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비행기를 타고 내려서 가장 멀게 느껴지는 곳은 어디일까. 좌우로 길쭉하게 생긴 제주도의

모양새를 보자면 제주시에서 한라산을 넘어 바로 접근가능한 서귀포는 차라리 가깝다고 말해야 할 거

같고, 동쪽의 성산이니 섭지코지쪽도 딱히 멀다고 하기는 애매하다. 가장 먼 곳은 아무래도 마라도,

가파도로 향하는 배가 뜨는 모슬포쪽 아닐까. 제주도 서남쪽, 올레길 10코스가 있는 곳이다.

화순에서부터 시작하는 올레길 10코스, 제주도의 변덕스런 날씨 탓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고

드문드문 빗발이 날리는 날씨였지만, 멀찍이 커다란 바윗덩이같은 산방산이 흔들림없이

섰다. 궂은 날씨에도 밭에 나와 일하고 계신 분은 이제 신경쓰지 않을 그 풍경, 산방산을

오른쪽에 끼고 계속 제주도 남서해안길을 따라 걷는 게 10코스의 매력이다.

젖은 날개를 쉬러 잠시 꽃들에 내려앉은 배추흰나비들. 금방이라도 쏴아 비가 쏟아부어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다 보니까,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빗물에 씻겨서 거의 형광색에

가깝도록 강렬하고 선명하게 빛깔을 내뿜는 꽃들 옆에 쪼그리곤 이리저리 구경.


제주도에 출장으로도 오고, 여행으로도 오고, 혼자도 오고, 가족이랑도 오고, 어떻든 올 때마다

주변에서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돌 많고 여자 많고 바람 많다니 조심하라는. 바람 구멍 숭숭난

깜장 현무암 돌담 옆을 우르르 걷는 여자들의 그림이 그럼 제주도의 단적인 이미지일까.

여자들 대신 보이는 건 농사일이나 장사일로 고단하신 어르신들이다. 제주도의 지역소주는

한라산, 그렇지만 맥주는 뭍이나 여기나 똑같다. 카스, 하이트, 맥스..관련 법규정이 워낙

대량생산이 가능한 대기업 위주로, 빡빡하게 되어있어 그렇다던데 지역 맥주를 만드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제주도의 맑은 물로 빚은 맥주라면.

화순 금모래해변가로 바싹 내려가는 길에서부터 본격 올레길 시작. 음..그치만 사실 길에 시작이

어디 있고 끝이 어디 있나. 올레길로 구간구간 끊겨있긴 하지만, 어디서고 올레길에 들어서서

또다시 어디서고 내키는대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랄까. 올레길이 불어온 걷기열풍이니

'자기를 찾는 도보여행'이니 따위의 말의 성찬에 걸맞는 사용법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파도에 씻긴 어두운 암갈색의 바윗덩이 해변. 하나의 바위로 이루어진 듯한 해변가에 셀수없이

들이치고 빠져나갔을 물결무늬가 그대로 새겨진 기암괴석들. 짙은 안개인지 구름이 끼어 정상부

절반쯤이 뚝 잘려나간 산방산이 계속 눈앞이다.


날이 잔뜩 찌푸린 거 치고는 잔잔한 바다다, 싶었는데 어느결에 조그마한 복어 한마리를 뱉었다.

점점이 흰 알맹이가 박힌 검정모래사장 위에 뉘인 하얀 배의 복어새끼, 그 거무스름한 등판에도

점점이 하얀 얼룩이 박혀있었다.

화순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이 끝나고 슬쩍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을 따랐다. 짙고 검은 바위들을

질식시킬 듯이 빼곡히 들어찬 녹색 풀떼기들이 검고 딱딱하고 까칠한 그것들을 바다로, 바다로

밀어내는 것만 같다. 녹색생명과 암석생명간의 전면전이랄까.

문득 언덕길 아래로 한뼘만한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삼면이 까만 바위로 둘러쳐진 채, 자동차 두어대만

대면 꽉 찰 것 같은 공간에 제주도에서는 보기 힘들것 같은 황금빛 모래가 곱게 쌓여있는 비밀의 공간.

