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사비궁, 궁궐의 중심에 섰던 천정전을 향한 대로에 놓인 벽돌 포석들. 처음 느낌은, 뭐야, 이 문양은 왜이리

이질적이야. 하는 것이었다. 어줍잖은 지식이나마 내가 갖고 있는 한국의 문화유산 이미지에 이런 식의 용문양이

쓰였던 건 못 봤던 거 같아서.

근데, 아니었다. 백제의 문화유산들이 사방에 널려있는 부여와 공주의 땅을 밟으며 온갖 곳에서 그 흔적과 변용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었던 것. 당장 박물관에서 여기저기 흔하게 눈에 띄던 용무늬 벽돌. 이런 문양이 친숙하게

쓰이고 사방에서 쉽게 쓰이던 때가 있던 것이었다. 1400년전.

정림사지석탑을 보러가는 길 울타리에도 있었다. 연꽃을 밟고 올라선 도깨비 문양, 연꽃 문양, 그리고 용 문양.

부여의 어느 음식점 앞, 부여궁(사비궁)에 있던 그 문양 비슷한 그림이 길가의 흔한 포석에서 다시 보였다.

용이 아니라 봉황, 인 듯 한데 그 역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지는 모습이나 간결하지만 화려한 모양새가 멋지다.

길가의 어느 벤치, 널빤지를 지탱하는 양 끄트머리 대리석에 봉황 무늬가 선명하다.

안타까운 건, 길가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보도블럭의 모양새나 박물관에서 만나는 그것의 오리지널 모양새는

많이 닮았으면서도 은근히 다르다는 거다. 왠지 이전의 것들이 훨씬 기품이 느껴지고 깊이있어 보인다.

조명의 탓이라기엔 뭔가 부족하다. 당장 같은 형상의 봉황이라고는 해도 뭔가 저급의 봉황과 고급의 봉황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 같달까. 내가 밟는 보도블럭도 조금은 더 고급스런 문양을 가진 거였으면 좋겠는데.

백제의 연꽃무늬 기와들은 그나마 눈에 좀 익은 편에 속하는 거다. 워낙 백제의 '우아한' 문화를 소개하는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대표적인 이미지이기도 하고, 그 고상하고 단정한 분위기는 워낙 인상적이기도 하고.

사비궁 벽돌 대로의 가장자리를 마감하고 있는 연꽃무늬 포석들은 그래서 한결 쉽게 다가왔다.

그리고 공주박물관 가는 길에서 다시 만난 백제의 문양들. 사방으로 금가있고 깨져있는 벽돌들이었지만,

형체는 분명했다. 불꽃이 수레바퀴 주변에서 돌아가는 듯한 형체의 문양. 근데 어떻게 니들은 1400년을 지낸

유물들보다도 더 오래되어 보이고 힘들어 보이니.

확실히 오리지널이 좀더 문양도 깊고 뚜렷하게 파여 있고, 세련됨의 정도로는 훨씬 더 세련된 느낌. 보도블럭이

핑크빛으로 칠해진 게 문제인 걸까. 예산이 없니 뭐니 하지말고, 아예 한 두께 20센티 정도의 벽돌이나 자연석을

가공해서 몇십년은 갈만한 보도블럭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어차피 매년 바꾸는 보도블럭 관련 예산이나

제대로 되어 몇십년 버텨낼 꺼로 바꾸는 예산이나.


도깨비 문양들, 연꽃을 타고 올라서 있기도 하고 산경치를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서 있기도 하고.

아마도 고대 '치우천황'의 이미지에서부터 내려온 게 아닐까 싶은 전혀 근거없는 상상. 이런 문양들도 좀더

많이 활용되면 충분히 백제의 얼굴이 될 수 있을 거 같은데.

부여궁 앞마당에 커다랗게 그려져있는 그림은, 너무 커다래서 한눈에 와닿지 않았었다. 더구나 그 원전이 되는

그림에 대한 이미지가 사전에 박혀 있지 않고서야 더더욱.

산경무늬 벽돌. 뫼산(山)자를 꾸역꾸역 먹이고 사육시켜서 토실하게 살찌워놓은 듯한 모양의 산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둥그스름한 형체도 그렇고, 듬성듬성 표현된 나무들도 그렇고 귀여운 느낌마저 든다.

그리고 불꽃무늬 왕관장식,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이 문화유산은 왕관에서 떨어져나와 그 자체로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성경의 한구절 표현을 빌자면 '쉬지 않고 불타오르는 떨기나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꼬리를 활짝 펼친 공작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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