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티비에서 맥가이버니 육백만달러의 사나이니 하는 방화를 줄창 틀어주던 시절 쯤이었을 거다. 검정 망토에

검정 마스크..라기보다는 검정띠로 눈을 가린 날렵하고 유쾌한 칼잡이가 군인들을 희롱하며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신출귀몰하던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조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그런 히어로물에 빠질 수 없는 이쁘고 당찬

여인도 한 명 있었던 거 같고. 그랬던 기억, 뮤지컬을 보고야 조로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그의 '레전드'가 어떻게

마무리되는지를 완성된 스토리로 만끽할 수 있었다. 인터미션 포함 190분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는 느낌.


조로 김준현, 루이자 조정은, 이네즈 이영미, 라몬 문종원..의 캐스팅으로 보았던 뮤지컬 조로는, 유쾌하면서도 쌉쌀한

느낌이 군데군데 묻어나는, 뭐랄까, 집시풍이라면 딱 좋을 듯한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가볍지 않은 비장함과

무거움을 품고 있으면서 동시에 유머러스함과 여유로움을 품고 있어 다소 위태하고 조마조마했던 게 조로 혹은 디에고의

양면성이라면, 그걸 좀더 부드럽게 파티나 주술 의식같은 분위기로 버무렸던 게 이네즈와 집시들의 역할 아니었을까.

감정이 격해져 숨이 막히거나 좌절에 몸부림치는 캐릭터나 마냥 조증에 걸린 유쾌한 캐릭터가 아니라, 그 두 면을 모두

품으면서도 어느 순간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관조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부여하는.


그런 집시의 도움이 있었기에 조로의 전설이 해피 엔딩으로 마감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아니라면 여느 열혈남아의

영웅들이 그러듯 끓는 피를 못 참고 스스로 폭발해버리거나, '지킬앤하이드'의 그처럼 브레이크 없이 마냥 폭주하며

비극으로 치달았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뮤지컬 조로는 '지킬앤하이드'와 같이 점증하는 긴장감과 폭발하는 절정감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클라이막스에서 확 치고 들어가는 느낌이라거나 스피커가 찢어질 듯 열창하는 배우들의

노래를 기대했다면 조금 아쉬울 수는 있겠지만, 집시의 왕 디에고/조로와 다른 인물들이 보여주는 감정의 진폭과

감정이 오갈 때 느껴지는 그 쫀득한 탄성을 감지하며 본다면 아쉽지는 않을 거 같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무척 스피디하고 군더더기없이 진행된 1부에 비해 2부에는 조금 속도가 느려지면서 늘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속도의 완급 조절이야 문제삼을 게 아니지만, 대사가 너무 많아 임팩트가 떨어진다 싶었고, 좀 장식적이다

싶은 장면들도 있었고. 아무래도 조로와 라몬과의 갈등 관계가 그렇게 산뜻하고 거침없이 내달릴 수는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어서 그랬던 탓이 크기 때문일 거 같긴 하다. 그렇게 본다면, 속도를 조금 늦추고 라몬의 감정과 사고를

헤아리고 그들의 관계가 그토록 파국으로 치달았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건 그 설득력과 성공 여부를

떠나서 당연할 수도 있겠다.


다른 것보다 하나 덧붙이고 싶은 건 무엇보다 공연장, '블루스퀘어'를 줄여서 '블쾌'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무대가 보이지 않아 오디오석이라 불린다는 3층의 자리는 모르겠지만, 1층에 앉아있으면서도 안내요원들이 마치 경비원이나

사나운 감시원인 듯 횡행하는 걸 봐야 했다는 게 꽤나 불쾌했다. 극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신사납게 통로를 뛰어다니는

것도 그렇고, 말투에 묻어있는 틱틱거리는 거칠함도 그렇고. 게다가 막이 오르고 나서도 쉼없이 손님들을 들여보내는

무개념은 또 뭔지. 여러모로 '블루스퀘어'는 불쾌했던 공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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