아까는 뾰족뾰족, 파도에 벼려진 칼날같은 바윗덩이들 사이로 걷는 게 곧 길이더니, 이번엔

파도에 씻겨서 둥글둥글해진 해변가 올레길이다. 뾰족하고 동글하고, 그걸 모두 파도 핑계로만

돌리는 건 얼마나 비겁한가. 나는 잘하는데 상대가, 다른 사람들이, 세상이 잘 못한다는 말은

대개 핑계이기 마련. 내 단단함과 심지를 먼저 살필 일이다.

'썩은 동앗줄', 누군가의 배를 항구에 비끄러매었을, 혹은 누군가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었을,

아니면 하다못해 그물망이라도 잡아놓고 있었을 그런 나이롱끈이 깡충하게 짧아진 채 해안가

모래톱 위에서 가늘고 야윈 몸을 뒤채고 있었다.

딱딱한 바위판, 두터운 각질처럼 해변가를 덮고 있는 길은 군데군데 여린 곳이 파이고 깨어져

물이 제법 깊은 곳도 있고 얕은 곳도 있고, 곳곳이 웅덩이였다. 테이블처럼 깍아지른 바위판에

파도가 밀려오니 철썩철썩 극적으로 하얗게 부서져내리기도 하고.

용머리 해안으로 접어드는 길. 올레길 표지가 언제 저렇게 쌈빡하게 바뀌었을까. 해안을 따라 걷던

좁은 길이 확 트이며 숲사이로 이어지는 즈음, 흙바닥은 톱밥이 깔린 듯 폭신폭신.

'산방연대'가 뭔가 했다. 산방산에 있는 연대, 그러니까 연기를 피워올리는 봉화대를 말하는 거다.

조선시대에 변경 최일선에 설치한 시설물로, 둘레에는 참호를 파고 대 위에는 각종 병기와 생필품을

간수하는 창고 역할도 했다고 한다. 저렇게 말끔하게 잘 보존이 되어있나 했더니, 최근에 보수한

거라고. 안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올려야 할 곳에는 잡초만 듬성듬성. 조선시대라면 평화로운

때로구나, 하겠지만 이미 봉화대는 퇴역한지 오래, 평화와는 거리가 먼 삼엄한 시절이다.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표류한 곳이 바로 여기란다. 용머리해안.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는 이곳이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간직한 곳이라 하여 중국의 누군가 와서 이곳에 칼을 꼽았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라고 했다. 칼을 꼽자 천지를 진동하는 비명소리가 번졌다던가. 하멜은

그런 전설이 서린 이곳에 처음 당도했을 때 저런 풍경을 봤을 거다. 그러고 보면, 올레길 10코스를

걷는단 건 당시 하멜이 봤던 풍경을 따라 걷는 길은 아닐까. 조난당하고, 근처를 배회하고, 혹은

조선의 병사들에게 압송되거나 민간인들에게 길안내를 받거나. 그렇게 걸었던 길 아닐까.

하멜 동상과 하멜이 타고온 범선이 놓인 한 옆에는 네덜란드문화체험관이 조그맣게 서있었다.

네덜란드의 나막신들을 직접 신어볼 수도 있고, (좀 뜬금없지만) 히딩크 생가나 캐리커쳐도 있고,

풍차니 튤립이니 모양을 딴 장식품들도 전시되어 있고. 풍차의 날개를 돌려 운수를 보라더니

'좋은 사람을 만나니 마음가는대로 행동하라'랜다.

산방산자락을 끼고 계속 가는 길, 올레길이 설마 산방산 위까지 올라가나 했는데 그런 건 아니고

우회하는 길이라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검푸르딩딩한 바다가 잔뜩 찌푸린채 빗발을 날리는

하늘이랑 섞여들어버렸다. 그나마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표지하는 건 길게 늘어진 섬하나.


