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으로부터 '백제의 미술'을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세계대백제전, 그리고 부여나 공주의

백제 문화유산들을 돌아보려면 우선 백제 문화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가 있어야 훨씬 깊게 보일 것 같았으니

정말 좋았던 기회였던 셈이다. 여행 그 자체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준비하는 재미가 더 크다는 말도 있듯이,

그곳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고 일정을 잡아보고 어떤 문화적 배경이나 특징이 있는지 하나씩 알게 되는

재미를 놓치고 봐서야 영 밍숭맹숭하기만 하기 십상이다. 백제를 돌아보기 전, 그야말로 든든한 가이드로서

부족함이 없으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한국미술사는 고사하고, 백제미술사에 대해 정리된 책 한권이 없다." 강연 말머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고분이니

회화니 조각을 개별적으로 다룬 책들은 있지만 총체적으로 백제의 미술은 이렇다, 라고 정리한 책이 없단 거다.

백제 문화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게 고작 중고등학교 때 배운 단편적 지식과 몇 개 이미지에서 멈춰

있는 중요한 이유겠다. 사실 그렇다. '백제'의 이미지란 어슴푸레하고 희미한, 불분명한 뉘앙스일 뿐이다.

사실 삼국시대의 세 나라에 대한 이미지가 대개 그렇다. 고구려는 강인하고, 백제는 우아하며, (통일전)신라는

소박하다는 정도.

유홍준 전 청장으로부터 한 두시간 반, 강연을 듣고 나서 바로 부여박물관의 유물들을 보았다. 뭔가 조금은

눈이 뜨이는 느낌, 이래서 백제의 문화를 두고 "儉而不褸, 華而不侈(검이불루, 화이불치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음)"이라고 표현한 거구나 싶었다. 그야말로 문화의 고상함과 우아함을 표현할

극상의 표현 아닌가. 검소와 누추 사이, 화려와 사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내는 미감이란.

부여박물관은 주로 백제의 사비(부여) 시대의 유물을 품고 있다. 백제의 수도는 한성과 공주를 거쳐 부여로,

그렇게 옮겨 다닌 게 백제의 유물이 신라 유물에 비해 적게 발견되는 하나의 이유라고 했다. 물론 계속된

전란과 정복자의 역사 왜곡/지우기 노력도 한 몫했겠지만.

아마 교과서에는 한 줄 이렇게 실렸을 게다. '백제는 활발한 해상활동으로 국제적으로 왕성하게 교류했다.'

박물관에서 만나는 유물들은 그 '왕성한 교류'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중국의 영향, 고구려와 신라와의

공통점, 왜와의 교류 흔적 등등. 나름 도식화되고 형식적인 그림 하나가 박물관에서 보였다. 설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적대관계와 교류관계를 선명히 구분했겠지만, 사실 당시의 외교란 게 오늘날 미국 편향의 외교같지도

않은 외교보다도 훨씬 정교하고 복잡해서 저렇게 국제관계가 굳어있었을 리 없는 거다. 뭐, 근초고왕 때의

분위기에 한정한 그림이라니 단순화를 무릅쓰고 저렇게 표현했겠지만.

전시품 중 동선의 앞머리에서 눈에 띄던 전시품 하나. 백제시대에 이걸 어떻게 세워놓고 활용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후대의 '장승'이 어쩌면 여기서 기원한 걸 아닐까 싶어졌다. 어느 지역이나 고대로 갈수록

남근이라거나 성적 뉘앙스가 잔뜩 담긴 예술품이 많아 보인다. 그게 왕성한 생명력의 근원 혹은 상징처럼

고대인들 사이에 공유되는 이미지였을 거다.

최근 발견되어 기사에도 꽤나 심심치 않게 떴던 백제시대 면직물의 유물이 여기에 있었다. 고려시대 문익점이

붓뚜껑에 담아왔다던 목화씨 신화 이전에도 이미 면직물을 한반도에서 직조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유홍준 청장이

말한 것처럼, 유물 하나가 발견되려면 정말정말 억세게 운이 좋아야 한다. 하필 그 자리에 떨어져서, 우연찮게

보존을 위한 환경이 조성되고, 이후 수백수천년간 전란이나 화마, 홍수 따위 자연재해를 이겨내고, 근래에

들어서는 제대로 조사도 없이 갈아엎고 콘크리트를 부어대는 우악스런 손길을 벗어나야 하는 거다. 그리고도

발견되기란 더욱 기적과도 같은 일.


그래서 그나마 우리에게 남겨진 문화유산은 '죽음의 문화', 고분이나 무덤에 고이 매장된 것들이라 한다. 아무래도

'삶의 문화', 일상 생활에서 쓰이고 계속 변화하는 것들은 일상생활 중 파괴되거나 소모되기 십상이니까. 뭔가

궁금증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 이것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 백제에서 만든 게 아닐 거라는 학계의 주장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그전까지 우리가 갖던 백제의 이미지란 막연하고 어설픈 것이었다. 발톱이 다섯개 달린 용이 연꽃봉오리를

입에 물고 버티고 있는 모양새라거나, 연꽃 위에 나타난 산수문양과 음악가들, 동물들의 형체, 그리고 맨 위에

버티고 선 봉황의 날아오르려는 듯한 모습까지. 이렇게 화려하고 우아한 대향로에 걸맞는 공간을 꾸미고 있었을

온갖 장식품과 치장들은 또 얼마나 화려했을까. 이 향로만 덜렁 놓였을 리 없는 거니까.

유홍준 청장에 따르면, 이런 백제의 공예 문화가 발달한 건 장인에 대한 예우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종을 만드는 주종(鑄鐘) 박사, 기와를 만드는 와(瓦)박사, 그렇게 기술인을 우대하고 적극 지원하는 정책,

오늘날 한국의 기술이나 디자인이 고전해온 이유도 그렇지 않을까. 장인 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장인 정신을 북돋을 정책적, 사회적 토양이 없어서.

서산 마애삼존석불은 매 계절, 매 시간, 매 순간 표정이 달라진다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씌여있었다.

그걸 보여주려는 걸까, 사방에서 조명이 움직이며 그에 따라 변하는 표정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마터에서 발굴되었다는 거대한 좌대. '상현좌'라 하여 부처님의 옷자락이 좌대 아래까지 흘러내리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사이즈가 거의 킹사이즈 침대만하다. 부처님상까지 다 남아있었다면 정말 멋졌을 텐데,라고

유홍준 청장이 탄식했던 그 유물이다.

이 파격적이고 생생한 얼굴 묘사라니. 그런데 제목은 무려 '나한(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은 성자)'랜다. 문득

현대미술을 전시한 미술전에 온 건지, 고대 문화유산을 전시한 박물관에 온 건지 헷갈리는 순간.

고대 삼국이 고분을 축조하며 왕의 안녕을 기원하던 시대에는 부장용 금관, 불교가 국교로 자리매김한 시대에는

사리함, 그렇게 일국 차원에서 문화적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대상이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의 出자형 금관이

전자의 예라면 백제의 이런 사리함이 후자의 예. 권력층이 자신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문화적

역량을 총동원한다는 궤는 같지만.




백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이런 연꽃무늬 기와. 그렇지만 연꽃도깨비무늬니, 산경치도깨비무늬니

하는 것들도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신선하다. 그전까지는 '연화귀형문전', '산경귀형문전'이란 함축적인

한자어로 표현되어 있어 딱딱하고 어려워보였는데, 그렇게 우리말로 풀어서 설명하니 훨씬 정감이 간다.

칠지도.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해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키워드들을 담고 있어 이를 소재로 하여 상상력을

마구 발휘한 소설들도 나왔던 바로 그 '칠지도'다. 진품은 일본의 왕실에 보관한 채 비공개를 고수하고 있다고

하던데, 칼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 인상적이다.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흠뻑 서려있다.

나뿐 아니라 이 박물관을 둘러본 아이들의 눈에도 역시 그래보였나보다. 박물관 한쪽 벽에 전시된 아이들의

그림들엔 칠지도를 그린 그림들이 참 많았다. 문화시설이니 볼만한 전시회니 따위가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2010년 한국, 그렇지만 1400여년 전 백제의 고대문화유산을 둘러보기엔 이 근처사는 아이들이 오히려 꽤나

유리한 점도 있겠다 싶어 조금은 다행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유홍준 청장의 말솜씨도 그렇고 이런 편안한 분위기도 그렇고. 그리고

듣고 나서 뭔가 세상에 뿌려진 흔적들을 조금은 더 새삼스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구나 하는 유쾌함도 그렇고.

비록 그게 당장 살아가는 데 도움은 안 되는 거라 할지라도, 막연하기만 하던 '백제'에 조금은 더 단단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다면 꽤나 멋진 일 아닐지.



*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하니 선택과목으로 하니 말이 많지만, 어쩜 그런 건 정말 중요한 논점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몇가지 형식적이고 막연한 설명과 문화에 대한 표현어구를 외울 뿐인 식으로

공부시킨다면 그건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계승하고 느끼도록 하는 데는 실패하는 거다. '우아하다'라는

표현방식에 맞추어 백제의 유물 사진 몇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백제의 문화유산들을 둘러보고 본인이

'우아하다'라는 표현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게 역사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네발 달린 짐승이 슬쩍 고개를 돌린 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자태다. 이것은 뭐에 쓰는 물건인고, 묻고 싶게

만드는 이 물건의 이름은 호자(虎子), 백제 시대의 남성용 변기라고 한다. 아하. 그러고 보니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 동그랗게 구멍이 나 있는 데다가 등언저리에 손잡이가 붙어 있는 게 보인다.


위트있게 슬쩍 뒤로 뺀 엉덩이하며, 몸통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그 은근한 곡선미하며, 전체적으로 안정감있게

버티고 선 균형감하며, 집에 저런 거 하나 있으면 따로 화장실 안 쓸 거 같다. 게다가 휴대하기도 편하잖아.

변기에 대해 아무런 생각없이 페트병이나 들고 다니던 현대인들에겐 없는 고졸한 운치와 미감은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이름은 '호자'라니, 왠지 볼 일을 보면서 호랑이처럼 울부짖어야 할 것 같은 충만함.

여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체의 구조와 용변의 자세가 다르니 남자와는 달라야 하는 건 사실 당연한 건데,

내가 봐왔던 휴대용 변기, 요강의 형태는 남녀에 무차별했던 것들 뿐이었다. 앞으로 길게 뻗어나온 입술이

편안한 배변을 돕기에 맞춤한 백제 여성들을 위한 변기, 신기하게 이름은 변기(便器) 그대로다.


이런 한자이름으로 백제 때도 불리웠을지는 모르겠지만, 변기(便器)라는 단어는 새겨보면 뭔가 의미심장하다.

지린내와 똥내가 섞여있는 단어라기보다는 '편리한 기구'라는 담백하고 호의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단어랄까.


분명 장담하지만 이런 변기는 밤새 안녕하라는 의미로 방안에 들이는 일종의 '요강' 기능을 수행했을 테고,

일반 가정이 아니라 어느 정도 지체높으신 분들을 위한 물품이었을 터. 일반 백성들은 뭐, 집밖의 큰 나무아래

성별에 따른 편한 자세를 취하고는 대충 풀잎사귀 한줌 뜯어다가 닦고 덮어두고, 그랬을 거다.



