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드 호수를 천년동안 내려다보고 선 블레드 성은 무려 100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 자리한 옛성이다. 올라가는 길은 이리도 험하다.

 

 

 

이런 휘장, 중세 시대 성벽에 나부낀다거나 기병대 간의 전투가 벌어질 때 뿔피리 소리가 들리면 하늘로 올라가는 그런 깃발이다.

 

 

조금 가빠진 숨을 가누며 성 안에 들어서면 블레드 호수와 그 주변을 둘러싼 호텔이니 레스토랑이니 까페들이 한눈에 내려보인다.

 

 

그리고 옛날에 쓰였을 우물이니 초소니 건물들이 생각보다 훨씬 촘촘하게 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 나름 굉장히 집약적인 공간활용.

 

 

그리고 성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블레드 호수의 한쪽 둔덕. 잔뜩 찌푸린 하늘 아래에서 되려 촉촉한 느낌의 풍경이다.

 

 

 

그리고 호수 한 가운데 있는, 아무래도 롯데월드의 매직아일랜드는 이걸 참조한 게 틀림없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블레드 섬.

 

블레드 호수 주변에 있는 높고 낮은 구릉들은 관광객들이 즐기는 트레킹 코스 여러곳을 품고 있다고 한다.

 

단 이렇게 흐리거나 비가 왔거나, 최근에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중간중간 끊겨있는 경우에는 입산 통제.

 

 

이때만 해도 아직 비가 오지 않아서, 저렇게 꼬물꼬물 조그마한 배가 블레드 섬에 오가는 걸 보며 나도 저걸 타면 되겠구나, 했는데.

 

 

 

 

동전을 넣으면 기념주화로 바꿔준다는 조그마한 프레스기. 궁금하긴 했는데 나 이외엔 여행자도 안 보여서 걍 포기.

 

 

덩굴손이 건물 외벽을 꼼꼼히도 감싸버린 운치있는 옛 건물은 빨간 지붕조차 적당한 느낌으로 퇴락했다.

 

성 내에 있는 '대장간' 공간에서 여전히 쇠를 만지며 이러저런 기념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나 보다. 역시나 용의 형상이 지천이다.

 

성 안에 있는 역사관이나 유물관 같은 데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옛 시절의 용 이미지들.

 

 

이렇게 생긴 사람들이 블레드 성과 호수 주위에서 수렵을 하고 농경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던 때에도 역시 드래곤이 짱.

 

 

성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블레드 섬. 그리고 그 너머 더욱 꾸물거리는 하늘.

 

 

대장간 내부에 들어왔더니 망치와 모루, 그리고 온갖 공예품들과 장식품들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요녀석이 땡겨서 슬쩍 만져보기도 하고 가격도 물어보고 디스카운트를 시도하다가 실패. 깨끗하게 포기. (너무 비쌌다)

 

 

그리고 성 안에 있는 성당. 제단 위에 있는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성모상이 너무 맘에 들어서 슬쩍 사진을 찍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고, 나는 망루 같은 곳에 잠시 기대어 비가 금방 그치지는 않을지 가늠해봤지만, 갈수록 굵어지는 빗발.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망루 주위를 두른 울타리랄까, 비둘기와 하트 문양이 번갈아 교직하는 그런 하얀 울타리.

 

 

블레드 성의 입장료는 8유로, 그런데 티켓에 1.5유로 짜리 쿠폰이 붙어있어서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음식을 사먹을 때

 

할인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제일 쌌던 커피가 3.5유로였던가 하여 결국 돈을 더 쓰게 만드는 마법의 쿠폰.

 

그리고 블레드 성에 가게 되면 꼭 들르라고 강추하고 싶은 와인 저장고! 중세 수도사처럼 생긴 수염 북실북실한 아저씨가 직접

 

오크통에서 와인을 병에 옮겨담아서 저렇게 마개를 하고 라벨을 붙여서 마지막엔 봉인까지 해준다.

 

그런 특별한 와인 말고도 슬로베니아에서 나는 온갖 와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인근 지역에서 '블레드'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들도 꽤나 많이 보였다. 가격대도 다양하고, 아저씨도 굉장히 친절하고 수다스럽게 와인도 소개해주고

 

북한의 핵실험과 일본/중국의 단체여행객이라거나 싸이에 대해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최근엔 일본의 단체여행객들이 깃발을 하나 들고 우르르 왔다갔다 하는데 시즌이고 뭐고 없이 엄청 많이 온다고 하길래,

 

이제 이삼년 후면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올 거라고 지금부터 한국어 한두마디는 연습해두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해줬다.

 

그렇게 아저씨랑 실컷 떠들며 한잔 따라주신 와인을 홀짝대다가, 결국 와인 한병을 사들고 뚜껑을 따달라고 부탁해선

 

더욱 거세진 빗발 속으로 나왔다. 아무래도 비는 그칠 기미가 없고, 와인을 한 병 들었으니 뭐 딱히 걱정할 것도 없고 하여.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버스로 한시간 반, '알프스의 눈동자'라 불리는 블레드 호수에 도착했다.

 

날은 굉장히 흐리고 꿀꿀한 게 금세라도 비나 진눈깨비가 내릴 듯한 날씨였지만 호수의 수면은 거울처럼 매끈하다.

 

 

백조가 유유히 직선을 그어내는 호수 너머 조그마한 섬, 매직 아일랜드같은 느낌으로 버틴 섬을 꽉 채운 성모승천 교회.

 

 

그리고 100여미터의 절벽 위에 서 있는 블레드 성. 무려 천년 동안이나 저 위에서 호수를 굽어보았다고 한다.

 

개구리 모양의 (아마도?) 쓰레기통, 그 넓적한 입매가 장난스럽게 비틀어졌다.

 

 

백조님의 클로즈업 샷. 어찌나 깃털이 발수기능이 좋으신지 머리에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모습이다.

 

 

생각보다 호수는 엄청 커서, 둘레가 대략 6키로미터라고 했던가. 겨울철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여름엔 무지 북적거린다고 한다.

 

 

그리고 덩굴처럼 자라난 아름드리 나무의 잔가지들이 수면 위로 스물스물 그림자를 드린 가운데 새하얗게 우아한 백조가 그리는 궤적.

 

 

아직 날은 춥고 바람도 세차게 불었지만 여지없이 봄이 내딛는 발자욱은 한걸음씩 진군 중이었다. 꽃망울을 여기저기 터뜨리며.

 

 

 

블레드 성에 오를 즈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 그칠 기미없이 점점 세차진다 싶더니 급기야 호수 표면에 셀수없는 구멍을 내버렸다.

 

나무 아래에서 잠시 비를 그어갈까 했지만 아직 다들 잎사귀조차 제대로 틔우지 못한 앙상하고 헐벗은 나무들.

 

 

중간중간 블레드 호수로 모이는 개울들의 목소리는 한층 더 드높아졌다.

 

 

 

블레드 섬과 호수 둘레길과의 직선거리가 가장 가까워지던 즈음, 두마리 조그마한 오리들이 섬을 향하듯 호수면을 미끄러지고.

