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티켓 두장, 그리고 최소 삼십분의 땡땡이 예상시간에 혹해서 집체 헌혈행사에 참여했다. 트레이드타워
정문에 늘어선 헌혈차들. 저혈압이라며 뺀찌먹고선, 이럴순 없다 하며 다시 신청서를 귀찮게 작성해선 옆 차에
올라 검사를 받았다. 10분전의 뺀찌..부적합 판정 기록이 어느새 내 발목을 잡아서 왠만함 이번에는 쉬시라는,
마음만 받겠다는 간호사 누님의 말에 투덜투덜대면서 기어코 피를 뽑았다. 가만히 누워서, 이마와 발끝에서부터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을 즐기면서 대체 왜 그렇게 고집을 부렸을까, 생각해 보았다.
일종의 가학? 그리고 피학의 동시만족? 나에 대한 as-is 분석과 to-be 분석..내가 가진 능력과 비전 내지
희망에 대한 매일매일의 새로운 분석은, 새로울 것없이 매일매일 우울하다.
현재 내가 가진 것들, 능력-소질-관심사-지식-자격증-점수-숫자..뭐하나 맘에 드는 것도, 깊이 벼리고 내세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 갑남을녀, 장삼이사, 뭐 그렇고 그런 아무개. 그리고 내가 가지려고 하는 것들, ...난
뭘 갖고 싶은 걸까.라는 곰팡내 나도록 오래고 단물빠진지 오래인 질문.
내가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하는 게 맞는지, 이게 내게 최선의, 아니 차선의 결과라도 되는 건 맞는 건지. 그리고
이곳은, 내게 맞는 최소한의 십원짜리 팬티라도 되어줄 수 있을지. 아니라면, 아니라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런데 지금 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모르겠고, 아무것도.
혹은 두렵고, 정말 모르겠고, 아무것도.
단순히 몇 개의 굵직한 행사가 거듭되어 쌓인 피로 탓일까, 성과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눈에 걸리적대기
시작된 탓일까, 회장/부회장의 개념없는 언행들에 진력이 난 탓일까, 아님 이 곳의 학교 선배들 모습을 보며
지레 질려버린 탓일까...혹은 이명박의 사진만 봐도 울화가 치밀고 욕지거리가 나온지 오래인 심리적 분격상태
탓일까, 그리고 얼마전 문득 떼거지로 만났던 대학원생들, 그리고 유학생들의 jargon에 양가감정을 느끼고
말았던 탓일까. 게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시간에 휩쓸려 대충대충 정신없이 지내는 하루하루.
무언가 쌓여간다는 느낌이 아니라, 무언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만이 허하게 남는 탓일까. 대체 난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요새 까칠해졌다. 지하철에서 고딩들이 떠들면 니들 안방이냐고 큰소리로 갈구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두줄타기하는 사람뒤에서 툭툭 쳐대는가 하면, 걸을 때 앞에서 느긋하게 걷거나 역주행하는 사람들에겐 감정실린
어깨를 날려준다. 그래, 사실은 내 앞에서 신경거슬리게 만드는 게 네온사인 간판이던 사람이던, 뭐가 되었건
있는 힘껏 한방 날려줬음 속이 다 시원하겠다. 이왕임 주먹도 덕분에 피칠갑 좀 했음 좋겠고.
밤늦은 지하철, 영등포구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멍하니 넋놓고 서있는 사이 두정거장이나 지나쳐
버렸댔다. 황급히 뛰쳐나와 반대편 플랫폼으로 가면서,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멍하니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오지 않았어도 될 길을 멍청하게 되밟아 가면서, 죽어버릴까 하고 사십번은 뇌까렸다.
이게 뭐하는 거냐..집에 가 쉬어야 할 몇분의 시간을 왜 이렇게 멍청하게 허비하는 거냐..아니 잠깐, 요새 넌
시간을 쓰는 거냐 시간을 지우는 거냐..죽어버릴까, 라는 구간반복 무한재생.
어제 엄마가 사왔던 정장바지는 엉덩이가 숨쉬기 힘들었다. 허리는 여전히 31-32정도에서 유지되고 있고 배도
그닥 변질되지 않았지만, 어느새 방심한 엉덩이에 살이 올라붙고 있었다.
우울해져서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서. 그래서그래서. 오늘 오후 두시간동안 헌혈이랍시고 땡땡이치고는 '죽음'을 타이밍좋게 체험했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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