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모두를 감시하고 테러하는 사회

지하철 막말남이 등장했다. 워낙 그런 류의 영상과 사진들이 많이 나도는 통에 그러려니 넘겼다가,

급기야 탈탈 털린 그의 신상을 먼저 보고서야 영상에 흥미가 생겼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전국민이 그의 이름, 나이, 소속, 주소를 알아야 되나 말이다. 영상이 도는 이분삼십초동안

욕을 해대고 삿대질을 해대는 그놈도 그놈이지만, 그보단 배경처럼 서있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촬영하고 있을 사람이 더욱 거슬린다.


말 한마디 변변히 않고 멀뚱히 자리만 피해있는 사람들, 게다가 그 시간동안 숨죽인 채 어딘가에

은폐엄폐해서 촬영하는 사람은 어떤가. 어처구니없는 그놈의 행패질에 심장도 쪼그라들고

저러다 뭔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 다른 침묵한 사람들처럼 겁도 나면서도, 혹시 뭔가 조회수

잔뜩 올릴 '특종' 한건 했다거나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저널리스트스러운 그런 '희열'이나

'보람'을 느끼고 있진 않았을까 두렵다.


언론의 파괴력,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준비가 되었나

그렇다. 두려운 거다. 모두가 스마트폰 따위로 무장한 1인 미디어시대라지만 과연 그들은 '언론'의

파괴력과 뒤따르는 책임을 의식하고 있을까. 타인들에게 텍스트나 이미지, 영상의 형태로 된 뉴스를

전달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의 직업 윤리가 있고 나름의 고민을 늘 물고 있다.

아무리 언론이 썩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은 공식적인 기자 직함을 달고 사람들에 노출되어

있으니 기사를 올리거나 영상을 올리기 전에 법적인 부분을 검토하거나 최소한의 '직업윤리'로

자기검열을 하게 되는 거다. 그렇지만 저널리즘에 대한 고민이 없었던 일반인들은?

과연 저런 영상을 찍어 인터넷의 무한공간에 올리는 사람은, 타인의 인권에 대한 고민이라거나

파급효과에 대한 염려 따위는 했을까. 저지른 죄에 대해 자신과 사람들이 법과 제도를 대신해 직접

침을 뱉고 처벌하길 바라는, 빠르고 속시원한 응답을 원한다는 마음 뿐이었을 거다. 이런 식이라면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고,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모두에게 호소하는, 그런 끔찍한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이미 숱하게 가십으로 소비되고 있지 않나.


오늘도 질세라, 욕쟁이할머니 기사가 떴다.



+ 사건전달과 개입 사이의 딜레마, 혹은 윤리는?

굳이 말을 보태야겠다.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저 유명한 사진은 아프리카에서 굶주린 아이들이

내몰린 사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이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듯한 저 독수리는 금방이라도

달려들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거다. 촬영자인 케빈 카터는 이 사진으로 엄청난 후폭풍에

휘말렸는데, 아이를 먼저 구해야지 사진 촬영을 하고 있냐는 비판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진을 찍고

바로 아이를 구했다고 하지만, 거센 비판으로 인해 결국 자살하고 만다.


아프리카의 기아들이 놓인 상황을 널리 알리겠다는 직업적인 소명의식, 그의 사진이 세계에

가져오리라 충분히 기대되는 반향을 감안하면, 그에게 쏟아진 비판은 너무 가혹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촬영 직후 아이를 바로 구조했다. 그런데, 저런 '지하철 막말남', '쩍벌녀', '욕쟁이

할머니' 따위 유포되는 동영상은 뭔가. 재수없게 딱 걸린 한명을 단체로 다구리하고 찢어발기겠단

변태같은 욕망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의 관심사는 박해받는 사람들이 아닌 거다.


과학기술은 너무나도 발달해버렸다. 누구나 만인에게 글을 쓰고, 사진을 보이고, 영상을 전달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다. 트위터니 블로그니 개인방송이니,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마이크를 쥐고 카메라를 들이대고 떠들어댈 수 있는 거다. 그렇지만 그들이 타인의 모습과

삶을 조각조각내서 남들 앞에 벌려놓는 그런 무자비하고 신(神)적인 작업에 걸맞는 의식과 경계심을

가졌을까. 그저 위태롭고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 뿐이다.



p.s. 일부 블로거들 역시, 파워블로거니 뭐니 이름을 팔아 상대를 위압하고 위세를 부리려는

케이스를 보았었다. 언론 같지도 않은 일부 광고찌라시같은 언론보다도 못한 행태들이다.







@ 제주도.


일시 : 2011년 6월 23일(목) AM 11:00부터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http://ytzsche.tistory.com)

● 자격 : '심뇌혈관질환' 안내포스터에 쓰인 제주도 방언 두개,

           1) '알아지쿠광?'(포스터 상단 제목) : 아시겠어요?

          
2) '몽케지 말앙'(포스터 하단 우측) : 꾸물대지 마세요.

