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에 백남준전시관을 보러 갔다가, 우연찮게 도슨트의 도움을 받아 몇개의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그 중 참신하기도 하고, 주변에서 자주 보았던 것 같은 기시감이 들던 작품 한 점이 있었으니 에릭 올(Eric Orr)의

"물조각"이라는 작품. 멀찌감치서 보면 무슨 날씬하게 빠진 비석같다는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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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색 대리석이 장중하게 서있고, 작은 모터를 이용했는지 어쨌는지 그 꼭대기에서부터 물이 흘러내린다.

자세히 보면 대리석에는 마치 세밀한 빨래판처럼 가로로 홈이 차근차근 파여져 있어서 물이 아래로 곧장

흐른다기보다는 군데군데서 물결을 만들면서, 번져가는 느낌을 준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물이 조그맣게

야트막한 개울가 소리까지 내면서 그 둔덕들을 움찔움찔 타넘어가고 있었다. 한쪽 다리 먼저 넘기고, 끙차,

기합과 함께 다른 다리를 마저 넘기는 듯한 물의 조심스런 흐름.


도슨트의 말로는 작품값도 상당한 이 작품을 정기적으로 청소해줘야 한댄다. 물때가 쉼없이 앉기 때문에

곰팡이도 끼고 그런다고. 그렇다고 거칠고 우왁스런 철수세미같은 걸 써서 청소하면 홈이 다 닳아버릴테고,

그렇다면 이 작품의 생명은 끝장나는 셈이기 때문에 최대한 부드러운 치솔같은 것을 쓴다고 했다. 살살살.


사실 이러한 원리, 이러한 디자인을 가진 작품은 우리 주위에서 금방 찾아볼 수 있다.

그랜드컨티넨탈호텔, 조선호텔같은 럭셔리한 공간의 로비뿐 아니라, 인천공항 입국심사장에도 유사한 컨셉의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한 작품이 아니라 '상품'으로서도 참 많이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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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정통적인 형태로 에릭 올의 작품을 따른 가정용 분수대는 사실 홈쇼핑이나 인터넷쇼핑몰에서 팔린 지

꽤 오래되었을 거다. 다만 그 원전의 형태가 에릭 올의 작품이라는 걸 알고 파는지, 알고 사는지는 차치하고서

말이다. 이미 이런 유사한 컨셉의 가정용 분수대는 다양한 변용을 통해 그 사이즈 면에서나, 디자인 면에서

애초의 형태를 많이 탈각했다. 만약 그러한 변용된 형태의 것을 먼저 보았다면, 그로부터 에릭 올의 작품을

떠올리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필요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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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공공장소에 설치되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온 에릭 올(Eric Orr)의 물조각, 이렇듯 실생활에서 예술작품의

아이디어가 살아있을 수 있다는 건 그 작품이 갖는 심플하면서도 실용적인 의미를 잡아낸 덕분일까.

어쩌면 에릭 올이 자신의 예술을 창작하면서 전하고자 했던 물흐름의 안온함과 평화로움이 이런 식으로

전파되어 나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품화된 '분수대'의 비싼 가격대라거나, 한갓 찰나적인 트렌드에 힘입은

것 뿐이라는 등 삐뚤게 보면야 꼬집을 게 더러 나오겠지만서도, 최소한 편안히 앉아 쉬면서 조용한 방안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물흐르는 소리..정도의 쾌감 그 자체에는 한표를 주고 싶다.


그렇지만 뭐니뭐니해도 지금 내가 사무실 내 자리 옆에 가장 놔두고 싶은 분수대는..바로 토토로 분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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