 

잔설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호숫가에는 차가운 빗물이지만 쉴새없이 내리며 조금씩 겨울의 흔적들을 걷어내고 있었다.

 

 

블레드 호수의 둘레길, 블레드 성에서 산 와인 한병을 들고서 홀딱 비 맞고 흐느적흐느적 걸으며 병나발 부는 맛이란. 캬.

 

 

 

 

원래 블레드 섬까지 들어가는 유람선이 있다고 해서 그것도 타보고 싶었지만, 워낙 비수기에 와버린 데다가 이렇게 비가 내리니

 

들어가는 건 포기해버렸다. 그 안에는 '소원의 종'이 있는데 그 종을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나, 내게 소녀시대가 있으니 괜찮아.

 

 

 

섬 주변에는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곳곳에 있고, 블레드 성같은 오랜 유적도 있는 데다가, 레스토랑이나 까페도

 

뭉탱이 뭉탱이 몰려 있다. 이 건물도 뭔가 까페인 거 같은데, 비수기라 역시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블레드 섬의 360도 뷰를 찍어볼 기세로 호수 둘레길을 걸으며, 와인병을 기울이며 사방에서 찍어댄 결과물들.

 

 

 

그리고 호수를 거의 다 돌았을 무렵,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더이상 촬영은 무리겠다 싶어서 카메라를 집어넣기 직전 마지막으로

 

담은 블레드 성의 옆모습. 얼짱각도에 수렴하는 45도 비껴난 샷이다.

 

다시 블레드에서 류블랴나로 가는 버스 안. 옷이고 신발이고 가방이고 홀딱 젖어서 무척이나 묵직하고 정신없는 와중에 창밖을 보니

 

어느새 빗물이 진눈깨비나 눈발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다. 날이 좀더 푸릇푸릇하고 맑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이렇게 비를 쫄딱

 

맞으며 와인 한병을 병나발 불며 호수 한바퀴를 도는 경험이란 것 역시 나무랄 데 없다.

 

 

 

 

보송보송하고 달달한 바람이 파랗게 쨍한 하늘 저편에서부터 시원~하게 불어오는 계절, 가을.

가을은 그런 계절이어야 하는데 아침부터 비가 오더니 공기가 무겁다. 하늘은 온통 꽉 막히고 무거운

느낌의 회잿빛 구름이 빈틈없이 드리웠고, 때문인지 답답하고 음침한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기분이 영 회복되지를 않아서. 며칠전 어느 대학 캠퍼스에서 찍은 가을 풍경 사진 몇 장.


아, 정말 얼마 되도 않는 이 좋은 계절, 좋은 날에 비를 흩뿌리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다.

갈래갈래 갈린 길, 양쪽으로 갈라지는 길을 표시하는 아스팔트 위 하얀 페인트가 꼭 뿔모양 머리띠를 쓴

와이(y)자 같이 생겼다. 쟤도 저러고 한일전 축구 응원가서 '일본 대지진 축하한다' 따위 헛짓하는 건 아니겠지.

이런 하늘이 보고 싶다구. 날씨 어쩔 거냐능.

riding on '가을'. 가을ing.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까페 가회, 저번달에 '타투이스트'의 전시가 있다해서 겸겸 다녀왔었다. 전시는

생각보다 단촐했는데, 아무래도 전시의 방점이 '타투'보다는 타투이스트의 예술 세계에 맞춰져서 그런듯.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은 여권에 과감하게 그림도 그리고 낙서도 하고, 심지어 저렇게 타투하듯이

재봉틀로 별이니 배니 종이비행기니 박아놓았던 작품.

북촌 한옥마을은 거의 처음 가봤던 거 같다. 안국역에서 내려선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 자칫하면 못 보고

지나칠 뻔한 조그마한 안내판을 용케도 놓치지 않고선, 빗길을 뚫고 가회 갤러리 까페 입성.


입구에서부터 전시중인 타투이스트 전시 관련한 팜플렛과 달력, 온통 그의 '타투' 작품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북촌 한옥마을을 소개하는 A4 한장 크기의 도보자용 지도도 주었는데, 여태 모셔두고만 있다.

왜 이렇게 비가 자주 오는지 걷기엔 참 좋지 않은 날씨 탓이다.

'타투이스트', 아무리 생각해봐도 한국어로 딱히 바꾸기가 애매한 단어다. 문신술사, 문신전문가, 문신예술가.

혹은...뭐가 더 있으려나. 그만큼 한국에서 '타투', 문신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워낙 부정적이고 척박하단

사실을 반증하는 거 같다. 그 와중에도 이렇게 종이 비행기를 주된 테마로 잡고 타투 아트를 계속해온

아티스트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박수쳐줄 일이지 싶다. 자기 몸을 도화지 삼아 연습하지 않았을까.


그가 갖고 있는 타투 장비들. 저 총처럼 생긴 것에 잉크통을 꼽고서 펜처럼 피부 위에다가 그림을 그리는

거다. 우리나라에서 타투가 뭐라더라, 공중위생법으로 제재받고 있다던가. 딱히 제재할 법이 없으니 저

타투 장비가 위생적이지 못하다느니 병을 옮긴다느니 따위의 조잡한 꼬투리를 잡고서 제재하고 있다는데,

한심한 일이다. 양성화해서 다양한 예술적 디자인이나 그래픽이 발전하도록 하고, 위생상의 문제가

정 그렇게 신경쓰인다면 제대로 관리하면 되지 않을까.


타투이스트 한 명의 작품만이 아니라, 다른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이 이루어진 결과물들도 전시해 놓았었다.

재봉틀을 이용해 저런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수놓고는 소녀의 여린 팔목에 뽀빠이처럼 닻 모양이라거나

조폭처럼 '一心' 이런 한자를 수놓는 센스라니.


뭐 벽면 한쪽으로 그런 그림이나 복합 재료로 꾸며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이렇게 분방하게 채색된

구두도 한 켤레 놓여있었고. 아무래도 갤러리 까페라 그런지 차 마시기도 괜찮은 분위기였지만, 찻잔을

들고 벽면을 따라 돌아다니며 이런 전시물들을 구경하기에도 괜찮았던, 편한 분위기의 천장 높은 까페.

와중에 발견한 맘에 쏙 들던 아이템 하나. 뱅 앤 올룹슨의 오디오였는데, 저 앙증맞은 빨강 세모모양

스피커가 한눈에 확 꽂혀버렸다. 게다가 조그마한 체구에서 울려나오는 사운드가 전혀 뒤지지 않고.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라도 꼭 사겠다며..일단 위시리스트에 보관.

에스프레소는 생각보다 많이 연했다. 갈수록 진한 커피를 좋아하게 되는 참이라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에스프레소 위의 크리마가 여느 까페 체인의 그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부드러웠던 듯. 저렇게 활짝 웃고있는

스푼의 애교에도 맘이 녹아내렸다.


들어갈 때 한장씩 나눠줬던 종이는, 전시 중인 타투이스트의 메인 테마인 종이비행기를 접으라며 미리

접는 선이 인쇄된 종이였다. 내친 김에 종이비행기도 접고, 배도 접고 나서는, 영수증 종이로도 조그마한

종이비행기를 마저 만들어버렸다.