           무슨 뜻인지 추측해서 비밀댓글로 남겨주세요!!

+ 초대장을 받을 이메일주소!^-^*


주최 : yztsche(이채, 異彩)

제공 : 초대장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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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웹툰을 꼭꼭 챙겨보는데, 그렇게 챙겨보던 웹툰 중 하나인 '고시생툰'에서의 한 장면.

나도 똑같은 생각을 누군가에게 말했던 적이 있어서 깜짝 놀라며 일종의 데자뷰를 느꼈었다.

꽃이란 식물의 생식기관,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관을 날것으로 드러낸 셈이랄까.

요새 여기저기서 찍어둔 꽃 사진들이다. 꽃을 찍는다는 건, 꽃을 본다, 와 이쁘다 감탄한다,

카메라를 들이댄다, 찍는다, 찍는다, 또 찍는다..그냥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가 일어나는

과정과도 같다. 그렇지만 저 웹툰 덕(?)에 이전에 잠시 품었던 '꽃=생식기'라는 생각이 들고

나니까 찍힌 꽃들 하나하나가 마냥 이쁘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말하자면 굉장히 펑퍼짐하고 '육덕진' 그런 관능미랄까. 게다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하늘거리는

꽃잎들과 대비되는 샛노랑 꽃술의 저 감각적인 모양새라니.

다섯개 다리를 가진 별모양처럼 피어난 꽃, 꽃잎과 살짝 비틀려 튀어나온 연두빛 꽃받침이나

사방으로 삐죽대며 폭죽처럼 터져나온 꽃술이 더욱 눈길을 붙잡았다. 굳이 또다시 꽃을

생식기에 비긴 비유를 원용하자면, 폭죽처럼 터져나온 별모양 생식기..인 건가.;

아무리 그렇게 삐뚤게 생각해보려 해도, 이쁜 건 이쁜 거다. 만져보지 않아도 저렇게 보드랍고

약해보이는 꽃잎을 잘도 피워올리는 꽃들의 대책없는 아름다움. 군대에 갔을 때 그 무디고

둔탁하고 강력한 군홧발 끝에서 뚝뚝 끊어지는 민들레 줄기라거나 짓밟혀서 흔적도 남지 않던

꽃들을 보며 조금 경악했던 적이 있었다. 난 그저 민들레 씨앗을 톡톡 띄워올리고 싶었을 뿐인데.

그래서, 꽃이 아무리 생물학적으로 '식물의 생식기'에 불과하다지만 받아들이기로는 그 이상이다.

어쩔 수 없이 그 빛깔과 질감과 향과 형체를 감각하고는 이내 감탄하여 카메라를 빼어든 채

꽃앞으로 대책없이 달려들 수 밖에 없는 거다. 꽃이 만발하는 여름이다.







사무실서 죽도록 웃고 말았다..







서울의 어느 동네를 걷다가 문득 발견한 신기한 탈것. 귀엽기도 하고, 뭔가 엉성하기도 하고

호기심이 확 땡기는 바람에 요모조모 살피게 되어버렸다. 보니깐 MTV 위에 알루미늄 샷시로

틀을 짜서는 투명 아크릴로 씌워버린 것. 그리고 나름 박스와 장판 등속으로 샷시와 MTV의

연결부를 최대한 부드럽게 이어붙이려 애쓴 흔적이 보인다. 이런 DIY(do-it-yourself) MTV라니.

원래 MTV 자체가 귀엽기도 하지만, 이렇게 각진 형태의 틀을 얹고 나니까 조그마한

소형차 같기도 하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전혀 운행에 문제가 없겠다 싶기도 하고.

딱 한명이 맞춤하게 들어가서 운전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셈이니까 안락하겠다 싶기도.

앞면 유리창-아크릴판-에 붙어있는 '국가유공자'란 딱지가 나름 자부심넘치는 유일한

데코라지만, 이런 식의 플러스 알파 튜닝은 처음 보는 거 같다.

뒤로 한번 돌아갔다가 푸핫, 터져버렸다. 저 앙증맞고 새빨간 짐가방은 또 뭐란 말이냐.

그렇지만 새삼 이 신기한 탈것을 손수 제작하신 분의 섬세함에 고개가 숙여졌다. 정말

실용적으로, 불편함에 대한 많은 고민과 연구끝에 만드셨겠구나 싶은 탈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철저한 관건장치까지. 문을 안전하게 닫을 수 있는 걸쇠도 모자라서 자물통을 채울 수

있도록 단단하게 짜맞춰져 있는 이 샷시라니. 밖에서가 아니라 안에 들어가서도 저렇게 닫아걸 수 있는

걸쇠가 마련되어 있는지는 잘 안 보였지만, 설마, 저 정도로 꼼꼼하게 만든 분이 안에 탑승해서

느낄 수 있는 불편함이나 미비함을 캐치못했을리 없다.




