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안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로 변신시켜버리는 호텔이 있다. 아니 그전에, 짝을 짓고 이를 유지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유배시키는 사회가 있는 거다.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발사이즈는 14인지 15인지 그 중간의 선택지는 도무지 제공하지 않는 호텔은 그렇게 결혼을 강압하는 사회의 반영인 셈이다.


짝을 찾을 의욕도 없어 보이던 사람들은 사회와 호텔로부터 탈출한 자발적 외톨이들을 사냥하는 경험과 동물로 변할 거라는 공포감에 떠밀려 짝을 찾아나선다. 거짓으로 공통점을 꾸미고 우연을 가장해 짝을 구하는 과정은, 마치 섹스중이던 채털리부인이 차가운 정신으로 한발뒤에서 바라보던 우스꽝스런 엉덩이의 움직임과 같다. 열정과 로맨스는 없고 기계적인 몸짓뿐이다.


짝을 찾은 후에 위기가 닥쳐도 걱정없다. 호텔은 그들에게 아이를 배정해주니까. 혹 그/녀의 가족 문제가 그들의 가정으로 쳐들어와도 적당히 화장실로 끌고가 사라질 때까지 발로 밟아버리면 그만이다. 짝을 이룬 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텔의 숙박공간과 서비스는 좋아지니 여하간 남는 장사 아닌가 말이다.


물론, 당신의 사랑을 15점 만점에 몇점이냐고 누가 총을 겨누고 묻는다면. 짝 대신 자신이 죽어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상대의 눈을 잃게 했으니 당신 역시 눈을 내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러한 질문 앞에서는 속절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는 건 넘어가기로 하자. 애초에 그런 질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이런가.


혹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그런 질문 앞에서 쪼그라붙고 위축된다고 사랑이 아닌 건가. 어차피 사랑이란 건 영화속 한장면처럼, 너와 나의 플레이어로 각자 듣는 음악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추려는 시도같은 것으로 충분할지 모르는 거다. 같은 노래를, 같은 타이밍에 들을 수 있는 행운이란 건 그렇게 흔치 않으니. 게다가 그에 더해 너와 나의 몸짓이 아름다운 몸짓을 그려내는 행운이란 건 더더욱.




p.s. 랍스터가 되고 싶다던 남자, 바다를 좋아하는 데다가 랍스터가 백살도 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랍스터를 택했다고 했다. 나는-영화 제작사에서 준비한 퀴즈에 따르자면-고양이로소이다. (링크는 여기)




 

 

님아 그강을 건너지 마오.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될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일찍 죽어버려 다행일 거라던 누군가의 독설은,

 

차라리 사랑이 시든 자리에 피어나곤 하는 방만하고 권태로운 관성에 대한 자괴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삼개월이면 사랑은 끝난다느니 결혼하면 의리로 산다느니 하는, 온통 사랑이야기뿐인 시대에 외려 득세하는

 

사랑에 대한 허무주의.

 

 

그리고 여기 이들이 있다.

 

죽음으로야 비로소 잡은 손 놓게 되는 그런 사랑을 하는 이들.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한다는 그런 사랑,

 

말과 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님을. 그래서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은 십대보다 풋풋하고 이십대보다 온전하며

 

삼십대보다 원숙해보인다. 온갖 곡절이 있는 삶이었겠지만 더욱 단단하고 깊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겪어냈기에 가능했을 거다.

 

 

그야말로 가능하다, 라고 말해주는 영화.

 

사랑은, 로맨스는, 계속 될 수 있다고 아름다운 그들의 삶을 들어 웅변해주는 것만 같던.

 

 

 

이를테면 육체를 (잃어)버린 시대의 사랑에 대한 영화랄까. 영화 속의 풍경은 현실같으면서도 묘하게 비틀려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OS를 개인비서삼아 말로써 기능을 조작하고 명령을 내리고, OS와의 연애가 쿨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다. 인공지능을 가진 OS는 한꺼번에 팔천명의 사람과 대화하고 그 중 육백명의 사람에게 사랑을 말한다. 섹스는 스마트폰 너머 누군가와의 스마트한 폰섹으로 대체되거나 인공지능을 가진 OS에 이끌린 자위로 대체되는 형편이다. 거리에 나서보아도 사람들은 전부 OS와 이야기하느라 허공에 대고 침튀겨 말하거나 손짓을 해대며 지나쳐 갈 뿐이다. 서툴고 상처받은 사람과 사람이 기껏 만나봐야 잠시 셈을 따지곤 도망칠 뿐이고.

가히 묵시록적인 풍경이지만, 지금의 모습과 멀지 않아 보인다. 스마트폰...이라는 창구로 연결된 OS와 인간들의 링크는 이미 탯줄만큼이나 단단해졌고, 사람들은 더이상 거리에서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다. 육체를 빌어 이어졌던 관계는 이제 육체로 인한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되기 위해 분해되는 중이다. 이미 카톡 너머, 페북 너머 당신들이 실재하는지 여부는 확인할 필요도 없을 만큼, 육체는 불필요해진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맥락에서 육체적 애정행위로서의 섹스 역시 (남자의 표현을 빌자면) 신혼시절에나 열심히 할 뿐인, 누구와 아무래도 좋은 욕망의 배설행위 정도로 격하되어버렸다. 앞으로는 구글글래스니 뭐니로 제공되는 새로운 자극만 충분하다면 굳이 육체를 통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로맨스를 표방하는 건, 스스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OS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메타포 그 자체일 수 있어서일 거다. 사람과 사랑에 서툰 이들에 대한, 사랑을 소유의 문제로 쉬이 치환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고 사랑이 서로를 어떻게 격려하며 키워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사랑과 그로 인한 혼란의 감정을 처음 맛보고, 사랑하는 이의 피부와 육체를 감촉하며, 실수와 실망 속에서도 상대와 스스로를 함께 한걸음 성숙시켜낼 수 있는 그런 사랑을 이끄는 상대. 그런 상대라면 그게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OS가 되었건 피와 땀이 흐르는 '미도리'가 되었건 사람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거다.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는 정말, 외모에 휘둘리지 않고 목소리만으로도 사람을 매혹시킬 수 있단 걸 깨닫게 해줬다.
++감독의 전작 '존말코비치되기'에서 보였던 기괴하고도 발랄하던 아이디어와 풍성한 메시지를 읽어내도록 했던 복잡한 이야기능력은 더욱 심오해진 것 같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그래도 좀 이쁘게 포장되려나. 자그레브 구시가,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성마르크 성당으로 가는 길에

 

문득 마주친 흥미로운 뮤지엄 하나.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다. '깨진 커플 박물관' 정도로 의역하면 될까 싶다.

 

 

연애가 되었건 결혼생활이 되었건, 아니면 짧디짧은 하룻밤의 유희가 되었건 상처받은 이들의 추억과 스토리가 흥건한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건 온갖 인형과 신발, 의류들. 이곳은 세계 각지에서 깨진 커플들의 스토리와 사랑의 징표들을

 

기부받아 세워진 박물관이라고 한다. 이미 꽤나 유명해져서 세계를 돌며 순회 전시도 할 만큼 규모면에서나 인지도면에서 성장했다고.

 

누군가 배 위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썼던 편지와 지도 그림. 흔들리는 배 위에서, 편지지조차 없어서 읽던 책을 찢어서 썼을 만큼

 

그 마음이 뜨거웠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깨지고 부질없는 사랑의 징표로 받은 이의 손을 떠나 대중 앞에 전시되는 중이다.

 

여기서부터는 살짝 19금. 이런 걸 선물해주고 또 착용해서 보여줬을 그들의 내밀하고도 달콤한 이야기들, 덧없고 덧없구나 싶다.

 

 

 

관계가 틀어지고 난 이후에도 이런 걸 계속 지니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아쉬움과 민망함이 교차되었을 듯.

 

 

관계의 마지막을 고하던 날, 그 극렬하던 싸움의 흔적이란다. 깨진 유리 조각을 이곳에 기증한 사람도 대단하다.

 

아예 이런 사람도 있었다. 둘이 주고받던 사랑의 편지들을 유리에 붙여서는 산산조각내버리곤 그 조각을 여기에 넘겼단다.

 

 

 

누군가가 아마도 이런 느끼한 대사를 치며 선물하지 않았을까. '내 마음을 여는 열쇠야, 당신이 처음 발견한.'

 

사람을 시니컬하게 만드는 전시인 거 같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들기 시작했다.

 

 

제법 값나가 보이는 옷들도 말짱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사연은 제각각이어서 처음 사귀던 날 입었던 옷이라거나,

 

프로포즈받을 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결혼식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그들에겐 이 옷이 그대로 자신들 삶의 한 조각이었을 거다.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쪼개져 나가며 벌어졌던 전쟁의 와중에도, 피난을 떠나던 꼬맹이들의 맘속에는 사랑이 일렁였다.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낀 채 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받던 상이용사와 간호사의 사랑이야기도 있었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거라곤 프랑스 국적밖에 없다는 한탄이 그대로 들리던 전시품도 있었고.

 

 

 

결혼식날 입었던 웨딩드레스나 혼인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나중에 결혼 10주년에 다시 입고서 남편과 춤을 추리라던

 

아름다운 소망이 물거품으로 꺼져버린 후에, 그 웨딩드레스를 볼 때마다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아팠을까.

 

이 뮤지엄에 기증하고 나서 이제 자신은 다른 드레스를 입고 자신만의 춤을 추겠다는 기증자의 다짐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비록 조그마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선물이었을 망정, 그 물건 하나에 담긴 곡절과 의미와 추억은 이토록 길고도 깊다.

 

 

이 뮤지엄의 기념품 중 하나. 나쁜 기억을 지워준다는 지우개를 팔고 있었다. 이런 뮤지엄을 설립해 전세계의 실연한 이들로부터

 

스토리와 가슴아픈 징표들을 기증받는다는 아이디어도 굉장히 참신했는데 이런 깜찍한, 그렇지만 제법 위로가 되는 기념품이라니.

 

이런 것도 있었다. '당신은 최고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당신 뿐이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따위의 빈칸이 있는 카드들.

 

영원할 것만 같던 찬란한 사랑이 지고 난 후의 씁쓸하고도 가슴 아픈 시간을 그대로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들이다.

 

 

뮤지엄을 나와 다시 성마르크성당으로 향하는 길, 왠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운운하는 이들에게 어디 한번 보고서 이야기하라고

 

강추하고 싶은 뮤지엄에서 세계 각지의 사람들 마음이 깨지고 부서진 흔적들을 보고 나니 건물벽 균열조차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이미 두 편의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 네 장의 초대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영화 네 편을 보거나, 데이트를 두 번 하거나.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 그리고 프랑스 영화다운 '시작은 키스(원제 : delicacy)'를 보고 난 참이었고, 조금 지치고 살짝

 

실망했던 참이었다. 홍상수식의 갈림길을 빙자한 순환도로라거나 미묘하고 달달한 사랑 이야기를 원했던 건 아니었으니까.

 

영화를 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으므로, 초대권 한 장은 남기고 일요일날 아트하우스 모모의 마지막 영화였던

 

'블루 발렌타인'을 보기로 했다.

