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를 따라왔다곤 하지만, 이미 '보헤미안'은 워낙 유명해진 까페가 되고 말았다. 강릉의 까페거리가 있다곤 하지만

 

보헤미안은 이미 강릉을 넘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드는 까페가 되고 말았으니.

 

영화에서 보헤미안은, 호텔 커피숍에서 에스프레소를 찾는 그의 모습에 약간의 허술함과 허세스러움을 덧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기껏 명인 박이추 선생이 내려준 에스프레소에 물을 타서 마셨던가. (아닌가, 그건 테라로사에서

 

한 행동이었던가, 기억이 그새 가물가물해져버렸다.)

 

 

여하간 보헤미안에 입성. 조그마한 건물 3층에 있는 까페는 이미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박이추 선생을 비롯한

 

세네명의 직원들은 모두 잔뜩 기합이 들어가서 주문받고, 커피내리고, 서빙하는 중이었다.

 

하릴없이 한쪽에 앉아 자리가 나길 기다리는 중. 한쪽 기둥에 박이추 선생이 일본에서 취득한 교육이수증과

 

뭐라뭐라 막 일본어로 적힌 증서같은 것들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위에는 누군가 그려준 캐리커쳐. 여유롭게

 

커피를 쥐고선 부드러운 눈매에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맘에 든다.

 

그리고 이 스위치 박스도. 여러번 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 했는지 까맣게 때가 남았다. 뭔가 커피색으로 칠하거나

 

눈에 잘 안 띄게 치장하는 것도 괜찮았겠다 싶으면서도, 또 저렇게 테이프가 까맣게 때묻은 채 너덜거리는 , 살짝은

 

허술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커피 원두를 사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한 옆에서 비닐 진공 포장을 해서, 이런 종이박스에 담아주기도 한다.

 

원두만 사가서 집에 가서 수동 기계로 갈 때 풍기는 그 냄새도 참 좋은데, 조금 사갈까 싶은 마음이 불끈.

 

생각보다 금방 자리가 났고, 받아든 메뉴판에는 예멘이나 페루의 커피도 있었다. 커피마다 간단한 설명이 있었는데

 

괜히 어렵거나 고상하게 꼬아서 표현하지 않고 '산뜻한 신맛'이라느니 '부드러운 맛'이라느니 '스모크향'이라느니

 

한두가지 특징만 잡아서 평이하게 써두었다.

 

 

잠시 문틈으로 구경한 배전실. 커피 원두를 볶는 배전실에서 박이추 선생님이 뭔가 분주히 움직이고 계셨다.

 

주문했던 건, 고로케 세트랑 브런치 세트였던가. 일본에서 배우신 분이라 역시 고로케 맛이 남달랐다.

 

 

감자 고로케는 따로 나왔는데, 고기 고로케는 이렇게 빵 사이에 아예 양배추처럼 포개져서 나왔다. 완전 대박 맛있던.

 

그리고 카푸치노. 커피가 다르니 당연하겠지만 카푸치노 맛도 확 다르다. 잔도 이쁘고.

 

'커피의 여왕'이라는 예멘 모카마타리. 원래 이전에 맛봤던 커피 중에 흙맛이 나는 예멘 커피가 굉장히 기억에 남아서

 

그건가 하고 주문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지만 역시 만족. 아무래도 모든 커피를 하나씩 다 마셔보고 싶어지던.

 

 

나오기 전에 계산대를 아무생각없이 훑어보다가, 빼곡하게 늘어선 찻잔 접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종류별로, 아마도

 

만들어진 나라도 다 다르지 싶은데 저렇게 모아둔 건 아무래도 바로바로 서빙할 수 있도록 한 편의를 따진 거겠지만

 

보는 입장에선 그 자체로 이쁘다 싶다.

 

 

3층에서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있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산속 풍경. 정말 보헤미안 오가는 길이란

 

대중교통으론 오지도 못하겠다 싶도록 험하고 외딴 동네였던 거다.

 

 

주말에 줄기차게 쏟아지는 사람들 때문에 엄청 힘들겠다 싶었는데, 그래도 주4일 근무인 셈이다.

 

월화수를 쉬는 주4일라면 그래도 나머지 목금토일, 열심히 일할만도 하지 싶은데. 전국에 전파가 시급하다.

 

 

보헤미안 앞에서 어딘가로 이어지는 꽃길. 사람이 좀만 덜 찾아오기만 하면 참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곳일 텐데.

 

그러고 보니 왜 건물 3층에 까페를 차렸을지도 슬쩍 짐작이 간다. 박이추 선생의 속내를 알 것 같달까.

 

번잡함이 싫어 서울 대학가에서 강릉, 하고도 외딴 곳을 찾아 들었을 텐데, 그리고도 굳이 3층에 까페를 만든 걸텐데

 

맛 좋은 커피와 장인의 솜씨에 기갈이 든 사람들은 거기까지도 꾸역꾸역 잘도 올라간다.

 

 

나 역시 그곳을 찾아 그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에 일조한 셈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렇게라도 한켠 박이추 선생과

 

보헤미안의 분위기를 차지해 보고 싶은 거다. 모두들 그런 생각으로 어깨를 부비며 이곳에 찾아드는 거겠지만.

 

 

'맛있는 인생'에서 그가 보헤미안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한적함과 여유로움의 편린일망정. 인생을 즐기고 싶어서.

 

 

 

 

'맛있는 인생',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강릉의 로맨스.

 

영화 '맛있는 인생'을 보고선 겨울에 혼자 강릉으로 여행을 갔다던 사람이 있었다. 혼자 떠났던 여행은 슬펐다 했다.

 

그이에게서 영화를 추천받았고, 강릉을 추천받았으며, 어느날은 나 역시 혼자 영화를 좇아 강릉으로 떠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번엔 다소 잿빛이었던 둘의 기억에 몇가지 빛깔을 더하는 여행. '맛있는 인생'을 따라잡는 여행이 되었다.

 

 

영화에서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나는 호텔, 경포대 현대호텔은 마침 이날이 영업 마지막날이었다. 아예 다 부수고

 

새롭게 다시 신축을 한다는 이 건물, 그래도 마지막으로 돌아볼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문득, 서울에서의 번잡하고 불쾌하고 난처한 일들에서 탈출하듯 강릉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강릉, 그가 묵었던 곳이 바로 현대호텔이었다.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났던 건 호텔의 까페 카리브. 밤이었던가 아침이었던가, 그는 메뉴에 나와있지도 않은 에스프레소를 찾으며

 

여점원을 괴롭혔고, 그녀는 귀찮은 손님의 난처한 질문에도 겸연쩍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었다.

 

그녀가 이 곳에 묵었을 때는 미처 까페까지는 못 둘러봤다 했었다. 여기서 앉아 차라도 한잔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이렇게 다시, 이번엔 함께 왔다는 걸로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기를.

 

 

어디였더라, 경포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였던 건 확실한데, 정확히 어디라고 딱 집어서 이야길 못하겠다.

 

사실 어디인들 뭔 상관인가.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경포 앞바다가 이렇게 이쁘다는 거, 그리고 이 공간에서 그들이

 

영화를 만들며 이렇게 저렇게 동선을 짜고 구도를 잡았으리라는 상상 자체가 재미있는 거니깐.

 

호텔 앞 로비에 있던 푹신해보이는 쇼파들. 저기 어딘가에 앉아서 그는 그녀가 일이 마치길 기다리기도 했었고,

 

그녀는 일이 없는 날 강릉 구경을 함께 나가기로 한 아침, 그를 기다리기도 했던 거다.

 

어라, 그런데 현대호텔의 마지막밤을 아쉬워했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던 걸까. 어느 프로축구팀 선수들도,

 

그리고 지방순회 공연중인 듯한 강부자 어르신도 체크아웃을 하곤 호텔을 떠나고 있었다.

 

호텔이야 부수거나 말거나, 옆에 있던 나무에서 쪼르르 내려와 고인 물을 할짝거리며 마시는 청설모 한마리와

 

딱 눈이 마주쳤다.

 

영화 속에서 그가 그녀를 좇아 스토킹하듯 뒤를 밟던 그 산책로, 그리고 언젠가는 그 혼자 술에 잔뜩 취해서

 

욕지거리를 우물거리며 호텔방으로 되돌아가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둘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도 했던 길.

 

호텔에서 내려오는 길, 차들이 말줄임표처럼 띄엄띄엄 늘어선 아스팔트 찻길 너머로 노란 모래사장, 그너머 푸른 바다.

 

그와 그녀, 그리고 또다른 그녀는 이런 풍경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호텔 앞 입구. 제법 운치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맘에 드는데, 이제 없어진다니 왠지 더 아쉬워서 쉽게 못 뜨겠다.

 

경포 해수욕장을 거닐며, 하나둘 켜지는 가게 불빛들을 보고 있는데 문득 해풍에 잔뜩 움츠러든 해송 너머로 새하얗게

 

질린 거대한 불빛 하나가 저물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의 사진 속에서 보았던 모래사장 위 흔들의자가 저거였을까. 노랑 풀꽃이 점점이 피었다.

 

경포대를 따라 이어지는 길 위에서 불쑥 나타난 꽃마차. 세상에, 청계천변에도 꽃마차가 달리더니

 

경포해수욕장에도 이런 게 있었구나 싶다. 말을 보면 기분좋게 달그락거리는 그 말굽소리를 꼭 듣고 싶어지는데

 

아쉽게도 아직 꽃마차 장사엔 제철이 아닌지 말들은 모두 가만히 서서 자는 듯 쉬고 있었다.

 

 

 

 

 

 

 

 

 

 

 

말하는 건축가, 요새 대세인 건축학개론 말고. 고 정기용 건축가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사실 건축이란 거, 여태 관심이 없었던 게 이상할 정도로 일상적이고 인간적인 예술인 거다. 사람을 에워싼

 

공간을 확보하고 형체를 부여하는 것. 그런 건축물들이 이번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새로 짓는 공모전에서

 

드러났듯, 그리고 청계광장의 빨갛고 파란 골뱅이탑에서 드러났듯, 인간과 역사에 대한 성찰과 배려없이는

 

쉬이 위압적으로 되어 천박하고 자기완결적으로 폐쇄된 '바벨탑'이 되고 마는 거니까.

 

 

그는 등나무에 기대어 선 운동장과도 같은 무주의 공공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제주도니 어디니 전국 곳곳의

 

기적의 도서관을 만들어내는 등 쉼없이 건축의 윤리성을 묻는다. 건축이 지향해야 할 바, 건축이 가져야 할

 

가치를 묻는 그의 태도는 대단히 완강하고 보수적이랄 수도 있겠지만-그래서 그의 건축은 첨단소재나 기법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한 가지 질문에 대한 나름의 성실한 답을 내놓는다.

 

 

공간을 실제로 활용할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평생 인간을 위한 공간, 형체를 만들기위해 애썼던 그가

 

자신이 지어올린 건물-목욕탕 겸 마을회관-옆에 앉아 볕을 쬐며 노인들과 담소하는 모습이란, 그가 꿈꾸던 인간적이고

 

공적인 건축물의 현현이자 그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을 보여주는 거 같았다. 그 건물을 누가 지었는지 관심조차 없는

 

노인들 옆에서, 다만 쓰잘데기없는 마을회관 대신 꼭 필요했던 목욕탕이 생긴 걸 기뻐하는 그들 옆에서, 가만히 웃는 그의 모습.

 

 

건축가로서 차츰 드러나던 그의 모습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이 보였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건축가로서의

 

시선을 갈무리하고 평생의 성취를 내보이는 회고전을 치루는 모습은, 그렇게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무리를

 

단단히 지으려는 모습은, 이미 특정 분야의 그렇고 그런 '전문가'의 모습을 넘어서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죽음을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을 매듭짓는 모습 자체로 모든 이의 공감과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거 아닐까.

 

 

'고양이를 부탁해'를 찍었던 정재은 감독은 그런 그의 죽음을 두고 괜히 눈물샘을 자극하지도, 턱없는 아량과

 

하릴없는 상찬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성대결절로 고생하는 병든 건축가의 갈라진 목소리를 자막도 없이 그대로

 

드러내며, 관객들이 모두 숨죽이고 귀를 쫑긋 세우고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꼭꼭 새겨듣도록 한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거슬린다 싶더니, 어느 순간 그 목소리가 너무도 뭉클하게 다가왔을 만큼 강력한 영화였다. 영악한 감독 같으니.

 

 

 

 

 

 

 

 

"파편화된 채 무기력한 대중으로부터 '클립토나이트'를 빼내고 모두를 당당한 슈퍼맨으로 각성시키고 싶은 영화." ytzsche.

 

 

한국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배우들이 이런 류의 영화를 찍은 건 얼마나 될까. 황정민과 전지현의 러브라인은 전혀

 

기대할 수 없으니 로맨스나 멜로도 아니고, 계속해서 비유가 가닿는 지점들을 생각하게 만들고 해석하게 만드니

 

코미디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화의 현실성에 기댄 채 눈물을 짜내는 '휴먼 다큐'식의 신파도 아니다.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장르도 더더욱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순간에 잡아채이곤 그의 삶을 들여다보다간

 

함께 걷는 이야기랄까. 한국의 주류 영화마켓에서 이런 잔잔하고 대중적이지 않을 영화에 황정민이나 전지현같은

 

대형배우가 출현하다니. 그들의 영화 선구안과 용기(?)에 조금은 감탄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일종의 우화로 다가온다. 스스로를 영웅이라 믿는 가슴따뜻한 바보들의 이야기는 많았다지만,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신파나 로맨스나 휴먼다큐의 유혹을 피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차근차근 동화속 세상으로 바꾸어나간다.

 

스스로를 슈퍼맨이라 믿는 황정민을 지천에 널린 또라이처럼 여기며 일회성 방송 소재로나 생각하던 전지현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그의 친구가 되어 그와 같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처럼,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세상의 모습이,

 

상식이 낯설게 바뀌는 거다. 계속해서 번갈아 보여주는 황정민의 날고 뛰고 악당과 싸우는 머릿속 슈퍼맨 이미지와

 

옆에서 보이는 누추하고 엉성한 뜀박질과 허공에 휘두르는 주먹질, 어느 순간 어떤 게 진짜인지 알 수 없어졌다.

 

 

그렇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조금씩 잠식하던 슈퍼맨의 저력은 마지막에 폭발한다. 아이를 구하려 3층에서

 

날아올라 무사히 땅에 착지한 건지, 아니면 무거운 쌀포대가 추락하듯 툭, 땅에 널부러지고 만 건지 잠시동안

 

혼란에 빠지는 거다. 물론 이어지는 후일담은 그가 결국 죽었다는 빼도박도 못하는 현실을 명시하고 있다곤 해도,

 

차근차근 그의 이야기에 스며들었던 그녀처럼 나 역시 황정민이 비로소 클립토나이트로부터 해방되어 날아올랐어도

 

이상할 게 없겠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래서 그가 '자기의 별로 돌아갔다'고 한 전지현 그녀의 대사처럼,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그는 정말로 대머리악당의 저주와 같은 클립토나이트로 초능력을 잃은 슈퍼맨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끝내 80년 5월의 광주까지 가닿는 욕심많은 영화라니. 어쩌면 이 영화는 우화나 감동 드라마인 척하며 힘을

 

빼고는 있지만 굉장히 정치적인, 실천적인 영화로 읽히는 게 온당할지 모른다. 광주를 짓밟은 계엄군의 총탄이

 

슈퍼맨을 일반인,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지구인'으로 만든 클립토나이트랜다. 그를 그렇게 만든 악당은 대머리고.

 

위기의 사고 현장이나 어려운 사람 앞에서 모두가 못 본 척 외면하거나 발만 구르고 무기력하게 손놓고 있을 때

 

'슈퍼맨임을 잊지 않은', 슈퍼맨이었다는 그가 먼저 한발 앞으로 나서는 거고.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물결이 봉쇄된

 

80년 광주의 상흔을 갖고 기억을 봉인한 한국사회가 무기력하고 무비판적으로 남아있음을 말하는 건 아닌지.