안녕하세요,

저는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http://ytzsche.tistory.com)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 비공개 포스트 : http://ytzsche.tistory.com/1486
* 비공개 일시 : 2011-06-03 18:00
* 조치 내용 : 포스트 비공개 전환
* 비공개 사유 : 청소년 유해 정보


최근 이러한 조치가 내려진 것을 이제야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고자 합니다.

해당 포스팅은 대림미술관에서 연령제한없이 입장가능한 '유르겐텔러'사진전의 내용을 재촬영,

인용한 것으로 일부 신체 부위가 노출되고는 있으나 이미 타임지, 보그 등 해외 유수의 잡지에서

공개된 광고용 사진으로 수십년에 걸쳐 인용되어온 바 전혀 유해할 것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예술과 음란물의 경계가 비록 애매하다고는 하나 해당 사진전의 전시주체로부터의 허락을 받고

촬영한 작품들을 포스팅한 것이 음란물로 취급되어 이렇게 비공개로 강제전환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다고 여겨지므로, 이에 대한 적절한 입장표명과 후속조치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빠른 답변 부탁드립니다.




호텔에서 나온 한식 코스메뉴를 쭉 훑어내려 보다가 문득 놀랐다. 얼간이 된장국? 얼간이?

먹으면 얼간이가 되는 된장국인 걸까. 얼이 빠진 사람, 정도가 얼간이의 뜻일 텐데.

그래도 호텔에서 만드는 메뉴이니만치 오타는 아닐 거라 믿고 싶었지만, 또 동시에

'얼간이 된장국'이란 말에 이렇게 생경한 나 자신도 찜찜하길래, SMART하게 스마트폰을

활용해서 국어사전에 접속했다.

얼간망둥이랑 얼간이가 둘다 표준어란 건 알게 된 수확은 있었지만, 그리고 얼간이의

관련어휘로 멍청이, 멍텅구리, 바보, 얼뜨기 따위가 있다는 걸 재발견한 수확은 있었지만

도무지 '얼간이 된장국'의 유래를 알 수가 없었다. 이거 혹시 '얼갈이'의 오타는 아닐까.


왜 그 얼갈이 배추니, 얼갈이 김치니 하는 단어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얼갈이는 얼간이랑은

영 다른 의미를 담은 단어, ㄹ과 ㄴ의 한끝차이일 뿐인데 느낌이 확 다르다. 그야말로 절묘한

오타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얼갈이 된장국이 맞지 싶어 수정을 요청했다.

그렇게 다시 고쳐진 메뉴, 얼간이 된장국이 아니라 얼갈이 된장국이 되고 나니까 속이 다

후련해진 기분이다. 그런데 이제 다시 눈에 띄는 다른 문구. 진지와 얼갈이 된장국. 밥 대신

진지라고 하니까 그것도 또 나름 웃기다.

여하간 이게 그 '진지와 얼갈이 된장국'의 정체. 그냥 뭐..흰쌀밥과 배추국이다.

아무래도 한식을 호텔에서 먹는 건, 뭔가 코스모폴리타닉해진 맛이랄까, 많이 심심하고

밋밋한 맛으로 순화되어서 그런지 별로 맛있다는 느낌은 없고 정갈하다랄까, 딱 그정도.




이런 식으로 생긴 구름은 아무래도 신기하다. 길고 곧은 직선처럼 쭉, 너무 두껍거나 얇지도

않게 딱 알맞은 두께로 한참동안 지탱되다간 슬몃 사라지는 구름이다. 그것도 정말로

한참동안, 아무런 흔들림이나 흐트러짐없이 막대사탕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듯한 구름.


어렸을 적에는 전투기나 비행기가 지나간 궤적은 아닐까 싶었는데, 혹은 UFO의 항적은

아닐까 했는데 그런 건 아닌 거 같다. 또 어디선가 듣기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우연찮게

길게 늘어뜨려져 생겨난 구름일 뿐이라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역시 모르겠다. 사실은 저런 구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누가 뱉어낸 건지는 그리 중요한

건 아닌 거다. 그냥 저런 구름이 생겨난 걸 문득 보면, 굉장히 의지력 강해보이고 단호한,

흔들림없이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그런 녀석이지 싶어서 응원해주고 싶어진다.







강화도에서 만난 배달오토바이 한대에 깜장테잎으로 돋을새김된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

비켜!는 그렇다 치더라도 -_-ㅗ라거나 ㅈㅅ이라거나, 그러고 보니 한글도 꽤나 변해버려서

일종의 상형문자나 기호처럼 알아보는 사람만 알아보게 되어버린 거 같다.


뭐 딱히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다 싶은 게, 예컨대 '엿먹어라'라거나 '죄송'이란 식으로

제대로 된 한글 단어를 저기에 채웠다면 저런 장난스러움이 느껴졌을까. 저렇게 간단명료한

몇개의 선으로 정리해서 보이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을테니 눈에 잘 띄지도 않았을 거다.


