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전이다. 이데올로기전에서도, 근래의 과학전에서처럼 정밀한 외과수술과 같은 surgical strike,

국부공격이 필요하다.)


다물으다. (잃은 것을) 되찾는다는 뜻을 지녔다는 우리의 고어로 알려진 이 단어는, 80년대 초 민족주의와

민족사관의 열풍을 선도한 베스트셀러 '다물'로 처음 소개된 바 있다. 식민시기 일제의 잔인한 악행과 천여번의

침탈만 당했던 애끓는 약자의 비애를 미래 언젠가 통일한국의 기개와 대비시키며 식민사관의 사슬을 끊어내자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언젠가 '그 때'가 되면, 남북한의 통일은 물론 토문강 이남의 연해주, 만주를 되찾고 (여전히

일각에서 주장되듯) 산둥반도 부근의 동중국까지 '다물'하여, 토끼같은 형상의 한반도에 짓눌려있던 한민족의

기개가 되살아나 평균신장까지 서구인보다 더 크게 된다는 거다. 그게, 우리가 다물해야 할 세계최강 최고민족

최종 버전의 역사이자, 원래의 우리모습이라는 주장. 흔히 민족사관이 빠져버리고 마는, 결과적인 자기 부정 내지

자기 혐오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소설이다. 형이상학적인 또다른 목적론과 병든 인간.



아직 주몽이 이끄는 일단의 무리들이 내건 '다물多勿'의 의미는, 수세적인 상황인지라 그 외연이 적절히 통제된

상황에서 그나마 다소간의 설득력과 적실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역-내지 당시의 전세계-패자인 한나라와 이에

기댄 부여에 대항해서, 상실한 삶의 기반(다소 서정적), 혹은 고토(다소 국가주의적), 혹은 민족의 터전

(다소 선동적)..이랄까, 뭐가 되었던 간에 그 땅뙈기를 되찾겠다는 데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뭐..물론 그 땅에

'백성이 주인되는 땅'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왜 하필 주몽이 왕이 되어야 하는지, '이 땅 위에서 가장

강대하고 융성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고토만 회복하면 되는지 아님 어디까지 쳐부셔야 가능해지는지, 왜

전쟁에서 잔인하게 죽어나가는 건 '주몽의 착한 백성'과 '적들의 무장한 병사'들 뿐인지 등등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들투성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고대 왕국의 성립을 위해 제창된 '되찾음'의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상실한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제시되고 있을 때, 그리고 상대편이 그에 대항하여 무언가 더욱 설득력있고 피끓는

명분을 제시하지 못할 때 강력한 호소력을 갖게 된다. 아무래도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의 외연을 좁히고 명확히

할수록 유리해지는 거다. 지금의 미국이 제시한 '테러와의 전쟁'이란 이데올로기가 그 외연을 이슬람 문화

일반으로 넓혀버리고 말아 더욱 곤란해지고 만 것은 반대의 사례일까.



고구려의 역사는 태왕사신기로 이어지면서, 아니 거기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당장 어느정도 고구려의 기틀이 잡힌

후에는, '다물'이란 단어가 폭주하기 시작한다. 외부의 제약으로 눌려있던 그 폭력성과 저속성이 드러나는 것

뿐이지만. 물론, 당시 고구려가 실제로 '다물'을 의식적인 이데올로기로 차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고구려

초기에 건원칭제하며 '다물'을 연호로 썼다는 설도 있다만-모든 국가, 조금 줄이면 고대국가는 동일한 행태를

보인다. '다물' 등 나름의 관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한 정복 전쟁. 더이상 우아한 '역사강역'의 문제나 합리적

(국제법적?)인 영유권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쟁을 위한, 그리고 전쟁을 수행할 백성을 동원하기 위한, 혹은

(아직 이데올로기가 백성에게까지 유효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스스로 납득하기 위한

핑계거리일 뿐이다.



독도의 영유권이 한일 중 어디에 있던 큰 상관이 없는 것보다 더, 주몽이 옛 조선의 영토를 다물하던, 대조영이

발해를 꿈꾸던, 그건 사실 사는데 별 상관 없는 일이다. 하잘것 없는 민족적 일체감을 5분정도나마 느껴보거나,

우리민족도 이만큼 해낼 수 있다는 이중으로 왜곡된 자기 비하에 빠지고 싶다거나..이런 건 비추. 그저 하나의

퓨전사극으로만 볼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암만해도 붉은악마가 재등장시킨 '치우천황기'나 민족주의를 빙자한

온갖 극우주의적인 주장들과 종교들이 낭자한게..일본이 뭐만 하면 헤드라인으로 '극우주의 부활' 이러는데

사실 한국이 더 문제다. 멀쩡하게 잘 사는 인간들을 갑자기 한이 가득한 못난이로 비하한 채, 과거 '깃발을

꼬나들고 대륙을 호령하던 영웅'을 처방하는 민족주의(내지 민족사관)는 이미 정부의 FTA 옹호 광고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미국하고 경제 자유화하자는 거지, 누가 깃발쥐고 말달리며 쳐들어가자했냐 말이다. 그런

메타포가 정부에서조차 흘러나오는 상황이라니..볼 때마다 참..가슴이 덜컥덜컥한다. 조금만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하면, 이 병든 인간들은 영웅을 부를 게다. 전쟁을 부를 거 같다. 아니, 이미 전쟁과도 같은 사고방식은

시작된지 오래다. 우리는 이미 전쟁에 동원된지도 모른 채로, 나와는 상관없는 전쟁중인지도 모르겠다. 대개

은폐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기가 순순히 죽으러 나가는 게 아니라, 상대를 죽이러 나가는 게 전쟁이다.



(민족주의는 식민주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도된 이미지 그 자체일 뿐이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단지

'일본인이 없는 일본의 지배'를 고도화했을 뿐인지도. sub-altern학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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