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노바의 귀향.꿈의 노벨레 (반양장) - 10점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모명숙 옮김/문학동네
#1. 카사노바의 귀향.


카사노바의 귀향. 제목부터 흥미롭다. 모든 남성의 로망이랄 수 있는 '카사노바', 그가

로망일 수 있는 이유는 끝내 어느 사랑하는 이의 품속에서 죽어가겠다며 호기롭게 외칠 듯한

그의 그치지 않는 모험, 정확하게는 사랑을 찾아 정복하고 다음 상대를 찾는 모험 때문인 거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귀향이라니. 어딘가 있을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라니 이건 배신이다.


말하자면 뭐가 있을지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내달려 무조건 일로직진하며

새롭고, 자극적이고, 신선한 사랑을 찾아 나서야 이름값을 한다고 여겨지는 카사노바가 어느순간

어라, 그런데 고향에 뭔가 있었지, 하며 고개를 돌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보는 순간이다. 후회하고,

추억하고, 되돌이키고, 상실감에 젖고, 센티멘탈해지는 그런 순간. 그런 '카사노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직선이라 멋졌던 그의 궤적이 어느 순간 꺾이고 늘어져 애초의

지점을 돌아보게 되는 건 차라리 발기불능의 문학적 은유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더이상 그의

마력적이던 육체가, 정신이 갓 사랑에 눈뜬 시골처녀의 마음 하나 흔들지 못하게 된 엄연하고

잔혹한 '시간'의 세례를 받는 순간이 있었으리란 점을 떠올리면 자연스러운 귀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이 이 지독히도 시니컬하고 잔인한 소설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더이상

과거의 영광과 자랑스러운 '정복'의 순간들을 재현할 수 없는 늙은 카사노바, 그의 자유정신은

꺽인지 오래고 그의 젊음이 사라지며 매력 역시 사라지고 말았지만 삶은 이어진다. 어떻게 살 텐가.

과거의 금송아지 풍월이나 읊으며 살기에는 억울하고, 뒷방 늙은이로 순순히 물러나기에는

여전히 피가 끓어오르는 상황.


어쩌면 그는 최악의 수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또다른 젊음의 매력에 편승해서, 그를 협박하고

그녀를 마구잡이로 차지하고 마는 그런 순간이란 건, 여태까지의 그가 걸었던 나름의 정합적인

궤적과 평판에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씌우는 셈인지도 모른다. '카사노바'라는 이름이 갖는

나름의 신화와 명예를 스스로 남김없이 더럽히고 용서할 수 없는 지경으로 퇴락시킴으로써,

어쩌면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그 이름을 이젠 스스로 매장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때 '카사노바'로 불렸던 사람이 뒤집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 맞닥뜨리게 될 좌절감과

배신감,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결과로 빚어지게 되는 비참함과 자괴감, 자기파괴로 치닫는

부정적인 흐름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는 건 더이상 우뚝 솟은 직선의 지향을 갖지

못한 구부러진 남성의 질시와 자기 혐오. 삶이 우스꽝스러워지고 말았다.



#2. 꿈의 노벨레.


이 작품은 영화 '아이즈 와이드 샷'의 원작이 되었다고 하며, 한나절 꿈을 통해 단조롭고

평온한 일상에 얼마나 크고 근본적인 균열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숱한 문학적, 영화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 작품이라고 한다. 사실 작품은 굉장히

짧고 등장인물의 동선과 행동 역시 굉장히 압축적으로 보인다.


마치 한 순간의 꿈처럼 일상에 파열구를 내고 만 가면무도회, 그곳에서 만난 '그녀'의 뒤를

캐는 과정에서 남자는 줄곧 전날밤 아내가 고백했던 꿈 이야기를 곱씹는다. 아내가 꿈꿨다던

한순간의 도발적인 유혹, 그와의 평온한 일상을 뒤엎어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리려 했다는

고백은 그로 하여금 무언가 자신도 '백업'해둘 만한 공간을 찾게 하는 건 아닐까.


그녀가 아니어도, 그녀와 함께 하고 있는 지금의 일상이 아니어도, 자신은 또다른 위로를

찾을 수 있으며 혹은 더 나아가 그곳에야말로 자신이 진정한 사랑을 찾고 진정한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 믿는 환상. 대부분의 경우 그런 환상은 지금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믿는 쐐기가 흔들거릴수록 더욱 절실하게 필요해지는 거 같아서 하는 얘기다.


상대가 흔들리면, 나도 흔들린다. 아무리 서로의 믿음이 깊고 사랑이 단단하다고 해도,

일상을 가로지르는 그대와 나의 두 축이 부르르 진동하는 순간 비열하고 약삭빠른 이성은

어느새 저만치 고개를 처박고 새로운 '환상'을 찾아 위로를 구한다. 그런 한 순간의 꿈,

동양의 꿈 이야기가 돌고 돌아 현실의 안온함을 지켜낸다면, 이 소설 '꿈의 노벨레'는

돌고 돌아 현실의 그런 Fragile함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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