@ 국립부여박물관.


뚜얼슬랭 박물관의 리플렛. 프놈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킬링필드'에 갈 짬이 안 난다면 시내에 있는

여기는 꼭 한 번 들러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

(관련 포스팅 : 캄보디아. 2만명의 원혼이 1명의 귀중함을 일깨우다, 뚜얼슬랭 박물관)


타이완의 야시장음식, 길거리음식도 워낙 유명하지만, 허름한 길가 음식점이나 조금 고급스런 수준의 음식점의

음식 역시 뭐 하나 맛이 없는 게 없었다. 상해나 북경에서 맛봤던 중국음식들도 대개 맛있었지만 대개 음식점들

내부는 기름때가 손닿는 모든 곳에 쩔어 있고 기름쩐내 역시 음식점 내에 꽉 들어차 있었다면, 바로 그런 위생상의

문제가 깔끔히 해결된 채 중국 요리의 맛까지 놓치지 않은 게 타이완의 음식점인 듯.

타이완 사람들이 아침으로 즐겨 먹는 '콩국', 두유, 혹은 그냥 영어로 소이밀크, 라고 하면 다들 알아들었었다.

아침으로 워낙 많이들 먹는지 파는 곳도 굉장히 많고, 들고 다니며 마시는 사람도 굉장히 많았는데 콩을 갈아

직접 만들고 며칠 만에 소진해서 새로 만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찬 것과 뜨거운 것, 두 종류로 팔던데 찬 두유를

마시면 기운도 나고 땀도 식고. 아침식사로 딱.

아침으로 두유와 함께 먹는 샤오삥(小餠), 깨가 가득하게 뿌려진 채 파삭파삭하고 고소하니 따뜻한 빵만 따로

팔기도 하고, 계란을 스크램블 에그처럼 으깨넣어 팔기도 하고. 
 
타이완에 가면 누구나 '딘타이펑' 본점을 순례하듯 들르곤 하지만, 사실 길거리 이름없는 가게에서 파는

'샤오롱빠오(小龍包)'도 뜨거운 육즙이 그득하게 들어있었다.

조금 업그레이드해서 101빌딩 내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어본 적도 있었다.

한국의 LA갈비와 비슷한 요리, 좀더 짭조름한 맛이 덜하고, 바닥에 상추가 깔려있더란 점 이외에는 비슷했던 듯.

이건..뭐더라..돼지 고기로 만든 음식이었는데, 오향장육이었던가.. 부들부들하면서도 쫀득한 돼지 껍데기 부분이

간장이 주 베이스로 이뤄진 양념에 포옥 안겨있었다. 그리고 옆엔 썰은 파와 고수.

그 고깃덩이와 채소들을 이 빵에 가운데에 넣어서 먹는 거다. 깨가 촘촘히 틀어박힌 빵 속에 젤리처럼 포들한

돼지껍데기와 고기가 웅크리고 들어가서는 따끈따끈, 쉼없이 입 안으로 들어갔다는.

고궁박물관 찻집에서 맛보았던 '애프터눈티' 세트. 호박과 오리와 배추가 이쁘게 올라와 있었던 고급스런 다과.

그리고 개구리 난소였던가, 뭔가 굉장히 독특한 내용물이 들어가 있던 독특한 후식, 시원하고 대추가 들어가

있어 달콤하고, 부석부석한 덩어리들의 식감 역시 묘하게 이끌렸었다.

101빌딩 89층 전망대에 있던 소 한 마리, 냉기가 뿜어나오는 아이스크림을 꼬나쥐고, 우람한 젖통을 불끈

내 보인 채 서 있던 풍경이 넘 재미있어서 한 방.

우육면, 뉘오우룽미앤. 고기가 있고 없고의 차이로 우육면과 우육탕면의 이름이 바뀌고 가격이 배로 차이가

나던 바로 그 메뉴. 고기가 무슨 맛난 갈비탕에 담긴 갈비살처럼 보들보들 야들야들.

돼지 귀 잘라 무친 것과 콩으로 만들었다는 소세지 모양의 반찬, 반찬은 한 접시에 40NTS던가, 돈주고 따로

샀어야 했다. 콩으로 만들었다는 저 소세지 같은 건..뭔가 아무 맛도 안 나는 거 같으면서도 굉장히 쫄깃한

식감 때문에 마법처럼 손이 계속 이끌리더라는.

융캉제 주변의 刀麵, 일종의 칼국수 집에서 맛보았던 국수. 손으로 한 반죽을 칼로 설설 썰어내는 통에 두툼하고

얇은 면의 다양한 부분에 제각기의 개성실린 맛이 났다.

 그 유명한 융캉제의 얼음빙수. 삥관, 혹은 아이스몬스터라고 불리는 그 곳에서 먹었던 망고 빙수는 과연 최고.

얼음의 부드러움은 밀탑빙수의 뺨을 치고, 망고의 달콤함은 뭇 과일을 무색케 하며, 야박하게 흉내만 낸

망고 시즈닝이 아니라 그야말로 풍족하게 올려주는 망고를 씹다보면 혀를 씹어도 모른다는.;

혹은 난징둥루의 브리즈센터 지하에 있던 레스토랑에서 반짝이던 홍등 아래 먹었던 음식들도 빼놓을 수 없다.

뭔가 마나 감자나 그런 뿌리식물을 갈아서 만든 것 같은 떡과 같은 에피타이저. 알고 보니 '무' 떡이랜다.

돼지 족발과 비슷하면서도 좀더 부드럽고 따뜻하게 찜한 느낌이 강하던 음식, 청경채와 함께 찰진 면발 위에

올려져서 함께 먹어줘 함께 먹어줘, 요러고 있었다. 녀석의 소원대로 발가락 사이뼈를 하나하나 분해해가며

남김없이 먹어 치워줬다는.

사실은 베이징 카오야를 먹어보고 싶었지만 찾지 못하고 패스, 꿩 대신 닭, 아니 오리 대신 닭으로 카오야와

비슷하게 바삭한 껍질을 가진 닭요리를 시켰다. 메뉴판의 그림과는 달리 생각보다 카오야와는 많이 거리가

있었고, 차라리 후라이드치킨에 좀더 가까웠던 요리.

이번 타이완 여행에서 얻은 소득 중 하나라면, '삐딴'을 제대로 맛보았다는 점.

* 네이버 참조 : (중국 요리에서) 오리알이나 달걀을 나무의 재·소금·생석회가루를 섞은 것에 두 달 이상 담근 것. 흰자위는 투명한 적갈색, 노른자위는 진한 녹갈색이 됨. 피단.

그리고 국내에서 이러저러한 기회에 맛보았던 삐딴과는 달리, 타이완에서 몇 번씩이나 맛봤던 삐딴은 일관되게

다른 특징을 보여줬다. 진한 녹갈색의 노른자가 거의 생크림처럼 보드라와져 있다는 점. 심지어 나무젓가락으로

슬쩍 크림 떠내듯 건드리면 노른자가 크림처럼 떠진다는 사실. 게다가 향도 훨씬 진했다.

닭발 요리, 한국에서처럼 뼈없는 닭발 요리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이건 뼈가 알알이 박혀 있는 닭발.

닭발하면 매콤한 맛만 떠올리게 되는 한국인의 상식을 깨고,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꽤나 좋았다.

그리고 새우 두 마리가 박혀 있던 촉촉한 밀병 요리. 미끈하면서 쫄깃한 게 떡을 얇게 펴서 그 안에 새우를

박아넣은 듯 했다. 좀 새우랑 껍데기랑 따로 노는 느낌은 아쉬웠지만, 나름 묘한 조합.

두화, 한자로는 豆花, 콩꽃이란 뜻이 되려나. 푸딩처럼 야들야들하고 탄력있는 순두부에 팥이니 타피오카니

아몬드니 원하는 토핑을 얹어서 먹는 디저트 메뉴다. 단팥을 선택하고 나니 약간 실망했던 게, 팥의 향이나

맛이 너무 강해서 '두화'가 그냥 단팥죽처럼 느껴지고 말았다는 것, 한 번 더 기회가 있었다면 타피오카나

아님 그냥 토핑없이 심플하게 먹어 봤을 텐데.




(요약) 고궁박물관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 중 하나, 박물관에 위치한 찻집에서 맛보았던 황제를 위한 다과 세트.

고궁박물관 가는 길, 아무리 한국이 요새 폭염이니 뭐니 하지만 대만에는 비길 바가 아니다. 훨씬 뜨겁고, 훨씬

습하다. 작렬하는 태양 밑에서 허둥대다가 하얗게 찍어버린 사진. 버스들 뒤에는 운전사 이름이 번호판처럼

별도로 붙어있다. 오른쪽 밑부분, 하얘서 잘 안 보이지만 실제로는 눈에 아주 잘 띄인다는. 난폭운전이나 사고

발생시 아주 유용할 거 같다.

드디어 도착, 고궁박물관. 장제스가 이끌던 부패하고 나약한 군대가 마오쩌둥의 붉은 군대에 휩쓸리고 나서,

대륙 본토에서의 패배가 거의 기정사실화되던 즈음 전례없는 군사작전이 펼쳐졌다. 청나라 때부터 북경의

자금성에 수집되었던 대규모의 엄선된 중국 국보급 유물들을 대만으로 옮기는 작업. 수십만점의 회화, 도자기,

조각, 서적 등 귀한 유물들이 전쟁의 북새통 속에서도 무사히 이 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사실 이건 대만 쪽, 장제스 쪽의 시각이고, 중국 쪽, 마오쩌둥 쪽의 시각으로 따지자면, 그야말로 중국 문화의

정수를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셈이다. 지금 중국에 남아있는 유물들은 청나라 때부터 누대에 걸친 정선 작업을

통과하지 못한 B급 유물이 대부분이라 할 정도니까. 고궁박물관은 그런 박물관이다.

마치 타지마할처럼 온통 하얀 계단을 꾸역꾸역 올라가야 고궁박물관의 본관에 도착한다. 그 와중에 계단의

장식이 눈을 잡아끌었다. 구름 모양인지 십장생의 하나인 영지버섯의 모양인지. 저 너머로는 야자수가

수양버들처럼 휘영청 잎새를 드리우고 있었다.

박물관 내부는 총 3층, 내부는 거의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더욱 꼼꼼이 살펴보아야 했다. 사진 따위에 의지해

기억을 남겨둘 수 없으니, 하나하나 눈에 마음에 새겨두겠다는 결의로 근 반나절을 돌아보았다. 특히나 도자기,

그리고 황제의 장난감으로 특수 제작되었다는 보석함이니 장식품들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기꺼이 많은 시간을

들여 세심하게 관찰하게 되었다.

청대의 도자기와 현대의 도자기 질감을 직접 만져보고 비교해 볼 수 있도록 마련해둔 코너에서 마주쳤던 '조각'.

이건 무려 네 자의 한자가 하나로 합쳐져 있는 글자. 중국이나 대만의 상점에서 재운을 기원하는 뜻으로 종종

걸어두는 장식품이라 하는데, 招財進寶, 초재진보. 재물을 부르고 보배를 나오게 하려는 뜻이 담겼다 한다.