 

 

그렇게 읽는다면, 그런 맥락과 떨어뜨려 놓고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몇몇 영화속 대사들은 새로운 의미와

 

메시지를 담게 되는 것 같다. 예컨대 이런 것들.

 

 

"도와주지 않으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아예 잃어버려요. 그럼 내가 누군지 아예 까먹어버리죠. 악당들이

노리는 게 바로 그거에요. 그래서 난 계속 사람들을 도우려 해요."

 

 

"(전지현이 잡고 있는 줄을 잡아당겨 그녀를 끌어당기며)가 이 줄을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거기 있었겠지.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와 있어. 미래가 바뀐 거지. 남을 돕는다는 건 바로 이런 거야. 누군가의 미래를 바꾸는 것."

 

 

"커다란 쇠문을 여는 것은 힘이 아니라 조그만 열쇠이다. 우리 모두 열쇠를 하나씩 갖고 있다. 다른 미래의

문을 열 수 있는."

 

 

영화가 굳이 전지현의 남자친구를 몽골로 떼밀어놓은 채 이야기를 전개해서 황-전의 로맨스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해 버리는 거나, '지구가 더워지고 북극이 녹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지구인들(한국인들)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세세히 주목하는 거나, 황정민이 끝내 어릴 적 80년 광주에서의 자신에게로 돌아가 길잃은 흉탄을 막아내는 장면을

 

넣은 거나,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쯤되면 또렷해진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단순히 어느 마음이 힘들고

 

조금은 모자란 사람의 '포레스트 검프' 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기력하고 파편화된 무기력한 대중으로부터

 

'클립토나이트'를 빼내고 다시금 모두를 당당한 슈퍼맨으로 각성시키고 싶은 영화.

 

 

애초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새삼 아쉽다. 그리고, '엽기적인 그녀'와 삼성프린터

 

광고 속 이미지로 성공했지만 그로부터 벗어나는데 끝내 실패했다고만 여겼던-특히 헐리우드 진출작인 '블러드'를

 

시사회에서 보고 나서-전지현 그녀가 이런 영화도 찍었었다니, 하고 뒤늦게 감탄하고 말았다. 2008년작인 이 영화에서

 

그녀는 제법 연기자다운 결기를 보여준 거 같다. 하나도 꾸미거나 이뻐보이려 하지 않는 맨 얼굴의 모습들, 적당히

 

시크하면서도 삐뚤어진 성격을 잘 드러낸 연기, 그리고 너무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은 감정의 표현이랄까. 다만

 

목소리의 톤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는 '다시보기'로 좋은 영화 하나 건졌다.

 

 

 

p.s. 전지현씨, 결혼 축하해요~* 앞으로 더 좋은 연기, 좋은 영화에서 많이 보여주시길.

 

(혹시 이 리뷰를 언제고 읽게 된다면 실명으로 댓글이라도 하나 남겨서 의견주시면 좋을 텐데요.ㅎㅎ)

 

 

 

 

 

 

 

대만에서도 8,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복고풍 영화가 유행인 걸까. '점프 아쉰'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만영화다.

 

그렇다고 대놓고 그 시절을 추억하려거나 이쁘게 분칠하려는 투는 아니다. 그 시절 태어나서 자라나 방황하고

 

사랑하고 턱없이 진지하다가 이내 웃음이 빵 터지는 그런 청춘이 있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 감독의 친형이 살았던

 

삶을 재구성한 실화라고 하니까 더욱 단단하고 거품없는 현실감이 느껴지는 거다.

 

 

영화는 제법 길다. 러닝타임이 두시간이 넘어가니 꽤나 긴 셈이다. 내용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체조'를 소재로 한

 

영화라고만 알고 시사회를 갔는데, 영화 속에 체조도 있고 빗나간 청춘도 있고 남자들의 우정도 있었으며 부모와의

 

화해라거나 살짝 시큰한 사랑 이야기까지, 말하자면 일종의 갈라쇼 같은 영화이기도 했던 거다. '빌리 엘리어트'와

 

'비트'와 '친구' 같은 영화들이 각각 하나에 담았던 이야기가 노련하게 하나의 인물에, 하나의 이야기에 꿰여든다.

 

 

그런 영화는 허를 찌르는 반전이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한 영광의 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만 8,90년대의

 

풍경이나 정서가 살짝 오글거릴지언정 줄곧 따뜻한 시선으로 아쉰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라가며 다음번 그의 스텝은

 

어디로 얼마나 '점프'하는 게 될지 바라보게 되는 거다. 예측했던 곳에 예측했던 멋진 동작으로 착지할 걸 기대하고,

 

실제로 그가 다소간의 우회나 방황을 거쳐 예측했던 곳으로 무사히, 멋지게 귀환하는 걸 보면 충분하니까.

 

 

자칫 산만하거나 늘어질 수도 있었을 곡절많은 스토리를 탄탄하게 한 호흡으로 꿰어낼 수 있었던 건, 영리하게도

 

감독이 남자의 감정을 적절한 선에서 끊어준 덕이 크지 않을까 싶다. 어머니와의 화해라거나 호출 교환원 그녀와의

 

애틋한 사랑, 비장미와 남성미가 물씬했던 불량 청소년들의 싸움과 비극, 심지어 그가 세계대회에서 멋지게 뜀틀을

 

딛고 몸을 휘돌아 날아가는 마지막 장면에서조차 영화는 먼저 눈물을 보이거나 유도하지 않는다.

 

 

그건, 표현의 진부함을 감수하고라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영화, '재미와 감동'을 모두 갖춘 이 영화가 남긴

 

명대사 하나로 충분히 수렴될 것 같다. "만약 울고 싶다면 물구나무서기를 해. 그럼 더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을 거야."

 

그 대사를 발판으로 아쉰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 멋진 도약을 성공시켰고, 감독은 이 영화를 여느 숱한 청춘영화와는

 

다른 차원으로 차별화하는데 성공한 거 아닐까.

 

 

 

 

 

 

 

 

두 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가 있다. 그리고 첫눈에 반한 네 개의 사랑이 있다.

 

 

#1. 첫번째 남자. 사랑이란 '상대'라는 책을 남김없이 읽고 이해하 것이라 믿는다.

 

우선 쥬드 로가 연기한 댄. 그는 자신이 매력있다는 걸 아는 남자다.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 자신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발산하고 상대를 끌어내는 방법을 아는 사람. 그에게 포섭된 건 두 명의 여자였다. 먼저 그가 손에 넣고 싶다 생각한 건

 

앨리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발판삼아 만나게 된 안나. 두 명의 여자 사이를 진동하며 그는 자신의 소유욕을 한껏

 

채우려 든다. 맞다. 그의 사랑은 소유욕의 형태를 띈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관대하고 진실한 사랑을 과시하려 들면서

 

상대가 자신에게 완전히 무장해제한 채 앞에 설 것을 요구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마음 밑바닥까지 검열하고

 

타인의 흔적을 지우거나 공유하려 한다. 감내할 수 있을까. 그녀, 그리고 그가.

 

 

때로 그렇다. 끝내 견뎌내지 못할 '진실', '진심'을 알고 싶다며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채근하거나 옛 애인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어보는 불퉁맞은 심술이 있다. 그게 심술을 넘어 내 안의 불안감과 결벽증으로 발전한다 싶을 때도 있다.

 

우리의 사랑이 아름답기 위해서, 완전하기 위해서는 마치 백퍼센트의 순금을 정련하듯 당신과 나의 마음 속에서 티끌과

 

부스러기들을 모두 쓸어내야 한다는 강박이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이 맹렬히 불붙었을 때, 당신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쌍끌이 어선으로 샅샅이 긁듯이 읽어내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의 발현이기도 하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게 상대를 남김없이 알아야 한단 건 아닌데,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하는 무모한 짓을 벌이고 말았다.

 

 

 

#2. 두번째 남자. 사랑이란 적당한 스킬과 경험치로 쌓아올려진 섹스와 비슷한 것이라 믿는다.

 

클라이브 오웬의 래리. 그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남자다. 어떻게 해야 여자가 웃을지, 어떻게 해야 여자를

 

안심시킬 수 있을지, 그리하여 어떻게 해야 여자가 편안하게 기댈 수 있는 남자를 연기할 수 있는지 아는 남자다.

 

그렇게 댄으로부터 안나를 끝내 되찾아오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는 여자의 마음을 잘 아는 척,

 

사람의 마음을 잘 아는 척 하지만 정작 앨리스가 그녀의 본명을 말할 때조차 그 진심을 읽어내지 못한다. 사실 안나를

 

되찾아 온 것도, 안나의 마음을 읽어서라기보다는 같은 남자인 댄의 조바심을 읽고 상처를 예비했기에 가능했던 거니까.

 

 

아는 척 하는 남자. 선수인 척 하는 남자들, 그리고 여자들이 꽤나 있다. 연애를 많이 해봤다느니, 이럴 땐 이렇고

 

저럴 땐 저러면 된다는 식의 일반론들. 전부 시덥잖다. 래리가 그런 재기발랄한 몇 마디 말들로, 시의적절한 이벤트와

 

감동을 안길 수 있는 멘트로 상대의 마음을 얻었던 건 잠시뿐, 그조차 상대의 마음 깊은 곳은 미동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허랑한 지식이니 얕은 경험 따위를 양손에 쥐고 요리할 수 있는 상대란 없는 거다. 래리에게 부족했던 건 뭘까,

 

그는 여자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려고 한 게 아니라 아는 척 연기했던 거 아닐까. 그가 집착하는 '섹스'를 위한 지름길이라

 

여기며 스스로 감탄할지 몰라도 그의 옆에 남은 여자, 안나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3. 첫번째 여자. 사랑이란 자칫 방심하면 자신이 다치는 불, 어느때고 꺼버릴 준비가 필요하다 믿는다.

 

나탈리 포트만, 그녀가 연기한 앨리스 혹은 제인. 그녀는 누굴까. 그녀는 댄을 진짜 사랑했을까, 래리도 사랑했던 걸까.

 

뭐 하나 쉽지 않다. 그녀의 이름. 왜 본명을 숨겼을까. 그저 순간의 장난이었을지도, 잊고 싶던 과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 잘 있어"라는 말로 상대가 더는 말도 못 붙이게 하고 떠나버린단 말. 어떻게 그렇게 모질 수 있을까.

 

그건 흔한 말로, 이전 사랑의 상처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그녀만의 사랑법일 뿐인지도 모른다. 댄에게 그녀가 이별을

 

선언할 때는 이 말을 덧붙였었다. '난 평생 널 사랑하려 했는데.' 진심일 수도 있었을 거고, 혹은 미안함의 발로였을 수도.

 

진심이라기엔 끝내 숨겼던 그녀의 본명이 걸리고 '진실'을 강요하는 댄의 익숙한 유치함을 참아주지 않은 게 걸린다.

 

 

문득 비약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사랑에 빠지길 겁내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라도 한발 뒤로 뺄 구석은 남겨두고,

 

본명 뒤로, 사랑하지 않는단 야멸찬 선언 뒤로 숨을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남자와 희롱하거나 댄과 이야기할 때의

 

그녀는 사랑을 비웃고 쿨한 척 굴지만, 그건 일종의 징후다. 그녀는 분명 사랑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 영리한 척 어리숙한

 

남자 둘보다 훨씬 더. 첫눈에 반한 사랑이 숙명이라며 안나와의 '바람'을 정당화하려는 댄에게 그녀가 한 말,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란 말의 노회함이라니. 그렇지만 정작 그녀야말로 사랑을 많이 아는 만큼 겁내게 되어버렸고, 끝내 뜨뜻하게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사랑만 취하고 떠나는 사람이 된 건 아닐까. 여전히 마음은 시리고 문득 눈물로 무너져내릴지언정.

 

 

 

#4. 두번째 여자. 사랑이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면 그뿐, 운명이라 믿는다.

 

줄리아 로버츠가 연기한 안나. 그녀가 댄과 래리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을 보고 살짝 답답증이 일었던 것은, 대체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 건지 분명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댄에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꼈으며, 또한 래리에게서

 

또다른 매력과 호감을 느꼈다. 어떤 걸 사랑이고 어떤 건 사랑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약간은 도발적이고 위태로운

 

관계, 그리고 편안하고 안정적인 관계로부터 비롯했을 뿐 두 가지 모두 사랑이라 하면.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두 개의

 

사랑 중에서 무엇을 택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그저 둘다 갖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데 혐의를 두는 게 낫겠다.

 

 

어쩌면 그녀는 앨리스(혹은 제인)와 정반대의 애정관을 가진 인물, 그녀에게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레

 

다가온 운명이며, 감히 먼저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운명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렇게 두 조각난 자신의 세계를

 

가까스로나마 보호할 수 있을 거다. 댄의 세계와 래리의 세계, 두 세계가 합쳐져야 그녀에게 완전하니까. 그 두 세계

 

어디에도 완전히 투신할 수 없는 그녀, 선택을 강요받는 지경에 이르러 댄이건 래리건 누군가의 옆에 머물게 되었지만

 

이미 그녀는 조각난 세계 앞에서 자신의 사랑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                                                             *                                                           *

 

그래서, 두 명의 남자, 두 명의 여자가 만들어낸 네 가지의 사랑이야기는 모두 비극이다. 그게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 믿어지던, 혹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누군가를 향해 열었던 마음이었던, 결국은 스스로가

 

생각하는 방식의 사랑을 쌓아올리다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사랑이 어디에 이르러 하트 모양의 공을 터치다운해야

 

비로소 성공하고 완성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모든 건 사랑에 빠지기로 '순간의 선택'을 하고 나서 '당신'이라는 거대한 블랙박스 앞에서 자신이 가진

 

최대한의 지식과 지혜와 경험치를 살려서 그 드문드문한 신호들을 해독해 보려 애쓰면서부터 예정된 비극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침묵이, 당신의 웃음이, 당신의 손짓이 가진 알 수 없는 뉘앙스와 의미에 겁먹지 않고 내게 친숙하고 익숙한

 

것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는 대체로 오해와 균열을 낳고 만다.

 

 

사랑을 한다는 건 서로 완강히 뻐팅긴 채 멀어지려는 직선 두개를 잡아매두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한땀한땀, 두꺼운 무명실을 대바늘에 꿰어 직선 두개 허리춤에 둘둘 묶어서 촘촘하게 바싹 붙여두는 식이랄까나.

 

그건 시지프스의 신화에 비견될만큼 지난하고 고단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어쩌나.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사람이 사랑없이 살 수 없는 게 사실이라면, 허리춤이 아니라 속고쟁이라도 잡고 늘어져야지.

 

 

왠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소라의 노래 가사 한 대목이 떠오른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바람이 분다, 2004)

 

네 명의 사랑 이야기가 비극적이란 점에서 이렇게도 한결같을 수 있구나, 싶어서일까. 또 이야기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싶어서일까. 또, 결국 Hello, Stranger로 시작한 영화가 Bye, Stranger로 끝나는 거 같아서일까.

 

 

영화는 짧았지만 생각이 한없이 늘어진다. 한번 보고, 다시 또 보고, 그러고 나서도 할 말이 정제되지 않아 이렇게

 

길어지다니. 영화의 여운도 여운이지만 노래 탓도 크다. 요새 잠들기 전 꼭 한번은 듣고 잠드는 노래.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would be
Life goes easy on m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shorter story
No love, no glory
No hero in her sky

당신이 말한 대로 되어 버렸죠.

대부분의 시간, 나는 인생을 편하게 받아 들이게 되었죠.

그건 아주 짧은 이야기죠.

사랑도 없고, 영광도 없고,

그녀의 하늘에는 영웅도 없는,

짧은 이야기..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And so it is
Just like you said it should be
We'll both forget the breeze
Most of the time
And so it is
The colder water
The blower's daughter
The pupil in denial

그래요.

