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 이외의 사람을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과도 거의 아무런 유대없이 혼자 살며, 친구, 직장동료라거나 애인도 만들지 않고 '사람은 혼자 죽는다'는

신조를 갖고 다만 자신이 세운 목표만을 위해 하루하루 조용히 살고 있다. 이따금 강연을 하러 가면, 가방을 

앞에 꺼내두곤 그 가방에 불필요한 책상 위 소품들, 챙기고 책임질 자신이 없는 친구/가족/배우자, 그 

하나하나를 모두 담아서는 자크를 닫고 내다버리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어서 더욱 어울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생면부지의 다른 회사 직원들에게 해고통지를 하는 역할.

그 일은 상대에 대한 집중과 배려, 세심한 말솜씨와 '밀/당'의 스킬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다시

상대를 볼 필요가 없는 일회적인 일이기도 하다.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 자살하던 말던, 그는 단지 소심한

그 회사 사장 대신 통지를 전하는 역할이었을 뿐이니 알아야 할 일도 아니고 관심도 없다는 투다.


그는 미국 전지역을 비행기로 커버하며 온갖 마일리지와 특급회원권을 향유한다. 비즈니스석과 특급호텔의

안락하고 편안한 서비스. 그 공간에서 역시, 그는 신경써야 할 소소한 장식품이니 청소니 빨래니, 책임져야

할 강아지나 가족 따위 없는 거다. 요컨대 그의 생활은 철저하게 본인 자신에 맞춰져 있고, 책임질 수 없는 본인

능력 이외의 부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부분은 그의 생활 '밖'에 있다. 


굉장히 솔직하기도, 또 굉장히 어린애스럽기도 한 태도다. 어린애같은 태도가 아니라면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라고 이토록 명쾌하고 단호하게 선을 그을 수 있을까. 그런 태도는 또 굉장히 매력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감당할 자신도 없고 벅찰 거라는 걸 알면서 꾸역꾸역 사람들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기대를 하지만, 애초

그런 거짓말은 하지도 듣지도 않겠다는 거니까. 자신은 아직 '지상에 내려와' '청소하고 빨래하고 기념일을

챙기며' 사람들과 우격다짐하면서도 행복한 척 연기나 하는 삶은 싫다는 거니까. "쿨하다"는 표현이 딱 맞다.


영화의 최대 장점은, 그렇게 뻗대는 그를 '교화'시켜 지상으로 내려보내려 안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물론 (어쩔 수 없는 인간이니만치) 동생의 결혼 앞에 가족애를 실감키도 하고, 24시간 늘 청결하게 유지되는

화려한 특급호텔과는 판이하게 남루한 전셋집에 익숙해보려는 노력도 하지만,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는 거다. 아직은 up in the air, 조금은 더 자신의 방식으로 '책임지는 관계'를 최소화한 채

살겠다는 거다.


자신 이외의 사람을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지상'으로 내려가는 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는 라이언

(그리고 조지 클루니)의 순수하고 도덕주의적인 태도엔 사실 반대다. 덕분에 그 연세에도 소년같은 순수함과

섹시함을 과시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그가 해고를 통보했던 사람들이 한바탕 울분을 토하고 격한

언사를 내뱉은 후에는 꼭 가족들과 함께임을 생각했듯, 어쨌든 그건 자신이 준비가 되고 안되고를 떠난 문제다.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을 책임질 준비가 된 사람을 '어른'이라 한다면, 어른이 될 준비가 되어서 어른이 된

사람이 어딨나. 그냥 피할 도리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거지, 라이언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비행기 안, 천만 마일리지를 달성한 그 자리에서조차 기장은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우린 돌아갈 곳이

필요하고 그 곳엔 어쩔 수 없이 책임져야 할 거미줄같은 관계망이 버티고 있는 거다. I'm from here. 라는 그의

있어보이는 듯, 그렇지만 엉성한 대답이 살짝 망연하게 들렸다. 아마 그도 알고 있었을 거다. 가방에 넣고 자크를

잠가버릴 필요도, 잠가버릴 수도 없는 게 다른 사람들 속에 어느샌가 품어진, 내 속에 어느샌가 품어진 서로의

조각들이란 것. 언제까지 호텔 직원과 비행기 승무원들이 일방적으로 챙겨주는 세상에 머물 수만은 없다는 것도.


그는 조금씩 지상으로 착륙하는 중이다. 책임을 지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도,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도

모두 쉽지 않단 건 이미 경험했으니 조금은 더 연착륙의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몰랐는데 '카모메 식당'과 감독이 같다. 모타이 마사코라는 주연 배우도 세번째 여자로 등장했었다. 알아채기

전에도 왠지 두 영화가 느낌이 같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조용한 이야기일 거라고.

사실은 그런 첫인상과 감독과 배우 한 명 빼고는 많이 달랐다. 가끔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담백하거나 심지어

능청스럽다 싶도록 느그지게 빼무는 카메라의 시선은 닮았지만, 느낌은 영 달랐다.


전통과 인습, 혹은 전통과 전설. 그 애매모호하고 불분명한 '가치'를 두고 벌이는 싸움을 이렇게 유쾌하게,

또 깊이있게 표현한 영화는 잘 못 봤던 거 같다. 금테둘린 채 무겁게 먼지 속에 가라앉은 '전통'의 이미지가

보기만 해도 앙증맞은 '바가지머리'로 치환되어 버린 순간, 파리의 최신유행 빠숑(fashion)과 촌티 사이를

위태하게 넘나드는 그 스타일을 경계로 꽤나 근본적인 이야기가 작은 마을 속에 꼭 맞게 들어앉았다.


저 아이들은 나중에 사회의 동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바가지 머리' 마을로 들어온 '찰랑찰랑 갈색머리'

외부인을 배척하거나 질시하는 일변도가 아니라, 내면에 숨어있던 질투와 부러움을 성찰하고 솔직히

소리내어 고백할 줄 안다. 외부인을 맞아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기적인' 성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친구가 되고 덩어리로 뭉쳐든다. 그렇게 열린 채로, 나이많은 사람부터 무서운 엄마까지 모든 사람들이

'전통'이라며 예스라고 할 때 쉼없이 물음표를 매달고는 급기야 전통에 반대하며 가출도 감행하고 시위도

하는 거다. 커서 멋진 노를 외치는 멋진 데모꾼이 될 거다.


비록 살색그림 가득한 빨간 책에 열광하고, 슬슬 철봉에 거기도 문대는 맛도 알아버린 장난꾸러기 녀석들이긴

하지만, 만약 '어른이란 타인을 배려해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꼬맹이 아버지의 기를 쓰고 멋져보이려는 말이

맞다면 녀석들은 이미 어른인지도 모른다. 마을의 룰, 규칙, 전통보다 먼저 새로 들어온 사람을 생각하고,

그런 '전통'이 깨져나갈 때 어쩔 수 없이 아프게 될 사람을 또다시 먼저 생각하는 녀석들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바가지머리를 유지하는 건 누군가에게 싫은 일이 되니까 반대지만 그렇다고 바가지머리를 없애는

건 또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니까...어째야 할지 모르겠다며 우는 거다.


그 아이들과 미용실 아주머니의 화기애애하고 다정한 분위기는 수미상관, 그렇지만 아이들의 머리모양은

바뀌었다. 바리깡으로 밀리고 나서는 아직 형태를 잡지 못했다. 다시 바가지 머리로 길들여지지는 않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착하게도, 강한 척 하지 않고 괜찮은 척 하지 않고 울어버렸댔다. 무언가를

바꾸고 변화시킨다는 건 그런 아픔을 모두에게 남긴다는 걸 고백함에 다름아니었다. 아주머니 역시 어른이니까

그 어른스러운 아이들에게 우악스럽고 일방적인 아픔을 전가하진 않을 거다. 어른이니까 조금은 더 양보하고

참아주면 좋겠다.


바가지 머리, 그런 거 하나를 바꾸는데도 이렇게 다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 깔끔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갈리지도 않는다. 어쩌면 모든 건 변하며 사람은 늙으니까, 실은 모두가 피해자인지도 모르겠다. 어른인 척은

아니어도 최소한 나잇값은 해가면서, 상대가 짊어지고 있는 아픔, 짊어지게 될 아픔은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생떼 피워가며 빨갱이니 뭐니 난동피우는 늙은이들, '反기성세대'라며 갈아엎자느니

죽이자느니 증오의 언어를 뱉는 젊은이들, 둘다 촌티 풀풀 나는 바가지 머리다.



어디나 사람사는 곳은 똑같다지만, 핀란드는 다르다. 열심히 바닥을 훑으며 줏었던 버섯들을 어느새 흘리고

올 만큼 사람을 홀리는 숲이 있어서라고는 했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소박한 식당에 모여앉아 밥을 챙겨먹고

커피를 마시는 그네들의 손놀림, 몸가짐, 온몸에서 풍기는 분위기,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여유로움'과

'아늑함'이라는 단어를 깊이깊이 각인시킨다. 낯선 타지로 여행을 나선 사람의 눈으로 보아서 그런 걸까.


'성공'이란 자기 억압의 결과물이라 했던가. 그냥 여기서라면 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 눌러 앉을 수도,

지도를 펼치고 눈감고는 아무데라도 찍어서 떠날 수도, 여행가방의 분실을 핑계삼아 아무 기약도 계획도 없이

머무를 수도 있는 건데. 그 곳에는 '하기 싫은 건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세 여자가 있었고, 그녀들은

가게 분위기를 만들고 또 그대로 젖어든다. 정정해야겠다. 핀란드라 다른 게 아니라 그녀들이 다른 거다.


핀란드가 아니어도, 그녀들이라면 어디서든 숲을 살갑게 헝클어뜨리는 바람을 불러일으킬 거 같다. 어디서든

빵을 굽고 주먹밥을 쥐며 손님들을 다정하게 불러모을 거 같다. 그런 가게가 근처에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마실 커피에 마법의 주문을 속삭여주는 주인이 있고, 소박한 가게의 인테리어에 맞는 앞치마를

깔끔하고 단정하게 걸치고 있는 점원이 있고. 그런 가게가 있다면 잠시 핀란드로, 어디로던 여행을 떠난

기분으로 앉아있을 수 있을 거 같다.


물론 그녀들도 언제나 그렇게 머물러 있지는 않을 터다. 완벽하다 싶은 조합은 하염없이 멈춰있을 수는 없고,

누군가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아쉬워 하며 빈자리를 쓸쓸해 할 거다. 몸이 떠나지 않더라도 마음이 떠나

더이상 이 잔잔하고 고요한 '여행'의 동반자이기를 부정하거나, 시덥잖은 농담에 푸짐하게 웃어줄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 데모, 그렇지만, 세상의 끝날에 좋아하는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써서 만든 맛난 것들로 파티할 때 다시 모이리라는 기대만 있다면야. 결국은 다시 모으고 모일 수 있으리란

기대만 있다면야 그야말로 다.이.조.브.

참 니가 고생이 많다. 입으로만 친구찾는 녀석들에 낚여서 정선에 훅 떨궈져서는, 잘못 찾아간 펜션에서

박대당하고 신종 꽃뱀에 물려 바지까지 털리고, 과잉친절을 베풀고는 바지를 벗겨내려는 아저씨를 만나는가

하면 기껏 만난 친구 녀석은 전 여친과 잤다는 고백이라니. (비록 오해가 풀려 전 여친이 아니라 여동생이라는

'충격적 반전'이 있지만, 그닥 고백의 강도가 떨어지지는 않는 거다.)


실은 이 녀석, 그 모든 '비극적인' 상황을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정선에 놀러가자는 친구들 꼬드김에도,

경포대에 가서 바다라도 보라는 친구 권유에도 항상 반문하는 거다. 거기에 뭐가 있는데? 거기 가면 뭐하지?

내가 바뀌지 않았는데 내가 놓인 곳이 변한다 해서 현실이 변할리 없다는 냉철한 판단이요 괜한 돈 낭비하며

멀리까지 나가봐야 돌아오면 똑같다는 실리적인-냉소적인-계산이 이미 끝난 건지도 모를 일이다.


짧막하게 줄여 말하자면 거기엔 술이 있었고, 거기 가서는 술을 마실 일만 있었다. 그 고생들, 무려 오박 육일에

이르는 대장정에는 늘 술이 있었다. 정선에 도착해 처음 들어선 해장국집에도, 티비와 함께 하던 허름한 펜션

방에도, 경포대의 횟집과 어딘가의 여관방에서도. 술은 사람들과 처음 얽히는 단초가 되기도 했고, 혹은 이미

설켜있는 관계를 해소하는 매개가 되기도 했다.


사실 까칠하게 보자면 꼭 술이 있어야 사람들과 말을 트고 관계를 쌓아나가느냐, 형님아우하며 부어라 마셔라

해야만 그렇게 친밀감이 쌓이고 신뢰가 쌓이냐, 등등 눈살을 찌푸리며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녀석이

근 일주일 동안 주종 가리지 않고 마셔댄 결과 몸도 축나고 나중엔 술잔도 기피하는 '교육적'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제대로 된 음주문화를 선도하려는 의도 따위도 없을 거고 말이다.


다만 그냥 오감에 기대어 말하자면, 영화를 보면서 여행이 땡기고 술이 땡기고 또 새로운 인연이 땡겼다.

주인공 혁진이 드디어 서울로 돌아가려는 찰나, 벤치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어오는 설레는 가능성의 그녀.

그녀와 그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순간 그들이 강릉으로 함께 떠나 술을 마시는 그림이 떠올라 버렸다. 다소

들뜨고 경계심이 풀린 그들, 여행 중인 그들, 음주 중인 그들, 그리고 새로운 인연 앞에 설레어하는 그들이다.


왠지 여행과 술과 인연을 굉장히 설득력있고 강력한 끈으로 칭칭 동여매어두는 삼위일체의 신비. 꼭 술이

아니어도 된다지만 역시나 술이란 '황홀한 마취와 각성의 액체', 상대와 자신의 마음/몸을 무장해제시키고

피가 들끓게 만드는 그건..곧 여행, 그리고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감과 통하는 거다. 혹 그가 지금 눈앞의

그녀와 함께 떠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어디메쯤, 서울로 돌아와 다시 어디론가 흐르는

그 골목길 어귀 어디메쯤에서라도 인연은, 그리고 술집은 항상 기다리고 있으니까.



