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앞뒤 토일껴서 9일동안 여름휴가다.
행선지는 파리. 사실 서유럽을 포함한 '제1세계' 국가들을 가보는 건 좀더 나이가 든 이후로 미뤄두고, 당분간은
네팔, 캄보디아나 탄자니아..이런 곳에서 거지처럼 여행다니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유학중인 친구 신세 좀 지고 다녀오기로 했다.
막상 파리 가기로 했다는 얘기를 하니, 부럽다는 반응들이다. 내가 히말라야나 킬리만자로 트래킹하러 네팔이나
탄자니아 갈까 한다고 했을 때와는 영 딴판인 반응, 왠지 '파리'라는 명칭과 장소가 갖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긴
한가 본데..나도 그런 걸 좀 갖고 가야 할 거 같아서, 이런저런 이미지와 스토리를 미리 챙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게 된 게 "파리의 연인".
총 20부작에 파리를 무대로 한 건 고작 3화 중간까지. 그마저도 세느강변을 거닐던 씬은 한강에서 찍은 거였다는
누군가의 제보. 사실은 군제대하고 바로 터키,이집트로 떠나느라 이 드라마를 끝까지 못 봤던 게 못내 아쉬웠던
거 뿐이었던 거다.
핏줄의 비밀, 기억상실증, 왕자와 신데렐라, 착해빠진 주인공, 삼각관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경우엔 기주
삼촌-형에 대한 수혁의 박탈감이 되겠지만), 재벌 혹은 대기업 총수일가...하나씩 깨서 보면 그렇게도 통속적이고
뻔한 이야기들인데, 재미있었다.
뻔한 시작과 끝에 뻔한 갈등들이지만, 대사들이, 울음이, 웃음이 너무 이뻤달까나.
마지막 회에서 불쑥 '액자 밖으로 튀어나와 버리는' 시나리오작가 김정은(태영이가 아니라)과 뭐하고 사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잘사는 박신양(기주가 아니라)과의 조우 in Seoul. 그녀의 시나리오처럼 가정부도 겸하고 있는
김정은은..모종의 아우라로 치장된 '파리'도 아닌데, 그리고 시나리오 속의 '태영이'도 아닌데, 이야기 속 정제된
대사들을 현실에서 풀어놓으며 주고받는다. 척박하고 치사한 서울에서, 쌔끈하게 빠진 기승전결로 향해 달리기도
힘든 리얼 삶속에서.
동화속의 사랑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따스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랄까, 아님 그런 사랑이 현실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라는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물음표랄까. 더러 황당하고 어이없었다고 했던 마지막이었지만,
내겐 그랬다.
그래, 지금까지 니가 본 건 드라마야. 궁상맞고 청승스럽지만 스포트라이트받는 주인공이 결국엔 해피해피해지는
드라마. 그치만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구, 니가 주인공이라고 믿기 어려운 팍팍한 삶에
해피엔딩을 믿기 힘든 세상이지만 그래도, 사랑이란 걸 한번 믿어봐, 라는 식의 마지막.
드라마를 많이 보지 않지만, 2004년 여름까지 그런 식의 한걸음을 내딛었던 한국드라마는 드물었던 듯 하다.
*
수영할 줄 알아요? 난 수영 못하거든요.
거짓말했어요. 나 수영잘해요.
근데 그쪽도 거짓말 한 것 같아서요.
내가 옆에 있는게 싫다 그랬죠? 그게 거짓말 같아서요.
*
이해안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니스에 갔던 건 돈때문이 아니었으니깐. 내 마음이 원한 거라구요.
그런 내마음값으로 도대체 얼마를 준다는 거에요?
(자존심이 문제를 해결해주진 않아.)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나아요.
*
우리 애기 놀랜 거 안보여요?
우리 애기 안놀랬니?
오빠가 알아서 할께.
애기야, 가자~
*
자기를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건 당연히 상대방을 좋아해주는 거잖아.
그런데 만약에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아주 작은 희망도 주지 않아야 하는 거래.
왜냐면 그 작은 희망도 상대방에게는 큰 고문이 될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희망고문이래.
*
내가 강태영한테 배운게 두가지 있다.
하나는 사랑하는 법.
또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법.
근데 나는 머리가 나빠서 사랑하는 법 밖에 모르겠다.
만약에 나중에 너를 다시 만나도 사랑하는 법만 배울꺼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강태영하고 사랑하는 법.
*
이제부터 당신에게도 좋은 추억이 많이 생길꺼예요.
그 안에 있는 난 항상 웃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내 추억 안에 있는 당신도 항상 웃고 있을테니까요.
*
이것보세요 한기주씨.
미안할때는요 그냥 미안하다고 하구요.
고마울때는요 그냥 고맙다고 하는거에요.
그런말 서툴다고 억지로 뻐팅기지 말구요.
고치세요. 그럼. 자존심세우면서 사과하는 방법은 없어요.
*
그거 알아요?
저기, 여자들은요.. 그런 상상 가끔 하거든요..
화려한 사람들 틈에 나 혼자만 시든 꽃처럼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서 내 이름 불러주고,
내 어깨 감싸안아주고, 흩어진 머리카락 가만히 쓸어주는 상상...
거기다 대문앞까지 바래다주면 그건 너무 완벽하잖아요.
.. 갈께요.
*
니 눈에 난 안보이니? 나 안보여?
난 어땠을 것 같은데?
사랑하는 여자가 내 앞에서 우는데
내 힘으론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다른 남자에게 부탁해야 하는 내 기분은 어땠을것 같은데?
내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몰라?
이안에 너있다.
니 맘속에 누가 있는지 모르지만, 내 맘속에 너 있어.
*
다행이죠?
(뭐가? 다시 못보게 된게?)
나쁘게 헤어지지 않아서요..
정말 고마웠어요. 파리의 일까지 포함해서 내가 평생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해줬어요. 좋았어요, 나.
*
나 죽어도?
너 나 죽어도 이럴 거야?!
이까짓 일로 죽을 사람이었으면 헤어지기 더더욱 잘했네요.
그리고 헤어진 뒤에 죽고사는 것 나 관심없어요.
*
연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같이 밥먹고 바래다 주고?
원하지 않아도 도와주려 그러고?
큰 상처 안주려고 작은 상처 주려고 애쓰면 그게 연앤가?
그러면 하는 거 같고.
*
잭 니콜라우스가 얘기했던가?
내 기술은 의심해도 내 클럽은 의심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자기 자신외에 어떤 것도 비난하면 안되잖아. 비겁하잖아.
공을 치는건 클럽이지만 그 클럽을 휘두르는 건 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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