당신이 말했던 것 처럼,

대부분의 시간에는

우리 둘 다 그 소문들은 잊어야 할 거예요.

그래요.

차가운 물.

허풍쟁이의 딸.

부정하는 눈동자..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o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off you
I can't take my eyes..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당신에게 눈을 뗄 수가 없어요.

 

Did I say that I loathe you?
Did I say that I want to
Leave it all behind?

당신이 싫다고, 내가 얘기 했었나요?

내가 말했었나요?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떠나 버리고 싶다고..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o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off you
I can't take my mind..
My mind...my mind..
'Til I find somebody new

내 마음을 당신에게서 뗄 수가 없어요.

내 마음을..내 마음을..

새로운 누군가를 찾을 때 까지는요.

 

 

 

 

 

영화는 어떤 기술적 진보에 대한 '아티스트'의 반감과 편견이 끝내 녹아내리고 새롭게 진보한 '그릇'에 어울리는 형태의

 

'아트'를 다시 재개하는 것으로 끝난다. 소리가 지워진 영화세트장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표정과 몸짓으로 연기하던 그가

 

먼 길을 돌아 다시금 모두들 소리를 죽인 영화세트장으로 돌아가는 것, 그렇게 그가 발굴하고 영감을 건넸던 젊은

 

여배우와 경쾌하게 탭댄스를 추는 장면에서 구둣발을 어찌나 감각적으로 타닥탁탁 거리던지. 타닥탁탁.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구둣발이 내는 소리를 살려내면서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더욱 넓혀내는데 일조한 셈이다.

 

 

어쩌면 영화는, 2011년에 만들어진 무성영화인 이 영화는, 영화에 꼭 '소리'가 필요한지에 대해 새삼스레 확인해 보고,

 

영화 속 세계에 당연하게 포함된다고 생각했던 '소리'를 어떻게 해야 인상적으로, 인습적이지 않게 재발견할 수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장면에서 소리의 힘을 빌지 않고 표정과 몸짓과 최소한의 대사 텍스트로

 

스토리를 진행해 가다가 문득, 남자를 괴롭히거나 희롱하다가 결국엔 화해하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릴 때마다 사운드가

 

지닌 나름의 강력한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 거다. (그보다 무성영화의 섬세한 아름다움에 더욱 감탄했지만.)

 

 

영화에선 크게 두개의 갈등이 노정되고 있는 듯 하다. 새로운 기술적 발전과 그 결과물에 대한 시선의 문제에 더해,

 

'세단 지나간다니 똥차 빼주자'는 세대간의 문제랄까. 기술 혁신과 그로 인한 변화의 가능성이란 건, 반기는 사람에겐

 

세상이 확 바뀌고 나아지리라는 열광을, 시큰둥한 사람에겐 조잡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생겼다는 기피감과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사진기술이 개발되거나 영화가 발명되거나, 영화에 소리가 들어가거나 혹은 3D기술이

 

생기거나, 아니면 스마트폰이 생기거나 따위에 대한 찬반. 그건 대체로 '구세대'와 '신세대'의 경계와 겹치곤 한다.

 

 

그렇지만 그건 '아티스트'에서 보여주듯, 어쩌면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에서부터 웅변하듯, 그러한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이라는 요소'에 비기면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인 거다. 기술 발전이 어떠한 방향으로 얼마나 혁신적인 가능성을

 

확장시킬지라도, 혹은 그것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식의 디그레이드가 될 여지가 크다 할지라도, 그걸 활용하고

 

가능성을 구현하고 제 몸에 맞는 옷으로 적응시키는 건 결국 인간. 그런 작업에 요하는 창의성과 창조성을 감안한다면

 

일종의 예술이라 해도 무방할 테니 결국 쉼없는 기술혁신기에 처한 인간은 모두 아티스트인지 모른다. 마치 그가

 

그녀와 함께 유성영화 속에서 구둣발을 타닥탁탁 하며, 목소리 대신 새로운 사운드를 들려주듯이.

 

 

그러거나 저러거나, 오랜만에 보는 무성영화-최근에 봤던 무성영화는 어느 따뜻한 나라로 떠나던 외국의 비행기 안에서

 

보았던 찰리채플린의 클래식이었다-는 역시나 물기를 함뿍 머금은 듯 부드럽고 촉촉한 화면의 느낌이라거나, 동작 하나

 

표정 하나 사려깊게 배치된 섬세한 세공이라거나, 그리고 무엇보다 자칫 자극적이고 번다하기 쉬운 소리의 쓰임없이도

 

보는 사람을 흡인하고 이야기의 끝까지 함께 달려가게 만드는 그 힘 같은 것들에 다시금 매혹되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2011년에 만들어진 새삼스러운 무성영화, '아티스트'를 찾아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어느 순간까지는, 사랑하던 남녀의 이별, 갑작스레 '차인' 상황에 대한 메타포에 다름아니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녀, 빵빵하게 부풀었던 질긴 풍선처럼 자신의 세상 구석구석까지 채웠던 그녀가

 

남기고 간 결핍감, 공허감, 그리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현실부정의 몸부림까지. 대체 왜 사라져버린 건지 감도 잡지 못한채

 

그저 몇몇 단서로 더듬거리듯 추측이나 해볼 뿐인 상황에서 남자는 때로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만큼의 슬픔과

 

비통함을 토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라져버린 여자에 대한 광기어린 분노와 질투, 증오를 폭발시키던 거다.

 

 

살아가면서 맺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란 게 고작 핸드폰 번호 하나, 이메일 주소 하나 만으로 간신히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를 떠난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참 쉬운 건지도 모른다. 전화를 꺼버리고 이메일 계정을 삭제한 채

 

커다란 알사탕에 바글바글 꼬여있는 개미떼같은 인간들 틈속으로 슬쩍 스며들면 그뿐이니까. 그렇지만 급속도로 불어난

 

인류의 비대해진 몸집을 전혀 따라잡지 못한 인류의 마음이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여서, 남자는 칼처럼 자신을 끊어버리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만 여자를 좀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다. 이제 그녀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어떻게 웃었으며 말할 때 버릇이 뭐였는지, 자신이 알던 그녀가 그녀가 맞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믿기지 않는, 도무지 현실같지 않은 현실에서 남자는 떠나간 여자의 온기를 찾는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잠시일지언정

 

함께 누웠고, 웃었으며, 꿈이 아닌 '레알'로 존재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 뿐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시간과 기억을

 

배반하고 부정하지 않으려는 그 숭고한 의지는 대개의 경우 상대의 싸이나 카톡 사진을 들춰보는 걸로, 술에 취한

 

새벽 두시쯤 전화 한번 해보거나 여차하면 집앞에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걸로 귀결되기 마련이지만, 영화 속

 

남자는 여자의 뒤를 쫓으며 예기치 않은 어둠의 장막을 들춰보게 된다. 계획된 살인과 본격적인 정체성의 은폐공작.

 

 

스릴러가 풀려가는 방식보다 더욱 재미있었던 건, 그 모든 걸 일종의 메타포로 읽어내렸을 때 남자의 반응이었다.

 

남자는 왜 여자의 뒤를 기를 쓰고 쫓으려 했을까. 남자는 왜 여자의 옛 남편까지 만나보려 했을까. 남자는 대체 왜,

 

기어이 여자를 만나고 껴안고 다시 놓아줬을까. 자신이 그녀와 함께 했던 사랑의 순간들이 그녀의 배신으로 한순간에

 

부질없는 조각들로 무화되는 걸 막아내려 필사적이었고, 그렇게 지켜낸 사랑의 이야기(서사)에 나름의 소망이 담긴

 

엔딩을 그려보려 하는 안간힘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는 그녀가 시든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낙화하는 그 순간을 막아보겠다고 기를 쓰고 내달렸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던 건, 그녀가 끝내 살아남는 것. 자신과 함께 했던 순간들, 마지막으로 마주서서 끌어안았던 순간의 진정성을

 

놓치지 않은 채 그래도 한조각 가슴에 품고 살아갈 만한 진심을 건네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대 잡히지 말고

 

어디서던 무슨 이름으로 어떤 얼굴로 누구로 살아가던 간에 꼭 살아남기를 바랬던 건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가 했던

 

사랑을 지켜내기를, 그래서 자신의 사랑이 배신당하지 않기를 바랬던 게 남자의 깊숙한 속내 아니었을까.

 

 

그랬다면, 여자의 선택은, 코너에까지 몰려버렸다고는 해도, 그의 기대와 소망을 다시금 흔들어버린 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와 그녀가 함께 했던 시간동안의 '사랑'에 대한 남김없는 배신일지도 모르겠다.

 

 

 


"강릉을 넘어 현실에까지 범람한 그와 그녀의 사랑. 그들의 로맨스는, 그들의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ytzsche.



강릉과 非강릉, 영화와 현실의 공간.

강릉은 그런 곳이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파랗기만 한 바다에 연한 이 자그마한 소도시는, 외지에서 들고 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나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곳이다. 특히 여름에 바다를 찾는 향락객들에게는, 강릉이란 극중 민아의 자조섞인

표현처럼 일종의 '피서지용 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필요할 때 찾아와선 며칠 후엔 훌쩍 내버리는.


영화사 조대표도 잔뜩 지친 채 그렇게 불쑥 강릉으로 향한다. 딱히 일정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그저 바다를 보겠다

떠난 길이었으니 그에게 강릉은 일종의 비현실이었다. 그리고 투숙한 호텔에서 20년전 강릉에서 만나 하룻밤을 지냈던

민박집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그녀, 민아를 만나 함께하며 강릉은 20년만에 로맨스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느 연인들처럼, 그와 그녀 역시 스치는 손길 하나에, 미묘한 뉘앙스를 흠뻑 적신 단어 하나에, 그렇게 감정이 부풀어오른다.

그건 그가 호텔 로비에서 만나는 남자 맛사지사와 여성고객의 흥정 따위를 모두 성적인 의미를 함뿍 담아 읽어내린다거나,

그녀 역시 그를 조심스레 만지려 들며 그를 욕망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자연스러운 거다.



강릉에서의 로맨스, 강릉에서만 가능한 로맨스.

문제는 그들이-그의 생각대로라면-부녀간일 수도 있다는 것. 그는 드문드문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감정을 벌여놓는다. 그건 그가 강릉이란 곳을 대하던 태도에서 비롯할지 모른다. 여긴 '피서지'니까,

현실과는 다른, 영화 속과 같은 허구의 공간. 현실의 문법과 규율이 깨지는 그런 비현실의 공간. 이미 그는 20년전에도 그랬었다.


어쩌면 그녀도 그와의 사랑이 순간의 불장난이라거나, 두시간여만에 크레딧이 올라가며 끝나버릴 영화같은 기억으로 끝날 거라

지레 겁먹고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아픈 상처를 갖고 있던, 그리고 아마 그런 아픈 상처의 결과로 태어난 그녀다.

혹은 그녀는 아직 어려서, 깨질지언정 한번 그와의 이야기 마지막 페이지를 보겠다는 당돌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는 같다.


그와 그녀는 줄곧 손에 소니 핸드캠과 라이카 카메라를 쥐고 다닌다. 경포에서 주문진을 돌아다니는 길에, 그들은 쉼없이

서로의 이미지를 기록하고 저장한다. 일층에 미용실이 있는 이층 양옥집에 대한 엇갈린 기억이라거나, 새로 찍으려 하는

영화에 대한 즉흥적이고 암시적인 이야기들이라거나, 그러는 그들은 분명 그 예술적인 세계의 감독이나 배우처럼 굴고 있었다.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로맨스의 물결.

그녀가 그에게 먼저 고백한 때, 그는 그 직전 분명 그 타이밍에 마음을 전하려 결심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도망갔을까.

왜 강릉을 벗어나 자신이 속한 거대한 도시 서울로 한달음에 되돌아왔을까. 그녀의 고백에 퍼뜩 놀라 겁먹은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게 '로맨스'로서 어울리는 짧고 아름다운 결말이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울에 돌아와 안심했을까.


아마 그는 굉장히 찝찝하고 부끄럽고 지쳐버린 채 돌아왔을 거다. 어디선가 내 아이가 나도 모르게 자랐다는 상상, 그리고

그 아이에게 '핏줄이 당기는 것'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상상이 허용되던 다소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불쑥

냉혹하고 단정한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그리고 20년이 지나도 똑같이 그 공간에서 도망나와 문제를 피해버렸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영화같다'고 표현하는 식이라면, 여기서 그의 이야기 한토막은 크레딧을 올리며 끝내야 하는 타이밍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영화는 끝이 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해주는 데서

폭발하는 거다. 강릉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었던 그들의 영화같은 사랑이 비로소 그 속박을 끊고 현실까지 넘쳐들어오는 순간.


로맨스와 현실의 혼재, '강릉'이란 알리바이가 필요치 않은 사랑.

물론 대책없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녀는 그의 딸인 게 분명해지고,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의 나이차는 스무살.

그들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지,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물과 기름같이 겉돌던 로맨스와 현실을 비로소 뒤섞을 수 있게 되었다. 강릉과 非강릉의 벽을 넘어서.


어쩌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아닐까. 로맨스는 로맨스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생각하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영화에선

그게 '강릉 vs 非강릉'의 공간으로 표현되었다면,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거나, 연애 초 콩깍지와 리얼한 실재모습은 다르다는

식으로, 결혼 전과 후가 다르단 식으로 칸막이를 세워 놓고는 '(짧아서 아름다운) 로맨스 vs 현실'의 구도를 만들곤 한다.


아닐 수도 있을 거라 믿는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도 않고, 로맨스의 마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만치

뭐 하나 뚜렷하게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건 확실하다. 우리의 로맨스는, 우리의 영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다음 장면으로 함께 넘어갈 수 있는 한 끝나지 않는다. 그게 아마도 백년후에 크레딧을 올리는 비법.


각자 만들어가는 영화의,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라면. 배우와 감독이라면.




"누군가에겐 일생을 통틀어 어느 짧은 시기만이, 그때의 감정만이 전부였을지 모른다." ytzsche.


매끄럽고 탄력있던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당돌하고 총명하던 얼굴에는 얼룩지듯 나이가 묻어나는 어느 노인의 독백,

그녀의 회상으로 시작한 영화는 그녀의 '오늘'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맺는다. 첨엔 이게 뭘까, 싶을 정도로 들이댄 렌즈에

잡히는 그녀의 하얗게 서리내린 머리카락과 시들어버린 육체를 두고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줄곧 끼적이던 그녀의 펜으로 풀려내려간 이야기를 듣고 난 그녀는 문득 아름다웠다.


그녀의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다. 영화제목은 영어로 the Lover, 불어로는 L'amant. 프랑스어로 듣는 게 제인 마치와

양가휘의 연기를 오리지널로 맛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삼분지일쯤 영어 버전으로 보던 영화를 다시 프랑스어로 재개했다.

제인 마치가 오물오물 입술을 벌려 내뱉는 짧고 도발적인 말들이라거나, 양가휘가 손을 덜덜 떨며 건네는 담배라거나

몇마디 구애의 언어들이 더욱 달콤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던 건 프랑스어 특유의 멜랑꼴리함 덕분이었을 듯.


쉽지 않은 사랑이다. 프랑스 식민통치하의 베트남, 피식민지에 와서 몰락한 프랑스 가족의 소녀, 그리고 베트남 상권을

장악한 중국인 가족의 남자. 소녀 나이에 두배에 이르는 남자 나이, 그 나이차와 피부색만큼이나 둘의 배경은 판이하다.

서로 교통하지 않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 유럽이 제패한 시대를 사는 몰락한 유럽인과 피식민지의 유복한 동양인의

아이러니에 더해서 이미 가족이 정한 정혼자까지 있는 남자. 물과 기름처럼 뚜렷하게 갈린 두 사람 사이에 칸막이마저 있다.


끝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면서 사랑한다면 그들처럼 하게 될까. 상대를 당장 확인하고 갖고 싶다는 열망의 끝은 섹스.