* 다만 '숙취'는 조심할 것. 혼자 떠난 여행에서 김빠진 기대감만 발로 툭툭 차며 돌아오는 일이란 건

부지기수인 데다가, 더러는 '변태'도 만나 단돈 육천원에 몸값을 흥정해야 하는 굉장히 유니크하지만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경험도 쌓이기 마련이니.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마음자리 곁에서 멀리 떠나있는 가족, 밥벌이용 밥통 이외엔 공유하지 않는 직장 동료들만 있다면 더더욱.


한규(송강호)가 그렇다.

그에게는 '빨갱이 사냥'하는 국정원 대공부서 일이나 '동남아 신부 사냥'하는 흥신소 일이나 별반 '밥통' 이외의

의미는 담기지 않았다. '국민들을 발뻗고 자게 한다느니' 따위의 말이야, '가정의 행복을 되찾아준다'는 명분과

똑같이 속편한 자기암시거나 위무일 뿐 그저 그는 딸내미 집 한 채 사줄 돈만 모을 수 있으면 족하다.


그런 한규라지만, 울리지도 않은 전화에 대고 살갑게 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다. 그는 결국, 외롭다.


지원(강동원) 역시 마찬가지다.

국정원에서 정리해고당한 한규처럼, 지원 역시 작전 실패로 배신의 낙인을 찍힌 채 '조국'으로부터 내쳐진다.

사실 '장군님'에 대한 그의 사상과 정조가 얼마나 투철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를 움직이던 힘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국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내와 딸이 있는 곳, 조국.


멀리 떨어진 가족,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6년여 시간을 기다렸지만 참 쉽지 않다.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란 때론, 의심스럽고 위험해보이기만 하는 낯선 남자보다 못해 보일 때도 있는 거다.


그래서 그들은 기대어 선다. 사람 둘이 서로 기대어 선 사람人의 형상에 걸맞도록, 그렇게 외로움을 삭인다.

가족으로부터, 조직으로부터, 남과 북 두 강력한 국가로부터 내쳐졌거나 강제적으로 떨어져나간 채

외롭던 그들이다. (국가 자체가 거대한 병영인 북한에서 떨어져 나간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국정원이라는

국가 핵심조직에서 튕겨나간 한규가 서울이 아닌 지방을 전전하며 '외국인'신부들을 잡는다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 아닐까.)


쉽지 않았다. 한 명은 명색이 전직 국정원 직원-게다가 '간첩신고'의 의무와 상금 수령의 권리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인 데다가, 다른 한 명은 최고도의 살상기술을 익혔을 남파 간첩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내면화되어 있을

반공회로와 반자본주의 적개심과 공포심은 어찌 다독거린다 하더라도, 상황과 조직이 내버려두지 않는다.

남한은 북한의 핵을 부르고, 북한은 핵으로 으름장을 놓고, 폐쇄 회로 속에서 꼬리를 무는 남북, 북남 두 국가의

대치 상황과 함께 '맥'장군님과 '김'장군님을 추앙하는 사람들의 득달같은 기세는 언제든 파국을 부를 수 있다.

그들의 '의리'는 통일보다 어렵다.


그렇지만 외로움이 해냈다. 인간이 외롭단 건, 때로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나보다. 빨갱이를 잡고

외국인신부에 수갑채우던 그가 '인간적으로' 바뀌었고, 웃음조차 사치인 양 냉막하고 까칠하던 그가 어느새

뜨거워졌다. 그런 그들의 관계가 굉장히 멋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마침 두 사람 다 외롭지 않았다면 시작조차

되지 못했을 그런 드라마, 영화가 마치고 나니 가슴이 따뜻해졌다. 



p.s. 굉장한 스포일러 하나,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이 척박한 세상에 그들 둘만이라도 해피해질 수 있다니,

가슴이 더 훈훈해졌던 이유 중 하나. 둘 중 하나라도 죽었으면 시니컬함이 더욱 심해졌을지도.


p.s.2. 그런 의미의 애국심이면 그래도 참아주고 인정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지원이 그의 나라,

북한에 쏟는 헌신과 애정이 그렇듯,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게 각별한 사람들이 있는 땅이어서 사랑하고 아끼는

거라면 좋겠다는 생각. 그건 다른 곳과의 경쟁심이나 우월감을 수반하지 않는 '나라 사랑'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속이 메슥거릴 정도로 선혈이 낭자했다. 실감나게 토막나버린 팔다리는 말할 것도 없이, 동강난 머리통과

허리째 베여나가 무슨 햄덩어리같은 인체의 신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중에는 그냥, 영화배우 '레인'이

칼을 휘두를 때마다 썰려나가는 적들의 몸뚱이를 보면서 정육점의 전동회전칼이 생각났다. 윙~ 소리나는

그것에 큼직한 고기를 갖다대면 살이고 뼈고 거침없이 썰려나가는. 아, 물론 약간의 김칫국물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효과와 외마디 비명소리 정도는 추가되어야겠지만.


액션 영화의 스토리란 거야 뭐, 뻔하니까 딱히 기대하는 것도 없었지만 영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건

딴 생각이었다. 이 영화에 비, 혹은 레인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 영화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구가 생겼을까.

그러니까 이 영화가 관객들, 최소한 국내 관객들에게 '소구'하는 요소는 레인이 주연으로 나온다는 점

이외에 뭐가 있었을까 싶었다. 적어도 난 그랬다. 딱히 액션을 다른 장르에 비해 즐기지도 않고, 새빨갛고

끈적한 느낌의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기는 비쥬얼이기만 하면 족한 것도 아니었으니. 무슨 흡혈귀도 아니고.
 

영화만 놓고 보자면 그냥 그랬다. 그다지 여운이 크지 않았던 그야말로 살짝 얹힌 드라마, 뻔하고 간결한

스토리, 만화같은 액션, 과도하다 싶을만큼 잔인하게 선정적으로 묘사된 죽고 죽이는 장면들. 결국 그 비쥬얼에

집중해서 그걸로 승부를 보려한 영화였던 것 같지만, 킬빌에서 보였던 핏빛잔혹한, 그렇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느낌마저 들었던 영상미보다는 많이 모자라 보였다. 훨씬 잔인하고 리얼하게 많이 죽어나갔지만 뭐랄까,

아무리 대량의 피가 사방에 흩뿌려져도 부담감과 속의 메슥거림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다.


아름답지 않았다. 불편하기만 했다. 그래서일 거다. 숱한 고비를 넘기고 그야말로 혈겁의 전투를 계속해온

레인의 몸에 남은 상흔들이 처절해보이고 그래서 아름답고, 그런 종류의 미감을 끄집어내기보다는 그저

너덜너덜해진 '걸레'처럼 보였던 건. '핏빛 아름다움', 뭐 그런 류의 미감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가 적들과 주고

받는 합들 사이로 번져나가는 붉은 피에서는 그다지 그런 미감이 건드려지지 않았다. 영화가 끝날 즈음 성한곳

하나없이 신체의 전면과 후면 모두 커다란 칼에 뜯긴 자국이 몇개씩 생겨난 레인이 우뚝 선 모습은 징그럽기만

했다.


레인의 연기가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액션 영화에 액션 이외 연기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애초 영화가 추구했던 '미감'의 문제 아닐까 싶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그런 '핏빛 미학'을 추구한 게

아니었던 거다. 그저 난도질하고 죽이고 피가 사방에 적나라하게 튀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뭐,

그렇다면 기존 헐리우드 영화가 '동양적 소재'에 기대어 그려내려 했던 '핏빛 아름다움'의 정형과는 상당히

다른, 새로운 시도가 되는 셈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그냥 좀 생각없이 만든 삐급영화였던 게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번에 전지현이 일본식 교복입고 칼휘두르던 '블러드'를 보면서도 느꼈던 거지만, 배우 한 두명이 헐리우드

작품에 나간다고 해서 그들이 '한국' 배우로서의 대표성을 갖는 건지, 헐리우드에서 그들이 '한국' 배우로서

인정받는 건지는 대단히 회의적이다. 그들은 이를테면 '배우 올림픽'에 한국이라는 나라 국가대표로 나간 게

아니라, 그냥 헐리우드에서 필요한 동양적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한 일개 배우인 거다. 괜히 한국 배우의

헐리우드 진출, 이렇게 대서특필하고 주목하고 자랑스러워할 게 아닌 거 같은데. 오히려 헐리우드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소비하고 왜곡해 나가는 '동양', 혹은 '한국'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만 쓰이는 소모품이 되는 건

아닐까. (배우 본인들은 헐리우드 진출의 후광을 업고 돈도 벌고 명예도 얻겠지만.)


이 영화만 해도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동양의 이미지들이 덕지덕지 포장된 거다. 그건 영화가 어색한 이유 중

다른 하나일 수도 있겠다. 한국인 관객들에 익숙한 '동양'의 이미지와 컨텐츠가 왠지 익숙한 듯 낯선 모습으로

헐리우드에서 재구성되고 있으니, 도무지 몰입이 안 되는 거다. ('동양'에 대한 백지 이미지를 가진 미국이나

서구에서야 그냥 그런가부다 하고 흡수되는 이미지겠지만 말이다.) 주로 일본에서 연원하는 국적 불명의

동양적 이미지들, 상당히 강조되어 노출되는 레인의 '동양적 생김새', 가족을 중시한다 여겨지는 '동양적

가치관', 게다가 영화를 보면서 이건 일본관객들이 불쾌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동양적 복수'의

방식, 묶어놓은 사람에 복수를 한다고 칼질을 하는 것까지.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세탁소의 한국인 주인은

차치하고라도, 마이크를 쥔 힘센 '서양' 헐리우드가 동네방네 '동양'은 이런 곳이야 떠벌리는 꼴이다.


물론 한 술밥에 배부르랴, 는 지적이 나오리란 거야 빤히 예상되는 바이지만, 요는 그거다. 한국배우 한두명의

진출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한국의 국격이니 위상이 중요하다 생각한다면) 헐리우드에서 한국을, 동양을

다루고 소비하는 방식의 단무지스러움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한국배우들의 헐리우드 진출이

늘어난다고 해서, 그리고 그게 이슈가 되어 해당 영화가 쉽게 홍보된다고 해서 이득보는 사람이 누굴까.

결국 레인이 나온다는 사실만 빼고나면 전혀 잘 만들었단 생각이 안 들었던, 딱히 인상적인 것도 없고 울림이

남는 장면도 없던 별볼일 없는 영화였다고 고백하는 셈이다.




날것의 무언가를 기대했는데 굉장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쉼없이 쏟아져나오는 육두문자와 걸레 물고

내뱉는 온갖 말들조차 세련되었다거나 세련되어서 어색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김기덕의 영화들에서 나왔던

막말들보다도 더욱 강하고, 진짜같았다. 리얼했다. 여기서 '리얼했다'는 말은 흔히 조폭 코미디나 깡패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관용어구'같은 욕들과 억양이 아니라, 정말 진짜로 '마음을 담아' 욕을 하고 있어 보였단 의미다.


세상 무서운 것 없이 경찰을 폭행하고, 거침없이 욕을 달고 살며, 아버지를 밟아 짓이기고, 길가는 여자에 침을

뱉으며, 여자에 주먹질도 서슴치 않는 사채 해결사.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다. 대화와 소재와 주제, 스토리까지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막장인데 대체 '세련되다'는 느낌은 어디서 왔을까. 세련된 거라 함은 보통 디테일까지

은근하지만 꼼꼼하게 안배되어 있으며, 어거지스럽거나 촌스러운 부분을 최대한 배격한 것을 이르는 것 같다.


아마 그런 부분 아니었을까. 남대문시장에 여자와 아이와 함께 놀러나갔던 남자, 그전까지 항상 쉼없이 담배를

뻐끔대던 남자의 입에 물린 담배가 불이 붙지 않은 채 빙빙 돌고 있던 어느 스쳐간 장면. 또, 아이와 여자가

금세 친해지고 살짝 겉도는 느낌을 받은 남자가 어색하게 주머니에 쑤셔넣은 손을 아이가 슬그머니 끌어당겨

잡아주는 장면. 여자가 남자의 이복 누이의 집에서 서둘러 일어나려는 남자에게 "갈테면 혼자 가"라는 식으로

당돌하게 말하면서도 문 앞을 가로막은 채 주저앉아 양파니 파를 다듬는 장면. 그리고..남자가 손목을 그은

아버지를 들쳐업고 뛰면서 내뱉는 헉헉 끊어지는 단어들, 중간중간 미처 뱉어지지 못한 채 삼켜진 단어들을

상상하게 만드는 장면. 남자가 입안가득 피를 머금고 꾸륵꾸륵대며 던지는 몇마디 짐승소리 같은 그것들.

너무나 함축적인데, 그러면서도 또 너무나 생생하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 역시 굉장히 좋았다. 양익준의 눈빛은
 
특히나.


