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안에 커플이 되지 않으면 동물로 변신시켜버리는 호텔이 있다. 아니 그전에, 짝을 짓고 이를 유지하는데 실패한 사람들을 유배시키는 사회가 있는 거다.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발사이즈는 14인지 15인지 그 중간의 선택지는 도무지 제공하지 않는 호텔은 그렇게 결혼을 강압하는 사회의 반영인 셈이다.


짝을 찾을 의욕도 없어 보이던 사람들은 사회와 호텔로부터 탈출한 자발적 외톨이들을 사냥하는 경험과 동물로 변할 거라는 공포감에 떠밀려 짝을 찾아나선다. 거짓으로 공통점을 꾸미고 우연을 가장해 짝을 구하는 과정은, 마치 섹스중이던 채털리부인이 차가운 정신으로 한발뒤에서 바라보던 우스꽝스런 엉덩이의 움직임과 같다. 열정과 로맨스는 없고 기계적인 몸짓뿐이다.


짝을 찾은 후에 위기가 닥쳐도 걱정없다. 호텔은 그들에게 아이를 배정해주니까. 혹 그/녀의 가족 문제가 그들의 가정으로 쳐들어와도 적당히 화장실로 끌고가 사라질 때까지 발로 밟아버리면 그만이다. 짝을 이룬 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텔의 숙박공간과 서비스는 좋아지니 여하간 남는 장사 아닌가 말이다.


물론, 당신의 사랑을 15점 만점에 몇점이냐고 누가 총을 겨누고 묻는다면. 짝 대신 자신이 죽어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당신이 상대의 눈을 잃게 했으니 당신 역시 눈을 내어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러한 질문 앞에서는 속절없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는 건 넘어가기로 하자. 애초에 그런 질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랑이 사랑이런가.


혹은, 이렇게도 생각한다. 그런 질문 앞에서 쪼그라붙고 위축된다고 사랑이 아닌 건가. 어차피 사랑이란 건 영화속 한장면처럼, 너와 나의 플레이어로 각자 듣는 음악에 맞추어 함께 춤을 추려는 시도같은 것으로 충분할지 모르는 거다. 같은 노래를, 같은 타이밍에 들을 수 있는 행운이란 건 그렇게 흔치 않으니. 게다가 그에 더해 너와 나의 몸짓이 아름다운 몸짓을 그려내는 행운이란 건 더더욱.




p.s. 랍스터가 되고 싶다던 남자, 바다를 좋아하는 데다가 랍스터가 백살도 넘게 살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랍스터를 택했다고 했다. 나는-영화 제작사에서 준비한 퀴즈에 따르자면-고양이로소이다. (링크는 여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그래도 좀 이쁘게 포장되려나. 자그레브 구시가, 성모승천 대성당에서 성마르크 성당으로 가는 길에

 

문득 마주친 흥미로운 뮤지엄 하나.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다. '깨진 커플 박물관' 정도로 의역하면 될까 싶다.

 

 

연애가 되었건 결혼생활이 되었건, 아니면 짧디짧은 하룻밤의 유희가 되었건 상처받은 이들의 추억과 스토리가 흥건한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건 온갖 인형과 신발, 의류들. 이곳은 세계 각지에서 깨진 커플들의 스토리와 사랑의 징표들을

 

기부받아 세워진 박물관이라고 한다. 이미 꽤나 유명해져서 세계를 돌며 순회 전시도 할 만큼 규모면에서나 인지도면에서 성장했다고.

 

누군가 배 위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썼던 편지와 지도 그림. 흔들리는 배 위에서, 편지지조차 없어서 읽던 책을 찢어서 썼을 만큼

 

그 마음이 뜨거웠을 텐데, 이제는 이렇게 깨지고 부질없는 사랑의 징표로 받은 이의 손을 떠나 대중 앞에 전시되는 중이다.

 

여기서부터는 살짝 19금. 이런 걸 선물해주고 또 착용해서 보여줬을 그들의 내밀하고도 달콤한 이야기들, 덧없고 덧없구나 싶다.

 

 

 

관계가 틀어지고 난 이후에도 이런 걸 계속 지니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약간의 후회와 약간의 아쉬움과 민망함이 교차되었을 듯.

 

 

관계의 마지막을 고하던 날, 그 극렬하던 싸움의 흔적이란다. 깨진 유리 조각을 이곳에 기증한 사람도 대단하다.

 

아예 이런 사람도 있었다. 둘이 주고받던 사랑의 편지들을 유리에 붙여서는 산산조각내버리곤 그 조각을 여기에 넘겼단다.

 

 

 

누군가가 아마도 이런 느끼한 대사를 치며 선물하지 않았을까. '내 마음을 여는 열쇠야, 당신이 처음 발견한.'

 

사람을 시니컬하게 만드는 전시인 거 같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들기 시작했다.

 

 

제법 값나가 보이는 옷들도 말짱하니 전시되어 있었다. 사연은 제각각이어서 처음 사귀던 날 입었던 옷이라거나,

 

프로포즈받을 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결혼식때 입었던 옷이라거나. 그들에겐 이 옷이 그대로 자신들 삶의 한 조각이었을 거다.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쪼개져 나가며 벌어졌던 전쟁의 와중에도, 피난을 떠나던 꼬맹이들의 맘속에는 사랑이 일렁였다.

 

한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낀 채 병원에서 재활 훈련을 받던 상이용사와 간호사의 사랑이야기도 있었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이 남긴 거라곤 프랑스 국적밖에 없다는 한탄이 그대로 들리던 전시품도 있었고.

 

 

 

결혼식날 입었던 웨딩드레스나 혼인 증명서가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나중에 결혼 10주년에 다시 입고서 남편과 춤을 추리라던

 

아름다운 소망이 물거품으로 꺼져버린 후에, 그 웨딩드레스를 볼 때마다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아팠을까.

 

이 뮤지엄에 기증하고 나서 이제 자신은 다른 드레스를 입고 자신만의 춤을 추겠다는 기증자의 다짐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비록 조그마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선물이었을 망정, 그 물건 하나에 담긴 곡절과 의미와 추억은 이토록 길고도 깊다.

 

 

이 뮤지엄의 기념품 중 하나. 나쁜 기억을 지워준다는 지우개를 팔고 있었다. 이런 뮤지엄을 설립해 전세계의 실연한 이들로부터

 

스토리와 가슴아픈 징표들을 기증받는다는 아이디어도 굉장히 참신했는데 이런 깜찍한, 그렇지만 제법 위로가 되는 기념품이라니.

 

이런 것도 있었다. '당신은 최고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당신 뿐이에요, 그렇지만 ________' 따위의 빈칸이 있는 카드들.

 

영원할 것만 같던 찬란한 사랑이 지고 난 후의 씁쓸하고도 가슴 아픈 시간을 그대로 직시하게 만들어주는 아이템들이다.

 

 

뮤지엄을 나와 다시 성마르크성당으로 향하는 길, 왠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운운하는 이들에게 어디 한번 보고서 이야기하라고

 

강추하고 싶은 뮤지엄에서 세계 각지의 사람들 마음이 깨지고 부서진 흔적들을 보고 나니 건물벽 균열조차 심상치 않아 보였다.

