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안 리얼리즘' 전은 추석 연휴 기간에 무료로 개방하고 있었다. 김혜자를

닮은 이 인도네시아 여자는, 그녀의 인상적인 얼굴, 혹은 두 눈을 제한 나머지는 온통 흐릿하게 처리되어 더욱

강렬한 인상을 주는 듯.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라는 무미건조한 제목이 레알 리얼리즘의 향취 가득.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대표 이미지로 광고나 티켓에 온통 쓰이고 있었는데 역시, 작품의 일부만 자른 채 활용된

그림들과 전체가 다 살아있는 실제 사이즈의 그림은 그 느낌이 꽤나 다르다. 가장 맘에 들던 작품 중 하나.

또 하나는 문화혁명기의 중국 화풍을 여실히 보여주는 몇 가지 작품들, 리얼리즘이 결국 대면하게 되는 사회

갈등과 모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영웅화된 노동자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예컨대 이런, "구리광산의

첨병" 같은 작품.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마치 기념동상이라도 된 듯 단단하고 당당하게 버티고 선 저 굳건하고

의지적인 자세, 게다가 광산 내부를 흐르는 물방울의 정밀한 묘사까지.


이외에도, 비바람을 맞으며 한밤중에 전봇대에 올라 전선을 복구하는 용감하고 굳은 눈매를 가진 아가씨의

그림이라거나, 밤중에 애기를 이쁜 포대에 업은 채 쇠스랑을 꼬나쥐고 사람죽일 눈매로 뛰쳐나오는 애아주머니의

그림 같은 것들. 보고 있으면 나 역시 절로 기운이 솟아 죽창이라도 뽑아들거나 열심히 노동해야 할 듯.

사실 한국의 20세기 리얼리즘을 보여준다는 작품들은 대개 실망이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20세기는 어느 정도의 공통 분모를 공유하고 있었고 피식민 경험, 일본의 수탈, 태평양 전쟁,

식민지 근대화와 독재, 자본주의화 따위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 치열히 대면한 작품들이 보였지만, 한국은

그다지 선명하지도 뚜렷하지도 않은 느낌. 일제 강점과 극렬한 사상대립, 한국전쟁과 반공이데올로기,

재벌과 압축 근대화 등등 리얼리즘의 냉막하지만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주제는 무궁무진했을

텐데, 다른 나라의 작품들에 비해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의미심장해 보이지도 않았다.


모르겠다. 아마도 한국의 리얼리즘을 좀더 잘 드러내는 작품들의 섭외가 안 된건지도. 그치만 그중에서 가장

맘에 들었던 작품, '속 농자천하지대본'. 쌀포대에 직접 그려진 이 작품은 표창장과 태극기와 캠페인 포스터의

활짝 웃고 있는 농부의 모습들이 온통 쭈글쭈글한 저 노인의 얼굴 속으로 우겨들어간 채, 그가 품은 한장의

편짓말로 주제를 드러낸다. 노인들만 남아 일손은 없고, 몸은 아프지만 난 괜찮응게. 부디 너그들은 대처에서

잘 살아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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