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죽도어시장을 돌아다니며 찍었던 사진 중에 가장 맘에 드는 한 장의 사진을 꼽으라면.

 

과메기 축제중인 시장통을 구경하다가 문득 시선을 돌린 한쪽에는 생선을 파느라 열심인 어느 청년이 보였다.

 

대담하도록 치켜올라간 점퍼와 내려뜨려진 츄리닝 바지를 위아래 입술삼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포항은 역시 과메기와 대게의 고장. 시장통 골목 곳곳에서 짙고 풍만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참돔배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상어 녀석. 경북 지방의 제수용 생선으로 널리 쓰인다던가. 세모꼴 이빨이 원통하다.

 

원래 과메기는 청어로 만들었던 게 원조라고 하는데, 요새는 거의 이런 꽁치로 만든단다. 살가죽이 말라비틀어질 지경.

 

흔치는 않지만 이렇게 청어로 만들어진 과메기도 곧잘 내걸려 있었다. 아쉽게도 이 녀석들은 시식용이 없더란.

 

 좌판마다, 상점마다 맛보기로 내건 (꽁치) 과메기 시식을 하나씩 하며 시장을 걷다보니 배가 부를 지경이다.

 

입으로는 시식을 권하며 쉼없이 과메기의 껍데기를 벗기고 꼬리를 떼어내던 그네들의 손놀림은 가히 생활의 달인급.

 

 아무래도 살짝 찝찝한 건 없지 않았다. 과메기 클러스터, 형님 예산, 만사형통 따위의 단어들이다.

 

포항까지 내려와서 네놈의 이름 석자를 들을 줄은, 그래도 몰랐다.

 

에라이, 말라비틀어지다 못해 하얗게 성에가 내려앉은 동태의 썩은 눈깔같은. 

 

성황이다. 주말이라 그랬는지 서울같은 먼 곳 말고도 인근 지역에서도 총출동한 듯 하다.

 

 꼬리에 철사를 꿰고는 물구나무선 채 해풍에 노닐던 생선들도 있었고.

 

 보기만 해도 묵직하고 맛깔스런 핑크빛의 몸뚱이를 가진, 지느러미가 촘촘한 생선도 있었다.

 

 그런 생선들의 장막 뒤로 손만 바쁘게 움직이고 계신 아주머니들.

 

 그리고 마치 커튼처럼, 시장통의 어느 예기치 않게 한적한 모퉁이에서 건너편 풍경을 미묘하게 가리는 생선들의 버티컬.

 

붉은 대게 한마리가 붉은 벽돌 건물벽을 기어오르다 잠시 쉬어가는 중.

 

그리고, 오랜 세월 사람들의 질척한 발길과 무수한 생선비늘로 갈고 닦인 이곳 죽도시장의 분위기만큼이나

 

운치있고 정감어린 돼지국밥집의 모자이크 창문 하나.

 

 

 

세상이 백팔번뇌를 안겨주는 2013년입니다.

 

그래도 모두 새해 복 듬뿍담뿍 받으세요~*

 

 

 

일시 : 2013년 1월 4일(금) PM 06:00부터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http://ytzsche.tistory.com)

● 자격 :

        

           1) 이 사진에 나온 문구를 한글로 해석해 주시고(& 조건),

 

           2) 본인이 느끼는 적절한 사례를 하나 제시해 주세요.

           + 초대장 받을 이메일 주소~!^-^*

 

 

주최 : yztsche(이채, 異彩)

제공 : 초대장 108장


 

 

 

 

 

 

'비판적 지지'가 이렇게 다급하던 적은 없었다.

 

최소한 이전의 2002년과 2007년, 이렇진 않았다. 당선이 목표가 아니라 영향력 확대를 목표로 내가 원하는 후보를 찍었었으니깐.

 

 

대체 민주당과 새누리당이 (선거 국면에서) 내세운 정책이 다른 게 뭔지, 그 이전의 노무현 5년의 경제정책과 이명박 5년의 그것은

 

또 얼마나 달랐는지에 대해 많은 부분 의구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것에 대해 민주당 세력이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일단은 문재인을 찍기로 했었다. 어쨌든 자격없고 부끄러운 대통령의 등장은 피해야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안철수를 '범진보'세력으로 억지로 낑겨넣으며 판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키를 놓쳐버린 민주당은,

 

아무 선거전략도 없이 SNS와 세대론에 기대어 낙관론에 빠져있었던 걸로 판명되었다. 뭐 하나 치고나온 의제도 없었고.

 

그저 '정권교체'만을 앞세운채 '닥치고 민주진보 대통합'을 외치며 군소후보나 정당을 고사시켜버렸다.

 

 

선거 후의 모습은 더욱 절망적이다. 왜 졌는지, 보다 선명하지 못해서였는지, 소구층이 분명치 않아서였는지,

 

정권교체의 부글거리는 민심을 받아안을 의지도, 정책도, 전략도 없이 그저 '세대론'과 '지역론' 따위에 머무른 채

 

정신승리 중이다. 48%의 가능성을 봤다거나, 여기가 바닥이라거나,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뻔한 이야기들. 지친다.

 

 

이런저런 정치 평론과 논설들도 마찬가지. 우르르 몰려다니며 인구구성이 어떻고 광주부산이 어떻고.

 

그래놓고 마지막에는 민주당의 쇄신과 지지층의 멘탈 회복을 요청한다. 그만큼이라도 잘했다 우쭈쭈.

 

 

지금 필요한 건 위로나 응원이 아니라, 가루가 되도록 박살내고 좌절시키는, 현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다.

 

의지적이고 주관적인 전망이나 희망섞인 기대는 한참 나중의 일.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꼴로는 참.

 

 

프레시안에서 퍼온 아랫글은, 그래도 대선 후 나온 글 중에 가장 내 생각과 유사한 판단과 비판을 담고 있어서.

 

 

 

 

노인과 싸우는 진보, 5년 후도 글렀다

[기고] 박근혜가 당선되어 가슴 아픈 이들에게

 

안성용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

기사입력 2012-12-24 오전 9:58:29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박근혜가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문재인에게 표를 주고 가슴이 아팠는데, 박근혜가 당선되어 더 가슴이 아픈 이들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 아래서 살아가야 할 향후 5년을 생각하면 눈앞이 노래진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상심과 우울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 이번 선거에서 왜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승리했을까, 그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 보았다.

새누리당의 변신과 의제 희석화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변화를' 주장하면서 4·11 총선에서 승리했다. 더구나 그 총선에서 박근혜 본인이 공천한 인물들이 대거 당선되었고 그 결과 박근혜 캠프의 두뇌와 수족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근혜는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에 성공했다. 이미 총선 결과를 통해, 야권이 주장해온 '이명박근혜'라는 비난은 흘러간 과거지사가 되었다.

총선 승리 이후 박근혜는 준비된 후보로서의 힘 있는 행보를 진행했고, 보수 진영의 어느 누구도 박근혜에 대적할 수 없는 힘을 만들어갔다. 결국 각종 이해관계를 가진 보수 정치권 전체를 아우르는데 성공했다. 또 박근혜 캠프는 지역 구도, 세대 구도, 계급 구도, 이념 구도로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 국면을 잘 이해했고, 그 수족들이 지역성을 기본으로 열심히 뛰게 만들었다(그에 반해 민주통합당의 지역구 의원들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열심히 뛰지도 않았다).

또 박근혜 캠프는 세대 구도에서 유리한 선거 의제들을 생산하였다. 그리고 야당이 제시한 경제 민주화와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반값 등록금, 복지 관련 공약 같은 '계급 성격'의 의제들마저 선점하고 단계적으로 희석시켜 감으로써, 성공적으로 야권의 공세에 대응하였다.

구진보의 몰락

지난 10년간을 돌이켜 보면, 2004년의 민주노동당 약진 이후부터 한국 사회의 진보 정당은 대략 13~20퍼센트의 득표율을 보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시도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의 덕택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시행한 각종 신자유주의 경제 사회 정책들로 인해 노동자와 농민, 중소 상공인, 영세 자영업자, 도시 빈민층의 삶이 오히려 질적으로 악화된 것도 이 시기 진보 정당의 득표율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정치적으로 각성되고 민주노동당과 같은 진보 정당을 지지했던 이들 서민들의 경험과 인식은 열린우리당에서 민주통합당으로 이어지는 민주통합당의 지평을 넘어섰다. 이들 진보적 서민들은 올해 4·11 총선에서도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연대를 적극 지지했다. 물론 전통적인 진보 정당 지지자 중 일부는 진보신당과 녹색당을 지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이명박 정부 치하에서 고통 받는 서민들을 감동시키는 정책과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일은 게을리 한 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권력 나눠 먹기 식의 야권 연대에만 매달렸다. 그 결과 서민들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외면했다.

더구나 소위 친노 패권주의와 통합진보당 내 패권주의의 문제가 4·11 총선 이전부터 터져 나왔다. 4·11 총선 직후 터진 통합진보당 내분 사태로 인해 그간 '진보 정당'으로 표현되어온 세력들 즉 통합진보당(그리고 분당 이후 진보정의당까지 포함)과 진보신당 등은 일반 국민들의 여론 속에서 '한통속으로' 평가되며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녹색당은 대선 시기에 제 목소리를 내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길게 보면 1987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온 '구진보'의 분열과 지리멸렬은 이번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하면서도 더 심해졌다. 그 결과 '구진보'는 대중의 눈높이에서 볼 때 거의 무의미한 세력이 되었다.

 

▲ 문재인-안철수의 '새로운 진보'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나? ⓒ뉴시스

새로운(?) 진보의 실패

친노 패권주의에 환멸을 느낀 이들과 진보 정당에 실망한 이들을 위한 빈자리를 안철수는 '새로운 진보'를 주장하며 자리 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진보'는 국민들의 '삶'을 바꿀 만한 '미래 비전'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진보였다. 즉 실제로는 '민주 진보 개혁'이라는 좋은 단어들의 조합에 불과했다.

안철수의 대통령 출마 선언과 그 이후 행보가 앞에서 언급한 과거 민주노동당 지지 13~20퍼센트의 국민에게 무슨 감동을 주었겠는가? 정치적으로 가장 열렬한 진보 지지자인 13~20퍼센트의 국민들에게는 설자리가 없었다.

진보 정당들이 지리멸렬하자, 중도주의를 내세우며 결집한 안철수 지지자들은 애매모호한 '정치 혁신'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민주통합당 지지자들은 '닥치고 반이명박, 반박근혜'만 이야기했다. 과연 그런 중도주의, 그런 '닥치고 반이명박근혜'가 얼마나 보통 시민들의 열정에 불을 붙일 수 있었을까?

한술 더 떠, 분열된 구진보는 심상정, 이정희, 김소연, 김순자라는 무려 네 명을 대통령 후보로 내보냈다. 그러자, 과거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온 13~20퍼센트의 유권자들은 그야말로 "이젠 망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자 박근혜의 당선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그 13~20퍼센트의 진보 유권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문재인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과 민주통합당을 비판하면서도, '박근혜가 되면 안 되는 이유'를 이런저런 이야기로 말하며 또 좌충우돌 변명하며 문재인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선 여론 조사에서 '정권교체'를 원하는 여론이 60~70퍼센트로 높았는데도 불구하고 당선 가능성에 대한 여론 조사는 항상 박근혜가 60~70퍼센트로 높았다. 그런 조사 결과가 나온 데는, '찍으려 해도 찍고 싶은 놈이 없다'고 고민하던 이런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 반영되어 있다.

선거 전략의 실패

본격 대선전에 돌입하자마자 안철수, 심상정, 이정희는 단계적으로 사퇴하였다. 그러자 지난 여러 번의 대통령 선거와는 달리, 여와 야 그리고 진보 후보의 3자 구도가 아닌, '보수 대 진보의 양자 구도 대결'이 되었다. 그러자 새누리당은 보수의 위기의식을 최대한 자극하는 선거 전략에 주력하였다.

'보수의 총결집과 인물 경쟁력'이 핵심 선거 전략이 되었고, 보수의 위기의식이 보수층의 광범한 결집을 가져왔다. 이것이 결정적 승인 중 하나이다. 또 박근혜라는 인물에 맞설 후보로서 문재인은 선거 기간 내내 존재감이 미약했다.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였다.

민주통합당과 문재인 후보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치하의 경험상 도저히 문재인을 선택하기 싫어하는 유권자들을 담아내기 힘들었다. 더구나 애매모호한 중도주의를 표방한 안철수 후보로는 비정규직 노동자과 자영업자, 농민 등 하층민들의 실제적인 삶의 요구와 열정을 담아내기 힘들었다.

문재인과 안철수 모두 저소득층과 서민의 대변자이기에는 그 인물됨과 가치관, 세계관이 협소했다.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 모두 저소득층과 서민을 위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에 열심이지 않았다. 결국 도시 저소득층이 가장 많은 수도권에서 문재인과 안철수는 대중의 선거 열기를 일으키는데 실패했다.

전국의 유권자 분포에서 차지하는 수도권의 비중이 서울 20.7퍼센트, 경기 23.1퍼센트, 인천 5.3퍼센트로 합계 49.1퍼센트인 점을 고려할 때, 수도권의 정치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게다가 수도권은 '지역성'보다는 '계급성'에 가까운 투표 성향을 늘 보여 왔다. 따라서 '무상 급식'과 같은 폭발력 있는 사회 복지 의제의 개발과 전략적 집중이 매우 중요했다. 그렇지만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 모두 그것을 위한 관심도 능력도 약했다.

역대 선거에서 야권이 이긴 것은 항상 수도권에서의 정치적 열기가 초래한 '준 혁명적인 상황'이 연출될 때뿐이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문재인과 안철수 (그리고 심상정과 이정희마저도)는 모두 '단일화'만 되면 이길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에 머물렀다. 문재인 캠프나 안철수, 심상정, 이정희 캠프 모두 과거 민주노동당 등 '진보 정당'을 지지했던 13~20퍼센트의 유권자들이 문재인으로 통일된 '야권 단일 후보'로 결집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들 중 다수는 문재인을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들 중 아무도 '열정적으로' 선거 운동에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권을 지지하는 선거 열풍이 일어나길 바라는 것은 당연히 언감생심이었다.

세대 간 대결 구도로는 성공할 수 없다

이번 대선의 30대 이하 유권자는 1547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38.2퍼센트인데 반하여 50대 이상 중장년층은 1618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39.9퍼센트이다. 반면 10년 전 노무현이 당선될 때인 16대 대선에서는 30대 이하가 1690만 명으로 48.3퍼센트, 50대 이상 유권자가 1024만 명으로 전체 유권자의 29.3퍼센트였다. 10년 동안 2030 세대의 인구 비중이 10퍼센트 포인트 줄고 5060 세대는 10퍼센트 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투표율이 높아지면서 투표장을 많이 찾은 것은 젊은 층만이 아니라 오히려 위기 의식을 느낀 5060 세대다.

주류 보수 언론은 '세대 간 대결 구도'를 시종일관 중계 방송하듯이 강조하였다. 즉 새누리당과 보수 세력은 인구 구성비상 비중이 높은 장년층과 노년층의 불안 심리를 교묘하게 조직했고, 이를 정확하고 적절하게 이용하여 각종 네거티브 캠페인을 활용하여 묶어냈다. 예컨대 <나는 꼼수다>와 김용민, 진중권, 이정희 등으로 대표되는 '예의 없는' 2030 세대에 대한 5060 세대의 불만과 불안을 보수 언론은 잘 조직해 냈다.

선거 직후 출구 조사 발표를 보면 50대의 89.9퍼센트가 투표를 했고, 이들이 박근혜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그 지지 이유에 대해 신문마다 분석이 떠들썩하다. 투표율이 높으면 야권이 유리하다는 얘기는 2030 세대의 인구 구성비가 많았던 10년 전에나 통하던 얘기이다. 이 점을 사전에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야권은 2030 세대에 비해서도 가난하고 빈곤한 5060 세대를 탈박근혜 지지자로 전환시켜 정치적으로 중립화 시켜낼 의지도 전략도 없었다.

또 2030 세대와 40대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의제의 개발과 제시에도 게을렀다. 그저 박근혜의 아버지인 박정희의 30년 전 행적을 비난하고, 국민들의 살림살이와는 동떨어진 순환 출자 금지 같은 재벌 개혁, 재벌 해체의 어젠다를 집중적으로 제시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야권은 시종 일관 여당에 끌려 다니는 '색깔 없는 선거'를 치르면서 패배했다.
한편, 2030 세대의 '보수화 경향'도 깊이 있게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애국주의'의 토대가 되고 있는 것이 60대 이후 노년층만이 아니라 신세대에게도 일부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방송 3사 출구 조사를 보면, 문재인 후보가 2030 세대에서 65퍼센트의 지지를 받았지만 박근혜 후보 또한 33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

이번 대선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최근 10년간의 선거 때마다 전체 2030 세대의 3분의 1이 보수주의를 지지한다. 젊은이들이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사회 개혁과 같은 공동체적 가치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장의 개인의 삶이 엄청나게 피폐한 층이 계속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 주요한 한 원인이다.

세대 간 대결 구도를 용인하고 더구나 노인 세대에 맞서야 한다며 2030 세대의 투표율을 높이려 독려하며 그것을 사실상 더 부추긴 것은 민주통합당과 진보 정치권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식의 세대 간 대결 구도로는 앞으로 백전백패일 뿐이다. 왜냐하면 출산율 저하의 영향으로 앞으로는 2030 세대의 비중이 더욱 줄어들고, 그에 반해 50세 이상 인구의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 정치권과 야권이 무상 급식과 같은 계급적, 탈지역적, 탈세대적 선거 어젠다를 전략적으로 부각시키는데 소홀히 했던 이번 선거에서는 자연스럽게 지역주의 구도가 다시금 강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그 구도는 당연히 여권에 유리했다. 지역의 인구 구성비로 볼 때 지역주의가 강할수록 영남 기반 보수 세력이 이긴다는 자명한 현실을 야권 역시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권은 거의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지역주의가 강할수록 보수는 결집한다. 진보 정치는 지역주의를 벗어나야 하며, 이번 선거처럼 전라도 같은 특정 지역의 몰표에 여전히 의존하는 정치적 의존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향후 진보 정치권은 세대 간 대결 구도가 아닌 세대 간 연대의 구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2030 세대가 되었건, 5060 세대가 되었건, 가난한 청년 및 노인들 대 부유한 청년 및 노인들 간의 대립 구도, 계급적 대결 구도를 만들어내야 앞으로의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 예컨대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 간의 세대 간 연대 의식이 강하게 작동해야만 존재 가능한 것이 국민 연금과 기초 노령 연금의 획기적인 확대이다.

스웨덴 등 북유럽의 보편적 복지 국가는 세계 최고 수준의 보편주의 노인 복지 체제를 만들어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정치적, 제도적 축 역시 세대 간 연대이다. 이렇게 세대 간 연대 의식이 필수적인 어젠다를 놓고 계급 투표가 가능해지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진보의 미래가 있다.

박근혜 캠프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제시하였는데, 여기서 '준비된'이라는 구호가 주로 급작스럽게 후보로 나선 안철수, 문재인과 비교하여 준비된 인물이라는 것을 홍보하는데 이용되었다면, '여성 대통령'이라는 구호는 실제로 여성층 특히 주부층에서 압도적으로 인정받았다.

즉 보육과 교육, 의료, 노인 복지처럼 가정주부들이 많은 관심을 갖는 정책 어젠다에서 문재인 캠프가 박근혜 캠프와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공약을 제시하는 일에 게을리 하는 사이에, 박근혜 후보가 제시한 '여성'이라는 슬로건이 여성계와 주부들 사이에서 실제 큰 힘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해서도 야권은 사실상 대응을 못하거나 안했다.

 

/안성용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

 

냉철히 따지면 놀랍지는 않은 상황.

 

그저,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바심냈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 치세 시작.



패인은 크게 두 가지 아닐까. 근본적으로 보수로 경도된 한국사회의 지형도는 차치하고,

 

인구비례로도 보수화된 투표자층도 차치하고, 선거 국면에서만의 패인을 따져보면

 

1. 민주당의 비전없음과 무사안일함. 2. 취향화된 'personalized network'밖에 되지 않는 SNS에 대한 과잉기대와 의존.

 


1. 민주당의 무능함과 무책임함.

 

그것이 안철수 현상을 부르고, 멘토 열풍에 힘입은 안철수의 아마추어식 진단에 힘을 실었으며, 결국 그의 한마디한마디에

 

선거판이 흔들리게 허용하고 말았다. 붉은 색을 선점하고 나선 영악한 새눌당의 선거전략과 아젠다세팅에 제대로 한번 반격조차

 

못한 채 '안철수 현상'만 바라보고 치고 나가지 못했다. 안철수 현상 뒤에는 민생과 유리된 정치, 국민을 대변하지 못하는 정치,

 

당면한 삶의 조건을 개선하지 못하는 정치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음에도, 안철수만 보았다.

 

 

그 결과는 모두가 알듯, 사실상 안철수와의 단일화 실패. 안이 다시 움직이긴 했다지만 이미 극적이고 감동을 주는 단일화 따위,

 

국민의 염원을 받아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는 안철수가 나눠져야 할 비판.

 

 

그렇지만 역시 포인트는, '안철수 현상'을 봐야 할 순간에 '안철수'만 보았다.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민주통합당 나부랭.

 

 



2. SNS라는 안경의 편향과 키보드워리어식 역량소진.

 

범 진보..민주당과 그 왼쪽, 그리고 '상식'을 표방한 시민들과 연예인급 셀렙들의 SNS에 대한 환상이 여전했다.

 

이미 트위터는 각자의 취향에 따른 개인화된 언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전의 선거들에서 경고되었었지만 별무소용.

 

인증샷을 나누고 이벤트를 하고 RT를 하고. 그래봐야 이미 취향과 정견에 따라 분류된 사람들끼리만 돌고 도는 정보들이다.

 

물론 SNS는 보조적인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SNS에서의 소통이 진짜 소통인 양, 그게 전부인 양 거드름피웠던

 

모습들 아닐까. SNS를 믿고, SNS의 인기도를 업은 안철수를 믿고, 막판까지 민주당이 안일했던 거 같아 하는 말이다.



소통은 기본이었다. 소통보다 중요한 건 컨텐츠. 민주당(과 왼편)은 컨텐츠도 부실한데 소통조차 '전근대적 감수성'을 건드리는

 

새눌당에 뒤지고 말았다. SNS안에서 의제가 돌고도는 것에만 만족할 게 아니라, 뭐가 되었건 공세적인 이슈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냥 SNS의 젊은이들은 우리편이야, 이런 자위에 기대었던 거 아닐까.

 



* 대통령 한 명이 해먹어봐야 얼마나 해 먹을까. 그냥 전임 대통령이 해먹은 거 지켜주고, 지가 또 해먹겠지. 역설적으로 그 끝에는,

 

제3세계중 예외적인 경제적 정치적 성장을 이루었다던 한국이 애초 가야 할 곳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남미형, 주변부 자본주의국가의 정글.

 

 



이명박근혜의 십년. '잃어버린 십년'의 하프타임이 지나간다.

 

 

 

광주 망월동, 국립 5.18민주묘지(신묘역) 앞에 선 안내판에는 의미심장한 문구가 있다.

 

"손수레나 청소차에 실려와 5.18 구묘지에 묻혀야 했던 분들을 이곳에 모셔와 안장했다"는 문구다.

 

(광주 망월동 신묘역, 이 곳에 선 문재인과 안철수는 무엇을 보았을까.)