 

 

 

 

 

 

 

초보비행 (by 에피톤프로젝트, "낯선 도시에서의 하루")

 

 

서툰 실력이 늘 힘들지만

오늘만큼은 내 모든 용기를 같이 가자

우린 모든 것이 다르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어디로든지

이렇게나 많은 짐은 필요없어

준비되면 이제 내게 말해

함께 가자 그 어디든 내 손 잡아 그대여

내 손 잡아 날 붙잡아

휘청이는 별에 넘어지지 않게

수많은 시간의 기적들을 끌어안고

할 수 있는 마음 모두 다해

같이 가자 그 어디든 내 손 잡아 그대여

내 손 잡아 날 붙잡아

휘청이는 별에 넘어지지 않게

 

 

우리의 음악

 

 

유난히 길었던 계절이 가고

아쉬운 봄의 끝에서

우리가 처음 만난 걸 기억해

말투와 글씨를 알아나가며

그대가 좋아한다던

음악을 듣고 다닌 걸 기억해

그대여 사랑을 미워하진마

우리가 함께 했던 계절을

때로는 눈부시던 시절을

모든게 조금씩 빛을 바래도

우리가 함께 듣던 노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면

그대가 듣던 음악을

다시 또 듣고 있겠지

오늘처럼

 

 

 

새벽녘

 

밤새 내린 빗줄기는

소리없이 마름을 적시고

구름걷힌 하늘 위로

어딘가 향해 떠나는 비행기

막연함도 불안도

혹시 모를 눈물도

때로는 당연한 시간인 걸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라

함께 했던 시간을 꺼내놓고

오랜만에 웃고 있는 날 보며

잘 지냈었냐고 물어보네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라

함께 했던 시간의 눈물들은

어느샌가 너의 모습이 되어

잘 지냈었냐고 물어보네

 

 

어렸을 때 봤던 '백 년 동안의 고독', 이 책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서평이랄까, 혹은 소개글이랄까.

 

게다가 연애감정을 단순히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만으로 묘사하는 단순한, 그래서 그만큼 거짓된 이야기들이 창궐한 세상에서

 

이렇게 정서적 혼란이 난무하는 것 자체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이란 걸 짚어주는 것 자체로도 위로가 되는 글이다.

 

 

 

 

이별 통보하며 던진 말 "널 지독히 사랑해!" (프레시안, 2012-05-11)

[박수현의 '연애 상담소']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

 

연재를 시작하며

사랑에 빠진 젊은 당신에게 묻는다. 행복하세요?

허세를 좋아하지 않는 청년이라면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적인 말씀 앞에서 청년은 기가 죽는다. 그리고 한탄한다. 실은 나 사랑에 빠진 죄로 피를 뚝뚝 흘리며 고통 받고 있는데, 어디 가서 하소연할꼬? 어떻게 말로 할 수 없는 이상한 마음에 빠져 있는데, 이 혼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러다가 내가 미치는 게 아닐까?

선남선녀가 첫눈에 반해서 장애물을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연애담의 다가 아니듯이,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연애 심리의 다가 아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종종 극심한 정서적 혼란을 겪는다. 더욱 곤란하게도 그들은 혼란의 정체조차 모른다. 연애는 기묘한 인간 심리가 난투극을 벌이는 장이다.

훌륭한 소설들은 이런 미친 듯한 기묘한 심리들을 발견하고 묘사했다. 이 연재는 명작 소설에 나타난 기이한 연애 심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각 이야기의 서두에는 민, 경, 희, 연, 도 등 익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소설 주인공이 아니라, 독자이다. 연애 때문에 고민하는 혹은 고통 받는 독자이다. 그들은 소설에서 비슷한 증상(?)을 발견하고 공감하거나 위로 받거나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그들의 실제 연애담을 먼저 이야기하고, 본문에서 그와 관련된 소설 속 사랑 이야기를 풀어놓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청년은 또한 질문한다.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신경증인가? 판타지인가? 유일한 구원인가? 이 질문 앞에서도 명작 소설들은 이미 멋진 답안들을 제출하였다. 연재를 진행하면서 이 답안들, 유식하게 말해서 '사랑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훔쳐보는 즐거움도 누릴 것이다.

사족

그런데 필자 양반, 왜 이런 글을 쓰세요?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본 게임 전에 하는 말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우선 연애 때문에 마음 아픈 당신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고, 당신의 기묘한 심정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 당황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 말하고 싶었다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명작 소설이 아픈 마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담은 '마음의 백과사전'임을 보이고 싶었다고, 아울러 소설을 깊이 읽는 한 방식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이런 식의 소설 읽기를 통해서 점점 독자를 잃어가는 소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기적도 아주 가끔 꿈꾼다고만 이야기해 두겠다.

 


첫 번째 상담

민이 연인에게 결별을 고했다. 일방적으로. 사람들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민을 부러워했는데. 그녀의 연인은 보기 드물게 자상했다. 어디에 가든, 그는 그녀와 동행했다. 우습게도 그는 혼자 있는 그녀가 혹여 사고나 당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그들이 싸웠다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녀의 안부였고, 그녀는 사소한 걱정이나 부끄러운 험담을 그에게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 그녀는 가장 흥미로운 텍스트였고, 그는 그녀의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데 도대체 누가 알겠는가. 쏟아지는 질문에 그녀는 침묵으로만 응대했다. 그와 그녀의 이별 후유증에 대해서는, 말을 말자.

세월이 흐른 후 그녀는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을 읽는다. 그리고 그때의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해했으므로 드디어 그녀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붉은 화인으로 남은 청춘의 한 때, 그녀가 빠져든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의 어리석음을 애도하면서 혹은 찬란함을 질투하면서.

그때, 난 천국에서 외줄을 타는 기분이었어. 천국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외줄 아래는 무시무시한 낭떠러지야.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다리가 늘 후들거렸어. 끝장나게 행복했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불안했단 말이지. 그 상태를 더 이상 지속할 힘이 없었어. 무엇보다 외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어.

사랑은 왜 그렇게 피곤한 걸까? 그리고 그 피곤한 사랑을 도대체 왜 하는 걸까?

정열과 고독, 그 기이한 함수관계

사랑에 빠진 사람의 불안감은 침대 안에서가 아니고는 평화를 찾지 못하리라.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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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년 동안의 고독>(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문학사상사

사랑할수록 처절하게 외롭다. 말장난이 아니라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체험적 진실이다. 이 소설의 레베카와 아마란타 역시 사랑 때문에 외롭다. 그들은 동시에 피에트로 크레스피를 사랑하지만, 레베카는 사랑을 차지하고 아마란타는 그러지 못한다. 정황이 다르기에 그녀들의 외로움의 색깔은 다르지만, 이는 사랑의 짝패인 고독의 두 가지 전형적 사례이다.

우선 사랑에 응답 받지 못한 아마란타의 외로움은 쉽게 납득된다. "변소를 닫아 잠그고 안에 들어앉아서 절망적인 정열의 고뇌를 쏟아버리려고 정열적인 편지를 써서는 그 편지들을 트렁크 깊이 감추"(81쪽)기를 반복하는 아마란타의 고독한 정열. 응답 받지 못한 정열은 고독을 부추기고 고독은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외사랑이 깊어질수록 저 홀로 타는 정열의 불길은 거세어진다. 응답을 받았으면 평범했을 정열은 종종 응답을 받지 못했기에 더욱 광포하게 날뛴다. 걷잡을 수 없게 된 정열 때문에 점점 더 사랑을 얻기 어려워지고, 더 고독해진다. 아마란타는 고독하기에 정열적이고, 정열적이어서 더욱 고독하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아마란타 못지않게 사랑을 얻은 레베카도 외로우니, 어쩌면 더욱 처절하게 고독하다. 레베카는 피에트로 크리스피의 편지를 매일 기다린다. 우편배달부는 2주에 한 번씩 온다. 그런데 실수로 다른 날에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녀는 매일 오후 4시마다 배달부를 기다린다. 그러나 다른 날 우편배달부가 오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와야 할 날에 오지 않기도 했다.