파도에 씻기고 쓸려서 오랜 옛 지층처럼 켜켜이 쌓인 모습이 되어 있는 해안가 바위들, 녹조류가

이끼처럼 온통 돋아난 모습이 신기하다. 암석의 때로 격하고 때로 부드러운 굴곡이 리드미컬한

가운데 부드러운 녹색 이끼가 빼곡하니 융단처럼 내려앉아 더욱 보드라운 느낌을 던져준다.

검정 모래사장 위에 떠밀려온 미역 비스무레한 해초류 동가리. 쪼글쪼글한 잎새 모양이 변기

청소하는 솔 같기도 하고. 굉장히 탱글탱글하고 두툼하니, 맛있어 보이기도 하고.

해안에 바로 붙어서 걷는 길은 이제 좀 뜸하려나, 해안도로의 아스팔트 위로 올라섰다. 오래지않아

나타난 조그만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들고는, 잠시 길가 벤치에 앉아 쉬는 중에 발견한

누군가의 호루라기. 대형버스들이 줄지어 서있던 이 곳이 마라도 잠수함타는 곳이라던가. 어느

부산한 가이드가 흘리고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멀리 형제섬이 보이는 바닷가. 바닷물이 들고 남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섬의 크기나 갯수가

달라진다는 형제섬을 흘낏거리며 걷는 와중에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려진 사람들의 소원도 만나고,

무슨 십장생도의 영지버섯처럼 자라난 풀떼기들도 만나고, 형제섬 앞으로 달리는 유람선도 만나고.

좀 가다 보니 나타나는 송악산 자락. 송악산은 제주도의 오름(기생화산) 중 남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인데, 제일 먼저 마주한 건 산자락에 뽕뽕 뚫린 구멍들. 일제시대에 여기에

대공포 요새를 만들었다나, 굴을 파고 포들을 숨겨놓았다 한다. 일반인의 접근은 통제된 채

그저 먼 발치에서만 볼 수 있는 뽕뽕뽕 구멍들.

그리고 송악산 중턱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 가만히 네다리로 버티고 선 채 잠을 자는 듯

미동도 않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이좋게 서로 몸을 바싹 붙인 채 풀도 뜯고 꼬리를 휘둘러

파리도 쫓는 (아마도) 부모자식간의 말 두마리도 있었다. 그리고 올레길 10코스 처음부터

우릴 따라 내달려온 저 말모양의 표지판도.


송악산 정상, 성산일출봉만은 못하지만 그만큼 거대하게 푸욱 꺼진 분화구는 한눈에 채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리저리 고개를 휘휘 돌려야 크레이터의 끝에서 끝까지, 그리고 위에서 아래까지 시선으로

거칠게나마 훑어볼 수 있었던 것. 그 풀떼기들과 돌무더기들의 거친 질감과 거리감을 담기엔

카메라가 너무 가까웠다. 가뜩이나 황량한 풍경, 불쑥 코앞에 닥친 거대한 크레이터 때문에 더욱

막막해지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올레길이 만들어진지도 이제 꽤 되었나. 파랑 페인트로 그려진 화살표가 놓인 돌이 쪼개지고 그 틈으로

풀씨가 새어들어가선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 화살표를 뚝 끊어먹었다. 애초 돌부터 쪼개져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화살표를 따른 오솔길 옆으로 말들이 슬몃슬몃 숨어있는 풍경이

희끄무레한 안개에 휘감겨 있었다.


아까까지는 돌무더기가 거칠거칠하거나 모래밭에 발이 푹푹 빠지는 해변가를 걸어서 힘들다 싶더니

어느결에 오르락내리락거리는 호젓한 산길 위로 걷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더구나 저 좁은 길 위로

폭탄처럼 투하되어 있는 말똥들의 향연이라니. 한발 한발, 지뢰를 밟을지도 모른다는 텐션 가득한

순간들. 그 덕에 주변 풍경을 여유롭게 보기보다는 발끝만 바라봐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빗물에

씻긴 풀꽃들이라거나 나무를 칭칭 감은 채 하얗게 변색된 덩굴 따위, 눈에 콕콕 박혔다.

