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을 넘어 현실에까지 범람한 그와 그녀의 사랑. 그들의 로맨스는, 그들의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ytzsche.



강릉과 非강릉, 영화와 현실의 공간.

강릉은 그런 곳이다. 사시사철 변함없이 파랗기만 한 바다에 연한 이 자그마한 소도시는, 외지에서 들고 나는 사람들을

통해서나 비로소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곳이다. 특히 여름에 바다를 찾는 향락객들에게는, 강릉이란 극중 민아의 자조섞인

표현처럼 일종의 '피서지용 연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른다. 필요할 때 찾아와선 며칠 후엔 훌쩍 내버리는.


영화사 조대표도 잔뜩 지친 채 그렇게 불쑥 강릉으로 향한다. 딱히 일정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이, 그저 바다를 보겠다

떠난 길이었으니 그에게 강릉은 일종의 비현실이었다. 그리고 투숙한 호텔에서 20년전 강릉에서 만나 하룻밤을 지냈던

민박집 여자아이와 똑같이 생긴 그녀, 민아를 만나 함께하며 강릉은 20년만에 로맨스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여느 연인들처럼, 그와 그녀 역시 스치는 손길 하나에, 미묘한 뉘앙스를 흠뻑 적신 단어 하나에, 그렇게 감정이 부풀어오른다.

그건 그가 호텔 로비에서 만나는 남자 맛사지사와 여성고객의 흥정 따위를 모두 성적인 의미를 함뿍 담아 읽어내린다거나,

그녀 역시 그를 조심스레 만지려 들며 그를 욕망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자연스러운 거다.



강릉에서의 로맨스, 강릉에서만 가능한 로맨스.

문제는 그들이-그의 생각대로라면-부녀간일 수도 있다는 것. 그는 드문드문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에라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감정을 벌여놓는다. 그건 그가 강릉이란 곳을 대하던 태도에서 비롯할지 모른다. 여긴 '피서지'니까,

현실과는 다른, 영화 속과 같은 허구의 공간. 현실의 문법과 규율이 깨지는 그런 비현실의 공간. 이미 그는 20년전에도 그랬었다.


어쩌면 그녀도 그와의 사랑이 순간의 불장난이라거나, 두시간여만에 크레딧이 올라가며 끝나버릴 영화같은 기억으로 끝날 거라

지레 겁먹고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아픈 상처를 갖고 있던, 그리고 아마 그런 아픈 상처의 결과로 태어난 그녀다.

혹은 그녀는 아직 어려서, 깨질지언정 한번 그와의 이야기 마지막 페이지를 보겠다는 당돌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과는 같다.


그와 그녀는 줄곧 손에 소니 핸드캠과 라이카 카메라를 쥐고 다닌다. 경포에서 주문진을 돌아다니는 길에, 그들은 쉼없이

서로의 이미지를 기록하고 저장한다. 일층에 미용실이 있는 이층 양옥집에 대한 엇갈린 기억이라거나, 새로 찍으려 하는

영화에 대한 즉흥적이고 암시적인 이야기들이라거나, 그러는 그들은 분명 그 예술적인 세계의 감독이나 배우처럼 굴고 있었다.

 



현실까지 넘쳐들어온 로맨스의 물결.

그녀가 그에게 먼저 고백한 때, 그는 그 직전 분명 그 타이밍에 마음을 전하려 결심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도망갔을까.

왜 강릉을 벗어나 자신이 속한 거대한 도시 서울로 한달음에 되돌아왔을까. 그녀의 고백에 퍼뜩 놀라 겁먹은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게 '로맨스'로서 어울리는 짧고 아름다운 결말이라 생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서울에 돌아와 안심했을까.


아마 그는 굉장히 찝찝하고 부끄럽고 지쳐버린 채 돌아왔을 거다. 어디선가 내 아이가 나도 모르게 자랐다는 상상, 그리고

그 아이에게 '핏줄이 당기는 것'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상상이 허용되던 다소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불쑥

냉혹하고 단정한 공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그리고 20년이 지나도 똑같이 그 공간에서 도망나와 문제를 피해버렸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영화같다'고 표현하는 식이라면, 여기서 그의 이야기 한토막은 크레딧을 올리며 끝내야 하는 타이밍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그녀가 그에게 손을 내밀어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영화는 끝이 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해주는 데서

폭발하는 거다. 강릉이라는 공간에 한정되었던 그들의 영화같은 사랑이 비로소 그 속박을 끊고 현실까지 넘쳐들어오는 순간.


로맨스와 현실의 혼재, '강릉'이란 알리바이가 필요치 않은 사랑.

물론 대책없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녀는 그의 딸인 게 분명해지고,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의 나이차는 스무살.

그들의 사랑이 어디까지 뻗어갈지,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물과 기름같이 겉돌던 로맨스와 현실을 비로소 뒤섞을 수 있게 되었다. 강릉과 非강릉의 벽을 넘어서.


어쩌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아닐까. 로맨스는 로맨스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따로 생각하는 식의 사고방식 말이다. 영화에선

그게 '강릉 vs 非강릉'의 공간으로 표현되었다면,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거나, 연애 초 콩깍지와 리얼한 실재모습은 다르다는

식으로, 결혼 전과 후가 다르단 식으로 칸막이를 세워 놓고는 '(짧아서 아름다운) 로맨스 vs 현실'의 구도를 만들곤 한다.


아닐 수도 있을 거라 믿는다. 물론 현실이 그렇게 녹록치도 않고, 로맨스의 마법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만치

뭐 하나 뚜렷하게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건 확실하다. 우리의 로맨스는, 우리의 영화는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다음 장면으로 함께 넘어갈 수 있는 한 끝나지 않는다. 그게 아마도 백년후에 크레딧을 올리는 비법.


각자 만들어가는 영화의,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의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라면. 배우와 감독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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