세련되다는 느낌은 무엇보다 선정적이고 표피적으로 동원해낸 막장스러움이 아니라 그냥 진정한 막장을

보여준 데서 나온 것 같다. 왜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듯이, 극단으로 밀고 간 막장은 오히려 극단의 세련됨과

통하는지도 모른다. 어정쩡한 선에서 타협하거나 우물쭈물하는 게 아니라, 거침없이, 끝까지 보여주면서

꾸미지 않는다. 어쩌면 그랬기에 더욱 이야기에 흡인력이 생기고 '진심'이 담겨 버린 게다. 이 영화, 어정쩡한
 
자세로 보면 왠지 한 대 호되게 두들겨 맞을 만큼의 서늘함과 기백을 품고 있다. 실제로 양익준은 이 영화를

자신의 지난 시절을 해소해내기 위해, 오로지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어쨌거나 굉장히 날것이면서도 굉장히 세련된 이 영화는, 결국은 사람을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어버렸다. 아니,

그보다는 '굉장히 우울함'이라는 연못에 빠졌다가 흠뻑 젖어서 기어나온 느낌이랄까. 써늘하고, 소름이 돋고,

너무 먹먹해서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가 끝났다는 것만으로 왠지 따뜻하고 안전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안심마저

들게 만드는 영화다. 이 영화의 단점이랄까, 나무랄데없이 행복해보이는 풍경과 최악의 상황을 맞바로 붙여

놓는 거침없는 모양새와 비쥬얼과 사운드를 필요에 따라 드문드문 생략한 채 어느 하나에 집중시켜 버리는

영리한 머리씀씀이. 그런 것들이 일종의 뒤집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이렇게 망가지고, 이렇게

형편없어져도 괜찮구나. 그래도 어엿하게 살아갈 수 있구나, 하고. 그건 분명 단점이라면 단점이고, 또 분명

장점이라면 장점인 게다.


내가 너무 쉽게 예상해 버렸지만, 예상치 못하게 이뻤던 장면 하나.

(한참 골몰하던 남자,) "야 한연희, 두년희, 세년희, 네년희 이 썅년아, 이 미친년아." "아씨 이 미친놈 진짜."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골목에서 남자가 여자에 침을 뱉고 주먹을 날렸을 때만 해도, 남자가

그녀 앞에서 이렇게 나름의 농담을 던지려고 애쓸 줄은, 그래서 귀여운 모습을 보이리라곤 생각도 못했다.

문장을 보는 것으론 느낄 수 없는 맛, 그리고 둘 사이의 내밀한 교류를 모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맛. 저런

대사들이 난무하는 사이에서도 그들의 눈빛만 좇을 수 있다면, 비위가 약해도 한번쯤 꼭 시도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영화다. 개인적으로 기대가 꽤나 컸던 영화, 기대 이상이었다. 김기덕의 은퇴 후, 이런 감독이 나타난 건

축복이다.






* 스포일링의 가능성은 최대한 비켜내고자 하는, 영화를 보고 삐쭉삐쭉 뻗어나간 사변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은 비켜내기로 하자. 개인적으로는 사형제도에 반대하지만 자칫-아니 백방-구구절절히

사형을 반대한다고 처벌에 반대한다거나 정당한 죗값을 주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라느니, 하는 이야기까지

주렁주렁 엮여야 할 것은 뻔하니, 그냥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고 싶다.


사람을 죽인다. 냉정하게 말하건대 별 거 아니다. 실수로, 사고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심지어 스스로

목숨줄을 놔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 생명이란 게 얼마나 취약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여느 영화에서처럼 목 한번 돌려주거나 숨통에 바늘 하나 꼽는다고 켁, 나자빠져 버리지야 않겠지만 그냥 목에

밧줄 한번 감아서 땡겨주거나 전기로 지지거나, 여차하면 독액이 든 주사액을 주입해버리면 그뿐이다. 실제로

사형은 그런 식으로 집행된다. 어쩌면 흔히 벌어지는 일들과 같이 차에 치이거나 높은 곳에서 밀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번거롭고 수고로울지 모른다.


죽이는 건 별 거 아니다. 사람의 육신을, 생명줄을 끊어버리는 건 쉽다. 문제는 그 임팩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 밖에서 보기엔 법원의 판결이, 공문 한 장이, 국가의 이름 하에 국가가 사람을 죽이는 거였지만,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아무리 국가의 공무(公務)라는 휘광 뒤에 숨으려 해도, 사회의 법과 정의를

위해서라는 대의를 내세우려 해도, 혹은 피해자의 아픔과 가해자의 비인간성에 대한 인간적인 공명이라 해도,

변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는 건 사람이다. 비록 그게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거라 해도,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신성하고 지고한 '초인간적인' 국가 따위 실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합법적 폭력'을 휘두르는 부르조아

소위원회..한줌의 사람-그들 역시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과격한 거일라나.)


갈림길이 나온다. 이사람은 죄를 뉘우치(는 것처럼 보이)고, 죄값도 치렀(다고 생각하)으며, 결과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사람은 죄를 뉘우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고, 사회에 돌아가면 계속 죄를 저지를

(처럼 보)이고, 갱생의 여지가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사람을 살릴지 저사람을 살릴지,

누굴 죽여도 되고 누굴 안 죽여야 할지의 갈림길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간과 '신'의 갈림길이다. 앞선 문장

중간중간을 얼기설기 묶어둔 괄호들, 그게 인간이 신이 아니라는 징표들이라고 이야기하면 너무 오바하는

걸까. 다른 생명을 판단하고 소멸시키는 건 신, 혹은 만물을 주재하는 운명 따위가 존재한다면 그가 맡을

역할이지, 동일한 생명, 인간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과 저사람을 죽일 때의 죄책감이 다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아무리 강호순 사건 때나

조두순 사건 때 골프장 갤러리들처럼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쳐죽일 놈, 광화문 네거리에 육시를 할 놈, 어쩌구

막말을 내뱉던 사람들도 밝고 맑은 정의로움과 숭고함을 유지하며 사람을 죽일 수는 없을 거다.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니까 막말을 하고 저주를 내뱉고 '죽여라'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다. 설혹 '내가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해도, 또 설마 실제로 직접 손을 써 죽여버린다 해도, 영화 속 집행자들처럼 뭔가가 하나둘씩

무너져버리고 말 거다.


처음에 말을 잘못한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면서 사형제도를 건드리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사람을 사람을

죽이게 만드는 것이 그간 주목받지 못해온 사형제도의 비인간적인 한 측면인 거다. 사회의 존속과 유지를

위해, 다른 사회구성원들의 안녕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집행'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상한 게 있다. 왜,

집행의 선고자들, 이 사회와 제도의 정점에 있는 자들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가. 저승에 있다는 

길고 긴 젓가락을 휘두르듯, 그렇게 누군가 다른 사람을 들어 '집행'시키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격무에

시달리거나 피곤해서는 아닐 텐데. 


"우리는 망나니였어" 어쩌구 하는 대사가 있었다. 사회를 위해 법을 집행하는, 좀더 적나라하게는 살인을

떠맡는 존재들. 사회를 위해 사람을 죽이는 그들 안의 무엇인가는 어쩌면 사회로부터 죽임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걸 또 다른 '살인'이라 부르기는 무리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져

버리는 건 틀림없는 거다.



* 고백 하나, 사실 '사람으로서의 무엇인가'가 무너지는 순간은 꼭 정말로 사람을 죽일 때만은 아닌 거 같다.

거리에서 전경들과 마주 선 채 투석이 난무하거나 파이프를 맞대고 있을 때, 전쟁터와 같은 그런 상황에서 역시

분노와 공포, 혹은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뭔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 뭔가

눈먼 야수같은 광기가 뿜어지는 듯한 감각은 두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무엇이었다. 단지 문제가 사형이

살인인지 아닌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을 조장하는 시스템, 문화, 분위기, 그리고 감수성의 차원까지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하는 이야기다. 꼭 생명을 말그대로 끊어버려야 살인이 아닐 거다.

(물론 당연히도 이른바 '폭력집회'가 잘못되었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과 정책의

문제를 틀 내에서 해결치 못하고 거리에서 파열음을 내게 만드는 기제 자체가 비인간적인 상황을 이끈다는

말이다. 2미터 앞에서 돌을 던지는 보호장구 완비한 전경들이나, 자위적 차원에서 무장을 한 시위대, 문제의

본질은 그 너머에 있다.)




* 스포일러 없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만..


어느 예술작품이나 그렇지만 특히 SF나 환타지류의 작품들은 특히나, 현실에 대한 은유와 시사점이 더욱

눈에 밟히게 마련이다. 맨 땅에 헤딩하듯 백지에서 뻗어나온 상상력이 아니라 감독,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소구할 수 있는 특정한 현실을 울룩불룩 비틀고 치환했기 때문에 그럴 거다. 이미 이 외계인'떼'가 등장하고

거대한 우주선이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떠있는 굉장한 스케일의 SF영화 역시, 빈부격차, 철거민, 성적 소수자에

이주노동자, 심지어 '호모 사케르'(이미 서평을 올린 적 있다. [리뷰] 호모 사케르(조르조 아감벤, 새물결))라는
 
개념까지 동원해서 해석되고 있다.



워낙 다 맞는 지적들이다. 영화 중 드러나는 외계인과 인간의 대치 상황, 역관계를 고려하면 외계인은 구조적

빈민, 철거민, (지탄받는) 동성애자라거나 이주노동자, 그렇게 이 사회에서 밀려나고 배제당한 사회적 약자의

뚜렷한 상징이 분명하고,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외면받고 도외시되는 2등 국민인 거다. 피가 튀고

살점이 씹히고 하는 화면도 걸쭉하니 살벌하지만, 그보다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용병에게 사냥당하는 그들의 처지가 더욱 살벌하게 와닿는 이유다.
 

새삼 말을 보탤 필요도 없이 다양한 해석들이 설득력있게 나왔지 싶다. 하나만 딴죽을 걸자면, 외계인의 처지는

현실세계의 '2등 국민', '호모 사케르'들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비록 지도층이 지구 착륙시 대부분 사망해버려

무질서한 군집을 형성한 채 지구인으로부터 천대받고 살지만, 그들이 가진 과학기술은 인류보다 월등한 것이
 
분명하고 정신문명 역시 최소한 낮지는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그들은 원래 (지구인에 비해)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20년동안 멈춰있던 우주선 덕분에 사람들의 두려움과 일종의 경외감 역시 화석처럼 딱딱해져 버린

건지, 다행히도(?) 지구인들은 그들의 약자에 대한 잔혹함을 외계인들에게 여지없이 발휘한다. 덕분에 영화는

3년 후를 기약하는 장면으로 거침없이 내닫을 수 있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외계인들을 돕는 주인공 남자, 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키를 쥔 쪽은 외계인임을

깨닫게 된다. 남자는 끊임없이 비열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계산적으로 행동해 왔지만, 그 계산과 복잡한 속셈은

모두 '인간>외계인'이라는 부등호 위에 버티고 서있었던 건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외계인이

수송선을 숨겨두었다는 걸 알게 된 즈음일 게다. 과거의 힘을 회복할 수 있는 '엑스칼리버'같은 그것.) 그는

이제 외계인이 자신의 명운을 쥐고 있음을, 또 자신과 다른 외계인들의 복수를 해줄 것임을, 그럴 수 있는

힘과 의지와 '선의'를 갖고 있음을 믿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을 향해 입을 벌렸던 부등호가 등을 돌려버렸다.


그래서 궁금해지는 건 그거다. 3년 후, 외계인들이 돌아왔을 때 남자는 인간으로 남기를 고집할까. 선택권이

그에게 남아있기는 할까. 우연찮게도 3년 후, 영화가 개봉한 해를 기준으로 하면 2012년인데, 또다시 2012년의

대재앙을 예고하는 영화인건 아닐까 싶다. 그가 되찾고 싶었던 과거는 사실 그의 아내, 그녀의 사랑 그자체다.

어쩌면, 변신이 완료된 그의 절절한 소원을 뿌리치지 않을 만큼 '인류애, 휴머니즘'을 가진 듯한 외계인들의

배려 덕분에 인류 마지막 아담과 이브가 되어 새로운 별로 이주하게 되는 건 아닐까. 이제 인류, 라기보다는

'인류였던' 남녀 한쌍이 되어.


사실 어느 순간 '외계인'이라는 단어가 혼란스러워진지 오래다. 그들은 외계에서 왔지만 지구에 거주 중이다.

그들과 우리, 가 칼로 자르듯 더이상 산뜻하게 갈라지지도 않게 되어버렸다. '외계인'이란 존재를 철통처럼

포박한 채 물 위의 기름처럼 분리시키고 있던 그 온갖 제재와 표식들은, 그 부적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무작정 밀쳐버리고 떠밀기만 했던 사람들은 아무런 대책없이 소멸될 예정이다. 단, 외계인이 힘을 회복했을 때.



이건, 요새 봤던 왠만한 영화 중에 최고다.

Wall-E에 이어 픽사가 또다시 잊지 못할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업(UP) 말이다.

메가박스 영화관 한가운데에 전시된 풍선이 주렁주렁 매달린 집을 보았을 때도, 다른 영화를 보기 전 예고편으로

할아버지와 뚱뚱한 꼬맹이가 나왔을 때도 이 영화가 이렇게까지 감동적이고 흡인력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애니메이션이 더이상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님은 이미 상식이 되어버렸지만, 이제 굳이 애니메이션이라는 표현

방식을 지적하며 다른 실사 영화와는 다른 기준으로 그 예술성이나 완성도를 평가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건, 요새 봤던 왠만한 영화 중에 최고다. 이야기를 이끄는 호흡의 완급에 있어서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에

있어서나, 어느 모로 보나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인 것 같다. 감동을 마구 먹어버렸다.

스포일러의 요소를 최대한 피하겠지만, 사실 이건 영화를 직접 봐야 느낄 수 있으니 별로 스포일링되지 않을 듯.


영화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눈물이 한번 고여버렸다.

할아버지가 거대한 풍선다발에 집을 매달고 하늘로 날아오르기까지의 삶, 그러니까 그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초반의 장면들이란 건 뭐랄까, 누군가의 인생에 순식간에 감정이입하면서 문득 일흔세살의 노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게 해준다. 어느순간, 내가 그 '칼'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그의 백발이

이전엔 검은 머리였음을 알고, 그의 완고한 표정과 눈매가 이전에는 훨씬 부드러웠고 누군가에겐 애정이 가득했음을

알고 있다. 비행선을 동경하며 늘 모험을 꿈꾸던 아이가 어른이 되고 홀로 남게 된 그런 상황, 영화는 그제서야

시작이다. 영화는 이제 시작인데 벌써 눈물이 한번 고여버렸다. 이런 영화는 본 적이 없다.

"Adventure is up there"?