 

 

맞다. 어떤 노래는 듣게 되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거다. 어떤 사람은 만나게 되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런 노래가,

 

그런 사람이 있다. 그 전까지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 현자같은 소리만 주워섬기거나, 이런저런 연애의 온갖 일반론들을

 

꿰차고 있는 척 해도, 도무지 빠져나올 길이 없는 그런 상대. 흔히 천생연분이라거나 소울메이트라거나 운명이라거나,

 

혹은 영원과 불멸을 다짐하는 그런 상대를 만나고 나면, 방법이 없다. 그런 인연 앞에 서고 나면, 마치 여태 어느 인류도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처음으로 밟는 기분으로 사랑에 빠지고 마니까.

 

 

뜨거운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아무리 평소에 '사람은 평생 변하지 않는다' 따위의 믿음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람과의 이런 순간들이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도 모두 옛 허물과 과오와

 

부끄러움을 태워버리고 불사조처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탄생할 수 있겠다 믿었을지 모른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

 

그녀를 잡아주는 그의 손길, 한순간의 불편한 침묵도 끼어들지 못하는 남김없는 대화. 베르나르가 소설 '개미'에서 말했던

 

더듬이를 포갠 개미들의 완전소통이란 건 이런 느낌이겠구나, 어렴풋이 알 거 같은 느낌이었을지 모른다.

 

 

거리에서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택시와 버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브루클린 다리 교각 위에 올라 사랑을 확인하는,

 

그런 모습들이 아름다운 건 더없이 오만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뿌듯하고, 거침없이 자랑스러운 그들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이 뭔지 맛보지는 못했을 거라고, 그와 그녀는 감히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맞다. 어른들의 경험이라봐야 누추하고 실패한 인생을 반추했을 뿐,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황홀한 건지, 한 순간 남김없이 충만함으로 가득했는지를 가르쳐 준 적은 없었다. 반면 우리는 얼마나 행운인가.

 

 

그런데. 무엇이 모자랐던 걸까. 도가니를 달구는 화력이 점점 떨어진 건, 바람이 불어서였을까. 땔감이 부족해서였을까.

 

착하고 유머러스하고 순수하던 그는 그대로 가정적인 남편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받아 안아주었던 그였고,

 

그의 마음은 좀처럼 변함없이 그녀를 향한다. 아마 그는 변했어야 했다. 그녀가 조금은 덜 세상에 찌들도록 자신이 조금

 

더 세상에 찌들거나, 그녀가 조금은 덜 독해지도록 자신이 조금 더 독해졌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 역시

 

변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때의 천진한 마음과 순진함을 지켜냈어야 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뿐일까. 그가 조금 변했다고, 아니면 그녀가 조금 변하지 않았다고 해결될 문제였을까. 과연 이런 당황스러운

 

피로감과 거리감은, 그와 그녀의 잘못인 걸까. 무엇이 모자라 그토록 펄펄 끓던 도가니에 냉기만 감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나 그녀의 잘못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와 그녀는 만났고, 사랑했으며, 기꺼이 서로를 책임지고 동반하려

 

함께 살아왔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 그와 그녀는 서로가 상대로부터 뻗쳐나온 냉기와 거부감으로 손끝 하나 마음대로

 

옴쭉달싹 못하게 된 상황임을 깨닫고, 숨을 헐떡거리며 아귀처럼 싸우기 시작하는 거다.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졌듯, 어쩔 수 없이 다가오는 균열.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도, 싸우지 않으려 애써

 

웃음을 짓고 노력해보아도 어쩔 수 없다. 굳이 찾아냈던 사랑의 이유들, 유머러스하고 천진난만하고 밝고 착하고. 그런

 

장점들은 그대로 단점이 되어 증오의 이유가 된다. 대체 왜. 대체 왜일까. 어쩌면. 사랑 따위 처음부터 환상이었던 걸까.

 

아니면 '유효기간 만년짜리 사랑'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고작해야 반평생 버티면 성공했다 쳐주는 게 사랑일까. 애초에

 

그와 그녀가 부지불식간에 감지했던 온갖 위험 신호와 불길한 징조를 외면하고 조롱했던 벌을 받는 걸까.

 

 

우리는, 나와 당신은,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평행선이었던 걸까. 어쩌다 한번 사다리 타듯 옆길을 타고 완벽하게

 

합쳐졌지만 어느 순간인가 다시금 옆길로 새버리고, 처음부터 그랬듯 각자의 길을 따라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평행선을

 

긋고 있을 뿐인 걸까. 그렇다면 나는, 그는, 앞으로 절대 다시 겹치지 않을 순간들을 저주해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찰나의 순간이나마 완벽하게 겹쳤던 잠깐의 순간을 기적으로 여기고 감사해야 하는 걸까. 분명한 건, 그런 겹침의 순간은

 

결혼 따위 인습적 구속이나 사회적 책임감 따위, 사랑이 아닌 '부부애'나 '정' 따위로 지속되진 않는다.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어른해진 눈길을 붙잡는 건 크레딧 가득 번쩍거리며 터져오르는 불꽃놀이 불꽃들.

 

그 불꽃들은 그와 그녀가 사랑하던, 그에게 그녀가 전부였고 그녀에게 역시 그가 전부였던 그런 시절의 풍경들을

 

하나씩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다시 아로새기고 지워내고 있었다. 허름하고 난잡한 해수욕장의 싸구려 불꽃을 보고

 

아름답다 느낀 적은 없었다. 왠지 그저 슬프고 안쓰럽단 느낌, 부질없단 느낌 밖에 없었으니. 그래도, 저 정도 불꽃을

 

피워낸 불꽃놀이 폭죽이라면, 내가 그런 불꽃을 피워낼 수 있었다면, 그래도 조금은 아름다웠길 바랄 뿐.

 

 

 

 

 

 

 

 

 

 

어렸을 때 봤던 '백 년 동안의 고독',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랄까, 혹은 소개글이랄까.

 

게다가 연애감정을 단순히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만으로 묘사하는 단순한, 그래서 그만큼 거짓된 이야기들이 창궐한 세상에서

 

이렇게 정서적 혼란이 난무하는 것 자체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란 걸 짚어주는 것 자체로도 위로가 되는 글이다.

 

 

 

 

이별 통보하며 던진 말 "널 지독히 사랑해!" (프레시안, 2012-05-11)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연재를 시작하며

사랑에 빠진 젊은 당신에게 묻는다. 행복하세요?

허세를 좋아하지 않는 청년이라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적인 말씀 앞에서 청년은 기가 죽는다. 그리고 한탄한다. 실은 나 사랑에 빠진 죄로 피를 뚝뚝 흘리며 고통 받고 있는데, 어디 가서 하소연할꼬? 어떻게 말로 할 수 없는 이상한 마음에 빠져 있는데, 이 혼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러다가 내가 미치는 게 아닐까?

선남선녀가 첫눈에 반해서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연애담의 다가 아니듯이,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연애 심리의 다가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종종 극심한 정서적 혼란을 겪는다. 더욱 곤란하게도 그들은 혼란의 정체조차 모른다. 연애는 기묘한 인간 심리가 난투극을 벌이는 장이다.

훌륭한 소설들은 이런 미친 듯한 기묘한 심리들을 발견하고 묘사했다. 이 연재는 명작 소설에 나타난 기이한 연애 심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각 이야기의 서두에는 민, 경, 희, 연, 도 등 익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소설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이다. 연애 때문에 고민하는 혹은 고통 받는 독자이다. 그들은 소설에서 비슷한 증상(?)을 발견하고 공감하거나 위로 받거나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그들의 실제 연애담을 먼저 이야기하고, 본문에서 그와 관련된 소설 속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또한 질문한다.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경증인가? 판타지인가? 유일한 구원인가? 이 질문 앞에서도 명작 소설들은 이미 멋진 답안들을 제출하였다. 연재를 진행하면서 이 답안들, 유식하게 말해서 '사랑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훔쳐보는 즐거움도 누릴 것이다.

사족

그런데 필자 양반, 왜 이런 글을 쓰세요?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본 게임 전에 하는 말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우선 연애 때문에 마음 아픈 당신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당신의 기묘한 심정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 말하고 싶었다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명작 소설이 아픈 마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담은 '마음의 백과사전'임을 보이고 싶었다고, 아울러 소설을 깊이 읽는 한 방식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이런 식의 소설 읽기를 통해서 점점 독자를 잃어가는 소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기적도 아주 가끔 꿈꾼다고만 이야기해 두겠다.

 


첫 번째 상담

민이 연인에게 결별을 고했다. 일방적으로. 사람들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민을 부러워했는데. 그녀의 연인은 보기 드물게 자상했다. 어디에 가든, 그는 그녀와 동행했다. 우습게도 그는 혼자 있는 그녀가 혹여 사고나 당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들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녀의 안부였고, 그녀는 사소한 걱정이나 부끄러운 험담을 그에게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 그녀는 가장 흥미로운 텍스트였고, 그는 그녀의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데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 쏟아지는 질문에 그녀는 침묵으로만 응대했다. 그와 그녀의 이별 후유증에 대해서는, 말을 말자.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을 읽는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해했으므로 드디어 그녀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붉은 화인으로 남은 청춘의 한 때, 그녀가 빠져든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어리석음을 애도하면서 혹은 찬란함을 질투하면서.

그때, 난 천국에서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어. 천국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외줄 아래는 무시무시한 낭떠러지야.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다리가 늘 후들거렸어. 끝장나게 행복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불안했단 말이지. 그 상태를 더 이상 지속할 힘이 없었어. 무엇보다 외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어.

사랑은 왜 그렇게 피곤한 걸까? 그리고 그 피곤한 사랑을 도대체 왜 하는 걸까?

정열과 고독, 그 기이한 함수관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불안감은 침대 안에서가 아니고는 평화를 찾지 못하리라.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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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문학사상사

사랑할수록 처절하게 외롭다. 말장난이 아니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체험적 진실이다. 이 소설의 레베카와 아마란타 역시 사랑 때문에 외롭다. 그들은 동시에 피에트로 크레스피를 사랑하지만, 레베카는 사랑을 차지하고 아마란타는 그러지 못한다. 정황이 다르기에 그녀들의 외로움의 색깔은 다르지만, 이는 사랑의 짝패인 고독의 두 가지 전형적 사례이다.

우선 사랑에 응답 받지 못한 아마란타의 외로움은 쉽게 납득된다. "변소를 닫아 잠그고 안에 들어앉아서 절망적인 정열의 고뇌를 쏟아버리려고 정열적인 편지를 써서는 그 편지들을 트렁크 깊이 감추"(81쪽)기를 반복하는 아마란타의 고독한 정열. 응답 받지 못한 정열은 고독을 부추기고 고독은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외사랑이 깊어질수록 저 홀로 타는 정열의 불길은 거세어진다. 응답을 받았으면 평범했을 정열은 종종 응답을 받지 못했기에 더욱 광포하게 날뛴다. 걷잡을 수 없게 된 정열 때문에 점점 더 사랑을 얻기 어려워지고, 더 고독해진다. 아마란타는 고독하기에 정열적이고, 정열적이어서 더욱 고독하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아마란타 못지않게 사랑을 얻은 레베카도 외로우니, 어쩌면 더욱 처절하게 고독하다. 레베카는 피에트로 크리스피의 편지를 매일 기다린다. 우편배달부는 2주에 한 번씩 온다. 그런데 실수로 다른 날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매일 오후 4시마다 배달부를 기다린다. 그러나 다른 날 우편배달부가 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와야 할 날에 오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날 레베카는 "절망에 미칠 것 같아서 레베카는 한밤중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고통과 분노로 흐느껴 울면서 흙을 닥치는 대로 손으로 퍼서 집어삼켰고, 매끈매끈한 지렁이를 막 씹어먹었으며, 달팽이 껍질이 입안에서 아삭아삭 바스러졌다. 레베카는 동이 틀 때까지 먹은 것들을 토해냈다. 열병에 걸린 듯 레베카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79쪽)

광란에 빠진 레베카는 실연을 당했거나 외사랑에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이다. 피에트로는 극진하게 레베카를 사랑했다. 편지가 오지 않는 경우도 피에트로가 무성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우편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편지는 대개 정기적으로 도착했다.