도무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가족에 대한 분노, 주위의 질책 어린 시선과 노골적인 비난에 대한 반감, 첫눈에 끌려버린

상대에 대한 사랑, 젊고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탐미, 이야기의 마지막장을 이미 알고 있다는 좌절감,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무기력함과 자기혐오, 자기를 잡아주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원망, 그 모든 감정이 회오리치는 섹스신들.


도대체 이건 어떤 감정인지, 서로는 어떤 의미인지조차 알 수 없어지도록 질펀하고 몽롱한 섹스의 향연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아프게 떠올린다. 피하고 싶었던 감각, 통증을 느끼며 상대를 바라보는 순간. 그들이 강철같이 단단하고

엄연한 현실을 피해 숨을 곳은 서로의 품밖에 없었던 건 아닐까. 일종의 마취제나 진통제처럼, 그들은 서로의 현재를

끌어안고 남김없이 탐닉하며 가능한 '살아있는 시간'을 연장하려 발버둥쳤던 건 아닐까.


"널 만나기 전에는 고통이란 걸 몰랐어..널 간절히 원해. 널 내 곁에 두고 싶어..하지만 내겐 힘이 없어. 내겐 힘이라곤

전혀 없어! 난 죽은 거야. 너를 향한 욕망도 없어..내 몸은 사랑하지 않는 이를 원치 않아."라는 남자의 고백.


그리고, 남자를 떠나보내고 프랑스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처음으로 울었던 그녀 역시. "모래 속의 배설물처럼 뒤섞여버린

현실 속에서, 알 수 없었던 그에 대한 사랑을 찾았다"던 그녀의 고백.


그들은 함께 있던 순간만 존재했다. 그녀의 짧은 이야기 속에, 영화 한 편 분량의 이야기 속에 그녀와 그의 인생이 전부

들어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예전에 그녀를 사랑했던, 그를 사랑했던 힘으로 버텨 살아왔을 그들. 과연 노년에 다시

만난 그는 말한다. "예전에 그녀를 사랑했었다고...그리고 그 사랑은 아직 멈추지 않았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며,

죽을때까지 그녀를 사랑할 것이라고."



* 사실 그들의 섹스는 굉장히 적극적이고 도발적이긴 하지만, 그보다도 육감적이었던 건, 그리고 그 섹스의 기원이라

여겨지는 풍경은 따로 있었다. 남자의 차를 함께 탄 여자, 그리고 짧고 설레는 문답이 띄엄띄엄 이어진 후에 가만히

접근하며 여자의 새끼손가락부터 촉감하던 남자의 다섯 손가락,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다가 어느 순간 활짝 다섯

손가락을 벌려 그를 받아들이던 여자의 손놀림까지. 자칫 굉장히 유치할 수 있던 순간을 숨까지 몰아쉬며 눈 부릅뜨고

보게 만들었던 건 온전히 두 배우의 연기력이라고 해야 하려나.






"미워할 수 없는 악인 캐릭터, 아니 차라리 그는 현대 도시에 뜬금없이 내던져진 정글소년 아니었을까." ytzsche.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거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그렇지만 그렇게 앞뒤 동강난 짧은 망상에 이야기가 붙어선 매력적인 캐릭터가 탄생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세상과 유리된 채 필요에 따라 조금 한숟가락 얹을 뿐인 초능력자. 일신에 품고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에 비해 참 단촐하고

소박하다 싶을 정도로 존재감없이 살고 있단 게 말이 되나 싶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려 했던 그의

비극적 운명을 헤아려보면 등장부터 연민이 울컥 치미는 캐릭터인 거다.


초능력. 일반인에 비해 월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때 우린 초능력을 지닌 자, 초능력자라고 말한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해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분명 일반의 수준에선 불가능하고 불가해한 초능력임에

분명하지만,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본인은 그로 인해 부모의 보살핌을 잃었고, 학교도 다니지 못했으며, 변변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막막한 도시의 그림자로 숨어들었던 거다. 배트맨에 나오는 악역 펭귄맨 같기도 하고, 혹은

어쩌면 현대 도시에 나타난 '정글소년 모글리'같은 캐릭터인지 모른다.


분명 '정글소년 모글리'를 연상시킨 이유의 팔할은 강동원의 덕이다. 작고 갸냘픈 체구에, 상처받은 눈빛을 불안하게

흔드는 그의 표정이나 움직임은 다른 사람들과 섞이지 못한채 줄곧 바깥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이방인의 그것 같다.

사실 그는 자신의 특수한 능력 때문에 사회화될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 내에 자신의 자리를 잡지 못한 채, 근근이

전당포나 털어가며 살았던 거다. 그에 비하면 무작정 그를 뒤쫓는 고수의 캐릭터는 그래도 준수한 삶을 살고 있달까.

그에겐 피부색이 다른-그렇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친구도 여럿 있고, 허름하나마 직장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강동원이 연기한 이 매력적인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뒤로 갈수록 영화가 후줄근해진다고 느끼는 건,

전적으로 그의 탓이다. 그가 왜 그토록 강동원을 잡는데 집착하는지, 그가 다른 이들에게 보였던 연민과 따뜻함이

강동원에 이입될 수는 없었던 건지, 그리고 심지어 강동원을 잡아서 뭘 어쩔 건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단서도,

설득력도 없어 보인다. 둘의 조우가 반복될수록 고수가 왜 강동원을 쫓는지, 왜 그의 분노게이지는 떨어질 줄

모르고 무작정 상승하기만 하는지 납득이 안 가는 거다.


차라리 강동원이 조우를 반복하면서도 끝내 그의 능력으로 확실히 고수를 종결짓지 않고 불씨를 남겨두는 건

이해가 간다. 여태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않고 제대로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을 그에게, 비록 맹렬한 분노일지언정

본인의 존재를 그토록 크게 인식하고 반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그에게는 전혀 새로운 쾌감이자 행복, 혹은

그에 가까운 감정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둘만의 생존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승패 여부에 관계없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능력을 한껏 뿜어내며 고수와 대적해 나가는 거다.


가끔 그런 해외토픽 기사가 뜨곤 한다. 무성한 밀림에서 홀로 자라난 어린 아이가 문득 발견되어 도시로

이송되어서는 병원 치료도 받고 교육도 받는다는 기사 말이다. 강동원이 그렇듯 문득 도시로 떠밀려온

정글소년과 같다면, 그는 초능력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장애자', '사회적 약자'라고 불리는 게 맞지 않을까.

그리고 해외토픽의 짧막한 후속보도가 그렇듯, 그렇게 사회로부터 떨어져 살며 사회화의 기회를 놓치고 만

사람들은 대개 죽어버리고 만다. 강동원이 그랬듯.









"아버지를 그리는 아버지의 영화, 하드보일드 버전의 '아름다운 인생'이랄까". ytzsche.


비우티풀Biutiful. 영어로 '뷰티풀'을 어떻게 쓰냐고 물어보는 딸에게 그가 알려주는 알파벳이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했으며, 떳떳한 일자리나 제대로 된 가정환경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아빠지만,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는 거다.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은 아니어도, 최소한 영어 단어 하나쯤은 주저없이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던 거다.


그의 삶은 '비우티풀'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경제 위기로 흉흉한 스페인,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의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그들의 일당을 나눠갖는 게 그의 소득이다. 갈취, 혹은 등쳐먹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경찰의 단속을 막기 위해

뇌물을 먹이는 것도 그의 일이다. 그렇게 그는, 스페인과 불법체류자 양쪽으로부터 멸시받고 혐오받는 사람이지만,

그런 멸시와 혐오의 대가로 근근히 이어지는 그의 삶은 초라하고 구질구질하기만 하다. 게다가 몇개월의 시한부 선고까지.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 앞에서 잔뜩 흔들려버린 그는, 전혀 떠날 생각이 없다. 아무리 영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엄마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아내와 두 조그마한 아이들 앞에서,

훌쩍 떠나갈 수는 없었을 거다. 게다가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도 아이들에게 아무 기억도 남기지 못한 채, 고작해야

몇달치 집세와 함께 가난만 남겨놓고 떠나가게 될 거란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그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던 젊은 나이에 스페인을 떠나 외국으로 일하러 떠났던 아버지는,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얼굴도 보지 못한 아버지를 늘 그리워한다. 그가 자신의 파탄나버린 결혼생활과 위기에 처한

가정을 어떻게든 지키려 애쓰는 거나, 먼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애쓰는 건 모두

그의 아버지에 대한 결락감과 그리움에서 비롯했는지 모른다.


포르말린에 잔뜩 절어 미이라가 되어버린 젊은 아버지의 시신, 이장을 위해 열린 무덤 속에서 드러난 아버지 미이라의

얼굴을 한참동안 매만지는 그, 마치 아버지의 영혼과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 같다. 그렇다. 그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돌려보내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 그렇지만 영화는 이때 그가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는 삶에 응어리나 원망이 남아 떠나지 못한 영혼과의 대화만 가능한 것.


아버지 미이라와의 조우 이후에도 그의 삶은 여전히 구질구질하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조급함과 불안감에

떠밀린 무리수는 그를 나락으로 몰아간다. 조울증으로 고생하는 아내와의 재결합 시도, 중국인 이주노동자들의

무리한 건설현장 일용직 투입..어느 것 하나 끝이 좋지 못했고, 그는 다시 아이 둘과 함께 하는 싱글파더로, 사고로

몰살당한 수십구의 시체 틈바구니에서 옴쭉달싹 못하고 돌아와버렸다.


그렇게 그는 한발한발, 죽음으로 다가간다. 그의 삶은 전혀 개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불어 그의 아이들 역시 그가

아버지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다. 결국 죽음이 눈앞에 닥쳤고, 형편없이

너덜너덜해진 육체를 겨우 가누며 그는 죽음 직전까지 자신이 만들어낸 수십구의 중국인 영혼에게 고통받는다. 그건 그의

특수한 능력이 발현된 건지, 아니면 그저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의 발현이나 삶의 무게 그자체의 메타포었는지도 모른다.


죽음. 죽기 전 그는 딸애에게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며 자신을 잊지 말 것을 약속받는다.

아이들이 따르게 된 사람에게 뒤를 부탁한다. 비록, 딸애가 언젠가 그 다이아몬드가 가짜라며 내팽개치고 그의 기억 역시

내팽개칠지 모르지만. 그리고 비록, 아이들을 부탁한 이주노동자 그녀가 돈뭉치를 들고 언제든 튈 수 있고 실제로도

한번 시도했었지만. 그정도의 흐릿하고도 갸냘픈 희망뿐이라지만, 그게 그가 죽기 전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희망.


아마 그는 그의 아버지 미이라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던 거다. 영화의 도입 장면에서 나타났던 그보다 훨씬 젊고

민활해 보이던 청년은, 이제 그가 그의 아버지란 사실을 알게 된 관객들 눈앞으로 영화 마지막, 그의 죽음 이후에 다시

나타난다. 잠깐의 어색함과 긴장감 이후에 둘이 나누는 눈빛, 흘려내는 웃음소리. 비로소 그는 아버지와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 거다. 아마도 그가 그토록 바라던 순간 아닐까.


어쩌면 그는 아버지를 그리던 한 생을 가장 아름답게 마감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신이 누군가의 아버지로

살았던 삶 역시, 그 신산함과 누추함에도 불구하고, 그 낙관하기 쉽지 않은 자잘한 희망부스러기들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던 거다. 비우티풀. 그가 그의 아이에게 가르쳤던 대로, 비우티풀.





사람의 사고능력을 제한하는 건 뭘까. 돈일까, 명예 혹은 자존심일까. 어떤 게 더 강력할까.


그런 질문을 던지는 영화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살인사건에 대한 조각난 팩트들이 몇 개 널려있고,

그 팩트들을 어떻게 꿰어서 어떤 시나리오를 만들어낼지, 누구에게 죄를 물어야 할지는 자신의 입장이나

분노 유발조건들이 좌우하는 건 아닐까 싶었던 거다.


살인사건이 있었고, 검사(박희순) 측은 피살자의 남편(장혁)을 범인으로 확신한다. 그건 박희순과 장혁 간

이전에 얽힌 악연과 상처받은 자존심에서 출발한 건지도 모른다. 한편 변호사(하정우) 측은 장혁을 범인으로

모는 검사에 대항해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시나리오를 정밀하게 만들어간다. 그리고, 명예 혹은 자존심으로

눈먼 검사와는 달리, 변호사는 피고와의 계약관계로 구속받고 있다. 돈으로 얽혀버렸다.


그리고 '국민배심원'들도 있다. 최근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온갖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그들

역시 전문성이나 객관적이고 엄정한 판단력보다는 감정과 드라마틱한 연출에 영향받는 대중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되는 것 같다. 그들 역시 각자의 선험적인 가치관이나 입장에 따라 주어지는 파편들을 꿰고 있을 거다.


결국 누가 틀렸는지, 누구의 추리와 시나리오가 더 왜곡되어 있었는지를 보게 되는 게 이 영화의 최종장이다.

그 과정을 얼마나 스릴있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는지, 라는 점에서라면 정말 기대 이상으로 멋진 영화였다는

생각이다. '유주얼 서스펙트'의 그 호흡마저 흐트러뜨리던 반전과 긴박감에 가장 가까웠던 한국 영화 아닐까.


다만, 마지막에 굳이 그렇게 착하고 자상한 사족이 붙었어야 했을지가 좀 아쉽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느꼈을, 갑자기 맥이 탁 풀리며 술술 '권선징악'의 급마무리로 돌진하는 엔딩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지 않았을까. 그냥 범인의 악마성을 드러내거나 폭발시키는 순간으로 열어두는 건 어땠을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는 여전했다. 미세한 감정의 떨림, 격랑을 그대로 애니메이션 안의 풍경으로 떠올리는

그 섬세하고도 정교한 이미지라거나, 두말할 것 없는 음악, 무엇보다 문득 말려들어간 위기상황에서 흔들리는

세계를 부여잡고 어느새 훌쩍 커버리는 아이들의 대견하고도 안쓰러운, 그리고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 역시.


특히, 고작해야 고등학생인 그녀가 어머니에게, 좋아하는 선배가 생겼는데 알고 보니 그 선배의 아빠가

우리 아빠랑 같은 사람이에요? 라고 묻고는 그 대답에 끝내 허물어지며 눈물 터뜨리는 장면의 임팩트란.

불쑥 낯설어진 아빠와, 선배와, 그녀 자신의 세계를 어쩌지 못하고 그저 버텨낼 뿐이다가 무너지는 순간.


영화는 시간이 흘렀다 하여 변해서는 안 되는 것들, 간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침마다

깃발을 끌어올리는 그녀의 습관이라거나, 아빠엄마에 대한 신뢰 혹은 사랑이라거나, 첫사랑 선배에 어쩔 수없이

끌리는 마음이라거나, 그리고 '도시 미화'가 진행중인 와중에 동아리 건물을 지키겠다는 학생들의 의지같은.


아쉽게도 중간중간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 있었다. 그녀의 큰 갈등 요인이 되는 '출생의 비밀' 비스무레한 상황은

한국적인 상황에선 너무도 자주 써먹어버린 대표적 '막장 전개'의 소재인 거다. 지브리 스튜디오가 한국의

막장 드라마의 뻔한 레퍼토리를 사전에 숙지하진 않았을 테니 그쪽을 탓하긴 어려울 거 같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지브리 스튜디오의 주인공들이 그렇듯 그녀와 그 역시 영화가 끝날 때쯤엔 잔뜩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그들의 앞길이 모쪼록 행복하기를 바라게 되는 거다. 처음 등장할 때는 그저

바르고 착한 아이일 뿐이라 생각했던 그들이, 조금씩 눈매가 깊어지고 인생의 비밀이랄까 가치를 고민하며

진정으로 어른스러워지는 걸 고작 100분도 안 되는 영화 한 편으로 감지할 수 있다는 건 축복같은 일이다.