스토리를 구구절절 이야기할 생각은 없으니 급마무리랄까. 할아버지가 집을 위로 띄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상황,

주위가 온통 재개발에 들어가 고층빌딩이 조그마한 집을 포위한 터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집을 띄우고 남아메리카까지

날아가기로 한다. 비행선을 동경했던 할아버지 내외의 가슴에 새겨져있던 탐험가의 말, "Adventure is up there"는

늘 '칼' 할아버지에게 하늘을 쳐다보게 만들었댔다. 이야기가 끝낼 때쯤에야 바닥에 안착하는 집의 이미지가 보여주듯

모험이란 건 다소 들뜨고 불안정한 상태, 어딘가에 정착하지 않고 부유하는 상태에서 이뤄지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건,

모험을 하려면 약간은 바닥에서 거리를 두고, 원경에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Adventure is ubiquitous!

'유비쿼터스'란 단어가 한때의 트렌드였던 적이 있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편재하는' 정도의 뜻을 가진 이 단어가

아마도 이 이야기와, '칼' 할아버지를 이끄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위(up)' 어딘가 기다릴 모험을 찾아 떠난

길이지만 실은 그의 삶 전부가 모험에 다름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특정 장소에 도착해야 비로소 모험이 시작되는 게

아니라, 그냥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 하며 이야기거리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던 거다. 흔히 여행이란 방식으로
 
낯선 곳에 떨어지고 나서야 하루하루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곤 하듯이 말이다.


'칼' 할아버지는 과거의 일상이 모두 소중한 모험이었음을 깨닫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지금의 순간을 적극적으로

'탐험'하기 시작한다. 그의 집이 비록 과거의 추억을 완성하기 위해, 과거에 약속한 모험을 이루기 위해 위로 떠오르긴

했지만, 수천개의 풍선은 이제 지금의 순간을 위해, 지금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으레 삶의 전성기를 지났다 여겨지는 노인들이 그러듯 어떤 삶의 순간에 멈춰버리지 않고, 다시금 계속해서 살아간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며.



p.s. 다시 생각해보면 애니메이션이어서 유리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애니메이션이라서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장면 하나하나에 스토리의 흐름에 필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움직임
 
하나, 소품 하나까지 의도에 맞게 정밀하게 세공해낼 수 있는 게 애니메이션이니까. 중간중간 화면 전체에 의미가 꽉 차

있다고 느껴지는 장면들이 더러 있었다. 게다가 어떤 건물의 창문밖을 슥 지날때 풍선을 투과해서 집안 내부에 비쳤던 

알록달록한 조명도 그렇고, 집에 묶여 바람에 나부끼는 색색의 풍선들이 보여주는 음악같은 율동감과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이라니. 물론 이야기 초반에 나오는 압축적이고도 압도적인 삶의 묘사는 말할 것도 없고.


또 하나 만화라서 되려 유리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한 부분이 있다면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 육체적으로

쭈글쭈글하여 '아름답지' 않으며 뭔가 모험이나 역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겨져 극을 이끄는 주인공으로는 잘

캐스팅되지 않는 그런 캐릭터를 무리없이, 감정이입이 쉽게 구현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애니메이션이 갖는 '미화'의 힘

때문은 아닐까. '칼' 할아버지는 사람이 살면서 자연스레 외면에 쌓게 되는 온갖 흔적들로부터 자유로운 건 사실이니까.

어떤 배우가, 어떤 사람이 '칼' 할아버지를 이만큼 연기해낼 수 있을지 잘 상상이 안 간다. 만화라서 유리한 건 역시

역사성 없는 할아버지 캐릭터랄까. 삶의 구린내가 전혀 풍기지 않는 동화(만화) 속의 할아버지여서, 그의 삶에 더욱

쉽게 감정이입하고 그와 함께 울고 웃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살풋 들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나도 당신들처럼 살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을 뿐이라고. 돈이 있고 없음에, 나와 당신들은 창살과

인질을 격하고 마주하고 있다고. 실화를 주물러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얼마간 위험을 안고서 시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토리가 뻔한 결말로 치닫는 걸 지루해할 관객들을 잡아놓아야 하고, 이미 많은 방식으로 해석된 실화에 대해 얼마나

그럴듯한 살점을 붙여넣을 수 있을지. 홀리데이도 그런 '뻔한' 스토리라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은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외침을 얼마나 와닿게 던져줄 수 있는가의 문제니까.

감독은, 얼마간 난관에 부딪힌 듯 하다. 처음의 철거촌 장면에서 드러나는 적나라한 공권력의 '합법적 폭력성'은 차츰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어디론가 스며들어가고 도망가버린다. 핏빛 낭자하던 콘크리트 바닥의 민들레꽃과 죽일듯

바라보는 그런 전장의 눈빛. 그런 건, '외국놈'들을 반기기 위해 정화된 서울거리에 어울리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소소하지만 따스한 일상의 공간들에 '침입'해들어간 '탈옥수'들은, 그래서 한낱 바이러스처럼, 아님

살인강간강도전과에 총칼로 무장한 괴한이란 말이 차라리 자연스럽다.


차츰 흐릿해지는 그들의 현실인식, 그리고 감독의 대략 낭패스러움, 큰일났다, 자꾸만 지강혁 '일당'과 대치하는 공권력,

내지 국가란 녀석이 어디론가 내빼고는, 지강혁은 단지 허공에 대고 주먹질하는 또라이 정도..로나 보이게 된다는 거다.

어쩔 수 없어진다, 감독은, 지강혁이 수북이 피워올린 담배가 올림픽종합경기장 모양의 재떨이에 꾸욱 비벼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이 가진 따스한 인간성과 최민수의 야비한 목소리와 말투, 표정을 대치시키려 하지만, 자꾸 전선은

허물어진다.

 
야비함과 비인간의 화신이 된 최민수를 죽이지 않고 극의 끝까지 그들과 대척시키려 하지만, 그정도론 어림없다. '우리의

대한민국'과 '대머리아저씨'는 피한방울 안묻어있을 뿐더러, 초코파이에 열광하지도 않고, 걸핏하면 욕지거리나 해대고

싸워대는 '시정잡배'가 아니란 말이다.
 
결국, 최민수가 마지막 쏘아올린 세 발의 총성, 실제와 다르게 감독이 영화적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마무리한 그것은,

최대한 '공권력'을 감각시켜내려는 상징 그 자체다. 그런 식으로밖에는, 그 실체를 잡아낼 수도, 보여줄 수도, 느끼게

할 수도 없다는 거다. 슬프게도, 지강혁이 무엇과 멱살을 잡고, 무엇에 대고 욕지거릴 내뱉었는지 볼 수가 없는 거다.

고작해야, 말갛게 닦인 시꺼먼 각그랜저 보디쯤에서, 그리고 최민수의 예기치못한 깍듯한 모습이 거기에 비쳐지는
 
것으로, 그렇게 보여질 뿐이다. 그렇다면, 그 총성 역시도 공권력, 국가 그 자체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반향 정도? 차체에 비친 최민수의 모습처럼, 국가의 압력이 최민수의 둘째손가락쯤에 가해져 작렬한 총탄. 

갈수록 투명해지는 국가권력의 압박, 그리고 아직 cloaking되지 않은 그 끄트머리쯤은 계속해서 감각적인 차원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안타까움. 난곡, 봉천3동...용산. 그리고 가슴저릿저릿한 비지스의 음색. 
 

Ooh you're a holiday , such a holiday
Ooh you're a holiday , such a holiday

It's something I thinks worthwhile
If the puppet makes you smile
If not then you're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Ooh it's a funny game
Don't believe that it's all the same
Can't think what I've just said
Put the soft pillow on my head

Millions of eys can see
Yet why am I so blind
When the someone else is me
It's unkind, it's unkind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Yet millions of eyes can see
Yet why am I so blind
When the someone else is me
It's unkind, it's unkind

Ooh you're a holiday , ev'ry day, such a holiday
Now it's my turn to say , and I say you're a holiday
It's something I thinks worthwhile
If the puppet makes you smile
If now then you're throwing stones
Throwing stones , throwing stones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de



프랑스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 - 가랑비.

프랑스 영화는 굴곡이 없고 밋밋한 거 같아.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것 같다가 어느순간 크레딧이 올라간다구.

'비퍼 선셋'이 '비퍼 선라이즈' 이래 9년만에 만난 두 남녀의 자잘한 수다로 일관하다 어느순간 끝났을 때의

그 황당함이란. 물론 그 영화가 싫었단 건 아니지만, 그 영화는 그야말로 "프랑스영화"였다는 얘기지.

그런데 사실 기승전결이 뚜렷치 않고 감정선이 뭔가 펑하고 터져나가는 순간이 없다는 거 자체는 나쁘다고도

좋다고도 할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 하나의 스타일인 거지 뭐. 천둥이 내려꽂히듯 번쩍 하는 깨달음이나

카타르시스의 순간도 있을 수야 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조근조근 젖어들 수도 있는 거니까.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광화문

그녀와 나는 월요병에 걸린 상태였어. 주말 내내 자알 놀았던 나는 사무실 책상 앞이 어설프고 어색해서 종일

엄지손가락 열개로 타자를 쳤고, 토요일밤부터 월요일을 의식하던 그녀는 결국 매우매우 녹초가 된 데다가 둘다

저녁을 먹지 않아 굶주린 상태였거든. 잔뜩 꾸물꾸물한 날씨, 왠지 전철이 광화문에 가까워질수록 몸도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어서, 몇마디 말도 나누다 끊겼던 듯 해. 게다가 광화문에 내려 시네큐브로 몇발짝 걷기도

전에 후두둑 후두둑 내깔겨지는 빗방울이라니. 좀, 좋지 않은 날에 좋지 않은 날씨, 영화도 그닥 기대만발이거나

막 보고 싶었던 영화가 아닌, 뭔지도 모르고 '프랑스영화' 보러 가는 길이었으니. 괜한 스케줄이었나 싶었지.


자그마한 우산들, 그리고 다시 비.

따뜻한 커피부터 한잔. 우중충하고 눅눅한 날이어선지 뜨거운 김이 폴폴 오르는 커피가 땡기는 거야. 한모금

마시고 나니 후끈한 커피기운이 마치 뜨거운 다리미처럼 몸을 뽀송뽀송하게, 게다가 날선 와이셔츠처럼 빳빳히
 
다시 풀먹여주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나니 둘다 기분이 매우 좋아졌었지. 다소 흐릿했던 눈매도 어느새 초롱초롱

총기가 반짝거렸고 심지어는 장난끼까지 어른거릴 정도로.
 

다리를 쭉 펼 수 있던 넓은 영화관, 절반도 채 차지 않았던 듬성대는 인구밀도, 게다가 어디선가 아스라히 들리는

빗방울 소리. 그건 마치, 여름날 매미가 벗어둔 허물같은 소리였어. 아니면 엄청시리 크게 틀어둔 엠피쓰리의

주인없는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얇고도 빈약한 소리랄까. 적당히 포근하고 또 적당히 감정을 흔드는 그런.


한숨 죽인 빗소리가 쏴아.....


그리고 영화가 시작됐지. 레인. 

언제나 화창하길 바라지 않아. 이 영화 원제가 뭔지 알아? 렛 잇 레인. 비는 내리거나 말거나. 날씨 핑계를 대며
 
우울해할 수야 있지만, 사실 성철스님 말마따나 비는 비요, 사람은 사람이라구. 그보다 덜 가다듬어진 대사도 하나 

있었지 아마. "자기만 있으면 난 언제나 해가 쨍인걸!" 이렇게 오바스런 대사는 상자에 넣고 청테이프로 둘둘

감아 뻥하니 발로 차버리더라도, 영화를 보고 나니 밖에서 그악스레 내려대는 빗방울 따위 심장까지 스며들어오지

않겠다는 자신감 혹은 여유가 생겼달까. 그런 영화였어.




* 영화 '레인'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그치만 영화의 흐름과 느낌에 매우매우 충실하려 애썼던,

비에 대한 이야기..


* 오늘도 하루종일 비가 내린다. 이런 식이다.

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



작년에 제1회 아랍문화축전을 보고 와서는,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공연이었어서 감탄했었습니다.

아랍권 국가들의 민속공연이나 미술전시회가 열렸던 작년보다 더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제2회 아랍문화축전이 2009. 5. 18(월)~20(수) 3일간 열린다고 하네요.


흔히들 '중동국가'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아랍국가'라고 불러주는 것이 그네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존중해주는 표현이라고 합니다.(저도 잘은 모릅니다만..^^;) 일본을 일러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면,

아랍국가들은 멀고도 먼 나라쯤 되려나요?


아랍국가라고 할만한 나라들이 어디어디가 있을지부터 쉽지 않습니다. 일단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이란은 포함될까? 수단은? 소말리아는 아랍국가일까?


아랍국가는 '아랍국가연맹'에 가입한 22개국가를 말한답니다.





단편적이고 선정적으로만 보도되는 아랍국가들에 대한 모습들 말고 그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 전통을

보여주고, 또한 (갠적으로는) 현재를 그들 나름의 어법으로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골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설레고 있습니다. 더구나 전부 무료라니, 예약만 하면 된다네요.

아래 그림들은 모두 제2회 아랍문화축전 공식홈페이지(http://www.arabfest.org/)에서 갓 잡아올린 것들이에요.


우선 공연에 대한 내용들..

그리고 영화에 대한 내용들..


그리고 전시/체험에 대한 내용들..

갠적으로는 캘리그래피에 대한 전시회를 꼭 가보고 싶어요.

아니면 헤나 아트도. 타투(Tatoo)는 넘 헤비하단 느낌이고, 한달이 채 못가 흐물흐물해지지만 맘껏 그리고

싶은 것들을 부담없이 려넣을 수 있는 헤나의 매력이랄까요. 아마 한귀퉁이에서 무료 시술도 해주지 않을지.ㅋ


요 그림 가운데 있는 저 기기묘묘한 글씨도 아니고 그림도 아닌 것이 바로 캘리그래피!
관심있으신 분들, 혹여 공연 보는데 옆자리에서라거나, 영화관에서 뒷통수만 마주할지언정, 함께 할 수 있으면

좋을 거 같습니다~*



조커는 번번이 화가 났다.

