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출증에 대해 생각하다.

용도에 따라 크고 작고 휘어진 그릇들, 접시들이 산개해 있듯이..적당한 형태를 취한 말글을 통해 타인과 접속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는 애초 말글의 목적이 타인과의 소통에 있다는 전제를 편의적으로 밟고 전개되는 이야기이나, 똘갱이가 아닌 이상 지 혼자만의 이야기를 펼쳐 말글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구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므로 말글의 목적이 노출에 있음을, 그리고 그에 상응한 피드백을 기대함에 있음을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2. 45억년의 외로움.

우주의 한생명으로 지구가 탄생하고, 지구의 한생명으로 유기생명이 태어나고, 유기생명의 진화체인 인류가 탄생하고, 그 세포 내에선 끊임없는 유전자적 진화가 이루어져 엄지손가락이 되고, 맹장이 되고. 우주적인 단위에선 지구가 외롭고, 동물적인 단위에선 인간이 외로우며, 개개 인간의 단위에선 내가 외롭지만, 어쩜 내 둘째손가락이나 소장의 상피세포가 외로워할지도 모른다.(미지의 영역이다) 다른 말로, 천왕성이 외롭고, 금붕어가 외로우며, 당신이 외롭고, 당신의 뇌하수체 국물이나 새끼발톱이 외로워할지도 모른다.


#3. 이야기하고 글을 쓴다는 것-나와 타인간의 관계

더구나 이렇게 홈그라운드를 탄탄히 구축하고 그 안에 자신의 온갖 사념들을 응집해 넣는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임상병리학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하루끼가 상실의 시대에서 갈파했듯, 사람들은 '내'가 하루에 계단을 몇개 밟고 몇걸음을 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한 맹목적인 호의나 감정이 관심을 끌어내는데 서툴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타인의 관심을 끊임없이 유발해내고 타인들의 세계관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지속적으로 개입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이 바로 자신을 언어로써 기술해넣는 skill인 것이다. 홈그라운드를 설정하여 타인을 자신의 거미줄로 불러들임으로써 얻는 이점에는, 자신의 연속적인 생각의 궤적을 타인으로 하여금 읽어내어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좌표를 가늠하게 하여 갈기갈기 찢긴 서로의 시공간적 공백을 보다 효과적으로 메워보고자 함에 있으며, 또한 타인과의 소경 길 더듬듯 하는 소통에 있어 모종의 어드밴티지를 얻고자 함이다. 담화의 소재와 주체를 최대한 자신 쪽으로 기울임으로써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장악력을 발휘하고자 하는 homo politicus로서의 본성이 발휘되는 것이라 하겠다.


#4. 글을 쓰는 걸 보고 이야기하는 걸 듣는다는 것-나 자신의 문제

그러나 타인에게 이해되는 순간에 본연의 자신은 왜곡되고 박제되어 버린, 예컨대 '04년2월2일오전3시54분의 홀로술기울이는아무개(남,24)'라는 괴상한 것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사실 그러한 수정과 왜곡, 축약의 과정을 거쳐야 모두에게 읽힐 수 있는 '인간'으로써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기에 불가피한 과정이라 여겨진다. 다만 니체가 이야기했듯, 편의상 구체화한 삶의 구라들을 진실로 여겨 지혼자 상처받고 울지 않도록...언제나 타인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한 관계란 완전할 수 없음을 유념하고 매분매초마다 그 냉혹한 현실에 두손들어 항복하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불가피한 랙에 걸린다 할지라도 자신이 자신을 기술하고 이해함에 있어 개재되는 말글의 형해화이다. 내가 자신을 읽어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자동기술적인 방식이나 브레인스토밍과 같은 카오스적인 방식을 활용한다 할지라도 역시나 자신을 위한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언어화함으로써 사념처럼 떠돌던 몇가지의 전기적신호들이 형태를 갖추어 자신을 지속적으로 설득해내기도 하여, 결국 말글이 인간의 생각의 흐름을 구속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요는, 자신을 이해함에 있어 본질적으로 인간은 언어를 필요로 한다는 성찰이다.

역시, 인간은 모두에게 타인일 수 밖에 없으며 결국 자기 자신마저 자신에게 타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나 방금 쓴 글에서 낯선 남자의 향기를 맡는 경우는 그나마 그 어쩔 수 없는 진실을 대면한 순간이다. 마치 화염이나 파도, 바람과 같이 예측할 수 없는 형태를 예측할 수 없도록 변화무상하게 지속하는 인간이 '씌여지고 말해지는' 바로 그 순간, 그 속류화한 인간형은 생기를 잃고 한 fiction의 등장인물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5. 다시 틈새에 끼어들어 무임승차를 꾀하다.

그렇다고 하여 말글을 통한 인간의 통상적인-큰 틀에서의-자기 규정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말글은 역사를 이루어왔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특정양식으로 고착화하거나 인간들간의 일들을 엮고 풀어왔으며 타인과의 관계를 묶는 접착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미니홈피 한장한장 역시 타인과 자신간의 사이에 놓인 우주와도 같은 그 허무를 메꾸기 위한 벽돌이자 시멘트가 되어 서로의 훼손을 감내한 소통의 기초가 되는 게 아닌가를 생각한다. 말글은, 그 빈약하고 거친 표현으로 인해 서로를 '일반화된 양식'으로 변형시키고-깎아내린단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보이지만-그로부터 다시 서로의 '고유한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기 위한 양대 도구-몸과 언어-이다. 그렇지만, 모두 서로를 자신의 고유한 영역으로 들이기 꺼리고, 타인의 고유한 영역에 들어가길 꺼린다면. 그저 각자 언어화된 형태로 자신의 그릇내에 안전히 존재할 뿐이라면, 그렇게 그저 세워져 있을 뿐이라면 이건 그저 그림자 놀이일 뿐이다. 제각기의 달팽이껍질 속에서 그 언어가 다중에게 노출되고 의미가 명확치 않은 익명속으로 증발해버리지 않으려면, 최소한 '일반화된 모두'를 위한 중첩적인 아크로폴리스가 필요하단 이야기. 방어선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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