'에일리언 비키니', 미모의 여자 외계인이 지구에 들어와 하룻밤새 원하는 정자를 얻어 임신을 해야 하는데,

막상 마주친 사람은 서른네살까지 연애 한번 못해본 혼전순결주의자에 숫총각인지라 그를 유혹하고 얼르고

고문하며 벌어지는 일을 다뤘다는 게 이 영화를 보기 전 마주했던 몇몇 시놉시스들의 대략적인 얼개.

시놉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고 신선하다 싶어 꼭 봐야겠다 싶던 영화였다.


굉장히 가볍고 발랄한 구성, 거침없는 표현과 상상력이 뭉게뭉게 피어나는데다가 배우들의 천연덕스런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무엇보다 결정적인 세팅은, 말하자면 '발정난 여자'와 순결을 지킨다며

'거절하는 남자'라는 전복적인 상황 그자체였다. 외계인이니 뭐니 장식된 설정들을 떼어내고 보면 결국 당장

남자의 몸을 바라는 여자가 남자를 달래고 얼르고 유혹하고 만지고 물고 빨고 심지어 때리는 상황.


마사지와 카마수트라, 최음제와 밧줄까지 동원되는 그녀의 '정자를 얻기 위한' 몸부림은, 여러 가지 장면과

자연스레 연결됐다. 여자는 그저 일종의 '정액받이'나 살아있는 공기인형처럼 다뤄지며 남자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 나오는 온갖 포르노들, 그리고 포르노만큼이나 말초적이고 일방향적인

성희롱, 성폭력들과 돼지발정제니 최음제니 온갖 도구들. 그렇게 여자를 대하고 돈주고 사면서도 동시에

순결 이데올로기와 정조 관념 따위를 주입하려 드는.


그런 남자들의 거침없는 판타지와 본능이라 당연시되는 욕망이 영화속에서 여자의 것으로 표출되며 남성이

대상화되는, 그런 낯설고 미묘한 상황이 재미있으면서도 불편하고, 또 오히려 더욱 적나라하기도 했던

거 같다.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저 멍청한 남자녀석 같으니, 라는 울림이 쉼없이 울렸단 것도 사실이지만.


음. 스토리로 뽑아낼 부분은 그 정도란 게 맞을 듯 하다. 그 앞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들-그러니까 남자의

과거사라거나 외계인과 그 사이의 섹스 이후에 지구에 벌어진 일들 따위-은 애초 그렇게 남녀의 스타일이

역전된 상황에 덧씌워진 액자틀과도 비슷한 거 아닐까 싶어서다. 액자 속 그림과 액자틀 자체의 디자인이

잘 어울릴 수도, 혹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고 섞이지 못한다 싶을 수도 있지만 그건 부수적인 이야기일 듯.

아니, 부수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딱히 스토리라인에 편입되지 않는 이미지나 뚝뚝 끊어진 단상같은

거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만들고 싶진 않아서 그닥 별 의욕없이 만들어낸 기승전결의

허울을 위한 이야기랄까, 이야기가 딱히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하나의 반짝거리는

메타포-남녀의 성에 대한 관념과 행태가 뒤바뀐-를 공들여 세공하면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싶다. 지구가 멸망해버리는 그 시니컬하고 터무니없는 새드 엔딩은 그래서 굉장히 맘에 들었다.



* 그런데 왜 이리 이 영화를 개봉하는 영화관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며, 막상 찾아서 들어가보면

이렇게 사람들이 적은 거냔 말이다. 아쉽고 아쉬웠던.




영화, 참 쉽게 만들었구나 싶은 게 첫 소감.


요새 3D가 트렌드라니까 한번 오토바이 경주씬이나 괴물이 육박하는, 쪼끔 맛보여줄만한 장면 좀 넣어주고,

여름 휴가 혹은 방학을 맞이한 관객들 많을 테니 일단 안전하게 '액션 블록버스터' 간판 내걸어주고,

한국에서 좀체 안 된다던 SF 크리쳐 영화장르를 '괴물'이 깼으니 비슷한 수준에서 괴물 하나 빚어내고,

그리고 빵빵한 투자사와 배급사 확보해서 온동네 영화관 다 확보해냈으니 훨씬 유리한 출발선에 선 데다가,

마지막으로 개봉 일자나 개봉 과정에서의 막판 작업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노이즈마케팅까지.

아, 게다가 뻔뻔스럽게도 마지막에 슬쩍 우겨넣은 뜬금없는 7광구에 대한 '민족주의 마케팅'..역겹더라.


뭐 다 좋다. 이야기의 개연성이고 흡인력있는 전개고 나발이고 간에, 아마도 이 영화가 따르고 싶었던 듯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간지나는 껍데기만 따르고 싶었다 치더라도, 재미는 있어야 할 거 아니냐 말이다.

아니면 하다못해 봉준호의 '괴물' 때보다 발전한 CG기술이라도 현란하게 과시하던가, 뭐라도 스케일크게

뻥뻥 터뜨리던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지원이 인상쓰고 뛰어다니는 것 밖에 보이지 않는데, 어렸을 적 봤던

'에일리언1'의 시고니 위버가 보여줬던 연기나 그 영화 자체의 아우라와는 전혀 비교조차 불가한 수준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이 영화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실수하는 것 같단 생각이 들면서도 뭔가

괘씸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어 굳이 영화평을 적는 것. 비슷하게 생긴 괴물딱지가 나오는 것 빼고는

봉준호의 '괴물'이 도달했던 해석의 다양성이나 세상에 대한 은유 같은 깊이보다는 그저 이런 괴물 한번

만들어내서 뛰어다니게 할 수 있어, 를 과시하는데 그치는 '디워', 혹은 '용가리' 쪽에 가까운 얼개와 스토리다.

애초 그런 수준의 영화라고 딱 깨고 이야기를 했으면 괘씸하지나 않지, 무섭지도 긴장감 돋지도 독특하지도

않은 괴물이 뛰어다니는 걸 보며 뭔가 크게 낚였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그나마 3D로 보지 않은 게 다행.


이런 영화, '피할 수 없는 놈과의 사투'가 시작된 게 아니니까 엔간하면 피해가는 게 좋겠다.






한국전쟁, 혹은 분단 상황을 다룬 한국영화들을 보면서 어느순간 굉장히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공동경비구역 JSA가 나왔을 때, 실미도가 나왔을 때, 그리고 그 전의 쉬리가 나왔을 때의 참신함이나

과감함의 동력은 떨어지고, 그냥 스펙터클한 볼거리로서 전쟁을 소비하거나 휴머니즘이 부각된 드라마의

배경으로 소비되는 게 관습화되어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쩌면 '퇴보'라고 불러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불을 뿜던 뜨거운 총구는 차갑게 식었지만 여전히

차가운 전쟁이 지속중인 한반도에서, 반세기가 넘는 분단상황에 의지한 양측의 지배권력이 적대적인

공생관계를 이어가며 사회와 경제와 문화를 일그러뜨리고 있는 한반도에서, 그 단초였던 '한국전쟁'이

고작 블록버스터용의 스펙터클이라거나 신파를 북돋우는 비극적 배경으로만 내리 읽히는 게 정상인가.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전쟁 이전의 남과 북의 정치적 상황은 어땠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좀더

깊고 끈질긴 시각을 보여주는 영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하는 거다. 어린애들이 뉴스에서 나온

정치인들에게 "아저씨들은 왜 맨날 싸워요? 싸우지 말아요" 하는 수준으로 한국전쟁을 다루고

남과 북을 다루는 영화도 필요하지만, 이미 그런 '안전하고 손쉬운' 영화는 넘 많이 나왔다.


사실은, 내가 바라는 한국전쟁에 대한 영화는 그런 수준이다. 좀더 논쟁적이고 좀더 위험할 수 있는

영화. 여기서 위험하다는 건, 애초 '쉬리'가 나왔을 때 남북한 관계의 변화를 반영했거나 이끌었다고

평가되었듯 그렇게 영화의 현실 인식과 판단이 한국의 기존 시각을 뒤흔들 수 있는 그런 걸 말한다.

막말로, 한국전쟁이 남측의 도발로 일어났고 미국의 전쟁범죄가 빨갱이의 그것보다 심했다, 는 식의

수정주의적 시각에 기댄 영화도 한번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옳던 그르던, 지평의 문제 아닐까.


그렇지만 요새 같은 세상에 그런 건 너무 과도한 희망인 거다. 긴장완화의 10년 세월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언제라도 국지적 도발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위태한 상황에 남북 모두 처해 있다.

마치 '고지전'에서 휴전 협정 조인 후 발효되기까지의 12시간 같은 상황 아닌가. 사실은 휴전으로

끝나는 것도 아닌데 12시간동안 어떻게든 상대를 밟고 올라서려 지옥도를 연출한 거나, 사실은 북의

숨통이 그리 쉽게 끊길 것도 아닌데 어떻게든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치킨게임중인 지금이나.


다시금 영화는, 한국전쟁을 해석했던 여태까지의 스펙트럼, 상식과 싸우고 변화된 현실을 치열하게

반영해냈던 그 '고지'를 지키고자 결사적이다. 붉은 깃발 휘두르며 빨갱이들 모두 쓸어내자, 라는 식의

반공 일색의 영화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이만큼 당했으니 어디 한번 본때를 보여주자, 라는

식의 호전적인 전쟁 독려 영화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어쩌면 장훈 감독은 여태 한국영화가 한국전쟁을

다뤄왔던 그 현실인식의 지평, 허용된 한계치에서 더이상 후퇴할 수 없다며 고지에 깃발을 꼽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얘기는 딱히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남북의 접경에서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양측

사람들이 겪는 거대한 분단체제와 가냘픈 휴머니즘 간의 갈등을 그렸던 '공동경비구역 JSA', 그리고

서로 다른 진영에 선 형제를 발견한 순간 기필코 죽여야할 불구대천의 적으로부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무언가로 바뀌는 상황을 그렸던 '태극기 휘날리며'가 확보했던 나름의 성취를 잘 버무린 수준이지

싶어서다. 비인간적인 전쟁에 대한 혐오, 국가권력에 대한 무기력함 등, 이미 여러번 밟았던 고지다.


언제쯤, 그들은 야전지휘관에 겨눴던 총부리를 남한의, 북한의 정치권력 심장부에 겨눌 수 있을까.

그래서 언제쯤, 우리나라에서 한국전쟁을 다루는 영화와 예술의 시각과 스펙트럼이 우측 끝에서부터

좌측 끝으로까지 다양해질 수 있을까. 그런 게 경제만 비대해진 '국격'에 맞는 수준으로 고양되는

문화의 힘 그자체일테고, 반공이데올로기를 넘어 자유로이 성찰하기 시작했다는 표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전쟁을 다룬 영화 앞에 '휴먼'이니 '대작'이니 따위 상투어가 떨어지지 않을까.


언제쯤, 이 고지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걸 '코미디'라 할 수 있을까. 개그가 버무려져 있긴 하지만,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능청스러운

연기와 코믹한 상황 전개에 맘껏 웃긴 했지만, 과연 그것 뿐일까. 이 영화가 이주노동자, 흔히들

외국인노동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캐릭터나 상황을 단순히 코미디의 소재로 소진해버리고

만 건 아니라고 볼 포인트들은 적잖이 깔려 있었다.


첫번째 포인트.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반복되는 메시지. "동냥은 못 줄지언정 쪽박은 깨지 말랬다.'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을 위해 법의 사각지대를 감내하며 추방의 위협을 무릅쓰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신고하고 사기치지 말자는 맥락에서 나왔던 대사다.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그들이 왜 굳이 탈주해서 불법체류하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이 좀더 담겼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이주노동자를 보는 기본 시각으로 부족함이 없달까. 같은 한국인끼리도 시각장애인

안내견에 '더럽다'며 고함치는 판이니 저 메시지는 모두가 모두에 대해 명심해야 할 거다.


두번째 포인트, 그들이 '낭만에 대하여' 대신 작업반장 알리의 고향노래를 함께 불렀던 것.

가사를 일일이 설명하고 재연해가며 배웠던 '낭만에 대하여'는 한국사회가 그들을 받아들이고

바라보는 전형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이주노동자노래자랑에서 상받는 노래는, 뽕삘의 성인가요,

명랑하고 신나는. 열심히 일하며 밝고 희망차게 한국에서 사는 이주노동자의 이미지 그대로다.

그들이 정작 무대 위에서 부른 건, 알리가 매일같이 흥얼대던 아주아주 슬프고 절절한, 그의

모국어로 된 노래. 이주노동자들의 정서와 고유한 문화를 드러내며 함께 살아가자는 의미 아닐까.


세번째 포인트, 한국인이 부탄인이라 위장해서 취업했다가, 국적이 드러나며 쫓겨난 것.

일각에서 이주노동자를 불편해하고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이란

거다. 저임금을 감수하고 고된 노동을 감내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악화시킨단

이야기다. 과연 그런가. 그러한 판단은 선후를 잘못 생각하는 거 아닐까. 언제나 좀더 값싸고

편하게 쓸 수 있는 인력을 찾고 있는 사장들이 먼저 있었고, 엉성하고 뒤처진 법망 틈으로

그들이 고용된 거 아닌가.


요새 문제인 비정규직/정규직에 비겨 보아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이 정규직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과

노동조건을 낮춘다고 손가락질할 건가.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이윤을 극대화하려

노동을 짜내는 사장들이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거 아닐까. 비정규직법안을 만들어내고 제도적으로 

악용할 여지를 계속 잔존시키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받아야 하지 않을까. 이주노동자도 마찬가지,

탓하더라도 유명무실하고 비현실적인 '산업연수생'제도와 법망을 피해 그들을 착취하는 고용인을

탓해야 하는 거 아닐까.


영화가 조금 아쉬웠던 건, 아무래도 코미디의 가벼움과 상큼한 뒷맛을 유지하려던 때문이겠지만,

뒤로 가면서 너무 편하게 해피엔딩으로 빠져버리더라는 점이었다. 착한 사장이 나와서 그간 지급하지

않았던 체불임금을 한번에 주는가 하면, 출입국사무소 직원은 노래에 울먹이고, 강제추방을 앞둔

그들이 경연장에 나설 수 있다는 등. 그렇지만 분명 이 영화는, '사장님 나파효'를 연발하는 개그

소재로나 단발적으로 소모되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살아갈 때 지녀야 할 마음가짐과 현재의

상황에 대한 억측을 막기 위한 안간힘을 보여준다.



p.s.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무식한 방법은 따로 있긴 하다. 문제를 없애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거다. 그들 중 불법체류자를 모두 본국으로 추방하고, 법적 시스템과

고용 시스템을 정비한 후에 합법적인 이주노동자만 제한적으로 받는 거다. 그렇지만 그건

결국 불가능한 이야기. 법의 보호를 받는 이주노동자는 더이상 지금처럼 싸게 막 부릴 수

있는 저임금 노동자는 아닐 테고, 공장과 자본은 역시 해외로 튀어버린다며 협박할 거다.

무엇보다, 문제를 없애는 게 칠판에서 백묵을 지워내듯 간단한 게 아니다. 사람들이니까.

초현실 환타지 '풍산개'의 처음이자 끝은 바로 그 전율돋는 메타포 아니었을까. 오랜 세월 남북의 무력대치가

부추겨지고 점증하는 상황에 대한 그 잔인하도록 적확한 묘파라니. 자그마한 방에 갇힌 사람들의 손에

권총 한 자루가 쥐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소총, 수류탄에 이르는. 누군가 계속해서 살상무기를 공급하고

남과 북은 각자의 위계에 따라 '대가리'에 충성을 바치며 이빨을 드러내고, 그 와중에 전부 공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그런 미친 상황에 끼어있음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여태 한반도의 분단상황이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화되어 왔다지만, 대부분 남측의 입장 혹은 휴머니즘 혹은 스펙타클에 치중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아니다. 이미 여러번 지적된 것처럼 남자 주인공(윤계상)이 아무런 말도 내뱉지않고

소속이 모호한 정체성을 견지하는 건, 전혀 남이나 북 어느 한편에 기울지 않은 채 그 분단상황을 그대로

보여줄 시각이 필요했기 때문인 거 같다. 영화는, 분단의 제약을 넘어 분단상황을 그려낸다.


