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때 기자 친구를 만났다.

요새 어떻게 지내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그리고는 다른 친구들의 근황을 묻고,

레드망고에서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이러저러한 기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전 국방부 선정 불온도서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다가 파면당한 법무관이 알고 보니 같은 과의 친한

일년 후배였다는 깜놀한 소식에서부터, 누군가는 누구와 사귀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무지 외로워하고

있다는 잡다한 소식까지. 장자연 리스트에서부터 박연차 리스트까지.


난 그에게 모종의 부탁을 했고, 그는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내게 뭔가를 요구했다.

기사거리를 내놓으랬다. 거북아 거북아 기삿거리를 내놓아라 아니 내어놓으면 구워먹으리.

정말 머리를 짜내어 십여가지의 아이템들을 제시했지만, 번번이 '킬'.


요새 고층빌딩을 많이 세운다는데, 실제 고층빌딩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겪는 생리적 변화와 어려움을

취재하면 어떨까. 그건 47층에 근무하는 당신의 민원성 아이템이니까 킬.

요새 무급휴가를 많이 내보낸다는데 그들이 휴가기간에 알바를 한다더라. 이미 많이 팔린 소재니까 킬.

어디 보니까 1인시위하고 있던데 그거 취재하면 어떨까. 사안의 중요성이 떨어지니까 킬.

음식점들에 비치된 명함 응모함이 조작되어 단골에게 사은쿠폰이 발급되는 거대한 음모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걸 밀착취재하면..시끄러, 킬.

출근길 지하철이 차간 간격조정으로 멈출 때마다 마이크로 삑삑대며 퉁명스럽고 시끄럽게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그런 건 애초 의도였을 고객 서비스 마인드에도 부합하지 않는 거 같은데..메트로 홈피에 올려, 킬.

인턴을 뽑아놓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문제라고 하던데 내가 일하는 데서는 아주 잘 관리하고 있어서 어찌

한번 나를 취재하러 오면 어떤지. 그런 청탁성 아이템은 꺼져버려, 킬.

아침에 출근할 때 보면 머리도 안 말리고 물 뚝뚝 흘리면서 서있는 아가씨들 있는데 그건 제2의 개똥녀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물귀신녀'정도로 조어해서 취재해봐. (이 대목에서 잠시 무진장 한심하단 눈빛 작렬)

제2롯데월드 올린다던데 그걸 한번 더 파보면...아니다, 이미 그건 나올 얘긴 다 나왔고 정치적 결단의

영역이야 모..그래서 (용기를 잃고) 스스로 킬.


올킬.

'등가교환의 법칙'에 따라 나의 부탁은 소멸되어 버릴 뻔 했으나, 그나마 하나가 그럭저럭 살아남은 덕에

아직 간당간당 목숨은 붙어있는 상태다.

코엑스가 길거리 캐스팅의 명소 중 한 곳이라고 하던데, 한번 하루종일 버티고 서서 그럼직한 아가씨들

취재해 보는 건 어떨까. ...끄적끄적. 그렇게 살아남은 하나.


기자 안 하길 잘했다. 이렇게 아이디어가 빈곤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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