이렇게 보면 레베카의 광적인 절망은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것이 된다. 드높은 인격과 향기로운 미덕을 갖추신 분들은 레베카를 맹목적인 탐욕에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맹목적인 탐욕이란 사랑이 필연적으로 거느리는 것, 사랑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사랑의 응답은 언제나 모자란다. 충만하다 못해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사랑의 응답도 필경 결핍만을 부각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픔을 느끼는 야차와도 같이, 사랑에 빠진 자는 악무한의 굶주림에 시달린다. 사랑에 빠진 자의 이런 허기를 마르케스는 '고독'이라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속뜻을 품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 레베카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사랑에 빠진 아우렐리아노뿐이었다.

열애 중인 연인은 고독이라는 인간의 천형을 사면 받는가?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열정의 노예가 된 사람은 연애 중에 오히려 더한 외로움을 느낀다. 아마란타와 마찬가지로 레베카의 사례에서도, 고독은 정열의 크기에 비례해서 깊어진다.

정열이 깊을수록 상대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많아진다. 많은 것을 기대하면 자연스럽게, 만족하기보다는 결핍을 느끼기 쉽다. 그러니 고독할 수밖에. 또한 그는 고독하기에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결핍을 느끼면 그것을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어지간해서는 체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맬망정 배고픔을 잊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열이 고독을 부르고 고독이 정열을 부르는 이 원환(圓環).

냉혈한인 그녀, 사실은 두려워서 사랑을 포기한 연약한 영혼

여자는 거리낌 없이 그를 만져댔고, 그는 그 여자의 손길에 몸을 부르르 떨며 쾌감보다는 두려움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38쪽)

상대의 마음은 대체로 나와 같지 않고, 마음이 맞는다 하더라도 이른바 '맺어지기' 전 결별의 요인은 너무나 많다. 그러니 사랑이 '맺어지기'란 구우일모(九牛一毛)나 다름없는 진귀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운 '맺어짐'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과연 기쁜가? 진실을 토로하라면 그때 표현하기 힘든 혼란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질투에 휩싸인 아마란타는 레베카와 피에트로의 결혼을 극성스럽게 방해하고 레베카를 독살할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레베카는 피에트로와 헤어진다. 아마란타가 방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레베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피에트로와 아마란타는 자주 만나서 조용한 사랑을 키워간다.

피에트로는 미쳐 날뛰는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따뜻하고 고요한 사랑에 도취하여 아마란타와 결혼하려고 결심한다. "억누를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쫓겨서라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따르자는 뜻"(125)에서. 그런데 청혼을 받은 아마란타의 대답은 어떠했나.

"나는 죽으면 죽었지, 당신하고는 결혼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정말로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앞으론 다시는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요." (126쪽)

이제 피에트로는 흐느껴 울며 비굴하게 애원한다. 비 오는 밤이면 아마란타의 침실을 바라보며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목소리"(127쪽)로 노래를 부르며 그녀를 설득한다.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절망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살하고 만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서 석탄불에 손을 지진다. 평생 화상의 흔적 위에 시꺼먼 붕대를 감고 산다.

아마란타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외롭게 했고, 질투심에 불타게 했으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던, 그리고 여전히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피에트로의 청혼을 고집스럽게 거절했을까? 피에트로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마란타의 어머니 우르슬라는 이렇게 분석한다.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의 마지막 분석 과정에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여인이었음이 분명해져서, 우르슬라는 아마란타에 대해 동정을 느꼈고, 피에트로로 하여금 부당한 고통을 받게 만든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자신이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시 사건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으며, 마침내는 아마란타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에 대해서 느끼고 있던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280쪽)

그 비극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다고 한다. 냉정하다는 평판과 달리 누구보다도 마음이 여린 아마란타는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에 굴복한 가엾은 영혼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피에트로를 깊디깊게 사랑했으나, 사랑의 동반자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꼿꼿한 직립이 가능한 굳은 땅 위인가, 천길낭떠러지 옆에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좁은 비탈길 위인가? 마음이 연약하고 깊은 이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깊은 사랑과 동시에 두려움에 몸을 떠는 사람은 이렇게 되뇐다.

그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토록 모자란 나를. 그는 언젠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사랑은 변하게 마련이니 결국 나는 사랑을 잃게 될 것이다. 잃은 후의 절망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나. 게다가 미쳐 날뛰는 정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열이 벼려 낸 내 안의 칼이 그를 찌르면 어쩌지. 사랑 속에서 나 자신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많다.

사랑에 빠진 자가 모두 사랑을 쟁취하려고 동분서주하는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경우 그는 사랑의 성취 바로 앞에서 비겁하게 몸을 사리고 도망쳐 버린다. 사랑의 깊이와 두려움의 깊이는 비례하므로, 피에트로를 죽음으로 이끈 아마란타의 냉혹함은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아마란타는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폭력적인 사랑의 심연을 두려워했을까. 그랬을 수도.

어쩌면 두려움은 행복 자체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란타는 눈앞에 다다른 행복 앞에서, 단지 행복해지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오랫동안 꿈꿔 왔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어떤 이는 환희보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행복이란 워낙 드문 것이기에, 사람은 그것을 만나면 낯설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 줄 모른다.

행복은 과거와 미래 속에서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과거에 행복했다고 다소 왜곡해서 기억하거나, 미래에 행복하기를 기대할 뿐이지, 현재 행복하다고는 거의 느끼지 않는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청미래 펴냄, 2007년), 197~200쪽).

지금 이곳에서 행복은 항시 부재중이다. 없어야 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순간 닥치는 행복은 '원래 없어야 하는 것'인데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이므로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편,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다. 줄기차게 추구해온 욕망의 정점에 아무것도 없음을. 그 텅 빈 정점을 보는 순간 느낄 참혹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기에, 꿈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에 도망쳐 버리는 게 아닐까. 꿈꾸는 대상이 허상이었음을 인정하기 두려워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마르케스를 만나면서도 되풀이 두려움을 느낀다. 여러 해에 걸쳐서 거듭 사랑을 고백하고 정성을 기울인 게리넬도에게 아마란타는 "자기 자신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면서, "죽는 그 날까지 혼자서 울면서 고독하게 평생을 보내리라고 결심하고는"(187쪽)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그녀의 이런 처사가 그동안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사람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후 우르슬라는 피에트로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이 깊은 사랑과 두려움의 싸움에서 두려움이 사랑을 이긴 결과라고 이해한다. 사랑이 깊기에 사랑이 사랑을 죽인 것이다.

내적 분열, 사랑의 핵(核)

그는,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만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39쪽)

인간의 마음은 본디 분열적이다. 무엇을 하고 싶을 때 동시에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이러한 내적 분열을, 연애하는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게 체험한다. 사랑하면서도 밀어내고, 도망치면서도 사랑한다. 아마란타가 게리넬도를 대하는 모습은 내적 분열하는 연애 심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게리넬도에게서 과거 피에트로에게 느꼈던 정열을 되살려보려고 애를 쓴다. 애를 쓴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정열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죽을 만큼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게리넬도를 거절한 후에도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에게 전쟁에 대한 최근의 형세를 알려주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으나 밖으로 나가서 그를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겨우겨우 그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160쪽)

사랑의 빛깔은 형형색색이라, 격렬한 정열이 아니어도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심정도 있고,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으면서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심정 또한 있다. 이런 분열적인 심정은 노년에도 그대로여서,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노인을 만나면서 추억으로 마음이 아파질 때면 공연히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서 그를 괴롭힌다.

 

ⓒ프레시안(손문상)

/박수현 문학평론가

 

 

부엌에서 그리 크지도 않은 '톡', 소리가 났다.

 

뭔가 싶어서 가봤더니 매끈하게 반짝거리는 하트 반쪽이 나머지 반쪽을 기다리는 중.

 

 

한 사람의 심장이 붉은 실로 묶였다는 인연의 심장을 당겨올리는 소리였다. 톡.

 

 

 

 

 

 

 

 

 

어느 순간까지는, 사랑하던 남녀의 이별, 갑작스레 '차인' 상황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녀, 빵빵하게 부풀었던 질긴 풍선처럼 자신의 세상 구석구석까지 채웠던 그녀가

 

남기고 간 결핍감, 공허감,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현실부정의 몸부림까지. 대체 왜 사라져버린 건지 감도 잡지 못한채

 

그저 몇몇 단서로 더듬거리듯 추측이나 해볼 뿐인 상황에서 남자는 때로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비통함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라져버린 여자에 대한 광기어린 분노와 질투, 증오를 폭발시키던 거다.

 

 

살아가면서 맺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란 게 고작 핸드폰 번호 하나, 이메일 주소 하나 만으로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를 떠난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참 쉬운 건지도 모른다. 전화를 꺼버리고 이메일 계정을 삭제한 채

 

커다란 알사탕에 바글바글 꼬여있는 개미떼같은 인간들 틈속으로 슬쩍 스며들면 그뿐이니까. 그렇지만 급속도로 불어난

 

인류의 비대해진 몸집을 전혀 따라잡지 못한 인류의 마음이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남자는 칼처럼 자신을 끊어버리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만 여자를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이제 그녀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어떻게 웃었으며 말할 때 버릇이 뭐였는지, 자신이 알던 그녀가 그녀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믿기지 않는, 도무지 현실같지 않은 현실에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온기를 찾는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잠시일지언정

 

함께 누웠고, 웃었으며, 꿈이 아닌 '레알'로 존재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 뿐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시간과 기억을

 

배반하고 부정하지 않으려는 그 숭고한 의지는 대개의 경우 상대의 싸이나 카톡 사진을 들춰보는 걸로, 술에 취한

 

새벽 두시쯤 전화 한번 해보거나 여차하면 집앞에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로 귀결되기 마련이지만, 영화 속

 

남자는 여자의 뒤를 쫓으며 예기치 않은 어둠의 장막을 들춰보게 된다. 계획된 살인과 본격적인 정체성의 은폐공작.

 

 

스릴러가 풀려가는 방식보다 더욱 재미있었던 건, 그 모든 걸 일종의 메타포로 읽어내렸을 때 남자의 반응이었다.

 

남자는 왜 여자의 뒤를 기를 쓰고 쫓으려 했을까. 남자는 왜 여자의 옛 남편까지 만나보려 했을까. 남자는 대체 왜,

 

기어이 여자를 만나고 껴안고 다시 놓아줬을까. 자신이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랑의 순간들이 그녀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부질없는 조각들로 무화되는 걸 막아내려 필사적이었고, 그렇게 지켜낸 사랑의 이야기(서사)에 나름의 소망이 담긴

 

엔딩을 그려보려 하는 안간힘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는 그녀가 시든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낙화하는 그 순간을 막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내달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던 건, 그녀가 끝내 살아남는 것. 자신과 함께 했던 순간들, 마지막으로 마주서서 끌어안았던 순간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은 채 그래도 한조각 가슴에 품고 살아갈 만한 진심을 건네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대 잡히지 말고

 

어디서던 무슨 이름으로 어떤 얼굴로 누구로 살아가던 간에 꼭 살아남기를 바랬던 건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가 했던

 

사랑을 지켜내기를,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랬던 게 남자의 깊숙한 속내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여자의 선택은, 코너에까지 몰려버렸다고는 해도, 그의 기대와 소망을 다시금 흔들어버린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그녀가 함께 했던 시간동안의 '사랑'에 대한 남김없는 배신일지도 모르겠다.