그리고 박물관 내의 화장실 표지. 남여화장실이 바로 옆에 나란히 붙어있기도 했지만, 별도로 여자화장실만

좀더 마련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일인당 '용무'에 필요한 공간이 남자보다 여자가 넓게 필요하기 때문에 같은

갯수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세심한 조치가 아닐까 싶었는데, 종종 급한 남자들이 여자용 화장실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나 보다.

박물관 나오는 길, 유리로 만들어진 자동문에 마치 자금성의 붉은색 대문처럼 오돌토돌 징이 박혀 있었다.

본관 말고도 별관도 있고, 행정용 관리관도 따로 있고. 별관에서는 지금 베트남 특별전시를 열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돌아보기에는 다리도 아프고 시간도 넘 많이 걸릴 듯 하여 패스.

대신에 좀 쉴 겸, 박물관에 딸려 있는 찻집에 들어갔다. 찻집 이외에도 고궁박물관을 감싸고 잘 조경되어 있는

정원과 정자 등도 있어서 어딜 갈까 잠시 고민했지만 워낙 더워서 에어컨이 절실했던 터라 망설임없이 실내로.

찻집 내부. 황실에서 즐기던 다과 세트를 맛 볼 수 있다는 곳이라더니, 실내 인테리어가 꽤나 화려하고 세련됐다.

모란차를 시켰더니 투명한 유리잔에 조그마한 잎새가 꽁꽁 뭉쳐진 덩어리 하나를 툭 떨어뜨린다. 정말이지

건조한 느낌으로 툭. 그리고 유리잔 주둥이가 찰박이도록 뜨거운 물을 뽈뽈뽈 부어주었다.

뭉글뭉글뭉글, 곧바로 반응하기 시작하는 덩어리. 바싹 말랐던 만큼 급했던 거다. 뭔가 잔뜩 뒤틀고 꼬깃꼬깃

말려있던 것들이 한껏 기지개키며 일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유리잔을 꽉 채워버린 꽃 한 송이. 초록색 꽃받침과 분홍색 꽃잎, 그리고 위풍당당한 수술까지 꽃송이

하나가 완연하게 피어올랐다. 투명했던 유리잔 속 물빛도 은은한 금색으로 바뀌었고 무엇보다 향기. 꽃향기.

모란차 말고 일반 녹차류를 시키면 이렇게 단정한 다기에 담겨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메인, 다과 세트. 정말 그럴 듯한 쟁반-이걸 뭐라 불러야 할지조차 모르겠지만-에 담겨 나왔다.

3층, 2층, 그리고 2층짜리 쟁반이 제각기의 높이와 공간을 확보한 채 이쁘게 빚어진 다과를 사뿐히 올린 채다.

콩으로 빚어진 오리 한 마리. 물결문양 날개깃이 새겨진 날개하며, 우스꽝스럽게 벌어진 부리하며. 검은깨로

콕 눌러박은 귀여운 눈매하며.

그리고 호박모양으로 빚어진 떡, 호박색도 딱 리얼하지만 그 위에 호박 줄기를 묘사하려고 올려둔 건포도는 참.

고궁박물관의 유명한 전시물 중 하나가 황제의 장난감이라는, 옥을 빚어 만든 배추다. 아마도 이 전시품을

흉내내어 만든 게 아닌가 싶은, 떡으로 빚은 배추.

그리고 복숭아 모양으로 빚어진 만두..라고 해야 하나. 호빵이라고 해야 하나. 비록 좀더 허술하고 치졸하게

만들어진 것일지언정 복숭아 모양의 호빵은 그리 신기한 편은 아니지만, 확실히 맛은 달랐다.

그리고 젤리 형태로 만들어진 다과. 투명하면서도 굉장히 탄력있는 젤리였는데, 의외로 맛은 어쩐 영문인지

굉장히 시원하다고 해야 하나. 독특한 식감이었다.

그리고 1층에 담겨 있던 다른 다과. 이 아이는 좀 평범한 형태의 떡이었다. 아무래도 1층에 있는 것보단

2층에 있는 것들이 화려하고, 그 중에서도 3층에 있는 오리모양으로 빚어진 다과가 최고였지 싶다.

또다른 떡, 카카오 가루를 아낌없이 뿌려넣은 떡이었는데, 고명이 평범한 팥이 아니라 검은쌀로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했다.

찻집 천장에 달린 조명도 자세히 보니 고궁박물관의 다른 유명한 전시품을 따라 만든 모양이다. 고대한자가

조각된 청동종의 형태가 천장에 주렁주렁.

이쁘게 빨간색 파란색 끈으로 매만져진 하얀 종지들.

여전히 햇살은 미친듯이 내려쬐고 있었고 남국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야자수 한 그루가 박물관 앞 정원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지만, 박물관을 한 바퀴 돌고 황제의 다과를 맛보고 났더니 뭔가 세상이 색다르다.

70만점이 넘는 소장품을 갖고 있다는 고궁박물관, 70만점이면 루브르 박물관이 가진 소장품의 배가 넘는 숫자,

게다가 그 퀄리티가 중국 오천년 역사의 정수를 품고 있는 수준이니 더 보탤 말이 없다. 그리고 그 전시품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녹아있는 찻집에서 그 자취를 찾아보며 차 한잔 여유롭게 즐기는 여유까지 부려보는 것,

대만에서 꼭 고궁박물관을 들러야 한다는 사람들의 조언에 나 역시 한 표.






DDR. 아마도 이천년대를 전후해서 한참 붐이 일었던 그 즈려밟기 게임을 떠올릴 사람도 있을 거고, 컴퓨터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DDR 램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근데 왜 난 다른 게 계속 생각나는 걸까.


가끔 좀 야한 생각만 가득찬 게 아닐까 싶긴 하지만, 사실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아닌 척 하지만 밤낮으로

다들 열심히 하고 계시잖아? 밤꽃냄새를 알고 그 비유 대상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비유대상부터 잔뜩 익숙해진

후에 어느 산에쯤 올라서는 '아~~ 이게 밤꽃냄새구나.ㅋㅋㅋ'할 텐데. 가끔 그런 상상을 하면 사방에서
 
새어나온 것들로 걸진 홍수라도 나는 건 아닌지 끔찍한 기분이 되곤 한단 말이다. 여하간에.


아. 그래서 여기의 DDR은 Deutsch Democratic Republic, 구 동독의 약자. 헤이리 토이뮤지엄에서 구 동독의

아이들도 별다를 바 없이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는 증거를 찾았다. 머, 사람 사는 게 여기나 거기나. 밤꽃냄새나

액냄새나.




@ 헤이리, 토이뮤지엄 내 非사진촬영금지 구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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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빛 대리석으로 지어진 카루젤 개선문, 늦은 오후에 기울어진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과 루브르 박물관을

오가는 사람들로 그 앞의 잔디밭은 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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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하늘이 찌뿌둥둥하다는 이야기를 넘 많이 들었지만, 요새 한국날씨에 비기자면 저 하늘이 부러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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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를리 정원의 녹색 '포장마차'들. 집 모양으로 빈틈없이 정돈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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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당신들을 찍으려던 건 아닌데. 더헙, 남자 손 어디 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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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이엿뉘이엿뉘엿뉘엿녓녓. 순식간에 황금빛 석양 너머로 숨어버리는 햇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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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어둑어둑하게 찍혀나온 사람들, 그리고 노랑빛과 검정빛으로 가득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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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혹은 야경을 보러 에펠탑에 오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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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 석양이 온통 잠식해버린 서쪽 하늘 말고 다른 쪽은 아직 낮의 느낌이 살아있다. 내 드림카였던 푸조307이

90년대 엑셀처럼 꼬리를 물고 달리던 파리의 차로. 더이상 드림카가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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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루젤 개선문을 다시금 일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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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마음이 흠뻑 담겼을 빨강장미꽃 한다발을 품고 가는 시크한 파리지앵 한 분의 긴 머리결에

살짝 설레어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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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를리 정원을 지키고 선 나신의 아가씨들에게로 눈을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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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 넘흐 늘씬하시다~♡ 다리가 무슨 고무고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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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등지고 서니 비로소 아이들이 알록달록 눈에 띄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때로 어떤 사원들은 다른 사원을 짓기 전 공법을 시험하고 디자인을 구현해 보기 위한 '시험판'의 역할을 맡게

되기도 하고, 임시로 다른 사원의 역할을 대행하기 위한 '가건물'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위한 큰 규모의 사원인 쁘리아 칸(캄보디아#13. 파괴된 듯 이어지는 사원의 명맥, 쁘리아 칸(Preah

Khan)
)을 세우기 전 그보다 작은 사이즈로 지었던 사원이 바로 따쏨이다.


아마도 그래서 중요성에서 많이 밀리기 때문일까, 사원 내부는 어찌 할 수 없이 드러나는 퇴락과 붕괴의 조짐을

억지로 막아놓는 안간힘의 뚜렷한 흔적들이 강렬하게 새겨져 있었다.

금세라도 비바람 한차례면 무너져 내릴 듯 기우뚱한 입구. 이미 돌덩이가 몇개씩 빠진 이빨처럼 듬성거린다.

입구 하나를 집어삼켜 버린 나무, 처음에 과연 어디에서부터 씨가 싹을 틔우고 가냘픈 연두빛 잎을 내밀었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나무 뿌리가 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 입구를 움켜쥔 채 땅 위로 끌어올린 느낌이기도 하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균열과 붕괴의 조짐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왜, 저렇게 지키고자 하는 걸까.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근대', 혹은 '현대'라고 규정짓고 시대구분을 하면서부터 본격화된 박물, 역사 박제화의 시도들.

그 이전까지는 무너지고 부서지면 그 뿐, 이렇게 처절하게 시간을 거역하려는 움직임이 없었다. (대체 지금이

'현대'라고 규정지어 버리고 나면, 백년이백년 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시대를 어떻게 규정지을까. 현대를

넘어서도 몇번은 넘어섰을 테니, 탈탈탈현대쯤? post-post-post-modernism? 늘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차라리 무너지고 사그라들도록 냅두는 것은 안 될까. 어쩌면 '인간이 왜 죽도록 냅둬서는 안 되는지'와 같은

도덕률과 당위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잔뜩 얽히고 섥힌 나무뿌리, 혹은 줄기. 어디서부터 줄기고 어디서부터 뿌리라 해야 할지. 차분하게 가부좌

틀고 앉아 수인을 맺고 있는 부처들의 자태가 고고하다.


 

이번 출장에서도 사진은 여지없이 찍었댔다. 두바이의 유명한 7성급호텔 버즈 알아랍,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아직 공사중인) 버즈 두바이 등등 두바이의 풍경들. 사우디 리야드의 밤거리, 드문드문 땡땡이치며

산책나갔던 시내 골목길에 쿠웨이트의 쇼핑몰까지. 왠지 사진을 올리려는 의욕이 안 생긴다. 물론 왠지 10월

내내 바빴고 바쁜 탓도 있겠지만.


작년에 이미 갔던 호텔에 고대로 묵는 사우디와 쿠웨이트는 사실 별 기대가 없었고, 이번 출장은 사실 오로지

이집트 카이로에 다시 간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 (드디어) 디카를 들고 간다는 것, 5년만에 피라밋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내 짧은 삶에서 뭔가 갈치 토막치듯 분기점을 나눠보라면

2004년 그때의 여행은 두세번째 순서쯤 되지 않을까 싶다. '먹고 살 고민' 따위, '먹고 살 궁리' 따위 '굴하지

않던' 철부지에서 '먹고 살 고민'씩이나 하는 철부지로 변신한 게.