그런 날 레베카는 "절망에 미칠 것 같아서 레베카는 한밤중에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서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고통과 분노로 흐느껴 울면서 흙을 닥치는 대로 손으로 퍼서 집어삼켰고, 매끈매끈한 지렁이를 막 씹어먹었으며, 달팽이 껍질이 입안에서 아삭아삭 바스러졌다. 레베카는 동이 틀 때까지 먹은 것들을 토해냈다. 열병에 걸린 듯 레베카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79쪽)

광란에 빠진 레베카는 실연을 당했거나 외사랑에 고통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이다. 피에트로는 극진하게 레베카를 사랑했다. 편지가 오지 않는 경우도 피에트로가 무성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돌발적으로 우편 사고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편지는 대개 정기적으로 도착했다.

이렇게 보면 레베카의 광적인 절망은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것이 된다. 드높은 인격과 향기로운 미덕을 갖추신 분들은 레베카를 맹목적인 탐욕에 사로잡힌 영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맹목적인 탐욕이란 사랑이 필연적으로 거느리는 것, 사랑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사랑의 응답은 언제나 모자란다. 충만하다 못해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사랑의 응답도 필경 결핍만을 부각한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픔을 느끼는 야차와도 같이, 사랑에 빠진 자는 악무한의 굶주림에 시달린다. 사랑에 빠진 자의 이런 허기를 마르케스는 '고독'이라는 평범하지만 깊디깊은 속뜻을 품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 레베카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사랑에 빠진 아우렐리아노뿐이었다.

열애 중인 연인은 고독이라는 인간의 천형을 사면 받는가? 날 것 그대로의 싱싱한 열정의 노예가 된 사람은 연애 중에 오히려 더한 외로움을 느낀다. 아마란타와 마찬가지로 레베카의 사례에서도, 고독은 정열의 크기에 비례해서 깊어진다.

정열이 깊을수록 상대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많아진다. 많은 것을 기대하면 자연스럽게, 만족하기보다는 결핍을 느끼기 쉽다. 그러니 고독할 수밖에. 또한 그는 고독하기에 다시 정열을 불태운다. 결핍을 느끼면 그것을 채우려고 발버둥치지, 어지간해서는 체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배고픈 사람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맬망정 배고픔을 잊으려고 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정열이 고독을 부르고 고독이 정열을 부르는 이 원환(圓環).

냉혈한인 그녀, 사실은 두려워서 사랑을 포기한 연약한 영혼

여자는 거리낌 없이 그를 만져댔고, 그는 그 여자의 손길에 몸을 부르르 떨며 쾌감보다는 두려움이 머리에 꽉 차 있었다. (38쪽)

상대의 마음은 대체로 나와 같지 않고, 마음이 맞는다 하더라도 이른바 '맺어지기' 전 결별의 요인은 너무나 많다. 그러니 사랑이 '맺어지기'란 구우일모(九牛一毛)나 다름없는 진귀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토록 어려운 '맺어짐'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과연 기쁜가? 진실을 토로하라면 그때 표현하기 힘든 혼란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질투에 휩싸인 아마란타는 레베카와 피에트로의 결혼을 극성스럽게 방해하고 레베카를 독살할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레베카는 피에트로와 헤어진다. 아마란타가 방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레베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피에트로와 아마란타는 자주 만나서 조용한 사랑을 키워간다.

피에트로는 미쳐 날뛰는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어도 따뜻하고 고요한 사랑에 도취하여 아마란타와 결혼하려고 결심한다. "억누를 수 없는 어떤 감정에 쫓겨서라기보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자연의 섭리를 그대로 따르자는 뜻"(125)에서. 그런데 청혼을 받은 아마란타의 대답은 어떠했나.

"나는 죽으면 죽었지, 당신하고는 결혼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정말로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면, 앞으론 다시는 집안에 발을 들여놓지 말아요." (126쪽)

이제 피에트로는 흐느껴 울며 비굴하게 애원한다. 비 오는 밤이면 아마란타의 침실을 바라보며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도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을 만큼 깊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목소리"(127쪽)로 노래를 부르며 그녀를 설득한다. 그녀는 요지부동이다. 절망을 이기지 못한 그는 자살하고 만다. 그녀는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서 석탄불에 손을 지진다. 평생 화상의 흔적 위에 시꺼먼 붕대를 감고 산다.

아마란타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을 외롭게 했고, 질투심에 불타게 했으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던, 그리고 여전히 열렬하게 사랑하고 있는 피에트로의 청혼을 고집스럽게 거절했을까? 피에트로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마란타의 어머니 우르슬라는 이렇게 분석한다.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의 마지막 분석 과정에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부드러운 여인이었음이 분명해져서, 우르슬라는 아마란타에 대해 동정을 느꼈고, 피에트로로 하여금 부당한 고통을 받게 만든 까닭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했던 대로 자신이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시 사건은 모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으며, 마침내는 아마란타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마음에 대해서 느끼고 있던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280쪽)

그 비극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은 사랑과 물리칠 수 없었던 비겁함의 결사적인 투쟁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다고 한다. 냉정하다는 평판과 달리 누구보다도 마음이 여린 아마란타는 어처구니없는 두려움에 굴복한 가엾은 영혼일 뿐이라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피에트로를 깊디깊게 사랑했으나, 사랑의 동반자인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사랑에 빠진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서 있는 자리는 꼿꼿한 직립이 가능한 굳은 땅 위인가, 천길낭떠러지 옆에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좁은 비탈길 위인가? 마음이 연약하고 깊은 이들은 후자를 택할 것이다. 깊은 사랑과 동시에 두려움에 몸을 떠는 사람은 이렇게 되뇐다.

그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토록 모자란 나를. 그는 언젠가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사랑은 변하게 마련이니 결국 나는 사랑을 잃게 될 것이다. 잃은 후의 절망을 도대체 어떻게 감당하나. 게다가 미쳐 날뛰는 정열을 감당할 수 있을까. 정열이 벼려 낸 내 안의 칼이 그를 찌르면 어쩌지. 사랑 속에서 나 자신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많다.

사랑에 빠진 자가 모두 사랑을 쟁취하려고 동분서주하는 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적지 않은 경우 그는 사랑의 성취 바로 앞에서 비겁하게 몸을 사리고 도망쳐 버린다. 사랑의 깊이와 두려움의 깊이는 비례하므로, 피에트로를 죽음으로 이끈 아마란타의 냉혹함은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아마란타는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했을까. 아니면 폭력적인 사랑의 심연을 두려워했을까. 그랬을 수도.

어쩌면 두려움은 행복 자체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란타는 눈앞에 다다른 행복 앞에서, 단지 행복해지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오랫동안 꿈꿔 왔던 사랑이 이루어지는 순간, 어떤 이는 환희보다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행복이란 워낙 드문 것이기에, 사람은 그것을 만나면 낯설어서 어떻게 대해야 할 줄 모른다.