 

 

1980년 5월이 무려 17년이나 지난 1997년에야 비로소. 그리고 나서 구묘역은 잊혀지고 버려지다시피 했다.

 

정치인들도 찾지 않고, 아마 2004년이던가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찾았던 게 거의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전례다.

 

 

그렇지만 구묘역은 여전히 5.18의 기억들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으며, 광주의 비극을 초래한 학살자 전두환과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가 있다는 점에서 지난 2012년 9월말의 다음 기사는 굉장히 흥미로웠다.

 

 

 

...문 후보는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 열사 등 의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문 후보는 또 정치인들이 잘 찾지 않는 옛 묘역을 찾아 87민주항쟁 때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묘역도 참배했다.

문 후보는 "이분들 덕분에 오늘의 민주주의가 있는데 자꾸 후퇴하니 볼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문 후보는 구 묘역 참배를 마치고 나오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민박기념비'가 이곳에 묻혀있다는 얘기를 듣고 되돌아와 이 비를 발로 밟고 지나가기도 했다. '민박기념비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2년 전남 담양군 마을을 방문한 뒤 세운 것으로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1989년 이 비를 부순 뒤 구묘역 입구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지나가도록 한 것이다...

 

 

* 오마이뉴스, 2012. 9. 28. 기사 발췌.

 

 

 

문재인이 이 곳을 굳이 찾았다는 것, 그리고 굳이 전두환 기념비를 밟고 나왔다는 건 어쨌든 유의미한 퍼포먼스다.

 

게다가 망월동 신묘역 안의 민주 열사들 영정 앞에서 저리도 해맑게 웃고 치우는 누군가와는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신묘역의 후문, 그러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열사들의 영정 앞에서 파안대소를 했던 곳을 지나 조금만 더 걸으면 나타나는

 

후문을 나와서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구묘역이다. 전두환 정권의 회유책과 묘지 이장 책동에도 불구, 여전히 5.18 희생자가

 

119분이나 안장되어 있으며 이후의 민주화 투쟁 중 살해된 열사들이 함께 모셔져 있는 곳이다.

 

이 곳이다. 제대로 다져지지도 않은 땅, 틀도 잘 갖추지 못한 채 제각기 색다르고 형이 다른 비석을 명패삼아 모셔진 분들.

 

그리고, 올라서는 곳 들머리에는 아스팔트가 커다랗게 구멍이 난 채 뭔가를 물고 있었다.

 

대충 식별되는 글자는, 두환 대통령 각하 내외분 민박마을...

 

옆에 선 안내판의 내용을 (조금 길지만) 그대로 인용해 놓기로 한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의 현장.

 

민족의 반역자요 광주민중 학살과 자주 민주 통일의 원흉 전두환이 자기 죄를 은폐하고자 학살현장인 광주를

 

방문하지 못하고 1982년 3월 10일 담양군 고서면 성산마을에 잠입하여 민박 기념비를 세웠다.

 

이에 복받쳐 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을 참을 수가 없어 1989년 1월 13일 이 비를 부수어 이곳에 묻었나니

 

5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곳을 짓밟아 통일을 향한 큰길로 함께 나아갑시다.

 

영령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1989년 1월 13일

 

 

광주, 전남 민주동지회"

 

저런 허름하고 낡은 '흔적'들이 아니었다면, 이 곳은 그저 여느 동네 야산의 공동묘지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을 뻔 했다.

 

그만큼 더욱 안타깝기도 하고, 무언가 이 나라의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강렬히 보내는, 그야말로 세계의 끝이다.

 

인혁당과 민혁당을 헷갈렸던, 프롬프터에 오타가 났던 박근혜의 진정성 없는 사과는 그들에게 상처만 더한 건 아닐까.

 

인혁당 유가족분들이 최근에 다녀가신 듯 싱싱하고 새하얀 화환 하나가 제대 위에 놓였다.

 

(그 옆에는 최근에 다녀간 문재인 대통령후보의 화환도 있었지만, 바람이 불었는지(?) 엎어진 채 꽃이 모두 시들어있었다.)

 

'진보적 정권교체'의 붉은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열사들, 이름이 있고 없고간에, 이 땅의 정신적 영토와 면면한 흐름을

 

지켜내온 그들은 총칼로 나라를 지켜낸 사람들만큼은 최소한 존중받고 기억되고 기려져야 하는 거 아닐지.

 

그렇기는커녕 거꾸로 흐르는 세월 탓에 저들은 무덤에 누워서까지 붉은 머리띠를 동여맸다.

 

구묘역 바로 앞에 있는 조그마한 꽃집. 색색깔의 꽃다발과 여러겹 펼쳐진 파라솔의 색감이 꽤나 화려하고 이뻤지만

 

왼쪽으로 시야에 걸린 '광주'라는 두 글자가, 그리고 묘역의 스산하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모두 잠식해버리고 말았다.

 

떠나기 전. 여전히 떵떵거리며 호의호식중인 문어 대가리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꺼이 즈려밟고 침을 뱉어주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그, 피해자 중 한명이었던 정치인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나머지로부터는 아니다.

 

게다가 스스로 뉘우침이 없이 29만원이 전재산이라며 불법 축재물에 대한 추징조차 피하고 있는 그런 괴물은 사람도 아니다.

 

 

 

 

 

 

 

시뻘겋구나. 이제 박근혜 대통령여왕폐하 취임식만 남은 거 아닐까...

 

어제 출구조사 발표 때부터, 아니 그전의 미미한 투표율을 체크할 때부터 예감했던 결과지만 여전히 멘붕.

 

멘붕을 이기지 못하고 오전내내 북한땅을 뻘겋게 칠하면서 멍하니 보내버렸다.

 

 

 

 

 

 

 

 

 

몇달전인가, 어느 시사잡지에서 '통인시장'의 상인분들이 미대생들의 재능기부를 받아 각자의 상점을 나름대로

이쁘게 꾸몄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생선가게에는 생선의 테마로 한 참신한 간판이나 장식들이 내걸렸고

옷가게는 옷을 가지고 꾸며서 사람들의 이목과 발길을 붙잡는다는 컨셉이었던 던 거 같은데, 직접 가서 보니

정말 시선을 확 붙잡을 만큼 독특하고 재미있는 것들이 여전히 깔끔하게 손님들을 끌고 있었다.

'여기 속옷집이 있다, 비와이X'. 가게 앞에 속옷만 입은 사람 형상의 판넬이 둥둥 공중부양중이다.

건어물가게, 주렁주렁 엮인 명태가 매달려 있는 옆에는 눈이 부리부리한 오징어가 매달려 있다.

'반찬과 함께 사라지다', 오래된 영화포스터를 연상시키는 간판과 함께 LP판을 활용한 메뉴판.

두부와 콩나물국과 만두, 새하얀 천과 금박이 입혀진 빨간 천이 번갈아 널린 장식이 제법 단정한 분위기.

어느 생선가게, 겨울이라 조금 춥게도 보이지만 생선들이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바다수영의 포스.


미용실 앞에 있는...음...용도불명의, 그렇지만 스케일도 그렇고 모양새도 그렇고 딱 미용실을 나타내는 (아마도) 간판.

과일들이 으레 그렇듯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진열된 것 뿐 아니라, 가게 위쪽에도 맛나보이는 과일들이 그득하다.

어느 분식점, 과자 포장지를 활용해서 찢어붙이기를 한 듯, 곰인형 한마리가 둥둥 떠있다.

어느 고깃집 유리창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댕기머리 총각. 티비를 훔쳐보는 건가 싶은 재미있는 풍경.

생선가게 앞에 '천하대장군'처럼 우뚝 선 물고기 한마리. 심심하게 서 있던 기둥에 표정이 생겼다.

그리고 심심찮게 보이는 SINCE 천구백몇년, 생각보다 연륜이 오랜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50년이 넘은 떡집도 있고.

자하문길로부터 들어가는 통인시장 입구. 쭉 한길로 이어지는 심플한 시장통이 필운대길쪽까지 뻗어있다.


전통 재래시장을 살리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한번 가서 오뎅 하나 집어먹고 뻥튀기 하나 산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이렇게 시장을 정비하고 꾸미고, 이야기를 얹는 등 다양한 노력이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이렇게 고객만족센터도 만들고, 통인시장에서 파는 반찬거리나 부식재료로 만든 도시락 까페도 만들어 운영하고,

통인시장은 나름 재래시장으로 살아남고 부흥하기 위한 서비스 마인드와 아이디어가 통통 튀고 있었다.

일회용 우의를 판다는데 포즈는 왜 저리도 시크한지. 우산을 슬쩍 쥐고 있는 두 손가락이나 푹 눌러쓴 모자도 완전 시크하다.

김치마을, 가게 주인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게 '마을'의 분위기가 물씬하다. 통인시장, 통인마을이랄까.

심지어 상점에도 이렇게 손이 많이 들었을 아치가 세워져 있었다. 가게에서 파는 맛소금이니 밀가루니 따위의

포장재를 하트모양으로 잘라서 달아놓으니 뭔가 가게에서부터 하트가 뿅뿅 날아올라가는 분위기.

분식 집 앞에서 방긋 웃으며 손님을 기다리는 김밥 내외.

전집 간판에 달라붙어 놀고 있는 몇몇 살찐 졸라맨 버전의 아이들은 '전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신발이 전시된 모양 그대로 이미 이쁘단 느낌을 자아내는 신발가게의 간판은 화려한 색감을 더했다.

식당의 메뉴가 그림과 글씨가 묘하게 뒤섞인 캘리그라피로 문짝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떡집의 '떡'자는 화려한 꽃그림으로 치장이 되어 시선을 붙잡는다.

어느 만두집 간판 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감긴 레이스를 잡아 떼어서 돌돌 뭉쳐만든 듯한 고양이가 한마리.

과일가게의 하얀 벽면에는 제법 섬세한 필치로 그려진 과일나무가 한 그루.

무와 배추와 양파를 파는 가게에는 허공에 무가 매달려 있는가 하면 가스통은 꽃무늬 옷을 입은 배추아줌마로 변신했다.

옷 수선점의 간판은, 크고 작은 각종 모양의 실패를 이어달아서 커튼처럼 드리웠다.


필운대길쪽으로 빠지는 통인시장의 입구. 천장이 유리 지붕으로 덮여있는 아케이드 형태인지라 날씨가 궂거나 춥거나

비가 오는 날에도 살짝 들어가서 둘러보기 좋은 재래시장이다. 아이디어가 통통 튀는 통인시장.




사진 몇 장을 보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해진다.


사진을 보고 나니 속이 후련해진다 싶은 건,


저 기세등등한 글씨체로 쓰인 '인간 오물'의 이름이 박힌 과녁판을 향해 날아들 온갖 흉기들

때문이 아니라 그 뒤에 놓인 커다랗고 당당한 바윗덩이의 기개 때문이고.


또 "만고역적 리명박!"이라거나 "리명박을 죽탕쳐버리자!"라는 알아먹기 힘들지만 왠지 알 거 같은 문장들

때문이 아니라 꽃샘추위에도 광장을 빼곡히 메운 사람들의 '맨 인 블랙' 패션센스 때문이고.


또 '정신병자 리명박 역도와 군부 호전광들을 때려잡자'는 자극적인 문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남과 북의 정신병자와 호전광들을 때려잡을 남북한 교류의 실마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라고 철수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때려잡자 김정일! 쳐! 죽이자! 김정은!" 따위 구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굴면서

위와 같은 문구들에는 '광분'이라는 단어를 쓰는 어느 쓰레기신문들의 편파성에 질려버린 게 아니라,


이미 죽어버린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다시 때려잡을 셈인지 좀체 알 수 없는 인체의 신비에 질려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래놓고서 후환이 두려워 '이건 제가 쓴 게 아니라 철수가 한 말을 옮겨적은 거에요'라는 핑계를

마련하느라 머리를 굴려야 하는 시대에 질려버렸습니다. 어쨌건, 여태까지 철수 said.

*                                                              *                                                        *


김정은 관련 우리 군부대 구호에 연일 광분하는 北

(2012. 3. 5, 조선일보)

인천에 있는 한 군부대 내무반에 ‘때려잡자! 김정일’ ‘죽이자! 김정은’이라는 구호가 걸려 있는 사진과 관련, 북한이 연일 고강도 대남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4일 ‘죽어서도 묻힐 곳이 없게 할 것이다’란 제목의 논평에서 “복수의 일념으로 만장약된 우리의 총구가 인간 오물들을 과녁으로 삼고 있다”며 “우리 군대와 인민은 희세의 전쟁 미치광이, 추악한 패륜아들을 강력한 불세례로 징벌하여 죽어서도 묻힐 곳이 없게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통신은 5일에도 ‘정치도덕 패륜아 이명박의 만고대역죄를 단죄’란 제목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했다. 인터뷰에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희승 소장 교수는 “이명박역도, 김관진, 정승조와 같은 악한들이 단하루라도 이 행성 우(위)에서 살아 숨쉬게 할 수 없다”며 “을사오적의 말로가 그러했듯이 이자들을 능가한 민족의 원수, 패륜아들인 이명박 역적패당의 반민족적, 반인륜적 특대형범죄행위는 역사가 철저히 계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군 장교 김철봉은 이 인터뷰에서 “민족 앞에 씻을 수 없는 대역죄를 저지른 이명박 역적패당을 짓뭉개버릴 것”이라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이명박 역적패당이 살아 숨쉴 곳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다.

4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는 ‘조선의 최고존엄을 중상모독한 이명박 역적패당을 무자비한 성전으로 매장해버리기 위한 평양시군민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 동원된 15만 평양시민은 ‘명박이를 쳐죽이라’ ‘군부호전광들을 때려잡자’ ‘민족의 이름으로 리명박놈을 찢어죽이자’ ‘리명박역적패당을 죽탕쳐버리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은 매년 키리졸브와 독수리 훈련 등 한미연합훈련을 전후해 대남 비난의 강도를 높이곤 했다”며 “하지만 올해는 인천 군부대의 ‘최고존엄 모독’ 사건으로 예년보다 그 수위가 높다”고 말했다.




             2일 남측이 북한 '최고존엄'을 모독했다며 대남 투쟁결의를 다지고 있는 북한 군인들. (평양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노무현 재임시절 모든 사람들의 입버릇이던 문장이 있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경제가 안 좋은 것도, 일자리가 없는 것도, 대학교육이 엉망인 것도, 집값이 폭등하는 것도, 심지어 시험성적이 떨어진 것도

전부 다 노무현 때문이라 했었다. 그러더니 그의 사후, 그는 갑자기 구름같은 추모물결을 불러일으키는 '우리의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고, 그의 재임시절은 마치 정의와 행복이 강처럼 흐르던 민주주의와 경제정의의 호시절이었다는 식으로 드라마틱한

역전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노랑풍선이 일렁였고, 그는 (참 모호하지만) '소탈하고 정많고 정의롭던 대통령'이 되었다.


분명 노무현은 그렇게 세상만사에 대해 욕을 먹어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민주주의의 상징이라거나

올바른 지향점으로 여겨져야 할 인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한미FTA다. 2005년 6월 한미FTA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불쑥 내지르고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국내정치와 사회의 소모적이고 극단화된 형태의 분란이 끊이진 않는 건

분명히 노무현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이명박을 욕하지만, 한미FTA는 (기본적으로) 노무현 때문이다.


워낙 한미FTA와 관련한 이슈들도 많았고 논란거리들도 많았으니 기억조차 가물가물하지만 살짝만 짚어보면 그렇다.

협상개시 선언 후, 이른바 4대 선결문제를 미리 해결한다며 스크린쿼터 축소, 미국산쇠고기 수입재개 따위를 양보해버렸다.

영화계와 농민계가 반발하고 항의하자 집단이기주의네 폭력시위네 하며 수천수만의 전경을 동원해 진압해버렸었다. 정책이

결정되기 위한 사전절차로 국민 혹은 국회를 설득하거나 논의하는 과정은 생략됐다.


그뿐인가. 한국이 미국에 비해 어떤 실익을 얻었고 양측의 실익이 균형잡혔는지조차 의문이 남는 협상 결과에 대한 투명하고

충분한 해명이 없었으며, 심지어 협정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접근권조차 비공개로 봉쇄하고 국회의원에게조차 제한했었다.

악명높은 독소조항이라는 몇몇 항목에 대한 비판 역시 어정쩡한 얼버무림으로 넘어가며 협박하기를, 개방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국내 경제를 선진 미국의 경제시스템으로 재편하고 경쟁력을 강화하고 싶다면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난맥상이다. 국내 여론을 수렴하지도, 한미FTA의 필요성이나 효과나 대책에 대해서 아무런 공론화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시작했고, 그런 태도 그대로 밀어붙였던 거다. 각각의 국면에서 점검하고 논의하고 의견이 모였어야 할 이슈들이

있었지만 우격다짐으로 미루기만 했던 문제들이 지금 순간에 폭발하고 있는 거다. 사실 ISD같은 조항의 유독성 여부나 의료보건

분야 등에 대한 파급효과 예측이라거나 국내 경제에 대한 효과라거나 따위를 협상이 다 끝난 다음에 따진다는 건 코미디다.
 


그런 측면에서 이명박은 억울한 면이 없지 않을 거다. 한미FTA 광고에 노무현이 나왔다고 많은 이들이 분개했다지만 대통령

노무현의 대표적인 '성과'였던 게 사실 아닌가.
그 공을 이어받았을 뿐인데, 이제 와서 노무현의 사람들이 그들을 손가락질하고

대중을 '선동'해서 매국노라느니 비난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홍준표 한나라당대표가 그렇게 억울해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이명박이 정권을 이어받은 이후의 일들, 여전했던 불통과 불투명성 따위에 대한 비판은 올곧이 그의 몫이다.


노무현을 욕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참여정부의 동시다발적 FTA 체결 전략의 핵심이었던 '한미FTA'를 추진한 최고정치인

대통령 노무현을 욕해야 한다. 그를 밟고 넘어서지 않고서는 기껏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이런 것 뿐이다. "그의 한미FTA와 이명박의

한미FTA는 다르다." 다르다고? 뭐가 얼마나 다른지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나라를 말아먹으려고 한다."

그들이라고 나라 팔아먹겠다고 눈이 벌개 혈안이 되어 한미FTA를 추진하는 게 아니다. 노무현과 당시 열린우리당은 그랬나.


치졸하다. 대통령 노무현의 전반적인 공과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한미FTA 추진정책에 대한 평가로부터 시작해야 이런 치졸한

항변이나 인신공격 이상의 비판을 할 수 있다. 최소한 민주당 내의 한미FTA반대파들, 그리고 한미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노무현에 대한 '의리'를 깨고 그의 정책을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이명박에 대한 막연한 반감으로,

혹은 정략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반대하는 것은 설사 그 반대가 성공한다 해도 아무 교훈도 남기지 못할 거다.


그랬을 때 우리가 얻게 될 교훈, 그리고 새로운 생각거리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될 거다. 시장과 개방, 시장개방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2005년과 2011년, 한국과 세계 경제환경은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동일한 것일까. 한국 경제는 어떻게

발전해야 하며, 그 이득은 어디로 어떻게 분배되어야 할까. 정부는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어디까지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할까. 그런 방향과 가치를 정하는 과정으로 한미FTA 찬반 논의가 가야 한다.


그러면서, 이명박은 물론이고 노무현도 넘어서는, 그런 인물을 발견하고 골라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을 거다.

단순히 인물 한명에 기대어 나라가 좌지우지되고 흔들거리는 허탈한 후진국가를 이젠 좀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한미FTA 통과후 첨언]

허탈하다. 기껏 열심히 썼더니, MB가 순방에서 돌아오는 시점에 맞춰 날치기를 해버리다니. 비록 통과가 되어버려

더이상 한미FTA 반대를 말하는 게 의미를 잃어버린 상황에 처하고 말았지만, 이 글의 본래 의미는 크게 손상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어차피 MB를 넘어서려면 노무현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어야 하며, 그런 바탕에서

한미FTA에 대한 비판비난질책이 귀결될 지점이 어디인지 살펴보는 건 여전히 의미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p.s. 지금도 국회에선 강행처리를 막으려는 진보정당 의원들의 절박한 몸부림이 있었다는 속보가 떴다. 한미FTA를 둘러싼

정치인들의 고성과 몸싸움을 그저 '정치싸움꾼'들의 난동으로 치부하고 손쉬운 양비론으로 빠지는 것은 피할 일이다.


p.s.2. [리뷰] 자유무역협정의 정치경제(윤영관, 인간사랑)(2007.4.19)

노무현 정권 때 외교통상부장관을 역임했던 윤영관 교수의 '국제정치경제' 수업 게시판에 올렸던 글인데, 첫단추부터

잘못 꿰였던 정황이 조금이나마 묻어난다 싶어 첨부한다.


p.s.3. 2011년 11월 22일 오후 4시 한미FTA 비준안 국회본회의 통과.

당장 한국이 멕시코나 미국처럼 의료보험체계가 붕괴하고 사람 못살 곳으로 변하지는 않을 거다. 다만, 체감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서히, 마치 조금씩 온도가 올라가는 냄비 속에 담긴 개구리가 조용히 삶아지듯, 그렇게 삶의 환경과 조건이

악화되지 않을까. 수년쯤 지나 문득 뒤돌아보면 어라, 생각보다 많은 게 변했구나 하는 식으로.


아울러, 한미FTA는 노무현 때문이다, 란 말에도 약간의 추가를 해야겠다.

한미FTA는 노무현과 이명박 때문이다.


대나무에 기대어 층층이 발판을 얹은 수십개짜리 덩굴계단. 안 그래도 위로 갈수록 작아져보이는 원근법의

마법에 더해, 일정한 비율로 줄어드는 잎사귀의 모습, 그러면서도 몇몇번째 계단에선 그 비율을 깨뜨리고

불끈 자라난 잎사귀들의 배열이 리드미컬하다.

담양의 죽녹원. 서울에서 전남 담양까지 내려갔으니 사람들이 많이 없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입구부터 꽉꽉

들어찬 사람들, 매표소에서 티켓을 사는 데에도 줄이 잔뜩 늘어서서 입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참 기다려야 했다.

입구에서 뒹굴고 있던 팬더 몇 마리. 왠 팬더인가 했는데, 생각해보니 대나무와 팬더는 자연스레 이어지는

한쌍이었던 거다. 어려서부터 훈련받은 그런 견고한 고리가 내 머릿속에서 깨어진 건 아마도 핑크팬더와

쿵푸팬더의 영향 아닐까. 제법 익살맞은 팬더들 사이에 선 꼬맹이, 암만해도 팬더들 따라 지어본 표정이지 싶다.


사방으로 휘휘 뻗어나는, 그렇지만 그렇게 부담스럽게 길지는 않던 죽녹원의 코스를 거닐면서 눈에 띄었던 것 중

하나는 나무를 자연 그대로의 모습 그대로 살린 채 가로등 기둥으로 활용하고 있던 모습.

온통 대죽들, 고개를 잔뜩 꺾어 올려야 겨우 그 너머 하늘이 보일 정도로 잘 자란 대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에어컨 바람도 울고 갈 정도였다. 꼬맹이들 앞니 빠진 새로 바람이 노닐듯, 그렇게 간결하고 호리한

대나무 사이로 바람이 노닐며 그 푸른 청량감을 한껏 머금는 듯 하다.