마침 이집트에서 카메라를 누군가에게 빼앗겨서만은 아니었다. 현지인들과 함께 부대끼고 암내맡으며, 하루에

2리터들이 물병을 두개씩 마시며 마주했던 카이로의 거리들, 그리고 피라밋과는 너무 달랐다. 반듯한 정장에

(무거워서 고리가 휘어버린) 노트북 가방을 척 걸치고, 45인승 고속버스 차창 밖에서 넘쳐들어온 햇볕 한 줌에

아 뜨거라 하며 큰길로만 다녔다. 군자는 대로행이라던가. 흥. 카이로는, 길거리는 그대로였다. 사천년을

멀쩡했던 피라밋도 고작 오년만에 달라졌을리 없다. 내가 달라졌다.


그다지 맘에 썩 들지는 않았다. 출장과 여행의 차이일 수도, '먹고 살 고민' 따위의 유무 차이일 수도, 그저

2004년 8월과 2009년 10월의 온도 차였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단순히 눈높이의 차이였을지 모른다. 피라밋을

굽어보게 만드는 45인승 고속버스라니. 왠지 순례하듯 그곳을 우러렀던 과거의 내게 모멸감을 안겼던 걸지도
 
모른다. 피라밋은, 카이로는, 사람 사는 곳은 그렇게 건방지게 내려보며 점점이 둘러보는 게 아닌데. 굽어보아

미안해. 내려보아 미안해요, 라고, 날 완전한 이방인으로 격리시켜 버린 양철캔 안에서 외치고 싶었다.


얄쌍하고 길쭉하며 튼튼해 보이는 고속버스들이 피라밋 앞 주차장을 쉼없이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입구에서부터 한참을 걸으며 피라밋의 위용과 이질감에 숨막혀했던 바로 그 오르막길 역시, 버스의 탄탄한

모터는 잘도 부릉거리며 한숨에 정복해버렸다. 이건 강간이다. 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5분만에 피라밋

코앞까지 내달렸다가, 다시 5분만에 피라밋 세 기가 배경으로 쭈그러든 포스트로 내달려 사진을 남기고 휑하니

가버렸다. 왜이리 덥냐고, 왜이리 사람이 많냐고, 이집트 삐끼들 못살겠다고.


어떤 식의 여행이 되어야 한다, 는 건 아니다. 꼭 땀 삐질삐질 흘리고 빡세야 여행이란 것도 아니다. 그저 난,

내가 풍경과 풍경 사이에 이전에 밟았던 그 울퉁불퉁하고 냄새나고 미칠듯 덥던 길이 사라지고 순간이동하듯

뿅뽕 튀어나오는 풍경들만 남아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전희도 없이 덜컥 달려나간 꼴. 그런 식의 폭력적인

풍경의 소환. 그건 서로에게 상처일 뿐이지 않을까. 이미 닳고 닳아버린 이미지라 해도 좀더 조심스럽게,

세심하게 접근하면 조금은 더 신선하고 깊이 느낄 수 있을 텐데. 


그 야만스럽고 난폭한 고속버스의 행렬이 피라밋과 '관광지'로서의 카이로를 현지 사람들로부터 뺏어들고

희롱하는 것처럼 보여 수치스러웠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낙타에 오른 이집션들의 눈높이가 차창에

바싹 붙어앉은 내 눈높이와 같았다는 사실. 이 녀석들, 마리당 몸값이 일억원이라더니 몸값 제대로 하는구나.

왠지 거대 고속버스들이 지분거리며 들고 나는 피라밋 앞 주차장에서 이집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게 그

낙타들 같아서 안쓰럽고, 대견하고 그랬다.


다시 한번 가고 싶다. 45인승 삐까뻔쩍한 고속버스 말고, 소금기 얼룩진 티쪼가리 입고 시커멓게 그을린 채,

박박 기듯이 걸으며 걷고 뛰고, 그러고 싶다. 뭔가 거기서부터 나의 1984년과 1Q84년이 갈라져버렸다고 

느껴서인지도 모르겠다. 아님 그저 훼손되고 벗겨내어진 내 기억속 그 공간의 아우라를 다시 조심조심

덮어씌워주고 싶어서인지도. 어쩌면 그 모든 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와 같을지

모른다.




오설록 녹차박물관, 아침부터 대형관광버스로 꾸역꾸역 관광객들을 토해내는 걸 보니 확실히 여긴 뜬 곳이다.

그럴 만도 한 게 녹차를 사업적으로 재배해 보겠다고 나선 한 기업 오너의 열정과 의지로 나름의 성공을 구가하고

있는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다. 녹차라는 아이템을 세련되게 다듬고 새로운 상품을 고안해 내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녹차 문화도 좀더 본격화되었지 않나 싶다. 사실상 곡물차로 분류되어야 할 '현미녹차'가

고소해서 좋다던 입맛을 나름 다양하게 변화시켜 주었으니 말이다.

이 분이 바로 녹차 쪽으로 사업을 추진하라 명령을 내리신 분, 넓은 잔디밭에 서서 흡족하게 바라보는 쪽에는

꾸불꾸불 녹차밭이 웅숭그리고 있었다. 녹차밭 사진 한장 찍어줬어야 하는데, 아침부터 운전하느라 정신없어서 패스.

참...녹차박물관이라고 가서, 녹차밭도 아니고 풀떼기 잔디밭에 누군가 벗어놓고 간 꼬맹이 신발을 좋다고

찍고 있다. 개나리 노란 꽃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아기는 살짝 신벗어놓고 맨발로 살금살금

나들이갔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꼬까신 하~ 나아아~ 고무줄 하던 기억을 뻐끔 퍼올려준 신발.

고무줄 놀이 나름 적잖이 했었던가, 나..?

아침에 비가 살짝 와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비는 그쳤고, 운좋게도 공기 중의 O2가 물방울에 실컷 두들겨맞고선

훨씬 청량해졌다. 현미녹차 티백을 어느순간부터 안 먹게 된 입맛으로, 박물관 내에서 무료로 시음시켜주는

초록빛 일렁이는 세작 녹차 한잔 마시고 나왔다.




업, 근래 봤던 영화 중에 꽤나 인상 깊이 남았던 영화다. ([업] Adventure is ubiquitous.)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고집스런 사각턱 할아버지나 통통한 동양계 꼬맹이 말고, 저 커다랗고 길다란 새를 기억하는지?

아마도 영화 속에서 할아버지가 집을 날렸던 곳은 남미 어디메쯤이었던 듯 하지만, 사실 이 새는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짠~* (왠지 익숙한 이 단어, 짠~*) 똑같지 않은가, 강인하게 쭉 뻗은 긴 다리, 두껍고 강력해 보이는 부리, 전체적으로

타조와 비슷할 만큼 대형 몸집을 갖고 있으면서도 슬림하게 뻗어있는 허리와 둔부까지. 깃털까지 꼽아놓았다면 아마

더더욱 흡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알록달록 빛깔이 선명한 깃털들로. 아프리카박물관엔 이런 조각상이 아주 많다.

제주도 컨벤션 센터와 마주보고 있는 아프리카 박물관, '서아프리카 말리공화국에 소재한 젠네 대사원'을 토대로

설계하였다는 박물관의 외관이 실물을 보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 자극한다. 무려 세계 최대의 진흙건축물이랜다.

마당 한 켠에 분방하게 전시되어 있는 전통 가면들. 왠지 하늘로 손을 쭉쭉 뻗은 나무들조차 아프리카스럽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새의 조각상. 딱 보자마자, '업'에서 벌어지는 탐험의 중심에 있던

그 새가 너로구나, 반가웠다. "코뿔새 상"이랜다. 업에 나왔던 그 새의 이름을 이제야 알겠다. "코뿔새"다.

"코뿔새는 아프리카의 신화적 동물로 반투어로는 코몬도(Komondo)라고 불린다. 코몬도는 양성의 동물이며, 크기가 30m가 넘는다고 전해진다. 가뭄에 시달릴 때, 하늘에 비를 내려 주기도 하고 죽은자의 영혼을 사후세계로 인도하는 죽음의 사신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또한 나쁜 기운과 질병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아프리카 박물관 홈페이지 참조)

아프리카박물관은 기대 이상으로 볼 거리도 많았다. 애초에는 하루 세차례, 11:30. 14:30, 17:30에 열린다는 아프리카

전통 공연을 위주로 보고 나머지 소장품들은 설렁설렁 보면 보고 말면 말자는 식이었는데, 소장품들도 풍부하고

재미난 것들도 꽤나 많았다. 아, 이런 아프리카 전통의 S라인 조각상을 봤다고 그러는 건 아니다.

S라인이 제대로 안 살아나 각도를 바꿔 다시 한번(이라고 쓰고 실은 여러번, 이라 속으로 생각한다) 찍는 열의를

보이기는 했지만, 정말 이 조각상이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건 아니다. 단지 아프리카에도 이렇게 수준높은 몸매...

아니, 이렇게 수준높은 조각예술이 발달했었나, 이렇게 육감적인 표현이 가능했었나 신기했을 따름.


어쩌면 마치 우리가 고대의 유물을 두고 다산/순산을 기원했다느니 하는 설명을 아프리카 예술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도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들 나름의 미감과 미적 쾌감이 발전해 왔을 텐데, 그들은 고대인이 아니고 아프리카

역시 21세기의 아프리카 땅이란 측면을 넘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싶다.

유리창 너머 보존되는 조각상이라 사진이 안 나왔다. 눈으로 보면 무척이나 섬뜩하고 강렬한 조각상인데.

해서 아프리카박물관 홈피에서 업어온 그림 첨부.
콩고의 주술사가, 부족의 룰을 어긴 사람을 선별해서 벌을 줄 때 사용한 조각상이라 한다. 온통 쇠못이 고슴도치처럼

박혀서는, 냉막한 표정으로 날카로운 송곳을 집어들고 있는 게 처키보다 섬뜩하다. 어찌 보면 단순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었던 상처, 아픔을 눈에 보이게 하는 게, 치유를 위한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저 살벌한 못들처럼.

주술사가 해결할 사건 수가 늘어갈수록 쇠못도 하나씩 늘겠지만, 그래도 사람이 살면서 타인에게 박아넣는 못들보단

훨씬 적은 수일 거다. 만약 그게 저 못들처럼 대가리를 삐죽대며 몸에 박힌 게 보인다면. 으..

신기하게도, '용'이란 존재를 불러내는 상상력은 만국 공통인 듯 싶다. 서양의 용, 동양의 용, 그리고 아프리카의 용.

아프리카의 용은 왠지 짧막하고 가분수인 게, 귀엽다. 이 녀석 어쩜 거대용의 아바타일지도.

시간 맞춰 들어선 지하의 공연장. 자그마한 공연장이지만 사람이 꽉 찬 게 더 놀랍다. 아프리카박물관을 강추하는

온갖 블로그나 까페, 구전의 효과란 말인가. 나 역시 그 구전에 기꺼이 합류하기로 맘먹고 블로그 중이지만.