 

 

 

속초 해변의, (내맘대로 이름붙인) 사랑나무. 사랑이 주렁주렁.

저 생선의 이름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폴짝 뛰어올라 등대를 집어삼키려는 타이밍에 사진 한장.

겨울날의 바다는 잔망스러운 파도 앞에서 다들 멈춰서 있는 느낌이다. 벤치도, 감시탑도, 바다를 찾은 사람들도.

바다가 거칠어져 쓰나미가 몰려오면 바로 코앞에 있는 고속버스터미널을 지나 가까운 이마트까지 도망가라는 안내판.

고놈 참 잘 생겼다. 사람들이 쉼없이 번갈아 사진을 찍어대는 틈새에서 비스듬히 올려다본 사랑나무.



애정남에서 보이는 반짝거리는 재치에 웃음보다 감탄이 먼저 터진 적이 한두번은 아니었지만, 특히나 이건 정말.

'눈이 높다'의 기준을 세웠던 지지난주 개콘 애정남. 다시보기로 뒤늦게 보고 나서 빵 터져 버렸다.


"난 얼굴 안 봐, 느낌이 중요하지"

"난 착하거나 발랄하거나 센스있거나..아니 그런 것보다, 나랑 맞으면 돼"


너무 공감해 버렸다. 게다가 "내가 존중할 수 있거나 존경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부분까지 어쩌면

저렇게 콕콕 찝어 버렸는지.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대박 공감을 했다는 게 참 놀랍기도 하고.


그러고 보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건 그만큼 쉽지 않은 일.

느낌이라거나 코드가 맞는지라거나, 어떻게 보면 참 쉬울 수도 있는데 점점 어렵기만 하다.


사실 세상에는 남과 여가 있는 게 아니라, 날 더 채워줄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나를 더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힘들어져서, 느낌과 코드는 점점 정밀하고

복잡해져서, 사랑에 빠지기는 더욱 힘들어지는 거 아닐까 싶다.





"강릉을 넘어 현실에까지 범람한 그와 그녀의 사랑. 그들의 로맨스는, 그들의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ytzsche.



강릉과 非강릉, 영화와 현실의 공간.

강릉은 그런 곳이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파랗기만 한 바다에 연한 이 자그마한 소도시는, 외지에서 들고 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나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곳이다. 특히 여름에 바다를 찾는 향락객들에게는, 강릉이란 극중 민아의 자조섞인

표현처럼 일종의 '피서지용 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필요할 때 찾아와선 며칠 후엔 훌쩍 내버리는.


영화사 조대표도 잔뜩 지친 채 그렇게 불쑥 강릉으로 향한다. 딱히 일정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그저 바다를 보겠다

떠난 길이었으니 그에게 강릉은 일종의 비현실이었다. 그리고 투숙한 호텔에서 20년전 강릉에서 만나 하룻밤을 지냈던

민박집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그녀, 민아를 만나 함께하며 강릉은 20년만에 로맨스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느 연인들처럼, 그와 그녀 역시 스치는 손길 하나에, 미묘한 뉘앙스를 흠뻑 적신 단어 하나에, 그렇게 감정이 부풀어오른다.

그건 그가 호텔 로비에서 만나는 남자 맛사지사와 여성고객의 흥정 따위를 모두 성적인 의미를 함뿍 담아 읽어내린다거나,

그녀 역시 그를 조심스레 만지려 들며 그를 욕망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자연스러운 거다.



강릉에서의 로맨스, 강릉에서만 가능한 로맨스.

문제는 그들이-그의 생각대로라면-부녀간일 수도 있다는 것. 그는 드문드문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감정을 벌여놓는다. 그건 그가 강릉이란 곳을 대하던 태도에서 비롯할지 모른다. 여긴 '피서지'니까,

현실과는 다른, 영화 속과 같은 허구의 공간. 현실의 문법과 규율이 깨지는 그런 비현실의 공간. 이미 그는 20년전에도 그랬었다.


어쩌면 그녀도 그와의 사랑이 순간의 불장난이라거나, 두시간여만에 크레딧이 올라가며 끝나버릴 영화같은 기억으로 끝날 거라

지레 겁먹고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아픈 상처를 갖고 있던, 그리고 아마 그런 아픈 상처의 결과로 태어난 그녀다.

혹은 그녀는 아직 어려서, 깨질지언정 한번 그와의 이야기 마지막 페이지를 보겠다는 당돌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는 같다.


그와 그녀는 줄곧 손에 소니 핸드캠과 라이카 카메라를 쥐고 다닌다. 경포에서 주문진을 돌아다니는 길에, 그들은 쉼없이

서로의 이미지를 기록하고 저장한다. 일층에 미용실이 있는 이층 양옥집에 대한 엇갈린 기억이라거나, 새로 찍으려 하는

영화에 대한 즉흥적이고 암시적인 이야기들이라거나, 그러는 그들은 분명 그 예술적인 세계의 감독이나 배우처럼 굴고 있었다.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로맨스의 물결.

그녀가 그에게 먼저 고백한 때, 그는 그 직전 분명 그 타이밍에 마음을 전하려 결심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도망갔을까.

왜 강릉을 벗어나 자신이 속한 거대한 도시 서울로 한달음에 되돌아왔을까. 그녀의 고백에 퍼뜩 놀라 겁먹은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게 '로맨스'로서 어울리는 짧고 아름다운 결말이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울에 돌아와 안심했을까.


아마 그는 굉장히 찝찝하고 부끄럽고 지쳐버린 채 돌아왔을 거다. 어디선가 내 아이가 나도 모르게 자랐다는 상상, 그리고

그 아이에게 '핏줄이 당기는 것'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상상이 허용되던 다소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불쑥

냉혹하고 단정한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그리고 20년이 지나도 똑같이 그 공간에서 도망나와 문제를 피해버렸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영화같다'고 표현하는 식이라면, 여기서 그의 이야기 한토막은 크레딧을 올리며 끝내야 하는 타이밍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영화는 끝이 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해주는 데서

폭발하는 거다. 강릉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었던 그들의 영화같은 사랑이 비로소 그 속박을 끊고 현실까지 넘쳐들어오는 순간.


로맨스와 현실의 혼재, '강릉'이란 알리바이가 필요치 않은 사랑.

물론 대책없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녀는 그의 딸인 게 분명해지고,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의 나이차는 스무살.

그들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지,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물과 기름같이 겉돌던 로맨스와 현실을 비로소 뒤섞을 수 있게 되었다. 강릉과 非강릉의 벽을 넘어서.


어쩌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아닐까. 로맨스는 로맨스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생각하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영화에선

그게 '강릉 vs 非강릉'의 공간으로 표현되었다면,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거나, 연애 초 콩깍지와 리얼한 실재모습은 다르다는

식으로, 결혼 전과 후가 다르단 식으로 칸막이를 세워 놓고는 '(짧아서 아름다운) 로맨스 vs 현실'의 구도를 만들곤 한다.


아닐 수도 있을 거라 믿는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도 않고, 로맨스의 마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만치

뭐 하나 뚜렷하게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건 확실하다. 우리의 로맨스는, 우리의 영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다음 장면으로 함께 넘어갈 수 있는 한 끝나지 않는다. 그게 아마도 백년후에 크레딧을 올리는 비법.


각자 만들어가는 영화의,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라면. 배우와 감독이라면.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서며 조심스레 자세를 잡는다.

그녀는 아이폰, 나는 카메라. 바싹 움켜쥐어 상대에 겨누고는 잠시의 틈을 노리는 순간.


그녀가 한걸음 비틀어 내딛는 걸 신호로 한바퀴 팽팽한 원을 그리며 서로를 향한 맹렬한 연사.

온실 속 꽃들과 이파리들이 나부끼는 중에도 서로에 가닿는 초점은 용케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비비적대는 걸음걸이를 감히 플라맹고의 춤에 비기는 건 황송한 노릇이겠지만,

카메라와 아이폰으로 세워진 방패를 벗겨내려는 놀이는 그렇게 사랑춤이 되고 말았다.




@ 아침고요수목원.

밤을 꼬박 샌 참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였지만 배가 고프지도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 곧 동터올 시간이 되었음을 의식했고, 굳이 커다란 가방에 쑤셔넣어온 삼각대가 머릿속 귀퉁이부터

스물스물 다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목도리까지 꽁꽁 싸매고 내키지 않는 몇걸음 나서니 바로 경포 해수욕장의 모래변.

싱겁게 벌겋던 하늘, 날이 흐려 해뜨는 게 안 보이나 했다. 어느 순간 파도가 미친 듯이 펄쩍거렸고, 귀가 얼얼한

파도소리에 덩달아 흥분하기라도 한 듯 붉은 해가 솟았다. 잿빛의 짙은 안개같은 구름을 찢고 그야말로 불쑥, 솟았다.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꽉 채운 채 미동조차 없던 그 한가지 생각도 잠시 사라진 듯 했다. 다행이었달까.

환상이었다. 그 생각은 잠시 밀려났던 성난 파도처럼 내 머릿속을 온통 휩쓸고 다시금 흠뻑 잠식해버렸다. 그렇지만,

태양이 솟고 파도가 철썩이던 그 순간의 압도적이고 삼엄하던 분위기는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온몸에 직접 와 부딪히는

것처럼 격하게 헐떡거리며 절정을 향해 내달리던 파도소리, 그리고 그 거대하고도 무거운 구체의 몸뚱이를 우아하고도

가볍게 하늘의 길을 따라 쳐올리던 태양의 부지런한 궤적.


 


 

@ 강릉, 경포 해수욕장.


"누군가에겐 일생을 통틀어 어느 짧은 시기만이, 그때의 감정만이 전부였을지 모른다." ytzsche.


매끄럽고 탄력있던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당돌하고 총명하던 얼굴에는 얼룩지듯 나이가 묻어나는 어느 노인의 독백,

그녀의 회상으로 시작한 영화는 그녀의 '오늘'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맺는다. 첨엔 이게 뭘까, 싶을 정도로 들이댄 렌즈에

잡히는 그녀의 하얗게 서리내린 머리카락과 시들어버린 육체를 두고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줄곧 끼적이던 그녀의 펜으로 풀려내려간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문득 아름다웠다.


그녀의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다. 영화제목은 영어로 the Lover, 불어로는 L'amant. 프랑스어로 듣는 게 제인 마치와

양가휘의 연기를 오리지널로 맛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삼분지일쯤 영어 버전으로 보던 영화를 다시 프랑스어로 재개했다.

제인 마치가 오물오물 입술을 벌려 내뱉는 짧고 도발적인 말들이라거나, 양가휘가 손을 덜덜 떨며 건네는 담배라거나

몇마디 구애의 언어들이 더욱 달콤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던 건 프랑스어 특유의 멜랑꼴리함 덕분이었을 듯.


쉽지 않은 사랑이다. 프랑스 식민통치하의 베트남, 피식민지에 와서 몰락한 프랑스 가족의 소녀, 그리고 베트남 상권을

장악한 중국인 가족의 남자. 소녀 나이에 두배에 이르는 남자 나이, 그 나이차와 피부색만큼이나 둘의 배경은 판이하다.