고려말 十八子得國의 파자(破字)가 이李씨 조선의 건국을 예언했다던가. 뭐 그렇게 거창하진

않더라도, 초중종성으로 얼기설기 엮인 한글도 저렇게 풀어쓰거나 적당히 변칙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재미있다. 이미 뭐, 저런 식의 어휘들이 대세가 되어버렸으니.






"송지선, 난 당신의 이야기와 슬픔을 헤아리기에는 정보도, 의지도, 그리고 기울일 여력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서로 몰랐던 사람 그대로 스쳐갈 뿐, 미안합니다.

알고 싶지 않은 소식과 깜냥에 넘치는 사람들이 내 삶에 너무나 많습니다."



이쪽으로 와아~, 저쪽으로 와아~, 멍청이도 아니고 오지랖쟁이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세상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 떄가 있다. 예전이라면 내가 절대 얼굴도 이름도 모른 채

평생 신경안쓰고 지냈을 지구 반대편 사람들, 옆나라 사람들, 이 나라의 사람들.



내 삶에 영향을 끼치고 더러 괴롭히기 일쑤인 위정자나 Big Man들이야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지만, 그 밖에 몰라도 될 소식들,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챙겨가며 미워하고 흥분하고 좋아하고 슬퍼하고, 그렇게 결국 즐기고 싶지는 않다. 변태도 아니고.



계속해서 대상의 이름만 바뀔 뿐, 내용은 동일하다. 먼저는 여자를 까더니 다음엔 남자다.

그전에도 여자와 남자가 있었다. 이지아, 서태지. 그 전에도 뭐, 캐면 계속 고구마줄기처럼 나온다.

대중의 이름으로, '공익'을 빙자하고 '알권리'를 빙자하며 애도와 정의를 빙자한 가학충동의 만족.



@ 충남 괴산.



일시 : 2011년 5월 23일(월) AM 09:05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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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충청도 음식대회 금상 수상'의 간판을 내걸었대도, 하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는 주말

지방도로 옆에 슬쩍 숨어있는 음식점의 분위기란 건 이렇게 머리맞대고 티비를 보며 쉬엄쉬엄

넘어가기 마련인 거다. 더구나 가까운데 유명한 관광지나 산을 끼고 있는 것도 아닌 곳이라면.


두어잔만 비어진 소주 한병과 바닥을 드러낸 매운탕 냄비를 남기고 점잖게 떠나간 아저씨 둘과

바톤체인지하듯 들어가 앉았다. 빠가사리와 메기와 잡어가 가득한 민물매운탕을 서빙해주시곤

'얘가 빠가요'라고 일러주시더니 이내 티비 앞에 모여앉으신 아주머니들이다.


같은 미용실을 다니시는 게 틀림없다. 한껏 뽀글한 머리 네개가 옹기종기 티비를 해바라기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문득 그림이 떠올랐다. 네분이서 쪼르르 미용실 의자를 점령해선 머리가득

'구루뿌'를 말고 거울로 티비를 넘겨보며 왁자하니 수다를 떨고 계시는 그런. 충분히 있음직한.



@ 충북 괴산.





갑자기 조문갈 일이 생겼다. 캐쥬얼데이라서 말이 뛰노는 반팔티를 입고 왔는데, 덕분에 타투도

번쩍 눈에 뜨이는 날인데 바로 가야 하게 되어서 어쩔까 하다가 반창고를 덕지덕지.


반창고가 워낙 더덕더덕 붙어있어서 그 자체가 눈에 띌 수는 있겠지만, 윗분의 어르신이 돌아가신

자리에 파란색 별이 막 번쩍거리고 그러는 거보다는 아무래도 낫겠다 싶어서.


이로써 타투는 봉인되었다. 일시적으로나마 밴드 다섯개로.

아 왜 하필 오늘이 금요일인데다가 날씨가 더워가지고. 정장은 아니더라도 겉옷이라도 갖고 왔으면

괜찮았을 텐데 말이다. 타투란 게, 문신이란 게 정말 죽을 때까지 몸에 남아있는 거니까 이런 정도의

불편이야 이미 예상한 바고, 조금씩이라도 이런 데 너그러워지다 보면 나중엔 반창고를 이렇게

덕지덕지 낭비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림자가 엿가락처럼 축추욱 늘어지는 시간대,.

인도의 벽돌들 틈새를 짙게 메워버린 그림자가 차오르더니 보도블록을 가로지르고,

슬몃 아스팔트 바닥으로 흘러들더니 졸졸, 길다란 막대기가 내어준 길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비오는 날, 잠은 안 오고 괜히 마음만 싱숭생숭 들락날락하는 때는 운전대를 잡고 맘에 드는 씨디

몇 장 쥐고서는 슬쩍 드라이브를 하는 것도 좋은 거다. 타닥타닥, 유리창을 때리는 빗물이 엔간히

풍경을 뭉개버리고 나면 기분도 후련해지고 속도 뚫리는 게 바다를 마주한 만큼이나 시원하다.

