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 간 건 2010년의 마지막 밤, 무려 세시간여의 영화가 끝나고 나온 시각은 2011년의 첫 밤.

그다지 크지 않은 상영관 안이었지만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은 우리를 포함해서 열명이나 되었을까,

사람에 치이지 않고 유난스럽지 않게 해넘이를 하는 방법으로 꽤나 추천할만한 방법인 듯 싶다.


영화는 굉장히 묘한 느낌을 자아냈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80년대에 번역된 세계문학전집을

그대로 읽는 식의 말투를 구사한달까, 도무지 일상생활에서 쓰이지 않을 법한 말투와 표현, 종결어미를

쓰는 거다.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따위의 말을 또박또박 읊는

그들의 말투는 영화에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게 만든다. 이 영화는 대체 어디로 나를 끌고 가려는걸까,

저런 배경에서 배우들의 저런 연기와 대사는 어떤 의미가 숨어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거다.


풍경도 마찬가지, 영화가 국내에서 근 일년여 늦게 개봉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2008년 어간의 서울

풍경일 텐데 왜 이다지도 낯설까. 남산타워의 모습이, 한강너머 트레이드타워의 모습이, 그리고

청계천과 덕수궁 인근의 모습이 내가 알던 그 곳들이 맞나 싶다. 풀칼라의 화면과 모노톤의 화면을

넘나들어서가 아니라, 워낙 날 것의 모습들로 나와서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분칠되지 않은 날 것의

모습이되 그때그때 사람들의 마음과 정서가 짙게 투영된 풍경들이어서 더욱 생경한 거 같다.


구성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정서와 아포리즘이 반복해 등장하는 전반부,

그리고 영화가 시작한지 한시간 반쯤 후에야 불쑥 '아 까먹었네'라는 느낌으로 등장하는 영화제목과

배우, 제작진 소개라니. 그리고 나서 '백야'의 정서와 아포리즘으로 넘어가는 후반부랄까. 게다가

영화 도중 계속해서 하얀 화면에 글씨로 새겨진 몇몇 대사들은, 실제 내러티브와는 살짝 빗겨나면서

더욱 풍부한 해석이나 느낌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복잡하고 낯선 장치들, 풍경들을 빌려 영화는 얼핏 세네개의 사랑이야기를 슬쩍 겹치며

흘려낸다. 신하균이 사랑하는 그녀, 신하균을 사랑하는 그녀, 신하균이 새롭게 만난 그녀, 그녀가

품고 있던 이전의 남자..가망없는 사랑 앞에 지쳐버려 죽음만을 생각하던 사내가 문득 새로운 가능성

앞에 가슴뛰고 열중하고, 그렇지만 다시 새처럼 날아가버린 그녀 앞에서 세상은 시간을 알 수 없는

흑백으로 물들고. 베르테르의 비극적 사랑과 그 결말을 백야의 여주인공이 그래도 조금 유예해줄 수

없을까, 했다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서 사랑으로 건너뛰며 우리는 죽을 때까지 연명하고 있는 건 아닐까.

'홍대여신' 요조가 연기했던 퀵배달부, 그녀의 역할이 결코 작지않았던 건, 그녀가 전하는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좌절하는 소식들을 받아드는 사람들의 제각기 반응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고백하고, 이별을 고하고, 이별 앞에 분노를 터뜨리거나 복수심에 이를 갈고, 그 중의 한두명은 신하균과

같이 사랑에 지쳐버려 죽어버리거나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또 누구는 그렇게 죽어버릴지도 모르고.


계속 화면 한 구석에서 적잖은 존재감을 과시하며 날카롭게 하늘을 찌르고 있던 남산타워, 그건

사랑으로 채 덮이지 않는 뾰족한 한 '현실' 아니었을까. 학생의 어머니를 향한 신하균의 사랑은 그

남산타워의 첨탑에 걸려 찢기고 말았고, 신하균을 향한 동료교사의 사랑 역시, 신하균의 정유미를 향한

사랑 역시.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었다. 디워 논쟁 때 진중권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이야기하며

불합리하고 비문맥적인 스토리를 비판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그렇지만 사랑은 대개 그런 거 아닐까.

불합리하고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딱히 명료한 맥락을 잡아내기도 힘든.


성모상 앞에서 배신한 남자의 뺨을 때리는 대신 꼭 안아주고 돌아섰던 어느 여자아이, 그녀가 남산으로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친구와 나누던 말은 신하균에겐 너무 늦은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래된 걸까.

이제 어떡할거야. 낳아야지. 어떡할 거냐고. 길러야지. 아니, 어떡할 거냐고. 살아야지. 살아야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하며 살아야지. 그 여자아이는 깨달은 걸까, 아님 너무 어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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