세네갈에서 왔다는 공연팀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도 열정적인 댄스와 노래-랄까 격한 허밍이랄까-를 선보였던

아리따운 검은 아가씨. 반질하고 매끈한 피부가 꼭 새까맣고 단단한 흑단목을 연상케 했다.

북을 치는 아저씨 둘은, 박자를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깨고 잇고, 굉장히 멋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수준높고 열정적인 공연이라니. 물론 그 와중에도 뽁뽁이 신발신고 뒤에서 뛰어다니는 아가의 부모는

어디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조금 더 큰 아이들은 아무런 제재나 부모의 관리없이 통로를 방황하고 있었지만.

꼭 '국립문화원'이니 '예술의 전당'이니, 돈쳐바른 곳에서만 조용히 예의를 지켜야 하는 건 아니란 말이다.

이제 둘러보고 나가는 길, 코뿔소 새의 휘영청 만곡한 부리가 너무 멋지다. 죽음의 사신이지 수호신이라는 신화적

존재, 코뿔소 새. 근데, 머리 위의 갈기털은..누가 파마를 시켜놓은 건가.

아프리카 박물관의 센스는, 화장실 표지에서도 빛을 발했다. 이런 자그마한 것 하나에서도 그 공간의 이미지와

특성을 드러낼 수 있을 만큼의 섬세함이 난 좋다.

기념품점에서 맞닥뜨린 No.5 던가.(일본만화 '원피스'를 보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알 듯.ㅋㅋ) 기린기린열매를 먹은

그가 열심히 단련하여 네모반듯한 기린 전사가 되는 눈물없인 볼 수 없는 감동의 대 서사시. 딱 그녀석이 생각났다.

왠지 우울한 표정의 원숭이, 조삼모사에 낚인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호랑이는 왠지 입에다가 타이거마스크를

하고 있는 느낌이고, 또다시 등장한 기린은 아직 완성체가 되기 이전의 모습.

티켓 값이 그다지 싼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주도의  지원으로 10% 할인이 적용된다고 한다. 참고로 아침일찍

갔다가 허탕쳤음을 호소해도 추가 할인은 없다.









2층 드농관

'사모트라케의 니케'. 이 천사는 땅위에 막 내려앉은 걸까, 아니면 막 떠나려는 걸까. 헬레니즘 조각 중 손꼽히는 걸작이라는 이 조각상은 명성에 맞게 독보적인 위치를 점유하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밀로의 비너스 역시 넉넉한 공간을 확보한 채 독보적으로 우뚝 선 채 사람들에 포위당해 있었는데, 마찬가지다.

피사체로서 니케상과 적당한 거리를 격한 채 둥그렇게 포위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카메라로 기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살짝 든 생각..니케의 조각상이나 밀로의 비너스 모두, 그 오랜 명성에서 기인한 후광효과라거나, 혹은 전시 방식에 따른 효과, 그리고 정말 미적으로 작품 자체에서 우러나는 효과를 구분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이미 일련의 회로를 따라 미적감각이 유인되고 승인되고, 또 어떠한 감동을 느껴야 할지도 정형화되어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삐딱한 딴지를 걸고 싶었다. 과거의 가치를 전승하고 위계를 공고히 하는 박물관의 디스플레이 기법, 혹은 필연적인 보수성.

이런 식으로 해 보면 어떨까. 다른 유물들, 예술품들과 차별화되지 않는 식으로 함께 전시된다거나 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명작으로서의 명성을 갱신하고 가치를 재평가받을 수 있도록 해 보는 거다. 사람들이 단순히 '걸작'이니까 아름답다라거나 뛰어나다라는 식으로 사고하지 않도록. 스스로 그걸 발견해 내고 다른 점을 느낄 수 있도록.

물론 이 작품이 다른 것들에 비해 달라보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별히 섬세하고도 자연스러운 저 옷자락의 율동감이라거나,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아름다운 몸을 가진 인간을 고대로 대리석으로 굳혀 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인체의 비례라거나, 무엇보다 당장이라도 어디로 떠나거나 혹은 막 어디로부터 떠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그 생생함. 힘있게 쭉쭉 뻗는 날개 역시 상상력의 소산이라기엔 너무도 그럴 듯 하게 리얼한데다가 묘한 느낌을 던진다.

사람들이 지쳐 간다. 사실 루브르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은 역시 2층 드농관에 있는 모나리자 등 회화와 3층 리슐리외, 쉴리관에 있는 프랑스 회화들일 텐데, 이들은 무엇을 보며 여기까지 와서 널부러진 걸까. 나 역시도 저기 한 구석에 앉아서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이 점차 뭉글뭉글 부풀고 있었지만 어차피 빈자리도 없다.

제리코가 그린 '메뒤즈호의 뗏목'같은 회화 대작들을 보며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어나가다 보니 일종의 '정체 구간'에 들어섰다는 걸 느꼈다. 모나리자가 앞에 있다.

모나리자가 그다지 크지 않은 그림이란 건 알았지만, 저렇게 작은 그림인 줄은 몰랐다. 세로 77cm, 가로 53cm. 온통 모나리자를 위해 열린 공간에 사람들이 그득그득 몰려 있었다. 한걸음씩, 서둘지 않고 내딛으며 모나리자에게 눈싸움을 걸었다.

사람들을 뚫고 맨 앞까지 나아가 한참동안 요모조모 찬찬히 살폈다. 눈, 입술, 얼굴, 손, 좌우 높이가 살짝 다르다는 배경..뭔가 안개가 스멀스멀 신기한 느낌을 자아내는 기법 탓이라곤 하지만, 역시 신비로운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주위에 웅성웅성대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없다면, 좀더 깊이 그 느낌에 젖어들 수 있을 텐데 아쉽다.

그치만 굳이 내가 파리에서 봤던 것 중 가장 멋졌던 예술작품을 꼽으라면..역시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중인 모네의 '수련' 연작. ([파리여행] 빛과 바람, 시간에 희롱당하는 수련..오랑주리 미술관.)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의 기법도 신묘하긴 하고, 모델이 된 그녀/그의 웃음도 신비롭긴 하지만, 그냥 난 수련이 더 맘에 들었다.

이런 그림도 인상적이었다. 촛불 시위때 등장했던 '유모차 부대'의 어머니들의 이미지도 왠지 오버랩되었고-맥락이 동일하진 않고 역할 역시 다르다지만-, 가운데 여성의 단호하고 결연한 표정이 가슴을 흔들었다.

그런가 하면 이런 평화롭고도 달콤한 풍경..화환을 만들어 자신의 허벅지를 베개삼아 기대 쉬고 있는 아가씨에게 씌워주려는 남자. 여성의 분홍빛 뺨과 발뒤꿈치가 앙증맞다.

레오나르도의 또다른 그림, '두 명의 성녀와 아기 예수'.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년의 기억"이라는 논문에서 이 그림이 그의 성적인 배경이라거나 어릴 적의 기억, 보다 정확히는 어머니에 대한 금기된 욕망을 해소하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이 그림에서 발견된 '독수리'의 형체가 레오나르도가 종종 사로잡혔던 '독수리'의 환상이 반영된 것이라 말하며 이런저런 성적 욕망으로 읽어내는데, 저 그림 속 파란 옷자락이 바로 그 형체라 한다.
한참동안 그림 앞에 앉아 대체 어디에 독수리가 있는지 찾고 있을 때, 마침 옆에서도 유럽인 커플도 그 이야기를 하며 새를 찾고 있었다. 그들도 프로이트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그 새를 찾아내려 하고 있었던 게다. 우리는 한동안 대체 새가 어디에 있을지, 머리가 어디고 꼬리가 어딘지 뚫어져라 그림을 바라보았었지만 결국 그들은 포기하고 모나리자에게 가버렸댔다. 난, 내가 찾은 저게 아닐까 싶은데..모르겠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어귀에서 바라본 루브르 궁전. 그 중에서도 팔레루아얄 뮤제 드 루브르 메트로 역과 인접한 리슐리외관. 사람드이 이제 조금씩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다들 저녁을 먹으러 가거나, 다른 곳에 가서 파리의 야경을 감상할 생각이겠지. 난 이제 9시쯤까지만 3층 회화를 둘러보면 되니, 한결 여유로워졌다.

멀리 보이는 카루젤 개선문의 연한 핑크빛 대리석이 단정하고 따스한 느낌이다. 그림자가 잔뜩 길어진 저녁무렵.

3층 쉴리관

앗..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랬다. 이건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집에 있던 도록에 포함되어 있던 그림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누나 또래라 생각하며 감상했었고, 조금 크고는 비슷한 나이대라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예기치 못하게 다시 만난 그녀는 이제 여동생이겠다 싶다. 하아....예술의 불멸성이란. (여전히 이 작품의 이름과 작가 명은 모르고 있다.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시길..ㅡㅡ;)

정말 발을 질질 끄는 수준이 되어 가고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을 걷기 시작한 지 거의 8시간여..4층의 회화 중에는 익히 알고 있는 것들도 많았고,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대작들도 많았지만 카메라를 들이댈 기력이 쇠해가고 있었다. 사실 속으로는 얼른 다 보고 나가서 좀 쉬자, 란 느낌도 없지 않았고, 또 한켠으로는 좀만 더 버티고 여유롭게 보자..언제 또 루브르 오겠냐..란 오기도 있었고.

그 중 이 그림은 지친 발을 좀 오래 쉬게 할 만한 유인이 되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초상', 파스텔로 그려진 그림이라 그런지 색채가 부드러우면서 풍요한 느낌이 들고, 또 그러면서도 무지 세밀하고 섬세한 묘사를 해냈다는 점에서 경이롭기까지 했다. 모델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루이 15세의 애첩이었고,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그녀는 당시 사교계의 여왕이었다고 한다. 그랬을 거 같다.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잃지 않았고, 정숙해 보이는 듯 하지만 일변해 요부스러움을 과시할 만큼 충분히 유연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표정이다.(딱 내 이상형이다..ㅡㅡㆀ)

3층 리슐리외관에서는 루벤스의 대작들도 감상하며 파트라슈와 네로를 생각했고, 다른 고전파 화가들의 회화를 둘러보았다. 약간의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았지만 역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을 보려면 오르세 미술관을 가야 한다는 말이 맞지 싶었다. 그리고 난 이제 절뚝거리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보니 심각할 정도의 악취와 함께 거대한 물집이 생겨 있었다.

뭐...저렇게 아름다운 루브르 궁전의 야경을 앞에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 싶다.

이제 박물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고, 시간도 거의 9시에 육박해 가던 시간에 난 루브르 박물관 10시간 산책 대장정을 마칠 수 있었다. 아직 문이 닫히기 전까지 시간은 좀 남았고, 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작품들을 다시 한번 찾아가 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으레 전시회 같은 곳에 가면 내가 취하는 코스가 그렇기도 하다. 우선 한번 쭈욱 둘러보고, 그다음엔 맘에 들었던 작품 몇 개를 찾아가 다시 한번 감상하는 것.

3층에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을 다시 만나고, 루벤스의 그림들을 다시 보고, 2층으로 내려오며 니케를 다시 만났다. 조금 사람이 적지 않을까 해서 모나리자를 만나러 갔더니 거긴 암만해도 나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빠질 생각이 없나 보다. 여전히 시끄럽고 웅성웅성 소리가 울려서 잠시 후에 나왔다. 소란스러움을 피해 제리코의 '메뒤즈호의 뗏목',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식', '나폴레옹 1세의 제관' 같은 것들을 다시 둘러보던 중, 박물관의 폐문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

9시 반 루브르 OUT. 정말 지쳤다.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발에서 은은하게 떨림이 느껴질 정도였다.