그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겠다. 여느 영화들처럼 인물이 중심이 되고 이야기가 흘러가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라, '풍산개' 이 영화는 하나의 상황에 대한 스틸컷을 보는 것만 같다. 초현실 환타지라고 굳이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장르를 앞세운 이유도, 그 상황을 최대한 설득력있게 공감가도록 제시하기

위한 장치로 다른 모든 것들이 쓰여졌다는 생각 때문이다. 김규리나 다른 등장인물들의 어색하고 비현실적인

연기와 좀체 감정이입되지 않는 상황, 게다가 장대높이로 휴전선을 넘는다는 설정까지.


그래서, 한국 사람들, 그리고 북한 사람들이 처한 분단상황이란 거대한 질곡을 시각화해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평소에 워낙 무뎌져서 좀체 의식하지 못했던 그

불편하고 불안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실감나도록 환기하는 것. 그게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이 아닐까 싶다.

어느 한편에 쏠리지도 이념적으로 치우치지도 않은 채, 신적인 관점에서 가감없이 그 광기의 표출을

바라보도록 해주는 참 드문 영화인 거 같다. (역시 김기덕 그리고 그의 후예들이랄까.)







걸작은 이유가 있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생명력이 넘치는 연기, 군더더기를 더하거나 덜함이 없는

깔끔한 화면,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의 잔혹한 시험대를 극복한 너른 공감대를 확보해 내는 이야기까지.

그런 세 가지만 확보가 된다면 그 작품은 한 시대를 풍미하고 다시 다음 시대의 전범 혹은 클래식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허공에의 질주, Running on empty. 영화는 어쩌면 굉장히 특수한 시대의 특수한 가족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1968년 신좌파의 혁명이 있었고, 베트남전에서 쓰인 네이팜탄을 개발했던

연구소에 테러를 가했던 젊은 남녀가 도망자 신세로 살아가는 시대, 더이상 히피들의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고 68혁명의 잔당들은 젊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반동의 시대인 거다. 게다가, 쉼없이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도망다녀야 하는 그 젊었던 두 남녀는 이제 대학을 가야 하는 나이대에 이른

두 아이의 부모. 이런 가족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88년은 그런 부모와 가족이 정말 있을 법한,

68혁명의 아이들이 다시 그들의 아이들을 키워냈을 맞춤한 시간대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니다. 영화는 68혁명의 잔향에 기대지 않는다. 어쩌면 88년쯤에는 그 향기가 너무도

강하게 남아있어서 다른 것들이 미처 드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또다시 20년쯤 흐르고 나니

조금은 숨겨져 있고 조심스럽던 다른 것들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띄는 것 같다. 영화가 가리키던 현실을

조금은 은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긴 건지도 모르겠다.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계속 환기되는 것은 겉으로는 '68혁명의 정신'이지만, 지금에 와서 읽히는 것은 차라리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에 대한 은유거나 '때가 되어 헤어지는 것의 슬픔과 아름다움'에 대한 지극히

섬세한 묘사인 것 같다. (간편하게 '성장영화'란 네글자로 뭉뚱그리기엔 뭔가 너무너무 억울하다.)


세상에 믿을 것은 우리 가족밖에 없다는 단호하고도 절박한 믿음, 그걸 단순히 꽉 막히고 세상에 겁먹은

부모의 못난 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눈감으면 코베어간다'는 세상의 잔인함과 무자비함이 선연하다.

이병철이 이건희에게,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금권력을 넘기는 거나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권력을 넘기는 것 모두 그런 단호한 믿음의 소산인 거다. 세상에 믿을 건 우리 가족, 내 피가

섞인 우리 핏줄이야말로 세상이 무너져도 믿을 수 있는 내 편이라는 오래고 오랜 믿음. 당대의 독재자들이

그런 식인데 하물며 힘없고 빽없는 일반인들이야 어떠랴 싶어서 부모의 못난 소리는 가슴이 아프다.


사실이기도 하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는 게 사실이고, 부모자식간의 인연이란

수십년 세월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건 '핏줄이 당긴다'며 수십년 한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르지않는

눈물로 증명되는 거다. 자식 역시, 특히나 한국처럼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부모를

둔 자식들에게는, 자신의 부모를 '그(He)'라거나 '그녀(She)'로 객관화해서 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단순히 멘탈리티의 문제가 아니라, 온갖 연고로 묶인 패거리문화와 시스템이 최후의 보루로

'가족'을 더더욱 부각시키고 신성화해 버린 점도 있을 테고,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안정적인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가족'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한 점도 잊지 말아야 할 점일 테고.


그렇지만 가족은 또다른 가족을 낳으며 분열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필연이다. 플라나리아의 몸통을

반으로 쪼개면 각기 두 개의 새로운 플라나리아로 분열해 생존하듯, '가족'을 찢어내어 다시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아플 수 밖에 없다. 자식들은 크고 부모는 늙는다. 자식들은 부모가 되고

부모는 죽는다. 단순한 과정 속에 숨어있는 엄청난 저항과 혼란, 싸움의 징후들이 보이지 않는가.

'허공에의 질주'에서 나온 리버 피닉스처럼 피아노와 대학이 탐탁치 않은 아버지와 맞서기도 하고,

마샤 플림튼처럼 중산층 부모의 삶이 허위에 가득찬 채 인간적이지 않다며 부정하기도 하고, 반대로

그들의 부모는 그들의 자식이 철이 없다거나 아직 부모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하며 갈등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헤어짐은 이르건 늦건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 예비되어 있는 거다. 언제까지

품안의 자식이고, 언제까지 하늘같은 부모여야 할 건가 말이다. '토이스토리3'에 나왔듯, 살아있는

것은 모두 나이를 먹고 헤어지기 마련이다. 서로에게 칼을 꼽고 손톱을 박으며 헤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식의 잘못된 헤어짐은 결국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짐이 된 채

불구를 만들고 만다는 게 수많은 문학과 예술작품들의 오프닝이었으니 적지는 않을 거 같다. 아무리

성숙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좋게 헤어진다고 해도, 그 헤어짐은 마치 자궁을 빠져나오는 순간과

같아서 배꼽이란 상흔을 남긴 채 더이상 이전의 세계를 허용하지 않을 거고.


굳이 부모자식간의 관계로 한정할 것도 없다. 남자와 여자, 친구와 친구, 선생과 제자, 결국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고 할 만한 그런 관계에는 어느 순간 헤어짐과 분열의 순간이 닥쳐오게 된다.

그게 우발적이던 필연적이던, 그런 식의 평가는 한참이 지난 후에나 내릴 수 있을 뿐이지만 만약

언제고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는, 피할 수 없는 때라는 느낌이 왔다면 그런 헤어짐에는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 걸까. 쥬드 허쉬와 크리스틴 라티처럼, 리버 피닉스처럼 나 역시도 처음에는

혼란스러워 하다가 때론 반발하다가, 결국은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슬프고 아름다운 분열의 과정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게 될까. 슬프고, 서럽고,

미안하고, 안타깝지만, 또 한켠, 뿌듯하고, 기쁘고, 대견하고, 설레는 느낌들이 마구 뒤섞이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는 느낌이 바로 그랬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아름답지만 슬픈 헤어짐의 이야기.

이토록 아름답고 멋진 헤어짐을 경험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에 나 역시도 이 영화를

평생 기억할 만한 영화로 손꼽기에 주저하지 않겠다.



@ 서울가족영상축제, CGV송파.




like 1984

언제나 의심해야 할 것은 '충성'과 '민족', '국가' 따위 단어를 내세워 사람들의 자유로운 사고를 막고

무조건 믿고 따르며 똘똘 뭉치라는 말이다. 'Strength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라는 그들의

구호, 그리고 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 거대한 텔레스크린으로 화상지시를 하거나 언제라도 도감청을

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능력, 정부가 날조하고 의도한 이야기만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언론들,

음악과 예술이 사라지고 10시면 사람들을 집안에서 꼼짝도 못하게 만드는 통제력, 전쟁/테러/질병/

자연재해 등 '외부의 적'을 계속 만들어내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연장하는 그들의 패턴은 똑같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류가 위계화된 이래 '권력'은 그런 식으로 대중을 동원하고 통제하고 조종해

왔으니까. 어느 정도의 사실을 가지고 언론과 학계의 권위를 빌려 '위기'를 만들어내고 '상식'을

만들어내는 거다. 영화에서 나왔던 소재는 악의적으로 뿌려진 '신종 바이러스'였지만, 1984에서는

'전쟁'과 '재구성되는 역사'였다. ([1984] 지배계급의 '영구혁명'이 진행되는 세상, 1984 혹은 현재.)


각시탈 혹은 바더 마인호프

권력에 대항한 '폭력'을 정면으로 제기하고 맥락을 수긍케하는 영화는 아무래도 '사회통념상' 쉽지

않은 거 같다. 떠올려보면 70년대 독일 적군파들의 무장봉기 및 테러를 앞세운 극좌노선 이야기를

그렸던 '바더 마인호프', 혹은 (한국에서 프로파간다 차원으로 만든 선전물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김일성 치하 북한에서 각시탈을 쓰고 무력투쟁의 선봉에 서는 '각시탈' 정도일까. '칠레전투3부작'은

조금 그림이 다르니까 논외로 치고, 당장 떠오르는 대부분의 영화는 '폭력은 나쁜 것'이란 선험적인

판단에서 그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는 어떨까. 국회의사당을 폭파하고 정부요인을 암살하며 테러를 선동하는 그 행동들의 기저에는

단순히 폭력에 대항하는 또다른 폭력, 반폭력으로 맞서는 건 어리석다는 판단이 깔린 채다. 총 앞에

총으로 맞서봐야 상대는 대포와 미사일을 갖춘 거대한 폭력집단. 중요한 건 잔뜩 움츠러 들어있고

마비되어있는 사람들의 이성과 감성을 일깨우는 자극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뇌된 부자유에 대한 불만,

자유와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결핍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대가리가 바뀌어봐야 그대로일테니.

폭력에 대한 판단은 그래서 차라리 부차적이다. 굳이 정당화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게 역사가

바뀌어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현실적인 '매트릭스'

물론 이 영화에서 '폭력'이 수반하는 모두의 피와 고통을 진지하게 마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화려한 수식과 세련된 연출력으로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 'Phantom of Opera'의 사회적

버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주인공 V가 부패하고 부정의한 정치권력을 살육하고 스스로도 목숨을

바쳐 이전 시대를 끝내고자 했다지만, 그가 권력자 한 두명을 바꾼 건지 '앙시앙레짐' 체제 자체를

바꿔낸 건지에 대해서는 답도 없다. 폭파해나가는 국회의사당 안에서 팔다리가 찢겨나가 죽었을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적당한 가벼움과 오락성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끝내 현실성과 감동을 획득한다.

매트릭스에서 나왔던 빨간 알약, 이번에도 영화를 보고 나면 그 빨간 알약을 나도 함께 먹은

느낌이 드는 거지만, 그때만큼 막막하거나 멍한 느낌은 없는 거다. 이 세상이 통째로 거짓이란

이야기, 차라리 세상을 떠나 어디 가서 도나 닦는게 낫겠다 싶게 만드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세상이 거짓이긴 하지만 그건 그들이 각본하고 짜맞춘 이야기와 시스템이 그렇다는 거지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부정하진 않으니까. 뭘 해야 하고 뭘 피해야 할지 알려주니까.


감동의 3단부스터 (아이유 좋아요)

그렇게, 옆에 있는 사람들과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V의 가면을 쓰고

국회의사당 앞 광장으로 물밀듯 몰려오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느리지만 단호한 발걸음이

탱크와 중무장한 군부대 턱앞까지 두려움없이 다가오던 그 때. 수뇌부가 무너진 군병력이

망연자실 손을 놓은 가운데 바리케이트와 방패와 탱크를 넘어 계속 나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1단 감동. 그리고 이윽고 시간이 되자 거대한 국회의사당이 사방으로 불을 뿜으며

폭발해 나가는 그 모습에서 2단 감동. 거대하게 화석화된 권위, 사람들로부터 나왔지만 어느새

사람들 위에 군림하던 국회의사당이 터져나가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정말 국회의사당이 무너져내리자 비로소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손놀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던 장면. 감동의 화룡점정, 그야말로 3단부스터였던 거다.

가면 뒤에 숨어서, 가면의 통일성을 빌어 자신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전달하던 그들은 이제 가면이

필요없게 되었음을 웅변하던 장면이었다. 제각기의 얼굴로 제각기의 목소리로, 새로운 권위를

세우고 자신들의,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국회의사당을 만들어낼 거다.


어쩌면, 워쇼스키 형제는 이런 식의 낭만적인 혁명이 진짜로 가능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름답고 깔끔한 혁명이란 영화속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그렇게

나도 따라 믿고 싶어지는 어느 혁명의 이야기, 브이 포 벤데타.




B.C와 A.D., 그리고 9.11.

9.11이 터지기 며칠 전, 뉴욕에서의 3개월 체류를 접으며 마지막 여행지로 쌍둥이 빌딩을 올랐었다.

아직 한국에서의 일상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어느 가전제품 대리점의 티비들로 접했던 그 충격적인

모습이란, 뭉클 솟아난 두려움과 함께 상당한 비현실감을 안겼었다. 이후 수많은 이미지와

스토리들로 계속해서 재연되고 재구성되었지만 그 충격이란 여전해서, 이후 국제정치의 룰도

바뀌고 세계사의 흐름도 꺽인 듯하다. 영화 속 대사가 딱 맞는 거 같다. 서양인들은 역사를 B.C와

A.D를 기점으로 나누었지만 그에 더해 제3의 기점, 9.11이 생겨났다고.


미국 내 무슬림들의 Ground Zero.

그렇지만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미국이 아니라 인도에서 시작한다. 인도에서 건너간

이민자들의 이야기, 더구나 이슬람을 종교로 가졌거나 가졌다고 오인받는 이민자들의 이야기.

그렇기에 그들에게 9.11의 타격은 쌍둥이 빌딩의 충격적인 붕괴가 아니라 이후의 '여진'에서

더욱 강렬하다. 히잡을 두르지 못하게 되고, 이슬람의 분위기가 풍기는 가게는 문을 닫게 되고,

급기야 무슬림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은 그들의 아이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미국인'들이 말하는

그라운드 제로가 쌍둥이 빌딩이 위치했던 곳이라면, 그들의 그라운드 제로는 아이의 타살장소.


'충격과 공포'에 대응하는 한가지 방법.

인도인이지만 힌두교인 여자는 소리친다. 무슬림인 당신과 결혼해서 내 아이를 잃었다고.

당신 때문에 아이가 죽었다고. 가버리라고. 온 미국인에게, 미국의 대통령에게 "내 이름은

칸이고,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모를까, 돌아오지 말라고. 그렇게 분노에 휩싸인

그녀는 아이의 살해범을 찾아내 응징하기에 발벗고 나선다. 그녀의 분노는 자연스럽다. 실제로

9.11이 터진 후 미국과 세계가 움직였던 방식이기도 하다. 분노, 응징, 그리고 공포에 질린 '고백'의

형태로 나타나는 그것은,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충성서약'과 유사해진다.


'충격과 공포'에 대응하는 또다른 방법.

자폐와 유사한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는다는 남자는 농담을 모른다. 늘 진심을 말하고, 순진함이

극에 달해 마치 이전의 '포레스트 검프'나 '레인맨'이 돌아온 느낌이다. 그는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대통령을 찾아 나섰다. "My name is Khan. I'm not a terrorist."의 멘트를 주문처럼 외우며.

