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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르포르타주 작가이자 '자성사관'의 주창자인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그중에서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견인한 세력이 누구이며 어떤 관점과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천착한다. 그저 '일본이 나빴다'거나 도조히데키 개새기,라는 두루뭉술한 선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여전히 피가 흐르는 동시대사를 갈무리된 역사로 넘기기 위해서도 구체적이고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단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일본의 정치와 전쟁을 줄곧 주도해온 세력을 육군, 그중에서도 대본영 육군부(참모본부)의 엘리트 군관료집단이라 본다. 군대에 대한 통수권이 국민에 대한 통치권보다 우위를 점한 채 전혀 간섭받거나 통제되지 않던 시대. 육군은 오로지 천황의 재가에 따라 움직이는 황군이라지만, 천황이 허울뿐인 총괄을 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변과 사건들이 풍부하게 등장한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은 육군 엘리트들은 군대조직의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자존 자위를 말하며, 그에 따른 안보선은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내지를 보전하기 위한 중국 침략, 중국을 보전하기 위한 러시아 견제 혹은 동남아 침략, 급기야 미국에 대한 침략으로. 그렇지만 빈약한 정보와 준비되지 않은 병참, 무엇보다 국가총동원체제로 치뤄지는 전쟁에서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엔 정신력과 충성심만으로는 중과부적.

책을 덮으며, 그간 우리는 승자의 기록에 손쉽게 편승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해방이라는 혜택을 입은 이해당사자로서(얼마나 다행인가, 일본이 폭주하여 스스로 자멸했단 건!), 엄밀하고 냉정한 분석을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41년말 진주만폭격으로 시작된 미일전쟁, 그리고 그전의 독이일 삼국동맹과 연합국간 다툼을 두고 단순히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나 제국주의 시대였고, 일본은 뒤늦게 시장쟁탈전쟁에 가담한 국가 중의 하나였을 뿐.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과 자유민주의 원칙들은 기실 타국의 대외정책을 견제하고 자국의 통상이익을 수호하는 국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증거로 뒤늦게 제출되었지 않나.

책의 한계 하나, 저자는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데올로기가 허위적이고 가식적으로 쓰였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그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혹은 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와 서양을 대비시키며, 식민지 지배자와 해방자를 대비시키는 구도는 너무 단순하고 나이브하지 않나. 게다가 동남아 전선에 버려진 수천의 무명용사들이 각국의 해방전쟁에 자의로 가담했음을 근거로 대동아공영권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건 비약이다. 그들의 의도와 맥락에 대한 분석없는 점프의 결과는 보편적인 인류애나 가치관이 아닌, 인종과 지역을 근거로 한 대동아공영권 아이디어 자체가 복권될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두번째 한계를 굳이 더하자면, 천백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월간지에 연재된 원고를 근간으로 쓰여지다보니 압축적이지 못하다. 관련자에 대한 심층취재의 생생함을 더하려 했다 해도 겹치는 내용과 장면이 많아, 예컨대 위안부나 전후배상 문제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부분이 아쉽다. 전시는 평시와는 다른 가치관과 결정을 필요로 하며 또 당대는 지금과 다른 감각으로 위안부 정책 등이 수행되었다, 는 다소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들이 뭉뚱그려졌다. 저자 말대로 이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조사가 선행되어야 그에 따른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가능한 부분일 텐데, 1991년에 씌여진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후 그다지 계승되지 못한 듯 하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봐야겠다.

베를린을 가로지르는 작지 않은 강, 슈프레(Spree) 강변으로는 과거 독일 분단시기의 유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독일이 동서로 나뉘고, 동독 내에 소재하던 수도 베를린 역시 동서로 나뉘었던 그 시절, 체제 경쟁이 심화하면서 동독은 서베를린의 구획을 온통 장벽으로 둘러싸버리기로 한 것. 그게 베를린 장벽의 초기 모습이었다. 물론 '클래시 오브 클랜'같은 게임을 보면 알 수 있듯 장벽이 점차 업그레이드되면서 내구성도 단단해지고 강화되는 것처럼, 이 장벽도 점점 최신의 기술적 진보를 더해 걷잡을 수 없이 삼엄해졌고.

20여 킬로미터에 이르던 그 장벽이 일부 구간, 약 2킬로미터 정도로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이곳 East Side Gallery다. 말그대로 거리의 갤러리, 장벽을 미술관 전시품처럼 보전해 놓은 곳. 


이른 아침에 도착해서 한번 따라가보기로 했는데, 상상보다 충격적이었다. 장벽 자체는 이렇게 얇고 허름했구나 싶어서.


보전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듯, 여기 보이는 그래피티들은 전부다 최근의 것들. 그러니까 '훼손'이랄 수 있겠다.


1961년 이래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 1989년까지 장벽을 넘으려다 숨진 사람들의 공식적인 숫자는 163명이라고 한다. 그 숫자만큼 해당 년도에 표기해 둔 이 작품은, 그렇지만 공식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탈주 시도자와 은폐된 죽음들을 놓치고 있을 거다.


누군가 가져다둔 화환. 아마도 여전히 그 상흔을 생생히 갖고 있는 누군가겠지.


이렇게 장벽에 자그마한 구멍을 뚫어둔 것처럼 묘사해둔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작은 구멍 하나로부터 장벽이 무너지리라는 기대 혹은 다짐.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가 끝나는 지점에 '장벽 박물관(The Wall Museum)'이 있다는 표지가 곳곳의 아스팔트 바닥에.


그렇지만, 동방의 여전한 분단국가에서 온 이가 새삼 감회에 젖기엔 이미 독일 통일은 역사가 되고 말았다. 이제 통일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마구 그려댄 그래피티로 장벽은 훼손되고, 그 코앞 전봇대나 가로등에는 온통 난삽한 광고 뿐이다. 이미 27년전이라니, 믿기지 않지만 이미 시간이 그렇게 지났다.


장벽이 던졌던 문제의식, 혹은 장벽을 남기며 사람들이 남기고 싶었을 자유라느니 정의라느니, 그런 가치들은 이제 얼마나 싱싱하게 남아있을까. 아니면 이들은 이미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젖히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느라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부러운 일이다.


장벽 너머 보이는 슈프레강, 이 작은 강은 대체로 동독의 영역에 속한 채 군사 대치중이었기 때문에 강에 아이가 빠졌을 때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칫 상대편의 총격을 입을까 두려웠기 때문인데, 이후 인도적인 조치를 취할 때에는 협조하도록 원칙을 세웠다고.


자꾸 한반도의 상황과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5차 핵실험이 벌어지고, 남북한 양측의 '최고존엄'이 전쟁을 부추기는 언어를 주고 받는 상황이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진, 동독과 구소련 정치지도자 간의 유착관계를 비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버전으로 치면, 글쎄, 두 명은 누구여야 하려나.


The Wall Museum 내부, 생각보다 전시물도 많고, 장벽이 생긴 이래 철거되기까지의 역사에 대한 시청각 자료가 엄청 많아서 둘러보는 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사진은 처음 장벽을 쌓아올릴 때 쓰였던 허름하고 기초적인 장비들.


그리고 최초의 기초적인 망루. 슈프레강 넘어 보이는 건 서베를린.


다리 중간도 이렇게 엉성하고 속이 빈 벽돌블럭으로 담을 쌓고.


그러다가 1989년, 외부 세력의 개입을 적절히 차단해 가면서, 또 적절히 활용해 가면서 서독과 동독은 결국 장벽을 무너뜨리고 통일을 맞이한다. 박물관 내 영상 자료들을 따라가다보면 그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질 지경이다.


부럽기도 하고, 천운이었다 싶기도 하고, 또 한국과는 굉장히 상황이 달랐다 싶기도 하고. 일단 베를린이 엄청 어색하게 동독 한복판에 박혀 있었던 데다가 동독과 서독간에 전쟁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도 없었으니. 한국은, 그리고 북한은 독일과 같이 분단 체제를 역사로 되돌릴 수 있을까.




 

마카오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앙상한 건물 외벽. 그것도 정면만 덩그마니 남아있는 모습은 기괴하기조차 하다.

 

그렇지만 1835년 화재로 정면을 제한 나머지가 소실된 이래 계속 저렇게 버티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고 할 부분이고,

 

또 그 전면에 저렇게 많은 은유와 상징들이 가득 차 있는 아름다운 조각들이 빽빽하다는 것은 역시 아름답다.

 

이왕이면 하늘도 좀 새파랗고 빛도 따뜻했다면 훨씬 더 좋았을 거 같은데, 그렇지만 이렇게 온갖 색깔의 우산이

 

마카오의 거리를 점령해 버린 모습도 꽤나 재미있는 풍경이다.

 

 대부분이 여행객인지라 이렇게 무리해서 꼬맹이한테 우산을 들리고 무등을 태운 아버지의 뒷모습도 보이고.

 

육포와 아몬드 거리로 이어지는 골목은 온통 고기 냄새와 아몬드 가루 냄새로 가득하다. 빗냄새 덕에 더욱 생생했던 듯.

 

실컷 육포도 맛보고 아몬드쿠키도 맛보고 나서는, 북쪽으로 계속 가서 까몽이스 공원까지 걷기로 했다.

 

정확히 어딘지는 몰라도 대충 골목길을 따라 위로위로 가다보면 나오겠거니 하고선, 재미있어보이는 골목으로 고고싱.

 

스콜처럼 비가 잠시 쏟아질 때는 옆에 있는 아무 상점이나 들어가서 물건들 구경도 하고, 주인이랑 잠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어디서 왔냐길래 한국에서 왔다니까, 너는 왜 다른 한국인들처럼 shy하지 않냐고 놀라던 주인.

 

 

 

 

건축에 어떤 철학이 담겨야 할지, 어떤 역사적인 맥락과 주변과의 조화가 고려되어야 할지에 대한 많은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 흔히 DDP로 줄여부르는 것 같은 그 건물이다. 사실 이 생뚱맞고 이질적인 건물을 설계한 자하 하디드를

 

둘러싼 논쟁보다는, 원칙적으로 제기되는 건축의 철학성, 역사성, 그리고 주변과의 심미적인 조화에 대한 문제가 과연 한국에

 

현대 건축에 얼마나 배어있는지를 곱씹어보는 게 더 재미있는 것 같다. 그런 기준을 충족시키는 건축이라면, '말하는 건축가'

 

고 정기용 건축가씨의 건축 정도려나. 몰개성한 아파트더미들과 스틸과 유리로만 처바르면 미래지향적이라 생각하는 건물들이 천지다.

 

하여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깔고 앉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그래놓고 보호하자는 이 낯짝두꺼운 표지판 보소.

 

 

 

동선이 굉장히 기괴하다고 느꼈는데, 층수와 현재 위치에 대해 계속 헷갈리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위풍당당한 외양에 집중한 건물.

 

음...아무래도 내가 좋아하는 아기자기하다거나 눈높이가 낮은 건물은 아니어서, 전시나 슬쩍슬쩍 보고 빠져야 할 듯 하다.

 

아니면 옆에 전태일교에서 노랑리본을 단 채 21세기의 이땅을 바라보는 그 청년의 곁을 지나쳐 동대문 시장통을 거닐거나.

 

 

 

* 정신나간 울릉도 2박3일 도보여행.

 

 

도동을 둘러보는 건 여태 울릉도의 깊고 짙은 자연 풍광을 벗하며 걸었던 길과는 워낙 다르고, 다소 힘든 길이었다.

 

항구에서 떠나고 들어오는 사람도 많고, 무려 삼사층이나 되는 고층건물들이 수두룩빽빽하게 꽂혀 있었으며,

 

차들도 엄청 많아서 그새 낯설어진 탓이다.

 

그런 사람과 건물과 자동차의 틈새에 이런 울릉 역사문화체험센터가 숨어있기도 하고, 잘 보이진 않지만 눈을 크게 뜨고

 

찾으면 보이는 관광용 지도의 힘을 빌어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약수공원 안의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오를 참이었다.

 

 

슬슬 오르막길의 시동이 걸리고 있었고, 가는 길에 '호박막걸리'를 팔길래 울릉도 특산 아니겠는가 싶어 사려고 보니

 

2리터 들이 댓병뿐, 혼자 이걸 다 마실 수 있으려나 잠시 고민하다가 먹을 만큼만 먹고 버릴 생각으로 거금 만원을 질렀다.

 

 

오르면서 '뻥' 글씨가 크게 씌여진 가게를 보며 막걸리 한모금, 약수공원 앞을 지키는 독도대장군과 여장군을 보며

 

또 한모금, 생각보다 호박 맛이나 향이 진하진 않고 덩달아 알콜도수도 약한 편이지 싶어 물처럼 마시기 시작.

 

도량에 있는 관음보살 석상 위로 떠다니는 건 독도전망대를 향해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다소 과격하고 유치한 발상의 비석도 하나 보고. 독도를 일본이 자기네 땅이라고 한다고 우리도 똑같이 대마도를

 

우리 땅이라고 우기자는 건가. 문제는 그거다. 대마도니 간도니 만주니 이런 소모적인 땅따먹기 논쟁이 우리의

 

'역사강역'-한때 이만큼의 영향권을 가졌다는-을 고치는 수준이라면 좋다, 그치만 근대적 의미에서의 영토분쟁과

 

국토의 확장을 기도하는 차원이니까 문제. 임나 일본부설을 내세우며 조선을 병합한 일본 제국주의와 다를게 뭔지.

 

여하간, 그 앞에 잔디밭도 좋고 너른 돌판도 따끈하길래 잠시 앉아 또 한모금. 어느새 호박막걸리가 저만큼 줄었다.

 

 

약수터가 있어 약수공원이라 했던가, 약수터로 향하는 길목에 있던 잘생긴 돌계단은 그저 한번 눈도장만 찍고.

 

 

그 옆에서 케이블카를 타러 올라왔다. 편도 5분의 왕복 티켓이 어른 7500원.

 

 

 

5분이라고는 하지만 제법 지상과 멀리 떨어진 높이에서 질질 끌려가는 느낌이어서 그렇게 짧게 느껴지진 않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쇠줄이 출렁거리며 살짝 스릴감을 맛보여주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굉장히 아늑했다.

 

불자동차처럼 새빨간 케이블카가 농담을 달리하는 온갖 초록빛을 배경으로 팝업되어 있는 모습.

 

 그리고 전망대. 울릉도의 울룩불룩한 구릉들 사이에서 배어나온 것처럼 형성된 도동리의 '번화가' 풍경이다.

 

 케이블카를 내려서 전망대까지 가려면 조금은 더 걸어야 한다. 나무데크로 잘 꾸며진 길을 따라 조금만.

 

 구릉줄기에서 굴러내리는듯한 깍둑썰기 뭉탱이들이 도동항에서 바다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배 한 척.

 

 

독도전망대의 다른 쪽 전망 포인트. 저기서는 맑은 날엔 독도가 보인다던데, 사람들이 그쪽으로 많이 가는 것 같아

 

일부러 이쪽으로 온 참이었다. 커다란 술병 옆에 차고 덜렁덜렁.

 

 

그러고 나니 제법 너른 전망대 위 공간이 온통 혼자만의 평상이 되어 버렸다. 가방도 던지고, 신발도 벗고,

 

술병과 종이컵도 일단은 바닥에 내려놓고 사면을 두루두루 둘러보기 시작.

 

 

온통 짙푸른 초록으로 성숙해가는 울릉도의 산하. 그 와중에 사방으로 뱅뱅 굽이치는 하얀 길들 중에는

 

어제그제 내가 걸었던 길도 있을 거고, 갈까 하다 말았던 샛길이나 갈랫길도 있을 테고.

 

삼일동안 뒷주머니에 꽂고 다녔던 울릉도 전체지도는 접힌 부분이 닳고 찢어지고 이제 온통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 버렸다.

 

핸드폰을 꺼내 노래를 틀어놓고 맨발로 슬쩍슬쩍 거닐며 피로를 풀어주며 홀짝대다보니 어느새 호박막걸리가 바닥을 보였다.

 

 

한 삼사십분 그러고 있었으려나. 마지막 남은 막걸리를 탈탈 털어넣고 일어섰다. 사방의 시야가 탁 트인 이곳에서

 

굽어본 울릉도 동남쪽의 풍경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음직하다. 노래와, 막걸리의 흥취와 함께. 

 

 

 

다시 내려가는 길. 공식명칭으로는, 티켓에 따르자면, '독도전망삭도시설'인 케이블카는 수시로 운행되어서

 

딱히 사람이 차길 기다리거나 그럴 필요는 없어 좋았다. 어디든 대체로 한산한 편, 몰려다니는 관광객 타이밍만 피하면.

 

 

  

 그리고 인제, 사동항으로 걷기 시작. 바야흐로 울릉도에서 내처 걸었던 2박3일의 일정이 끝나가는 참이다.

 

 도동의 버스정류장을 지나고, 울릉터널을 지나고 흑비둘기 서식지를 지나.

 

 

 두둥, 공사가 한창인 사동항에 도착했다. 이제 일이년만 지나도 이 곳의 풍경은 확 바뀌어 있을 거다.

 

 

다섯시 반에 출항하는 배를 타려 줄을 선 사람들, 갑판으로 나가 바람을 쐴 수도 없는 답답한 배 안으로 일찍부터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으니 근처를 서성거리며 바람을 쐬다가, 울릉도를 좀더 바라보다가 거의 마지막에 탑승 완료.

 

묵호까지 세시간 반, 딱 그만큼 소요되어 주차했던 차를 찾으니 아홉시가 살짝 넘은 시각. 열심히 서울로 내달려 귀환하다.1

 

 

 

 




서울이란 동네는 워낙 순식간에 건물들이 사라지고 새로 올라가는 곳인지라, 당장 오늘 찍었던 사진이 내일이면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는 경우가 왕왕 있단 이야기를 들었었다. 옛 서울역사, 그곳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될 거라며 헐벗은 채 속살과 뼈대를 드러내며 리모델링 중이었던 모습이 오히려 사진전에
 
출품된 사진들보다도 흥미로웠었다. 이 곳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하게 단장해서 옛모습이 많이 지워지겠구나,

하는 비감함마저 들었는데 2009년 그 때 이후, 대충 3년이 꽉 차가는 시점에 다시 가본 서울역사는 또 달랐다.


재단장되어 문을 연 이곳에서 '연합국제보도사진전'이 열리고 있고, 다른 개관 프로젝트 설치미술전이 무료로

전시되고 있단 이야기를 들은 건 사실 두어달 전이었다. 한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이제야 갔더니, 이미 보도사진전은

끝났고 '카운트다운'이란 이름의 개관프로젝트만 내년 2월까지 열려 있었다. 3년동안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애초 1925년 복원 당시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문화재 복원의 의미와 문화 공간의 탄생이라는 의미를 아우르는

시도로 '카운트다운'이란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고.

(before & after #1.) 서울역사 1층 로비 한가운데에서 문득 고개를 들면 보이는 천장. 위의 사진이 2009년의 모습.

그리고 밑의 사진이 복원공사를 마치고는 밝고 산뜻하게 정리된 모습이다. 이전의 모습이 뭔가 공공기관의 느낌이

강하도록 무궁화니 봉황이니 태극마크가 커다랗게 압도했다면 지금 모습은 훨씬 샤방샤방하니 이쁘다.

 

(before & after #2.) 정확한 위치는 아니지만, 저 낡고 삐걱대는 문짝들이나 페인트칠이 잔뜩 금가고 깨어져나간

공간이 이렇게 말끔하게 정돈된 셈이다. 새하얗고 잔잔한 불빛이 말끔하게 칠해진 하얀 벽면과 전시물들에 반사되어,

높은 천장과 더불어 탁 트인 느낌을 준다.


(before & after #3.) 천장에 그려져있던 누렇게 바랜 두터운 벽지같던 무늬와 색감은 전부 사라지고 새하얗고

단정하게 칠해진 하얀 벽만 남았다. 그래도 마냥 하얗지만은 않아서, 기둥마다 검정색 받침으로 포인트를.


1층의 어느 창문들은 이렇게 색색으로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막 뭔가 복잡한 형체가 그려지거나 그러지 않아도,

저렇게 유리마다 다른 색을 끼워놓기만 해도 제법 분위기가 그럴 듯 하구나 싶다. 그리고 기차역이었던 이 공간의

전력을 감안한 듯 기차모양으로 쭉 이어지는 의자, 혹은 의자 모양의 예술작품. 예술작품인 거 같기도 하지만

누군가 앉았다 간 듯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서 슬쩍 엉덩이를 걸쳤더니 선뜻하니 차갑다.

예수와 부처와 공자? 뭔가 세계 종교를 대표하는 듯한 입상들이 서 있었는데 가만히 보면 그들의 대표적인

상징들이 혼란스럽게 뒤바뀌어 있다. 부처 머리위에 가시 면류관이 씌워있다거나, 예수가 수인을 맺고 있다거나.

그리고 작품들 너머로 보이는 말끔하고 단정한, 그야말로 새건물같은 옛 서울역사. 아, 이제 이곳의 이름은 바뀌었다.

이제 이곳은 2012년 3월부터 '문화역서울 284'라고 불리게 된다고 한다. 284는 이곳의 문화재 사적번호.

(before & after #4.) 다 찢어발겨진 벽지, 깨어진 창문, 대충 흰천으로 막아둔 썩은 나무내 풍기던 창틀 풍경이

이렇게 바뀌었다. 귀빈들이 기차를 기다렸다는 오늘날 VIP대기실과 같았던 이 공간, 그때의 우아함과 고급스런

느낌을 살려서 붉고 따뜻한 느낌의 두툼한 커튼과 함께 세련된 온기를 품고 있다.

(before & after #5.) 그리고 같은 공간, 일제강점기 쯤에는 겨울철 추운 날에 저기서 땔감을 때며 방안에 온기를

불어넣지 않았을까. 2009년 국제사진페스티벌 당시 사진작품을 올려두는 멋진 포인트 공간이었던 곳엔 역시

'우리는 모두 여행자'란 LED조명이 반짝이는 또다른 예술작품이 설치되었다.

(before & after #6.)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깨져나간 벽면은 을씨년스럽기가 그지없어서 왠지 공포영화의 한장면으로

손색이 없겠다 싶을 정도였는데, 말끔하게 정리되어선 저렇게 이리저리 뒤집히고 기울어진 숫자 작품들이 커다랗게

전시되어 있었다. 붉은 빛이 감도는 백열등이 아니라 세련되고 도회적인 느낌의 하얀 형광등이란 것도 큰 차이.

(before & after #7.) 계단도 말끔하게 바뀌어 있긴 매한가지. 잔뜩 녹슨 철제 기둥에 드문드문 거미줄도 끼어있어

가뜩이나 차가워 보이는 시멘트계단 바닥이 더욱 차가워보였는데. 한결 나아진 모습이다.
.
(before & after #8.) 시커먼 먼지가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이 흐르는 동안 운명처럼 내려앉았던 그 곳, 조명조차 부실해서

더욱 껌껌해 보였던 그곳이 하얗게 씻겨지고 나니깐 난간에 붙어있는 무늬도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before & after #9.) 화장실도 이렇게 바뀌었다. 배선이 다 드러나고 위의 천장도 뜯겨서 이리저리 흐르는

파이프가 다 보이던 복원공사 중의 서울역사와, 이제 그런 것들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한 말간 얼굴로 시치미를

떼며 사람들을 맞이하는.

(before & after #10.) 큰 변화 중 하나는 창문에 붙어있던 철망이 모두 사라지고 딱딱하고 무거운 색감의 창문틀이


파스텔톤의 가볍고 따뜻한 느낌을 가진 창문틀로 바뀌었다는 것.

(before & after #11.) 2층으로 올라가는 길, 바로 맞닥뜨리는 두개의 방. 이전에는 화장실과 이발실로 쓰였다는

곳이다. 지금은 이 곳이 과거에 어떤 모양이었으며, 복원을 거치며 어떤 부분이 어떻게 살아남고 버려졌는지

그 흔적을 남겨두고 있는 복원전시실이 되었다.

안에 들어가보면 이렇게 이전의 빨간 벽돌 건물의 속살이 그대로 살아있고, 고풍스런 기운이 뚝뚝 떨어지는

유리장이나 목재 전시장 안에서 마치 박물관의 귀한 유물처럼 옛 서울역사의 부분들이 모셔져 있었다.


1층 로비의 천장화 그림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보여주는 옛 사진들도 남아있고, 서울역사 곳곳의 문짝 손잡이도

추려져 있었으며, 심지어 과거 이방이 화장실이었다는 걸 환기시키는 벽면의 파이프 흔적까지 간직했다.

(before & after #12.) 과거에 양식 레스토랑의 대명사였다는 서울역사의 대식당 '그릴', 그 공간은 이제 커다란

다목적홀로 바뀌었다. 휘황한 불빛을 뿜어내는 샹들리에가 줄줄이 늘어져 있던 곳은 그 무겁고 웅장한 느낌을

벗어던지고 밝고 가벼운, 좀더 현대적인 느낌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여전한 인테리어들과 방 자체의

독특한 모양새에서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고풍스러움이 멋지다.

과거에 대식당, 그릴이었다는 것의 흔적도 역시 여전히 남아있다. 1층에서부터 음식들이 올라오는 엘레베이터가

두개, 고스란히 남아있었는데 워낙 깔끔한 상태여서 지금도 그대로 써도 될 거 같다.

그리고 홀 뒤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저 문을 통해 날랐었나 보다. 매표소 유리창처럼 생긴 저 두 개의 구멍은

아마도 홀 서빙을 맡은 사람과 안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창구 같은 거였을라나.

(before & after #13.) 한쪽에 있는 벽난로. 저기에서 뻘건 불빛이 날름날름 땔감을 핥고 있었을 거고, 그 불빛에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 채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지 않았을까. 뭐 여기가 유럽의 어느 연회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그런 식의 상상을 자꾸 부채질하는 이 곳의 건축물. 애초 그렇게 서양을 따르고 상상하며 만들어진 아시아

'근대'의 건축물이기도 하다.

(before & after #14.) 그 안에 있던 라디에이터들. 지금도 설마 작동이 되랴만은, 그 쓰임이 없다고 지워버리지 않고

굳이 저렇게 철망까지 만들어서 그대로 보존해둔 건 그 자체로 이 방의 분위기를 만드는 아이템이지 싶어서일 듯.

아마 앞서 보았던 벽난로는 그냥 장식적인 효과만을 노린 거였거나, 아니면 워낙 방이 큰 지라 열기가 사방에 전달되지

않아서 별도의 난방 장치가 필요했나보다.

 

그리고 전시 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 건, 벽면을 따라 담쟁이 덩굴처럼 타고 오르던 이 수많은 전선들, 아니 이어폰들.

뭐라고 칙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살아있는' 이어폰들이 벽면을 따라 꿈틀대며 유리창을 한가득 덮고 있었다.

창너머에서 조명이 아래로부터 위로 비쳐왔다. 서울역사 건물 외곽에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조명들을 빙

둘러서 야경을 이쁘게 꾸미보려고 하는 거다. 근데 조명이 좀 얼룩덜룩하게 벽면에 그림자를 남겨서 새롭게

복원된 역사 건물 내부처럼 말끔하다는 느낌은 없는 거 같지만, 여하간, 창문을 넘어 천장에 울퉁불퉁 그림자를

물리쳐낸 조명의 힘.

그리고 다른 예술작품들이 역사 건물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제목을 보기 전에 먼저 작품을 한참 노려보며

대체 뭘까 상상을 해보고는, 대충 생각이 멈춘다 싶으면 제목을 보고 다시 자극을 받고 제목과 작품 간의

연관관계를 새롭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그런 감상 패턴.

그리고 이런 무지개색 아크릴인지 유리인지를 활용해서 네모난 방 공간 곳곳에 입체 형상들을 배치해둔 작품도

있었다. 다른 것들보다, 실용성이란 측면에서, 창문 옆에 기대어 선 저 핑크빛의 영롱해 보이는 수납장이 맘에 들었다.

아무거나 손닿는 대로 집어서 저기에 칸칸이 집어넣어 두면 이쁠 거 같은데.


2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건물 밖으로 돌아나오면서 다시 한번 눈여겨 본 역사의 이모저모. 복원공사를 거치고

말끔하게 타일을 바꾸거나 페인트칠을 하고 거울도 말갛게 새로 갈아 꼈다지만, 나무문짝이라거나 묵직해보이는

문손잡이, 그 나무빛깔이 워낙 생생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빈티지스럽다. 그래서 다행이지 싶다.


하늘이 파랗게 밝을 때 들어갔는데, 한바퀴 휘휘 둘러보며 작품들도 보고 서울역사의 바뀐 모습들도 살피고

하다보니 어느새 하늘이 파랗게 어두워졌다. 건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저렇게 버티고 서서, 한때 기차를

타는 손님들이 들고 나던 건물에서 이제는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들고 나는 건물로 쓸모를 바꾸며

수명을 이어가는 건 멋진 일인 거 같다. 이 곳에 켜켜이 쌓였던 오랜 기억들과 시간들 위에 또 다른 추억들이

쌓여 간다는 것, 하릴없이 무너져 내리고 사라지고 지워지지 않는다는 건 참 다행이다.






 


강릉의 선선한 날씨를 뒤로 한 채 졸음기 가득한 운전수가 몰던 버스가 도착한 곳은 동서울 터미널.

또다시. 누군가 작정하고 던지는 돌팔매질같은 빗발이 서울 하늘 가득 노이즈처럼 끼어있었다.


이틀간 내 피와 살이 되었던 싱글몰트 위스키와 한라산물 맑은소주와 카스와 하이트 맥주, 그리고

절어버린 담배연기를 씻어낸다는 느낌으로 그 따끔한 대바늘들을 온몸에 맞으며 길건너 강변역에 도착.


그러고 보니 7월의 절반은 참 정신없이 지나버리고 있었다. 운좋게 다녀온 일본 아오모리 여행에 이어

올해만 세번째인 제주도여행, 그리고 강릉 이박삼일까지. 와중에 양념처럼 뿌려진 이야기들은 또 어떻고.


어딘가 창문을 열어놓았던 거다. 장마인데, 밖에는 미친듯이 대바늘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쏘아지는데

맘속이거나 머릿속이거나 하여간 어딘가 단도리를 안 해두었나보다. 맘속이나 머릿속이 침수되고 말았다.


강변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는데 살짝 열린 창문틀에 부딪힌 빗물이 분수처럼 치솟으며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지하철역 벽면 타일들이 울룩불룩 고르지 못하게 붙었단 걸 새삼 발견한 것도 그 때였다.


영혼이 따라오길 기다려야할 타이밍이 있다. 삼엄하고 부산한 빗소리가 귓전을 침식하고, 언제라도 살짝

열린 틈을 타고 온통 물바다를 만들어버릴 듯 덤벼드는 이러한 때라면 더욱. 이미 흠뻑 젖었으니 더더욱.



1984 (반양장) - 10점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문학동네


솔직히 그런 책들이 있다. 제목을 워낙 많이 들었거나 그 핵심 아이디어라며 쉽사리 인용되는 한두가지 개념에

워낙 익숙해진 탓에 미처 읽기도 전에 이미 읽었다고 착각하고 마는 책. 예컨대 '빅브라더'같은 단어가 그런

착각을 일으킨다. 하루키의 1Q84를 두고 '아이큐84(IQ84)'라며 이상하게 읽어대는 어떤 문학평론가를 조소하다가,

그러고 보니 나 역시도 하루키가 1Q84라며 비튼 제목의 원전 격이랄 조지 오웰의 '1984'를 여태 읽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정말정말 굉장히 멋진 책이다. 하루키를 무지 좋아라 하지만, 그의 1Q84는 조지 오웰의 1984과 매우 '다르다.'

그리고 아마 2984년쯤에도 살아남아 찬사를 받을 작품은 조지 오웰의 1984일 거라는 데 걸겠다. 물론 두 작품은

제목 빼고는 별로 주제도, 내용도 겹치지 않으니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래도 굳이 1Q84를

제목으로 내건 하루키가 1984의 문학적 성취를 의식하고 호승심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뭐랄까, 두 번째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불현듯 마오쩌둥의 '영구혁명론'이 떠올랐다. 사회주의가 성취되기

위해서는 한번의 혁명, 한번의 전복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애써 이뤄낸 성취가 무위로 돌아가거나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모든 분야에 걸쳐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그 '영구혁명론'의 대강인데,

이 책에서 그려지는 1984년의 세상은 그런 영구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세상인 거다. 다만 그 혁명은 위로부터의

혁명, 그러니까 기득권층, 더 적나라하게는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라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겠다.


1984년의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 '빅브라더'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다, 혹은 이해했다고 믿는다. 권력을 쥔

상층계급에 대항해서 자유와 평등, 정의 따위의 수식을 내건 중간계급이 하층계급을 끌어들여 그들을 전복시킨다.

그리고 중간계급은 상층계급으로 자리이동하고 다시 새로운 중간계급이 생성되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한다는

식의, 커다란 순환을 무한반복한다는 것이다. 이제 권력은 그 역사의 흐름을 이해했으니 그 지식을 활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영구히 보유하려 한다. 중간계급이 성장하기 위해서 집적되어야 하는 부를 족족 소진시키고,

중간계급을 각성시키기 위한 지식을 황폐화시키겠다는 황당하지만 살벌한 전략. 그게 지배계급의, 지배계급을

위한, 지배계급에 의한 '영구혁명'의 목표다.


듣기엔 우습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온 인류를 먹여살리고 노동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만큼 경이로운 수준에

오른 생산력은 주변국과의 쉼없는 전쟁을 위한 총과 대포를 위해 소모된다. 현재의 세상을 비교하고 평가하기

위한 나침반이자 전거로서 기능해야 할 과거의 역사, 과거의 지식은 매시간 새롭게 씌여진다. 늘 전시체제 하에서

동원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전쟁이 없던 시기를 기억하지 못하며, 배급되는 신발과 면도날의 질과 양이

불과 일년 전에 비해서도 양호해졌는지를 따지지 못한다. 그들은 전쟁의 광기에 불현듯 휩싸이면 빅브라더를

위해 만세를 부르며, 집안 화장실마저 감시하는 사상경찰 하에서 억지웃음을 지을 뿐이다.


권력이 자원을 무익하고 비생산적인 쪽으로 소모해버리고 적극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건 2010년 지구에서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풍경이다. 한국만 해도, 온 국민을 먹여살리고 북녁의 주민들까지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풍요한 자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굳이 희소하게 만들어 버린다. 전쟁무기를

구매하고 국외와의 불공정한 경쟁에 노출시키며 4대강 같은 무익한 사업에 쏟아부으며 '소모'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옹호하기 위한 논리와 이데올로기를 만들기에도 게으르지 않다. 권력과 언론간 '반복과 차용'의

근친교배를 통해 사실로 굳어져버리고 마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들. 천안함 사태가 그렇고, G20가 그렇고,

사대강 사업이 그렇고, FTA옹호론이 그렇다. 그 와중에 국내이슈를 덮어버리는 애국 마케팅도 절묘하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은, 그렇지만 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괜히 그를 '디스토피아'의 무시무시한 재현자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거다. 이들, '빅브라더'를 전면에 내세운 채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춰버리려는 이들은 사회를

통제하고 구조를 고착화시키려 안간힘을 쓸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의 사고 자체를 개조하려 든다. 기계에서

자동으로 배열된 몇가지 단어로 짜맞춰진 시와 노래만을 유포하고, '섹스를 더럽게 변질시켜' 억압된 성욕을

전투적인 증오심과 지도자 숭배로 전환시키는 거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둔화시키고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그 자체를 새롭게 정리한다. 어휘를 계속 줄이고 줄여서 생각의 폭을 좁히고, 결국에는 생각할

필요도 없는 기계인간을 만드는 것이 빅브라더가 생각하는 혁명의 완수.