행복은 과거와 미래 속에서만 존재했거나 존재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과거에 행복했다고 다소 왜곡해서 기억하거나, 미래에 행복하기를 기대할 뿐이지, 현재 행복하다고는 거의 느끼지 않는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청미래 펴냄, 2007년), 197~200쪽).

지금 이곳에서 행복은 항시 부재중이다. 없어야 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을 만날 때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 순간 닥치는 행복은 '원래 없어야 하는 것'인데다 '예상을 벗어난 낯선 것'이므로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편, 인간은 본능적으로 안다. 줄기차게 추구해온 욕망의 정점에 아무것도 없음을. 그 텅 빈 정점을 보는 순간 느낄 참혹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기에, 꿈이 이루어지기 바로 직전에 도망쳐 버리는 게 아닐까. 꿈꾸는 대상이 허상이었음을 인정하기 두려워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을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는 것이다.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마르케스를 만나면서도 되풀이 두려움을 느낀다. 여러 해에 걸쳐서 거듭 사랑을 고백하고 정성을 기울인 게리넬도에게 아마란타는 "자기 자신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절망"하면서, "죽는 그 날까지 혼자서 울면서 고독하게 평생을 보내리라고 결심하고는"(187쪽) 영원한 이별을 고한다.

그녀의 이런 처사가 그동안 겪은 괴로움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사람들은 분석한다. 하지만 오랜 세월 후 우르슬라는 피에트로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이 깊은 사랑과 두려움의 싸움에서 두려움이 사랑을 이긴 결과라고 이해한다. 사랑이 깊기에 사랑이 사랑을 죽인 것이다.

내적 분열, 사랑의 핵(核)

그는, 그럴 마음이 없으면서도 그 여자를 만나러 가야만 한다는 충동을 느꼈다. (39쪽)

인간의 마음은 본디 분열적이다. 무엇을 하고 싶을 때 동시에 그것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이러한 내적 분열을, 연애하는 사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극심하게 체험한다. 사랑하면서도 밀어내고, 도망치면서도 사랑한다. 아마란타가 게리넬도를 대하는 모습은 내적 분열하는 연애 심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게리넬도에게서 과거 피에트로에게 느꼈던 정열을 되살려보려고 애를 쓴다. 애를 쓴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정열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해 죽을 만큼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게리넬도를 거절한 후에도 아마란타는 "우르슬라에게 전쟁에 대한 최근의 형세를 알려주는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으나 밖으로 나가서 그를 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겨우겨우 그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다."(160쪽)

사랑의 빛깔은 형형색색이라, 격렬한 정열이 아니어도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심정도 있고,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으면서도 억누를 수밖에 없는 심정 또한 있다. 이런 분열적인 심정은 노년에도 그대로여서, 아마란타는 게리넬도 노인을 만나면서 추억으로 마음이 아파질 때면 공연히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서 그를 괴롭힌다.

 

ⓒ프레시안(손문상)

/박수현 문학평론가

덫과 같은 사랑에 빠져있을 때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상대에 질리고 지치고, 그렇지만 여전히 마음이 남아서는 헤어진 이후에도 계속 서로를 힘들게 하는 와중엔

시간이 약이란 말 따위, 전혀 와닿지 않기도 하고 이번만큼은 안 그럴 거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또 슬쩍 시간이 지나서 아물고 나면.

그렇구나, 시간이 약이었구나 싶어지죠.


참 쓸데없는 말 같아요. 뱀의 다리 같은. 아무 효과도 없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이죠.


그냥..어제 빗소리를 창밖으로 넘겨들으면서 카톡에서 지워버렸던 그녀를 살짝

차단해제하고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착잡해져버렸습니다.


시간이. 약일까요.


 

외도에서 촬영되었다는 옛날옛적의 드라마, '겨울연가'를 알리는 낡은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2002년 드라마였던가..했다가 문득, 군대가는 바람에 마지막 엔딩을 못봤었단 생각이 떠올랐다.

근데 정말 어떤 장면에서 외도가 나왔던 거지? 전혀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걸 보면 내가 놓친 엔딩?

국내 유일의 해상농원,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섬으로 개인적인 취향과 안목이 그대로 투영된

이국적인 아열대 식물들, 평소에 관리가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하던 범상치않은 조경.

온통 하늘로 치솟은 덤불의 끄트머리가 무슨 탑의 형상같기도 하고, 에너지가 뻗쳐나가는 거 같기도.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기도 한다는 외도에서 눈에 띄던 건 역시 육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아열대의 식물들, 황금빛에 가까운 신기한 빛깔을 뽐내던 요 신기한 풀떼기처럼.

산책로를 따라 걷는 길, 한바퀴를 도는데 대략 한시간 정도 소용된다니 걷기 전에 몸을 가볍게

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이 엘레강스한 화장실 표지 역시 섬주인의 취향이 그대로

묻어나는 하나의 특징적인 포인트일 텐데 조금 거창하단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이쁘다.

화장실 표지도 표지지만, 전지역 금연을 실시할 정도로 환경을 보호하기에 열심인 이 작은 섬에선

빗물을 저장시설에 모아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섬이 작아 딱히 물이 있지는 않은가 본데,

이렇게 많이 다녀가는 관광객들을 소화하려니 이런 부탁을 할 수 밖에 없을 듯.

정말이지 깔끔하게 전정된 가로수들, 가지들을 툭툭 쳐낸 모양새가 인상적이다. 옷걸이로 쓰면

딱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고, 저기에 잘못 부딪히면 푹 박히는 거 아닌가 싶어 지레 소름돋기도

하고. 저런 곳의 나무를 켜내면 옹이구멍이 송송 박혀있는 거 아닌가.

2월의 매화꽃. 짙은 초록색의 두텁고 반들거리는 울창한 잎사귀 사이에서 샛노란 술을 가진

새빨간 꽃들이 촘촘이 박혔다. 슬쩍 잎사귀를 차양삼아 햇살을 가리려는 듯한 꽃잎의 제스처가

사랑스럽다.

판판한 평지에 조성된 정원이 아니라 제법 오르내림이 있는 조그마한 산 같은 섬인지라, 이렇게

산책로를 걷는 재미도 더 큰 거 같았다. 더러는 높은 나무로 울타리쳐진 길을 오르기도 하고,

아니면 저런 야트막한 정원수들이 양쪽에 줄서 있는 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며 전체 섬을

내려보기도 하고.

조금 당황스러웠던 공간, 외도에서 가장 뭐랄까, 이질적이고 뜬금없다 싶었던 공간이었던 거 같다.

물론 갠적으로. 이름하여 '비너스가든'과 '음악당'. 루브르박물관에서 봤던 니케상 비슷한 것도

하나 서 있고, 그리스 느낌 가득한-그렇지만 꽤나 아쉬운 느낌 역시 가득한-구조물이 바닷바람을

맞고 녹슨 채 서 있었다.

프랑스 식으로 잘 다듬어진 정원은 외도의 한복판, 그야말로 외도 정원의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조금만 늦게 와서 날도 풀리고 꽃도 좀더 피고 녹색도 좀더 싱싱했다면 더 멋졌을 거 같긴

하지만, 뭍은 아직 겨울바람 씽씽 불어닥치는 2월에 갔어도 꽤나 좋았았던 공간.