대죽의 색깔도 약간 소프트한 무광택 코팅이 살짝 입혀진 옥빛이랄까, 보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기분이 드는데

실제로 살짝 손만 대어도 대나무가 빈 통속에 보관하고 있던 냉기가 맹렬하게 전달되었더랬다. 죽순의 떡잎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쭉쭉 뻗어나간 대나무 하나, 워낙 순식간에 자라난다니 가능했을 듯.


그런데 대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그 숲의 짙고 깊은 느낌을 만끽하는데 종종 방해가 되던 현수막들이 보였다.

"저는 대나무입니다. 저를 만지거나 제몸에 낙서하지 마세요. 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꽤나 섬뜩한 문구다.

근데 정말, 그런 현수막이 버젓이 내걸려있는 앞에서도 차키를 들고, 펜을 들고 대나무에 하나씩 달라붙어서

글자를 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나 많이 눈에 띄던 거다. 나이가 많던 적건 상관없이. 심지어 이런

엄마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낙서라거나, '개개개자로~' 시작되는 말을 이어놓은 낙서도 있더라는.


대나무들의 저런 눈물어린 읍소에도 불구하고 저런 낙서를 의연하게 하는 사람들은, 담양특산품인 이런

대살회초리로 체형을 내려야 하지는 않을까. 수학여행 때던가 기념품 가게에서 회초리를 사갔던 옛날의

아련하고도 아팠던 기억을 새록새록 자극하던 대살회초리 특산품. 손바닥에 몇대 시험해보니 찰지구나.

죽녹원은 총 여덟개 코스로 구성된 산책로를 갖고 있는데,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죽녹원 안의 숲을 돌아서

그 코스를 전부 밟아도 두어시간이면 충분한 거 같았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었던 건 '1박2일 촬영지 가는길'.

아무리 저 프로그램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해도, 저렇게 안내판에 덕지덕지 붙여놓는 게 맞을까

모르겠다. 더구나 이승기가 빠졌었다는 연못엔 '이승기 연못'이란 이름까지. 한 3년만 지나도 저게 왜 저런

이름이 붙었는지, 저기서 뭘 찍었는지 기억도 잊혀질 텐데, 그땐 지우고 새로 안내판을 세우려나.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는 거다. 그냥 여기가 이런 영화, 이런 프로그램 촬영했던 곳이라는 것만 표시를 남기면

될 것을, 뭘 전체 지도에다가도 요란스레 '1박2일'이니 '이승기연못'이니 정식으로 표기를 해 놓았을까.


 

*토막상식(@ 죽녹원 안내판).   <죽림욕의 효과>

ㅇ 음이온 발생
  - 음이온이란 전기를 띈 눈에 보이지 않는 미립자로 마이너스 전하가 음이온이다.
  - 대숲에서는 음이온 발생량 1,200~1,700개 발생 (음이온 발생량 700개 이상일 경우 사람은 시원함을 느낌)

ㅇ 풍부한 산소 방출
  - 대나무숲 안과 밖의 온도는 약 4~7도씨 가량 차이가 난다.
  - 대숲 1ha당 1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0.37톤의 산소를 발생

ㅇ 심신안정 효과
  - 뇌에서 알파파의 활동을 증가시켜 스트레스 해소, 신체/정신적인 이완, 심신의 안정 효과


 


 


여덟 코스 중에서도 가장 경사도 있고 길도 좁던 곳은 추억의 샛길,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이곳을 방문했을 때

산책했던 코스라고도 한다. 대나무뿌리가 얼기설기 드러난 흙길 양쪽으로 하늘높은 줄 모르는 죽의 장막을 친

대나무숲 사이를 걸으니까 땀도 안 나고, 걸을수록 상쾌한 느낌이 드는 게 죽림욕 제대로다. 그치만 맘 한켠으론

대통령이 걷기엔 좀 너무 정비되지 않은 거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 그의 소탈함이 반영되었던 걸까.


죽녹원이라고 대나무숲만 울창하리라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낮은 곳에는 저렇게 하얀 꽃망울을 매달고 있는

차나무도 있었고, 드문드문 덩굴이 말려올라간 나무들도 있었고.

근데 죽녹원 가운데에 있던 이 동상은 대체 누굴까. 못 찾은 거 같기도 하지만 안내팜플렛이나 지도나 동상

근처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었던 거 같다. 그런데 누군가 저렇게 파랑땡땡이 스카프를 곱게도 감아놔서

차갑게만 보일 수 있는 동상에 살짝 온기가 감도는 것만 같다.


죽녹원 맨 안쪽에 웅크리고 있던 한옥체험마을 가는 길. 깔딱고개를 넘어서듯 경사가 급 가팔라졌다가 급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길을 지나면 한옥들과 정자들이 조그맣게 무리짓고 있는 마을이 나온다. 경사가 가팔라서인지 옹골차게

짧막한 마디가 꽉 차있는 대나무뿌리가 흙바닥 위로 꾸물꾸물 기어나와선 자꾸 발목을 잡았다.

한옥체험마을, 몇 개의 연못이 이어져있었는데 괜히 궁금해지는 거다. 이 중에서 어디가 '이승기연못'인 거지.

혹시나 하고 굽어본 안내판엔 이승기연못 대신 죽녹원 두꺼비를 지켜달라는 이야기만.

한옥마을과 죽로차체험관, 그리고 시비공원이 모여있는 곳인지라 조경도 잘 되어 있고, 잔디가 곱게 깔린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자갈길은 정말 걸을 맛이 나는 구간이었다. 적절히 안배된 연못과 건축물들, 그리고 나무와

벤치들까지 아기자기한 그림같은 풍경이 돋보이던 곳.


정자에서는 어느 명인 한분이 가야금을 뜯으며 구성진 가락을 한 소절 뽑아내리고 계셨고, 굳이 그 앞에 총총이

모여서 듣지 않아도 부드러운 바람결에 날려 오는 소리가 가을날의 정취를 더했다.


그리고 이곳 연못에서 잠시 앉아 쉬면서 이곳저곳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남은 사진들. 연못 너머 벤치에 우뚝

선 아기를 어르고 있는 부모의 부산스럽지만 행복해 보이는 풍경이라거나, 곳곳에서 쌍쌍이 벤치에 앉아

가을하늘과 가을바람, 가을공기를 즐기는 어린 연인들의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돌아나오는 길, 그러고 보니 요새 코스모스 보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얼핏 듣기로 외국산 국화던가, 그런

외래종에 밀려서 점점 코스모스 개체가 줄고 있다고 신문기사를 봤던 거 같은데. 벌 한마리가 부산하게

움직이며 허벅지에 노란 꽃가루테를 두르고 있었다.

죽녹원을 나오다가 잠시 돌아보았더니, 누렇게 변색된 대나무를 촘촘이 엮어만든 담벼락이 터져나갈 듯

거침없이 쭉쭉 뻗은 대나무숲의 기세가 충천한 느낌이다. 저래서야 비가 와도 물방울이 안으로 새어들어갈

틈이나 있으려나 싶도록 빼곡하게 밀집해선 시퍼런 색감과 칼날같은 잎사귀 모양을 자랑하고 있던 죽녹원의

대나무숲. 아무래도 대나무숲은 '임금님귀는 당나귀귀' 이야기를 머릿속에 소환해내는 거 같다.





벌써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지는 2010년 G20 서울정상회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

아랫쪽에 얼핏 보면 '맹박'이라 잘못 읽힐 거 같은 대통령의 사인도 있다.

몇 번을 지나치면서도 늘 저게 무슨 기념물인가 싶어 궁금하기만 했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런 거다.

정상회의장 오찬장 벽면에 디자인된 로고를 잘라서 제작했다는, 일종의 재활용이랄까.


뭐..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키보드 앞 손가락들이 씰룩거리지만..그냥 하나만 궁금해 해보기로

한다. 저거 나중에 예컨대 경매 같은데 나온다 치면, 얼마나 하려나. 순수하게 가격이 궁금하단 차원.


B.C와 A.D., 그리고 9.11.

9.11이 터지기 며칠 전, 뉴욕에서의 3개월 체류를 접으며 마지막 여행지로 쌍둥이 빌딩을 올랐었다.

아직 한국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어느 가전제품 대리점의 티비들로 접했던 그 충격적인

모습이란, 뭉클 솟아난 두려움과 함께 상당한 비현실감을 안겼었다. 이후 수많은 이미지와

스토리들로 계속해서 재연되고 재구성되었지만 그 충격이란 여전해서, 이후 국제정치의 룰도

바뀌고 세계사의 흐름도 꺽인 듯하다. 영화 속 대사가 딱 맞는 거 같다. 서양인들은 역사를 B.C와

A.D를 기점으로 나누었지만 그에 더해 제3의 기점, 9.11이 생겨났다고.


미국 내 무슬림들의 Ground Zero.

그렇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미국이 아니라 인도에서 시작한다. 인도에서 건너간

이민자들의 이야기, 더구나 이슬람을 종교로 가졌거나 가졌다고 오인받는 이민자들의 이야기.

그렇기에 그들에게 9.11의 타격은 쌍둥이 빌딩의 충격적인 붕괴가 아니라 이후의 '여진'에서

더욱 강렬하다. 히잡을 두르지 못하게 되고, 이슬람의 분위기가 풍기는 가게는 문을 닫게 되고,

급기야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은 그들의 아이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미국인'들이 말하는

그라운드 제로가 쌍둥이 빌딩이 위치했던 곳이라면, 그들의 그라운드 제로는 아이의 타살장소.


'충격과 공포'에 대응하는 한가지 방법.

인도인이지만 힌두교인 여자는 소리친다. 무슬림인 당신과 결혼해서 내 아이를 잃었다고.

당신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가버리라고. 온 미국인에게, 미국의 대통령에게 "내 이름은

칸이고,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돌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아이의 살해범을 찾아내 응징하기에 발벗고 나선다. 그녀의 분노는 자연스럽다. 실제로

9.11이 터진 후 미국과 세계가 움직였던 방식이기도 하다. 분노, 응징, 그리고 공포에 질린 '고백'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것은,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충성서약'과 유사해진다.


'충격과 공포'에 대응하는 또다른 방법.

자폐와 유사한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다는 남자는 농담을 모른다. 늘 진심을 말하고, 순진함이

극에 달해 마치 이전의 '포레스트 검프'나 '레인맨'이 돌아온 느낌이다. 그는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대통령을 찾아 나섰다. "My name is Khan. I'm not a terrorist."의 멘트를 주문처럼 외우며.

몇개월에 걸쳐 대통령을 만나려다가 오히려 테러리스트로 오인받아 수모를 받기도 하고, 전투적

무슬림들의 테러 대상이 되기도 한 그에게 결국 그녀가 다시 돌아오고 난 후에도, 그는 그 말을

대통령에게 전한다는 '약속'은 꼭 지키겠다며 다시 나선다.


겁먹은 '충성서약'을 넘어 당당한 '선언'으로.

그렇지만 그의 멘트는 다르다. 난 당신과 같은 편이에요, 라는 겁먹은 고백이 아니다. 내가 가진

종교를 타협하지도, 내가 사는 방식을 타협하지도, 편가르기식 프레임에 포섭되지도 않는다.

처음엔 그저 그녀에게 돌아갈 생각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슬림으로 겪게 된 미국사회의

편견과 격한 공포심에 맞닥뜨리면서 바뀐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애초부터 현명한 어머니에게

받은 교육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이슬람식 이름을 대며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밝히는

그의 말은, 차라리 이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편견과 무지를 깨뜨리자는 선언처럼 들린다.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세상에 좋은 사람을 늘리자는 그런.


인도의 카메라가 미국을 훑다.

이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를 두시간여 흠뻑 몰입하며 내달릴 수 있게 하는 게 진짜 능력이다.

인도에서의 성장기를 경쾌하게 내달렸던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미국의 곳곳을 핥아내면서

전혀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인도인 이민자에게 미국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라는 식으로.

게다가 자폐증을 연기한 '샤룩칸'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라거나, 이국적이면서도 마력적인

인도의 음악, 미국 곳곳의 풍광이 담긴 영상까지 잘 만들어져, 몇몇 센스넘치고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가슴에 남고 말았다.


"My name is Khan. I'm not a terrorist."





사실, 이건 일종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같은 쿠데타 반란세력, 군대를 뒤집고

정치를 뒤집고 나라를 뒤집어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을 휘두른 범죄집단의 수괴를 국민의

손으로 처단하지 못한 데서 빚어지는 혼란이 얼마나 큰지 말이다. 여전히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고 그의 지도력, 그의 '조국근대화' 능력, 그의 카리스마, 그의 청렴함,

그의 인간미 따위에 대한 상찬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며 재구성되는 건, 그 독재자와

추종세력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탓이다.


지들끼리의 자리다툼을 벌이다 자중지란에 빠져 붕괴한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최소한 눈에 보이는 성과는 이뤄냈던 박정희 도당들보다도 못한 문어대가리 일파들이

다시 그 정권을 찬탈했으니. 제대로 박정희에 대해 평가하고 바로잡을 기회도 없이

더 나쁜 놈이 나타나버렸으니 기억이 왜곡된 건 아닐까. 때리던 놈 다음에 칼로 찌르는

놈이 나타난 셈이랄까. 칼로 찌르던 놈들 두 명은 법정에까지 겨우겨우 세웠다지만,

여전히 때리던 놈에 대해서는 요원한 거다.


박정희에 대한 세간의 잘못된 상식, 무조건적인 찬양은 여전히 가실 줄을 모르고

일종의 '신앙화' 경지에서 굳어진지 오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화를 통해

상대를 설복시키거나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라지만, 최소한 서로의 인식이

공통의 지평에서 뻗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 몇가지 팩트와 분석자료가 담긴

글들을 공유해 본다.




[심층취재|박정희기념관 파문]
“박정희 개발독재는 시장경제 발전의 암세포”
고려대 경영대학장 이필상 교수 인터뷰 (신동아, 2000.12.01 통권 495 호 (p134 ~ 143))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mairso2@donga.com

”IMF 위기의 씨앗은 바로 개발독재입니다. 박정희전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이 우리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공은 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역사의 형틀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를 쓰러뜨린

책임도 있는 겁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향수엔 그의 경제개발 치적이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

민주화운동 탄압과 인권 말살 등 피로 얼룩진 독재정권에 대한 비난을 상쇄시켜온, 유일한 또는

최후의 보루 구실을 해왔다.

찬양론자들은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실적을 들이대며 개발독재론을 옹호하고 정당화해왔다.

한마디로 경제발전을 위해선 민주주의 유보가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단기간 초고속성장의 신화를 낳은 개발독재. 그것은 과연 불가피한 것이었나. 역사의 저울추는

개발독재의 성과와 폐해 중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가. 고려대 경영대학장과 경영대학원장을

겸하고 있는 이필상 교수(53)는 인터뷰에서 “가시적인 실적 위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야말로 시장

경제를 병들게 한 암세포였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IMF 금융위기의 뿌리였다”고 비판했다.


인터뷰는 11월13일 오전 고려대 경영대학장실에서 진행됐다. ‘재무관리’ ‘관리경제학’ ‘신국제금융’

‘경제정책과 기업활동’ 등 다수의 경제 관련 책을 펴낸 이필상 교수는 그간 인터뷰나 신문 칼럼 등을
 
통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해왔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어 혹시 인터뷰 주제가 그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기우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채
 
1분이 걸리지 않았다.



박정희 신화의 허구성


―최근 박정희 전대통령 흉상 철거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 동안 꾸준히 진행돼온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기념관 문제를 떠나 흉상철거행위 자체에 대해선

법질서를 들어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싶습니다.


“그 자체는 불법이므로 잘못된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국민들 사이에 박정희 전대통령의 업적이
 
잘못 해석되고 신화가 돼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흉상 철거행위는) 거기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라고

생각합니다. 의사표시 방법은 잘못됐지만 그 뜻을 다함께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박 전대통령의 업적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죠. 불법행위로 간주해

무조건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만큼 기념관 건립에 대한 반대여론이 강하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박정희 기념관 논란은 박 전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초부터 박정희 신드롬 또는 박정희 부활현상이 일어났는데, 찬양론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것이 경제치적입니다. 먼저 박 전대통령의 경제업적을 살펴보지요.


“경제가 어렵다보니 사람들이 정신적 돌파구를 찾게 됐는데, 막연히 과거 박정희 시절의 고도성장을

동경하면서 그것을 신화로 삼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박정희 경제신앙으로

굳어졌죠. 그 배경이 뭐냐. 첫째, 우리 민족은 6·25를 거치며 엄청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선 후 그 힘들던 보릿고개를 극복했습니다. 초가지붕 개량으로 상징되는

새마을운동, 그것이 후세에 길이 남을 박 전대통령의 업적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둘째, 신화창조의 계기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입니다. 당시 건설비용이 1년 국가예산보다 많았습니다.

일본이 주도한 아시아개발기금이 원조하는 자금을 바탕으로 착공한,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대역사였습니다.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끝내 성사시켰는데 그것이 산업발전에 대동맥이 됐죠.

또한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줬습니다.


셋째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쓰지 않았습니까. 그저 먹을 거나 제대로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에게 국토는 좁지만 경제영토는 전세계로 무한히 펼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섬유라든가 합판 가발 등을 수출하면서 우리 경제의 잠재력을 일깨운 것이죠.


넷째로, 두드러진 업적은 중화학공업 발전입니다. 60년대 말부터 철강 자동차 조선 화학 등

네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했습니다. 과잉·중복투자로 국가 경제를 주름지게 했지만, 기간산업을
 
구축하고 우리 경제가 세계적 경제로 도약하는 데 발판이 된 것은 사실이죠.”


이교수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긍정성을 뛰어넘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는 게 우리 경제의 비극이다.



정경유착과 성장제일주의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라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가장 큰 문제는 정경유착을 통한 불법지배체제 형성입니다. 정통성 없는 독재권력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보겠다는 재벌과 불법공생관계를 형성한 것이죠. 권력은 재벌에

각종 인·허가상 특혜를 비롯해 금융·차관·세제 특혜를 주고 그 대가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권력과 재벌의 유착이라는 불법구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됐습니다.

그 정당성 없는 지배계층이 지금까지 사회·경제·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정경유착

지배구조라는, 역사발전의 큰 걸림돌을 만든 거죠.


그 둘째 병폐는 빈부격차입니다. 무조건 고속성장을 해야 한다, 가난을 탈피해야 한다, 이런

생각에서 성장제일주의로 나갔거든요. 그것을 위해 정부가 경제를 통제했어요. 통화증발과

관치금융에 의해 인위적으로 돈을 풀어 특정기업에 지원하는 일이 다반사였죠. 그러다 보니

특혜를 받는 쪽은 자꾸 발전하고 부가 축적된 반면 일반 기업과 서민 계층은 인플레이션의

피해를 입으며 소득이 자꾸 떨어지고 빈부차이가 계속 벌어졌습니다.

빈부격차의 배경이 된 또 하나의 문제는 지하경제입니다. 정경유착 테두리에서 돈을 마구

뿌리고 고속성장에 치중하다 보니 부동산 값이 폭등했어요. 권력의 특혜를 받은 계층은

부동산투기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부동산 값은 일반 물가보다 몇 배 상승하는

경향이 있어요. 공급이 제한돼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땅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지배계층은

그걸 이권으로 삼았어요. 증권시장도 비슷한 성향을 띠고 있습니다. 부동산과 증권시장이

지하경제의 온상이 된 것은 고속성장의 큰 부작용이죠.


셋째 문제는 경제력 집중이에요. 재벌을 집중지원해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정책을 펴다보니

일반 중소기업이 빈사상태에 빠진 거죠.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수직적 주종관계가 돼버렸습니다.

중소기업이라는 게 산업의 풀뿌리로 상품 개발과 기술력 향상을 통해 경쟁력의 저변이 되는
 
것인데,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재벌기업의 하청기업으로 전락해 산업발전에 엄청난 불균형이
 
생겼죠. 각종 인·허가 특혜를 받은 대기업이 조금씩 대주는 걸로 연명하다보니 자생적 기술이나
 
상품을 가지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버렸죠.

가장 큰 문제는 조립수출산업 위주로 산업이 발전된 데 있습니다. 흔히 가마우지 경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가마우지라는 새는 훈련을 시키면 고기를 잡아오는데, 그것을 삼키지 못하게

목을 묶어 놓습니다. 고기를 뺏고 나서 풀어주면 다시 고기를 잡아와요. 잡아온 고기를 빼앗기고

날아가는 일을 되풀이하죠. 우리 경제가 그렇다는 거예요. 외국에서 부품과 기계를 사들여

조립해 만든 상품이 주종을 이루다보니 수출로 해외에서 돈을 벌어와 봐야 부품값 갚고

기계값이나 기술료 주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죠. 진짜 이익인 부가가치는 뺏기고 조금씩
 
던져주는 먹이나 얻어먹고 사는 가마우지 경제를 만든 겁니다. 자생적 경쟁력의 기반이

처음부터 형성되지 않은 겁니다.


넷째 부작용은 지역격차입니다. 대개 동쪽에서 집권세력이 나오다 보니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동서간 경제력 격차가 커지고 그것이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요인이 됐어요. 지배계층은 그것을 또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경제의 동서분단선을 만든 겁니다.
 
그에 따른 사회갈등이 선거 때마다 극단의 형태로 표출되면서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골이 깊어진 것입니다.” 



지역감정의 뿌리


이교수는 지역간 불균형 경제발전이 오늘날 지역감정의 뿌리가 됐다고 단언했다. 그가 지적하는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는 끝이 없을 듯싶다.


“지역격차의 또 다른 측면은 도시 농촌간 격차입니다. 재벌들에게는 한국은행을 독촉해 돈을
 
지원해주면서 농촌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지원엔 인색했습니다. 지배자들의 횡포였죠.

그렇지 않아도 산업화과정에는 농촌경제가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인위적으로 육성하고

발전시키지는 못할지언정 거꾸로 황폐화를 가속시켰어요. 농촌 사람들이 안 되겠다 싶어
 
다 도시권으로 옮겨가면서 수도권을 비롯한 도시는 비대해지고 농촌은 황폐해지는,

기형적이고 비효율적인 국토발전이 이뤄졌습니다.


다섯째 폐해는 천민자본주의의 만연입니다. 고속성장을 독재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습니다. 성장제일주의가 사람들에게 사치와 허영을 부추긴 겁니다.

부동산 투기로 돈 벌어 흥청망청 쓰고 해외에 나가 낭비하고 사치품을 사들이고… 그런 게
 
소비미덕으로 여겨지고, 사람들이 그걸 부러워하는 사회가 돼버렸어요. 그 과정에 가난한

이웃과 나누며 살던 전통적 가치관과 따뜻한 가족관, 공동운명체 의식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것을 사회파괴라고 생각해요. 전통문화가 파괴되면서 민족의 정체성이 상실됐다고
 
봅니다.


여섯째로 관료주의 확대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독재권력을 장기간 유지하려다 보니 입법부

기능을 축소하고 사법부를 마비시켜야 했습니다. 반면 행정부는 굉장히 비대해졌죠. 사회를

지배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기업들을 길들이기 위해 엄청난 규제가 양산됐습니다. 관료주의가

엄청난 힘을 갖고 경제를 지배하다 보니 정부와 유착하지 못한 기업은 아예 발전 대열에 진입도
 
못하게 됐죠. 말만 시장경제지, 사실은 관치경제였습니다.