나나 이 도시 전체가 바다에 잠겨드는 듯한 분위기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뭉글하게 뭉개진 풍경을 보고 있다가 와이퍼로 문득 빗물을 걷어올렸다. 뽀득하게 닦인

유리창 아래 풍경은 선명한 불빛이 새겨졌고, 그 위로는 물방울에 포섭된 불빛들. 잠시 와이퍼가

움직인 사이 맑아졌던 풍경은 이내 흐려졌다. 눈물이 가득 괴는 느낌처럼.

물방울들은 아예 비닐봉지처럼 불빛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다. 하얀색, 노란색, 빨간색

불빛을 감싸쥔 반투명한 비닐봉지들. 질질 새어나온 불빛은 온통 아스팔트 위에 처덕처덕

내려앉았고 사방에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이던 그 늦은 밤, 누군가가 죽도록 보고 싶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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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터미널·서울역 '사제폭탄' 연쇄폭발(종합)



시청 근처를 걷다가 문득 발견한 술집,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술집에 내걸린 황금색 플래카드가

눈에 번쩍 뜨였던 거다. 다름 아닌 '선토리 프리미엄'. 그것도 생맥주와 병맥주를 모두 판다는

소식에 완전 흥분해버리고 말아서, 가던 길도 제끼고 당장 들어가 앉아 각 일병씩 주문부터.

선토리 프리미엄, 일본에서 발견한 최고의 맥주.

선토리 프리미엄 캔맥주는 일본 여행갔을 때 발견해버린 최고의 맥주였는데, 병맥주나 생맥주도

그럴까 싶었다. 아무래도 생맥주는 좀더 가볍고 탄산이 진해 시원한 느낌이 강하고, 병맥주는

반년전쯤의 기억에 따르자면 캔맥주랑 비슷하면서도 살짝 다른 느낌? 그렇지만 역시 선토리는

선토리. 약간씩 미묘한 차이는 있었지만 역시 최고다.

그 전에도 정말 희소한 몇몇 주점에서 사적인 라인을 통해 수입해온 듯한 선토리 맥주를

팔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공식적인 라인이 아니었기에 딱히 저런 배너같은 홍보물도

없었고, 이렇게 정식 수입절차를 밟은 명찰도 안 붙었던 거 같다. 물론 가격도 좀더 비쌌고.

여기서 파는 선토리 생맥주와 병맥주는 각각 만삼천원. 비싸긴 하지만, 기네스같은 프리미엄급

맥주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으니만치 만족이다. 값싼 거 두 잔 마시기보다 선토리 한 잔을

마시고 싶은 날도, 사람도 있는 거니깐.

주점 아저씨한테 물어보니까 정식으로 수입되기 시작했으며, 다만 시중의 마트 같은 곳에서도

팔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한다. 다른 맥주 업체들의 반발이 있다나, 해서 당분간은 이렇게

주점에서만 팔릴 거 같다는 말씀인데, 어디까지나 그 분 말씀이니 진위 여부는 확실치 않으니

좀더 추이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그런데 여기 발견하고 나서 보니 여기저기 배너가 내걸리고

하는 걸로 보아 일반 주점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두근두근.

언젠가 마트에서 선토리를 살 수 있는 그날이 오면, 냉장고 한가득 선토리 캔맥주만 쟁여놓고

마시는 그날을 꿈꾸며. 맛있게 마시는 방법을 공유! 맥주와 거품의 비율은 7:3의 황금비를

지켜서 따르기 위한 테크닉이 담겨 있으니 꼭 선토리뿐이 아니어도 다른 맥주를 마실 때

충분히 응용이 가능한 팁 되시겠다.






상처.

내 마음을 겨눴던 칼끝은 너무도 깊고 긴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우물.

걸핏하면 덜컹이며 열린 채 시꺼먼 어둠속을 부유하는 먼지와 케케한 악취를 길어올린다.


반창고.

봉인이다. 상처가 다시 벌어지지 않기를, 우물이 더러운 우울함을 게워올리지 않기를.


띵동.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다가, 문득 방금 시선이 슬쩍 훑었던 곳 중에 굉장히 맘에 걸리는 뭔가가

있었다는 불편함이 느껴졌었다. 뭘까, 이리저리 휘적대던 시선을 다시 뒤로감기해서 발견한 그것,

'삘딍'이라는 굉장히 생경하고 낯선 단어. 저건 뭐지. 초록색 페인트가 다 벗겨져나간 황동판의

고풍스러움은 저리 가랄 듯한 포스가 느껴지는 두 글자인 거다.


아무리 외래어표기법이 여러번 바뀌어왔고, 그 와중에 상식선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표기도

적지않았음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좀. buiding이란 단어 어디에서 '삘딍'이란 표기가 나올 수

있는 걸까. '삘', 은 그렇다고 쳐도 저 요상한 '딍'이란 표현은 순간 수십년전, 혹은 백년전쯤의

아스라하고 케케한 과거의 향내를 짙게 풍겼다.