빅브라더의 생각대로 될까.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다양한 동사와 형용사들, 깊은 사고와 반성을 가능케 하는

관념어들이 없어지면, 정말 인간이 변화할까. 그리고 신발깔창처럼 제작되는 노래와 시들이 재래의 예술을

대체하면 인간의 문화는 황폐해지고 말까. 성욕을 억압하면 인간들이 까칠해져버려서 전투적으로 변하고

전시상태의 비인간성을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 전통적 가정을 하나의 상호 감시단위로 변화시킬 정도의

강력한 감시와 통제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수락할 수 밖에 없게 될까.


모르겠지만, 조지 오웰은 그렇다, 그렇다, 그렇다고 말한다. 이미 그의 주인공 윈스턴조차 찢겨진 시체의 팔목을

무심히 발로 차내어 버릴만큼 황폐해졌고,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을 곡괭이로 살해하고 말겠다 다짐할 만큼 살벌하다.

결국 지독한 고문과 자기 부정을 거쳐 윈스턴이 빅브라더를 사랑한다 고백하는 최후의 순간에 이르면, 오웰의

예측은 옳은 것이었다고 동의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마는 거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런 상황에까지 몰리면

인간은 멸종하고 말겠구나, 역사는 멈추고 말겠구나, 기껍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거다.


그게 단순히 조지 오웰의 '사고 실험'이었으면 좋겠다. 아직 어떤 권력도 빅브라더만큼 철저하게 국민들을

통제한 바 없으며, 언어를 조직적으로 퇴화시키는 건 고사하고 문화와 사생활과 사고방식을 규율하고 억압한

적은 없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불길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신체에 대한 구속력-생체권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고, 국가와 자본주의의 동학 내에서 대중문화는 스스로 천박해진지 오래다. 전신을

스캐닝하고 개인정보와 생체정보를 집적하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란 너무 쉬워졌다. 민주주의의 이름을

팔아 하향평준화를 강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자기 성찰과 반성적 사고를 단련하기 위한 시간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이슈들에 선점당한다고 느낀다면, 너무 시니컬한 건가.


다행히 아직은 그렇게까지 위태롭지 않다고 해도, 조지 오웰의 이 암울하고 염세적인 이야기는 여전히 값지다.

자연스런 흥망성쇠의 역사 흐름을 멈춘 채 현재의 지위와 특권을 영원히 장악하겠다는 그들 권력자들의 욕심은,

조지 오웰이 그 결과로 그려낸 세상은 낯설지언정, 그 욕심 자체는 지독히도 진부하고 익숙한 거다. 그들은

언제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라며, 그들을 위해 유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기를 강권한다. 너무도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4대강은 운하가 아니고, FTA는 모두에게 유리하며, 아랍인은 테러리스트이고, 미국은 영원한

우방이자 세계경찰이고, 그리고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란 이야기.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다. 2+2=5, 라디오헤드의 이노래가 1984의 이 대목에서 비롯한 건 아닐까.

이제 끔찍해질 거야, 도망칠 곳은 없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쳐도 이제 너무 늦었어.


Are you such a dreamer
To put the world to rights?
I stay home forever
Where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 lay down the tracks
Sandbag and hide
January has april′s showers
And two and two always makes up five

Its the devil′s way now
There is no way out

You can SCREAM IT, you can shout
It is too late now

Because...
You′re not there!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payin′ attention
You have not bee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paying attention
WHEN I SAY SOON oohh

I try to sing along
But I get it all wrong
′Cause I’m not
′Cause I’m not

I swat ′em like flies but like flies the buggers keep coming back NOT
But I’m not

All hail to the thief
All hail to the thief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But I′m not

Don′t question my authority or put me in the box
′Cause I′m not
′Cause I′m not

Oh go and tell the king that the sky is falling in

When it′s not
But it′s not
But it′s not
Maybe not
Maybe not

거꾸로 보는 고대사 - 10점
박노자 지음/한겨레출판
 
"현재 북한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군사적 압박을 가하자는 전쟁 불사론은 바로 이런 네오콘식 선제 정밀 타격과 전쟁 수행을 통해 무력으로 김정일 정권을 붕괴시키자는 주장의 판박이다.
일부 국내 호전론자들은 만일 미군이 결심만 하면 북한 수복은 물론이고 만주까지 치고 올라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펼친다."
- 시사인 11.29일자, 한반도 전쟁 시뮬레이션 해봤더니…하루만에 240만명 사상 중.


정말 황당한 주장이다. 당장 황당한 건 '잃어버린 고토'라는 단어에서 배어나오는 재미없고

칙칙한 열혈 우국지사틱한 마인드고, 또 그들이 잃어버린 고토라는 '우리땅' 만주에서

비롯하는 낯설고 생경한 어감이다. 수백만명이 죽고 다치는 전쟁을 무슨 땅따먹기놀이처럼

생각하는 무식한 야만성이나 미군이 미국 국익의 고려없이 무조건 우리편이라는 유아적

사고에 멈춰있다는 따위, 지엽적인 문제는 넘어가기로 하자.


대체 어떤 또라이들이 저런 주장을 하나 싶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발딛고 선 논리랄까,

마인드의 문제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유롭지 못하단 게 문제다. 사실 이미 드라마니

영화니 잡서들을 통해 가공의 역사와 특정한 시각이 알게 모르게 친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다. 주몽이니 근초고왕이니,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들이나 조선의 세종을

다룬 영화('신기전'이었던가), 심지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따위 쓰레기까지, 조금만

더 진지해지면 저런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또라이와 같아질 정도로 접근해왔다.


그들은 단순하게도 오늘날 나라와 나라 사이를 구획하는 경계선이 단단하듯 수천년전에도

똑같이 명확한 국경선이 그어졌을 거라고 상상한다. 아니, 그렇지 않다는 거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정립했다는 시기에조차 각 고대국가는 도읍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정 권역의 개념이었지 국가간 경계선을 그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확정된

근대적 '영토'를 갖지는 않았다. 예컨대 고조선이 만주 일정지역에 영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신채호가 말한 것처럼 '정복 왕조'로서 파악되거나 단군을 '정복자'로

묘사할 만한 정도의 것이 아니라 일정 지역에서 공물을 거두는 정도였다는 거다.


게다가 어느 한때, 잠시동안 '만주'를 영향력 하에 두었다고 해서 '원래 우리민족,

우리나라 땅'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그 이전이후의 다른 점유자들은 강탈자인 건가.

팔레스타인 땅을 두고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벌이는 강탈과 똑같은 논리인 셈이다.

물론 '만주'에 대한 고토회복의 열망은 좀더 근대의 기록에 근거한다고 반박할 거다.

백두산 정계비에 쓰인 조선-청 간의 영토획정 결과 간도지역이 조선에 속한다는 건데,

글쎄, 청과 조선이 모두 망했고 백년이 넘은 지금 상황에서 그걸 주장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한국이 독도를 실효적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중국이 지배하고 있는 땅이다.


두번째로, 오늘날 그어진 국경선 내에 꾸깃꾸깃 살고 있는 사람들이 수천년 전부터 동일한

민족을 이룬 채 살아왔다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민들은 서로를

한민족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거라는 착각인데, 덕분에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룬

신라의 김유신과 김춘추는 거의 '민족반역자' 수준의 비난을 받아온 거다. '조선일천년래

제일사건'이라며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애통해 했던 신채호의 입장은 이후 남북한을

막론하고 이 사건을 보는 기본적인 시각이나 멘탈리티로 굳어진 셈이다.


그렇지만 과연 그랬을까. 그때의 '우리'라는 관념이 지금처럼 국가나 민족단위로 단단하게

있었을지도 의문이고, 동일 언어를 쓰는 한민족, 혹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삼한일통'의

정신이 뚜렷이 드러나는지는 더욱 회의적이다. 국가가 구성원을 통제하는 수단이나

정도가 근대국가에 비해 훨씬 미미했던 그때, 사람들은 씨족이나 가문 정도에서 가장 크고

확실한 정체성을 얻지 않았을까. 설혹 신라인, 백제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해도 그들이

'뙤놈'과 '왜놈' 사이에서 '우리민족'을 의식했다는 건 소설에 가깝다. 동일 언어를 썼으니

말도 잘 통했을 거라는 막연한 상상도 서로 국서가 불통하더라는 사실 앞에 무너진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일본 혹은 다른 타국을 의식하는 방식이다. 일본에 대해서는 근대의

아픔만큼 과거에는 우리가 우월했음을 강변하는 식으로 대처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과거의

조공으로 맺어진 사대관계를 얼버무리는 대신 '만주'를 회복해 우리가 중심이 되겠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고대 한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문화전파만이

있었는데 배은망덕하게도 한반도를 호시탐탐 노려왔다는 아주 간편하고 단순한 전제가

늘 깔려 있다.


일부 민족사학자들은 일본을 아예 백제 유민이 건설하고 이후 쭉 천황계보를 이어오고 있는

형제의 나라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백제의 일본'이라 해도 그런 전제가 달라지진 않는다.

아무런 문화도 없던 섬나라의 원숭이들에게 문화를 전파하는 선진국의 이미지, 그리고

그런 은인의 나라를 욕보이고 덥썩 집어삼킬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는 양아치 원숭이의 이미지.

역사를 조금만 보면, 오히려 한반도와 왜국 간의 긴밀한 문화 교류-일방적 전파가 아니라-의

사례들이 수천년동안 발견될 뿐 아니라 왜국은 중요한 외교적 파트너로 존중되었단 거다.


사대교린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중국의 문화적 역량과 군사적 역량을 앞세워 구축한

천하질서는 당대 외교질서의 문법이었을 뿐이다. 오늘날 미국이 구축한 세계질서 하에서

다른 국가들이 자리매김하고 각개약진하며 미국의 문화적 군사적 역량을 제공받듯, 당대

중국의 문화를 교류하고 천하질서 하에서 상석을 차지하는 경쟁이 벌어진 셈이다. 그건

국가의 실리를 위한 외교정책이었을 뿐, 그 어디에도 근대적 의미로의 '예속'이나 '식민'의

굴욕을 떠올려야 할 구석은 찾을 수 없는 거다.


결국 '거꾸로 읽는 고대사'를 읽으면서 계속 부딪히는 건 '민족사관'의 문제 그 자체다.

'우리 대한민국', 혹은 '우리 한민족'이 먼옛날 언젠가 만주벌판을 호령하며 '뙤놈'과

'왜놈' 따위는 가뿐히 무찌르고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최고였다는 유치찬란한

환상, 그리고 그 '우리'는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변함없어서 가히 개인의

목숨 따위보다 훨씬 지고하고 신성한 집단, 민족공동체라는 구라. 박노자가 줄기차게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심플하고 기본적이다. 민족사관의 거품을 빼자. 민족사관이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해 부풀린 몇 개의 사실들만 말고, 균형을 잡고 보자는 거다.


신채호가 고대사를 읽어내던 시대는 지금의 시대와 다르다. 달라야 한다. 근대국가로의

경쟁적인 변신이 이루어지던 와중,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하는 등 야만적이고

가차없는 힘의 논리가 극강하던 시절에야, 뒤늦게라도 '한민족'을 만들어내고 하나로

규합해서 근대민족국가를 만들 필요가 '민족사관'을 만들어냈던 거다. 언제고 국제사회는

냉엄한 현실 논리, 힘의 논리로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존재했던 평화와 공존의

시기에서 눈돌려서는 안 될 일이다.


일본을 늘 한결같이 악하고 못 믿을 존재로 규정짓는 역사를 공부한 사람과, 때로는 굉장히

갈등하기도 했지만 또 때로는 생각 이상으로 긴밀하고 절실하게 상호 교류해온 나라로

공부한 사람, 그 인식의 차이는 어쩌면 이후 한국 사회가 얼마나 다채롭고 성숙할 수 있을지

열쇠가 될지 모른다. '한민족'이라는 집단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성되고 변화되어 왔는지

그 임의성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비로소 근대인으로, 주체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P.S. 박노자는 이 책에서 한사군이 존재했다 말한다. 한사군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불쾌감과 민족적 '책무감'이 더해 가타부타 말이 많지만, 박노자는 정작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탄탄히 대는 데에는 힘을 쏟지 않는다. 그는 한사군의 존재 여부보다

그 존재에 대해 일단 거부하고 보는 한국 사학계의 멘탈리티 혹은 태도를 한번 따져보길

바라는 거다. 한사군이 있었다고 해도 일제 시대처럼 총독부를 설치하고 식민화한 게

아니라, 그저 중국계 유민들의 부락 정도였을 거라는 게 그의 추측이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현재 아는 것에 빗대어 상상하는 게 위험하다는 걸 잘 보여주는 좋은 사례.





 

Ⅰ. 개 관

 

o 국명 :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

o 수도 : 아쉬하바드 (Ashgabat, 83만명)

o 면적 : 488,100 ㎢ (한반도의 2.2배)

o 인구 : 83만명

o인종 : 투르크멘인(85%), 우즈벡인(5%), 러시아인(4%), 기타(6%)

o종교 : 이슬람교(수니파 89%), 동방정교회(9%), 기타(2%)

o국어 : 투르크멘어(공식언어), 러시아어(통용어)

- 투르크멘 72%, 러시아어 12%, 우즈벡어 9%, 기타 7%

o 주요자원 : 천연가스, 원유, 유황, 소금

o화폐(08년) : 마나트(Manat)

- 1 USD = 14,250 Manat (2008.5월부터 고정환율적용)

o독립일 :91.10.27(독립기념일)

o행정구역 : 아할, 발칸, 다쇼구즈, 레바프, 마리 등 5개 행정구역(벨라야트)

 

 

Ⅱ. 경제정세

 

1. 경제약사

. 제정 러시아의 투르크메니스탄 정복 이전에는 약간의 오아시스 농업, 축산업 등을 제외하고 산업기반이 전무

. 1880년대 제정 러시아의 투르크멘 정복이 완료된 후, 광물자원 채굴 산업 및 목화 재배 등 산업 발전 시작

- 카스피해 철도 (투르크멘바쉬-아쉬하바드-우즈베키스탄) 건설

- 아쉬하바드, 투르크멘바쉬 등 주요 도시 건설

. 1928~1937년간 경제개발기간에 산업화 토대 마련

. 1950년대 이후 경제규모 지속 성장(주요 산업 : 목화 재배)

. 1960년대 이후 석유와 천연가스 증산으로 화학공업이 발전

. 1980년대 구소련 공화국간의 경제협력체제 붕괴로 경제성장 부진

. 1994년 러시아가 천연가스의 수출을 금지함에 따라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경제침체 발생

. 1996년부터 가스 생산의 증가, 주요 수출시장 활로 개척, 대규모 러시아 가스판매 개시, 면사 생산 증가 및 가격 상승으로 GDP 증가

. 1998-2002년간 심각한 단기외채 상환의무와 천연가스 수출로 부족으로 다시 어려움 발생

. 2003-2008년 국제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GDP 증가 등 경제 활성화

. 2007.2월 베르디무하메도프 현 대통령 취임 이후 점진적인 경제 개혁 조치 실시로 외국인 투자 환경이 다소 개선

. 2008.5.1 단일 환율제 실시

. 2009.1.1 화폐 개혁 실시 (5,000 Manat = 1 Manat 신화폐로 개혁)

 

2 주요 경제지표

 

가. 최근 경제동향 및 전망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2009년

GDP(십억 달러)

6.4

7.4

8.5

8.1

7.7

GDP성장률(%)

6

6

6

3

-6

인플레이션(%)

10.7

8.2

6.3

13

 

수출(백만 달러)

4,944

7,156

7,919

12,343

6,737

수입(백만 달러)

2,947

3,558

3,615

5,601

4,109

경상수지(백만 달러)

1,231

3,940

3,285

5,145

1,065

외화보유액(금 포함, 백만 달러)

4,458

8,059

13,186

13,907

9,551

환율

(기간평균, TMM/$)

5,200

5,200

 

 

 

출처 : 수출입은행 10.08

 

나. 주요 수출입 품목 현황(2003년 기준)

수출 품목

금액

(백만달러)

비중(%)

수입품목

금액

(백만달러)

비중(%)

천연가스

1850.0

75.5

기계 및

운송수단

 

1,125.6

45.9

석유화학제품

681.8

27.8

기초 제조업

상품

487.7

19.9

석 유

330.0

13.5

화학제품

271.2

11.1

면 화

120.0

4.9

잡 화

165.2

6.7

방적사

80.1

3.3

식료품

130.3

5.3

출처 : Asia Development Bank

 

다. 투르크메니스탄 GDP에서의 산업별 비중

. 에너지 및 섬유 51%, 서비스 24%, 농업 8%

 

라. 2007년 주요 수출입 상대국 및 비중 (생산지 및 최종 소비지 기준)

(단위: 백만달러, %)

국가명

수출액

비중

국가명

수입액

비중

우크라이나

3591.5

47

UAE

491.3

14.3

이란

1351.7

17.7

터키

372.9

10.9

아제르바이잔

400.4

5.2

중국

344

10

터키

360.8

4.7

우크라이나

303.7

8.9

UAE

253.3

3.3

러시아

285.4

8.3

미국

213

2.8

이란

240.2

7

이탈리아

197.4

2.6

독일

238.2

6.9

아프가니스탄

163.3

2.1

미국

203.2

5.9

아르메니아

152.2

2

프랑스

55.9

1.6

헝가리

0.3

0.004

아제르바이잔

12.5

0.4

출처 : ADB 2008.8

※ 상기 수출입 통계는 생산지 및 최종 소비지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러시아 가스프롬사를 통해 우크라이나, 이탈리아 등에 천연가스를 수출

 

 

마. 외국인직접투자 현황 및 전망

(단위: 백만달러)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2008년

순투자액

150

150

158

315

236

213

207

출처 : EBRD, UNCTAD

 

3 주요 경제정책 기조

. CIS 국가들 중 유일하게 체제 전환시 IMF 프로그램을 수용하지 않고 과거 소련의 계획 경제를 계승하는 독자노선 견지

- 석유 및 천연가스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로 건설, 정유, 농업 등 핵심 사업을 발전시키고, 나아가 수입대체 부문을 확대하여 자급자족 경제를 건설한다는 계획

- 주요 산업인 석유 및 천연가스 산업은 국가소유이며, 전력.가스.수도 등 사회 기본서비스는 사회보장 정책의 일환으로 저가 또는 무료로 공급

. 2007.2월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시장경제 지향적 개혁조치를 점진적으로 시행중

- 2008.9월 채택된 신 헌법에 시장 경제 도입을 명시적으로 선언

- 2008.5월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한 외국인 투자 증대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였던 이중환율제도를 폐지하고 2009.1월에는 구 화폐 5,000 Manat를 신화폐 1 Manat로 하는 화폐 개혁을 단행

- 유류가격 현실화 (2008.1월), 대중 교통 요금 인상 (2008.5월) 등 니야 조프 전 대통령 당시 대중 영합 정책으로 인해 악화된 재정상태 회복 노력

. 가스관 다변화를 통한 추가적 가스수송로 건설 추진 및 이를 위한 외자 유치 도모

- 투르크메니스탄이 제안한 “에너지 안전 수송 (Reliable and stable transit of energy and its role in ensuring sustainable development and international cooperation)”에 대한 결의안이 2008.12월 유엔총회에서 채택 (우리나라는 동 결의안 공동 제안국으로 참여)

- 2009.4.23-24 상기 에너지 안전 수송에 대한 국제회의를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개최

 

4 분야별 현황

가. 재정.외채

. 재정 수지

- 니야조프 전 대통령 시절에는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의 가스.전력 무료 공급, 명목상 가격으로 주택 및 기본식료품 제공, 각종 보조금 지급, 물가통제 등 대중영합정책으로 인해 재정 수지가 만성 적자

- 베르디무하메도프 정권 출범 이후 가스 가격 상승 및 수출 증대로 인해 재정 수입이 증가하였고 유류 가격 현실화 (2008.1월), 대중교통 요금 인상 (2008.5월)등 재정 지출 감소를 위한 조치를 시행하였으나, 사회복지 제도의 상존 및 인프라 등에 대한 투자 증가로 재정 상황이 크게 호전되지는 않고 있는 상황

- 투르크멘 정부는 향후에도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여 농촌 지역 인프라 개발(2008-20년간 농촌 발전 계획 수립), 올림픽 타운 건설, 정제시설 현대화 등으로 대형 국가 기간산업 프로젝트에 투자할 예정

- 최근 세계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대러시아 가스 수출 가격 상승, 대중국 가스 수출 개시, 외국인 투자 증가 등으로 재정수입이 증가되고, 재정수지가 일부 개선될 것으로 전망

. 외채 및 경상 수지

- 정부의 사회분야에 대한 투자 증가에도 불구하고 천연가스 수출 증대와 가스가격 상승에 힘입어 GDP 대비 국가부채 감소

- 2003년 GDP 대비 국가부채 13.6%이던 국가 부채가 2006년 3.3%, 2008년 1.3%로 점차 감소

- 경상수지는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 등으로 인해 2007, 2008년에 걸쳐 대폭 흑자를 기록하였으며, 2009년에도 국제 에너지 가격 하락에도 불구하고 대러시아 가스 수출 가격은 유지될 것으로 보여 경상수지가 심각하게 악화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

 

나. 물가, 환율 및 외환 보유고

. 물가상승세 지속

- 2007.2월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 취임 이후 국가의 물가 통제 완화, 유류 가격 인상 등 복지 혜택 일부 철회, 외환 유입 증가 등으로 인해 물가 상승세가 지속되고 있는 추세(07년 6.3%→08년 13%)

. 환율

- 2008.5월 이중환율제도를 폐지하고 단일 고정 환율제(1 USD = 14,250 Manat)채택

- 2009.1월 5,000 Manat를 1 Manat 신권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을 단행 (1 USD = 2.84 신권 Manat)

- 2009년말까지는 경과기간으로 신권과 구권을 병용

. 외환보유고

- 투르크멘은 외환보유액에 대한 정보를 발표하지 않고 있어 1999년 6월 말 IMF가 추정한 외환보유액 14억 달러가 가장 최근 공식자료

- 2008년 기준, 투르크메니스탄의 외환보유고는 121억달러 수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

※ 2008년 투르크멘 수입규모(45억달러)의 2배 이상

- 투르크멘은 주식 및 외환시장이 발전되어 있지 않고 정부 및 개인 기업의 해외차입이 거의 없어 최근 세계 경제 위기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지 않은 상황

 

다. 외국인투자

. 풍부한 천연자원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사업 및 투자환경으로 외국인 투자는 미미한 실정

- 석유.가스 개발이라는 고부가가치 사업기회와 저렴한 노동시장이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세제, 노동, 보건 등에 관한 법률 미비, 소유권 및 계약권 보호체제 결여 등 인근 국가들에 비해 투자환경 열악

. 국제신인도 매우 저조

- 영국의 Fitch사는 2005년 투르크메니스탄의 신용등급을 철회하였고, 미국의 US Eximbank, 영국의 ECGD 등은 단기 채무만 인수하고 중기 인수에는 제한을 두는 등 국제금융시장에서 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한 신인도는 매우 낮은 수준으로 평가

. 외국인 투자유치 계획

- 2005.11월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개최된 제10차 국제석유가스 회의시 투르크멘 정부는 2020년까지 석유가스 부문 인프라 건설 및 광구개발에 약 600억불의 신규투자가 필요하며 이중 40%를 외국인 직접투자로 조달할 계획이라고 발표

- 2008.3월 외국인 투자법 개정 및 8월 석유가스자원법 개정을 통해 외국인 투자 여건을 일부 개선

- 투르크멘 정부는 이를 통해 2030년에는 연간 1억톤의 석유(일 200만 배럴, 현재 20만 배럴)와 2,500억㎥(현재 730억㎥)의 가스 생산을 목표로 설정

- 투르크멘내 2개 정유단지중 서부의 투르크멘바쉬 정유단지는 이미 이스라엘, 터키, 일본, 네덜란드 등의 참여하에 국제수준으로의 부분적 현대화를 마쳤으며, 동부의 세이디 정유단지는 6백만톤 규모의 시설을 갖출 수 있도록 현대화를 추진할 예정

. 외국기업 유.가스전 투자 현황

- 현재 6개 외국기업이 생산물분배계약(PSA)하에서 6개 유.가스전 탐사 및 생산 활동 중

.육상 3개 프로젝트 : Khazar, Nebitdag, Gumdag 프로젝트

.해상 3개 프로젝트 : Cheleken, Block-1 및 Block 11-12 프로젝트

 

주요 유.가스전 프로젝트 개요

1. Chelken 프로젝트

.위치: 투르크메니스탄령 카스피해, 950㎢ 규모로 Dzheitune과 Dzhygalybeg

광구로 구성

.운영회사 : Dragon Oil

- Dragon Oil은 본사를 두바이에 두고 있으며, UAE 국영 석유회사 (ENOC)가 지분의 52% 보유

.PSA 계약 : 2000년 PSA계약(25년) 체결, PSA 계약 종료 후에도 10년간 PSA 계약 연장 협상을 배타적으로 할 수 있는 권리 보유

.부존 매장량 : 원유 6.5억배럴, 가스 991억㎥

.생산량 : 2006년 20,000 배럴/일, 2007년 32,000배럴/일, 2008년 40,038 배럴/일로 원유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

 

2. Nebit Dag 프로젝트

.위치: 투르크메니스탄 서부 육상, 1,050㎢ 면적의 5개 광구로 구성

.운영회사 : Burren Energy

- 영국에 기반을 둔 Burren Energy 사를 2008.2 이탈리아계 ENI가 인수

.PSA 계약 : 2022년 PSA 계약 종료 예정, 다만 10년간 PSA 계약 연장 가능

.부존 매장량 : 원유 83백만배럴, 가스 약 200억㎥

.생산량 : 22,643 배럴/일

.2006년 3개정에 대한 심부 시추 완료 및 현재 2개정 시추 중

 

3. Khazar 프로젝트

.위치 : 투르크메니스탄 서부 육상, 1개 광구로 구성

.참여사 : Turkmenneft(52%), Mitro International(파나마 48%)

- 프로젝트 운영사는 Turkmenneft이며 Mitro International은 금융 담당

.부존매장량 : 원유 35백만배럴, 가스 40억㎥

.생산량 : 원유 2.8백만배럴/년, 가스 0.8억㎥(2005년)

 

4. Block-1 프로젝트

.위치 : 투르크메니스탄령 카스피해, 3개 광구로 구성

.운영회사 : Petronas (말레이지아 국영 석유회사)

.PSA 계약 : 1996년 PSA 계약(25년) 체결

.부존 매장량 : 원유 20백만배럴, 가스 51억㎥

.생산량 : 10,000 배럴/일

5. 아무다리야 강 동안 프로젝트

.위치 : 아무다리야 강 동안 가스전

.운영회사 : CNPC (중국 국영 석유회사)

.부존 매장량 : 가스 1.3조㎥

6. Block 11-12 프로젝트

.위치 : 투르크메니스탄령 카스피해

.운영회사 : Wintershall, Maersk Oil

.PSA 계약 : 2002년 PSA계약(25년) 체결

.현재 탐사작업 추진 중

 

 

라. 에너지 개발 정책

1) 기본원칙

. 세계 유수의 기업들과 국익을 고려하여 계약을 체결, 특정국의 독점 방지

. 단기간내 탐사.매장량 평가.송유관 등 에너지 관련 인프라 구축

. 대규모 송유관 및 가스관 건설을 통해 기존 수출물량 확대 및 수출선 다 변화

. 외국기업에게는 육상광구는 개방하지 않고 해상광구만 개방

- 다만 육상광구의 서비스분야(시추 및 정제시설)는 외국기업도 참여 가능

※ 에너지 분야는 투르크메니스탄의 핵심 산업으로 전체 GDP의 1/3, 정부 재정수입의 80-90%를 차지

 

2) 가스 및 석유분야 개발

. 가스분야

- 천연가스 개발 부문에 외국자본의 투자유치가 필요하나 제한적, 선별적으로 개방

- 1999년부터 러시아, 우크라이나 및 우즈베키스탄과의 가스 공급 계약 체결에 따라 가스 생산량 증가

- 캐나다, 독일 기업이 Naip 천연가스 처리공장에 투자(2004년 준공)

- LPG 저장/수송시설에 외국인 투자를 희망

- 오스만-욜로탄 광구(매장량 약 4조-14조 입방미터)가 발견되었으나, 동 광구의 경우 압력이 높고 황 함유가 많아 개발을 위해서는 많은 투자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

. 석유분야

- 생산물분배계약(PSA) 조건으로 5개의 프로젝트가 진행 중

.개발단계 : 육상유전 Burren Energy(이탈리아계 ENI사가 인수)와 Mitro Int’l(오스트리아) 해상유전 Dragon(UAE), 페트로나스(말레이시아)

.탐사단계 : Wintershall(독), Shell, Dragon(UAE), Petronas(말), Zarit (러-투 합작투자) 등이 참여 중

- 생산물분배계약은 로얄티 4-5%, 소득세 20%, 기타 해외 송금세 면제이며 외국기업의 원유수출, 처분에 제한이 없어 조건은 양호한 편

- 투르크멘내 파이프라인의 노후화에 따라 2001년부터 파이프라인 교체작업 진행 중이며, 매년 300km의 폴리프로필렌 파이프, 1,000㎞의 메탈 파이프를설치하는 사업을 추진 중

 

※ 투르크메니스탄 5대 석유.천연가스 산업의 국영기업 현황

국영기업명

기능

투르크멘네프트가즈(Turkmenneftegaz)

국내판매 및 수출

투르크멘오일(Turkmenoil)

천연가스 생산

투르크멘가즈(Turkmengaz)

석유 생산

투르크멘네프트가즈스트로이

(Turkmenneftegazstroi)

석유.천연가스 부문 건설

투르크멘게올로기아(Turkmengeologia)

광구 탐사 및 개발

 

3) 2020 에너지 개발 계획

. 2007.3월 에너지 프로젝트 평가, 라이센스 발급협상 및 계약 체결 등을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석유가스 자원관리청(The State Agency For Management and Use of Hydrocarbon Resources)을 신설

- 2008.8월 석유가스자원 관리법 개정으로 석유가스 자원관리청의 권한 대폭 강화

. 2020년까지 가스관 및 가공 인프라 건설과 석유.가스 산지의 종합적 개발을 통한 에너지 산업 전반의 획기적 발전 추진

. 석유 공업단지 증축 및 현대화 추진

- 기존 투르크멘바쉬, 세이디 등지의 대규모 석유 화학공업 단지 증축 및 현대화 공사 진행 추진

※ 투르크멘바쉬 단지는 이미 이스라엘, 터키, 일본, 네덜란드 참여하에 부분적 현대화 공사를 마쳤으며, 세이디 단지는 5년 내 6백 만톤 규모의 시설을 갖추도록 증축, 현대화 추진

- 아할, 마리에도 석유 화학단지를 조성, 연간 총 3,500만톤의 원유를 가공, 2,000만톤 규모 수출 계획

 

투르크메니스탄 석유산업 관련법 현황

 

□ 석유가스자원법

.1996년 제정 및 2008.8월 개정되었으며, 외국기업이 광구 취득시 ‘투’ 정부와 생산물 분배계약(PSA)을 체결토록 하는 것이 주요 내용

- 외국기업과의 합작법인(JV)을 설립하거나 생산물 분배계약(PSA) 체결, Royalty and Tax Concession Agreement, Agreement on Service Works at Risk 등 4가지 형태로 외국인 투자 유치

 

□ 광구개발, 탐사, 생산관련 구체 내용

가. 탐사 및 개발 계약

.라이센스 계약을 통해 개발 및 탐사를 위한 광구 분양 가능

- 탐사 개발에 성공한 회사에게 매장지에 대한 생산 라이센스 부여

 

나. 기간

.석유개발을 위한 탐사면허 기간은 6년, 2년씩 2차례에 걸쳐 연장 가능

.석유생산 면허 기간은 20년, 5년씩 연장이 가능하나 예외적으로 10년 연장도 가능

 

다. 광구 반납(철회) 규정

.2000년에 제정된 광구면허 규정에 따르면, 매 탐사 단계마다 유망한 구조로 판명 되지 않아 사업자가 개발하지 않는 지역의 15~20%는 ‘투’ 정부에 반납

.또한 90일전 사전통보시 분양받은 광구 전부나 일부를 ‘투’ 정부에 반납 가능

 

라. 개발 의무규정

.석유기업들은 광구 개발 시 투입 자본 및 개발 계획을 ‘투’ 정부와 협의해야 하며, 의무비용은 15~35백만불

마. 석유개발 세제

.석유생산에 따른 로열티는 총 원유생산 규모에 따라 달라지며, 당사자 간 협상에 따라 5차례 인상 가능

- ‘투’ 정부는 관행적으로 3~15%정도의 로열티 징수

 

바. 우선 구매 규정

.생산물 분배계약 하에서 ‘투’ 정부 측에 할당되는 석유량이 국내 수요를 채우지 못할 경우, ‘투’ 정부는 생산자에게 할당된 석유를 우선 구매할 권한 보유

 

※ 투르크메니스탄 주요 유.가스전 현황

유전/광구명

운영사

부존 매장량

(백만 입방피트)

비교

Dovletabad-Donmez

Turkmengazprom

38,215,604

 

Gurrukbil

Turkmengeologiya

3,300,000

탐사평가

Shatlyk

Sinopec Corp

3,078,642

 

Samandepe

Turkmengazprom

2,902,855

일시 생산중단

Malay

Turkmengazprom

2,617,857

 

Zeagli-Derveze

Balkannebitgazsenagat

2,359,500

개발승인중

Beshgyzyl

Balkannebitgazsenagat

2,309,418

 

Korpeje

Balkannebitgazsenagat

2,211,077

 

Barsagelmez

Turkmenneft

1,615,929

 

Yelguyi

Turkmengazprom

1,558,838

 

Goturdepe

Turkmenneft

1,489,993

 

 

4) 송유관.가스관 및 정제사업

가) 석유.가스 배관망

.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약 8,000km)

- 국영 Turkmengaz사가 주 수출노선인 CAC Ⅰ,Ⅱ,Ⅳ(Deryalyk-유럽)을 통하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가스를 수송, 2010년까지 수송능력을 연간 1,000억㎥로 확장 예정

- Turkmentransgaz가 내수공급배관과 유럽으로 가스를 공급하는 CAC Ⅲ (Garobogaz-유럽)운영, 유럽방향 수송능력 100억㎥로 확장 예정

- Turkmenneft가 이란북부에 가스를 공급하는 Korpeje-Kurt Koy 노선을 운영하며 연간 수송능력은 130억㎥

. 석유 수송용 간선 파이프라인은 618km를 운용 중

- 주로 투르크멘바쉬 정유공장으로의 석유공급과 석유선적항인 Aladzha와 Ekerem을 연결하며 국토의 서부지역에 집중

나) 국외 가스공급 파이프라인 프로젝트

. 카스피해 東岸 가스관 건설 사업

- 2007.5월 투르크멘바쉬 정상회담 시 러시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3국 정상간 카스피해 동안 가스관 건설 및 3국간 기존 가스관 확장에 합의

- 2007.12월 모스크바에서 이에 관한 MOU 체결

- 투르크메니스탄 구간의 경우 가스관 건설을 위한 컨소시움이 구성되었으며, 카자흐스탄 구간에서는 지질 조사 등이 진행 중

- 가스관 연장은 약 1,200Km 달하며 연간 운송능력은 200억㎥ 수준

. 투르크멘-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인도(TAPI) 노선

- 1990년대부터 추진하였으나 아프간사태로 중단, 2001년 이후 ADB 후원하에 재검토

- 2008.4.23 투르크메니스탄,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간 석유가스 장관회의 개최시(이슬라마바드), 2010년부터 TAPI 가스관 건설 착공 및 2015년부터 가스공급을 원칙적으로 합의