서로 교통하지 않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 유럽이 제패한 시대를 사는 몰락한 유럽인과 피식민지의 유복한 동양인의

아이러니에 더해서 이미 가족이 정한 정혼자까지 있는 남자. 물과 기름처럼 뚜렷하게 갈린 두 사람 사이에 칸막이마저 있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서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하게 될까. 상대를 당장 확인하고 갖고 싶다는 열망의 끝은 섹스.

도무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가족에 대한 분노, 주위의 질책 어린 시선과 노골적인 비난에 대한 반감, 첫눈에 끌려버린

상대에 대한 사랑, 젊고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탐미, 이야기의 마지막장을 이미 알고 있다는 좌절감,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기력함과 자기혐오, 자기를 잡아주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원망, 그 모든 감정이 회오리치는 섹스신들.


도대체 이건 어떤 감정인지, 서로는 어떤 의미인지조차 알 수 없어지도록 질펀하고 몽롱한 섹스의 향연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아프게 떠올린다. 피하고 싶었던 감각, 통증을 느끼며 상대를 바라보는 순간. 그들이 강철같이 단단하고

엄연한 현실을 피해 숨을 곳은 서로의 품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일종의 마취제나 진통제처럼, 그들은 서로의 현재를

끌어안고 남김없이 탐닉하며 가능한 '살아있는 시간'을 연장하려 발버둥쳤던 건 아닐까.


"널 만나기 전에는 고통이란 걸 몰랐어..널 간절히 원해. 널 내 곁에 두고 싶어..하지만 내겐 힘이 없어. 내겐 힘이라곤

전혀 없어! 난 죽은 거야. 너를 향한 욕망도 없어..내 몸은 사랑하지 않는 이를 원치 않아."라는 남자의 고백.


그리고, 남자를 떠나보내고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처음으로 울었던 그녀 역시. "모래 속의 배설물처럼 뒤섞여버린

현실 속에서, 알 수 없었던 그에 대한 사랑을 찾았다"던 그녀의 고백.


그들은 함께 있던 순간만 존재했다. 그녀의 짧은 이야기 속에, 영화 한 편 분량의 이야기 속에 그녀와 그의 인생이 전부

들어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예전에 그녀를 사랑했던, 그를 사랑했던 힘으로 버텨 살아왔을 그들. 과연 노년에 다시

만난 그는 말한다. "예전에 그녀를 사랑했었다고...그리고 그 사랑은 아직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며,

죽을때까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 사실 그들의 섹스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도발적이긴 하지만, 그보다도 육감적이었던 건, 그리고 그 섹스의 기원이라

여겨지는 풍경은 따로 있었다. 남자의 차를 함께 탄 여자, 그리고 짧고 설레는 문답이 띄엄띄엄 이어진 후에 가만히

접근하며 여자의 새끼손가락부터 촉감하던 남자의 다섯 손가락,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활짝 다섯

손가락을 벌려 그를 받아들이던 여자의 손놀림까지. 자칫 굉장히 유치할 수 있던 순간을 숨까지 몰아쉬며 눈 부릅뜨고

보게 만들었던 건 온전히 두 배우의 연기력이라고 해야 하려나.






하늘에서 본 지구,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간단한 컨셉일 수도 있겠다. 헬기나 기구를 활용해서 남들이 확보하기 어려운

거리를 두고 지구상의 풍경과 사람, 사물들을 사진에 담아낸다는 건. 가까이서 보았을 때 미처 한눈에 잡아내지 못했던

전체적인 이미지라거나, 흉물스럽고 무질서해보이기만 하던 덩어리에 특정한 패턴이나 리듬감이 느껴질 수 있으니까.

게다가 멀리 떨어져서 보면 웬만하면 다 이뻐 보인다는, 그런 식의 말도 있으니 '하늘에서 본 지구', 항공사진이란

장르는 어느정도 먹고 들어간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얀 아르튀스-베르트랑의 전시는 역시 기대했던 것만큼, 아름다웠다. 그의 사진들은 기껏해야 지면으로부터 1-2미터

떨어진 곳으로부터 바라볼 뿐인 인간의 시선으론 좀체 가닿지 못할 그런 풍경들을 담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의 눈'.

고도 30-3,000미터 사이에서 촬영되었다더니 그 높이란 건 정말 사람이나 자동차, 섬이 콩알 만하게 보일 만큼의

높이여서 꽤나 신선하고 새로운 각이 잡혔던 거 같다. 게다가 1990년 이래 110개국이 넘는 나라를 돌아다니며 삼천시간

이상을 비행했다고 하니 뭔가 담을 거리를 찾는 작가의 발놀림은 굉장히 부지런했던 셈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을 더욱 빛나게 했던 건 단순히 아름다움을 좇거나 풍경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으려는 의지랄까

그의 마음이 사진들에 담겨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인 거 같다. "하늘에서 본 지구", "하늘에서 본 한국", "인간의 친구-동물"

그에 더해 영화감독 뤽 베송과 함께 촬영한 "HOME"이란 동영상까지 총 네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전시를 보고 있으면,

지구의 생태가 어떻게 일상적으로 인류로 인해 더럽혀지고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간인지,

지구가 품고 있는 생명들이 얼마나 다종다기하고 서로 다른지에 대한 애정이 물씬한 시선을 따르게 되는 거다.


각종 광물과 대리석을 캐는 채석장에서 흘러나오는 화학물질로 범벅된 기이한 색상의 물줄기들이 거친 선의 추상화처럼

황토빛 대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거침없이 선을 그어놓는가 하면, 말려놓으려 걸어둔 바닷가 청록색 그물들은

중첩된 채 캔버스에 거칠하게 붙여둔 텍스쳐같은 설치미술품 같기도 하고, '꽃보다 남자'에서 나왔다는 그 누벨칼레도니의

하트 모양 표식은 도무지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섬세하게 장식적이고. 그런가 하면 직접

키우고 있는 말이니 돼지니 양 같은 동물들을 가슴에 품고, 사랑스럽게 껴안고 사진을 찍은 농부들의 그 표정이라니.


흔히 "지구는 인류가 후대로부터 빌려 쓰는 곳"이란 표어를 생각없이 말하지만, 얀 아르튀스는 그 이상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지구는 인류의 '가정(HOME)'이다, 인류와 온갖 동식물과 생명들이 함께 모여사는. 그런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 전시의 수익금은 전부 환경기금 및 국제 어린이 기아기금 등에 전달된다고 하니

꼭 한번 가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이런 높이를 확보한 채 세계를 찍은 사진을 본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좋을 듯.



*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본관(2,3층), 2011.12.15~2012. 3. 15일까지.

www.하늘에서본지구.net







설득 (반양장) - 10점
제인 오스틴 지음, 원영선.전신화 옮김/문학동네

"사랑과 결혼, 그 풀리지 않는 함수관계에 대한 사려깊은 답안, 읽고 나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ytzsche.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으로 필명을 떨친 그녀가 죽기 일년 전에 남긴 유작이자 또다른 명작이라 감히 칭하고 싶다.

사랑이란 감정이 어떻게 맥놀이하는지를 보여주는 건 이미 숱한 작가들이 숱한 작품에서 묘사하려 애썼던 것이지만,

제인 오스틴이다. 그녀의 문장은 비단처럼 매끄럽고 섬세하며, 그 와중에 날카롭고 예민한 성찰까지 녹아들어 있는 거다.

게다가 이미 이전에 놓쳐버렸다,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다시 어떻게 안에서부터 불붙기 시작하고 상황에 따라

어떻게 꺽이고 젖혀지는지, 그리고 다시 만개하는지를 이토록 흡인력있게 묘사해내다니.


결혼이란 문제는 흔히 사랑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인 양 이야기하는 게 현명함을 가장하기 쉽다. 자못 어리숙하다느니,

세상물정 모른다느니, 결혼은 또다른 현실이라느니 따위의 야박한 '설득자'들 앞에서, 사랑과 결혼,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는

식으로 편히 갈라놓고 이야기하는 건 제인 오스틴이 목도했던 근대 초기의 세태와 작금의 세태가 과히 다르지 않은가 보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프레임도 그런 식이다. 감정에 몰입하기보다는, 결혼을 디딤돌로 얻을 수 있는

물적 조건-적나라하게 말하자, 그때나 지금이나 재력과 '신분'을 업그레이드할 기회인 거다-에 집중하라!


오스틴은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펼쳐 놓으며 그들의 결혼, 혹은 결합이 서로에게 어떤 시너지를 줄 수 있는지, 면밀히 따져묻는

당대인의 모습을 눈 앞에 보일 듯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런 세밀화의 풍경엔, 불타오르는 사랑 앞에 모든 게 무너져내리는 듯하던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눈먼 사랑이라거나 그 반대의 팜므파탈이 나설 공간은 없다. 얼핏 보기엔 우리 옆을 스치는 여느 남녀의

범상한 연애담과 결혼담에 지나지 않을 법한 담담하고 평이한 풍경 속에, 그녀는 잃었다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마음이 다시 열리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 국면을 너무도 강렬하게 돋을새김해 놓는다.


하여, 사랑은 판타지일 뿐이라며 어른의 조언을 따르라는 '설득', 그에 반해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라는 또다른 '설득', 혹은

지난 일은 어쩔 도리가 없이 지난 일일 뿐이라는 옛사랑의 '설득' 따위에서 방황하며 더러는 길을 잃고 더러는 홀로 야위어가던

앤 엘리엇은, 누군가의 설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로맨스를 찾아간다. 그건 처음부터 로맨스로 시작해 무책임한 결말을 비워두는

이야기도 아니고, 시니컬한 냉소로 시작해 황폐한 풍경만 지루하게 내뿜는 이야기도 아니다. 주위의 설득으로 이미 한차례,

로맨스를 버리고 '현실'을 좇았던 여인이 이제는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의 로맨스를 복구해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연애담 혹은 결혼담은, 둔한 눈으로 보면 얼핏 '다들 그러고 사는 것'이라며 무시하고 지나치기 쉬운, 삶의 어떤

결정적인 국면을 포착해내어서는 그 안에 숨어있는 내면의 폭풍과 결단의 순간들을 너무나도 특별하고 따뜻한 시각으로

어루만져 주는 거다. 그것이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감정이 격동했던 이유 아닐까 싶다. 평이한 일상에 그토록 밀도높은 생기와

현실감, 극적인 감각을 불어넣어준 오스틴 덕분에, 심장이 문득 두근거렸다. 어떤 의미로던 이 책 '설득'은 너무도 늦게 한국어로

번역된 거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윤상과 신해철이 댄스가 없는 댄스음악을 만들어보겠다, 고 의기투합하여 만든 앨범이었던가. 나중에 SES가

리메이크했던 '달리기'란 노래가 있었고, '질주'와 '기도'란 노래도 꽤나 인상적인 앨범이었지만 무엇보다

강렬했던 노래는 역시 이 노래였다.


윤상과 김광민, 이병우가 함께 했던 'Play with us' 콘서트의 잔향이 여전히 짙게 남아있는 무더운 여름날

생각난 김에, '사랑은 천개의 날을 가진 날카로운 단검이 되어 너의 마음을 베고 찌르고 또 찌르고, 자 이제

날 저주하겠니'란 가사가 완벽하게 아름다웠던. 96년 노댄스의 그 노래. Moon Madness.