그러고 나니 문득 불붙어 버린 종이접기의 마력. 어렸을 때 만들었던 독수리5형제의 비행기를 만들 수

있을까, 스스로 궁금해져버려서 있는 종이 없는 종이 동원해서 결국 만들고야 말았다. 저렇게 입도 쩍쩍

벌어지는 날렵한 모양의 비행기. 양쪽 옆구리에도 비행기 한대씩 합체분리할 수 있고 위에도 한대

합체해놓을 수 있는 궁극의 비행기였었다. 어렸을 때 커다랗고 두꺼운 달력 종이로 참 많이 만들었는데.

그렇게 비행기도 접고 배도 접고, 까페도 온통 둘러보고, 책도 읽고 하는 와중에도 참 줄기차게 내리던 비.

이제 한국은 4계절이 뚜렷한 나라라기보다는 '우기'가 있는 아열대의 나라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서 북촌한옥마을을 좀더 돌아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비는 그칠 생각이 없었다.

이미 에스프레소는 훌짝 다 마셔버린지 오래. 마치 타투처럼 굵고 선명하게 남아버린 크리마의 갈색 띠만

에스프레소 잔 안쪽에 보름달처럼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내 타투를 보고도 사람들이 '참 잘했어요'라거나 '1등급' 따위의 둥근 도장을 찍어놓은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이쁘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조금은 더 밖으로 열려있는 이미지였음

좋았겠다 싶기도 하고, 일단 달과 별을 몸에 새겼으니 다음에는 다른 천체를 새겨서 공간을 넓혀야겠다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실 가회 갤러리까페에서 전시회를 열었던 이 타투이스트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내 꺼만한 게 없지 싶어서 조금은 뿌듯.




모처럼 비가 그친 하루. 여전히 하늘은 마냥 찌푸린 채 여름같잖은 선선한 바람을 불어제끼고 있다지만.

길가에 고인 물웅덩이에 비친 풍경이 참 말갛다. 좌측으로 꺾어들어간 비보호 표지판이 선명해보이는.



@ 강릉.




열린 하늘 틈으로 빗발보다 먼저 뭉게뭉게 비구름이 들이찼다. 갈라진 천장 사이를 억지로 더욱 비틀어

비집고 들어오려는 듯 우왁스런 안개가 시시때때로 만들어져선 용을 쓰다 사라졌고, 그로부터 굵고 길죽한

빗발이 죽죽 그어져내렸다. 그렇게 온통 하얗고 까만 그 공간에서 빗물에 젖은 강철지지대가 녹슨 적빛을

식은땀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순간 수직으로 낙하하는 빗방울과 교직하며 홍대입구행 'INNER CIRCLE LINE'이 도착했다.

애초 '내부순환' 정도의 의미밖에 없었을 저 단어가 언제부터 내게 그야말로 '이너서클', '파워엘리트집단'

따위의 부차적인 의미를 먼저 제시하게 되었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말았다.




강릉의 선선한 날씨를 뒤로 한 채 졸음기 가득한 운전수가 몰던 버스가 도착한 곳은 동서울 터미널.

또다시. 누군가 작정하고 던지는 돌팔매질같은 빗발이 서울 하늘 가득 노이즈처럼 끼어있었다.


이틀간 내 피와 살이 되었던 싱글몰트 위스키와 한라산물 맑은소주와 카스와 하이트 맥주, 그리고

절어버린 담배연기를 씻어낸다는 느낌으로 그 따끔한 대바늘들을 온몸에 맞으며 길건너 강변역에 도착.


그러고 보니 7월의 절반은 참 정신없이 지나버리고 있었다. 운좋게 다녀온 일본 아오모리 여행에 이어

올해만 세번째인 제주도여행, 그리고 강릉 이박삼일까지. 와중에 양념처럼 뿌려진 이야기들은 또 어떻고.


어딘가 창문을 열어놓았던 거다. 장마인데, 밖에는 미친듯이 대바늘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쏘아지는데

맘속이거나 머릿속이거나 하여간 어딘가 단도리를 안 해두었나보다. 맘속이나 머릿속이 침수되고 말았다.


강변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는데 살짝 열린 창문틀에 부딪힌 빗물이 분수처럼 치솟으며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지하철역 벽면 타일들이 울룩불룩 고르지 못하게 붙었단 걸 새삼 발견한 것도 그 때였다.


영혼이 따라오길 기다려야할 타이밍이 있다. 삼엄하고 부산한 빗소리가 귓전을 침식하고, 언제라도 살짝

열린 틈을 타고 온통 물바다를 만들어버릴 듯 덤벼드는 이러한 때라면 더욱. 이미 흠뻑 젖었으니 더더욱.



이십여일 동안 지겹도록, 아니 아무리 짧게 잡아도 저번주 금요일부터 쉼없이 내리고 있으니 근 열흘동안

엄청시리 퍼붓는 빗발 앞에서 자칫 마음도 몸도 눅눅해지기 쉬운 때다. 그렇다고 가만히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또 어디론가 가고, 어딘가로부터 온다. 버스정류장에서 쫄딱 젖은 팔과

카메라를 들어서는 너덜너덜해지고 살이 휘청거리는 앙상한 우산 대신 단단하게 버틴 정류장 천장의

아크릴판과, 그 너머 빗발이 실루엣이 동글동글 뭉개진 건물들을 가리켰다.

아, 3박 4일동안 일본 아오모리현 다녀옵니다. 원전이 폭발한 후쿠시마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조금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올해나 내년 X-ray를 안 찍으면 어케 허용치 기준량 이하에서 선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 삼성역, 마을버스 7번을 기다리다.

모슬포항 앞,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로 배를 가득 채운 '만선'의 꿈이 뭔가 어촌의 정취가 느껴지면서도

여유롭고 뿌듯한 삶을 바라는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 느껴지는 단어라면, 그 뒤로 보이는 단어는 훨씬

강렬하고 직설적이다. '돈방석'이라니. 굉장히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욕망을 드러내는.

내가 꼭 저 만선식당에서 먹었던 고등어회가 정말정말 맛있어서만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뜩이나

신선도가 금방 떨어져서 회치기가 힘들다는 고등어, 왠지 비릴 거 같기도 한 그 생선회를 구운 김에

싸서 깨소금과 참기름으로 비빈 밥과 함께 먹으면. 캬아..제주도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인상에 남는.

바다에 비가 내리는 걸 보노라면 뭔가 망연해진다. 비가 오는 날 회를 먹지 말라던 건, 비싼 회를 조르는

아이들의 입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던 어른들의 궁여지책 같은 거 아니었을까. 배고프다.

제주도답게, 구멍이 송송하고 반들반들한 현무암스러운 돌멩이로 냅킨을 눌러둔 까페에 앉아

책도 들척이고, 노래도 듣고. 그러고 있으면 참 좋았다. 어딘가로부터 어딘가로 걸었던 길 끝에서,

혹은 어딘가로 떠나기 전 길을 앞에 두고, 쿠션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포실포실한 쿠션을 꼬옥

끌어안고는 잠시 몸을 부려두는 거. 그리고 여력이 된다면 다시 책 속이나 멜로디 속으로 떠나는 거.