몇개월에 걸쳐 대통령을 만나려다가 오히려 테러리스트로 오인받아 수모를 받기도 하고, 전투적

무슬림들의 테러 대상이 되기도 한 그에게 결국 그녀가 다시 돌아오고 난 후에도, 그는 그 말을

대통령에게 전한다는 '약속'은 꼭 지키겠다며 다시 나선다.


겁먹은 '충성서약'을 넘어 당당한 '선언'으로.

그렇지만 그의 멘트는 다르다. 난 당신과 같은 편이에요, 라는 겁먹은 고백이 아니다. 내가 가진

종교를 타협하지도, 내가 사는 방식을 타협하지도, 편가르기식 프레임에 포섭되지도 않는다.

처음엔 그저 그녀에게 돌아갈 생각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슬림으로 겪게 된 미국사회의

편견과 격한 공포심에 맞닥뜨리면서 바뀐 건지 모르겠다. 아니면 애초부터 현명한 어머니에게

받은 교육의 효과일지도 모른다. 이슬람식 이름을 대며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밝히는

그의 말은, 차라리 이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편견과 무지를 깨뜨리자는 선언처럼 들린다.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세상에 좋은 사람을 늘리자는 그런.


인도의 카메라가 미국을 훑다.

이 결코 가볍지 않은 영화를 두시간여 흠뻑 몰입하며 내달릴 수 있게 하는 게 진짜 능력이다.

인도에서의 성장기를 경쾌하게 내달렸던 카메라가, 본격적으로 미국의 곳곳을 핥아내면서

전혀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인도인 이민자에게 미국이란 이런 느낌이구나, 라는 식으로.

게다가 자폐증을 연기한 '샤룩칸'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라거나, 이국적이면서도 마력적인

인도의 음악, 미국 곳곳의 풍광이 담긴 영상까지 잘 만들어져, 몇몇 센스넘치고 사랑스러운

장면들이 가슴에 남고 말았다.


"My name is Khan. I'm not a terrorist."





'공기인형' 리뷰는 기네스 병맥주를 사서 마시고는 그 딸랑이는 것의 정체를 찍은 사진을

포스팅할 때까지 미뤄둬야겠다, 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잠드는 건

역시 못할 짓이다.


노조미가 처음으로 밟은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발견한 달그락대는 병, 아마도 기네스 병맥주일

그 이미지만으로 이 영화는 응축될 수 있다. 별 다를 거 없는 그 유리병은 조그마한 구슬 하나를

안에 꼭 품고 있다. 고작 조그만 구슬 하나가 더 들어있을 뿐인데, 그 존재로 인해 오히려 유리병

속이 텅 비어있음이 더욱 부각되는 거다.


유리병을 꽉 채우지도 못하고 절겅절겅 소리만 내는 구슬, 사람의 마음이 딱 그렇다. 존재를 꽉

채워주지도 못하면서 그 '결락감'만 더욱 부각시키는, 도무지 쓸모를 모르겠는 '맹장'같은 녀석.


마음이 생긴 공기인형이 바라보는 세상은 누군가가 누군가의 대용품이 되는 세상이다. 그것은

그녀가 늘 스스로 '나는 공기인형,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용품'이라고 아프게 되뇌여왔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처지로부터 비롯한 날카로운 시선이다. 그녀가 그렇게 보이는 세상에 마음

아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옛 여자친구를 잊지 못하고 섹스돌에 그녀 이름을 붙인 채 인형놀이에 열중인 아저씨,

자동응답기에 녹음해둔 자신의 목소리와 대화하며 스스로를 위안 중인 아가씨, 젊은 시절

학교에서 대리교사로 일했던 할아버지, 자신의 가게에서 일하는 여직원을 세탁기 위에서

겁탈하는 사장님..심지어는 공기인형 그녀가 마음을 주려는 남자조차 그녀를 옛 여자친구의

대용품으로 여기고 있다.


어쩌면 그녀의, 또 나의 과잉한 반응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집에 여전히 간직된

옛 여친의 사진들, 옛 여친이 썼던 헬멧의 긁힌 자국, 자신도 공기인형과 비슷하다는 그의 고백,

그녀의 바람을 뺐다가 넣었다가 하고 싶다며 그가 아무 설명없이 요청해왔던 것들 모두

'공기인형 그녀는 그의 옛 여친 대용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공기인형 그녀의 바람을 뺐다가 넣다가 하는 건, 그야말로 옛 여친에 대한 그의 욕구를

극적으로, 그리고 지독히도 이기적으로 해소하는 방식 아닐까. 떠난 옛 여친에 대한 복수심

-죽어라죽어라 하는-인지, 반대로 아마도 죽어버린 옛 여친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야말로 공기인형을 통해서만이 해소할 수 있는 그의 욕구. 적어도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그걸 왜 하고 싶은데, 라는 그녀의

질문에 우물쭈물 답하지 못했던 그의 흐트러진 눈빛만 봐도 뻔하다.


그녀가, 인간의 마음이란 게 꼭 '대용품 or not'으로 칼처럼 갈리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후여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쉽게 분별증류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게 마음이란 걸 깨달아서 다행이었다.

그녀는 이미 훌쩍 자라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를 품어줄 만큼, 비록 그녀의 숨으로 그를 살릴

수는 없을지언정, 그녀가 어쩌면 그보다 성숙한 마음을 갖게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는 아직

미처 인정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공기인형 그녀에 대한 '사랑'을 그녀는 그의 마음 속에서 발견해냈다.


한때 그녀의 주인이었던 남자는 말한다. 마음이 없던 때가 좋았어, 그때로 돌아와주지 않을래.

글쎄. 그저 자신의 욕망을 쏟아붓고 돌아서 화장실에서 씻어내면 그만이었던 그때를 말하는 거라면,

당신이 쭈그려앉은 모습은, 섹스돌을 껴안고 말을 거는 모습은, 왜 그리도 불행해 보였던 걸까.


'마음이 생겨난다'는 표현, 그야말로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거다. 어느날 문득 공기인형이 눈을

깜빡이며 몸을 움직이듯, 누군가를 생각하고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란 건 한순간에 번쩍

생겨난다. 비록 그 마음이 꼭 충만하고 행복한 순간을 약속하는 건 아니라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괴롭고 쓰디쓴 경험만을 불러 오겠지만, 그건 텅빈 유리병들 틈에서 스스로를 구분짓는

'가능성'이자 '축복'에 가까운 무언가다.


영화를 보는 시각에 따라서, 영화는 밝을 수도, 혹은 지독히도 어두울 수도 있을 거 같다.

아마도 그게 '마음'이란 녀석이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할 거고. 그 녀석은 그저 그림자도 투명한

'공기인형'들 틈에서 잘그랑잘그랑, 나 여기 있다고 소리내고 있을 뿐이다.



기대를 많이 했었다. 그리고 기대 이상이었다.


전주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순식간에 매진되었다는 것 같은 단편적인 '카더라' 기사들도

계속 꾹꾹 자극을 해댔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가게를 차리고 맛집방송에 출연해서 그 거짓을

벗겨내겠다는 기획의도가 대단해보였던 거다. 통틀어 한주에 177개나 소개된다는 '왼갖 짭새가

날아들듯' 하는 맛집들이 진짜일 리는 없다는 생각은 이전부터 모두가 해왔을 터, 이걸 어떻게

요리해서 보기 좋게, 먹기 좋게, 그리고 재미있게, 결국은 맛있게 보여줄까. 그런 기대였다.


그 천편일률적인 손님들, 단골을 자처하는 손님들의 리액션이나 광고문구같은 몇마디 대사는

대본에 가까운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이미 모든 프로그램이 시청률 경쟁에 매몰된 지금

맛집프로그램 역시 시청률이 높도록 더욱 충격적이고 신선하고 흥미로운 것들을 찾아서 눈이

빠지도록 돌아다니고 있을 줄도 알았다. 그러다보니 홍보를 원하는 음식점과 방송국(혹은

외주제작사)과의 금전 거래가 없진 않으리라, 그것도 짐작했었다. 짐작대로였고, 기대대로였다.


그런데 그 이상이다. 사실은 브로커를 통해 돈이 오가며 '방송'시간을 광고시간으로 팔고 사는

자체로도 이미 충격적인 범죄인데, 이미 자극적인 것들에 잔뜩 둔해져버린 미각으로는 '고작'

그 정도의 폭로로는 성에 안 찰 우리임을 알았던 걸까. 브로커는 친절하게도 가게의 방송용

컨셉을 정해주고, 전지전능한 상상력을 동원해 음식들을 마구 퓨전해주기에 이른다. 캐비어

삼겹살, 특제 대판요리, 청양고추범벅의 돈까스, 해물과 호박찜..방송을 위한 일회용 메뉴들.



실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절망하기에 이르렀다.


몰랐던 것들도 아니고, 그렇게 '보기좋은 떡'을 만들어 방송국에, 실은 시청자에 팔기에 열중인

브로커의 넉살좋은 얼굴과 느끼한 목소리에 문득문득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장난같았다.

그렇게 '매워서 죽던지말던지 돈까스'가 그들의 세트장이자 음식점인 곳에서 뚝딱 만들어져

촬영이 되는 장면이 그야말로 블랙코미디의 정점이었다면, 그렇게 장난처럼 만들어진 것이

수분동안 공중파를 타는 장면에선 울컥, 분노랄까 절망이 치솟았다.


방송이 장난인가. 맛집이라 주장하는 가게 주인들은, 환호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알바들은,

온갖 말장난으로 코너 하나를 해치우는 연예인과 방송인들은, 그리고 뚝딱 컨셉을 만들어내고

그 모든 컨텐츠를 조율하는 제작진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이건 단순히 '먹기 좋도록' 떡을

포장하는 수준이 아니라 떡인 양 비닐봉지를 씹어먹는 CG를 촬영하는 수준 아닌가 말이다.

오대수, '오늘만 대충 수습해서 살자'라는 마음가짐으로 방송 한번하고 모르쇠하는 마음가짐,

그 어디에도 시청자는 없었다. 시청자는 그저 시청률의 숫자, 혹은 우스운 호구였을 뿐.


그렇지만 사실 더하고픈 질문은, 사람들이 맛집프로를 보며 얻으려는 게 맛집 정보가 아니라

가학적이고 선정적인 비쥬얼쇼와 박스로 돈을 쓸어담는 대박의 판타지는 아닐까 하는 거다.

만약 그렇다면 맛집 프로를 공장처럼 찍어내는 그들은 사실은 사람들의 욕망과 니즈를 아주

적확하게 꿰뚫고 그에 부응하는 것 뿐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굉장히 날카롭고 위험한 영화의

칼끝은 사실 방송국 혹은 외주제작사가 아니라 천박한 입맛과 취향을 가진 우리들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문제는, 놀림감으로 전락 중인 우리 자신이다.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들'의 거짓과 사기행각에 분노하는 건, 직면하기 낯뜨겁고 수치스러운

질문 앞에서 굉장히 단순무식하고 손쉽게 문제를 푼 척 하거나 아예 부숴버리려는 시도인지 모른다.

영화는 분명 그 부분을 불편하게도, 굳이 까칠하게 짚고 있다. 시청자들의 취향과 입맛이 고작

그정도라 이런 프로와 이런 되먹잖은 맛집들이 횡행하는 건 아닌가, 어느 맛집 컬럼니스트가

영화에서 분명히 지적했듯이. '그들'을 욕하는 건 쉽지만 결국 그들을 키워낸 건 '우리'다.


꼭 맛집프로그램에 관련된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자존심강하고 자기잘난 줄 아는 대중이 사실은

이리저리 휘둘리고 희롱당하는 모험담은 주위에서 넘쳐난다. 조선일보가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열독률 1위의 신문', 자신들을 무시하면 자신들을 그토록 열독하는 대중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논리라거나, 한나라당과 박정희에 대해 다수결이나 지지율을 근거로 정당화하고

복권시키는 논리라거나, 언론이 던져주는 떡밥을 덥썩덥썩 물며 남의 사생활이나 캐대고

연예인이나 마녀사냥해대는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라거나. 잘난 척하지만 놀림감으로 전락중인.



내가 원하는 건 뭔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영화 마지막의 장면은 자못 심각하게 방송이 맛갔음을 선포하지만, 사실 감독은 지금

우리 모두가 맛이 갔음을 먼저 인정하라고 솔직히 말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채널선택을

하기에 앞서 우리가 맛집프로그램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는지, 저널리즘에 대한 기대치가

얼마나 있었는지, 있기는 했는지부터 따져보았어야 한다는 거다. 단순히 일부 방송의

문제, 시청률 경쟁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방송을 굳이 챙겨보는 우리의 문제란 거다.


결국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해서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욕망과

결핍을 알아내야 하는 거다. 내가 원하는 건 뭔가. 무엇을 보고자 하는가. 만약 당신이

맛집프로그램에서 맛집 정보를 찾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삶 자체이자 즐거움인 음식을

조롱하고 더럽힌 제작진에게 불의 철퇴를. 만약 당신이 맛집프로그램에서 대박의 판타지와

시트콤을 보고 싶다면, 지금까지처럼 하면 된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무의미해질 때까지.


낯뜨거움과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던진 질문의 최종적인 답은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을까

두렵다. 지금 우리의 입맛, 취향과 사고수준은 너무나도 저렴하고 천박해서, 이런 맛집프로는

바로 지금의 우리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거울처럼. 나는 맛집 정보를

손쉽게 뽑아보고 싶었고, 나는 뜨겁고 맵고 신기한 음식 앞에서 연예인들의 리액션이 즐거웠고,

나는 맛집들의 성공담에서 자영업 성공신화를 보았고, 따위들.


트루맛쇼.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MBC, KBS, SBS의 맛집프로그램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포고 따위를 넘어서고 말았다. 가처분신청을 내고 어쩌고, 약간의 소란이 있긴

했지만 이미 맛집프로그램들은 택시기사의 추천을 받는다거나, '티비 안나와도 손님이 너무

많아 걱정'이라는 따위 변형을 거쳐 또다시 우리들의 욕망에 발빠르게 응답하고 있는 거다.

결국, 우리가 바뀌지 않는 한 맛집프로그램 따위 지엽말단의 이슈는 바뀌지 않는다.


거악(巨惡)은 우리다. 현재로선 그렇다.


이런 스토리로 빠질 줄은 몰랐다. 청소년보호법의 존재로 인해 유명무실한 처벌을 받을 뿐인 아이들의

범죄에 대해서 피해자의 어머니이자 가해자의 선생님인 그녀가 나름의 방식으로 응징을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예고편 따위를 통해 접했던 이야기의 얼개였다. 그 응징이 왠지 풋풋하고 발랄한 식으로

내려지리라는 건, 어른이자 선생님이 어린이이자 학생에게 내리는 벌이리라는 안이한 기대에 더해

주연배우 마츠 다카코의 여성스럽고 선한 이목구비 때문이었던 거 같다.


영화는 계속해서 내달렸다, 이런 내 안이한 예상치를 훌쩍훌쩍 여유롭게 뛰어넘으며. 학생들이 점령한

무질서하고 소란스런 교실을 거닐며 종업식을 진행하는 시종 무기력한 그녀의 이미지도, 그녀의

아이를 죽인 살인자  A와 B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순간도, 그 살인자들에 AIDS환자의 혈액을 섞은

우유를 먹였다고 그녀가 폭로하는 순간도, 끝내 막장까지 내몰리는 살인자 두 명의 지옥과도 같은

일상의 묘사도, 그리고 등장인물들 제각기의 고백에서 수시로 번뜩거리는 가학과 살인의 충동까지.


그런 충격은, 물론 조밀하고 탄탄한 스토리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어린이', 혹은 '청소년'에 대해

한수 접어두던 사회적인 태도 탓이 큰 거 같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비슷하게,

그들을 아직 스스로의 의지와 사고를 통제하지 못하는 판단력 부족한 미완성의 인간으로 보거나,

아직 인간의 덕목이나 인간성을 다 갖추지 못한 한정치산의 존재로 보는 시각이랄까. 덕분에 그들은

'계도'나 '훈육'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동시에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도 제한된 책임만 지는 거다.