너의 눈빛 너의 몸짓
너는 내게 항상 친절해
너를 만지고 너를 느끼고
너를 구겨버리고 싶어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
채워지지 않는 지배욕
암세포처럼 지긋 지긋하게
내 몸을 좀 먹어드는 외로움

나의 인격의 뒷면을
이해할 수 없는 어둠을
거길 봐줘 만져줘
치료할 수 없는 상처를

내 결점을 추악함을
나를 제발 혼자 두지마
아주 깊은 나락 속으로
떨어져가고 있는 것 같아

나의 마음은 구르는 공 위에 있는 거 같아
때론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롭지
날 봐, 이렇게 천천히 부서지고 있는데
아주 천천히

끝없이 쉴곳을 찾아
헤매도는 내 영혼
난 그저 마음의 평화를
원했을 뿐인데

사랑은 천개의 날을 가진
날카로운 단검이 되어
너의 마음을 베고
찌르고 또 찌르고

자 이제 날 저주 하겠니
술기운에 뱉은 단어들
장난처럼 스치는 약속들

나이가 들수록
예전 같지 않은 행동들
돌고 도는 기억속에
선명히 낙인 찍힌
윤리 도덕 규범 교육

그것들이 날 오려내고
색칠해서 맘대로
이상한걸 만들어 냈어

내 가죽을 벗겨줘
내 뱃살을 갈라줘
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나도 궁금해

나의 마음은 구르는 공 위에 있는 거 같아
때론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롭지
날 봐, 이렇게 천천히 부서지고 있는데
아주 천천히

끝없이 쉴곳을 찾아
헤매도는 내 영혼
난 그저 마음의 평화를
원했을 뿐인데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칠 때
기억나지 않는 지난밤
내 마음을 언제나
감싸고 있는 이 어둠은
아직 날 놔주지 않고




원빈의 무겁고 까만 눈빛과 (원빈의) 화려하고 산뜻한 피의 향연. 그 두개가 장착되었으니

영화가 그렇게 떴던 거 아닐까. 원빈의 등언저리에 붙은 근육과 팔근육이 꿈틀거리며 움직여

만들어낸 군더더기없고 단호한 선들이 쓰레기들의 목을 따고 동맥을 끊어 빨간 피를 콸콸

쏟아내는 장면이란 건, 남자가 보아도 굉장히 아름답다 느껴질 만한 장면들이었으니.


그리고 하나가 더 있지 않나 싶다. 제목, '아저씨'. 특히 여성에게 '아저씨'라는 호칭이 갖는

안도감 혹은 적당한 거리감이 먹혔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이긴 하나 연애나 섹슈얼한 의미의

가능성을 가진 대상이 아니라 육체적이거나 성적인 의미가 지워진 상대. 비슷한 위치의 두 사람이

감정을 밀고 당기고 하는게 아니라 여성이 확 낮아진-그러나 우월한-위치에서 그저 바라보고

부탁하고 얻어낼 수 있는 그런 편하고 편리한 상대.(자신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를 무기로.)


그래서 이 영화는 김새론이 연기한 소미의 시각에서 줄곧 바라보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말없이 보듬어주고, 이불덮어주고, 심지어 목숨을 걸고 구하러 오는

싸움도 잘하고 과거도 멋있고 잘생기기까지한 '아저씨'. 그 아저씨는 다른 남자들처럼 귀찮게

그녀를 치근대거나 몸달라 마음달라 보채지도 않는 거다. 김새론의 눈높이에 어느결에

동화되어 버린 여성들의 환타지를 만족시키는 무독하고 일방적인 애정을 제공하는 아저씨.


그러고 보면 그런 원빈 아저씨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허름하고 오징어 비스무레하게

생겼다는 일반 아저씨들과의 차이는 딱 그거다. 아저씨라 불릴만큼 연령대도 다르고 연애의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점은 같지만, 보통은 싸움도 못하고 과거는 초라하며 대개 자신은

중간은 간다는 환상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거다. 아저씨라고 다 같은 아저씨가 아니다.



p.s. 그런데 소미는 아저씨를 계속 기다렸을까. 그녀와 아저씨의 뭐라 이름붙이기 힘든

애정의 관계는, 부모자식간의 그런 형태로 갈까 아니면 남녀간의 그런 형태로 갈까. 저런

스토리의 끝에는 어쩜 일반적 차원에선 '로리콘'이라 손가락질할 이야기가 덧붙지는 않을까.

그리고 난 왜 그런 게 궁금해지는 걸까, 그냥 다 사랑인데.



"지금은 잃어버린 꿈, 호기심, 미래에 대한 희망.

언제부터 장래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 걸까.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일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좋은 일요일 내내 흙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를 핑계로 전날밤부터 급 달리기 시작한 '연애시대'.

토요일 밤을 꼬박 새고, 네시간 자고, 밥먹고, 다시 달려서 이제야 16부작 정주행 완료.

저렇게 적고 보니 왠지 폐인 모드였..지만, 왠지 한번쯤 다시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전에 봤을 때와 지금의 느낌이 어떻게 다를지. 내게 어떤 자극이 될지 궁금했달까.

장래희망을 잃고 하루를 견뎌내고 있단 느낌이 드는 때.



#1. 사랑이 오고 간 자취.

다시 봐도 역시, 서로 끌리고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과 사람 간의 온갖 국면을 참 섬세하게

그려냈다. 미묘한 떨림, 설레임과 두려움에서부터 슬쩍 엇나가고 막막해지고 슬퍼지는 그런

순간들, 두사람의 감정이 휘발되고 언뜻 지치고 지루해지는 순간들과, 그리고 둘 이외에는

의미불명의, 둘에게조차 더러는 덧없을지 모를 몇몇 장면들이지만 분명히 행복했고 아름다웠던,

그리하여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들. 특히나 유머러스하지만 센스넘치는 카메라워킹과 소품들로

놓치지 않은 뉘앙스들은 장면장면 공들여 조탁된 이 드라마의 덕목 중 하나.


#2. 사랑이 뭘까.

사랑이 뭘까. 헤어지고 나서야 시작된 이상한 마음, 그런 것도 사랑일까. 미움도 사랑, 집착도

사랑, 미련도 사랑, 아쉬움도 동정도 선망도 욕정도 모두 사랑인 걸까. 그런 건 아니라 치면,

역시나 모르겠다. 사랑이 뭘까. 사랑이 아닌 건 뭘까. 마지막회 엔딩 후에 스탭들이 모두

'사랑이 몰까'란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있었다. 둘이 있을 때 행복한 거, 믿음, 끊임없는

의사소통..같은 답들도 의미심장했지만 그보다는, 나잇살 깨나 먹은 분들도 모르겠다며

손사래치는 모습이 훨씬 든든했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니구나, 하는.


#3. 사랑은..운명일까.

그리고 역시나. '사랑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와 '사랑은 사람이 어쩔 수 없다' 사이의 갈등.

그 굵은 갈등선에 대해 워낙 풍부한 말들과 감성적인 장면들을 마련해 두었는지라, 결국은

이거든 저거든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어도 될 거 같다. 드라마야 비록 해피엔딩 아닌 앤딩을

말하며 끝났지만, 그래서 둘은 운명인 걸까,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지나고 나니 운명이었다

손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어차피 못가본 갈랫길엔 '붕어똥처럼' 후회가 남는 거다. 다만..

조심스레 덧붙이자면,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 한결같은 그 일관성이 슬프고 원망스러울지라도.



#4. (특히) 이번에 꽂혔던 대사들.


"사랑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시작할 때는 두려움과 희망이 뒤엉켜 아프고

시작한 후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알고 싶어서 부대끼고

사랑이 끝날 때엔 그 끝이 같지 않아서 상처받는다.

사랑 때문에 달콤한 것은 언제일까."


"사람은, 추억만으로도 살 만하단다."


"기억이란 늘 제멋대로여서

지금의 나를 미래의 내가 제대로 알 리 없다.

먼훗날 나는 이때의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노력하면 될 줄 알았어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왜 이렇게 피곤할까요."


"당신이 그랬잖아.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우리 잘 될까?

그런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확신해?

우리 끝까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 같아?"


"언젠가는 변하고 언제가는 끝날지라도

그리하여 돌아보면 허무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슬퍼하고, 기뻐하고, 애달파하면서.

무엇보다도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가끔 싸우기도 하고, 가끔은 격렬한 미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가끔은 지루해하기도 하고, 자주 상대를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간다.

시간이 또 지나 돌아보면 이 때의 나는 나른한 졸음에 겨운 듯

염치없이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1. 이런 '연애조작단' 어디 없을까.

일단 아무 여자나 하나 '찍기'만 하(고 돈만 내)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준다는 거잖아. 뭐,

전지현이나 신민아는 안 된다는 거 같지만 그래도 굉장히 획기적인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할 때 어느 부분이 상대의 주의를 빼앗고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그런 불안하고 막막한

부분들을 든든히 받쳐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과 동선까지 파악해서 그야말로 '인연'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2. A/S가 관건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무리 첫인상을 잘 만들고 인상적으로 깊이 새겨지는 이벤트로 마음을 얻었다해도,

이후의 관계가 문제 아닐까. 계속해서 둘 사이의 친밀도를 유지하려면 꾸준한 관리가 절대로

필요할 텐데. 아니면 대부분의 상황에 대한 그녀의 '모범답안' 메뉴얼을 한 권 만들어서

제공하던가. 그렇지만 그들도 온갖 변수에 즉흥적으로 대응해야 할 뿐이니 그건 불가능할 듯.

연애가 고백으로 끝나는 원샷이벤트는 아니잖아. 아니 원샷인가? 그건 원나잇 아닌가.


#3. 평생 '가면'을 쓰고 지내야 하려나.

막말로 '조작단'이 평생관리를 해준다 해도 문제다. 언제까지 그렇게 그녀 맞춤형으로 '나'를

연기하며 지낼 수 있을까. 처음에야 그저 그녀의 마음을 얻은 것만으로도 기뻐서 내가 다 맞추겠네

평생 저항않고 노예처럼 받들겠네, 하겠지만 그게 어디 될 말인가 말이다. 연애는, 관계는,

여튼 맞출 수 있는 한 서로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할 텐데. 그렇게 한발이라도 삐끗하면 그들의

관계는 끝장날 가능성이 더욱 클 텐데.


#4. 에라, 그냥 알아서 하던대로 하자.

헷갈리는 와중에, 그러고 보면 사실 조금 낮은 수준의 '연애조작단'은 이미 가동중이지 싶다.

초딩들이 활개치는 포털사이트는 제끼고라도, 연애감정 비슷한 것이 일어나는 상대가 생기면

머릿속에서 촤라락 돌아가는 과거의 경험들, 그리고 주변인들을 동원한 암호식별 및 행동전략.

뭐, 맞을 때도 있고 영 아니다 싶을 때도 있는 거지만, 어차피 연애란 게 하나의 블랙박스,

읽어보지 않은 책을 살며시 열어보는 재미 아니던가. 이쪽이나 그쪽이나.



뭐, 영화에 대한 리뷰라기보다는 그냥 영화보고 나니 저런 '조작단' 하나 있음 어떨까 싶어서

이런저런 잡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골목을 뱅글뱅글 돌았다.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씨씨티비를 피해 세워놨던 차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문득 조바심치다 에라 모르겠다. 늘 길찾기는 내게 스트레스였다.