중간중간에 놓인 벤치 역시 바닷바람에 씻기고 적당히 헐어보여서 오히려 더 맘에 들었다.

괜히 엘레강스한 분위기를 내려 힘준 게 아니라, 그리고 괜히 유럽이나 그리스식의 분위기를

잡느라 꼬불꼬불한 문양으로 흉내낸 게 아니라 좋았다.


같이 갔던 사람들이 여긴가, 여긴가 했다. '겨울연가'에 나왔던 장면이, 나왔던 외도의 풍경이

여기 어디선가 찍혔던 건 아닐까 추측이 난무했던 곳.


곳곳에 숨어있던 귀여운 소품들, 고양이 가족들의 익살맞은 표정도 맘에 쏙 들었지만 색색깔의

기린들이 보이는 시크한 표정과 우물대는 듯한 입모양이 참.

외도의 주인이 얼마나 조경에 힘쏟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몇그루의 잘 가꿔진 나무들.

남자사람 머리만 해도 삐쭉삐쭉대지 않도록 잘 다듬어주려면 삼주에 한번씩은 깎아줘야 하는데,

작다고는 하지만 이 섬 전체를 정원으로 꾸며버린 스케일을 감안했을 때 정말 얼마나 손길이

필요한 일일까. 하나 흐트러짐이나 지저분한 구석없이 이렇게 관리하려면. 



양배추처럼 생긴 꽃..저거 이름이 뭐더라, 맨날 듣고는 까먹어버리는 이름의 꽃들 사이로

곰발바닥이 새겨진 시멘트 바닥을 따라가면, 지금은 출입통제된 정원의 어느 샛길이 나타난다.

막혀있단 거 뻔히 보이지만 곰발바닥이 귀여워서 일단 따라 걷고 보는 단순한 걸음걸이.


이전부터 섬에 대한 로망은 있었다. 한쪽 끝에 서면 다른 쪽 끝이 보이는 그런 조그마한 섬.

외도는 그정도 사이즈는 아니어도, 불쑥 올라선 섬의 중앙부에선 섬의 가장자리가 손에 닿을듯

가깝게 보일만한 사이즈. 정원으로 꾸며진 섬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 섬들이

가득한 남해바다가 희끄무레한 바다안개를 덮은 채 버티고 있고.

기묘하게 생긴 벤치, 아마도 커다란 죽은 나무를 다듬어서 만든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어디론가

통하는 샛길 하나가 또 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귀여운 바리케이트로 막혔다. 자연스런

나무의 휘어짐이나 모양새가 그대로 살아있는 느낌이 좋다.

날씨에 따라 대마도까지 보인다는 전망대, 오백원짜리 동전은 내가 어렸을 적 통일동산이나

판문점 같은 곳에 올랐을 때부터 변치않는 가격인 거 같다. 물가는 미친 듯이 뛰었어도

전망대용 망원경 가격은 십여년째 그대로.


날이 흐리고 해무도 끼어서, 게다가 딱히 망원경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섬 너머는 전부 바다니깐

그냥 맨눈으로 보아도 이쁘다. 그리고 전망대 아랫자락으로 펼쳐지는 외도의 살갗도 참 이쁘고.

거의 외도를 한 바퀴 돌고서, 선착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내려다보이는 '비너스정원'과

'음악당'의 모습이 자그마하니 귀엽다. 그리고 건물 안에서 삥삥 도는 저 계단 역시.


'명상의 언덕'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 혹은 성당. 사이즈로는 정말

X딱지만하다는 표현이 딱 맞아떨어질 정도로 작지만, 안에 슬쩍 들어가서 바라본 창밖

풍경은 바다랑 섬들이랑 사이좋게 어깨겯고선 따뜻하기 그지없던.


선착장으로 가는 길, 바닥엔 동글동글 까만 돌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기하학적인 문양들을 만들고

담백한 풀꽃모양도 떠올려냈다. 그리고 가로수들 그루마다 둘러싼 깔끔한 돌화분에 박혀있는

산뜻한 타일들, 애기들이 지나가다 관심을 바싹 갖고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바닥에 하트 모양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공간을 발견, 저 은은하고 부드러운 핑크빛의

하트에는 동글동글하고 작은 조약돌로 두번이나 하트모양으로 띠도 둘려 있다. 일종의 이별여행을

떠났던 곳이니만치, 저런 모양 하나하나에 쿡쿡 가슴이 찔려왔지만, 사랑ing인 사람들이야 뭐.


선착장에 내려서기 직전, 외도의 마지막 포스트인 '외도 갤러리'라는데 다른 것보다 그 뷰가

참 좋았다. 천장이 높아 바람이 숭숭 자유로이 드나드는 커다란 정자 같은 곳에 삼삼오오

앉아서는 바닷바람도 맞고, 멀찍이 시선을 던져둔 채 망연하게 넋놓고 있는 것.

배가 선착장을 떠나는 순간. 선착장과 배 사이를 쉼없이 이간질하며 철썩철썩 거칠게 내지르는

파도를 견디어내려면 저렇게 튼튼한 타이어를 빈틈없이 둘러야 하는 거다. 그렇게 하고서도

바닷물과 바닷바람과 파도와 무디고 둔탁한 뱃전에 쓸려 금세 낡고 허름해지는 타이어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구나. 늘 긴장 가득한 관계구나 싶다. 배와 항구란 거.




골목을 뱅글뱅글 돌았다. 다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씨씨티비를 피해 세워놨던 차까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문득 조바심치다 에라 모르겠다. 늘 길찾기는 내게 스트레스였다.

문득 떠오른 그녀의 타박 아닌 타박. 오빠는 어떻게 나보다도 길눈이 어두워.


어차피 집 밖에 나서면 전부 길이다. 낯선 길 위에서 늘 그녀의 말이 맴돈다면 큰일이다.

장소에 주석을 붙이고 기억을 첨부하는 건 일종의 허세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악세사리같은 말들이라 생각했었는데. 정작 나는 길 위에서 추억한다.


그러다 번쩍, 계시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안농'손칼국수. 지난 3년동안 그녀의 인사는

대개 '안농' 아니면 '안뇽'이었다. 안농. 입술에 주름을 잔뜩 끌어모아 앞으로 바싹, 평온하던

날에 그 인사말은 장난스런 키스의 느낌을 떠올렸댔다. 안농, 그러면 나도 안농.


길 위에서 넘실대던 그녀의 기억이 인도 위까지 들이차기 시작한 걸까. 장마철 보도블록을

핥아대며 역류하는 빗물의 강처럼 뭔가 으슬으슬해졌다. 우리의 시간이 내게 주었던 교훈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역시 조금은, 변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의 '안농'이 내게 남았다. 그리고 다른 고민이 남는다. 그럼 대체 난 뭘 배운 걸까.

그 시간동안, 그 평온했던 날들과 쓰라렸던 날들을 거치면서 결국 뭔가 배워야 할 걸 못

배운 건 아닐까. 이런 내가 다시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들.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영화니 드라마를 보면, 모두가 조금씩은 깨달음을 얻는 거 같다.

그때 그랬어, 사실은 그랬어야 했어, 내 문제였어, 둘다 어렸어 따위. 근데 정말, 그렇게

현실이 굴러간다면 지금쯤은 세상엔 사랑에 득도한 사람들만 가득할 텐데 그것도 아니고.