더구나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씨라면.

모슬포항 주변에도 이런저런 벽화가 그려져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맘에 들었던 건 저 해녀 사진.

몸의 동작이나 모양새 자체가 바다 속이라는 느낌이 가득하도록, 살짝 흐느적거리거나 유영하는 듯하다.

무중력 상태에서 자유롭게 몸을 운신하며 바다 밑 해산물들을 채취하는 그네들의 생활이 꼭 저럴 거 같다.


이렇게 며칠째 비가 내리는 날에는 바다 밖의 사람들도 저렇게 둥둥 유영해다니는 거 같다. 길거리를

부유하는 우산들도 그렇지만, 뭐 하나에 마음이 집중되지 못하는 정신상태 역시.









비오는 날, 잠은 안 오고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 들락날락하는 때는 운전대를 잡고 맘에 드는 씨디

몇 장 쥐고서는 슬쩍 드라이브를 하는 것도 좋은 거다. 타닥타닥, 유리창을 때리는 빗물이 엔간히

풍경을 뭉개버리고 나면 기분도 후련해지고 속도 뚫리는 게 바다를 마주한 만큼이나 시원하다.

나나 이 도시 전체가 바다에 잠겨드는 듯한 분위기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뭉글하게 뭉개진 풍경을 보고 있다가 와이퍼로 문득 빗물을 걷어올렸다. 뽀득하게 닦인

유리창 아래 풍경은 선명한 불빛이 새겨졌고, 그 위로는 물방울에 포섭된 불빛들. 잠시 와이퍼가

움직인 사이 맑아졌던 풍경은 이내 흐려졌다. 눈물이 가득 괴는 느낌처럼.

물방울들은 아예 비닐봉지처럼 불빛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다. 하얀색, 노란색, 빨간색

불빛을 감싸쥔 반투명한 비닐봉지들. 질질 새어나온 불빛은 온통 아스팔트 위에 처덕처덕

내려앉았고 사방에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이던 그 늦은 밤, 누군가가 죽도록 보고 싶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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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 허리를 굽혀 빗물에 씻긴 이백원을 줏었다.


누구는 길에 떨어진 1달러를 줍는 것보다 그냥 가는 게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던데,

하필 버스정류장 앞이라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허리를 굽혀 빗물구덩이 속에 백원짜리 두개를

줏어야 하는지 잠시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지만 모. 손가락들은 반짝거리는 것들로 자연스레.


백원짜리 두개를 집어드는 그 짧은 나의 시간과 백원짜리 두개. 어떤 게 더 무거울까.

챙겨들고 나니 외려 더 생각들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톱카프 궁전 깊숙한 곳,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단정하게 세워진 다소곳한 별궁.

내부의 벽면이 전후좌우, 윗면 모두 복잡하게 아름다운 기하학적 문양으로 가득하다. 창밖너머에서

그득하게 던져지는 햇살을 뚫고 창틀에 기대면 시퍼런 보스포러스 해협이 활짝 펼쳐진다.

날이 쌀쌀해지면 저 실내 스토브에서 불을 피웠던 걸 거다. 아니 근데, 저거 스토브가 맞는 건가.

그리고 밑에는 아마도 세면대..? 아니면 기도시간에 맞추어 발을 씻기 위한 곳인가..; 용도가

아리까리하지만 그림같은 아랍어 글자들과 금박이 단정하고 세련되게 입힌 모양새가 이쁘다.

가까이 들여다본 모자이크 타일의 섬세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양, 한 장의 타일 내에 구비구비

얽혀있는 문양들도 신기하지만, 그 타일들이 다닥다닥 붙으면서 이어지고 엮여지는 느낌이 굉장하다.

빛이 스미는 창틀 바닥면에도 빠짐없이 붙어있는 모자이크 타일들이 정교하다.

길게 누울 수 있는 빨간 의자가 긴 벽면을 따라 미리부터 길게 누워있었고, 돌아나오는 발걸음을

잡는 건 좀처럼 심심할 틈 없는 올록볼록한 철문의 문양들.

별궁에서 바다 쪽으로 면한 울타리 너머로 톡 튀어나온 조그마한 정자, 금빛 지붕이 반짝이는

곳에서 두 사람이 서면 꽉 차는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너머로는

외적을 침입이나 불청객의 접근을 막기 위한 돌담이 완고하게 버티고 섰고.

이렇게 햇살이 부드럽게 흘러넘치는 곳에서 긴 의자에 누워서 뻐끔뻐끔 시샤를 맛보며 나른하게

한나절 보낸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푹신푹신하고 탱탱하게 탄력을 유지하는 듯 해 보이는 쇼파가

사람 손을 많이 타지 않은 듯 새것같은 느낌마저 풍기고 있었다.

둥근 돔 천장에서 무게를 잡고 돔을 지탱하는 무거운 추가 늘어뜨려져 있다. 건축학을 전공한다는

여행 친구로부터 듣기 전까지는 왜 저런 걸 늘어뜨렸을까 궁금했는데, 그림까지 그려주며 설명하던

그 친구의 열의 덕에 이해할 수 있었더랬다.

건물 가운데에 네 발로 버티고 선...이것은 뭘까. 향로? 터키에도 향을 피우는 전통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김새로 보자면 꽤나 그럴듯하게 생긴 향로인 거 같은 거다. 그게 아니라면

여기에 초를 꼽거나 물을 담아두었을까. 그다지 다른 용도로는 상상이 되지 않는, 너무나도

분명히 '나는 향로에요'라고 외치는 듯한 외양.

궁궐 건물들 사이에서 발견한 조금은 외진, 그렇지만 까막 바닥돌들이 하얀 돌들과 어우러져

꽤나 이쁜 그림을 그려내던 길 하나가 눈에 들었다.

돌아나오던 길, 드문드문 비추던 햇살은 깍쟁이처럼 끝내 간만 보이다가 사그라들어 버렸고,

어두침침한 구름 사이에서 톱카프 궁전의 담회색 잿빛 색조가 조금은 무거워졌다.

궁전의 곧고 반듯한 포장도로 위에서 젖은 발을 끌며 걷는 여행객들, 그렇지만 이전에 이 길위를

걸었던 건 터키의 왕후장상, 더러는 말을 타고 지나기도 했으려나.

아무리 해도 이런 둥그렇고 완만한 돔 형태의 지붕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찍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참 어렵다. 그냥 눈으로만 잠깐 바라보고 있어도 눈알이 뱅글뱅글, 덩달아 머릿속도

뱅글뱅글 해서 왠지 갸냘픈 폐병환자처럼 풀썩 기절이라도 할 거 같은 거다.

궁전에서 거의 다 돌아나올 즈음, 마치 테마공원의 으리으리한 지붕처럼 양끝의 첨탑이 뾰족하니

깃발을 휘날리는 성문을 지나쳐 나오곤 돌아보았다.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며 함께 걸어주던 성벽 근처에선 더이상 아무런 살벌한 기운도, 예리한

금속물질들의 철컹이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고양이 새끼들 몇 마리가 지나는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며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는. 저 녀석들은 고양이라기보다는, 마중냥이나 개냥이 정도.