일곱째로 빚경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로부터 금융특혜를 받은 기업들이 다들

자기 돈이 아닌 은행돈으로 사업을 벌이다 보니 부채비율이 엄청나게 높아졌죠. 특정 기업이
 
좀 어려워지면 그때마다 한국은행 돈 풀어 구제해줬습니다. 시장경제체제에서 좋은 기업이란

시장에서 자금을 지원받아 물건 판 돈으로 스스로 발전하는 기업입니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도태돼야 하는데, 거꾸로 됐죠. 금융특혜를 받은 부실기업에 자꾸 돈을 대주니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부실이 확대 재생산됐습니다. 기업들을 빚 먹고 사는 공룡으로 만든 겁니다.

외국 차관도 끌어다 그런 기업에 대주고. 기업들이 시장에서 평가받고 스스로 자본을 축적해
 
투자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돈 대줘 발전하는 기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다 보니
 
산업구조가 매우 취약해졌어요. 위험도도 높아졌고.


여덟째. 부패공화국입니다. 경제가 부패공화국의 희생물이 된 거죠. 정경유착에 따라 재벌과
 
권력층이 경제를 독식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경제가 희생됐습니다. 관료주의가 확대되고

규제가 양산되다 보니 뇌물이 판치는 비리구조가 위에서부터 형성됐고 그 영향이

민간부문에도 미쳤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가 그 씨앗을 뿌린 것으로 볼 수밖에 없죠.”


IMF위기 씨앗은 개발독재


이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개발독재의 패러다임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된 데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역대 대통령들의 책임이 크다. 어쩌면 오늘 인터뷰에서 질문은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기자의 ‘불안감’도 아랑곳없이 그는 마치 한칼에 끝장을

내기라도 하듯 설명을 계속한다.


“79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서거한 후 들어선 전두환 체제는 오히려 독재권력을 강화했지요.

시장경제는 더 멀어지고. 특히 정권이 정통성을 갖지 못했기에 정경유착이 더 악화됐어요.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가면서 개발독재의 구조적 문제가 심해졌습니다. 두 사람이 쓰고 남은
 
돈, 들킨 돈만 각각 5000억원, 4000억원이었어요. 그렇게 따지면 독재정권의 집권자들이

재벌보다 더 큰 재벌이었던 셈입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뭔가 고쳐질 것으로 다들 기대했지요. 그런데 가장 큰 걸림돌인

정치질서 체제가 바뀌지 않고 관료주의도 여전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혼자 개혁하려

애썼는지는 모르지만 체질화된 관료주의와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치권이 둘러싼

상태에서 도저히 뭘 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금융실명제라는 미증유의 개혁이 변질된 것도
 
그런 사정 때문입니다.

개혁을 하려면 끝까지 제대로 해야지 실패하거나 변질되면 경제에 오히려 더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문민정부가 경제를 망치고 말았는데, 그 배후엔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단이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선 국민의 정부도 크게 다를 바 없어요. 구태의연한

정치체제와 관료주의가 여전히 개혁에 걸림돌이 되고 있어요. 개혁의 성적표를
 
따진다면 크게 내세울 게 없죠.”


이교수의 개발독재 비판논리는 IMF 책임론으로 연결된다.


“IMF 위기의 씨앗은 바로 개발독재입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이 우리
 
국민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공은 있지만 정경유착이라는 역사의 형틀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를 쓰러뜨린 책임도 있는 겁니다. 안타까운 건 IMF라는 큰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의 틀을 바꿔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짊어진 국민의 정부가 제몫을

못 한다는 점입니다. 정경유착과 관료주의를 타파하는 근본적 개혁을 해야 하는데

그것 없이 재벌개혁을 한다고 나섰다가 저항에 부딪히자 기껏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근로자나 정리하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아직까지 박정희 개발독재의

패러다임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21세기 들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이 잘못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과거 고도성장의
 
향수에 빠져 박정희 기념관을 세우는 건 굉장한 모순이 아닐 수 없죠.”



독재와 지도력의 혼동


―박정희식 경제성장에 대해 학계에선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절대 긍정론으로
 
박정희식 개발독재가 경제성장을 위해 바람직했고 지금도 그 패러다임이 유효하다는 겁니다

. 둘째, 개발독재 자체는 비판적으로 보지만 산업화 초기단계에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보는 견해죠. 즉 한시적 긍정론입니다. 셋째 견해는 완전 부정론입니다. 개발독재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독재를 정당화한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독재는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화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속성장했다, 빈곤에서 탈피했다,
 
그것을 당시 독재 덕분으로 돌리는 건 굉장히 잘못된 해석이고 위험한 일이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독재와 지도력을 혼동해서 그래요. 독재가 아니고 국민의 지지를 받는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시장경제체제를 발전시켰더라면 지금쯤 우리는 선진형 경제구조를 갖게 됐을 겁니다.”


―교수님은 그러면….


“셋째 견해에 해당하죠.”


―당시 상황을 돌이켜 보면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고 장면 정부가 들어섰지요. 그런데

민주주의를 내세운 장면 정부가 허약하고 무능해 군부가 일어났다는 것 아닙니까. 당시 장면

정부가 더 기회를 가졌다면 박정희 못지않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이 점을 구분해야 합니다. 당시 장면이라는 사람, 장면 정부가 허약했지 민주주의가 허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주주의를 곧 장면 정부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거죠. 장면 정부가

무능하고 지도력이 부족했다면 민주적 절차로 정권을 교체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빌미로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독재를 정당화한 것은 잘못된 일이죠. 그때는 각 나라에서

경제발전이 시작되는 단계였어요. 어떤 정부가 들어섰더라도 경제발전에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제3세계, 특히 동남아국가들의 경제 발전 시기와 배경이 우리나라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고, 특히 우리에게 굉장한 자극을 준 나라는 일본이에요. 일본이 전쟁에 패한 후
 
그 잿더미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걸 봤거든요. 그걸 보고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당연히 우리도 해보자, 이렇게 나온 거죠. 그때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합리적 경제발전

체제를 만들고 시장경제 개념을 발전시켰다면, 모르겠어요, 빈곤탈피속도는 좀 느렸을는지
 
모르지만 훨씬 의미 있는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어쨌든 박정희식 경제발전은 한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습니다. 경제발전의 질보다
 
외형적인 수치나 가시적인 성과에 더 감동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당시 경제지표를 보면,

경제성장률만 해도 5·16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해인 1962년부터 박 전대통령이 죽은

1979년까지 연평균 9.3%를 기록했습니다. 1인당 GNP도 1961년 82달러에서 1979년엔

1640달러로 커졌어요. 수출액도 4000만 달러에서 150억 달러로 엄청나게 늘었지요.


“맞아요. 그런 것에 대한 동경이죠. 그런데 지금과 그때 상황을 비교해 지금 어려우니

그때 그런 일이 또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또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건

굉장히 잘못된 일이죠.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던 황무지였어요. 사람들이 일을 하면

뭔가 이뤄지는 게 막 보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경제발전이 시작되고 소득이

늘어나니 다들 놀랐죠. 그런데 지금은 경제구조가 달라요. 경제여건도 달라요. 지금 만약

박정희 방식을 적용한다면 경제, 마비됩니다. 현 경제구조에서 정부가 모든 걸 통제하고

특정기업을 지정해 특혜를 주고 정경유착을 강화한다면 경제가 쓰러지죠.” 


관치경제에 희생당한 금융



―단기 고속성장이 갖는 단점은 무엇입니까?


“몸집이 아주 왜소한 사람이 별안간 쌀밥과 고기 먹고 몸집이 커졌다고 했을 때, 과연

몸집만 보고 그 사람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나라 경제는
 
초고속성장을 하며 몸집은 굉장히 커졌어요. 그런데 그 몸에 피를 돌게 하는 심장 구실을
 
하는 금융 부문이 관치경제에 희생되고 정경유착의 수단이 되면서 기능이 마비됐습니다.
 
심장에 병이 든 거예요. 심지어 플라스틱 인공심장을 달기도 했어요. 그럼 그 사람의

건강이 제대로 유지되겠어요? 계속 성장하며 힘을 발휘할 수 있겠어요? 고속성장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경제의 심장을 망가뜨렸다는 점, 나아가 문화 측면에서 볼 때

머리도 정신도 완전히 잃었다는 거예요. 별안간 큰다는 게 좋은 건 아니에요.”


―고도성장의 요인 중 하나로 박정희 전대통령의 리더십을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경제발전에 대한 확실한 신념과 일관성 있는 전략,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비전 등이지요.


“그런 것들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한 건 사실입니다. 고도성장에 견인차가 됐죠.

그건 인정하자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통치수단, 정권연장 수단으로 악용했고 그 결과
 
경제 전체가 병들었다는 점은 구분해 평가해야죠.”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이나 신념은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덕목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철학이다. 이교수에 따르면 그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릇된 경제철학과 신념이 결합한데다 정치논리가 개입되면서 그 폐해가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바깥 세계의 평가도 무시할 순 없지요. 1993년 세계은행 보고서엔 한국이 일본과 더불어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성공사례로 소개됐습니다. 박 전대통령의 수출지향 전략과

거시경제적 안정화 전략을 그 요인으로 꼽았더군요.


“결과만 놓고 보면 엄청나게 성장한 건 맞아요. 그러니 성공이냐 실패냐, 이렇게만 따질 때
 
바깥에선 당연히 성공으로 보죠. 그런데 그들이 우리 내부의 상황이나 경제발전의 내용,

예컨대 독재나 정경유착 부정부패 경제집중 등 개발독재의 폐해를 따지진 않는다는 겁니다.
 
내용을 따지면 실패죠.”



시장경제 철학 없어


―아시아 경제성장의 성공 모델로 ‘네 마리 용’이라는 표현이 있지요. 이 나라들은 경제발전
 
배경이나 시기, 정치적 여건이 비슷하지 않았습니까. 그중 우리나라가 가장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다 지금은 가장 처졌다는 평을 듣는 것 같습니다. ‘네 마리 용’의 유사성이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겉으로 보기엔 네 마리 용이지만 실은 세 마리 용과 한 마리 공룡입니다. 우리는 내부적으로
 
문제가 너무 많았어요. 몸집은 오히려 다른 세 마리보다 컸을 겁니다. 그런데 내면적인 모순
 
때문에 먼저 주저앉아버렸어요. 또 몸집이 크니까 그만큼 일어나기도 힘들고. 그 내면적인
 
병이 바로 박정희 개발독재의 폐해인 것입니다.”


―독재라는 공통점도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홍콩만 빼고요.


“독재라는 형식은 비슷해도 내용과 결과가 크게 다르죠. 대만은 중소기업 발전을 기반으로 한
 
경제구조가 탄탄했어요. 결정적 차이는 우리나라처럼 정치지도자가 재벌로부터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받는, 재벌과 정권의 불법공생체제가 없었다는 것이죠. 좁은 국토에

자원도 없는 싱가포르는 일찍이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개방 정책을 추진했어요. 지금

싱가포르는 세계 속의 싱가포르입니다. 반면 폐쇄성이 강했던 우리 경제는 결국 억지로

개방하게 됐는데 경쟁력이 약해 맥없이 무너져버렸어요.”




암세포 도려냈어야



박 전대통령이 사망한 직후인 1980년 한국 경제의 각종 지표는 급격한 하강곡선을 그렸다.

20년 가까이 늘기만 하던 1인당 GNP가 처음으로 줄었고 실업률은 3.8%(1979년)에서

17.9%로 뛰어올랐다. 1979년 경제성장률은 6.8%였으나 1년 뒤엔 마이너스 3.9%를 기록했다.
 
물가도 50% 가량 올랐다. 직접적인 원인은 석유파동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비판론자들은

이를 개발독재의 후유증에 따른 구조적 위기로 본다.


―1980년의 경제지표는 각 부문에서 곤두박질쳤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80년대 초반 공장 가동률이 50%대로 떨어졌어요. 박정희 경제의 한계가 폭발한 것이죠.

그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습니까. 당시 5공 정권의 김재익 경제수석이 경제안정 정책을
 
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요. 그것이 다시 힘을 축적하는 계기가 됐는데, 80년대

후반 노태우 정부 때 비록 엔화 가치의 절상 덕을 톡톡히 본 것이긴 하지만, 무역수지에서
 
엄청난 흑자를 기록하는 힘이 됐죠.”


이교수는 경제 정책에 관한 한 김영삼 전대통령보다 전두환 전대통령을 높게 평가했다.


"전두환 전대통령의 유일한 장점이라면 자기가 모르면 전문가한테 다 맡긴다는 것이죠.

경제분야는 김재익 수석에게 일임했는데 당시 물가를 3%로 잡았어요. 김영삼 전대통령도
 
경제를 모르니 맡기긴 했는데 사람을 잘못 썼지요. 정부 주변에서 관치금융 논리나 제공하고
 
영화를 누려온 사람한테 단지 부산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맡겼거든요. 김영삼 정부 초기
 
‘신경제 5개년계획’이라는 걸 추진했는데, 5년 동안 한 일이라곤 한국은행에서 돈 푼 것과

외채 끌어온 것밖에 없어요. 처음 ‘신경제 100일계획’을 추진할 때만 6조8000억 원을

풀었어요. 외채는 400억 달러에서 1500억 달러로 늘었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가장 극대화한 사람이 김영삼 전대통령입니다. 구시대 패러다임을 고스란히

답습했습니다. 구조조정은 안 하고.”


―IMF의 뿌리가 박정희 개발독재라고 말씀하셨는데, 일부 경제학자들은 김영삼 정권도

억울한 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말하자면 덤터기를 썼다는 것이죠.


“IMF 위기를 초래한 데 대해선 책임을 져야죠, 문민정부가.”


―뿌리는 박정희 개발독재에 있지만….


“뿌리는 그렇지만 그 뿌리를 잘랐어야죠, 명색이 문민정부인데. 새로 시작했어야죠.

그런데 오히려 문제를 확대시켰습니다. 암세포를 더 키운 거죠. 돈 풀어가면서,

외채 끌어들이면서.”


화제는 다시 박정희 개발독재의 문제점으로 돌아갔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중화학공업의 과잉·중복투자가 지닌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

그 두 가지는 박정희식 경제발전의 핵심요소 아니었습니까?


“수출 드라이브 정책 자체는 좋은 거죠. 문제는 실적 위주의 드라이브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양만 강조하고 질적인 측면은 외면했어요. 기술개발보다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수출상품들, 예를 들어 옷이나 가발 등을 수출하는 데 주력한 겁니다.

중화학공업 투자의 경우, 아무리 좋은 투자라도 그 나라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마치 아무리 좋은 보약이라도 그 사람의 소화능력에 맞아야지, 좋다고 무조건 먹으면
 
설사 나는 이치와 같은 거죠. 중화학공업에 과감히 투자한 건 좋은데 과잉·중복투자를 하는

바람에 우리 힘에 부치게 됐습니다. 그래서 후유증이 컸죠. 70년대 중반부터 엄청나게

투자했는데, 1·2차 석유파동의 충격이 가해지자 가뜩이나 부담이 큰 상태에서 견디지

못하게 된 겁니다. 80년대 초반의 산업공황은 그래서 생긴 겁니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공통점



―재벌정책은 어떤가요. 일부 경제학자는 박 전대통령이 경제발전을 위해 재벌을 적절히
 
이용했다고 평가하더군요. 고속성장과 대형사업을 벌이는 데 재벌의 힘이 필요했다는 것이죠.


“재벌은 우리 경제를 발전시킨 반면 주름지게 한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정권이

재벌과 결탁했다는 것이죠. 재벌 불가피론엔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중소기업이 잘 발달한
 
대만의 경제발전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우리나라의 경우 잘못된 재벌 정책의 폐해가 너무
 
큽니다. 재벌에 돈이 집중되고 각종 특혜가 몰리는 바람에 너무나 많은 중소기업이

죽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산업이 균형 있게 발전하지 못했죠.”


이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박 전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과 신념을 다시 한번 높게

평가했다. 반면 그것이 경제논리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치논리에 오염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지원하는 데 대해선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끝으로 박 전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정책 면에서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을 갖고

있는지 물어봤다.


“박 전대통령은 민족주의 의식이 강했습니다. 우리가 한번 일어나서 해보자, 하면 된다,

이런 정신을 갖고 있었지요. 반면 김대중 정권은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커요.

그런 점에서 대비가 되죠. 공통점이라면 역시 정치논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끝)




“화해하려면 DJ 혼자 하라”
박정희 기념관을 반대하는 사람들 (신동아, 2000.12.01 통권 495 호 (p112 ~ 124))
조성식<동아일보 신동아 기자>mairso2@donga.com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불길이 뜨겁다. 지난 9월 시민단체들을 비롯한 학계 언론계 노동계
 
문화계 등 각계 247개 단체의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 결성으로 기세를 떨친 이 운동은
 
최근 서울 문래동의 문래공원에서 벌어진 박정희 전대통령(이하 박정희) 흉상 철거 사건으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국민연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기념관 반대운동을 범국민 차원으로

확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11월8일 오후 문래공원은 적막감과 평화로움에 휩싸여 있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칼바람이 공원 여기저기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는 낙엽들을 들들 볶고 있었다. 놀이터에선 몇몇 아이들이 한가롭게 미끄럼을 즐기고

있었다. 기자는 오랜 세월 인간들의 삶을 지켜봐왔을 성싶은 아름드리 고목들의 연륜에
 
위압감을 느끼며 문제의 박정희 기념탑이 자리잡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래공원의 박정희


문래공원은 약 7000평.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 따르면 하루 평균 700∼800명의 시민들이

찾는다. 자연학습장과 놀이터 동물원 등이 주요 시설물이다. 공원 정문 쪽에서 박정희 기념탑
 
쪽으로 가다보면 금계와 인도공작, 일본원숭이 등이 놀고 있는 동물원이 눈에 띈다. 그 앞에서
 
직원 한 사람이 부지런히 낙엽을 쓸어모으고 있었다. 무심코 지나치려던 기자는 그의
 
왼손 손가락 두 개에 감긴 붕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언론에 보도된 윤아무개씨(52),
 
바로 그였다.


보도에 따르면 윤씨는 3일 전인 11월5일 낮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5개 기관·단체 회원

30여명이 이 공원에 세워져 있던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때 이를 저지하다가 전치2주의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기자가 “얼마나 다쳤냐”며 아는 체를 하자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조금 다쳤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더 말을 붙일 틈을 주지 않고 잰걸음으로 동물원 뒤쪽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따로 공원관리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손가락이 부러진 건 아니고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간 정도”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김용삼씨(50)에게 적용된 폭행 혐의는 바로 이 손가락 상처와 관련된 것이다.


동물원을 지나 20발짝쯤 걸으면 박정희 기념탑과 마주친다. 공원의 거의 동쪽 끝이다. 몸통인
 
흉상이 떼어진 기념탑은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높이는 2m쯤 될까. 윗부분에 흉상과의

연결고리인 듯싶은 철근 2개가 삐죽 솟아 있다. 탑 앞면엔 ‘5·16 혁명발상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이 이곳에 세워진 배경은 이렇다. 5·16 당시 이곳엔 서울을 관할하는 육군 제6관구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1958년 별 두 개를 단 박정희는 이듬해 6개월 동안 6관구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런 인연으로 6관구사령부는 5·16 당시 쿠데타군의 지휘부 구실을 했다. 기념탑이 세워진 것은
 
1966년. 6관구사령부의 요청으로 홍익대 조소과 최기원 교수(65)가 제작했다. 이번 흉상 철거

사건에 홍익대민주동문회가 관련된 데는 이런 사정이 있는 것이다.


기념탑 뒷면엔 문인 박종화(1981년 사망)가 쓴 것으로 알려진 글이 새겨져 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 불의 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하라는 일편단심 침착 용단 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1966.7.7‘

 

 

DJ의 선거공약



한국 현대사의 영원한 숙제인 박정희. 그는 과연 한국민에게 어떤 존재인가.

1961년 5월16일 육군 소장 박정희(당시 44세)는 일단의 군대를 끌고 한강을 넘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로부터 16년 동안 한국사회는 ‘영원한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포박됐다.
 
3선개헌, 유신헌법 제정 등의 부당한 방법으로 통치기간을 연장한 그는 1979년 10월26일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서야 절대권력의 사슬에서 풀려났다.

절대권력의 혼란기를 틈타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헌법 전문에서 ‘5·16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삭제함으로써 박정희와 다름을 애써 강조했다. 이후 상당수 한국인들은 엄청난 가치관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구국의 결단’이라던 5·16은 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혁명이 아닌
 
불법 쿠데타로 굳어졌고, ‘민족중흥의 지도자’는 독재자로 전락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입에서 박정희 기념관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1997년 대선 유세 때였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경북 구미를 방문, 박정희의 생가를 둘러본 후 그 지역 유권자들에게 박정희
 
기념사업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현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 추진은 이처럼

김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난해 5월13일 대구를 방문한 김대통령은 이의근 경북지사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적극 지원할 의지를 밝힘으로써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은 곧이어 5월19일 김대통령이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결성을 지시한 직후 싹트기
 
시작했다. 5월20일 한국역사연구회·역사학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 등은 성명을 내고

“민주주의 인권 분배정의 등의 가치를 부정한 박정희식 근대화를 기념하는 것은 결국

이 사회의 민주주의적 가치와 역사의식에 왜곡과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같은 날 대구참여연대와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구지부 등 대구 지역 시민단체들도
 
반대성명을 냈다. 또 4·19혁명 관련 4개 단체는 “김대통령은 독재자와 화해하기 앞서

민주화투쟁을 하다 의문에 싸여 죽었거나 감옥 갔던 사람들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부터
 
먼저 해야 한다”며 지원계획 철회를 요구했다.

그해 7월26일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신현확

전국무총리가 회장을, 김대통령이 명예회장을 맡았다. 아울러 국민회의 권노갑 고문

(현 민주당 최고위원)과 자민련 김용환 의원(현 한국신당 대표) 및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

(현 한나라당 부총재)이 부회장으로 추대됐다. 정부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비(100억원)와

기념사업회 운영비(5억원) 등 모두 105억원을 2000년 예산에 책정했다.

10·26 20주기를 하루 앞둔 지난해 10월25일 서울에선 두 가지 상반된 모임이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선 옛 공화당 출신들이 주축이 된 박정희 어록집

(‘우리도 할 수 있다’)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반면 정동의 세실 레스토랑에선

전국역사학자모임의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등 역사학자 1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한편 국고지원 중단을 촉구했다. 


역사학자들의 분노



역사학자들은 성명을 통해 “현재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 모순의 대부분이 박정희 시대에
 
이뤄졌으며, 경제성장을 내세우며 그가 자행했던 인권탄압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전국역사학자모임은 전국의 대학교수, 강사 및 연구원, 대학원생,

중·고교 교사 등 역사 연구자 110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11월25일엔 71개 단체가
 
연합한 ‘박정희 기념관 국고지원을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출범했다.

그러나 정부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국회는 정부가 제출한 박정희 기념관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해가 바뀐 후 한동안 잠잠하던 박정희 기념관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은
 
7월20일 이후. 전날 정부가 2002년 월드컵이 열리는 서울 상암동에 5000∼7000평의
 
박정희 기념관을 짓기로 확정한 것이 촉발제가 됐다.

동아일보와 한겨레신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가운데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 성명(7.21),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대구·경북지역 40개 시민단체의 국회 및 청와대 앞 항의시위(7.31),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학단협(학술단체협의회) 소속 교수들의 기자회견 및 서명운동(8.3)

등이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은 마침내 9월28일 ‘박정희 기념관 반대 국민연대’(이하 국민연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국민연대엔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연합 녹색연합 등 이른바

빅4 시민단체를 비롯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전교조, 민족문학작가회의, 4월혁명회, 민족문제연구소, 민주노총, 민언련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전국역사학자모임 등 모두 247개의 사회·시민단체가 참여했다.