갱단이라는 것들은 '가오'도 잡을 줄 모르고 돈만 밝히며, 경찰은 화끈하게 자신과 놀아주기는 커녕 빌빌거리다가

뒤로 돈이나 찔러주면 좋다고 실실거린다. 범죄자라고 감옥에 처박힌 것들도 조금만 겁주면 오줌이나 질질 싸거나

눈물부터 흘리는 심약한 것들이고, 그런 범죄자와 자신은 다르다며 고고한 척 하는 '시민'들 역시 애써 자신들

마음 속에 있는 악마적 요소들을 외면하고 있을 뿐 다를 게 없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선하고 나무랄데

없는 '문명화된' 사람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이 조커 그에겐 역겹기까지 하다. 착한 척, 질서잡힌 척, 교화된 척이나

하지 말던가.


그는 생각한다. 나는 억울하다.

인간은 누구나 악한 거다. 네놈들은 분칠한 내모습이 무섭다고 손가락질하지만, 네놈들이 위선과 허영으로

자신의 악한 모습에 덕지덕지 분칠해 놓은 것은 더더욱 그로테스크할 뿐이다. 선한 척, 고상한 척, 고결한 척

하며 애써 겁먹지 않은 척 자신에게 대적하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니들 마음속의 악마를 보란 말이다. 우린

다르지 않아. 왜 나를 별종(Freak)이라고 몰아가지? 왜 나만 나쁜 놈이라 비난하지? 니들이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은 원래 혼돈 그 자체이고, 악과 선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는데, 왜 날 거세하려 들지?


그렇다면 좋다.

니들이 스스로의 가면을 벗도록 해주지. 난 돈 따위 관심없어. 다만 당신들이 스스로 각성하길 바랄 뿐이야.

조커는 사람들에게 나름의 심판을 내린다. 기독교적인 의미의 '심판의 날'에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계량하고

본모습을 대면해야 하는 것처럼,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구린 속내와 직면하고, 그걸 따르도록 강제, 혹은

유인코자 한다. 덴트 검사야말로 배트맨이 '백기사'이자 영웅으로 세워내려할 만큼 강하고 훌륭한 '가면'을

갖고 있었지만, 이런 그 역시 조커에 의해 '투페이스'로서의 광기에 먹히고 만다.


여기서 꼭 항변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건, 그 광기 자체를 내가 불러낸 건 아니란 사실이야. 검사 양반 그가 그토록 크고 강한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반대로 그가 그만큼 크고 강한 악의를 감추고 있었단 이야기도 되지. 그는 자신의 속에 애초부터 존재하던

'광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뿐야, 약간 내가 돕기는 했지만 말이지. 그가 왜 받아들였냐고? 그 이름모를 여자의

죽음이 마치 방아쇠처럼 그의 가면을 깨뜨리는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알 바 아냐. 어쨌든 난 또다시 내

주장을 강화하는 커다란 샘플을 얻었지. 세상의 것들은 온통 타락했고, 악하며, 세상의 본질은 카오스 그 자체라는.

그런데 영 맘에 안드는 자식이 있다. 배트맨.

내가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추의 한쪽 끝, 극단이라면 또다른 한쪽 끝에 서서 균형을 잡고 있는 녀석. 그런데 그는

나를 없애려고만 드니 골치가 아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나를 죽일 용기도 없는 '찌질이'다. 그러니 더

배알이 꼴리는지도 모르지. 내가 그를 희롱하고 놀리듯이 그도 나와 놀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유머감각도 없고 '균형'이란 걸 생각지도 못하는 꽉 막힌 놈이다. 몇번이고 말하지만, Why, so, serious?

난 몇번이고 그에게 기회를 주고 시험해 보았는데 이젠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나처럼 별종(Freak)이다.

그의 것은 '가면'이 아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박쥐가면을 쓴 찌질이와 허연 분칠을 한 입째진 조커만이

실은 '가면'을 뒤집어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그가 적당히 섞인 채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조심스런 미소와 겸손한 태도를 가장한 채 살아가고 있는 거다. 사람들이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결국 배트맨 너와 조커 나는 사이좋게 정신병원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거다. 너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리지 않은 동전 앞면'이 나오는 녀석과, 나처럼 백번을 던지면 백번 다 '불에 그슬린 앞면'이

나오는 존재는 '사람처럼' 살 수 없다. '사람'이란 존재가 무엇인지를 다수결원칙으로 정의한다면, 세상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이, 배트맨 너와 나는 이미 '사람'이란 종에 속하지 않는지도 모르니까.


아마도 그래서 우린 살아남았다.

서로 몇번씩이나 죽일 수도 있었지만, 지겹고 이가 갈리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일 지경이겠지만, 니가 없이는 내가

무너지고, 내가 없이는 니가 무너지겠지. You, complete, me. 다음엔 좀더 멋지게 해보자구. 넌 여전히 사람들이

본래 선하고 질서를 선호한다고 믿고 있겠지만, 내가 그 믿음을 산산이 깨뜨려 보여주지. 아직까지 우리의 싸움은

오십 대 오십. 잠깐 어느쪽으로 추가 기운 듯 보일 수야 있겠지만, 아마 앞으로의 싸움도 오십 대 오십.



P.S. 그렇지만 말야 친구, 결과를 안다고 재미없어지는 건 아냐. 난 당신과 춤추듯 스텝을 밟을 뿐야.

누가 리드하던, 한발 앞으로 딛었다가 한발 뒤로 뺐다가, 날렵하게 턴을 하기도 하고 말이지. 멋지지 않아?

끝도 결말도 없는 선과 악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말이지. 우리는 그 속에서 살고 그 속에서 가는 거라구.





#1. '남편'이 아니라 '아내'가 결혼한 이유.

'남편이 결혼했다'란 제목은 '아내가 결혼했다'는 지금의 제목보다 더욱 비현실적일 뿐더러 그닥 신선하지도 않다.

왜 그럴까. 한국에서 남자로, 혹은 남편으로 산다는 건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굳이 따로 결혼을 생각할 만큼 머리가

복잡한 일이거나 채워지기 힘든 불만족을 떠안고 지내는 걸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단순하기

때문일지는 모르지만, 한국 남자에게 결혼은 아직 '남는 장사'고, 하고 나면 장땡인 '쑈부'인 게 사실이다. 


그리고 굳이 '결혼'이란 형식으로 새로운 관계를 틔워놓아야 할 만큼 절박하지도 않으며, 언제든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즐기고..그게 또 '남자답다'는 식으로 용인받기도 하는 게 아직은 사실인 듯 하다. 여전히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고, 영화 중의 대사말마따나 '바람핀 뇬 용서못하고 차버리고 떠난

놈 용서못한다'는 게 일종의 관습법인 게다.

결국 남편이라면, 굳이 또다시 결혼을 할 생각을 할 유인이 적다. 그래서, 아내가 결혼했다.


#2. 목마른 그/녀가 우물을 팔 뿐.

그렇지만 이 영화를 꼭 페미니즘적인 시각, 그러니까 가부장제적인 가족제도 하에서 구속받고 억압받고 있는 

여성의 해방이란 측면에서 보아야 할 지는 모르겠다. 더구나 남자 둘, 여자 하나 간의 섹스에 대한 문제는 살짝

건드리기만 할 뿐, 어정쩡한 선에서 봉합하고 있다고 보이니 그다지 적극적으로 '성 해방'을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요사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코드로 읽어내려가려는 내 편향성이 걸리긴 하지만, 이 영화 역시도

어쩔 수 없이 사랑을 끝까지 추구하고 지켜나가려는 이야기..란 느낌이다.


그녀는 사랑이 하나가 아닐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랑하는 마음이 어떻게 반으로 쪼개지냐는 그의 항변에,

뻔뻔하지만 또 사랑스럽게도 그녀는 이렇게 응수한다. 사랑이 절반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두 배가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마음이 상대의 장점, 단점, 그리고 온갖 고유한 특성들을 다 껴안아 주는

거라면, 그는 그녀가 믿고 있는 이러한 애정관을 미리 알았어야 했고, 껴안거나 내치거나 해야 했을 거다.


그는 그렇지만 '그녀가 원하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녀의 연애 생활을 무덤 속으로 끌고

가려고' 결혼을 이미 해버렸다. 결혼은 그런 게 아닐 텐데, 아니어야 할 텐데, 뒤늦게 수업료가 어마어마하다.


사랑은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애초 서로에게 마법같이 끌려들었던 그 감정을 그대로

지켜 나가는 두 사람에게 이해되고 용인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문제될 것은

없을 거 같다. 그리고 남1과 여, 남2와 여는 그렇게 우여곡절과 자기부정과 관계부정을 거쳐, 자신들의 '사랑'을

새롭게 정의하고 단단히 다져나간다. 그들은 아마, '축구공'을 차고 노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는 어릴 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걸 게다. 그들 인생의 축구공을 단단히 쥐고 함께 살아가기를.


#3. 사랑을 유지시키는 신기술, 두 번의 결혼?

그런데 꼭 또 한번의 결혼이어야 했을까. 그보다, 그녀가 남2에게 느꼈던 것은 사랑이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상대의 도드라진 점만 보는 연애와는 달리, 결혼은 삶 자체가 포개지는 느낌이라고, 새로운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행복을 남2와도 나누고 싶다고.


어쩌면 그녀는 흔히들 결혼을 핑계로, 변화를 핑계로, 혹은 다른 무엇인가 적당한 핑계로 사랑이 식고 '情'으로

굳히기에 들어가는 관계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번에 두사람을 사랑할 자신이 있다, 혹은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말하는 거고, 평생에 걸친 '영원한 사랑'의 판타지는 여전히 흔들림없는 게다. (상대가 하나던 둘이던

간에 말이다.) 그런 점에서, "평생 한사람만 사랑할 자신이 있냐"고 묻는 도발적인 카피는 사실 좀 초점이 엇나가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어쩜 덧없고 허무한 '사랑'의 불꽃을 계속 신선하고 뜨겁게 지켜내기 위해 다소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꼼수를 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이 사랑이었다고, 혹은 자기합리화라고 재단할 생각은 없다. 그건, 그녀와 사랑하는 자의 몫이다.


#4. 내게 묻는다면.

다만, 내가 그라면, 그녀를 이해하려고 애써보긴 하겠지만..끝내 못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이 하나가 아닐 수 있을까. 게맛살 쪼개지듯이 사람 맘이 두 곳으로 쫙 쪼개져서 둘다 진짜임을 주장한다고

해도, 그건 잠정적인 과도기일 뿐 결국은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지 않을까. 도덕적으로 누구에게 미안하고

못할 짓이고 라는 식의 비난이 아니라, 결국 그 두 사람 모두에게서 외로움만 더 커지고 마음의 상처만 깊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한 명씩이었다면 그 순간 상대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으며, 또 자신의 것-"내꺼"-이라고 믿으며

한때나마 충일감을 느끼고 외로움을 떨쳤겠지만, 그런 기적과도 같은 마법을 온통 망쳐버리는 짓 아닐까.


그래서 나라면, '영원한 사랑'의 판타지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영원한 기간동안 그녀가 나와 또다른

남자를 사랑할 거라는 선언을 받아들여 그녀를 사랑할 자신은 없다. 물론 모, 닥쳐봐야 아는 일이지만.



덧댐. 아마도 '채털리부인의 사랑'에서 나왔던 대목을 차용한 거 같은데, 맨살-혹은 우비만 입고-로 소낙비

빗방울을 후두둑후두둑 맞으며 사랑하는 이와 야외 섹스를 하고 싶다는 그녀의 환타지, 그걸 실제로 남2와

했었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내가 이 영화를 그다지 강하거나 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이유다.


덧댐2. 손예진의 매력이란...그리고 뮤직비디오로 '요조'의 모닝스타가 쓰였는 줄은 몰랐다.


#1. 지워진 테입에 덧씌워진 '새롭고 오랜 기억'.
 
제리(잭 블랙)이 사고로 자석인간이 되고 나서 친구 마이크(모스 데프)가 일하는 비디오 가게의 비디오 테입이

전부 지워진다. 그렇게 아무 내용이나 기억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 채 허망한 타이틀과 앙상한 시놉시스만 걸치고

남아있는 테입들이지만, 그들의 필사적이고도 기발한 재창조 과정을 거쳐 다시 새롭지만 익숙한 무엇들을

품게 된다.


옛 영화들과 닮아 있으면서도 묘하게 코믹하고, 또 묘하게 감탄하게 만드는 그들의 새 영화들은, 마치 자신의

실수로던 어떤 이유로던 서둘러-예기치 않게-지워버린 과거의 사랑을 다시금 기를 쓰고 기억하고 각인해낸..

그런 결과물과 유사한 것 같기도 하다. 큰 얼개와 스토리 전개는 비슷하다 해도, 자신의 입맛과 현재 상황에 맞춰

이리저리 각색되고 힘을 덜 빼고 더 넣은 장면들.


그들의 '새롭고도 낡은' 영화는 대박이 났다. 사랑이 지난 후의 '새롭고도 낡은' 기억 역시 대개 대박이 되던가..?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쩜 평생 품을 가슴시린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만.



#2. 지워지는 '파사익의 팻츠'에 덧씌워지는 '새롭고 오랜 기억'

비디오 가게 주인 플레처(대니 글로버)는 이 마을, 파사익(Passaic)과 자신의 가게가 있는 건물에 얽힌 '팻츠'란

재즈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하곤 했다. 사람들이 그 뮤지션을 잊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비감한 마음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라곤 마이크와 제리 뿐이었던 듯 하다. 건물을 철거하려는 당국의 시도에

끈질기게 저항해 보았지만 끝내 일주일 후 건물이 해체되기로 통보를 받은 날, 그는 사실 '팻츠'와 그 건물, 그리고

그 마을을 묶어주던 자신의 이야기가 거짓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의 재구성. 신부님, 독실한 교인,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마을 사람들이 풀어내는 '구라'들이

희미해지다가 급기야 펑, 소리내어 부정당할 뻔 했던 '팻츠'와의 이야기끈을 더욱 딴딴하고 풍요롭게 비끄러

매어주는 동앗줄이 되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곤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을 불러낼 만큼 힘있는 '사실'이 된다.