이제 완전히 톱카프 궁전의 구역을 빠져나오는 길, 돌아나오는 길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좀더 선명히 기억을 남길 수 있었던 거 같았다. 눈앞에서 어른대는 파랗고 하얗던

모자이크 타일들이니, 살짝 뿌연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보스포러스 해협의 검푸른 파도라거나,

비를 맞으며 이리저리 거닐던 와중에 발견한 호젓하고 분위기 있던 짧은 골목길이라거나.




성 소피아 성당 앞을 걷다가 마주친 뭔가 희한하게 낯설면서도 낯익은 옷가게가 보였다. '몸빼바지'를

잔뜩 팔고 있던 터키식 '몸빼바지' 전문 매장이래도 손색이 없을 법한 노천 옷가게. 펑퍼짐하게 여유를

둔 바지 아랫단하며, 허리춤이나 발목춤을 유연하게 조여주는 고무줄, 게다가 화려한 색감까지.


형제의 나라라더니 언젠가부터 두 나라 여인네들의 의상 컨셉조차 공유하고 있었다는.ㅋ

옷가게를 지나니 옆에선 석류가 잔뜩이다. 요새 터키 근방에는 석류가 제철인지 온통 석류를 산처럼

쌓아둔 채 즉석에서 주스를 만들어주는 과일가게들이 한 블록에 하나씩 있었던 듯.

석류를 반으로 잘라서 이렇게 압착기에 넣고는 열심히 손잡이를 돌려 석류즙을 짜내는 식인데, 꽤나

시거나 떫은 맛이 날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어서 깜짝 놀랬다. 굉장히 달콤상큼했다는.

하긴 석류가 얼마나 잘 익고 싱싱하던지 거죽의 때깔이나 과즙의 탱탱함부터 남달랐다.

부슬비가 적시고 가서인지 더욱 선명해진 원색깔로 부조화의 조화를 보여주는 테이블과 의자.

다른 간식거리들, 우리네 겨울 간식처럼 밤에 칼집을 넣고 구워내는 군밤이랑 똑같아 보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이니 따끈하고 노릇노릇한 밤을 까먹으면 딱 어울릴 거 같았는데, 잠시나마

지켜보고 있던 사이에 손님이 하나도 오지 않아 조금 아쉬웠다.

예전에 이스탄불을 돌아다닐 때 가끔 밥한끼 대용으로 뜯어먹고 다녔던 빵, 프레첼이랑 비슷하게

생긴 빵인데 소금이 솔솔 뿌려져서 짭짤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한진 모르겠다.

그리고 또다른 친숙한 간식거리를 팔던 두발짜리 포장마차. 샛노랗게 잘익은 옥수수를 소금 뿌려서

구워서 팔던 곳이었는데, 저기도 예전에 내가 맛봤던 것만큼 굉장굉장히 짠 옥수수를 파는 건 아닐까

시험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2004년, 휴가때마다 못을 밟아가며 노가다 현장에서 모았던 돈을 바리바리 싸짊어지고 제대하곤 사흘만에

훌쩍. 터키와 이집트로 향했었다. 왜 하필 그 나라들을 가겠다고 맘먹었었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덕분에 제대하곤 군대에서 공찬 이야기밖에 할 게 없는 '복학생' 껍데기 따위는 한번도 뒤집어쓰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만큼 강렬하고 그만큼 행복했던 터키의 기억, 이번엔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디지털 모드로

6년만에 다시.

아낌없이 사진을 찍어주리라 다짐했건만,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새벽에 나와 아침 9시쯤 공항 도착하니

이곳은 일주일 째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는 거다. 일반적으로 10월경이 터키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던데 아마 세계적 기상이변의 영향 아닐까, 창밖으로 빗발이 계속 빗금을 긋고 있었다.

톱카프 궁전 들어서는 길, 아침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여행객들이 참 많았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사방에서

우산도 팔고 우의도 팔고. 저렇게 파란색 우의를 단체로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개 크루즈를 타고

놀러온 유럽인들이라 했다. 갈라타항구에 커다란 크루즈선이 정박하면 며칠동안 이스탄불 곳곳에 저들이

출몰하며 혼잡함을 더한다고.

티켓을 끊고 들어서는 곳부터 높은 천장, 금칠된 장식들, 묵직한 대리석의 위용.

이 꼬맹이들은 터키 어디선가 수학여행이나 소풍을 온 걸까. 선생님인 듯한 분이 한 군데로 모아놓고

설명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제각기 다른 곳을 보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의 분방함은 어디나 똑같다.

투르크메니스탄의 흙먼지 풀풀 나는 건조한 분위기에 익숙했다가 초록빛 가득한 궁전 안을 둘러보니 눈이

다 싱그러워지는 듯 했다. 더구나 비까지 촉촉하게 내려주는 이스탄불의 아침이다.

궁전 곳곳에 돋을새김으로 그려진 문자들은 아랍어, 아마도 코란의 구절들 아닐까 싶지만 저건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건지 여전히 감도 안 잡힌다.

화려한 문양과 금박들로 뒤덮인 궁전에서 이렇게 담백한 벽면 찾기도 쉽지 않은 지라 오히려 더 눈에 띄던

하얗고 소박한 벽면. 게다가 활짝 열린 창문간에 놓인 조그마한 꽃화분까지. 왠지 조그마한 공주님이라도

살고 있을 거 같은 귀여운 방이 창문 너머에 있을 거 같다.

톱카프 궁전에서 꼭 보아야 할 곳 두 군데를 꼽으라면 왕궁 내 여자들이 거처하던 하렘, 그리고 이곳 보석방.

200캐럿이던가 굉장히 큰 다이아몬드를 위시해서 투르크 왕조가 비장하고 있던 보석류와 호화로운 장신구,

황금칼 같은 것들이 잔뜩 전시되어 있다.

이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색감이 참 좋다. 갓 구운 빵의 노릇노릇하고 먹음직스런 빛깔 같기도 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커피크림 같기도 하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세워진 성곽이 왕궁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여기뿐 아니라 이스탄불 시내의 근처

해안가에는 오래전 세워진 성곽이 무너지거나 유실되지 않고 여전히 굳건하게 남아있는 걸 볼 수 있다.

궁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발견한, 꽤나 불편해보이는 돌의자 발견. 왕이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데, 저렇게 딱딱한 의자에 바로 앉히진 않았겠지 설마. 십분만 앉아있어도 엉덩이가

시리고 욱신거릴 거 같다는.

독특한 형태의 격자가 들어있는 난간 아래로 졸졸졸, 낙수물이 흘러내린다.

네모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창살에 송글송글 맺힌 빗방울들.

좌우대칭이라거나 정연한 질서가 있지 않아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모자이크가 벽면 가득, 아마도

그때의 미감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던 것일까. 딱히 좌우가 대칭되어야 한다거나 똑같은 문양이 연속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던 거 같다. 그런 대칭미나 연속미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는 톱카프

궁전의 모자이크.