- 현재 TAPI 가스관 관련 기술적인 사항이 검토되고 있으며 TAPI 가스관 건설 관련 MOU 체결 예정

- TAPI 노선은 Dovletabat 가스전으로부터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의 Fazilka까지 남쪽 노선의 연장이 1,680㎞이며 예상 공사비는 76억불,운송 능력은 연간 300억㎥

. Trans Caspian 노선(TCP)

- 투르크메니스탄-(카스피해 해저 통과)-아제르바이잔-터키를 연결하는 노선으로 현재 관련국에서 검토 중이며, 서방으로 직접 공급 가능하므로 EU 및 미국이 지지

- EU는 동 노선의 기술적.경제적 타당성 조사를 위하여 투르크메니스탄에 170만 유로의 자금을 제공

- 동 노선이 나부코(Nabucco)노선과 연결되면 유럽으로 가스 공급 가능

- 다만, 2007.12월 투르크메니스탄-카자흐스탄-러시아 3국이 카스피해 東岸 가스관 건설 사업 합의 하고 2008.8월에는 그루지야 전쟁 발발로 그루지야를 경유하는 가스관의 안정성에 대한 문제점이 제기됨에 따라 Trans Caspian 가스관 건설 추진에 어려움 예상

. 투르크멘-(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경유)-중국 노선

- 2006.4월 투르크멘과 중국 정상간 체결한 가스협정(2009년부터 300억 ㎥/년씩 30년간 공급)에 따라 건설하기로 합의하였으며, 2007.7월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 방중시 이를 재확인

- 2008.8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방투시 연간 공급량을 300억㎥에서 400억㎥로 증가시키기로 합의

- 현재 가스관 건설이 진행 중이며 2010년부터 투르크메니스탄이 이를 통해 중국에 가스를 공급할 예정(다만, 기술적인 문제 등으로 가스 공급량이 당초 계획에 미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

 

다) 정제 사업

. 투르크메니스탄 정부의 국가발전계획에서 정제시설 규모 확장은 매우 중요

- 현재 투르크메니스탄은 2개의 정제공장 보유

. 카스피해 인근의 투르크멘바쉬 정유공장은 프랑스, 독일, 일본, 터키 등 이 참여하여 약 10억불 규모의 현대화 작업이 진행 되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으나, 우즈베키스탄과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세이디 정유공장은 현대화 추진과 추가 공장 신설을 위해 외국투자자 물색 중

 

≪참고자료 : 중앙아의 對유럽 에너지 공급망≫

 

 

마. 건설 산업

명 칭

구 간

진 행 상 황

비 고

Nabucco

가스관

터기-불가리아

-루마니아-헝가리

-오스트리아

(약 64.6억불)

- ‘08년 건설시작, ’11년 완성

계획이었으나 추진 여부 불투명

- 수송능력: 연간 250-310억㎥

- 길이: 3,300km

- 오스트리아 주도

- 러시아는 Blue Stream

(러시아-터키) 수송용량

두배 확대 및 South

Stream Project로 대응

Trans-

Caspian

가스관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

(바쿠)

- ‘99년 타당성 조사, 러시아 및 이란

반대로 지체

- ‘06년 러시아.우크라이나

가스분쟁으로 재추진

- ‘07년 러시아.투르크멘.카자흐

카스피해 東岸 가스관 건설 합의로

추진여부 불투명

- 수송능력: 연간 300억㎥

- 미국, EU가 추진

- 투르크멘은 카자흐,

러시아의 참여 없이 건설

불가 입장

- 러시아 경유 않고 유럽에

투르크멘 가스공급 가능

Trans-

Caspian

송유관

카자흐스탄

(악타우)-

아제르바이잔

(바쿠)

- ‘07년 타당성 검토

- 길이: 700km

- 미국, EU가 추진

- 러시아 경유 않고 유럽에 카자흐 원유 공급 가능

BTC

송유관

아제르바이잔

(바쿠)-그

루지야(트빌리시)-

터키(세이한)

- ‘05.5.10 가동시작

- 수송능력: 하루 100만 배럴

- 길이: 1,776km

- 미국, EU가 주도

Odessa-

Brody-

Poland

송유관

우크라이나(오데사)-

폴란드(브로디)-

폴란드(플록)

- 오데사-브로디 구간 ;01년 완성

(674km)

- ‘06년 플록까지 연장결정

- 러시아의 반대로 현재 무기한 연기

- 수송능력: 연간 9백만톤

- 미국, EU가 추진

- 러시아가 카자흐 원유 오데사로의 수송 반대

.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투르크메니스탄 건설 시장 규모는 약 50억 달러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며 에너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경제 부문

- 투르크멘 정부는 가스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의 50%이상을 건설 공사에 투자

- 2008년도 터키계 건설기업들이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약 40억 달러 이상을 수주한 것으로 추정

. Polimeks를 포함한 터키계 건설회사와 프랑스계 Bouygue 건설이 주도적인 역할

- Polimeks사는 주로 조형물 건설, 기타 터키 건설업체는 아파트 건설에 진출

- Bouygue사는 주로 정부 청사, 호텔 등 기념비적인 건물 건설

- 투르크메니스탄 건설업체들의 역할이 미미하여 투르크멘 정부는 자국 건설업체 육성을 위해 노력중

. 투르크멘 정부부처가 건설시장의 주요 발주자는

- 중앙부처는 직원 주택, 청사 건설을 발주

- 아쉬하바드시청은 일반 주택 등을 발주

. 투르크메니스탄 건설시장은 공급과잉과 현대적인 감리 제도의 부재의 문제에 봉착

- 아쉬하바드 시내 신축 아파트 입주율은 20-30%에 불과

- 감리제도가 정착되어 있지 않아, 건물의 품질이 낮다는 문제점

. 세계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투르크멘 정부는 현재 아와자 관광특구 조성 사업, 지방 인프라 발전 계획, 올림픽 타운 건설 등 수십억 달러 규모의 건설 프로젝트를 지속 추진

바. 섬유 산업

. 섬유 분야는 에너지, 건설, 농업과 함께 투르크메니스탄 주요 기간 산업 중 하나

- 터키계 기업들이 주도적인 역할 수행

- 투르크메니스탄 원사는 품질이 매우 우수하여 섬유 제품의 50% 정도를 유럽 등에 수출

. 최근 세계 경기 침체로 인해 섬유류 및 면화 가격 하락, 판매량 감소에 따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

 

사. 금융 산업

. 금융 분야는 국가통제 체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민간 시장 규모가 작아 금융시장 부재

- 1993년 증권거래법이 제정되었으나 국가 주요산업은 모두 국영이며, 민간부문은 외국기업 또는 영세 식품, 도매, 서비스업으로 전체 GDP의 25%에 불과

- 8개 은행 중 6개 은행은 국유이고 2개의 상업은행도 국가가 통제

- 낮은 경제수준과 저임금으로 국민들의 저축 및 재테크 불가

- 증권거래소 및 투자회사 전무

 

아. 항만 및 조선

. 카스피해 연안에 투르크멘바쉬와 Gasan-kuli 등 주요 항구가 있으며, 현재 투르크멘바쉬 항만 현대화 사업 추진 중

- 석유수출 능력 제고 및 여객 수송 증대를 위해 이란 국경에서 50㎞ 떨어진 에케렘에 제2항구 건설 추진

- 아무다리야강과 카라쿰 운하를 이용한 선박 수송 활성화 추진

 

자. 전력산업

. 전력생산은 국가에서 독점하고 있으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국민들에게 저가에 공급

- 총 발전 능력은 2003년 현재 3.1GW이며, 2010년까지 4.6GW로 확대 계획

- 생산량은 2004년 119.8억kWh에서 2005년 129억kWh로 증가했으며 소비량보다 많아 자급자족 가능

. 천연가스를 연료로 하는 화력발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자원 부족으로 수력은 1% 미만

. 바터 협정에 의해 생산량의 15~17%를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터키 등지로 수출

- 주변국과 에너지 그리드 시스템을 연결하여 2004년에 11.36억 kWh를 수출

- 이란과 320㎞의 송전선을 건설하여 이란 북부(네비트다그-알리아바드)로 시간당 200-500MW 송전

. 구소련 시대 건설된 낙후된 설비로 인해 전력생산 증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

- 마리 발전소 현대화, 베즈메인 발전소 개보수를 통한 전력생산 능력 증대 추진

- 미국 GE의 기술 지원을 받아 에너지 손실율이 40%에 달하는 구소련 시대의 가스터빈 교체, 송전선 개보수 등을 추진하는 등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전력 인프라 개선에 주력중

 

주요 전력 프로젝트

 

.아프간.파키스탄 경유 송전선 건설(1,150km, 사업규모 2.88억불)

.Nebitag(200만불), Serakhs(200만불), Kerki(200만불), Farab(200만불), Seidi (350만불), Dashoguz(350만불) 송전소 건설

.Kyzylatrek(3.5억불), Dashoguz(1.75억불), Turkmenbasy(6,200만불) 열병합발전설비 건설

.Ashgabat 전선 생산시설 재건(3,000만불)

 

 

차. 농목축산업

. 투르크멘은 1929년 이래 농업의 집단화와 전통적인 유목민의 정착화가 진행

. 관개용 카라쿰 수로를 비롯한 인공호 건설에 의해 1960년대 이후 농목 축업 급속히 발전

 

주요 전력 프로젝트

 

.남부지역 34,000ha 관개시설 확충 프로젝트(4.25억불)

.카라쿰 운하 연장(1,100km, 2,680만불), 제7, 11 펌프 스테이션 재건(각각8,000만불,

780만불)

.카라쿰 운하 서남 지선 270km 복구(8,370만불)

.Mugap, Tedjen강 범람 방지시설 확충(3,500만불)

.Bauaramali, Turkmenabat, Dashoguz내 채소 오일 생산공장 재건(2.68억불)

.Ahal州 마가린, 마요네즈 생산설비 건설(1,560만불)

.Mary 제분단지 건설(일일 200톤 처리, 1,500만불)

.육류, 식료품 포장지 생산시설 건설(1,000만불)

 

. 농업은 GDP의 8%를 차지하는 투르크멘 경제의 주요산업

- 전체 국토의 4%만을 경작하나, 전체 노동력의 약 50% 고용

. 경지의 40%이상이 면화 경작지이며, 주산지는 코페트다크 산맥, 아무다리야강 상.하류, 테젠강 중.하류 지방의 오아시스 주변

- 면화생산은 2003년 71.4만톤에서 2006년 350만톤으로 증가

- 최근 면화와 곡물의 과도한 집약적 경작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심각

- 이외의 주요 작물로는 보리, 밀, 옥수수, 채소, 포도, 멜론을 포함한 과일 등

. 목축은 중동부지역에서 이루어지며, 주로 소.돼지.양.염소 등을 사육하고,

그 밖에 말.낙타 등도 사육

- 농경지에서는 소와 말, 카라쿰 사막의 목초지에서는 낙타와 양이 사육 되며, 특히 모피(아스트라한)용 카라쿨종(카라쿠리양) 사육은 세계적

- 축산분야에서 가축수가 2006년 1/4분기 1,800만마리로 전년 동기 대비 7% 증가

 

<농업부문 생산 추이>

구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곡물

생산(萬톤)

150

230

253

284

250

350

경작면적(萬ha)

77.5

85

76

76

76

91

면화

생산(萬톤)

114

48.9

71.4

73.1

72

-

경작면적(萬ha)

77

64

64

65

65

-

5 경제 전망

. 에너지 산업 주도로 당분간 경제성장 지속 전망

- 투르크메니스탄은 2006-2008년간 주요 수출품인 석유, 가스 및 면사 가격 상승 등에 힘입어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으나, 최근 세계경제위기와 이에 따른 에너지 가격 하락으로 인해 2009년도에는 경제 성장세가 다소 둔화될 것으로 예상

- 투르크메니스탄의 고립 경제 구조와 경제규모 대비 높은 외환 보유고 등을 감안시, 심각한 경제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관측

- 그러나, 최대 교역국이자 경협파트너인 러시아의 경제 위기는 투르크메니스탄 경제의 지속적인 부담 요인이 될 것으로 전망

. 에너지 분야에 지나치게 편중된 산업구조 및 여타 산업생산 시설의 낙후 등 취약한 경제상황에 대한 전반적 개혁의 부재는 경제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

- 투르크멘 정부가 추진 중인 2000-2010년간 장기 경제.사회발전전략의 실현을 위해서는 외국 투자유치, 대외지원이 필수적이나, 가시적인 정치. 경제 개혁이 없는 상태에서 국제금융기구 및 서방으로부터의 지원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

- 토지사유화가 매우 제한적이며 민간 기업이 거의 전무한 국가주도 계획 경제의 내재적 한계로 인해 지속적인 경제 발전 여부는 불투명

- 특히, 정부 재정 수입의 80-90%를 에너지 수출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향후 국제 에너지 시장 동향에 따라 투르크메니스탄 경제 상황이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전망

 

Ⅲ. 한-투르크 경제협력 현황

 

가. 교역

 

•한‧투르크메니스탄 교역량

 

 

무역현황

2007

2008

2009

주요품목

수입(천달러)

6,884

22,364

66,262

석유화학제품, 수송용기계, 섬유사, 섬유제품

수출(천달러)

696

177

749

 

※ 2010년 10월 현재 우리나라의 대투르크메니스탄 수출은 전년도 대비 25.4% 증가하여 76백만불에 이름

- 이는 주투르크메니스탄 대사관 개설 07.6월 이후 한투르크멘 양국간

경제협력 관계가 급격히 발전한 결과로 평가

•주요 수출입 품목

- 수출 : 엘리베이터, 합성수지, 자동차 등

- 수입 : 의류, 기타농산물, 섬유제품 등

 

※ 한국의 對투르크멘 주요품목별 수출입내역(2010년 10월)

 

○ 한국의 對투르크 주요 수출품목

(MTI 3단위, 천불)

순위

품목명

2009

2010(1월~8월)

금액

증가율

금액

증가율

총계

66,262

196.3

58,090

7.0

1

레일및철구조물

2,043

9,865.6

12,911

765.8

2

자동차

40,494

787.0

12,672

-67.8

3

철강재용기및체인

0

-

12,300

-

4

철강판

3,892

-

3,986

622.1

5

자동차부품

190

124.1

3,008

6,552.3

6

운반하역기계

373

1,945.1

2,920

916.9

7

압연기용접기및주조설비

0

-

1,735

-

8

건설광산기계

1,512

326.5

1,724

164.8

9

합성수지

3,658

-28.8

1,639

-39.6

10

농약및의약품

614

274.6

1,333

-

(자료 : 한국무역협회)

 

한국의 對투르크 주요 수입품목

(MTI 3단위, 천불)

순위

품목명

2009

2010(1월~8월)

금액

증가율

금액

증가율

총계

749

322.1

341

-46.0

1

의류

102

26.1

281

278.7

2

기타농산물

542

-

49

-90.1

3

기타섬유제품

42

-7.3

11

-60.4

4

공구

0

-

0

-

5

컴퓨터

0

-

0

-

6

곡실류

0

-

0

-

(자료 : 한국무역협회)

 

※ 한국의 對투르크멘 투자현황(2009년)

투자현황

2007

2008

2009

2009년 말 누계

신규법인 수

1

-

1

2

천 달러

18

-

15

33

 

 

 

나. 유‧무상 협력 사업

•KOICA 지원사업 실적

- KOICA는 투르크멘에 1991-2006년간 총 142.8천불(연평균 9.52천불)

지원으로 매우 미미진한 수준이었으나, 07.6월 주투르크메니스탄 상주

대사관 개설 이후 KOICA 지원 실적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

- 투르크멘은 무상원조 개념보다는 인적 자원 양성을 선호하며, 연수생초청 확대를 희망

- 2008년도에는 총 30명의 투르크멘 연수생을 초청

다. 우리기업 진출현황

•2009.3 현재 대우인터내셔널(aewoo International), LG 상사, 현대종

합상사, SK 건설이 지사장을 파견하여 현지 사무소를 개설 운영중


매년 11월 30일은 '무역의 날', 올해는 그 무역의 날이 제정된지 47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공과가 어찌되었건 우리 나라를 지금의 경제 발전 루트로 견인해 온 건 바로 '무역입국'의 기치

아래 머리카락부터 북어까지 돈되는 건 전부 수출에 나섰던 그 시절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터.

그 때 이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수출은 좋은 것, 수입은 나쁜 것'이라거나 '우리나라의 살 길은

오로지 수출, 대외지향형의 경제'라는 정형이 생긴 건 이제 좀 교정이 필요할 때지 싶지만,

여하간 그 때나 지금이나 포스터에서 읽히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맨날 도약이래.

세계 속의 수출한국. 한국이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so 심플한 거다. 사는 것보다 많이 팔면

된다는 식. 이 포스터의 테두리에 감긴 국기들이 아마도 당시 한국의 주요 교역 국가였나보다.

외국 앞에서는 항상 '우리'로 똘똘 뭉치는 성향도 있거니와 그걸 부추기는 건 이런 식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전략이다. 세계 시장을 우리의 무대로, 온 동네방네에 태극기와

애국가를 퍼뜨리며 가슴 뿌듯해 하는 건 일종의 병이겠지만, 아직 상품 무역에 치중하던

때 무역이야말로 바로 그런 가슴뛰는 애국심의 원천, 용광로였을 거다. 나라를 부강케 하고

당장 우리 가족들을 잘 살게 만든다는 믿음에 기반했을 테니 마냥 냉소할 일도 아니다.


상품 수출 뿐인가. 중동으로, 독일로 간호사나 건설 노동자를 내보내어 외화벌이에 나서게

하고, 일본 관광객을 겨냥한 기생 관광도 암묵적으로 조장하고. 언제나 그렇듯 대다수의

이름없고 나서지 않는 사람들이 이 나라 경제를 이만큼 이끌어왔다.

한국에서 '수출기업'은 한때 굉장한 특혜와 정책적 배려를 누렸고, 여전히 그런 점이 없잖다.

의도적인 고환율을 유지하거나 거의 0%에 가까운 이율로 자금을 융통해준다거나, 사실은

수출과 수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데다가, 특히나 한국처럼 원자재를 수입하고 완제품을

수출하는 형태라면 수입과 수출 모두를 잘 챙겨야 하진 않을까 싶은데. 이전이야 수출, Export만

강조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작고 약한 경제였으니 그렇다고 쳐도, 이제 어쨌든 OECD도 들어가고

G20도 들어갔으니 어느 정도 마구잡이식 달러벌이에선 벗어날 때가 된 거 아닐까.


군수물자 팔아서 달러 벌고, 빈국에 제공하는 무상원조는 가능한 쌩까거나 수익 조건을 달거나,

노동자들이 파업만 하면 '소나타 몇대분 손실'이네 협박하는 행태는 이제 벗어던져야 더욱

발전할 동력을 얻을 거라고 생각한다. 몸빵과 '하면된다' 정신으로 해결될 수준은 지났으니까.

이건 언제적의 포스터일까. 정말 상상속의 '로봇손'이 반도체를 쥐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고

계산기처럼 생긴 컴퓨터 초기모델이 휭휭 날아다니고, 아, 반도체는 심지어 한반도 어디메에서

뻗어나온 빛과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 위에 날고 있는 건, 인공위성인가 설마.

왠지 조금씩 포스터에 들어가는 메시지가 많아지고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기술혁신과

품질의 고급화로, 소득을 높이고 생산을 많이 하고 외화를 벌고 고용을 많이 하자는 메시지.

왠지...낯설지 않다. 사실은 수출입국의 기치를 세운 이래, 혹은 대부분의 수출을 담당하는

대기업 위주의 산업정책이 펼쳐진 이래 늘 일관된 이야기였던 거다. 기술 혁신에는 비단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인적자산 관리기술, 쉽게는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 따위라 표현할

기술도 포함되는 것. 뒤집어 말하자면 모든 정책이 표방하는 목표는 한결같았다. 다행이랄까.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부분을 빼고 나면 역시 "소득 증진과 고용 증대"가 관건이다.

'근로자'라는 단어는 여전히 거슬리지만 참 집요하게도 계속된다. 오늘도 이명박 대통령은

무역의 날 행사 축사 중에 '근로자'란 단어를 몇 번이나 썼던 것. 수출 500억불을 달성했음을

축하하는 포스터가 86년에 만들어졌고, 조만간 무역 1조불을 축하하게 될 테니 여전히 한국

경제는 고속 성장중인 듯 보이기도 한다. 수출, 수입에 한정하자면.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86년 포스터에서 '국회' 건물 이미지가 보인단 사실과 '수입업자'는

발 딛을 곳이 없이 빠져있다는 사실. 정부는 적절한 시책을 펼 테니 국민들과 국회는 그저

정부만 잘 이고 지고 따르라는 걸까. 수입은 적을수록 좋다는 기조 아래서 수입업자들이야

뭐, 찬밥 아닌 찬밥 신세인 거는 어쩔 수 없었을 테고.

세계를 한국의 무대로. 곧게 솟은 태극기가 워낙 작아서 혹시 거꾸로 들린 건 아닌지, 사방의

괘가 제대로 그려지긴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때나 지금이나, 촌스러운 색감과 도안만 조금

손보고 나면 딱히 메시지에서 바꿀 거는 없어 보인다. 수출 증진, 수출 몇백억, 몇천억, 규모로

세계 몇 위라느니 등등 수치에만 목 매달고 축하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란.

사실은 그 수출의 순이익이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원재료를 수입해 왔는지, 무엇보다

그런 과정에서 얻어지는 국가의 총이익이 전체 국민들에게 골고루 분배되고 있는지 그런

질적인 측면을 더욱 앞세워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그런 걸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으면 좋겠다.


오늘 '무역의 날' 행사에서 본 장면 하나, 회사의 오너가 아닌 월급쟁이 사장이 마침 그

회사의 수출 실적이 몇 백억, 몇 천억에 도달해서 행사장에 나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산업훈장을 받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사실은 그 월급쟁이 사장이 아니라 수십년째

한결같이 일해 온 그 밑의 직원들이 받아야 하는 상 아닐까. 이씨 일가의 삼성이나 정씨

일가의 현대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영광'이-이명박에게 받는 건 영광은 아닌거 같지만-

사장 혹은 회사대표의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건 웃기다. 이 나라 경제가 몇몇 대기업 덕분에

이만큼 커지고 자라난 게 아니듯이.




@ 삼성동, 코엑스 무역전시관

투르크메니스탄 약사


민족 형성 및 각국의 지배


구석기시대 투르크멘바쉬 인근에서 인류 거주

○ 8,000년 전 코페트다그 산맥 지역에서 신석기 농경 시작

○ 청동기-Anau(아나우)문화 코페트다그 북부와 테젠강 하류에서 발흥

○ BC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에 의해 피지배

○ 9세기말 이후 투르크계 오그즈족 이슬람교 수용→투르크멘 명칭 처음으로 등장

○ 12세기말 ∼ 13세기초 호레즘왕의 지배

○ 1219 ∼ 1221 징기스칸의 지배

15세기 ∼ 17세기 남부부족-페르시아, 북부부족-히바와 부하라왕의 지배

○ 18세기초 페르시아, 18세기말 부하라왕의 지배


帝政러시아와 舊소련 시대


1860년 제정 러시아군에 의해 크라스노봇스(現 투르크멘바쉬)시 건설

1869 ∼ 1880년 대러 항쟁

1884년 항복

1917년 자카스피 반볼세비키 지역 정부 형성, 투르크멘 의회 수립

1918년 4월 투르크멘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선포, 7월 영국 지지하 민족주의자들 볼세비키 정부 전복, 독립 정부 수립

1920년 붉은 군대에 의해 독립정부 전복

1924년 10월 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1930년초 정치적 자치 운동 시작했으나 많은 지식인이 투옥 또는 처형됨


영세중립국 투르크메니스탄


○ 1990년 8월 주권 선언

○ 1991년 10월 독립 선언(10.27 독립기념일)

○ 1995년 UN 총회에서 영세중립국 결의안 채택

○ 2006년 12월 니야조프 초대 대통령 사망

○ 2007년 2월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 취임

○ 2008년 9월 헌법개정안 채택



정치 · 사회 동향


정치 및 국제관계


야당 및 반대세력이 없어 정치 안정 가능

2007년 2월 11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전임 부총리이자 보건부 장관이었던 베르디무하메도프가 의회(Khalk Maslakhaty) 및 엘리트 집단의 절대적인 지지와 높은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음.

ㆍ 철권통치를 자행해온 니야조프 전임 대통령의 2006년 말 사망으로 신임대통령 선거 실시

ㆍ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은 여당인 투르크메니스탄 민주당(구공산당)을주축으로 하는 단일정당체제 유지 및 실질적인 반대세력과 언론에 대한통제를 지속할 것으로 보여 당분간 정치적 불안은 없을 것으로 보임.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권한 강화

ㆍ 2008년 9월 헌법이 개정되어 인민평의회(Khalk Maslakhaty)가 폐지되었으며, 의회(Mejlis)의 의원수가 65명에서 125명으로 증가됨으로써 명목상 국민의 대표자 수는 증가되었음.

ㆍ 동년 12월 민주적 총선이 실시되었으나, 유일합법정당인 민주당과 정부가 승인한 비정부기구만이 후보를 낼 수 있어 일당체제는 여전히 유지

ㆍ 그러나, 동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이 주지사 임명권을 보유하고 국가안보회의(State Security Council)의 의장이 됨으로써, 대통령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음.

러시아와 갈등 발발에도 불구 여전히 중요한 협력 상대

ㆍ 투르크메니스탄은 연간 700억㎥의 가스를 생산하며, 니야조프 정권이 2003년 체결한 25년 장기 가스 공급계약에 따라 이중 약 500억㎥를 러시아 국영석유기업 Gazprom의 송유관을 통해 러시아로 수출하고 있음.

ㆍ 러시아는 투르크메니스탄으로부터 저가 구입 후 우크라이나에는 고가판매를 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한편, 중앙아시아에서의 에너지 패권을 강화하고 있음.

ㆍ 2009년 4월 가스관 사고로 인해 분쟁이 발생하여 대 러시아 가스공급이 중단되었으나, 동년 9월 13일 가스공급 재개에 합의함. 그러나 투르크메니스탄은 러시아의 자국 가스 재수출을 반대하고 있으며, 러시아는 투르크메니스탄의 고정가격 기반 가스공급에 불만을 가지고 있어 향후 분쟁 재발 가능성이 남아있음.

ㆍ 그러나 투르크메니스탄 입장에서 러시아는 여전히 최대 가스수출 대상국이며, 러시아 입장에서도 자국 가스전개발에는 고비용이 소요되어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공급이 에너지 정책에 있어 중요하므로 현재 갈등에도 불구 양국의 경제협력관계는 유지 될 것으로 전망됨.

○ 중국과의 경제협력 관계 증진

ㆍ 2006. 4월 중국과 가스 파이프라인 건설 협정을 체결한데 이어 2007. 8월 중국 CNPC 주도의 총 7,000km의 가스 파이프라인(Central Asia Gas Pipeline) 건설에 착수하였고, 2009년 12월 가동될 것으로 전망됨.

중국에 대한 가스 공급 물량을 연간 300억㎥에서 400억㎥로 확대하기로 합의함에 따라 동 파이프라인이 완공되면 중국은 러시아에 이은 두 번째 가스 수입국이 될 것임(러시아에는 약 500억㎥ 수출).

ㆍ 2007년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의 중국 방문과 2008년 후진타오주석의답방을 통해 양국은 에너지 부문 이외에 섬유, 은행업, 통신 등 다방면에 걸친 협력을 약속하는 등 최근 양국간 경제협력관계가 증진되고 있음.

○ 가스 수출 다변화 움직임의 일환으로 서방과의 협력 확대

ㆍ 최근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은 러시아와 이란에 국한된 가스 수출선 다변화하기 위해 서방과의 협력의사를 표방함.


사회 및 소요사태


○ 장기 독재정권 지속에도 불구, 저항세력이 많지 않아 소요사태 발생가능성은 낮음

ㆍ 전임 니야조프 대통령의 독재정권이 15년 동안 지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세력이 많지 않고 국민만족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현대통령이 급격한 정치적 변혁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지 않아 사회불안사태가 야기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임.



국제 신인도 및 대외지급능력


주요평가기관 신용등급


○ 주요기관별 신용도 평가순위

ㆍ 2008. 1월 OECD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높은 자원개발 가능성 및 신정부의 대외관계 개선 노력 등을 바탕으로 국가 신용등급을 7등급에서 6등급으로 한 단계 상향 조정한 바 있음.


평가기관

최근 평가 등급

종전 평가 등급

수출입은행

D2(2009.12)

D2(2008.11)

OECD

6등급(2008.1)

7등급(2007.1)

S&P

B2(2006.5)


*
Euromoney: 155/186('09. 3) → 155/186('09. 9)

* I.I: 129/177('09. 3) → 120/178('09. 9)


외채상환실적


○ 가스 수출에 따른 외환보유액 증가

ㆍ 에너지 수출 호조에 힘입어 외환보유액은 2005년 45억 달러에서 2008년 167억 달러로 크게 증가하였음. 2009년 러시아에 대한 가스공급 중단으로 수출이 감소하여 꾸준히 증가하던 외환보유액이 94억 달러 수준으로 감것으로 예상되나, 2010년부터는 중국으로의 수출이 개시될 것으로예상되어 외환보유액 증가세는 회복될 것으로 전망됨.

○ 총 외채잔액은 낮은 수준

ㆍ 투르크메니스탄의 투기 등급(B2, Moody's)로 분류되고, S&P 및 Fitch사에서는 등급평가 대상국에서도 제외되어 있는 등 국제자본시장에서 소외되어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의 영향을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고, 폐쇄적인 경제구조로 외채가 소규모인데 반해 동국의 외환보유액 및 가스 수출 전망이 긍정적임을 감안할 때, 외채 상환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임.

2009년 말 총 외채잔액은 6억 6천만 달러(GDP 대비 3.4%)로 예상



사회


언어


○ 투르크멘어는 투르크-오구즈어 계통으로써 우즈벡어와 카작어보다 터어키어와 아제리어에 가까움. 투르크멘의 부족들은 각기 다른 방언을 말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나지는 않음. 투르크멘의 표기문자는 18세기 들어 도입되어 주로 소수의 존경받는 시인들에 의해 사용되어옴. 투르크멘의 국립대학과 아쉬가바드의 주요 도로중 하나의 이름도 바로 이러한 유명한 시인중의 하나인 Magtumguly(막둠굴리)의 이름을 따서 지어짐. 시인들은 페르시아의 아랍 문자를 사용해 왔으나 1917년 혁명이후에는 라틴문자의 표기법이 개발됨. 이것이 1939년 소비에트 문화를 러시아화하기 위한 스탈린의 노력의 일환으로 시릴릭 표기법으로 바뀜. 1994년에 다시 라틴표기법이 재기되어 초등교육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시하다가, 2001년부터 공식적인 모든 정부문서 및 신문 등 공적게제에는 라틴표기법을 사용하도록 제정하여 실시되고 있음.

○ 구소련의 다른 민족과는 달리 투르크멘 종족들은 러시아화 운동에 저항을 해왔고 그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투르크멘인들은 투르크멘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며 러시아어를 말하지 않음. 그러나 지역 상권과 대부분의 공식 사업관계에 있어서는 여전히 투르크멘어보다 러시아어가 좀더 공식적인 언어로 받아들여지는 편임. 특히 아쉬가바드와 같은 도시에서는 대화 중에 투르크멘어에서 러시아어로 자유롭게 전환하는 사람이 많음.


복장


○ 서구사람들에 비해 투르크멘인은 항상 깔끔하게 복장을 갖추려고 노력하는 편. 남자들은 보통 넥타이와 깨끗한 구두에 정장을 입고 여자들은 아주 화려한 색상의 긴 드레스를 입음. 이것은 부를 과시하는 의미에서라기보다 예의를 갖추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것임.

○ 공공장소에서 단정치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김. 하지만 집안에서는 손님이 있건 없건 자유로운 복장을 선호. 이에 반해 이 지역에 같이 사는 러시아인들, 특히 여성들은 전혀 다른 의복문화를 가지고 있어서 긴치마와 긴소매, 머리에는 스카프를 둘러쓴 투르크멘여인과 짧은 미니스커트에 티셔츠를 입은 젊은 러시아 여성들의 대조되는 의복형태를 볼 수 있음.


교육


○ 투르크메니스탄의 초중등 교육체제는 구 러시아 때의 11년, 또는 12년의 의무교육제도를 폐지, 9년으로 축소 확정.

‘멕뎁’이라고 부르는 이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4년제 종합대학(우니버시테트) 이나 단과대학(인스티투트)을 진학할 수 있는데, 2년 동안의 정부관계의 인턴쉽 취업, 군대복무, 또는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활동(예를 들면, 예술, 체육 등)들을 하여 직장의 추천을 취득한 후에야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음. 대학교육도 정부가 학비를 전담하는 무료교육으로 되어 있으나, 입학을 하려면 엄청난 수준의 입학뇌물 또는 출신배경에 따른 입학청탁이 없으면 거의 입학이 불가능할 정도. 동시에 대학교육의 정원을 제한하고 교육계에 일하는 교수 및 교직원들의 일자리를 축소시킴으로써 고등교육을 제한하고 있음. 또한 투르크멘 내에서는 외국에서 취득한 학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외국에서 공부한 유학파들의 국내활동을 저지하려 함. 이러한 교육체제는 한 마디로 말하면 ‘우민교육’ 정책이라고 볼 수 있음. 가능한 국민들의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한하고, 외부와의 정보, 지식을 교환하고 지식을 확장시키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국민들을 무식하게 만들고 바보가 되게 함으로써, 비판의식을 통제하여 철저하게 자신독재체제의 위치를 강화하려는 의도로 보임. 동시에 투르크멘 내의 국립대학의 종교학과를 제외한 어떠한 학교체제 내에서도 쿠란(이슬람의 성전)교육을 금지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은 원리주의 이슬람들이 쿠란교육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도 금지하고 있음. 4년제인 종합대학과 단과대학 외에도 2년제의 직업훈련 중심적 콜리지(College)제도가 있음. 따라서 부실한 교육내용과 짧은 교육과정에 만족치 않는 고소득권력층의 자제들은 많은 사교육에 의지함.


종교


○ 투르크메니스탄의 종교인구 분포는 이슬람교(수니파) 89%, 동방정교 9%, 기타 2%임.

○ 이슬람 정교 : 순니 이슬람의 ‘하나피’ 파에 속한 투르크멘 종족은 과거 70년간의 소련 공산 치하에서 이슬람 성전을 비롯한 다른 예배장소들은 폐쇄를 당했고 유물론적 세계관이 모든 교육과 사상을 지배. 그러나 1991년 독립이후 투르크메니스탄의 이슬람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어 이슬람교는 번성하기 시작함. 이슬람 성전인 메짓(모스크)이 다시 개방되고 하루 다섯 번 기도를 알리는 애잔(이슬람 물라가 마이크를 대고 크게 코란을 읊으므로 기도시간을 알리는 방법)이 재개되는 한편, 대학에서는 이슬람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종교학과가 신설. 여러 개의 이슬람 성전이 새롭게 건축됨. 하지만 소련 문화의 영향으로 이슬람은 투르크멘 사람들에게 신앙이라기보다는 그로 인해 민족적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노력으로 보여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에 대해서도 거의 알지 못함. 최근 터키의 문화와 이슬람교육에 초점을 둔 터키 학교들이 생겨났고 이란정부도 아쉬하바드에 대규모 이란 문화관을 설립. 이렇듯 증가하는 투르크메니스탄 내에서의 터키와 이란의 종교적 영향력에 대해 보통 시민들도 그들의 동기를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음.