그렇게 가게 주인 플레처가 지워 버리려던 이야기,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던 이야기는 다시금 생명력을

얻고 또다시 '새롭고도 낡은' 기억으로 화한다. 그건 더이상 플레처가 말했던 그 내용과도 다르지만, 또 예전과

같이 얄팍하고 의미박약한 이야기도 아니다.



#3. 시간에 씻겨나가는 기억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사실 'Be Kind, Rewind' 이 영화 코미디라고 분류되어 있다. 그냥 배우들의 재기발랄한 표정과 연기를 즐겨주고,

또 노골적으로 조악한 특수효과, 그렇지만 그 통통 튀는 상상력과 표현력에 탄복하며 살짝 마지막에서 감동해

주면 그만일 영화인데, 괜히 심각한 척 다른 데를 보며 되도 않는 의미를 부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비카인드 리와인드', 되감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도로 의역될 수 있을까. 비디오 가게에 크게 적혀

있기도 한 이 제목은 그렇지만 괜히 이런저런 다른 생각으로 나를 계속 몰고 간다.

"종종 짜증나고 싫던 기억들, 다시 되감아 조금 더 여유롭고 아름답게 기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만의 기억이라 여겨지던 것, 다시 되감아 우리의 기억으로 만들어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완전히 잊혀지기 전에 말입니다...


나만 가슴이 살짝 아프게 본 걸까. 모르겠다.



덧댐. 참, 영화를 다 보고 이 영화 출연진들을 일별하는데 깜짝 놀랬다. 시고니 위버가 나왔었다고..??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린 [oscar@momo: 아카데미의 보석들]에서 상영된 작품들은 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하다

놓쳤거나, 기대하고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그래도 몇 개 딱히 끌리지 않는 작품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더 레슬러". 제목만 봐도 뭔가 센스없어 보이고 무성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시놉시스를 약간 보니

대충 '은퇴한 레슬링 영웅의 눈물겨운 부활..' 그런 식의 뻔한 레퍼토리 같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 레슬러> 2008/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105분/청소년관람불가

은퇴한 노년의 레슬러의 눈물겨운 재기를 그려낸 작품으로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수작이다. 주연을 맡은 배우 미키 루크의 화려한 재기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으며, 이미 올해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미키 루크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거머쥘 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1998년 장편 데뷔작 <파이>와 2000년 <레퀴엠>으로 영화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작이며, 1992년 <내 사촌 비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탄 후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마리사 토메이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듯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면서, 두번째 여우조연상에 도전한다.(씨네아트 상영작 정보 中)


그렇지만 시간상의 제약으로 다소 체념하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던 이 영화는, 의외였다.

노쇠한 영웅의 재기..라는 뻔한 주제에 따라붙기 쉬운 뻔한 묘사들, 뻔한 동기 부여들에 더해 그냥 괜찮은 영화로

남는 게 아니라, 그나마 남아있는 삶의 안온한 부분들을 전부-자의던 타의던-던져 버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에센스로 바로 돌진하고 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어느순간 자신의 지난 삶이 실은 자신의 황금기였음을 깨닫는 것 같다. 자신에게 현재 남아있는 건

소원해진 가족, 얼굴도 까먹은 친구들, 그리고 밥벌어먹고 사느라 망가져가는 몸뚱이, 그렇게 누추해진 삶일 뿐.

그러면 보통 며칠 싱숭생숭하다가 술 한잔 하고 풀기도 하고-더러는 눈물을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혹은

돌아올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있는 여행을 다녀온다거나..그렇게 어떻게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현재의

자리로 고분고분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건 뭐랄까, 추운 겨울날 아침 눈을 딱 떴을 때, 그 약간의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을 벗어나기 싫어 더욱 안으로 

파고 들듯..그렇게 '남아있는 행복'들에 집착하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레슬러는 달랐다. 그나마 그에게 안온함을 주고 남아있는 삶의 행복쪼가리들이라도 꼭꼭 지키며 남은 삶을

방어하려는 자세를 굳힌 것이 아니라, 다시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바쳐진 링으로 돌아가 싸울 태세를 갖춘다.

그는 살이 깨끗하게 발라진 뼈다귀만 애꿎게 핥으며 여생을 보내고 싶진 않았던 게다.


그는 착하지도 않고, '사회성'도 떨어지며, 사람에 대한 속깊은 사랑이나 배려가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를 알았고, 다른 대체물들로 대리만족을

구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이어나가기 위해 죽음도 불사했다.


아마도 그 점이, 가게에서 쌍욕을 하고 자해를 하며, 스테플러 철심을 몸에 박아넣고 피칠갑을 하는 그를 끝내

연민하고 응원하게 되는 이유지 싶다. 가족을 제대로 건사하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 하나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막말을 하는 외톨이 레슬러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고 있다.






어쩌다 보니 코엑스 인터콘티넨탈 호텔 VIP시사회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VIP로 대접받고

싶어하고, 행사가 있으면 헤드테이블에 앉겠다고 난리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마치 그런 거다. 내가 뜬금없는

호텔 VIP로 대접받아 영화시사회에 초대받는 상황.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만.

(그러고 보면 요새 영화는 전부 시사회에 초대받아 보고 있다. 요새 좀 그렇다.)


영화는, 사람 얼굴을 쉽게 외우지 못하는 나로서는 다소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인물을 깔아두면서 시작했다.

그들의 사랑이 때론 막 깨어져 나갔고, 진행중이기도 하고, 혹은 피어나는가 싶더니 피시식 꺼져버리는 이야기들.

그런 짧막한 에피소드들이 서로 하나씩 단서들을 물면서 연결되고, 누군가의 불꽃같은 사랑은 또다른 누군가에겐

결혼생활을 송두리째 회의케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감정에 빠진다는 것은,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이 취사선택을 요구받았던 두 개의 알약 중 하나를 삼켜야

하는 바로 그 타이밍에 빠져드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생활, 지금까지의 사람들과의 관계에 뭔가 낯설고 거슬리는

균열을 발견하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다만 매트릭스의 알약과 사랑의 차이라면, 이번

'핑크 알약'은 한번 먹어서 될 일은 아니라는 거 아닐까.


소설 하나를 쓰는 기분으로 연애나 사랑을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저러한 감정의 변곡선의 위태위태한

궤적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어디서 언제쯤, 어떤 대사를 동원해 결말까지 써내리겠다는 다짐을 나 자신도 모르게

어느 시점에 했을 거라 자각했던 건, 늘 그 사랑이 지나고 난 바로 다음이었다. 그대로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해도,

사랑에 빠진 스스로의 감정을 즐기며, 그렇게 암묵적인 개요와 아웃라인에 맞춰 결말까지 숨가쁘게 한판 달리고

나선 문득 이건 자기애가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런 이기적인 '사랑'놀음을 깨고, 마치 영화에 나오는 알렉스가 지지에게 빠져버리듯 그렇게

최초의 '핑크 알약'을 맛봤던 그런 순간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퇴락하거나, 무의미해지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상투적인 사랑이야기라기엔, 그리고 상투적인 변곡선들이 넘나들며 결국은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는 식의 뻔한

스토리라고 치부하기엔,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머금는 커플(혹은 홀로 선 깨진 커플조차)의 모습이 이쁘다.

타인의 시각으로 보기엔 참 뻔하고 식상하고 닳고 낡은 이야기일지 몰라도, 지금 사랑에 빠져 있고, 그 사랑이

자신을 사랑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의 유치하고 이기적인 수준이 아니라면, 그 둘만의 이야기는 참 충만하고

내밀한 달콤한 소근거림으로 가득할 거다.


마침 발렌타인 데이란 게 다가왔고 또다시 솔로들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겠지만,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들은 부디 자신들의 지극히 사적이고 비밀스런 이야기를 소근대기를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록 어딘가엔

"He's just not that into you"라는 살벌한 가능성이 으르렁대며 웅크리고 있을지라도, 그저 매순간 진심을 따라

행동한다면, 그리고 그 진심에 감응한 또다른 진심이 용기를 낸다면,


He can be absofuckinglutely that into you. 비록 언젠가 마침표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찍게 될지라도.


* 스포일러가 약간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스포일러는 뭐니뭐니해도 "손수건을 준비하라"는 팁..이 아닐지.


사랑하는 열 살짜리 아들이 한순간 눈앞에서 스러져 버렸다. 그것은, 처음에는 사고였다.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을 가누어가는 남은 세 가족, 에단, 그레이스, 그리고 딸-여동생이 있다.

에단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비난할 사람을 찾고 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아들의 부재, 그런 당혹스럽고

비극적인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누구인지, 누가 그의 아들을 치고 도망갔는지 밝히고야 말겠다며 광기에 가까운

집념과 증오심을 불태운다. 어쩌면 그건 그의 아내 그레이스가 자칫 자책감을 갖지 않을까 염려해서, 혹은

자신조차 아내에게 원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억지로 몰고 나간 감정인지도 모른다. 


한편 그레이스는 이미 떠난 그녀의 아들을 정리하고 남은 가족들을 잘 추스르려고 안간힘을 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며, 핸드헬드로 촬영되어 연신 경련하듯 흔들리는 화면은 그녀의 바스라질 듯한 내면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하지만 더이상 아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 소재니 법적 절차니 운운하며 떠난 아이의

아픈 기억을 들추는 건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음을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아픔을 참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맛살을 한껏 찌푸리고 입술에 힘을 주며,

그 슬프고 힘겨운 바람이 멎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는 느낌. 보고 있는 것조차 너무 아팠다.


사이좋던 오빠를 잃은 여동생은, 영문모르고 분위기에 휩쓸려 비명을 지르고 펑펑 눈물을 흘리는 꼬맹이지만

또 하늘에 있을 오빠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바칠 줄도 아는 녀석이다. 어쩌면 죽음 앞에서 이래야한다 저래야한다,

라는 식의 당위 없이 있는 그대로 슬픔을 받아들이고 또 보낼 줄 아는 게 아이들 아닐까.



그 사고로 인한 슬픔을 가누어가는 또다른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사고를 살인으로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고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싶었던 그였는지라, 실수로 쏟아버린 물처럼

의도치 않게 벌이고 만 사고는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책감과 후회, 괴로움을 안기고 만다. 그렇게 그가

괴로워하면서 시간을 끌고, 거의 반사적으로 증거를 은폐하고, 또 겨우 짜낸 용기도 무성의한 경찰들 앞에서

사그라들어 버리면서 타이밍을 놓치는 사이, 그 사고는 살인으로 바뀌어 간다.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그의 압박감과 죄책감, 그리고 어느새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모든 걸 둔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끼도록 바꿔버리는 시간의 강력한

산화력에 대항해서, 그와 에단은 계속해서 마주치게 된다. 마주치면서 조금씩 높아지는 가슴의 떨림, 그리고

그 진동을 상대가 눈치채면서 이야기는 폭발하듯 터져오르는 순간으로 급속히 달려나간다.


비극이란 건, 단순히 이야기가 슬퍼서 비극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그 인간의 숙명같은 것..뭐랄까, 어찌어찌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뒤얽히고 결국은 옴쭉달싹 못하게 되는 그런 '통발'같은 스토리를 이른다고 했다.

어느 한편을 들어서 쉽게 다른 한 편을 손가락질하고 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더욱 가슴이 답답하고 꽉 메이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게 만드는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의 비극.



모두가 아픔을 나누어 갖는 것이 사고라면, 누군가에게 아픔을 적극적으로 떠넘기는 게 살인 아닐까.


결국 한 아이의 사고는 남은 가족들이나, 그 죽음을 직접 초래하고 만 당사자, 그리고 그의 남은 가족들에게 모두

견디기 어려운 아픔과 고통을 남긴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그 사고, ACCIDENT의 피해자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걸 다른 단어가 아닌 '사고'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고와 살인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은 자들의 아픔을 누군가에게 모두 전가해버리려는 의지를 갖고 행하는 건 범죄, 살인.

그리고 남은 자들의 아픔을 타인에게 떠넘기고 모르쇠하려는 게 아니라 기꺼이 내 몫을 나누어 받겠다는 자세라면

실수, 사고.


사고를 낸 드와이트, 죽은 아들의 부모인 에단과 그레이스가 모두 '인간'이어서 다행이다. 그들은 삶을 살아나가다

예기치 않은 사고를 맞닥뜨렸으며, 그들 모두 그 사고의 피해자였던 것 아닐까..



* 스포일러의 가능성은 없지 않으나...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훨씬

불쾌하지만) 질문이다...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우리에게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과 직면하게 된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주진모는 왕이다. 그가 키워낸 호위무사 조인성은 그의 다정한 연인이다. 그들은 사랑한다.


왜 그들이 사랑하게 된 건지는 중요치 않다. 조인성이 어렸을 적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또랑또랑 말했을 때

시작된 건지, 갸름한 선의 어여쁜 아이가 칼을 휘두르며 수련하는 모습에 맘이 움직인 건지는 모른다. 그리고

조인성이 왜 주진모를 사랑하게 된 건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왕을 왕으로 받들고 아끼고 모셨을 뿐인데 왜

사랑하냐고 물으신다면.."이라고 답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 왕 주진모에 대한 사랑은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사랑이 그렇듯 그들의 사랑도 이유없이, 마치 땅속에서 버섯이 솟아오르듯 문득 생겨났을
 
뿐이다.


그들의 다정하고 때로 후끈하지만 샤방샤방한 공기는, 그렇지만 이미 곳곳에 이물질이 침투하고 있었다.

