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포에서였던가, 금발 꼬맹이 하나가 잔뜩 늘어진 고양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무진 애를 쓰는 중이었다.

고양이한테 소리도 질러보고, 슬쩍 꼬리나 귀를 잡아당겨보기도 하고. 그럼에도 철저히 몸뚱이를

내팽개친 채 끄떡없이 눈을 감고 있던 이 녀석. 야윈 목덜미를 감싼 색색의 목걸이가 눈에 닿았다.

방콕 가이드북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은 짜오프라야강 서안, 운하가 촘촘한 그 어디메를

헤매이다 발견한 늠름한 개자식. 더럽고 위험해보이는 이곳에도 피터팬과 푸우는 살풋

이불보처럼 내려앉아서 개자식의 위용에 커튼을 더했다.

실은 이 녀석의 밥을 훔쳐먹는 두 마리 까마귀를 담고 싶었는데, 영악한 녀석들은 카메라

렌즈 움직이는 소리에 멀찍이 도망가고 객쩍은 참새만 남아서 부리질 중이었다. 그나마도

찰칵, 소리에 눈을 뜬 개자식은 더운 나라의 개답잖게 미친 듯이 짖어대며 밥값을 했다.

빡크롱 꽃시장에서, 핏줄이 섞인 듯한 이 두 녀석이 늘어지게 자는 걸 보고 접근했더니 두 녀석

모두 어느 순간 번쩍 눈을 뜨고 말았다. 앨런포의 '검은 고양이'를 떠올릴 만큼 악마처럼 새까맣던

녀석들의 잠을 방해했단 사실이 따끔따끔해지도록, 그렇게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대던 녀석들.

이렇게 서글서글한 눈빛이라면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꽃시장의 아지매들, 아저씨들이 슬쩍

쌀국수 그릇을 걸친 채 한끼를 해결하던 식탁 대용 테이블에 퍼진 채 남국의 고양이다움이란

이런 것임을 늘어지게 과시하던 녀석.

오늘은 동쪽으로 걸어볼까, 싶던 날. 차도와 인도가 슬몃 섞여들어가던 어느 길 위에서 지하세계로

통하는 비밀의 문을 발견했다. 절실한 손과 발 모양으로 그곳을 갈구하던 도마뱀 한 마리, 도망갈까

싶어 조심조심 사진을 찍고 나서 한숨돌리며 슬쩍 발로 밀었더니 슬슬 밀린다. 고인의 명복을.

아침에 먹던 쌀국수와 캔맥주를 제하면 사실 남국의 과일로 배를 채우다시피하던 낮의 시간,

그에 더해 맥주와 재즈 공연 따위로 버무려진 저녁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배가 꾸륵꾸륵꾸르륵.

어딘가 있을 무료 화장실을 찾아 애타게 방황하던 타이밍에도 고양이는 놓칠 수 없었다.

날 그렇게 심문하는 눈초리로 노려보지 말기를. 나 역시도, 너 역시도 왜 사는지는 모르잖아.

우린 이제 요절하기엔 너무 많은 나이. 한 시간에 이백바트짜리 타이 마사지로 몸을 풀기에는

배배 꼬인 구석들이 워낙 많더란 말이다. 근데, 심문을 하려는 거냐 아님 측은해하려는 거냐.

싸판풋 야시장, 라마1세 동상이 서 있는 앞에서 불경하게도 두어 시간 누운 채 노래를 듣고 책을

읽으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었다. 따끈하게 달아오른 대리석 화단조각에서 내 게으른 등짝을

떨어뜨렸던 건, 어디선가 웽웽거리며 나타난 R/C 카, 그리고 그 자동차를 따라 짧은 발을 재게

놀리며 눈을 뗄 줄 모르고 내달리던 강아지 한 마리.

방콕의 물가는 많이 올랐다. 타이 마사지는 삼십분에 백바트, 한시간에 이백바트. 이건 그나마

배낭여행객의 천국, 게으름뱅이들의 천국 카오산의 시세고, 이런 이쁜 고양이가 지키는 다른

동네에선 한시간에 이백육십여바트. 고양이값이라기엔, 저녀석은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다는.

카오산 동쪽으로 걸어볼까 싶던 날이었다. 예기치 않게 마주친 골든 마운틴, 푸 카오 텅의

황금산을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슬쩍 풍경과 섞여있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울룩불룩한

탑의 무늬에 스며든 채 달게 자던 녀석이 부러워 굳이 탑모서리를 밟고 다가가선 카메라를

들이밀었더니, 심술궂은 눈을 번쩍 뜨고 만 녀석의 심통스러움이라니.

남쪽으로 걷던 날이었다. 팟퐁을 지나 쑤언 룸 나이트 바자를 가는 길은 무슨 공원을 하나

끼고 있었더랬다. 공원을 따라 걷는 길에, 불쑥 난 경련하듯 몸을 떨며 잠시 멈춰선 채 저

미지의 생물체가 뭔지 곰곰이 뜯어봐야 했다. 이 거대한 도시 한 가운데 수로를 유유히

헤엄치던 저 녀석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래, 룸피니 공원. 이리저리 물길을 품고 있는 그 공원의 울타리 저쪽으로, 더러는 버스 정류장

뒷편의 깨어진 콘크리트와 벽돌 자재들 사이로 일미터는 쉽게 넘을 거대 도마뱀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비둘기가 심상히 도마뱀의 상륙을 바라보듯, 정류장의 태국인들은 심상히 도마뱀들을

눈으로 좇고 있었던 거다. 거대 도마뱀을 품고 있는 도시, 방콕.

미국식으로라면, Cock-a-doodle-do!의 순간이랄까. 카오산 로드 앞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에 들어맞을 그 사원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오만한 수탉 녀석이 시도 때도 없이 목을 뽑아쥐고

꼬꼬댁을 외치던 타이밍이었다.

남국의 개들은 남국의 고양이들만큼이나 축축 늘어진 채 순한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 앞을 장군처럼 꼿꼿한 걸음걸이로 비장한 히프를 내민 채 사열하는 수탉들의 위엄이라니.

태국에서, 태국의 방콕에서 만났던 개와 고양이와 닭, 그리고 더러는 도마뱀들에 얽힌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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