국민연대는 정관 제정과 함께 고문단 공동대표단 상임집행위원장단 등을 구성, 모양새를
 
갖췄다. 국민연대는 이날 결성선언문을 통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추진은 민족사를 유린하는
 
범죄행위”라고 규정하는 한편 김대중 대통령에게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명예회장직을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10월17일엔 전국 대학교수 649명이 10월유신 선포 28돌을 맞아 박정희 기념관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국민연대는 박정희 사망 21주기인 10월26일 오전 덕수궁 앞에서 회원

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열었다.

11월5일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4개 단체 회원들이 서울 문래동에 있는 박정희
 
기념탑에서 흉상을 끌어내린 것은 박정희 기념관 반대운동의 첫 ‘실력행사’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간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가 1995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는데, 그간 주로 친일파들의 행적을 고발하는 책을 펴내는 한편
 
그와 관련된 각종 시위와 집회를 주도해왔다.

11월9일 서울 청량리동에 있는 민족문제연구소는 몹시 분주해 보였다.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려대는 가운데 직원들은 관련단체들의 지지성명을 챙기는 한편 이번 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싶었다. 기자와 마주 앉은 서우영 기획실장(36)은 박정희 기념관
 
국고 지원에 대해 “김대중 정부의 천박한 역사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 “영남권 지지표를
 
얻으려는 단세포적 정략”이라고 비난했다.

이날 밤 10시께 방학진 조직부장(29)과 홍익대민주동문회 사무국장 이중기씨(35)가 경찰에서
 
풀려났다. 철거현장에서 성명서를 낭독했던 곽태영 4월혁명회 대표(64·국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하루 전인 8일 귀가조치됐다. 이제 경찰서에 남은 사람은 김용삼 운영위원장뿐이다.

다음날 오전 방학진씨와 통화했다. 방씨는 “문래동의 흉상은 박정희 전대통령에 대한 기념비가
 
아닌, 쿠데타 찬양 기념비이므로 그것을 철거하는 것에 국민이 공감하리라 생각했다. 정통성을
 
갖춘 정부라면 당연히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노숙자와 실직자들이 박정희 흉상
 
앞에 술을 올리는 것을 본 적 있다”며 “이런 퇴행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정부가 막지는

못할지언정 오히려 기념관 건립을 추진함으로써 국민의 가치관을 혼란케 하고 있다”고

정부를 비난했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 곧 박정희의
 
공과에 대한 시시비비다. 반대론자들은 대체로 박정희는 기념관을 세워 기릴 만한 업적이

없으며, 오히려 역사적 과오가 크다고 주장한다. 논쟁의 또다른 초점은 국고 지원의 타당성

여부. 기념관 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국민의 세금으로, 곧 정부 지원으로 기념관을 세우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박정희 찬양론자 또는 추종자들이 사비를 들여 박정희의 고향에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반대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박정희의 과오 중 가장 보편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민주주의 억압과 인권 탄압이다. 박정희가
 
집권한 기간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 2년을 포함하면 총 18년에 이른다. 1963년 군복을
 
벗고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박정희는 1979년 사망 당시 9대 대통령이었다.

장기집권의 포석이 된 것은 1969년의 3선개헌이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던 이 불법개헌을 성사시킨 1등 공신은 공작정치의 산실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였다.

그러나 이는 독재의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1972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제정, 영구집권의
 
길을 닦았다. 이른바 총통시대의 출현이었다.

박정희 절대권력을 뒷받침한 것은 공포정치와 공작정치였다. 국가테러리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부르짖는 수많은 정치인 종교인 법조인 언론인 교수 학생

문인 노동자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거나 의문사했다.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과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야당 의원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하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1971년 7대 대통령선거에서 95만 표 차이로 선전해 박정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김대중

신민당 의원은 일본 동경에서 괴한들에 납치 당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 중앙정보부의

공작이었다. 1979년엔 야당 총재인 김영삼 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미국 언론과 인터뷰하며 박정희 체제를 비판한 것을 문제삼아서였다. 이 일은 부산·마산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역사적
 
가정이다. 김재규의 법정진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죽기 8일 전인 1979년 10월18일 “부마사태가
 
전국적인 민중봉기로 확산될 조짐이 있다”는 김재규의 보고를 받고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4·19와 같은 데모가 일어난다면 내가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김재규는 이때 박정희의 심복인 차지철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서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이나 200만 명 정도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 문제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고 진술했다. 이를 근거로 학계 일부에선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 손에 죽지
 
않았다면 부산이나 마산에서 1980년 5월의 광주학살처럼 대규모 학살극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는 주장마저 제기하고 있다.





계엄령, 위수령, 긴급조치


18년 동안 집권하면서 박정희는 계엄령을 세 차례(31개월) 발동했다. 군대가 주요 시설물을
 
점거해 경비하는 위수령과 각종 비상조치를 포함하면 총 105개월 동안 ‘비정상적’ 통치를

했다(한국정치연구회, ‘박정희를 넘어서’, 도서출판 푸른숲, 1998). 이는 그의 통치기간인
 
220개월의 약 절반에 달하는 기간이다. 1974년 1호로 시작해 1979년 9호까지 이어진
 
긴급조치는 체제비판을 원천봉쇄하는 초헌법적인 명령이었다.

긴급조치 위반자는 영장도 없이 체포돼 비상군법회의에서 처벌받았다. 한성대 사학과

윤성로 교수의 ‘박정희 정권의 인권 탄압과 그 부정적 유산’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1970∼

1979년까지 10년 동안 국가보안법 반공법 노동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죄로 구속된

양심수는 총 2704명(그중 1184명은 구류)에 이른다.

한국의 파시스트 논리를 비판한 책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저자로 유명한 진중권씨(36)는
 
박정희를 파시스트로 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진씨는 지난 11월7일 민언련 강당에서

열린 ‘박정희와 조선일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유신 이후 한국 정치는 파시스트 체제였으며
 
이는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휘두른 독일의 나치즘, 반미·반공주의를 내세운 일본의 신우익과
 
맥락이 닿아 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기념관 반대론자들은 박정희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되는 경제발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한마디로 개발독재의 폐해다. 개발독재가 낳은 경제성장보다는 그 폐해가

한국 경제에 끼친 악영향에 더 주목하는 것이다. 정경유착, 관치금융, 경제력의 지역격차,

소득분배 불균형 등을 대표적 후유증으로 본다. 또한 가시적인 성과와 실적 위주의

성장제일주의에 따른 구조적 모순이 한국 경제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다카끼 마사오


박정희의 과오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의 친일행적에 대한 시비다. 지난

11월9일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조문기씨(76)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22인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중단을 촉구하며 발표한 성명엔 이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젊은 시절 일제에 맞서 싸울 때 박정희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는데
 
앞장선 일본제국주의의 선봉대였다…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결과 일본군 장교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민족의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박정희가 교직을 떠난 것은 1939년.
 
일본인 아리마 교장을 폭행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후의 행적. 이듬해 23세의 그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의
 
길을 걷게 된다. 1941년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벌어졌다. 그 해
 
그는 창씨개명을 했다. 다카끼 마사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한 다카끼 마사오는 우수한 성적 덕분에 일본 본토의

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1944년 일본 육사를 3등으로 졸업한 그의 첫 부임지는
 
관동군 635부대. 이어 만주군 보병 제8단장 부관으로 임명됐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만군장교 박정희는 소속을 잃었다. 8월29일 중국 베이징으로 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잠시
 
몸담았다가 이듬해 5월 부산을 통해 귀국했다.


‘신동아’는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각계 인사 15명을 집중 인터뷰했다. 현 정부 초대

감사원장을 지낸 한승헌 변호사(64)는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근로자 권익을 짓밟는 등 강압적
 
요인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며 성장의 질을 문제삼았다.


“결과적으로 경제가 성장한 데 대해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는 데 본질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폭군이자 반역사적 인물이다.

역사를 보면 경제성장의 가시적 성과를 내세워 독재를 정당화한 예가 많다.”


소설가 유시춘씨(50)는 박정희 흉상 철거행위에 대해 “올바른 역사의식과 정치적 신념을 가진
 
양심범의 정당한 행위”라고 평가했다. 유씨는 “박정희는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짓밟고 인권탄압을
 
일삼은 독재자다. 도대체 박정희의 어떤 점을 기리겠다는 것인가”라며 분노했다.


“우리 민족을 가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게 하고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한 공은 인정한다. 하지만
 
경제개발의 공을 박정희의 카리스마로 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온 국민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다.”



인권탄압 일삼은 독재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위원장 김재열 신부(61)는 “광복 후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 군대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 자체가 민족의 불행”이라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비판했다. 김신부는 또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경제성장 대 인권’의 이분법을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이라고 말했다.


“경제는 속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언제든 발전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다운 삶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베스트셀러인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씨(36). 박씨는 지난 7월26일 동아일보에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반대한다는 뜻을 담은 의견광고를 내 화제가 됐었다. 그는 “제대로 된 국가에서라면
 
쿠데타를 기념하는 흉상이 세워질 수 없다”며 박정희 흉상 철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는 또

“똑같이 독재를 했지만 이승만은 독립운동이라도 했다”며 박정희의 친일행적을 강하게 비판했다.


아울러 “박정희는 좌익 전력으로 체포됐을 때 자신이 살기 위해 동지들을 밀고하는 등 인간성에도
 
문제가 많은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4·19 이후 부패를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5·16이 앗아갔다.
 
2공화국이 무능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는데, 출범한 지 1년도 안 된 정부를 어떻게 그렇게 평가할
 
수 있나. 2공화국도 경제개발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며 5·16을 비판했다.


“학교 다닐 때 그 사람(박정희)이 사라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박정희
 
하나밖에 없는 줄 알았다. 세뇌라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것이다. 그 여파가 최소한 30년은 간다고
 
봐야 한다.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박정희 추모 열기는 그 시대가 제대로 종결되지 못한 데 따른
 
후유증이다.”


고려대 사학과 박용운 교수(58)는 “쿠데타로 역사를 후퇴시킨 사람에 대해 아무런 역사적 평가 없이
 
기념관을 세운다는 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돈명 변호사(78)는 김지하 국보법위반사건, 김재규 내란음모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등 각종
 
시국사건의 변호인으로 유명하다. 이변호사는 “박정희 흉상을 계속 놔둔다는 것은 민족의 정서에
 
유해한 일”이라며 흉상 철거를 “정당한 역사적 행위”로 평가했다. 그는 또 “박정희는 유신체제를
 
선포하며 죽을 때까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그 탓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을 강요당했나”라며
 
유신독재를 비판했다. 또한 박정희의 경제발전 공적에 대해서도 이론을 폈다.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박정희 방식이 아닌, 더 합리적인 정책을 추진했다면 폐단 없이 경제개발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10·26재평가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한 이변호사는 특별히 김재규의 ‘진실’에 대해 말했다.


“나는 변호사로서 ‘유신체제의 종결을 위해 박정희를 죽였다’는 김재규의 증언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증거도 있다. 김재규 재판은 재판도

아니었다. 일부에서 CIA 배후설이 제기돼 김재규에게 물어보니 펄펄 뛰더라.”




”기념관은 박정희에게도 부담”


경실련 정책협의회의장인 건국대 경제학과 최정표 교수(47). 최교수는 “쿠데타 주역들이

생존해 있는 지금 박정희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며 개발독재론을 비판했다.


“개발독재가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뤘다면 좋았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고도성장을 이룩한 싱가포르도 우익독재를 겪었지만 오늘날 선진국가 대열에
 
올라섰다. 그 차이는 우리의 경우 정권유지를 위해 독재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최교수는 박정희를 무조건 비판하지는 않았다. 경제발전 공로를 어느 정도 인정하며

특히 지금 위기에 처한 한국 경제를 박정희 탓만으로 돌리는 데 대해선 반론을 폈다.


“박정희의 국가경영철학과 리더십은 인정해야 한다. 개발독재의 폐해가 한국 경제의 구조를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에 일리는 있지만 그후의 위정자들 책임도 크다. 전임자의 잘못을

고쳐나갔어야 했다. 재벌 문제만 해도 그렇다. 박정희는 재벌을 고도성장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정경유착의 폐단이 심화된 건 80년대 이후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소속 박기호 신부(51·시흥4동 성당)는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독재가
 
오래 지속되다 보면 신념화한 추종자들이 생긴다. 그들과 변혁을 두려워하는 세력이 박정희를

살려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신부는 또 “박정희식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정신세계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정신세계는 경제와 달리 하루아침에 복구되는 것이 아니다. 경제건설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박정희식 경제발전의 어두운 측면을 강조했다.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44)는 박정희를 ‘반국가사범’으로 규정하고 기념관 건립을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박정희의 정책 구조는 한국형 부패구조의 원형”이라며

“박정희 부활현상은 허약한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것은 미숙했던 우리 정치사의 시행착오다. 그는 나름대로 노력은 했지만
 
불행히도 기릴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경제를 조금 발전시켰다고, 국민을 있는 대로

짓밟아놓은 그를 기념하는 것은 애들 교육에도 좋지 않다. 그것은 국민에게 부담을 주는 일이다.
 
아마 박정희도 지하에서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홍교수는 또 “경제발전 방식이 잘못됐다”며 개발독재의 폐해를 지적했다.


“민주화나 인권을 논하기 전에 박정희의 경제논리 자체를 비판해야 한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발전은 철저하게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분배가 시작된 것은
 
1987년의 6월 항쟁 이후다. 새마을운동만 해도 그렇다. 북한의 천리마운동과 경쟁하기 위해

시작한 그 운동은 농민들에게 거대한 환상만 심어주고 결국엔 농촌을 폐허로 만들었다.

단기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11월3일 박정희 기념관 건립 논쟁을 다룬 MBC의 ‘100분 토론’에 출연했던 동국대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55·학단협 대표). 강교수는 경제발전의 공을 박정희에게 돌리는 것을 경계했다.


“당시 경제발전의 배경엔 미국이 주도한 냉전구도가 있다. 미국은 대만과 남한을 주변의

공산주의국가들에 맞서는 보루로 삼기 위해 경제발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5·16 직전
 
장면 정부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짜 놓았다. 그것이 박정희 경제발전계획에
 
토대가 됐다. 당시 세계는 자본주의경제가 팽창하던 때다. 한일협정도 미국의 압력으로 맺은
 
것이다. 박정희는 그때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을 뿐이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가 발전한 것은
 
아니다.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경제성장은 가능했다.” 


박정희 때문에 경제발전?


그는 또 박정희 리더십에 대해서도 혹독하게 비판했다.


"리더십은 국민이 자발적으로 따르도록 만드는 지도력이다. 박정희 정권을 유지한 것은

일관된 무력이었다. 무력에 바탕을 둔 철권통치와 폭압정치는 리더십과 거리가 멀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조희연 교수(44·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는 “1997년부터 일기 시작한

박정희 신드롬은 경제위기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며 “대중은 위기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영웅을 상상했고, 그것을 대선 과정에 일부 정치인들이 이용함으로써 증폭된 점이
 
있다”고 박정희 부활현상의 원인을 진단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핵심적 가치는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 경력과 독재는 정신적 뿌리가 같은 것으로 민족적 공분을 자아내는 것이다.

5·16은 반혁명이자 반역사적 쿠데타다. 특히 유신체제는 극단의 전체주의체제였다. 피해자가
 
엄존한 상태에서 충분한 국민적 합의 없이 독재자의 기념관을 짓는 것은 국론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 문제는 뜨거운 감자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그런지 드러내놓고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의원은 손에 꼽을 정도다. 먼저 한나라당 박종웅 의원(47).

박의원은 “YS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박정희 시대의 정경유착, 잘못된 재벌정책 등 개발독재의
 
폐해가 문민정부 때 폭발해 IMF 위기를 불렀다”며 문민정부의 경제실정을 박정희 탓으로

돌렸다. 그는 또 “당 지도부가 정체성을 못 살리고 있다”며 “박근혜 부총재도 진정 자신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무엇이 유리한지 잘 판단해야 할 것”이라며 박정희 기념관 문제에
 
관한 한나라당 지도부의 대응방식을 비판했다.


서울시 국감에서 박정희 기념관 건립의 부당성을 제기한 민주당 심재권 의원(54)은 “박정희
 
흉상 철거 당시 기자들도 있었다.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는데 구속한 것은 잘못된

처사”라며 경찰의 ‘과잉대응’을 비난했다. 심의원은 “박정희는 공보다 과가 훨씬 많은 사람”이라며
 
박정희 체제를 “세계사에 흔치 않은 참혹한 독재”로 규정했다. 또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민주사회 구현과정에 과도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질서 이완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 기념관의 국고 지원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한 목소리로 내놓는 대안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기념관 건립은 추종자나 지지세력에 맡기고 정부는 지원하지 말 것. 둘째, 굳이
 
정부가 지원하려면 역대 대통령 모두를 대상으로 한 자료전시관, 또는 기념도서관을 지을 것.
 
아울러 그 장소로는 각 전직 대통령들의 고향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또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 명분으로 내세운 ‘화해(지역화합, 민족화합)’에
 
대해서도 강도 높게 비판한다. 빈약한 역사의식이 빚은 정략적 발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화해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연세대 행정학과 최평길 교수(60)는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도서관이나 기록보관소를 짓는 것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꼭 필요한 일”이라면서도 “정부가 나서는 것은 옳지 않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제스처는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교수는 “민간이 주도해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도서관을 지을 경우 정부의 역할은 관리비를 보조하는 데 그쳐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DJ의 역사적 월권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 비서실 제2부속실장을 지낸 한나라당 정병국 의원(42)의 생각도 최교수와
 
비슷하다. 정의원은 “기념관이든 자료관이든 역대 대통령에 관한 자료는 귀중한 국가 자산”이라며
 
“전임 대통령의 추종자들이 건물을 지으면 정부는 그 내용물을 제공하고 관리비를 지원하면

된다”고 말했다. 정의원은 또 “DJ의 오만과 독선에서 비롯된 일”이라며 “DJ 개인 돈으로

(기념관을) 짓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고 꼬집었다.


유시춘씨는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를 존중하는 철학은 좋다. 하지만 박정희 기념관 건립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사람의 개인적 은원(恩怨)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며 “명분은 지역화합이지만
 
영남 유권자에 대한 아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김재열 신부는 “기념관 건립이 과연

지역화합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박영규씨는 “이 나라에 영호남만 있는 건 아니다.
 
영남에서도 (기념관 건립을)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김대통령이 내세우는 명분에서

전형적인 우중(愚衆)정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박씨는 또 “기념관을 세울 경우
 
박정희 옹호세력의 기세만 키워줄 뿐이다. 오히려 화합의 저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용운 교수는 “대통령이 명분으로 내세운 화합이 오히려 국론을 분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통령의 역사적 월권이자 분별력을 잃은 행위”라고 비판한 홍윤기 교수는 “김대통령이 화해를

내세우는 심정은 이해되지만, 정 화해하고 싶으면 추모회에 가서 개인 자격으로 꽃다발을 놓고

오면 될 일”이라고 ‘권고’했다. 박종웅 의원은 “대구·경북 지역에 짓는다면 반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기호 신부는 “명분도 잘못됐고 실효성도 없다”고 비판했다. 



희생자들에 대한 예의


강정구 교수는 “지역화합의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경상도 표를 의식한 정략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며 “권력 기반이 약한 DJ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고 비판했다. 조희연 교수는 “정치적 효과 없는 정략”으로 평가하면서 “진정

동서화합을 원한다면 기념관을 지을 것이 아니라 탈지역주의 정치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는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직전 펴낸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의 서장에
 
이렇게 밝혔다. “민주주의 신봉을 견지하는 한 여론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토론의 자유’
 
속에 ‘혁명의 구심력’을 찾아야 하는 혁명.” 그러나 박정희는 집권기간 내내 여론의 자유를
 
막았고 토론의 자유를 막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혁명은 실패했다.


그는 처음부터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민주정권을 불법으로 뒤엎은 5·16도

그에겐 “내적(內賊)의 소탕을 위하여 출동한 군의 작전상 이동에 불과”했다. 그의 독재 기질은
 
혁명 초기단계부터 엿보였다. ‘국가와 혁명과 나’ 제1장(‘4·19 혁명의 유산과 민주당 정권’)에서
 
그는 “민주적 정치권능보다 일관성 있는 강력한 지도원리가 요청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제3장 ‘혁명의 중간결산’에는 “다시 한번 그들의 반성을 일방 기대하였다” “본인은 이 이상 더
 
관용이나 이해를 그들에게 베풀 수는 없게 되었다” 따위의 표현이 등장한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 그는 이미 ‘전제군주’의 위치에서 정치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 교수(45)는 박정희 부활현상에 대해 일찍이 이렇게 진단했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박정희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는 단지 복고주의니 향수니 하는

문화현상만은 아니다. 그건 정치·경제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과 금력을 가진
 
기득권층, 그리고 엘리트층의 절대 다수는 박정희 시대에 영화를 누리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언로를 장악하고 있다… 박정희가 주도한 근대화를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해도 박정희는 욕을 먹어야 한다. 그건 결코 모순이 아니다. 그건 박정희 시대에 고통받은

인간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인물과 사상’ 2권, 1997.6)


국민연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조희연 교수는 국민연대의 향후 활동계획에 대해

“무엇보다도 100억원의 추가예산 편성을 막기 위해 기념관 반대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펼치겠다.
 
그래도 강행한다면 건물 착공을 저지하기 위한 고강도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과연

훗날 역사는 박정희에 대한 화해와 단죄 중 어느 쪽을 더 의미 있게 평가할까.

[옥중인터뷰|김용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11월13일 오후 영등포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는 김용삼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을
면회했다. 초췌해 보였지만 표정은 밝았고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건강은 어떤가?

“심장이 조금 좋지 않지만 견딜 만하다.”

―적용된 혐의 내용이 뭔가?

“특수공무방해죄와 폭행죄다. 재물손괴죄 정도로 생각했는데 뜻밖이다. 재판과정에 시비가
가려질 것이다.”

―언제 어떤 동기로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마음을 먹었나?

“박정희의 가장 큰 죄는 민족을 배반한 죄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사람이다.
 4·19혁명 후 ‘김구 선생 암살규명위원회’가 구성됐다. 암살에 관련됐던 사람들이 속속 자수하는
상황이었는데 5·16쿠데타가 진상규명 기회를 앗아가 버렸다. 5·16은 또 4·19혁명의 영향으로
막 움트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싹을 잘라버렸다. 흉상을 철거하기로 맘먹은 것은 그 자리가
바로 쿠데타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국민연대가 출범한 9월28일 민족문제연구소의 방학진 조직부장과 함께 지하철 1호선을 타고
가는 동안 그에게 흉상을 철거해야겠다는 내 뜻을 밝혔다. 한 달 뒤 저녁 회식 후 방학진에게
이 일에 협조할 수 있는 단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11월2일까지 4개 단체가 참여의사를 밝혀왔다.”

―구속을 각오했나?

“역사적 정의 차원에서 구속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실정법에 저촉될 것은 각오했다.”

―박정희 부활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나?