저런 풍경은, 아무래도 뭔가 효과가 더해진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게 훨씬 그 분위기를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저 색감을 강렬하게 살린 느낌의 사진이 아니라, 뭔가 2011년의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1900년대 어딘가의 골동품, 그것도 녹이 잔뜩 슬은 골동품을 만난 느낌을

전달할 수 있으려면 뭐가 좋으려나.

1) 토이카메라. 주변부가 어둡고 색감이 약간 붉어져서, 좀더 오랜듯한 분위기가 묻어나긴 하지만,

빛이 모인 중앙부에 '삘딍' 두 글자에 온통 시선이 몰리는 거 같긴 하다.

2) 수채화. 저 단어와 시공간과의 불화를 조금이나마 화해시켜주는 게 수채화 모드랄까.

너무 그림같이 변형되어 버리고 나니 2011년의 도심 한복판에 뭐라 써져있대로 이상하지 않을 듯.

3) 파스텔.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말랑한 질감으로 바뀌어버렸다. 차가운 청동판이나 대리석기둥이

아니라 파스텔을 빚어 만든 판과 기둥인 것처럼. 삘딍이란 단어 역시, 조금은 부드러워 보인다.

4) 포스터효과. 원색의 색감이 강렬하게 발산하는 느낌이다. 삘딍이란 두 글자에 조금이나마

녹이 서려 있었다면, 완전 빤짝빤짝하게 닦아내서 광이 나는 거 같달까.

5) 모노크롬. 역시 오래된 느낌을 주거나 살짝 아련한 느낌을 전하는 건 모노톤, 살짝 갈빛을

섞어서 세피아의 느낌을 주니까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 근데 좀, 모노톤은 슬픔이 묻어나.


뭔가 맘에 드는 거 한 장만 올리려다가, 글쎄, 딱히 이거다 싶은 느낌을 팍 전해주는 사진이

없어서 우다다 올리고 보는 포스팅.




어버이날 전날, 부모님께 조용필 콘서트를 보여드렸다. 다녀오시더니 정말 너무 좋았다 하시며

나처럼 타투를 했노라고 자랑스럽게 손등을 펼쳐보이시던 부모님, 손등을 모아 사진을 찍어드렸다.

엄마의 두 손, 아빠의 한 손, 총 세 손등 위에서 용필 오빠 스티커가 활짝 웃고 있었다.

마침 아버지 생신이 어버이날 즈음인지라, 겸겸해서 동생이 준비한 케잌과 아이스와인.

초에 불을 붙이고,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훅 불어 끄는 그런. 참, 초 갯수가 많기도 하구나 싶다.

촛불이 뭉쳐져서 화르륵, 굉장한 불길을 뿜어내는 통에 야윈 초가 구부러지고 다 녹아내리는 작은

불상사도 있었지만 여하간. 케잌이 잘리면 바로 처묵처묵할 수 있도록 일렬로 대기중인 앞접시들.


금요일 회사에서 기회가 닿아 어버이날 맞이 꽃바구니랄까, 도자기로 된 사각그릇에 담긴 거니까

바구니라긴 어폐가 있고, '꽃사발'이라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은 큼지막한 놈을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드리기도 했다. 케잌과 와인을 마시는 테이블을 장식한 내 꽃사발.

와인을 따는 건 늘 내 몫이다. 와인을 따고 손목을 돌려 잔에 따르는 것, 이제 꽤나 능숙해져서 엔간한

레스토랑의 어설픈 웨이터들 보다는 훨씬 그럴듯하게 안정적인 거 같다.


술은 캐나다의 아이스와인, Inniskillin. 미리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원하게 칠링해두었던 덕분에

금세 병이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질세라 홀짝홀짝 달달하고 상큼한 아이스와인을 마시며

케잌도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뒤로 보이는 꽤나 큼직한 화분같은 게 나의 '꽃사발'.

얇고 긴 아이스와인병은 역시 모양새만 봐도 알 수 있듯 용량이 많지 않다. 고작 300미리 조금 넘는

정도라서, 게다가 와인 한번 따고나면 바로 마셔버려야 나중에 맛도 안 변하고 자칫 버리게 되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는 거다. 잠시 코르크마개로 닫혔던 와인이 재개봉되고, 남김없이 마셔버렸다.

5월 7일 '조용필&위대한 탄생' 콘서트에서 있었다는 에피소드 하나. 아니 글쎄 용필오빠가

가왕은 가왕이지, 노래 부르다가 중간에 벨트를 끊어버렸다지 뭐니. 어찌나 뱃심이 좋았으면

노래부르다가 중간에 벨트가 끊어져서 손으로 잡고 불렀다더라. 라는 게 어머니의 전언.






정답 : 얕은 내에 웅크리고 있는 도롱뇽알들.