원나라에서 온 왕후 송지효는 두 남자의 밀도높은 관계 속에 쐐기처럼 박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가 하면,

건룡위의 총관 조인성이 왕 주진모에게 입고 있는 총애를 질투하는 부총관도 도끼눈을 뜨고 있고, 후사가 없는

왕의 자리와 권세를 노리는 권문세족들도 호시탐탐 음모를 꾸민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왕의 패착..이랄까. 핀치에 몰린 상황이었다고는 해도, 그리고 서로의 감정에 대해 굳은

확신이 있었다고는 해도, 주진모는 그와 조인성의 사랑을 "시험에 들게 했다." 사랑을 과신해서 함부로 휘두르다

자신도, 상대도 온통 상처투성이로 뻘밭에서 뒹구는 꼴을 많이 봤다. 곱게 품고 아끼고 소중히 다뤄도 언제고

깨지기 십상인 그 레어아이템을 덥썩 '욕정' 혹은 '또다른 사랑'과의 무한경쟁에 돌입시킨 남자 주진모.

사랑이란 감정이 세계일류를 지향할 것도 아닌 바에야 왜 다른 것들과 비기고 재어가며 질투하게 만드는 건지,

왕은 결국 자신이 충분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던 상황에 스스로 갇혀버렸음을 깨닫는다.


"관계의 중심에는 말로 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나는 너를 원한다/나는 너를 원하지 않는다-양쪽 메시지 모두

그것이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이 시점에서 연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짝에게

다시 구애를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낭만적 테러리즘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은 대책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에 대한 응답을 강요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꾀를 부리기도 하고, 그

앞에서 폭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그는 합방을 떡밥으로 조인성과 송지효를 시험에 들게 하고, 모든 것을 왕의 뜻에 따를 것임을 스스로 고백케

하며, 대식국의 말과 그림, 달콤했던 추억의 환기를 통해 조인성을 자신에게 비끄러매어두고자 당근을 내건다.

동시에 그는 검이 술(術)이 아니라 혼(魂)이라며 갈구기도 하고,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아마도 조인성의 사랑)을

이미 잃었는데 너의 목숨을 취해서 무엇하냐며 삐지기도 하고, 조인성과 송지효의 또다른 사랑을 '욕정'이라

이름하도록 위협하기도 한다. 그는 조인성의 자신에 대한 사랑이 당연하다 여긴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의 마음은 자신의 것이라 믿지만, 사실 그가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강요할 방법이란 없다. 그게 불안하다.


그리고 미쳐돌아가는 미꾸라지 한마리가 온통 뿌연 흙탕물로 흐트려놓듯 왕 주진모가 스스로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국사를 팽개치고 조인성에 대한 낭만적 테러리즘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왕의 여자 송지효에 대한 조인성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간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주진모와 송지효 그 둘 모두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 어정쩡한

포지셔닝은 주진모에게 신기루를 보여준다. 이건 욕정에 눈이 먼 한순간의 실수일 뿐이라고. 금방 원래 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우리의 사랑은 결국 어려움을 겪고 한뼘 더 성장할 거라고. 실제로 더욱 격해지는 건 주진모의

집착, 그리고 질투일 뿐. 이제 어떤 식의 파국이 진행될 것인지의 문제만 남겨놓고 있었다.


"테러리스트가 된 연인은 현실적으로 자신의 사랑이 보답받을 길이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쓸모없다

해서 그 일을 반드시 안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꼭 누가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말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송지효는 왕후다. 그녀가 한때 질투하던 조인성은 왕의 호위무사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한다.

시작이야 어떻든, 굴욕감을 참으며 미동도 않던 그녀가 어느순간 입술을 열고 몸을 움직이며 사랑을 시작했다.

옆방의 왕이 문을 몰래 밀치고 숨어서 보든말든, 왕의 남자 조인성은 또다른 사랑이 왔음을 깨달았다. 왕은

그의 뿌리를 뽑아내고, 급기야 왕후의 목을 성벽에 내걸어 극도의 질투심이 담긴, 극한의 테러를 가한다.


그렇게 다시 눈앞으로 조인성을 불러내고는, 그는 다정히 묻는다. 왜 이제야 왔냐고. 여기 좀 앉으라고.

그는 기껏 조인성을 눈앞에 불러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그는 너무 많은 것을 흐트려 놓았고,

너무 많은 것들을 망쳐놓았다. 조인성에게 기대할 수 있던 건 단지, 단한번도 당신에게 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는,

당신을 정인이라 생각했던 적이 단한번도 없었다는 표독하고도 가슴에이는 대답뿐.


주진모의 눈빛은 심하게 흔들린다. 그는 못 보겠지만 나는, 그 독한 대답을 듣는 주진모만큼이나 독한 대답을

해내고 만 조인성의 눈빛도 심하게 부서지고 있음을 본다. 아마 그들이 서로의 부서진 눈빛과 마음을 알아챘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을 거다. 이미 그들의 사랑은 시험에 처했고, 수명이 다했고, 결코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


망연하게 찢기는 주진모의 마음이 담긴 화폭, 부서져내리는 한때 그들이 뒹굴던 침소, 그리고 마치 푸닥거리하듯

온통 깨어지고 부서지는 그들의 내밀한 공간..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 서로의 심장에 칼을 후벼박고는

양패구상해서 둘다 무너져내리는 넝마같은 결말밖에는. 그리고 왠지 모를 후련함. 실컷 상처입고, 실컷 힘들어하고

그리고 바닥까지 온통 지랄같이 휘저어 흙탕물 범벅을 만들어놓고는 '이제 됐다'싶은 느낌.


"나는...사랑을 강요할 의지를 잃었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제18장 낭만적 테러리즘)


그건 어쩌면 비통한 체념. 아니면...자신의 마음을 상대에 강제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순간의 후련함.


#1. 2008 PIFF

토요일 아침 댓바람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국제영화제.

대학 들어와서부터 계속 가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막상 갈 만한 타이밍이 없었달까. 다른 짓들을 이것저것 

하다보니 번번이 '보다 더' 바쁘고 중요해 보이는 일들이 생겼더랬다.

원래는 토욜부터 일욜 저녁까지, 한 예닐곱 편의 영화를 쭈욱 볼 생각이었지만. 이러저러한 변수들로 인해 예매했던

표들을 전부 취소하거나 현장에서 교환하게 되었고..군대 동기들 그리고 그 여자친구들과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거리를 걷고, 바다를 보고, 학교 캠퍼스에서 연못을 보고, 길에 눕고, 술을 마시고, 해맞이를 했다.


야외상영관에서 했던 '공각기동대' 감독의 애니 '스카이 크롤러' 더하기 2008 칸느영화제 심사위원장상이던가..

라던 이태리 영화 '고모라'를 보다가 영화가 중간에 끊기고 이탈리아어가 너무도 리드미컬하게 잠을 불렀던 게

그 모든 걸 촉발시켰다. 아마도 야외상영관의 약간은 산만한 배경도 한몫했을지도.


부산내려간다 하면 니 와봐야 지갑아작나고 몸씹창난다고 오지말라고 걸진 욕지거리를 전화로, 문자로 질겅이는
 
녀석들이지만, 그래도 결국, 이번에도 밤새 뭔가 촛불 하나를 뿌리채 태워버리는 듯한 기분으로 놀아제껴버렸다.

가장 최근에 봤던 건 올해 초 협회 연수기간, 북경, 상해를 거쳐 부산으로 왔을 때, 룸메이트였던 행님 한분을

옆방에 밀치고는 밤새도록 양주마시고 웃고 떠들고..우리가 포대 BX에서 냉장고 열린 문짝서 새나온 불빛을

조명삼아 밤새 술마시던 이야기와 하루키의 소설을 두고 벌이던 담배 한개피의 이야기들..그런 안주거리 삼아 

진지해지기도 했다가는, 결국 침대에 담배빵 한두개 내주고 토하고..담날 아침에 정신못차린 녀석들 쫓아내곤

나 역시 하루종일 널부러져 지냈던 기억.


그나마 이전처럼 숱하게 잘려나간 필름쪼가리들만 넝마처럼 늘여뜨려 돌아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져있는 기억을 갖고 돌아와서 다행이다. 비록 리비도와 어렴풋한 불만으로 가득한 자유연상법을 차용해

스토리와 인과관계를 무시한..일종의 포스트모던을 표방한 독립영화였지만.


다음엔 영화만 보고 와야겠다..고 잠시 생각도 했었지만, 흔들리는 핸드-헬드(hand-held) 카메라로 로드 무비를

찍듯 부산녀석들과 밤새 이야기하고 걷고 노는 게 역시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도, 영화를 한꺼번에 세네편씩

과식하는 건 잘 소화시켜 내는 것보다 도로 토해놓는 게 더 많은 거 같아서.




#2. 채용설명회

어제 1시, 서울대학교 140동에서 무역협회 채용설명회가 있었다. 140동이 어딘가 했다. 홈피에서 확인해보니

국제대학원. 몰랐는데, 우리학교에서 채용설명회를 위해 공간을 빌리려면 대관료를 내야 한단다. 한 번에 30,

두 번에 50. 학교가 배가 불러서 그런 걸까. 여러 모로 생각해도 배부를 상황은 아닌 거 같은데, 다른 학교는

쌍수들고 환영이라건만 이상한 일이다. 결국 협회와 관계를 맺고 계신 국제대학원 교수님을 통해 무료로 장소

협찬. 빈정상한 협회 인사팀분들은 자칫 우리학교를 스킵할 뻔 했고, 난 하루 볕쬐며 모교안에 포스터붙이고

채용설명회를 준비하는 색다른 이벤트를 놓칠 뻔 했다.


협회 신입에서 3년차쯤까지 중에 서울대 출신 '대표'로 뽑혀나온 나로선, 내게 주어진 15분쯤의 시간을 어찌 쓸까

고민하다가 그냥 최근 대두되는 '사회적 기업'이란 개념을 끌어다가는 60여년전부터 협회가 그런 상을 구현해온게

아닐까 한다거나, 민간부문과 같은 역동성으로 공익성을 추구한다는 매력이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리고

국제통상본부에서 내가 하는 일들이 '해외시장 개척을 지원하고 민간통상협력활동을 촉진'하는 거창하고 보람찬

일이며 일과 삶의 밸런스가 잘 잡혀 있다는 반증으로 PIFF 참관기와 색소폰 연습 등을 주워섬기는, 나름 모범적인

답안을 제시했던 것 같다. 


중소업체들이 행사나 세미나에 참석하며 진정 고마워할 때 보람을 느끼지만, 가끔 걸려온 전화가 코트라가 아니냐
 
따진다거나 협회는 어디에 있고 대체 뭐하는 데냐고 물을 때 당황스럽다는 '진솔한' 얘기도 가볍게 눌러 해주고.


Q&A시간에는 대부분 구체적인 전형 절차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글쎄..사람들이 보통 채용설명회 안 오는

이유가, 질문이 어떤 수위를 넘어 예민한 영역으로 넘어오면 정답이 안 넘어오기 때문 아닐까. 나도 그래서 작년에

채용설명회는 두세번밖에 안 가봤던 것 같은데 그것도 대개 선물로 준다는 USB나 꽁짜점심 때문이었다. 뭐..그런

당근도 없는 상황에서 그 자리를 지켜준 사람들이라 감사했고, 열심히 질문을 해준 사람들이라 더욱 감사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도 아닌 것이, 사실 나는 작년 한 번, 그 중에서도 고작 한 차례 서류에서

CEO 면접까지를 거쳤을 뿐인 조그마한 샘플인 거다. 동기들도 제각기 다른 질문, 다른 취향의 면접관을 마주했고,

일년 전 전형절차를 밟은 선배들은 더욱더 다른 환경과 내용으로 시험에 처했다. 그리고도 올해 전형이 어찌 될

지에 대해서는 인사담당자가 아닌데 무슨 책임있고 신뢰감 있는 말을 할 수 있으리오.


물론, 그런 건 있다. 협회의 분위기에 비추어 어떤 사람을 원할지,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이 역시 어쩔수없이 많이
 
주관적이겠지만), 그리고 이 곳이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을지. 아마 마지막 문제의 경우에는 이미 이 공간에서
 
닳아버린채 닮아가고 있다고 느끼는 나로서는 외부인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을 위한 채용설명회마저 내 고민과 기억을 위한 자리로 변질시켜버렸달까. K, Ba, Ca같은 강력한 산화력으로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을 나를 중심으로 도는 양 묘사하는 건, 지독한 이기심의 발로인 게다. 사랑을 한다는 건

마음을 가로세로 넓히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오로지 그 상대만을 향해서였을 뿐, 어쩜 주위에 대해서는

외려 가로세로 좁혀버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여자친구가 CGV의 CINE de CHEF 십만원권 상품권이 생겼던 터에, 언제 이 좋은 아이템을 써야 할 지

머리를 굴리고 의논하다가 몇 가지 기준을 세웠더랬다.

1) 우선 영화가 정말 보고 싶은 거여야 한다. 피가 튀는 '스위니 토드'나 '추격자'류의 영화를 피하고, 그렇다고

별로 보고 싶지 않았던 영화를 보기는 상품권이 넘 아깝지 싶어서.

2) 저녁식사는 너무 비싸니 점심식사를 하는 걸로 하자. 그러자면 주말이나 주중에 휴가를 내서라도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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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시네 드 쉐프가 뭔지도 몰라서 CGV 홈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겨우 알아냈었다. 얼마전 CGV 골드클래스

티켓도 여자친구를 통해 처음 써 봤었고, 마찬가지로 CGV 홈페이지를 뒤적대곤 이런 게 있구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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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마미아를 하고 있었다. 최근에 보고 싶은 영화가 별로 없던 터에, 상품권 유효기간이 1년밖에 안 되어서 조만간

휴짓조각으로 날라가진 않을까 긴장감이 더해가고 있었기 때문에..이 영화를 꼭 보자! 라고 둘이서 결심했다.

맘마미아 뮤지컬도 몇 번씩 보고 싶었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쳤었고, ABBA의 노래는 좋아하고 있었으며,

이번 영화가 뮤지컬에 충실한, 그다지 욕심부리지 않은 영화란 평을 봤었기에 더욱 보고 싶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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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서, 6만원짜리로 두 명이면 12만원이니까 추가로 드는 현금은 2만원이면 그만인 셈.