근데 영화에서 그려진 그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아이들 중 일부는

작고 어리지만 이미 활짝 피어난 어른, 악인일 뿐이지 꽃봉오리나 씨앗의 무궁한 잠재력을 품은

'청소년'의 이미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거다. 글쎄, 그런 아이도 있을 수 있겠다 싶다. 아이라고 해서

모두 선하고 순진무구하기를 바라는 건 어른들의 퇴행적인 로망, 자신들 멋대로 꾸며내고 믿고

싶어하는 신화니까. 아이들도 결국 백인백색이라는 사람과 같은 종(種)인 바에야 당연할지도.


영화가 딱히 '어린이는 조그만 어른이나 마찬가지'라고 강변하려는 건 아닌 거 같다. 다만 그런

악마적인 아이의 범죄와 맞닥뜨렸을 때 어디까지 잔혹하고 또 잔인한 복수가 이뤄질 수 있을지

극한까지 내달리고 싶었던 거 같다. 거의 면책에 가까운 특권을 가진 아이들의 악의적이고

의식적인 범죄로 삶이 망가져버린 사람이, 그 아이들의 흉포하고 잔인한 인간적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 반들거리는 눈빛을 마주하고 난다면 어떻게 변할까. 어떻게 복수할까.


두 살인마에게 복수를 마치고, 그녀의 마지막 대사가 굉장히 섬뜩했다. 이제 아무 희망도

남지 않은 절망의 구렁텅이를 느껴봐, 거기서부터 갱생이 시작되는 거야. 아니, 장난이야.

대충 이런 식의 이야기. 절망의 바닥으로 떨어지고 삶이 온통 부서지고 난 이후에는, 갱생이고

뭐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폐허만 계속되었다는 그녀의 고백. 그리고 또 너 역시 그런 폐허를

거닐게 될 거라는 처절한 저주. '파리대왕'과 '올드보이'의 교집합, 그 어딘가쯤 이 영화가 있다.



원빈의 무겁고 까만 눈빛과 (원빈의) 화려하고 산뜻한 피의 향연. 그 두개가 장착되었으니

영화가 그렇게 떴던 거 아닐까. 원빈의 등언저리에 붙은 근육과 팔근육이 꿈틀거리며 움직여

만들어낸 군더더기없고 단호한 선들이 쓰레기들의 목을 따고 동맥을 끊어 빨간 피를 콸콸

쏟아내는 장면이란 건, 남자가 보아도 굉장히 아름답다 느껴질 만한 장면들이었으니.


그리고 하나가 더 있지 않나 싶다. 제목, '아저씨'. 특히 여성에게 '아저씨'라는 호칭이 갖는

안도감 혹은 적당한 거리감이 먹혔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이긴 하나 연애나 섹슈얼한 의미의

가능성을 가진 대상이 아니라 육체적이거나 성적인 의미가 지워진 상대. 비슷한 위치의 두 사람이

감정을 밀고 당기고 하는게 아니라 여성이 확 낮아진-그러나 우월한-위치에서 그저 바라보고

부탁하고 얻어낼 수 있는 그런 편하고 편리한 상대.(자신의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를 무기로.)


그래서 이 영화는 김새론이 연기한 소미의 시각에서 줄곧 바라보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말없이 보듬어주고, 이불덮어주고, 심지어 목숨을 걸고 구하러 오는

싸움도 잘하고 과거도 멋있고 잘생기기까지한 '아저씨'. 그 아저씨는 다른 남자들처럼 귀찮게

그녀를 치근대거나 몸달라 마음달라 보채지도 않는 거다. 김새론의 눈높이에 어느결에

동화되어 버린 여성들의 환타지를 만족시키는 무독하고 일방적인 애정을 제공하는 아저씨.


그러고 보면 그런 원빈 아저씨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허름하고 오징어 비스무레하게

생겼다는 일반 아저씨들과의 차이는 딱 그거다. 아저씨라 불릴만큼 연령대도 다르고 연애의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점은 같지만, 보통은 싸움도 못하고 과거는 초라하며 대개 자신은

중간은 간다는 환상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 다른 거다. 아저씨라고 다 같은 아저씨가 아니다.



p.s. 그런데 소미는 아저씨를 계속 기다렸을까. 그녀와 아저씨의 뭐라 이름붙이기 힘든

애정의 관계는, 부모자식간의 그런 형태로 갈까 아니면 남녀간의 그런 형태로 갈까. 저런

스토리의 끝에는 어쩜 일반적 차원에선 '로리콘'이라 손가락질할 이야기가 덧붙지는 않을까.

그리고 난 왜 그런 게 궁금해지는 걸까, 그냥 다 사랑인데.




영화가 끝났다. 혜화는 절룩거리며 뒤에서 걷고 있는 전 남자친구 한수를 한참이나 백미러로

응시하다가, 기어를 쥔 손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었던 참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술을 질끈 깨문 채 기어를 'R'에 맞추고 차를 뒤로 움직였다. 클로즈업된 그녀의 얼굴,

그야말로 수만가지 감정이 실린 수만가지 표정이 드러나있었다.


그건 그녀가 살풍경한 철거촌에서 낑낑거리는 강아지를 챙겨올 때의 표정이기도 했고, 배신한

남자친구를 오년만에 조우했을 때의 표정이기도 했으며, 자신의 아이라 믿던 아이를 바라볼 때의

표정, 자신 때문에 잔뜩 쪼그라든 엄마를 볼 때의 표정, 그리고 내심 따르던 동물병원 원장의

결혼소식을 들었을 때의 표정이기도 했다.


그치만 그녀의 눈빛에 '단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하고, 겁나고, 화나고, 막막하고, 스스로도

자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는 그런 떨림이 가득했었다. 단순히 남자친구를 다시 받아줄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떤 식으로 살아갈 건지, 그녀의 주위사람들과 세상은 계속

그녀를 몰아세우며 답을 요구했고, 더이상 멈춰선 채 답하길 주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드디어 움직였다.


뭐였을까. 그 장면을 위해 영화는 달려온 거였을 거다. 이 영화의 모든 이야기는 혜화의 그

표정에 다다르고, 그걸 공감할 수 있도록 달려왔다. 자신을 배신했다가 불쑥 나타난 남자친구

앞에서, 죽었다 생각했던 아기가 살아있다는 소식 앞에서, 그밖에 자잘한 삶의 장애물과 고난에

주춤거리며 멈춰섰던 혜화가 다시 움직이는 순간. 영화의 제목처럼 '혜화, 동(動)'하기 위해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혜화의 저 착잡한 눈빛과 입술모양, 눈물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그녀는 말했었다. '인정하지 않는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거잖아.' 유약하기만 한 남자 앞에서

이토록 당당했던 그녀라면 어쩌면 기어는 'D', 앞으로 움직였여야 했던 거 아닐까. 아니면

그녀는 또다시, 자신이 짊어질 짐의 크기를 하나 더 키운 걸까.


그리고 크레딧이 올라가며 달콤하고도 씁쓸하게 울리는 노래,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

'안 돼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이 노래가 굉장히 양면적인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가 이전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는 없단 것, 그렇지만 그게

앵콜같은 반복이 아니라 리셋, 새로운 이야기라면 혹시 모르겠다는 것. 갸냘픈 희망고문.


그렇지만 이 영화에선 그 이상의 의미가 담긴 건 아닐까. 단순한 사랑 노래가 아니라, '앵콜'이던

뭐던, 주문하고 요청하는 세상에 대한 노래로 읽을 수는 없을까. 그녀가 황량한 삶 속에도 버려진

강아지들을 계속 품어내듯, 누군가 타인의 (앵콜) 요청과 무게에 짓눌리지 말고 스스로의 노래를

스스로의 의지로 계속 부를 수 있도록. 그에게 돌아가서 손을 내밀 테지만 그건 더이상 '앵콜'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 잡아주고 나서 계속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이제 다시 움직이는 그녀에 대한, 그녀의 삶에 대한 응원가인지도 모르겠다. 앵콜요청금지.



앵콜요청금지. (브로콜리 너마저)


안 되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

더이상 날 비참하게 하지 말아요

잡는 척이라면은 여기까지만

제발 내 마음 설레이게

자꾸만 바라보게 하지 말아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스쳐지나갈 미련인걸 알아요

아무리 사랑한다 말했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때 그밤이 부른다고 다시 오나요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순 없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이런 말하는 그런 내가 잔인한가요


제발 내 마음 설레이게

자꾸만 바라보게 하지 말아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스쳐지나갈 미련인 걸 알아요

아무리 사랑한다 말했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때 그 밤이 부른다고 다시 오나요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순 없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이런 말하는 그런 내가 잔인한가요

아무래도 네가 아님 안 되겠어

이런 말하는 자신이 비참한가요

그럼 나는 어땠을까요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순 없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이런 말하는 그런 내가 잔인한가요


안되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

더 이상 날 비참하게 하지 말아요

잡는 척이라면은

여기까지가 좋을 것 같아요





#1. 이런 '연애조작단' 어디 없을까.

일단 아무 여자나 하나 '찍기'만 하(고 돈만 내)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준다는 거잖아. 뭐,

전지현이나 신민아는 안 된다는 거 같지만 그래도 굉장히 획기적인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할 때 어느 부분이 상대의 주의를 빼앗고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그런 불안하고 막막한

부분들을 든든히 받쳐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과 동선까지 파악해서 그야말로 '인연'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2. A/S가 관건이지 않을까.

그렇지만 아무리 첫인상을 잘 만들고 인상적으로 깊이 새겨지는 이벤트로 마음을 얻었다해도,

이후의 관계가 문제 아닐까. 계속해서 둘 사이의 친밀도를 유지하려면 꾸준한 관리가 절대로

필요할 텐데. 아니면 대부분의 상황에 대한 그녀의 '모범답안' 메뉴얼을 한 권 만들어서

제공하던가. 그렇지만 그들도 온갖 변수에 즉흥적으로 대응해야 할 뿐이니 그건 불가능할 듯.

연애가 고백으로 끝나는 원샷이벤트는 아니잖아. 아니 원샷인가? 그건 원나잇 아닌가.


#3. 평생 '가면'을 쓰고 지내야 하려나.

막말로 '조작단'이 평생관리를 해준다 해도 문제다. 언제까지 그렇게 그녀 맞춤형으로 '나'를

연기하며 지낼 수 있을까. 처음에야 그저 그녀의 마음을 얻은 것만으로도 기뻐서 내가 다 맞추겠네

평생 저항않고 노예처럼 받들겠네, 하겠지만 그게 어디 될 말인가 말이다. 연애는, 관계는,

여튼 맞출 수 있는 한 서로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할 텐데. 그렇게 한발이라도 삐끗하면 그들의

관계는 끝장날 가능성이 더욱 클 텐데.


#4. 에라, 그냥 알아서 하던대로 하자.

헷갈리는 와중에, 그러고 보면 사실 조금 낮은 수준의 '연애조작단'은 이미 가동중이지 싶다.

초딩들이 활개치는 포털사이트는 제끼고라도, 연애감정 비슷한 것이 일어나는 상대가 생기면

머릿속에서 촤라락 돌아가는 과거의 경험들, 그리고 주변인들을 동원한 암호식별 및 행동전략.

뭐, 맞을 때도 있고 영 아니다 싶을 때도 있는 거지만, 어차피 연애란 게 하나의 블랙박스,

읽어보지 않은 책을 살며시 열어보는 재미 아니던가. 이쪽이나 그쪽이나.



뭐, 영화에 대한 리뷰라기보다는 그냥 영화보고 나니 저런 '조작단' 하나 있음 어떨까 싶어서

이런저런 잡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2000년에 나온 영화, 그 즈음 언젠가 대학 근처 '비디오방'에서 봤던 영화다. 새삼 영화 내용을

되짚기도 애매한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본 그 영화는, 그 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을 전했던 거다.

굳이 이렇게 글을 남겨 영화를 기억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학에 갓 들어간 그녀가 도쿄로 떠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집과 고향을 떠나 차창 밖 햇살조차

덜컹이는 기차를 타고, 그녀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미래와 터무니없는 공백으로 가득한 가능성으로

뛰놀았을 거다.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무엇을 하게 될지, 어떤 삶이 펼쳐질지. 


대학교라는 공간은 그랬다. 이곳저곳에서 선배들의 뜨거운 공연이나 거침없는 움직임이 있었고,

무엇을 배울지 어떻게 시간을 쓸지,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에 맡겨져서 그녀처럼 나 역시도 처음엔

살짝 당황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뜬금없이 기웃거려보기도 하고. 아무래도 좋아, 라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래도 좋은 때였고 아무래도 좋은 곳이었다. 그 낯선 공간과 사람들이 낯익어지면서 점점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마치 낮과 밤 사이의 그 퍼런 빛을 사방에 머금는 몽환적인 시간대에 그렇듯

묘하게 들떠 있는 기분은 잊을 수가 없는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뚜렷해지고, 점점 그리워지는

그런 느낌. 뭔가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고, 전혀 알 수 없는 삶으로 나를 흘려보내는 그런.


그녀의 사랑은 그런 순간의 정서를 하나로 모아내는 그런 거였다. 새롭고 낯선 삶으로 흘러온지

한달쯤 지난, 4월의 어느날에나 일어날법한 사랑 이야기. 전혀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어떻게 해야할지

하나도 모르겠는 그런 상황에서, 문득 쏟아내리는 소낙비처럼 한순간의 격동을 따라 마음을 전하고

전해받는 그런 사랑. 앞으로의 진부한 전개 따위가 아니라 그 순간으로 아름다운 사랑.


이전에 봤을 때에 비해 강렬하게 와닿던 것들은 그런 거였다. 한순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삶과 사랑.

더이상 뭘 더할 것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있는 자체로, 살아서 느끼던 그 자체로 아름답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다소간의 회고체, 약간의 '노화 자각' 증상이 보태어진 그시절의 재구성이겠지만,

모든 게 마냥 설레고 들뜨기만 하던 그런 때가 있었고, 지나버렸다는 느낌이랄까.




뭐 하나 딱 떨어지거나 명료하지 않은 채 뿌연 눈세계 속의 풍경처럼 불분명하고 모호한

그녀들의 사랑 이야기가 다시 와닿는 날이다. 같은 사람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 기억들을 잘 합쳐보면 그 사람에 대한 보다 '완전한' 기억과

이미지를 추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성공했을까. 그리고, 뒤늦게 받아든

누군가의 '러브레터'로 톡톡 두들겨진 오래전 첫사랑의 기억은 또다른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혹은 상처로 남을까.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오겡끼데스.


결국 지나간 두 개의 사랑에 안부를 묻는 영화, 너무나도 선명하고 강렬하게 지나버려

2년이 지나도록 지우지 못한 사랑과 그게 사랑이었는지도 모른채 지나버린 사랑에 대해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고 '난 지금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

그건 상대가 감기에 걸리진 않았는지, 봄꽃은 보았는지, 눈이 내리는 날 뭘하며 지내는지

묻는 그런 소소한 말건넴 밑바닥에 깔린 채 쉼없이 속삭이는 본심일 거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지나간 일들은 모두 아름답게 분칠되고 지난 사랑 역시 늘

아름답게만 기억되기 마련이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지나버린 사랑,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사랑,

아름답지만 더이상은 가망없는 사랑-혹은 더이상 가능성이 남지 않아 더욱 아름답기만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에 대해 '오겡끼데스까'를 물어야 할 게 아니라, 지금 옆에 있는 사랑,

전쟁중인 사랑에 '오겡끼데스까'를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나간 사랑에 안부를 묻기란, 진행 중인 사랑에 안부를 묻기보다 쉬운지 모른다.

중부지방에 폭설특보가 내린 날, 모처럼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다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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