문득 떠오른 그녀의 타박 아닌 타박. 오빠는 어떻게 나보다도 길눈이 어두워.


어차피 집 밖에 나서면 전부 길이다. 낯선 길 위에서 늘 그녀의 말이 맴돈다면 큰일이다.

장소에 주석을 붙이고 기억을 첨부하는 건 일종의 허세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악세사리같은 말들이라 생각했었는데. 정작 나는 길 위에서 추억한다.


그러다 번쩍, 계시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안농'손칼국수. 지난 3년동안 그녀의 인사는

대개 '안농' 아니면 '안뇽'이었다. 안농. 입술에 주름을 잔뜩 끌어모아 앞으로 바싹, 평온하던

날에 그 인사말은 장난스런 키스의 느낌을 떠올렸댔다. 안농, 그러면 나도 안농.


길 위에서 넘실대던 그녀의 기억이 인도 위까지 들이차기 시작한 걸까. 장마철 보도블록을

핥아대며 역류하는 빗물의 강처럼 뭔가 으슬으슬해졌다. 우리의 시간이 내게 주었던 교훈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역시 조금은, 변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의 '안농'이 내게 남았다. 그리고 다른 고민이 남는다. 그럼 대체 난 뭘 배운 걸까.

그 시간동안, 그 평온했던 날들과 쓰라렸던 날들을 거치면서 결국 뭔가 배워야 할 걸 못

배운 건 아닐까. 이런 내가 다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니 드라마를 보면, 모두가 조금씩은 깨달음을 얻는 거 같다.

그때 그랬어, 사실은 그랬어야 했어, 내 문제였어, 둘다 어렸어 따위. 근데 정말, 그렇게

현실이 굴러간다면 지금쯤은 세상엔 사랑에 득도한 사람들만 가득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그저 다들 늘어만가는 나이에 부끄러우니까, 깨진독처럼 좀처럼 숙성되지 않는 경험치가

부끄러우니까 있어보이는 척만 하는 건 아닐까. 사실은 나도 그래보일 순 있는데. 허름하니

글자가 깨져나간 간판 하나에 '안농'이니 어쩌니 울렁대지만 않으면. 




젖이 팅팅 불은 채 아파하는 암소처럼, 누군가에게 사랑을 쏟지 못해 힘든 마음.

이전에는 몰랐다. 사랑받으려는 욕구보다 큰 게 사랑하려는 욕구임을.


내가 주는 걸 최대한 흘리거나 튕겨내지 않고, 가능한 오롯이 받아낼 수 있는 사람.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정말 인연이란 게 있을지도 모른다.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더러 기억하기도 부끄러운 치졸한 이별과 유치하고 눈멀었던 사랑을

겪고 난 뒤에도 결국 난 변하지 않았다.

토끼해를 맞아 다짐했을 여러 약속들, 꼭 이뤄지길 바라는 여러 소원들, 모두 그 결이 다르고

색이 다른 이야기들이겠지만, 사실은 모두 하나로 돌아오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사랑받고 싶은 마음.


이번 발렌타인데이를 핑계로 그런 마음을 채우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초콜렛을 (많이) 받는 나만의 노하우!'라는 Q&A를 겸한 초대장 배포!


● 일시 : 2011년 2월 11일(금) PM 3:00부터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
              옛)異彩가 꿈꾸는 경험적세계의 유토피아적 가능성

                 (http://ytzsche.tistory.com)

● 자격 : "초콜렛을 많이 받는 나만의 노하우?"
              이 질문에 대한 본인의 답과 그 이유를 적어주세요.

              + 초대장을 받을 이메일주소!^-^*


주최 : yztsche(이채, 異彩)

제공 : 초대장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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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zs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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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그래도 세상에 '꼭' 있어야 하는 것들, 이것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것, 이사람, 이길, 뭐가 되었던 그렇게 절대 놓치거나 없어져선 안 될 것들이 있다고 말이다.

다른 것들이 전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머스트해브' 아이템들만 쥐고 있으면

결국 길을 잃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그렇게 '꼭' 있어야 할 것들은 있고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없는 동네가 아니란 건

점점 더 리얼하게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한발씩 뒤로 물러나면서 양보하기 시작해서, 꼭 이길만이

길은 아니란 것, 꼭 이러저런 가치나 아이템이 필수는 아니란 것을 배워가면서 주춤거리다 보니까

뒤에 숨겨둔 '머스트해브' 아이템의 목록들이 어느새 한두줄로 줄었다.


그리고, 꼭 이사람이어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도 어쩌면 그렇게 양보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이사람 아니면 안된다, 이사람이 평생에 한번 만날 내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이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을지 모른다..라는 식으로 바뀌어나가는 건, 그런 배움의 한갈래일지도 모른다. 애초 모든

만남과 이어짐과 헤어짐은 순간순간 눈앞에 놓인 갈래길을 두고 일어난 겁과 망설임의 결과.


'꼭'과 '결코' 따위 단언할 수 있는 여지라곤 있지 않은 흐물흐물한 세상에서, 객관적인 표현으론

'융통성'이 생겨나고 있는 걸까.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단단한 기준점을 잡아두고 싶었던

마음 그자체가 욕심이었고, 애초에 길잡이가 되어줄 만한 변치 않는 무언가, 꼭 쥐고 놓지 말아야할

무언가는 있지도 않았단 걸 조금씩 납득하고 있다. 슬프지만.



p.s. 요샌 'lost'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중. 말 그대로 lost in lost.  시즌 1과 2를 이틀에 주파하고

시즌3를 달리고 있다. 하루하루 아무 생각없이 돌을 굴리듯, 똥을 말듯.
2000년에 나온 영화, 그 즈음 언젠가 대학 근처 '비디오방'에서 봤던 영화다. 새삼 영화 내용을

되짚기도 애매한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본 그 영화는, 그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을 전했던 거다.

굳이 이렇게 글을 남겨 영화를 기억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학에 갓 들어간 그녀가 도쿄로 떠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집과 고향을 떠나 차창 밖 햇살조차

덜컹이는 기차를 타고, 그녀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미래와 터무니없는 공백으로 가득한 가능성으로

뛰놀았을 거다.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떤 삶이 펼쳐질지. 


대학교라는 공간은 그랬다. 이곳저곳에서 선배들의 뜨거운 공연이나 거침없는 움직임이 있었고,

무엇을 배울지 어떻게 시간을 쓸지,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에 맡겨져서 그녀처럼 나 역시도 처음엔

살짝 당황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뜬금없이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아무래도 좋아, 라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래도 좋은 때였고 아무래도 좋은 곳이었다. 그 낯선 공간과 사람들이 낯익어지면서 점점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마치 낮과 밤 사이의 그 퍼런 빛을 사방에 머금는 몽환적인 시간대에 그렇듯

묘하게 들떠 있는 기분은 잊을 수가 없는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뚜렷해지고, 점점 그리워지는

그런 느낌. 뭔가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전혀 알 수 없는 삶으로 나를 흘려보내는 그런.


그녀의 사랑은 그런 순간의 정서를 하나로 모아내는 그런 거였다. 새롭고 낯선 삶으로 흘러온지

한달쯤 지난, 4월의 어느날에나 일어날법한 사랑 이야기. 전혀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어떻게 해야할지

하나도 모르겠는 그런 상황에서, 문득 쏟아내리는 소낙비처럼 한순간의 격동을 따라 마음을 전하고

전해받는 그런 사랑. 앞으로의 진부한 전개 따위가 아니라 그 순간으로 아름다운 사랑.


이전에 봤을 때에 비해 강렬하게 와닿던 것들은 그런 거였다. 한순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삶과 사랑.

더이상 뭘 더할 것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있는 자체로, 살아서 느끼던 그 자체로 아름답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다소간의 회고체, 약간의 '노화 자각' 증상이 보태어진 그시절의 재구성이겠지만,

모든 게 마냥 설레고 들뜨기만 하던 그런 때가 있었고, 지나버렸다는 느낌이랄까.




뭐 하나 딱 떨어지거나 명료하지 않은 채 뿌연 눈세계 속의 풍경처럼 불분명하고 모호한

그녀들의 사랑 이야기가 다시 와닿는 날이다. 같은 사람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 기억들을 잘 합쳐보면 그 사람에 대한 보다 '완전한' 기억과

이미지를 추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성공했을까. 그리고, 뒤늦게 받아든

누군가의 '러브레터'로 톡톡 두들겨진 오래전 첫사랑의 기억은 또다른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혹은 상처로 남을까.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오겡끼데스.


결국 지나간 두 개의 사랑에 안부를 묻는 영화, 너무나도 선명하고 강렬하게 지나버려

2년이 지나도록 지우지 못한 사랑과 그게 사랑이었는지도 모른채 지나버린 사랑에 대해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고 '난 지금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

그건 상대가 감기에 걸리진 않았는지, 봄꽃은 보았는지, 눈이 내리는 날 뭘하며 지내는지

묻는 그런 소소한 말건넴 밑바닥에 깔린 채 쉼없이 속삭이는 본심일 거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지나간 일들은 모두 아름답게 분칠되고 지난 사랑 역시 늘

아름답게만 기억되기 마련이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지나버린 사랑,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사랑,

아름답지만 더이상은 가망없는 사랑-혹은 더이상 가능성이 남지 않아 더욱 아름답기만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에 대해 '오겡끼데스까'를 물어야 할 게 아니라, 지금 옆에 있는 사랑,

전쟁중인 사랑에 '오겡끼데스까'를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나간 사랑에 안부를 묻기란, 진행 중인 사랑에 안부를 묻기보다 쉬운지 모른다.

중부지방에 폭설특보가 내린 날, 모처럼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다시 보고.




이 영화를 뭐라면 좋을까. 그저 줄줄 울다가 나왔다.

사실은 감동을 극대화시키려 애쓰는 영화는 아니다. 드라마틱하게 빵 터뜨리는 구성도 아니고,

이금희의 내레이션이 담담한 다큐멘터리니까 괜히 눈물 빼놓겠다 달려드는 신파나 눈물폭탄도

아닌 거다. 그저, 그저 한 사람의 삶이, 그리고 죽음이, 얼마나 커다랗고 오래남는 파장을 남길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예전에 터키가는 비행기에서 한비야와 합석했을 때, 그녀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한국에도

못살고 힘든 이웃들이 많은데 왜 하필 이라크니 어디니 외국인들을 도우러 가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故 이태석 신부도 같은 상황, 왜 하필 수단이란 이름도 생경한 나라냐고. 한비야처럼

그도 비슷한 대답을 한다. 자기도 잘 모르지만 뭔가가 끌렸다고. 그리고 '가장 낮은 곳의

사람에게 해준 것이 자신에게 해 준 것이라는' 어른의 말씀을 따른 것 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담담하면서도 은근히 잔인한 구석이 있는 영화기도 하다. 1년 8개월동안 떨어진 채

그를 다시 보거나 작별인사도 못한 수단의 아이들에게 그를 제대로 보내줄 기회를 줘야

했다는 거 알지만, 이별을 제대로 맺는 게 중요하다는 거 알지만, 그 아이들의 충격과 슬픔이

그대로 전해지면서 나까지 같이 아파오는 거 같았다. 어른이 되려면 칼로 이마에 평생 남을

자국을 몇 개씩 그으며 눈물을 삼켜야 한다는 그런 부족의 사람들이 모두들 흐느끼는 모습은.