궁전 내에는 은근히 앉아 쉴 만한 곳이 숨어 있었다. 애초 사람을 앉히려고 저렇게 툭 튀어나온 모양새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궁전 안을 배회하다 지친 다리를 쉬기에는 안성맞춤. 이미 자리잡고서 느긋이

쉬고 계신 어느 풍채좋은 유러피안 할아버지.



동작대교니 어디니, 한강의 다리들 위에 언젠가부터 요 비스무레하게 생긴 까페들이 볼록하게 튀어나왔더랬다.

언제고 한번 가보겠다고 맘만 굴뚝이다가 어젯밤 불쑥, 동작대교의 '구름까페'로. 동작대교엔 구름까페와

노을까페가 대교 양편에 버티고 섰는데 한 삼십대쯤 차를 주차해놓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덕분에 교통체증의

원인이라고 원성도 높다던데 월요일 밤 열시쯤 가서 그렇겠지만 한가한 분위기.

동작대교 남단에서 강넘어 남산촌을 바라보았다. 건너편 강변의 주홍볼빛과 이편 스테인레스 울타리의 은빛이

묘하게 대치하는 느낌.

구름까페는 3층이던가, 건물 위에는 전망대도 있어서 내키면 음료를 들고 올라와 마셔도 될 거 같다. 비가 온

직후라 그곳의 테이블은 온통 빗물에 씻겼다.

양초칠을 빽뺵하게 하고 비를 맞았으면, 혹은 물을 뿌렸으면 동글동글 이쁜 물방울들이 맺혔을 텐데, 아무래도

이 테이블들은 그렇게 준비된 상태는 아니었는지라. 물방울들이 지들 마음대로 쪼개지고 뭉치고. 그래도

그 올록볼록한 느낌은 생생하다.

동작대교를 넘나드는 차들의 행렬. 빨갛고 노란 불빛이 띠처럼 대교에 감겼다.

그리고 올림픽대로, 여길 88대로라고 부르는지 올림픽대로라고 부르는지에 따라 세대가 구별된다고 했던가.

올림픽대로를 따라 줄지어선 가로수들이 마치 디오라마를 꾸며놓은 나무 모형같다.





@ 강화도


#1. 국립의료원에서 황열병 주사를 어제 맞았다. 치사율이 무려 오백만분의 일이라던가. 의사가 말하길 그렇게

낮은 수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기로 한 거 안 갈거 아니니까 맞으셔야죠, 그랬다. 실은 이달 말께 가기로 했던
 
아프리카 출장이 무기 연기되는 바람에 딱히 오백만분의 일이라는 운세를 시험해볼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십년이나 효과가 지속된다니, 이김에 (꽁짜로) 맞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삼일정도 금주를 하라 했고, 며칠 몸살기운이 있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수 있다 했는데 딱히 모르겠다. 아직

살아있는 거 보면, 오백만분의 일의 확률은 날 비켜간 듯. 그 정도면 높지도 낮지도 않은 확률이었는데.



#2. 그러고 보니 막걸리를 마시면서 포스팅중. 객관적으로야 삼일이 채 안 지났지만, 이미 내 맘속으로는

한 삼백일쯤 지난 듯 하니 패스.



#3. 5월말부터 월, 수, 금, 퇴근 후 일곱시부터 열시까지 교육을 받고 있다. 이제 다음주말에 시험만 보면

끝나는데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나 싶기도 하고, 또 어쨌든 꾸역꾸역 출석하고 중간셤도 나름 잘 보고 하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는 '성실함'이 빛을 발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냥, 회사를 다니면서 목표를 상실한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려면 조금씩 단기 목표를 세워가며 사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어영부영한 맘으로 시작했던 코스인데 끝이 보여서 다행이다. 내일 열두시부터 여섯시까지

여섯시간동안이나 수업 겸 평가를 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깝깝하긴 하지만서도.


#4. 종일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심각하게 찌푸렸던 하늘에서 물방울이 톡톡 돋아나는 것부터 보았던

터라, 내내 기분이 좀 처져 있었다. 게다가 다음주엔 무슨 행사가 그리도 많은지, 손가락은 열 개인데 키보드

자판은 무려 백네개나 되어서 힘겨웠던 하루였던 거다.


주말에 일박이일로 여행이나 갈까 했는데. 아쉽게 되고 말았다.



#5. 아...막걸리 한잔에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오백만분지일의 가능성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건가.

국립의료원에서 황열병 예방주사를 신청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는데, 이미 내 앞으로 사백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명의 사람이 무사히 주사를 맞고 돌아갔던 건지도 모르겠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선혈이 낭자했다. 실감나게 토막나버린 팔다리는 말할 것도 없이, 동강난 머리통과

허리째 베여나가 무슨 햄덩어리같은 인체의 신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중에는 그냥, 영화배우 '레인'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썰려나가는 적들의 몸뚱이를 보면서 정육점의 전동회전칼이 생각났다. 윙~ 소리나는

그것에 큼직한 고기를 갖다대면 살이고 뼈고 거침없이 썰려나가는. 아, 물론 약간의 김칫국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효과와 외마디 비명소리 정도는 추가되어야겠지만.


액션 영화의 스토리란 거야 뭐, 뻔하니까 딱히 기대하는 것도 없었지만 영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딴 생각이었다. 이 영화에 비, 혹은 레인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구가 생겼을까.

그러니까 이 영화가 관객들, 최소한 국내 관객들에게 '소구'하는 요소는 레인이 주연으로 나온다는 점

이외에 뭐가 있었을까 싶었다. 적어도 난 그랬다. 딱히 액션을 다른 장르에 비해 즐기지도 않고, 새빨갛고

끈적한 느낌의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기는 비쥬얼이기만 하면 족한 것도 아니었으니. 무슨 흡혈귀도 아니고.
 

영화만 놓고 보자면 그냥 그랬다. 그다지 여운이 크지 않았던 그야말로 살짝 얹힌 드라마, 뻔하고 간결한

스토리, 만화같은 액션, 과도하다 싶을만큼 잔인하게 선정적으로 묘사된 죽고 죽이는 장면들. 결국 그 비쥬얼에

집중해서 그걸로 승부를 보려한 영화였던 것 같지만, 킬빌에서 보였던 핏빛잔혹한, 그렇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마저 들었던 영상미보다는 많이 모자라 보였다. 훨씬 잔인하고 리얼하게 많이 죽어나갔지만 뭐랄까,

아무리 대량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져도 부담감과 속의 메슥거림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다.


아름답지 않았다.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서일 거다. 숱한 고비를 넘기고 그야말로 혈겁의 전투를 계속해온

레인의 몸에 남은 상흔들이 처절해보이고 그래서 아름답고, 그런 종류의 미감을 끄집어내기보다는 그저

너덜너덜해진 '걸레'처럼 보였던 건. '핏빛 아름다움', 뭐 그런 류의 미감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가 적들과 주고

받는 합들 사이로 번져나가는 붉은 피에서는 그다지 그런 미감이 건드려지지 않았다. 영화가 끝날 즈음 성한곳

하나없이 신체의 전면과 후면 모두 커다란 칼에 뜯긴 자국이 몇개씩 생겨난 레인이 우뚝 선 모습은 징그럽기만

했다.