그저 다들 늘어만가는 나이에 부끄러우니까, 깨진독처럼 좀처럼 숙성되지 않는 경험치가

부끄러우니까 있어보이는 척만 하는 건 아닐까. 사실은 나도 그래보일 순 있는데. 허름하니

글자가 깨져나간 간판 하나에 '안농'이니 어쩌니 울렁대지만 않으면. 




젖이 팅팅 불은 채 아파하는 암소처럼, 누군가에게 사랑을 쏟지 못해 힘든 마음.

이전에는 몰랐다. 사랑받으려는 욕구보다 큰 게 사랑하려는 욕구임을.


내가 주는 걸 최대한 흘리거나 튕겨내지 않고, 가능한 오롯이 받아낼 수 있는 사람.

사람은 변하지 않으니까. 어쩌면 정말 인연이란 게 있을지도 모른다.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더러 기억하기도 부끄러운 치졸한 이별과 유치하고 눈멀었던 사랑을

겪고 난 뒤에도 결국 난 변하지 않았다.

뭐 하나 딱 떨어지거나 명료하지 않은 채 뿌연 눈세계 속의 풍경처럼 불분명하고 모호한

그녀들의 사랑 이야기가 다시 와닿는 날이다. 같은 사람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 기억들을 잘 합쳐보면 그 사람에 대한 보다 '완전한' 기억과

이미지를 추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성공했을까. 그리고, 뒤늦게 받아든

누군가의 '러브레터'로 톡톡 두들겨진 오래전 첫사랑의 기억은 또다른 그녀에게 어떤

의미로, 혹은 상처로 남을까.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오겡끼데스.


결국 지나간 두 개의 사랑에 안부를 묻는 영화, 너무나도 선명하고 강렬하게 지나버려

2년이 지나도록 지우지 못한 사랑과 그게 사랑이었는지도 모른채 지나버린 사랑에 대해

'잘 지내고 있는지'를 묻고 '난 지금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은 마음.

그건 상대가 감기에 걸리진 않았는지, 봄꽃은 보았는지, 눈이 내리는 날 뭘하며 지내는지

묻는 그런 소소한 말건넴 밑바닥에 깔린 채 쉼없이 속삭이는 본심일 거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지나간 일들은 모두 아름답게 분칠되고 지난 사랑 역시 늘

아름답게만 기억되기 마련이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지나버린 사랑,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사랑,

아름답지만 더이상은 가망없는 사랑-혹은 더이상 가능성이 남지 않아 더욱 아름답기만 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에 대해 '오겡끼데스까'를 물어야 할 게 아니라, 지금 옆에 있는 사랑,

전쟁중인 사랑에 '오겡끼데스까'를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나간 사랑에 안부를 묻기란, 진행 중인 사랑에 안부를 묻기보다 쉬운지 모른다.

중부지방에 폭설특보가 내린 날, 모처럼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다시 보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 10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청미래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보면..사랑이 싹트고 자라고 피어나고 시드는..그 과정들에 대한

단락구분이 절묘하다. 예컨대 이상화..진정성..정신과 육체..사랑이냐 자유주의냐..그녀에게서 무엇을 보는가?

..행복에 대한 두려움..이런 식이다. 이를테면 관계의 절정에 달했달 부분인, '행복에 대한 두려움' 챕터 이후에

오는 것들은, 수축..낭만적 테러리즘..선악을 넘어서..예수 콤플렉스..사랑의 교훈..운운 이런 이별을 예감하고

준비하고 맞이하고 되새기는 과정들에 대한 압축적인 소제목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스물다섯 쯤에 쓴 처녀작이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그의 감성과 능력에 질투를 느꼈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그는 '이별하는 법'을 말하지 않았다. 이별을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하는게 좋은 이별이고

어떤 게 나쁜 이별인지 말하지 않았다. 애초 그가 배우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이별 따위 없는 거고, 이뿌게

돌아서는 것 따위 없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별은 언제나 당하는 것일 뿐..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별은 상대로부터 오는 건지도, 혹은 자신이 만들어낸 마음속의 환영으로부터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와, 누구에게 어떻게 이별을 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배우지 않은 것들, 배울 수 없는 것들은 도무지

막막할 뿐이다. 다만...그에게 힌트를 얻는다. 그는 그 기승전결의 루트를 돌이키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주의와
 
나약함을 가감없이 대면하고, 묻는다. 묻어버리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저 매순간..진심을 담아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더할 수 있는 팁일까.



(2008. 12. 28)

#. 자동차의 앞모습을 보고 저녀석 웃고 있구나, 인상쓰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밍숭밍숭한

헤드라이트를 가진 프라이드는 왠지 멍청해 보였고, 캐피탈 정도는 왠지 지적이란 느낌을 주는 얼굴을 갖고

있었고. 마티즈 정도는 내게..상당히 세련되면서도 은근 얍쌉하다는 느낌을 주었고. 뉴그랜저 정도는 적당히

무게 있는 표정과 적당히 올라간 눈꼬리를 갖고 있고.


유지태의 코란도는 그런 거였다. 이영애와 잠시 분위기가 틀어져 분위기가 싸해지면 디젤엔진 특유의 덜덜거리는
 
소음이 그 공간을 더욱 야박하게 했고, 새로 뽑은 이영애의 마티즈와 엇갈려 한눈에 잡힐 때에는 더욱더 그

무지근한 덩치와 투박함이 두드러져 보이는. 봄날은간다, 이영화에서 자동차는 그 인물들의 캐릭터를 구체화하는

하나의 적나라한 힌트였다.


이영애가 끌린 다른 남자, 그의 뉴그랜저는 그녀가 그에게 첨으로 관심보였던 선그라스만큼이나 짙은 검은색의

반들반들한 보디를 갖고 있었고, 유지태의 각진 코란도는 제대로 광이라곤 났던 적이 없는 거 같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내겐 '사랑은 역시 변하는구나', 정도로 들렸다. 관계가 힘들어지거나, 유지태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시계나, 하다못해 달력이라도 나왔다. 조막만한 공간이었고, 그만큼

시계가 세상에 널려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와 그가 충일감을 느끼던 그런 시간들에는 한번도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자가 첨으로 화를 내던 시간 아침 10시반, 그후 혼자 남자가 꾸역꾸역 밥먹는 시간 11시, 남자의 할머니를 찾은

시간 밤 10시..그런 식으로, 계속 화면의 한구석에서 집요하게 시간이 흐르고, 안쓰러운 감정의 흐름과 관계의

변천을 의식시킨다. 결국 그런 아연스러운 시간의 흐름...그 극단의 형태는 마지막...남자와 여자가 서로 등을

돌리기까지..화면의 모서리로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몇번씩 서로 눈길이 엇갈리며 하염없이 부질없는 희망을

갖게 만드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거 같다.
 

그간의 관계를 집약해서 보여주듯 때론 같이, 때론 홀로..상대를 되돌아보고, 무언가를 기다리듯 애절하게 잠시

멈춰서 마주보지만..시간이 멈춰진다면 잠시나마 기대앉아 울어보기라도 하겠지만...


시간은 흐르고 봄날은 가고.


마티즈의 세련된 이미지를 가진 그녀였지만, 악수를 핑계로 먼저 등을 보여주는데 성공했지만, 역시 사랑을

세련되게 혹은 잘 정돈된 모습으로 한단 건 불가능하다. 가슴이 터질듯한 안타까움..대체 세상은 왜 이따위인

거냐고 고래고래 내지를법한.