사실은 조금 갑갑하기도 하다. '고작' 사람 한 명에 이렇게 휘저어지는 세상이라니, '고작'

사람 한 명에 이렇게 큰 변화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세상이라니. 그만큼 수단이란 곳이

열악하고 기본조차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곳이란 반증이기도 할 거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그토록 선하고 아름답던 건. 보통 '돈없는 사람=마음이 부자'라거나 '빈곤한 사람=선한 사람'

따위의 손쉬운 고정관념은 거짓이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정말 그래보였다.


신부에게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인사하던 그 아이들의 노래. 신부는 왜 하필 가르쳐도 그렇게

가슴아픈 노래를 남긴 걸까. 앞으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故 이태석 신부님과 수단의 아이들이

떠오를 거 같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예- 예- 예-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멀리 떠나버린 못잊을 임이여

당신이 내곁을 떠나간 뒤에 밤마다 그리는 보고싶은 내사랑아"





영화를 보러 간 건 2010년의 마지막 밤, 무려 세시간여의 영화가 끝나고 나온 시각은 2011년의 첫 밤.

그다지 크지 않은 상영관 안이었지만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은 우리를 포함해서 열명이나 되었을까,

사람에 치이지 않고 유난스럽지 않게 해넘이를 하는 방법으로 꽤나 추천할만한 방법인 듯 싶다.


영화는 굉장히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80년대에 번역된 세계문학전집을

그대로 읽는 식의 말투를 구사한달까, 도무지 일상생활에서 쓰이지 않을 법한 말투와 표현, 종결어미를

쓰는 거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따위의 말을 또박또박 읊는

그들의 말투는 영화에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든다. 이 영화는 대체 어디로 나를 끌고 가려는걸까,

저런 배경에서 배우들의 저런 연기와 대사는 어떤 의미가 숨어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거다.


풍경도 마찬가지, 영화가 국내에서 근 일년여 늦게 개봉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2008년 어간의 서울

풍경일 텐데 왜 이다지도 낯설까. 남산타워의 모습이, 한강너머 트레이드타워의 모습이, 그리고

청계천과 덕수궁 인근의 모습이 내가 알던 그 곳들이 맞나 싶다. 풀칼라의 화면과 모노톤의 화면을

넘나들어서가 아니라, 워낙 날 것의 모습들로 나와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분칠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이되 그때그때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가 짙게 투영된 풍경들이어서 더욱 생경한 거 같다.


구성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정서와 아포리즘이 반복해 등장하는 전반부,

그리고 영화가 시작한지 한시간 반쯤 후에야 불쑥 '아 까먹었네'라는 느낌으로 등장하는 영화제목과

배우, 제작진 소개라니. 그리고 나서 '백야'의 정서와 아포리즘으로 넘어가는 후반부랄까. 게다가

영화 도중 계속해서 하얀 화면에 글씨로 새겨진 몇몇 대사들은, 실제 내러티브와는 살짝 빗겨나면서

더욱 풍부한 해석이나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복잡하고 낯선 장치들, 풍경들을 빌려 영화는 얼핏 세네개의 사랑이야기를 슬쩍 겹치며

흘려낸다. 신하균이 사랑하는 그녀, 신하균을 사랑하는 그녀, 신하균이 새롭게 만난 그녀, 그녀가

품고 있던 이전의 남자..가망없는 사랑 앞에 지쳐버려 죽음만을 생각하던 사내가 문득 새로운 가능성

앞에 가슴뛰고 열중하고, 그렇지만 다시 새처럼 날아가버린 그녀 앞에서 세상은 시간을 알 수 없는

흑백으로 물들고. 베르테르의 비극적 사랑과 그 결말을 백야의 여주인공이 그래도 조금 유예해줄 수

없을까, 했다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건너뛰며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연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홍대여신' 요조가 연기했던 퀵배달부, 그녀의 역할이 결코 작지않았던 건, 그녀가 전하는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좌절하는 소식들을 받아드는 사람들의 제각기 반응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이별을 고하고, 이별 앞에 분노를 터뜨리거나 복수심에 이를 갈고, 그 중의 한두명은 신하균과

같이 사랑에 지쳐버려 죽어버리거나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또 누구는 그렇게 죽어버릴지도 모르고.


계속 화면 한 구석에서 적잖은 존재감을 과시하며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고 있던 남산타워, 그건

사랑으로 채 덮이지 않는 뾰족한 한 '현실' 아니었을까. 학생의 어머니를 향한 신하균의 사랑은 그

남산타워의 첨탑에 걸려 찢기고 말았고, 신하균을 향한 동료교사의 사랑 역시, 신하균의 정유미를 향한

사랑 역시.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었다. 디워 논쟁 때 진중권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이야기하며

불합리하고 비문맥적인 스토리를 비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렇지만 사랑은 대개 그런 거 아닐까.

불합리하고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딱히 명료한 맥락을 잡아내기도 힘든.


성모상 앞에서 배신한 남자의 뺨을 때리는 대신 꼭 안아주고 돌아섰던 어느 여자아이, 그녀가 남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친구와 나누던 말은 신하균에겐 너무 늦은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래된 걸까.

이제 어떡할거야. 낳아야지. 어떡할 거냐고. 길러야지. 아니, 어떡할 거냐고. 살아야지. 살아야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하며 살아야지. 그 여자아이는 깨달은 걸까, 아님 너무 어린 걸까.





핏빛 부서지는 도끼질의 향연

영화는 굉장히 세다. 감독의 전작 '추격자'에서 송곳에 찔릴듯 말듯한 아슬아슬한 장면이 허리춤서

발끝까지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면, '황해'에서는 거침없이 후비고 들어간다. 식칼이던 도끼던,

심지어는 족발 뼈다귀로 사람을 쑤시고 갈기는 장면들은 굉장히 리얼하고 잔혹하다.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핏밫 영상이 아니라 그냥 정말 사람을 때려죽임 저렇게 죽겠구나,

저렇게 피가 쿨럭쿨럭 솟아나와 끈적하게 흐르고는 뚜욱 뚝 떨어지겠구나, 싶은 거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사랑.

한 사람을 노리는 두 무리의 집단이 있고, 각각의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누군가는 아내를 구해오고

복수하려는 양가감정으로, 누구는 자신의 '애인'과 바람난 '형님'에 대한 복수심과 질투심으로, 누구는

새로운 사랑을 위한 '옛사랑'의 종말을 고하려는 의지와 사랑의 힘으로. 연변에서 택시기사를 하던

구남(하정우)이가 사람을 죽이기로 하고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발동되는 톱니바퀴는 두 집단의 움직임

속에서 더욱더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 그를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으로 옭아매고 만다.
 

다른 무리들도 마찬가지, 예상치 못하게 중첩된 살의(殺意) 속에서 난마처럼 얽혀가며 서로를 도륙해

나간다. 그 무참하고 거침없는 살육전에 몰입할 수 있는 건, 그들이 그렇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걸

납득했고 이해했기 때문일 거다. 모든 살인과 폭력의 이면에는 명확한 대상을 향한 분노와 복수심이

자리잡고 있었고, 그 이후에도 점차 들불처럼 번져만 가는 상황을 통제하고 마무리짓기 위한

헛되지만 의미있는 폭력이 이어졌달까. 처절하고 잔인한 도끼질의 향연을 눈크게 뜨고 지켜봐야 했다.


단 한 명 유일하게 돈을 좇아 움직이는 인물, 개장수

다른 메인 캐릭터들은 어쨌거나 '사랑', 혹은 사랑에서 파생된 감정찌꺼기들로 채찍질당하며 칼질하고

도끼질을 한다지만, 단 한명 유일하게 초연한 자세로 사람들을 꼬챙이로 꿰는 사람이 있다. 개장수(김윤석).

그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인물이다. 굉장히 심플하고, 또 굉장히 단호하면서 냉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를 움직이는 동력은 오로지 돈, 그리고 그의 행동은 깔끔한 금전관계의 그것처럼 명료하고 깨끗한

느낌마저 드는 거다. 그런 단순한 사고회로, 행동패턴을 따라간 그의 길 끝에는..


구남은 위로받았을까.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영화가 얼마나한 빛을 보여주랴만은, 영화는 비극이다. 모두가 상처투성이가 되어

사랑을 잃고 우정을 잃고 돈을 잃은 셈이다. 그래도 하나, 조그마한 빛망울은 남는 것 같다면 너무 자의적인

기대일까. 구남(하정우)이 그의 아내를 그려보는 환상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습에서 그런 위로의 단편을

발견한 건 나만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애초 다른 남자를 올라타고 한껏 즐기던 아내의 환상은, 정작 조선족이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다른 환상으로 대체된다. 이제는 이곳에서 의탁한 남자에게 얻어맞고 쫓겨나는 그런 환상(상당부분

현실과 맞닿아있던)으로 괴로워하던 구남이 마지막으로 봤던 건, 세련되게 차려입고 연변의 기차역으로,

자신과 아이에게 돌아온 아내의 모습. 구남은 위로받았을까.





임수정은 뭘해도 이쁘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으로 무대뒤를 감독하느라 정신없을 때도, 감독에게

쿡쿡 가슴께를 내질리며 구박받느라 허리가 접히도록 죄송합니다를 연발할 때도, 샐쭉하니 입술을

내밀며 맘에 들지 않는 남자 흉을 보거나 멍하니 넋놓고 잠들어 있을 때조차, 뭘해도 이쁘다. 특히

고양이 기지개켜듯 허리를 활처럼 젖히고 남자에게 다가가 키스하는 장면은. 아아.


또다시, 임수정은 이쁘다. 첫사랑이었던 남자를 못 잊는다며 십년전의 사진들을 망연히 바라볼 때도,

자신의 예상과 다른 결말을 보게 될까봐 소설의 마지막을 못 보겠다고 이야기할 때도, 남김없이

먹고 나면 허해질까봐 하나는 꼭 남기고 먹는다고 호두과자를 오물거릴 때도, 그리고 첫사랑 앞에서

끝내 돌아서 새로운 시작을 해보겠다며 슬쩍 팔짱을 껴올 때도 이쁘다.


사실 임수정의 첫사랑은 내가 아니고(당연히 그럴 리도 없지만), 그녀가 그 귀여운 입술로 말을

나누고 시선을 마주하는 상대 역시 단한번도 나였던 적이 없으니 팔짱 따위 더더욱 내게 끼어왔을리

없는 거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렇다. 내게도 임수정이 다가올지 모른다고, 어디선가 막막한

첫사랑을 끝내고 조금은 성숙해져서 내게 기회를 줄지 모른다고. 그런 희망을 갖게 되는 거다.


'첫사랑(김종욱)찾기'가 영화의 제목이라지만 정작 영화는 첫사랑 이후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다. 첫사랑을 가슴시린 무엇으로, 유리알같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소

씁쓸할지 모르지만, 첫사랑 이후 수많은 사랑을 거치게 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실 나처럼 작은

위로가 되는 영화 아닐까. 첫사랑을 통해 '시작하고 끝내는 법'을 대략이나마 배워서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는 걸 새삼 일깨워주니까 말이다. 그리고 나 역시, 지난

첫사랑(들)이 헛되고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셈이다.



p.s. 여성팬들의 관심사일 공유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역시 굉장히 귀여웠다. 살짝 융통성없고

뻔한 멍청이같아 보이지만 세심하고 착한 모습, 영화랑 비슷하다. 이미 가뜩이나 뻔한 레파토리

연극으로 수백번 우려먹었지만, 영화는 세심하고 착하게 임수정과 공유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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