영화를 먼저 볼지 밥을 먼저 먹을지 잠시 자중지란에 빠졌다가, 먼저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영화를

보고 밥을 먹어야 소화도 잘 되고 밥먹으면서 얘기할 것도 많을 거라는 게 그녀를 설득시킨 나의 근거들. 사실

밥을 먹던 차를 마시던 항상 쉴새없이 둘이 떠들어대는 터라 그다지 영화얘기만 할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영화는, 지중해의 부드럽고 화사한 햇발이 바다 표면에 산산이 비산되는 만큼이나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멋진

풍경에, 가슴을 울리는 발성과 노래가사, 그리고 발랄하고 생기넘치는 군중 퍼포먼스까지. 왠지 여성상위의

모계사회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다소 발칙할 수 있게도 딸은 세 아버지를 긍정하고 세 잠재적 아버지는 모두

1/3의 딸을 인정하겠다는 장면 역시 신선했던 장면 중 하나.


무엇보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이제 아바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풍경이 떠오를 거 같다. 마치, 에픽하이의 노래

러브러브러브를 들을 때마다 김태희가 깜찍하게 춤을 췄던 광고가 떠오르듯이. 그리고 앞으로 기회가 닿으면

꼭 '맘마미아'를 뮤지컬로 봐야겠다고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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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가벼운 전채로 버섯샐러드와 연어샐러드가 나왔고, 아마도 8만원짜리 메뉴일 스테끼

대신 파스타가 나왔다. 메뉴판이 따로 나온 건 아니었고, 웨이터가 몇 가지 주워섬기면 그 중에 맘에 드는 걸

고르는 형태였는데, 올리브오일 파스타와 까르보나라 파스타를 고르고 나름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고 자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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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도 고급스러웠고, 테이블 배치도 넓찍하게 쓰여져서 주위에 신경쓰지 않고 식사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대부분 어느 정도 연령대가 있으신 분들이 부부동반으로 오신 듯 했고, 우리처럼 젊은 애들은 안 보였다.

하긴, 영화를 아무리 골드클래스보다 더 좋은 의자-자그마치 좌석당 600만원 짜리라는 홍보..-에 앉아 볼 수 있다

하고 점심식사를 좀 분위기 있는 데서 '칼질'할 수 있다 해도, 인당 6만원은 버거운 금액임엔 틀림없다.

더구나 6만원짜리 메뉴는 '칼질'할 것도 없는 파스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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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다시 갈 거냐고 묻는다면 좀 생각을 해봐야겠다. 골드클래스도 그랬지만, 영화를 안락하게 볼 수 있고

영화보기 전후에 뭔가 특별한 공간에서 식사나 차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지불하기에는 비용이 좀 세다고 본다.

그러니까 전국을 통틀어 오직 CGV압구정점에만 운영하고 있는 거겠지만.


하나 불만이었던 건, '씨네 드 쉐프'를 예매할 때 그리고 예매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웨이터나 매표원이 '육만메뉴'

혹은 '팔만메뉴' 이런식으로 적나라하게 가격을 드러내어 지칭한다는 것.


어찌됐건 결론은, 여친 덕분에 좋은 경험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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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는 내내 딩굴거렸다. 논문쓰고 났더니 지쳤는지, 아님 내처 꾸역꾸역 달려왔던 것에 질렸는지, 이제

헝클어질대로 헝클어져서 다리조차 안 움직여지는 거였는지.


수욜엔 학교서 김기덕의 빈집을 보고, 목욜엔 논문섭째고 김기덕 강연회가서 질문하고 사인받고, 금욜엔 모처럼

술마시고, 토욜엔 친한 누나 결혼식, 일욜엔 집에서 내내 잠.


김기덕의 영화는, 현실을 보여주기 위한 깡통따개같은 거다.

잔혹해 보일 수도 있는 영상들과, 적나라할 수도 있는 정형적일 수도 있는 남여의 역할, 그리고 하나같이

우울하고 어둡고 아픈. 이게 당연한 거라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을 낯설게 하고 난 정상의 감수성과 예민함을 갖고

있다 생각했던 것들에 문득 이질감으로 경악을 느끼게 하는. 그래서 그의 영화는 내겐 아름답다.

말이 닿지 못하는 차원에서 두명의 인간이 만나고 이해하고, 한장한장 그림과도 같은 상징과 의미들로 가득찬

화면들을 통해 의식의 흐름을 전하고. 가슴이 아프면서도 이거 진짜다 싶은...


김기덕은, 강연회 처음에 인사를 생략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칠판으로 가더니 휙휙 글자로 '반갑습니다'라며

인사말을 날려썼다. 다소 파격이었지만, 신선했다. 그이기에 더욱 납득할 수 있었다. '소통'을 끈질기게

이야기하는 감독이라 여겼기에, 그에다 대고 카메라폰을 찍어대는 건 왠지 아니다 싶어서 말았지만 칠판만은

한장 남겼다. 머, 결국 사인까지 받고 말았으니 그다지 수평적이고 인간적인 '소통'과는 좀더 거리가 멀어진거

같기도 하지만.ㅋ


심각하게 무기력하다. 오늘 아침에 좀 나아지나 했더니 아니다.

수욜쯤 여행이나 다녀와야겠다. 어딘가 있을 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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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니들끼리 잘해봐라"였던가? 06년 한국을 강타한 괴물의 오프닝에서 나오는 대사다.

아마도 한강에서 투신 자살을 꾀할 정도로 삶의 극한에 몰렸던 그는, 칙칙한 강물 바닥 아래서 그 무언가를

감지한다.



#1st '둔함'-괴물이 존재하던 말던..

강두(송강호)의 가족은,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을 마주한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마스크를

공구해서 일괄착용하고, 상상된 '바이러스'를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의사는 강두 머리에 구멍을 내고,

경찰은 그들을 잡기 위해 애쓰며, 국과수직원은 연무소독에 여념이 없다.(이로써 그들의 임무는 완수된다)

어쩌면 어이없다 싶을 정도로 강두 딸의 생존 가능성이나 괴물의 존재에 무관심한 사람들.

괴물을 잡으려는 노력은 전적으로 송강호들의 몫이다.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둔감함이 일부 깨어나는 것은,

자신이 그로 인해 피해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때다. 환경'운동권'으로 표현된 사람들이랄까..



#2nd '둔함'-영화 '괴물'의 괴물은 누구?

바이러스의 숙주는, 옐로우 뭐라는 그 축늘어진 돌고래같은 '괴물'이었다. 날것으로 인간을 잡아먹고 뼈를

토해내는 다른 괴물은, 변태적인 기형일지언정 생태피라미드의 한 부분에 살짝 걸쳐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 그 돌고래시체같은 노란 '괴물'이 요동하는 순간 사람들은 귀에서 피를 뿜으며 한강변에 쓰러진다. 물론

강두의 가족은 그 '바이러스 vs 사회'라는 틀을 벗어나 있었고, 개인사적인 원한 관계로 '올챙이 괴물 vs 가족'의

구도를 갖고 있었다. 해서 화염병 석유+불화살+쇠파이프 라는 사상 초유의 무기로 괴물을 해치우는 것이

가능했고 의미도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정말 두려워하던 바이러스는, 혹은 바이러스와 같이 생체를

갉아먹는 것은 그 노란 '괴물'이 작동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이었지만 이는 순수한 형태의 폭력을 행사하는

올챙이 괴물에 가리워져버렸다.

괴물과 송강호들이 조우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온갖 괴물스러운 작태들, 시스템들. 그 극단의 형태가 바로

노란돌고래였을 수도.



#3rd '둔함'-재생시킨 행복조차 둔해빠진.

엔딩 어디메쯤에서 송강호는 매점 창밖의 기척에도 총을 움켜쥐며 괴물을 경계하지만, 정작 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그럴듯한 발표를 낭독하던 티비는 무심하고 둔한 발가락으로 꺼버린다. 언제고 한강에 사람을 잡아먹는

올챙이같은 것이 나타나는 순간 작동하기 시작하는 '괴물'. 그 아가리는 눈에 보이지 않고 훨씬 세련되어서

'빠이'프를 쑤셔넣기도 불가능할 텐데도, 송강호는 현상수배됐던 자신의 얼굴이 담긴 '삐라'를 액자에 꼽아넣고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끝까지 둔해빠진 색퀴".

따스한 불빛은 그의 조그마한 매점 주위만을 밝힐 뿐, 푸지게 쏟아지는 하얀 눈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온통 어둠에

먹혀 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최초의 발견자가 한강에서 보았던 건, 과연 뭐였을까. 그 검은 그림자는 올챙이 괴물의

그것이었을까.



더하기. 반미영화?

정말, 이제 '반미'는 문화적 상품이자 시대의 트렌드가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포름알데히드'라는 단어를

반복학습시키는 영화인지라, 강력한 반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선전됐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송강호와 함께 괴물에 맞섰던 그 미군은? 바베큐 파티를 함께 하던 미군과 한국군은? 구도는 좀더 명료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미국(과 미국에 복종하는 한국 기득권층) vs 미국에 반대하는 한국(혹은 민중)은 아닌 것 같다.

마치 '살인의 추억'에서 미국의 회신이 결정적으로 한국의 수사 향방을 좌우했듯 미국은 하나의 '상수'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냥 우리가 놓인 환경..이란 정도. 송강호에게 재갈을 물린 건 미국, 미군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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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애초 기획단계에서부터 이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기대를 꽤나 했었고, 꽤나 오랜 시간 공을 들이는 것을

보면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흥미진진했었다. 그렇지만 칸영화제에서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는 수다스런

언론의 설레발이 확대재생산되고, 마치 한국영화의 새로운 부흥을 알리는 전기가 될지 계속 침체일로를 걸을지

막중한 역사적 의미까지 띈 영화처럼 부각되면서 차츰 우려스럽기 시작했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단

사실만으로 이미 맘속으로 몇 수 접어주고 관대한 갈채를 보냈던 분위기 속에서, 생각보다 별로였다..란 조심스런

얘기조차 돌팔매질당하는 분위기가 또다시 재연될까봐 불편했다.(이미 '디-워'를 둘러싼 이해할 수 없는 논란에서

충분히 증명되었던 데다가, '밀양'같은 '어려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사실 역시 외국영화제로부터 빌려온

아우라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이미 스스로도 너무 영화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 것은 아닐까, 이러다간 왠만한 영화를 봐도 좀처럼 만족스럽지

않겠다..란 생각도 하고 있던 터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치솟기만 한 기대치를 어떻게든 낮추고 봐야겠다는

경계심이 들었달까. 개봉 나흘만에 100만에 육박한다는 실로 과열된 신드롬 현상-한국에서 흥행했던 많은

영화들의 첫 궤적-을 따르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에 대한 약간의 우려와 스스로에 대한 경계, 그 두가지가
 
아마도 이 '놈,놈,놈'을 보는 나의 준비자세였지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생각없이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라고 생각하며, 두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 그다지

길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볼거리와 긴장감도 팽팽한 영화인 것 같다. 이런 영화를 볼 때 탄탄한 스토리를

기대하거나 배우들의 연기에 주목하는 편이라면 다소 실망했을 수도 있겠지만, 여름방학을 맞이한 본격적인

오락영화 그자체의 본분에는 매우 충실하다. 그렇게 진지하게 뭔가 잡아내서 이야기하기에도 석연치 않은,

그리고 이 영화가 몇백만이 들만한 영화일지에 대해서도 그다지 평가하기도 그런-재밌으면 보는 거지 뭐..

다만 남들이 보니까 따라보는 게 아니기만을 바랄뿐..아니 실은 그랬대도 별말 하고 싶지는 않다-영화.



최근에 씨네21이었던가, 어느 영화잡지에서 본 거 같은데 김지운 감독이 분명 '마카로니 웨스턴'의 광팬이었을

거라고 평했던 적이 있었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의 대결이 아니라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의 대결.


* 마카로니웨스턴 [macaroni western],

미국 서부극과 같은 개척정신의 요소는 없고, 주로 멕시코를 무대로 총잡이를 등장시켜 잔혹한 장면을 강렬하게 묘사한 것이 특색이다. 1964년 세르지오 레오네가 《황야의 무법자》를 제작한 이래 미국 서부극을 압도할 기세로 선풍을 일으켰다. 한국에도 1966년 《황야의 무법자》(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가 상영된 이래 여러 편이 수입되어 마카로니 웨스턴 붐을 일으켰다. (네이버 백과사전 中)


그에 더해, CGV 골드클래스 경험담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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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연인에서 나온 CGV골드클래스 장면)

영화 시작 한시간전부터 골드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데, 골드클래스 상영관에 붙어서 바로 라운지가 있다.

주류를 포함해 약간의 음료와 간식류를 팔고 있으며 조그마한 카페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영화 시작전

아늑하게 미리 입장해서 편히 앉아 놀거나 쉴 수 있는 장소.

입장을 하게 되면 좌석은 총 30개, 130도까지 꺽이는 편안하고 커다란 가죽의자가 두개씩 붙어서 있고 커플석당

테이블이 하나씩 놓여있다. 한껏 젖혀서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 영화관을 전세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조조를 봐서 그런지 대략 10명도 안되는-그니까 네 커플도 안되는-사람들이 엉성히 앉아있어서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사실 영화시작전 한시간동안 라운지에서 무료음료와 보드게임 어쩌구..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건

CGV입장에서도 일종의 수익사업이지 관람객의 편의를 기한다는 느낌이 크지 않고, 영화관의 좌석 배치와

안락한 좌석...그게 골드클래스의 가장 큰 메리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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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놈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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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놈 이병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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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최초로 시도되었을 열차탈취씬. '서부영화' 혹은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장르
역시 한국에서 최초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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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상한놈 송강호. 자칫 '가오'만 잔뜩 잡고 엉성해지기 쉬웠을 영화를 끝까지 붙잡고 갈 줄 아는 배우.
그는 정말 살아있다는 느낌이 드는 생생한 캐릭터를 연기해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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