#. 그래도 남자에겐 기댈 곳이 없다. 이미 훌쩍 커버린 그에게는 고작 친구녀석과의 짧막한 대화나, 할머니가 주는

사탕 정도가 남아있을 뿐...떠나간 사람을 내처 못잊는 할머니에게, 자신에게 화를 내고, 고함치고,

울어버리지만...허물어질듯, 무너져내릴듯 하면서도 자그마한 할머니의 어깨는 너무도 야위고 약하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래서 둘은 세상 한가운데서 오직 서로의 품에서만 기댈 곳을 찾았던 거였고.

그런데 더이상 그들은 서로의 외로움을 거둬내고 씻어주지 못한다. 외로움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영혼에 스며있는 것. 둘이 되어 그 외로움이 더욱 커질 때, 빈틈이 늘어나고 균열이 깊어질 때 봄날이

가버렸다. 최악보다 차악, 그렇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남자는 다시금 시간의 흐름이 숨겨진 곳에서 바람을 느끼며 헤어진 후 처음으로 웃음을 띄우지만...글쎄,

그 뒤에는 아마도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정도...를 붙여서 생각해야 하지않을까.


봄날은 가버렸고, 시간은 흐르고, 다시 봄날이 오겠지만, 시간을 비끄러매고 태양을 묶어둘 재간이 없는 이상..

다시 봄날은 가고. 언젠가 분홍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분홍빛 양산을 드리운채로 햇살 가득한 봄날의

끝물쯤에서 세상을 등질지 모른다.


(2005.4.25)
[술잔#1] 조각만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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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한쪽 끝에 서면, 다른쪽 끝이 보일만큼 자그마한 섬에 가보고 싶다.
내가 가보았던 섬들은 모두 너무도 크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김한길이 이야기했던가, 북극곰은 다른 곰을 만나면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고. 평생 한번 만날지조차 기약없는 만남이므로. 그렇게, 조각만한 땅뙈기에서, 술잔과 오른손의 인연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술잔#2] 그녀 앞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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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마주섬에서 시작된다. 설레이며 눈을 마주치고, 술잔과 오른손은 서로가 품고 있는 표정과 이야기를 알고 싶어하고. 여전히 스스로의 감정과 상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채 두손 떨구고 어설픈 사랑.



[술잔#3] 목소리 좀 들려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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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동하면 몸이 움직인다. 몸이 움직이면 마음이 간다.
입밖으로 소리내어 사랑을 말하는 순간 손가락은 술잔에 매료되고 말았다. 당신도 날 보고 있었나요..우선, 술잔 당신의 매끄럽고 후끈한 목소리를 좀 들려줄래요. 우리 목소리부터 익혀나가는 건 어떨지. 손길이 닿으면 갸냘프지만 분명한 술잔의 응답. 말꼬리를 땋기 시작했다.



[술잔#4] 살짝 접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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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술잔은 위험하지 않다고, 냄새와 향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손을 뻗어 만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꿈이었던양 떠나버릴 것 같아..오른손은 술잔의 부피와 질감을 확인하기 시작하다. 이 세상에 있었구나, 조각만한 세상에서 병아리오줌만한 인연을 타고. 고마워서.



[술잔#5] 외전. 기어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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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오른 유리산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니미럴 절라 높네.



[술잔#6] 니 이야기를 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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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되고, 나도 니가 될 수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하루가 하루를 지랄같이 소모시켜도 기꺼이 온몸으로 귀가 되어주는 술잔이 있었기에. 서로의 사용설명서를 꼼꼼이 읽어내리며, 조금씩 마카로니 치즈의 맛을 음미하기 시작하는 사람들. 몇번씩의 구역질과 거부감을 인내한 후에야.



[술잔#7] 어깨 빌려 사람人의 뜻을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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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휩쓸려 가라앉지 않으려면 댄스댄스댄스. 끊임없이 똑딱이며 빛바래가는 세상 속에서 오른손의 이정표는 술잔. 생기와 의욕을 말려버린채 기어코 삶의 뒷켠으로 내리눌러버리겠다는 시간을 비웃으며 어깨도 걸어보고. 가벼운 스텝으로 하루하루 생을 더해갈 수 있다면. 하루치 삶의 의미를 아침마다 떠올릴 수 있다면.



[술잔#8] 손잡고 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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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다 힘들면 쉬었다 가기도 하고, 손잡고 가기도 하고.
지겨워서, 힘들어서, 살다가 지쳐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손내밀어 이끌어주기도 하는. 어차피 시작해 버린 인생, 최종 목표는 트루 러브라 외치는 술잔과 오른손. 그 치기어린 말과 행동은 한때..아름답다.



[술잔#9] 기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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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기. 허물어지듯 무너지더라도, 두팔가득 받아줄 술잔이 있다면 나중나중에 다시 일으켜세워볼 요량도 생기겠지. 세상이 무거워졌다고 느낄 때 대신 하늘을 빤히 노려봐주는 노랑색눈깔의 술잔.



[술잔#10] 좌우명은 올인(al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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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지 못하겠음 뛰어든다. 이리저리 재봐야 답도 안보이고 머리만 아플터. 맷돌에 장렬히 뛰어든 콩처럼 곤죽이 된채 설설 밀려나올지라도, 올인이다. 눈에 보이고 말이 섞이고 심장이 따라간다면. 오른손과 술잔의 이빨과 이빨이 부딪쳐 불똥이 튄다해도, 좌우명은 올인.



[술잔#11] 완전한 밀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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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길에 도착. 정점에 도달했으니 식도를 타고 내려갈 길만 남은 건가. 혹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동화속으로..? 완급의 조절, 호흡의 조절. 산낙지마냥 술잔에 엉겨붙은 오른손은 그저 좋댄다. 일생동안 흔치않을 황홀한 충만감. 손을 위한 술잔. 술잔을 위한 손.



[술잔#12] ..어디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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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충실한 게 술잔이라지만, 납득할 수 없는 오른손.
어디갔을까,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고 순식간에 말라붙은 술잔.



[술잔#13] 넌 왜..비어 버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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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에 비견될만한.
넌 왜 비어버렸니.
털썩, 절망한채 바닥에 무너져내리는 오른손.



[술잔#14] 술은 술이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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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만한 인연이 사그라들고, 잘록한 곡선과 짙은 향을 닮은 술잔을 다시금 어디선가 들어올리겠지만. 지나간 시간과 흘러간 이야기들은 사진첩에 봉인된 채 고이 '버려진다'. 찍히는 순간 죽어버리는 밴댕이같은 사진, 그리고 그속에 담긴 기억들처럼. 달그림자가 비치듯 그대의 마음에 잠시 비쳤던 것 뿐이니..슬퍼할 것도, 그리워할 것도 없다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어디선가 오른손의 이야기와 표정을 떠올려 준다면..

술은 눈코입으로 마시고 마음으로 마신다. 그리고 무엇보다...술과 술 사이, 그 비워진 잔 또한 마셔야 한다.

스포츠센터에 다니고 있다. 더이상 고수부지나 집근처 공원같은 공간을 달리는 것이 아니라, 무한도전, 혹은

J-Channel같은 프로그램을 달린다. 촛농처럼 땀이 흐르고 난 조금씩 안쪽에서부터 녹아내린다.(고 상상한다.)

