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신분으로 처음 받은 예비군 훈련은 30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 나흘동안..길고 지루하게 이어졌다.

어떻게든 시간을 잡아 죽여보려고 MP3플레이어도 가져갔고, 시사인 이번주호나 타임지같은 잡지도 몰래

꿍쳐갔으며, 스도쿠 게임기도 들고 들어갔지만 별무소용. 일단 전투복을 걸치고 군화에 발을 꿰고 난 이상

몸은 무거워지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그에 더해 방탄헬멧(혹은 하이바, 혹은 철모..라 불리는 것. 아직 우리말로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단어들이 꽤나

있다. 마치 "안경닦는거"라 불리는 수건처럼.), 수통에 덜렁이는 탄띠에 환갑은 제대로 넘었을 칼빈소총을

장착하고 나니 걸음걸음이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더위. 어찌나 덥던지. 04년 8월에 이집트 배낭여행갔을 때, 특히 룩소 왕의 계곡즈음을 자전거로

돌아보던 때의 그 막막하고 숨통을 조르는 더위의 재림. 그때는 하루에 1.5리터짜리 물병을 네개씩 마시면서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 다녔다지만, 지금은 '전투력을 저하시키는' 전투복을 차려입고 점심시간에 충성마트를

잠깐 이용해 아이스크림 한개쯤 사먹을 자유 뿐.


쉴새없이 들리는 사격장으로부터의 총성, 새로 개발된 연습용수류탄의 그다지 연습용스럽지 않은 폭발력과

파열음, 사열대에서 삑삑거리는 마이크에 대고 질러대는 병정놀이 오타쿠들의 쇳소리..소리없이 내리쬐는

절대적인 태양광선의 아우성까지 더해서, 귀가 먹을 지경이었다. 시간을 이렇게 죽이지 못해 안달해야 할만큼

내가 한가하거나 여유롭지가 않은데, 이것저것 맘에 걸리는 것도 많고 몸을 보채는 것도 많은데, 싹뚝

잘라낸 4일간의 시간동안 그저 멍하니 시간이 빨리 흐르기만을 바래야 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난 납득되지

않았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둔탁하고도 거친 말들과 그 뒤에 버티고 선 사고방식들, 그 모든 걸 비주얼하게

보여주는 얼룩덜룩한 국방무늬가 가시처럼 날 쿡쿡 찔러댔고, 난 처음 입대할 때처럼, 처음 예비군 훈련 받을

때처럼, 그렇게 하나도 익숙해지지도 타협하지도 못한 채 그저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켰다.


사람 죽이는 법을 까먹지 않게 하려고 우르르 불러모았댄다. 북괴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수류탄을 던지랜다.

책임이 있으니 의무도 있는 거랜다.(이게 무슨 말인지..자유가 있으니 책임도 있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자유 운운하기엔 넘 척박하고 열악한 상황이니 병정놀이오타쿠들, 교관들도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나름 변형한

거겠지.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라는 속편하고 살짝 효험도 있다는 체념 역시 무기력해지는 이상한

공간인 게다, 군대란.) 비상식으로 가득차서, 외려 상식을 들고 말하기엔 유치해 보이고 까칠해 보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래도 4일간의 소득을 하나 꼽으라면..군내 식당에 붙어있던 광우병 관련 정부홍보물들을 죄다 잡아 찢고

왔단 사실 정도? 그리고 스도쿠를 한 30판 했고 잡지를 두권 봤으며 팔뚝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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