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와 A.D., 그리고 9.11.

9.11이 터지기 며칠 전, 뉴욕에서의 3개월 체류를 접으며 마지막 여행지로 쌍둥이 빌딩을 올랐었다.

아직 한국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어느 가전제품 대리점의 티비들로 접했던 그 충격적인

모습이란, 뭉클 솟아난 두려움과 함께 상당한 비현실감을 안겼었다. 이후 수많은 이미지와

스토리들로 계속해서 재연되고 재구성되었지만 그 충격이란 여전해서, 이후 국제정치의 룰도

바뀌고 세계사의 흐름도 꺽인 듯하다. 영화 속 대사가 딱 맞는 거 같다. 서양인들은 역사를 B.C와

A.D를 기점으로 나누었지만 그에 더해 제3의 기점, 9.11이 생겨났다고.


미국 내 무슬림들의 Ground Zero.

그렇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미국이 아니라 인도에서 시작한다. 인도에서 건너간

이민자들의 이야기, 더구나 이슬람을 종교로 가졌거나 가졌다고 오인받는 이민자들의 이야기.

그렇기에 그들에게 9.11의 타격은 쌍둥이 빌딩의 충격적인 붕괴가 아니라 이후의 '여진'에서

더욱 강렬하다. 히잡을 두르지 못하게 되고, 이슬람의 분위기가 풍기는 가게는 문을 닫게 되고,

급기야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은 그들의 아이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미국인'들이 말하는

그라운드 제로가 쌍둥이 빌딩이 위치했던 곳이라면, 그들의 그라운드 제로는 아이의 타살장소.


'충격과 공포'에 대응하는 한가지 방법.

인도인이지만 힌두교인 여자는 소리친다. 무슬림인 당신과 결혼해서 내 아이를 잃었다고.

당신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가버리라고. 온 미국인에게, 미국의 대통령에게 "내 이름은

칸이고,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돌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아이의 살해범을 찾아내 응징하기에 발벗고 나선다. 그녀의 분노는 자연스럽다. 실제로

9.11이 터진 후 미국과 세계가 움직였던 방식이기도 하다. 분노, 응징, 그리고 공포에 질린 '고백'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것은,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충성서약'과 유사해진다.


'충격과 공포'에 대응하는 또다른 방법.

자폐와 유사한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다는 남자는 농담을 모른다. 늘 진심을 말하고, 순진함이

극에 달해 마치 이전의 '포레스트 검프'나 '레인맨'이 돌아온 느낌이다. 그는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대통령을 찾아 나섰다. "My name is Khan. I'm not a terrorist."의 멘트를 주문처럼 외우며.

몇개월에 걸쳐 대통령을 만나려다가 오히려 테러리스트로 오인받아 수모를 받기도 하고, 전투적

무슬림들의 테러 대상이 되기도 한 그에게 결국 그녀가 다시 돌아오고 난 후에도, 그는 그 말을

대통령에게 전한다는 '약속'은 꼭 지키겠다며 다시 나선다.


겁먹은 '충성서약'을 넘어 당당한 '선언'으로.

그렇지만 그의 멘트는 다르다. 난 당신과 같은 편이에요, 라는 겁먹은 고백이 아니다. 내가 가진

종교를 타협하지도, 내가 사는 방식을 타협하지도, 편가르기식 프레임에 포섭되지도 않는다.

처음엔 그저 그녀에게 돌아갈 생각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슬림으로 겪게 된 미국사회의

편견과 격한 공포심에 맞닥뜨리면서 바뀐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애초부터 현명한 어머니에게

받은 교육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이슬람식 이름을 대며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밝히는

그의 말은, 차라리 이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편견과 무지를 깨뜨리자는 선언처럼 들린다.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세상에 좋은 사람을 늘리자는 그런.


인도의 카메라가 미국을 훑다.

이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를 두시간여 흠뻑 몰입하며 내달릴 수 있게 하는 게 진짜 능력이다.

인도에서의 성장기를 경쾌하게 내달렸던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미국의 곳곳을 핥아내면서

전혀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인도인 이민자에게 미국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라는 식으로.

게다가 자폐증을 연기한 '샤룩칸'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라거나, 이국적이면서도 마력적인

인도의 음악, 미국 곳곳의 풍광이 담긴 영상까지 잘 만들어져, 몇몇 센스넘치고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가슴에 남고 말았다.


"My name is Khan. I'm not a terror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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