바람은 소슬한데 루브르의 야경은 왠지 눈물겹도록 따스해서, 왠지 미친듯이 센치해져서 순간 마음의 갈피를 잃었다. 방금까지 내가 있었던 그 공간의 넘치도록 풍요한 감성과 자극들이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배가 차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없이 노틀담을 향해 걷다가 예술의 다리를 지나게 되었다. 사람들이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노는 걸 보고 있자니, 왠지 배도 고프고 가슴도 고프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완전 한국의 가을 날씨였고, 루브르를 나서며 순간 난 '가을'을 탔던 것 같다.





1층 리슐리외관

이 영악스럽고 장난기 넘치는, 그렇지만 뭐든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 그야말로 사랑의 신이 가져야 할 법한 눈빛이다. 날개달린 어린 아이로 표현되어 어머니 아프로디테의 근방을 맴도는 사랑의 신, 큐피트는 수많은 그림과 조각에서 묘사되고 있지만 그 중에서 내 맘이 쏙 드는 표정이다. 아이처럼 여리고 부드럽고, 순수한 몸이지만 그 눈빛과 입가의 웃음은 왠지 조금 악마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조용히 하라며 오른손가락을 입술에 대곤, 왼손으로 슬몃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아드는 순간. 큐피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빛으로, 혹은 뭔가 재미있는 일을 잔뜩 기대하는 장난꾸러기의 표정으로 '사냥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신화의 어느 대목인 걸까. 뭐...뒷켠에서는 옷을 벗고 있는, 혹은 입고 있는 여성의 조각상도 보이고, 이 남성을 보면 '크기'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온통 세계 최고, 최대를 지향하고 선전하기에 바쁜 못난 사람들도 좀 맘의 안식을 찾으려나.

2층 리슐리외관

리슐리외관 2층에는 나폴레옹 3세의 살롱과 회랑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마도 나폴레옹 3세가 궁전으로 썼던 리슐리외관을 1993년에 미술관으로 바꾸면서 옛모습 그대로 남겨놓은 공간인 듯 싶다. 이런 화려한 '프랑스식' 궁전은 이미 터키에서, 또 태국에서도 봤던 거지만, 그 오리지널 버전인 거다.

샹들리에에서 노랗게 빛나는 불빛, 그 아래 반사광을 번뜩이며 가지런히 정렬된 소품들과 의자들. 원래는 이렇게 거무죽죽하게 죽은 색감이 아니었는데 아쉽다.

신기하게 생긴 의자. 세명이서 서로 뒷사람 등을 슬쩍 바라보며 앉아있을 수 있는 소용돌이식 의자라니, 서로 대화하기는 쉽지 않겠다. 셋다 목을 오른쪽으로 살짝씩 틀면 어쩜 셋이 마주보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으려나. 실제 앉아보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자라났지만, 이녀석과 나 사이에는 출입을 금지하는 바가 설치되어 있어서 포기.

이런 색감인 거다. 화려하게 발색한 자줏빛 벨벳에, 황금빛이 은은하게 머금어져 있는 밝고도 따뜻한, 사치스럽지만 우아한 분위기.

비록 샹들리에에 꼽힌 초들이 전구꼽힌 짝퉁이라 해도, 그래서 바람에 펄럭이며 살아있는 듯 너울지는 불빛과 그림자의 신비로움을 머금고 있지는 못하다 해도, 온통 돋을새김된 조각들과 무늬들은 그 빛을 당당하게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살아있는 촛불과 달리 이렇게 멈춰지고 굳어져 버린 느낌의 전기불빛이 비춰진다는 건, 생활의 영역에서 떨어져나와 유리관 안에서 '보존'되는 박물관에 딱 어울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림과 조각으로 디테일한 공간마저 가득 채운 궁전.

2층의 리슐리외관이 끝나갈 무렵, 어느 방에 내려뜨려져 있던 본격 전기불빛 샹들리에. 만월들이 둥실둥실 떠있는 느낌.

2층 리슐리외관에 있던 자그마한 카페. 유리 피라밋 너머 드농관이 보인다. 애초 1980년대에 유리 피라밋의 건설을 둘러싸고 격렬한 찬반토론을 불러일으켰다지만, 결국 루브르 궁전과 유리 피라밋의 안 어울릴 것 같던 조합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여기서 눈여겨야 할 것은 '결국' 끝이 좋지 않냐..라는 게 아니라, 그 건설을 둘러싸고 진행될 수 있었던 질긴 찬반토론, 혹자는 그 소란스러움과 유난스러움이 싫다고 할 지 몰라도.

작동을 멈춘 분수대 옆에서 서로 기댄 한 커플도 키스 상태로 멈춰 있었다. 오랫동안.

2층 쉴리관

대체 이집트인들은 얼마나 많은 유물을 남기고 있는 걸까. 이 곳의 있는 이집트 유물들도 카이로 박물관 못지 않게 많다. 물론 박물관 내에다가 디스플레이 따위 상관없이 빼곡히 좌판처럼 바닥에 벌려놓은 거기만 하겠냐만, 보면서 놀라게 된다.

관 안에 모셔진 망자가 여전히 밖의 세상을 지켜볼 수 있도록, 자신의 안녕을 도모할 수 있도록 관 외부에 그려진 두 개의 눈동자. 이집트에 가서 만들어온 반지에 있는 '호루스의 눈', 바로 그거다. (이집트 상형문자가 아로새겨진 '절대반지'.)

아네모피스 4세, 아케나톤의 거대했을 인물상이 일부만 남았다. 다소 그로테스크하게도, 뒷머리 부분이 예리하게 떨어져나갔다. 표정이며 풍채가 뭔가 범상치 않다는 느낌을 한웅큼 안겨 주지만, 뱀처럼 길게 찢어진 눈에 뾰족함이 강조된 턱이 그다지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니다.

이집트 미술이 전시된 공간을 허위허위, 그렇지만 쉼없이 내딛다가 여기서 비로소 한번 멈췄던 듯 하다. 저런 색감의 조각은 이집트에서도 못 봤었다. 무지 현대적이란 느낌을 주는 색감이면서 눈에 탁 띌만큼 청량한 색이라고 생각했다. 온통 칙칙하고 퇴락한 색만 드문드문 발려있던 유물들 사이에서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2층 드농관

2층 드농관에서는 이탈리아, 에스파냐, 영국의 회화 및 19세기 프랑스 회화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워낙 유명한 대작들이 많아 루브르에서 가장 혼잡하다고 이야기되는 곳이기도 하단다. 그 곳에서 문득 내 눈에 들어왔던 회화가 한 점 있었다. 투구를 차려입은 신에게 알몸으로 달려가 뭔가를 호소하는 듯 간절한 여인. 그리고 그 뒤에 백발성성한 노인은 보디빌더처럼 근육이 잘 새겨진 몸뚱이를 갈색 날개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다.

이건...무슨 제스쳐지...? 님좀짱인듯? 니가 짱 먹어라? 이 무렵의 그림은 문자나 텍스트, 혹은 이야기를 직접 그림 속에 풀어넣었다고는 하지만, 저 번쩍 치켜든 엄지손가락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앞쪽에서 갑자기 출현한 일군의 관광객들이 무시무시하게도 거침없는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별로 반갑지도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아는 척 하고 싶지도 않아서 잠시 조용히 창밖의 프랑스 정원을 내다보며 앉아 쉬었다. 중간중간 앉아서 쉴 만한 곳들을 많이도 만들어놨다. 6시간쯤 넘게 계속해서 걷고 있던 상황이어서, 한번 앉으니 발가락들이 아우성친다.

저녁도 먹어야 할 텐데, 일단 2층까지 다 돌고 내려가서 카루젤 개선문 옆의 PAUL에서 빵이랑 에스프레소로 때우기로 했다. 따져보니 대략 예정대로 잘 오고 있다. 딱히 주마간산 격으로 대충 봤다는 느낌도 없고, 인상적이었던 작품 앞에서는 한참을 빙빙 돌며 구경도 하고, 잠시 앉아서 바라보기도 했다. 물론 10분 이상 앉아서 쉰 적은 없으니 발이 완전히 욱신거리며 어딘가 물집이 잡혔노라고 항변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만족스럽다.

그리고 일어났더니, 발이 약간 질질 끌리는 느낌이긴 하다..

기다란 회랑, 그리고 천장과 벽면을 모두 모자이크하듯 가득 채우고 있는 커다란 회화들과 그림들 간의 구획을 지어주듯 구불구불거리며 온통 휘감고 있는 황금빛 장식들. 한 6시간쯤 계속해서 보다보니 이제 살짝 무감각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지만, 뭐 멋진 건 멋진 거다.

루이 15세가 대관식 때 썼던 왕관이라고 한다. 물론 왕관을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루비 같은 호사스런 보석들로 충분히 반짝거리기는 했지만 뭔가 아쉬웠다. 뭘까 생각해 보니 그런 거다. 왕관만 덩그마니 있으니 좀 부족해 보이는 거다. 그 화려한 복식과 다른 장신구들, 왕홀 같은 것들이 함께 하지 않아서야 역시 좀 볼품이 떨어진다.





루브르 박물관에 입장하려는 관광객들이 하도 많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던 터였지만, 막상 오전 11시 반쯤 도착한 루브르 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적었다. 다만 입장권 구매 창구를 몇 개 닫아놓은 데다가 느긋하기만 한 매표원들의 행동에 마음이 조금 답답했을 뿐이었다. 9유로의 입장권, 그리고 최근에 대한항공이 협찬하여 생긴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 대여에는 5유로. 그냥 입장권만 구매했다.

# 루브르 박물관 "열시간 산책 대장정" 전략.

반지층 쉴리관

이곳부터 시작했다. 루브르 궁전의 역사적 변천 모습을 살필 수 있는 전시물들이었다.

루브르 궁전의 원래 모습은 내성, 외성에 해자까지 파여있는 요새 모양의 성이었다고 한다. 윗 사진이 바로 그 때의 모습을 추정 복원한 것일 텐데, 작은 창문에 폐쇄적인 성곽 형태가 아주 단단해 보인다. 공사 중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는 이런 옛 자취들, 지금의 모습과는 영 딴판인 이런 모습을 보면 이곳도 꾸준히 전란이 이어졌고, 짓고 허물고 다시 짓고 허물어졌던 그런 땅이구나 싶다.

이 동서 1km에 이르는 거대하고도 우아한 궁전의 지하에서 발견된 과거 성벽의 유적들. 루브르 궁전, 아니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발견한 유물은 그래서 바로 루브르의 옛 모습이었다.

반지층 리슐리외관

이어진 길을 따라 리슐리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닥쳤다. 반지층이라곤 하지만 평탄한 하나의 공간을 쓰는 게 아니라 반층 높이만한 계단도 있고 해서, 길을 어찌어찌 좇다가 보면 어느새 리슐리외관 1, 2층까지 오르내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완전히 루트가 엉망이 되겠다 싶어서, 차분히 다시 바닥부터 훑기로 했다. 급하게 할 건 없고 아까부터 눈을 끌던 조각들이 보이던 탓이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건 내가, 혹은 상대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포즈로 서있는 사진을 찍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렇게 서로 마주보며 공이나 창이라도 던졌는지, 뭔가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는 이 두 조각상 사이에 내가 서 있다 상상하며 사진을 남겼다.