○ 민속 이슬람 : 소련 치하의 종교성 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나이 많은 투르크멘인들 가운데는 개인적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자하여 민속 이슬람을 통한 종교활동을 이어옴. 이 민속이슬람은 원래 투르크멘이 갖고 있었던 샤마니즘적인 요소와 이슬람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종교적 형태이며 독립이후 이러한 활동은 상당히 널리 퍼지게 됨.

○ 악한 눈 : ‘악한 눈(괴즈데그메)’을 믿는 것은 도시나 지방을 막론하고 투르크멘인들에게는 매우 흔한일임. 예를 들어 신생아를 보고 귀엽고 예쁘다고 칭찬하는 것조차 아기에게 ‘악한 눈’을 심어놓는다고 생각하여 용납되지 않음. 왜냐하면 아기를 칭찬할 때 말하는 사람이 질투심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아기를 저주한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임. 이러한 저주를 끊기 위해 투르크멘 사람들은 공식처럼 정해진 말을 세 번 반복하기도하고 처음부터 ‘악한 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코란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종이에 써서 삼각주머니에 꿰메어 휴대하는 등 여러 가지 처방이 있음. “악한 눈이 당신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라는 의미의 “퉤이레미”라는 말이 ’잘했어‘라는 표현으로 흔히 쓰임.

○ 낙타 털 : ‘악한 눈’을 비롯하여 다른 않좋은 일을 예방하는 대책으로 흔히 낙타털을 많이 사용함. 대부분의 차에는 운전대나 거울에 낙타털이 매어져 있는데 이것이 위헙으로부터 차를 보호한다고 믿고 있음. 또한 여자들은 낙타털로 만든 팔찌를 만들어 끼고 다니기도 함. 또한 낙타털은 병을 고치는 힘이 있다고 믿어 만약 임신한 부인이 예정일을 넘기면 아이를 낳기 위해 낙타 밑으로 지나가야 한다고 믿음.

○ 후다이 욜리(신의길): 투르크멘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표현으로 ‘후다이 욜리’ 즉 ‘신의 길’ 이라고도 말함. 예를 들어 가족 중에 돌아가신 분의 기일이나, 아들이 군대에서 무사히 돌아오거나 기타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면 볶음밥(파로브)을 만들어 이웃의 모든 사람들을 초대하고, 종종 이슬람 선생인 뮐라를 초청하여 코란을 읽히고 기도함. 사소한 경사가 났을 때는 빵이나 후식을 넉넉히 준비하여 이웃에게 나누어주기도 함. 이렇게 함으로써 알라가 그 가정에 앞으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할 것이라고 믿음.

○ 길일 : 투르크멘 사람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을 길일로 여김. 긴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일, 혹은 어려운 일을 시작할 때 이러한 길일에 택함. 수요일은 투르크멘 고어로 ‘챠샨베’ 즉 ‘4’라고 하는데 그 날에는 사방이 모두 열려서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고 믿음. 금요일은 무슬림의 성스러운 날이므로 길일로 여김.







'2010 세계대백제전'을 준비중인 안희정 충남도지사를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다. 대백제전이라니,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하나씩 들고 나오는 무분별한 지역 행사 중의 하나는 아닐지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출발해

부여에 
도착했다. 최근 성남시가 재정 악화로 모라토리엄 선언을 했듯 그간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유치하고

남발했던
지역 행사들도 상당수 지지부진한 채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상황, '대백제전'은 부디 그런

'나쁜 예'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취재 전에 '대백제전', '안희정'에 대해 미리 검색해보고 조사하는 것은 필수, 여러 정보 중에서도 최근

시사지에서
봤던 기사 한 꼭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가 기획해 심대평 지사 시절 시작했고 올해 축제를 앞두고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완구

전 지사는
이 축제를 국제 행사로 키워놓았고 안희정 지사가 마무리를 하게 된 것이다."

"
안희정이 백제에 빠진 까닭(시사IN, 151호)".

라는 내용이 있을 만큼 오랜 준비 기간을 거친 세계대백제전, 안희정 지사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2010 세계대백제전이 펼쳐질 부여의 '백제문화단지', 그 중에서도 고대 국가의 궁궐을 최초로 복원했다는

부여궁(사비궁)과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굴된 능사를 복원한 공간을 안희정 지사와 함께 돌아보며 '대백제전'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눠보기 전, 간단한 브리핑이 있었다. 4000여 억원의 공사비가 투입되어 330만㎡

(100만 평)
대지에 건립된 아시아 최대의 역사 테마파크라는 백제문화단지, 1994년에서부터 근 20년 걸려

지어진 셈이다.


아시아 최대니 뭐니, 그런 거창하고 알맹이없는 수사보다, 무엇보다 놀랐던 사실 하나는 세계대백제전은 기껏

몇년 된 다른 지자체 행사와는 달리 올해로 57회를 맞는 연원깊은 행사라는 것. 일제시기 낙화암에서 나라잃은

백성의 비애를 달래던 부여/공주 지역행사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안희정 지사는 그런 역사적 연원을 강조하며

이 행사가 여느 지자체 주관의 행사들과는 다르게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성원과 지지가 있음을 강조했다.

사비궁에 들어서며 설명을 듣고 있는 안희정 지사. 그는 백제 문화와 역사가 그저 피상적인 암기와 이해에

머물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사실 '백제'라는 고대 국가의 이름이야 너무도 익숙하지만 그에 걸맞는 이미지나

깊이있는 지식이 있었던가. 북한과 남한이 각각 국가 정통성의 연원으로 '고구려'와 '신라'를 상대적으로

부각하던 사이, 1400년 전의 이 화려한 고대국가는 점점 그 흔적을 잃어가고 있었던 거다.

그런 점에서 세계대백제전을 통해 잊혀졌던 역사를 다시금 기억해내고, 재구성해내어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역사문화적 저력을 재발견하려는 것이 대백제전의 목적이라 한다. 외국에 나갔을 때 고작 삼성 반도체, 현대

자동차 따위 최근의 공산품 제조능력만으로 식별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문화적 저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나 자신의 한국인으로서의 품격이 존중받길 바랍니다"라는 게 안희정 지사의 바람이다.


들으면서 꽤나 거창한, 그렇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지구촌 유지'의 일원이

되었음에 천박한 황금이빨을 드러내며 으스대기 바쁜 게 지금 한국의 문화적 소양이랄까, 수준인 터다.

그에 더해 필요한 건 문화적 자존감과 정체성의 풍요로움. 백제는 분명 그 중요한 수원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담이불루 화이불치'라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문화의 정수를 찬탄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에 잘 살려내는 건 우리 후손들의 몫.

사비궁은 삼국시대 왕궁의 모습을 최초로 재현한 것으로, 아무런 잔존 건물이나 흔적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꽤나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와 영향을 주고 받았던 수, 당, 남송은 물론 왜의 당대 자취를

추적하고 고증을 거치면서 탄생한 궁전이지만 당연히 원래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거다.

역사도 마찬가지, 지금 우리가 불러내는 '백제'의 기억이란 지금 이시대의 요구와 필요성에 의해 제약받을

거다. 당장 낙화암 인근에서 대백제전 기간에 벌어진다는 '수상공연'이 4대강 정세와 맞물려 미묘한 파장을

낳고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안희정 지사도 그런 부분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 했다. 한국의 토담 문화가 벽돌이나 석재를 위주로 한

여타 문화에 비해 시간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금세 지워지기 쉬우나, 가능한 한 기록과 보전을 통한 역사문화의

계승은 꼭 필요하다는 것. 20세기식의 민족주의 혹은 국수주의를 극복하며, 동시에 현시대의 정치적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사비궁을 돌아보고 점심까지 함께 하며 좀더 심도 있는 질문들을 나눴다. 내가 했던 첫 질문은, 대백제전을

이렇게
커다란 규모로 준비하고 있는데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백제문화, 조금 좁혀 대백제전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를 제시해 준다면 무엇인지
였다.


안희정 지사의 답.

백제의 키워드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대백제전의 키워드는 첫 번째로 역사무대를 소재로 한 지역의 축제이고, 두 번째로는 백제의 역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자체가 이번의 가장 큰 목표이다.

해상왕국으로서의 백제, 아시아권 질서내에서의 백제, 불교문화의 중심으로서의 백제, 향후 대백제전이 어떠한 주제의 컨셉을 가지고 볼것이냐가 앞으로 개발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역사문화축제라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국가중심의 역사로부터 땅의 사람의 역사에 대한 문화에 대한 관점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국가의 역사로부터 백제의 역사는 있지만 한반도 어느 한 지역을 차지했던 이 땅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체계적으로 그 역사와 문화 속에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백제문화제의 초창기 55년, 56년 백제문화가 열렸던 초반기에는 국가의 패망을 애석해하는 유민의 심정으로 연민의 마음으로 행사를 치루었다면 올해 세계대백제전은 이 지역사로서의 백제의 지역역사에 대한 주목이 첫 번째 컨셉이고 역사에 대한 인식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온조 이야기를 주제로 한 사마(왕) 이야기, 사비미르 (부여의 용) 의자왕을 주제로 한 수상공연과 삼국시대의 궁터, 백제의 궁터 재현단지가 이번 축제기간에 주목받는 컨텐츠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사비궁과 능사를 둘러보던 옷차림은 참 편안했다. 등산객들이 흔히 쓰는 편한 모자, 그리고 한 손에는

플라스틱 부채를 쥔 채 캐주얼 차림이었다. 그의 말투 역시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맛이 느껴지는, 그리고

무엇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성과 열정이 전해지게 만드는 그런 느낌.

그리고 두번째 질문, 외국인 관광객을 20만명으로 잡고 있었는데 이들을 유치하기 위한 구체적인

복안이
준비되어 있는 건지. 주로 어떤 국가의 관광객이 타겟이 될지.


안희정 지사의 대답.

20만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 대다수는 일본인 관광객이 차지할 것이다. 주미대사가 열심히 홍보대사 역할을 해주실 것이다. 샤프 사령관등 주한미군 가족들이 백제역사 축제에 많이 참여를 할 것이고 한국에 살고 있는 많은 미국인들의 관광도 예상하고 있다.

일반 기업인들도 한국 내에 들어와 있는 많은 외국인 바이어들을 실질적으로  대접을 잘하고 싶다면 백제재현단지 문화를 보여줌으로써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1400년 전 패망했던 백제유민의 심정으로 역사를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반도가 아시아의 질서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우리의 조상들이 어떠한 생활반경을 가졌는지를 주목해 본다면 아시아 평화와 질서를 만드는데 상당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본다.


안희정 지사는 2010 세계대백제전이 가진 커다란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무엇보다 사람들이 함께 즐기며

또다시 이 시대의 기록을 쌓고 추억을 만들어가려면 재미있고 내실있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함께 강조했다. 그가 가장 자신있게 추천하는 공연은 바로 '사비미르 수상공연'. 꼭 한번 다시 와서 1400년 전

백제의 문화와 분위기를 흠뻑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백제전 홈페이지 : www.baekje.org/html/kr )



덧댐. 백제문화전과는 상관없이, 안희정 지사에게 궁금한 점 하나가 있어 트윗 친구를 빌어 질문을 했다.

안희정 지사(@steelroot)는 평소 활발한 트윗을 하는 걸로 유명한데 요새 트윗 세계와 바깥 세계와의

온도차가 심하게 나는 건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지. 대체 왜 그럴까, 하고. 대답이 궁금하신 분은 그에게

다시 물어보셔도 좋을 듯.




 

중국의 '공안'들이 열맞춰 걷는 이곳, 상해 엑스포 출입문 앞이다.

딱히 각이 칼처럼 잡혔다고 말하긴 힘들어도, 최소한 저 파란 신호등 불빛 속에서 걷고 있는 녀석만큼의 절도는

있어 보인달까. 이리저리 각자의 구역 내에서 왔다갔다, 돌고 있는 공안들.

아직 엑스포 공식 개관 전이어서 스탭들만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출입구는 꽤나 엄중했다. 오죽하면 공항보다

더욱 철저하게 몸수색도 구석구석 한다고 다들 혀를 내두를까.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더듬더듬, 감정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스킨십을 감내해야 했다.

심지어는,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면 한번 찍어보라고 시킨다. 카메라를 가장한 뭔가가 아닐까 싶어서 그렇단다.

그래서 찍힌 한 장의 사진. 물이나 음식류의 경우엔 한번 마셔보고 먹어보라고까지 시킨다고 했다.

임시 출입증의 앞면과 뒷면. 스티커는 중국 공안이 인증했다는 비표 역할을 할 거다. 뒷면에 찍힌 붉은 별

도장이 멋지다.

상해시 역사관, 왼켠엔 일본산업관. 푸서지역의 1번 출입구쪽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두 개의 전시관.

일본산업관은 한국기업연합관과 더불어 엑스포 사상 최초로 '연합관'의 형태로 들어간 전시관이라고 한다.

여러모로 일본과 한국은 서로를 의식하고 경쟁하게 되는 듯. 2002 월드컵 때도 그랬지만 대개의 경우 후발주자,

혹은 역사적 피해자로서의 복수심이랄까 오기랄까. 그런 게 작용하는 면이 없지 않아 보이긴 한다.

그리고 눈앞에 나타난 한국기업연합관. 엷은 하늘빛을 띄고 있는 외관이, 꼭 어렸을 때 좋아라 먹던 그 뭐더라,

아이스크림 색깔이 떠올랐다. 왜 우윳맛 진하게 나던 하얀색 알맹이 겉에 딱 저런 색깔을 한 샤벳같은 게

코팅되어 있던 아이스크림. 캔디바던가. 뭐였지...;

여기도 열지어 대기중인 중국 공안들. 고생들 많으십니다 그려.

산뜻해 보이기도 하고, 가벼워 보이기도 하고, 뭔가 바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처의 하수구 뚜껑들은 이미 검침을 완료하고는 봉인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손을 타선 혹시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예방하기 위한 철저한 조치들이다.

아직 개관 전인지라, 동선 중간중간을 폴리스라인이 끊어두고 있었다. 왠지 여기저기 쑤시며 사진찍다가는

카메라째 뺏겨버릴 듯한 살벌한 분위기. 지들 기분 거스르면 언제든 출입증 좀 보자고 들이대는 녀석들인지라.

아, 엑스포장 내에서는 금연이라며 담배나 라이터를 가진 사람은 전부 압수당한다고 했다. 쓰레기도 이렇게

몇 가지 종류로 나누어 버리도록 해두었고. 아무래도 주제가 친환경 쪽이니까 그렇겠지만 글쎄.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고작 180여일 쓰자고 각 국가들이 거창하게 지어둔 건물들이 내어놓는 건축 폐자재니 쓰레기부터

어떻게 줄이려고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닐지.




세계 곳곳의 풍경은 골목길 구석까지 샅샅이 훑어볼 수 있게 되었다지만, 우리 동네의 오래 전 풍경은 좀처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거다. 서울 삼성역 일대의 풍경 역시 80년대까지만 해도 비가 조금만 오면 물웅덩이가

사방에 포탄자국처럼 생겨나는 '깡촌'이었다던가.


당시에도 지금과 같은 장소에 봉은사는 그대로 있어서 그걸 기준삼아 대충 코엑스는 어디, 트레이드타워는 어디,

아티움은 어디, 한전 건물은 어디 등등 위치를 잡아볼 수가 있다. 어둠의 경로를 통해 얻어낸 삼십년 전 항공사진,

그러고 보면 참 순식간에 변했다.

삼십년 전, 정확히는 1982년에 국제무역박람회장을 준비했던 장소다. 뒤로 보이는 숲속 한옥이 바로 봉은사.

사진의 발색이 살짝 희미해지고 바랜 듯한 느낌이어서 그런지 봄날 아지랑이처럼 아련하다.

80년대 초만 해도 칼라사진과 흑백사진이 혼용되던 시기였나보다. 사진 오른쪽 쯤에는 타이어 모양으로 생긴

종합운동장이 세워질 테지만 아직은.

저 너머 보이는 숲은 선릉. 아마도 좀더 이전에는 이 근방이 모두 저렇게 숲이었을 텐데, 야금야금 땅따먹기

해서는 지금 저만큼 남을 걸 테다. 왼쪽으로 쭉 올라가는 테헤란로는 그냥, 신작로 하나 덜렁 난 느낌.

88년에 삼성역 옆에 들어차는 종합무역센터 신축 현장. 54층짜리 무역센터랑 코엑스, 현대백화점, 인터콘호텔,

도심공항터미널 등이 한 곳에 집결하게 된 곳이다. 이곳에 그런 고층 건물이 들어서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믿거나 말거나라지만, 88년 서울올림픽 때 종합운동장 전경을 전세계에 생중계로 내보낼 때 뒷배경이 너무

허해 보인다는 '쩌~ 위'의 지시가 있었다나.

봉은사 꽤나 뒤숭숭했겠지 싶다. 이런 커다란 공사장이 코 앞에서 온갖 소음을 내며 쉼없이 돌아갔을 텐데.

그리고 2010년. 현재의 삼성역 인근 전경이 찍힌 항공사진이다. 상전벽해.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지만

정말, 삼십년도 채 안되었는데 논밭이 빌딩숲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래도 봉은사와 선릉이 녹색벨트처럼 단단히

매여 있어서 다행이지 싶다. 누군가 백투더 퓨처했을 때 알아보기 쉬운 징표들.

서울이라고 전부 고층건물이 즐비하고 끝없는 마천루를 가진 건 아니어서, 조금만 시 변두리로 나가도 굉장히

낯선 풍광에 당황할 때가 있다. 신작로 하나 덜렁 났었던 테헤란로 인근은 그래도, 가장 '국제도시' 서울의

이미지에 값하는 풍경인 거 같다. 고작 한세대, 삼십년동안 이렇게까지 극적으로 풍광이 바뀌어버린 동네라니,

압축적으로 달려온 한국의 경제발전상을 실감케 하는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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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 536회 (4) " 동혁이형 국사선택과목 유감"  2010-02-28 방송. KBS 찜,  Powered by VMark>

KBS ‘찜’은 KBS 컨텐츠의 편리한 시청, 공유를 위해 무료로 제공되는 서비스입니다.


굳이 이름을 알리고 싶지도 않은 어떤 시민단체는 동혁이형의 개그가 "국민을 賤民(천민) 혹은 暴民(폭민)화"

하는 포퓰리즘에 기반한 선동이라고 비판하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제2의 김제동 꼴이 나는 건 아니냐,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반면 '개그는 개그일 뿐, 정치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비판도 있네요.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건 초점을 흐릴 수 있으니, 단지 '국사 문제'에 한정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합니다.

국사 과목이 무슨 골라먹는 아이스크림이야, 우리 역사에 간주점프 버튼 계속 눌러댈 거야, 독도는 노래만

줄창 불러대며 지킬 거야, 라는 동혁이형의 샤우팅에서 틀린 부분을 좀처럼 찾기가 어려운 건 제가 과문한

탓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기사화되지 않고 있는 요미우리 신문과 청와대 간의

진실게임이 보여주듯 오히려 더욱 제대로 된 국사교육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독도는 우리땅', '한민족의 우수성' 따위만 강변하는 교육을 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겠죠. 어쨌거나

'근대 민족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의 역사를 민족단위로 쪼개서 땅따먹기하다 보니 일본과 부딪히고, 중국과

부딪히고 그러는 거니까요. 역사에 대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공통교재를 발간하는 작업이 중요한 게 바로

그런 부분에서 서로의 과잉한 민족적 내러티브를 줄이고 보다 냉정하고 차분한 시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동혁이형의 개그를 그들의 '선전선동'을 위한 불쏘시개로 써먹는 역겨운 시민단체-그 시민에서 저는

좀 빠졌으면 좋겠습니다만, "XXXX시민(빼기 이채)연대"라고 말이죠-로부터 그의 개그를 지키고 싶은 맘에

이번 나눔을 진행합니다. 개그가 담고 있는 내용이 맞고, 개그가 재미있으니 그의 샤우팅에 푸쳐핸졉~해서

호응해주고 싶습니다.


하여, '한일역사 공통교재'로 한국과 일본 연구자/교사들이 10년에 걸쳐 완성한 한일 양국의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를 다룬 책을 이번 나눔으로 내놓기로 했습니다. "한일 교류의 역사"라는 책인데요, 총 세 권입니다.

동혁이형이 마지막에 말한 대로 선택과목으로 아무리 괄시한다 해도 찾아서 배우고 공부하면 되는 거겠죠,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조금더 균형잡힌 성숙한 시각으로 읽고 싶은 분들, 푸쳐핸접~*


                        ----   제7차 동시 나눔 마당 응모 안내  ----

   * 응모 기간 :  롸잇나우~3월 12일 (금) 24:00
   * 응모 방법 : 이 글 밑에 신청 의사와 이유를 댓글로 남겨 주세요!
   * 선정 조건 : ① 
직접 쓴 본인의 국사교육 관련 포스팅을 엮어 나눠 준 분, 우선 선정
                        ③ 댓글로 신청 의사와 그 이유를 남겨주시는 분, 선정
  * 선정 발표 : 3월 13일 (토)

  * 책 배송 : 3월 15일 (월), 우체국 택배로 발송 예정

한일 교류의 역사 - 8점
한국역사교과서연구회 엮음/혜안



* 이 포스트는 blogkorea [블코채널 : 블로그와 나눔] 에 링크 되어있습니다.   





약사

인도 역사의 특징

인도는 다양한 인종, 종교, 언어, 생활풍습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대륙과지리적으로 차단된 특수성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화를 이루어 왔음.

○ 5,000년 이상의 긴 역사 중 정치적 통일을 이룬 시기는 마우리아왕조(B.C.321-185), 굽타왕조(A.D.380-606) 및 무갈왕조(A.D.1526-1858) 등 3개 왕조에 불과하며, 북서부지역은 외부세력 침입의 출입구가 되어 그리스, 훈, 터키족 같은 외부 세력과의 항쟁 속에서 성쇠를 거듭하였으나, 데칸고원 등 남부지역은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외부세력의 침입을 비교적 적게 받아 왔음.

고대

○ 인더스 문명(기원전 3000-2000)

- 세계 4대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3,000~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으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의 유적이 있음.

- 고도로 발달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단계로서, 종교는 다신교, 정치 체제는 제사장 중심의 공화제를 형성함.

○ 아리안 문명(기원전 2000-1000)

-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 부분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 침입 후 정착하면서 이루어졌음.

- 사제 계급인 브라만 중심의 제사 의식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이 집대성된 리그베다 등 베다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됨.

○ 도시국가의 형성

- 기원전 7세기경에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도시국가들을 건설

- 정복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마가다 왕국은 알렉산더왕의 침입 때까지 난다 왕조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기원전 500년경 불교 및 자이나교가 발생함.

중/근세

○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321-185)

- 3대왕인 아쇼카왕(BC 272~232)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고, 포교에 힘써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함.

○ 쿠샨왕조(78-226)

- 쿠샨족 카니슈카왕이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중국의 한나라, 남쪽으로는 인도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함.

○ 굽타왕조(380-606)

- 찬드라 굽타 2세(380-413) 시대에 문화적 르네상스를 구가하였으며, 불교, 힌두교 및 자이나교 등이 융성, 부흥했음.

○ 무굴제국(1526-1858)

- 데칸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제국이 건설되었고 악바르 이후 150년 간 전성시대가 지속됨.

- 이슬람교가 번성하여 타지마할 등 이슬람 관련 유적을 남김.

- 1707년 이후 지방토후의 발호,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약화됨.

- 1757년 영국이 프랑스와의 플랏시 전투에서 승리함.

- 1857년 영국이 세포이 반란을 진압한 후 영국의 직할지로 편입됨.

근대

○ 반영 독립투쟁

- 18세기 후반에 생겨난 많은 정치단체 중, 1885년 결성된 "인도 국민회의"가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함. 특히,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냉담한 반응에 대응하여 보이콧 및 스와데시 운동이 전인도로 파급되게 됨.

-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취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영국의 배후 지원을 받은 회교도 연맹을 결성함.

- 1차 대전 이후 인도 국민회의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하에 영국이 제시한 자치령 지위를 거부하는 등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많은 인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반해 회교도 연맹은 파키스탄의 분리를 요구함.

○ 독립

- 2차 대전 후 영국은 인도에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방안을 제시한 바, 동 제안을 국민회의가 수락함으로써 인도는 1947.8.15 영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게 됨.

현대

○ 인도 헌법 채택

- 1947년 8월 15일 독립과 함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초대 인총리에 취임한 후, 1949년 제헌의회에서 연방제와 민주주의를 골자로 한 헌법이 채택되고, 1950. 1월 발효됨으로써 영연방 자치령의 지위에서 탈피함.

○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강화

- 한편, 독립 당시부터 파키스탄과는 종교적, 영토적 분쟁으로 1947. 10월, 1965. 6월, 1971. 12월 등 3차례 전쟁을 치뤘으며, 중국과는 국경문제인해 1962년 전쟁을 겪는 등 주변국들과 마찰을 겪기도 했으나 비동주의와 균형 및 실용주의를 적절히 추진함으로써 꾸준히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강화시켜 옴.

○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 시현

- 국내 정치적으로 국민회의당(Congress Party)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추진해 오다가 1990년초 경제상황 악화에 따라 1991년 신경제정책을 채택하여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실시함. 1990년대 이후 국내 정치권력은 국민회의당․BJP 양대 정당과 군소 정당들이 합종연횡하면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오고 있으며, 경제개방 및 개혁의 성과로 꾸준히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시현하고 있음.

정치 개황

국내 정치의 특수한 여건

인도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주는 주요 요인으로는 일반국민의 민주의식, 언론자유의 보장, 관료제도, 군부의 중립성, 사법부의 독립 등 긍정적인 요인들과 카스트 제도, 종교간 대립, 빈부격차, 지방주의, 취약한 정당기반 등 부정적인 요인들이 있음.

○ 인도의 고질적 사회풍습인 카스트제도를 타파하고 특히 전체국민의 22.5%에 해당하는 최하층민(Scheduled Caste와 Scheduled Tribe)과 52%에 해당하는 하층민(Other Backward Castes)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 문제는 인도정치가 안고 있는 최대 과제 중의 하나임.

- 오랜 인습은 타파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무력충돌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음. 2006년에는 정부의 OBC에 대한 국립대학 입학할당제도 도입 방안추진계획을 둘러싸고 찬반논쟁이 가열되기도 함.

헌법과 정부형태

○ 1950년 1월 26일 공포된 헌법은 22장 395조 및 부칙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특징은 아래와 같음.

-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 공화국 표방

- 종교 무차별주의로 신앙의 자유 허용

- 주정책에 대한 지시지침(Directive Principle of State Policy)을 통해, 부의 공정하고 적절한 분배 및 생산수단의 집중방지 규정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연방국가로서 의원내각제의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음.

- 연방은 28개 주(state, 2000년도에 3개 주 신설)와 7개 연방 직할지(Union Territory)로 구성

○ 각 주에는 주 정부와 주 의회가 있음. 주를 대표하는 주지사(Governor)는 5년의 임기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주행정의 실권은 주지사가 주 의회 다수당 지도자 중에서 지명하는 주 총리(Chief Minister)가 장악함.

입법/행정/사법부

○ 상원(Rajya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의회에서 간접 선출되는 238명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12명 등 총 25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6년으로 매 2년마다 1/3씩 새로 선출함.

○ 하원(Lok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대표 543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Anglo-Indian community 대표 2명 등 총 545명으로 구성하며, 임기는 5년임.

행정부는 대통령, 부통령, 총리 및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로 구성됨.

-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상‧하 양원 및 주 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하여 간접 선출되며,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 역할 수행함.(군 최고통수권 보유)

○ 사법부는 연방 대법원(Supreme Court of India), 주 최고법원(High Court), 지방법원(Lower Court)으로 구성되는 3심제임. 대법원은 인도 헌법과 법률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권을 가지며 대법원의 판결은 모든 법원에 대해 구속력을 가짐.

외교

대외정책의 기조

1947년 독립이후 인도의 외교정책을 지배해 온 기본적 원칙은 “네루외교노선”에서 비롯된 비동맹주의와 균형주의 원칙이며, 이와 같은 외교기조는 인도가 처한 특수한 외교 및 안보환경 즉, 광대한 국토와 복잡한 사회적 구조로 인해 국가적 단결이 독립초기의 최대의 관심사였고 대외정책 선택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책결정을 내리기 곤란한 국내적 제약조건에 기인한 것이었음.

- 인도는 독립 당시부터 패권주의 반대, 군사동맹 가입 반대, 국제분쟁평화적 해결 및 모든 국가와의 우호관계 수립 등 비동맹회의와 유사기본이념을 대외정책의 기본노선으로 표방하면서 비동맹운동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비동맹주의를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아 왔음.

최근 외교정책 노선

점차 과거 비동맹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고도 경제성장의 지속적 달성을 위한 실용주의적, 친서방적 외교정책 노선을 강화하는 추세이며,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강화가 아시아의 세력 균형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

- 1990년대 후반 이후 현저하게 대미국관계 강화를 시도하는 실용주의 노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2004년 재집권한 Congress당 중심의 UPA 연합 정권 하에서도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고 있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등 부상하는 global power로서의 국제영향력 확대 노력을 가속화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G-4와의 협력 유지를 통한 외교노력을 경주하고 있음.

서남아 지역의 중심국가로서 지역분쟁 예방, 정세 안정화 및 역내 영향력 유지․확대를 위한 외교적 지도력를 추구하며, 특히 주변국가들에게 군림하던 과거의 형태를 벗어나 서남아지역연합(SAARC)의 활성화 등을 통한 전향적이고 유연한 지역 외교 노선으로 전환중임.

고도 경제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확보를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의 하나로 추진하고, 특히 원자력 에너지협력을 위해 미국, EU, 러시아, 중국 등 기존 핵보유 국가들의 지원 확보를 위한 다방면의 외교노력을 기울이고 있음.

○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출범을 통한 장기적 East Asia Community 구상 추진, ASEAN과의 FTA 협상 마무리, 한국과의 FTA(CEPA) 협상 개시, 중국 및 일본과의 FTA 타당성 검토 등 동아시아권과의 지역 협력 강화를 통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고 있음.

인도-파키스탄 관계

○ 카슈미르 문제는 대 파키스탄 외교정책의 가장 큰 부문으로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이후 카슈미르(Kashmir) 지역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유권 싸움이며 회교와 힌두간의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임.

○ 인도·파키스탄 전쟁

-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 분쟁은 1947년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가 신생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될 당시, 동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77%)를 차지하는 회교도측이 파키스탄에 귀속코자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하에 반란을 일으킴. 이에 대해 동지역의 힌두교 영주(Maharaja)가 인도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1947. 10월 제1차 인도·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UN의 거중조정에 따라 휴전선이 설정됨.

- 1965. 7월 양국간 다시 전쟁(제2차 인·파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UN 안보리의 노력으로 휴전됨.

-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파 전쟁이 발발

○ 2003년 양국 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는 노력과 동시에 그동안 끊겼던 항공 운항을 2004. 1월부터 재개하고 2005. 10월 발생한 대 지진과 관련 카슈미르 지역에서 양국 공동 구조 활동을 펼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음.

○ 그러나 2006. 7월 뭄바이열차 연쇄폭탄테러로 인해 약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도 측은 동 테러를 일으킨 단체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을 이유로 7월에 예정되어 있는 외교차관 회담을 무기한 연기함.

2006. 7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개최된 SAARC 상임위원회(Standing Council) 회의를 계기로 양국 외교차관 회담에서 양국은 평화구축 과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공감하였으나, 구체적인 다방면 대화의 추후 일정은 정하지 못함.

○ 2006. 8월 파키스탄이 자국내 인도 외교관을 외교관 신분에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혐의로 추방하자, 인도도 맞바로 자국내 파키스탄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함.

뭄바이 테러 사건 발생(2008.11.26-29)

- 10명의 테러리스트가 중무장한 채 해상을 통해 뭄바이에 침투, 11월 26일 밤 10시경부터 동시다발적 무차별 테러 공격 감행함.

- 약 170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테러범 9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하여 테러를 진압함.

-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테러와 파키스탄 당국과의 관련성을 계속 부인해 왔으나, 파키스탄 무장단체 ‘라슈카르에타이바’(LeT)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짐.

- 이 사건을 통해서 군병력의 국경 재배치 움직임이 일어나고 양국간의 갈등이 다시 고조됨.

남아시아 지역협력 연합(SAARC)

○ 국제무대에서의 상호협력을 도모하고 역외개도국 및 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증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아시아국가간 지역협력 기구로서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이어 두 번째로 창설됨.

-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 모색(정치, 군사문제 제외)

-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몰디브, 부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 8개국이 회원국이며, 한국, 중국, 일본, 미국, EU가 옵서버로 가입함.

역내국가간 국력의 불균형과 회원국간 다양한 갈등 및 대립 등 어려운 문제가 있으나 회원국 상호간의 공동체 인식과 함께 협력분위기 조성에 기여하는 바도 있음.

사회

카스트(Caste) 제도

○ 수천 년 간 인도인의 생활을 규율해 온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고, 근대화 및 교육의 영향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관습으로 존재하고 있음.

○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인도를 정복한 후 소수집단인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짐. 피부색 또는 직업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Brahman), 군인‧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ya) 및 천민계급인 수드라(Sudra)로 크게 나누어지며, 이 안에는 다시 수많subcaste가 있음. 최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 있음.

○ 최초에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으나 오랜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 불허 등 많은 금기를 가진 사회규범으로 굳어져 인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행위범을 준수해야 했었음. 이러한 계급제도는 인도사회를 안정시키고 결속시키는데 도움이 된 면도 있다고 하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를 정체시켜 활력을 잃게 하는 부정적 영향이 큼.

마하트마 간디를 포함한 많은 사회개혁운동가들은 불가촉 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면서 불가촉 천민들을 ‘신의 자식’이라는 뜻에서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고, 이들이 힌두 사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천민보호에 앞장섰음.

- 오늘날 인도에는 1억이 넘는 하리잔이 있는 바, 정부에서는 입학, 취업시 일정비율을 하리잔에 배정해 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하리잔 출신이 장관까지 된 경우도 있으나, 농촌에서는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임.

언어

○ 다양한 인종과 더불어 180여종이 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헌법으로 인정한 지역별 공용어는 18개임.

- 힌디어, 텔루구어, 벵갈어, 마라티어, 구자라트어 등

이중 인구의 38.7%가 사용하고 있는 힌디어는 전국적 공용어이며, 영어는 18개 공용어에 해당하지 않으나 의회, 행정부, 사법부 및 사각 분야에서 널리 사용하는 공용어이자, 학력이 높은 층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함.

복장

○ 남자 : 고유의상으로는 도티(Dhoti), 룽기(Lungi), 아즈칸(Achkan), 파자마 등을 들 수 있음. 그러나 도시에는 하절기에 사파리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

- 도티 : 동부‧남부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긴 천을 밑으로 늘어뜨린 후 다시 허리춤으로 올려 동여 입는데 흰색의 얇은 천을 사용함.

- 룽기 : Kerala 등 해안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좁은 폭의 천을 늘어뜨린 후 허리를 동여 입음.

- 아즈칸 : 네루 전 총리가 즐겨 입었던 목이 올라온 제복 스타일의 옷

- 파자마 : 우타르 프라데쉬 주에서는 무릎 아랫부분이 꼭 끼는 추리다(Churidar) 파자마를 입으며 Punjab에서는 헐거운 쿠르타(Kurta)를 입음. 흰색 천을 주로 사용함.

- 사파리 : 하절기(4월-11월)에 많은 도시인들이 즐겨 입는데 공식적모임에서는 점차 양복, 넥타이 차림이 조금씩 늘어가는 추세임.

여자 : 사리(Saree)라는 고유의상을 주로 입는데 지역에 따라 매는 방법, 천의 길이, 천의 개수가 다름.