@ 백운산


일시 : 2011년 5월 6일(화) PM 15:55부터

장소 : "다른異 색깔彩을 지켜낼 자유"(http://ytzsche.tistory.com)

● 자격 : 이 괴물체의 정체가 뭘까요, 맞춰주세요.
             (얼핏 보면 똥 같기도 하고, 구불구불 이어진 게 뱀같기도 한..)
+ 초대장을 받을 이메일주소!^-^*


주최 : yztsche(이채, 異彩)

제공 : 초대장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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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갗을 간질이는 봄햇살의 따스함과 보드라움이 사진에 담겼으면, 하고 찍었다.

봄날엔 그림자조차 보들보들 너그럽고 따뜻한 느낌이다.



@ 대림미술관 & 통의동 어느 까페.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최초 아이디어는, 이런 풍경과 조우하며 시작한 거 아닐까.

그가 즐겨 활용한 골드스타의 텔레비전 브라운관 속에서 뭔가 예기치 않은 걸 발견하는 순간.


그런 거랑 비슷한 거다. '중력의 법칙' 뉴턴과 사과나무를 묶어 생각하듯이

한국 최초의 아티스트 백남준과 허름하게 낡은 텔레비전이 하나의 끈으로 묶이는 거다.


상처투성이 브라운관 안에는 꽃잎을 대부분 털어버린 벚나무와 가로등이 들어차고,

그 나머지 여백은 뽀얀 햇살이 전부 메워버렸다.

마루 소파에 딩굴딩굴, 하면서 티비도 보고 술도 마시고.

역시 와인은 코와 입 외에도 눈으로 보며 즐기는 술이란 게 맞지 싶다. 찰랑찰랑, 흔들리는 붉은 빛.

그럴 때면 무슨 고민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고. 뭘 그리 아둥바둥 맘쓰며 사나 싶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스파클링 와인, '아랄디카 브라께토 다뀌'. 빛깔은 로제 와인처럼 산뜻한 핑크빛에 가깝고,

탄산가스가 계속 뿜어올라서 와인잔에 달라붙었다. 제법 달달하지만 시원상큼한 맛이 입안을

개운하게 해주는 느낌. 원래 스파클링 와인은 저런 넓은 잔이 아니라 뾰족하고 긴 잔에 마셔야

기포가 송송 솟아오르는 걸 볼 수도 있고 맛도 오래 즐길 수도 있다지만, 뭐 아쉬운 대로.


그러고 보면 이런 식의 스파클링 와인을 통틀어 대충 '샴페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샴페인은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된 스파클링 와인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랄까. 샴페인<스파클링와인,

이런 포함관계인 셈인데, 어쨌거나 샴페인이란 호칭도 좀 웃긴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니
 
Champagne란 이름은 당연히 프랑스식으로, '샹파뉴'라고 읽혀야 할 텐데 영어식으로 '샴페인'이라

굳어져 버린 거다. 왜 그렇게 된 거지. 20세기초까지도 세계 외교, 파티의 중심이었던 파리일 텐데.


늘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다 보면 샴페인, 샹파뉴에 생각이 미치고 늘 '샴페인'의 패권 장악과정이

궁금해지는 거다.


아주아주 달콤하고 쌉쌀한 초콜렛 음료를 만들어내는 곳, 카운터의 모습이 반질반질한 천장에

그대로 말갛게 비쳤다. 이런저런 스토리와 추억이 얽혀있는 까페.

다른 곳의 까페. 딱 보면 어디인지 알 수 있을 인테리어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던 건 천장을

온통 덮고 있는 거울이었다. 친구들이 서로의 눈빛을 주고 받으며, 또 더러는 서로의 폰에

집중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나만 천장을 보고 사진 한장. 근데 저 지갑은 왜 연거지.

또 다른 시간의 강남역. 해가 까무룩하니 저물어가며 사방으로 빛을 퍼뜨리는 시간대에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 그리고 LED조명이 색색으로 바뀌는 가운데 거침없이 지하도

아래로 빨려들어가고 토해내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는 과선배랑 모처럼 만나서 진하게 술을 마시던 날.

보궐선거라거나, 북한 핵 문제, 남북관계라거나 동아시아 정세. 북한 내 정책결정자를 개인으로

볼지 그룹으로 볼지라거나, 대북정책의 근간이 되는 북한의 자멸 여부에 대해서라거나, 한-미,

한-EU FTA에 대해서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라거나, 진보정당들이 원내외에서

어떤지라거나. 근대국가니 현실주의니 따위, 오랜만에 듣는 국제정치학의 jargon들이 우르르.


뭐, 대학다니며 늘 나누던 이야기들이었다. 근대니 탈근대니, 국제정치가 어떻고 세계 정세가

어떻고. 국내 정세가 어떻고 어떤 정치인은 어떻고, 파급 효과는 어떨 거 같고. 개별 이슈에

종횡하는 표피적인 것들이 아니라, 구조와 동학에 대해 집중하는 이야기들. 국가 차원이나

세계 차원에서 정치와 정세를 논하는, 말하자면 정말 '고담준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일 수

있지만 학문쪽으로 계속 나갔다면 굉장히 진지하고 중요했을 이야기들.