리슐리외관 천장, 그니까 루브르 박물관(혹은 궁전)의 천장은 일부 저런 식으로 자연채광을 위해 뚫려 있었다. 컴컴하던 쉴리관의 중세 루브르 유적과는 달리 화사한 햇살 아래 유백색 대리석 조각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광경은 역시 루트 따위, 9시간 주파 의지 따위 잊어버리게 만든다.

이 청동조각은 아마도 큰 뱀을 잡아죽이는 헤라클레스? 제목을 유념해서 살피긴 했는데, 그걸 다 기억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이녀석은 저 뱀의 생생한 피부질감의 묘사라거나 눈알의 섬뜩함, 그리고 다른 박물관에서 보던 여느 대리석상들의 남근이 대개 애매하게 뭉개져 있는 것과는 달리 당당했어서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곳의 대리석상들은 상당수가 제대로 된 남근을 소지하고 있었던 게 눈에 띄었다.

'크로톤의 밀론'이란 작품이랜다. 작가는 피에르 퓌제. 관람 안내문에도 표기된 작품인 걸 보면 뭔가 대단한 작품인가 본데, 내가 굳이 이걸 사진으로 남긴 건 왠지 우스꽝스러워서였다. 엄마~아, 엄마~아, 엉덩이가 뜨거워.

반지층 드농관

유리 피라밋을 중심으로 하여 세개의 건물동이 피라밋의 세 모서리를 바라보고 선 형태다. 매표소는 바로 그 유리 피라밋 아래에 있는데, 일단 티켓을 사고 나면 당일에는 몇 번이던 들락날락할 수 있다. 리슐리외관과 마주본 드농관으로 가기 위해 리슐리외관 출구로 일단 나와 매표소를 지나 드농관 입구로 들어갔다.
'성 막달라 마리아, 16세기 에르하르트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교 관련 예술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거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것일 텐데, 게다가 그녀의 성스러움과 고귀함, 거룩함을 드러내고자 노력하는 게 상례라는 점에서 이건 특이하다 싶었다.

'거리의 여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라니. 게다가 저 새침하고 도도한 표정과 몸에 배인 듯 자연스러운 유혹적이고 도발적인 자태, 탐스럽고 구불구불한 긴 머리가 그녀의 벗은 가슴을 지나 음부에까지 교묘히 가려진다. 이뻐서 한참 이리저리 뜯어보았더니 살짝 우울해하는 듯한 그녀가 숨어있었다.

11-15세기 이탈리아 및 스페인 조각이 전시된 이 부근 공간에는 온통 그리스도교 관련 유물들이었다. 십자가상에, 피에타상에..처녀 혹은 아주머니와 아기 하나. 그 소재로 수세기 동안 무궁하리만치 다양한 표정과 구도, 자세를 표현하고 있었달까. 이 '성 막달라 마리아'만큼 인간적인 표정과 분위기가 어린 것 없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청순, 요염, 새침, 푸근, 센치한 '여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 이제 반지하층에서 1층의 드농관으로 올라가는 길. 계단 어디메쯤에 있는 궁전의 장식품이던가, 아님 반지하층의 전시품 중 하나던가, 흉상이 루브르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긴 이 건물 안의 모든 것들은, 한때 궁전의 장식품이었던 것들을 포함해 모두 박물관의 전시품 아니겠는가. 이곳은 약 30만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 3대 박물관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궁전에 미술관이 처음 생긴 건 프랑스 대혁명기인 1793년, 왕실이 수집한 미술품들이 왕가만을 위한 소장품이라는 비판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폭넓은 공감대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비판이지 않을까. 그때의 혁명적 의식과 기풍이란.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왕'이 있었기에 왕의 목을 베었지만, 만약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이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대통령의 목을 베어냈을 거다.

1층 드농관

뭐더라..저 여자는 아마 월계수가 되고 남자는 그 월계잎으로 승자의 관을 씌워주는 아폴로였을 거다. 아폴로가 큐피드에게 잘난 척하다가 그의 화살을 맞고 저 강의 신 따님이신 여자를 죽도록 스토킹하게 되고, 그녀는 또한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무작정 피한다는 슬픈 어긋남의 이야기. 그녀는 싫다 하고, 그는 좋아한다 한다.(그렇다고 보기엔 남자의 눈빛이 열에 들뜨다 못해 잡아먹을 듯이 사나워져 버렸다. 욕정의 개입일까.)

그리스로마 신화란 게 생각해 보면 죄다 유괴, 강간, 치정에 의한 살인사건..그런 거다. 그만큼 원초적이고 원형적인 날것의 이야기란 뜻일까. 에로스만 과잉확대시킨 에로스박물관이나 섹스샵이 아니라, 이런 감정을 담아낸 예술작품에서 더 제대로 에로스를 느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신의 키스로 소생된 프시케'란다. 카노바의 작품. 유백색 대리석의 매끈함과 찰진 느낌이 그대로 프시케라는 여인과 천사의 몸으로 이어진다. 저 절묘한 자세하며, 그럼에도 흐트러짐없는 인체의 비율이나 자연스러움하며.

하아..그냥 딱 보면, 딱 이뿌다. 아름답다는 표현이 오바스럽지 않을 만큼.

그리스의 신들을 나타내기 위한 표징으로, 대리석상에는 뭔가 그들의 스토리 중 한 장면이 연출되거나, 양손에 상징물을 쥐고 있거나 한다고 한다. 부엉이를 쥐고 있는 이 신은 그렇다면 아테네, 미네르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 무렵에야 날갯짓을 한다. 그치만 저 부엉이는 왜 저렇게 (귀엽긴 하지만) 엉성하게 조각된 느낌이 드는지. 동그란 원통형 몸에다 날개 두개 대충 만들어 꽂아넣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내려보고 있는 여신의 저 퉁명스럽고 냉소적인 눈빛. 미네르바를 잡아넣은 그들의 눈빛이고 그들의 움켜쥠처럼 느껴지는 건 과잉한 반응인 걸까.

1층 드농관에서 쉴리관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던 화려한 회랑. 천장화에 나온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감별하며 걷자니 어질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식의 무늬와 조각이 지금 생활에서 쓰여진 곳을 찾으라면 아마 뭔가 촌스럽게 키치화된 사진 액자나 그림 액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거 같다. 그렇지만 회랑의 천장부는 황금색의 현란함과 빼곡하게 채워진 문양들, 조각들에도 불구하고 과하다라거나 천박하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물론 그건 이 건물 자체가 이런 화려함과 과한 문양들로 그득한 일종의 '테마 파크'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1층 쉴리관

이건 뭔지 한눈에 알 거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렇지만 정작 실물은 처음 보는 '밀로의 비너스'. 뭐랄까, 초등학교 때 첫사랑을 나이 서른에 만난 느낌이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반가우면서도 낯설고 어색하고, 내가 알던 그사람이 이사람 맞는지 싶기도 하고, 그런 느낌이었다.

역시 난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밀로'는 그녀가 발견된 지역의 이름, '비너스'라곤 하지만 사실 그녀의 양손이 부러져 있어서 특징을 밝혀줄 징표가 사라진 탓에 정체는 불확실하단다. 손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었을지, 그렇게 그녀는 어떤 포즈를 결국 취하고 있었던 건지, 살짝 주춤한 골반과 모델의 워킹인 듯 율동감이 느껴지는 두 발의 실루엣..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내 상상 속에서보다는 훨씬 남성스럽고 강인해 보였다. 너무나도 선명하게 오똑한 코는 살짝 무서워 보이기까지 했고, 다소 심술스럽게 앙다문 입술이나 이마의 생김이란 건 왠지 '이터널 선샤인'쯤의 케이트 윈슬렛을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그늘이 지면 식스팩이 살짝 비치는 저 배는 대체...남성의 배라고 해도 믿겠다.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 유물. 봉긋한 배와 다소 도식적이지만 끝이 돌돌 말린 머리모양에서 여성스러움이 묻어난다. 물론 좀 딱딱하고 엉성한 신체 묘사는 비너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왠지 비너스의 몸은 (이뿌지만) 거구의 여전사나 남성의 몸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서 더욱 대비되는 듯 하다.

이곳의 유물들은 역시 카이로 박물관, 혹은 룩소의 '왕의 무덤'이나 '귀족의 무덤'群을 따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볍게 돌아보곤 빠져나왔다.

고대 이란의 '아파다나 궁의 기둥머리'랜다. 이런 기둥머리가 수십개가 열을 짓고 늘어서 건물을 받치고 있었을 텐데, 그 규모가 얼마나 웅장했을지 모르겠다. 아마 거대한 기둥들이 백 몇개씩 빼곡히 늘어서 있던 이집트 룩소르사원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1층 리슐리외관

1층 쉴리관에서 리슐리외관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창밖으로 내다본 루브르의 프랑스식 정원. 깍듯이 정돈된 초록빛 덤불이 구획을 짓고 있는 사각 공간 정원이란 건 루브르 궁전의 반듯한 외양과 잘 어울린다.

메소포타미아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에서 철푸덕 주저앉아 스케치 연습을 하고 있는 프랑스의 아이들. 이런 광경은 사실 어느 미술관에서나, 어느 박물관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장면이었다. 아이들도 이런 식의 체험학습(이랄까)을 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에 익숙해 보였고, 비록 잘 그리진 못해도 뭔가 펜으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이건 아시리아 제국의 사르곤 2세 궁전의 일부를 아예 통째로 복원해 놓은 전시관이었다. 궁전의 입구 한 면을 장식하는 유물들을 원래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드문드문 배치해 놓았고, 무엇보다 입구 양옆에 버티고 선 이 반인반마의 괴수 두 마리의 위압감이 대단했다. 잘못하면 저 뾰족하고 단단해 보이는 발굽으로 뻥, 하고 걷어차일 듯한 압박감.



어제는 연휴 마지막날이자 내생일이었어서, 뭘 할까 생각하다가 며칠전부터 맘에 담아두었던 사진전을 보러가기로

했다. 혼자 유유히 전시회 보러다니는 걸 함께 보러다니는 것 만큼이나 좋아함에도 한동안 혼자 뭘 보러 갔던 적이

없었단 걸 문득 깨닫고,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처럼 서울역사로 향했다.
번듯한 서울역사의 높다란 계단위에서 바라본 옛 서울역사는 커다랗고 밋밋한 건물들 사이에서 위축되어 보였다.

낡고 닳아보이는 담갈색의 벽과 청회색의 지붕에서 풍기는 고즈넉하고 부드러운 느낌은 차갑고 깍쟁이같아 보이는

유리와 철의 배합인 서울역사에 비기자면, 못나고 수더분한 시골아지매같다. 서울역사에 갓 상경한 할머니같은.