- 입는 방법은 천을 허리에 감아 맨 다음 어깨에 걸쳐 밑으로 내려 입음. Punjab 지방에서는 사르와르 카미즈(Salwar Kameez)라는 상의가 길고 바지가 넉넉한 옷을 입으며 우타프라데쉬, 라자스탄, 구자라트에서는 가그라(Ghaghra)라는 긴 스커트를 입음.

문화

○ 베다문화(B.C.2000-500)

- 아리안 족의 침입 후 형성된 베다문화는 인도의 종교‧사회‧관습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힌두교를 탄생시켰으며, Veda와 같은 대서사시적인 경전을 발전시켰음. A.D.6세기-10세기를 통해 힌두문화는 건축․조각․회화 등 각종 예술 분야에서 번창했으며 힌두사원 등 많은 기념비적인 힌두문화 유물을 남겼음.

○ 불교문화(B.C.500-A.D.1100)

- 불교문화 전성기는 B.C. 3세기 야쇼카대왕 시대로 산치대탑, 보드가야의 대탑, 녹야원의 석탑, 아잔타․엘로라 동굴 조각 및 건축 예술에서 절정을 이룸. 아울러 불교는 중국, 한국 및 동남아 등 여러 나라로 전파됨.

○ 이슬람문화(A.D.1100-1600)

- 이슬람문화는 특히 건축에서 페르시아 및 힌두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조화를 이룬 대표적 양식으로, 초기의 상호배척을 점차 극복하고 상호간의 종교적 관용이 정착하면서 우루두어의 탄생 등 언어, 문화, 음악, 미술 분야에서도 많은 공헌을 함.

○ 서구문화의 영향(A.D.1700-1947)

- 250년에 걸친 영국 지배하에 인도예술, 특히 전통회화분야에서 서구 예술의 영향을 받음. 또한 영어의 도입과 함께 생활양식의 변화와 문학의 발전을 가져옴. 그러나 힌두문화는 상당부분 그대로 전승됨.

○ 독립이후(A.D.1947-현재)

- 독립 이후, 전통문화 창달과 문화유산을 보호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미술 등의 진흥을 위한 국가적 지원문화재 발굴, 보존, 전시 등을 위한 박물관, 문화재 관리국 등 국가행정기관을 통하여 현재 문화와 함께 전통문화를 조화시켜 나가고 있음.

교육

○ 교육의 기본정책은 지역 간의 교육격차해소, 전 계층 간의 균등한 교육기회, 국가사회 요구에 부응하는 인력자원개발 등에 목표를 두고 14세까지의 무상의무교육, 영어, 힌디어 및 주 공용어 등 3개 언어교육, GNP의 6% 교육투자 등을 통해 중앙정부와 주정부가 공동 노력하고 있음.

학교교육은 10+2+3의 15년 과정의 교육제도로써 1968년도 채택 후 현재 거의 모든 주가 이를 실시하고 있음.

종교

인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Jainism), 시크교(Sikhism) 등 4개 종교발생지이며 이슬람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태교 등 다양한 외래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임.

종교는 인도 국민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종교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종교는 인도인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종교는 인도인의 일상생활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임.

○ 헌법은 모든 종교에 대한 무차별, 신앙의 절대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는 국가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음.

○ 인도의 종교인구 분포는 힌두교 81.5%, 이슬람교 11.2%, 기독교 2.7%, 시크교 2.4%, 불교 0.7%, 자이나교 0.4%, 기타 1.1%임.

힌두교

○ 힌두교는 B.C 2000년경 아리안족 침입 후 최고경전 Veda가 집대성되면서 정치, 사회생활을 지배해 왔으며, 이슬람교 등 이교도의 수세기 동안에 걸친 침략 속에서도 이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하면서 오늘에 이름.

- 드라비다족의 토속신앙, 아리안족의 자연신 숭배 등에 바탕을 둔 다신교인 힌두교는 외래사상과 종교 등에 대한 인내와 관용을 특징으로 하며 생활경험, 도덕, 사회관습, 규범의 총체로서 Dharma(정의 또는 의무)에 따른 수도생활과 최고 정신을 탐구하는 고도의 생활 철학적 종교임.

- 소를 신성시하고 카스트제도를 정착시킨 힌두교는 해외 전파보다는 인도인의 종교로 존속하길 바라는 성향을 띠고 있음.

- 현재 약 8억에 이르는 신도를 가진 힌두교는 인도사회에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종교임.

보건

○ 약 26%의 빈곤층을 가지고 있는 인도는 모든 국민의 건강향상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농촌, 빈민층에 대한 위생, 의료혜택을 확대 실시하고 있음. 특히 UPA 정부는 집권기간 중 GDP의 2-3%를 보건 분야에 투입하되 기초보건에 우선적으로 투자한다는 계획이며,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의 조기 도입과 필수 의약품의 저렴한 판매 방안 마련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음.

○ 지난 30년 간 평균 수명은 31세에서 52세로 사망률은 천 명당 27.4%에서 14.2%로, 유아 사망률은 천 명당 146명에서 125명으로 개선됨. 또한 전염병퇴치를 위한 특별대책을 실시하고 있는 바, 1977년도를 기해 천연두는 퇴치되었으며 학질, 사상충, 나병, 콜레라, 결핵 등의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

○ 1952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출발로 시작한 가족계획은 많은 성과를 가져출생률은 60년대 4.12%에서 1978년도 3.33%로 감소되었으며, 2002년에는 2.38%로 정부는 2001-11년의 10년 간 인구증가율을 16.2% 이내에서 억제한다는 계획임.

관습

인도인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이 사원이나 집안에서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음.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교리나 성찰보다는 수많은 제신들의 형상화를 통한 의식이 주요 신앙생활을 이루고 있으며, 도덕률이나 내세구원보다는 개인의 현세구복에 치중하고 있음.

오랜 카스트제도 하에서 묵묵히 순종해온 생활태도, 불교의 자비와 관용적 사상, 장기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 등의 영향에 기인하는 관용적 태도, 생명존중 사상, 무저항주의 같은 평화주의 사상이 인도인들의 생활 저변있으며,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주의도 이러한 전통적 사상의 계승 내지 발전으로 볼 수 있음.

- 그러나 이슬람-힌두 등 종교, 종파간 갈등 분규가 발생시 폭력사태로 변질되기 쉬우며,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여 외국인의 주의를 요함.

인도인들은 전통과 관습을 존중, 일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며, 보수적 풍속을 벗어나는 외국인은 풍속사범으로 체포, 처벌하기도 함.

인도에서는 금주제도를 실시하는 주가 있으며 일반 식당에서도 금주일이 있고, 판매시간이 제한되어 있음. 주류 판매는 호텔이나 규모가 큰 대중식당에만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임.

○ 매춘은 불법이며, 지역마다 정도의 차는 있으나 대체로 자국인들 간에 이루어지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음.

○ 여성들은 복장법령에 따라 공적 활동시 반드시 전통의상인 사리 또는 사르와르 카미즈를 입어야 하며, 일반대학에서도 여학생들에게 전통의상을 강요하는 사례가 있음.

언론

인도의 언론은 스스로 영국으로부터 독립(1947년)을 쟁취하는데 공헌바 크고, 독립이후에는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높은 긍지를 갖고 있음.

- 개도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언론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며 언론이 여론정치 구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신문 등 정기간행물(약 8,000종)은 대부분이 개인소유로 운영되고 있음. 특히 TV 및 라디오는 방대한 지역과 인구의 1/3 이상이 문맹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보도‧교육‧오락 등 일반적인 방송기능은 물론 정부의 대국민 홍보기능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 인도 유일의 공중파 방송인 국영 TV Doordarshan(DD-TV)은 DD National, DD News, DD India(해외방송) 등의 채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외에 최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민영TV 채널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케이블 TV 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음.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약사

근대 약사

○ 1517년 오스만 터키 지배

○ 1869년 수에즈 운하 개통

○ 1922년 영국의 보호 통치기 종료,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

○ 1948년 이스라엘과의 제 1차 중동전쟁에서 중동 아랍국가 패배

○ 1952년 자유장교단 혁명을 통한 네기브(Neguib) 정권 수립

○ 1953년 군사 쿠테타 이후 공화정 수립

○ 1954년 나세르(Nasser) 쿠테타를 통해 집권

○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발발

○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발발

○ 1970년 나세르 대통령 사망 후 부통령 사다트(Sadat) 대통령직 승계

○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발발

○ 1981년 사다트 대통령 암살 후 부통령 무바라크(Mubarak) 대통령직 승계

○ 1982년 이스라엘의 시나이 반도 반환

○ 1987년 무바라크 대통령 재임

○ 1989년 이집트 아랍연맹 복귀

○ 1993년 무바라크 대통령 3선 당선

정치 개황

이집트의 정치 동향

○ 정치적 안정성

- 1981년 집권에 성공한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대통령 은 2005년 9월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한 직선제에서도 승리함으로 써 2010년까지 임기를 보장 받았고 군부의 지지도 받고 있으며, 의회에서는 집권 국민민주당(NDP)이 2005년 11월 총선에서 원내의석 70%(311석)을 확보하면서 여당에 권력이 집중된 상태임.

- 여당은 2007년 3월 헌법 211개 조항 중 34개 조항에 대한 개헌 안을 통과시키면서 야당인 무슬림형제단의 정치진출을 억제하고, 무바라크 대통령의 차남 가말 무바라크(Gamal Mubarak)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음.

○ 무바라크 대통령이 장기집권하고 있고, 헌법개정을 통해 선거감독에 대한 서법권 소멸, 정당소속의 의무화, 종교 세력 지지기반 정당의 불법화 등을 선언하는 등 반민주적 조치가 취해지자 민주화 및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 더욱 커져가고 있는 상황임.

○ 2008년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18.3%에 달했고 2009년에도 물가상 승률이 10%대를 유지하고 있어 서민층의 정부에 대한 불만이 팽 배해 있고 관련 시위도 간헐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나 정권을 위협 하는 수준으로는 발전하고 있지 않음.

- 사법부 및 반대 세력에 대한 이집트 정부의 통제가 효율적으로 작 용하고 있고,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반대세력의 경우 계파 별로 분열되어 있어 당분간 현 정권의 실질적인 대항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낮은 상황임

- 차기 대통령 선거(2011년 9월)까지 큰 정치적 혼란은 없을 것으 로 전망되며, 현 정부도 차기 대선을 위한 권력 이양 작업에 치중 할 것으로 보임.

외교

대외정책의 기조

○ 대외적으로는 온건 친 서방 비동맹 외교노선을 지속적으로 견지하 며 중동지역 민주주의 실현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자생적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고 이란의 역내 세력 확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갖고 있음.

- 이집트는 지정학적으로 중동 이슬람 문화권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 이고 석유의 보고 페르시아만과 인접해 있으며, 아랍-이스라엘간 의 평화 회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

- 또한 아랍과 무슬림 세계의 지도적 국가로서 국경을 넘어 중동 여 러 인접국가에 정치와 종교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쳐 왔음.

이집트-미국 관계

○ 미국과는 전통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으로 부터 매년 대규모 경제, 군사 원조를 받고 있음.

- 미국은 이집트를 미국의 아랍지역 정책 수행의 보완 및 동반자로 활용하는 대신 이집트는 미국으로부터 매년 20억 달러 가량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어 양국 간 관계는 당분간 큰 변동이 없을 전망임.

- 무바라크 대통령 후계자 역시 미국과의 관계를 크게 흔들지 않을 것으로 보이나, 차남 가말이 집권하면 이집트에 정치적 자유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되면서 미국과의 관계의 변수로 작용 할 전망임.

이집트와 그 외 국가들의 관계

○ EU와는 지리적으로 근접하여 경제적으로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 지하고 있으며, 이집트의 탈 서방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와 중국 과의 관계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임.

○ 2008년 3월25일 이집트 무바라크 대통령은 러시아를 방문하고 러 시아 푸틴 대통령과 푸틴의 후임자로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된 드 미트리 메드베데프와 중동 평화 문제를 포함한 각 종 국제 사회 문제를 논의하며 양국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하였고, 이 집트와 러시아 간 핵에너지 협력 협정을 도출하였음.

○ 중국의 경우 2006년 6월 원자바오 총리가 이집트를 방문하여 상 호 경제 협력 협정을 체결하였고,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 탈 유럽 을 통한 아시아 국가와의 관계 증진을 위한 이집트의 노력과 에너 지 자원 확보에 총력을 다하고 있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상호 일치하고 있음.


이집트 체류 정보

치안 및 유의사항

이집트는 비교적 치안이 안정적인 편이며 외국인에 대해서도 호의적임. 다만 외국인을 상대로 한 바가지 씌우기, 소매치기 등에 주의 요망.

- 일단 분실된 소지품은 찾기가 어려우니 사전에 분실되지 않도록 대비하는 것이 최선임.

○ 최근 이라크 등 중동정세 관련, 한국, 미국 등 이라크 파병국 국민에 대한 반감이 있는 바, 이집트 국민을 자극할 수 있는 발언 (특히 정치, 종교)은 삼가야 함.

○ 이집트는 별도의 신호등이나 횡단보도가 없으며 현지인들의 운전습관이 난폭하여 길거리 무단횡단시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함.

-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으므로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

○ 거리나 대중음식점에서 판매하는 음식이나 음료수를 함부로 섭취해서는 안 됨. 특히 음료수는 탄산음료나 정화된 물 이외에는 가능한 마시지 않는 것이 좋고 식당에서도 국물이 포함된 식사메뉴는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음.

기후

봄철은 3~4월 중 짧게 나타나고 거의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로 바뀌는 기후변화를 보이며 4월말경이면 우리나라의 6월 상순에 해당하는 더위가 시작됨.

5~9월말이 여름철로 한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으며 6~9월의 혹서기에는 38-45도 사이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가 지속됨.

1년중 국지적인 특성으로는 매년 3~5월 사이에 ‘까마신’이라는 사막의 열풍 및 모래바람이 부는데 엄청난 먼지를 수반함.

환전

사용화폐

- 통화단위 : 1 파운드(Pound) = 100 피아스타(Piasta)

- 지폐 : 200, 100, 50, 20, 10, 5, 1파운드, 50, 25 피아스타

- 동전 : 25, 20, 10, 5 피아스타

○ 환전 : 시중은행 및 환전소, 호텔에서 환전가능

- 환율 : 1.00 USD = 5.51800 EGP (2009년 9월 현재)

- 사설환전소의 경우도 은행 환율과 거의 비슷함

- 역환전 : 출국시 이집트화를 달러로 재환전할 경우, 처음 환전시 증빙서 필요(이 경우 하루 30불 이상 지출했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함)

국제 전화

일반전화 이용시

- 00(국제전화) + 82(한국 국가코드) + 2(서울 지역코드) + 번호

- 호텔에서 이용시에는 외부전화 9번을 누른 후 전화번호 입력

수신자 부담 데이콤 전화 이용시

- 365-5641를 누르면 안내방송이 나옴.

- 안내방송에 따라 교환원과 연결 후 원하는 전화 번호 통보

국내 또는 국제통화는 룸이나 호텔 1층 로비에 문의, 사용 가능하나, 비용이 매우 비쌈.

공중전화 사용이 가능하나 설치 지역이 드물어 이용이 매우 불편함.

시차 및 서머타임

이집트의 시차는 GMT+2

리나라와 시차는 KST-7시간으로 한국이 24:00시일 때 이집트는 같은 날 17:00시임.

현재 서머타임이 해제되어 한국과의 시차는 7시간임.(서머타임 중에는 한국이 24:00시일 때 이집트는 같은 날 18:00시가 됨)

전력 및 인터넷 환경

○ 인터넷 환경 : 일부 ADSL이 사용되나 주로 모뎀을 사용함.

○ 전력사용 현황 : 220V/50Hz 사용

- 콘센트 타입은 한국과 같으나, 모터를 사용하거나 강한 열을 내는 전자제품의 사용은 멀티플러스 사용 요망

주요언론

○ T V : 이집트국영방송(채널 1,2,3)

- 유료위성방송을 통해 여러 나라 방송(BBC, CNN 등)을 시청할 수 있으며 한국의 KBS월드, 아리랑 TV 시청 가능함.

○ 신문과 잡지

- 신문과 잡지는 이집트 공용어인 아랍어 외에도 영어, 불어로도 발간되기도 하며 외국의 유명 신문 및 잡지(New York Times, Herald Tribune, Newsweek 등)도 시내 곳곳에서 쉽게 구입 가능

- 주요일간지 : Al Ahram, Al Akhbar, Al Gomhuriaw, Al Wafd 등

팁 문화 및 교통편

팁 (박시시)

- 팁이 생활화 되어있으며 대체적으로 5파운드 정도가 적절함

- 호텔과 레스토랑 등에서는 이미 계산서에 서비스 요금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팁을 지불할 필요는 없으나 포터나 웨이터들에게는 1파운드 정도를 주는 것이 좋음.

교통편 안내

- 시내 교통편으로는 일반적으로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함.

- 사전에 요금 협상하여 승차하는 것이 좋음.

- 요금은 근거리 5파운드, 15~20분 거리는 10~15파운드 정도임.

교통수단

○ 항공

- 국제선․국내선 모두가 연발착이 잦은 편이므로 72시간 이상 이집트에 체류할 시 반드시 예약 확인이 필요하며, 출발 시에는 최소한 2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여 출국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

철도

- 철도는 이집트 철도청에서 관장하며 총 연장 약 5천 Km로 주요 도시와 연결되어 있으나 카이로-알렉산드리아 구간 등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권장할 만한 교통수단이 되지 못하며, 특히 남부 지역은 치안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철도 및 자동차를 이용한 여행은 삼갈 것.

○ 버스

- 버스는 미니버스, 시내버스, 장거리 버스 등으로 구분. 시내버스는 요금(0.5 이집트 파운드(약 0.2불))은 싸지만 매우 혼잡함.

- 미니버스는 일정 지역 구간을 운행하나 정해진 목적지가 없으며 구간에 따라 요금이 차등 적용됨. 장거리 운행 버스는 카이로 시내 TAHRIR 광장 및 람세스역에서 출발, 알렉산드리아, 포트사이드 등 주요도시와 시나이 반도, 후르가다 등 주요 도시 연결함.

○ 지하철(Metro)

- 1-3호선이 있으며, 역명이 영문 알파벳으로 표기 되어있어 초행자의 경우에도 이용이 비교적 편리함. 열차의 첫 번째 및 두 번째 칸은 여성 전용임.

○ 택시

- 택시는 호텔 앞에서 관광객 상대로 운행하는 리무진과 '우그라' 라는 일반 택시가 있으며 미터기가 부착되어 있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 고 있음(이집트인의 경우에도 동일). 특히 외국인의 경우에는 별도 요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탑승 전 미리 흥정이 필요함.

종교활동

○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이나 외국인들의 종교 활동에 특별한 제한 을 두고 있지 않음.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자말렉, 헬리오 폴리스, 마아디 등)에는 성당, 개신교회 등이 있어 종교 활동(예 배)에 큰 불편이 없음.

- 카이로에는 2개의 한국인 교회와 성당이 있어 비교적 자유롭게 종 교 생활을 영위하고 있음.

○ 그러나 선교사활동은 일체 인정하지 않으며, 엄격히 제한함. 특히 무슬림의 샤리아에 의해 무슬림에 대한 선교활동은 역시 엄격히 제한되고 있음.

대인관계 문화

○ 이집트인들은 인사할 때 주로 악수나 양 볼에 입 맞추는 정도이나 아주 친밀한 사이일 경우에는 껴안기도 함.

○ 대부분의 이집트 국민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른 종교생활(1일 5회 예배 등)을 하므로 이들의 종교생활을 해치는 행위는 삼가 해야 하며, 너무 짧고 노출이 심한 옷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함.

○ 종교에 따른 금식기간인 라마단은 이슬람력으로 아홉 번째 달에 시행되며 태음력에 기초하므로 해마다 시기가 약 11일씩 앞당겨지 는데, 2009년의 경우 라마단은 8월 21일~9월 19일이었음.

- 라마단 기간에는 일출에서 일몰시까지 금식하는데, 이곳 사람들이 철저히 지키는 종교행사이므로 현지인 앞에서 음식을 먹거나 음주, 흡연 등은 삼갈 것.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약사



고대/중세


○ 1947년 8월 독립 이전까지의 파키스탄 역사는 바로 인도의 역사로 볼 수 있음.

○ 파키스탄 서남부에 위치한 모헨조다로(MOHENJODARO)에는 고대문명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는 BC 3000년경의 금석병용기 시대의 도시국가 유적으로서 하랍파(HARAPPA) 유적과 함께 고대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이며 두 지역을 인더스 문명의 기원으로 보고 있음.

○ 인더스문명은 고도의 청동기문명으로서 정연한 가도, 완비된 위생시설 등의 탁월한 도시건설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약 1천년 동안 지속되다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침입해 온 아리안족에 의해 멸망되었음.

석가모니 이후 한때 불교가 전성기를 이루기도 했으며 이로 인하여 파키스탄 전역에 걸쳐 곳곳에 간다라문명이 꽃을 피우기도 하였음.

○ 중세사회가 시작되는 8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무슬림세력이 서북방 지역으로 침입하여 델리를 중심으로 약 300년간 무슬림왕조가 성쇠를 되풀이하였음.

○ 1500년경 서부인도에 중앙아시아의 티무르가 멸망한 후 그의 후예인 바바르가 수립한 무굴제국은 전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150년 간 전성기를 이루다가 힌두ㆍ회교간 대립, 농민반란 등으로 1857년 세포이 반란사건을 계기로 영국에 합병되어 멸망하였음.


근대


○ 영국 식민통치하에서 인도의 독립운동은 마하트마 간디 등 힌두교들의 지도하에 1885년 소집된 인도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전개됨에 따라 회교도들은 독립 후 힌두문화의 지배를 두려워하여 1930년 초를 기점으로 회교시인 IQBAL 등을 중심으로 회교국가의 분리 독립운동을 점진적으로 실천에 옮기기 시작하였음.

○ 2차 대전 후 파키스탄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MOHAMMAD ALI JINNAH (QUAID-E-AZAM)의 파키스탄 분리주장 요구와 영국의 인도ㆍ파키스탄 분리 독립 정책에 따라 1947년 8월에 오늘날의 파키스탄으로 독립하여 영연방의 자치국이 되었으며 초대 총독에는 모하메드 알리 지나, 총리에는 아라드 알리 칸이 취임하였음.


독립이후


○ 신생 파키스탄은 법률 및 제도를 정비하고 1947년에는 UN에 가입하는 등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져 나갔음. 1948. 5월부터 인도와의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에서 상권과 권력을 쥔 힌두계인들로부터 종교적 제한을 받아온 데에 불만을 품은 회교주민들의 무장 봉기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인도, 파키스탄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여 충돌함으로서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 1949. 1월 UN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파키스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

○ 1970. 12월 총선 결과 서파키스탄에는 A. BHUTTO가 이끄는 인민당이 의회의 절대 의석을 차지한 반면,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는 MUJIBUR RAHMAN이 영도하는 AWAMI LEAGUE당이 대승하였음. 총선 후 동, 서파키스탄은 정치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연합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동파키스탄의 RAHMAN 당수가 거부함으로써 협상이 결렬되었음.

○ 이에 따라 서파키스탄군이 동파키스탄에 진주하는 한편 인도가 동파키스탄에 군사개입을 함으로서 1971. 12월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고 동 전쟁에서 파키스탄이 패함에 따라 동파키스탄은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되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게 되었음.


정치 개황



정치제도


○ 정부형태 : 내각책임제(2002. 8월 헌법개정)

○ 행정부 의회간의 견제·균형장치

-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 내각은 하원에 대해 책임을 짐(91조 4항)

- 하원은 수상 불신임권을 가짐

○ 지방행정기구는 4개주(Baluchistan, Punjab, Sindh, North-West Frontier Province)와 소수종족연방보호지역(FATA : Federally Administered Tribal Area) 및 연방수도권지역(FCA : Federal Capital Area)으로 구성됨.


의회


○ 상 원

- 구 성 : 100명(4개 주의회별 각각 22명 선출, 하원 12명 선출)

- 임 기 : 6년(매 3년마다 1/2 개편)

- 의장단 :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임기 3년)

- 상원의장은 대통령의 해외 방문으로 인한 부재나 사임, 사망 등 대통령 공석시, 대통령의 직무권한을 대행

하 원

- 구 성 : 342명

- 임 기 : 5년

- 의장단 : 의장 및 부의장 각 1명

- 회 기 : 1년에 적어도 3번의 회기, 최소한 130일이 개원되어야 함.


국방


○ 병역제도 : 지원제

○ 국방예산 : 2235억루피(약 37.3억불)(GNP 대비 3.3%, 총예산의 20.0%)

○ 병력 : 64만 명(예비군 54만)


외교



기본 외교 노선


○ 파키스탄 대외 정책은 카슈미르 분쟁 해결 등 인도와 대립 관계 개선, 인근 국가인 아프가니스탄과의 선린 관계 유지, 대미, 대중 관계의 강화가 근간을 이루고 있음.

○ 기본 외교 노선으로는 비동맹 중립 외교 노선, 이슬람 제국과의 결속 강화, 대 중국 관계 공고화, 대 아프가니스탄 전후 복구 경제 지원 등을 들 수 있음.


파키스탄-인도 관계


○ 카슈미르 문제는 대 인도 외교정책의 가장 큰 부문으로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이후 카슈미르(Kashmir) 지역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유권 싸움이며 회교와 힌두간의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임.

○ 인도·파키스탄 전쟁

-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 분쟁은 1947년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가 신생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될 당시, 동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77%)를 차지하는 회교도측이 파키스탄에 귀속코자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하에 반란을 일으킴. 이에 대해 동지역의 힌두교 영주(Maharaja)가 인도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1947. 10월 제 2차 인도·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UN의 거중조정에 따라 휴전선이 설정됨.

- 1965. 7월 양국간 다시 전쟁(제2차 인·파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UN 안보리의 노력으로 휴전됨.

-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파 전쟁이 발발

○ 2003년 양국 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는 노력과 동시에 그동안 끊겼던 항공 운항을 2004. 1월부터 재개하고 2005. 10월 발생한 대 지진과 관련 카슈미르 지역에서 양국 공동 구조 활동을 펼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음.

○ 그러나 2006. 7월 뭄바이열차 연쇄폭탄테러로 인해 약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도 측은 동 테러를 일으킨 단체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을 이유로 파키스탄 측에서 자국내 테러기지 및 테러척결에 대한 성의있는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평화구축 과정에 진전이 있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면서 7월에 예정되어 있는 외교차관 회담을 무기한 연기함.

이에 파키스탄 Musharraf 대통령은 7월 20일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인도측에 뭄바이 열차 테러 관련 비난전을 하지 말 것을 촉구하면서, 인도측이 테러에 개입한 테러리스트에 관한 정보를 파키스탄측에 제공한다면 가능한 모든 협력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함.

2006. 7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개최된 SAARC 상임위원회(Standing Council) 회의를 계기로 양국 외교차관 회담에서 양국은 평화구축 과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공감하였으나, 구체적인 다방면 대화의 추후 일정은 정하지 못함.

○ 2006. 8월 파키스탄이 자국내 인도 외교관을 외교관 신분에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혐의로 추방하자, 인도도 맞바로 자국내 파키스탄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함.

뭄바이 테러 사건 발생(2008.11.26-29)

- 10명의 테러리스트가 중무장한 채 해상을 통해 뭄바이에 침투, 11월 26일 밤 10시경부터 동시다발적 무차별 테러 공격 감행

- 약 170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테러범 9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하여 테러를 진압함.

-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테러와 파키스탄 당국과의 관련성을 계속 부인해 왔으나, 파키스탄 무장단체 ‘라슈카르에타이바’(LeT)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짐.

- 이 사건을 통해서 군병력의 국경 재배치 움직임이 일어나고 양국간의 갈등이 다시 고조됨.


대 아프가니스탄 관계


○ 파키스탄은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자원 교류 및 교역을 원활히 하고, 이들 국가들로의 해상 운송 루트로서 가치를 발휘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안정 및 아프가니스탄의 친파키스탄 정책 유도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과의 유대 관계는 형제국과 같은 관계로 매우 긴밀한 편임.


대 중국 관계


○ 파키스탄과 중국은 전통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 1996년 12월 1일 장쩌민 국가 주석이 파키스탄을 방문해 양국 경제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특히 핵개발 기술 협력 강화에 합의(평화적 목적)하였음.

○ 중국은 인도 견제를 위해 전략적으로 친 파키스탄 외교를 펴고 있으며 파키스탄에 대한 다양한 경제 지원을 계속하고 있음.

○ 한편 무샤라프 대통령은 지난 2006년 2월 중국을 공식 방문, 후진타오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양국 간 교역 및 협력 확대에 합의하였으며 2006년 11월 이루어진 후진타오의 답방을 통해 FTA 협정을 체결하는 등 정치, 경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대 미국 관계


○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문제 해결, 인도에 대한 견제, 경제지원 등의 측면에서 대미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대 테러 활동, 마약류 단속 노력에도 적극 협조하기로 함.

○ 무샤라프 대통령은 쿠데타 집권 후 9.11사태 발생 시 미국에 적극적인 협조를 함에 따라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의 경제 원조를 받아낼 수 있었고 파키스탄의 주력 수출품인 섬유 제품의 쿼터 추가 확보로 미국 수출 증가에도 크게 기여함.

○ 2001년부터 미국과의 협력 강화를 모색해왔고 부시 정권과의 관계도 양호함에 따라 대미 관계의 지속적인 유대 강화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됨.


사회




교육


○ 파키스탄은 국가이념과 회교교육을 바탕으로 하여 과학기술교육에 중점을 두는 신교육정책을 채택하고 있음.

○ 파키스탄의 학제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 있음.

- 초등교육 5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2년, 대학교육 2~4년


언론


○ 정부에 의한 직접 사전검열이 82년 초 완화되어 현재는 정부 지침에 따른 자체 검열제를 시행함. 중소언론기관이 난립하고 재정상태가 어려우며 언론인의 자질문제 등으로 객관성 유지가 어려운 점 등의 문제가 있음.

○ 국영 PTV(3개 채널), AJK TV, 기타 Geo-TV, ARYONE, Indus TV 등 다수 채널이 두바이 또는 인도에 본사를 두고 방송하고 있음.


사회적 갈등 요인


○ 파키스탄은 마약상습자의 증대로 심각한 사회문제에 직면해 있음.

- 마약상습자의 숫자는 100만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

○ 지형이 험난한 북서변방지역의 계곡은 양귀비 재배지와 헤로인 제조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에서 소비되는 헤로인의 1/5이 이곳에서 공급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

- 이 지역은 영국의 식민통치 당시부터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았고, 그 지방의 부족지배자가 통치한 것도 마약증대의 원인으로 들 수 있음.


문화


○ 회교화 운동 : 회교화 운동이 강조되고 있으며, 일반생활의 회교 전통유지에 부심함.

○ 복장 : 전통 복장이 일반적임.

○ 기타 : 술, 돼지고기, 도박 등이 금지되고 있음.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약사



인도 역사의 특징


인도는 다양한 인종, 종교, 언어, 생활풍습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대륙과지리적으로 차단된 특수성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화를 이루어 왔음.

○ 5,000년 이상의 긴 역사 중 정치적 통일을 이룬 시기는 마우리아왕조(B.C.321-185), 굽타왕조(A.D.380-606) 및 무갈왕조(A.D.1526-1858) 등 3개 왕조에 불과하며, 북서부지역은 외부세력 침입의 출입구가 되어 그리스, 훈, 터키족 같은 외부 세력과의 항쟁 속에서 성쇠를 거듭하였으나, 데칸고원 등 남부지역은 지형적 요인으로 인해 외부세력의 침입을 비교적 적게 받아 왔음.


고대


○ 인더스 문명(기원전 3000-2000)

- 세계 4대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기원전 3,000~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으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의 유적이 있음.

- 고도로 발달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단계로서, 종교는 다신교, 정치 체제는 제사장 중심의 공화제를 형성

○ 아리안 문명(기원전 2000-1000)

-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 부분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 침입 후 정착하면서 이루어졌음.

- 사제 계급인 브라만 중심의 제사 의식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이 집대성된 리그베다 등 베다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됨.

○ 도시국가의 형성

- 기원전 7세기경에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도시국가들을 건설

- 정복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마가다 왕국은 알렉산더왕의 침입 때까지 난다 왕조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으며, 기원전 500년경 불교 및 자이나교가 발생함.


중/근세


○ 마우리아 제국(기원전 321-185)

- 3대왕인 아쇼카왕(BC 272~232)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고, 포교에 힘써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함.

○ 쿠샨왕조(78-226)

- 쿠샨족 카니슈카왕이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중국의 한나라, 남쪽으로는 인도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

○ 굽타왕조(380-606)

- 찬드라 굽타 2세(380-413) 시대에 문화적 르네상스를 구가하였으며, 불교, 힌두교 및 자이나교 등이 융성, 부흥했음.

○ 무굴제국(1526-1858)

- 데칸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제국이 건설되었고 악바르 이후 150년 간 전성시대가 지속됨.

- 이슬람교가 번성하여 타지마할 등 이슬람 관련 유적을 남김.

- 1707년 이후 지방토후의 발호, 서구열강의 침입으로 약화

- 1757년 영국이 프랑스와의 플랏시 전투에서 승리

- 1857년 영국이 세포이 반란을 진압한 후 영국의 직할지로 편입.


근대


○ 반영 독립투쟁

- 18세기 후반에 생겨난 많은 정치단체 중, 1885년 결성된 "인도 국민회의"가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함. 특히,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냉담한 반응에 대응하여 보이콧 및 스와데시 운동이 전인도로 파급되게 됨.

-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취하여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영국의 배후 지원을 받은 회교도 연맹을 결성함.

- 1차 대전 이후 인도 국민회의는 마하트마 간디의 지도하에 영국이 제시한 자치령 지위를 거부하는 등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많은 인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불복종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반해 회교도 연맹은 파키스탄의 분리를 요구함.

○ 독립

- 2차 대전 후 영국은 인도에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 방안을 제시한 바, 동 제안을 국민회의가 수락함으로써 인도는 1947.8.15 영연방의 자치령으로 독립하게 됨.


현대


○ 인도 헌법 채택

- 1947년 8월 15일 독립과 함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초대 인총리에 취임한 후, 1949년 제헌의회에서 연방제와 민주주의를 골자로 한 헌법이 채택되고, 1950. 1월 발효됨으로써 영연방 자치령의 지위에서 탈피함.

○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강화

- 한편, 독립 당시부터 파키스탄과는 종교적, 영토적 분쟁으로 1947. 10월, 1965. 6월, 1971. 12월 등 3차례 전쟁을 치뤘으며, 중국과는 국경문제인해 1962년 전쟁을 겪는 등 주변국들과 마찰을 겪기도 했으나 비동주의와 균형 및 실용주의를 적절히 추진함으로써 꾸준히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강화시켜 옴.

○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 시현

- 국내 정치적으로 국민회의당(Congress Party)이 정권을 독점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서구식 의회민주주의,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적 경제정책추진해 오다가 1990년초 경제상황 악화에 따라 1991년 신경제정책을 채택하여 경제개혁 및 개방정책을 실시함. 1990년대 이후 국내 정치권력은 국민회의당․BJP 양대 정당과 군소 정당들이 합종연횡하면서 연립정부를 구성해 오고 있으며, 경제개방 및 개혁의 성과로 꾸준히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시현하고 있음.


정치 개황



국내 정치의 특수한 여건


인도의 국내정치에 영향을 주는 주요 요인으로는 일반국민의 민주의식, 언론자유의 보장, 관료제도, 군부의 중립성, 사법부의 독립 등 긍정적인 요인들과 카스트 제도, 종교간 대립, 빈부격차, 지방주의, 취약한 정당기반 등 부정적인 요인들이 있음.