누구는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이 정부의 외교라인 씽크탱크로 들어간 교수진이 어떻고,

우리과 교수 누구는 한국의 대표선수로 외국 정계, 학계에서 인정받았고, 누구는 D.C로, 뉴욕으로

유학을 가서 아카데미아로 빠졌다거나 따위의 이야기들, 그리고 선배도 외교분야 보좌를 하다보니

공부를 더해야겠다며 유학준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다가 불쑥 마음이 서늘해졌었다.


학교 다닐 때는 그냥 나도 서른 즈음 되면 그렇게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 무작정 생각했었다.

나름 '이데올로그'가 되겠다며 정치학이던 IR이던, 사회학이던 뭔가 잡고서 책상물림하며

공부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국가 이외의 다른 행위자들이 등장하는

국제관계를 볼 수 있는 국제정치이론을 만들겠다느니. 그런 식의 '고담준론'을 교환하며 머릿속에

세계를 집어넣고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왠지 그런 이야기들이 내 일상과는 맞지 않게

붕붕 뜬 이야기 같기도 하고, 왠지 마음이 서늘해졌었다.


사실 공부하고 싶은 생각도 열의도 그다지 많진 않은 거 같다. 못 가본 길에 대한 호기심이나

매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하고 싶던 공부란 건 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공부였던 거다.

뭔가 대단한 논리나 통찰을 제공해서 바뀔 세상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아카데미아로 빠진

삶에서 내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올곧은 선비의 이미지보다는 왠지 낙향해 초야에 묻혀사는

폐포파립의 한량 이미지에서 더 매력을 느끼는 거 같기도 하고.








덫과 같은 사랑에 빠져있을 때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상대에 질리고 지치고,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이 남아서는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 서로를 힘들게 하는 와중엔

시간이 약이란 말 따위, 전혀 와닿지 않기도 하고 이번만큼은 안 그럴 거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또 슬쩍 시간이 지나서 아물고 나면.

그렇구나, 시간이 약이었구나 싶어지죠.


참 쓸데없는 말 같아요. 뱀의 다리 같은. 아무 효과도 없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이죠.


그냥..어제 빗소리를 창밖으로 넘겨들으면서 카톡에서 지워버렸던 그녀를 살짝

차단해제하고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착잡해져버렸습니다.


시간이. 약일까요.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나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발길이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옳은가 이것만은 분간하기가 좀 어려웠다.

가야하나? 그럼 어디로 가나?


이때 뚜우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이상, 날개(1936)

월화수목금, 그리고 토일. 이 사이클만 무한히 남아버린 듯한 일상.

막상 얻고 싶은 것들은 보행로 밖에 있는 거 아닌가 싶으면서도 저렇게 커다랗고 위압적으로

씌여진 글씨 앞에서 고분고분 차선을 지키고 순서를 지키고 예의를 지키고 있다.


그렇게 안전한 보행로만 따라걷는다고 또 길을 잃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당장 보행로가 저렇게 활처럼 휘어지는 곳에서, 또 다시 갈등하고 마는 거다.

같이 휘영청 휘감아돌아야 할지, 아님 보행로 밖으로 '탈주'해서 누군가 무언가의 앞에 설지.


길 (G.O.D.)

내가 가는 이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 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준형]사람들은 길이 다 정해져 있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이렇게 또 걸어가고 있네

[호영]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계상]무엇이 내게 정말 기쁨을 주는지
돈인지 명옌지 아니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알고 싶지만
아직도 답을 내릴 수 없네

[데니]자신있게 나의 길이라고 말하고 싶고
그렇게 믿고 돌아보지 않고 후회도 하지 않고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걷고 싶지만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네

[호영]나는 왜 이 길에 서있나,
이게 정말 나의 길인가
이 길의 끝에서 내 꿈은 이뤄질까

[태우]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hoo~ 지금 내가 어디로 어디로 가는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살아야만 하는가

나는 왜 이길에 서있나(왜 이길을)
이게 정말 나의 길일까(이게 정말 나의 길일까)
이 길의 끝에서 내꿈은 이뤄질까(내 꿈은 이뤄질까)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난 무엇을)
그건 누굴 위한 꿈일까(꿈인가 hoo~)
그 꿈을 이루면 난 웃을 수 있을까





출근길에 허리를 굽혀 빗물에 씻긴 이백원을 줏었다.


누구는 길에 떨어진 1달러를 줍는 것보다 그냥 가는 게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던데,

하필 버스정류장 앞이라 사람들도 많은데 굳이 허리를 굽혀 빗물구덩이 속에 백원짜리 두개를

줏어야 하는지 잠시 이런저런 생각이 스쳤지만 모. 손가락들은 반짝거리는 것들로 자연스레.


백원짜리 두개를 집어드는 그 짧은 나의 시간과 백원짜리 두개. 어떤 게 더 무거울까.

챙겨들고 나니 외려 더 생각들이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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