린 손길과 뭔가를 갈구하는 눈빛, 그리고 끈적한 대화를 들으면서, "저들이 부부가 아니라는데

내 가진돈 전부와 오른손모가지를 걸지. 쫄리면 뒈지시던가." 따위 객기를 부릴 필요도 없었다. 그런 객기는 음식점에서

서로 밥을 먹여주거나 반찬을 집어주는 중년의 남녀 커플을 향하거나, 다정히 손을 맞잡고 산에 오르내리는 어른들을

향할 때에나 쵸큼 효과가 있으려나. Chocolate이니 秘니, 그렇고 그런 이름의 단란한 주점들 앞에서 택시를 잡는

사람들은 빤해 보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방금 지나친 그 중년커플의 지쳤지만 다정한 분위기와 오랜 관계였음을 암시하는 대화

몇 마디를 듣고 난 다음이었을지 모른다. 그것 역시 사랑일지 모른다.


공정하지 않다. 결혼을 했는지 안했는지, 어떤 정신적 육체적 관계를 맺어 왔는지, 어떤 사연으로 둘은 이 야밤에 술에

취한 채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건지도 모르면서. 그들의 관계와 감정을 한낱 '매매'려니 치부하는 건 흔해빠진 편견이다.


젊음의 생기발랄함을 잃은 채 시들고 주름진 그네들의 육체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네들의 나이에, 그네들의 육체에 걸맞는 건 '사랑'이 아니라 '욕정'이란 단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젊고 팽팽하고 발랄하고 싱싱한...그런 것이 바로 '사랑'이란 감정을 위한 필수조건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사랑'이란 단어는 젊음의 특권인 듯 사고하는 건, 젊음을 포기하고 뒷사람에게 물려주면서 '사랑' 역시

자연스럽다는 듯 내치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닐까. 더이상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리거나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허용되지 않으며, 단지 가끔 상념에 젖어 어렴풋이 추억하는 게 고작이라는 듯. 그게 '어른'이라는 듯이.


물론 '불륜', 내지 '바람'이라는 편리한 딱지도 준비되어 있다. 그건 잘 모르겠다.

다만 불륜이 사랑이 아닌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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