○ 인도의 고질적 사회풍습인 카스트제도를 타파하고 특히 전체국민의 22.5%에 해당하는 최하층민(Scheduled Caste와 Scheduled Tribe)과 52%에 해당하는 하층민(Other Backward Castes)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 문제는 인도정치가 안고 있는 최대 과제 중의 하나임.

- 오랜 인습은 타파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무력충돌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음. 2006년에는 정부의 OBC에 대한 국립대학 입학할당제도 도입 방안추진계획을 둘러싸고 찬반논쟁이 가열되기도 함.


헌법과 정부형태


○ 1950년 1월 26일 공포된 헌법은 22장 395조 및 부칙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특징은 아래와 같음.

-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 공화국 표방

- 종교 무차별주의로 신앙의 자유 허용

- 주정책에 대한 지시지침(Directive Principle of State Policy)을 통해, 부의 공정하고 적절한 분배 및 생산수단의 집중방지 규정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연방국가로서 의원내각제의 정부형태를 취하고 있음.

- 연방은 28개 주(state, 2000년도에 3개 주 신설)와 7개 연방 직할지(Union Territory)로 구성

○ 각 주에는 주 정부와 주 의회가 있음. 주를 대표하는 주지사(Governor)는 5년의 임기로 대통령이 임명하며 주행정의 실권은 주지사가 주 의회 다수당 지도자 중에서 지명하는 주 총리(Chief Minister)가 장악함.


입법/행정/사법부


○ 상원(Rajya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의회에서 간접 선출되는 238명 및 대통령이 임명하는 12명 등 총 25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6년으로 매 2년마다 1/3씩 새로 선출함.

○ 하원(Lok Sabha)은 각주 및 연방 직할지 대표 543명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Anglo-Indian community 대표 2명 등 총 545명으로 구성하며, 임기는 5년임.

행정부는 대통령, 부통령, 총리 및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s)로 구성

- 대통령은 5년 임기로 상‧하 양원 및 주 의회 의원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하여 간접 선출되며,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 역할 수행(군 최고통수권 보유)

○ 사법부는 연방 대법원(Supreme Court of India), 주 최고법원(High Court), 지방법원(Lower Court)으로 구성되는 3심제임. 대법원은 인도 헌법과 법률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권을 가지며 대법원의 판결은 모든 법원에 대해 구속력을 가짐.


외교



대외정책의 기조


1947년 독립이후 인도의 외교정책을 지배해 온 기본적 원칙은 “네루외교노선”에서 비롯된 비동맹주의와 균형주의 원칙이며, 이와 같은 외교기조는 인도가 처한 특수한 외교 및 안보환경 즉, 광대한 국토와 복잡한 사회적 구조로 인해 국가적 단결이 독립초기의 최대의 관심사였고 대외정책 선택에 있어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책결정을 내리기 곤란한 국내적 제약조건에 기인한 것이었음.

- 인도는 독립 당시부터 패권주의 반대, 군사동맹 가입 반대, 국제분쟁평화적 해결 및 모든 국가와의 우호관계 수립 등 비동맹회의와 유사기본이념을 대외정책의 기본노선으로 표방하면서 비동맹운동의 창설을 주도하였고 비동맹주의를 대외정책의 기조로 삼아 왔음.


최근 외교정책 노선


점차 과거 비동맹 외교노선에서 탈피하여 고도 경제성장의 지속적 달성을 위한 실용주의적, 친서방적 외교정책 노선을 강화하는 추세이며, 특히 미국과의 관계 강화가 아시아의 세력 균형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하고 있음.

- 1990년대 후반 이후 현저하게 대미국관계 강화를 시도하는 실용주의 노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2004년 재집권한 Congress당 중심의 UPA 연합 정권 하에서도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고 있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 등 부상하는 global power로서의 국제영향력 확대 노력을 가속화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G-4와의 협력 유지를 통한 외교노력을 경주하고 있음.

서남아 지역의 중심국가로서 지역분쟁 예방, 정세 안정화 및 역내 영향력 유지․확대를 위한 외교적 지도력를 추구하며, 특히 주변국가들에게 군림하던 과거의 형태를 벗어나 서남아지역연합(SAARC)의 활성화 등을 통한 전향적이고 유연한 지역 외교 노선으로 전환중임.

고도 경제성장에 필요한 에너지 확보를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의 하나로 추진하고, 특히 원자력 에너지협력을 위해 미국, EU, 러시아, 중국 등 기존 핵보유 국가들의 지원 확보를 위한 다방면의 외교노력을 기울이고 있음.

○ 동아시아 정상회의(EAS) 출범을 통한 장기적 East Asia Community 구상 추진, ASEAN과의 FTA 협상 마무리, 한국과의 FTA(CEPA) 협상 개시, 중국 및 일본과의 FTA 타당성 검토 등 동아시아권과의 지역 협력 강화를 통한 경제적 실리를 추구하고 있음.


인도-파키스탄 관계


○ 카슈미르 문제는 대 파키스탄 외교정책의 가장 큰 부문으로서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 이후 카슈미르(Kashmir) 지역에서 계속 일어나는 영유권 싸움이며 회교와 힌두간의 대표적인 종교적 갈등임.

○ 인도·파키스탄 전쟁

- 카슈미르 지역 영유권 분쟁은 1947년 영국 식민지하의 인도가 신생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될 당시, 동 지역 인구의 절대다수(77%)를 차지하는 회교도측이 파키스탄에 귀속코자 파키스탄 정부군의 지원하에 반란을 일으킴. 이에 대해 동지역의 힌두교 영주(Maharaja)가 인도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여 1947. 10월 제1차 인도·파키스탄 간에 전쟁이 발생하였고, UN의 거중조정에 따라 휴전선이 설정됨.

- 1965. 7월 양국간 다시 전쟁(제2차 인·파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UN 안보리의 노력으로 휴전됨.

-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파 전쟁이 발발

○ 2003년 양국 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여 분쟁을 종식시키는 노력과 동시에 그동안 끊겼던 항공 운항을 2004. 1월부터 재개하고 2005. 10월 발생한 대 지진과 관련 카슈미르 지역에서 양국 공동 구조 활동을 펼치는 등 화해 무드가 조성되고 있음.

○ 그러나 2006. 7월 뭄바이열차 연쇄폭탄테러로 인해 약 2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인도 측은 동 테러를 일으킨 단체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있음을 이유로 7월에 예정되어 있는 외교차관 회담을 무기한 연기함.

2006. 7월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개최된 SAARC 상임위원회(Standing Council) 회의를 계기로 양국 외교차관 회담에서 양국은 평화구축 과정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단 공감하였으나, 구체적인 다방면 대화의 추후 일정은 정하지 못함.

○ 2006. 8월 파키스탄이 자국내 인도 외교관을 외교관 신분에 적절치 않은 행동을 한 혐의로 추방하자, 인도도 맞바로 자국내 파키스탄 외교관을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함.

뭄바이 테러 사건 발생(2008.11.26-29)

- 10명의 테러리스트가 중무장한 채 해상을 통해 뭄바이에 침투, 11월 26일 밤 10시경부터 동시다발적 무차별 테러 공격 감행

- 약 170명이 사망하고 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테러범 9명을 사살하고 1명 생포하여 테러를 진압함.

- 파키스탄 정부는 이번 테러와 파키스탄 당국과의 관련성을 계속 부인해 왔으나, 파키스탄 무장단체 ‘라슈카르에타이바’(LeT)와 관련되어 있음이 밝혀짐.

- 이 사건을 통해서 군병력의 국경 재배치 움직임이 일어나고 양국간의 갈등이 다시 고조됨.


남아시아 지역협력 연합(SAARC)


○ 국제무대에서의 상호협력을 도모하고 역외개도국 및 타 국제기구와의 협력을 증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아시아국가간 지역협력 기구로서는 동남아국가연합(ASEAN)에 이어 두 번째로 창설됨,

- 경제, 사회, 문화, 과학‧기술 분야의 발전 모색(정치, 군사문제 제외)

-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몰디브, 부탄, 아프가니스탄 등 서남아 8개국이 회원국이며, 한국, 중국, 일본, 미국, EU 옵서버 가입

역내국가간 국력의 불균형과 회원국간 다양한 갈등 및 대립 등 어려운 문제가 있으나 회원국 상호간의 공동체 인식과 함께 협력분위기 조성에 기여하는 바도 있음.


사회



카스트(Caste) 제도


○ 수천 년 간 인도인의 생활을 규율해 온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
고, 근대화 및 교육의 영향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인도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관습으로 존재하고 있음.

○ 카스트제도는 아리안 족이 인도를 정복한 후 소수집단인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에 동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짐. 피부색 또는 직업에 따라 승려계급인 브라만(Brahman), 군인‧ 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상인계급인 바이샤(Vaisya) 및 천민계급인 수드라(Sudra)로 크게 나누어지며, 이 안에는 다시 수많subcaste가 있음. 최하층 계급으로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 있음.

○ 최초에는 그다지 엄격하지 않았으나 오랜 역사적 흐름과 더불어 다른 카스트와의 결혼 불허 등 많은 금기를 가진 사회규범으로 굳어져 인도인들은 자기가 속한 카스트의 행위범을 준수해야 했었음. 이러한 계급제도는 인도사회를 안정시키고 결속시키는데 도움이 된 면도 있다고 하나, 인권을 침해하고 사회를 정체시켜 활력을 잃게 하는 부정적 영향이 큼.

마하트마 간디를 포함한 많은 사회개혁운동가들은 불가촉 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노력하면서 불가촉 천민들을 ‘신의 자식’이라는 뜻에서 하리잔(Harijan)으로 부르고, 이들이 힌두 사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천민보호에 앞장섰음.

- 오늘날 인도에는 1억이 넘는 하리잔이 있는 바, 정부에서는 입학, 취업시 일정비율을 하리잔에 배정해 주는 등 혜택을 주고 있어 하리잔 출신이 장관까지 된 경우도 있으나, 농촌에서는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임.
 

언어


○ 다양한 인종과 더불어 180여종이 넘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헌법
으로 인정한 지역별 공용어는 18개임.

- 힌디어, 텔루구어, 벵갈어, 마라티어, 구자라트어 등

이중 인구의 38.7%가 사용하고 있는 힌디어는 전국적 공용어이며, 영어는 18개 공용어에 해당하지 않으나 의회, 행정부, 사법부 및 사각 분야에서 널리 사용하는 공용어이자, 학력이 높은 층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함.


복장


○ 남자 : 고유의상으로는 도티(Dhoti), 룽기(Lungi), 아즈칸(Achkan),
파자마 등을 들 수 있음. 그러나 도시에는 하절기에 사파리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

- 도티 : 동부‧남부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긴 천을 밑으로 늘어뜨린 후 다시 허리춤으로 올려 동여 입는데 흰색의 얇은 천을 사용함.

- 룽기 : Kerala 등 해안지방에서 많이 입는데 좁은 폭의 천을 늘어뜨린 후 허리를 동여 입음.

- 아즈칸 : 네루 전 총리가 즐겨 입었던 목이 올라온 제복 스타일의 옷

- 파자마 : 우타르 프라데쉬 주에서는 무릎 아랫부분이 꼭 끼는 추리다(Churidar) 파자마를 입으며 Punjab에서는 헐거운 쿠르타(Kurta)를 입음. 흰색 천을 주로 사용함.

- 사파리 : 하절기(4월-11월)에 많은 도시인들이 즐겨 입는데 공식적모임에서는 점차 양복, 넥타이 차림이 조금씩 늘어가는 추세임.

여자 : 사리(Saree)라는 고유의상을 주로 입는데 지역에 따라 매는 방법, 천의 길이, 천의 개수가 다름.

- 입는 방법은 천을 허리에 감아 맨 다음 어깨에 걸쳐 밑으로 내려 입음. Punjab 지방에서는 사르와르 카미즈(Salwar Kameez)라는 상의가 길고 바지가 넉넉한 옷을 입으며 우타프라데쉬, 라자스탄, 구자라트에서는 가그라(Ghaghra)라는 긴 스커트를 입음.


문화


○ 베다문화(B.C.2000-500)

- 아리안 족의 침입 후 형성된 베다문화는 인도의 종교‧사회‧관습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힌두교를 탄생시켰으며, Veda와 같은 대서사시적인 경전을 발전시켰음. A.D.6세기-10세기를 통해 힌두문화는 건축․조각․회화 등 각종 예술 분야에서 번창했으며 힌두사원 등 많은 기념비적인 힌두문화 유물을 남겼음.

○ 불교문화(B.C.500-A.D.1100)

- 불교문화 전성기는 B.C. 3세기 야쇼카대왕 시대로 산치대탑, 보드가야의 대탑, 녹야원의 석탑, 아잔타․엘로라 동굴 조각 및 건축 예술에서 절정을 이룸. 아울러 불교는 중국, 한국 및 동남아 등 여러 나라로 전파됨.

○ 이슬람문화(A.D.1100-1600)

- 이슬람문화는 특히 건축에서 페르시아 및 힌두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조화를 이룬 대표적 양식으로, 초기의 상호배척을 점차 극복하고 상호간의 종교적 관용이 정착하면서 우루두어의 탄생 등 언어, 문화, 음악, 미술 분야에서도 많은 공헌을 함.

○ 서구문화의 영향(A.D.1700-1947)

- 250년에 걸친 영국 지배하에 인도예술, 특히 전통회화분야에서 서구 예술의 영향을 받음. 또한 영어의 도입과 함께 생활양식의 변화와 문학의 발전을 가져옴. 그러나 힌두문화는 상당부분 그대로 전승됨.

○ 독립이후(A.D.1947-현재)

- 독립 이후, 전통문화 창달과 문화유산을 보호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문학, 음악, 무용, 연극, 미술 등의 진흥을 위한 국가적 지원문화재 발굴, 보존, 전시 등을 위한 박물관, 문화재 관리국 등 국가행정기관을 통하여 현재 문화와 함께 전통문화를 조화시켜 나가고 있음.


교육


○ 교육의 기본정책은 지역 간의 교육격차해소, 전 계층 간의 균등한 교육기회, 국가사회 요구에 부응하는 인력자원개발 등에 목표를 두고 14세까지의 무상의무교육, 영어, 힌디어 및 주 공용어 등 3개 언어교육,
GNP의 6% 교육투자 등을 통해 중앙정부와 주정부가 공동 노력하고 있음.

학교교육은 10+2+3의 15년 과정의 교육제도로써 1968년도 채택 후 현재 거의 모든 주가 이를 실시하고 있음.


종교


인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Jainism), 시크교(Sikhism) 등 4개 종교발생지이며 이슬람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유태교 등 다양한 외래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임.

종교는 인도 국민생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종교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종교는 인도인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종교는 인도인의 일상생활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임.

○ 헌법은 모든 종교에 대한 무차별, 신앙의 절대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모든 종교는 국가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음.

○ 인도의 종교인구 분포는 힌두교 81.5%, 이슬람교 11.2%, 기독교 2.7%, 시크교 2.4%, 불교 0.7%, 자이나교 0.4%, 기타 1.1%임.


힌두교


○ 힌두교는 B.C 2000년경 아리안족 침입 후 최고경전 Veda가 집대성
되면서 정치, 사회생활을 지배해 왔으며, 이슬람교 등 이교도의 수세기 동안에 걸친 침략 속에서도 이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포용하면서 오늘에 이름.

- 드라비다족의 토속신앙, 아리안족의 자연신 숭배 등에 바탕을 둔 다신교인 힌두교는 외래사상과 종교 등에 대한 인내와 관용을 특징으로 하며 생활경험, 도덕, 사회관습, 규범의 총체로서 Dharma(정의 또는 의무)에 따른 수도생활과 최고 정신을 탐구하는 고도의 생활 철학적 종교임.

- 소를 신성시하고 카스트제도를 정착시킨 힌두교는 해외 전파보다는 인도인의 종교로 존속하길 바라는 성향을 띠고 있음.

- 현재 약 8억에 이르는 신도를 가진 힌두교는 인도사회에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종교임.


보건


○ 약 26%의 빈곤층을 가지고 있는 인도는 모든 국민의 건강향상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농촌, 빈민층에 대한 위생, 의료혜택을 확대 실시하고 있음. 특히 UPA 정부는 집권기간 중 GDP의 2-3%를 보건 분야에 투입하되 기초보건에 우선적으로 투자한다는 계획이며, 저소득층을 위한 의료보험의 조기 도입과 필수 의약품의 저렴한 판매 방안 마련 등을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음.

○ 지난 30년 간 평균 수명은 31세에서 52세로 사망률은 천 명당 27.4%에서 14.2%로, 유아 사망률은 천 명당 146명에서 125명으로 개선됨. 또한 전염병퇴치를 위한 특별대책을 실시하고 있는 바, 1977년도를 기해 천연두는 퇴치되었으며 학질, 사상충, 나병, 콜레라, 결핵 등의 퇴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음.

○ 1952년 제1차 5개년 계획을 출발로 시작한 가족계획은 많은 성과를 가져출생률은 60년대 4.12%에서 1978년도 3.33%로 감소되었으며, 2002년에는 2.38%로 정부는 2001-11년의 10년 간 인구증가율을 16.2% 이내에서 억제한다는 계획임.


관습


인도인들 중에는 무신론자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이 절이나 집안에서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을 행하고 있음.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교리나 성찰보다는 수많은 제신들의 형상화를 통한 의식이 주요 신앙생활을 이루고 있으며, 도덕률이나 내세구원보다는 개인의 현세구복에 치중하고 있음.

오랜 카스트제도 하에서 묵묵히 순종해온 생활태도, 불교의 자비와 관용적 사상, 장기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 등의 영향에 기인하는 관용적 태도, 생명존중 사상, 무저항주의 같은 평화주의 사상이 인도인들의 생활 저변있으며, 마하트마 간디가 제창한 비폭력주의도 이러한 전통적 사상의 계승 내지 발전으로 볼 수 있음.

- 그러나 이슬람-힌두 등 종교, 종파간 갈등 분규가 발생시 폭력사태로 변질되기 쉬우며,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여 외국인의 주의를 요함.

인도인들은 전통과 관습을 존중, 일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며, 보수적 풍속을 벗어나는 외국인은 풍속사범으로 체포, 처벌하기도 함.

인도에서는 금주제도를 실시하는 주가 있으며 일반 식당에서도 금주일이 있고, 판매시간이 제한되어 있음. 주류 판매는 호텔이나 규모가 큰 대중식당에만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

○ 매춘은 불법이며, 지역마다 정도의 차는 있으나 대체로 자국인들 간에 이루어지며,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음.

○ 여성들은 복장법령에 따라 공적 활동시 반드시 전통의상인 사리 또는 사르와르 카미즈를 입어야 하며, 일반대학에서도 여학생들에게 전통의상을 강요하는 사례가 있음.


언론


인도의 언론은 스스로 영국으로부터 독립(1947년)을 쟁취하는데 공헌바 크고, 독립이후에는 국가 건설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높은 긍지를 갖고 있음.

- 개도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언론자유가 보장되고 있으며 언론이 여론정치 구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음.

신문 등 정기간행물(약 8,000종)은 대부분이 개인소유로 운영되고 있음. 특히 TV 및 라디오는 방대한 지역과 인구의 1/3 이상이 문맹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보도‧교육‧오락 등 일반적인 방송기능은 물론 정부의 대국민 홍보기능 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

○ 인도 유일의 공중파 방송인 국영 TV Doordarshan(DD-TV)은 DD National, DD News, DD India(해외방송) 등의 채널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외에 최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민영TV 채널이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으며, 케이블 TV 시장이 활성화되고 있음.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모로코 (KINGDOM OF MOROCCO) 알기

지정학적 위치

○ 아프리카 북서단, 지중해 남서단(북위 23-36 도, 서경 13-17 도)

- 북쪽 : 지브랄탈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의 14Km 남쪽에 위치

- 남쪽 : 모리타니아와 접경

- 서쪽 : 대서양과 접경(해안선 3,500km)

- 동쪽 : 알제리와 접경

지형 특색

○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해발 4,000m의 아틀라스 산맥이 길게 뻗쳐 있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막이 알제리 국경에서부터 모리타니아 국경과 접한 대서양까지 연결

- 아틀라스 산맥 서쪽과 모로코 북부 및 중서부 대서양 연안지역에 전체국민의 70 % 이상이 거주

민족구성

○ 아랍인 60 %, 베르베르인 36 %, 유럽인, 유태인, 흑인등 4 %

- 베르베르족은 모로코지역에 기원전부터 정착해온 유목민족이며, 8세기 아랍족의 진출 이후 종교와 문화가 아랍화 됨.

- 아랍족은 주로 도시지역, 베르베르족은 주로 농촌 지방이나 아틀라스 산맥 인근 유목지대에 주로 거주

종교

○ 종교 : 이슬람교(수니파) 99.99 %, 기독교 및 유대교 0.01%

- 이슬람교가 국교이며, 국왕이 종교수반을 겸하고 있음

-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고, 모로코인에 대한 타 종교 포교 행위는 금지되어 있음

언어

○ 공용어 : 아랍어, 베르베르어(Amazigh어)

- 표준 아랍어는 문어체(신문, 방송, 출판문)에서만 사용하며, 구어로는 모로코 방언을 주로 사용(표준 아랍어 문맹률은 약 50-60%임)

○ 상용어 : 불란서어(제 1 외국어)

- 국민학교 과정 이수자는 웬만한 불어 회화는 구사가능

약사

고대

○ 페니키아 및 카르타고 시대

- BC 11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들이 해안지대에 이주 시작, 내륙지방의 거주민인 베르베르족과 접촉 시작

- 한편, 튀니지 일대를 지배하던 카르타고인들이 아프리카 북부 해안선을 따라 탕제, 라바트 등지의 식민 항구도시 건설

- BC 196년 로마에 의한 카르타고 멸망이후 카르타고 난민들이 동 식민 항구도시로 유입

중세

○ 이슬람교 도래

- 680년 세우타 점령을 시작으로 이슬람교도들의 모로코 침입 시작

- 711년 경에 무어족에 의한 모로코 지배 확립

- 732년까지 베르베르족을 중심으로 모로코의 이슬람화

근대

○ 열강의 모로코 침공

-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 교두보로서 모로코 침공개시

- 국내 정정의 불안 및 열강의 침공에 대응한 고립 정책(대 유럽 통상금지 및 유럽영사관을 탕제로 추방)이 왕국의 쇠락 촉진

○ 프랑스는 훼즈협정을 통해 모로코의 국방, 외교, 국내 치안권을 장악하였고, 스페인은 유사한 협정을 통해 북부 해안지방과 남부지역 일부를 보호령화

○ 프랑스 및 스페인 보호령(1912-1956)

-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정책에 따라 아틀라스 산악 지역에 대한 중앙정부의 확고한 통치권 확보

- 프랑스인들의 대규모 이민 및 불란서 식민 정부의 유화정책에 따라 프랑스 문화 보급 확대

- 한편, 스페인의 경우 북부 리프지역에서의 광물 탐사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남부지역에서는 단순한 지배자로서만 주둔하였을 뿐 식민지 개발에 무관심

현대

○ 대 프랑스 항쟁

- 1930년 라바트와 훼즈에 거주하는 프랑스 교육을 받은 모로코 엘리트가 중심이 되어 이슬람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

- 프랑스는 분할 식민통치 방식으로 산악지대의 베르베르족에 대한 기독교 포교를 통해 도시지역의 이슬람교 아랍인들과 반목을 조장

○ 1927년 즉위한 Mohammed V 국왕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모로코의 독립 추구, 1953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강제 망명

○ 독립 모로코(1956- )

- 1955.11.18 Mohammed V 국왕은 해외 망명지에서 모로코의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하였고, 1956년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독립인정

- 1956. 4. 22. 유엔 가입

○ 1961. 3. 3. Hassan II세 즉위

- 즉위 당시 모로코는 행정 수도인 라바트와 상업중심지인 카사블랑카를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의 도로, 보건위생, 교육시설들이 매우 낙후되어 있었는 바, Hassan II세 국왕은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전통적인 통치자로서의 국왕의 절대 권력은 계속 유지

- 1975.11.16 : 녹색대행진

(35만명이 서부사하라 사막 행진, 병합 촉진)

- 1979년 : 서부사하라 전역 장악(79.8.5. 모리타니는 폴리사리오, 알제리와 협정체결, 서부사하라 포기)

- 1992.9.14 : 새 헌법 채택

- 1996.9.13 : 제 4 차 헌법 개정(상. 하 양원 구성)

- 1999.7.23 : Hassan 2세 국왕 서거

○ 1999.7.30 현 Mohamed 6세 국왕 즉위

정치제도

국왕

○ 모로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왕국(Kingdom) 중의 하나로 서기 788년에 최초의 통일 왕조 수립 후 수차 왕조가 바뀌면서 왕국 체제를 유지해 오고 있으며, 1660년부터 Alaouite 왕조가 현 모하메드 6 세 국왕까지 이어져 오고 있음.

○ 국왕은 종교 최고 지도자(Amir Al-Muminin), 국가 원수, 국가 통일의 상징 및 국가의 연속성을 보장하고 이슬람과 국헌의 수호자(헌법 제19조)로 명시되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함.

○ 왕권은 국왕이 다른 왕자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는 한 장자 상속(헌법 제20조)

행정부

○ 행정부는 의회 다수파 중 국왕에 의해 지명되는 수상(Prime Minister)과 수상에 의해 제청되어 국왕이 임명하는 각료(Ministers)로 구성되어 있음.

○ 수상은 국왕과 의회에 책임을 지며 법률을 집행하고 각 부처의 정책을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함.

사법부

○ 사법부는 독립을 유지하며, 법관은 국왕이 주재하는 최고 사법평의회의 추천에 의해 임명되고 있음.

- Communal and District Courts(지방법원) : 관할 구역 내 거주하는 개인의 재산권(금액 1,000 디람 이하)에 관한 심의를 담당

- Administrative Tribunals (행정법원)

- Tribunals of Original Jurisdiction(민사 1 심 법원) : 가족법, 상속, 계약, 노동분쟁, 민사 소송 등을 심의

- Courts of Appeal(상고법원)

- Supreme Court(대법원)

- Special Court of Justice(특별법원) : 지방 관리나 중앙 정부 공무원의 횡령 및 배임에 관한 재판을 전담

- High Court(고등법원) : 정부 공무원이 업무 수행 중 발생한 범죄나 위법행위에 심의

- The Standing Tribunal of the Royal Armed Forces(군사법원)

의회

○ 과거 단원제이던 의회는 제 4 차 헌법 개정(96.9.13)에 따라 상원(Chambre des Conseillers) 및 하원(Chambre des Representants)으로 구성된 양원제로 변경되었음.

하원은 임기 6년으로 직선에 의해 선출되며 정원 325석임. 하원 의장은 임기 3년이며, 각 위원회 의장단의 임기는 1년으로 정당 그룹별 의원 수에 비례하여 구성

○ 상원은 임기 9년으로 지역 선거인단 대표에 의해 총 의석(270석)의 3/5를 지역별로 선출하고, 나머지 2/5의석은 직능별 대표와 전국의 임금노동자 대표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함.

선거제도

○ 피선거권과 선거권은 공히 만 18세 이상의 모로코 국적자에게 주어짐

- 모로코는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 이후 국민투표, 의원 및 지방 선거 등 각종 선거를 치렀으며, 최초의 국민투표는 1962 년 12 월 7 일의 헌법제정을 위한 국민투표였음.

- 지난 1996년 9월 13일 국민투표를 통한 헌법개정을 통해 상/하 양원제를 채택하였음.

○ 최초의 지방선거는 1960년 5월에 있었고,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총선은 1963년 5월 최초로 치러졌고 매 5년마다 선거가 있음.

국가원수 겸 최고 통수권자 인적사항

○ 직 위 : 국왕 (Roi du Maroc)/ 입헌군주제

○ 성 명 : 모하메드 6세 (Mohamed VI)

○ 생년월일 : 1963.8.21

○ 약 력

- 1967-1981: 왕실교육을 통해 초, 중, 고등학교 과정 수료

- 1985: 라바트 소재 모하메드5세 대학교 졸업

- 1987: 모하메드 5세 대학교 정치학 석사

- 1993: 프랑스 니스-소피아 인터폴리스 대학교 법학박사

외교

외교정책기조

○ 모로코 대외정책의 기조는 비동맹 중립, 대 마그레브권 건설, 아랍권 단결 및 아프리카의 단결과 서부사하라(Western Sahara)의 영토 보전 및 통합임.

- 그간 이스라엘과의 특수 관계를 바탕으로 아랍권-이스라엘 간의 관계 개선의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 왔음.

- 서구 유럽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 및 스페인이 중요한 동맹국인 한편 주요 교역 상대국의 위치를 차지

- 국제 관계 다변화 차원에서 중국 등 아시아 국가와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고 있음. 중국 및 인도와 기존 비동맹 외교에 바탕을 둔 친선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과의 경제적 협력관계도 증진

- 대 한반도 정책에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기존 우호관계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음.

프랑스 및 미국 등 서구제국과의 전통적 유대관계 유지

○ 모로코는 지리적으로 지브랄타 해협을 사이로 유럽과 불과 14km 떨어져 있는 관계로 전통적, 역사적으로 유럽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고, 정치, 경제, 외교적으로 유럽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프랑스로부터 44년간 식민통치를 받았으나, 독립 후 알제리가 사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과는 달리, 서유럽 및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우호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음.

- EU는 2001년도 모로코 수출의 72.5%, 수입의 54%를 차지하고 있으며, 2000.3. EU와의 제휴협정 발효로 경제관계 집중화 현상 심화 예상

- 모로코는 EU 회원국 가입을 위해 1987년 가입신청을 한 바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단, 1996년 EU와의 협력협정(Association Agreement)을 체결(2000.3월 발효)하여 단계적으로 EU에 접근하고 있음.

- 또한 군사, 외교, 특히 중동평화협상 및 지역안보(서부사하라 문제 등) 측면에서 미국과 제 분야에서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으며, 자유무역지대 설립을 협상 중

대아랍, 이슬람국가 관계 강화

○ 모로코는 아랍권 내 대표적인 온건 이슬람 국가로서, '관용'을 국가정책의 근간으로 삼고 있으며, 기존 이스라엘과의 특수관계를 바탕으로 아랍권-이스라엘간의 관계 중재자 역할을 수행해 옴.

- 선왕 Hassan 2세는 93.9.13 워싱턴 중동평화협정 성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바 있으며, 현재 모로코 국왕은 아랍연맹기구(OIC)의 예루살렘위원회(Al-Quds Committee) 위원장으로, 아랍국가들간 협의 및 관련 정책 추진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 마그레브 아랍연합(UMA) 및 아랍연맹(Arab League)을 통한 역내 국가, 아랍권 및 회교권 전체 단결 공고화를 도모하고 있으며, 89. 2월 UMA의 형성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

- UMA는 모로코-알제리간 서부사하라 문제를 둘러싼 갈등, 서방의 대리비아 제재 등으로 그간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으나, 99.4월 알제리 신임 대통령 및 99.7월 Mohamed 6세 국왕 취임, 리비아 제재의 부분적 해제와 더불어 관계 실무회의 개최 등을 통해 새로운 전기 마련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

○ 모로코는 2001. 5월 소위 Agadir 선언을 통해 모로코, 튀니지, 이집트, 요르단 등 4국간 자유무역지대(Arab-Mediterranean FTA) 설립 추진을 주도하고 있으며, 향후 이를 여타 아랍국가 들에게 개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음.

대아프리카 관계

○ 모로코는 아프리카 국가로서의 일체성을 부각, 아프리카 제국들에 대한 지원 및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2001년 모로코 국영통신(Maroc Telecom)의 모리타니아 국영통신 51% 지분 인수, 세네갈 국영항공 운영 참여 등 경제진출에도 역점을 두고 있음.

- 모로코는 폴리사리오의 OAU 가입에 항의, 1984년 OAU를 탈퇴하였으며, 현재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서부사하라 이남 국가들과 협조하여 폴리사리오의 OAU 축출을 도모하고 있음.

Mohamed 6세 국왕은 2002.2 모로코에서 시에라레온, 라이베리아, 기네 등 Manon강 유역 3국간 정상회담을 주선, 이들 국가들간의 국경선 분쟁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역내 평화유지에 적극 기여

대아시아 관계

○ 모로코는 외교관계 다변화 차원에서 최근 들어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적극 도모하고 있으며, 기존 제3세계 비동맹외교에 바탕을 둔 중국, 인도 등과의 친선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 한국,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있음.

- Mohamed 6세 국왕 아시아 방문 : 2001.2. 인도, 2002.2. 중국, 태국, 2003.3. 말레이시아

- 모로코 총리 아시아 방문 : 1998.12 중국, 2000.2. 태국, 인도, 2001.4 파키스탄, 2001.11 말레이시아

- 모로코 방문 아시아 주요인사 : 1999.10 중국 강택민주석, 2002.4 말레이시아 Mahathir 총리, 2002.3 한국 이만섭 국회의장, 2003.7 Musharraf 파키스탄 대통령

서부사하라 문제

○ 서부사하문제는 모로코 최대의 외교, 국방 과제로서, 모로코는 1975년 스페인이 서부사하라에 대한 식민지 점유권 포기 이후 Hassan 2세의 녹색대행진(green march)을 통해 동 지역을 자국 영토의 일부로 편입, 이를 기정사실화 하는 대외정책을 추진

- 이에 대해 당초 서부사하라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폴리사리오전선(Polisario Front)은 76.2월 알제리 Tindouf에 거점을 정하고, 망명 정부인 "사하라 아랍 민주공화국"(RASD 또는 Polisario Front)의 수립을 선포, 알제리의 지원하에 서부사하라 독립을 위한 대모로코 게릴라 무력항쟁을 개시

- 동.서 냉전체제하에서 RASD는 세계 60여개 국으로부터 승인을 획득하였으나, 모로코는 지속적인 외교 노력을 전개,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이 동 승인을 철회토록 유도하고 RASD를 아프리카 단결기구(OAU)로부터 축출을 기도하였음.

○ 모로코가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가운데 현 평화유지 상황이 지속되는 한, 서부사하라의 모로코 편입 및 동화과정은 더욱 진행될 것으로 보이며, 상당기간 유엔의 평화유지 기능이 계속되는 가운데, 모로코가 서부사하라를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동화시켜 나가느냐에 따라 서부사하라 장래가 정해질 전망임.

사회

인구

○ 인구(2004. 9월 모로코 정부 인구센서스 결과)

- 총 인구 : 2,989만명

- 인구증가율 : 1.4%(80년대 2.5%에서 2001년 이후 크게 감소)

- 평균수명 : 69세(남 : 67, 여 : 72)

- 인구분포 : 도시 55.1%, 농촌 44.9% (도시 인구증가율 변화 추이 : 1971년 35%, 1982년 42%, 1994년 51.4%)

- 연령별 인구 분포 : (0-14세) 34.39%, (15-64세) 60.93%, (65세 이상) 4.68%

- 평균자녀 : 3.05명/성인여자(2001년 추정)

교육

○ 주요 교육 시책 : 일반화, 지역간 격차 축소, 모로코화 및 아랍화

○ 정부 교육 정책

- 정부 총예산의 26.3%를 교육에 투입

- 지역간 격차 축소 및 교육 기회 확대 정책 추진

- 1963년부터 7-13세 남녀 아동에 대한 기초 의무교육 실시

○ 취학률 : 도시지역 81%, 농촌지역 67%, 여학생 취학률 : 71%

○ 교육제도는 우리 나라 제도와 비슷함.

- 초등학교(Ecole Primaire) 6년, 중학교(College) 3년, 고등학교(Lycee) 3년, 대학교(Universite, Ecole Special 혹은 Ecole Superieur) 4년, 대학원 및 박사과정(Doctorat)

- 각 교육과정별로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립학교와 민간이 운영하는 사립학교가 있음(유아원은 거의 전부 사립임). 공립학교는 초등부터 대학원 및 박사과정까지 무료이나, 사립은 주재국 생활수준에 비하여 학비가 높은 편임.