“친일파들이 박정희를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그의 범죄실상을 가리고 왜곡하고 있다. 민족 반역자를
 기리겠다고 국민의 돈을 쏟아 붓는다니 말이 되는가. 더욱이 세계가 주목하는 장소에 반역의
바벨탑을 세우려 하다니. 이는 역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김대통령을 좋아하던 사람이다. 역사의식이 올바른 분으로 믿었고, 통일지향적인
대북정책에 마음이 든든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통일정책은 국민이 적극 밀어줘야 한다.
그런데 친일을 한 박정희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구 선생보다 더 화려하게 기념하려는 것을
 보고 실망했다. 박정희 기념관은 김대통령의 역사적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역사는 대통령
개인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끝)




[2010 연중기획]경부고속도로 반대 ‘일리 있는 논리’

(2010 02/09위클리경향 862호)

ㆍ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
ㆍ당시 야당 ‘남북종단’보다 도로 열악한 ‘동서횡단’ 우선 건설 주장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때 야당 정치권에서 목숨을 걸고 반대했습니다. 국가를 팔아먹는다, 업자를 위해 그 일을 하느냐, 누구를 위해서 하느냐, 나라를 망가뜨리려 하느냐, 그 예산을 차라리 복지에 써라 등 내용을 보면 요즘과 비슷한 반대의 목소리인 것 같습니다.”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코로나 승용차와 그 옆을 걷는 할아버지. 1970년 7월 7일.

“도로 건설 찬성하나 우선순위 의문”
지난해 11월 28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날 이 대통령은 청계천과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반대에도 무릅쓰고 관철시켜 결과적으로 좋아진 예’로 거론했다. 당시 언론, 학계, 야당의 반대에 맞서 관철시킨 박정희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발전이 있었겠느냐는 인식이다. 이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꺼낸 것은 현재 추진하고 있는 ‘4대강 사업’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4대강 사업 이전에 ‘한반도대운하’를 추진할 때도 이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의 예를 자주 거론했다.

실제 야당은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당시 신문자료를 뒤져 경부고속도로와 관련한 쟁점을 검토해 보았다. 동아일보는 1968년 1월 11일자에 ‘밝은 정치를 위해 유진오 신민당수에게 듣는다’는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유 당수는 인터뷰에서 히틀러의 아우토반을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근대화의 기간인 도로 건설이라는 데서 그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현 경제 실정에 비춰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남북 간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의 발언은 당시 신민당 당론을 반영하고 있다. 즉 ‘취지를 반대하지는 않으며, 남북 간보다는 동서 간을 뚫는 길이 급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근거는 무엇일까.

1968년 2월 22일 오후 2시 국회에서는 63회 건설위원회 3차 회의가 열렸다. 김형일 신민당 의원의 바통을 이어받은 김대중(DJ) 신민당 의원이 질의한다. “…시급한 것은 동서를 뚫는 그러한 교통망이 필요하다, 이것은 누구나 알다시피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이 대륙에 진출하기 위해 남북종단에 철도와 도로를 치중하였기 때문에 그 유산으로서 이와 같은 교통 체제가 되어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재원 또 한정된 능력을 가지고 지금 가위 우리나라 현실로 보아서 그래도 가장 발달된 그 노선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 급한 것은 뒤로 미루고 안 급한 것은 먼저 한다, 이런 일을 정부가 하고 있다는 건데….” 김 의원의 주장 요지는 이미 일제 시대 때 대륙 병탄 목적으로 남북종단 교통체계는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군사용 도로를 제외하고는 철도·도로 시설이 거의 없는 강원도를 연결하는 동·서 고속도로 건설사업이 더 필요하며, 세계은행(IBRD)의 결론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김 의원의 질의에 대한 주원 당시 건설부 장관의 답변이다. “전국에서 교통량 수송량 전체를 볼 때 가장 폭주하고 있는 것을 완화하는 것이 긴급한 문제이며, 그래서 이것(경부간 고속도로)이 된 것이다. 지역을 개발하거나 도로의 선을 결정한다든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권력이나 정치적 압력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조작된 기억’
IBRD가 내놓은 한국 고속도로 건설 관련 의견 보고서. 김대중 등 당시 야당 측은 이 자료를 근거로 경부고속도로보다 동서횡단 건설 우선론을 주장했다.
“정치에 이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박 전 대통령도 강조한 말이다. 경향신문 1969년 3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그는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한 업체 대표자들과의 오찬 자리에서 조기 완공을 당부하면서 “일부에서 말하듯 정치에서 이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과 7개월 뒤 언론은 박정희의 3선 개헌 국민투표를 앞두고 여당 쪽에서 만들어진 정치 신어(新語)로 ‘하이웨이 전술’이라는 것을 꼽았다. “경부간 고속도로 건설을 내세워 정부 실적 PR를 최대한 활용키로 한 것. 지난번 오산~천안간 고속도로 개통식 때 많은 시민의 운집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이후 부상된 것.”(경향신문 1969년 10월 7일) 그리고 1971년 대선. 신민당 후보 김대중은 “우선은 지방 국도 포장, 2단계로 고속도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공화당 후보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뿐만 아니라 여러 고속도로 동시 착공”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논쟁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란 책에 ‘고속도로와 지방불균형발전’이라는 장을 저술한 한상진 울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김대중이나 야당의 논리는 고속도로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가 아니었고, 실제 경부고속도로 건설 이후 소외된 전라도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급속한 이농현상 등이 발생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했다. DJ의 주장대로 서울~강원 간 고속도로가 우선 만들어졌다면? 교양역사서 <타르타르스테이크와 동동구리무>를 펴낸 정창수 박사는 “강릉은 대도시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부산은 부산대로 지리상 발전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해상교통이 발달하고 해안지역의 전반적 개발이 있었을 수도 있다”면서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야당의 반대가)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주장은 만들어진 기억”이라고 말했다. 실제는 경부고속도로 개발 반대론이라기보다 차선론이었고, 나름대로의 대안적 논리가 있었음에도 박 전 대통령이 선거 유세 등에서 ‘반대를 위한 반대’라고 딱지를 붙인 이후 진실로 둔갑한 ‘조작된 기억’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야당사’와 관련해 여러 권의 책을 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전 대한매일 주필)은 “박정희는 당시 야당을 두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다고 몰아붙여 왔지만 야당이 그런 정도라도 비판했기 때문에 국회에서 통과되기도 전에 줄부터 긋고 그런 것은 막을 수 있었다”면서 “이런 측면에서 4대강 관련 예산안이 국회에 통과되기도 전에 착공부터 하는 현 정부는 박 정권으로부터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경부고속도로 반대’ 야당 시위 사진은 조작?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이후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김영삼·김대중 등 야당 인사들이 건설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며 인터넷에 유포된 사진. 사진은 일부 내용 변조 등으로 미뤄볼 때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의 인식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야당은 ‘목숨을 건 반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했을까. ‘국민과의 대화’ 전후로 인터넷에는 한 장의 사진이 돌았다. 굴삭기 앞에 두 남자가 누워 있고,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손팻말을 들고 있다. 밑에는 다음과 같은 사진 설명이 붙어 있다. 

“공사현장에 몸소 드러누워 진보, 개혁, 민주화운동을 몸으로 실천하신 ‘움직이는 양심’ 슨상님.” 굴삭기 앞에 누워 있는 이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던 1960년대 후반부터 완공되던 1970년,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인 신민당의 국회의원이었다. 그러나 출처 불명의 이 사진 속 인물은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야당 인사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뒤에 도열한 사람들이 들고 있는 손팻말의 ‘끝까지 결사반대’라는 글씨는 원래 글씨로 보이지만 이것이 경부고속도로와 관련된 사진이라고 주장이 가능한 ‘고속도로 반대’라는 글씨는 누군가가 사진에 가필(加筆)한 것이다. 사진을 살펴본 장신기 김대중도서관 연구원은 “실제 누워 있는 사람의 옷차림이나 체형 등은 김대중 당시 신민당 의원과는 다르다”면서 “일부에서는 앞에 누워 있는 사람이 김 전 대통령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지나가던 차, 태권도 학원차였다.

효孝와 예禮를 커다랗게 적어두고 태권도를 익히면 저런 것들도 덩달아 키워진다고 말하려는 듯.

그러다 눈에 들어온 건, '이차에는 미래에(의) 영부인과 대통령이 타고 있습니다'란 문구.

여자는 영부인이고 남자는 대통령인 건가, 조금 뭔가 배려랄까 생각이 아쉽더라는.


대통령은 본인의 힘으로 얻는 직업이랄까, 지위가 되겠지만..영부인은 역시 결혼빨인데.

그리고 굳이 하나 더하자면, 대통령이, 영부인이 훌륭한 사람인가? 이미 그들이 그렇지 않단건

숱한 사례들이 보여주고 있는데다가, 요새같은 때라면 오히려 저런 문구는 자칫 폭력성을 더욱

부추기는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가봐야 총알받이밖에 더 되나요?" 연평도 사건이 딱 터졌을 때, 사무실에서 나이 좀 있으신

분들이 내게 그랬다. 너도 총 들고 나가서 싸워야 하는 거 아냐?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분위기는 조금 싸해졌고, 요새 젊은이들 애국심이 어쩌고 후렴구가 들려오길래 조금은 수습해야

되겠다 싶어서 '요새 전쟁을 어디 총으로 하나요' 운운, 얼버무리고 치웠지만, 그리고 들려온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사망 소식에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조차, 국가가 지켜야

할 국민의 생명을 저토록 무책임하게 내버려두다니. 전쟁나면 도망가야겠구나.


서해5도에 군사령부를 창설한다느니, 세계최고 수준의 무기를 갖다 놓는다느니, 국방비 예산이

6% 가까이 증액된다느니, 심지어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중국 코앞까지 들이쳐 군사훈련을 한다느니

연일 들려오는 소식은 점점 무서운 소식 뿐이다. 전쟁 무기의 쓸모라곤 오로지 전쟁을 벌이는데

있으니 거기 들어가는 돈은 아무 생산유발효과도 없을 뿐더러 언제고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 위기만 고조시키는 거다. 심지어 중국땅에까지 이미 수송된 북한의 수해

구호물자를 다시 한국으로 회수해 오겠다는 통일부의 발언까지.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있고 나서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국가가 존립할 수 있고 외적을 격퇴할 수 있는 능력이 유지되고 난

이후에야 평화공존이든 뭐든 이야기할 수 있는 거니까. 그런 점에서 조갑제가 이명박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당신이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이 있는가'라고 까지 이야기한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진보/보수를 떠나서 현 정부는 대북 정책과 국방 정책에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아마추어스럽단 거다.


문제는, 지금 마구 쏟아내듯 국방비를 증액하고 접경지역에 군사적 대결구도를 강화하는 걸로

과연 요새 드러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군대의 허약함과 무질서함이 해결될까
하는 점이다.

우리의 군사력이나 국방비 예산, 무기 수입 비중 따위들의 수치가 보여주듯 우리 나라는 강국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절대적 견지에서는 군사 대국에 가깝다. 이미 돈과 무기와, 한달에 몇 만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싼 '총알받이'까지 충분히 보유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가 부족한 건, 내게 총이 쥐어졌을 때 '이쪽'의 대가리들이 아니라 '저쪽 인민'들을

살해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싶다. 근본적으로 '전쟁'에 나가는 쫄따구들은 상대 쫄다구의 몸에

총구멍을 내고 목숨을 빼앗으러 가는 것, 그런 살해행위의 비도덕성과 야만성과 죄악을 국가의 이름으로

사해 줄 수 있는지, 기꺼이 살해에 동참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고민해야겠지만, 전쟁이 일단 벌어지고

내 손에 총이 쥐어졌을 때만 생각해보면 그렇다. 내게 이쪽 대가리나 저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는

쫄다구 '인민'들 사이에서 꼭 저쪽을 쏴죽여야 할 필요나 정당성이 있는가.


비단 병역 기피의 문제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쫄따구로

전쟁에 임하는 내 위치에서, 나의 생명과 재산에 대해 이토록 박하게 대하며 함부로 내팽개치는 '이쪽

대가리'들의 책임 방기에 대해 나 역시도 파업을 선언하겠다는 거다. 전쟁을 불사하고 내 목숨이라도

내걸겠다는 의지가 생길만한 국가가 아니다. 사실 저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나 이쪽 대가리 밑에서

고생하나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굳이 그들의 장단에 발맞추어 내가 손에 피를 묻히고 목숨을 그들

손에 내맡기지는 않겠다는 거다. 그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며 맏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던 어쩌던,

나는 이 나라의 모든 전쟁에 반대하며 총알받이를 거부한다는 거다.


대체 지금의 한반도 위기를 점점 고조시키는 자들은 무엇을 판돈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건가.

혹시 그 판돈은 대가리 이외 자들의 목숨과 재산은 아닌가. 전쟁 위기 앞에서 분명하게 말하지만,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여느 때나 비슷했지만 특히나 이명박의 국가는 이미 누차에 걸쳐

필요하면 힘없고 돈없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임을 선포했으니, 이 나라가 내

목숨과 재산과 일상을 지켜줄 거라고 믿기는 힘들다. 제각기 자신의 목숨 보전은 알아서 해야 할 일.


북한에 두세배의 복수를 해야 한다느니, 왜 (성능에 열배에 달한다는 포탄을) 80발 밖에 쏘지

않았냐느니, 전면전을 치를 각오를 해야 한다느니, 그들에게도 자식과 부모가 죽은 슬픔을 안겨야

한다느니 온갖 되먹지 않은 소리들이 사방에서 번져나온다. 그렇지만 난 아무래도 당신들의 권력놀음을

위해, 북조선의 세습 기도와 남한의 '반공신도'들의 놀이판 위로 '애국심'에 홀려 들려올려가 무익하고

무의미한 개죽음 당하기를 거부한다. 전쟁나면 도망가야겠다.







파란 지붕 아래 살고 계신 G님,


G20 마치고 모쪼록 미끄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천안함 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기에 골몰해서 객관적인 증거조차 부실한데 남북대결을 조장한 점,

민간인은 물론이고 여당 정치인까지 사찰하더니 이제는 범죄조직처럼 대포폰까지 동원한 점,

UAE에 원전 반값에 후려쳐서 들이밀고는 이 나라 군인들을 용병으로 끼워판 점,

한미FTA 협상에서 자동차만 내준다더니 은근슬쩍 쇠고기까지 내주려 하는 점,

국가안보를 포기했다던 전정권들에서조차 반대했던 124층 제2롯데월드를 순식간에 허용해준 점,

동네 구석구석 자리한 SSM문제로 지역 상권이 무너지지만 기껏 목도리 하나로 입씻으려 하는 점,

정권의 나팔수 KBS 수신료 인상시켜서 조중동의 종편채널 배불려주려고 야금야금 진행중인 점,

복지의 기본틀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 부자들을 위한 감세정책만 펼치고 있는 점,

모범적이던 인권위 파행으로 몰아넣는 등 강부자, 고소영 식의 코드인사로 문제를 일으킨 점,

견찰, 떡찰을 동원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과 노골적 비난을 통해 자살을 교사한 점,

세계 어느 나라보다 종교간 불화가 없던 나라에서 노골적인 기독교 편향을 드러내어 갈등을 조장한 점,

국민들이 원하면 안 하겠다더니 4대강이 결국 수심6미터 이상의 대운하로 변신중인 점,

용산에서 타죽어간 철거민들의 눈물은 나몰라라 부동산거품 키우기에 혈안인 점,

노사협상 테이블에 경찰이 들이닥쳐 급기야 노측 대표가 분신까지 시도하게 사주한 점,

반값 등록금 따위 대선공약은 고사하고 비리사학 부활시키고 비정규직만 양산하는 점..


여기저기 G덫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친구분들과 사진 찍으실 때는 모쪼록 '기무치' 대신 '김치'라고 해주시기 바라며,

친구분들께 각 나라 언어로 '미끄럼주의'가 무언지도 꼭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옆의 미키마우스와 너무 친한 척 하다가 다른 큰 나라 쥐들에게 단체로 다구리당하는

불상사는 피하시길,



P.S. 님의 죄목에 더 추가될 굵직굵직할 항목이 뭐가 있을까요. 워낙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벌어져 놓은지라

하나하나 헤아리기도 쉽지 않네요.

구 소련이 멸망할 때까지 공산정권의 치하에 있었던 이 공간은, 이후 투르크메니스탄이란 이름으로 독립하게

되고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임을 선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후 두명의 대통령을 맞으면서 사실상의

일인 독재정권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공산주의 정권이나 일인독재 정권이나 어슷비슷하게 통하는 것도 있을 테고,

사람들의 일상이야 딱히 혁명이 일어나 뒤집히지 않은 바에야 크게 달라진 건 없는 듯.

어쩌면 북한의 평양 시내 모습도 이와 같지 않을까. 외부에 보이기 위한 일정 구획 안에만 잘 관리되어 있고

그 너머를 향하는 순간 마치 '매트릭스'의 세계의 끝에 도달한 느낌을 던지는.

시내 중심의 커다랗고 새하얀 건물들이 아쉬하바드의 집결된 부와 권력을 상징한다면, 그걸 좀더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건 곳곳에 서있는 초대대통령의 금빛 동상과 현직대통령의 대형 초상화, 그리고 탑이나 조형물들인 듯.

실제로 저런 커다란 건물들은 관공서, 정부 청사, 역사 혹은 국립 대학이라고 했다. 건물 외벽에 커다란 초상화를

걸어두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건물들인 거다.

그에 비해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건물들은 많이 허름했다. 옛 소련식으로 지어졌다는 아파트 건물들하며, 살짝

이지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의 가정집들. 모래폭풍이 심심찮게 불어오는 뿌연 공기 속에 내놓은 채 말리는

빨래들처럼 이들의 삶은 적당히 까끌까끌하고 건조하진 않을까 싶었다. 이 땅에서 많이 난다는 석유와 가스

팔아서 번 돈으로 저런 관청이나 대리석으로 지을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하는 건 아닌가.

그치만 또 그렇게만 볼 일도 아닌 거 같다. 외부인의 시각으로야 이상하고 비정상적이라 여겨질 만한 일이라도

이들의 시각으로는, 그리고 이들의 기준으로는 나름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국가로부터 대우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러니까 초대대통령에 대한 애정이 하늘을 찌르고 현직 대통령 역시 못지 않는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는 걸 거다. 분수대 앞에 아이를 데리고 나와 사진을 찍는 어머니도 그랬지만, 길거리를 걷는

많은 투르크인들의 표정은 분명히 밝았었다.

그녀들의 화사한 전통의상이나 원피스도 이쁘고, 나름 생기발랄한 표정도 그렇고, 찌푸리거나 쩔어있는 표정은

아니다. 그리고 흔히 '공산주의국가'나 '독재국가'를 상상할 때 그려지는 회색빛의 음침한 분위기도 아닌 거

같아서 다행이었다. 이들은 이전에도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옷을 입고 다녔을까.

어쩌면 그런 변화는 구소련의 공산정권 치하를 벗어나고부터, 혹은 최소한 가스와 기름 덕에 조금씩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허름하고 흐릿하던 신호등이 이렇게 반짝거리며 녹슬지 않는 스테인레스

재질의 선명한 LED조명 신호등으로 바뀌었듯이.

그리고 여전히 이 나라는 러시아식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시내 곳곳에서 눈에 띄는, 그런 나라인 거다.

거리에 서 있다가 누군가를 향해 경례를 올려붙이는 딱딱하고 건조한 군인들, 이들은 샤방한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들과 함께 변화중인 투르크메니스탄을 상징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쉬하바드 거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던 커다란 깃발들, 깃발들을 꽂아 놓은 깃발꽂이들. 저건 어디에 쓰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왠지 평양 시내를 스케치한 사진들에서도 비슷한 걸 봤던 거 같다. 집체 공연을 하거나 군중무를

할 때도 깃발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흔히 활용되는 도구기도 하다. 여기선 대체 뭐에 쓰이는 걸까. 궁금증을

끝내 풀지 못한 채 돌아오고 말았다.

아파트 벽면에 걸려있는 커다란 그림, 성모 마리아 같은 인물을 그린 종교화 같기도 하고, 인민의 표상 같기도

하고, 혹은 공산주의식의 계급의식을 드러낸 벽화같기도 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로만 따지면 소련의 느낌.

구소련 시절에 세웠던 제2차 세계대전 '기념탑'(이라고 해야 하나 위령탑이라고 해야 하나..)이 여전히 남아

있기도 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연합국 측의 승리를 가져온 건 팔할이 소련의 힘이었던 거니까

그들은 이곳저곳 치열한 전쟁의 상흔이 남은 곳에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 곳에서 굴러다니는 차들도, 오래 된 것들이다 싶으면 대개 소련에서 양산되어 공급되었던 '국민차'에 속하던

것들이라 보면 딱히 무리가 없다고 했다. 물론 새 차들이야 벤츠에 BMW에 폭스바겐에 전부 외국 브랜드.

저 버스는 뭔가 깡총하게 생긴 게 뒷바퀴가 조금 앞쪽으로 땡겨져 있다 싶기도 하고, 어쨌든 꽤나 귀엽다.

그리고 아쉬하바드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는 순간 황량해지는 풍경. 뜨문뜨문 떨어져 있는 건물들조차 저만치

멀어지고, 그 사이로 바싹 마른 채 헐벗은 땅거죽이 붉게 드러났다. 우리나라도 서울에서 조금만 교외로

빠져도 금세 스카이라인이 땅바닥에 달라붙고 도시적인 느낌이 사라지긴 하지만, 여긴 도시의 외관이 벗겨지면

바로 사막의 거칠고 헐벗은 식생이 드러나니까 더욱 극적인 거 같다.

와중에 화려한 색감의 옷을 입은 투르크 여성분이 한 분 지나가셔서 급 화색이 돌던 풍경.

그나마 몇 그루씩 듬성듬성 있는 나무들도 비리비리하긴 마찬가지, 튼실하다거나 싱싱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나무 밑둥에는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해 하얗게 무언가를 칠해놓았다고 하던데, 알제리에 갔을 때도 이렇게

나무 밑둥을 전부 하얗게 칠해놨던 걸 봤었다. 물론 이유는 달랐지만. 거기선 '이뻐 보일라고' 칠했다던데,

어쩌면 알제리 역시 병충해 방지를 위한 목적일지도.

투르크메니스탄에도 소수의 쿠르드 족이 산다. 쿠르드족은 터키에서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종종 무력 충돌도

일으키고 소요를 발생시키곤 하는 소수민족인데, 이 곳의 쿠르드족은 그런 분리독립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쉬하바드를 벗어나 조금 산 쪽으로 가다보면 보이는 저쪽 동네가 바로 쿠르드 족의 거주지역이라고.

정말, 아쉬하바드 시내 역시 참 작아서 이십분이면 끝에서 끝까지 차로 달릴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금방

주위 풍경이 바뀌어버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건물다운 건물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건조한 땅을 조금이라도

녹화시켜 보겠다는 의지로 심었을 조그마한 나무들은 사막의 거센 삭풍에 희롱당하며 비척비척.

그래서, 여기가 바로 아쉬하바드의 끝. 공산독재의 지난 세월이, 일인독재의 현재가 어떤 식으로 이 경계지역을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갈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여기가 아쉬하바드의 끝.