한시간반쯤 뛰면 머리가 멍해지는데, 그러고 나서야 쇳덩이 좀 들고 기구 좀 사용해 준다. 다른 부위는 모두

구속한 채 특정 부위만을 해방시키는 기구에 몸을 묶은 채 느슨해진 근육들에 긴장을 불어넣다 보면 어느새

두시간이 훌쩍 넘어있다. 꼬챙이에 꼽힌 채 커다란 칼로 살살살 벗겨내지는 케밥용 고기처럼 그렇게 내

껍데기에서는 지방이 벗겨지고, 안쪽에서부턴 왜소하게 박혀있던 근육들이 둔중한 부피감을 과시하며 차츰

밀려나와 안팎으로 꿈틀대는 중이다.(라고 상상한다.) 무리하고 있다. 왼쪽발목이 삐그덕대기 시작해서, 낼부터는
뛰지 말고 걸어야 하지 않을까..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걷고 있다. 강남구청역 바로 옆에 있는 영어 학원에 가려면 한시간반씩 걸리며 두번이나

환승해야 하는데다가, 층을 오르내리며 수업을 들어야 한다. 매일 9시부터 3시까지 있는 수업 역시 녹록치만은

않아서 오전중에 벌써 개풀처럼 지쳐버린다. 어쨌건 덕분에 끈떨어진 졸업생치곤 아주아주 근면성실하게 살고

있는 것같은 포만감은 들지만, 사실은 이게 다다. 헛배만 불렀다.



정몽구는 동아일보 인턴할 때 공판을 지켜봤었고, (인터뷰라기엔 살짝 머한) 짧막한 대화도 살풋 나눴었다. 그에

대한 항소심 판결을 보면서, 얼마나 유리처럼 취약한 세계관에 기대어 우리가 살고 있는지..한심스럽고도

가련했다. '저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우리나라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도박을 하기 꺼려졌다'는 대목. 재판관은

법의 정신에 따라 판결만 하면 된다지만, 법조목에만 능한 그가 가진 경제적, 사회적 소양은 기껏해야 신문에서

줏어본 '상식'이다. 마치 외교과 교수들이 '국익'을 논하면서, 그저 경제학원론 수준의 경제적 이론-규모의 경제,

자유무역의 이익-을 전제한 채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과 같다. 전부다 기능인들 뿐이다. 그저 '상식적'인

이야기를 빌려온 채 자신이 가진 조그마한 양념을 뿌려 판.단.한다.

혐오스러운 기능인들. 최소한 자신이 기능인에 불과함을 인정하고 자기 분야가 아닌 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

나이브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하는 거다. 물론 그가 판결을 내리려면, 국제정치 문제에 대한 판단을

하려면, 이러한 식의 거친 '상식의 개입'은 불가피하기도 하다.



사실은, 모든 종류의 세상살아가는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최근의 소설이 전부다 일인칭의

자기분석적 서술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지만,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판에 구태여 타인의

시각을 전지적으로 개재시킬 필요도, 능력도 없다는 포스트모던한 자각에서 비롯한 걸 거라고 생각한다. 상황을

해석하고 감정을 헤아리는데 있어서의 기능인. 자신의 감정에 투영시켜 상대를 보고, 자신과 같은 상대의 감정을

기대하는. 내가 갖는 느낌은 기껏해야 내 신체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 그나마 운전을 할 때라거나 검도를 할 때. 내 존재가 차의 보디를 따라 연장/확장되는 느낌이 들면서, 바퀴가

돌을 밟으면 내 다리에 밟힌 것처럼, 엔진이 쿨럭이면 내 심장이 잠시 버거운 것처럼 감각한다. 검을 따라 내 팔이
늘어난 것 같은 감각 역시. 그치만 이것들은 도구화된 무생물일 뿐이다...



촛농처럼 땀을 흘리면서 징징대는 게 아닐까 생각하다가도 무한도전보며 웃다가 자빠질 뻔 하기도 하는 녀석이

무슨 감정을 품고 살고 있는지조차 스스로 알기 힘든 판이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세상, 그리고 사람들은 그저

상식대로, 혹은 내가 바라는 '상식'대로 굴러간다고 믿는 게..편하다. 자기편의적인 효용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해만 안 주면야, 내 편한대로 '상식'을 초혼하는 것도 괜찮을 법하다.



후희(post-play), 혹은 금단 현상(withdrawal syndrome).

감정이 달리는데 있어서 전희(fore-play)라는 게 갖는 비중만큼이나 후희라는 것도 중요하다면..오케이.

여전히 남은 온기와 따뜻함의 여운을 쓰디쓰게 되씹는게 충실한 후희.

새벽에 눈을 뜨니 집앞 놀이터였다. 얼굴을 모랫바닥에 반쯤 파묻고선, 입안에선 알콜내음 물씬한 모래가 잔뜩

씹혔다. 팔다리를 어떻게 휘청이며 일어섰는지 기억이 없다. 하늘색 니트는 군데군데 얼룩진 갈색으로

변해있었고 바지 역시 토사물이 떡처럼 엉겨있었다. 다시는 엉망으로 술 먹지 않겠다는 약속, 깨뜨릴 때마다 뭔가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엄마는 미친놈, 이랬다.


해가 중천을 지나서야 다시 집에서 같은 상황 반복. 뱃속은 돌로 변한 것처럼 딱딱하게 죽어있었고, 숨결엔

알콜이 실려나왔다. 물 한모금에도 바로 변기를 부여잡아야 했고 누가 옆에서 머리를 망치로 내려치고 있어서

약국으로 향했다. 몇 걸음 걷다가 지쳐서 아파트 계단에 앉아 쉬는데 신물이 넘어왔다. 화단에 숨어들어가

숨넘어가듯 구토. 조금만 힘을 더주면 목으로 내장이 넘쳐 나올 것 같아서 참았지만, 이미 노란색 위액이

질펀하게 낙엽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치아는 말랑해지고, 나는 죽을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저녁에야 겨우 라면 하나 먹고 트림이 나왔다. 점심 때 미친놈 미친놈 이러면서 라면을 끓여줬던 엄마는, 그치만

물 400ml에 북어랑 파랑 다시마까지 넣어줬었다. 덕분에 국물이 바싹 쫄아들어 난 기갈스럽게 숟가락으로 냄비

바닥만 긁다말고 변기로 향했었고. 장이 다시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지렁이나 플라나리아가 앞으로 향하기 위해

꿈틀대는 그런 연동운동, 내 장에서도 재개됐다.


머리를 쪼개 두 개의 머리를 갖게 된 플라나리아처럼, 감정도 때로 두 개로 쪼개지는 시험에 들기도 하고, 또 때론

두 개 다 끈질기게 살아남기도 한다. 그래서 한 장면에선 두 사랑이 겹치더라도, 다음 장면은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선택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장이야 연동운동을 제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해도 어딘가로 가고

그러지야 않겠지만, 장이 아닌 바에야 거칠거칠한 모랫바닥이라 해도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해도 1mm라도

움직이는 기색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


보낸 건 난데, 돌아오길 바라는 것도 나다. 악역을 맡고 싶은 사람은 없어서, 그래서 어디도 향하고 있지 않은

당신의 멘트를 뺏어 내가 대신했지만, 나 역시 악역은 싫었다. 정답이었는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는 약속을 들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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