- 각 과정별 졸업은 비교적 엄격한 심사에 의해 결정되며 명문학교일수록 졸업심사가 까다로운 편임.

- 모로코 정부는 대학 졸업자수의 점진적인 증가에 비해 일자리가 정체되어 있는 고학력 실업문제를 정책적인 측면에서 해결코자 노력하고 있음.

기후

○ 기후 : 크게 우기와 건기로 구분되며, 지역별로 특성이 있음.

- 우기는 11월-4월로 온난 다습(평균 15도), 건기는 5월-10월로 고온 건조(평균 28도)

- 가장 더운달은 8월(평균 최저, 최고기온 18-28도), 가장 추운달은 1월(평균 최저, 최고기온 8-17도)

- 가장 건조한 달은 7월(평균 강우량 1mm), 습한 달은 12월(평균 강우량 86mm)

- 북부지역 : 지중해성 기후(겨울-온난다습, 여름-고온건조)

- 중부지역 : 대륙성 기후(겨울-한랭, 여름-서부사하라 사막의 열풍으로 고온건조)

- 남부지역 : 사막성 기후로 고온건조, 주야간 기온차 극심

비즈니스 에티켓

○ 문화 상대주의적인 입장에서 모로코의 문화, 풍속, 관습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자세에서 대화를 전개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모로코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특히 모로코 역사 속의 세계적 인물, 예컨대 대여행가로서 이태리의 마르코 폴로, 중국의 정화 등과 비견되는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1368)를 화제로 삼는 것도 바람직함.

○ 식사 전에 ‘비쓰밀라(신의 이름으로)’를 중얼거리거나 동서양의 음식이나 모로코인이 즐겨 먹는 양고기와 꾸스꾸스(COUSCOUS)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한 방법이고, 이슬람에서 금하는 음식물인 돼지고기 등을 식사 화제로 삼지 않아야 함.

○ 극히 한정된 몇 마디의 아랍어라도 분위기를 부드럽게 할 수 있으며, '쌀람 알라이쿰'(안녕하세요)에 대한 답변은 '알라이쿰 앗쌀람' (당신께서도 안녕하신지요?)임. 그외 함두릴라(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 잘 되고 있다), 슈크란(감사합니다) 등이 있음.

○ 친한 사이인 경우 남녀구별 없이 양 볼을 번갈아 가며 살짝 비비고, 그렇지 않으면 악수를 나누거나 말을 하면서 오른손이나 왼손을 가슴에 가볍게 얹어 상대에 대한 경의를 표시함. 모로코인들은 서로 안부 및 가족 안부 등도 잊지 않고 물어보며, 한편 모로코 전통옷을 입은 여성과는 신체접촉을 피해야 함.

문화적 특성

○ 모로코 시장은 대다수 품목이 전적으로 가격에 의해 구매가 좌우되는 철저한 가격시장으로 국내 업체의 오퍼 가격에 네고의 여지가 없다고 바이어가 판단하면 설사 한국산 수입에 관심이 많더라도 회신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결정권한이 사장에 집중되어 있어 사장이 부재 중이면 "예스"나 "노"라는 확답을 얻지 못함. 현지 중소 바이어들은 영어에 약하거나 아예 불어밖에 몰라 주로 불어를 사용

○ "인샬라"(신이 원한다면)라는 말은 본래 전지전능하신 신 앞에서의 겸허함에서 연유된 것인데, 종종 책임회피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있는 만큼 상담 시에 잘 새겨들어야 함. 모로코인들은 스트레스 받기를 싫어하여 예스나 노에 대한 결정을 빨리 내리지 않는다고 다그쳐 봐야 일만 그르치며, 우리가 "빨리 빨리"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듯이 모로코인들은 "슈이아 슈이아"(천천히 천천히)라는 말을 즐겨 씀.

○ 모로코는 이슬람국가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등 정통 이슬람권과는 달리 상당히 개방적인 분위기를 보여 금요일을 공휴일로 하는 대부분의 이슬람권과는 달리 유럽의 영향으로 일요일이 공휴일이며, 라마단 등 종교 축제 기간을 제외하고는 음주가 가능하고, 여성의 경우 차도르를 착용하는 모습을 좀처럼 보기가 어려운 실정임. 단, 이슬람력에 따른 종교행사인 금요일 오후 예배, 라마단(금식기간)등은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음.

라마단 기간은 이슬람 최대 종교행사의 하나로 이슬람력에 따라 매년 10 일 정도 앞당겨지며, 약 1개월 동안 계속되는 라마단 금식 기간 중에는 비즈니스 활동이 거의 중단상태이기 때문에 동 기간 중에는 가능한 한 이슬람권 비지니스 출장을 삼가하는 것이 바람직함. 라마단 기간 중 해가 떠있는 동안은 음식물 및 담배도 일체 금하며 해가 지고 나서야 예배를 보고 음식을 섭취함. 이 기간 중 근무시간은 대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점심시간 없이 연속근무를 하여 음식점은 모두 문을 닫아 점심식사를 하기가 곤란하나, 외국인을 위해 일부 호텔 레스토랑은 영업함. 흔히 3 금이라고 말하는 국왕, 체제 및 종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며 현지 관습을 존중해야 함.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알제리 (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Algeria) 알기

국가 상징

○ 초록색과 하얀색 바탕에 있는 빨간색의 초승달과 5각 별은 이 나라의 국교(國敎)인 이슬람교의 상징이며, 초록색은 번영을, 하얀색은 평화를 나타냄.

지정학적 위치

위치 : 북아프리카, 지중해연안, 모로코와 튀니지 사이 (28.00N, 3.00E)

○ 면적 : 238만1741㎢, 국토면적 세계 10위, 아프리카 2위 (Sudan 다음)

○ 국경 :

- 총 6343km, 튀니지 (965km 동), 리비아 (982km 동), 니제르 (956km 남동), 말리 (1376km 남서), 모리타니 (463km 남서), 모로코 (1559km 북서), 서부사하라 (42km 서)

- 해안선 : 998km (지중해)

민족구성

○ 민족 : 아랍인 (81%), Berber인 (19%)

- 현재 양자간 구별은 어려우나, 베르베르인들은 주로 KABYLE지역 출신으로, 자신이 베르베르 후예임을 내세우며 아랍문화보다는 베르베르문화, 아랍어보다는 토착어인 AMAZIGH어에 강하게 집착

지형 특색

○ 동쪽에서 서쪽으로 4개 지역으로 구분

- 텔 지역 : 알제리 인구 다수가 거주, 언덕과 비옥한 계곡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경작가능 지역을 포함

- 고원지대 : 우기동안 물을 저장하고 건기에 마른 호수나 “쇼트 (chott, shott)”라고 부르는 염천이 됨.

- 사하라 아틀라스 지역 : 목초지의 영향으로 고원 지대보다 비가 많이 옴.

- 사하라 지역 : 아랍어로 ‘사막’이란 뜻으로 국토의 99%를 차지하며 오아시스 정착지가 흩어져 있어 대추야자 농업과 소규모 농업이 이루어짐.

종교

○ 현지 카톨릭 성당 및 개신교 교회가 있으나, 현 치안상태 하에서 잘 이용하지 못하고, 신자들의 집을 활용,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 (국교 : 이슬람(순니))

약사

고대

○ 페니키아인 도래 (BC 1250경)

○ 로마인 도래 (BC 510경)

○ 베르베르 토착왕국 (BC 3-2세기)

- Numidie왕조, Massinissa 왕조, Jugurtha왕조

○ Numidie왕국 로마 지방조직으로 편입 (BC 46)

- 북아프리카에 대한 로마화 진행 (1~429)

중/근세

○ 이슬람 도래 (647-1556)

- 사라센 문명

○ 오스만 터키 지배 (1518-1830)

근대

○ 프랑스 식민시대 (1830-1962 : 132년간)

- 1920년대 Messali Hadi를 중심으로 근대적 민족주의운동 시작

- 1954년 민족해방전선, FLN 결성 후 알제리에서 대 프랑스 무장투쟁

- 1962년 프랑스대통령 샤를 드골은 정전과 독립을 선언

○ 독립 알제리

- 1962년 9월 알제리 민주인민공화국 수립 (Ahmed Ben Bella 초대수상)

- 1965년 군사 쿠데타, 군장교로 이루어진 혁명 의회 구성

현대

○ 대규모 반정부 시위 및 총선

- 1988년 악화된 경제상황에 대한 항의와 폭동으로 수백명이 사망

- 1989년 국민투표로 새 민주헌법 채택

- 1990년 최초로 복수정당제하의 지방선거 및 총선 실시 결과, 이슬람구국전선(FIS)의 정권장악

○ 군부의 정치개입

- 1992년 군부개입으로 총선취소 및 FIS 해체

- 회교세력이 제도권외부 정치세력화 되면서 현재까지 테러 정국 계속

○ 2004년 임기5년의 8대 대통령으로 Abedlaziz Bouteflika 재선

알제리 정세

정세 개관

○ 2004년까지 매년 테러로 약 100-200여명이 사망하였으나, Bouteflika 대통령은 2005.1.3 테러 종식을 공식 선언하고, 동년 9.29(목) "평화와 민족대화합“을 위한 헌장을 97%의 높은 지지율로 채택하여 테러문제 해소에 관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함.

○ 5개년 경제개발계획(2005-2009)을 수립, 공적자금 600억불 투입하여 국내수요 창출, 농업 및 중소기업지원을 통한 노동집약 산업 육성, 사회간접자본 확충 및 인력개발 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음. 특히 알제리는 경제도약 3대 역점 분야를 설정, 정보통신, 농업 개발(식량안보 확보 및 고용창출), 주택 건설(매년 20만호 주택 건설) 개발을 적극 추진 중에 있음.

- 최근, 국제유가 상승에 따라 알제리정부는 대규모 공공 및 기간사업 조기발주를 추진하면서, 실업자 문제 및 주택부족 문제(가구당 평균 7명),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 부족 등 사회문제 해소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

대통령 인적사항

○ 성 명 :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Abdelaziz Bouteflika)

○ 생년월일 : 1937년 3월 2일

○ 경 력

- 1957 서부지역 참모본부 및 조국해방군 총통합참모 사령관 임명

- 1961 Aulnoy에 억류된 혁명지도자와의 접촉을 위해 프랑스 밀입국

- 1962 제헌국회의원 당선, 알제리 초대독립정부 관광/체육 및 청년부장관으로 임명

- 1963 외무부장관으로 임명

- 1974 제29차 국제 연합총회에서 의장 선출

- 1979 스위스에서 망명생활하며 외교고문 역할 수행

- 1995 대통령 당선

- 2004 대통령직 5년 연임 재선 승리

○ 기 타 : 최근 개헌을 통한 3선 집권 준비 중으로 알려짐.

○ 참고사항 : 2003. 12월 방한

외교

제3세계 비동맹외교

○ 전통적으로 비동맹 외교노선을 지향하고 제3세계 국가의 대변인 역할

- Bouteflika대통령은 74년 제29차 UN총회의장을 역임하던 당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정부수반의 UN연설을 성사시켰고 인종차별을 이유로 남아공을 UN에서 축출한 바 있음.

○ 중동의 리더국으로 자임하면서, 아랍연맹의 이집트 독주에 반기를 제기하면서, 주도권 획득에 노력

- 2005.3.22 아랍연맹 정상회의 개최 (알제)

대프랑스 관계

○ 알제리의 주요 무역 파트너이자 실질적인 최대 수입국인 프랑스와는 경제적으로 긴밀한 협력관계 유지하고 있으나, 국민들의 반불정서는 상당히 높음.

- 이와 관련, 지난 2003년 Chirac 프랑스대통령의 알제리 방문시 합의된 우호협약(Traité d'Amité)은 2005년말 체결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2005.2월 프랑스 식민지배의 긍정적인 면을 언급한 법안이 프랑스 의회를 통과함에 따라 무산됨.

- 이어 Douste-Blazy 프랑스 외무장관이 최근(2006.4.9-10) 알제리를 방문 우호조약 체결을 재추진 하였으나, 알제리측이 프랑스의 과거사 인식을 이유로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보임.

알제리의 전체 수출 중 27%가 대 프랑스 수출로서 제1의 수출대상국임.

대미국 관계

1974년 외교관계를 재개하고 긴밀한 경제적인 협력관계를 유지(2004년 미국은 알제리 최대의 원유수입국임)

2001년 9.11테러 발생 이후, 알제리내 테러리스트 척결 및 미국의 대테러 전쟁 명분과 부합하면서, 2005.7월 양국은 사하라사막 지역에서 군사 합동훈련을 실시함.

- 알제리 남부지역에 미군도청기지 설립을 위한 협의

- 미국의 지원하에 알제리-NATO간 군사협력 강화는 물론 미군사고문단 약 100여명이 주재국 파견됨.

- 최근 Rumsfeld 국방장관의 방문 (2006.3), Bedjaoui 외교장관의 방미 (2006.4) 등 양국간 고위인사 교류도 지속

대EU 문제

○ EU는 알제리 무역의 60% 내외를 차지하는 최대 교역상대임.

- EU는 2010년까지 알제리 등 12개 지중해연안국과 유럽-지중해 자유무역지대(EMFTA)를 창설키로 합의

○ 2002년 4월 알제리는 EU와 준회원협정(Association Accord)을 체결하였으나, 알제리 측 국내 비준문제로 2005년 9월 발효

- 양자는 발효시점으로부터 12년 후 완전한 관세철폐를 목표로 점진적인 관세 인하를 추진 중임.

대마그레브 문제

○ 인근국인 모로코와는 서부사하라 분쟁으로 소원한 관계 (서부사하라 망명정부가 알제리에서 활동)

○ “모리타니아”와는 1969년 친선협정 체결 (대이스라엘 수교로 다소 서운한 관계 유지)

○ 튀니지와 리비아와도 우호관계 유지

중동평화 문제

○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적극 지지 입장

- 요르단 및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화해하자 동 국가들과 외교관계 단절한 바 있음.

대중국 관계

알제리 독립 전쟁시 알제리 임시정부 승인해 준 중국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계 유지, 특히 과거 중국원조를 각종 SOC사업권으로 전환해줌.

국민들의 정서는 중국을 기대하지 않으나, 알제리 정부는 각종 대형 프로젝트(건설, 통신 등)에 중국의 참여를 적극 지지

사회

종교

○ 종교는 이슬람교(수니파 99%)이며, 각종 생활을 이슬람계율에 근거하여 행하고 있음.

- 기타 소수 가톨릭 신자

○ 주요 종교의식d d

- 하지 : 매년 히즈라력 12월 8일-13일까지 5일간의 메카 이슬람 성지순례가 있는데, 이를 위해 실시하는 이슬람국가의 전반적인 휴가

- 라마단 : 매년 히즈라력 9월은 사도 무함마드가 9월 29일 밤 하늘로부터 지브릴(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코란을 최초로 계시받은 달로서, 이달 한 달은 고행과 수도의 달로 일출후부터 일몰전까지 음식은 물론 물, 음료, 담배 등을 일체 금식하는 대신 밤에 식사를 하고 특별 예배를 봄. 라마단 행사가 끝나고 3일간은 ‘이둘휘뜨르’라는 제2대 명절로서 전 이슬람권이 친지, 이웃을 방문하는 공휴일

언어

○ 알제리 공용어 : 아랍어

- 상업 활동에는 불어가 광범위하게 통용되므로 주의를 요함.

문화적 특성

○ 알제리인의 경우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에는 알제리계 80여만명이 집단거주하고 있음. 알제리는 프랑스,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인접국으로 유럽문화 및 브랜드에 친숙하다고 평가됨.

○ 전 가정에 보급된 위성방송수신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유럽 주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음.

- 알제리인들은 정서적으로는 이슬람권에 속하지만, 소비자 취향은 유럽문화권에 속하고 있는 영향으로 유럽문화와 브랜드에 우호적임.

○ 이슬람 국가 중에서 여성의 사회참여도가 높은 편이며, 라마단 기간 등을 제외하고는 호텔 및 레스토랑에서 주류 판매가 허용되는 비교적 개방화된 문화를 갖고 있음.

○ 이슬람 기본예절에 따라 인사할 때와 식사할 때에는 왼손을 사용하지 않고, 돼지고기 섭취를 금기시하는 특성이 있음.

교육

○ 수도 알제에는 영미계 학교가 없어 초등학교 저학년은 현지학교나 프랑스계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으나, 중고교 취학자녀가 있는 겨우 인근 제3국에 유학을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

○ 지난 2002. 9월 프랑스학교가 개교하여 운영되고 있음. 현지인 학교는 모두 국립이며 정부의 아랍화 정책에 따라 아랍어로 교육하고 있음. 최근 아랍어와 불어를 병행하는 현지 사립초등학교가 많이 세워졌으나 교육시설 및 수준은 미흡한 실정임.

치안

○ 1990년대 초 알제리 테러문제는 국내적 사회불안요소이자 대외적으로 알제리 이미지 손상의 주요 요인이면서, 알제리 경제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여 왔음.

○ 최근 알제리가 정세가 안정된 이후, 외국기업들의 알제리 진출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으며, 2005.1월 Bouteflika 대통령의 테러 종식 선언과 함께 동년 9.28 실시된 “평화 및 민족대화합” 헌장 국민투표에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도 긍정적인 요인

○ 여전히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일부 테러집단이 잔재하고 있어 해당지역 여행시 주의를 요함.

사회보장제도

○ 알제리에 진출한 기업 및 기관은 알제리 사회보장제도에 따라 모든 고용주는 영어개시 10일 이내에 영업장 소재지 관할 사회보장 기관에 신고하여야 할 의무가 있음.

○ 사회보장금고(CNSS : Caisse National de Securite Sociale)에 가입할 의무가 있음.

○ 사회보장금고에 급여자와 견습자를 등록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

○ 사회보장금고에 급여자의 월급 중 고용주 26%, 피고용자 6% 납부

- 피고용인 10인 이하 : 각 분기 이후 30일 이내

- 피고용인 10인 이상 : 매월 말 30일 이내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쿠웨이트 (Kuwait) 알기

지정학적 위치

○ 북위 28-30도(한국과 대만 중간), 동경 46-48도

(우랄산맥과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중간)

○ 쿠웨이트의 총면적은 17,818㎢로 한국의 경상북도 크기와 비슷 하며, 동서의 폭은 150km, 남북의 길이는 195km임. 총면적중 2,590㎢는 1966년 사우디와 쿠웨이트간에 분할된 '중립지대'(Neutral Zone)이며, '부비얀'(Bubiyan), '와르바'(Warba), '훼일라카'(Failaka)로 구성되는 10개의 근해 섬(offshore island)과 쿠웨이트만(灣)에 형성돼 있는 199km의 해안선을 가지고 있음.

지형적 특징

○ 쿠웨이트는 아라비아 반도의 동북부, 즉 걸프만의 머리 부분에 위치한 산유 부국(富國)으로 북으로는 이라크, 남으로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동으로는 걸프만에 인접. 쿠웨이트의 정식 국명인 State of Kuwait는 '작은 요새'(little fortress)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

○ 쿠웨이트는 걸프만 내륙으로부터 이락에 이르는 진입로를 제공하는 약 간 경사진 단단한 땅을 가지고 있고, 가까운 모래 언덕과 산호초로 둘러싸인 양호한 항구를 가지고 있기에 성장에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음.

○ 동부의 해안지대를 제외하고는 국토의 대부분이 해발 10-80m의 평탄한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음.

기후

○ 열대성 사막기후

- 연간 평균기온 : 25도 연중 6개월이 30-53도 사이(연중 최고기온 53도)

- 연중 6개월이 30-35도 사이(연중 최고기온 53도)

-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더운 지역(6-8월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고온)이고, 겨울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기온상 가장 추운 지역

약사

국가 형성 과정

○ 16세기 이전부터 터키(Ottoman 제국)의 영향에 있었으며, 18세기초부터 오늘날의 사우디, 이라크, 이란 등지로부터 Amaiza족 등이 이주하여 현 쿠웨이트 민족의 주류 형성

- 756년 초대 Sabah 왕이 황무지를 개척, Koutu라는 지역에 정착

○ 1897년 Mubarak왕은 터키의 쿠웨이트 합병을 피하기 위해 보호를 요청했고, 영국은 지중해와 인도간의 무역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1899년  쿠웨이트와 보호조약 체결, 이후 영국이 외교와 국방 담당 

근대 및 현대

○ 1961년 쿠웨이트는 영국과의 보호조약을 우호협력조약으로 대체, 독립국 지위 획득

- 화폐는 루피(Ruffy)에서 디나(Dinars)로 변경

○ 1990.8.2. 이라크가 침공, 쿠웨이트 합병 선언

- 유엔 결의에 따라 미국을 주축으로 구성된 27개국 다국적군의 공격으로 이라크군을 축출하고 1991.2.26. 쿠웨이트 해방

왕위 계승

○ 13대 ‘자베르(Jaber)’ 국왕(77.12 즉위)은 걸프전후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고조되자 언론검열 폐지(92.2), 여성 참정권 허용(05.5) 등 점진적으로 민주화 추진

○ 2006.1 ‘자베르’ 국왕의 사망으로 ‘사드(Saad)’ 왕세제가 즉위했으나 건강문제로 직무수행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10일만에 의회의 결정으로 퇴위

- 왕위계승 관련 법률 4조에는 의회가 재적의원 2/3 이상의 동의로 국왕 퇴위를 결정할 수 있다고 규정

○ 총리였던 ‘사바’가 국왕으로 즉위(06.1), 외교장관․총리로서 40년 이상 풍부한 국정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정국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

- 사바 국왕은 여성참정권 허용, 신언론법 제정, 선거구수 축소 등 선거제도 개선, 각종 규제완화 등 개혁정책 추진

- 쿠웨이트는 GCC 국가중 유일하게 의회 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06.6월 국회의원 선거에 여성이 최초로 입후보하고 투표에 참가

정치 개황

정부형태

○ 국가 형태 : 입헌 군주국

○ 국왕(AMIR)의 권한

- 국왕은 국가수반으로 각료 임면권, 의회 해산권 및 군 통수권을 갖고 있음. 국왕부재 시는 왕세자(CROWN PRINCE)가 업무를 대행하며, 왕세자의 업무대행이 불가할 경우 국왕은 칙령에 의한 대행자를 임명함.

- 종전에는 왕세자가 수상을 겸임했으나 2003.7월 정치 개편 이후 수상직이 별도 분리되었고, 각료수상의 추천에 따라 국왕이 임면함.

- 각료는 국가의 정책에 대한 집단 책임과 함께 개별 부서의 업무에 대한 개별 책임을 짐.

- 단일 도시국가 형태로 지방자치 제도는 전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며, 전국은 행정부 산하로 6개의 GOVERNORATE로 나뉘어 있음.

내각

보통, 비밀,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 50명의 의원과 당연직 의원인 15명의 각료로 구성되며, 구성각료는 의원겸직 가능

의원의 임기는 4년으로 연임 제한은 없으며 법률안 의결권 및 왕세자 임명 동의권을 가짐.

의원 선거권자는 문자 해독이 가능한 21세 이상의 쿠웨이트 시민이며 왕족, 군인, 경찰및 보안관계 종사자는 투표권이 없음.

사법제도

3심제이며 모든 법원은 형사, 민사, 가정사건 등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건을 다루고, 계엄 시 군사법정이 설치되며 재판관은 국왕이 임명함.

○ 대법원 - 대법원장과 부원장이 있으며 판결은 5인 1팀의 법관에 의해 내려짐.

○ 고등법원 - 법원장과 부장이 있으며 1심 또는 즉결심판에서 불복한사건에 대해 판결함. 판결은 3인 1팀의 법관에 의해 내려짐.

○ 1심 법원 - 형사 사건이나 단독심의에 의해 내려진 판결을 재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독심으로 진행됨.

○ 헌법 재판소 - 헌법에 위배되는 사항을 다루기 위한 법원으로 5명의 상시 재판관과 2명의 임시 재판관으로 구성되어 있음. 헌법소원은 의회나 정부 또는 하급법원에서 제기되고 있음.

각료명단 및 주요인사 인적사항

국왕

○ 이름 : His Highness The Amir, Sheikh Sabah Al-Ahmed Al-JaberAl-Sabah 아미르, 셰이크 사바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생년 : 1929년

○ 출신 : 3대 국왕인 Amir Shaikh Jaber Al-Ahmed Al-Sabah(아미르 셰이크 자베르 알-아흐마드 앗-사바)의 동생

○ 경력

- 1962년 공보부 장관 역임

- 1965~1967년 재경부장관과 석유부장관대리 역임

- 1963~1991년 외무부장관 역임

- 1998~2003년 외무부장관과 제1부총리 겸임

- 2003~2006년 총리 역임

왕세자

○ 이름 : His Highness Sheikh Nawaf Al-Ahmed Al-Sabah(Amir’sbrother) 셰이크 나와프알-아흐마드 앗-사바(현 국왕의 동생)

○ 생년: 1937년

○ 경력

- 1962년 하왈리 주지사 역임

- 1978~1988년 내무부 장관 역임

- 1988~1991년 국방부 장관 역임

- 1991~2003년 국가방위군 부의장 역임

- 2003~2006년 내무부 장관과 부총리 겸임

총리

○ 이름 : Sheikh Nasser Al-Mohammad Al-Ahmad Al-Sabah

○ 생년 : 1940년

○ 경력

- 1965년 왕실 의전장관역임

- 1968년 이란대사 역임

- 1985~1988년 정보부장관 역임

- 1988~1990년 노동사회부장관 역임

- 1990~1991년 국무부장관 역임

- 1991~2006년 왕실 의전장관 역임

외교

외교정책기조

○ 독립 이후 비동맹 중립외교를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친서방 정책을 견지해 왔으나, 81년 5월 사우디, 바레인, UAE, 오만, 카타르 등과 GCC(페르시아 만안(灣岸) 협력 회의)를 창설, 강대국의 개입을 배제한 자주적 역내집단 안보체제 구축을 모색하면서부터 미∙소 양 진영에 대한 등거리 외교정책과 엄정 비동맹 정책을 추구

○ 이러한 외교적 노력의 실례로 81년도 SABAH 외상의 방소, JABER 국왕의 발칸 및 동구제국 순방, 82.6월 SABAH 외상의 동구 및 소련 방문, 미∙소 양측으로부터의 무기구입 등을 들 수 있는 바, 이는 친서방적인 종래의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한 외교적 전략으로 해석됨.

○ 걸프전 이후 외교정책은 안보체제 구축을 최우선으로 하여 미국, 영 국, 프랑스, 러시아와 방위 조약을 체결하는 등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음.

대미국 관계

○ 쿠웨이트의 동∙서 등거리 외교원칙에 입각, 중립적인 태도를 취해 왔 으나 쿠웨이트항공기 납치 및 국왕 피격 사건 시 미국의 신속한 태도 표명으로 85년부터 관계가 호전됨.

○ 미국의 대 이란 무기 판매 사건으로 쿠웨이트에 있어서 미국의 신뢰성이 크게 실추되었으나 2차에 걸친 미해군의 이란 쾌속정 및 석유시설 공격과 대 이란 무기 금수조치에 대한 명확한 태도 표명으로 신뢰성도 크게 회복됨.

○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 의해 이라크로부터 해방된 91년 2월 이후 방위조약을 체결한 이후 경제적인 모든 면에서 미국 기업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고 있으며, 2003년 이라크전을 통해 더욱 공고히 되고 있음.

아랍-이스라엘 분쟁

○ GCC 회원국들과 공동보조 아래 미국․EU의 중재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의 조속한 해결을 적극 지원한다는 입장

○ 이스라엘에 대해서는아랍권의 정서를 고려, 관계개선에 미온적이며 통상 관계도 중동평화협상 진전 상황을 보아가며 결정한다는 입장

유럽 및 러시아와의 관계

○ 93.11월 상호방위 조약 체결 이후 합동 군사 훈련을 계획하는 등 군사외교적 관계를 긴밀히 유지하고 있음.

○ 이라크로부터의 해방 후에도 이라크의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자국의 방위를 위한 UN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력

○ GCC국가와 가장 밀접한 교역 파트너인 EU의 시장통합에 대응하기 위하여 GCC국가가 추진하고 있는 역내 자유교역 및 대EU 수입품의 수입 관세율 동일 적용 등의 추진에 회원국으로서 적극적으로 대응

대아시아 관계

○ 자국산 원유의 최대 도입국인 한․일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으며, 한․일의 쿠웨이트 진출기업 및 근로자들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 견지

○ 걸프전 시 다국적군에 참여한 한국의 역할에 사의

○ 2004.7 '사바‘ 총리(현 국왕)는 한국․일본․중국을 함께 방문한 바 있으며, 최근 들어 중국, 베트남과의 관계 강화에 적극적 자세를 보이면서 에너지 협력 및 금융투자 확대 추진

중동국가들과의 관계

○ 이라크와는 1990년 걸프전이라는 악몽이 남아 있으나, 최근 들어 이라크와의 과거 청산 및 미래지향적 협력관계 수립에 적극적 자세

-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말리키’ 총리의 2차례 쿠웨이트 방문(06.7)및 ‘국경선 설치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06.11) 등을 계기로 적대관계청산을 모색하고 있으나, 이라크와의 국경분쟁, 이라크 내부 혼란으로 인한 난민 유입 가능성 등에 대해 우려하여 친미 성향의 이라크 신정부정책을 지지하고, 이라크의 조속한 안정화를 지원

- 최근 대이라크 부채탕감 문제에 다소 신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이라크 재건사업에 5억 6,000만불 지원

○ 이란과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이란의 핵개발은 IAEA 체제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으로, 특히 이란의 핵개발로 인한 걸프지역의 해수오염 가능성에 우려

○ 2006.10 미국 주도의 PSI 해상 기동 훈련시 이란은 쿠웨이트가 참여하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압력을 행사하였으며, 이에 따라 쿠웨이트는 옵저버 자격으로만 참가

사회

교육

○ 공립학교 및 사립학교는 초, 중, 고 각 4년

○ 국제학교(사립학교)중 American School은 미국학제, British School은 영국학제를 따름

○ 학교현황

- 국.공립학교 : 현지인만 입학

- 사립 아랍어학교 : 현지인 및 외국인 입학가능

- Int‘l School : American School 및 British School 등 다수

- 학비는 US$5,000 - US$13,000 범위

○ 쿠웨이트대학 (www.kuniv.edu.kw)

- 현지인 및 외국인 입학가능 단, 외국인은 교육부장관 승인사항

- Tel : 4988-888

○ 사립대학

- American University of Kuwait, Gulf University, Australia University

언론

○ 채널 4개가 있으며 아랍어방송 1개, 영어방송 1개, 스포츠․오락방송 1개 등 아랍어 방송 2개가 있음. (모두 국영방송)

영어방송의 경우 대부분이 미국방송 프로그램을 그대로 방영하고 있음.

○ 위성수신 TV Channel이 다양하며 CNN, BBC, STAR TV 시청 가능

Arirang TV, Sun Channel, YTN TV등 한국 TV방송도 가입시 시청가능

○ 일간지 - 아랍어 현지 신문 5개, 영자신문 3개

사회적 갈등 요인

○ 국민을 1등국민(참정권 향유)과 2등국민(귀화후 20년 미경과자로서 참정권 없음)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약 12만명의 아랍계 무국적자(Bedouns) 및 외국인 근로자 등이 공존하면서 사회의 이질감 형성

서구식 자유를 향유코자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보수 이슬람주의 자들이 사회를 이슬람화 하려는 동향이 있어 종종 갈등 노정

○ 외국인은 쿠웨이트인 Sponsor가 있어야 사업과 체류를 할 수 있는 바, 외국인 근로자의 체류비자를 둘러싸고 쿠웨이트인의 비자 알선 폭리와 인권유린이 사회문제화

○ 남.녀간의 성비 불균형(많은 외국인 독신 근로자들의 존재로 남성이 압도적인 다수 차지), 본인 의사에 반하는 결혼으로 이혼율 증대, 공공부문의 흡수능력 한계로 인한 쿠웨이트인들의 실업율 증대도 점차 사회문제로 대두

비즈니스 에티켓

○ 복장

- 반바지 착용 금지

- 여성의 경우 전통의상인 ‘아바야’ 반드시 착용 요망

- 여성이 남성 앞에서 손목과 발목 및 얼굴을 노출시킬 경우 외국인일지라도 종교경찰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음에 유의

○ 식사문화

- 세 번 이상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남.

- 전통식당에서 오른손으로만 식사해야 할 것에 유의

- 개, 돼지, 맹수류, 맹금류, 파충류와 이슬람식으로 도살되지 않은 고기, 죽은 짐승의 고기와 피, 내장 등을 먹지 않는 것이 관례

- 술을 권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남.

- 쿠웨이트는 주류, 마약 반입을 철저히 금하고 있어 입국 시 일체의 주류를 소지해서는 안됨. (마약 반입은 최고 사형)

○ 인사

- 남성 간에는 악수교환이 일반적인 인사법

○ 선물

- 이슬람 문화는 뇌물수수를 금기시하기 때문에 선물전달에 유의

- 특별한 기회에 소박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함.

○ 약속

- 현지인은 시간관념 부족

- 비즈니스 미팅의 경우 잦은 연락을 통해 약속을 지키도록 유도

사회문화

○ 가부장적인 가정생활

- 남편의 권위주의, 남아선호사상

- 사회발전과 세계화의 영향으로 여성인권 및 사회진출 요구 중

○ 결혼문화

- 부족주의 시대관습 계승하여 근친간의 결혼형태가 만연

- 혼인을 위한 신랑의 막대한 지참금 부담이 사회문제화

관습및 체류시 주의사항

○ 관습

- 전통적 회교국으로서 사회생활의 근간을 이슬람 교리에 두고 있음.

- 대가족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나 사회발전에 따라 점차 핵가족화 경향

- 이슬람 교리에 따라 4번까지 중혼이 가능하나 중혼은 점차 줄어들고 있음.

- 매춘, 음주, 돼지고기, 이자놀이, 도박 등은 금기사항

○ 체류 시 주의해야 할 사항

- 이슬람교도가 아닌 경우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지 말 것.

- 기도하고 있는 사람의 앞을 지나가거나 말을 걸지 말고, 기도할 때 까는 담요를 밟지 말 것.

- 친한 경우가 아니면 종교나 상대방 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 여주인이나 여자식구를 위해 선물을 사오거나, 여주인의 안부를 물어서는 안되며 거리에서 여인의 사진을 찍어서는 안됨.

- 여성의 경우 옷차림은 정숙하여야 하며 어깨를 드러내는 옷은 피해야함.

- 라마단 단식 기간 중에는 아랍인 앞에서 먹거나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말 것. (위반 시 구금)

- 특별히 의심되지 않는 쿠웨이트인이 제공하는 아랍커피와 홍차는 받아 마시는 것이 예의임.

- 물건을 주고받을 때는 바른손을 사용

- 쿠웨이트인과 면담 시, 신발바닥이 보이도록 앉는 것은 실례

- 길거리나 주요건물 앞에서 사진촬영 금지

(적발 시 벌금 부과 및 차후입국 시 입국금지 됨)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지정학적 위치

아라비아 반도의 서해안 중간지대에 위치, 걸프만쪽으로 약 160㎞ 북쪽으로 뻗어 있는 반도 (남-북 160㎞ / 동-서 80㎞)

Halul 섬 등 다수의 섬을 포함하고 있으며, 사우디와는 육지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

지형 특색

○ 대부분의 지형이 사막평지로 되어 있으나, 60m 높이의 모래 둔덕이 있음. 해발 최고지점은 120m 높이임.