니야조프 투르크메니스탄 초대대통령, 금빛으로 번쩍이는 그의 동상은 아쉬하바드 곳곳에서 눈에 띄었지만

특히나, 여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쓰고 만들어진 곳 같다. 북한으로 치자면 '주체사상탑'과 그 앞의 거대한

금빛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에 비길 수 있을까. 적어도 삼사미터는 훌쩍 넘어보이는 커다란 동상은

설마 석유와 가스를 팔아 사온 금덩이로 빚어놓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돈 냄새가 물씬 나는 것 같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옛 전사들 복장을 하고 옛 무기를 꼬나쥐고 있는 이 근위병들도 인상적이었다. 마치 절 앞을

지키고 선 사천왕상처럼 부리부리한 눈과 다부진 포스를 뿜어내며 왼켠에 둘, 오른켠에 둘, 도합 네 명의

커다란 병사가 그들의 왕, 아니 그들의 대통령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은 그들의 대통령이 자원을 팔아 이뤄낸 '쇼윈도 건물'들이 열맞춰 서 있었고. 번쩍이는 하얀 대리석에

거대한 건축물들이 띄엄띄엄, 마치 무슨 테마파크처럼. 그리고 번쩍이는 금빛 동상에 거대한 호위 무사들을 갖춘

대통령이 마치 무슨 왕처럼.

자세히 보니 대통령 앞에 시립해 서있는 네 명의 호위 무사 말고도, 또다시 그의 최측근에서 대통령을 지키고 선

네마리 독수리가 있었다. 이걸 네마리라고 해야할지 조금 난감한 게, 머리가 무려 다섯인 독수리인데다가 발톱에

걸고 있는 뱀의 머리도 양쪽으로 두개가 있으니.

다섯개의 독수리 머리는 투르크메니스탄의 다섯 개 지역을 상징하니 투르크메니스탄 그 자체이며, 각기 반대편을

보고 있는 뱀은 투르크메니스탄 양편의 외적을 경계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가이드 압둘라가 그렇게

뭉뚱그려 말한 걸 두고 눈치없이 반문하고 말았다. 서쪽의 이란과 동쪽의 아프가니스탄을 경계하는 거군요.

이란은 중동 지역의 패권국가이니 늘 경계할 수 밖에 없을 테고, 아프간 같은 경우는 좀처럼 정돈되지 않는

내정불안의 문제가 자칫 투르크로 번질 우려가 있어서 아닐까 싶었는데, 대략 맞는 듯 하다. 압둘라가 당황했다.

뭐랄까, 광화문광장 같다. 사람이 쉴 만한 곳은 없고, 그저 거쳐가거나 방황하며 지나는 곳. 여긴 그래도 뻔뻔하게시리

'광장'이란 이름을 붙여서 사람을 미혹시키지는 않을 거 같았다. 공산주의의 잔재가 아직까지 자본주의적인

성향을 막아주는 건지도 모르겠고, (반)주변부적인 '촌스러운' 동네라 한결 인간적이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떠나려는데, 그새 어느 아주머니가 텅빈 공간을 쓸고 있었다. 밤이고 낮이고, 정말 밤 두세시에도

나와서 차도를 쓸고 보도를 쓸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많았던 것도 투르크에서 얻은 인상적인 장면 하나.

국방부 였던가, 건물 앞에 몇 명의 군인이 총을 들고 선채 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왠지 맘에 걸렸지만

건물 앞에 선 황금빛 니야조프 대통령의 동상이 그새 반가운 거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셔터를 누르자마자 군인

한명이 잔뜩 쏘아보며 손사래를 친다. 국방부 건물이라 보안상의 이유로 그런 건지, 대통령 동상에 대한 불경이라

그런 건지. 사진을 지우라고 요구하고 확인까지 하는 중동 나라들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하며 얼른 도망.

차안에서만 바라본 금빛 돔의 건물, 저게 바로 대통령궁이라고 한다. 투르크의 초록색 국기와 금빛이 생각보다

꽤 잘 어울린다는 뜬금없는 생각과 함께, 생각보다 현대의 대통령궁(집무실 건물)과 과거의 왕궁 간의 갭이란 게

그리 크지 않은 건 아닐까,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싶었다. 미국의 백악관이나 프랑스의 사이요궁, 한국의 청와대나

뭐 기타 등등. 어차피 본질은 그 자리의 위세를 뻗치고 우러러보게 만드는 것이니 당연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 곳곳에서 마주치다 보니 결국 돌아올 즈음엔 왠지 굉장히 친숙하고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버린 듯한 (혼자만의) 착각에 빠지고 말았던  베르디무하메도프 현재 대통령의 커다란 사진들. 정말이지

북한의 그들이 하는 행태와 다를 게 없다. 호텔 로비에서 만난 그의 인자한 미소.

어느 사무실 건물의 계단 중간층에 걸려있는 같은 사진.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가 아마 저렇듯

자애롭고 인간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을 대량배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갔던 어느 식당, 연회장을 겸하고 있던 그 공간에서도 현 대통령은 인자하게 웃으며 맞이해

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 위치는 결혼식으로 치자면 주례가 서는 뒷편, 모든 이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수 있는

바로 그 위치. 펜을 쥐고 뭔가를 쓰는 듯한 포즈를 잡고 있는 그 사진, 활용도가 가히 백만 퍼센트다.

아쉬하바드의 밤거리라고 대통령의 모습이 지워질리 없다. 시내의 어느 거리에서 환한 불빛을 사방으로 튕겨내며

금빛 미소를 선보였던 초대 대통령의 동상. 이 나라 사람들은 아마도 초대 대통령과 현 대통령의 얼굴이라면

눈감고도 그릴지 모르겠다.

국제포럼이 열리던 행사장에도, 자칫 떨어지면 사람이 깔려죽을만한 사이즈의 사진, 바로 그 사진이 커다랗게

한 옆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연사로 나섰던 사람들 역시, 과민하게 받아들인 건지도 모르지만

예외없이 전/현직 대통령의 리더십과 결정을 칭찬하는 언사를 양념처럼 빼먹지 않았던 거 같다. (물론 그들이

전부 그에게 밥그릇이 달린 공무원이었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만찬장에서도, 이들이 연주를 계속하는 동안 뒤에서 눈을 살짝 올려뜬 채 혹시 삑사리가 나지는 않는지, 음식은

다들 맛있게 먹고 있는지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사방을 살피던 거다.

투르크메니스탄은,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충성'은 어느정도 경찰에 의해 지탱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블럭이 지나기도 전 새로운 교통경찰과 마주할 만큼 곳곳에 지키고 선 경찰들은, 내키는 대로 아무 차량이나

멈춰 세워서 불심검문을 하는가 하면, 시도때도 없이 도로 전체를 막아선 채 지나지 못하게 통제하기도 한다.

새벽 세네시쯤, 예고도 없이 통제된 채 텅텅 비어버린 호텔 앞 도로. 그리고 사이렌도 없이 우르르 달려나가는

십여대의 새까만 세단들. 대통령이 탄 차가 저 도로 끝에 있는 별장으로 가는 거라 했다.

새벽에도, 저녁에도, 한낮에도, 대통령이 다니는 길은 늘 완전히 비워진 채 그들만을 위해 열리던 나라. 우리나라는

교통정체니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구간구간별로 끊어서 통제한지가 꽤 된 걸로 알고 있는데, 투르크도

그렇게 바뀔 때쯤에는 사방에 널려있는 대통령 사진도 철거되어 있으려나.



* 유비쿼터스 (Ubiquitous) :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라는 뜻의 라틴어.





투르크메니스탄이란 나라가 생겨난 건 1991년 10월 27일, 무너져내리는 구 소련으로부터 독립선언을 한 날이다.

이후 15년간 니야조프 초대 대통령의 독재가 이어져왔지만, 정치적 반대세력도 많지 않고 국민만족도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2006년에 니야조프가 사망한 뒤 그의 자리를 이어받은 건 그의 주치의였던

치과의사 출신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 투르크메니스탄의 모든 건물 로비, 건물 내 사무실들, 심지어는

투르크메니스탄 국적 항공기에도 티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의 커다란 초상화가 붙어있는 나라다.

그런 나라인지라, 초대 대통령의 묘소가 으리으리하게, 마치 파리에 있는 나폴레옹의 무덤 앵발리드를 떠올리게

하듯 금빛 번쩍이는 돔 형태의 지붕과 대리석 뻑적지근한 건물로 꾸며져있는 건 새삼 이상할 것도 없을지

모르겠다. ([파리여행] 나폴레옹의 휴식처, 앵발리드) 사진 촬영조차 금지된 채, 니야조프 초대 대통령과

그의 부모, 그리고 두 형제를 위한 다섯개의 대리석 관이 봉안된 그 곳에서 가이드 압둘라는 낭랑한 목소리로

죽은 이의 안식을 비는 코란을 노래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유해도 못 찾았고, 어머니와

두 형제는 45년인가, 투르크메니스탄에 있었던 대지진때 전부 돌아갔다고 한다. 압둘라는 그가 대통령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망자에 대한 무슬림의 예의로 코란을 읊었다 했다.

그리고 이 건물, Ertogrul Gazy 모스크가 그 묘소 바로 옆에 있었다. 1998년 터키가 건설해서 투르크메니스탄에

선물했다는 건물, 남자 5천, 여자 2천이 한꺼번에 수용가능한 거대한 모스크라고 한다.

현대에 만들어진 모스크라 그런지 전통적인 모습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면서도 뭔가 현대적인 느낌이 드는 거 같다.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새하얗게 반짝이는 대리석과 화려하게 번쩍이는 금박이 아직 그 풋풋함이랄까 신선함을

잃지 않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빼곡히 세워진 채 미나렛 첨탑을 따라 위로 쭉쭉 솟은 가로등들 때문일지도.

황금빛과 나무색이 섞인 기하학적 문양이 가득한 문을 지나면 바로 모스크 안으로 입장, 더이상 사진촬영은

불가능한 공간에서 잠시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1층은 남자를 위한 기도공간, 2층은 여자를 위한 기도공간이라고.

여느 모스크들과 다를 바 없이, 기도를 바칠 때 메카 방향을 알 수 있도록 살짝 움푹 패인 '키브라'가 꾸며져

있고 천장의 커다란 돔에는 알라를 의미하는 아랍어가 쓰여있고, 우상숭배가 금지된 그들의 교리 덕분에

발달한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빼곡하게 채워진 공간.

다만 이집트나 다른 아랍국가의 모스크에서 느꼈던 편안함이나 여유로움이 느껴지지 않았던 건 아쉬웠다. 아무래도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특별한 '과시용' 모스크이기 때문이겠지만, 사람들의 일상에 콕 박힌 채 누구라도 편히

와서 기도하고 쉬고 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어서 그랬을 거다. 더구나 바로 옆의 초대대통령 묘소와 맞물려서

더욱 경건하게 위엄을 부리려는 탓도 있을 테고.

사막의 나라 투르크메니스탄, 그곳에서 이런 분수를 넓게 조성해 놓고 또 저렇게 녹색 정원을 잘 관리하는 것은

꽤나 많은 돈과 시설을 필요로 할 거다. 중동의 여러 아랍국가들에서 그렇듯, 이곳 역시 정원과 분수는 부와

권력의 상징. 이 사원은 그런 점에서도 역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소망교회'쯤 위상을 차지할 거 같다는.

무슬림들은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는 계율이 있다고 한다. 보통 다른 모스크들은

입구 앞 정면에 몇 개 수도가 설치되어 있어서 거기에서 손발을 씻고 들어가는데, 여기처럼 칠천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대한 모스크는 고작 몇 개의 수도시설로 택도 없는 거다. 하여 지하에 목욕탕처럼 잔뜩

설치된 수도꼭지들. 왠만한 사이즈의 목욕탕은 훌쩍 뛰어넘는 거대한 공간이다.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느낌의 조명, 그 등불이 천장에 그려내는 격자살 무늬 그림자가 인상적이었다.

Ertogrul Gazy 모스크에서 돌아나오는 길, 사실은 여기에서 초대 대통령 묘소를 향해 사진을 찍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고 했다. 그새 살짝 움직인 태양, 덕분에 잔뜩 역광을 받고 선 모스크를 향해 사진 몇 장을 더

찍으며 압둘라에게 물었다.


투르크 사람들은 이번 대통령이 죽고 나서도 저런 화려한 대통령 묘소를 지으려고 할까. 그는 아마 그럴 거라고

했다. 대통령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건지, 아님 그만큼의 애정인 건지 모르겠지만 조금 착잡했다. 십여년

독재를 해온 대통령에 대해 불만없이 수긍하며 죽고 나서도 계속 그의 죽음을 기리는 사람들. 물론 엄청난

부존량을 자랑하는 석유가스 자원이 가져다 주는 '먹고사니즘'의 해결이 그 일등공신이겠지만, 그게 다일까.







대통령들의 별장이었던 청남대에서 3월쯤 찍었던 사진.

반 장난삼아서였지만-전두환이 큰소리치며 살고 있는 것 말고도 어이없는 일들이 워낙 많았으므로-

그래도 오늘만큼은 순수한 분노의 마음이 응어리져 있음을 확인해 봐야 했다.


저걸 처음 맞닥뜨렸을 때나 지금이나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점 하나.

저게 왜, 아직도 무사히 건재한 거지.


용서를 빌고 합당한 응징을 받은 사람은 없는데 누가 용서라도 한 건가.

대통령 감투 챙긴 사람이? 천여명을 헤아리는 사상자와 실종자를 대표해서??

혹은, 펜촉을 움켜쥔 하이에나들이? 종교의 논리를 사회에 유치하게 대입하는 성자들이?


눈뜨고 봐줄 수가 없는 조각상이다. 앞에서 방아타령이나 불러줄까.


@ 상해.
청와대 방문신청서(국문)

청와대 방문신청서(영문)


청와대에 들어갈 일이 있어서 갔던 길, 다른 때와는 달리 시화문 쪽으로 가서 방문 신청을 하라고 했다.

신청서를 써내면서 신분증을 맡기면 방문증을 준다. 핸드폰을 받아서는 카메라 렌즈 부분에 검은 스티커를

붙여서 촬영을 막은 후엔, 금속탐지기를 거쳐 청와대 IN.


별 거 없다. 청와대 경내 곳곳에 설치된 철문을 지키고 선 경호 인원들의 우렁찬 구령소리가 인상깊었을 뿐.
 
입차! 확인! 문열어! 문닫아! 출차! 정도...였던가. 하루종일 인형처럼 각잡고 서서는 고작 한다는 몇마디 말이

저런 거라니 참 힘들겠다.


시화문,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자 시절 2008년 새해의 사자성어로 발표했던 '시화연풍'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참 좋은 단어. 현실은 시궁창.


*                                          *                                            *

이 당선인 새해 희망 사자성어 ‘시화연풍(時和年豊)’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30일 새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성어로 ‘시화연풍(時和年豊)’을 선정, 발표했다.

주호영 당선인 대변인은 이날 서울 삼청동 인수위원회에서 브리핑을 갖고 “이 당선인이 새해의 사자성어로 ‘시화연풍’을 선정했다”면서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든다는 뜻으로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국민이 화합하는 시대를 열고 해마다 경제가 성장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주호영 당선인 대변인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새해 사자성어 ‘시화연풍’을 들어보이며 뜻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시화연풍’을 새해 사자성어로 선정한 배경과 관련, 주 대변인은 “대선을 통해 확인된 시대정신은 경제 살리기와 사회통합”이라며 “시화(時和)는 국민 화합, 연풍(年豊)은 경제 성장의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 대변인은 “지금 우리 사회가 심각하게 겪고 있는 지역, 이념, 계층갈등 등 여러 유형의 갈등과 분열상을 극복하여 대화합을 이룩함으로써 국가발전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하고, 노사안정과 규제완화, 기업의 투자활성화 등을 통해 성장동력이 떨어진 우리 경제를 다시 살려내어 일자리를 많이 창출하는 등 선진경제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임기가 시작되는 2008년부터 이러한 두 과제를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성실히 이행하여 그야말로 나라가 태평하고 풍년이 드는 국민성공시대를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뉴스투데이 2007.12.31 14:03





아이를 잃어버리는 건 순간이다. 드라마나 여느 영화 따위에서 흔히 나오듯 문득 움찔하는 느낌도, 물건을

떨어뜨리는 전조도, 빠바바빰~하는 비극적인 음악도 없는 거다. 그냥, 아이가 서서 손흔들던 창가가 휑해지고

집에 불이 꺼져 있다. 촛불이 훅 꺼지듯, 그렇게 아이는 한순간에 사라진다.
 
내 아이를 찾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경찰은 느리다. 다음날 아침이면 돌아올 거라고 태평이다. 꼭 좀

찾아달라는 눈물의 읍소 앞에 오만하고 위압적이다. 게다가 부패하고 비열한 경찰은, 아이의 실종 사건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실추(라고 쓰고 '폭로'라고 읽는 게 낫겠다)하는 악재가 되고 있음에만 주목한다.

덕분에 그녀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혼란에 빠져 사리분별도 못하는 못난이 취급받는다. 나쁜 엄마이자 못된

'암캐'가 된다. 온 동네를 돌며 '제 아이도 몰라보는 여자'로 낙인찍힌다. 정신상태를 의심받더니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된다. 다리를 벌려 매독검사를 받는다. 제안에 따르지 않아 전기쇼크-고문-기계 위에 눕혀진다.

준비되지 못한 해군과 당국, 프락치만 준비하다.[2010-03-30]

염장 지른 경찰… 실종자 가족 틈서 사복형사들 첩보활동(경향신문, 2010-03-31)
"함미에 산소 주입? 공급할 산소가 없다는데..."(오마이뉴스, 2010-03-31)


그녀는 운다. 울고 분노한다. 그녀의 아이를 되찾고 싶을 뿐이었다. 아이를 되찾고 싶었지 경찰과 거물정치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도, 새삼스럽고 쌩뚱맞은 정의감과 적대감도 없던 일반인이었다. 자신의 아이만 온전히

려받을 수 있다면 경찰과 정치인들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손바닥이 닳도록 감사하고 감사했을 착한 사람.


뒷짐진 靑, 노골적 '北風 띄우기' 용인? (프레시안, 2010-04-02)
생환 기원 詩, 인터넷에 확산…국민들 심금 울려 (동아일보, 2010-04-02)
'얼 빠진' 한나라…故 한주호 준위 입관식에서 기념 촬영 (프레시안, 2010-04-02)


그렇지만 아이를 찾는 일이 점점 경찰과 시장의 썩어빠진 곳에 빛을 비추는 일과 같아지고 말았다.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경찰과 시장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들의 권력과 위세가, 썩어빠진 곳에서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 '국민의 종복'이고 '정의의 지팡이'였다면, 실종된 아이 앞에서 자신의

이미지 실추나 걱정하고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지 따위나 고민하진 않았을 거다.

 

하여 그녀는 울고 분노하고 일어선다. 아이를 찾아야 하겠으므로. 이악물며 수치심과 정신적학대를 견딘다.

그녀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이들과 싸워 버티곤, 극도의 불안감과 공포, 위압감으로 바닥까지 동댕이쳐져서도

욕지거릴 내뱉는다. "개자식들. 벼락맞아 뒈질 놈들." 



체인질링을 봤지만 천안호를 봐버렸다. 개자식들, 벼락맞아 뒈질 놈들은 여기 또 있다.



청남대를 거닐다 나무들 사이로 언뜻 비친 초가지붕, 청남대 제2경이라는 '초가정'이 그곳이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가져왔다는 전통 생활도구를 구비한 초가집. 이런 곳에서도 고졸한

'인품'이 내는 향기가 언뜻 풍기는 듯 하다.

사실 조선시대 국왕들이 흉년이 들거나 새봄이 되면 몸소 허름한 옷을 입고 농사일을 체험했다느니, 따위의

이야기도 선례라면 선례겠지만, 그렇게 보여주기 식으로 꾸며진 곳은 아닌 거 같아서 엄연히 다른 거 같다.

최소한 김대중의 이런 점이 정략적으로라거나 감정적으로 어필했던 적은 없는 거 같은데다가, 여긴 정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쉬고 '향수'에 젖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자그맣게 꾸며진 곳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 하면, 그 앞의 정자 때문이다. 호수와 그 너머 '뭍'의 부드러운 곡선, 그런 푸근하고

평화로운 그림이 그려지는 정자에 앉아서 그는 머리를 식히고, 숨을 돌리지 않았을까. 누구라도 여기에 잠시나마

앉게 되면 뭔가 마음을 턱 하니 내려놓고 착해지지 않을까 싶은 그런 풍경.

몇몇 분들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털썩 그 자리에 앉았다.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도 저렇게 앉아

말없이 한참을 따로, 또 함께 있었지 않을까.





청남대에서 채 못다했던 이야기들, 그 중 하나는 대통령이 쓰던 화장실 이야기다. 아직 못 돌아본 코스도 꽤나

있어서 조만간 한번 다시 가봐야겠다고 다짐중이기도 하다.

이렇게 얼기설기 쪼아올린 봉황이 마당에서 깃을 드리우고 있는 청남대. 대통령의 별장이니, 대통령이 쓰던

보트, 대통령이 쓰던 가구, 대통령이 쓰던 숟가락, 대통령이 쓰던 티비, 당연히 대통령이 쓰던 화장실도 있다.

그런 것들이 있는데도 노무현 전대통령이 충북도청에 소유권을 위임하고 민간에 개방된 후 줄곧 적자에 시달리는

이유 중 하나.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저렇게 다섯 명을 합성해 놓는 역사의식과 '입장'의 결여. 저 사진은

그저 재임순서로 다섯명을 늘어세웠을 뿐 아무런 메시지도, 의미도 담지 못한다. 정치적 논란이나 '편향'을

우려해서였겠지만, 그래서 남는 의미는 단 하나. 29만원 있다는 살인마나 벼랑에서 떠밀린 정치적 살인의

희생자나, 그냥 '대통령'으로 마주하게 될 뿐이다. 이넘이나 저넘이나 다 똑같애, 정치인이 다 그렇지, 따위

거침없이 사방에 내질러지는 삿대질을 부를 뿐이다.


그리고, 저렇게 다섯 명이 화목하게 서 있는 모습이 현실에서 가능할 법한 이야기인가. 청남대에서 일부

대통령의 후광을 걷어내야 하지 않을까. (기억을 지워버리자는 게 아니라, 무작정 '대통령'이라고 드리워진

후광을 떼내어 버리잔 이야기다.) 차라리 현실 정치에 대한 감을 조금은 더 익힐 수 있는 배움의 장으로

활용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적자 이유는, 본관에서의 내부 촬영 금지 아닐까. 청남대 본관에 실내화신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여기서 찍었다는 드라마 관련 사진들이다. 드라마는 되는데 왜 일반인은 안 된다는 건지.
 
대통령이 청남대로 쉬러 오면 몸을 뉘어서 쉬었을 그 침대. 대통령의 침대는 왜 사진찍으면 안 되는 건데, 하며

맘대로 슬쩍 셔터를 눌렀다.

대통령의 집무실. 저 스탠드는 왠지 낯익은 게 울집에 있는 내 스탠드와 같은 종류 같다. 저 옷걸이는 왠지 예전

외할아버지댁에 있던 그런 퀴퀴하고 낡은 것과 비슷해 보이고. 아, 그런 건가. 무려 대통령이 쓰는 일상용품이

일반인들의 그것과 같거나 별반 차이가 없으면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와서 보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짠~ 여기가 대통령의 화장실. 세상에, 비데도 없고, 금칠도 안 된 뽀오얀 도자기색 그대로인 데다가, 작다.

사진이 많이 어둡긴 하지만 다를 게 없구나 참. 슬쩍 고개를 디밀었다가, 이내 빼버렸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한 것도 아니지만 역시나 별 거 없는 거다. 다만 남는 건 상상의 영역, 저기에 바지 내리고 앉아서

볼일을 보았을 전두환, 노태우를 위시한 전임 대통령들의 모습. 더러는 술 먹고서 변기 붙잡고 토했을지도.

가끔 국무에 시달리거나 혹은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에 시달린 때에는 '피똥 쌌을지도' 모를 일이다.