말들이 돌아다니는 걸 막으려 했나보다. 제법 넓은 길이 나타났다 했더니, 어느 틈에 저런 울타리가

길 앞을 가로막았다. 숲까지도 길게 이어져있는 엉성한 울타리, 사람들은 저 옆에 한번 꺽여있는

좁은 창구로 이동해야 한다. 말을 막고 사람은 걸러내는 그런 신기한 울타리.

그렇게 울타리를 넘고 나니 또다른 말들이 나타났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뒷배경이 모두

날아가버린 어느 언덕 위에, 미끄럼틀처럼 고개를 드리우고 풀을 뜯는 어미말 옆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망아지 한마리. 아니 근데, 말에 접근하지

말라면서 어떻게 올레길 표지는 말 옆에 저리도 바싹 묶어둘 수가 있나 말이다.

그리고 또다시 나타난 말들, 그보다 먼저 눈에 띈 건 푹 꺼진 땅에 구축된 콘크리트 구조물.

말들이 느긋하게 늘어져서 풀을 우물거리는 정경은 분명 평화로워야 함에도 왠지 모를

서늘함과 살벌함이 느껴지는 건 저 구조물 때문이었다. 뭔고 하니, 일제시대 이 근처에

만들어진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한 방공포진지였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고자 군사시설을 부랴부랴 확충하던 시기 건축하던 것으로 5기 중

하나는 미처 완공도 못한 상태였다니,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군사시설이 조선이 해방되는 순간을

그대로 멈춘 채 증거하는 셈이다.

흡사 정글 트레킹을 하는 기분. 어느덧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가방과 옷을 흠뻑 적시곤

삶의 무게를 한껏 더해주었고, 물방울을 머금어 축축 처진 잎사귀들이 시야를 가리고 길을

감추기에 이르렀다. 날이 맑았다면 온통 새까맣게 타버리고 목도 금방 말라버리고, 여러모로

그것도 쉽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끈덕진 가랑비도 쉽진 않단 말이다. 온통 희뿌옇게

'밥안개'가 내려앉은 제주도의 시골 풍경, 대충 16킬로미터에 이르는 올레길 10코스가 끝물에

다다른 참이어서, 조금 더 비를 맞으며 걷기로 했다.


예기치 않게 눈앞에 저런 시멘트 구조물이 나타나서 조금 놀랬다. 그리고 조금 지나 나타난 텅빈

주차장과 단발 비행기의 앙상한 얼개까지. 사람 하나 얼씬대지 않는 곳에 이런 것들이라니. 더욱

을씨년스럽고 추적추적 청승맞은 느낌이다. 알고보니 그 '알뜨르 비행장'과 관련된 시설들,

시멘트 구조물은 비행기 격납고, 주차장은 인근 양민학살장과 비행장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시설.

아직도 남아있는 청보리밭이 조금. 청보리축제는 이미 3,4월에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

수확을 하지 않은 밭이 조금 남아있었던 거 같다. 상큼하고 건강한 보릿대가 위로 뻗어올라가면서

초록빛을 쭉쭉 짜올리다가 급기야 가늘고 보드라운 붓털같은 끄트머리에서 팡, 공기중으로

퍼뜨려 버리는 느낌. 바람이 불지 않으면 저 보리밭 위로 연두빛 구름이 곱게 뭉쳐있을 것만

같은데, 바람이 슬슬 일렁이며 초록빛 기운을 온통 흐트려버렸다.

그렇게 10코스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빗발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고, 흙길엔 온통 물구덩이가

패여서 발이 푹푹 빠지는 열악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10코스를 첨부터 끝까지 걷는데

5시간에서 6시간내외로 걸린다고 보면 될 듯.


아마도 청보리가 가득 차 있던 밭이 아니었을까. 양쪽으로 시꺼먼 흙, 굉장히 비옥해 보이는

흙이 잘 다독거려진 채 빗발을 흔적없이 빨아들였다. 그 사이로 난 곧고도 좁은 길 하나가

하모해수욕장, 모슬포항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