약 6천만년전 해수아래 침잠 되어 있은 영향으로 다수지역에 소금지대가 산재함.

민족구성

○ 카타르인은 17C-18C에서 19C 초엽까지 인근지역에서 이주해 온 아랍계 인종임.

○ 카타르인 외에 인도․파키스탄․이란 등 100여개국의 외국인이 거주함.

주요 도시

○ Doha : 동해안의 항구도시로 수도임. 정치‧경제‧사회생활의 중심지역으로 카타르 전체 인구의 절반이상이 거주함.

○ 기타 석유화학 산업도시인 Messaieed, 유전지역인 Dukhan, 가스생산 지역인 Ras Laffan, Doha 인근 해변도시인 Al-Wakrah와 Al-Khor가 있음.

종교

공식종교는 이슬람이며, 주요 입법원은 회교 샤리아법임.

○ 절대 다수 카타르인은 순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이슬람교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고 있음.

이슬람교 이외의 외국인의 종교에 대해서는 비공식 묵인 등 관용적 태도를 취함.

약사

고대

고고학적 조사에 따르면 BC 4C 남부 이라크와 북부 걸프 아라비아 지대에 번성한 Ubaid 문명이 카타르에까지 미쳤으며, 인간 정주의 흔적을 남김.

BC 5C에 원주민이 정주하기 시작했으며, AD 2C에 아랍세계 지도에 Qatra로 지명이 표기

중세

이슬람 여명기에 Mandher 왕조의 지배하에 있다가 그후 Khawarej와 Qarameta의 지배를 받음.

○ 6C에 인도행 무역전략 거점으로 포루투갈의 통제하에 있었으나, 곧 오토만 터키의 영향권으로 들어감.

근대

○ 1860년대 Bani Utab족 카타르에 정착

○ 1868 : Sheikh Mohamed bin Al-Thani족 영국과 선린 외교관계 수립, 협정 체결 (이후 현재까지 Al-Thani 왕가가 지배)

○ 1872 : Ottoman Turkey 지배

○ 1876 : Ottoman Turkey의 정부 수립

○ 1880 : Bahrain과 영토보호 협정 체결

○ 1899 : Kuwait와 영토보호 협정 체결

○ 1913 : 영국과 Ottoman Turkey 제국간 협정체결로

카타르 독립인정

○ 1914 : 영국과 Ottoman Turkey 제국간 정식 협정 체결로 영국은 카타르 국내 문제 불간섭 언약

(동시에 카타르 반도내의 터어키 세력권 규정)

○ 1916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터어키 세력 물러가고 영국세력 신장

현대

○ 1961 : OPEC 정회원으로 가입

○ 1970 : 영국 보호령으로부터 아랍 연맹 가입을 허락하는 신헌법 제정 독립 선포

○ 1971. 9. 3 : 영국과의 보호협정 폐지, 완전독립을 선언

○ 1971. 9. 4 : Sheikh Ahmed bin Ali Al-Thani 국왕(Emir) 즉위

○ 1971 : 아랍연맹 및 유엔에 각각 가입 (9.11 및 9.21)

○ 1972. 2.22 : 궁정 쿠데타로 국왕 (Sheikh Khalifa bin Hamad Al-Thani) 즉위

○ 1977. 5.31 :Hamad 왕세자 국왕 후계자로 지명

○ 1995. 6.27 :궁정 쿠데타로 현 국왕 (Sheikh Hamad bin Khalifa Al-Thani) 즉위

○ 1996.10.22 :현 국왕의 3남인 Sheikh Jassim bin Hamad Al-Thani를 왕세자로 책봉

○ 1999. 3. 8 : 중앙자치의회 의원 선거 실시 (29명)

○ 2002. 7. 2 : 영구헌법안 발표 (5장 150조)

○ 2003. 4. 7 : 중앙자치의회 의원 선거 실시 (여성의원 1명 최초 당선)

○ 2003. 4.29 : 영구헌법안 국민투표실시 (96.6% 찬성, 통과)

○ 2003. 8. 5 : 현 국왕의 4남인 Sheikh Tamim bin Hamad Al-Thani로 왕세자 교체

○ 2003. 9.16 : 제1부총리 (외교장관 겸직) 및 제2부총리 (에너지․산업장관 겸직) 신규 임명

○ 2005. 6. 1 : 영구헌법안 발효

○ 2007. 4. 1 : 지방선거

○ 2007. 4. 3 : 정부조직개편 (복수부총리제를 단수부총리제로 개편)

정치개황

국왕 (Emir)

2003. 4월 통과된 영구헌법에 의하면 국왕(Emir)은 행정부를 관장하며, 자문위원회(Advisory Council, 우리의 국회에 해당)에서 제정한 법률안 거부권과 자문위원회의 해산권을 가짐.

- 헌법이 완전하지는 않으나 민주 헌법의 요체인 3권 분립 도입하여 자문위원회의 법제정권을 인정함으로써 영구헌법 이전에 국왕이 독점적으로 보유하였던 입법권이 대폭 약화됨.

○ 국왕은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모든 법령을 비준, 공포하고, 각의를 주재하며, 군 통수권자가 되는 외에 법률에 따라 정부각료와 군인을 임명하고, 자문위원을 임명

내각

내각은 국왕의 위임을 받아 각종 법령을 집행하는 최고 행정 기관임.

○ 각료는 각종정책을 집행하는 책임을 지며, 법령안 제안 및 집행, 재정감시, 예산준비, 국가 이익의 대외적 수호 등 임무를 수행

총리, 부총리(2명, 장관 겸직), 9개 부처 장관, 국무장관 4명, 무임소 국무장관 8명으로 각료회의(Council of Minister)가 구성됨.

자문위원회

○ 영구헌법에 의한 자문위원회는 4년 임기로 총 45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며, 이중 30명은 직접․보통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나머지 15명은 국왕이 임명하는 위원으로 구성됨.

- 과거 자문위원회는 72년 발효된 헌법에 따라 전원 국왕이 임명한 20명(75년 30명, 96년 35명으로 증원)으로 발족되었고, 그후 국왕 칙령으로 임기가 1년에서 6년 연장되었으며, 이후 4년씩 중임되었음.

법률 제정, 각의에서 부의되는 예산, 법령안, 기타 주요안건을 심의하고, 제반 제안을 발의할 수 있는 등 의회 기능을 담

○ 신 영구 헌법에도 서구 개념의 의회제도는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정당 활동이 금지되어 있음.

사법제도

법무부 내에 5종으로 구별되는 법원이 있음.

-하급민사법원 (Lower Civil Court) : 1심

-상급민사법원 (Upper Civil Court) : 2심

-하급형사법원 (Lower Criminal Court) : 경범 취급

-고등형사법원 (Higher Criminal Court) : 중요 사건 취급

-항소심 법원 (Court of Appeal) : 민사, 형사 최고 법원

○ 특수법원으로 전통적인 이슬람법원(Sharia)이 있으며, 이는 이슬람교도의 개인문제에 관련한 판결과 코란의 율법에 대한 유권적 해석을 내리는 종교재판소이며, 그외 종교행정에 있어 광범위한 감독권을 갖고 있음. 동 이슬람법원은 04. 10월 사법 개혁법 공포를 통해 05.1월부터 법무부 내로 편입됨.

○ 지난해 카타르 여성의 권익보호를 위해 국왕비의 주도로 가정법원을 설치하여, 이혼시 여성의 위자료 지급, 양육권 문제, 아동보호 문제 등을 전담함.

국왕 인적사항

○ 성 명 : Hamad bin Khalifa Al-Thani

○ 생년월일 : 1952년 (칼리파 전 국왕의 장남)

○ 출 신 지 : Doha (수도)

○ 학 력

- 카타르에서 초․중등 교육 이수

- 영국 Sandhurst 육군사관학교 졸업 (1971)

○ 경 력

- 1972 카타르군 총사령관

- 1977 왕세자 책봉, 국방장관 취임

- 1979-91 청소년 복지 최고위원회위원장

- 1992 국왕으로부터 내각임명권 수임으로 사실상 국정운영

- 1995 전국왕(아버지) 외유 중 정권장악, 국왕즉위

○ 가족관계 : 부인 및 아들 5명

○ 참고사항 : 99. 4월 방한

외교

외교정책기조

GCC 역내 각국(쿠웨이트, UAE, 오만, 바레인)과 보편적인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주변 이슬람․아랍국가와의 연대감하에 우호관계를 갖고 있지만 친서방 온건 노선을 견지, 실리적 균형 외교를 취하고 있음.

<GCC 및 아랍권 협력>

아랍권 및 GCC 국가와의 전통적인 유대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문제, 중동평화 문제 등 주요 국제문제에 있어 GCC 국가와 원칙적으로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음.

<친서방․친미 외교정책>

실용주의 노선 추구로 2003년 사우디에서 주둔중인 미군기지를 전격적으로 유치하는 등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서방국가와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함.

<아시아국가와의 관계 확대 추진>

최근 카타르는 아시아국가의 일원이라는 기치하에 제15회 도하아시안게임 유치 등 아시아국가와의 관계 강화에 적극 나서고 있음. 특히 서구와 견줄만한 기술과 산업생산력을 가진 한국, 일본, 싱가폴 등과의 협력 확대에 적극적임.

대이스라엘 관계

이스라엘의 점령지로부터의 전면 철수 및 팔레스타인의 독립국가 수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이스라엘 무역대표부의 설치를 허용하는 다소 현실적 노선을 추구함.

○ 2000. 11월 카타르에서 개최된 이슬람 국가 정상회의(OIC) 직전에 이란, 사우디 등의 압력에 굴복, 공식적으로는 자국의 이스라엘 무역 대표부를 폐쇄하였으나, 이스라엘측에서는 무역대표부를 유지하고 있고 2002. 7월, 2003. 5월 각 파리에서 이스라엘과 외무장관급 회합을 갖는 등 일정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음.

○ 2006. 7월 Hamad 제1부총리겸 외교부장관의 이스라엘 방문, 2007. 1월 Peres 이스라엘 부총리의 카타르 방문 등 이스라엘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으로 보임.

팔레스타인 문제

아랍 최우선 현안인 중동평화 협상에 있어 여타 아랍국가들처럼 이스라엘의 점령지로부터의 전면철수 및 팔레스타인의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독립국가 수립과 국권보호를 전폭 지지하는 원칙적 입장하에 Quartet에 의한 중동 평화정착 로드맵 적극 지지하고 있음.

○ 팔레스타인내 Hamas-Fata간 통합 정부 구성 협상에 적극 개입, 중재에 나서고 있으면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원을 강화

미국과의 관계

대미 관계를 주재국의 안보와 직결된 문제로 인식하고 있어 주변 아랍 국가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미 협조 자세를 보이고 있음.

서방국가중 미국에 대해 카타르 내 주요 병참기지 건설을 허용하여, 약 10,000명의 여단병력을 빠른 시간내 무장시킬 수 있는 Pre-Positioning Base로서의 병참기지가 설치

-동 병참기지는 최신정찰기, 전투폭격기, 탱크 등 주요 군사장비를 보유함으로써 유사시 동 군사기지를 통해 중동에서 지역 분쟁에 대해 빠른 군사개입을 할 수 있게 됨.

○ 한편, 대 이라크 전쟁시 도하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아스 사일리야 기지(Camp As Sayliyah)에 미군 중부사령부의 전진 기지를 제공하였으며, 전쟁 종료후 2003년 8월 사우디 주둔 미 공군기지를 카타르내 알 우데이드(Al Udeid) 공군기지로 이전하는 등 최근 양국간 군사협력 관계가 한층 긴밀해지고 있음.

사회

인구

전체인구는 외국인을 포함 약 90만명(카타르인은 약 20만명)으로 추정되며, 아랍계 40%, 인도 18%, 파키스탄 18%, 이란 10% 등으로 구성되어 있음.

출생률은 1천명당 15.6명, 사망률은 4.8명 선이고, 연령별 인구 분포는 0-14세 (23.1%), 15-59세 (72.9%), 60세 이상 (4%)으로 나타남.

교육

카타르 국민은 대학교까지 무료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외국인에 대해서도 무슬림인 경우에 한하여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음.

카타르는 국력을 기울여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재 양성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학업 성적(고등학교 40% 이상 수준)만 좋으면 전액 국비 해외유학 보장

카타르 대학은 현재 6개 단과대학에 학생 수 8,400여명, 교수진 600여명으로 년 1,380여명 내외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으며, 교수진중 70%가 영국, 이집트, 이란 등지에서 초빙, 충원되고 있어 외국 교수의 비중이 높은 편임.

동 대학의 특이한 점은 전체학생수의 약 70%가 여학생으로 성비가 불균형한 바, 동 불균형의 이유는 남학생들은 주로 해외로 유학을 가는 반면 여학생들은 이슬람 관습상 해외유학이 어려워서 국내 교육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임.

- 단 여성인력의 고학력 추세에 따른 여성의 사회진출로 여성인권이 대폭 신장 중

○ 카타르 정부는 중동지역의 교육의 중심지로 부상하겠다는 전략하에 교육부문에 국가적인 투자를 거행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적극적인 교육 정책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교육도시를 설립하게 됨.

언론

○ 1996년 Hamad 현국왕의 즉위 이후 즉각적인 언론검열의 폐지로 언론보도의 자유는 진전됨. 단, 일정 사항은 아직 금기로 남아있고, 거의 모든 언론들이 카타르 정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고 있어 언론인의 자율적인 보도 제한이 실시됨.

라디오 및 TV 방송은 각기 아랍어, 영어방송을 별도 방영하며, 영어뉴스 방송은 다음과 같음.

- 라디오 (QBS) : 06:00, 07:30, 08:30, 13:00, 18:00, 20:00

- QTV (CH.69) : 20:00 (30분)

- Al-Jazeera TV (CH.76) : 전세계 전역 아랍어 시사 TV

○ 신문

-영 자 지 : Gulf Times, The Peninsula

-아랍어지 : Arrayah, Al-Sharq, Al-Watan

종교

국민 거의가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며, 와하비파에 속하는 순니파로서 사우디와 비슷한 엄격한 이슬람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음.

이슬람교의 교리, 문화, 관습의 전파를 위하여 종교부를 두고 있으며, 종교부는 이슬람 사원의 건립 및 관리, 회사금의 관리, 이슬람문화 보급, 서적발간 등을 맡고 있음.

○ 카타르에서 지켜지는 중요한 종교행사는 아래와 같음.

- Ramadan : 이슬람력 라마단 (이슬람력 9월) 1개월간의 고행과 금식의 기간으로 양력으로는 매년 변동되나, 2006년도에는 9.24 - 10.23 이었음.

- Eid Al-Adha : 이슬람력 둘히자 (이슬람력 12월)

제10-13일까지로 공식 공휴일임.

○ 카타르 정부는 구미 선진국 인의 진출과 기타 외국 인력의 증가와 이들의 압력에 따라 99. 4월부터 기독교 등 타종교에 대해서도 제한된 범위내에서의 종교활동을 허용하기 시작하여 일정지역에 외국인 전용의 성당 등 종교시설 건립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

생활양식

국민의 모든 일상생활은 이슬람 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음. 그러나, 미국 등 선진국과의 잦은 접촉과 구미 문물의 도입으로 생활면에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

남녀간의 내외가 엄격하며 사우디만큼 보수적은 아니나, 여성의 직장, 대외활동 등 사회참여가 거의 없음. 그러나, 최근 중앙자치의회 후보로 여성이 입후보하여 여성의원이 1명 탄생하고 국왕비가 적극적으로 공무원 및 국영기업체에 카타르인들을 고용하는 카타르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여성 인력 사회 활동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또 여성의 운전이 가능함.

- 서구문물의 도입과 해외여행, 백화점, 슈퍼마켓등의 발달로 병원, 교육 기관 일부 등 출입처가 따로 되어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남녀간의 구분이 완화되어 가고 있음.

식생활에 있어서 이슬람교 관습에 따라 주류, 돼지고기, 맹수, 파충류는 금기사항임. 이중 주류는 고급 호텔을 제외한 요식업소에서 판매 또는 접대치 않고, 이를 소지하거나 판매하는 것은 처벌되나, 외국인의 경우 자택에서 마시는 것은 묵인되고 있음.

카타르는 남녀 모두 전래의 아랍 복장을 상용하고 있어 외국인 또는 여타 아랍권 국민과 구별 가능함. 아랍복장을 상용하는 걸프 국가(바레인 등은 서구복장 착용 경향)의 경우도 모양이 다소 상이함. 아랍 복장은 공식복장이며, 남자의 경우 두건 Qutra와 긴 흰옷 Dishta(겨울철에는 유색도 착용)를 입으며, 왕족과 정부 고위층은 각기 다른 소매 없는 두루마기 Al-Abaah를 걸쳐 입음.

여성의 경우 연령에 따라 상이하나, 성년 여자는 마스크 Al-Battoulah와 검은천 Bousheih로 얼굴을 가리고 몸 전체를 감싸는 Al-Daraa를 착용함.

관습 및 국민성

○ 여타 아랍국가들과 같이 이슬람을 국교로 하고 있어 이슬람 종교와 문화가 개인과 사회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

-따라서 공식석상에서의 금주, 돼지고기 섭취 금지, 일부다처제, 가부장제, 전통복장 착용 등의 이슬람 풍습과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음.

○ 다양한 서구식 문화의 유입과 외국인 노동력 유입에 따라 이슬람문화의 영향력이 점차적으로 약화되는 추세로서 외국인의 생활 (복장 및 음주 등) 및 종교에 대해 묵인하는 등 관용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등 개방적인 모습도 목격됨.

○ 가부장제 사회로서 가문 또는 가족을 향한 의리가 무엇보다 우선하며 동일 가문내에서도 친형제와의 우애가 친척간 유대감보다 중요함.

-가족 중시 성향으로 인해 사회적 책임과 공중도덕 관념이 상대적으로 미약

○ 카타르인들은 혈연 가족관계 및 체면․명예를 매우 중시하며 이에 따라 자신의 재산 및 부계혈통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있음.

-혼인시 개인의 외모․능력․성격 보다는 가계․혈통이 중요한 고려 요소로 작용함.

○ 카타르인들은 순박하며 인정이 많고 친화력이 있으나, 자존심이 강하고 배타적이며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양보를 하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

○ 특히 “조급하게 굴지말라”라는 코란의 계율에 따라 느긋하여 서두르지 않고 서두르는 것을 믿음이 없는 사람의 경박한 행위로 간주함.

○ 라마단 단식기간중에는 먹거나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고 껌을 씹는 것을 삼가하여 함. (해가 뜨기 시작해서 질 때까지)

○ 특별히 의심되지 않는 카타르인이 제공하는 아랍커피와 홍차는 받아 마시는 것이 예의이며, 더이상 마시지 않을 경우는 잔을 들고 세번 흔들어 줌.

비즈니스 참고사항

○ 에이전트 제도

- 카타르는 여타 중동국가와 마찬가지로 Agent 제도가 매우 보편화되어 있음. 현지대리인 또는 대표를 통해서만 판매행위가 가능하고, 외국인이나 외국기업은 직접판매 행위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외국업체가 카타르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Agent 선정이 필수적이며, 좋은 대리인 선정이 사업성공의 중요한 요소임.

- 현지에이전트의 변경은 대단히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므로 대리인 선정을 아주 신중히 해야함. 선정시에는 현지시장을 직접방문, 지명대리인의 잠재력을 충분히 검토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유능한 대리인은 현지 정부 및 기업조직에 광범위한 접촉망을 형성, 주요 정부발주 입찰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있어야 함.

○ 스폰서 제도

- 스폰서는 카타르 장기체류비자 등을 발급받기 위한 일종의 보증인으로 카타르에 지사를 설치하는 경우 반드시 카타르 국적인의 스폰서를 구하여야 하며, 매년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 일정액의 스폰서료를 지급해야 함.

- 스폰서의 동의가 있어야 장기체류가 가능하며, 주의할 점은 카타르로부터 출국시에도 스폰서의 동의가 있어야 출국이 허용됨.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KINGDOM OF SAUDI ARABIA) 알기



지정학적 위치


○ 아라비아 반도 (북위 16-32도, 동경 36-56도에 위치)

- 인접국가 : 요르단/이라크(북), 페르시아만 연안의 쿠웨이트/바레인/카타르/UAE 등(동), 오만/예멘(남), 홍해를 사이에 두고 이집트/수단/에리트레아(서)와 마주함. (국경선 길이 : 4,431km)


지형 특색


면적이 약 57,000㎢인 북부의 나푸드 사막(Nafud)과 약 65만㎢ 면적의 남부 룹알할리(Rub' al-Khali) 대사막은 세계 최대의 연속 사막지대

- 전 국토의 95%가 사막, 경지의 0.5%가 관개에 의존


기후


○ 사우디 아라비아는 뚜렷한 3개의 기후지대로 나뉨.

- 아시르 지방(예멘국경지역) : 연평균 강우량 480mm 정도, 습윤온화

- 서부 산악지대 및 초원지대

- 사막지대(전 국토의 95%) : 겨울철 14-23도, 여름철 38-54도

○ 동부와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Shammals라 불리는 모랫바람이 늦은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불어 3-4월에는 약 2주간, 6월에 절정에 달하며, 통상 한달 평균 20일 이상 모랫바람 지속


종교


○ 엄격한 종교생활 강조

- 사우디 아라비아는 헌법을 제정하는 대신 이슬람경전에 기반한 이슬람법을 국법으로 삼음.

○ 종파에 따른 차별

- 자국민 이슬람 종파 현황 : 수니파 90%, 시아파 10%

- 수니파 : 엄격한 종교생활을 중시

- 시아파 : 상대적으로 개방적, 자유로운 분위기

- 시아파에 대한 사우디 정부의 차별 : 병역의무 면제, 정치외교적 참여 제한, 출판 및 언론진출 제한

○ 라마단 : 이슬람 네 번째 규율에 의해 한달간 일출부터 일몰까지 금식, 공공장소에서의 술, 담배, 식사 등도 금지. 여행객에도 준수 요구


약사



국가 형성 과정


○ 아랍족의 발상지는 중앙아라비아와 북부아프리카로 추정

- 사우디 동부는 BC 4000-5000년 전에 이라크 남부로부터 이주시작

○ BC 500년 경 나바트인(Nabateans)들이 사우디 북서부 지방을 거점으로 아라비아 반도 북부 통치

○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유목민(베드윈)과 오아시스 정착민이 거주하였으며, 오아시스 도시 중 메카와 메디나 번창

○ 612년 경 마호메트가 이슬람을 포교한 이후 마호메트 사후 10년인 640년 경까지 페르시아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이슬람 제국 건설

○ 이후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이전하면서, 이슬람 성지순례의 목적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제외한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의 중요성 감퇴


근대 및 현대


○ 18세기 중반, 압둘 와합과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제휴, 정통 이슬람 원리에 입각한 사회개혁운동인 와하비 운동 시작

○ 19세기 말, 사우드家의 라이벌인 라쉬드家는 오스만 터키의 지원 하에 사우드가의 거점인 리야드를 점령

○ 1927년 압둘 아지즈왕(이븐 사우드)가 리야드를 탈환, 영국군의 지원 하에 오스만 터키군을 격퇴하여 통일

○ 1932년 9월 23일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 선포

○ 1938년 미국회사에 의해 동부지역 석유생산 성공

○ 1944년 ARAMCO 석유회사 설립

○ 2005년 제8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시


왕위 계승


○ 1953년 사우드 제2대 국왕 즉위

○ 1964년 파이잘 제3대 국왕 즉위

○ 1975년 칼리드 제4대 국왕 즉위

○ 1982년 파드 제5대 국왕 즉위

○ 2005년 8월 압둘라 제6대 국왕 즉위 (제6대까지 국왕은 압둘 아지즈 초대 국왕의 아들들이 계승)


정치 개황



정부형태


○ 정교일치의 국왕중심제 (이슬람 절대군주국)

- 국왕이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행사하며 종교의 수장을 겸임

- 2005년 8월 1일 사우디 제5대 파드(Fahd) 국왕이 사망하면서 이복형제인 82세의 압둘라 황태자가 왕위 계승

○ 왕실후계 문제

- 국왕 체제 유지와 관련하여 국왕지위 승계자 후계구도가 문제시됨.

- 국가 서열 2위의 제2부총리 겸 국방장관 임명건은 중요한 화두


내각


○ 국왕이 왕실위원회와 국무회의를 주재, 국정을 대행

- 현재 압둘라 국왕이 수상 겸임, 술탄 왕세자가 제1부총리 및 방위군 사령관, 국방항공부 장관 겸임

- 국왕이 임명하는 120명의 국정자문위원회가 의회와 유사한 역할

- 국무회의 구성 : 제1부총리, 21개 부처장관, 7명의 무임소 장관

- 지방행정조직의 13개 주지사는 왕실에서 임명한 왕자들이 담당

○ 왕정일치 국가형태로 선거제도 부재

- 2005. 2월 역사상 최초의 리야드 주 38개 지방의원 104명 직선

(단 여성의 투표권 인정 안함)


사법제도


○ 샤리아법과 규율로 구분

- 이슬람법인 샤리아법과 규율이 상치될 때에는 샤리아법이 우선

- 규율 : 국무회의를 거쳐 제정되고 왕령으로 승인

○ 사법기관 : 3심 법원과 법원감독기관인 사법감독위원회로 구성


국방


○ 군대는 지원제이며 국방비의 많은 부분을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고 있음.

- 국방예산 : 181억 달러(GDP의 12%)

- 병력 : 정규군 117,500명 (육군 3만5천명, 공군 1만5천명, 해군 4천5백명, 비정규군 6천3백명, 경찰 1만6천명, 국경해안 경비대 1만5천명)


각료명단 및 주요인사 인적사항



국왕


○ 성 명 : 압둘라 (Abdullah bin Abd al-Aziz Al Saud) 국왕

○ 생년월일 : 1924년

○ 출 신 지 : 리야드 (Riyadh)

○ 직 위 : 국왕 겸 총리

○ 경 력

- 압둘 아지즈 초대 국왕과 여덟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출생

- 1962년 사우디 아라비아왕국의 사령관으로 임명

- 1975년 사우디 아라비아왕국의 부총리 취임

- 1982년 사우디 아라비아왕국의 총리 취임

- 2005년 8월 1일 국왕 취임

○ 성 향 : 보수적, 아랍민족주의 지향


왕세자


○ 성 명 : 술탄 (Crown Prince Sultan bin Abdul Aziz) 왕세자

○ 생년월일 : 1924년

○ 경 력

- 농업부장관 및 교통부장관 역임

- 행정개혁위원회 의장 역임

- 최고교육위원회 부의장 역임


외교



외교정책기조


○ Abdullah 국왕의 신정부하에서의 대외정책은 Fahd 전 국왕의 외교정책기조인 주권존중, 독립, 내정 불간섭 원칙에 입각하여 ①모든 국가들과 선린 우호관계 유지 ②양자, 지역간 상호협력 증진 ③적대행위 금지 및 ④지역 및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계승 추구

○ Abdullah 국왕의 방미 (2005. 4월, 왕세제 당시) 등을 통해 다져진 미국과의 견고한 대테러 공조 하에 Al-Qaeda 세력 소탕 및 주변 아랍제국과의 안보협력, 유가 안정화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


대미국 관계


○ 9.11테러 이후 외국 언론 중심으로 양국 관계 악화가 우려 되었으나, 미국이 요구하는 대테러 협력에 사우디가 비교적 잘 응해왔으며, 특히 이라크 전쟁 관련, 사우디가 전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양국 지도부간 원만한 관계를 유지 (다만, 국민들의 반미 감정이 문제)

- 2003. 5월 리야드 테러 사건으로 Al-Qaeda등 테러 단체들의 표적 이 사우디 정부로 전환됨으로써 사우디 정부는 대테러 관련 미국 과의 협력에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변했음.

○ 2005. 4월 Abdullah 국왕이 왕세제 당시 방미, 부시대통령과 양국간 새로운 협력시대를 열기위한 회의체로 “사우디-미국 전략대화”를 창설 합의한 바, 제1차 회의가 2005. 11월 젯다, 2차 회의가 2006. 5월 워싱턴에서 각각 개최됨.

○ 최근 팔레스타인 문제 및 이라크사태와 관련하여 미국과의 이견 노정

- 압둘라 국왕은 아랍정상회의에서 미군의 이라크 주둔을 불법으로 규정


아랍-이스라엘 분쟁 (일관된 팔레스타인 지지)


○ 유엔 안보리 결의 242 및 338에 근거한 아랍-이스라엘 분쟁 해결을 지지하며, "land for peace" 원칙에 입각 모든 아랍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이 철수할 것을 주장함.

- 2001년 이스라엘의 대"팔"군사행동에 대하여 아랍보수국가들의 리더국가로서 대이스라엘 비난 자세 견지

- 1967년 이후 점령한 모든 아랍영토로부터 철수 및 궁극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 지지

- 2002년 Abdullah 왕세제는 아랍평화안(Arab Peace Initiative) 제안


중동국가들과의 관계


이슬람, 아랍 국가들과 전통적인 우호협력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

- 57개 이슬람국가들의 회의공동체인 이슬람 회의기구 (OIC) 본부 주재국 젯다에 소재

- 특히 팔레스타인 등 중동 이슈에 있어 국제사회에서의 이익 대변을 통해 이슬람의 종주국으로서의 비중과 위상을 견지함.

이라크

- 이라크의 불안정한 사태로 인해 중동지역에서 이란, 시리아, 헤즈볼라, 하마스 등 강경 세력의 영향력 확대에 우려하고 있으며, 특히 이라크내 대미항전세력에 사우디인들 이 참여하고 있는데 대해 이들이 향후 주재국 안정에 위협요소가 될 것임을 경계함.

- 사우디는 이라크내 시아파 회교도의 영향력 증대가 자국 및 GCC 역내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음.



사회



교육


○ 종교 의무의 일환으로 이슬람교육 의무화

- 종교교육에 편중된 학제로 명분없는 학교교육 만연

1960년대 제3대 파이잘(Faisal) 국왕의 여성교육정책

- 여성교육의 중요성 강조

- 여성교육청 신실 및 여성의 대학교육 확대

학제 및 교육 특징

- 전 교육과정은 무상이나 의무는 아님.

- 전 교육과정에 이슬람 교리에 관한 종교교육의 의무화

- 여학생과 남학생의 철저한 분리


치안



○ 시내 치안상황은 비교적 좋은 편이나 한적한 곳이나 밤늦은 시간에는 외출 자제 권유

○ 이동시 도보보다는 차량을 이용하고, 과속차량이 많은 것을 고려 오너 드라이빙은 회피하는 것이 바람직함.

○ 자동차 창문을 깨고 물품을 훔쳐가는 절도사건이 간혹 일어나므로 차량 내 컴퓨터, 지갑 등을 놓고 들어가는 것은 피해야 함.


언론


○ 텔레비전 방송

- 아랍어 방송 : Channel 1

- 영어 및 불어 방송 : Channel 2

- 위성 수신기를 통한 채널 다양화 확산 추세

○ 신문 및 일간지

- 아랍어 : Al-Riyadh, Al-Sharq, Al-Awsat, Al-Jazeerah, Oka

- 영어 일간지 : Arab News, Saudi Gazette 등


통신



○ 공중전화가 있으나 한국에 비해 많지 않음.

○ 우편제도 : 우편배달 제도 없이 P.O.Box 사용


비즈니스 에티켓


○ 복장

- 반바지 착용 금지

- 여성의 경우 전통의상인 ‘아바야’ 반드시 착용 요망

- 여성이 남성 앞에서 손목과 발목 및 얼굴을 노출시킬 경우 외국인일지라도 종교경찰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음에 유의

○ 식사문화

- 세 번 이상 초대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남.

- 전통식당에서 오른손으로만 식사해야 할 것에 유의

- 개, 돼지, 맹수류, 맹금류, 파충류와 이슬람식으로 도살되지 않은 고기, 죽은 짐승의 고기와 피, 내장 등을 먹지 않는 것이 관례

- 술을 권하는 것도 예의에 어긋남.

- 사우디는 주류, 마약 반입을 철저히 금하고 있어 입국 시 일체의 주류를 소지해서는 안 됨.(마약 반입은 최고 사형)

○ 인사

- 남성 간에는 악수교환이 일반적인 인사법

○ 선물

- 이슬람 문화는 뇌물수수를 금기시하기 때문에 선물전달에 유의

- 특별한 기회에 소박한 선물을 준비할 것

○ 약속

- 현지인은 시간관념 부족

- 비즈니스 미팅의 경우 잦은 연락을 통해 약속을 지키도록 유도


사회문화



○ 가부장적인 가정생활

- 남편의 권위주의, 남아선호사상

- 사회발전과 세계화의 영향으로 여성인권 및 사회진출 요구 중

○ 결혼문화

- 부족주의 시대관습 계승

- 근친간의 결혼형태가 만연

- 혼인을 위한 신랑의 막대한 지참금 부담이 사회문제화



* 위의 자료는 외교통상부, KOTRA, 수출입은행, 한국무역협회, CIA 등의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옛 서울역사 1층을 휘휘 둘러보고 2층으로 오르는 길. 뭔가 꼬불꼬불한 장식들이 허리춤에 잔뜩 매여진 계단

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올라섰다.

1과 1/2층에서 돌아본 전시장 풍경. 빨간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서 화살표가 되고 출입금지선도 되어 다소

살풍경해 보이기도 하지만, 저너머에 따뜻해 보이는 연한 주홍불빛과 커다랗게 프린트된 사진작품들이 덕분에

더욱 화사해 보이는 것 같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문득 바라본 천장에 붙은 벽면. 페인트가 온통 쩍쩍 갈라져서는 터져 나갔다. 참 오래되기도

했지만, 사람 손이 안 닿는 건물이란 게 참 금세 황폐해지는구나.

정확히 1과 1/2층 벽면에 있는 그림. 저 움푹 들어간 곳은 뭔가 전시를 해놓거나 화분을 두려고 했던 장소일까.

아님 정확히 저 공간에 꽉 끼어들어갈 만한 수조라도 채워넣던 걸까. 그 밑에 있는 앙상한 필치의 그림이 그려진

타일들은 좀 뜬금없지 싶기도 하고 이뿌지도 않고 그렇다.

화장실. 포스팅을 하면서도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지 싶기도 하지만, 화장실 표시가 장소마다, 나라마다 얼마나

다를 수 있고 또 재미있을 수 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여긴 좀 아닌 듯. 전혀 특징도 없고 주변 배색을 고려치도

않았으며, 전혀 기차역 화장실이라는 느낌을 던지고 있지 않달까. 그 '기차역 화장실'스러움이 뭐냐면 당장 할

말은 없어도, 그래도 뭔가 쌈빡한 게 있을 텐데.

이곳은 어쨌거나 '갑작스러운 수도공사'로 인해 단수가 될 수도 있는 철거 직전의 낡고 닳은 건물인 게다.

그런 건물에서 사진전을 벌이겠다는 아이디어는 참, 처음 이런 전시가 열리고 있다는 기사를 봤을때부터

깜찍발랄한 느낌이 팍팍 들었었다.

화장실 안 창문에서 내다본 바깥세상. 겨울날 같잖게 따스한 햇볕이 나려앉은 1월의 서울역앞 광장. 때와 먼지가

구질구질하게 달라붙은 유리창에 그려지는 창살 그림자가 선명하다.

1과 1/2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중턱에서 바라본 2층 복도. 약간 노리끼리하면서 바랜듯한 색감도 그렇고, 진회색

타일과 달걀색 도료도 그렇고, 분위기가 있다는 표현이 좀 어울리지 않나 싶다. 


부록. 옛 서울역사 1층에 있는 화장실.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매표소와 카페를 겸하고 있는 공간 옆에 붙어있는

이 공사판 날림형 화장실같은 곳은 더이상 벽지나 타일로 말끔했을 분장조차 지워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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