서울역에서 지하철을 내려 거리로 올라설 때면 늘 뭔가 당혹스러움과 낯섬이 포함된, 묘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한쪽에선 으레 종교를 선전하는 악다구니가 들리고, 이공간의 분위기에 녹아들지 않는 타인들이 돋을새김처럼

눈을 어지럽히며, 겨울임에도 코를 찡하게 파고드는 노숙자들의 노골적인 냄새. 게다가 대개 이곳에선 성난

사람들이 파도처럼 넘실대며 사기를 북돋우는 장면을 마주하길 기대했었고, 나 역시 그런 열기를 품고 오곤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적 284호. 옛 서울역사는 사적 284호였다. 둘레를 온통 칭칭 감고 있는 저 출입금지의 팻말이 어디서 끊겨있을까.

아마 그곳이 이 안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에 입장하기 위한 입구일 테다.

마치 폴리스라인처럼 둘러쳐진 출입금지선 너머엔 비둘기들만 유유히 주인인 양 뽐내며 걷고 있다. 그 위에서부터

운치있게 나려드는 아치형의 기둥, 달랑 내려뜨려진 조명등이 작동은 할까, 문득 궁금했다.

옛 서울역사의 야트막한 2층 건물은 꽤나 넓은 양지바른 공간을 노숙자들에게 許하고 있었다.

건물이 높아지면 그늘도 길고 짙어진다. 바랜 갈색잎을 잔뜩 달고 섰는 나무를 살짝 굽어보는 퇴락한 역사.

빙 둘러쳐져 있는 출입금지 폴리스라인에 난 균열을 발견했다. 2008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언뜻 보면 잘 알아채기

어렵겠다 싶은 게, 바로 앞에 있는 화단의 앙상한 나무가지들이 수북히 시야를 가리고 있다. 옆으로 틀어서 잘

보이게 사진 한장.

들어섰다. 팔천원짜리 대인 표를 끊고 썰렁한 전시장으로 들어섰더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천장. 가뜩이나

관람객이 드문 점심때쯤의 휑함과 누추함을 더 강렬하게 하는 천장의 터져나간 페인트와 장식무늬. 단정하고

심심한 네모무늬 창문에서 쳐들어오는 햇살도 천장에는 가닿지 않는다.

태극무늬가 바로 세워지게 딱 각맞춰 한번 찍어본다. 태극무늬를 품고 있는 봉황 네마리가 박제처럼 뻣뻣해 보이는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예전엔 좀더 금빛으로 번쩍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1층 홀 한가운데에서는 "Black Dogs"라는 이름이었던가,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은 작가의 특별전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뒷모습만으로도 저런 느낌을 낼 수 있구나, 라는 내 감탄은 어쩌면 그 옆에 나란히

전시되었던 그들의 고백과도 같은 짧은 수기로부터 온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과 글, 두가지 텍스트가 조합되면

그중 하나만 쓰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깊이있게 자신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사진과 이 텍스트는 사실 제 짝은 아니었는데, 머 사실 이렇게 저렇게 얽어놓으면 다 그럴듯해 보이는지도

모르겠다고 비로소 생각해본다. 어쨌든 텍스트는 "나는"이라고 말을 시작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순간 낯설게

만들어주었던 일종의 화두랄까. 그리고 꽃덤불이 땅속에서부터 피어오르듯 단단히 땅위에 피워올려진 저 사람.

아마 엉덩이 밑으로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은 뿌리가 뻗어나가 있을 거 같다.

서울역사 안에 있는 커다란 시계는 여전히 안녕했다. 제 시간에 맞춰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혹시 알고 있으려나.

2009년에는 1초가 늘어난다지 아마. 누군가 챙겨줘야 할 텐데. 음..파리의 오르세미술관에 있는 화려하고 반짝이는

시계와 비교하기는 많이 담백하달까.

뭐랄까, 롯데월드 어드벤처같은 놀이공원에 가면 돌처럼 위장한 속이 텅텅 빈 플라스틱 껍데기들로 포장된 공간이

많이 보인다. 대리석 대신 시멘트 위 처덕처덕 발라진 하얀색 페인트를 조명빨로 숨기고 있기도 하고. 그런 느낌.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세워진 대리석기둥들과 요모조모 장식이 곁들여진 천장과 사면의 벽들을 보고 있으면 뭔가

어색한 키치의 냄새가 난다. 그런 위화감과 조악함이 한국이 근대를 수입해온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트렌드랄까

지배적인 심상이였을지도 모르겠다.

허옇게 분칠된 고등학생의 어설픈 화장술이 자꾸 연상되던 대리석 기둥들.

한 옆에는 사람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게시판이 있었다. 각자 찍은 사진을 들고 오면 한명이 무료입장 가능하댔나.

그리고 관람객들이 맘에 드는 사진에 스티커를 붙여 가장 많이 받은 사진 출품자에게 상품을 준다는 식이다.

꼭 저렇게, 엉덩이 한가운데 붙이고 양 볼에 연지곤지를 붙여넣는 사람들이 있다.(내 취향이다..랄까.)

역사에 있는 방들, 복도들을 모두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제각기 특징을 가진 문들을 지나 다른 공간으로

넘어서면서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방의 인테리어, 그리고 새로운 느낌의 사진들. 비록 문을 지탱하고 있는 것들이

소화기였다는 사실이 계속 걸리적거렸음에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전선이 빨랫줄마냥 늘어져 있고, 온통 헐벗은 벽면에 뼈대가 드러난 채 설치된 조명시설들. 사진보다는 그 전시

공간 자체에 한동안 눈이 먼저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귀퉁이가 깨진 천장에는 그래도 예전엔 꽤 발랄한 선홍색으로 발색했을 이국적인 문양들도 보이고, 드문드문

이빠진 채이긴 하지만 불을 밝힌 샹젤리제도 있고. 이곳이 역사로 활용되던 시절 이곳은 무슨 공간이었을까.

철창살이 끼워진 유리창 너머 보이는 출입금지의 표지. 정말 철창살 너머, 저런 폴리스라인같은 경계선을
 
바라보자니 어딘가 사건 현장 한가운데 들어와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치 이 건물과 이 공간이 보이지도 않는

양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외부의 사람들. 하기야 밖에서 보면 딱 철거되기만을 기다리는 노쇠한 건물이다.

건물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찬송가 소리, 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울려퍼지는 선전선동 소리.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바닥에 엉성하게 화살표를 만들어 붙여놓는 데에도, 출입금지 구역을 막아놓을

때에도, 그리고 벽면에 동선을 그려넣거나 들어가면 안 되는 문에 엑스자 표시를 할 때에도, 게다가 하다못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 딱지를 붙여두는 데에도 모두 빨간색 테이프를 활용했으니..가히 만능 테이프라 할만하다.

건설현장에서 노가다할 때 느꼈던 콘크리트 건물 날것의 싸한 냉기와 살짝 두렵기까지 한 낯선 느낌. 이 공간에

사람들이 가득 차있고 손때를 탔다면 훨씬 인간적이고 따스한 공간이었을 텐데, 여긴 더이상 쓰이지 않고 버려진

곳. 사람의 온기를 잃고 뭔가 괴물같고 초현실스런 느낌이 뭉실뭉실 커나가서는 순식간에 공간이 황막해졌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역시 역사를 개조해서 만든 파리의 오르세미술관을 상상하면서 왔었지만, 막상 와보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철거를 기다리는 건물을 잠시 재활용하는 정도인 듯 하다. 나름의 운치도 있고 외려 그런 막나가는

인테리어가 내 맘에야 꼭 들지만, 어쨌든 이상태를 보면 계속 전시공간이나 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생각은 아닌것

같다. 파이프가 이렇게 구불구불 벽과 천장을 타고 구불거리는 걸 보면 외려 퐁피두미술관하고 비슷하다.

커다란 사진작품들이 걸려이씨고, 그 옆에 그 사진보다 작은 조그마한 문이 나있다. 왠지 사물의 비율이나 크기에

대한 감각이랄까 현실감각이 시험에 든 느낌이 들었다. 원더랜드에 와서 하얀토끼를 쫓는 앨리스같은. 그치만

이 원더랜드는 많이 헐었군. 파이프가 얼기설기 벽을 기어다니고, 하얀색 백열등은 할짝대며 사진을 탐한다.

그리고 어둠이 들이찼던 공간은 사람이 연다.

이런 풍경. 사진 자체가 이미 '익명성'이란 제목의 초점잃은 누드사진이었으니..내 시선이 가닿았던 곳은 사진들이

아니라 역시 오래되어 자갈처럼 쌓여있는 벽돌들이었다. 뭐든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러워진다. 반듯반듯 모서리의

까칠함까지 살아서 잔뜩 긴장한 채 열맞춰 쌓여있었을 벽돌들이, 비록 그 모서리의 까끌함이야 여전하다 할지라도

훨씬 긴장이 풀린 채 처억 척 늘어서 있다. 저대로 수천년쯤 지나면 피라밋이 마치 자연적인 산처럼 느껴지듯

그런 무위'자연'의 경지에 들지도 모른다. 가만히 냅둔다면.

문득 들어서니 이방의 테마는 뭐야, 거울의 방정도로 잡은 건가. 사진작품이 내걸려있는 벽면이 온통 맞은편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엉거주춤한 상태로 사진 한 장. 혼자 다니는 데 치명적인 약점 하나는, 자신의 사진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 행인지 불행인지.

문득 눈앞에 나타난 문을 통과하려다 눈에 띄었다. 저 스테인드글라스. 원래 있던 거였겠지? 뭔가 조잡하다 싶은데

살짝 유쾌해지려고 했다. 그 쌩뚱맞음도 그렇거니와, 대체 이 공간은 어떻게 쓰였던 거지 상상하면서 말이다.

제법 운치있고 잘 보존되어 있는 방이었다. 천장에 붙은 장식들도 그랬지만, 벽지 가운데쯤 둘린 띠도 그렇고,

가지런히 내려앉은 커튼도. 노란색 불빛이 따스하다.

방마다 심심치 않게 보이는 저 벽난로들. 실제로 쓰였던 건지는 모르겠다. 애초 쓰였는데 벽돌로 막아둔 것 같기도
 
하고, 애초 장식용으로 설치된 것은 아닌지 싶기도 하고. 저런 벽난로가 있는 방, 화톳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면

참 볼 만 했을 텐데 아쉬웠다.

어떤 전시실은 이전의 허름한, 그치만 나름 자부심을 가졌을 명찰을 채 떼지도 않고 있었다. "귀빈실". 일종의

VIP대기실이란 얘긴데, 역시 이곳저곳 망가지고 해어진 것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한쪽 천장이 온통 무너져내려있었다. 참 심하다 싶으면서도, 저 상태 그대로 안전사고의 위험없이 보존될 수 있다

하면 그 또한 살짝 파격적인 전시 공간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아니라면 뭐, 리모델링을 싹 하던가 해서

조금은 더 깔끔하게 꾸며도 좋을 거 같고. 1층을 이리저리 종횡하면서 옛 서울역사가 어떻게 무너지고 망가지고

있는지도 많이 보았지만, 건물 자체가 나름 매력적이란 느낌이 들었다.

잔뜩 허름해보이지만, 과거에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면서 서울로 올라와 출세를 꿈꾸고, 누군가는

시골(지방)으로 되돌아가서 남겨둔 사람들을 그리기도 하고. 그렇게 버글버글했을 그림을 맘속에 그려보면

금방 또 이미지가 퍼올려진다. 그리고 그런 그림들은 서울역사에서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누군가를 배웅했던 기억들과 함께 이 삭아가는 건물에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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