레인의 연기가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액션 영화에 액션 이외 연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 영화가 추구했던 '미감'의 문제 아닐까 싶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그런 '핏빛 미학'을 추구한 게

아니었던 거다. 그저 난도질하고 죽이고 피가 사방에 적나라하게 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뭐,

그렇다면 기존 헐리우드 영화가 '동양적 소재'에 기대어 그려내려 했던 '핏빛 아름다움'의 정형과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시도가 되는 셈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냥 좀 생각없이 만든 삐급영화였던 게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번에 전지현이 일본식 교복입고 칼휘두르던 '블러드'를 보면서도 느꼈던 거지만, 배우 한 두명이 헐리우드

작품에 나간다고 해서 그들이 '한국' 배우로서의 대표성을 갖는 건지, 헐리우드에서 그들이 '한국' 배우로서

인정받는 건지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들은 이를테면 '배우 올림픽'에 한국이라는 나라 국가대표로 나간 게

아니라, 그냥 헐리우드에서 필요한 동양적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일개 배우인 거다. 괜히 한국 배우의

헐리우드 진출, 이렇게 대서특필하고 주목하고 자랑스러워할 게 아닌 거 같은데. 오히려 헐리우드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소비하고 왜곡해 나가는 '동양', 혹은 '한국'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만 쓰이는 소모품이 되는 건

아닐까. (배우 본인들은 헐리우드 진출의 후광을 업고 돈도 벌고 명예도 얻겠지만.)


이 영화만 해도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동양의 이미지들이 덕지덕지 포장된 거다. 그건 영화가 어색한 이유 중

다른 하나일 수도 있겠다. 한국인 관객들에 익숙한 '동양'의 이미지와 컨텐츠가 왠지 익숙한 듯 낯선 모습으로

헐리우드에서 재구성되고 있으니, 도무지 몰입이 안 되는 거다. ('동양'에 대한 백지 이미지를 가진 미국이나

서구에서야 그냥 그런가부다 하고 흡수되는 이미지겠지만 말이다.) 주로 일본에서 연원하는 국적 불명의

동양적 이미지들, 상당히 강조되어 노출되는 레인의 '동양적 생김새', 가족을 중시한다 여겨지는 '동양적

가치관', 게다가 영화를 보면서 이건 일본관객들이 불쾌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동양적 복수'의

방식, 묶어놓은 사람에 복수를 한다고 칼질을 하는 것까지.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세탁소의 한국인 주인은

차치하고라도, 마이크를 쥔 힘센 '서양' 헐리우드가 동네방네 '동양'은 이런 곳이야 떠벌리는 꼴이다.


물론 한 술밥에 배부르랴, 는 지적이 나오리란 거야 빤히 예상되는 바이지만, 요는 그거다. 한국배우 한두명의

진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한국의 국격이니 위상이 중요하다 생각한다면) 헐리우드에서 한국을, 동양을

다루고 소비하는 방식의 단무지스러움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한국배우들의 헐리우드 진출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리고 그게 이슈가 되어 해당 영화가 쉽게 홍보된다고 해서 이득보는 사람이 누굴까.

결국 레인이 나온다는 사실만 빼고나면 전혀 잘 만들었단 생각이 안 들었던, 딱히 인상적인 것도 없고 울림이

남는 장면도 없던 별볼일 없는 영화였다고 고백하는 셈이다.




프랑스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 - 가랑비.

프랑스 영화는 굴곡이 없고 밋밋한 거 같아.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것 같다가 어느순간 크레딧이 올라간다구.

'비퍼 선셋'이 '비퍼 선라이즈' 이래 9년만에 만난 두 남녀의 자잘한 수다로 일관하다 어느순간 끝났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물론 그 영화가 싫었단 건 아니지만, 그 영화는 그야말로 "프랑스영화"였다는 얘기지.

그런데 사실 기승전결이 뚜렷치 않고 감정선이 뭔가 펑하고 터져나가는 순간이 없다는 거 자체는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하나의 스타일인 거지 뭐. 천둥이 내려꽂히듯 번쩍 하는 깨달음이나

카타르시스의 순간도 있을 수야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조근조근 젖어들 수도 있는 거니까.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광화문

그녀와 나는 월요병에 걸린 상태였어. 주말 내내 자알 놀았던 나는 사무실 책상 앞이 어설프고 어색해서 종일

엄지손가락 열개로 타자를 쳤고, 토요일밤부터 월요일을 의식하던 그녀는 결국 매우매우 녹초가 된 데다가 둘다

저녁을 먹지 않아 굶주린 상태였거든. 잔뜩 꾸물꾸물한 날씨, 왠지 전철이 광화문에 가까워질수록 몸도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어서, 몇마디 말도 나누다 끊겼던 듯 해. 게다가 광화문에 내려 시네큐브로 몇발짝 걷기도

전에 후두둑 후두둑 내깔겨지는 빗방울이라니. 좀, 좋지 않은 날에 좋지 않은 날씨, 영화도 그닥 기대만발이거나

막 보고 싶었던 영화가 아닌, 뭔지도 모르고 '프랑스영화' 보러 가는 길이었으니. 괜한 스케줄이었나 싶었지.


자그마한 우산들, 그리고 다시 비.

따뜻한 커피부터 한잔. 우중충하고 눅눅한 날이어선지 뜨거운 김이 폴폴 오르는 커피가 땡기는 거야. 한모금

마시고 나니 후끈한 커피기운이 마치 뜨거운 다리미처럼 몸을 뽀송뽀송하게, 게다가 날선 와이셔츠처럼 빳빳히
 
다시 풀먹여주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나니 둘다 기분이 매우 좋아졌었지. 다소 흐릿했던 눈매도 어느새 초롱초롱

총기가 반짝거렸고 심지어는 장난끼까지 어른거릴 정도로.
 

다리를 쭉 펼 수 있던 넓은 영화관, 절반도 채 차지 않았던 듬성대는 인구밀도, 게다가 어디선가 아스라히 들리는

빗방울 소리. 그건 마치, 여름날 매미가 벗어둔 허물같은 소리였어. 아니면 엄청시리 크게 틀어둔 엠피쓰리의

주인없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얇고도 빈약한 소리랄까. 적당히 포근하고 또 적당히 감정을 흔드는 그런.


한숨 죽인 빗소리가 쏴아.....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지. 레인. 

언제나 화창하길 바라지 않아. 이 영화 원제가 뭔지 알아? 렛 잇 레인. 비는 내리거나 말거나. 날씨 핑계를 대며
 
우울해할 수야 있지만, 사실 성철스님 말마따나 비는 비요, 사람은 사람이라구. 그보다 덜 가다듬어진 대사도 하나 

있었지 아마. "자기만 있으면 난 언제나 해가 쨍인걸!" 이렇게 오바스런 대사는 상자에 넣고 청테이프로 둘둘

감아 뻥하니 발로 차버리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니 밖에서 그악스레 내려대는 빗방울 따위 심장까지 스며들어오지

않겠다는 자신감 혹은 여유가 생겼달까. 그런 영화였어.