2층짜리 건물인 청남대 본관에 엘레베이터가 생긴 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된 후라 한다. 발을 절뚝거리던

그에게 꼭 필요한 거였으리라.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방, 쇼파와 골드스타 텔레비전이 놓인 방, 그 다른 한쪽에는 한식방도 있었다.

다른 나라들의 옛 왕궁이니 대통령궁이니 이런 데도 사진 촬영은 다 허가하던데, 굳이 사진 촬영을 금지한 건

왜일까. 그들의 생활 소품이 찍히고, 화장실이 찍혀서 그로부터 상상력이 뻗쳐나올 걸 저어한 걸까. 그들의

'품격'과 '위엄'에 손상이 가는 일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들이 무슨 김태히나 송혜규도 아니고

이슬만 먹고 살 리도 없고 화장실도 안 갈리 없는 건데.


그런 '인간적인' 모습을 노출시켜서 격이 떨어지리라 생각할 만큼 그들이 높은 곳에 있다고 여겼던 거라면 더욱

심각한 오해다. 드라마 촬영은 허가해 놓고, 그런 스틸 사진으로 본관 1층을 쫙 도배해놓은 마당에 일반인들의

촬영은 막으니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거다.

청남대 전 지역은 산나물 채취금지구역, 어쩌면 이렇게 잘 보전된 채 손을 안 탄 지역에 산삼이라도 한 뿌리
 
자라고 있는 건 아닐까.

기념관에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손바닥 자국. 손금을 볼 줄 안다는 사람은 저 손금 중 생명선이 2009년께

끊겨 있는지 한번 봐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청남대의 화장실 표시. 일반인들을 위한 화장실이나 대통령을 위한 화장실이나 변기는 똑같구나, 왠지 안심한

마음으로 맘껏 사용할 수 있었던 화장실 변기.

청남대 관람안내. 혹시 다음 가실 분을 위한 자상한 배려.





청남대, [충북팸투어-청남대] 김대중과 노무현의 '아바타'가 그곳에 있다.에 이어 나머지 대통령들의 이미지도

가득 담아 올 수 있는 곳이다. 아무래도 전두환 대통령 때 지어진 곳이라 그런지 그 이전 대통령들의 체취랄까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 이후로도 워낙 (여러 의미로) '씨알굵은' 대통령들이 있으니 아쉽진 않다.

참 씨알 굵은 양반. 산책로에서 제일 먼저 만났던 분인데, 이후 제각기의 특징을 잡고 있는 동상의 모습을

되짚어 보니까 저 자세는 어쩌면 구보와 각잡힌 걸음새에 익숙한 퇴역군인의 특성을 잘 포착한 게 아닐까

싶었다. 찰져보이는 몸뚱이에 완강하고 의지력있어 뵈는 얼굴까지. 딱 그사람이다.

그의 뒷모습. 맨들맨들한 동상 뒷머리에 흔히 떨어져 있을 법한 새똥 하나 없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다음 타자는 골프채를 시원하게 휘두르는 노태우 전 대통령. 그가 대통령을 하던 시절 나는 삐라를 모았었다.

그 천연색깔 알록달록한 그림과 낯선 글씨체가 신기하고 자극적이었다. 똥오줌 못 가리던 어린 나이인지라

아마 사람들이 회피하고 어쩌면 무서워하던 삐라를 한장 두장 모아가며 묘한 쾌감을 느꼈던 거 같다. 어느날

부모님은 우표수집책 속에 우표처럼 꼽혀있던 색색의 삐라를 보고는 다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의 입꼬리는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원래 그렇게 생긴 걸까 아님 이 동상의 작가가 잘못 만든 걸까. 본인이나

유족으로부터 초상권에 대한 합의를 받고 최대한 실제와 똑같이 만들어낸 작품들이라 했었다. 사실 그가

재임중이던 시절, 난 최루탄 냄새 맡으며 어린이회관에 '우뢰매' 따위 보러다니던 꼬맹이였다. 그의 얼굴을

티비에서 본 기억이 없다. 입꼬리는 더더욱 기억에 있을 리 없다. 별명이...물태우였다던가.

김영삼 전 대통령. 요새도 참 말 많이 하던데, 다행인지 우리 나라 대통령 중엔 아직까지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전례가 없었다. 끝까지 무사하게 피 안 묻히고 구정물 안 튀긴 대통령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조깅을 워낙 좋아했던 대통령답게 흥건히 브론즈색 물들이고도 또 뛴다. 무슨 포레스트 검프도 아니고.

그의 봉긋한 엉덩이를 함께 보며 친구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한미 정상회담 기간 중 클린턴이 조깅을

제안해왔댄다. 나란히 달리며 한미관계를 논해야 할 그 찬스에서, 그는 죽어라고 달려선 클린턴을 멀찍이

따돌리고 이겼다며 좋아했단다. 그러고 보니 포레스트 검프랑 비슷한 면이 적잖다.

"클린턴도 조깅으론 날 못 이겨~!" 좋댄다.

그리고 책 읽는 김대중과 자전거 타는 노무현을 만나고, 초봄 기운이 드리워진 청평호에 시선을 박았다.

청남대엔 군사시설도 함께 있었다고 하더니, 설마 그때부터 화장실 옆에 저렇게 배치되었던 건 아닐 거다.

여자는 왼쪽으로, 남자는 오른쪽으로, 그리고 볼일급한 꼬맹이는 가운데쪽으로.

대통령 광장에 들어서는 입구. 뒷 벽면에는 각국의 행정수반이 집무를 보는 관청이 있다. 한국의 청와대,

프랑스의 엘리제궁, 미국의 백악관, 뭐 그런 것들.

총 9명의 대통령. (현 대통령을 제하면) 16대 대통령까지 16번의 임기가 지났는데 인물은 9명이다. 뭐 재임,

중임이 항상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지만, 좀더 옵션이 많았으면 조금은 더 맘에 드는 대통령이 많았을지도

모르겠어서 아쉬울 따름.

옆구리에 '대한민국 헌법'을 끼고 있는 대통령,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그의 치하에서 만들어진 헌법이긴

해도 그때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의미는 지금과는 또 달랐을 거다. 당장 국토의 공공성이라거나

수도로서의 서울이 갖는 지위 따위가 해석을 통해 바뀌어 나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장면 내각은 내각제여서 대통령 광장에 끼지 못했나 보다. 바로 윤보선 대통령으로 스킵. 무슨 일을 했는지,

그가 어떤 대통령감인지 알아보고 평가하기엔 그의 재임 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 사람. 근데, 그 사람하고 진짜 닮았다. 그 사람이 그 사람 흉내낸다고 선그라스 끼고 돌아다니고 그런

모습을 봤을 때도 느꼈지만, 그 사람은 정말 그 사람 닮으려고 꽤나 노력하는 중인 거 같다. 어쩌면 요새는

그 사람보다 더욱 세련되고 고도화된 수준에 올라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엄연한 질적 차이가 있으니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엔딩은 얼마나 닮고 또 얼마나 다르게 될까.

최규하 전 대통령. 이 분이 아마 최근의 '서거 러시' 이전 가장 가깝게 돌아가신 분이었던가. 조용하게

돌아가셨던 거 같다. 무색무취한 대통령이었던 걸까, 역시 짧았던 재임 기간 때문인지도.

아까, 군대에서 구보하는 걸음새로 각잡혀서 걷던 아자씨. 그는 여전히 살아있고, 광주의 전남도청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한 채 파시드랑 뼈대만 남겨두었으며, 가끔 그는 현실 정치에 훈수도 둔다.

노태우 전 대통령. 그런 생각도 든다. 대통령도, 국민도, 시간이 지난다고 점점 나아지라는 법은 없다.

그건 조금은 무임승차하려거나 언발에 오줌누기식 위로를 구해보려는 얕은 꾀.

IMF라는 재앙이 터진 건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시기였지만, 그게 터지지 않고 안으로만 내연해서 약자들을

사회 밖으로 튕겨내는 시스템을 만든 건 그 이후였다. 거대한 후폭풍을 불러오고 뭔가 구태의연하던 과거를

지워버려야 할 타이밍에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고도화된 모순을 만들어내버린 면도 있는 거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한 고용 시장, 오히려 위축되는 듯한 사회복지망, 수월성 위주의 입시 교육, 민주/반민주 따위

선언적이고 허구적인 경계선에만 자족하는 지난 시대의 비주류들..그래서 김영삼 때문에 IMF가 났다고 쳐도

-사실은 다른 원인들이 많다고 생각하지만-그 뒷수습을 그렇게 한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어쨌거나, 대통령 광장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태극무늬가 있다.

대통령 동상들이 바라보는 쪽엔 뭐가 있을까, 싶어서 고개를 돌려봤다. 고개도 돌리고 카메라도 돌렸다.



충청북도 청원군에 위치한 청남대는 대통령 전용 별장이다. 대통령이 국무를 보다가 내려와 쉴 수 있는 공간,

그 정도 되려면 주위 경관이니 입지 조건도 특별해야 할 테고 옛날옛적 어느 스님의 예언 같은 것들도 구비구비

서려 있어야 하는 거다. 청남대 역시, "왕이 머물 곳"이라는 예언이 일찍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이 곳은 더이상 대통령을 위한 곳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 충청북도에 소유권을 이양한 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으니, 누구든 입장권을 사면 들어올 수 있는 문턱낮은 곳이 되었다.

최외곽으로 돌면 반나절은 산책할 법한 규모의 청남대 내부에 올 초 새로 '대통령 광장'이 생겼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 왼쪽에 과거 골프장으로 쓰이던 풀밭을 끼고선 전직 대통령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김영삼을 못 본 척 지나고 나니,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마주쳤다.

이 분, 작년에 그렇게 가신 것도 모자라 요샌 묘소에 도깨비불이 횡행한다고 했다. 그런 번다한 세사 따위

모르겠다는 듯 초연히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단단해 보였다. 그는 민주화 투쟁 시절 감옥에서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어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서 좋다고 했었다. 만델라도 그랬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골프장 잔디밭을 일부 밟은 채 국산 자전거에 올라앉아 손을 흔들어 주는 노무현 전 대통령.

그의 환한 웃음을 마주했다. 자전거를 타고, 밀짚모자를 쓰고, 그런 모습들이 워낙 친숙했던 그인지라 이런

동상이 서 있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뭐랄까, 일종의 아바타-화신-인 거다. '노무현'에 대해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이미지들을 똘똘 뭉쳐 놓으면 저런 게 나올 게다. '김대중' 역시 마찬가지.

작년 5월쯤, 그의 갑작스런 서거가 몰고 온 파급력은 정말 대단했다. 마치 온나라 국민들이 이제야 그의 진가를

알았다는 듯, 지켜주겠다고, 지키겠다고 울음지었었다. 아직도 모르겠다. 인간 노무현이 아닌 대통령 노무현에

발견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일까. 좀더 많은 이야기가 오가고, 그의 정책과 비전에 대한 쿨한 평가가 진행되야

하겠지만, 당장은 그렇다. 인간 노무현의 저런 소탈한 웃음은 굉장히 좋았었다.

실개천같던 산책로를 따르다가 어느 순간 대통령 광장으로 탁 트여나왔다. 미래의 대통령 동상이 놓일 자리를

마련해 두었고, 그 뒤로는 역대 대통령 동상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저 '미래의 대통령' 자리에서 어떤 꼬맹이는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집을 넓히고 싶다 했고, 어떤 아주머니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람은 설사 남편이라

할지라도 엄벌에 처하겠노라 공약했다고 했다. 유치할 수도, 혹은 순박할 수도 있는 공약들이지만, 단상 뒤로

쭉 섰는 대통령들을 보자니 그런 '단순함' 혹은 '순박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리나라는 그다지 자랑스러운 대통령을 갖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을 때는 조금 뿌듯했다. 그런 대통령의 단상 위에는 꼬맹이들이 그와 눈높이를 맞춰

기념사진을 찍고 싶었던 듯, 흙발자국이 어지럽다. 다른 대통령들의 단상은 상대적으로 말끔한 편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시, 여기서도 웃고 있다. 증명사진 찍듯 경직된 자세와 표정을 고수하던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생생한 표정, 생생한 제스쳐다. 그런 모습은 그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상대적으로 갖지

못했던 '젊은 모습'이었고, '비권위주의적인 모습'이었던 거다. 그게 연출되거나 의도된 이미지 메이킹이었다고

해도, 이제 그는 '권위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대통령-인간'의 대명사로 남게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청남대의 풍수지리적 예언-"왕이 머물 곳"이라던-을 들먹거리는 건 사실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코미디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근엄함과 신성성, '가오'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하늘의 아들'이 아니란

이야기다. 청남대는 왕이 머문 곳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인간 하나를 대표로 내세워

국가대표 공무원을 시켰던, 그 '사람'이 일하다가 와서 쉬던 곳일 뿐이다.

그가 들어올린 손이 앞선 대통령들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밀쳐내는 듯 하다. 그의 모습이 다른 전임 대통령에

비해 훨씬 커보이는 듯 하다. 가까운 건 커보이고 먼 건 작아보이는 원근법의 효과다. 그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돌아나오는 길, 이번엔 그의 뒷모습을 만났다. 느낌이 달랐다. 아까는 산책로에 들어서는 사람들을 환대하고

맞이하러 나오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엔 뭔가 뒤도 안 돌아본 채 휑하니 사라지려는 듯한 분위기랄까. 그의

등짝을 바라보는데 살짝 울컥했다. 생전의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나였음에도.

다행히도, 그의 그런 쓸쓸하고 비감한 뒷모습 옆에는 거의 쉴틈없이 사람들이 함께 서 주었다. 전두환과

노태우와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을 구경하고 지나친 사람들은 저 사진찍기 좋은 동상 옆에서 줄을 서서

사진을 찍으려 기다리고 있었다. 생전에 그리도 만만한 대통령이었던 그는 지금도 청남대에서 딱 그만큼

만만한 전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있는 듯 했다.

청남대, 이 곳은 일반에 개방된 이후부터 적자 행렬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관리해야 할 시설물과 규모를

생각하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야 겨우 적자를 면하지 않을까 싶다. 그곳에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자전거를 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건대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박정희, 최규하, 윤보선, 이승만 대통령이 있다. 입맛대로 골라갈 일이다.)




(서울=땡박뉴스) 이번 "건국60년 대한민국 봉헌을 위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이명朴統이 직접 산타 복장을 하고

5인조 그룹을 결성, 흥겨운 캐롤에 맞추어 춤판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언제나

궁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눈물을 닦아주려고 노력하는 이명박정부는 최근 들어 말바꾸기개그와 호통개그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에 처했다고 판단하여 국회에선 슬랩스틱개그를 유도하고 청와대에선 막춤개그를

선도하기로 결정했다.

본보가 발굴한 당시 영상을 보면 그 사지의 팔랑거림이 일견 경망스럽기 이를 데 없어 마치 사람잡는 선무당을

방불케 하나, 보면 볼수록 보는 사람의 심박수를 제압하는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전언에 따르면 이명朴統은

춤사위를 펼친 후 격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대자연에 굴하지 않고 삽을 높이 치켜올린 태산같은 기개, 그리고

대다수 사람이 뭐라하건 자신의 길로 일로매진하는 신화적인 돌파력을 형상화했다"고 자평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이교도연합회 알함브라 대변인은 "이명朴統은 하루라도 빨리 그의 타고난 神氣와 화해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한편 이명朴統의 총애를 받는 강만수 기획재정부장관은 똥아일보와의 구원을 풀고자 오보 개그를 연마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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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올렸던 거지만, 이 분이 국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선별적 재활용밖에 없다고 판단되어

다시 한번 올려본다. 그가 해온 일 중 가장 무해한 일이 아닌가 싶어서, 물론 사람에 따라 약간의 메스꺼움과

분노를 동반한 구토증을 유발할지도 모르겠다.

이순재 대통령이 펼쳤던 '동아일보', 놓칠래야 놓칠 수 없는 제호 아래 떡하니 버틴 오자, '당청금'. 특정 신문사

혹은 하향평준화되어가는 언론계 맞춤법 실력을 풍자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장동건이 참모와 나눈 대화 중

'시장나가고 떡볶이 먹으면 서민정책이야?' '보여주는대로 믿습니다'란 대사야 너무하다 싶게 노골적이었지만,

보통 가정을 꾸리고 사는 최초의 여성대통령 고두심의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모습은 왠지 조금많이 에둘러서

'같기도 안같기도 한' 누군가의 처지를 떠올리게 했던 것 같다.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달려들고 싶지는 않고 그냥, 어렸을 적 잠깐 품었던 '대통령'의 꿈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야 워낙 어렸으니 별 생각없이 과학자 되겠다는 짝궁 이겨먹겠다고 난 대통령이나 될까, 서울대 가겠다는

짝궁 이겨먹겠다고 서울대는 시시하고 하바드나 갈까, 이런 식이었던 것 같지만. 조금 머리가 굵어지면서

대통령이란 자리는 뭔가 내가 손을 뻗을까, 생각해 볼 만한 '직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한줌 정치인들만의

정략적인 계산 결과 얻어지는 자리라 여기게 됐었다. 어쩔 수 없이 뒤가 구리고, 거짓말을 직업적으로 하고,

조선시대 왕과 같은 그런 존재라고.


근데, 이런 대통령도 꿈꿔볼 수 있었던 거다. 이순재 같은 대통령, 장동건 같은 대통령, 고두심 같은 대통령,

그들 역시 별 수 없이 노회하고 얄미운 정치인이고, 각자의 정견에 따른 요상한 정책들을 펼치겠지만, 그래도

꽤나 인간적이지 않은가. 사실은 꽤나 '훌륭'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꽤나 훌륭한' 대통령을 여태

현실세계에서 만나보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뭐, '적당히 훌륭한' 대통령은 한두명 만난 거 같긴 하지만.

웃으라고 만든 영화인 거 같은데, 별 수 없이 자꾸 현실과 비겨보게 된다. 젠장.


한가지, 장진 감독의 작품이란 걸 몰랐다면, 제목만 보고서는 그다지 보고 싶은 맘이 무럭무럭 동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왜 이렇게 얌전하고 무색무취한 제목을 달았던 걸까. 좀더 매력적인 문구 없었을까. 이를테면, 음..

음..쉽지 않구나. 그냥 뭐, '이쯤되면 막가자는 대통령질'이라거나, '당선은 됐지만 대통령은 아니더라'. 뭐 요런

제목? 아님 '개나 소, 그리고 대통령' 이런 제목은 어땠을지. 개나소나 다해먹는 대통령질이라는 의미로다가.

이 영화를 보고는 나조차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하고 대통령의 꿈을 한번 꿔볼 수 있는 영화였으니 말이다.








故김대중대통령 추모 공식홈페이지(http://211.233.13.92/?brch=1)에 고인의 마지막 일기 중 일부가 PDF형태로

공개되었다. 생각보다 현 정권에 대해 '세게' 발언한 부분도 공개되어서 왠지 안심했다. 고인이 생전에

침묵하지 않으셨다는 게 안심이 되었고, 서거 후에도 타의에 의해 침묵당하지 않으셨다는 것 역시 안심이

되었달까.



■ 건강에 대한 언급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이고..건강도 괜찮은 편인 것이 행복이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고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2009. 5. 2)

이렇게 건강도 괜찮으셨다는 분이 갑작스레...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충격이 크셨던 게다.


■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언급

"노 대통령도 사법처리 될 모양. 큰 불행이다.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다.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2009.4.18)

고인은 스스로를 노 전대통령과 함께 "진보진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진보'라는
것에 주어지는 운신의 폭이란 그 두 분의 서거를 돌이켜도 빤히 보이는 것 같아 답답하다.


"자고 나니 청천벽력 같은 소식-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다.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노 대통령, 부인, 아들, 딸, 형, 조카사위 등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수사기밀 발표가 금지된 법을 어기며 언론플레이를 했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2009.5.23)

결국 노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던 사람들, 침묵을 지키고 있는 그들.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이번처럼 거국적인 애도는 일찍이 그 예가 없을 것이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2009.5.29)


전례는 없었겠지만, 생각보다 금방 또다른 사례가 생겨나고 있습니다...그런데 전현직 대통령 중 당신의 추도사는
누가 해줄지, 누가 이렇게 진심을 담아 울어줄지...먹먹해지네요.


■ 정치적 시사점을 던지는 언급

"끝까지 건강 유지하여 지금의 3대 위기-민주주의 위기, 중소서민 경제위기, 남북문제 위기-해결을 위해 필요한 조언과 노력을 하겠다. '찬미예수 백세건강'"

야당 정치인들이 뭐라뭐라 떠들기는 하지만, 김대중 전대통령만큼 명징하게 현재의 위기상황을 정리한 사람은 없었다.
대정부 비판을 위해서 제대로 된 프레임을 마련해 주었고, 실제로 이후 야당은 이 세가지를 잘 활용하고 있다.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2009.1.20)

동계 철거는 실시하지 않는 게 상례였다는 점에서, 용산 참사는 사정을 아는 모두에게 매우 예기치 않았던 비극이었다.
빈민들의 처지가 눈물겹다고 일기에 적는 당신의 모습에서, 20대 체게바라의 감수성을 본다면 과장일까.


"역사상 모든 독재자들은 자기만은 잘 대비해서 전철을 밟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전철을 밟거나 역사의 가혹한 심판을 받는다."(2009.1.16)

지금이 독재인지 아닌지, 그걸 이론적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적인 구속감, 자유의 박탈감'이
더욱 중요한 거 아닐까. 마치 빈부차에 있어 '상대적인 박탈감'이 '절대적인 박탈감'보다 중요한 요소듯이.


"여러 네티즌들의 '다시 한 번 대통령 해달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는 노 정객의 다짐. '삼김'이라 도매금으로 묶였지만 줄곧 피해자의 위치에 서있었고,
YS 대 DJ의 라이벌구도라 하지만 사실 YS만큼의 막말을 던진 적이 없는 고인. YS와 JP의 일기장엔 뭐가 적혀있을까.
그리고 우리의 MB 일기장엔 대체 뭐가 들어있을까.


■ 촛불집회 관련 언급

"(인류의 역사는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며...)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촛불시위에 대한 이런 심정적 지지, 온건한 입장을 갖기란 '노땅'의 마음가짐으론 쉽지가 않을 터다. 평생의 살아온 길이
고인의 열린 마음, 합리적인 판단을 가능케 한 것일까. 정말 대단한 정치인이었다.



■ 아내와의 사랑

"요즘 아내와의 사이는 우리 결혼 이래 최상이다.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아내 없이는 지금 내가 있기 어려웠지만 현재도 살기 힘들 것 같다."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이희호 여사와의 관계가 참 돈독하셨나 보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 라는 표현에 담긴 애정이 잔잔하게 와닿는다.


■ 기타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마당의 진달래와 연대 뒷동산의 진달래가 이미 졌다.지금 우리 마당에는 영산홍과 철쭉꽃이 보기 좋게 피어 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나에 대해서 허위사실을 공표한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서(100억 CD) 대검에서 조사한 결과 나는 아무런 관계 없다고 발표. 너무도 긴 세월동안 '용공'이니 '비자금 은닉'이니 한 것, 이번은 법적 심판 받을 것."

"가난한 사람들, 임금을 못 받은 사람들, 주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설날이 큰 고통이다."



p.s. 김대중 전 대통령님, 허락을 안 받고 감히 '마지막일기' 파일을 제가 첨부하려 합니다.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올리오니 부디 넓은 마음으로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평안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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