* 영화 '레인'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그치만 영화의 흐름과 느낌에 매우매우 충실하려 애썼던,

비에 대한 이야기..


* 오늘도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이런 식이다.

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



#1.

월급날이어서 불끈, 기운이 솟는다는 건 거짓부렁이다.

조삼모사에 넘어간 원숭이도 아니고, 다만 하루를 조금이라도 업시키기 위해 스스로 주입하는 마취약에 가깝지 않을까.

아침 출근길에 누군가의 미소를 보고, 어젯밤 꿈자리의 달콤한 여운으로, 혹은 신기하게 딱딱 맞춰오는 전철 덕분으로..

그런 소소하지만 효과적인 마취약 중 하나.


#2.

20일은 월급날, 오늘도 쌰발랄라 알제리 쉐라톤 호텔은 칠십명 그룹 부킹을 위해 온갖 것을 다 요구했다.

처음엔 여권 사본과 카드 사본, 그다음엔 잘 보이게 스캔된 여권 사본과 카드 사본 앞뒷면, 그다음엔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예약된 방을 캔슬시켜버리겠다는 협박, 다시 칼라 스캔본으로 정리해서 보내주고 나니 급기야 자필 서약서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글로벌 스탠더드 따위 없는 거다.


그들과의 시차, 8시간은 어쩔 수 없는 야근을 부른다.


#3.

자려는데 빗소리가 톡톡, 하더니 우다다다 진동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밤엔 술 한잔이 제격이지만,

마침 머나먼 콩고에서 오후 6시의 '야근'을 즐기던 친구-형-녀석과 채팅을 신나게 지껄이고는 속을 풀었다.

집에서 회사까지 도성초등학교를 지나고 이마트를 지나고 포스코사거리를 지나는 삼십분의 산책로는,

비오는 날에는 아마 사십분쯤으로 길어질 테니 일찍 자야 하는데. 뭐...차라리 십분 지각하고 말기로 한다.


#4.

여느때보다 이르게 찾아온 더위로, 이번주부터 노타이에 반팔 셔츠 차림이 가능하길래 내일부터 그렇게

입고 다닐 생각이었는데. 내일도 하루종일 비가 온다고 Y가 말해줬다.

비가 내리면 반팔은 썰렁하려나, 슈트차림은 습기먹고 끈적하게 몸에 감기진 않을까, 습기가 잔뜩 포화된

공기 탓에 긴팔은 답답하려나. 이거...쉽지 않은 고민이다.



벚꽃잎이 바람에 실려 후둑후둑 떨어질 때, 그렇게 이는 꽃바람을 보면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

그런 게 봄을 타는 거라면, 난 봄을 심하게 타고 있는 중이었어.


우산조차 벚꽃잎처럼 나빌레라던 비바람이 장악해버린 창밖 풍경을 보면서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달까.

연분홍빛 꽃잎들을 곱게 모두고 있던 꽃받침에 그악스럽게 달려있던 마지막 꽃잎들마저 니녀석이 쓸어가겠구나,

그렇게 후둑후둑 후두둑 여릿하고 아슬아슬한 것들은 모두 날려버리고는,

텁텁하지만 탄탄한 갈빛가죽의 골격만 남기겠구나 싶더라구.


꽃바람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게 봄을 타는 거라며?

2009년 봄은 끝났어. 내년에 다시 올지언정, 2009년 봄은 끝.



'다빈치 코드'의 배경이 되었던 교회이자, '사디즘'이란 단어를 만들어낸 마르키 드 사드, 또 보들레르가 세례를

받은 곳이 바로 이 곳, 생 쉴피스 성당이다. 파리에서 두번째로 큰 성당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나. 그렇지만 그런 식의 사이즈 과시에는 별 관심도 없었고-사실 다녀온 후에야 알게 된 정보들이다-게다가

내가 갔던 작년 9월에는 한창 가림막으로 온통 둘러친 채 공사중이었다.


그래도 앞에 있는 거대한 분수 조각상이 꼭 맘에 들었었다. 묽은 초코렛이 흘러내리는 이층 케이크처럼, 보드라운

물살이 층층이 흘러내리는 그 멋진 광경, 그리고 그 소란스럽지만 유쾌한 분수대를 향해 둥그렇게 자리잡은 온갖

그림쟁이들. 그림으로 밥을 벌어먹는 사람인지, 단순한 취미로 그리는 사람인지 일군의 사람들이 그렇게 분수를

꼬나보며 살짝 인상쓰고 있는 풍경에 나도 녹아들고 싶었다. 그림을 배워보고 싶단 생각이 살풋.

생제르맹 거리에서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갑작스레 비가 내렸다. 파리의 날씨란 게 워낙 햇빛도 귀한

데다가 날씨도 대개 꾸물꾸물하기 마련이어서 사람들은 갑작스런 비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더러는

저렇게 의연하게 비를 맞으며 가던 길을 가고, 더러는 잠시 근처 까페에 앉아 비를 긋기도 하고.

비 내리는 풍경을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김한길의 소설에서 얼핏 본 구절인 듯 한데,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조금씩 더 착해 보인다는 느낌. 수천년동안 인류는 비를 맞아왔지만 여전히도 비를 긋는 장비라곤 얄포름한

비닐 조각 하나에서 크게 진보하지 못했다.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살짝 '어쩔 수 없다'는 체념어린 표정을 지으며 거리로 나선다. 서울에서도, 파리에서도.

부슬부슬 내린 비였는데, 친구와 맥주 한잔 하며 돌아본 거리는 어느새 흠뻑 젖어서 번들번들거릴 정도다.

생제르망 거리면 나름 한국의 대학로에 비길 수 있을까, 번화가라긴 뭣하지만 그렇다고 고즈넉한 교외라거나

외곽지역은 분명히 아닌데...쏴아 내리붓는 빗소리에 묻혀 외려 조용해진 거리.

나서기로 했다. 금방 그칠 비는 아닌 거 같아, 우리도 의연히 저 비맞고 다니는 사람들의 대오에 합류하기로 결정.

가게의 처마 끝에서 똑, 똑, 떨어져내리는 빗방울을 포착하고 싶었는데 왠 의식치 않은 아가씨의 뒷모습만

도촬해 버린 사진이 나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모노프리(MONOPRIX)'에서 장을 보고 숙소에 돌아가기로 했더랬다. 외국의 마트를 돌아보며

한국에서 못 본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당장 쇼핑한 물건들을 담는 바구니부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바퀴달린 바구니에서 길다랗게 손잡이가 당겨져 나오는 형태, 무식하게 큰 카트를 끌 필요도

없고, 무거운 바구니에 절절 맬 필요도 없고.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었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 기형도, '가는 비 온다'

 *                                                  *                                                  *

빗방울이 톡......톡...톡, 톡톡, 번지다가 어느 순간 쏴아하고 쏟아지던 태국의 밤거리.

비가 번져나가면서, 번들거리는 불빛이 온통 사방으로 녹아내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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